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속 세탁소
모이치 구미코 지음, 나카무라 에쓰코 그림, 육은숙 옮김 / 크레용하우스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맑은 숲을 마주하셔요
 [어린이책 읽는 삶 20] 모이치 구미코, 《숲 속 세탁소》(크레용하우스,2005)

 


- 책이름 : 숲 속 세탁소
- 글 : 모이치 구미코
- 그림 : 나카무라 에쓰코
- 옮긴이 : 육은숙
- 펴낸곳 : 크레용하우스 (2005.7.20.)
- 책값 : 7500원

 


  감나무마다 새잎이 푸르게 돋습니다. 감나무에 새잎이 처음 돋았을 때에는 몇 닢 살며시 톡 따서 입에 넣고 냠냠 씹었습니다. 감나무마다 새로 맞이한 봄에 즐겁고 씩씩하게 틔운 잎사귀마다 서린 향긋한 기운을 보들보들한 감잎으로 느꼈습니다. 이제 감나무 새잎은 꼴을 제대로 갖추며 차츰 커집니다. 머잖아 조그마한 별처럼 감꽃을 피울 테고, 감꽃이 바람 따라 하나둘 질 무렵 조그마한 감알이 푸른 빛깔로 맺히겠지요. 푸른 빛깔로 맺히는 조그마한 감알은 차츰 굵어지고, 차츰 굵어지다가 또 바람에 하나둘 떨어지다가는 알맞다 싶은 숫자를 남기고 찬찬히 발갛게 익겠지요.


  모든 몽우리가 꽃으로 피어나지 않습니다. 모든 꽃이 열매로 맺히지 않습니다. 어느 몽우리는 바람에 그만 떨어집니다. 어느 몽우리는 사람이나 멧새 손길을 타며 그만 떨어집니다. 어느 몽우리는 짓궂은 사람이 가지를 꺾는다든지, 또는 땔감 찾는 사람이 가지를 자르며 그만 몽우리로 끝나기도 해요.


  마루에 앉아 바깥을 바라봅니다. 아이와 손을 잡고 들길을 거닐며 두리번두리번 살펴봅니다. 들새이든 멧새이든 아주 가볍에 나뭇가지에 앉습니다. 몸집 커다란 해오라기나 왜가리도 아주 가벼이 나뭇가지에 앉습니다. 참 가느다랗다 싶은 나뭇가지이건만, 새들은 나뭇가지에 사뿐히 앉습니다. 새들이 앉을라치면 나뭇가지는 살짝 흔들리다가 이내 흔들림이 멎습니다. 여러 마리가 나란히 앉아도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일을 볼 수 없습니다.

 


.. 시커먼 먹구름이 사라지고, 하얀 양떼구름이 하늘 높이 피어 올랐어요. 오소리 아저씨는 오랜만에 세탁소 문을 닫고, 단풍딸기를 따러 가기로 했어요 ..  (6쪽)


  오늘날 여느 사람들이 들새나 멧새가 퍼덕퍼덕 살아서 날갯짓할 때에 손에 살그마니 쥘 일은 드물다고 느낍니다. 오늘날 여느 도시에서는 들새나 멧새를 마주하기 힘드니까요. 내가 마음을 열고 두 팔을 활짝 하늘로 뻗치며 가만히 선다면, 새들 몇 마리가 내 손이나 어깨나 머리에 살짝 내려앉았다가 다시 날아오르리라 느끼는데, 누구라도 새를 손바닥에 앉히고 보면, 새 한 마리 무게가 아주 가벼운 줄 깨달으리라 봅니다. 제법 큰 새라 할 만하다 싶은 직박구리라든지 까치라든지 까마귀라든지 무게가 많이 나가리라 여길는지 모르나, 막상 이 새들을 안아 보셔요. 하나도 무겁지 않습니다. 얼마나 작고 얼마나 가벼우며 얼마나 보드라운지 모릅니다.


  그러고 보면 나뭇가지 하나도 참으로 작고 참으로 가벼우며 참으로 보드랍습니다. 작은 나뭇가지가 모여 조금 굵직한 나뭇가지가 되고, 조금 굵직한 나뭇가지가 모여 제법 굵은 나뭇가지가 되며, 제법 굵은 나뭇가지가 모여 우람한 줄기가 됩니다. 우람한 줄기가 튼튼히 뿌리내려 아름다운 나무 한 그루로 섭니다.


  이 지구별에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사람들도 더없이 작은 사람이요, 더없이 작은 사람이 깃든 지구별 또한 더없이 작은 별 하나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 “정말 고맙다. 하지만 우리 세탁소 빨래가 아니구나.” 오소리 아저씨는 하얀 것 가까이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어요. “정말 우리 세탁소에서 쓰는 쥐엄나무 열매를 우린 물처럼 달콤하고 향긋한 냄새가 나는구나. 그런데 이거 아주 좋은 털실로 만들었는데.” 그것은 오소리 아저씨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새하얀 털실로 만든 것이었어요.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며 보들보들하고 가벼웠지요 ..  (9쪽)


  숲을 마주합니다. 풀로 이룬 풀숲을 마주합니다. 풀숲에는 사람보다 조그마한 목숨이 수없이 얼크러집니다. 사람들이 풀숲에 아무 생각 없이 발을 디디면, 아주 조그마한 목숨은 그예 밟혀 죽고 깔려 죽습니다. 사람들이 풀숲을 따사로이 보듬거나 건사하면, 아주 조그마한 풀숲은 곱게 살아숨쉬다가는 고운 노래소리 들려줍니다. 바람에 일렁이는 풀잎이 서걱거리는 노래소리, 풀숲에 보금자리 마련한 벌레들 노래소리, 꽃잎이 피고 지며 내는 잔잔한 노래소리 들이 골고루 얼크러집니다.


  숲을 바라봅니다. 나무로 이룬 나무숲을 바라봅니다. 나무숲에는 사람보다 커다란 목숨이 수없이 어우러집니다. 사람들이 나무숲에 아무 생각 없이 발을 디디면, 나무마다 애써 떨군 작은 씨앗이 틔운 여린 새싹이 몽땅 짓밟혀 죽고 짓이겨져 죽습니다. 사람들이 나무숲을 너그러이 보살피거나 돌보면, 아주 커다란 나무숲은 해맑게 살아숨쉬다가는 해맑은 빛깔을 베풉니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나뭇잎 빛깔, 나무에 둥지 마련한 새들이 날갯짓하며 펼치는 빛깔, 햇살이 드리우며 알록달록 이루는 푸른 그림자 빛깔 들이 아리땁게 어우러집니다.


  숲이 있어 사람이 있습니다. 숲이 있어 벌레가 있습니다. 숲이 있어 짐승이 있습니다. 숲이 있어 지구별이 숨을 쉬고, 숲이 있어 모든 목숨이 먹이를 얻습니다.

 


.. “이게 내 것이 되면 아주 멋지게 쓸 텐데.” “아니, 곰 할아버지도요? 멋지게 쓰다니, 어떻게요?” 곰 할아버지는 멋쩍은 듯이 대답했어요. “찻주전자 덮개로 말일세.” “찻주전자 덮개요!” “그래. 아주 오래 전부터 찻주전자 덮개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  (20쪽)


  숲바람이 마을을 감쌉니다. 흙땅에 나즈막하게 앉은 작은 집으로 이루어진 마을은 숲바람을 포근히 맞아들입니다. 숲에서 살아가는 새들이 작은 마을을 휘휘 돌며 나들이합니다. 숲에서 씨앗을 맺는 나무들이 작은 마을마다 푸른 빛 이야기를 휘휘 흩뿌리며 노래합니다.


  숲바람이 고속도로를 탑니다. 숲바람이 기찻길을 탑니다. 숲바람이 공장 굴뚝을 맴돕니다. 숲바람이 수많은 아파트 사이사이 돌고 돕니다.


  숲바람은 시골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따사로우며 포근하고 시원하면서 향긋하고 싶습니다. 숲바람은 누구한테나 넉넉하며 너그럽고 느긋하면서 한갓지고 싶습니다. 숲바람은 사람들 가슴마다 푸른 빛깔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천천히 천천히 불며 천천히 천천히 서로 사랑하고 싶습니다.

