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다움’과 ‘소녀적’과 ‘소녀틱’
[말사랑·글꽃·삶빛 46] 어른답게 쓸 말을 생각한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동안 영어를 쓸 일은 딱히 없습니다. 집에서 살림을 꾸리며 아이들을 보살피는 동안 영어를 쓸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면내나 읍내로 마실을 나가 저잣거리에서 먹을거리를 장만하는 동안 영어를 쓸 일은 따로 없습니다. 오늘 하루 지낸 이야기를 내 일기장에 천천히 연필로 적으면서 영어를 쓸 일은 조금도 없습니다.


  시골을 떠나 도시로 볼일을 보러 갈라치면, 버스표나 기차표를 파는 곳부터 영어를 듣습니다. 요사이는 ‘표’라는 말보다 ‘티켓’이라는 말을 흔히 쓰는 듯합니다. 버스나 기차에서 먹으려고 빵집을 찾아보면, 빵집 이름은 으레 알파벳으로 적히고, 빵집에 놓인 빵 또한 알파벳 이름이나 영어 이름이 붙습니다. 새벽버스나 새벽기차를 타며 편의점을 찾아보아도, 편의점 간판은 몽땅 알파벳투성이입니다.


  도시에서 만나는 분들은 으레 말마디에 영어를 섞습니다. 도시에서 타는 버스나 전철에는 영어 이름이 붙습니다. 도시 한복판 길거리 가게들은 온통 영어 이름이요, 사람들이 입는 옷에 붙는 이름도 영어요, 사람들이 손에 쥔 전화기 또한 모조리 영어 이름입니다. 도시에 있는 대학교에서는 영어를 높이 삽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영어 학원을 다니거나 영어 교재를 장만해서 익히려 합니다.


  비행기나 배를 타고 다른 나라로 나들이를 간다면 영어쯤 할 수 있어야겠지요. 따로 미국이나 영국을 좋아하는 이라면, 영어로 된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볼 수 있겠지요. 다른 나라로 볼일 보러 자주 나가야 하는 회사원이라면 영어를 제법 잘 말할 수 있어야겠지요. 그러면, 이런 자리 저런 사람 빼고는, 누가 왜 영어를 써야 할까요. 아니, 영어는 어느 자리에 어떻게 써야 할까요. 빵집은 왜 영어를 써야 할까요. ‘패밀리 레스토랑’은 왜 영어를 써야 할까요. 돼지고기를 튀겨서 판다는 ‘돈까스’집은 일본말을 써야 멋스러울까요. 짜장면 파는 집은 중국말이나 한자를 써야 돋보일까요.


  일본사람 요시나가 후미 님 만화책 《사랑이 없어도 먹고살 수 있습니다》(서울문화사,2005)를 보다가, 141쪽에서 “연애가 하고 싶다든가 하는 건 소녀틱하고 귀엽지만” 하는 말마디에 눈길이 멎습니다. ‘소녀답고’도 아니요 ‘소녀적(-的)’조차 아닌 ‘소녀틱(-tic)’이라고 번역을 했군요. 아마, 일본책에는 ‘少女tic’처럼 적혔는지 몰라요. 그래서, 이 말투 그대로 한글로 적어 ‘소녀틱’처럼 옮겼을는지 몰라요.


  일본책은 일본사람이 보라고 만듭니다. 이 일본책을 한국말로 옮기려 한다면, 일본사람 아닌 한국사람이 보라고 만드는 셈입니다. 곧, 한국사람이 볼 책이라면 한국말로 적어야겠지요. 껍데기만 한글인 말이 아니라, 속알맹이 아름다운 한국말로 적어야 올바르겠지요.


  한국사람은 예부터 어떤 말로 서로 생각을 주고받았을까 하고 떠올려 봅니다. “소녀처럼 귀엽지만”, “소녀같이 귀엽지만”, “소녀답게 귀엽지만”, “소녀다이 귀엽지만”, “소녀인 양 귀엽지만”, “소녀인 듯 귀엽지만”, “소녀와 같아 귀엽지만”, …… 이런 말 저런 말 하나하나 떠오릅니다. 그러나, 일본책을 한국말로 옮긴 분은 이런 말 저런 말 가운데 어느 말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이 번역책 읽을 한국사람은 저절로 ‘소녀틱’이라는 낱말을 읽습니다.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있을 테고, 재미있다 여겨 즐겨쓰는 사람이 있을 테며, 뭐 이런 번역이 다 있담 하며 눈살 찌푸리는 사람이 있을 테지요.


  놀라운 모습을 보면서 ‘놀랍네!’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환상적(幻想的)이네!’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며, ‘판타스틱()!’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살아가는 터전에 따라 쓰는 말이 다를 테니, 어느 말을 쓰든 무어라 따질 수 없습니다. 다만, 시골사람은 ‘놀랍네!’ 하고 말합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는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환상적이네!’ 하고 말할 일도 없지만, ‘판타스틱!’ 같은 말을 할 까닭도 없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으로, 또 인터넷이나 손전화로, 수없이 많은 말이 떠돌고 흐르며 춤춥니다. 신문은 어느 곳에서 어떤 사람이 만들까요. 방송은 어느 곳에서 어떤 사람이 만들까요. 인터넷이나 손전화는 어느 곳에서 어떤 사람이 자주 쓰거나 많이 쓸까요. 오늘을 살아가는 어린이와 푸름이는 어떤 말을 어느 곳에서 들으면서, 앞으로 어떤 일을 하는 사람으로 자랄까요.


  아이들한테 신문이나 방송을 보여주기 몹시 꺼림칙합니다. 싱그러이 숨쉬는 말은 신문이나 방송에 좀처럼 안 나오는구나 싶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이나 손전화도 이와 비슷해요. 푸르게 빛나는 말이 인터넷이나 손전화에 떠도는 일은 매우 드물어요. 아이들한테 읽힐 그림책이나 동화책도, 작가나 편집자가 한국말을 더 슬기롭게 살피거나 아름답게 매만지지 못하기 일쑤예요. 집에서 아이들하고 그림책을 함께 읽다가 숨이 턱턱 막히곤 합니다. 아이들 눈높이와 어울리지 않는 낱말이 그림책에 너무 많이 나오기도 하지만, 아이들 넋과 사랑을 북돋우기에 모자란 말투마저 자주 나와요.


