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입에서 나오는 말
[말사랑·글꽃·삶빛 9] 고사성어 아닌 삶말

 


  우리 집 첫째 아이가 다섯 살을 살아가는 어느 날 아침입니다. 이슬이 들판을 곱게 적십니다. 나란히 햇살을 받으며 마당에 섭니다. 들새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문득 한 마디 합니다. “아버지 왜 (저 새들은) ‘은지 은지 은지’ 해요?” 함께 들새 노랫소리 듣던 아버지는 ‘찌삣 찌삣 찌삣’처럼 들었으나, 아이는 ‘은지 은지 은지’처럼 듣습니다. 아이 말을 되새기며 들새 노랫소리를 맞추어 봅니다. 아버지와 아이는 들새 이름을 모르지만, 이 들새가 노래하는 소리는 ‘은지 은지 은지’라 해도 잘 들어맞는구나 싶습니다. 다른 분들이 이 들새 노랫소리를 듣는다면 이와는 달리 적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이는 마당에 놓인 자전거를 타려다가 “어, 젖었네.” 하면서 옷섶으로 자전거 안장을 닦습니다. 아버지는 곁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젖지 않았어. 거기엔 이슬이 앉았어.” “이슥?” “아니, 이슬. 자, 여기도 봐. 여기 풀잎에 물방울이 맺혔지. 이 물방울을 이슬이라고 해.” “아, 이·슬.”


  차츰 밝고 노랗게 빛나는 햇살을 올려다보다가는, 마당 빙 둘러 자라는 들풀에 맺힌 이슬을 함께 내려다봅니다. 아이는 한손을 휘휘 저으며 손가락마다 이슬을 붙입니다. 풀잎 이슬을 아이 손가락으로 옮기는 이슬놀이를 합니다.


  아버지는 집으로 들어와 이불을 빨래합니다. 손으로 비누를 바르고 비빔질을 하다가 빨래기계에 넣습니다. 아버지는 아이한테 ‘빨래기계’라 말하기에, 아이는 아버지 곁에서는 ‘빨래기계’라는 말을 익힙니다. 우리 시골집에 나들이하는 다른 분들은 우리 식구가 드디어 ‘세탁기(洗濯機)’를 들이며 손빨래에서 벗어난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 집 아이는 바깥 손님이 있는 자리에서는 ‘세탁기’라는 말을 들으면서 천천히 익힙니다.


  아이 어머니가 당근을 갈아서 잔에 담습니다. 아이 어머니가 ‘당근즙(-汁)’이라 말하면 아이는 ‘당근즙’이라는 말을 들으며 배웁니다. 아이 어머니가 ‘당근 간 물’이라 말하면 아이는 새삼스레 ‘당근 간 물’이라 들으며 배웁니다.


  아이는 “나 밥 먹을래.” 하고 말합니다. 아이 아버지도 어머니도 늘 ‘밥’을 먹기 때문입니다.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여느 때에 “자, 우리 식사(食事)하자.”처럼 말했다면, 아이는 “나 식사 할래.” 하고 말하겠지요.


  얼마 앞서 읽은 책 《어머니전》(호미,2012)을 생각합니다. 《어머니전》이라는 이야기책은 섬마을 두루 도는 분이 섬마을 할머니들 삶을 조곤조곤 여쭙고 들은 말마디를 하나하나 아로새깁니다. 25쪽을 보면, “첫 숟갈에 배부를까. 방죽을 파 놔야 머구리(개구리)가 뛰어들제. 그물코도 삼천 코면 걸릴 날 있다고, 차분히 맘먹고 사시오.”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43쪽을 보면, “마도를 똥막대기 만든다.”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섬마을 할머니, 곧 ‘섬할매’ 입에서는 “첫 숟갈에 배부를까”라든지 “방죽을 파놔야 머구리가 뛰어들제”라든지 “그물코도 삼천 코면 걸릴 날 있다고”라든지 “똥막대기 만든다”라든지, 당신들 살아오며 몸으로 겪은 말마디가 톡톡 튀어나옵니다. 하나둘 샘솟습니다.


  한국말을 살피는 학자들은 섬할매 말마디를 으레 ‘속담(俗談)’이라든지 ‘격언(格言)’이라는 이름을 붙여 가리킵니다. 또다른 이름으로 ‘상말(常-)’이 있습니다. 그런데, 국어사전에서 ‘상말’ 뜻을 찾아보면 “점잖지 못하고 상스러운 말”이라 나옵니다. 여느 사람들이 으레(常) 쓰는 말이기에 ‘상말’이라는 이름이 붙는데, 여느 사람들이 으레 쓰는 말이 “점잖지 못하고 상스러운 말”이라 합니다. ‘상(常)스러운’이란 무슨 뜻일까요? 사람들이 얘기하는 ‘상스러운 말’이란 어떤 말일까요? ‘상스럽다’는 “말이나 행동이 보기에 천하고 교양이 없다”를 뜻한다 합니다. ‘속담’이란 “속된(俗) 말(談)”을 가리킵니다. ‘속되다’는 “(1) 고상하지 못하고 천하다 (2) 평범하고 세속적이다”를 뜻한다 합니다. 그러니까, 한국말 살피는 학자들 학문에 따른다면, 섬할매들 말마디는 ‘속되거나 상스러운 말’인 셈이요, 낮고 나쁜 말이라 일컫는 셈입니다.


