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손길 저 손길



  이 손길이 닿아 이 책 한 권이 새롭게 빛난다. 저 손길이 닿아 이 책이 새삼스레 빛난다. 한 사람 손길이 닿으면서 비로소 곱게 피어난다. 두 사람 손길이랑 세 사람 손길이 어우러지면서 바야흐로 무럭무럭 자라는 나무처럼 뿌리를 내린다.


  책 한 권은 꼭 한 사람한테 읽히려고 태어날 수 있다. 그리고 꼭 한 사람은 오래도록 책 한 권을 건사한 뒤 새로운 한 사람한테 물려줄 수 있고, 새로운 한 사람도 오래도록 책 한 권을 건사한 뒤 다시 새로운 한 사람한테 물려줄 수 있다.


  책이란, 참으로 책이란, 한 번 읽히고 사라져도 되기에 나오지는 않는다고 느낀다. 책이란, 그러니까 책이란, 한 번 읽히고 두 번 세 번 거듭 읽히면서 두고두고 아름다운 삶을 노래하려는 숨결로 태어난다고 느낀다.


  새책방에서 한 번 팔리고 끝이 날 책이 아니라, 여러 사람 손길을 차근차근 걸치면서 여러 사람한테 기쁜 숨결을 나누어 주려고 태어나는 책이라고 본다. 내 손에서 네 손으로 가고, 네 손에서 내 손으로 온다. 우리는 서로서로 책을 돌려서 읽고 돌보고 건사하고 어루만지면서 마음밭을 가꾼다. 4348.11.9.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헌책방 언저리/책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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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구리왕짜 2015-11-09 18:53   좋아요 0 | URL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책이죠?
책도 기뻐할 것 같아요^^

숲노래 2015-11-09 21:02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말씀처럼
온누리에 하나만 있는 책이겠군요!
 

책과 걸상



  책 한 권을 손에 쥐어 한 쪽 두 쪽 천천히 읽다가 어느새 이야기에 사로잡히면 오직 이야기만 바라본다. 두툼하다 싶은 책을 들고 책을 읽더라도 팔이 아프다거나 다리가 아프다는 생각을 잊는다. 이야기에 사로잡히지 못할 적에는 팔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기 마련이다.


  마음을 사로잡는 책은 아무리 무게가 나가더라도 이 책 때문에 무겁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책이 안 다치도록 잘 건사하자는 생각을 한다. 마음을 사로잡는 책은 아무리 값이 나가더라도 이 책 때문에 주머니가 홀쭉해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책을 기쁘게 장만하자는 생각을 한다.


  아이들이 어떤 장난감이든 ‘장난감에 붙은 값’ 때문에 더 아끼거나 덜 아끼지 않는다. 스스로 마음에 드는 장난감일 때에 그야말로 아끼고 보듬고 사랑하고 고이 품으면서 신나게 논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장난감으로 신나게 노는 아이란 없다. 그러니, 책을 읽는 어른이 바라볼 곳은 ‘내 앞에 있는 책에 내 마음이 살며시 날아가듯이 닿는가’이다.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르고, 걸상이 있다면 발걸음 소리를 죽이면서 조용히 앉는다. 마음에 드는 책을 읽을 적에는 종잇장 넘기는 소리조차 없다. 몸을 움직이지도 않고, 더위나 추위도 느끼지 않는다.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온마음을 넉넉히 울리는 아름다운 노래로 흐른다. 4348.11.8.ㅎ.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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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구리왕짜 2015-11-09 18:52   좋아요 0 | URL
맞아요... 소리조차 묻히죠...
 

연필 한 자루



  나는 연필 한 자루로 글을 쓴다. 아이들은 연필 한 자루로 그림을 그린다. 헌책방지기는 연필 한 자루로 책마다 책값을 매기고, 장부에 팔림새를 적는다. 연필도 숲에서 왔고, 종이도 숲에서 왔으며, 책도 숲에서 왔다. 숲에서 자란 나무를 사람이 사랑하고, 사람이 가꾸며, 사람이 베고, 사람이 다루어, 사람이 연필이며 종이에다가 책을 짓는다.


  연필 한 자루를 손에 쥐면 문득 숲바람이 살풋 분다. 어디에서 비롯한 숲바람일까? 내가 쥔 연필 한 자루는 어느 두멧자락 숲에서 살던 나무가 새롭게 태어난 숨결일까? 내가 연필로 글을 쓰는 종이는 어느 시골자락 숲에서 자라던 나무가 새롭게 거듭난 숨결일까? 헌책방지기가 건사해서 책꽂이에 곱게 둔 책 한 권은 어느 나라 어느 마을 깊은 숲에서 깃들던 나무로 새롭게 이룬 이야기일까?