  어른들이 ‘세 나라 말’을 쓰는 한국 사회에서, 아이들도 ‘세 나라 말’을 쓰도록 길들여지는구나 싶습니다. 어른들이 ‘세 나라 말’ 아닌 사랑스러운 말을 쓰는 한국 사회라면, 아이들도 ‘세 나라 말’ 아닌 사랑스러운 말을 쓰겠지요.


  밤이 깊습니다. 어린 두 아이한테 자장노래 곱게 불러 줍니다. 한 아이씩 새근새근 잠듭니다. 아이들 아버지로서 가장 맑고 아름다운 낱말로 엮는 자장노래를 가장 보드랍고 따스한 목소리를 뽑아서 부르면, 아이들도 환한 얼굴로 노래를 들으며 잠들고, 아버지인 나도 노래를 부르며 얼굴이 환해서 즐겁습니다. 아이들한테 가장 맑고 맛난 밥을 먹이고 싶듯, 아이들이랑 가장 정갈하고 싱그러운 밥을 나누고 싶듯, 나부터 가장 맑고 사랑스러운 말을 쓰고 싶으며, 나 스스로 가장 정갈하고 고운 말을 쓰고 싶습니다. 영어를 쓴대서 안 깨끗하거나 안 사랑스러운 말이라고는 할 수 없는지 모르나, 나는 내 어버이가 나를 사랑하면서 물려준 말을 쓰고 싶어요. 내 어버이가 어릴 적 당신 어버이가 당신한테 물려준 말을 쓰고 싶어요. 먼먼 옛날부터 이 나라 어버이가 이 나라 아이를 사랑하고 아끼며 들려준 가장 사랑스럽고 해맑은 말을 살찌우고 싶어요. 우리 아이들이 사랑스럽고 해맑게 자랄 수 있도록 활짝 웃는 어른으로 살아가고 싶어요. 4345.12.30.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국어사전 뒤집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소설은 어떻게 쓰는가
[말사랑·글꽃·삶빛 44] 글로 빚는 꽃인 문학

 


  시와 수필과 소설과 희곡을 일컬어 ‘네 갈래 큰 문학줄기’라고 일컫습니다. 이들 문학은 모두 글로 써서 이룹니다. 시는 으레 입으로 읊기 마련이고, 희곡은 무대에 올려 배우들이 공연을 하지만, 입으로 읊거나 무대에 올리기 앞서 누군가 글로 적바림하면서 문학으로 먼저 태어납니다.


  글이 있기에 문학이 있습니다. 글은 말이 있기에 있어요. 말은 곧 글이 되고, 글은 곧 문학이 됩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이면, 말은 삶이 있기에 있어요. 그러니까, 삶과 말과 글과 문학은 언제나 한 흐름입니다.


  시골마을 작은학교 아이들을 가르친 삶을 톺아보면서 ‘글쓰기’ 이야기를 나눈 이오덕 님이 있습니다. 이오덕 님은 《우리 글 바로쓰기》(한길사,1989)라고 하는 책을 내놓으면서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너무 엉터리로 쓰는 모습을 밝혔습니다. 《우리 글 바로쓰기》 1권을 읽다 보면, ‘소설쓰기’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203, 213, 214, 221쪽에 걸쳐 띄엄띄엄 나옵니다. 먼저 이 글을 천천히 읽어 봅니다. 옳고 그름이 아닌, 삶과 말을 헤아려 봅니다.


  “소설이고 동화고 수필이고 할 것 없이 지금 우리 글은 순수한 우리 말인 ‘웃는다’와 이 ‘웃는다’를 꾸미는 온갖 아름다운 어찌씨들을 다 쫓아내고, 대신 ‘미소짓다’한 가지만 쓰려고 하고 있다 …… 우리 말로 쓰는 소설에 꼭 남의 나라 말같이 남녀를 구분해서 ‘그’‘그녀’로 해야 할까 …… 다른 어떤 글보다도 소설은 입말에 가까운 말이 되어야 한다. 더구나 소설에 자주 나오는 등장인물을 가리키는 삼인칭의 말은 실제로 쓰는 말이거나 적어도 자연스럽게 쓰일 수 있는 듣기 좋은 말, 아름다운 말이어야 한다 …… 사라져 가는 순수한 우리 말 대신에 어떤 말이 생겨나고 어떤 말이 남게 되는가? 도시 산업사회의 병든 소비문화는 판에 박힌 획일의 말과 삶에서 떠난 추상의 말에다가 천박한 기분을 나타내는 감각의 말만을 남겨 놓는다.”


  이오덕 님은 ‘순수한 우리 말’이라고 적습니다만, 한국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한국사람이 쓰는 말은 그예 한국말입니다. 따로 ‘순수하거나 안 순수하거나’ 하는 금을 그을 수 없습니다. 다만, 나날이 서양 문화와 문명을 더 넓게 많이 받아들이다 보니, 자꾸자꾸 영어나 한문이 섞여 들어와서 ‘순수한 우리 말’을 남달리 살피기도 할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그렇잖아요. 한국사람이라면 ‘하양·희다·하얗다’ 같은 한국말을 쓰면 넉넉해요. 굳이 ‘百色’이라 쓸 까닭이 없어요. 어떤 이는 ‘純百色’ 같은 외국말(한자말)까지 쓰는데, 한국말로는 ‘새햐얗다’예요. 여기에 영어로 ‘white’가 끼어들지요. 그러니까, ‘百色’과 ‘white’가 어지러이 춤추는 드센 물결 사이에서 ‘순수한 우리 말’인 ‘하양·희다·하얗다’를 따로, 남달리, 새롭게 생각하면서 살피고 아끼지 않으면, 우리 한국말은 차츰 힘을 잃거나 사라집니다.