  섬마을 두루 도는 어느 분이 섬마을 할매들을 만나지 않고, 서울이나 부산에서 교수님이나 학자님을 만났더라면 아마 ‘속담’이나 ‘상말’이 아닌 ‘고사성어’나 ‘사자성어’를 으레 들었으리라 봅니다. 이녁이 책을 낼 때에도 이녁 책에는 고사성어와 사자성어가 가득하리라 생각합니다.


  고사성어나 사자성어란 ‘한자로 엮은 말’입니다. ‘고사성어’는 ‘중국 옛일을 한자로 적은 말’이요, ‘사자성어’란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을 한자 넉 자로 적은 말’이에요.


  아이들은 늘 배웁니다. 아이들은 둘레 어른들이 나누는 말을 듣고 배웁니다. 아이들이 전라남도 고흥에서 살아가면 전라남도 고흥말을 듣고 배웁니다. 아이들이 경상남도 통영에서 살아가면 경상남도 통영말을 듣고 배웁니다. 아이들이 시골할매하고 만나며 살아가면 아이들은 시골할매 말을 듣고 배웁니다. 아이들이 학원을 다니거나 학교를 다니면 아이들은 학원 강사나 학교 교사 말을 듣고 배웁니다. 아이들이 텔레비전을 보면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말을 듣고 배웁니다.


  어른들도 노상 배웁니다. 어른들 스스로 어디를 일터로 삼느냐에 따라 어른들 스스로 듣고 배우는 말이 달라집니다. 어른들 스스로 찾아 읽는 책이나 신문이나 잡지에 따라 어른들 스스로 읽고 배우는 말이 바뀝니다.


  고장말을 듣고 자라는 아이는 고장말을 듣고 익힙니다. 사자성어나 고사성어 같은 한자말을 듣고 자라는 아이는 사자성어나 고사성어 같은 한자말을 익숙하게 여기며 익숙하게 씁니다. 영어를 으레 듣고 자라는 아이는 영어를 으레 받아들이며 영어로 아이 생각을 밝히며 살아갑니다.


  고운 말을 듣고 자라는 아이는 고운 말로 생각하며 이야기를 꽃피웁니다. 맑은 글을 읽고 자라는 아이는 맑은 글로 생각을 키우며 사랑을 나눕니다. 살가운 말을 들으며 자라는 아이는 살가운 말로 생각하며 꿈을 이룹니다. 따스한 글을 읽고 자라는 아이는 따스한 글로 생각을 돌보며 믿음을 다스립니다. (4345.5.2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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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5-21 13:23   좋아요 0 | URL
어머, 이뻐라,
벼리가 '왜 새가 은지은지 해요?' 하던가요?
그렇게도 들리는구나... 하기사, 짹짹 삐약삐약 등 하나의 말로 한정짓기엔
너무 아까운 아름다운 소리잖아요.

댓글 달면서, '한정짓기엔'을 우리말로 풀어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한참 망설이는데
생각나질 않아요. 가르쳐주세요, 된장님.

숲노래 2012-05-22 04:47   좋아요 0 | URL
'뭉뚱그리다'라 하면 돼요.

또는 "삐약삐약 같은 말로만 적기엔"처럼 적어도 되고요.

토씨 '-만'이 있으니
알맞게 잘 살리면 됩니다~

hnine 2012-05-21 15:51   좋아요 0 | URL
지난 번에 읽은 이정록 시인의 책에도 충청도 사투리가 나오는 대목은 저도 모르게 따라 읽어보게 되던데요. 이 책도 그럴 것 같아요. Thanks to하고 구입합니다 ^^

숲노래 2012-05-22 04:46   좋아요 0 | URL
어머니전 장만하시는가 봐요?
오오~
아무쪼록 즐거이 누려 주시리라 믿어요~ ^^
 

‘외출’과 ‘나들이’와 ‘마실’
[말사랑·글꽃·삶빛 8] 생각을 하며 쓰는 말


  좋아하는 어린이책을 한 권 읽습니다. 일본사람이 쓴 글을 한국사람이 옮겼습니다. 군데군데 아쉽다 싶은 옮김말이 보입니다만, 속으로 아쉽네 하고 여긴 다음 지나칩니다. 이러다가 꼭 한 줄에서 오래도록 생각에 잠깁니다. 밑줄을 그은 다음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오늘날에는 거의 모두라 할 만큼 사람들이 으레 이렇게 말을 하고 으레 이러한 말을 들으니까, 나 또한 이냥저냥 지나치면 그만일까 궁금합니다. 오늘날 거의 모두라 할 만한 사람들이 으레 쓰거나 듣거나 하더라도, 나부터 찬찬히 헤아리며 살짝 손질하거나 따사로이 보듬어도 좋을까 궁금합니다.

