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에도 이벤트
[말사랑·글꽃·삶빛 14] 한 해에 한 번 기리기 때문일까

 


  한국은 처음부터 서양 예수님이나 하느님을 믿는 나라가 아니었으나, 이제 아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나 하느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해마다 십이월 이십오일 즈음 되면 ‘예수님 나신 날’을 기린다고 하는 잔치로 시끌벅적할 뿐 아니라, 여느 살림집에서도 ‘오붓한 잔치’를 벌인다고 케익을 마련하곤 합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조차 이날을 맞이하면 마음이 들뜬다고 얘기하는데, 종교가 있는 사람이라면 마음이 두근두근하겠지요. 그러나, 오직 하루 이날만 기다리며 종교를 믿을 사람은 없습니다. 한 해 삼백예순닷새 언제나 그분을 마음으로 모시고 내 삶을 사랑으로 돌보며 지내리라 생각합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기리는 사람한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이 오셨다는 날 하루만 기리지 않습니다. 한 해 삼백예순닷새 내내 곰곰이 헤아립니다. 부처님이 왜 이 땅에 오셨고, 부처님이 사람들하고 어떤 넋과 얼을 나누면서 지구별을 따사롭게 돌보려 했는지를 돌아보려고 힘쓰리라 생각합니다.


  한 해에 한 차례, 시월 구일에 찾아오는 ‘한글날’도 늘 이와 같다고 여깁니다. 한 해에 한 차례 찾아오니까, 이날 하루만 한글을 기릴 만하다고 느끼지 않아요. 한글날이 달력에 굵직하게 적힌 ‘기림날’이라 한다면, 참말 한 해 삼백예순닷새 언제나 한글이란 무엇이고 한국말은 어떠한가를 살뜰히 살피고 알뜰히 돌보며 지내야 알맞고 아름다우리라 느껴요.


  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일한 삶을 적바림한 책 《서울 여자, 시골 선생님 되다》(살림터,2012)를 읽다가 75쪽에서 “한글날이다. 아이들은 오늘이 공휴일이 아닌 것을 너무나 아쉬워 한다. 한글날 이벤트를 한다고 한다. 한글에 대한 사랑과 소중함을 전하는 내용을 순 우리 말로 표현해 핸드폰 문자 보내기다.” 같은 글월을 봅니다. 고등학교 아이들이 한글날을 맞이해 한글날을 기리려고 ‘한글날 이벤트’를 스스로 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참 깜찍한 생각이로구나 하고 느끼다가 한글날에 이 아이들이 벌인다는 ‘이벤트(event)’란 무얼까 궁금합니다. 아이들로서는 ‘이벤트’는 영어가 아니라 할 만하겠지요. 둘레 어른 누구나 이 말을 쓰니까, 아이들로서는 이 낱말을 깊이 살피기 힘들겠지요. 텔레비전에서도, 마을 가게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온통 ‘이벤트’를 해요. 한글날을 맞이하는 어른들부터 이벤트만 하니까, 아이들 또한 이벤트를 따라할 뿐이에요.


  아마, ‘깜짝잔치’쯤 되겠지요. 한글날 하루만 맞이해서 깜짝스럽게 벌이는 잔치가 될 테니까요. 생각을 조금 기울인다면, ‘한글날 기쁨잔치’라든지 ‘한글날 기림잔치’라든지 ‘한글날 누림잔치’라든지 ‘한글날 멋잔치’라든지 ‘한글날 솜씨잔치’ 같은 이름을 지을 수 있습니다. 또는 ‘한글날 말잔치’라든지 ‘한글날 이야기마당’이라든지 ‘한글날 놀이마당’을 마련할 수 있어요.


  어찌 본다면, 한 해에 고작 하루만 기리고 그치는 한글날이기 때문에, 고등학교 아이들뿐 아니라 이 나라 어른들 모두 한글날을 옳고 바르며 예쁘고 아름다이 돌아보기는 힘들는지 모릅니다. 누군가는 한 해에 고작 하루조차 한글을 생각하지 않을 뿐더러, 아예 마음에 안 담으니까, 한글날을 맞이하건 말건 한국말과 한국글을 엉터리로 쓰거나 아무렇게나 쓰거나 바보스레 쓸는지 모릅니다.


  마음을 찬찬히 가다듬을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고등학생이 되어 대학입시를 바라보는 아이들은 한 해 삼백예순닷새 내내 대학입시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온통 대학입시 생각이 가득합니다. 어느 하루라고 대학입시 생각에서 홀가분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늘 쓰는 말글을 이런 얼거리로 생각하는 일은 슬픈 노릇이 되겠으나, 참말 한글날을 기리려 한다면 이 같은 매무새일 때에 비로소 참다이 기릴 만합니다. 하느님을 섬기거나 부처님을 모시듯, 아니 하느님 뜻을 내 삶에 펼치거나 부처님 넋을 내 삶으로 녹이듯, 한국말과 한국글을 알뜰살뜰 사랑하고 따사롭게 돌볼 때에 예뻐요.