  회사나 공공기관에서는 ‘이름짓기’를 으레 ‘네이밍(naming)’이라는 영어로 이야기해요. 아예 ‘브랜드 네이밍’이라 하기도 하고, 여느 사람들 사이에서는 ‘베이비 네이밍’ 같은 말까지 퍼져요. ‘아이 이름 짓기’나 ‘아기 이름 짓기’처럼 말하면, 어딘가 시골스럽다며 깎아내리는 사람마저 있어요. 나라는 한국이고 사람은 한국사람이지만, 말은 한국말이 아니라 할까요. 나라도 사람도 말도 모두 ‘한국다움’을 벗어던져야 무언가 볼 만하거나 자랑할 만하다고 여긴달까요.


  이 흐름은 문학으로도 고스란히 이어집니다. 시에도, 수필에도, 희곡에도, 또 소설에도, 자꾸자꾸 외국말로 이야기를 빚으려는 젊은이가 늘어나요. 일본제국주의가 이 겨레를 짓밟을 적에는 뜻있는 문학꾼들이 힘을 내어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맑은 한겨레 말마디’로 문학을 했는데, 이제 일본제국주의도 중국사대주의도 없는 민주주의나라에서, 되레 중국 한자말과 일본 말투와 서양 말씨를 뒤섞는 얼치기 문학이 끝없이 쏟아져요.


  그런데, 어느 모로 보면 이 흐름이 오늘날 한국에서는 참 어쩔 수 없는 노릇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일본제국주의나 중국사대주의가 판치던 때에는, 문학하던 이들이 으레 시골에서 살았어요. 서울에서 살더라도 흙을 밟고 나무를 만지며 풀을 먹으면서 살았어요. 오늘날에는 한국사람 거의 모두 도시에서 살아요. 92%가 넘는 사람이 도시에 주민등록을 두었다고 하니까, 훨씬 많은 사람이 도시에서 산다는 뜻이에요. 이제 문학꾼들 가운데 흙을 만지는 이는 매우 적어요. 나무를 만지거나 바라보는 문학꾼은 아주 드물어요. 풀을 먹으면서 스스로 씨앗을 심는 문학꾼은 참말 몇 없어요. 모든 문학은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퍼져요. 문학을 하는 이들도 도시에서 살고, 문학을 읽는 이들도 도시에서 살아요. 시골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시도 소설도 수필도 읽지 않아요. 아니, 책을 아예 안 읽는다고 할 만해요. 시골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텔레비전 연속극만 쳐다봐요. 그나마, 도시에 있는 사람들이 책도 읽고 문학도 읽어요. 이제 한국문학은 시골하고는 동떨어졌다고 해야지 싶어요. 시골에서는 문학이 태어나지 못하고, 시골에서 태어나는 문학이 있더라도 비평을 못 받는 한편 독자도 못 얻어요.


  곧, 모든 문학이 도시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이제부터 한국말은 차츰 사라지면서 빛을 잃을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도시는 경제성장과 투자무역과 건설건축으로 움직이거든요. 도시에서는 말을 이루는 바탕인 삶이 없어요. 경제성장과 투자무역과 건설건축만 있어요. 도시에서는 새말이 태어나지 않아요. 도시에서는 ‘이웃나라에서 새 물질과 문명과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새 외국말을 받아들이는 흐름’이 있을 뿐이에요.


  때때로, 도시에서도 새말이 태어나곤 해요. ‘즐겨찾기’라든지 ‘누리집’ 같은 낱말은 도시에서 만들지요. 그러나, 사람들 누구나 쓴다는 손전화 기계 하나만 바라봐도, 도시가 어떤 얼거리요 어떤 말짜임인가를 알 만해요. 이래저래 글다듬기를 해서 ‘손전화’라 할 뿐, 도시사람이 쓰는 말마디는 끝모를 영어물결입니다. 기계이름부터 이 구석 저 구석 모두 영어바람입니다. 한국말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한국말은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계다움(글로벌)’이라는 이름을 앞세워 영어 아닌 지구별 여러 나라 다 다른 삶과 문화와 이야기는 숨을 죽여야 합니다. 한국말도, 필리핀말도, 스리랑카말도, 볼리비아말도, 노르웨이말도, 핀란드말도, 체코말도, 잠비아말도, 모두모두 숨을 죽여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아이를 둔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영어동화를 읽힙니다. 아이들이 중학교에 들어설라치면 영어소설을 읽힙니다. 노벨상을 타려면 영어로 소설쓰기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마저 나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사람을 이웃으로 사귀며 문학을 누리는 즐거움보다는, ‘세계다움’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쓰면서, 스스로 삶을 빛내는 길하고는 동떨어지는 모습입니다.


  이오덕 님은 ‘순수한 우리 말’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순수한 우리 말’이란 따로 없습니다만, 이 ‘순수한 우리 말’이란 무엇인고 하면, 한국에서 나고 자라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꾸밈없이 드러내는 말입니다. 비가 올 때에 ‘비’라 말하고, 눈이 올 때에 ‘눈’이라 말합니다. 흙을 일구며 ‘흙’이라 말하고, 풀을 뜯으며 ‘풀’이라 말해요. 풀내음 향긋하다고 느끼며 ‘풀빛’을 ‘푸르다’고 여깁니다. 멧골에서 지저귀는 새들이니 ‘멧새’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노랫소리’로 받아들입니다. 졸졸 흘러 냇물입니다. 밭이랑 밭고랑 김매기를 합니다. 아침과 저녁으로 밥을 차립니다. 설거지를 합니다. 빨래를 합니다. 이부자리를 여밉니다. 자장노래를 부릅니다. 달빛을 바라보고 미리내를 즐깁니다. 별이 가뭇가뭇 스러지는 새벽에 천천히 동이 트며 노을빛 발갛고, 햇살은 온누리를 따숩게 감쌉니다.