 

오소리 아저씨는 종이 옆에 ‘외출중’이라고 쓴 팻말을 걸어 놓고 세탁소 문을 나섰어요
《모이치 구미코/육은숙 옮김-숲 속 세탁소》(크레용하우스,2005) 16쪽

 

  내가 어린이책을 쓴다면, ‘세탁소(洗濯所)’라는 낱말부터 안 쓰겠습니다. 왜냐하면, 어린이책이니까요. 어린이들도 세탁소라는 가게쯤 안다 할 수 있으나, 아직 모르는 어린이도 틀림없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이들 살아가는 집에 ‘세탁기’ 없는 곳은 없다 할 만하지만, 그래도 어린이책에 넣을 글을 쓴다 할 때에는 ‘세탁기(洗濯機)’라는 낱말마저 안 쓰고 싶습니다.


  어떤 낱말을 쓸까요. 어떤 낱말을 아이들한테 보여줄까요. 어떤 낱말로 아이들 생각밭에 말씨 하나 심을까요. 어떤 낱말로 아이들 넋과 꿈을 보듬는 길을 이끌면 즐거울까요.


  일본사람 모이치 구미코 님 어린이책을 헤아립니다. 모이치 구미코 님은 ‘사람’ 아닌 ‘들짐승’을 빗대어 어린이문학을 펼칩니다. 사람 아닌 들짐승이 나오기도 하는 만큼, 들짐승 사이에서 쓰는 낱말이라고 여기며 조금 더 다르게 새 낱말을 빚어도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세탁소’ 아닌 ‘빨래집’이나 ‘빨래가게’라는 낱말을 쓰고 싶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빨래집’이나 ‘숲속 빨래집’ 같은 낱말을 넣고 싶습니다.


  나는 빨래를 늘 손으로 했습니다. 나는 스무 해 동안 손빨래를 했습니다. 스무 해만에 빨래하는 기계를 장만했지만, 빨래하는 기계가 집안에 들어왔어도 손빨래는 예전처럼 합니다. 기계가 할 수 없는 몫이 있거든요. 기계가 해 주더라도 사람이 손으로 주무르고 비벼야 하는 자리가 있어요.


  먼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빨래를 했’지, 따로 ‘손빨래를 하’지 않았어요. 얼마 앞서라 할 서른 해나 마흔 해쯤 앞서 이 나라에도 ‘빨래 맡는 기계’가 들어오면서 ‘기계빨래’와 다른 ‘손빨래’를 따로 나누어 가리킵니다. 곧, 빨래라 하면 예전부터 아주 마땅히 ‘손빨래’였는데, 이제는 빨래라 하면 아주 마땅히 ‘기계빨래’로 여겨요. 그러니 ‘손빨래’라는 낱말이 새로 생겨요. 되레 ‘기계빨래’라는 낱말이 생겨야 할 테지만, 막상 ‘기계빨래’라 말하거나 일컫는 사람은 아주 없거나 몹시 드물어요.


  하찮다 싶은 대목일까요. 어쩌면 하찮다 싶은 대목인 ‘빨래’요 ‘洗濯’인지 몰라요. ‘밥’과 ‘食事’라는 말마디도 하찮다 여길 만한지 몰라요. 나는 늘 밥을 먹지만, 둘레 사람들은 으레 “식사 하셨어요?”처럼 물어요. “밥은 먹었나요?” 하고 묻는 사람을 보기 매우 힘듭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옷차림’이나 ‘입성’이라는 낱말을 쓰지 않아요.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두루 ‘패션(fashion)’이라고 말해요.


  집에서 셈틀을 다루어 종이를 한 장 뽑는다 할 때에도 ‘종이를 뽑’거나 ‘종이에 글을 찍’는 일을 하지만, 막상 ‘종이뽑기’나 ‘종이찍기’처럼 말하는 사람은 없어요. 적어도 한자말로 ‘인쇄(印刷)’라 하거나 영어로 ‘프린트(print)’라 해요. 종이를 뽑거나 글을 찍는 기계를 가리켜 ‘프린터(printer)’나 ‘인쇄기(印刷機)’라고만 하지, 딱히 한국말로 어떻게 가리켜야 좋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드뭅니다.


  반드시 한국말로 이런 낱말이나 저런 낱말이 있어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생각은 해야지 싶어요. 꼭 국어사전에 어떤 한국말이 옳게 실려야 하지는 않아요. 다만, 어린이문학을 하든 어른문학을 하든, 문학을 하거나 글을 쓰는 이들은 한국말로 슬기롭게 생각하면서 한국말을 빛내는 길을 살펴야지 싶어요.

 

 외출중 ↔ 나들이
 회의중 ↔ 이야기
 휴가중 ↔ 쉼
 식사중 ↔ 밥
 취침중 ↔ 잡니다
 공부중 ↔ ?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면 살림집에 아이 방을 따로 마련하기도 합니다. 이때에, 아이들은 문에 조그마한 푯말을 걸곤 합니다. 이런저런 말마디가 적힌 푯말을 건다 할 텐데, 으레 ‘-中’이라 하는 말투만 붙어요. 여러모로 한국말을 더 깊이 살피는 말투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나는 잘 모르지만, 요사이에는 아예 영어로 이렇게 가리키거나 저렇게 가리키기도 하겠지요. ‘공부중’이라 적기보다 ‘study’라 적는 사람이 더 많을 수 있어요. 가만히 보면, 학교에서 교사나 아이들 스스로 ‘공부한다’라는 말보다 ‘스터디한다’라는 말을 제법 자주 써요. ‘공부 모임’처럼 말하는 이는 드물고, ‘스터디 모임’처럼 말하는 이가 훨씬 많아요.


