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숲’
[말사랑·글꽃·삶빛 24] 마음을 빛내는 말

 


  언제부터인가 ‘자연보호(自然保護)’라는 말이 쓰였습니다. 자연을 돌보자, 자연을 지키자, 자연을 아끼자, 자연을 사랑하자, 이런 여러 가지로 쓰면 한결 좋았을 테지만, ‘자연보호’ 네 글자로 곳곳에 푯말을 세우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한자로 된 네 글자 말마디를 쓰는 버릇은 퍽 옛날부터 ‘고사성어’라는 이름으로 흘러들었습니다. 그러니, 아주 스스럼없이 ‘자연보호’를 외쳤겠구나 싶기도 합니다.


  ‘자연(自然)’이란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라 합니다. 그러나, 이 한자말 ‘자연’을 한국사람이 언제부터 썼는지 아리송합니다. 조선 무렵에도 이 한자말을 썼을까요. 고려나 백제나 신라나 고구려나 가야 무렵에도 이 한자말을 썼을까요. 예전 지식인이 한자로 삶과 생각을 나타내던 때에는 어떠한 한자말로 ‘자연이 가리키는 무엇’을 나타냈을까요.


  옛시조나 옛소설에는 ‘강산(江山)’이라는 한자말을 으레 쓰지 않았나 싶습니다. “강과 산이라는 뜻으로, 자연의 경치를 이르는 말”이라 하는데, 조선이나 고려 적 사람들이 ‘강산’이라는 한자말을 쓸 적에는 “자연의 경치”만 가리키지는 않았으리라 느낍니다. “자연의 경치”라기보다 “자연”을 가리켰겠지요.


  예전 지식인이 아닌 조선 무렵 흙일꾼이나 고려 무렵 흙일꾼, 또 고구려 무렵 흙일꾼이라든지 가야 무렵 흙일꾼, 여기에 옛조선 무렵 흙일꾼은 ‘자연’이든 ‘강산’이든 어떠한 낱말로 가리켰을까요. 옛사람이 바라보던 ‘자연’이나 ‘강산’이란 무엇이었을까요.


  한자를 받아들이지 않던 무렵에는 어떠한 낱말로 우리 둘레 터전을 가리켰을까 하고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말이 처음으로 생겨 사람들 삶터를 하나하나 일컬을 무렵에는 어떠한 낱말로 ‘오늘날 자연이나 강산이라는 낱말로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을까 헤아려 봅니다.


  머리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생각합니다. 2000년대를 살아가는 내 몸뚱이가 아닌 천 해나 이천 해나 삼천 해나 오천 해 앞서 살던 내 넋으로 생각합니다. 오만 해나 십만 해 앞서 살던 내 얼로 헤아립니다.


  그래, 그무렵에는 내 삶터이고 내 둘레 터전이고 온통 ‘숲’이었구나 하고 떠오릅니다. 국어사전 말풀이로 ‘숲’은 ‘수풀’을 줄인 낱말이요, “나무들이 무성하게 우거지거나 꽉 들어찬 것”을 뜻한답니다. 그런데, 나무가 우거진 곳이란 나무만 있는 곳이 아니에요. 풀이 함께 있습니다. 벌레가 함께 있습니다. 새가 함께 있고, 온갖 짐승이 함께 있습니다. 풀과 나무가 있는 데에는 돌도 있고, 냇물이 흐릅니다. 돌과 바위와 모래와 흙이 얼크러져 골짜기를 이룹니다. 멧자락을 이루고 멧골이 이루어집니다. 먼먼 옛날, 한자도 한글도 없던 옛날, 스스로 사랑을 빛내어 삶을 일구던 사람들은 ‘숲’에서 살았어요. 숲이 곧 지구요, 숲이 곧 온누리요, 숲이 곧 우주였어요.

  그렇다면 바다는? 하늘은? 바람은? 해는?


  과학자가 밝히기도 하지만, 바다는 바다 홀로 있지 않습니다. 뭍보다 너른 바다입니다만, 바다는 숲이 있어 바다 구실을 합니다. 숲에서 모래와 흙과 돌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바다로 흘러들어 바다가 싱그럽게 숨쉽니다. 낱낱이 따로 떼내어 가리키자면 ‘나무’이고 ‘돌’이고 ‘메’이고 ‘냇물’이고 ‘바다’라 할 테지만, 가만히 헤아리면 이 모두를 아우르는 ‘숲’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터는 숲으로 이루어졌으며, 숲이 있기에 사람 누구나 숨을 쉽니다.