  소설이란, 이와 같이 너른 삶자락을 담는 말그릇입니다. 지구별 저마다 다른 겨레가 서로서로 다 다르게 꾸리는 아름다운 삶자락을 겨레마다 다 다른 말마디로 알뜰살뜰 건사하며 갈무리하는 글이 바로 소설입니다.


  소설말은, 겨레마다 가장 아름다운 말이 싱그러이 넘치기 마련입니다. 겨레마다 가장 아름다운 말로, 저마다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옛이야기이든 ‘오늘이야기’이든, 소설말은 그때그때 가장 아름답다고 여기는 이야기를 살포시 고장마다 가장 아름답게 이어온 말마디로 담아서 뒷사람한테 곱디곱게 물려주는 말그릇 노릇을 해요. 말선물이랄 수 있고 말잔치랄 수 있으며 말꾸러미랄 수 있어요.


  한국은 한국 소설입니다. 경상도는 경상도 소설입니다. 전라도 전주는 전라도 전주 소설입니다.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은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소설이요,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에서도 신호리 동백마을이라면,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에서도 신호리 동백마을 소설이에요.


  삶터마다 다른 이야기가 삶터마다 다른 말빛으로 환하게 살아나도록 북돋우는 소설입니다. 소설이 글로 빚는 꽃인 문학인 까닭은, 삶을 아리땁게 바라보고 느껴 아리따운 글꽃으로 이루어서 나누기 때문입니다.


  소설은 삶으로 씁니다. 소설이 아름답자면 삶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삶이 아름답자면 말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말이 아름답자면, 넋과 꿈과 사랑이 아름다워야 할 테고, 우리가 보살피며 누리는 보금자리가 아름다워야겠지요. 마을도, 숲도, 흙도, 햇살도, 바람도, 냇물도, 나무도, 풀도, 모두모두 아름다울 때에 비로소 소설말이 아름다울 수 있다고 느껴요. 4345.12.2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국어사전 뒤집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삶말
[말사랑·글꽃·삶빛 43] 시와 노래로 태어난 말

 


  나는 몇 해 앞서부터 갑작스레 시를 많이 읽습니다. 몇 해 앞서 불현듯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시를 읽는대서 시를 쓸 수 있지는 않을는지 모르나, 내 마음속 깊이 ‘시 쓰고 싶은 꿈’이 생겨서 시를 읽습니다.


  나는 사진을 처음 배울 적에도 사진을 많이 읽었습니다. 사진찍기를 하자니 사진읽기를 해야 한다고 느꼈어요. 사진기는 가장 값싼 녀석으로 장만하고는, 사진책을 사려고 푼푼이 돈을 모아 퍽 비싼 책까지 꾸준히 사서 읽습니다. 사진책은 책방에 선 채 읽어도 그만이라 여기는 사람이 있을 텐데, 사진책은 한 번 훑고 그치는 책이 아니에요. 백 번 천 번 만 번 되읽으며 내 눈길을 가다듬거나 다독이도록 돕는 책이에요.


  아름답다 싶은 노래는, 또 즐겁다 싶은 노래는, 백 번 천 번 만 번 되듣습니다. ‘되듣다’라는 낱말이 있을까 모르겠습니다만, ‘되읽다’라는 낱말이 있으니, 이처럼 써도 좋으리라 생각해요. 아무튼, 내 마음으로 스며드는 아름답다 싶은 노래를 수없이 되듣듯, 내 눈으로 젖어드는 아름답다 싶은 사진을 수없이 되읽습니다. 그러니까, 시를 쓰고 싶은 꿈을 떠올리면서, 내 입술을 곱게 달싹이도록 북돋우는 어여쁜 싯말을 찾아서 내 마음밭을 살찌우는 셈이에요.


  날마다 새로운 시를 읽으며 곰곰이 생각을 가다듬습니다. 어떤 시는 그야말로 ‘문학’입니다. 어떤 시는 참말로 ‘말’입니다. 문학을 하려고 시를 쓰는 분이 있고, 말을 나누려고 시를 쓰는 분이 있어요. 저마다 스스로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 문학을 하든 말을 나누든 대수롭지 않아요. 나는 내 길을 슬기롭게 찾으면 즐겁습니다.


  나는 내 나름대로 내 시를 씁니다. 이를테면, 〈나무그늘〉이라는 이름을 척 붙이고는 “옆에 자전거 세우고 / 다리를 쉰다. // 바람이 흔들며 빚는 / 보드라운 잎사귀 노래 / 듣는다. // 조그마한 흙땅에 / 조그마한 씨가 내려 / 나무로 자라고 / 그늘을 드리운다.”처럼 한달음에 내 시를 씁니다. ‘내 시’를 써요. ‘내 삶’을 씁니다. ‘내 사랑’을 쓰고, ‘내 이야기’를 쓰며, ‘내 꿈’을 써요. 내가 쓰는 내 사랑·꿈·삶 이야기는 내가 여느 자리에서 으레 쓰는 말마디로 이루어집니다. 나는 내가 잘 모르는 낱말을 안 씁니다. 나는 나 혼자만 아는 어떤 대단한 낱말을 안 씁니다. 나는 나랑 오붓하게 살아가는 살붙이하고 곱게 나누는 낱말을 ‘내 시’에 고스란히 담습니다.


  문득문득 ‘내 말’을 돌이켜보곤 합니다. 내 말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는가 하고 되새기곤 합니다. 누가 이런 낱말을 지었을는지, 어떤 사람이 어떤 삶을 누리면서 어떤 사랑을 담아 이 낱말을 펼쳐서 이웃이랑 스스럼없이 나누었을는지 생각해 봅니다.