  말은 쓰는 사람 마음이니, 이렇게 쓰고 싶으면 이렇게 쓸 노릇이고, 저렇게 쓰고 싶다면 저렇게 쓸 노릇입니다. 이러쿵저러쿵 따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대로 생각합니다. 내가 내 나름대로 내 말빛을 북돋우고 내 말결을 살찌우면서 나눌 만한 말마디를 생각합니다. ‘공부중’이라 쓰기보다 “나 공부해요”라 쓰거나 “나 책 읽어요”라 쓸 수 있어요. “배웁니다”라 써도 즐겁습니다. 한 마디로 “책”이라 적을 수 있어요. ‘외출중’은 “밖”으로 적고, ‘회의중’은 “말”로 적을 수 있어요. 한 마디로 갈무리할 수 있습니다. 두 마디나 세 마디로 맞추어 적어도 되고, 풀어서 적는 글로 갈무리할 수 있어요. 이를테면 “밖에 있어요”나 “바람 쐽니다”처럼 적습니다. “얘기 나눕니다”나 “이야기꽃”처럼 적습니다. (4345.5.17.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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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5-17 13:55   좋아요 0 | URL
숲속 빨래집... 너무 예쁜 말이예요.
세탁소보다 훨씬 동화에 어울리구요. 공부중 보다는 배웁니다... 네, 그것도 참 좋네요.

숲노래 2012-05-17 16:35   좋아요 0 | URL
동화에 어울리는 낱말을 아이들이 익숙하게 들으면
앞으로 어른이 되면서도
새롭고 싱그럽게 말을 빛내리라 느껴요

노이에자이트 2012-05-17 14:29   좋아요 0 | URL
이오덕 씨 책에도 이런 내용을 볼 수 있죠.

저는 옷거리가 좋다, 맵시난다는 말을 자주 씁니다.요즘은 스타일리시하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요.

숲노래 2012-05-17 16:35   좋아요 0 | URL
맵시라는 낱말은 거의 잊혀진 말이지만,
그래도 다시 살아날 만하기도 하다고 느껴요.
사람들이 이런 낱말을 모르니까 못 쓰거든요..
 

아이들한테 들려줄 말
[말사랑·글꽃·삶빛 7] 동화는 어떻게 쓰는가

 


  대학교에 문예창작학과가 있습니다. 대학교 바깥에 글쓰기 강좌라든지 문예창작 강의가 무척 많습니다. 글을 쓰고 싶다는 꿈을 키우는 분들이 대학교를 다니거나 여러 강좌나 강의를 찾아서 듣습니다. 글을 쓰고 싶다면 스스로 마음껏 쓰면 될 노릇이지만, 글을 쓸 때에 어떤 틀이나 솜씨가 있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대학교에 들어가려 한다든지 강좌나 강의를 들으려 한다고 느낍니다.


  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다니며 글쓰기를 배울 수 있습니다. 강좌나 강의를 들으며 글쓰기를 북돋울 수 있습니다. 어디를 얼마 동안 다니든 누구나 새롭게 바라보는 눈길을 틔우고, 새삼스레 느끼는 마음을 다스릴 만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라 할 텐데, 어디를 얼마 동안 못 다니거나 안 다니더라도 스스로 새롭게 바라보는 눈길을 틔울 뿐 아니라, 새삼스레 느끼는 마음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글쓰기란 삶쓰기이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는 일이란 삶을 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글쓰기를 배운다 할 때에는 삶쓰기를 배우는 셈입니다. 곧, 남한테서 무언가 따로 배우거나 이야기를 들으며 스스로를 살피거나 다스릴 수 있다고 여기는 분이라면, 대학교를 들어가거나 강좌랑 강의를 찾아 들어야 합니다. 굳이 남한테서 무언가 따로 배우거나 이야기를 듣기보다, 스스로 제 삶을 찬찬히 곱씹거나 톺아보면서 제 삶을 깨닫거나 느끼려 하는 분이라면, 하루하루 깊이 헤아리면 넉넉합니다.


  글을 쓰는 일이란 삶을 쓰는 일이기에, 내 삶이 있어야 내 글을 씁니다. 그리고, 내 삶을 나 스스로 느낄 줄 알아야 내 글을 써서 내놓을 수 있습니다.


  누구나 삶을 꾸립니다. 누구나 날마다 새롭게 삶을 일굽니다. 내 하루를 곰곰이 되새긴다면, 내가 누리는 하루 이야기로 긴 소설 하나 쓸 수 있습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이루어지는 일 하나로 얼마든지 긴 소설 하나 쓸 만합니다. 내 하루살이를 긴 소설로 쓸 수 있을 때에, 이 기나긴 소설 줄거리 가운데 하나를 간추려 짤막한 싯말 하나로 선보일 수 있습니다. 거꾸로, 내 하루살이를 짤막한 싯말 한 줄로 간추려 선보일 줄 아는 이라면, 이 이야기에 살을 붙여 기나긴 소설 하나로 다시 엮을 수 있어요.


