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집에 살아야 행복할까? - 집 길담서원 청소년인문학교실 4
고제순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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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운 숨결 사랑하는 집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57] 길담서원 청소년 인문학교실 4, 《나는 어떤 집에 살아야 행복할까?》(철수와영희,2012)

 


- 책이름 : 나는 어떤 집에 살아야 행복할까?
- 글 : 고제순·서윤영·노은주·이재성·조광제·손낙구
- 펴낸곳 : 철수와영희 (2012.12.10.)
- 책값 : 13000원

 


  언제나 한밤에 이듬날 아침에 먹을 밥을 헤아립니다. 이른새벽이 되면 아침에 끓일 국을 생각합니다. 집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집에서 먹는 밥을 마련합니다. 아침 낮 저녁 세 끼니를 먹든, 아침 저녁 두 끼니를 먹든, 때로는 낮에 한 끼니를 먹든, 내 몸을 살리는 밥을 돌아봅니다.


  밥을 먹어 몸 움직일 기운을 얻습니다. 몸뚱이는 밥을 먹으며 새롭게 기운을 내어 하루를 누립니다. 그러면 마음은? 마음도 밥을 먹어야 기운을 얻을까요. 마음은 밥을 먹지 않아도 한결같이 기운이 넘칠까요. 마음은 몸이 지칠 때에 나란히 지치고, 마음은 몸이 씩씩할 때에 나란히 씩씩할까요.


.. 고등학교 때 저는 제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입시 위주의 공부만 했죠.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왜 대학에 가야 하지?’ 학교에서는 밤늦도록 우리를 잡아 놓고 공부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정작 저는 그 필요성을 못 느꼈어요 … 막상 대학에서 수업을 받으면서 크게 실망했어요. 대학이 제가 그리던 이상적인 상아탑이랄까, 그런 곳이 아니었던 거예요. 학교를 그만둘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갈등과 방황이 깊었죠. 그러면서 얻은 결론이 뭐냐 하면, 공부라는 것은 교수나 선생님으로부터 배우는 것도 있지만 스스로 찾아서 하는 게 진짜 공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18∼19쪽/고제순)


  누가 가르치거나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어릴 적부터 몸과 마음이 서로 어떻게 얽히는가를 살펴봅니다. 교과서 같은 데에는 이런 이야기가 안 나오고, 중학교에서 도덕 배우거나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배우더라도 이런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밭에서는 몸과 마음이 얽히고 맺으며 꾸리는 삶을 곱씹습니다.


  여러 끼니를 굶거나 여러 날 굶어 봅니다. 이때에 마음이 배고픔을 느끼거나 힘들다고 느끼거나 지친다고 느낄까요. 무언가 먹지 않을 적에 마음이 괴롭거나 슬프거나 어딘가 막힌다고 느낄까요.


  배불리 먹으면 마음이 느긋할까요. 넉넉히 먹으면 마음이 한갓질까요. 따순 밥을 먹으면 마음도 따사롭게 거듭날까요.


  밥은 틀림없이 몸을 살찌웁니다. 밥은 참말 몸이 새롭게 움직일 기운을 북돋웁니다. 그러나, 끼니에 맞추어 무언가 먹어야 비로소 ‘살아간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스스로 어떤 마음이 되느냐에 따라 내가 먹는 밥이 달라진다고 느껴요. 스스로 기쁜 마음일 때에는 어떤 밥을 먹든 기쁜 기운이 스며들고, 스스로 서운하거나 힘들거나 지친 마음일 때에는 어떤 밥을 먹더라도 서운하거나 힘들거나 지친 기운이 찾아드는구나 싶어요.


  밥과 함께 떠올리는 옷이랑 집도 이와 같아요. 대단한 옷을 입거나 놀라운 집에서 살아야 하지 않아요. 마음을 홀가분하게 건사하면서 즐겁고 맑게 누릴 수 있는 옷을 입으며 집을 얻어야 해요. 값진 옷이나 집은 덧없어요. 예쁜 옷이나 집은 부질없어요. 사랑스러운 옷이나 집일 때에 사랑스럽습니다. 즐거운 이야기 꽃피우도록 마음을 보드라이 어루만지는 옷이나 집일 때에 즐겁습니다.


.. 지금 우리가 사는 집들은 대부분 규격화된 건물입니다. 옷으로 치면 기성복 같은 거죠. 예전엔 달랐습니다. 내 몸에 맞는 옷을 지어서 입었죠. 한복도 그렇고 양복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옷 가게에 가서 얼추 비슷한 치수에 맞춰 입잖아요. 그러다 보면 정확히 내 몸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 몸이 다 다르잖아요 ..  (86쪽/노은주)


  오늘날 학교에서는 밥도 집도 옷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어린이집이나 보육원부터,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교사 구실을 하는 어른들은 학생 노릇을 하는 아이들한테 밥이며 집이며 옷을 가르치지 못해요. 고운 숨결 사랑하는 밥과 집과 옷을 가르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어쩌면 너무 쉬운 얘기일 텐데, 교사들은 사범대학이나 교육대학교에서 ‘교과서 지식 잘 가르치는 길’만 익힐 뿐, ‘아이들이 삶을 바라보고 누리며 사랑하는 길’은 익히지 않아요. 교육학과 수업에서는 아이들 삶을 헤아리지 않아요. 언제나 ‘교과서 지식 잘 가르치는 길’만 다뤄요. 교사자격증이란 ‘교과서 지식 잘 가르치는 길’을 알뜰히 해내는 사람한테 주지, 아이들 삶을 헤아리는 어른한테는 주지 않아요.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며 시험공부만 할 수 있다고 할까요. 아이들은 학교에 오래오래 붙들리면서, 정작 밥이랑 집이랑 옷하고는 동떨어진다고 할까요. 게다가, 오늘날 학교는 초·중·고등학교 모두 급식을 해요. 대학생이 되는 아이들 가운데 도시락을 손수 싸서 먹는 아이는 아주 드물어요. 고등학생 때까지는 학교와 집에서 아무렇지 않게 얻어먹기만 하고, 대학생 때부터는 학교 안팎에서 돈을 주고 사다 먹기만 해요.


  밥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생각할 겨를이나 구석 하나 없는 오늘날 아이들이에요. 아이들한테 밥삶과 밥틀과 밥바탕과 밥결을 보여주거나 가르치거나 나누지 못하는 어른들이에요. 이리하여, 집 이야기랑 옷 이야기도 옳게 보여주지 못해요. 옳게 보여주지 못하니 옳게 가르칠 수 없겠지요. 옳게 가르치지 못하는데 옳게 나눌 수 없어요.


.. 당시 지붕의 재료로 쓰인 슬레이트가 1급 발암물질인 석면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그래서 요즘 지자체에서는 슬레이트 지붕을 철거하고 있습니다. 새마을 운동은 지붕을 바꾸고 마을길을 넓히면서 우리 삶의 흔적을 지웠을 뿐 아니라, 신화라든지 설화, 전래 민요, 민담 등 예부터 입으로 전해 오던 전통적인 구비 문화, 즉 상상력이 풍부해지는 우리 문화의 근거를 지웠다는 점에서 일종의 정신 개조 운동이기도 했어요 ..  (138쪽/이재성)


  모든 밥은 흙에서 얻습니다. 모든 흙은 햇살과 바람과 물이 살찌웁니다. 햇살과 바람과 물은 사람 스스로 사랑하고 아끼면서 빛납니다. 곧, 햇살과 바람과 물은 흙을 살리고, 흙은 사람을 살리며, 사람은 햇살과 바람과 물을 살려요.


  사람 스스로 슬기로울 때에는 햇살과 바람과 물을 살립니다. 사람 스스로 어리석을 때에는 햇살과 바람과 물을 죽여요.


  잘 살펴보셔요. 오늘날 물질문명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햇살과 바람과 물을 얼마나 어처구니없이 짓밟거나 무너뜨리거나 죽이는가를 잘 살펴보셔요. 대통령 한 사람이랑 공무원 여럿이랑 개발업자 몇몇이랑 똘똘 뭉쳐 밀어붙이는 4대강사업 하나만 햇살과 바람과 물을 짓밟지 않아요. 아무 생각 없이 어디로든 자가용 몰고 다니는 여느 사람들도 햇살과 바람과 물을 무너뜨려요. 흙을 안 밟고 흙을 안 만지며 흙을 안 쳐다보는 곳에서 시멘트랑 이웃되어 살아가는 도시사람 누구나 햇살과 바람과 물을 죽여요.


