[숲노래 책노래] 물 1994-2019


1994.6.20. 조교로 일하는 선배가 오늘 목돈을 벌었다면서 저녁에 술자리를 열 테니 같이 가자고 한다. 이런 말을 들으면 지겹다. 그런 날이 아니어도 그냥 날마다 늘 술자리를 펴잖은가? 속으로 한숨을 쉬다가 생각한다. 옳거니, 어쩌면 오늘이 좋은 ‘날’일는지 모른다. 마음을 단단히 먹기로 한다. 아주 벼르기로 한다. 활짝 웃으면서 술집으로 앞장서서 걸어가는 선배한테 묻는다. “선배님!” “응? 왜?” “오늘 참말로 마음껏 술을 마셔도 됩니까?” “그래! 아까 말했잖아? 오늘 먹고 싶은 대로 마음껏 마셔! 하하하!” 선배한테서 다짐을 들었으니 되었다. 1학년 새내기인 우리들은 선배를 가운데에 앉히고 빙 둘러싼다. 500들이 맥줏잔을 한 사람 앞에 하나씩 놓는다. 맥줏잔을 다 놓고 돌아가려는 술집 일꾼을 부른다. “저기요, 기다려 주셔요.” 내 몫으로 500들이 맥줏잔을 받기 무섭게 한칼에 비우고 돌려준다. “다시 채워 주셔요.” 선배는 이 모습을 보더니 “이야, 술 잘 먹네! 좋아! 그렇게 마셔야지.” 그런데 500들이 맥줏잔 한칼질을 멈추지 않았다. 술집 일꾼이 내 잔을 새로 채워서 가지고 오면 “저기요, 기다려 주셔요.” 하고는 꼭 44벌을 되풀이했다. 500들이 맥줏잔을 한칼로 비울 적마다 손가락을 꼽으면서 셌다. 넋을 잃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으면서 셌다. 너덧 벌쯤은 선배가 웃으면서 보다가, 열 벌을 넘고 스무 벌을 넘자 선배 낯빛이 싹 바뀌었다. 그렇지만 나는 44벌까지 달렸다. 이동안 뒷간을 아예 가지 않았고, 그냥 앉은자리에서 500들이 44잔을 한칼에 비웠다. 술자리를 마칠 즈음에야 비로소 뒷간에 갔는데, 얼추 10분 넘게 오줌만 누었다. 어쩌면 20분 넘게 오줌만 누었을는지 모르겠다. 다들 내가 뒷간에 가서 쓰러진 줄 알았단다. 그러나 나는 뒷간에서 10분인지 20분인지 30분인지도 모르도록 오줌만 누었는걸.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버티고 서서 선배한테 말했다. “선배, 앞으로 후배한테 술 좀 사 주지 마세요. 후배한테 뭘 사 주고 싶으시면 그 돈으로 책을 사 주셔요. 저는 책 살 돈이 모자라서 사고 싶은 책을 다 못 사는데, 술값 말고 책값으로 해 주셔요.” 선배는 이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미안하다. 앞으로 술 마시자고 안 할게. 내가 아주 잘못했다.”고 고개를 숙였다. 뭐 그렇지만 책을 사 주겠다는 말은 안 하더라.


1994.7.14. 선배가 한 달쯤 앞서 있던 일을 까맣게 잊었나 보다. 또 “맘대로 마셔” 술자리를 열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선배는 뭔가 징하게 겪어야 하는구나? 오늘도 지난달처럼 500들이 맥줏잔 한칼질을 한다. 오늘은 지난달처럼 44벌까지 달리지 못하고 40벌에서 멈추었다. 아, 40잔은 집어넣었는데 41잔째에서 더는 안 들어가네. 선배가 지난달 일을 떠올린다. “아, 지난달에 똑같은 일이 있었지!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선배, 이 짓을 두 판째 겪었으니, 이제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맙시다.”


2010.2.28. 잠결에 물이 녹는 소리를 들었다 싶어 퍼뜩 깨어난다. 그러나 꿈이었다. 한숨을 쉬고 입맛을 다신다. 곁님도 잠결에 물이 녹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곁님 또한 꿈이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며 또 기다린다. 늘 기다리고 언제나 기다리며 자꾸 기다린다.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내 하루하루 삶을 글로 적바림하고 사진으로 남긴다. 따순 봄을 기다리면서 내 글과 사진에 조금 더 따순 기운이 스밀 수 있기를 바란다. 잠든 아이 이마를 쓸어넘긴다. 깊은 밤에 아이가 쉬 마렵다며 깨어나기에 기저귀를 푸니 벌써 오줌으로 젖었다. 오줌을 참다 못해 조금 지리고 일어났을까. 아이는 제 오줌그릇에 앉는다. 푸직푸직 소리가 난다. 아하, 요 나흘 동안 물똥을 싸더니 아직 속이 안 좋아서 이렇게 또 자다가도 물똥을 싸는구나. 아이 아랫배를 살살 쓰다듬는다. 한참 똥을 누는 아이를 기다린다. 다 눈 아이를 안아서 밑을 씻는다. 바지를 다시 입힌다. 이제 속이 개운한지 깊은 밤인데 조잘조잘 떠들며 노래까지 부른다. 아이로서는 깊은 밤이건 한낮이건 아침이건 새벽이건 똑같을까. 놀고 싶을 때에 놀고, 잠보다 밥보다 놀이가 더 좋을까. 아침이 되어 비가 멎는다. 어제는 하루 내내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며 도랑 얼음과 계단논 얼음도 꽤 녹았다. 그러나 다 녹지는 않았다. 아직 비가 찬비인 듯하다. 찬비를 지나 따순비가 되어야, 그러니까 그냥 봄비라 할 비가 아니라 참말로 따뜻한 봄비가 되어 온 들판과 멧자락 얼음과 눈을 스르르 녹일 수 있을 때에 우리 집 겨우내 얼어붙은 물도 녹을 테지. 똑같은 비라 할지라도 찬비는 얼음을 녹이지 못한다. 똑같은 비인데 따순비는 얼음을 녹인다. 똑같은 가슴이더라도 찬가슴은 사람들 마음을 녹일 수 없겠지. 똑같은 글이더라도 따순글이 될 때에 다른 사람들보다 내 가슴부터 사르르 녹일 수 있겠지. 이 비가 지나고 비를 몰고 온 매지구름이 물러나면 바야흐로 따스하면서 살랑바람이 부는 파란 봄하늘이 찾아올까 궁금하다. 기다리고 기다리며 거듭 기다린다. 이제 집에서 빨래하고 설거지하며 걸레 빨아 집안 구석구석을 닦고 싶다.