  ‘문예창작’이라는 말마디를 생각합니다. ‘문예’란 ‘글 예술’을 일컫습니다. ‘창작’이란 ‘새로 짓기’를 가리킵니다. 곧, ‘글을 예술이 되도록 새로 짓기’가 문예창작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면, 예술이란 무엇이라 할까요. 우리 삶에서 어떤 모습이 예술이라 할 만할까요. 어느 이야기는 예술이 되고, 어느 이야기는 예술이 안 될까요.


  아이들을 토닥토닥 재우며 부르는 자장노래 어버이 목소리와 낯빛과 손길은 얼마나 예술답다 할 만할까 생각합니다. 식구들 밥상을 차리는 집일꾼 몸짓과 매무새와 넋은 얼마나 예술답다 할 만할까 생각합니다. 빨래를 손으로 하는 몸짓은, 빨래기계 단추를 눌러 옷을 건사하는 매무새는, 해바라기 하도록 빨래줄에 빨래를 너는 몸가짐은, 다 마른 빨래를 찬찬히 개어 옷시렁에 놓는 모습은 얼마나 예술답다 할 만할까 생각합니다. 아이 손을 잡고 들길을 거닐며 꽃송이 바라보며 꽃내음 맡는 일은 얼마나 예술답다 할 만할까 생각합니다. 걸레를 빨아 방바닥을 훔치는 일은 얼마나 예술답다 할 만할까 생각합니다. 마당 한켠 물꼭지를 틀어 물놀이 즐기는 아이를 바라보는 일은 얼마나 예술답다 할 만할까 생각합니다.


  글을 쓰려 하는 분들은 어떤 삶을 어떤 꿈으로 어떤 사랑을 실어 어떤 줄거리로 엮고 싶을까 궁금합니다. 글을 쓰려 하는 분들 가운데 아이들과 함께 읽는 동화를 쓰려 하는 분들은 어떤 삶을 어떤 꿈으로 어떤 사랑을 실어 어떤 줄거리로 엮으며, 아이들과 함께 웃고 우는 이야기를 빚으려 할까 궁금합니다.


  어떤 글을 쓰든 글에는 글쓴이 삶을 싣습니다. 어떤 글을 쓰든 글마다 글쓴이 꿈을 담습니다. 어떤 글을 쓰든 글줄에 글쓴이 사랑을 아로새깁니다. 어떤 글을 쓰든 글쓴이가 누리는 즐거움과 웃음과 햇살과 바람을 살포시 깃들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읽는 동화를 쓰는 삶을 헤아립니다. 아이들과 함께 어떤 말로 삶을 북돋우면 즐거울까요. 아이들과 함께 읽는 동화를 쓰는 어른은 ‘동화를 쓰는 오늘에 이르도록’ 내 삶을 담는 내 말을 얼마나 곱고 착하고 참답고 맑고 올바르고 곧고 정갈하고 깔끔하고 산뜻하고 싱그럽고 빛나도록 다스렸을까요.


  아이들과 함께 읽는 동화에 “-ㄹ 것 같아요”나 “할아버지의 아치형 나무뿌리”나 “시작된 여정”이나 “뱀을 향해 말했어요”나 “왕과의 만남”이나 “해골만 남은 몰골에도 치장하고”나 “구하기 위해”나 “-려는 거예요”나 “친구가 필요하잖아”나 “도대체”나 “감히”나 “여왕의 방”이나 “몇 명의 왕”이나 “자기”나 “자신”이나 “미소 짓는다”나 “정답다”나 “날고 있다”나 “공손히” 같은 말마디를 적바림하는 일은 얼마나 ‘동화 글을 쓰는 일’이 될까 하고 돌아볼 노릇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읽을 동화를 어떤 낱말 어떤 말투 어떤 말씨로 엮는지 하나하나 짚을 노릇입니다.


  어른으로서 널리 쓰는 낱말이라 하더라도 아이들한테까지 함부로 쓸 수 없습니다. 수많은 어른들이 아이들 앞에서 ‘bye bye(바이 바이)’나 ‘安寧(안녕)’ 같은 말을 생각없이 쓴다 하더라도 ‘잘 가’나 ‘잘 있어’나 ‘다음에 봐’처럼 동화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고 느껴요.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아이들한테 이처럼 말할 수 있어야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수많은 어른들이 아이들 앞에서 ‘생일party(파티)’ 같은 말을 생각없이 읊더라도 ‘생일잔치’나 ‘귀 빠진 날 잔치’처럼 동화 글을 쓸 수 있어야 어여쁘다고 느껴요. 수많은 어른들이 ‘操心(조심)해’ 같은 말을 생각없이 말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동화 글을 쓰려는 이라면 ‘잘 살펴’나 ‘찬찬히 살펴봐’나 ‘마음을 써 봐’나 ‘마음을 기울여 봐’처럼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에 아리땁다고 생각해요.