  수도물 놓는다며 댐을 짓고 땅을 파헤치며 온갖 쇠붙이와 플라스틱을 골골샅샅 파묻습니다. 우리가 왜 수도물을 마셔야 하지요? 우리가 왜 먹는샘물을 사다 마셔야 하지요? 흐르는 냇물이 가장 맑고 시원할 텐데요. 골짝물을 마시고 시냇물이랑 도랑물을 마실 수 있어야 할 텐데요. 온누리 물줄기를 죄 더럽히고 나서 화학약품으로 못물을 걸러 수도물을 마시도록 해야 사람 숨결이 곱게 빛날까요. 모든 들판과 갯벌과 바다와 숲을 깡그리 더럽히고 나서 방부제와 첨가물과 항생제를 쓴 가공식품을 먹도록 해야 사람 숨결이 환하게 빛날까요.


  모든 밥이 흙에서 나오듯, 모든 집과 옷 또한 흙에서 나옵니다. 하늘에서 똑 떨어지는 집이나 옷은 없습니다.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는 밥이요 집이며 옷입니다. 석유이든 석탄이든 가스이든, 흙에서 비롯하지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화학방정식으로 짜서 만들지 못해요. 화학방정식으로 짜더라도, 흙에서 얻는 화학조합물이지 어디에서 짠 하고 나타나지 않아요.


.. 이사를 하는 이유가 뭘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죠. 직장이나 학교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많은 이유는 바로 집을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자기 집을 소유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평균 이사 횟수에 차이가 납니다 ..  (212쪽/손낙구)


  서울 어느 골목 한켠에 깃든 〈길담서원〉에서 마련한 ‘청소년 인문학교실’ 열매 가운데 하나인 《나는 어떤 집에 살아야 행복할까?》(철수와영희,2012)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 나라 푸름이한테 ‘집’ 이야기를 들려주려 애쓰는 어른들 마음이 반갑습니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며 시골을 모를 뿐더러, 막상 서울이라는 터전조차 옳게 모르는 푸름이한테, ‘학교에서는 도무지 가르치지도 보여주지도 얘기하지도 않는’ 집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는 자리를 마련하니 더없이 예뻐 보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네 학교에서는 국어이니 수학이니 영어이니 과학이니 하는 과목을 지식으로 아이들 머릿속에 집어넣을 일이 아니에요. 이런저런 과목이란 다 쓸데없어요. 아이들한테는 맨 첫째로 ‘사랑’을 가르칠 일이요, 다음으로 ‘삶’을 가르칠 일이며, 이동안 ‘말’을 나란히 가르칠 일입니다. 사랑과 삶과 말을 가르친 뒤, ‘꿈’과 ‘이야기’와 ‘숨결’을 가르칠 수 있어야겠지요. 이 다음에는, 사람이 살아가며 누리는 ‘밥’과 ‘집’과 ‘옷’을 가르쳐야 할 테고요.


  아이들한테 가르칠 것을 놓고 따로 교과서나 책을 엮어야 하지 않습니다. 어른들 스스로 살아내는 모습이 곧바로 교과서나 책이에요. 두 말이나 세 말을 안 해도 돼요. 어른들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면 돼요. 어른들이 무언가 먹는 모습이 ‘밥’을 가르치는 삶입니다. 어른들이 어디엔가 깃들어 지내는 모습이 ‘집’을 가르치는 삶입니다. 어른들이 스스로 챙겨 입는 모습이 ‘옷’을 가르치는 삶입니다.


.. 모든 자연에 있는 스스로 해결합니다. 새들은 스스로 둥지를 짓고 먹이를 찾아요. 우리처럼 먹이 구하는 새, 먹는 새, 따로 있지 않아요. 몸이 아프면 어떻게 해요? 스스로 치유합니다 …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움직이는 집이에요. 왜 그럴까요? 여러분 몸이 수많은 생명체의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 콘크리트는 생명을 죽이고, 공격하고, 파괴합니다. 그 안에선 어떤 생명체도 숨쉬기가 어려워요. 그럼에도 인간은 콘크리트에 의존합니다. 콘크리트가 발명된 이래 인간은 엄청난 양의 콘크리트로 생명을 덮어 버렸어요 ..  (23, 32, 34쪽/고제순)


  눈치 있는 분은 무슨 소리인가 하고 느끼시리라 생각해요. 간추려 말하자면, 아이들을 오늘날 제도권학교이든 대안학교이든, 어떻든 학교라는 이름이 붙은 울타리에 집어넣으면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한다’는 소리예요. 아이들은 저희를 낳아 돌보는 어른(또는 어버이)하고 함께 살아가면 넉넉해요. 아이들은 저희를 아끼고 사랑하는 어른(또는 어버이)하고 날마다 복닥이고 부대끼며 얼크러질 때에 모든 것을 골고루 배워요.


  수업 50분 쉼 10분, 이렇게 틀을 짜거나 나누어서 가르치거나 보여주는 삶은 없어요. 언제나 모든 모습을 낱낱이 보여주면서 가르쳐요.


  말 한 마디가 국어요 산수입니다. 밥짓는 몸짓이 과학이요 문학입니다. 못질을 하거나 빨래를 하는 매무새가 역사요 사회입니다. 들길을 걷거나 밭자락에서 풀을 뜯는 손길이 고스란히 영어요 철학입니다.


  책으로 지은 집이라 할 〈길담서원〉 같은 보금자리에서 알뜰살뜰 꾸리는 ‘청소년 인문학교실’을 때때로 서울에서 한참 벗어난 고즈넉한 시골마을 들판이나 바닷가나 숲에서도 열면 한결 푸르게 빛날 수 있겠구나 싶습니다. 아니, 시골마을, 그러니까, 우리 식구들 지내는 고흥군이라든지 이웃 보성군이나 장흥군 같은 시골마을 같은 데에서, 교사와 공무원들이 생각을 그러모으며 예쁜 ‘인문학교실’을 꾸려, 이 시골에서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이 즐거이 누리도록 힘쓰면 참 예쁘겠구나 싶습니다. 4345.12.10.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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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의 오월 이삭문고 1
윤정모 지음, 유승배 그림 / 산하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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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력을 갖고 싶으면 가지라지요
 [푸른책과 함께 살기 100] 윤정모, 《누나의 오월》(산하,2005)

 


- 책이름 : 누나의 오월
- 글 : 윤정모
- 펴낸곳 : 산하 (2005.5.2.)
- 책값 : 7000원

 


  우리는 권력을 가질 마음 없어요. 우리는 우리 마을 우리 보금자리에서 사랑을 보살피고 사랑을 나누며 사랑으로 웃고 싶어요. 권력을 갖고 싶으면 가지라지요. 이름값을 갖고 싶으면 가지라지요. 무슨 대수인가요.


  나는 늘 바람을 마셔요. 골골샅샅 훑으며 저 먼 태평양 깊은 곳부터 불어서 우리 마을 숲을 지나 들판을 가로지르기도 하는 바람을 마셔요. 햇살 머금은 바람을 마셔요. 풀내음 듬뿍 밴 햇살을 먹어요. 구름이 내려보내는 맑은 빗물을 마셔요. 멧새와 풀벌레가 들려주는 노래를 들어요.


  그런데, 나는 바람을 가지지 않아요. 햇살도 빗물도 풀내음도 노랫소리도 가지지 않아요. 바람은 누구한테나 바람이에요. 나도 마시고 이웃도 마시며 풀잎도 마셔요. 햇살은 누구한테나 햇살이에요. 온 고을 고루 내리쬐는 햇살이요, 시골뿐 아니라 도시로도 드리우는 햇살이에요.


  스스로 누리고 싶을 때에 누리는 바람이요 햇살이고 빗물이에요. 스스로 누리고 싶지 않으니까 누리지 못하는 바람이며 햇살이자 빗물이에요.


  생각해 보면, 손전화 기계는 없어도 돼요. 텔레비전을 왜 봐야 하나요. 신문을 굳이 읽을 까닭이 없어요. 인터넷은 안 켜도 돼요. 눈을 뜨고 바다를 바라봐요. 눈을 살며시 감고는 바람내음을 맡아요. 눈을 다시 뜨고 구름을 바라봐요. 다시 눈을 살며시 감고 햇살이 드리우며 나누어 주는 따순 기운을 온몸으로 느껴요.


.. 그 벌은 고문과도 같았다. 더욱이 우리는 로봇이 아니었다. 움직임이 생명인, 그러니까 10분만 움직이지 않아도 엉덩이에 곰팡이가 슬거나 이끼가 끼거나 땀띠가 돋아 버리는 딱 그 나이의 소년들이었다 ..  (11쪽)


  군대는 평화를 부르지 않아요. 군대는 전쟁을 불러요. 저쪽에서 군대를 만든대서 우리도 군대를 만들어야 평화를 지키지 않아요. 이쪽에서는 저쪽 때문에 군대를 만든다지만, 저쪽에서는 이쪽 때문에 군대를 만들어요. 북녘에 군대가 있으니까 남녘에 군대가 있어야 하지 않아요. 북녘에서는 남녘에 있는 군대를 탓하거든요. 서로서로 탓하면서 군대를 키워요. 서로서로 평화를 외치면서 정작 전쟁으로 나아가요.