2014.6.9. 오늘 바다로 마실을 가면서 책을 두 자락 챙길까 하다가 한 자락만 챙긴다. 동시책을 한 자락 챙기면서 틀림없이 너끈히 다 읽으리라 여겼으나, 동시책을 다 읽고 나서 더 읽을 책까지 챙기지는 않는다. 아이들과 바다로 마실을 갈 적에 책을 넉넉히 챙기면 나로서는 책을 느긋하게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바다로 가면서 책을 챙기면 책을 바라보느라 바다를 덜 바라본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저희끼리 놀아야 할 때가 있다. 이동안 나는 혼자 조용히 동시책을 읽는다. 동시책을 반쯤 읽고 나서 아이들한테 간다. 아이들은 모래밭에서 모래를 뒤엎느라 바쁘다. 나는 아이들을 살며시 바라보다가 바닷물 찰랑이는 데로 걸어간다. 맨발로 바닷물을 첨벙첨벙 밟는다. 아, 바닷물은 이 느낌이어서 좋지 즐겁지 싱그럽지 하고 생각한다. 혼자서 바닷물을 밟고 누비면서 재미있다. 조금 뒤 아이들이 다가온다. 바닷물을 밟으면서 노는 아버지를 알아챈다. 이제 아이들은 모래놀이보다 바닷물놀이가 훨씬 재미있다. 한여름에도 차가운 바닷물에 온몸을 담그면서 아이들은 바닷물에서 떨어질 줄 모른다. 속으로 생각한다. 너희들 참말 물을 좋아하네. 너희들 참으로 바다가 반갑구나. 아이들은 왜 이렇게 물을 좋아하면서 즐길까 궁금하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적부터 물을 늘 마주하기 때문일까. 우리 몸은 거의 모두 물로 이루어졌기 때문일까. 우리가 먹는 밥이 거의 모두 물로 이루어졌기 때문일까. 바닷물에 너무 오래 있지 말고 모래밭으로 나오자고 하면서 동시책을 마저 읽는다. 아이들은 모래밭에서 살짝 있다가 다시 바닷물에 들어간다. 얼른 동시책을 덮는다. 나도 바닷물로 들어가서 아이들과 섞인다. 세 시간 가까이 바닷물을 누비면서 논다. 바다에 있는 동안 바다만 바라보고 바다만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숲에 가면 숲만 누리고 숲만 생각한다. 집에서는? 집만 바라보고 집만 생각하겠지. 마당에서 제비집을 볼 적에도, 제비집만 바라보면서 제비집만 생각한다. 바다에서 동시책을 읽으면서 바닷물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 아마, 동시책보다 바닷물 소리 때문에 책을 더 살뜰히 읽었으리라 느낀다. 동시책이 아무리 아름다웠다 하더라도 바닷물 소리를 들으면서 책을 덮었으리라 느낀다.


2015.8.6. 골짜기에 깃들어 책을 읽으면 대단히 재미있다. 깊고 깨끗한 골짜기에서는 물 흐르는 소리만 해도 아주 우렁차고, 이 우렁찬 물살 소리를 가로지르는 멧새 노랫소리에다가, 바람이 나뭇잎하고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가 어우러진다. ‘데시벨’로 치면 아주 높은 소리가 퍼지는 골짜기인데, 이런 데에서 책을 손에 쥐면 아뭇소리가 안 들린다. 아주 고요하고 차분하게 책에 사로잡힌다. 골짜기에 깃들어 책을 읽더라도 눈길을 다른 데에 두면 괴롭다. 이를테면 여름날 휴가철을 맞이해서 시골로 놀러오는 사람들이 골짜기에 함부로 버린 온갖 쓰레기가 눈에 뜨이면 ‘책’이 아니라 ‘쓰레기’에 자꾸 눈길하고 마음이 가고 만다. 골짜기에는 ‘쓰레기를 보러’ 오지 않는데, 휴가철 언저리에는 그만 ‘쓰레기에 눈길이 가’니, 이를 어쩌나? 한 마디로 말해서 마음을 제대로 모으지 못하는 셈이다. 도시에는 자동차가 아주 많다. 여느 때에 ‘자동차 노래’를 부르는 작은아이는 장난감 아닌 실물 자동차가 쏟아질듯이 넘치기에 눈을 뗄 줄 모른다. 도시에서는 작은아이 손을 붙잡고 걷지 않으면 자동차에 휩쓸리겠다고 느낀다. 그런데 도시에서 사는 사람은 자동차를 안 쳐다본다. 너무 많으니 안 쳐다볼 수 있을 테고, 자동차를 쳐다보면 ‘내 할 일’을 생각하지 못하고 하지 못하니, 쳐다보아야 할 까닭도 없다. 골짜기에서 책을 읽는다고 할 적에, 골짝물하고 골짝바람하고 골짝나무하고 골짝이웃이 모두 내 마음을 차분하게 다스리도록 돕는다. 그러고 보면, 배우려는 사람들이 깊은 숲이나 절집으로 깃들려고 하는 까닭을 알 만하다. 숲이란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곳인가? 사람들이 고요하면서 차분한 마음이 되도록 이끄는 데가 바로 숲이다. 도시라는 곳에도 찻길하고 건물만 있지 않고 너른 숲이 함께 어우러진다면, 도시에서 일하거나 사는 사람 누구나 고요하면서 차분한 마음이 되어 사랑과 평화를 꿈꾸는 삶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도시라는 터를 지으며 숲을 밀어내고 아파트를 잔뜩 세우는 까닭이라면, 사람들이 못 깨어나도록 할 셈이지는 않을까? 도시에 일자리를 잔뜩 마련해 놓고, 지하상가를 끝없이 뚫으며, 갖가지 문화시설이나 체육행사를 꾀하는 까닭도, 사람들이 숲이라고 하는 살림터랑 배움터를 까맣게 잊고는 쳇바퀴질을 하도록 내몰려는 속셈이 아닐까? 도시에 겨우 마련한 손바닥만 한 공원마다 그렇게 농약을 뿌려대어 잔디밭이건 나무밑이건 앉기 어렵도록 하는 까닭도, 사람들이 풀잎이나 나무한테서 바로 기운을 받아 참다이 깨어나지 못하도록 가로막아 종살이에 길들도록 하려는 꿍꿍이가 아닐까?


2016.7.20. 아이들한테 가만히 속삭인다. 얘들아, 오늘은 어떤 날씨가 될까? 너희는 오늘 어떤 날씨이기를 바라니? 아이들이 잘 모르겠다고 하면 다시 속삭인다. 자, 우리 하늘을 볼까? 자, 우리 바람맛을 느껴 볼까? 아침 낮 저녁으로 바람맛을 보고 햇볕맛을 보면, 날씨가 어떻게 흐르는가를 몸으로 깨달을 수 있다. 어렵지 않다. 그저 몸으로 누구나 알아차릴 만하다. 이러한 날씨는 마당에 설 때뿐 아니라, 마루나 부엌이나 어디에서라도 느낀다. 모든 바람은 온누리를 골골샅샅 흐르기에, 우리 마을이랑 집을 둘러싼 날씨는 내가 늘 마시는 바람결로 헤아릴 수 있다. 시골집에서 살며 마시는 물은 냇물이거나 골짝물이다. 뒷숲에서 흘러내리는 물이나 숲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땅밑으로 흐르는 물이니 땅밑물이기도 하겠지. 여름에도 겨울에도 늘 흐르는 이 물을 마시면서 새삼스레 아이들한테 묻는다. 우리 어여쁜 아이들아, 이 냇물맛은 어떠하니? 시원하니? 맑니? 다니? 차갑니? 상큼하니? 우리 집 아이들이 삶을 읽고 살림을 읽으며 사랑을 읽는 따사롭고 너그러운 숨결로 자라기를 비는 마음이다. 이러면서 나도 삶이랑 살림이랑 사랑을 읽는 슬기로운 어른으로 아이들 곁에서 무럭무럭 크자고 꿈꾼다. 밥맛뿐 아니라 풀맛이랑 흙맛을 읽고, 바람맛이랑 비맛을 읽을 수 있는 어른으로 살자고 생각한다.