 


.. 아이가 재빨리 물었어요. “그런데요?” “우리한테 주면 좋겠는데…….” 오소리 아저씨는 아이에게 날다람쥐와 토끼와 곰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자 아이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어요. “가방에, 호른 주머니에, 찻주전자 덮개로 쓴다고요? 좋아요. 모두 다 소중히 쓸 것 같으니 드릴게요.” ..  (29쪽)


  모이치 구미코 님 글에 나카무라 에쓰코 님 그림이 어우러진 어린이책 《숲 속 세탁소》(크레용하우스,2005)를 읽습니다. 잔잔히 물결치는 고즈넉한 줄거리가 빛나는 《숲 속 세탁소》는 숲에서 빨래하며 살아가는 ‘오소리 아저씨’ 삶을 한 자락 보여줍니다. ‘세탁소’라는 이름을 붙여 사람들이 이룬 도시에서 으레 보는 가게를 떠올릴까 싶기도 하지만, 숲에 깃든 오소리 아저씨네 집은 기계를 쓰지 않습니다. 오소리 아저씨는 ‘손으로 빨래’합니다. 이야기 흐름으로 보자면, “숲 속 빨래집”쯤으로 적을 때에 한결 잘 어울립니다. 쥐엄나무 열매 우린 물에 빨래를 담그고는 두 손으로 복복 비벼서 빨래를 해요. 숲에서 얻은 비누와 물로 빨래를 하고, 빨래를 마친 물은 숲으로 돌아가도록 합니다. 숲은 언제나 고요하고 숲은 늘 정갈하며 숲은 노상 빛납니다.

 


.. “굉장히 좋은 털실로 만든 장갑으로 별을 닦는구나!” “이거, 하늘의 양털로 만든 거예요.” “하늘의 양털?” 오소리 아저씨는 눈을 동그랗게 떴어요. 아이는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어요. “저는 요즘 바람의 아이가 하는 일을 배우고 있어요. 오늘은 처음으로 혼자서 별을 닦았어요.” “바람의 아이가 하는 일?” “네. 풍차의 날개를 돌리기도 하고, 양치기 할아버지의 등을 밀어 주기도 해요 …… 모든 별을 다 닦는 건 아니에요. 큰 도시 위에서 더러워진 별만 닦아요.” ..  (32∼37쪽)


  나는 내 옷가지와 옆지기 옷가지와 아이들 옷가지를 빨래합니다. 먼지나 때가 묻은 옷가지를 빨래한다 할 텐데, 내가 하는 빨래는 내 살붙이들 삶을 얼마나 싱그러우며 아름다이 어루만지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깨끗하게 빨래할 무언가는 옷가지 하나만이 아닙니다. 나는 내 마음과 살붙이들 마음도 빨래합니다. 가장 좋은 꿈과 사랑을 실어 가장 좋은 넋과 얼이 되도록 마음빨래를 합니다. 마음을 갈고닦습니다. 마음을 쓰다듬습니다. 마음을 추스릅니다. 마음을 다스립니다.


  내 마음이 늘 정갈하다면, 나로서는 굳이 내 마음을 갈고닦지 않아도 될는지 모릅니다. 《숲 속 세탁소》에 나오는 ‘바람 아이’가 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도시에서 더러워진 별 닦기’라 하듯, 시골에서 ‘더러워지지 않은 별’이라면 굳이 때를 닦지 않을 테니까요. 나 스스로 내 삶을 정갈히 건사해서 내 마음이 언제나 정갈하다면, 나는 굳이 내 마음을 갈고닦지 않아도 즐거워요. 이때에는 언제나 내 삶을 예쁘게 누리며 기쁘게 빛내고 살갑게 나눌 수 있으면 넉넉해요.


  새벽 두 시 반, 멧새들 노래소리를 듣습니다. 문득 우리 집 처마 제비집에서 나는 노래소리도 듣습니다. 새벽 두 시 반에 제비들이 왜 지저귀지? 어느덧 새끼가 알에서 깨어났나?


  두 아이는 달콤하게 색색 잡니다. 고단하게 뛰놀던 첫째 아이는 이리저리 뒹굴며 자고, 씩씩하게 기던 둘째 아이는 이리저리 뒤척이며 잡니다. 이 아이들 몸과 마음을, 또 나와 옆지기 몸과 마음을, 저마다 맑으며 밝게 아낄 수 있는 사랑을 생각합니다. 우리 집 마당 한켠 산초나무마다 푸른 빛깔 작은 몽우리가 몽실몽실합니다. 산초나무 꽃송이를 기다리며 새벽을 누립니다. (4345.5.1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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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촌 유학 - 제13회 미메이 문학상 대상 수상작
나카야마 세이코 지음, 서혜영 옮김 / 도서출판 문원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도시에는 숲이 있어야 해요
 [푸른책과 함께 살기 93] 나카야마 세이코, 《산촌 유학》(문원,2012)

 


- 책이름 : 산촌 유학
- 글 : 나카야마 세이코
- 그림 : 우메다 후지오
- 옮긴이 : 서혜영
- 펴낸곳 : 문원 (2012.2.29.)
- 책값 : 9000원

 


  학교가 처음 생긴 뒤부터, 무언가 배우려는 뜻을 품은 사람들은 학교가 있는 곳으로 찾아갑니다. 학교는 깊은 두멧자락 시골마을에도 서지만, 사람들이 조금 더 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읍내나 도시 한복판에 서곤 합니다. 시골마을에는 자그마한 학교가 있다면 도시에는 커다란 학교가 있습니다. 시골마을에 대학교가 자리잡는 일은 드물지만, 도시에서는 대학교가 쉽게 생깁니다. 다른 나라가 어떠한가를 살피기 앞서 이 나라를 살피면, 한국에서 내로라한다는 대학교는 으레 서울에 몰립니다. 서울 바깥에는 ‘내로라한다는’ 대학교가 서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쉬 드나들거나 자주 찾아올 만한 도시에 학교가 서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극장도 책방도 도서관도 학원도 이것도 저것도 모두 도시 한복판에 서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둘레에서 으레 이렇게 말하기에 나 또한 어릴 적부터 이 같은 생각에 천천히 물들었습니다. 제아무리 좋다 하는 학교나 시설이나 기관이라 하더라도, ‘더 많은 사람이 쉽고 빠르게’ 찾아갈 만하지 않다면 부질없지 않겠느냐 여겼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더 많이 살아가는 도시라서 모든 시설과 학교가 도시에 모여야 할까요. 나부터 내 생각을 다스리면서 깨닫습니다만, 학교가 도시에 서야 할 까닭이란 없었구나 싶어요. 도서관도 박물관도 기념관도 체육관도 …… 어느 하나 도시에 서야 할 까닭이 없구나 싶어요. 도시에 무언가 서야 한다면 꼭 한 가지라고 느껴요. 바로 ‘숲’이라고 생각해요.


.. 오른쪽을 봐도 왼쪽을 봐도,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온통 초록이다. 초록색 사이로 시냇물이라기에는 조금 큰 물길을 따라 맑은 물이 흐르고, 드문드문 보이는 기와지붕도 모두 같은 초록색이다 … “낡은 집이지? 지은 지 백 년은 됐을걸.” 현관의 큰 미닫이문을 열면서 아줌마가 말했다. 그 집은 무척 낡아 보였다. 에어컨도 달려 있지 않은 옛날 집이다. 그럼에도 집 안 공기가 서늘한 것은 지붕이 크고 천장이 높기 때문일까? … 별이 이렇게 밝게 빛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어쩐지 딴세상에 온 것 같았다. 일본은 어디나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소리, 냄새, 색깔, 빛, 바람…… 여기는 내가 사는 곳(도쿄)과는 완전히 다르다 ..  (7, 22, 26쪽)


  도시에는 다른 시설이나 기관은 한 가지도 없어도 되리라 느낍니다. 도시에 대학교뿐 아니라 박물관이나 기념관 또한 한 곳도 없어도 되리라 느낍니다. 그러나, 도시에 숲이 없다면, 나무그늘과 들판이 없다면, 논이랑 밭이 없다면, 냇물이랑 골짜기랑 멧자락이 없다면, 이런 데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도시에 사람들이 많이 몰린 까닭은 학교 때문이 아닙니다. 돈 때문입니다. 먼먼 옛날부터 어느 나라에서든 도시가 이루어지는 까닭은 돈이 모이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돈 때문에 도시를 만듭니다. 어른들은 돈을 거머쥐려고 도시를 더 크게 키웁니다. 이렇게 어른들이 웅성웅성 모여 돈벌이를 하다가 남녀가 짝을 지어 아이를 낳고, 아이를 낳다 보니 수많은 아이들을 가르칠 겨를이 없습니다. 시골에서는 어버이와 아이가 숲과 들과 바다에서 함께 뒹굴며 서로 가르치고 배우지만, 도시에서 어버이 자리에 설 어른들은 돈을 버느라 바빠요. 언제나 돈을 벌고 늘 돈을 생각합니다. 도시에서 돈을 버는 어른들은 아이들하고 하루 내내 복닥이거나 뒹굴면서 삶을 가르치고 배우는 흐름을 읽지 못해요.