  탱크가 평화를 지키는 적은 없어요. 잠수함이나 미사일이 평화를 이루는 적은 없어요. 평화는 낫과 호미와 쟁기가 지켜요. 평화는 따순 햇살 머금는 연필 한 자루가 지켜요. 평화는 맑은 바람 마시는 붓 한 자루가 지켜요. 평화는 바로 하늘처럼 넓고 바다처럼 깊은 사랑이 어린 손길로 어루만지는 손길로 빚어요.


  군인 아저씨도 군인 아줌마도 평화를 지켜 주지 않아요. 군인 아저씨도 군인 아줌마다 달삯쟁이 공무원이에요. 사내로 태어났기에 군대로 끌려간다면, 불쌍한 넋이에요. 군대로 끌려가서 살아남고 싶다며 똑같이 거친 말을 일삼거나 주먹을 휘두른다면, 똑같이 못난 전쟁질이에요.


  사랑은 사랑을 불러요. 주먹질은 주먹질을 불러요. 꿈은 꿈을 불러요. 돈쟁이는 돈쟁이를 불러요. 그러니까, 평화는 평화를 부르고, 권력은 권력을 불러요.


  권력하고 맞서 싸울 까닭이 없어요. 권력을 무너뜨려야 하지 않아요. 봄햇살은 겨울눈을 녹여서 없애지 않아요. 봄햇살은 그저 흙에 깃든 씨앗을 불러서 깨울 뿐이에요. 봄햇살은 봄을 부를 뿐인데, 겨울눈은 어느새 자취조차 남기지 않고 흙으로 스며들고 하늘로 깃들어요. 평화는 전쟁을 몰아내거나 무너뜨리는 데에는 없어요. 평화는 전쟁이 스스로 녹아서 평화한테 한몸으로 스며들어 다시 태어나도록 할 때에 비로소 빛나요.


.. 맛이 기가 막혔다. 라면에 관한 한 우리 엄마가 이 세상에서 최고다. 고추장까지 조금 풀어 넣은 라면은 내 입맛에 그만이었다. 내가 국물까지 비우자, 엄마가 물었다. “그게 그렇게 맛나냐?” 그럼, 엄마 손맛인데. 이런 대답을 해야 했을 텐데, 내 입에선 딴소리가 튀어나왔다. “다음 올 땐 자장면 사 줘.” “그려, 한가할 때 올라오면 그러더라고.” ..  (25쪽)


  밥 한 그릇 함께 먹어요. 이야기 한 자락 함께 나누어요. 책 한 권 돌려서 읽어요. 이부자리 서로 나누어 누워요.


  내가 마시는 물이 네가 마시는 물이에요. 내가 마시는 냇물은 저 멧골에서 솟아서 이렇게 흘러요. 내가 마시고 내려놓는 물방울 하나는 다시 냇물이 되어 내 동무들 마시는 물줄기로 이어져요.


  꼭지를 트니까 나오는 물은 없어요. 비가 내리고 냇물이 흐르며 바다가 움직이면서 물을 얻어요. 지구별이 아름답게 움직이면서 내 보금자리 한켠에도 맑은 물이 솟아요. 지구별이 어여삐 숨쉬면서 내 마을 샘가에서 맑은 물이 콸콸 솟아요.


  이맛살을 찡그리니 서로 이맛살을 찡그리는군요. 까르르 웃음보를 터뜨리니 저마다 까르르 웃음보를 터뜨리는군요.


  아이들 살살 다독이며 재워요. 코코 자는 아이들은 보드라운 어버이 손길을 느껴요. 어버이 손이 굵다든지 투박하다든지 거칠다든지 못생겼다든지 새까맣다든지 허여멀겋다든지 생각하지 않아요. 아 참 따스하구나 하고 느낄 뿐이에요. 어버이는 아이한테 사랑을 물려주고,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물려받은 다음, 이 사랑이 차근차근 깊고 넓게 커지면서 새로운 사랑꽃을 피워요.


.. 엄마는 조용조용 타일렀다. “아녀, 너도 이 에미에겐 금덩이여. 하지만 너는 벌써 익은 금덩이고, 기열이는 아직 덜 익은 금덩이잖냐. 그란께 그렇게 꼬집으면 멍이 더 깊이 들제.” 그 뒤 누나와 단둘이 살 때, 누나는 그때 일을 이렇게 되새겨 주었다. “익은 금덩이, 덜 익은 금덩이. 세상에 얼마나 듣기 좋고 또 그럴듯한 소리다냐? 그 말을 듣자 슬며시 반성이 되더란께. 안 그냐?” ..  (55∼56쪽)


  윤정모 님 푸른문학 《누나의 오월》(산하,2005)을 읽습니다. 누나는 어디에서나 누나입니다. 1980년 5월 광주에 있었기에 누나가 아니에요. 누나는 경상도 청도에서도 누나요, 강원도 횡성에서도 누나입니다. 1970년 4월에도 누나이고, 2010년 7월에도 누나예요.


  누나는 마음속으로 꿈을 키웁니다. 동생도 가슴속으로 사랑을 키웁니다. 누나는 푸른 들판을 바라보고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꿈을 가다듬습니다. 동생도 푸른 숲을 바라보고 파란 바다를 내다보면서 사랑을 키웁니다.


  가을날 막 베어 말리는 나락 한 알 가만히 손바닥에 올려놓아 보셔요. 나락 한 알에서 피어나는 가을냄새를 맡아 보셔요. 이윽고 나락 한 알 혀에 살며시 올려놓아요. 혀로 나랏맛을 느껴 보셔요. 가을이 짙게 밴 나락 한 알에는 봄과 여름을 지낸 기운이 서려요. 겨우내 볍씨로 곱게 잠들다가 봄부터 따순 흙땅으로 깃들어 햇살과 바람과 빗물을 먹고 자란 숨결을 느껴요.


  겨를 벗기지 않은 햇나락은 혀에서 살살 녹아요. 깨물지 않아도, 씹지 않아도, 햇나락은 입안에서 달콤하게 녹아요.


  햇나락 먹으면서 생각해요. 먼먼 옛날 옛적 사람들은 굳이 불을 피워 밥을 짓지 않아도 나락을 먹으며 숨결을 이을 만했겠다고 생각해요. 더 맛나게 먹으려고 밥을 짓기도 했을 테지만, 모든 곡식은 열매 그대로 입안에서 녹는구나 싶어요.


.. “옴마, 우리 집 밥상!” 누나는 밥상 앞에 달려들어 밥을 퍼먹기 시작했다. 배가 고파서만은 아닌 듯했다. 집에서 먹어 보는 밥상이 그처럼 그리웠던 모양이다. “우리 집 김치가 참말로 꿀맛이다, 꿀맛!” 엄마는 계란 부친 것도 슬며시 누나 밥그릇 옆으로 디밀었으나, 누나는 김치와 청국장만 정신없이 먹어댔다. 그 모습을 지켜본 엄마와 아버지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그간 얼마나 굶었으면 저럴까 싶은 모양이었다. “천천히 묵어라잉.” 그렇게 말해 놓고 엄마는 누른 밥을 긁어 왔다. 누나가 그 누른 밥까지 달게 먹고 있는데, 엄마가 물었다. “인제 다시는 안 나갈 거제?” ..  (85쪽)


  푸른문학 《누나의 오월》에 나오는 누나는 아무런 권력이 없습니다. 이른바 ‘어떠한 주먹힘도 돈힘도 말힘’도 없습니다. 다만, 누나는 꿈을 꿉니다. 스스로 살아가고픈 누리를 꿈꿉니다. 스스로 살아가며 빛내고픈 나라를 꿈꿉니다. 스스로 살아가며 빛낼 사랑을 펼칠 어여쁜 마을을 꿈꿉니다.


  권력을 노리는 이들은 군대를 키워 권력을 건사합니다. 권력을 노리는 이들은 졸업장과 자격증을 거머쥐면서 강단과 교단과 법정과 병원에서 이름표를 가슴에 척 붙이고 다닙니다. 권력을 노리는 이들은 경제를 부르짖고 문화를 노래하며 예술을 퍼뜨립니다. 권력을 노리는 이들은 야구공 하나로 수십 억원을 번다고 외치고, 권력을 노리는 이들은 축구공 하나를 꿰매는 이웃나라 아이들 삶을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웃나라 아이들이 축구공 꿰매는 삶’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권력자는 이 나라 아이들이 학교에서 어떻게 시달리면서 입시기계가 되고 마는가를 들여다보지 못해요. 이 나라 어린이와 푸름이 가슴에서 꿈이 자라지 못하는 모습을 들여다보지 못해요. 이 나라 어른들 가슴에서 사랑이 싹트지 못하는 모습을 들여다보지 못해요.