  이 숲을 감싸는 하늘이 있고, 이 숲을 간질이는 바람이 있습니다. 이 숲을 살찌우는 해가 있어요. 하늘과 바람과 해를 찬찬히 헤아리고 보면, ‘숲’이라는 낱말로 가리킬 테두리가 참 작구나 여길 수 있지만, ‘자연’이라는 낱말이라고 해서 더 넓게 가리키지는 못해요. ‘자연’이라는 낱말로 ‘하늘’이나 ‘바람’이나 ‘해’를 아우를 수 없습니다. 달이나 우주를 ‘자연’이라는 낱말로 담을 수 없어요. ‘자연’이라는 한자말은 “사람 힘이 닿지 않고 이루어진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정작 ‘자연’이라는 낱말은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 테두리에서 가리킵니다. 곧, ‘숲’이에요.


  이렇게 살피고 나서 새삼스레 ‘자연보호’라는 외침말을 들여다봅니다. 정치권력을 손에 쥔 이들이 외친 ‘자연보호’는 ‘숲을 지키자’였습니다. 숲을 살리고 숲을 가꾸며 숲을 돌보자고 외쳤습니다. 한 마디로 간추리면, 정치권력을 손에 쥔 이들 스스로 ‘숲사랑’을 외친 셈입니다.


  한자가 한국땅에 깃들어 ‘글 권력’을 이루던 때에 ‘사자성어’나 ‘고사성어’도 태어납니다. 이러한 권력 언저리에서 가지를 치는 ‘자연보호’ 같은 낱말입니다. 글로도 정치로도 돈으로도 학문으로도 권력을 이루지 않으며 살아가는 여느 마을 여느 살림꾼 눈높이에서 다시금 짚어 봅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밟고 올라서지 않는 데에서는 ‘사랑’이 태어납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사랑합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는 나를 사랑합니다. 삶이란 서로 사랑하며 빛납니다. 이리하여, 어버이는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는 어버이를 사랑합니다. 사내는 가시내를 사랑하고 가시내는 사내를 사랑합니다. 나무는 풀을 사랑하고 풀은 나무를 사랑합니다. 저절로 샘솟는 말마디 ‘숲사랑’입니다. 스스로 거듭나는 말마디 ‘숲사랑’이에요.


  나무는 사람이 심는대서 널리 퍼지거나 자라나지 않습니다. 나무는 나무 스스로 씨앗을 맺습니다. 나무는 나무 스스로 꽃을 피우고 잎을 틔웁니다. 나무는 홀가분하게 살아갑니다. 나무는 씩씩하게 자라납니다. 나무는 사람 힘이 닿지 않아도 천천히 우거지며 숲을 이룹니다. 사람은 나무가 이룬 숲에 예쁘게 깃들며 서로 어깨동무합니다. 사랑입니다. 나무는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은 나무를 사랑합니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꿈입니다. 스스럼없이 빛나는 삶입니다. 홀가분하게 피어나는 사랑입니다. (4345.8.1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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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ㅂㄱㅎ’와 ‘PGH’
[말사랑·글꽃·삶빛 25] 한국사람이 쓰는 이름

 


  나는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던 1992년부터 내 이름을 ‘ㅊㅈㄱ’처럼 적었습니다. 동무들 이름은 ‘ㄱㅎㅅ’이나 ‘ㅈㄱㅎ’나 ‘ㄱㅅㅌ’처럼 적곤 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던 때까지는 알파벳으로 ‘CJG’처럼 적기도 했지만, 나와 동무들 이름을 한글 닿소리를 따서 적을 때에 한결 즐거우면서 보기에 좋다고 느꼈어요. 때때로 학과목 이름 ‘국어’를 ‘ㄱㅇ’로 적고, ‘영어’를 ‘ㅇㅇ’로 적기도 합니다. ‘생물’은 ‘ㅅㅁ’로 적고, ‘물리’는 ‘ㅁㄹ’로 적어 봅니다. 사람들이 안 써 버릇해서 그렇지, 이렇게 한두 차례 적고 보면 누구라도 쉽게 알아볼 수 있어요. 그래서, 대학입시를 앞두고 다른 이들은 ‘SKY’라 말하지만, 나와 내 가까운 동무들은 ‘ㅅㄱㅇ’이라 말했어요. 적기로는 한글 닿소리를 따서 ‘ㅅㄱㅇ’이라 적고, 말할 때에는 ‘서고연’이라 말했어요.