  곰곰이 따지면, 학교는 시골에 서야 올바르지만, 시골에서는 따로 학교라는 울타리가 없어도 됩니다. 도시는 학교가 설 만한 터가 아니지만, 도시 어른들은 아이들을 즐거이 가르치고 아이들한테서 스스럼없이 배울 짬이 없는 나머지, 따로 학교를 세웁니다. 따로 세운 학교에 아이들을 넣고, 아이들한테 삶 아닌 지식을 물려줄 어른을 새로 전문직업인으로 키웁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전문직업인 자리에 설 어른한테서 삶을 배운다면 이 아이들은 ‘돈만 벌 뿐 삶을 가르치지 못하는 어버이’ 곁을 금세 떠나거든요. 삶을 배울 수 없는 어버이한테서는 사랑을 배우지 못합니다. 삶을 들려주지 못하는 어버이한테서는 꿈을 듣지 못합니다. 삶을 보여주지 않는 어버이한테서는 이야기를 얻지 못합니다.


.. 재밌는 건 학생수가 적어서 교장 선생님이 전교생의 얼굴을 모두 알고 있다는 것, 아이들을 부를 때도 별명으로 부른다는 것이다 … 우리 (도쿄) 학교에서는 다른 학년과는 사이가 좋아지는 일이 없다. 그런데 여기서는 학년이 다른 건 크게 상관이 없는 모양이다. 2학년 아이가 (5학년) 아키라를 친구처럼 그냥 “아키라!” 하고 불렀고 … 인원수가 적어서 여자아이들과 저학년 아이들도 함께 시합을 했다. 저학년이 들어오면 공의 힘이 약하거나 패스를 해도 공이 제대로 안 가서 좀 헤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런 데에는 이미 익숙한 듯, 그렇다고 저학년 아이를 빼놓고 시합을 하지는 않았다 ..  (22, 40∼41쪽)


  도시에는 책방이 없어도 됩니다. 도시에서 돈벌이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책방에 찾아가서 마음을 살찌우는 책을 읽을 겨를이 없으니까요. 도시에서 돈벌이 일에 매인 사람으로서는 책방으로 나들이를 하면서 마음을 착하고 환하게 빛낼 책을 끌어안을 틈이 없으니까요.


  도시에는 책방이 많아도 오늘날 도시사람은 책방마실조차 안 합니다. 인터넷으로 책을 삽니다. 인터넷으로 처세책과 자기계발책과 문학책과 인문책만 사다 읽습니다. 정작 삶을 밝히는 책은 사다 읽지 못하고, 애써 삶을 밝히는 책을 사다 읽어도 ‘이야기를 느낄 가슴’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도시사람은 삶을 밝히는 책을 읽으면서도 삶을 못 느끼고 말까요.


  돌이키면 나부터 지난날 도시에서 살며 이와 같았다 할 텐데, 도시에는 숲이 없기 때문에 숲넋을 삶으로 아로새기지 못합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며 숲을 끌어안고 숲을 아끼며 숲을 어깨동무하는 매무새일 때라야 비로소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숲을 모르면서 책을 읽지 못합니다. 숲하고 사귀지 않으면서 책을 사귀지 못합니다. 숲을 사랑하지 않을 때에는 책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도시에는 다른 무엇보다 숲이 있어야 합니다.


.. 일어나자마자 집안일을 도우라니, 이건 또 뭐야! 야채 주스를 마시면서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밥이 나오는 게 아침이잖아? 집안일을 돕다니!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이를 잃은 할머니에게는 아직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거야. 지금도 때때로 꿈속에서 그 아이를 찾고 계신단다.” 등을 둥글게 웅크린 채 흐느끼는 할머니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희뿌옇게 보였다. 잠이 완전히 깨고 말았다. 이부자리로 돌아왔지만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희생자 몇 명, 사망자 몇 명, 매일처럼 흘러나오는 텔레비전 뉴스나 신문의 글자. 하지만 숫자로는 아무것도 전할 수 없다. 사람을 숫자로 나타내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  (29, 102∼103쪽)


  숲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삶을 누리지 못합니다. 숲을 누리지 못하는 오늘날 도시사람은 삶을 누리지 못합니다. 다만, 도시에 가득한 돈을 누립니다. 도시에 넘치는 돈으로 값싸거나 값비싼 놀음놀이에 빠져듭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즐거운가를 생각하지 못하고, 어떻게 돈을 써야 할까를 따집니다. 어떻게 사랑할 때에 기쁜가를 헤아리지 못하고, 어떻게 돈을 굴릴까를 살핍니다.


  ‘산촌 유학’이란, 곧 ‘시골 배움마실’이란, 숲을 잃거나 잊은 도시에서 생각을 잃거나 잊고 싶지 않은 어른들이 당신 아이들한테 생각을 일깨우고 사랑을 보여주며 꿈을 들려주고 싶은 가느다란 끈과 같다고 느낍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며 이마저 하지 못한다면 아이한테나 어버이한테나 아름다운 삶 한 자락 누릴 수 없겠다고 여기며 함께하는 ‘학교’라고 느낍니다.


  이제 시골에서 도시로 떠날 아이들은 거의 다 떠났습니다. 앞으로도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갈 아이들은 이럭저럭 있기는 한데, 머잖아 이 아이들은 몽땅 도시로 갈는지 모릅니다. 거꾸로, 도시에 몰린 채 삶이 아닌 지식에 허덕이며 사랑 아닌 정보에 둘러싸인 채 파리해지고 쓸쓸해지는 아이들이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갑니다. 흔히들 ‘귀농’이나 ‘귀촌’을 말하는데, 이제야말로 시골로 가지 않고서야 사람이 살아남을 수 없다고 여길밖에 없습니다. 도시에 남는다 하더라도 끼니를 이으며 돈을 벌 수 있겠지요. 도시에서는 돈벌이가 끊이지 않을 테니까, 어떡해서든 이웃나라하고 무역을 하며 공산품을 내다 팔아 먹을거리를 사들이면 밥은 먹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참말 어른도 아이도 사람답게 살아남고 싶다면, 아니 사람답게 살아가고 싶다면,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갈밖에 없습니다.


.. “응, 그랬어. 하지만 나랑 아키라 오빠는 굉장히 기다렸어. 케이 오빠가 오는 거.” 나나는 나를 보면서 뒷걸음질 치며 걸었다. “왜?” “그냥…… 그게 그러니까, 친구가 생기는 건 기쁜 일이잖아!” …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엥? 그런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하지만 여름이 끝나면 말라 버리지. 다른 꽃들도 겨울이 되면 말라 버려서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모르게 돼. 눈 아래에 묻히고 나면 다시는 꽃이 피지 않을 것 같지. 하지만 봄이 됐는데 꽃이 안 핀 적이 있니?” ..  (35, 89쪽)


  천천히 생겨 천천히 퍼지는 산촌 유학입니다. 시골살이를 하나도 모르는 채 도시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편의점과 유흥시설과 텔레비전과 전자제품에 익숙합니다. 도시 아이들뿐 아니라 도시 어른들은 전철도 버스(도시처럼 자주 많이 다니는 버스)도 비행기도 없는 시골에서 어떻게 지내야 하는가를 알지 못합니다. 자가용 없이 다니는 길, 두 다리로 걸어서 다니는 길, 온몸을 움직여 살아가는 나날을 알지 못합니다.


  도시에서는 그야말로 몸 한 번 움직이지 않아도 밥을 먹고 옷을 입으며 잠을 잡니다. 돈이 있으면 도시에서는 내 몸이 뚱뚱해지건 말라비틀어지건 대수롭지 않습니다. 돈만 있으면 도시에서는 내 삶이 어떻게 뒤틀리거나 비틀리거나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시골에서도 돈만 있으면 다 될까요. 시골에서도 돈만 있으면 아무 걱정거리가 없을까요. 시골에서도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지낼 만할까요.