  어버이는 아이들 밥을 차립니다. 한 해 삼백예순닷새 언제나 아이들 밥을 날마다 세 끼니씩 꼬박꼬박 챙깁니다. 어버이는 아이들 옷가지를 날마다 챙깁니다. 어버이는 아이들이 어느 하루이든 뜻있고 즐겁게 누릴 수 있도록 애씁니다.


  햇살은 언제나 따사롭게 내리쬡니다. 햇살은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따뜻하게 지구별을 감쌉니다. 구름이 끼건 비가 내리건 햇살은 늘 지구별을 어루만져요.


  바람은 늘 솔솔 붑니다. 물은 언제나 졸졸 흐릅니다. 흙은 풀씨를 북돋웁니다. 나무는 한결같이 그늘을 드리우고 열매를 나눕니다.


  어버이가 아이들과 살아갑니다. 자연은 뭇목숨을 어루만집니다. 사람들은 날마다 말과 글로 생각을 주고받습니다. 이 나라에 한국말이 있고 한국말을 담는 그릇인 한국글, 곧 ‘한글’이 있는 일은 더없이 고마운 사랑입니다. 오늘날 숱한 사람들은 바람 한 점과 물 한 방울이 얼마나 고마운지 못 느끼며 살아간다지만, 막상 바람 한 점과 물 한 방울이 아주 살짝이라도 사라지면 모두 숨을 거두고 말아요. 사람들이 서로 생각을 나누는 말이랑 글이 없을 때에는, 사람들 누구나 넋을 잊거나 잃겠지요.


  말은 넋을 보듬습니다. 글은 얼을 빛냅니다. 하나하나 따지면, 너무 바쁘게 몰아치며 제자리를 못 찾는 오늘날 사람들이 스스로 제 삶과 넋부터 알뜰히 사랑하지 못하는 판에 제 말을 알뜰히 사랑하기를 바라기란 힘들 수 있어요. 사람들 스스로 제 삶과 넋부터 알뜰히 사랑한다면 사람들 스스로 제 말과 글 또한 알뜰히 사랑할 수 있겠지요. 말과 글도, 그러니까 한국사람이 늘 쓰는 한국말과 한국글도 알뜰히 사랑한다면 기쁠 텐데, 이에 앞서 참다이 누릴 고운 삶과 착하게 다스릴 고운 넋부터 따사롭고 너그러이 추스를 수 있기를 빌어요. 좋은 삶에 좋은 넋이 깃들며 좋은 말이 빛나요. 고운 삶에 고운 넋이 감돌며 고운 글이 샘솟아요. (4345.6.1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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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하다’와 ‘틀림없다’
[말사랑·글꽃·삶빛 13] 겹말을 못 느끼는 가슴

 


  오늘날에는 초등학생도 인터넷을 켜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찾아봅니다. 초등학생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집안에 국어사전이 없더라도 찾기창에 낱말 하나 넣으면 아주 빨리 말풀이를 살필 수 있습니다. 애써 컴퓨터를 안 켜더라도 손전화를 누르면 말풀이를 찾을 수 있습니다. 지난날처럼 가방에 두툼한 국어사전을 들고 다닐 일이 없습니다. 집안에 두툼한 국어사전 안 갖추어도 될 만하다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척 궁금합니다. 이제 오늘날에는 따로 국어사전을 챙기지 않아도 낱말뜻과 쓰임새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는데, 참말 오늘날 사람들은 컴퓨터나 손전화로 ‘한국말 낱말뜻’을 찬찬히 살피거나 헤아릴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자주 ‘한국말 낱말뜻’을 알아보려고 애쓸까요.


  점글 읽는 아이 이야기가 나오는 일본문학 《덴코짱》(양철북,2011)을 읽다가 115쪽에서 “엄마가 곁에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게 분명하다. 틀림없다.”와 같은 글월을 봅니다. 나는 이 글월에서 몇 가지 아쉽다고 느낍니다. 먼저 ‘것’과 ‘게’를 잇달아 넣어 아쉽습니다. 다음으로 ‘느끼고 있는’처럼 적은 글투가 아쉽다고 느낍니다. 두 말투 모두 알맞거나 바르게 쓰는 한국 말투가 아닙니다. ‘곁에 있다는 것을’은 ‘곁에 있는 줄’로 손질해야 알맞아요. ‘느끼고 있는’는 ‘느끼는’으로 바로잡아야 올발라요. ‘현재진행형’ 꼴은 영어에 있지, 한국말에 없어요. 이 대목에 나오는 ‘느끼고 있는’ 같은 말투는, 영어에 있는 현재진행형을 일본사람이 ‘-하는 中’처럼 옮긴 말투를 다시 한국사람이 ‘-하는 중’으로 잘못 옮기다가, ‘-하는 가운데’나 ‘-하고 있는’처럼 잘못 옮긴 꼴이에요.