  잘 살피고 옳게 생각할 수 있어야 즐겁게 동화 글을 씁니다. ‘微笑(미소)’나 ‘始作(시작)’ 같은 한자말은 일본 한자말입니다. ‘都大體(도대체)’나 ‘감(敢)히’나 ‘필요(必要)’ 같은 한자말을 어른들이 거리끼지 않고 쓰는데, 참말 아이들 앞에서 이런 말마디를 거침없이 쓰며 보여주어도 즐거이 누릴 삶이 될까 궁금합니다.


  동화 글을 쓰려는 어른이라면 말부터 깊이 살피고 옳게 짚으며 착하게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여느 어른들 사이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는 말마디라 하지만, 또 신문이나 방송이나 인터넷에 널리 나타나는 말마디라 하지만, 이런저런 말마디를 동화 글에 버젓이 넣어도 될 만한가 하고 가만히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참말 어른들은 “微笑 속에 비친 그대”처럼 노래를 부릅니다. 어른들은 “只今부터 始作이야” 같은 말을 흔히 씁니다. 어른들은 “네가 必要해” 같은 말을 쉽게 씁니다. 여느 자리에 익숙하게 어른들끼리 이런 일본 한자말과 저런 중국 한자말을 쓸 뿐 아니라, 이런 영어와 저런 프랑스말과 그런 외국말을 너무 생각없이 씁니다. 어른들이 일한다는 막일판에는 일본말이 많이 쓰인다지요. 책을 만드는 사람들 또한 책마을에서 일본말을 아주 많이 쓴다지요. 이른바 전문직이라 하는 자리에서는 몽땅 일본말투성이라지요. 우리 아이들이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익히며 쓰도록 이끌자는 생각을 거의 안 한다 할 텐데, 말에 앞서 삶부터 아이들이 아이답게 삶을 꾸리도록 돕지 못하기 일쑤예요. 초등학교에 들기 앞서 어린이집이나 유치원부터 영어를 가르칩니다. 학원을 끝없이 보냅니다. 입시지옥 굴레에 몰아세웁니다. 아이들 삶을 사랑하지 않으니 입시지옥을 만듭니다. 아이들 꿈을 아끼지 않으니 입시지옥에 허덕이다가 대학교에 들어가도록 내몰기만 해요. 아이들 스스로 하루하루 예쁘게 누리며 즐기도록 손을 내밀지 않아요. 아이들 스스로 온 하루를 어여쁜 꿈과 사랑으로 빚도록 어깨동무하지 않아요.


  오늘날 한국땅에서 동화를 쓰는 일이란 어떤 뜻이 될는지 아리송하곤 합니다. 말만 예쁘장하게 가다듬으면 동화가 될까요. 무언가 배울 만한 대목을 집어넣어 “고개숙여 배우는 작품”이나 “지식을 쌓는 작품”이나 “재미있는 작품”이나 “가슴 뭉클한 작품”을 쓰는 일은 어떠한 보람이나 뜻이 있을까요.


  동화 글에 “印象的(인상적)인 表情(표정)”이나 “或是(혹시)”나 “구멍을 通(통)해”나 “巨大(거대)한”이나 “氣色(기색)” 같은 낱말을 넣는 일은 알맞을까 헤아려 봅니다. 그런데, 이런 낱말을 슬기롭게 가다듬어 알맞고 바르게 동화 글을 추스른다 할지라도, 사랑스레 나눌 이야기를 꿈꾸도록 돕는 줄거리로 빚지 못한다면, 어떤 값이나 구실을 할까 잘 모르겠어요. 동화 글이란, 글줄부터 하나하나 잘 삭히고 엮으며 빚어야 합니다. 동화 글이란, 줄거리와 이야기 모두 환히 빛나도록 잘 건사하고 갈고닦으며 세워야 합니다. 두 갈래를 오롯이 추스르면서 동화를 쓰는 어른 삶부터 해맑게 사랑하고 꿈으로 빛내야 합니다. 봄날 제비 노랫소리를 맑게 들으며 좋은 넋 누리고, 가을날 파란하늘 바람소리를 곱게 들으며 좋은 얼 품을 때에 동화 글이 태어난다고 생각합니다. (4345.5.10.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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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맑은’ 사람 노래하는 고정희 시인
[말사랑·글꽃·삶빛 6] 생각으로 빛내는 말

 


  고정희 시인이 남긴 시집 《지리산의 봄》(문학과지성사,1987)이 있습니다. 이 시집에 실린 〈이별―편지 3〉이라는 시를 읽으면, 첫머리에 “새벽 다섯시면 / 수유리 옹달샘 표주박 속에 / 드맑게 드맑게 넘치고 있는 사람 / 드맑게 넘치다가 / 아침 나그네 목 축여주고”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드맑게 드맑게 넘친다는 사람 이야기를 읽다가 문득 깨닫습니다. ‘드-맑게’로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드높은 사랑입니다. 드날리는 깃발입니다. 드센 기운입니다. 드솟는 꿈입니다. 드넓은 품입니다.


  앞가지 ‘드-’를 붙이는 낱말을 하나하나 떠올립니다. 여러 가지 낱말이 떠오르고, 여러 곳에 곧잘 썼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드-’를 붙여 크거나 대단하다는 느낌을 나타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구나 싶습니다. 초등학교에서든, 중·고등학교에서든, 교사가 학생한테 ‘드-’라는 앞가지를 잘 살려 생각을 북돋우라고 이끄는 일이란 없구나 싶어요.