  따로 한글사랑이 깊거나 넓었기에 ‘ㅊㅈㄱ’를 쓰지 않았습니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말을 주고받는 한국사람이기에 아주 홀가분하게 한글 닿소리로 내 이름을 적을 뿐이었어요.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는 ‘이니셜’을 쓴다면, 한글을 쓰는 나라에서는 ‘앞글’을 쓴다고 할까요.


  201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여러 사람이 대통령이 되겠다며 나섭니다. 나는 이 후보도 저 후보도 마음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누가 대통령이 된다 해서 나라가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가 대통령이 된다 하든 나 스스로 내 보금자리에서 내 삶을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일구면서 누릴 때에 내 마을과 내 나라 또한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거듭나리라 느낍니다. 내가 할 일이라면 아이들과 맑은 눈빛으로 맑은 생각을 나누는 일이라고 느껴요. 마음을 맑게 다스리고, 삶을 맑게 빛내며, 사랑을 맑게 꽃피우면, 이 기운이 차츰 퍼지면서 온누리를 따사로이 보듬을 수 있으리라 느껴요.


  그나저나, 올 대통령선고를 둘러싸고 어느 정당 후보 한 사람 이야기가 곧잘 도마에 오르는 듯합니다. 이이는 ‘ㅂㄱㅎ’라는 한글 닿소리로 이녁 이름을 적바림하면서 스스로를 널리 알리려 합니다. 이제까지 여러 대통령 후보, 또는 정치꾼은 으레 알파벳 앞글을 딴 ‘YS’이니 ‘DJ’이니 ‘JP’이니 ‘MB’이니 하면서 적바림하곤 했는데, ‘GH’ 아닌 ‘ㄱㅎ’라는 한글 이름을 써요.


  ‘ㅂㄱㅎ’를 쓰는 이분이 한글과 한국말을 널리 사랑하거나 깊이 아끼기에 이처럼 한글 닿소리를 딴 이름을 쓰는지, 대통령선거에서 사람들한테 당신 이름을 두루 알리고 싶은 생각 때문에 한글 닿소리를 딴 이름을 새삼스레 내세우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한글 닿소리를 딴 이름 적기는 새롭지 않습니다.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이름을 적으니까요.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한글에 담아서 나타내는 겨레이니까, 대통령 후보이든 아니든, 소설쟁이가 되든 대학교수가 되든, 또 여느 흙일꾼이나 어버이가 되든, 누구나 한글 닿소리로 이름을 적을 만해요. 곰곰이 따지고 보면, 웬만한 사람들은 이름을 적을 때에 으레 알파벳으로 적어 버릇할 뿐이에요.


  ‘ㅂㄱㅎ’를 쓰는 이분이 ‘ㅂㄱㅎ’처럼 적바림하기에 한결 널리 당신 이름을 알릴 수 있으리라고는 느끼지 않아요. 이분 스스로 이러한 이름을 쓰면서 당신 이름을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 깊으면, 차츰 이 이름을 알릴 수 있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정치꾼 한 사람 말씀씀이를 돌아보건대 한글사랑이 더 깊지 않은 셈이요, 정치꾼 한 사람 몸짓을 살피건대 홍보하는 효과가 더 크지 않은 셈이요.


  그러나, 나는 생각합니다. ‘ㅂㄱㅎ’처럼 이름을 쓰는 이분 모습을 바라보면서, 신문기자이든 방송기자이든, 다른 정치꾼을 가리키는 자리에 이제부터는 ‘YS’ 아닌 ‘ㄱㅇㅅ’이나 ‘ㅇㅅ’처럼 적바림할 만해요. 굳이 ‘DJ’를 써야 할 까닭 없이 ‘ㄱㄷㅈ’이나 ‘ㄷㅈ’처럼 적바림해도 좋아요. 왜 ‘MB’라고만 적어야 할까요. ‘ㅇㅁㅂ’이나 ‘ㅁㅂ’처럼 적바림하면 돼요. 우리들은 ‘ㅇㅊㅅ’나 ‘ㅁㅈㅇ’처럼 사람이름을 적바림하면서 이분들을 떠올리면 즐겁습니다. ‘ㅂㄱㅎ’라고 이녁 이름을 적바림한 분 때문이 아니라, 한국사람이라면 으레 이런 한글 닿소리 쓰기를 하면서 이녁 이름을 예쁘게 사랑하는 길이 있는 줄 예쁘게 느낄 수 있으면 흐뭇해요.