2018.8.5. 참 오래 한 가지 생각을 하면서 물에 몸을 맡겼다. ‘나는 헤엄을 못 쳐’ 같은. 이제 이 생각을 더는 안 한다. 요새는 ‘나는 물하고 사귀면서 놀고 싶어’ 하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남들처럼 물에서 헤엄질을 하지는 않는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든, 아니면 숨을 다 내뱉은 빈몸으로든, 물속 깊이 잠기며 놀기를 즐긴다. 헤엄질도 재미있을 텐데, 자맥질도 매우 재미있다. 더구나 제법 깊은 물속에 가라앉아서 얌전히 바닥에 앉아 본다든지, 엎드리거나 눕는 자맥질이 매우 재미나네. 자맥질을 할 적마다 조금씩 길게 해 보는데, 내가 물속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지낼 수 있나 놀라곤 한다. 그렇다고 아직 10분이나 20분쯤 물속에 잠기지는 못하는데, 우리 살갗이 뭍에서는 바람에 깃든 숨을 걸러서 마시듯이 물에서는 물에 깃든 숨을 걸러서 마시지 않나 하고 문득 느껴 보았다. 굳이 코나 입으로 숨을 가득 담아서 물속에 잠기지 않아도 된다고, 우리 살갗은 물이 몸속으로 못 들어오게 막는 구실도 하지만, 이러면서 물에 깃든 숨을 알맞게 걸러서 받아들이는 줄 느낀다면, 물속에서 얼마든지 길게 자맥질놀이를 할 만하구나 싶다. 이렇게 자맥질을 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다 보면, 물고기가 물속에서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함께 느낄 만하네. 뭍에서는 뭍대로 느끼고 보는 눈이요, 물에서는 물대로 느끼고 보는 눈이로구나. 우리가 뭍에서 으레 적외선 테두리로만 바라보는데, 자외선이나 감마선이나 알파선이나 베타선이나 엑스선을 볼 줄 안다면, 이러한 빛줄기를 보는 눈으로 마음을 활짝 열 줄 안다면, 더욱 재미나겠구나 싶다. 뭍하고 물을 거쳐 하늘을 날며 볼 수 있다면, 그때에는 새가 온누리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배우겠지? 종이책을 한동안 덮고서 골짝물에 잠기니, 갖가지 새로운 책이 나를 이끌면서 새롭게 가르쳐 준다.


2019.7.12. 아침이면 물을 4리터 남짓 마신다. 그냥 벌컥벌컥 마신다. 물이 몸에 얼마나 잘 들어오는지 모른다. 아침마다 물을 4리터 남짓 마실 적마다 생각한다. 물을 마시면 굳이 다른 밥을 먹어야겠다는 마음이 안 생긴다고. 어쩌면 우리가 물을 안 마시거나 덜 마시니까 자꾸 끼니를 채울 밥을 지어서 몸에 집어넣어야 한다고 여기지는 않을까 하고. 이렇게 물을 신나게 마시다가 어느 날에는 굳이 물을 안 마시곤 한다. 며칠쯤 다른 어떤 밥도 몸에 안 넣고 물조차 안 넣으면서 지내는데 뱃속이나 몸이 매우 가벼우면서 싱그럽다고 느낀다. 이런 때에 새삼스레 생각한다. 물만 마셔도 배가 부르고 몸이 반기기도 하지만, 굳이 입으로 물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짓을 하지 않더라도 살갗으로 ‘바람에 깃든 물’을 늘 받아들이니 물조차 따로 마실 까닭이 없을 수 있겠구나 하고.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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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12일, 순천 동남사에서

사진강의를 합니다.

이 자리에서 펼 이야기 가운데 한 자락을

이렇게 추슬러 놓습니다.

즐겁게 사진을 누리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숲노래 책노래] 사진책


1998.7.14. “어이, 최종규 씨, 사전 쓰는 일 하지?” “네, 그렇지요.” “그러면 이 사진책도 좀 보지 그래?” “네? 사진책이요?” “그래. 말만 나온 책만 보지 말고, 이제는 사진이 나온 책도 좀 봐.” “어, 그런가요?” “잘 봐. ‘아미쉬’라는 이름은 어떻게 풀이할래? 아미쉬 사람들이 입은 옷이나 타고다니는 마차를 보지 않고서는 아미쉬 사람들을 풀이할 수 없잖아? 뭐, 아미쉬 사람들이 사는 곳에 가서 같이 살아 본다면 사진책을 안 봐도 되겠지만, 모든 나라 모든 곳에 다 찾아가서 두 눈으로 볼 수는 없잖아? 그런 때에 사진책이 무척 좋다고. 이 아미쉬 사진책을 좀 봐. 때로는 사진 하나로 백 마디 말을 담아내는 풀이를 할 수도 있어. 라루스 사전이 그래. 굳이 말로 풀이하지 않고서 그림이나 사진을 넣기도 하거든.” “음,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네요. 여태 사진책을 볼 생각을 안 했는데, 이제부터는 사진책도 찬찬히 봐야겠습니다.”

2001.3.12. “야, 이 사진책 좋기는 한데, 비싸지 않냐?” “네, 값이 좀 세기는 합니다만, 이만 한 사진을 담은 사진책이 드물어요. 이 책값은 이 사진 하나가 다 벌어 줍니다. 이 엄청난 사진 하나 때문에 우리는 엄청난 돈을 줄였다고도 할 수 있어요. 이렇게 엄청난 사진 하나이니, 우리는 이곳에 갈 찻삯이며 품이며 안 들여도 될 뿐 아니라, 몇 달이나 몇 해라는 나날까지 벌어들인 셈이에요. 그렇게 치면 이 사진책 하나를 우리 사전을 짓는 길에 자료로 삼으려고 사들이는 값은 매우 싸다고 할 수 있어요.”

2003.5.22. “집에 사진책이 꽤 많으시네요? 사진을 전문으로 하세요?” “아닙니다. 저는 사전을 씁니다.” “네? 그런데 웬 사진책이 이렇게 많아요?” “사전을 쓰는 사람이니까 사진을 같이 봐야 해요.” “어, 왜요?” “생각해 보셔요. ‘옷’이라고 해도 오늘 우리가 입는 옷이 있지만, 1950년대에 입는 옷하고 다릅니다. 1850년대에 입는 옷하고도 다를 테며, 1550년이나 550년이나 기원전 옷하고도 다르겠지요. 이 모든 다 다른 옷을 모두 사진으로 담아내지는 못하겠지만, 어느 한때 차림새는 사진으로 담겨요. 그 사진을 읽으면서 더 예전에는 어떤 옷을 두르고 살았을까 하고 어림하지요. 옷 하나를 보기로 듭니다만, 낱말 하나도 매한가지예요. 어느 낱말 하나를 제대로 파헤쳐서 알아내고 뜻이나 결을 밝히자면, 그 낱말이 살아온 길을 모두 헤아려야 해요. 그런 길에서 사진책은 대단히 고마운 곁책이 되어 줍니다.“

2007.4.5. 사진이란 삶을 사랑하는 빛. 이 빛살이 넘쳐흘러 가슴이 풍덩 잠기도록 출렁거리는 이야기꾸러미가 사진책.

2010.6.6. 사진책은 ‘사진 작품집’이 아니다. 예술을 하든 작품집을 꾸미든, 이렇게 해서 나오는 사진책도 더러 있다. 그러나 사진책이란, 사진으로 삶을 이야기하면서 노래하는 살림을 갈무리하는 책이다. 사진으로 삶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작품집이란 이름은 붙일 수 있을 터이나 ‘사진책’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첫 쪽부터 끝 쪽까지 사진을 줄줄이 담아내어야 사진책이 되지 않는다. 사진책이란, 사진만 있는 책이 아니다. 사진책이라면, 삶과 살림과 사람을 사랑이라는 눈으로 슬기롭게 살피면서 새롭게 이야기를 지피는 책이라고 해야 걸맞는다고 느낀다.