..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누나는 정말 선생님이 되었을까?” 누나는 그 말에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아녀.” “왜?” “가난한 시골 사람들은 딸아이한텐 절대로 공부를 시키지 않은께.” “글믄 어째서 전에는 소를 몰고 나갔단가?” ..  (154쪽)


  누나가 바라는 한 가지는 꿈입니다. 누나를 바라보며 살아가던 동생이 바라는 한 가지는 사랑입니다. 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하는 일이 꿈이 아닙니다. 학교를 마치고 공무원이나 회사원이 되는 일이 사랑이 아닙니다.


  삶을 빛낼 때에 꿈입니다. 삶을 누릴 때에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권력을 가지고 싶으면 가지셔요. 권력을 갖고 여든 해 삶이나 아흔 해 삶을 지내 보셔요. 나는 꿈과 사랑을 품에 안고 백 해뿐 아니라 오백 해나 천 해를 즐거이 지낼게요. 내 몸뚱이가 삭아서 사라지더라도 내 넋은 즐거이 온 지구별과 뭇별 사이를 오가며 즐거니 지낼게요. 아니, 내 몸뚱이는 꿈과 사랑을 먹으면서 언제까지나 이어가리라 느껴요. 살결이 몸뚱이가 아니고 뼈가 몸뚱이가 아니거든요. 나는 언제나 나무 한 그루가 될 수 있고, 풀 한 포기가 될 수 있어요. 바람 한 가닥이 될 수 있어요. 햇살 한 조각이 될 수 있어요. 옷을 입는 몸만 몸이 아니에요. 저 잎사귀도 저 풀벌레도 저 멧새도 모두 내 몸이요 내 마음이에요.


  늦가을 들판을 거닐며 풀벌레 가느다란 노랫소리 들었어요. 이제 풀벌레 모두 고요히 잠들었겠거니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들판에는 아직 가느다랗게 울리는 풀벌레 노랫소리가 있어요. 아하, 삶을 누리는구나. 즐거이 삶을 누리는구나.


.. 마침내 면 보건소 앞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경운기를 세우고 미친 듯이 보건소 문을 두드렸다. 눈을 비비고 나온 의사는 경운기 위에 누워 있는 누나를 살펴보더니 어서 집으로 데려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새벽 첫닭이 울 무렵 누나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 얼마 뒤였다. 경운기에서 옮겨 와 이불에 누이자, 누나는 별안간 아버지 손을 잡아챘다. 그리고 하얀 박꽃처럼 오므려진 그 입술을 들썩이며 말했다. “아부지, 기열이는 꼭 공부시켜 줘요.” ..  (167쪽)


  1980년 5월 광주에 있던 사람들은, 또는 보성이나 고흥에 있던 사람들은, 또는 여수나 순천에 있던 사람들은, 또는 대구나 부산에 있던 사람들은, 또는 서울에 있던 사람들은, 무엇을 꿈꾸거나 사랑했을까요. 권력을 무너뜨려 새 권력을 세우고자 했을까요. 민주주의를 되찾고자 했을까요. 평화와 통일을 이루고자 했을까요.


  누군가는 군인이 쏜 총알에 맞아 죽고, 누군가는 군인이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 죽으며, 누군가는 보안사에서 붙잡아서 남영동 지하실에서 두들겨패는 바람에 죽었어요. 누군가는 연좌제이니 무어니 하면서 피가 마르며 죽었고, 누군가는 땅을 빼앗기고 집을 빼앗기며 죽었어요.


  그리고, 누군가는 살아가요. 누군가는 살아남았고, 누군가는 아무것도 들여다보지 않으면서 텅 빈 머리로 살아가요. 누군가는 깊이 생각을 키우며 살아가요. 누군가는 1981년에 태어나고 1991년에 태어나면서 지난 발자국은 모르는 채 새로운 사랑을 누리며 살아가요.


  《누나의 오월》에 나오는 누나는 언뜻 보기에는 쓸쓸하게 죽은 듯해요. 그렇지만, 누나는 그토록 누나가 아끼고 사랑하는 동생이랑 어머니랑 아버지 곁에서 고요히 눈을 감아요. 가장 아늑한 품에서 가장 따사로운 숨결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아요.


  누나는 권력을 바라지 않았어요. 민주주의도 평화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어요. 다문 하나 꿈을 바랐어요. 동생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꿈을 잊지 않기를 바랐어요. 언제나 꿈을 아끼면서 살아가기를 바랐어요. 곁에서 누나가 죽는 모습을 지켜보던 동생은 누나가 품은 꿈을 비로소 느끼면서 스스로 품은 사랑이 꿈하고 만나 어떻게 얼크러지도록 살아갈 때에 아름다울까 하고 천천히 생각해요.


  그곳에 모인 사람들도, 그곳에 모이지 않은 사람들도, 모두 한마음 한사랑 한삶이리라 느껴요. 너희가 권력을 갖고 싶으면 가지렴, 우리는 서로를 아끼는 꿈과 사랑을 흐드러지게 꽃피울 테니까, 하는 한삶이에요. (4345.11.1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푸른책 푸른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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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는 농부가 될 거야 - 개정판 작은 책마을 31
딕 킹 스미스 지음, 데이비드 파킨스 그림, 엄혜숙 옮김 / 웅진주니어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내 마음을 따뜻하게 돌보고 싶어
 [어린이책 읽는 삶 25] 딕 킹 스미스, 《소피는 농부가 될 거야》(웅진닷컴,2003)

 


- 책이름 : 소피는 농부가 될 거야
- 글 : 딕 킹 스미스
- 그림 : 데이비드 파킨스
- 옮긴이 : 엄혜숙
- 펴낸곳 : 웅진닷컴 (2003.12.15.)
- 책값 : 9000원

 


  나는 도시에서 살 적부터 학교라는 데에 아이들을 보내고픈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 마음은 아이들만 학교라는 데에 안 보내겠다는 생각이 아닙니다. 나부터 내가 ‘어른 아닌 아이’로 살아간다 할 적에 학교라는 데에 가고픈 생각이 없습니다. 곧, 내가 ‘아이 낳아 어른으로 지내는 오늘’에 맞추어 되뇌는 말이 아닌, 내가 ‘어린이와 푸름이로서 학교를 다니던 어제’에 비추어 읊는 말입니다.


  국민학교를 다니는 여섯 해 동안, 학교에서 동무들과 뛰놀면서 학교가 싫다고 여긴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뛰놀지 못하고 공부를 해야 하던 때에는 교사들이 으레 몽둥이를 들고 윽박지르듯 이것저것 외우도록 시키기만 하니까 학교가 달갑지 않습니다. 국민학교에서도 시험이 아주 잦고, 시험이 잦은 만큼 시험점수에 따라 매질이 끝없이 이어졌어요. 일기 검사나 숙제 검사나 옷차림 검사나 손톱이나 머리카락 검사나 도시락 검사 따위를 자꾸자꾸 하면서, 검사에 걸린 아이들을 마구 두들겨패며 막말을 일삼는 교사들을 치러야 할 때면, 학교에 가기란 죽기보다 싫다고 느꼈어요.


.. “달팽아, 넌 아주 작은 신을 신어야겠다. 네가 경주에서 이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너는 참 예쁘구나. 네가 나의 달팽이가 되어 주렴.” … “소피야, 손에 든 게 뭐니?” 엄마가 간식 시간에 물었어요. “소피의 달팽이예요!” 매튜와 마크가 합창을 했어요. “얼른 마당에 내버리고 오렴.” 엄마가 말했어요. “안 돼요.” 소피는 작지만 야무진 목소리로 대답했지요 ..  (13∼14, 16∼18쪽)


  학교가 없어져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학교가 학교 구실을 안 한다고 생각해요. 학교는 시험공부를 하는 데가 아니에요. 그러나, 한국에서 학교는 오직 시험공부만 시켜요. 학교는 아이들을 가두는 감옥이 아니에요. 아이들 옷차림이나 매무새나 생각을 꽁꽁 가두거나 옭아매는 데가 학교일 수 없어요. 그러나, 한국에서 학교는 아이들을 다그치거나 다스리기만 해요.


  사랑을 나눌 수 있는 학교라야 비로소 학교라고 생각해요. 이런 지식 저런 정보를 얻는 데 아닌, 이런 사랑 저런 꿈을 서로 북돋우거나 보듬으면서 활짝 웃어야 바야흐로 학교라고 생각해요.