  나는 내 이름을 적바림하는 자리에 ‘ㅊㅈㄱ’라고도 적지만, 내 글이름인 ‘함께살기’를 간추려 ‘ㅎㄲㅅㄱ’처럼 적기도 합니다. 2012년에 서른여덟 살인데요, 나는 그동안 스무 해째 이렇게 내 이름을 적습니다. 우리 집 큰아이 이름 ‘사름벼리’는 ‘ㅅㄹㅂㄹ’로 적고, 작은아이 이름 ‘산들보라’는 ‘ㅅㄷㅂㄹ’로 적습니다. 이름을 즐겁게 생각하며 한글 닿소리로 즐겁게 적습니다. 이름을 곱게 읊으며 앞글을 하나씩 곱게 따서 적습니다. 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가장 맑은 기운을 느끼면서 밝은 손맛을 살려 내 이름을 씩씩하게 적습니다. (4345.8.6.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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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로 적는 길
[말사랑·글꽃·삶빛 22] 외국말을 옮길 때에는

 


  사람들은 누구나 스스로 살아가는 대로 말을 합니다. 스스로 살지 않는 모습으로 말을 하지 못합니다. 몸소 겪고, 몸소 들으며, 몸소 생각한 그대로 말을 합니다. 누구라도 스스로 살아가는 대로 말을 하는 만큼, 더 잘난 말이란 없고 덜 좋은 말 또한 없습니다. 언제나 내 삶자리에 맞추어 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말은 이러한 말대로 이러한 삶을 보여주고, 저러한 말은 저러한 말대로 저러한 삶을 보여줍니다.


  삶을 보여주거나 드러내는 말이기에, 말 한 마디를 듣거나 말 두 마디를 들으면서 ‘나한테 말을 거는 사람’이 살아온 발자국을 더듬습니다. 이녁 스스로 사랑하면서 일구는 삶을 헤아립니다. 누군가는 ‘가르치다’와 ‘가리키다’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나는 마음을 읽으면 되지 ‘맞춤법’이나 ‘표준말’이나 ‘바로쓰기’나 ‘글다듬기’를 읽을 까닭이 없습니다. 누군가는 ‘뜨거운 감자’라느니 ‘졸라’라느니 ‘레알’이라느니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괜찮아요. 이러한 말마디를 섞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 넋인가 하고 읽으면 될 뿐, 이 말은 이렇게 다듬고 저 말은 저렇게 고치라 할 까닭이 없어요. 다듬을 말이란 스스로 깨달을 때에 다듬을 수 있고, 고칠 말 또한 스스로 느낄 때에 고칠 수 있어요.


  배고픈 사람이 밥을 먹습니다. 배고프지 않은 사람은 밥을 먹지 않습니다. 배가 고프다고 느낄 때에 비로소 밥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밥을 찾습니다. 마음으로 느끼는 말이 될 때에, 스스로 가장 사랑스러우면서 가장 빛나고 가장 즐겁게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못 느낄 때에는 그저 못 느끼는 대로 이 말이든 저 말이든 끌어들여 쓰기 마련입니다.


  일본사람 구도 나오코 님이 쓰고 한국사람 고향옥 님이 옮긴 푸른문학 《친구는 초록 냄새》(청어람미디어,2008)를 읽다가 100쪽에서 “당나귀는 ‘천천히 걷기’를 시작했다. 해 보니, 꽤 어렵다. 금세 ‘종종걸음’으로 바뀐다. 이러다가는 순식간에 사자에게 도착할 것이다.”와 같은 글월을 봅니다. 한국말로 옮긴 문학인데, ‘시작(始作)’이나 ‘도착(到着)’ 같은 낱말을 한국말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소리값만 ‘한자를 한글로 옮기’고 끝냈습니다.