2019.7.11. 어느 사진이 깃든 어떤 사진책을 마주하든, 이제껏 보거나 읽은 사진·사진책을 먼저 마음에서 지워 놓고서, 텅텅 비운 마음으로 마주하려고 한다. 내 앞에 있는 사진·사진책은 새로운 빛결을 담은 이야기가 흐르니, 이 이야기를 읽자면 모든 옛생각(선입관·지식)을 잊어야 한다. 옛생각을 티끌만큼이라도 품은 채 새로운 사진·사진책을 마주한다면, 옛생각이라는 틀로 읽고 만다. 새로운 빛결을 해묵은 눈으로 읽는다면 무엇을 느낄까. ‘바지 입은 가시내’는 가시내인가 사내인가? 가시내일 테지. ‘치마 입은 사내’는 사내인가 가시내인가? 사내일 테지. ‘바지 = 사내’이지 않고 ‘치마 = 가시내’이지 않다. ‘짧은머리/박박머리 = 사내’인가? ‘긴머리 = 가시내’인가? 아니다. 사내이든 가시내이든 머리카락을 짧게 치고 싶으면 짧게 칠 뿐, 그대로 두어 길게 나풀거리고 싶으면 이렇게 할 뿐이다. 틀에 박힌 눈을 품은 채 새로운 빛결을 마주하려 하면 아무것도 못 보고 만다. 속살뿐 아니라 겉모습조차 제대로 못 본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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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노래, 모기


2019.5.19. 우리 집 뒤꼍에서 쑥을 뜯는다. 집에서 쑥잎을 덖을 생각이다. 이때에 모기가 곧잘 앵앵하면서 달라붙으려 한다. 유월 내내 뽕나무 곁에서 오디를 훑었다. 오디로 신나게 오디잼을 했다. 이때에도 모기가 흔히 앵앵대면서 달라붙으려 한다. 모기가 붙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다가, 때로는 손가락으로 통 튕겨내다가, 모기가 애타게 빌면서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제발 네 피를 빨게 해줘!” “뭐? 내 피를 달라고?” “그래, 네 피를 빨아먹게 해줘! 한 방울이라도 줘!” “내가 내 피를 왜 너한테 줘야 하니?” “우리(모기)는 우리가 무는 대로 다시 태어날 수 있어. 이 모기란 몸을 벗을 수 있어. 나(모기)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사람을 물려고 해.” “…….” “넌 못 믿겠지만, 우리(모기)들은 소를 물면 소로 다시 태어나고, 개를 물면 개로 다시 태어나. 사람을 물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어서, 목숨을 던져서 사람을 물려고 하지.” “그래? 그런데 내가 너를 찰싹 때려서 죽이면?” “아 …….” “왜?” “…….” “더 할 말 없으면 이제 널 때려잡아도 되지?” “때려잡더라도 피를 좀 주고서 때려잡아.” “응? 왜? 왜 그래야 하는데?” “피를 못 빨고서 죽으면 모기로 다시 태어나.” “그게 뭐?” “우리는 사람한테든 다른 짐승한테든 달라붙어서 피를 빨 때까지는 모기로 다시 태어나거든. 그래서 비록 너희(사람)한테 때려잡히더라도 피를 한 방울 빨고서 너희 피에 담긴 숨결을 받아들이면, 기꺼이 즐겁게 때려잡혀 죽을 수 있어.” “이 말을 들으니 영 너한테 내 피를 더 안 주고 싶은걸?” “제발 …….” 모기가 애타게 비는 말을 끝으로 입김을 후 불어서 모기를 날렸다.


2019.7.4. 올해 5월하고 6월, 두 달 동안 우리 집 모기하고 이야기를 했다. 이 이야기가 참말 ‘모기 수다’였을까 하고 가만히 헤아려 보았다. 입으로 주고받은 말이 아닌, 마음으로 확 들어온 모기 목소리였으니, 틀림없이 모기는 애타게 무언가 빌면서 나한테 찾아왔지 싶다. 모기는 참말로 사람피를 빨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더라. 모기 몸에는 모기 씨톨(DNA)만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모기로서는 다른 숨결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모기 그대로 다시 태어나기만 하리라 느낀다. 이러다가 다른 목숨한테서 흐르는 다른 숨결이자 씨톨을 ‘피를 빨면’서 받아들이면, 참말로 다른 몸으로 태어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몸을 이루는 씨톨은 먼먼 옛날부터 흐르고 흘렀다고 하는 만큼, 고작 피 한 방울이라 하더라도 대수로우리라 느낀다. 그저 한 가닥 머리카락이나 한 방울 피가 아닌, 우리 몸을 이루는 모든 씨틀이 깃든 숨결이요, 이 숨결을 제대로 구석구석 느끼거나 살펴서 하루를 살지 않을 적에는, 이 몸이 낡거나 죽음길로 가겠구나 싶더라.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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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노래] 어버이


2013.8.5. 선물받은 시집을 앞짐에 챙겨서 두 아이를 데리고 순천으로 나들이를 간다. 시외버스에서건 어디에서건 살짝 틈을 내어 읽으려 한다. 그러나 바깥일을 보고 두 아이를 건사하느라 첫날은 한 쪽조차 못 펼치고, 이튿날 아침에 겨우 몇 쪽 펼쳤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시외버스에서는 작은아이를 무릎에 앉혀 재우면서 나도 곯아떨어지느라 바빠 더는 못 읽는다. 그나마 집으로 돌아와 짐을 풀면서 ‘아, 쉽게 꺼낼 수 있도록 앞짐에 시집을 넣고 나들이를 나왔네.’ 하고 깨닫는다. 아이가 하나만 있던 때에도 나들이를 다니면서 책을 읽기란 무척 힘들었다. 아이를 돌보거나 살피는 데에 힘을 쏟을 뿐이었다. 아이를 둘 데리고 다니며 1분이나 10초쯤 책을 손에 쥐어 펼치기란, 여섯 살 세 살 어린 아이들이니 아직 바랄 수 없는 노릇이려나 싶다. 작은아이가 일고여덟 살쯤은 되어야 나들이 다니는 길에도 슬쩍 책 한 자락 꺼내어 몇 분쯤 누릴 수 있을까. 아이들 데리고 다니는 아버지가 드물다. 아이들 데리고 다니며 짐에 책을 챙기는 아버지라면 훨씬 드물겠지. 아이들 데리고 다니는 어머니 가운데 짐에 책을 한 자락 챙기는 분은 몇 사람쯤 있을까. 아이들 건사하기에도 바쁠 텐데 책을 짐에 넣어 구태여 무겁게 들고 다니려 한다고 해야 할까. 덧없거나 배부른 몸짓이 될까. 아이들이 신나게 놀고 뛰고 노래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야말로 살가운 책읽기가 되니, 어버이로서는 애써 종이책에 매이기보다 ‘아이책’ 또는 ‘삶책’을 한껏 누리자 여기면 될까.


2014.2.1. 아이들은 어버이가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지를 찬찬히 지켜본다. 그러고는 스스로 가만히 따라하곤 한다. 아이들이 쓰는 말이란 모두 어버이가 쓰는 말이요, 여기에 둘레 어른들이 쓰는 말을 곁들인다. 아이들이 누리는 놀이란 어버이가 누리는 놀이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먹는 밥이란 모두 어버이가 늘 먹는 밥이다. 네 살 작은아이가 그림책에 볼펜으로 금을 죽죽 그린다. 그림도 그린다. 무엇을 하는가 하고 지켜보니, 아버지가 책을 읽으며 하는 몸짓을 고스란히 흉내낸다. 아버지는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대목이 있으면 밑줄을 긋는다. 때로는 빈자리에 이런 생각 저런 느낌을 적어 넣는다. 아직 글을 모르고 읽거나 쓰지 못하는 작은아이인 만큼, 글씨 흉내를 꼬물꼬물 그림으로 보여준다. 큰아이는 두 살 적에 이런 금긋기와 그림그리기를 했다. 큰아이는 무엇이든 스스로 하려 했으니 두 살 적부터 아버지 흉내를 냈고, 작은아이는 누나가 언제나 잘 챙기거나 도와주기 때문에, 두어 해쯤 늦는다고 여길 만하다. 작은아이가 볼펜을 쥐고 ‘아버지가 안 보는 데’에서 몰래 책에 금을 긋고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참 예쁘다. 비록 책을 다 어저립히듯이 금을 긋고 그림을 그려서 “아이고, 보라야, 그림책을 하나 새로 사야겠구나.” 하고 말했지만, 이렇게 아이들이 ‘맨 처음’으로 금도 긋고 글(그림)도 그린 책은 오래오래 건사하며 애틋하게 되돌아볼 만하리라 느낀다