  이 다음으로 또 한 군데 아쉽다고 느껴요. 글월 끝에 나오는 “분명하다. 틀림없다.”가 아쉬워요.


  왜 아쉬울까요. 왜 나는 이 대목이 아쉽다고 느낄까요.


  한번 생각해 보셔요. 이 대목은 거리끼지 않고 쓸 만한 말투일까요. 이 같은 글월은 알맞거나 바르거나 좋다 할 만할까요. 누구나 이처럼 쓸 만한가요. 이렇게 쓰든 저렇게 쓰든 아랑곳할 까닭이 없을까요. 사람들마다 달리 쓰는 말투 가운데 하나이니까, 개성으로 여겨야 하나요.


  나는 국어사전을 찾아보기로 합니다. 먼저, 한자말 ‘분명(分明)’ 말뜻을 찾아봅니다. ‘분명’은 “틀림없이 확실하게”를 뜻한다 합니다. 이 말풀이에 나오는 다른 한자말 ‘확실(確實)’도 찾아봅니다. ‘확실’은 “틀림없이 그러함”을 뜻한다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국말 ‘틀림없다’를 찾아봅니다. 이 낱말은 “조금도 어긋나는 일이 없다”를 뜻한다 해요.


  국어사전을 찾아보았으니 찬찬히 갈무리해 봅니다. ‘분명 = 틀림없이 확실하게’라 했으니, ‘분명 = 틀림없이 틀림없이 그러하게’인 셈입니다. 곧, 한자말 ‘분명’과 ‘확실’은 한국말이 아닌 한자말이라는 소리예요. 한국사람이 굳이 안 써도 될 한자말이라는 얘기예요. 한국사람이 쓸 낱말은 오직 하나 ‘틀림없다’라는 뜻이에요. 일본문학 《덴코짱》에 “분명하다. 틀림없다.” 하고 나왔으면, 이 대목은 잘못되었다 할 수 있어요. 말놀이를 한다면 모르되, 말놀이라 하더라도 퍽 어설프거나 어리석은 말놀이인 꼴이에요. 마치, “고마워. 땡큐.”라 말하는 꼴이거든요. “잘 가. 바이바이.”라 말하는 꼴이요, “좋아. 굿.”이라 말하는 꼴이에요.


  뜻이 같은 여러 나라 말을 한 자리에 잇달아 쓰는 일은 ‘겹말’이에요. 한국말로는 ‘겹말’이고, 한자말로 나타내면 ‘중복표현(重複表現)’이에요. 사람들은 “역전 앞” 같은 말투만 겹말이라고 생각하기 일쑤이지만, “분명하다. 틀림없다.” 또한 겹말이에요. 알맞고 바르게 다듬어 본다면, “틀림없다. 그렇다.”라든지 “틀림없다. 바로 그렇다.”라든지 “틀림없다. 참말 틀림없다.”처럼 적을 수 있어요.


  스스로 생각하며 말하지 않으면 겹말인지 아닌지 느끼지 못하고 말아요. 스스로 생각하며 말할 때에는 겹말이 나타날 일이 없어요. 스스로 생각을 북돋우지 않는다면 아름답거나 알차거나 상큼하게 말하지 못해요. 스스로 생각을 북돋울 때에 비로소 사랑스럽거나 어여쁘거나 해맑게 말할 수 있어요.


  말빛은 내 삶빛이에요. 삶빛이란 나 스스로 일구는 넋빛이에요. 내 넋을 가꾸는 손길에 따라 내 삶은 한결 빛날 수 있고, 슬프게 헤매거나 어지러이 떠돌 수 있어요. 슬기롭게 가꾸는 넋빛이 삶빛으로 깊어지도록 이끌며 내 말빛을 빛내요. 어리석게 내팽개치는 넋이라면 삶도 말도 꿈도 사랑도 모두 어영부영 흩어지며 빛을 잃어요. (4345.6.1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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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익숙하게 쓰는 영어
[말사랑·글꽃·삶빛 12] ‘깔개’와 ‘방석’과 ‘쿠션’

 


  이제 초등학교 아이들은 아주 스스럼없이 영어를 학교에서나 학원에서나 배울 뿐 아니라, 집에서도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으로 배웁니다.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들기 앞서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도 영어를 배웁니다. 아이들은 한글 그림책과 나란히 영어 그림책을 읽기도 하지만, 한글 그림책에 앞서 영어 그림책을 읽기도 합니다.