  한국말로 적는 길을 생각해 봅니다. 이 글월을 살피면 “천천히 걷기”라 나오는데, 이 대목에서 ‘걷기’를 일본사람은 일본말로 ‘い(行)く’라 적었을 수 있고, ‘보행(步行)’이나 ‘산보(散步)’라 적었을 수 있어요. 이 대목에서는 ‘걷기’라고 옮겼어요. 그러니까, 일본사람이 일본말로 ‘行’을 쓰든 ‘步行’을 쓰든 ‘散步’를 쓰든, 한국사람은 한국말로 ‘걷다’라 적으면 넉넉하다는 뜻입니다. 글흐름에 맞추어 ‘가다’라 적을 수 있고 ‘마실하다’나 ‘나들이하다’라 적을 수 있어요. 보기글을 다시 들여다보면 “천천히 걷기를 시작했다. 해 보니, 꽤 어렵다.”라 나오는데, ‘시작했다’ 다음에 ‘해 보니’라고만 적습니다. 그러니까, 이 대목은 “천천히 걷기를 했다. 해 보니, 꽤 어렵다.”처럼 적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시작’이라는 한자말은 군말인 셈입니다. 한국사람은 ‘시작’이라는 낱말을 무척 널리 쓰기는 하지만, 곰곰이 살피면, 한국사람한테 ‘시작’ 같은 낱말은 그리 쓸모없다고 할 수 있어요. 아니, 한국말이 아니라고 여길 수 있어요.


  왜 그럴까요. 왜 ‘始作’과 같은 한자말은 ‘한자말’일 뿐이면서 ‘한국말’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요.


  어린이도 푸름이도 스스로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서른 살 어른도 예순 살 어른도 스스로 헤아려 보면 좋겠어요.


  “시작과 종료(終了)”라 한다면 한국말로는 “처음과 끝”입니다. “자, 시작하자!”라 한다면 한국말로는 “자, 해 보자!”나 “자, 하자!”입니다. “시작이 안 좋았어.”라 한다면 한국말로는 “처음이 안 좋았어.”나 “마수(마수걸이)가 안 좋았어.”입니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라 한다면 한국말로는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예요. “휴가철이 시작되면서”라 한다면 한국말로는 “휴가철이 되면서”이고요. 국어사전에는 “짐을 싣기 시작하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같은 글월을 싣는데, “짐을 싣자 빗방울이 떨어진다”처럼 바로잡아야 알맞다고 느껴요. 왜냐하면, 한국사람이 보는 한국어사전은 한국말을 슬기롭게 가다듬어야 알맞거든요. 그래서, “처음에는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으나” 같은 글월은 엉터리입니다. 한자말 ‘시작’은 ‘처음’을 가리키니까, 이 글월 첫머리에 ‘처음에는’처럼 적었으면 “처음에는 기자로 사회생활을 하였으나”라 적어야 앞뒤가 올바르게 이어져요.


  아마, 누군가 이런 글월은 이렇게 풀어내고 저런 글월은 저렇게 풀어내 보셔요, 하고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아하 그렇네, 하고 깨달을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누군가 이야기를 들려준다 해서 알아차리거나 알아듣는 한국말은 아니에요. 길은 스스로 찾아야 해요. 말결과 말무늬와 말투와 말씨는 스스로 가다듬거나 갈고닦아야 해요. 내 목숨을 잇거나 살찌우는 밥은 내 몸으로 받아들여요. 옆사람이 밥을 먹어 주었기에 내 배가 부르지 않아요. 내가 밥을 먹으며 내 배가 불러요. 내가 하는 말은 내가 스스로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하는 말이에요. 누가 옆에서 지식이나 정보를 알려주었기에 내가 받아들이지 못해요. 스스로 찾고 스스로 익혀 스스로 삶이 되어야 비로소 내 말이 돼요.


  푸른문학 《친구는 초록 냄새》를 읽다가 본 글월에는 “이러다가는 순식간에 사자에게 도착할 것이다” 같은 대목도 있습니다. 국어사전에서 ‘도착’ 말풀이를 찾으면 “목적한 곳에 다다름”이라 나와요. 곧, 한자말은 ‘到着’이요 한국말은 ‘다다르다’란 뜻이에요. 한국사람이 이웃이나 동무를 사귀며 주고받을 한국말은 ‘다다르다’란 소리예요.


  ‘다다르다’를 혀로 또르르 굴릴 수 있으면, 이 낱말 하나에서 비롯하여 ‘닿다’랑 ‘이르다’랑 ‘가다’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말 한 마디를 하면서 말 두세 마디가 이어져요. 말 한 마디를 생각하면서 말 서너 마디를 꿈꾸어요.