  말은 태어났습니다. ‘말’이라는 낱말도 태어났습니다. 숲·나무·짐승·꽃·물·흙·풀·돌·섬·뭍·바다·들·메·길·달·해·별·무지개·미리내·도랑·고랑 같은 낱말을 누가 어떻게 지었을까 궁금하지만, 누가 어떻게 지었는지 하는 뿌리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고 합니다. 어떤 책에도 적히지 않거든요. 쌀·벼·보리·냉이·수수·팥·콩·쑥·달래·감·배·살구·복숭아·오얏·머루·무 같은 낱말을 누가 어디에서 지었을까 궁금하지만, 이 또한 뿌리캐기를 할 수 없다고 해요. 어떤 학자나 지식인도 알아내지 못하고 책에 적지 못하거든요. 이름·꿈·머리·손·다리·몸·손가락·눈·귀·코·입·목 같은 낱말은 누가 어떤 마음으로 지었을까요. 살다·놀다·하다·짓다·쓰다·보다·누다·걷다·섞다·열다·먹다·자다·크다·놓다·주다·내다·뚫다·맞다 같은 낱말은 누가 어떤 사랑을 실어 지었을까요.


  생각을 기울이고, 다시 생각을 기울입니다. 만 해쯤 앞서 이런 낱말이 태어났을까요. 백만 해쯤 앞서는, 천만 해나 일억 해쯤 앞서는 어떤 낱말로 서로 생각과 뜻과 이야기를 주고받았을까요.


  한겨레뿐 아니라 어느 나라 어느 겨레에도 ‘일노래’라 하는 ‘구전민요’나 ‘노동요’가 있다고 해요. 그런데, 일노래는 일할 때에만 부르는 노래는 아니에요. 일할 때에도 부르지만 여느 때에도 으레 부르는 노래예요. 악보 없고 글로 남지 않지만, 아주아주 기나긴 나날에 걸쳐 사람과 사람은 입과 머리와 가슴과 마음에 아로새기면서 이 일노래를 물려주고 물려받았어요. 아이들 노래, 이른바 놀이노래도 이와 같아요. 누가 책으로 따로 적바림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아주 마땅히 물려주고 물려받았어요.


  시를 읽다가 퍼뜩 깨닫습니다. 그래요. 맞아요. ‘바람’이라는 낱말을 처음 빚어서 쓴 사람은 그예 시인입니다. ‘눈물’이라는 낱말을 처음 빚어서 쓴 사람도 그예 시인입니다. ‘숟가락’이라는 낱말을 처음 빚어서 쓴 사람도 그예 시인이에요. 우리가 여느 자리에서 으레 쓰는 가장 수수한 낱말을 처음 빚은 사람은 모두 시인이에요. 어둡다·밝다·좋다·싫다·곱다·밉다·맑다·흐리다·똑똑하다·멍청하다·부르다·고프다·가리다·어울리다 같은 낱말을 처음 빚은 사람 또한 모두 시인이에요. 곧, 우리가 쓰는 ‘가장 흔한 낱말’은 싯말입니다. 싯말이란 노랫말입니다. 일하며 부르든 놀이하며 부르든, 살아가며 부른 노래예요.


  간추려 말하자면 ‘일노래 = 놀이노래 = 삶노래’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삶노래 = 사랑노래 = 꿈노래’입니다. 거듭 말하자면 ‘일 = 놀이 = 삶’이요, ‘노래 = 사랑 = 꿈’입니다. 또한 ‘삶 = 사랑 = 꿈’이고, ‘꿈 = 놀이 = 삶’이기도 합니다.


  시를 쓴다 할 때에는, 노래를 부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시를 쓰는 사람은 삶을 짓는 사람이요, 일과 놀이를 짓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랑을 짓고 꿈을 짓는 마음이기에 시를 쓸 수 있어요. 이러는 동안 시나브로 ‘말을 짓’습니다.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면서 아주 보드랍게 ‘새말 한 자락 태어나’요.


  오늘날 같은 물질문명 사회에서는 새 물건이 끝없이 자꾸 나오기에 ‘새 물건’ 가리킬 새 이름이 있어야 한다고 해요. 그런데 잘 살펴보셔요. 새로 나오는 물건에 붙이는 새 이름은, ‘새 물건’이 머잖아 ‘헌 물건’이 되면 감쪽같이 사라져요. ‘죽는 말’이 돼요. 이와 달리, 우리 삶을 나타내는 아주 오래된 낱말, 이를테면 ‘밥’이나 ‘사람’이나 ‘집’ 같은 낱말은 달라지지 않아요. 천 해나 만 해 앞선 때 사람들이 먹던 밥하고 오늘 우리가 먹는 밥은 다르잖아요. 그렇지만, 예나 이제나 밥은 밥이에요. 예나 이제나 비는 비요 눈은 눈이에요. 하늘은 하늘이고 달은 달이에요. 자동차 배기가스와 공장 매연 때문에 하늘이 뿌옇다 하더라도 하늘은 그저 하늘이고, 구름 또한 그저 구름이에요.


  아하, 하고 또 하나 깨우칩니다. 내가 스스로 시를 쓰고 싶다 생각했을 때에는, 바로 나 스스로 삶을 짓고 싶다 느꼈다는 뜻입니다. 나 스스로 사랑을 짓고 꿈을 지으면서, 나부터 스스로 오래오래 누리고픈 이야기를 우리 아이들이랑 나누고 싶다는 소리예요. 새 삶을 지으며 새 노래를 짓겠지요. 새 노래를 지으면서 새 말마디를 짓겠지요. 새 말마디를 짓되, 억지스레 짓거나 우스꽝스레 지을 수 없어요. 늘 쓰는 낱말을 짓고, 언제나 주고받을 낱말을 짓습니다.