  학교 문법 수업에서는 왜 이 대목을 가르치지 않았을까요. 학교에서 교사는 학생한테 왜 이러한 말짜임을 이야기하지 못할까요.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잘 살릴 뿐 아니라 한국글을 살찌우는 길을 가르치지 못하는 까닭을 생각해 봅니다.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살리지 못할 때에 어떤 외국말을 제대로 배울 만한가 궁금합니다. 한국사람이면서 한국글을 알맞고 기쁘게 쓸 줄 모른다면 어떠한 이야기꽃을 펼칠 만한가 궁금합니다.


  드넓은 바다라 한다면, 드깊은 바다이기도 합니다. 드높은 하늘이라면 드파란 하늘이기도 합니다. 드맑은 꽃잎은 드보드라운 꽃잎입니다. 드좋은 일이나 드나쁜 일이 있을 테지요. 드기쁘거나 드즐거운 꿈을 꾀할 수 있겠지요. 드밝은 불빛처럼 드너른 사랑빛이 됩니다.


  드하얀 빛깔이나 드까만 빛깔을 헤아립니다. 드푸르거나 드빨간 빛깔을 그립니다. 고운 빛깔을 어루만지듯, 고운 말결을 어루만집니다. 좋은 무늬를 쓰다듬듯, 좋은 말넋을 쓰다듬습니다.


  고등학교 다니던 어느 날 국어사전을 뒤적이다가 ‘도차지’라는 낱말을 보았습니다. ‘독차지’ 아닌 ‘도차지’라니, 처음에는 국어사전이 잘못되지 않았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어요. 어느 국어사전에는 ‘都차지’라고 적지만, ‘獨차지’와는 다르며, 어쩌면 한국사람 스스로 잊거나 잃은 낱말이 되겠다고 느꼈어요. 왜냐하면, 혼자 맡는다는 뜻으로 ‘도맡다’가 있거든요. 국어학자는 ‘도-차지’에서 ‘도’를 ‘都’로 적어야 한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도-맡다’처럼 ‘도-’가 앞가지 되어 여러 곳에 쓰였다 할 수 있어요. ‘도-’를 앞에 붙여 새롭게 여러 낱말을 빚는 얼거리를 살필 만합니다. 도-보다, 도-살피다, 도-주다, 도-듣다, 도-쓰다, 도-걷다, …… 여러모로 말가지를 칩니다.


  이런 낱말을 꼭 써야 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반드시 새 한국말을 빚어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생각할 수 있을 때에 즐겁습니다. 한국말로 생각하고 한국말로 꿈꾸며 한국말로 사랑할 때에 아름답습니다. 어여삐 드빛나는 말을 빚을 수 있어요. 홀가분하게 드날리는 말꽃을 널리 흩뿌릴 수 있어요.


  더 좋거나 더 낫다 싶은 말을 찾지 않아도 됩니다. 내 삶을 내 손으로 빛내는 말을 내 마음을 기울여 아끼면 됩니다.


  시집을 즐겁게 읽습니다. 나도 시를 즐겁게 씁니다. 싯말을 즐겁게 되뇝니다. 싯말을 노래하듯 즐겁게 엮습니다. (4345.4.26.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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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4-26 10:58   좋아요 0 | URL
'드-' 라는 앞가지가 참 깊고도 맑은 울림을 가지는군요.

드넓은, 드깊은, 드푸른, 드하얀...
'도-'라는 앞가지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 혼자 한다는 의미인가봐요.

마지막에 드빛나는, 이라는 말, 참 예쁘네요. 드빛나는 하루 되셔요, 저도 함께.

숲노래 2012-04-26 12:53   좋아요 0 | URL
모든 낱말이 국어사전에 실리지는 않아요.
몇 가지는 제 나름대로 붙여 보았어요.

꼭 국어사전에 실린 낱말만 써야 하지 않으니까요.
글을 쓰고 나서 보니, 미처 한 가지 얘기를 못 넣었더라구요.
에궁... @.@
 

‘배려’는 어떤 마음일까
[말사랑·글꽃·삶빛 5] 뜻을 살피지 않는 한국사람

 


  책을 읽습니다. 한국글로 적힌 책을 읽습니다. 한겨레가 빚은 글이기에 ‘한글’이고, 한글은 ‘한국사람이 쓰는 글’, 곧 ‘한국글’입니다. 한국글로 적힌 책은 한국말을 옮겼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글인 한글로 적었다 해서 모두 한국말이지는 않습니다. 이를테면, 온 나라에 있는 빵집 가운데 ‘빠리바게뜨’나 ‘뚜레쥬르’는 한국글로 적었어도 한국말이 아닙니다. ‘라이브쇼’는 한국말이 될까요. ‘녹음방초승화시’나 ‘남아수독오거서’는 한국말이라 할 만한가요. ‘만땅’이나 ‘오라이’나 ‘땡큐’나 ‘바이바이’는 모두 한국글로 적은 모습인데, 이들 한국글은 한국말로 삼아도 되나요.