.. 친구들과 함께 채소를 거두기도 하고, 논밭의 김매기를 돕기도 했다. 맨발로 흙 위에 서면 부드럽고 근질거리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 엄마는 슈퍼에서 사는 채소가 비싸다, 비싸다, 불평하곤 했지만, 출하까지 이렇게 품이 많이 드니 어쩔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모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버스에 올라타려는데, 할머니의 감자 같은 손이 내 등에 닿았다. “언제든지 돌아오렴.” ..  (43, 59, 141쪽)


  나카야마 세이코 님이 빚은 푸른문학 《산촌 유학》(문원,2012)을 읽습니다. 이 문학책은 푸름이가 읽도록 쓴 이야기인데, 푸름이 가운데에서도 시골 아닌 도시에서 살아가는 푸름이가 읽도록 썼습니다. 시골마을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 이 책을 읽을 일이 아예 없지는 않겠으나, 이 책을 읽을 아이라면 도시에서 도시살이에 젖은 채 지내는 아이라고 느낍니다. 그런데, 도시 아이들이 이 책을 즐겁게 뽑아들어 읽을까 모르겠습니다. 도시 아이들은 도시에서 누리는 갖가지 놀음놀이를 들려주는 이야기책을 읽지, 시골마을 나들이 이야기를 읽을까요. 도시 아이들 가운데 스스로 깨우치거나 깨달아 도시를 떠나려 하는 아이가 있을까요. 도시 아이들 가운데 교사나 어버이가 이 책을 건네기 앞서 스스로 알아보거나 알아채어 기쁘게 읽어 제(푸름이) 삶을 고치려고 땀흘릴 아이가 있을까요.


  틀림없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틀림없이 도시 삶이 어딘가 비틀리렸다고 느낄 푸름이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틀림없이 입시지옥과 제도권교육과 사회제도 모두 어딘가 튀들렸다고 느낄 푸름이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한 사람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뜻을 되새길 도시 푸름이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한 목숨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빛을 톺아볼 도시 푸름이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한 사랑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꿈을 보듬을 도시 푸름이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제 어버이와 교사를 이끌고 도시를 떠나자고 씩씩하게 외치며 시골 삶을 찾아 빛·꿈·사랑을 일구려 할 도시 푸름이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4345.5.8.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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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와 통하는 윤리학 - 함규진 선생님이 들려주는 윤리와 도덕 이야기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6
함규진 지음, 스튜디오 돌 그림 / 철수와영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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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리·도덕·예의, 착함·참됨·고움
 [푸른책과 함께 살기 92] 함규진, 《10대와 통하는 윤리학》(철수와영희,2012)

 


- 책이름 : 10대와 통하는 윤리학
- 글 : 함규진
- 그림 : 돌 스튜디오
- 펴낸곳 : 철수와영희 (2012.4.19.)
- 책값 : 11000원

 


  1988년부터 1990년까지 다닌 중학교에서 ‘도덕’ 과목을 배웠습니다.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다닌 고등학교에서 ‘철학’과 ‘국민윤리’ 과목을 배웠습니다. 교사들은 우리를 바라보며 “너희는 도덕을 배우면서도 도덕적이지 않다”고 말하기 일쑤였고, “국민윤리를 배우면서 윤리를 지킬 줄 모른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며 교사들한테 대꾸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무렵 교사한테 대꾸 한 마디 할라치면 뺨따귀를 올려붙이거나 몽둥이로 등짝 머리통 허벅지를 마구마구 두들겨팼기 때문입니다.


  1982년부터 1987년까지 다닌 국민학교에서는 ‘바른생활’ 과목을 배웠습니다. 교과서에 실린 이야기는 하나같이 옳고 바른 길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한테 이런 ‘옳고 바른 길’을 가르치는 교사 스스로 옳고 바른 모습을 보여주었다고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학교에서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도록 닦달하고 새마을청소를 시키며 제식훈련과 교련 따위로 우리들 가슴에 군국주의 넋이 스며들도록 내몰았어요.


.. 윤리가 왜 유익할까? 어떤 단체든, 사람이 모여서 만들어진 단체는 질서를 잡기 위한 규칙이 있어야 해 … 법에 앞서 도덕이 있어야 그 사회가 건강해질 수 있고, 그러기에 도덕에 근거해서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윤리가 필요한 거란다 …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지는 간섭과 통제, 참 힘든 문제지 … 윤리학적으로 보면, 이것은 전에 말한 윤리의 정신에서 배려가 너무 지나친 경우라고 볼 수 있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너무 큰 나머지, 그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게 되는 거지 ..  (16∼17, 34쪽)


  고등학생이던 때, 국민윤리 교사한테 한두 차례쯤 여쭌 적 있습니다. 윤리나 도덕이나 철학이란 ‘착한 삶’을 말하려 하지 않느냐고. 그러나 마땅하다 싶은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습니다. 오직 대입시험을 잘 치르는 일 하나와 중간·기말시험에서 내신성적이 잘 나오도록 하는 데에 마음을 쏟으라는 이야기만 듣습니다.


  나는 혼자서 생각합니다. 착하게 살고 참답게 살며 곱게 살아갈 때에 아름답지 않겠느냐고 생각합니다. 바른생활이든 도덕이든 국민윤리이든 철학이든, 동양철학이든 서양사상이든 하나도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좌파가 되든 우파가 되든 무슨 보람이 있을까요. 중도가 되든 극좌나 극우가 되든 무엇이 대수로울까요. 어느 갈래인가를 묻지 않으면서 가장 아름답게 내 삶을 꾸릴 때에 가장 즐겁게 누리는 날이 아닐까요.


  동무들은 거의 모두 책상에 엎드려 자던 고등학교 교실에서 나는 엎드려 자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국민윤리와 철학 과목을 귀기울여 듣지 않습니다. 나는 혼자서 생각에 잠깁니다. 내가 가장 착하게 살아가고 참다이 살림을 꾸리며 곱게 사랑할 길은 어떠한 모습일까 하고 꿈을 꿉니다.


  알맞춤하다 싶을 만한 땅을 얻어 스스로 흙을 일구어 밥과 옷과 집을 마련할 때에 가장 착하고 참다우며 고운 삶이 되리라 느낍니다. 그런데, 나는 흙일을 배운 적 없습니다. 흙일을 가르치는 어른이 없습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며 도시 인문계 학교를 다니며 대학시험에 목매다는 학생으로서, 도무지 흙일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를 헤아리지 못합니다.


  대학교에 가면 흙일을 가르쳐 줄까. 나 혼자 시골마을로 찾아가서 배울 수 있을까. 논밭은 어떻게 마련하지. 논밭을 일구는 동안 밥은 어떡하나.


  혼자서 생각에 잠기고 꿈을 꾸지만, 이런 걱정 저런 근심이 뒤따릅니다. 국민학교 여섯 해와 중학교 세 해에 이어 고등학교 세 해에 다시금 제도권교육에 길들여지면서, 아름다이 꿈꾸며 즐거이 살아가는 일보다, 이런 논리 저런 이론을 앞세워 걱정과 근심을 쌓는 데에 더 마음이 기울어집니다.


.. 그런데 이상하잖아? 지식보다 함께 사는 법, 윤리적 생활방식을 배워야 하는 학교에서 왜 전보다도 더 비윤리적인 일들이 그토록 자주 일어나는 거지? 학교를 윤리적으로 비람직한 공동체로 만들려면 학생들의 주체적인 노력이 필요한 건 아닐까? 선생님들도 옛날이 좋았다는 타령만 늘어놓지 말고, 좋은 대학 보내는 일에 급급해 하지 말고, 학생들이 훌륭한 가치관을 정립하게 하게끔 도와야 하는 게 아닐까? … 전쟁 덕분에 발전한 기술은 ‘목적’조차 아니지. 그저 ‘부수적 효과’일 뿐이지. 로켓이나 인터넷을 개발하려고 전쟁을 벌인 건 아니잖아? ..  (61, 130쪽)


  함규진 님이 쓴 《10대와 통하는 윤리학》(철수와영희,2012)이라는 푸른책을 읽는 동안 지난일이 떠오릅니다. 학교에서 이만 한 깊이와 너비로 바른생활·도덕·국민윤리를 가르치려 했으면 생각이나 삶이나 꿈이 꽤 달라질 수 있었겠다고 느낍니다. 학교에서는 적어도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조차 들려주지 못했습니다. 아니, 학교는 이와 같은 책에서 다루는 이야기를 안 다루거나 멀리하도록 내몰았습니다.


  학교는 아이들을 입시기계가 되도록 몰아붙입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푸른 넋 푸른 꿈을 키우지 못하도록 해야, 이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마치고 나서 기꺼이 군대에 들어가 젊은 넋 젊은 몸을 망가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푸른 사랑 푸른 살림을 살피지 못하도록 해야, 이 아이들이 공무원이나 회사원이 되어 돈벌이하는 일에만 매이도록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책이 교과서보다 넓고 깊게 생각을 담는다 하더라도 이론 이야기와 논리 이야기 테두리에서 벗어나지는 않아요. 교과서보다 이론을 넓게 살피고 논리를 깊이 들여다본다 하더라도 이론이랑 논리 울타리에서 맴돌기는 서로 엇비슷해요.