  밤에 깨어 잠 못 이루는 아이를 무릎에 누여 토닥토닥 재웁니다. 곧바로 나는 ‘무릎잠’이라는 낱말을 새로 짓습니다. 아이들이 저희 어버이한테 쓰는 고운 마음결을 느끼면서, 이야 이 아이들 마음속에 참 고운 빛줄기 있구나 생각합니다. 곧바로 나는 ‘마음빛’이라는 낱말을 새로 짓습니다. 옆지기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찬찬히 듣다가, 서로 믿고 아끼는 넋이기에 이처럼 이야기를 나누는구나 싶어, 나는 또 곧바로 ‘이야기꿈’이라든지 ‘이야기사랑’이나 ‘이야기씨’ 같은 낱말을 새로 짓기도 하고, ‘사랑씨(사랑씨앗)’나 ‘꿈씨’ 같은 낱말을 새로 짓습니다.


  시를 쓰기에 말을 씁니다. 노래를 부르기에 말을 부릅니다. 아이들과 나누는 새로운 말마디가 국어사전에 실리건 안 실리건 대수롭지 않습니다. 옆지기와 주고받는 새로운 말자락을 국어학자가 알아주건 안 알아주건 대단하지 않습니다. 나로서는 오늘 하루를 즐기는 말이요 꿈이고 빛입니다. 나로서는 언제나 하루를 밝히는 넋이요 삶이며 숨입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사람들은 스스로 시를 안 씁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문학을 읽을 뿐, 시를 스스로 쓰지 못해요. 오늘날 사람들은 문학을 읽거나 쓰거나 평론할 뿐, 스스로 시를 사랑하지 못해요. 오늘날 사람들은 학교를 다닙니다. 대학교도 많이 다닙니다. 졸업장이나 자격증을 많이 땁니다. 그러나, 문학과 졸업장만 넘치고, 정작 말은 싱그러이 살아나지 못합니다. 문학은 있되 말이 없고, 졸업장은 있되 삶이 없어요. 4345.12.22.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국어사전 뒤집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번역은 어떻게 하는가
[말사랑·글꽃·삶빛 41] 삶과 함께 배우는 말

 


  나는 일본사람이 쓴 책을 퍽 많이 읽습니다. 그러나 일본말로 된 책으로는 안 읽어요. 한국말로 옮긴 책을 읽습니다. 얼마 앞서, 일본사람 이와아키 히토시 님이 그리고 한국사람 오경화 님이 옮긴 《히스토리에》(서울문화사,2009)라는 만화책 5권을 읽는데, 150쪽에 “나뭇가지 하나만 쓸게요. 이파리랑, 나무피.”라는 대목이 보입니다. 이 대목에 눈길이 오래 머뭅니다. ‘나무피’라는 낱말 때문입니다.


  국어사전에서 ‘나무피’라는 낱말을 찾아보면 안 나옵니다. 이 낱말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나무피’라니, 나무에서 피가 나기라도 할까요.


  국어사전에 실리는 낱말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나무껍질’이고, 하나는 ‘목피(木皮)’입니다. 하나는 한겨레가 먼먼 옛날부터 누구나 쓰던 낱말이요, 다른 하나는 이 땅에서 권력을 누리던 이들이 ‘한겨레 말’을 ‘중국 글자’를 빌어 나타내던 낱말이에요.


  우리 집 어린 아이들하고 읽으려고 장만한 그림책 《열 배가 훨씬 더 좋아》(낮은산,2004)는 서양사람 레너드 베스킨 님이 그리고 한국사람 박희원 님이 옮겼습니다. 이 책 12쪽을 읽다가 “산돼지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 멧돼지 엄미가 가장 튼튼하지.”처럼 나오는 대목을 보고는 그만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산돼지’하고 ‘멧돼지’는 서로 다른 돼지가 아니거든요. 한겨레는 예부터 ‘멧돼지’라 일컬었고, 이를 한자 ‘山’을 빌어 ‘산(山)돼지’처럼 적기도 해요. 그러니까, 한겨레는 ‘멧돼지·멧토끼·멧새·멧골·멧나물’이요, 한자를 빌어 ‘산돼지·산토끼·산새·산골·산나물’인 셈입니다.


  창작을 해도 한국말로 합니다. 번역을 해도 한국말로 합니다. 한국사람이 쓴 글을 읽든, 외국사람이 쓴 글을 읽든, 우리들은 한글로 적바림한 한국말을 읽습니다. 곧, 창작을 하는 사람이나 번역을 하는 사람은 한국말을 슬기롭고 똑똑하게 알아야 합니다. 한국말을 슬기롭게 모른다면 한국말을 엉터리로 쓸 테고, 한국말을 똑똑하게 모른다면 한국말을 어리숙하게 쓰겠지요.


  그런데, 말만 익힌대서 말을 잘 하지 못합니다. ‘나뭇가지’라면 ‘나무껍질’이요 ‘나뭇잎’이고 ‘나무열매’처럼 낱말을 엮을 줄 알아야 합니다. 말은 말대로 익히면서, 삶은 삶대로 익히고, 문화와 역사와 사회는 문화와 역사와 사회대로 익힐 수 있어야 해요.


  번역 일을 하는 분들이 외국말만 알뜰히 익히면서 한국말은 어설피 익힌다면, ‘한국사람이 읽을 한국글’을 제대로 적바림하지 못합니다. 외국말을 알뜰히 익히면서 언제나 한국말 또한 알뜰히 익혀야 해요. 그러니까,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는 학생도 ‘영어 공부는 영어 공부대로 알뜰히’ 하면서 ‘한국말 공부는 한국말 공부대로 알뜰히’ 해야 올발라요. 한국말을 알뜰히 익히지 않으면, 정작 ‘영어를 한국말로 제대로 들려주지 못’하거든요. 곧, “외국말 : 한국말 : 외국 문화 : 한국 문화”를 “3 : 3 : 2 : 2”로 익힐 수 있어야 아름답습니다. 외국말을 익히는 데에 들이는 품만큼 한국말을 슬기롭게 익힐 수 있어야 하고, 외국말에 깃든 외국 문화를 살피는 데에 들이는 품처럼 한국 문화를 살피는 데에도 품을 곱게 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번역은 ‘글자 바꾸기’가 아닙니다. 번역은 이웃 문화를 우리 문화로 알려주는 일입니다. 번역은 이웃 삶과 사랑과 이야기를 우리 삶과 사랑과 이야기로 녹여서 나누는 일입니다. 그런데, 초·중·고등학교에서 아이들한테 영어를 가르치는 만큼 한국말을 옳거나 바르거나 알맞게 가르치지 못하는 우리 모습이에요. 대학교에 들어간 아이들은 영어를 더 잘 배우려고 애쓰지만, 막상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한국말을 더 깊고 넓게 배우려고 애쓰지 않아요. 회사원이 된 뒤에도 영어학원을 다니는 분들이 있는데, 회사원이 된 뒤에도 한국말을 슬기롭고 똑똑하게 배우려고 마음을 기울이는 분은 찾아보기 아주 힘들어요.