  푸름이가 읽도록 엮은 책 하나를 읽다가 “배려하는 마음을 상대도 알 수 있도록 드러내 보이는 행동 방식이 바로 예의야” 하는 대목을 봅니다. 책은 줄거리를 헤아리자고 읽는 책이기에, 낱말 몇 군데나 말투 곳곳이 엉클어지거나 뒤틀렸어도 가볍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틀린 글로 엮은 책이라 해서 줄거리를 못 헤아리지 않아요. 한국말을 알맞거나 알차게 다스리지 못한 글로 빚은 책이기에 줄거리가 흐려지거나 감추어지지 않아요. 그래서 “배려하는 마음”을 들려주는 푸른책 한 권을 읽으면서, 글쓴이가 밝히고픈 뜻을 넉넉히 헤아립니다. 다만, 줄거리는 줄거리대로 읽되 한국말은 한국말로 살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국어사전에서 ‘배려’라는 낱말을 찾아봅니다. 뜻풀이는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씀”이라 합니다. 한국글로 ‘배려’로 적지만, 이 낱말 온 모습은은 ‘配慮’입니다.

 

 配慮 = 마음을 씀, 마음쓰기, 마음씀
 배려하는 마음 = 마음쓰기하는 마음, 마음쓰는 마음

 

  한국글로 적자니 ‘배려’이기에, 얼핏 이 낱말을 한국말이라 여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配慮’는 ‘配慮’이지 ‘배려’가 아니에요. 한자말 ‘配慮’는 한국글로 적어도 한국말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한국말 시늉을 할 수도 없습니다.


  한국말은 ‘마음쓰기’나 ‘마음씀’입니다.


  이 대목에서 찬찬히 마음을 쓰면서 살펴봅니다. 누군가한테 “마음을 쓰는” 일이란, 아무 생각 없이 마음을 쓰는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는 뜻으로 마음을 씁니다. 곧, 한국말 ‘마음쓰기’나 ‘마음씀’은 한자말 ‘配慮’를 쓰는 뜻하고 한동아리입니다. 다만, 국어사전에는 ‘마음쓰기’나 ‘마음씀’ 같은 낱말이 안 실려요.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살피도록 마련하는 국어사전에는 한국말을 안 싣고 한자말을 잔뜩 싣고 맙니다.


  푸른책을 읽다 만난 “배려하는 마음”을 생각해 봅니다. 이 대목은 이렇게 적어서는 옳게 뜻을 알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한국사람은 이 책 이 대목을 읽으며 글쓴이 뜻이 무언지 어렵잖이 헤아려요. 글쓴이가 무얼 말하려 하는지 읽습니다. 말투와 말법과 낱말은 엉성하지만, 뜻은 새깁니다.


  뜻을 알 수 있다 하면서 한국말을 자꾸자꾸 얄궂게 쓰거나 엉터리로 씁니다. 뜻만 알 수 있도록 하면서 한국말을 제대로 익히거나 올바로 다스리지 않습니다.


  푸른책에서 본 글월을 새롭게 적어 보겠습니다.

 

 내 마음을 알 수 있도록 드러내 보이는 몸가짐이 바로 예의야
 내가 어떻게 마음을 쓰는가 알 수 있도록 드러내 보이는 몸짓이 바로 예의야
 넉넉한 마음을 알 수 있도록 드러내 보이는 매무새가 바로 예의야

 

  ‘配慮’이든 ‘마음쓰기’이든 내가 너한테 합니다. 그래서 “내 마음”처럼 다듬습니다. 말투를 손질해서 “내가 어떻게 마음을 쓰는가”나 “내가 어찌 마음을 쓰는가”나 “내가 마음을 어떻게 쓰는가”처럼 적을 수 있습니다. 뜻을 또렷하게 나타내도록 “넉넉한 마음”이나 “따스한 마음”이나 “좋은 마음”처럼 적어 봅니다.


  나 스스로 어떤 마음일 때에 서로를 헤아리는 모습이 될까 하고 곱씹습니다. 나 스스로 어떤 마음이 서로를 아끼는 몸가짐이 될까 하고 되뇝니다.


  뜻을 찬찬히 살핍니다. 글흐름과 말흐름을 곰곰이 돌아봅니다. 나부터 제대로 마음을 쓸 때에 내 말이 살아납니다. 내가 내 말넋을 북돋울 때에 겨레말이든 나라말이든 한국말이든 아름다이 빛납니다. (4345.4.2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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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4-21 13:15   좋아요 0 | URL
저를 반성하게 만드시는군요... (일부러 그러셨다는 의미 아닌거 아시죠?)

된장님의 우리말에 대한 바로잡음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노력했어야 한다는 생각을 어제 오늘 했습니다. 다음에도 고쳐주셔요.
저는 철자조차도 종종 틀린답니다. 창피하죠....

오늘 봄비가 옵니다. 된장님, 봄이 왔어요. 꽃이 너무 화사해요.
음.... 남자분께 이런 말을 써도 될지 모르지만, 애정을 전합니다, 이웃으로써. ^^

숲노래 2012-04-21 18:36   좋아요 0 | URL
봄은 아주 즐거운 철이에요.
이 즐거운 철에는
즐거운 넋을
내 가슴으로 고이 담아
좋은 말마디로 꽃을 피우면
더 아름다우리라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