2015.10.21. 책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면, 책으로는 언제나 책 이야기를 할 수 있구나. 모든 책에는 저마다 이야기를 담기 마련이지만, 사람은 책을 길동무로 삼기는 하더라도, 삶은 책 바깥에서 이룬다. 아름다운 책을 읽더라도 아름다운 이야기는 책을 손에 쥐는 동안 흐른다. 책을 내려놓으면 삶은 책하고 다르다. 책에서 얻은 이야기가 삶에서도 흐르리라 여길 수 없다. 삶에서 누리는 이야기를 책에서도 함께 누리자고 여길 적에 비로소 책을 즐거이 맞이할 만하다고 느낀다. 책처럼 짓는 삶이 아니라, 삶을 짓듯이 책을 한 권씩 만나면서 즐겁게 노래하는 하루가 된다. 그러니까 인성교육이든 무슨무슨 교육이든 책으로는 할 수 없다. 가르침이나 배움은 오직 삶으로 할 수 있다. 직업교육이든 지식교육이든 학교에서는 할 수 없다. 오직 마을이랑 집에서 삶으로 할 뿐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학교는 삶터 구실을 하나도 못 하면서 오직 시험공부 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나? 언제쯤 이 수렁에서 헤어나오려나? 마을 이야기를 함께 짓는 학교라 한다면, 학교에서 인성교육이나 다른 여러 가지 교육을 할 만하다. 그러나 마을 이야기를 함께 짓지 못할 뿐 아니라, 마을하고는 동떨어진 채 ‘출퇴근하는 공무원’만 있는 학교라 한다면, 이 학교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책이 여러모로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사람다운 마음결로 나아가려고 하는 ‘인성교육’이라면, 모름지기 삶자리에서, 그러니까 어버이랑 아이가 이웃하고 동무를 아끼는 하루를 누려야지 싶다. 숲·나무·풀·꽃이며 온갖 벌레·새·뭇짐승에다가 바람·해·별·달·구름 모두를 헤아릴 수 있을 적에 비로소 따순 마음이나 고운 마음이나 착한 마음이나 너른 마음을 키우거나 가꾸거나 살찌울 만하리라 느낀다. 별 한 톨 못 보는 아이들이 무슨 착한 마음이 되겠는가? 바람 한 줄기 느끼지 못하는 어른들이 무슨 고운 마음을 가르치겠는가? 가을에 가을볕을 함께 쬐고, 겨울에 겨울노래를 함께 부를 적에 비로소 삶이요 교육이며 사랑이 된다.


2018.8.10. 흔들리는 버스나 전철에서 책을 읽는 사람이 있다. 바로 내가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열일곱 살부터 이런 책읽기를 했다. 열일곱 살이던 해에 어버이가 집을 옮기는 바람에 그때부터 고등학교를 두 다리 아닌 버스로 다녀야 했고, 버스로 한 시간 즈음 다녀야 하는 길에 언제나 한 손에 책을 쥐고서 ‘마음이란 무엇인가?’를 책을 거쳐서 읽으려 했다. 흔들리는 곳에서 책을 어떻게 읽을까? 흔들림에 맞추어 몸을 똑같이 흔들기에 얼마든지 읽는다. 흔들리는 곳에서 몸이 안 흔들리도록 하려면 책이며 눈이 다 흔들려서 글씨가 눈에 안 들어온다. 그러나 버스나 전철이 흔들리는 결하고 몸을 똑같이 맞추어 움직이면(흔들면), 눈은 책을 또렷이 바라보고 아무 흔들림 없이 책을 읽을 수 있다. 책을 읽을 적에는 오직 책만 바라본다. 다른 것을 바라볼 까닭이 없다. 창밖을 본다거나 버스·전철을 탄 다른 손님을 볼 까닭이 없다. 사내라는 몸을 입고 태어난 터라, 내 또래는 버스를 타면 으레 ‘가시내라는 몸을 입고 태어난 여학생’을 흘깃거리던데, 나는 그런 흘깃질에 마음이 없었다. 거꾸로 내 또래 가운데 책읽기에 마음이 있던 아이를 만나지 못했다. 아마 또래들 눈으로는, 내가 참 어이없거나 바보스러웠으리라. 책읽기를 오래 하다 보니, 이제는 1000쪽에 이르는 책도 몇 분이나 몇 초 만에 읽어낼 수 있다. 1000쪽이건 2000쪽이건 이러한 책에 깃든 참거짓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무슨 심령술사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숲에 깃들어 숲을 늘 마주하면서 숲을 읽으려 한다면, 숲을 척 보아도 숲이 아픈지 튼튼한지 바로 알아챈다. 나는 책으로 내 마음읽기를 어릴 적부터 했기에, 어느 책을 보든 이 책을 쓴 분이 ‘무엇을 바라보고 바라며 책을 냈는가’를 마음으로 읽는다. 이를테면, 돈을 바라보았는지, 이름값을 바라보았는지, 교수 자리를 바라보았는지, 티없는 넋으로 이웃한테 앎을 나누려 했는지, 즐겁게 배움길을 걸으며 깨달은 슬기를 벗한테 알려주고 싶은지, 어설피 짚은 헛다리가 헛다리인 줄 모르고 자랑을 늘어놓으려 하는지 …… 들이 책 겉종이만 보아도 한눈에 들어오더라. 그런데 퍽 오랫동안 놓친 대목이 있다. 책을 보며 책을 읽어낼 줄 아는 눈이라면, 사람을 보며 사람을 읽어낼 줄 아는 눈으로도 옮아 가야 아름답겠지? 이 눈으로 살림과 삶과 사랑을 읽고 알아내며 즐겁게 꽃피우는 눈으로도 옮겨 가야 기쁘겠지? 그러니까, 나는 책으로 마음을 읽는 눈을 키우기는 했어도, 그 다음 길을 어떻게 간다든지 새로 지필 만하다는 대목을 못 느끼거나 생각을 않은 채 살았더라. 열일곱부터 걸어온 이 길이 어느 고비를 맞이한 요즈음 아주 짤막한 말 한 마디가 벼락처럼 가슴으로 스민다. “더 할 수 있습니다”라는 한 마디. 이 말을 들려준 분은 나더러 책을 앞으로 어떻게 읽으라거나, 여러 마음닦기나 몸닦기를 어떻게 다스리라고 이끌거나 가르치지 않았다. 그저 다른 여러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이 한 마디 “더 할 수 있습니다”를 들려주었을 뿐. 나는 이 한 마디를 듣고 먼저 물속에서 내 몸을 새롭게 맞추어 보았습니다. 눈을 뜨고 골짝물에 잠겨 숨을 일곱걸음 내뱉아 보았다. 세걸음 내뱉기까지는 어렵잖이 되는데, 네걸음을 내뱉으려니 문득 숨이 막히네. 이때에 “더 할 수 있습니다”를 떠올리며 몸에 그렸고, 그 뒤 거침없이 물속에서 숨을 내뱉을 수 있더라. 냇바닥에 착 가라앉아서 달라붙은 몸 둘레로 온갖 물고기가 맴돌면서 ‘반가워, 잘 왔어. 우리 같이 놀자.’ 하고 속삭여 주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 몸에는 끝이 없다. 우리 몸은 이 몸뚱이에 끝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우리가 마음으로 끝이 있다는 생각을 씨앗 한 톨로 심으면 몸은 이대로 따라간다. 우리가 마음으로 끝이 없다는 생각을 다시 씨앗 한 톨로 심으면 몸은 또 이대로 따라간다. 무엇을 먹어야 튼튼해지지 않겠지. 무엇을 안 먹어야 튼튼해지지 않을 테고. 먹든 말든, 마음이 기쁨인지 두려움인지 살필 줄 알아야지 싶다. 하든 안 하든, 하다가 그치든 끝까지 해보려 하든, 제대로 바라보아야지 싶다. 우리는 어디를 보는 책읽기를 할까? 우리는 무엇을 바라는 마음읽기를 할까? 우리는 어떤 사랑으로 나아가려는 꿈읽기를 할까? 길은 늘 우리 마음에 있고, 길을 바라보는 눈은 언제나 스스로 머리를 어떻게 틔워서 가슴을 어떻게 여는가에 달린 노릇이지 싶다.