  사회가 뒤집어졌다고 해야 할까요. 교육이 어긋났다고 해야 할까요. 우리 생각이 제자리를 못 잡거나 뿌리를 잃었다고 해야 할까요. 영어를 잘해서 한국문학을 나라밖에 알려야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지 않습니다. 영어만 잘한다 하지만 ‘문학을 모르’고 ‘문화를 모르’면, 한국문학을 영어로 옮기지 못해요. 외국문학을 한국말로 옮기는 이들은 ‘영어만 잘하’기에 번역을 할 수 있지 않아요. 외국나라 문화와 삶과 이야기를 환히 꿰뚫으면서 한국 문화와 삶과 이야기 또한 맑게 보듬을 만한 눈높이일 때에 비로소 번역을 할 수 있어요.


  문학을 하는 분들은 누구보다 한국말을 아름답고 해맑게 쓸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무언가 가르치는 교사와 교수 자리에 서는 분들도 누구보다 한국말을 어여쁘고 바르게 쓸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지식인도 전문가도 모두 한국말을 슬기롭게 쓸 줄 알아야 합니다. 공무원과 회사원도 이와 같아요. 대통령이 될 사람도, 국회의원으로 나설 사람도,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가누는 매무새를 길러야 합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여느 어버이도 한국말을 사랑스러우며 믿음직하게 쓸 줄 아는 어른이어야겠지요. 그래야,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가장 사랑스러우면서 믿음직한 말을 배워요.


  번역이든 통역이든 말입니다. 창작이든 문학이든 보고서이든 서류이든 모두 말이에요. 말로 이루어지는 일이요 삶이며 이야기입니다. 말이 어떻게 태어나고 말을 이루는 바탕이 어떠한가를 깨달을 때에 바야흐로 마음속에서 빛줄기가 샘솟아요.


  국어학자만 배우는 한국말이 아닌 줄 느낄 수 있기를 빌어요. 국어교사만 잘해야 하는 한국말이 아닌 줄 깨닫기를 빌어요. 어떤 전문가나 우리 말글 운동꾼 몇몇 사람만 새롭게 배우거나 가꿀 한국말이 아니라고 헤아릴 수 있기를 빌어요. 4345.12.20.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국어사전 뒤집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말매무새’와 ‘언어현실’
[말사랑·글꽃·삶빛 40] 바르게 쓸 한국말이 없다

 


  국어사전을 틈틈이 새로 장만합니다. 내가 ‘한국말 사랑스레 살려서 쓰는 길’을 찾으며 살아가니까 국어사전을 새로 장만한달 수 있지만, 내가 꼭 이 일을 안 했더라도 국어사전을 틈틈이 새로 장만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사람을 이웃으로 두며 한국말을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거든요.


  학자이기에 국어사전을 들추지 않습니다. 교사나 작가이기에 국어사전을 읽지 않습니다. 한국말을 쓰는 여느 한국사람이기에 국어사전을 살핍니다.


  내가 우리 아이들을 아끼거나 사랑하는 까닭은 ‘내가 남달리 훌륭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에요. 우리 아이들을 낳은 어버이로 살아가니 우리 아이들을 아끼거나 사랑합니다. 이웃 어버이도 나와 같아요. 이웃 어버이가 ‘남달리 훌륭한 사람’이라서 이녁이 이녁 아이들을 아끼거나 사랑하지 않아요. 그저 수수한 여느 어버이입니다만, 바로 이처럼 그저 수수한 여느 어버이인 터라 아이들을 아끼거나 사랑합니다.


  옆지기 남동생은 이제 곧 고등학교 2학년이 됩니다. 손전화로 얘기하는 모습을 어느 날 지켜보는데 “아버지 오고 계셔요” 하고 말하기에, 곰곰이 생각하다가 한 마디 들려줍니다. “‘아버지 오고 계셔요’ 하는 말은 잘못 하는 말이에요. ‘아버지 오셔요’ 하고 말해야 알맞아요. ‘오고 계셔요’가 아니라 ‘오셔요’이거든요. 높임말은 ‘오다’에 붙여야 하는데, 요즈음 사람들 가운데 이런 말투를 옳게 짚는 분이 드물어 ‘오고 계셔요’나 ‘오시고 있어요’라 말해도 다 알아듣지만, 이런 말투에 길들면 뜻은 짚을 수 있어도 말이 엉터리가 될 수 있어요.”