  한글은 으레 쓰고 한국말은 누구나 하니까 아이들한테 따로 안 가르쳐도 될 만하다고 여기지 않나 싶도록, 한국 어른들은 한국 아이들한테 한글과 한국말을 옳고 바르며 예쁘고 상냥하며 즐겁고 슬기롭게 가르치는 일을 안 합니다. 그렇지만, 제대로 안 가르치면 제대로 배우지 못해요. 찬찬히 물려주지 않으면 찬찬히 물려받지 못해요. 사랑을 담아 알려주지 않으면 한국말을 사랑스레 쓰는 길을 깨닫지 못해요.


  시골집에서 살아가는 우리 집 아이는 날마다 바깥에서 뛰노느라 살결이 차츰 까맣게 탑니다. 그러니까, 우리 집 아이 살결은 햇볕에 ‘그을려’요. 햇볕에 타는 일은 ‘그을다-그을리다’요, 불에 태우는 일은 ‘그슬다-그슬리다’입니다. 우리 집 아이 말고, 이웃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놀러오는 아이들이라든지 면내나 읍내에서 마주하는 아이들을 만날 때면 문득문득 느끼는데, 이 아이들 가운데 한국말을 옳고 바르게 쓰는 아이는 매우 드뭅니다. 이를테면, ‘그을다’와 ‘그슬다’를 알맞게 가릴 줄 아는 아이가 없어요. 더 나아가, 이 낱말을 아예 모르기조차 합니다. 더 살피면, 아이들이 ‘그을다’과 ‘그슬다’를 모르기 앞서, 어른들부터 이 낱말을 모릅니다.


  어젯밤부터 빗방울이 듣습니다. “빗방울이 듣는다”고 적었는데, ‘비오다’를 일컬어 “빗방울이 듣는다”고도 합니다. 비가 올 때에 비를 안 맞으려고 처마 밑으로 몸을 옮기는 일을 일컬어 “비를 긋는다”고 합니다. ‘처마’는 집을 덮은 지붕이 도리 밖으로 나온 자리를 일컫습니다. ‘도리’는 서까래를 받치려고 기둥을 가로지르는 나무를 일컫습니다. ‘서까래’는 지붕을 얹기 앞서 도리 위에 죽 이어 까는 나무를 일컬어요. 그런데, 이런저런 ‘집’을 이루는 나무를 가리키는 낱말을 오늘날 어른들은 얼마나 잘 알거나 살필까요. 집짓는 일을 하는 어른이 아니라면 이런 낱말은 아예 모르쇠로 살아가지 않나 싶은데요.


  곧, 어른도 모르고 아이도 모르는 한국말입니다. 비오는 날, 우산을 ‘펼치’고 ‘접는’다고도 하지만, 우산을 ‘켜’고 ‘끈’다고도 해요. 빗줄기 굵기가 어떠한가에 따라, 안개비·는개·이슬비·가랑비로 나눕니다. 이 같은 굵기는 빗줄기를 눈으로 살피고 빗방울을 몸으로 맞으며 스스로 느껴야 깨닫습니다. 머리로는 알 수 없고, 지식으로는 가르지 못해요. 빗방울이 몇 밀리미터라야 는개이고 이슬비이고 나누지 않아요. 빗물이 어느 만큼 옷을 적셔야 안개비이고 는개이고 가르지 않아요. 이리하여, 오늘날 어른이든 아이이든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 같은 옛말을 쓰는 일이 몹시 드뭅니다. 비오는 날 빗줄기를 살피며 가랑비인가 실비인가 이슬비인가 살피지 않거든요. 더구나, 도시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은 이슬을 볼 일이 더 드물다 보니, 이슬비를 깨닫기 힘들고, 이슬비를 깨닫지 못하니, 보슬비는 또 어떤 비인가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더 들여다본다면, 아이들에 앞서 어른들부터 보슬비를 말하지 않아요. 바람 없는 날 가늘게 조용히 내리는 보슬비를 텔레비전에서 날씨를 알려주는 분들이 말하는 일 또한 없어요.


  조용히 여름비를 느끼며 만화책 한 권 읽습니다. 일본사람 콘노 키타 님이 지은 만화책 《다음 이야기는 내일 또》(대원씨아이,2012) 셋째 권입니다. 아이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대목이 보이는데, ‘방석’과 ‘쿠션’과 ‘마루’와 ‘리빙룸’이라는 낱말이 나옵니다.


.. “앗, 방석에 고양이 털이. 다른 걸 가져올 테니까 기다리렴.” “방석?” “여기 있어. 앉으렴. 자!” “아, 쿠션 말이군요!” “마리아네 집에는 ‘마루’가 없어?” “응.” “그럼 어디서 가족들이랑 TV를 보거나 얘길 하는데?” “어머, 그거야, 당연히 리빙룸이지.” ..