2019.6.28. 어버이는 두 가지 말을 아이한테 들려주는 사람. 첫째, “가! 신나게 가! 마음껏 가! 하고픈 대로 가!” 둘째, “그만! 멈춰! 다툼은 그만! 다툼은 멈춰! 미움은 그만! 미움은 멈춰! 시샘은 그만! 시샘은 멈춰! 히죽질은 그만! 히죽질은 멈춰! 괴롭힘질은 그만! 괴롭힘질은 멈춰!” 어버이는 아이가 스스로 나아갈 길을 신바람을 내며 가도록 북돋우다가도, 아이가 스스로 벼랑에서 굴러떨어지려 할 적에 멈춰세우고는 이다음 걸음을 스스로 어떻게 하라고 짚어 주는 곁사람이지 싶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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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노래] 마음 1994-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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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에 <우리말 책읽기 사전>이란 책을 써낼까 하고 생각해 본다. 이런 책이 태어나자면, 2019년 올해 7월에 텀블벅으로 <우리말 글쓰기 사전>부터 씩씩하게 태어나야겠지.


https://tumblbug.com/writing0603


이 텀블벅에 즐겁게 힘을 실어 주셔요.

<우리말 책읽기 사전>이란 책을 낸다면 실을 '마음'이란 꼭지에 담을 글자락을 그럭저럭 추스른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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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책노래. 마음


1994.6.5. 우리가 읽어야 하는 책은 없다고 느낀다. 우리 마음이 어디에서 어디로 흐르는가를 읽으면서 책을 만난다고 느낀다. 우리 마음이 어떻게 흐르는가를 읽는 동안 책을 알아차린다고 느낀다. 여느 때에 늘 숲을 마음에 담은 사람은 어느 곳에 가든 숲을 다루는 책을 한눈에 알아보더라. 언제나 시쓰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도서관에서든 학교에서든 시를 노래하는 책을 시나브로 알아내고. 구름에 마음을 두지 않으면 서울을 벗어나 너른 들녘을 마주하더라도 구름을 알아보지 못해. 들꽃을 마음에 심지 않으면 골목에서나 숲에서나 들꽃을 알아채지 못할 뿐 아니라 꽃집 옆에 서더라도 꽃내음을 못 맡아. 마음 가는 곳을 읽는다. 마음으로 읽기에 줄거리 아닌 글쓴이 넋과 얼을 책에서 헤아린다. 마음으로 읽으니까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 아닌 책을, 말 그대로 책을 읽는다. 인기도서나 비인기도서를 읽을 까닭이 없다. 인문책이나 처세책을 읽을 까닭도 없다. 그저 책을 읽는다. 오롯이 책을 만난다. 마음이 사랑스레 피어나도록 책을 읽는다. 


1998.12.21. 어떤 마음인가에 따라 다르다. 아무리 훌륭하다는 책을 읽는다 하더라도, 짓궂거나 얄궂은 마음이라면 읽지 않는만 못할 수조차 있다. 성경을 읽어야 착해지지 않더라. 착하게 살면서 성경을 읽어야지. 동화책을 읽어야 맑은 마음 되지 않아. 맑은 마음으로 살면서 동화책을 읽어야지. 시집을 읽어야 문학을 알거나 소설책을 읽어야 문학을 누리지 않더군. 삶이 언제나 시처럼 흐르면서 시집을 읽고, 삶을 늘 소설처럼 이야기샘 솟도록 가꾸면서 소설책을 읽어야 아름답더라. 눈으로도 읽지만, 눈과 함께 마음으로 읽는 책. 눈으로도 꽃을 바라보고 나무를 헤아리지만, 눈과 함께 마음으로 바라보는 꽃이요 마음으로 헤아리는 나무. 밥 한 그릇을 혀와 입으로 먹지만, 혀와 입과 함께 마음으로 먹는다. 밥을 지은 사람 마음을 느끼고, 밥으로 차리기까지 흙을 보살핀 흙지기 손길을 나란히 누린다.


1999.12.18. 책을 읽고 싶으면, 책을 펼치기 앞서 마음을 펼쳐야지 싶다. 마음이 어떤 모습인지 가만히 헤아리면서, 마음자락을 책 앞에 펼쳐야지 싶다. 맑고 싱그러운 숨을 들이마시고 싶다면, 먼저 몸에 깃든 바람을 바깥으로 내보내야겠지. 핏톨에 얹혀 온몸 구석구석 돌고 난 바람을 살그마니 바깥으로 내보낸 뒤에라야 맑고 싱그러운 숨이 몸으로 보드랍게 스며들어 새 기운이 솟을 수 있도록 북돋운다. 사랑스러운 아이를 꼬옥 안자면 두 팔을 벌려야 한다. 두 팔을 벌려야 안지, 두 팔을 안 벌려서는 아이를 안지 못해. 콩씨를 심어야 콩을 거두고, 팥씨를 심어야 팥을 거두어. 숲에 깃들어야 싱그러운 바람을 마시고, 흙을 일구어야 맛난 밥을 얻어. 마음을 열 적에 책이 가슴으로 파고들어. 마음을 열고 책을 손에 쥐어 한 쪽 두 쪽 넘길 적에 비로소 이야기 한 자락 가슴으로 스며들어. 마음을 열지 않는 사람은 책을 읽는다 하더라도 겉훑기로 그쳐. 마음을 열지 않은 채 책을 손에 쥐면 지식이나 정보는 얻더라도 꿈과 사랑은 누리지 못해. 마음을 열어 책을 읽으면, 지식이나 정보는 잘 모른다 하더라도 꿈과 사랑을 따사로이 누려. 꿈과 사랑을 따사로이 누리는 사람은, 책으로 지식이나 정보를 못 얻는다 하더라도, 스스로 삶에서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찾아내. 마음을 열어 사랑을 하잖아. 마음을 열어 사랑을 하면서 밥을 짓잖아. 마음을 열어 사랑을 하면서 지은 밥을 먹고 기운을 내어 흙을 일구고 나무와 풀을 돌보잖아. 마음을 열어 사랑을 하면서 지은 밥을 먹고 기운을 내어 흙을 일구고 나무와 풀을 돌보던 손길로 곁님과 아이를 곱게 안으면서 하루를 즐겁게 누리잖아. 책은 언제나 우리 가슴속에 있는데.