  고등학교 아이들뿐 아니라 중학교 아이들도, 또 초등학교 아이들도 영어를 배웁니다. 영어를 배우는 아이들은 문법이건 말투이건 낱말이건 ‘하나도 안 틀리도록’ 배워요. ‘잘못 쓰는 영어 말투’를 가르치는 일도 없고 배우는 일도 없습니다. 학교에서나 학원에서나 ‘사람들이 잘못 쓴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 알아들으니 안 고쳐도 된다’ 하고 말하지 않아요. 생각해 보셔요. 교사나 강사가 ‘익숙한 버릇대로 어떠한 말투를 잘못된 모습 그대로 안 고치며 쓴다’고 한다면 어찌 될까요. 아마, 학원에서라면 쫓겨날 테고, 학교에서라면 아이들한테서 비웃음을 사겠지요. 이와 달리, 한국말을 잘못 쓰거나 엉뚱하게 쓰는 교사나 강사라면? 안타깝다 해야 할는지 어쩔 수 없다 해야 할는지 아리송합니다만, 국어교사라 하더라도 ‘옳고 바르며 알맞게 쓰는 한국말’을 제대로 모르다 보니, 국어교사조차 ‘가르치다’와 ‘가리키다’마저 잘못 말하기 일쑤예요.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잘 다스리느냐 하는 대목을 넘어, 말투와 낱말을 슬기롭게 다스릴 줄 아는 분이 너무 적어요. 대학입시 시험공부는 잘 시킬는지 모르지만, 한국사람으로서 한국사람답게 한국말 슬기롭게 쓰는 길을 밝히는 국어교사가 몹시 적습니다. 그래서, 옆지기 남동생이 고등학교 2학년이 되도록 잘못 쓰는 말투를 둘레에서 어느 누구도 건드려 주지 못하거나 바로잡아 주지 않습니다.


  ‘오고 있다’라는 말투는 현재진행형이요, 한국말에는 현재진행형이 없으며, ‘오는 中이다’라든지 ‘오고 있는 中이다’ 같은 말투가 한국 말투에 얄궂게 스며든 일본 말투인 줄 깨닫는 사람은 매우 드물어요. 이러한 말투는 신문과 방송과 잡지와 인터넷과 교과서와 숱한 책과 문제집과 참고서에까지 속속들이 파고듭니다. 교사도 학생도, 어른도 아이도, 이러한 말투에서 홀가분하지 못합니다.


  1920∼30년대에 윤동주 님이 쓴 시를 요사이 다시 읽다가 새삼스레 느낍니다. 시인 윤동주 님이 1920∼30년대에 쓴 글에 ‘오고 있다’처럼 ‘한국 말투에 없는 현재진행형’ 글투는 거의 안 나타납니다. 시골 어르신들 말투에서도 이런 모습을 비슷하게 느껴요. 이른바 ‘구비문학’이라 일컫는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면, 이분들 말씨에 ‘오고 있다’라든지 ‘하고 있다’라든지 ‘보고 있다’ 같은 말투는 거의 안 나타나요. 아예 없다고까지 할 수 있어요. 아니, 나타날 수 없겠지요.


  국립국어원에서 내놓은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면 ‘-이기’라는 씨끝을 놓고 ‘-기’라는 올림말로만 싣는데, 막상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기’ 올림말 자리에서 보기글을 살피면, 모두 ‘-이기’ 꼴로 다뤄요. 이를테면, “혼자이기는 해도”, “화가이기도 하다”처럼요. 국립국어원에서는 언제나 ‘-이기’ 꼴로만 씁니다. 그렇지만 막상 씨끝 ‘-이기’는 올림말로 다루지 않아요.


  우리 둘레를 살펴보면, 사람들은 “화가기도 하다”나 “혼자기는 해도”처럼 쓰곤 합니다. “나이기는 하지만” 아닌 “나기는 하지만”처럼 쓰는 사람이 제법 많아요. 국립국어원에서는 ‘-이기’를 ‘-기’로 쓰는 일도 받아들일 만하다고 밝히는데, 표준어규정이나 맞춤법해설 같은 자리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적바림하지 않아요. 이 같은 대목을 이야기하는 국어학자나 지식인이나 전문가도 따로 없어요.


  한국말을 다루는 전문가조차 스스로 한국말을 올바로 들려주지 못하고 제대로 알려주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여느 자리 여느 한국사람은 여느 한국말을 아무렇게나 쓸밖에 없어요. 더 생각해 보면, 학자나 전문가가 한국말을 슬기롭게 다루지 못하더라도, 우리들 여느 사람이 슬기롭게 쓰면 돼요. 신문이나 방송에 엉뚱한 말씨가 실려도, 우리들 여느 사람이 아름답게 쓰면 돼요. 교과서나 책에 얄궂다 싶은 말투가 나타나도, 우리들 여느 사람이 올바르게 쓰면 돼요.


  누군가 “땡큐!” 하고 말한대서 나까지 이 말을 따라서 할 까닭이 없습니다. 나는 “고맙구나!” 하고 말하면 됩니다. 누군가 “익사이팅!” 하고 말한대서 나마저 이 말을 따라서 할 일이 없어요. 나는 “즐거워!”나 “짜릿해!”나 “좋아!”나 “신난다!”나 “두근두근!”처럼 느낌과 뜻을 살리는 말을 쓰면 돼요.


  생각을 바르게 가다듬으며 삶을 바르게 가다듬습니다. 삶을 바르게 가다듬으면서 말을 바르게 가다듬습니다. 눈길과 손길과 마음길을 따사롭고 환하게 가다듬습니다. ‘언어현실’이 이렇다 하더라도 나는 내 ‘말매무새’를 스스로 가장 사랑스러우며 넉넉하게 가다듬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영어를 자랑하듯 쓴다 하더라도 나는 내 말씨를 스스로 가장 고우며 맑게 가다듬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린대서 나까지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릴 수 없어요. 다른 사람들이 나뭇가지를 함부로 꺾는대서 나까지 나뭇가지를 함부로 꺾을 수 없어요. 나는 숲이 푸르게 빛나도록 보살피고 싶습니다. 나는 풀과 꽃과 나무를 살포시 쓰다듬으며 아끼고 싶습니다. 내 삶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말매무새를 가다듬습니다. 내 삶결을 북돋우면서 내 말결을 북돋웁니다. 내 삶자락을 돌보면서 내 말자락을 돌봅니다. 오늘날 이곳저곳 둘러보노라면 바르게 쓸 한국말이 없구나 싶지만, 내 마음속에서 조그맣게라도 바르며 착한 한국말이 샘솟을 수 있도록 힘을 쓰려 합니다. 4345.12.14.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