  스스로 빚는 생각을 엿보지 못합니다. 스스로 누리는 좋은 마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교사이든 교사 아닌 사람이든, 책을 많이 읽고 학교를 오래 다녔으며 나라밖으로 배우러 다녀오기까지 한다지만, 그닥 윤리·도덕·예의를 지킨다고 느끼기 어렵습니다. 훌륭하다는 책을 많이 읽었다거나 대단하다는 학교를 마쳤다 하지만 막상 착함·참됨·고움을 빛내지 못하는구나 싶어요.


.. ‘제 앞가림 못 하는 어른들’ 대부분이 이처럼 청소년기에 ‘도야’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방치되거나 야만적인 억압에 시달렸던 사람들이란다 … 오국이 스스로 의지와 결단으로 국가에 충성한다면 윤리적으로 잘못을 찾기 어렵지만, 누군가가 그런 생각을 오국이에게 주입한 것이라면 결코 옳다고 볼 수 없으니까 … 아렌트가 본 아이히만은 피에 굶주린 야수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거든. 그러나 그런 사람이 광기에 찬 체제의 하수인이 되면,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악행을 저지르게 된다는 거야 ..  (79, 100, 140쪽)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신문읽기도 배웁니다. 신문을 제대로 읽는 길을 익힙니다. 그렇지만, 막상 스스로 ‘신문쓰기’를 하지는 못합니다. ‘제도권 신문 틀’에 맞게 학급신문이나 학교신문을 만들기는 하지만, 아이들 스스로 ‘아이인 내 삶’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야기를 담아 내 나름대로 내 꿈을 펼치는 ‘내 신문’을 빚도록 돕거나 이끌지 않아요.


  아이들한테 권장도서나 추천도서를 읽히고 독후감 숙제를 하도록 몰아세우는 어른들입니다. 아이들 스스로 ‘저마다 마음과 몸에 알맞다 싶은 책’을 스스로 느끼며 찾도록 북돋우지 않습니다. 아이들 스스로 도서관·새책방·헌책방 나들이를 즐기면서 독후감 숙제나 대학입시에서 홀가분한 채 마음닦기를 거드는 책을 찾아 읽도록 살찌우지 않아요. 더 생각한다면, 아이들 스스로 ‘내 삶을 내가 손수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사진을 찍어 엮는 책’을 짓도록 일깨우지 않아요. 무엇보다, 어느 책이든 내가 꾸리는 삶이 밑바탕이 되어 태어나는 줄 찬찬히 들려주지 못해요.


  학교급식은 얼핏 보면 평등한 교육 문화입니다. 그러나, 학교급식이라는 굴레로 다 다른 아이들 다 다른 몸 다 다른 입맛을 다 똑같이 맞춥니다. 가장 좋은 밥을 학교에서 마련해 준다고 하지만, 다 다른 아이들 삶을 살필 수 없는 학교급식입니다. 어느 아이는 고기를 먹을 수 있을 테지만, 어느 아이는 고기를 먹을 수 없습니다. 어느 아이는 소젖을 마실 수 있을 테지만, 어느 아이는 소젖을 마실 수 없습니다. 달걀이나 치즈나 기름이 안 맞는 아이가 있습니다. 밀가루나 유산균이 안 맞는 아이가 있습니다. 채식이라 해서 다 같은 채식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곰곰이 짚을 대목이 있는데, 풀을 먹는 소한테 고기 성분 깃든 사료를 주면 소가 미쳐요. 고기를 안 먹는 아이한테 고기 반찬을 내주는 일이란, 고기를 썰어 넣고 끓인 카레를 주는 일이란, 소한테 고기를 먹이는 일하고 똑같아요. 밀가루나 유산균이 몸에 안 받는 아이한테 국수나 김치나 냉면이나 동치미를 먹으라 하는 일이란, 갈매기한테 새우깡을 먹이며 내장을 망가뜨리는 일하고 같아요.


  아이들한테 가르친다는 윤리란 무엇일까요. 아이들한테 들려준다는 도덕이란 무엇인가요. 아이들한테 다그치는 예의란 무엇이려나요.


.. 우리는 스스로 마음에 비추어,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을 아름답게 여기고 있지. 그 느낌을 느낌으로 끝내지 않고 남을 돕는 일은 옳은 일이야 ..  (119쪽)


  《10대와 통하는 윤리학》이라는 책을 생각합니다. 초·중·고등학교에서 쓰는 교과서란 참 부질없다고 느낍니다. 학교에서 아이들한테 교과서 지식을 외우도록 한대서 아이들은 착함·참됨·고움하고 사귈 수 어려우리라 느낍니다. 그러나, 학교에서 교과서 지식을 외우도록 한다면 윤리·도덕·예의라 하는 지식을 집어넣을 수 있겠지요.


  착하게 살아가는 길 아닌 윤리를 따지는 일을 생각하도록 이끕니다. 참다이 살림하는 길 아닌 도덕을 찾는 일을 생각하도록 이끕니다. 곱게 사랑하는 길 아닌 예의를 살피는 일을 생각하도록 이끕니다.


  그렇다고 《10대와 통하는 윤리학》이라는 작은 책 하나에 이 모두를 어우르는 사랑과 꿈과 이야기를 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이 작은 책 하나는 대한민국에서 제도권학교에 다니며 입시지옥에 시달리며 대학바라기를 해야 하는 아주 많은 아이들이 교과서 윤리와 도덕과 예의 울타리에서 홀가분하게 지내는 넋을 보듬으려 할 뿐이니까요.


  삶을 바꾸고 싶으면 넋을 바꿀 노릇이고, 넋을 바꾸고 싶으면 말을 바꿀 노릇이며, 말을 바꾸고 싶으면 삶을 바꿀 노릇입니다. 학벌사회를 고치고 싶으면 나부터 학벌하고는 홀가분하게 살아가면 됩니다. 가부장사회를 뜯어고치고 싶으면 나부터 서열이나 돈이나 직장을 내세우며 집일하고 등지는 매무새를 뜯어고치면 돼요.


  윤리에 앞서 착한 삶이에요. 도덕에 앞서 참된 넋이에요. 예의에 앞서 고운 말이에요. (4345.4.2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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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금붕어 난 책읽기가 좋아
스테파니 블레이크 지음, 심지원 옮김 / 비룡소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시험공부 때문에 망가지는 어린이
 [어린이책 읽는 삶 19] 스테파니 블레이크, 《빨간 금붕어》(비룡소,2008)

 


- 책이름 : 빨간 금붕어
- 글 : 스테파니 블레이크
- 옮긴이 : 심지원
- 펴낸곳 : 비룡소 (2008.1.18.)
- 책값 : 6500원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를 다니는 동안 시험을 참 많이 치렀습니다. 학교는 무엇인가 배우러 다니는 곳이라 하지만, 그때나 이때나 가만히 돌아보면, 학교는 시험을 치르는 곳이 아니랴 싶습니다. 늘 시험을 치르고, 언제나 시험문제를 외도록 내모는 곳이라고 느껴요.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배우는 즐거움’이나 ‘배운 무언가를 나누는 기쁨’을 맛볼 겨를이 없어요. 어쩌면, 처음부터 이러한 이야기하고는 동떨어진 데가 학교라 할 수 있어요. 배움도 가르침도 나눔도 없이, 시험문제와 성적표만 남는 데가 학교인지 몰라요.


.. 나는 알리스와 함께 교실에 들어갔어요. 곧 수학 시험이 시작되었지요. 아는 문제가 하나도 없었어요. 옆을 슬쩍 보았더니 알리스는 거의 다 푼 거 있죠. 난 하나도 풀지 못했는데 말이에요. 나는 알리스의 시험지를 베끼려고 했어요. 그러자 알리스가 신경질을 내더니 큰 소리로 외쳤어요. “선생님! 잔이 내 걸 훔쳐봐요.” ..  (8∼9쪽)


  학교가 학교다움을 잃은 모습이 ‘한국땅다운 학교 모습’으로 뿌리내렸다고 느낍니다. 초·중·고등학교 모두 대학교만 바라보도록 이끌어요. 대학교를 바라보는 눈길은 내 꿈이나 뜻이나 사랑이 아닌 성적표 한 가지입니다. 막상 대학교에 들어간 뒤에도 꿈이나 뜻이나 사랑은 아랑곳없이 학점과 자격증과 이력서만 살피고 맙니다. 학문도 자유도 생각과 사랑도 없는 톱니바퀴입니다.


  왜 학교에서는 삶을 가르치지 않을까요. 왜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서로 어울려 즐거이 놀도록 놓아주지 않을까요.