2003.11.18. 모든 책은 마음으로 들어온다. 마음으로 들어오지 않은 책은 삶으로 들어오지 못한 책. 마음으로 들어온 책일 적에 사랑씨앗 한 톨 두 톨 드리우면서 우리 마음밭에서 사랑나무가 자란다. 사랑나무가 자랄 적에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사랑말 되고, 우리 손으로 쓰는 글은 사랑글 되며, 우리 목청으로 부르는 노래는 사랑노래가 된다. 마음으로 들어온 책 하나 곱게 건사할 수 있다면, 밥을 지으며 사랑밥을 나누지. 집을 돌보며 사랑집을 가꾸지. 옷을 기우며 사랑옷을 입어. 일은 사랑일 되고, 놀이는 사랑놀이 될 테지. 마실은 사랑마실이 될 테며, 이야기는 언제나 사랑이야기 되겠지. 책을 마음으로 담지 않는다면, 마음밭에 사랑씨앗을 못 뿌린다. 사랑씨앗을 못 뿌렸으니 마음밭에서 사랑나무가 자랄 수 없고, 다른 나무도 자랄 수 없네. 책을 읽는다고 한다면, 스스로 마음밭에 씨앗을 뿌리고 싶기 때문 아닐까. 책은 길이 아니다. 책은 스스로 삶길을 열도록 북돋우는 길동무 아닐까. 책을 읽으며 마음밭에 스스로 뿌릴 씨앗이 무엇인가 하고 알아차린다. 책을 읽는 사이 삶길을 어떻게 다스릴 적에 아름다운가 하고 깨닫는다. 마음으로 들어온 책을 차근차근 아끼고 사랑하면 그 책이 누구 손으로 돌아가든 아름답게 읽힐 수 있으리라. 곧, 내가 읽은 책은 이 삶을 살찌우는 밑거름이 되고, 내가 읽은 책으로 오늘 삶을 아름답게 다스리면, 이 삶에서 흐르는 오늘 빛이 둘레로 찬찬히 퍼져 이웃들이 저마다 이녁 삶을 아름답게 다스리도록 돕기도 하리라. 내가 읽은 아름다운 책을 이웃한테 건네주어도 좋다. 헌책집이라는 곳이 있으니, 내가 읽은 책을 가만히 내놓으면, 누가 이 헌책집으로 찾아와서 내가 내놓은 책을 기쁘게 장만하겠지. 또는, 내가 읽은 책에서 얻은 아름다운 빛으로 오늘 삶길을 가꿀 수 있으면, 이 삶빛은 언제라도 둘레에 환하게 드리울 테니, 이웃과 동무는 우리 빛을 나누어 받으면서 즐겁게 삶읽기를 누릴 수 있겠지. 마음으로 들어온 책은 마음에서 빛나 따사로운 바람이 된다.


2008.11.23. 우리가 먹는 밥이 우리 몸을 이룬다. 어떤 밥을 먹느냐에 따라 우리 몸이 달라진다. 우리가 마시는 물과 바람이 우리 몸을 이룬다. 어떤 물과 바람을 마시느냐에 따라 우리 몸이 달라진다. 우리가 보는 것이 우리 생각을 이룬다. 어떤 것을 보느냐에 따라 우리 생각이 달라진다. 우리가 읽는 것이 우리 앎을 이룬다. 어떤 것을 읽느냐에 따라 우리 앎이 달라진다. 그러면, 마음과 사랑과 꿈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마음을 어떻게 가꾸고, 사랑은 어떻게 나누며, 꿈은 어떻게 키울 때에, 우리 스스로 기쁘면서 아름다울 수 있을까. ㅈㅈㄷ신문을 읽는 사람은 두 갈래 길로 간다. 하나는 ㅈㅈㄷ이 외치는 대로 멍하니 좇는 길을 간다. 다른 하나는 ㅈㅈㄷ이 외치는 거짓을 알아채면서 ㅈㅈㄷ을 꾸짖거나 손가락질하는 길을 간다. 둘 모두 ㅈㅈㄷ 언저리에서 헤맨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ㅈㅈㄷ을 끊으면 된다. 들풀을 보거나 들꽃을 보는 사람은 들풀과 들꽃을 차츰차츰 익힌다. 어느 풀을 뜯어서 먹으면 몸에 도움이 되는가를 스스로 시나브로 깨닫고, 어느 꽃을 어느 철에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지 찬찬히 알아챈다. 도감을 뒤지거나 인터넷을 살핀다고 해서 들풀이나 들꽃을 알아채거나 배우지 못한다. 육아책을 만 권쯤 읽기에 아이를 잘 돌보거나 키우지 않는다. 육아책은 한 권만 읽어도 되지만, 한 권조차 안 읽어도 된다. 왜냐하면, 내가 키울 아이는 우리 아이인 터라, 우리 아이를 제대로 바라보고 살가이 보듬으면서 따스히 보살필 수 있으면 된다. 인문책을 읽는 사람은 인문책 지식을 머리에 담는다. 베스트셀러를 읽는 사람은 베스트셀러 줄거리를 머리에 담는다. 교과서와 문제집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교과서와 문제집 정보를 머리에 담는다. 스스로 찾거나 보거나 읽는 대로 마음을 이룬다. 어느 책을 찾거나 보거나 읽든 그리 대수롭지 않다. 이러한 모습이 되기에 훌륭하지 않고, 저러한 모습이 되기에 볼썽사납지 않다. 그저 그뿐이요, 그저 그이 스스로 나아가는 삶일 뿐이다. 넋이 무엇인지 바라보려고 하는 사람은 넋을 바라볼 수 있다. 하루가 걸릴 수 있고 한 해가 걸릴 수 있으며 백 해나 즈믄 해가 걸릴 수 있다. 바라보려고 하는 사람은 자꾸 바라보면서 꾸준히 생각하기 때문에 마침내 제대로 알아채면서 깨닫는다. 바라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조금도 알아채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도 못 깨닫는다. 누구는 야구나 축구를 잘 알 테지만, 누구는 야구나 축구라는 이름조차 모른다. 바라보는 사람은 차근차근 알면서 깨달을 테지만, 안 바라보는 사람은 하나도 모를 뿐 아니라 조금도 알 수 없다. 마음을 이루는 책인 줄 알아차릴 수 있다면, 먼저 내가 어떠한 길을 걷는 삶이 되고 싶은지 생각해야 한다. 우리 삶길을 생각하면서 이 삶길에 걸맞구나 싶은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 말글을 다루는 사람은 말글을 다룬 책과 온갖 사전을 곁에 두면서 말글을 누구보다 깊이 헤아릴 수 있다. 역사를 다루는 사람은 역사를 다룬 책과 온갖 자료를 옆에 놓으면서 역사를 누구보다 깊이 돌아볼 수 있다. 보고 다시 보며 또 보니, 잘 알고 깊이 알며 넓게 알 수밖에 없다. 우리는 책을 읽는다. 우리는 저마다 마음을 이루는 책을 읽는다. 좋거나 나쁜 책은 없다. 그저 마음을 이루는 책을 읽을 뿐이다. 어느 책을 고를는지,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살면서 어떻게 사랑하고 싶은지,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한다. 값싼 책을 살 수도 있고 비싼 책을 살 수도 있을 테지만, 무엇보다 ‘우리 삶을 씩씩하게 걷는 길에 맞는 책’인지 제대로 살펴서 품에 안아야 한다.