  그리고, 이 글월에 나오는 ‘순식간(瞬息間)에’와 ‘금세’는 같은 낱말이에요. 말고리를 살피면 ‘바로’와 ‘곧장’과 ‘곧바로’와 ‘곧’을 떠올릴 수 있고, 말가지를 넓혀서 ‘눈 깜짝할 새’라든지 ‘눈 깜빡할 새’를 되새길 수 있어요. 말느낌을 살리면 ‘끔뻑하다’라든지 ‘금벅하다’라든지 ‘굼벅하다’라든지 ‘꿈뻑하다’처럼 적어도 돼요. 왜냐하면, 한국말이기 때문입니다. 느낌과 결을 살리면서 흐름과 무늬를 빛내는 한국말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새롭게 생각해 봅니다. “이러다가는 눈 끔뻑할 새에 사자에게 닿겠네”하고 “이러다가는 곧장 사자한테 가겠네”를 일본말이나 영어로 옮긴다고 하면, 어떻게 적을 만할까요. (4345.7.26.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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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와 텍스트
[말사랑·글꽃·삶빛 21] 한국사람이 쓰는 ‘전문 낱말’

 


  신발 파는 가게는 ‘신집’입니다. 그러나 신발을 파는 어느 가게는 ‘신집’이라는 이름을 달지 않았습니다. ‘제화점(製靴店)’이라는 한자를 써서 이름을 달았습니다. 요즈음에는 ‘슈샵(shoe shop)’이나 ‘슈스토어(shoe store)’라는 영어를 써서 이름을 붙이는 곳이 꽤 많다 합니다.


  밥을 마련해 주기에 ‘밥집’입니다. 그러나 웬만한 여느 가게는 ‘식당(食堂)’이라는 한자말을 씁니다. 어느 가게는 ‘요리점(料理店)’이라는 한자말을 씁니다. 어느 가게는 ‘레스토랑(restaurant)’이나 ‘패밀리 레스토랑(family restaurant)’이라는 영어를 씁니다. 구실은 밥을 파는 가게이지만, 애써 한자말이나 영어를 빌어 무언가 전문스럽다 하는 대목을 가르곤 합니다.


  자동차는 ‘자동차’라 하지만, 날쌔고 갸름하게 만들었다는 자동차는 ‘스포츠카’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자동차를 한국 아닌 서양에서 만들었으니, 어딘가 다른 자동차라 할 때에, 서양에서는 서양말로 다른 이름을 붙였겠지요. 그런데,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 붙인 ‘스포츠카(sports car)’라는 이름은 하나도 전문스럽지 않습니다. 영어를 쓰는 영국이든 미국이든 ‘스포츠’나 ‘카’라는 낱말은 아주 흔하며 너른 쉬운 낱말입니다.


  옷집에서 옷을 따로 맞춘다 할 때에는 내 몸 크기를 요리조리 줄자로 잽니다. 이른바 허리·가슴·엉덩이 크기를 잽니다. 그런데, 옷을 짓든 무언가 남다르다 하는 일을 하든, 스스로 전문 직업에 몸담았다 하는 이들은 ‘허리·가슴·엉덩이’ 같은 낱말을 안 씁니다. ‘웨이스트·바스트·히프(waist·bust·hip)’라는 영어를 씁니다. ‘웨이스트·바스트·히프’는 전문 낱말이 아닌 그저 영어일 뿐이나, 이 영어 낱말을 쓰는 이들은 ‘웨이스트·바스트·히프’를 꼭 전문 낱말처럼 삼습니다. 한국말 ‘허리·가슴·엉덩이’는 전문 낱말로 여기지 않습니다.


  《손석춘-10대와 통하는 미디어》(철수와영희,2012)라는 책을 읽다가 131쪽에서 “광고는 이미지와 글을 이용해서 사람들에게 행복 또는 이익을 약속하고”와 같은 글월을 봅니다. 이 글월을 한동안 곰곰이 들여다봅니다. 글을 쓰신 분은 ‘이미지·글’이라는 낱말을 씁니다. 한 가지 낱말은 영어로 ‘이미지(image)’로 적고, 다른 한 가지 낱말은 한국말로 ‘글’이라 적습니다.


  어떤 분은 이 같은 대목에 ‘텍스트(text)’라는 영어를 쓰곤 합니다. ‘이미지·텍스트’처럼 적으면서, 두 낱말은 영어라기보다 전문 낱말이기 때문에, 딱히 번역할 만한 낱말이 없기도 하고, 따로 번역할 수도 없다고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저는 달리 생각합니다.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야 아주 스스럼없이 ‘이미지·텍스트’처럼 쓸 테지만, 러시아말을 쓰거나 독일말을 쓰거나 네덜란드말을 쓰는 나라에서는 어떤 낱말을 쓸까요. 이들 나라에서도 영어로 생각과 마음을 나타낼까요.