  학교이니까 여러 아이들이 얼크러져 놀 수 있어요. 학교이니까 널따란 운동장에서 마음껏 달릴 수 있어요. 아이들은 달려야 아이들이에요. 그러니까, 운동장에서도 달리고, 교실에서도 달리며, 골마루에서도 달려요. 달리지 않으면 아이들이 아니에요. 달리면서 이마에 땀을 송송 맺으니까 아이들이에요.


  어린이를 책상 앞에 앉혀 얌전하게 굴도록 하면서 50분씩이나 옴쭉달싹 못하게 하는 짓은 공부도 수업도 배움도 아니라고 느껴요. 아이들은 왜 책상 앞에서 옆도 못 보고 뒤도 못 보아야 하나요. 아이들은 왜 책상 앞에서 입을 꾹 다문 채 교사 얼굴만 바라보아야 하나요.


  중학교로 가는 길목인 초등학교일 수 없습니다. 고등학교로 가는 길목인 중학교일 수 없습니다. 대학교로 가는 길목인 고등학교일 수 없습니다. 학교라 한다면, 초등은 초등대로 중등은 중등대로 고등은 고등대로 값어치와 뜻과 보람이 있어요. 대학바라기로 흐르는 학교라 한다면, 이러한 곳은 ‘입시학원’일 뿐 학교가 될 수 없어요. 대학교조차 삶과 꿈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마당이 아니라, 취업에 목을 매다는 데라면, 이는 학교 아닌 ‘취업학원’일 뿐이에요.


.. “난 어른이 되면, 농부가 될 거야.” 소피가 아침을 먹다가 말했어요. “넌 못 해.” 쌍둥이들이 말했어요. “왜 못 해?” “농부는 다 남자야.” “그러면 난 여자 농부가 될 거야. 그럼, 되지.” … “(소를) 한 마리만 가질 거야. 그리고 꽃송이라고 부를 거야.” “그럼, 팔 우유가 얼마 안 될걸.” 아빠가 말했지요. “난 우유를 팔지 않을 거예요.” 소피가 말했어요. “어째서?” 매튜가 물었지요. “내가 다 마실 거야. 난 우유가 좋아.” ..  (24∼25쪽)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며 즐겁게 떠올리는 일이라면, 무엇보다 신나게 놀던 일입니다. 다음으로, 사육장 청소를 하고 먹이를 주던 일입니다. 다음으로, 집과 학교 사이를 뚜벅뚜벅 걸어다니던 일입니다. 이 세 가지 말고는 국민학교와 얽혀 즐겁게 떠올릴 만한 일이 없습니다. 중학교를 다닐 적에는 즐겁던 일이 한 가지도 안 떠오릅니다. 고등학교를 다닐 적에는 자율학습이나 보충수업을 빼먹고 시내 헌책방이나 새책방에 들러 책을 읽던 일이 떠오릅니다. 고등학교에서도 딱히 즐거이 떠올릴 만한 일이 없습니다.


  요즈음 학교들을 돌아보면, 인문계 학교는 ‘입시학교’요, 실업계 학교는 ‘취업학교’입니다. 인문계 학교는 학생 하나라도 더 대학교에 붙여 학교이름을 드날리겠다고 용을 씁니다. 실업계 학교는 학생 하나라도 더 공장이나 회사 경리·회계부에 뽑히도록 해서 학교이름을 높이겠다고 기운을 씁니다. 어느 학교도 아이들이 ‘아름다운 사람’으로 자라도록 돕지 않습니다. 어느 학교도 아이들이 ‘사랑과 꿈을 넉넉히 나누는 사람’으로 크도록 이끌지 않습니다.


  시험점수 잘 따는 기계처럼 자라면 무엇이 되지요? 영어시험 잘 치르는 기계처럼 크면 무엇이 되지요? 학교에서 내준 숙제를 잘 내고, 학교에서 시키는 일을 잘 하면 무엇이 되지요? 여러모로 살피면, 학교라는 곳은 초등부터 고등까지 아이들을 ‘사회에서 톱니바퀴 구실을 하도록 길들이는’ 몫을 맡는지 몰라요. 아이들이 ‘컨베이어벨트 부속품 노릇을 하도록 내모는’ 몫을 하는지 몰라요.


  생각힘을 기르는 학교는 보이지 않아요. 손수 삶을 일구도록 이끄는 학교는 보이지 않아요. 따순 사랑과 너른 믿음을 북돋우는 학교는 보이지 않아요. ‘특성화’ 학교라느니 ‘시범’ 학교라느니 허울을 붙일 뿐, 즐겁게 다니면서 즐겁게 놀고 즐겁게 어깨동무하는 삶길을 보여주지 않아요.


.. “소피야. 그럼, 넌 몇 살이냐?” “여섯 살요. 몇 살이세요?” 하고 소피가 말했어요. “소피야! 그런 건 묻는 게 아니다!” 엄마가 말했어요. “왜요? 고모도 저한테 물어 봤는데, 그렇죠?” ..  (43쪽)


  딕 킹 스미스 님이 쓴 어린이문학 《소피는 농부가 될 거야》(웅진닷컴,2003)를 읽습니다. 《소피는 농부가 될 거야》에 나오는 어린 소피는 아직 초등학교에 들지 않습니다. 한 해 더 ‘집에서 놀고’ 나서 초등학교에 들어간다고 해요. 여섯 살 어린 소피인데, 소피는 스스로 “농사꾼이 될 테야!” 하고 다짐합니다. 여섯 살 소피 나름대로 농사꾼 놀이를 합니다. 여섯 살 소피 깜냥껏 흙을 만지고 풀을 아끼며 나무를 보듬습니다.


  소피네 어머니나 아버지가 소피를 농사꾼이 되도록 이끌지는 않습니다. 소피네 어머니나 아버지는 농사꾼이 되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지만, 농사꾼이 어떤 삶이거나 사랑인 줄 살피지도 않습니다. 소피 혼자 씩씩하게 농사꾼 되는 길을 생각하고 찾으며 돌아봅니다.


.. 한 시간 뒤에 엄마가 왔어요. “어머, 소피가 잘 돌보고 있네. 소피야, 넌 어른이 되면 간호사가 되겠구나.” “여자 농부가 될 거라는 거, 아시잖아요.” ..  (83쪽)


  이야기책에 나오는 소피가 일곱 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간다 할 적에, 소피가 다닐 초등학교에서는 소피한테 ‘농사꾼이 될 아이가 배울 여러 가지’를 즐겁게 가르치거나 보여주거나 함께할 만한지 궁금합니다. 한국에서든 미국에서든 영국에서든 프랑스에서든 일본에서든 중국에서든, 학교라는 데는 오직 ‘더 높은 학교’로 보내는 몫을 맡으면서, 더 높은 학교에서는 ‘도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공장 일꾼’이 되는 자격증만 알려주지 않느냐 싶어요. 학교 스스로 농사꾼하고 등지는 얼거리요, 학교 스스로 농사꾼을 반기지 않는 틀거리예요.


.. 소피는 창틀에 기대어, 모르는 사이에 기어 올라온 작은 덩굴손을 만지며 놀고 있었어요. 소피는 벽을 덮은 담쟁이덩굴을 보았지요. 그런데 소피의 코 밑에서 아주 작은 달팽이가, 소피의 가운데 손가락만 한, 귀여운 노란색 달팽이가 기어 올라오고 있는 거예요 ..  (106쪽)


  내 마음을 따뜻하게 돌보고 싶습니다. 새벽에 기저귀에 쉬를 하고는 잠에서 깨어 칭얼거리는 아이를 무릎에 누여 다시 재우면서 따뜻한 손길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 싶습니다. 우리 집 어린 둘째는 아버지 무릎에 누워 새근새근 잠듭니다. 나는 작은 이불로 아이를 훌훌 덮고 나즈막히 자장노래를 부릅니다. 집 둘레에서는 새벽에 일어난 멧새가 노래노래 부르며 아침밥을 찾아다닙니다. 바람은 풀잎 노래와 나뭇잎 노래를 들려줍니다.


  내 생각을 너그럽게 보살피고 싶습니다. 즐겁게 밥을 차려 즐겁게 함께 먹고 싶습니다. 즐겁게 아이들과 뛰놀며 하루를 열고 싶습니다. 즐겁게 기지개를 켜고 즐겁게 자전거마실을 다니며 즐겁게 글 한 줄 쓰고 싶습니다. 큰아이는 날마다 새롭게 글씨쓰기를 익힙니다. 아이는 이제 그림책에 적힌 커다란 글씨를 따라 쓸 수 있지만, 곁에서 누가 글씨를 먼저 적바림해 주기를 더 좋아합니다. 나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적바림합니다. 아이가 보고 따라서 쓸 글씨를 가장 곱게 적바림하자고 생각합니다.