  어느 아이는 ‘깔개’를 ‘방석(方席)’이라 말합니다. 어느 아이는 방석이라는 낱말을 알아듣지 못하다가는 ‘쿠션(cushion)’이라 외칩니다. 이러다가 ‘마루’라는 낱말이 나오는데, 늘 마루에서 지내는 아이는 아주 마땅히 ‘마루’라 말하지만, 다른 아이는 이 또한 못 알아듣다가는 ‘리빙룸(living room)’이라 외쳐요.


  즐겁게 읽던 만화책을 한동안 덮고 생각합니다. 재미 삼아 나온 이야기라 여길 수 있고, 일본에서도 이처럼 영어에 길들거나 젖어든 채 살아가는 아이들이 많다는 우스개로 여길 수 있습니다. 일본도 한국도 온통 영어 물결에 휩쓸리는 나라인 만큼, 스스로 제 말을 잃거나 잊으며 넋과 얼이 뒤죽박죽이 되는 모습이라 여길 수 있겠지요.


  가만히 보면, 예부터 이 나라 살림집에는 ‘마루’가 있고 ‘부엌’이 있었으나, 어느새 ‘거실(居室)’과 ‘주방(廚房)’이라는 한자말이 또아리를 틀었어요. 한자말이 또아리를 튼 자리는 시나브로 ‘리빙룸’이라든지 ‘키친(kitchen)’ 같은 영어한테 새롭게 자리를 내주고 밀려나요. 이동안 한국말은 어디에서도 깃들지 못해요. ‘마루’나 ‘부엌’뿐 아니라 ‘책상’과 ‘걸상’이라는 낱말이 밀려납니다. ‘아침밥’과 ‘낮밥’과 ‘저녁밥’이라는 낱말은 ‘조찬(朝餐)’과 ‘오찬(午餐)’과 ‘만찬(晩餐)’이라는 한자말에 밀리더니, 요즈음에는 ‘브런치(brunch)’와 ‘디너(dinner)’라는 영어가 새삼스레 스며듭니다.


  그렇다고 요즈막 아이들더러 영어를 쓰지 말라느니, 애먼 한자말을 지식자랑 삼아 쓰는 일은 나쁘다느니 하고 나무랄 수 없습니다. 쓸 만한 영어라면 쓸 노릇이고, 알맞게 쓰는 한자말은 알맞다 할 만합니다. 다만, 스스로 어느 자리에 어떤 낱말을 쓸 때에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빛나는가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아무 영어나 한자말을 함부로 쓸 때에는 반갑지 않습니다. 어느 자리에 어떤 낱말을 써야 좋은가를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삶도 넋도 말도 흐물흐물 시들어요.


  으레 ‘의사소통’을 하려고 말을 주고받는다 하는데, ‘의사소통(意思疏通)’이란 무엇인지부터 옳게 살펴야지 싶습니다. 이 한자말 의사소통은 “생각이나 뜻이 서로 제대로 흐르는 일”을 가리킵니다. 흔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어.” 하고들 얘기합니다만, 참말 ‘알’기에 이렇게 얘기하는지는 아리송해요. 넘겨짚는다거나 어떤 지식이나 정보를 얻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뜻으로 ‘의사소통’을 들지 않느냐 싶어요. 곧, 사람과 사람이 참답게 의사소통을 하는 일이란 ‘생각을 제대로 밝혀 주고받는 일’이요, 생각을 제대로 밝혀 주고받자면, 나 스스로 읊는 내 말이 내 모든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생각이 담기도록 슬기롭게 가다듬어야 알맞습니다. 사이좋게 놀던 동무하고 헤어지는 자리에서 어떤 인사말로 내 좋은 느낌을 나누어야 기쁠까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랜 벗한테 띄우는 글월에 어떤 말마디로 내 삶과 넋과 말을 담아야 사랑스러울까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살결이 그을리도록 노는 아이를 바라보다가 “너는 ‘깜순이’로구나.” 하고 말합니다. 이윽고 ‘까미’, ‘까망이’, ‘깜씨’, ‘까망둥이’ 같은 이름을 하나하나 떠올립니다. 말괄량이처럼 노는 아이라 한다면 ‘말괄까미’라 이름을 붙여도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똑같은 것을 바라보면서, 누군가는 방석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깔개라 말하며 누군가는 쿠션이라 말합니다. 그렇다면 세 사람이 바라보는 이 똑같은 것은 무엇일까요. 세 사람이 바라보는 이 똑같은 것을 영어나 프랑스말이나 중국말로 옮긴다 할 때에는 어떻게 적바림할 수 있을까요. 아이들이 여느 자리에서 영어를 익숙하게 쓰는 까닭은, 어른들부터 여느 자리에 영어를 익숙하게 쓰기 때문인데, 어른들은 무엇을 생각하거나 바라며 여느 자리에 영어를 익숙하게 쓰나요. (4345.6.8.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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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8 1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2-06-08 15:17   좋아요 0 | URL
저는 늘 괜찮아요.
저는 저 스스로 제 삶과 마음을 제 깜냥껏 사랑으로 다스리거든요.