  학교를 세우는 까닭은 모든 아이들 머리속에 틀에 박힌 지식조각을 집어넣어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학교를 보내는 까닭은 모든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도록 미리 담금질을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학교에서 외우는 교과서로 아이들 모두 똑같은 넋 똑같은 몸짓 똑같은 차림새로 닦달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동무를 만나고 언니 오빠 동생 누나 형하고 어울리려고 학교에 갑니다. 저마다 다른 보금자리에서, 저마다 다른 마을에서, 저마다 다른 어버이한테서, 그동안 차근차근 받으며 북돋운 꿈과 뜻과 사랑을 다 함께 예쁘게 나눌 뜻으로 한 자리로 모입니다.


  이야기가 있을 때에 학교입니다. 회초리가 있거나 출석부가 있거나 교과서가 있으면 학교가 아닙니다. 마음이 있을 때에 학교입니다. 시험지가 있거나 성적표가 있거나 행동발달사항을 따질 때에는 학교가 아닙니다. 흙이 있고 나무가 있으며 풀이 자랄 때에 학교입니다. 시멘트 건물에다가 플라스틱 잔디를 운동장에 깔고는 주차장이 자동차로 득시글거린다면 학교가 아닙니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삶을 함께 나눌 때에 비로소 학교입니다. 아이들이 서로서로 생각을 주고받을 때에 바야흐로 학교입니다. 어른들이 아이들보다 여러 해 먼저 더 살아온 나날을 슬기로이 빛내며 좋은 꿈을 들려줄 때에 시나브로 학교입니다.

 


.. 수학은 아무래도 모르겠는데 어쩌라고요 … “수학을 빵점 맞았어요. 아무것도 모르겠단 말이에요. 이제 학교에도 가기 싫어요!” “잔, 들어 보렴.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야. 넌 국어랑 체육, 음악, 미술을 아주 잘하잖니.” ..  (10, 13쪽)


  학교에서 시험을 치르던 일은 언제나 괴롭게 떠오릅니다. 수도 없이 치른 시험 가운데 즐거웠던 일은 한 차례조차 없습니다. 시험공부도 괴로울 뿐이요, 시험을 치르고 나서 온 학교가 몽둥이찜질 소리로 가득 퍼질 때에도 괴로울 뿐입니다. 가을이면 시골집마다 콩 터는 소리 가득하다지만, 시험을 치르고 나면 교실마다 교사란 이름을 단 어른들이 학생이란 꼬리표 붙은 아이들을 흠씬 두들겨패며 엉덩이 살점 떨어지도록 털어대는 소리만 맴돌았어요. 나로서는 이런 끔찍한 감옥살이를 학교라 느낄 수 없어요.


  문득 생각합니다. 왜 옆 짝꿍한테 답을 알려주면 안 될까요. 왜 나는 옆 짝꿍한테서 답을 들으면 안 될까요. 서로서로 잘 모르니, 서로서로 머리를 맞대어 문제 하나 풀 수 없는가요. 여럿이 모둠을 지어 어려운 길을 헤쳐 나가도록 할 수 없을까요. 조금 더 잘 하는 아이는 조금 더 못 하는 아이를 돕습니다. 조금 더 똑똑한 아이는 똑똑한 머리를 씁니다.


  몸이 재거나 튼튼한 아이만 운동장에서 공을 차거나 던지며 놀아야 하지 않아요. 몸이 굼뜨거나 여린 아이도 함께 섞이고 얼크러지면서 즐거이 공놀이를 할 수 있어야 해요. 서로 돕고 서로 마음을 기울이며 웃음꽃이 피고 땀열매를 맺을 때에 ‘체육’이고 ‘교육’이며 ‘학교’예요.

 


.. 안느 아줌마는 예순 살이에요. 아줌마는 화가이기 때문에 자기 집에서 일해요. 아줌마는 여러 가지 색깔이 들어간 아주 크고 화려한 그림을 그려요. 나는 아줌마가 쓰는 색깔들을 무지무지 좋아하지요. 그 색깔들을 보고 있으면 빨래 집으로 돌아가 그림을 그리고 싶어져요. 안느 아줌마는 늘 즐거워 보여요. 자기 일을 정말로 사랑하는 것 같아요 ..  (18쪽)


  이 사회가 온통 돈 이야기로만 흐르는 까닭이 어디 한 가지 때문이겠습니까만, 아이들이 어린이집 다닐 때부터 과외니 영어니 뭐니 뭐니 하면서 지식조각만 머리에 집어넣다가는 초등학교 들어서기 무섭게 입시지옥 굴레에 가두니까,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돈 아니고는 헤아리지 않으리라 느껴요.


  이 사회가 몸이 아프거나 힘든 이웃을 살피지 못하는 밑뿌리도, 이 사회가 서로서로 예쁘게 얼크러지는 길로 나아가지 않는 밑바탕도, 이 사회가 오직 도시를 키우고 불리며 먹여살리는 흐름에서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 밑모습 또한, 하나같이 학교 때문이라고 느껴요. 시험만 치르는 학교, 성적표만 만드는 학교, 아이들 머리통만 커다랗게 부풀리는 학교, 이런 학교가 아이들을 망가뜨리고 삶터를 망가뜨리는구나 싶어요.

 


.. 오늘은 아빠가 쉬는 날이에요. 아빠는 하루 종일 나와 함께 있었어요. 아빠는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방바닥에 커다란 천을 깔아 주었지요. 나는 온종일 그림을 그렸어요. 학교나 뱅상, 알리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죠 ..  (27쪽)


  스테파니 블레이크 님이 빚은 조그마한 이야기책 《빨간 금붕어》(비룡소,2008)를 읽습니다. 시험공부 때문에 망가지는 어린이 이야기를 읽습니다. 이 슬픈 어린이 곁에는 지난날 똑같이 시험공부 때문에 망가질 뻔하다가 씩씩하게 살아난 ‘예순 살 그림쟁이 할머니’가 있습니다. 예순 살까지 살아오며 즐거이 그림을 빚는 할머니는 고작 열 살쯤 되었을까 싶을 어린 벗한테 슬기로운 꿈을 곱게 들려줍니다. 열 살쯤 되었을까 싶을 어린이는 예순 살 그림쟁이 할머니를 좋은 벗으로 삼아 ‘삶넋’을 맞아들입니다.


  학교에서는 한 마디조차 듣지 못하던 삶넋입니다. 동무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 아이한테 속삭이지 않던 삶넋이에요. 교사도 교장선생도 어느 누구도 이 가녀린 어린이한테 예쁜 꿈이나 멋진 뜻이나 좋은 사랑을 나누지 않았어요. 학교에서는 어른이나 어린이나 몽땅 삶넋하고는 동떨어지고 말았어요.


  《빨간 금붕어》에 나오는 어린이는 학교 따위 금세 때려치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어린이는 학교를 굳이 때려치우지 않습니다. 같은 학교를 다니는 동무 가운데 하나를 좋아하거든요. 이 어린이는 아프고 슬픈 마음을 스스로 달래고 북돋웁니다. 예순 살 할머니를 동무로 삼으며 삶넋을 찬찬히 받아들이면서 제 꿈을 살찌우고 사랑을 꽃피웁니다. 이리하여, 바보스러운 학교 바보스러운 교사 바보스러운 학급동무를 차근차근 바꾸어 내요. 살가운 손짓 하나로 바꿉니다. 따스한 눈짓 하나로 바꿉니다. 포근한 몸짓 하나로 바꿉니다.


  살아가는 밑힘은 사랑입니다. 살아가는 밑넋은 꿈입니다. 살아가는 밑앎은 슬기입니다. 이제라도 학교가 학교다움을 찾으려 한다면, 바로 사랑·꿈·슬기가 무엇인가를 헤아리면서 곱게 아낄 수 있어야 합니다. (4345.3.13.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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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육아의 원형을 찾아서 - 아마존 예콰나족에게서 ‘인간 본성을 존중하는 육아법’을 배운다
진 리들로프 지음, 강미경 옮김 / 양철북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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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어른들은 왜 아이들을 안 사랑하는가
 [사랑하는 배움책 4] 진 리들로프, 《잃어버린 육아의 원형을 찾아서》(양철북,2011)

 


- 책이름 : 잃어버린 육아의 원형을 찾아서
- 글 : 진 리들로프
- 옮긴이 : 강미경
- 펴낸곳 : 양철북 (2011.6.10.)
- 책값 : 13000원

 


 아이를 돌보는 일이란 어버이인 내 삶을 돌보는 일이라고 느낍니다. 어버이로 살아가며 내 삶을 사랑한다면, 나와 함께 살아가는 아이들을 똑같이 사랑하는구나 싶어요. 어버이로 지내는 내 꿈을 북돋운다면,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며 가슴으로 품을 꿈을 곱게 보듬는구나 싶어요.