  아침이 찾아오면 눈부신 햇살이 드리우면서 하늘은 온통 파랗게 물듭니다. 아침이 되면 밤새 깜깜하던 하늘에 반짝이던 달과 별은 어느덧 가물가물 스러집니다. 밤이 저물어 아침을 지나 낮이 되고, 낮이 저물어 저녁을 지나 밤이 됩니다. 새가 노래하고 벌레가 노래합니다. 풀잎이 살랑거리고 나뭇잎이 흔들거립니다. 눈으로 바라보고 귀로 들으며 코로 맡습니다. 살결로 느끼고 가슴으로 생각합니다. 하루를 돌아보면, 이 모든 삶자락은 내 사랑이 피어난 모습이 아닌가 싶고, 이 모든 삶자락은 나한테 사랑으로 스며드는 모습이 아닐까 싶으며, 이 모든 삶자락은 서로서로 사랑으로 가꾸는 모습이겠구나 싶습니다.


  숲이기를 빌어요. 시멘트로 지은 건물 아닌 나무 우거진 숲이기를 빌어요. 풀과 나무가 어우러진 숲이기를 빌어요. 영어교실이나 체육관·강당·식당 아닌 풀숲과 나무숲이기를 빌어요.


  학생도 교사도 숲에서 숲바람을 쐬고 숲햇살을 누리기를 빌어요. 교장이나 교감도, 또 어버이들도, 모두모두 숲이야기를 나누고 숲삶을 일구는 따사로운 손길로 하루를 누릴 수 있기를 빌어요. 우리는 누구나 아름답게 살아가고 싶어 태어난 맑은 숨결이라고 생각해요. (4345.10.2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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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 대한민국 부모님과 선생님께 드리는 글
편해문 지음 / 소나무 / 201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아이도 어른도 놀이가 밥이겠지요
 [사랑하는 배움책 9] 편해문,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소나무,2012)

 


- 책이름 :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 글 : 편해문
- 펴낸곳 : 소나무 (2012.9.20.)
- 책값 : 1만 원

 


  어릴 적에 ‘미술학원’이라는 데를 한 해 다녔습니다. 일곱 살 적인 1981년이었는데, 이름은 미술학원이었지만 유치원하고 같은 데였어요. 그림그리기를 조금 더 자주 시키는 대목이 다를 뿐, 국민학교에 들기 앞서 한 해쯤 아이들을 맡겨 ‘놀게’ 하는 데였지 싶어요.


  내 여섯 살 적을 거의 못 떠올립니다. 다섯 살 적이나 네 살 적도 거의 못 떠올립니다. 그무렵 무엇을 하거나 어떻게 놀았는지 하나도 못 떠올려요. 꼭 일곱 살이던 미술학원 다니던 때부터 떠올려요.


  내가 떠올리는 일곱 살 내 모습은 무척 개구집니다. 틈만 나면 놀고, 틈이 없어도 놉니다. 이것을 하면서 딴생각에 잠겨 놀고, 저것을 할 적에도 딴생각에 빠져 놀아요.


  그림을 그릴 적에도 놀이로 그림을 그립니다. 어디 바깥으로 나들이를 간다 하면 그저 뒹굴고 구르고 온갖 법석을 떱니다.


  일곱 살 내 모습에 비추어 여섯 살이나 다섯 살이던 때에 얼마나 개구졌을까 헤아립니다. 얼마나 말썽을 많이 피우고, 얼마나 어머니를 힘들게 했을까 되새깁니다. 집살림이 썩 좋지 않더라도 개구쟁이 막내를 미술학원이라는 데에 넣고는 아침부터 낮까지 ‘신나게 놀리려’ 하지 않았나 싶어요.


..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은 놀이가 아이들 삶의 전부라는 진리를 숨기고 지우는 데 거의 성공한 것 같다 … 왕따는 아이들이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중독되기 쉬운, 매혹적인 놀이가 되었다. 소비가 아이들의 새로운 놀이가 된 것처럼 말이다 … 닭장 안에서 조금의 자존감도 느낄 수 없었던 닭들이 다른 닭들을 존중한다는 것은 당치 않은 이야기다. 왕따는 바로 존중받지 못하고 관심받지 못한 아이들이 벌이는 존재의 드러냄이다 ..  (9, 32, 35쪽)


  놀기는 늘 부산스레 놀지만, 놀이를 잘 했다고는 떠오르지 않아요. 아주 못 하지는 않으나, 퍽 잘 하지는 않았어요. 놀이 가운데 발을 쓰는 놀이는 거의 젬병이었어요. 그래도 공차기를 할 때면 용을 쓰며 달리고 몸싸움을 했어요. 발로 공을 차는 재주는 모자라지만, 그러니까 남들처럼 발끝으로 얹어 발등으로 공을 찰 줄은 모르지만 발을 넓적하게 펴서 차곤 했어요. 문지기 노릇도 곧잘 했고요.


  공치기 놀이를 할 적에도 방망이로 공을 맞히기는 꽤 맞히지만 멀리 보내지는 못해요. 용케 삼진으로 안 죽고, 이래저래 공을 굴리는데, 동무들이 구르는 공을 잘 잡지 못하니 이럭저럭 살아 나가곤 했어요. 다만, 공을 잘 치지는 못하지만, 공은 꽤 잘 잡았고, 투수 자리에 서서 공을 던지는 일을 제법 했어요. 공을 빨리 던질 줄 몰랐으나, 노림수라고 할까, 구석구석 공을 찌른다든지, 때때로 느리게 던져서 박자를 흐트리는 일은 할 줄 알았어요.


  곰곰이 떠올리면, 내가 가장 못하는 놀이는 제기입니다. 제기를 하늘에 띄워 발로 차는 재주가 참 없습니다. 서너 번 차면 그럭저럭 차는 셈이요, 대여섯 번 차면 잘 차는 셈이고, 열 번 넘게 차는 일은 아주 드물어요. 이러면서도 제기놀이는 왜 이리도 많이 했는지, 할 적마다 술래를 도맡으면서도 제기놀이에 안간힘을 썼어요.


  하다 보면 잘 차리라 생각했을까요. 백 번 천 번 만 번을 차면 조금씩 나아지리라 생각했을까요. 1대1일로 붙는 제기놀이는 으레 술래만 했지만, 여럿이 하는 제기에서는 공격을 잘 했습니다. 수비도 잘 했어요. 제기를 차는 재주는 떨어지지만, 맞은편이 뻥뻥 찬 제기를 잽싸게 좇아가서 붙잡는다든지,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제기를 손바닥 아픈 줄 모르고 잡아낸다든지, 이런 대목에서 살짝 돋보였어요. 동무들은 제기놀이를 할 적에 ‘제기 차는 점수는 기본만 해라’ 하고 말했어요. 나머지는 저희들이 채울 테니, 공격과 수비 때에 잘 하면 그만이라고 받아들여 주었어요.


  무리지어 하는 제기를 앞두고 연습하던 때, 제기를 잘 차는 가시내가 ‘넌 왜 제기를 그리 못 차나?’ 하면서 ‘이렇게 차면 돼!’ 하고 가르치지만, 나는 몇 번을 보고 숱하게 따라해도 도무지 안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문간에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땀을 뻘뻘 흘리며 제기차기 연습을 해도 나아지지 않아요.


.. 아이들은 오랫동안 ‘놀이’라는 은혜로운 햇살과 빗줄기를 받고 자랐다 … 아이들 삶이란 것은 놀이로 촘촘히 박음질되어야 나중에 쉽게 터지지 않는다 … 마음껏 놀면서 행복했던 기억이 있는 아이라야 행복을 찾아갈 수 있다 … 책 말고 재미있는 것이 세상에는 많다는 것을 아이들이 몸으로 먼저 만나야 한다. 어디까지나 놀고 나서 그래도 시간이 남을 때 읽는 것이 책이라는 순리를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 ..  (10, 11, 12, 76쪽)


  나는 발이 퍽 느렸습니다. 몸도 꽤 여렸습니다. 싸움이 붙으면 언제나 먼저 코피가 터지며 우는 쪽이었습니다. 씨름을 붙으면 나보다 몸집이 작은 아이한테도 뒤집어지곤 했어요. 그렇지만, 이런 발에 몸에 몸집이면서 ‘오징어놀이’를 할 때에는 꽤 날렵했습니다. 내가 보아도 놀랍고, 동무들이 보아도 놀라웠어요.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서른여덟 먹은 오늘, 여덟 살 적 내 모습을 헤아려 봅니다. 열두 살 적 오징어놀이를 하던 때를 그립니다. 서른 해 지난 오늘에도 그무렵을 떠올리면 짜릿짜릿합니다. 돌멩이로 흙땅에 금을 그어 판을 만듭니다. 금을 안 밟으면서 적진을 가로지르던 느낌이라든지 금이 어디가 끝이고 내 발은 어떻게 춤을 추어야 맞은편 손아귀에서 벗어나 두 발을 마음껏 쓰도록 살아나는가 하고 되새길 수 있습니다.