부디 스스로 가장 좋은 사랑으로 돌보실 수 있기를 빌어요.
서재를 떠나고 안 떠나고는 하나도 대수롭지 않아요.

방명록에 글을 남기기도 했는데,
앞으로는 부디
'무익한 논쟁'이 아닌
'즐거울 글'을 기쁘게 쓰시면 좋겠어요.

사람들은 '익명'이라는 이름으로 언제나 '무익한 말놀이에 말다툼'만
벌여 버릇하거든요.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스스로 얼마나 바보짓 말다툼을 하는가
깨닫지 못해요.
 

늙은 시인이 쓰는 말
[말사랑·글꽃·삶빛 11] ‘웃음’과 ‘미소’와 ‘스마일’

 


  오늘날 사람들이 쓰는 손전화 기계는 전화를 걸거나 받는 구실뿐 아니라, 인터넷을 누빈다든지 동영상이나 영화를 본다든지 노래를 듣는다든지, 여기에 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을 찍는다든지 하는 데까지 쓰임새를 넓힙니다. 이름은 손전화라 하지만, 구실이나 쓰임새는 참 넓어요.


  저는 사진기라는 이름이 붙는 기계를 따로 쓰기에, 굳이 손전화라는 기계로 사진을 찍지는 않습니다. 저처럼 사진기라는 이름이 붙는 기계를 따로 안 쓰는 분들은 으레 손전화라는 기계로 사진을 찍으실 텐데, 언젠가 어느 분 손전화 기계에서 사진이 찍힐 때마다 ‘스마일!’ 하는 소리가 나오는 모습을 곁에서 보았습니다.


  서양사람은 사진을 찍을 때에 ‘치즈(cheese)’라 말한다 하고, 한국사람은 사진을 찍을 때에 ‘김치’라 말한다 하니까, 한국 회사가 만들어 한국사람이 쓸 한국땅 손전화 기계라면 ‘스마일’ 아닌 ‘김치’라는 말이 흐르거나 ‘웃어!’ 같은 말이 흘러야 알맞지 않을까 하고 살짝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사람 스스로 ‘손전화’ 같은 낱말조차 잘 안 써요. ‘휴대폰(携帶phone)’이라 할 뿐입니다. 적어도 ‘폰’을 ‘전화’로 바로잡아 ‘휴대전화’라 말하는 분조차 드물어요.


  어른들부터 말을 곰곰이 생각하며 사랑스레 쓰지 못하는 얼거리이다 보니, 푸름이와 어린이 또한 제 말을 곰곰이 생각하며 사랑스레 쓰도록 이끌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푸름이와 어린이는 바로 둘레 어른들이 여느 때에 늘 쓰는 말을 언제나 들으면서 익숙하게 말을 하고 글을 써요. 둘레 어른들이 곱고 예쁘게 말을 한다면, 푸름이와 어린이 또한 곱고 예쁘게 말을 할 테고, 둘레 어른들이 밉고 거칠게 말을 한다면, 푸름이와 어린이 또한 밉고 거칠게 말을 하고야 맙니다.


  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국문학과를 마치고, 시를 쓰며 살아가다가, 출판사 편집자로도 일한 적 있는, 예순 살 넘은 어느 분이 쓴 시를 읽다가 “헛간에 좀 늦게 들어온 호박이 쭈뼛거리다가 얼굴에 곧 환한 미소를 띠며 서로에게 등을 기대고 앉아(122쪽/늦가을)”라 노래하는 글줄을 봅니다. 《은빛 호각》(창비,2003)이라는 시집에 실린 싯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싯말을 찬찬히 곱씹고 호박꽃과 호박빛을 가만히 헤아리다가 ‘미소(微笑)’라는 낱말이 마음에 걸려 한참 생각에 잠깁니다. 시를 쓰는 예순 넘은 할아버지는 왜 ‘미소’라는 낱말을 싯말로 담았을까요. 책 만드는 일을 한 적 있는 할아버지는 왜 ‘미소’라는 낱말을 싯말로 그대로 남겼을까요.


  ‘미소’는 한자말입니다. 한자말 가운데 일본 한자말입니다. 이 낱말은 ‘웃음’이나 ‘빙긋 웃음’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들 얘기하지만, 막상 이처럼 올바로 바로잡는 사람은 퍽 드뭅니다.