  저는 한국사람이기 때문에 한국말로 생각과 마음을 나타내고 싶습니다. 저는 ‘그림·글’이라는 한국말을 쓰고 싶습니다. 영국사람이나 미국사람이 ‘이미지·텍스트’라고 말을 하거나 글을 쓴다면, 저는 ‘그림·글’로 옮겨서 받아들입니다. 제가 쓰는 ‘그림·글’이라는 낱말은 영어로 옮기며 ‘이미지·텍스트’처럼 적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림’이라는 낱말이나 ‘글’이라는 낱말은 무척 쉽고 널리 쓰는 낱말이면서, 어느 한 가지를 깊고 넓게 담는 낱말이기도 해요.


  종이에 붓으로 무언가를 그릴 때에 그림이 됩니다. 머리로 어떤 모습을 떠올릴 때에 그림이 됩니다. 앞으로 하고프거나 이루고픈 어떤 일을 가만히 살피면서 그림이 나타납니다. 내 눈으로 바라보는 여러 가지 모습은 그림이라 할 만합니다. 더없이 보기 좋아 그림이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종이에 연필로 무언가를 적을 때에 글이 됩니다. 글이 모여 책이 됩니다. 책은 글이 모인 이야기꾸러미이기에, ‘책 = 글’처럼 여길 수 있습니다. 글은 글씨를 가리키기도 하고 글발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말을 담아서 글이기도 하지만, 온누리에서 살아가며 배우거나 깨달은 여러 생각이나 슬기를 일컬어 글이라고도 합니다.


  무척 쉽게 쓰는 ‘그림·글’이지만, 영어 ‘이미지·텍스트’로는 이 한국말 두 가지를 오롯이 담아내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인데, 영어 ‘이미지·텍스트’가 나타내거나 가리키려는 테두리를 한국말 ‘그림·글’로는 살뜰히 담아내지 못할 수 있어요.


  그러나, 한국사람과 외국사람이 서로 뜻과 마음을 주고받으려고 ‘번역’을 합니다. ‘그림’을 ‘이미지’로 옮기고, ‘텍스트’를 ‘글’로 옮깁니다. 서로서로 뜻을 나눕니다. 서로서로 가장 알맞고 바르게 쓸 낱말을 살펴 마음을 나눕니다. 어느 갈래에서만 쓴다는 전문 낱말이라 하더라도, 서로서로 뜻과 마음을 나누고 싶으니 번역을 합니다.


  저마다 살아가는 나날을 글로 빚습니다. 스스로 살아가는 하루를 말로 엮습니다. 저는 이 글에서 ‘번역(飜譯)’이라는 한자말하고 ‘옮기다’라는 한국말을 나란히 썼는데, 일찍이 생각있는 한겨레 옛사람은 ‘옮긴이’라는 새 낱말을 빚어 책에 밝혀 적습니다. ‘지은이·글쓴이·그린이·엮은이·펴낸이’ 같은 새 낱말이 태어났어요. 이 결과 흐름에 맞추어 ‘꾸민이·도운이·만든이·힘쓴이(애쓴이)·부른이·찍은이’ 같은 낱말을 새롭게 지을 수 있어요. ‘밝힌이·찾은이·이룬이·멋진이·좋은이’처럼 말나무 가지를 쑥쑥 뻗을 수 있습니다.


  전문 낱말은 하늘에서 똑 하고 떨어지지 않습니다. 전문 낱말은 사람들이 여느 자리에서 흔히 쓰는 낱말을 알맞게 엮거나 짜거나 이어서 빚습니다. 무언가를 찾으면서 ‘찾기’라 하고, 더 깊이 찾고 싶을 때에는 ‘깊이찾기’나 ‘꼼꼼찾기’나 ‘낱낱찾기’를 할 수 있어요. 더 찾겠다 할 때에는 ‘더찾기’를 할 수 있겠지요. ‘다시찾기’도 있을 테며, 오늘날 인터넷에서 흔히 쓰는 ‘즐겨찾기’도 있어요. 여럿이 힘을 모아서 찾는다면 ‘함께찾기’가 돼요. 비슷하게 ‘서로찾기’나 ‘나란히찾기’나 ‘여럿이찾기’처럼 쓸 수 있어요. 어느 때에는 ‘한꺼번에찾기’라든지 ‘모두찾기’를 해 볼 수 있습니다. ‘새로찾기’라든지 ‘모아찾기’를 할 수 있어요.