  그때에나 이제에나 늘 매한가지인데, 힘이 세다든지 키가 크다든지 몸집이 좋다든지 하는 동무들은 늘 ‘마음을 놓아’요. 나처럼 몸도 작고 힘도 여리며 발도 느린 아이들이 적진 한복판을 가로질러 ‘외발’에서 ‘두발’이 될 줄은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늘 이런 ‘마음 놓는 동무들 빈틈’을 찌른다고 할까요. 또한, 내 편에서도 나처럼 여리고 어설픈 아이는 ‘죽거나 살거나 그만’이라 여긴다고 할까요. 내가 한복판 가로지르기를 하다가 죽더라도 맞은편 힘센 동무 하나를 붙잡고 늘어져 함께 넘어지면 둘이 같이 죽으니 ‘너 죽고 나 죽자’ 작전이라고 할 텐데, 여린 내가 죽으며 센 동무를 잡으면 우리 편한테 도움이 된다고 여겼어요.


  이런저런 까닭이 얼크러져 오징어놀이에서는 제몫을 단단히 했어요. 마지막에 적진을 달려들어 작은 동그라미에 발을 디딜 적에도 나는 덩치 우람한 동무하고 부딪히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동무하고 쿵 부딪히더라도 발이 동그라미에 먼저 닿으면 되니까 그냥 몸을 날렸어요. 몸을 날리다가 튕겨져서 흙땅에 얼굴이 긁히든 몸이 구르든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하다 보니,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면서, 나를 만만하게 보지는 않더라고요.


.. 놀이는 머리 좋아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과 행복을 미래가 아닌 오늘 당장 만나기 위해 하는 것이다 … 놀이는 끝났어도 놀이감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마음, 이게 놀이다 …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물건을 함부로 사주지 않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 텔레비전을 보라. 텔레비전은 아이들을 울타리 안에 묶어두는 일을 한다 … 아이한테 알맞은 일을 거들 수 있게 하자. 아이들은 세상을 일과 놀이를 통해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데, 어른들은 조각난 지식만을 억지로 먹이려 하니 아이들이 아프지 않을 수 없다 ..  (21, 22, 42, 50, 98쪽)


  내가 공을 치거나 차는 일은 잘 못하지만, 두 가지나 못하다 보니 ‘받기’ 하나만큼은 잘 해내자고 생각하고 다짐했어요. 생각과 다짐에다가 기나긴 연습이 있은 까닭인지, 발야구를 하든 야구를 하든, 또 오재미를 하든 피구를 하든, 수비를 하며 늘 악착같았어요. 오재미를 할 때에는 일부러 맞은쪽 끝줄에서 몸을 옹크려요. 그러면 저쪽 끝줄에서 오재미를 이쪽 끝줄로 던지며 나를 잡으라고 할 적에, 나는 펄쩍 뛰어올라 이 오재미를 잡곤 했어요. 저쪽에서는 ‘아차!’ 하지만 때는 늦지요. 나는 이 꼼수를 ‘최종규 작전’이라고 내 이름을 붙여서 선보였어요. 맞은편에서 내가 이러는 줄 안다 하더라도, 막상 우리 편 아이들 두엇이 옹크릴 적에는 ‘그리 높이 안 던져도 우리 편이 받아서 저 녀석들을 잡을 수 있겠지!’ 하고 생각하고 마는가 봐요. 그래서, 우리들이 옹크리면서 기다리면 그리 안 높게 오재미가 날아오고, 우리들은 이 오재미를 펄쩍 뛰어서 잡아내지요.


  그렇지만, 이런 놀이 저런 놀이는 국민학교를 마치며 거의 다 사라집니다. 중학교에 들어서면서 운동장에서 놀이를 즐기는 동무가 사라집니다. 중학생이 된 동무들은 농구를 하느니 축구를 하느니 할 뿐입니다. 놀이를 하지 않아요. 때로는 게임기를 학교에 가져온다든지, 미팅을 한다든지, 벌써 당구장에 간다든지, 담배를 태운다든지, 하는 쪽으로만 흐릅니다. 더군다나, 중학생이 된 사내들은 패싸움도 하고 깡패짓까지 합니다. 열셋에서 열넷이 되었을 뿐인데, 숱한 놀이를 스스로 몽땅 버려요. 아니, 몽땅 빼앗긴다고 해야겠지요. 중학생 때부터 오직 대학바라기 입시공부만 시키니까요. 중학생한테조차 밤 열 시까지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을 시키니, 놀 겨를이 없어요. 운동장에서 금긋기를 하고 땅놀이를 할라치면 어느새 이런 교사 저런 주임이 달려들어 몽둥이로 두들겨패거나 욕설을 하거나 손찌검을 해요. 이렇게 ‘놀 겨를이 어디 있느냐’고 ‘문제집 하나라도 더 풀라’고 닦달을 해요.


.. 대한민국은 작은 골목을 없애 도로를 만들고 동네 마당을 메꾸어 큰 건물을 지어, 이제는 아기자기한 골목도 마당도 보기 쉽지 않다. 골목과 마당이 사라지니 아이들도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 정말 무서운 것은 게임에 가까워질수록 동무와 형제와 부모 같은 사람과 멀어진다는 것이다. 삶이라는 것, 사랑한다는 것, 가슴 아프다는 것, 힘들다는 것, 눈물겹다는 것, 관계라는 것에서 멀어지고 그것이 무엇인지 점점 느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 아이들을 중독에 빠트려 돈을 벌려는 게임 개발업자들을 장려하고, 상을 주지만 그 피해자인 아이들을 돌보지 않는 나라를 어떻게 나라라고 할 수 있겠는가 ..  (53, 55∼56, 70쪽)


  중학교 다니면서 구슬치기도 딱지치기도 사라집니다. 제기차기는 아주 우습게 여깁니다. 오재미나 묵찌빠는 애들 놀이로 여깁니다. 중학생이 묵찌빠를 할 때에는 돈 놓고 돈 먹기를 할 생각일 뿐, 즐거운 놀이로 삼지 않습니다.


  중학생이 된 나는 무척 외롭습니다. 외로울 뿐 아니라 힘듭니다. 놀지 못하고 놀이를 생각하지 못할 뿐 아니라 놀이동무가 없습니다. 다른 동무도 나와 같았을까 궁금한데, 몽둥이에 길들고 시험성적에 주눅듭니다.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에 목이 매이고, 체벌과 괴롭힘에 몸이 얽힙니다.


  생각이 자랄 수 없습니다. 생각이 뻗칠 수 없습니다. 생각이 홀가분할 수 없습니다. 학교는 우리한테 생각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학교는 나와 동무 누구나 생각 없이 주어진 틀에 맞추라고 윽박지릅니다. 배우는 터인 학교가 아니라 길들여지는 터인 학교요, 삶을 누리면서 빛내는 학교가 아닌 톱니바퀴 되는 길을 걸어가는 학교입니다.


.. 학교가 너무 많은 것을 가르치는 것도 문제이지만 아이들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으려는 것은 더욱 큰 문제다. 그 속에 부모들로부터 손쉽고 길게 노동을 빼앗으려는 의도가 숨어 있음은 알려진 사실이다 … 아이들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고, 피부로 느낄 수 있고, 껴안으면 가슴이 따듯해지는 실제의 것을 만나고 싶어 한다 … 마을 공동체의 중심인 (시골) 학교의 문을 닫고, 제가 사는 곳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차를 타고 멀리 있는 학교에 다니며 사이버 세계와 유행과 도시를 동경하게 만드는 것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인가 ..  (78, 87, 147쪽)


  편해문 님이 쓴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소나무,2012)를 읽습니다. 편해문 님은 우리더러 텔레비전을 버리고, 인터넷은 줄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어른 스스로 텔레비전하고 헤어지면서 인터넷하고도 살짝 멀어질 수 있을 때에, 아이들하고 놀 수 있거든요. 어른들 스스로 놀고픈 마음을 북돋울 때에 아이들도 실컷 놀 수 있어요. 어른들은 안 놀면서 아이들만 놀라 할 수 없어요. 어른 스스로 옭매이지 않는 가벼운 몸과 마음일 적에, 아이들 또한 가벼운 몸과 마음 되어 신나게 뛰놀 틈과 겨를과 터와 동무한테 길을 열 수 있어요.