  아무래도 ‘웃음’이라는 낱말로는 뜻이나 느낌이 살아나지 않겠다고 여겨 ‘미소’ 같은 낱말을 쓸는지 모릅니다. 어릴 적부터 ‘미소’라는 낱말을 둘레에서 익히 들었으니, 시를 쓰건 책을 엮건 말을 하건 이 낱말이 저절로 튀어나올는지 모릅니다. 요즈음에는 ‘생일잔치’라 말하지 않고 ‘생일파티’라 말하는 이가 무척 많은데다가, ‘생파’라고 줄여 말하기까지 한답니다. 한국사람이 쓸 한국말이면 마땅히 ‘잔치’이지만, 어른들부터 잔치를 누리지 않아요. 어른들부터 아이들과 함께 ‘파티’를 벌여요. 아이들은 아주 스스럼없이 ‘파티’라는 낱말에 길들어, ‘떡볶이잔치’ 아닌 ‘떡볶이파티’를 합니다. 짜장면을 먹을 때에도 ‘짜장면파티’가 되고, 김밥을 먹어도 ‘김밥파티’가 되고 말아요.


  어른들이 얼굴에 빙그레 웃음을 띠면 아이들도 얼굴에 빙그레 웃음을 띠겠지요. 어른들이 얼굴에 살며시 웃음을 비치면 아이들도 얼굴에 살며시 웃음을 비치겠지요. 방긋 웃는 어른이요 아이입니다. 발그레 웃는 어른이면서 아이입니다. 싱긋생긋 웃는 어른이기에 싱긋생긋 웃는 아이예요.


  이 나라 어른들은 웃음을 잃습니다. 어른들부터 웃음을 잃기에 아이들이 웃음을 잃습니다. 이 겨레 어른들은 웃음을 잊습니다. 어른들부터 웃음을 잊으니 아이들이 웃음을 찾기 어렵습니다.


  즐겁게 웃지 않고, ‘행복(幸福)한 미소’를 짓고, ‘해피(happy)한 스마일’을 띱니다. (4345.6.2.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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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설’과 ‘말하기’와 ‘떠벌리기’
[말사랑·글꽃·삶빛 10] 내 말은 내 사랑이다

 


  생각을 가만히 기울이면서 말할 때에 내 말투는 씩씩하게 섭니다. 마음을 따스히 쓰면서 말할 때에 내 말마디는 어여삐 빛납니다. 사랑을 알뜰히 들이면서 말할 때에 내 말결은 보드라이 샘솟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가장 좋아하는 말을 합니다. 따로 ‘표준말’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가장 사랑하는 글을 씁니다. 따로 ‘맞춤법’에 걸맞게 글을 쓰지 않습니다. 내 생각을 씩씩하게 다스릴 말을 합니다. 내 마음을 따스하게 북돋울 글을 씁니다. 내 사랑을 보드라이 보듬을 이야기를 나눕니다.


  흔히들 ‘바른 말 고운 말’을 이야기합니다. 말을 바르게 써야 한다 말하고, 글은 곱게 써야 한다 얘기합니다. 나는 이 같은 목소리가 틀리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바른 말 고운 말’은 가없이 마땅하다고 느낍니다. 다만, 어떤 바른 말이고, 어떻게 고운 말인가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국립국어원에서 들려주는 표준말이 바른 말이라 할 만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말글학자가 얘기하는 맞춤법이 고운 말이라 할 만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바르다’와 ‘곱다’를 밝히자면 무엇보다 바른 삶과 고운 삶을 밝혀야지 싶어요. 바른 넋과 고운 넋을 나란히 밝혀야지 싶어요. 바른 꿈과 고운 사랑을 함께 밝혀야지 싶어요.


  사람들한테 어떤 ‘말 지식’을 얘기한대서 바르게 쓸 말이 서지는 않는다고 느낍니다. 사람들한테 어떤 ‘말 정보’를 알려준대서 곱게 쓸 말이 퍼지지는 않는다고 느낍니다.


  삶을 바르게 볼 줄 모르면서 말을 바르게 볼 수 있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착한 일을 즐기지 못하거나 고운 나날 누리지 못하면서 말만 곱게 꾸밀 수 있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말’이란, 내 삶을 드러내는 얼굴이라고 느낍니다. ‘글’이란, 내 사랑을 적바림하는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사람들 스스로 어디에서 어떤 삶을 누리는가를 톺아볼 수 있어야 사람들 스스로 어디에서 어떤 말을 익히며 나누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 스스로 어떤 일을 어떤 넋으로 하는가를 깨달을 수 있어야 사람들 스스로 사랑어린 말과 믿음직한 글로 생각을 드러냅니다.