  스스로 생각할 때에 전문 낱말이 태어납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북돋울 때에 여느 자리 살림말, 곧 삶말이 환하게 빛납니다. (4345.7.1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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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구름 가득한 들길
[말사랑·글꽃·삶빛 20] 좋은 말이 샘솟는다

 


  여름으로 접어든 유월부터 빗줄기가 끊이지 않습니다. 한여름인 칠월에도 빗줄기는 온 들판을 적십니다. 아이들하고 들길을 걷습니다. 아이들을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들길을 달립니다. 빗줄기가 듣지 않을 때에 가깝고 먼 멧자락을 바라보면서 자전거를 달립니다. 흰빛과 잿빛을 띠는 구름은 멧등성이에 걸리기도 하고, 멧자락에 따라 길게 걸치기도 합니다. 아이들과 자전거를 달리다가 문득 멈춥니다. 아이들더러 저 멧자락을 바라보라고 얘기합니다. “구름이 멧등성이에 걸렸구나, 음, 그러면 ‘멧구름’이 될까? 그래, 멧구름이구나.” 하는 말이 절러 터져나옵니다.


  낮게 깔린 구름은 넓은 들판을 사뿐사뿐 걷듯 흐릅니다. 옳거니, 들판을 누비는 이 구름이라 하면 ‘들구름’이 되겠구나. 그렇다면, 아이들이랑 함께 들길을 자전거로 달리니까, 우리 자전거는 ‘들자전거’가 될까요? 들길을 들자전거로 달리며 들구름을 누린다면, 우리들은 ‘들사람’이 될까요? 들길을 들자전거로 달리며 들구름을 누리는 들사람이라 한다면, 나와 아이들은 ‘들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즐긴다 할 만할까요?


  구름은 흐르고 흘러 바다로 나아갑니다. 바다로 나아가는 구름은 ‘바다구름(또는 바닷구름)’이 됩니다. 바다에서 뭍으로 흐르는 구름이라면 ‘뭍구름’이라 이름을 붙일 만하겠지요. 비를 잔뜩 품어 ‘비구름’입니다. 눈을 살포시 품으면 ‘눈구름’이에요. 구름과 구름 사이에 무지개를 드리울 때에는 ‘무지개구름’일 테지요. 하늘을 온통 채운 구름일 때에는 ‘하늘구름’이라고 말해도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다시 자전거를 달립니다. 천천히 노래하며 자전거를 달립니다. 나는 들마음을 아끼며 들자전거를 달립니다. 나는 들사람 되어 우리 어여쁜 들어린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워 들길을 달립니다. 들구름을 올려다보다가는 들풀이랑 들꽃을 바라봅니다. 들판에 한두 그루 우뚝 솟은 나무일 때에는, 이 나무를 가리켜 ‘들나무’라고 해도 좋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들판에 지은 집일 때에는 ‘들집’이라 할 테고, 들판에서 하는 일은 ‘들일’이 되겠지요.


  아이들은 들판으로 ‘들놀이’를 갑니다. 아이와 어버이는 나란히 ‘들마실’이나 ‘들나들이’를 떠납니다. 너른 들판을 가슴에 포옥 안으며 ‘들사랑’을 헤아립니다. 들사랑을 헤아리며 ‘들꿈’을 꿉니다. 들사람은 들사랑을 꽃피우며 ‘들글’을 쓰거나 ‘들말’을 나눌 수 있을까요. 들판에서 꺾은 들꽃 한 송이 하얀 종이 한켠에 곱게 붙여 글월을 띄우면 ‘들글월(또는 들편지)’가 되겠지요. 들을 아끼며 살아가는 사람은 ‘들이야기’를 빚습니다. 바다에서는 ‘바다이야기’를, 멧자락에서는 ‘메이야기(또는 멧이야기)’를, 하늘에서는 ‘하늘이야기’를 빚습니다. 마을에서는 ‘마을이야기’요, 도시에서는 ‘도시이야기’이고, 시골에서는 ‘시골이야기’입니다. 옛날 옛적 이야기이기에 ‘옛이야기’이듯, 오늘 하루 누리는 이야기일 때에는 ‘오늘이야기’입니다.


  좋은 말은 내 가슴에서 샘솟습니다. 좋은 꿈은 내 마음에서 피어납니다. 좋은 글은 내 손으로 빚습니다. 좋은 넋은 내 몸에 아리땁게 깃듭니다. (4345.7.15.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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