  연필 한 자루를 마주하면서 늘 숲을 그린다. 연필 한 자루를 손에 쥐어 칼로 석석 깎으면서 늘 숲을 헤아린다. 연필 한 자루를 아이한테 건네면서 늘 숲을 떠올린다. 연필 한 자루를 주머니에 넣고 나들이를 다니면서 늘 숲을 가슴에 품는다. 연필 한 자루가 있는 헌책방에서 책시렁을 살피면서 늘 숲을 만난다. 4348.10.26.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헌책방 언저리/책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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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앞



  어릴 적부터 누군가를 만날 적에 으레 “책방 앞”에서 보자고 했다. 참말 “책방 앞”에서만 기다리기도 하지만, “책방 안”으로 들어가서 책을 보며 기다리기도 했고, 책방에서 책을 장만하기도 했다. 시계조차 없이 돌아다니면서 동무를 만나던 때에는 책방 시계를 보기도 했지만, 굳이 시간을 따지지 않았다. 늦든 이르든 대수로울 일이 없고, ‘동무하고 함께 있는 겨를’이 즐거울 뿐이었다. 늦게 오더라도 서로 마음으로 함께 있으니 걱정할 일이 없기도 하고, “책방 앞”에서 그달에 새로 나온 잡지 겉모습을 구경한다든지, “책방 안”으로 들어가서 ‘가벼운 주머니로 장만하지 못하는’ 책을 몇 쪽씩 읽는다든지 하면서 재미있었다.


  언제 어디에서든 “책방 앞”에 서면, 또 “책방 앞”을 보면, 어린 마음으로 돌아간다. 앞으로 내 나이가 몇 살이 되든 “책방 앞”에 서거나 “책방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린다면, 나는 늘 풋풋한 마음이 되어 삶을 노래할 만하리라 느낀다. 4348.9.15.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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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5-09-15 09:09   좋아요 0 | URL
책방 앞이라고 하시니 문득 저도 항상 친구들과 약속했던 서점이름이 떠오르네요!
부산의 서면쪽 영광도서 앞,(동보서적?도 있었던 것도 같고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그리고 남포동의 남포문고 앞!!(대형 남포문고 옆에 오래된 다른 서점이 있었는데 바로 앞이 버스정류장이라 친구들,지금의 신랑과 늘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가 그서점이었는데 오래되어 이름이 생각나질 않네요ㅜ 그서점은 없어진지가 십여 년이 넘어 제일 아쉬운 서점이에요)
그시절엔 그곳들이 명소였었는데~~옛추억들이 새삼 떠오르네요^^

숲노래 2015-09-15 10:28   좋아요 0 | URL
사람들마다
책방 앞하고 얽힌
멋지면서 애틋한 옛이야기가 있을 테지요?

그 이야기가 옛이야기만이 아니라
오늘도 새롭게 누리는 이야기가 되어서
작은 마을에서도
언제나 고운 노래가 흐를 수 있기를 빌어요 ^^
 

헌책방에 가장 많이 있는 책



  헌책방에 가장 많이 있는 책은 두 갈래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새책방에서 아주 많이 팔려서 헌책방에도 쏟아지는 책이다. 다른 하나는 새책방에서 거의 안 팔리는 바람에 헌책방에만 쏟아지는 책이다.


  새책방에서 아주 많이 팔려서 헌책방에도 쏟아지는 책 가운데에는 헌책방에서도 잘 팔리는 책이 있으나, 헌책방에서만큼은 도무지 안 팔리는 책이 있다. 새책방에서 거의 안 팔린 책 가운데에도 헌책방에서조차 도무지 안 팔리는 책이 있지만, 헌책방에서는 제법 잘 팔리는 책이 있다.


  헌책방 팔림새로 본다면, 두 갈래로 책이 팔린다고 여길 수 있다. 하나는 곧바로 읽히는 책이 팔리고, 다른 하나는 두고두고 읽힐 책이 팔린다. 알차고 재미있어서 곧바로 읽히는 책이 있고, 알차지도 않고 재미있지도 않으나 그때그때 처세와 경영과 학습에 맞추어 읽히는 책이 있다.


  책은 사랑받고 싶다. 책은 한 번만 읽힌 뒤 불쏘시개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어느 책이든 사랑받고 싶다. 숲에서 아름드리로 자라다가 책으로 거듭난 나무는 두고두고 푸른 숨결을 나누어 주는 즐거운 이야기꾸러미가 되고 싶다.


  오늘날 한국 헌책방에는 학습지가 가장 많이 있다. 아니, 새책방부터 학습지를 가장 많이 다룬다. 학습지를 일부러 안 다루는 헌책방이 있으니 ‘모든 헌책방에 학습지가 많다’고 할 수는 없다. 굳이 학습지를 안 다루려 하는 헌책방이 아니라면, 어느 헌책방이든 학습지가 차지하는 자리가 매우 넓을 수밖에 없다. 학습지 가짓수와 갈래도 많고 부피도 권수도 대단히 많기 때문이다.


  이 많은 학습지는 누가 볼까? 아이들이 보고 어른들이 본다. 중·고등학교 아이들이 보고, 중·고등학교 교사와 학부모가 본다. 싱그러운 나이인 아이들은 학습지에 길들고, 싱그러운 아이들을 돌보는 어른들도 학습지에 젖어든다.


  왜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책이 아닌 학습지를 읽힐까? 왜 우리 어른들은 스스로 책이 아닌 학습지만 자꾸 들여다보려 할까? 책이 아닌 학습지만 들여다보는 아이와 어른이 자꾸자꾸 늘면서 삶과 사랑과 사람을 보는 눈이 흐려지지 않나 싶다. 책하고 멀어진 채 학습지에 파묻혀 싱그러운 나날을 보내는 아이들이 늘면 늘수록 삶과 사랑과 사람이 아름다이 거듭나거나 슬기롭게 깨어나는 길하고도 멀어지지 않나 싶다. 헌책방에 가장 많이 꽂히면서 널리 사랑받을 책은 ‘학습지’가 아닌 ‘그냥 책’이어야 하리라 느낀다. 4348.9.14.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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