  일본사람 우오즈미 나오코 님이 쓴 청소년책 《원예반 소년들》(양철북,2012)을 읽다가 39쪽에서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하는 대목과 “어쨌거나 발설만 하지 않으면 된다 이거지?” 하는 대목을 봅니다. 44쪽에서는 “나가서 떠벌리지 않을까요?” 하는 대목을 봅니다. 세 가지 글월을 나란히 놓고 생각에 잠깁니다. 읽던 책은 내려놓고 한동안 생각에 빠집니다. 내가 열대여섯 살 푸름이였을 적, 나는 어떤 낱말과 말투로 내 넋을 가누었을까 하고 돌이킵니다. 내 열대여섯 살에는 누구한테서 듣거나 배운 말마디로 내 넋을 드러냈을까 하고 돌아봅니다. 내 열대여섯 살 말밭은 어떤 낱말로 이루어졌던가 하고 되돌아봅니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늘 주고받는 말마디가 내 말마디가 되었을까요. 동무들하고 주고받는 말마디가 내 말마디가 되었을까요. 교과서에 적힌 글줄과 교사들이 읊는 말소리가 내 말마디로 녹아들었을까요. 나는 어떤 말을 어떤 넋으로 어떤 사랑을 담아 나누던 푸름이였을까요.


  한자말 ‘발설(發說)’은 “입 밖으로 말을 냄”을 뜻한다 합니다. 나는 푸름이였을 적 이 한자말을 알았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발설’뿐 아니라 ‘입 밖에 내다’라든지 ‘벙긋하다’ 같은 말도 알았다고 느낍니다. 열대여섯 살 무렵, 나와 동무들이 주고받던 말마디를 하나씩 되새기며 적어 봅니다. 첫째, “너, 말하지 마.” 둘째, “너, 입도 벙긋하지 마.” 셋째, “너, 입 다물어.” 넷째, “너, 조용히 해.” 다섯째, “너, 일러바치지 마.” 여섯째, “너, 호박씨 까지 마.” 일곱째, “너, 주둥이 함부로 놀리지 마.”


  이밖에, 이무렵 나와 동무들이 알던 말로 ‘고자질(告者-)’이 있고, ‘발설(發說)’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말은 어른들이 으레 쓰기에 우리들도 더러 썼지, 우리 스스로 먼저 쓰지 않았습니다. 동무들이나 아이들끼리는 언제나 “너, 선생님한테 일렀지?”처럼 말했습니다. 이무렵 ‘말하다’와 ‘이르다’가 서로 어떻게 같거나 다른가를 알지 못했지만, 두 가지 말을 골고루 썼어요. ‘호박씨 까기’는 좀 다른 자리에 쓴다고 하지만, 내 어릴 적 동무들은 몰래 읊는 말도 호박씨를 깐다고 함께 얘기했어요. 뒤에서 주절거리는 말도 ‘호박씨 깐다’고 했어요. “너 어디서 호박씨 까고 다니냐?”처럼.


  더 뒤돌아보면, 이무렵 어른들은 우리한테 ‘이르다’가 어떤 뜻이거나 쓰임이거나 느낌인지 이야기해 주지 않았습니다. 초·중·고등학교를 거치는 열두 해 동안, 어느 국어 교사도 이 대목을 짚지 못했습니다.


  고등학생 때에는 때때로 ‘언쟁(言爭)’이나 ‘논쟁(論爭)’ 같은 말을 듣거나 썼습니다. 그런데, 이런 낱말을 쓰면서 어딘가 꺼림칙했어요. 나는 열 살에 천자문을 떼며 한자를 조금 익혔는데, 어른들이 쓰는 ‘언쟁’이나 ‘논쟁’이란, 말뜻을 풀면 한국말로 ‘말다툼’이나 ‘말싸움’이에요. 어느 자리에서는 ‘다툼’이라기보다 ‘나눔’이었어요. 서로 말을 나누는 자리인데, 언제나 버릇처럼 ‘논쟁’이라 하더군요. 삶 매무새 그대로 ‘말나눔’이나 ‘이야기나눔’ 같은 낱말을 즐겁게 빚을 만하지만, 어른들은 이렇게 새말을 빚어 즐겁게 쓰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어요.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합니다. 한국사람이니까요. 일본사람은 일본말을 합니다. 일본사람이니까요. 중국사람은 중국말을 할 테지요. 중국사람이니까요. 그러면, 한국사람이 주고받는 한국말은 어떤 한국말일까요. 한국사람이 쓰는 한국말은 한국말답다 할 만할까요.


  한자말 ‘발설’은 한국사람이 쓸 만한 한국말로 여겨도 될까요. 이 낱말을 ‘한국말사전’에 싣거나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싣거나 청소년책에 넣어도 괜찮을까요.


  어른 나이로 살아가는 이 나라 사람들은 푸름이 나이로 살아가는 이 나라 사람들 앞에서 어떤 말을 쓰는가요. 어떤 마음으로 어떤 말을 쓰나요. 어떤 사랑으로 어떤 글을 짓나요. (4345.5.28.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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