 

 어버이인 내 삶을 돌보지 않으면서 아이들만 잘 지내라 할 수 없습니다. 어버이인 내 삶을 내팽개치면서 아이들만 씩씩하게 자라라 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한국에서 손꼽히는 대학교에 들어가도록 뒷배를 한대서 어버이 노릇을 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아이들한테 대학교 배움값을 대준대서 어버이 구실을 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설 수 있도록 꿈과 사랑을 북돋우는 어버이가 아니라면, 어버이로서 옳고 바르게 살았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착한 꿈과 맑은 사랑을 꽃피우도록 이끈 어버이가 아니라면, 어버이답게 즐겁고 아름답게 살았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 서구의 아기들이 사무실이나 가게, 작업실, 심지어는 저녁 모임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기들은 대개 시끄럽게 울어대며 발길질을 하거나 팔을 휘두르고 온몸이 뻣뻣하게 긴장돼 있다. 그래서 아기를 얌전히 있게 하려면 누군가의 두 손과 엄청난 관심이 필요하다 … 물론 가장 좋은 의도를 가지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해 온 행동을 생각하면 너무나 끔찍하다. 하지만 우리 못지않게 무지하고 순진했던 부모님이 우리를 대하던 태도와 그 때문에 그분들이 겪었을 고통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 어머니나 아버지의 역할에 여성이냐 남성이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 이른바 ‘선진국’에서는 출산을 앞두고 육아 책을 사들이는 것이 관행이다 … 젊은 엄마들은 자신의 타고난 능력은 깡그리 무시한 채, 아직은 완벽하게 분명한 신호를 보내는 아기의 ‘동기’도 깡그리 무시한 채 책을 읽고 그대로 따른다 ..  (11, 15, 73, 74쪽)


 밤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칭얼거리는 아이를 무릎에 누입니다. 옆지기는 지난밤 몇 시간이나 애먹으며 아이를 안고 달랬습니다. 이 녀석은 왜 이렇게 고이 잠들지 못할까요. 무서운 꿈이라도 꾸었을까요. 몸 어디가 아플까요. 낑낑거리며 자꾸 우는 아이를 번쩍 안고 마당으로 나옵니다. 방문을 열고 깜깜한 바깥을 내다 보면, 이제 별들이 찬찬히 사라지는 까만 하늘을 올려다보면, 저 멀리부터 시나브로 동이 트려고 옅은 빛이 바뀌는 모습을 살펴보면, 아이는 얌전합니다. 마당을 걷거나 마을을 한 바퀴 돌거나 뒤꼍에서 어르는 동안, 아이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조용합니다.

 

 잠자리가 아이한테 더웠을는지 모릅니다. 살짝 바람을 쐬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아니, 더 따사로이 보듬고 더 포근하게 감싸는 손길을 바랐을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이 하루하루 조금씩 크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란, 내가 이 아이들만 한 나이를 어떻게 살아내며 내 어버이한테 빛과 사랑과 꿈이 되었는가를 돌아보는 일입니다. 내 아이들은 나한테 고운 빛이요 사랑이며 꿈입니다. 나는 내 어버이한테 고운 빛이요 사랑이며 꿈입니다. 내 아이들은 앞으로 저희 아이들을 낳아 저희대로 새로운 빛이며 사랑이랑 꿈을 느끼겠지요.


.. 아기는 끊임없는 신체 접촉을 통해 나중에 직접 맛보게 될 경험을 하나씩 눈에 담는다. 가만히 품에 안겨 있는 동안에도 아기의 감각은 모두 깨어 있다 … 갓 태어난 아기는 자궁 밖으로 나오면서 겪게 되는 이런 급속한 변화와 그 밖의 느낌을 놀랍도록 침착하게 견뎌낸다 … 어떤 상태든 아기는 어른보다 자신의 경험에 더 민감하다. 자신이 받은 인상을 완화해 줄 선례가 없기 때문이다 … 하지만 (아기는) 죽음과도 같은 무의 상태나 안에 천을 깔아 놓은 바구니, 움직임이나 소리, 냄새, 기타 생명의 느낌이 전혀 없는 플라스틱 상자로 뛰어오를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자궁 안에 있는 동안 형성되었던 어머니와 아기의 견고한 관계가 갑자기 단절될 경우 아기만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도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 ..  (17, 66, 67, 75쪽)


 목숨은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이 아이들 목숨도 어버이인 내 목숨도 모두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어버이로 지내는 나를 갓 낳으며 막 어버이가 된 내 어머니와 아버지도 아름다운 목숨이요, 내 어머니와 아버지를 낳은 웃 어머니와 아버지 또한 아름다운 목숨입니다.

 

 아름다운 목숨이기에 한삶 고이 누리고서는 흙으로 돌아갑니다. 아름다운 목숨인 만큼 한삶 고이 누리려 신나게 태어납니다. 흙에서 이 땅을 박차고 일어섭니다.

 

 얼마만큼 살아야 좋다 여길 만한 삶인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마흔 해를 살아내면 즐거이 살아낸 나날인지, 예순 해는 살아내야 즐거이 살아낸 나날이 될는지, 여든 해나 백 해쯤 살아내야 즐거이 살았다 할 만한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나이를 더 먹기에 더 기쁜 삶이라고는 느끼지 않아요. 돈을 좀 많이 모았기에 기쁜 꿈이라고는 느끼지 않아요. 책을 많이 읽거나 글을 많이 썼다면 더 기쁜 사랑이라 할까요.

 

 바야흐로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오는 날씨입니다. 마을 논둑에는 봄까치꽃이 핍니다. 아직 다른 꽃은 피지 않습니다. 드문드문 동백꽃이 봉오리를 열곤 합니다만, 아직 봉오리를 닫은 동백나무가 훨씬 많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새봄 기운을 곳곳에서 마주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 이 새봄은, 해마다 맞이하는 새봄은, 언제 보아도 즐겁습니다. 열일곱 차례 맞이하던 새봄도, 스물일곱 차례 맞이하던 새봄도, 서른일곱 차례 맞이하는 새봄도 언제나 즐겁습니다. 앞으로 새봄을 얼마나 더 볼는지 모르지요. 한 차례 더 보고 삶을 마감할는지, 서른일곱 차례를 더 볼 수 있을는지, 쉰일곱 차례를 더 볼 수 있을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더 볼 수 있대서 더 좋은 삶은 아니요, 더 볼 수 없어서 더 나쁜 삶은 아니에요.


.. 전문가들이 만족스럽게 사는 법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하지만 발견하는 데 실패하면 할수록 그들은 이성의 힘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들면서 이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은 없다고 주장한다 … 문화가 지성에 의존할수록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선 개인에게 더 많은 제약을 가할 수밖에 없다 … 문명사회의 구성원에게서 나타나는 출생외상이라는 현상의 주된 원인은 철제 도구나 눈부신 조명, 고무장갑, 살균제와 마취제 냄새, 왕왕거리는 목소리, 기계 소리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출생 과정에서 외상을 입지 않으려면 아기의 경험이 아기와 아기 어머니의 태곳적 기대에 부합해야 한다 ..  (54, 61, 102∼103쪽)


 진 리들로프 님이 쓴 《잃어버린 육아의 원형을 찾아서》(양철북,2011)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아이를 돌보는 참모습을 찾아나서는’ 이야기를 다루는 책입니다. 아마존 예콰나겨레 사람들이 아이를 어떻게 낳아 어떻게 돌보며 어떻게 사랑하는가 하는 대목을 가만히 살펴보면서 ‘서양사람이 나날이 잃거나 잊는 사랑과 꿈’이 무엇인가를 헤아리는 책입니다.

 

 책을 읽지 않았을 때에도 알고, 책을 읽고 나서도 알 만한 이야기인데, 아마존 예콰나겨레한테 학교란 없습니다. 사람들이 익히 아는 북중미 붙박이한테도 학교란 없습니다. 북극 붙박이한테도 학교란 없습니다. 한겨레 옛사람한테도 학교란 없습니다. 곰곰이 따지면, 임금이나 사대부나 권력자한테조차 학교란 없습니다. 흙을 일구거나 길에서 장사하던 여느 사람들한테만 학교가 없지 않았어요. 누구한테나 학교란 없습니다.

 

 임금이나 사대부나 권력자한테는 ‘늘 곁에 붙어 무언가 가르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느 사람들한테는 ‘늘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있어요. 여느 사람들 어버이나 살붙이는 ‘늘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습으로 삶과 사랑과 꿈을 가르쳐요. 삶을 가르치고 삶을 배웁니다. 삶을 보여주고 삶을 물려받아요.

 

 김치를 담그든 밥을 하든 벼를 빻든 베틀을 밟든 물레를 잣든 바느질을 하든, 어떤 학교를 다녀야 배우지 않습니다. 따로 어떤 교과서나 교재가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며 배울 대목이란 학교나 교과서로는 가르치지 못하고 배우지 못합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며 배울 모든 것은 ‘내가 사랑할 사람하고 살아가는 오늘 하루’ 서로서로 가르치며 배웁니다.