2010.1.2. 책을 읽는 사람은 스스로 ‘이야기’를 찾아서 고른다. 스스로 찾아서 고른 책을 읽는 사람은 스스로 가장 아름다운 겨를을 내고, 스스로 가장 사랑스러운 곳에 앉거나 서거나 눕거나 엎드려서, 스스로 가장 즐거운 눈빛을 밝혀 ‘이야기’를 누린다. 그런데,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과 즐거움이 아닌 책읽기가 있다. 이를테면, 서평도서라든지 홍보도서가 되면 아름답지도 사랑스럽지도 즐겁지도 않더라. 추천도서와 명작도서라면 아름답지도 사랑스럽지도 즐겁지도 않더라. 독후감 숙제나 논술훈련이라면 아름다울 수도 사랑스러울 수도 즐거울 수도 없더라.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나 신문이나 영화 같은 매체는 우리한테 자꾸 ‘유행’이나 ‘사건 사고’ 같은 데에 얽매이도록 할 뿐 아니라, 생각을 안 하고 빨려들도록 이끌지 싶다. 우리 스스로 마음을 깊이 쓰면서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저 휩쓸리거나 휘말리고 만다. 그렇지만, 아무리 책이라 하더라도 스스로 마음을 기울여서 찾고 고르고 읽고 삭이고 누리고 나누지 않는다면, 멍하니 텔레비전을 들여다보는 몸짓하고 똑같겠지. 마음을 기울이기에 아름다운 책읽기가 된다. 마음을 쏟을 적에 사랑스러운 책읽기가 된다. 마음을 들이면서 삶을 지으니 즐거운 책읽기가 된다. 책을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즐겁게 읽어서 누리는 사람은, 종이책이 아닌 나무와 풀과 새와 구름과 해와 바람과 흙을 읽으면서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과 즐거움을 맛본다.


2013.11.1. 바쁜 일이 있을 적에는 한 줄만 차근차근 읽어도 된다. 굳이 긴 글이나 여러 글을 다 읽지 않아도 되지. 바쁜 일이 있으면 바쁜 일에 마음이 사로잡히기 마련이라, 책이나 글을 제대로 살피기 어렵다. 책이나 글은 바쁜 몸으로는 못 읽기 때문. 바쁜 사람은 노래를 제대로 못 듣는다. 바쁜 사람은 사랑을 제대로 못 한다. 바쁜 사람은 밥맛을 제대로 못 느낀다. 바쁜 사람은 하늘빛과 햇빛과 웃음빛을 찬찬히 헤아리지 못한다. 안 바쁠 때에, 아니 느긋할 때에, 느긋하면서 아늑하고 따사로울 적에 비로소 책을 읽는다. 느긋하면서 아늑하고 따사로울 적에 찬찬히 노래를 듣고 사랑을 하며 밥맛을 느낀다. 느긋한 삶에서 느긋한 말이 샘솟아. 아늑한 삶에서 아늑한 말이 흘러. 따사로운 삶에서 따사로운 말이 고운 빛으로 거듭나.


2015.2.26. 배울 마음이 없는 사람은 배울 수 없다. 참으로 그렇다. 배울 마음이 있는 사람은 배울 수 있다. 참말로 이와 같다. 눈을 뜨고 싶다면 눈을 뜰 수 있다. 눈을 감고 싶다면 눈을 감을 수 있다. 언제나 내가 스스로 생각해서 모든 일을 한다. 언제나 내가 스스로 생각을 기울여서 내 길을 걷는다. 남이 나를 가르치지 못한다. 내가 나를 가르친다. 왜냐하면, 아무리 남들이 내 앞에서 멋진 강의와 강연을 베풀어도 ‘스스로 들어서 배울 마음’을 끌어내야 비로소 배우기 때문. 그러니까, 나를 가르치는 사람은 언제나 나일 뿐. 숱한 스승이나 멋진 길잡이나 훌륭한 이슬떨이는 우리 곁에서 이 길을 함께 걷는 사람일 뿐. 이들이 우리를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 가르치려고 이들, 스승이나 길잡이나 이슬떨이를 불러서 함께 이 길을 걷는다. 남이 나를 살리지 못한다. 내가 나를 살린다. 왜냐하면, 아무리 내 머리에 ‘산소마스크’를 씌워 주어도, 내 마음이 움직여서 내 몸이 숨을 쉬도록 말을 걸지 않으면, 나는 숨을 못 쉬고 죽는다. 내가 살려면 내가 기운을 내어 숨을 쉬고 밥을 먹어야 한다. 배우려는 사람은 늘 스스로 배운다. 살려는 사람은 늘 스스로 살아난다. 책을 읽으려는 사람은 늘 스스로 책을 읽는다. 돈을 벌려는 사람은 늘 스스로 돈을 번다. 삶을 지으려는 사람은 늘 스스로 삶을 짓는다.


2017.10.4. 나이를 한 살 더 먹기에 더 슬기롭지 않더군. 돈을 더 많이 벌기에 더 너그럽지 않더라. 글을 더 많이 썼기에 더 빼어나지 않네. 말을 더 잘 하기에 더 착하지는 않고. 책을 더 많이 읽었기에 더 아름답지는 않지. 땅을 더 거느리기에 더 넉넉하지 않을 뿐더러, 밥을 더 많이 먹었기에 더 배부르지 않아. 어떤 마음인가에 따라서 늘 달라지는 살림. 읽는다는 마음이란, 우리 스스로 아직 모자라거나 어리숙한 줄 깨닫고 이를 채우거나 가다듬을 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 즐겁게 새로 지을 길을 갈고닦거나 가꾸려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우리한테는 책 하나조차 없어도 된다. 참답고 고우며 착하게 읽으려는 마음이 있을 적에는 우리 스스로 책이 되고 우리 스스로 책을 지으며 우리 이웃이 빚는 숱한 삶책을 받아들일 수 있다.


2018.12.12. 나는 “모든 아이는 열 살 무렵까지 신나게 뛰놀 줄 알아야 합니다.” 하고 한동안 생각했다. 우리 집 큰아이는 2017년에 열 살이다. 얼마 앞서 곁님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문득 곁님이 한 마디를 하네. “아이들이 스무 살까지 신나게 뛰놀아도 되지 않을까요?” 곁님이 문득 들려준 말을 듣고 10초쯤 생각했다. 더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겠더군. 참말로 모든 아이는 열 살 무렵까지 신나게 뛰놀고, 스무 살에 이르도록 재미나게 뛰놀면 좋겠네. 나중에 서른 살 적까지 사랑스레 뛰놀면 더욱 좋구나 싶고. 놀 줄 아는 마음이란 어떻게 누구하고 놀 적에 어떻게 즐거운가를 알 수 있는 삶이 된다고 느낀다. 그래서 이 마음은 고이 흐르고 흘러서 어떻게 누구하고 일할 적에 어떻게 즐거운가를 알아차리는 살림으로 거듭나지 싶다. 잘 놀며 자란 아이가 잘 일하며 살림짓는 어른이 되지 싶다. 슬기롭고 사랑스레 놀며 자란 아이가 슬기로우며 사랑스레 살림을 지어 새롭게 아이를 낳거나 돌보는 어버이가 되지 싶다. 그래서 신나게 뛰놀며 자란 아이는 책을 읽어도 참으로 아름답고 알차며 사랑스레 읽는 멋스러운 어른으로 살아갈 수 있지 싶다. 


2019.6.29. “저기 노래가 흐르나?” “저기 차가 지나갔나?” “저기 누가 있나?” “저기 덥나?” “저기 춥나?” 내가 나를 지켜보면서, 스스로 나아갈 길을 가려고 한다면, 우리 마음은 우리 몸이 언제 어디에서나 가장 빛나게 튼튼한 결을 잇도록 이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을 기울일 줄 알면, 오직 우리 마음이 가는 대로 몸이 움직이면서 스스로 즐겁게 지낸다. 이때에는 시끄러움·수선스러움·더위·추위·남눈 모두 튕겨낸다. 책읽기도 좋고 글쓰기도 좋고 밭일도 좋고 집안일도 좋고 수다질도 좋다. 무엇이든 좋으니 생각해 보자. 우리 스스로 마음을 기울여서 이 여러 가지 가운데 하나를 하면 이 일이나 놀이를 빼고 다른 것은 하나도 우리 몸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신나는 수다꽃잔치에서는 추위도 더위도 ‘하루가 저무는 줄’도 잊는다. 멋진 삶이자 마음이 아닌가?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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