.. 아이를 이해해서도 신뢰해서도 안 된다고 배우는 ‘특권’을 갖지 못하는 제3세계 부모들은 네 살이 넘은 아이에게는 예외 없이 집안일을 시키면서 온 가족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 곰곰이 따져 보니 물을 긷는 시간을 그보다 ‘더 알차게’ 보낼 수는 없었다. 적어도 행복의 관점에서 보면 그랬다. 반대로 진보나 그 부산물인 속도, 효율성, 새로운 방식이 기준이라면 물을 길러 가는 것은 누가 보아도 어리석은 짓이었다 … 아이들은 흉내 내기 좋아하고 잘 어울리고 개인과 종을 보존하려는 성향을 보이지만, 갓난아기를 어떻게 하면 잘 돌볼 수 있는지 같은 세부 사항도 알고 있다 ..  (20, 43, 147쪽)


 서양사람은 아이를 돌보며 사랑하는 길을 잃습니다. 미국사람이든 유럽사람이든 거의 매한가지입니다. 한국사람도 일본사람도 아이를 아끼며 사랑하는 길을 잊습니다. 도시사람이든 시골사람이든 한결같이 슬프도록 사랑을 잊습니다.

 

 아이는 아이답게 배울 대목을 배우며 살아야 합니다. 아이는 사람답게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는 길을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지내는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돈이야 물려주고 싶으면 얼마든지 물려주겠지요. 돈이야 벌려 하면 언제라도 얼마든지 벌겠지요. 지식이나 졸업장이야 얻고 싶으면 얼마든지 얻겠지요. 지식이나 졸업장이란 얻으려 하면 언제라도 마음껏 얻겠지요.

 

 한 살 갓난쟁이가 한 살일 적 사랑을 받지 못하면, 이 한 살 때 사랑은 어떻게든 돌이키지 못합니다. 이 사랑을 돌이키려 하면 아주 힘들며 아주 오래 걸립니다. 두 살 아이가 두 살일 적 사랑을 누리지 못하면, 이 두 살 때 사랑은 어떻게든 갚지 못합니다. 이 사랑을 갚으려 하면 몹시 힘겨우며 매우 오래 걸립니다.

 

 세 살, 네 살, 다섯 살 아이들한테는, 또 여섯 살, 일곱 살, 여덟 살 아이들한테는 학원이나 영어나 유치원이나 만화영화는 하나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저를 낳은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받으며 나날이 즐겁게 누리는 꿈이 가장 대수롭습니다.


.. 경제력이 웬만큼 뒷받침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손을 움직이고 싶어하는 본능을 골프장에서, 지하실 작업장에서, 요트 정박소에서 해소한다 … 큰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려고 갈망하고, 권력을 쥔 사람들은 그 권력으로 더 많은 권력을 탐한다. 하지만 최종 목표에 이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밖에서 주어진 갈망에 사로잡힌 채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지 못하면 아무리 갈망을 채워도 마음에 차지 않기 때문이다 … 남편을 차갑거나, 무심하거나, 냉담하다고 생각하는 어머니는 거의 절반이 아이가 사고를 당할 때 남편으로부터 따스한 애정을 받지 못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 우리 사회에서 권리가 주어진다면 그 이유는 고통이 크기 때문이 아니라 당사자가 나서서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불평하기 때문이다 ..  (117, 180, 195, 250쪽)


 돈이 좀 없으면 없는 대로 그럭저럭 살림을 꾸립니다. 돈이 꽤 많이 없으면 많이 없는 대로 그야말로 허리띠 졸라매며 살림을 꾸립니다. 어떻게든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어떻든 살림을 꾸립니다.

 

 사랑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곧 죽음입니다. 사랑을 누리지 못하거나 사랑을 받지 못하니, 돈이 아무리 많더라도 쓸쓸하거나 허전하거나 괴롭거나 힘겨워 그만 목숨을 놓고 맙니다.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삶이기에, 이름이 높거나 동무가 많거나 돈이 많거나 무엇무엇이 많다지만, 살아갈 뜻을 찾지 못해 그예 목숨을 내려놓고 맙니다.

 

 일삯을 많이 쳐주는 일터가 더 좋다고 느끼지 않아요. 일삯이 조금 적어도 즐거이 일하며 사랑스러운 꿈을 키울 만한 일터가 더 좋다고 느껴요. 아니, 일하는 곳이라면 일하는 동안 즐거이 사랑을 키울 만해야지요. 즐거울 수 없고 사랑스러울 수 없다면, 일하는 뜻이나 값이란 없어요. 즐거이 읽는 책이고, 즐거이 먹는 밥이며, 즐거이 마주하는 아이들입니다. 서평을 쓰자며 읽는 책이거나, 끼니를 때우려 먹는 밥이거나, 낳았으니 할 수 없이 학교에 넣는 아이들이라면 얼마나 슬프며 괴로울까요.


.. 삶의 목적은 삶이며, 행복의 목적은 행복의 느낌을 고양하는 데 있다. 출산의 목적은 계속해서 생명을 낳는 데 있다. 이런 순환은 절대 무의미하지 않으며, 모든 종류의 순환을 통틀어 가장 좋은 것이다 … 아이는 고통을 참거나 갓난아기처럼 어머니의 품에서 위안을 받고 싶어하는 욕구를 전혀 억누르려 하지 않았다. (예콰나족에서는) 다들 그런 아이를 이해했지, 혀를 차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낯선 곳에서 어머니 곁에 최대한 붙어 있으려는 욕구는 아기의 본성이다 … 우리에게는 지성을 사용해 예콰나족과 우리 조상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저 지식으로 되돌아가는 길밖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 아기가 태어나고 나서 1년 동안은 곁에 있어 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다면 아기의 평생에 나쁜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어머니 자신에게도 두고두고 짐이 될 박탈을 막기 위해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 ..  (116, 130∼131, 143, 168, 247쪽)


 《잃어버린 육아의 원형을 찾아서》를 쓴 진 리들로프 님은 아마존 예콰나겨레를 살펴보며 ‘서양사람 스스로 잃거나 잊은 사랑과 꿈’을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간추려, 사람을 사람답게 섬기며 돌보는 고운 손길을 아마존 예콰나겨레한테서 찾았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면, 지구별 모든 겨레가 아마존 예콰나겨레처럼 해야 할까요?


.. 아이들은 어른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닐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거의 불가능한 우리 문화권에서는 누가 가르쳐 줄 때보다 마음에서 우러나올 때 따라하고 학습하려는 아이들의 성향을 학교와 교사가 잘 활용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 지속적인 신체 접촉 욕구를 모두 충족하며 자신의 연속성 안에서 편안히 지내는 아기는 굳이 에너지를 배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남는 에너지는 자신을 안고 분주하게 활동하는 어른이나 아이한테 넘겨주면 되기 때문이다 … 품을 박탈당한 어른들 사이의 사랑은 개인이 경험한 박탈의 성격에 따라 형태만 다를 뿐 두 가지 욕구의 혼합이라는 점에서 본질은 모두 똑같다 ..  (219, 236, 239쪽)


 서양사람 누구한테나 있었으나 서양사람 누구나 쉬 내버린 사랑이 무엇인지 살펴야 합니다. 한국사람 누구한테나 있었으나 한국사람 누구나 함부로 내팽개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제도권 울타리에서는 사랑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사회 테두리에서는 사랑자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학교 틀거리에서는 사랑말을 찾을 수 없습니다.

 

 내 보금자리에서 사랑길을 찾아야 합니다. 내 보금자리 깃든 마을에서 사랑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내 살붙이와 복닥이는 조그마한 집에서 하루하루 삶을 누리고 생각하면서 사랑말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요즘 어른들이 왜 아이들을 안 사랑하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요즘 어른들 스스로 사랑스레 일구지 않는 삶을 옳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요즘 어른들부터 맑은 사랑하고 등지는 슬픈 모습을 참다이 헤아려야 합니다.

 

 아이들이 거친 말을 일삼거나 못된 짓을 벌인다면, 이 모든 거친 말을 어른들이 즐겨쓰기 때문이요, 이 모든 못된 짓을 어른들이 자꾸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한테서 배우지, 따로 어떻게 나쁜 짓을 스스로 생각해 내지 않습니다. 어른들이 착하고 참다우며 아름다이 꾸리는 삶일 때에, 아이들은 이 어른들 삶을 날마다 가만히 바라보면서 착하고 참다우며 아름다이 돌볼 제 삶을 사랑으로 빛낼 수 있습니다. (4345.3.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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