  참 마땅한 말인데, 오늘날 한국에서는 이토록 마땅한 말이 거의 안 받아들여집니다. 어른들 스스로 밥벌이 일에 얽매일 적에 아이들도 입시학원에 얽매여요. 어른들 스스로 집 바깥에서 돈을 버느라 하루 내내 시달리니, 아이들 또한 집 바깥에서 학원을 빙빙 돌면서 입시공부에 허덕이고 말아요.


  놀아 본 어버이가 아이들을 놀게 한다지만, 놀아 본 어버이라 하더라도 ‘오늘 한국 사회에서 돈을 버는 톱니바퀴 기계 구실’을 한다면 아이들을 놀리지 않아요.


  무엇보다, 집에 텔레비전이 있으면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눈이 빠지게 들여다봐요. 텔레비전에 길든 어른들은 텔레비전에 길드는 아이들을 낳아요. 텔레비전 없이 삶과 꿈과 사랑을 생각하는 어른들은 삶과 꿈과 사랑을 생각하는 아이들을 돌봐요.


.. 모든 것을 과외와 암기, 그리고 부모의 기획력에 의존해 오로지 등수에만 몰두한 아이들이 도대체 스스로 무슨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 아름다운 것, 새로운 것, 즐거운 것을 만든 것은 언제나 놀이다. 아이들은 놀면서 생명의 기운을 몸에 담고 새로운 세계로 발을 옮긴다 … 게임의 폭력성이 아이들을 폭력에 물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사는 곳이 이미 싸움터요 전쟁터란 말이다 … 가장 중요한 것은 유기농도 무엇도 아닌 누구랑 먹느냐이다. 혼자 밥 먹기만큼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이것은 혼자 놀기의 어려움을 짐작하면 이해할 수 있다. 골방에서 유기농 혼자 먹으면 오래 못 산다 ..  (200, 201, 209, 214쪽)


  아이들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갈 아이들이 아니에요. 아이들은 사랑을 받을 아이들이에요. 아이들은 놀아야 하는 아이들이에요. 아이들은 마음껏 땅을 박찰 아이들이요, 아이들은 개구지게 뒹굴거나 구르다가 무릎이 까지고 얼굴이 긁힐 아이들이에요. 무릎이나 어깨나 볼에 핏자국 멍자국 있는 일은 대수롭지 않아요. 아이라면 마땅히 온몸에 지는 멋진 무늬예요. 아이다운 그림이요, 아이다운 빛살이에요.


  아이는 아이답게 살아야 해요. 그리고, 어른은 어른답게 살아야 해요. 돈을 잘 벌어다 준대서 어른이 아니에요. 밥을 잘 차리고 빨래를 잘 한대서 어른이 아니에요. 망치질을 잘 하거나 톱질을 잘 하니까 어른일까요. 삶을 사랑하고 삶을 꿈꾸며 삶을 지을 때에 어른이라고 느껴요. 삶을 사랑하기에 하루하루 즐겁게 놀겠지요. 삶을 꿈꾸기에 날마다 기쁘게 놀 이야기를 찾겠지요. 삶을 짓기에 언제나 아름다이 보살피는 놀이를 이루겠지요.


  더 큰 도시에서 살아야 하지 않아요. 공무원이 되거나 고시에 붙거나 큰회사 달삯쟁이가 되어야 하지 않아요. 굳이 자가용을 몰려고 하지 말아요. 아이들은 저희 어버이한테 자가용이 있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저희랑 손을 잡고 거니는 어른을 좋아해요. 아이들은 저희를 안거나 업으며 걷는 어른을 좋아해요. 아이들은 함께 자전거를 타고 함께 헤엄을 치며 함께 멧골을 오르내리는 어른을 좋아해요.


  살아온 이야기를 구성지게 들려주며 살아갈 기운을 북돋우는 어른을 반기는 아이들이에요. 살아온 나날을 기쁘게 돌아보며 이야기꽃 피우는 어른을 달갑게 맞이하는 아이들이에요.


  고무줄놀이는 어린이만 하던 놀이가 아니에요. 공기놀이는 어린이만 할 놀이가 아니에요. 고누도 두고 오목도 두어요. 장기도 두고 장기알 따먹기도 해요. 흙놀이도 함께 즐기고, 풀밭에서 풀놀이도 함께 누려요. 꽃 한 송이 꺾어 서로 꽃순이 꽃돌이가 되어 주셔요. 해맑은 눈빛으로 햇살을 올려다보며 밝고 따사로운 기운을 우리 가슴에 살포시 안을 수 있기를 빌어요. (4345.10.1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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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일 때 가장 빛난다 - 인생에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한홍구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대학생은 졸업장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53] 한홍구·홍세화·김규항·강신주·김현정·간호섭·오강남, 《내가 나일 때 가장 빛난다》

 


- 책이름 : 내가 나일 때 가장 빛난다
- 글 : 한홍구·홍세화·김규항·강신주·김현정·간호섭·오강남
- 펴낸곳 : 철수와영희 (2012.9.18.)
- 책값 : 13000원

 


  중앙대학교 신문사에서 중앙대학교 학생들한테 도움이 되리라 여겨 ‘한국 사회 여러 갈래 지성인’ 일곱 사람을 만나 주고받은 이야기를 그러모은 책 《내가 나일 때 가장 빛난다》(철수와영희,2012)를 읽습니다. 일곱 ‘어른’은 젊거나 어린 대학생을 만나 수수하면서 꾸밈없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젊거나 어린 대학생들은 일곱 어른 이야기를 다른 자리에서는 들은 적 없을 수 있습니다. 대학생이 되기까지, 또 대학생이 되고 나서, 또 앞으로 대학교를 마친 뒤까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다른 어른이 없을는지 몰라요.


  두 아이 아버지로 살아가는 ‘어른’으로서, 《내가 나일 때 가장 빛난다》를 어렵지 않게 읽습니다. 내가 저 일곱 어른 자리에서 대학생을 마주하며 이야기꽃을 피운다고 할 때에는 어떤 말을 들려줄 만한가 하고 헤아리며 차근차근 읽습니다. 옳은 정치를 말하면 좋을까요? 바른 사회의식이나 민주의식을 말하면 좋을까요? 착한 몸가짐이나 곧은 넋을 말하면 좋을까요? 아름다운 꿈이나 어여쁜 사랑을 말하면 좋을까요? 돈을 잘 버는 길이라든지, 아이를 낳고 어떻게 살림을 꾸려야 즐거울까 하는 길을 말하면 좋을까요?


.. 옛날이야기를 들어 보면 우리네와 같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역사라 하면 장군, 예술가 등 특별한 사람들만 떠올리게 되잖아요 … 대학생 모두가 다 같이 개미처럼 스펙 경쟁에 뛰어들어서 어떻게 됐습니까? 스펙을 쌓기 위해 돈과 마음과 열정을 다 쓰고 거기에 더해 어마어마한 스트레스까지 받지요 … 사람들이 괴로운 이유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도 재벌 2세처럼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세상 살면서 정말 필요한 건 돈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는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해요 ..  (한홍구/14, 21. 25쪽)


  내가 대학생을 마주하며 이러구러 이야기꽃을 나눌 수 있다면, 나는 무엇보다 이 한 가지를 먼저 대학생한테 묻고 싶습니다. “대학생인 당신은 졸업장을 내려놓을 수 있나요?”


  대학교 여덟 학기를 잘 마치고 졸업장을 따든, 대학교를 몇 학기 다니다가 그만두든, 스스로 ‘대학교 졸업장’을 잊거나 내려놓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지 궁금해요. 참으로 마땅한 일이지만, 졸업장이 있어야 나무 한 그루를 심을 수 있지 않아요. 초등학교 졸업장이든 대학교 졸업장이든, 이런저런 졸업장이 있기에 능금이나 복숭아를 더 맛나게 먹을 수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논밭에서 두레를 하며 품을 팔 적에 더 김을 잘 맬 수 있지 않아요.


  회사이든 공장이든 공공기관이든, 대학교 졸업장 가진 이들이 달삯을 더 받습니다.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졸업장이 있기에 더 돈을 번다고 해요. 다만, 편의점이나 식당에서 알바를 할 적에는 졸업장이 있건 말건 돈을 더 받지 않아요. 신문배달을 하건 택배 일꾼을 하건, 이때에도 졸업장을 내밀며 일삯을 더 받을 수 있지 않아요.


  가만히 보면, 굳이 졸업장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졸업장은 아랑곳하지 않는 일터’가 무척 많아요. 우유배달이나 신문배달뿐 아니라, 시골마을 흙일꾼이나 고기잡이도 졸업장을 따지지 않아요. 과수원에서 능금을 따거나 김매기를 할 때이든, 이삿짐 나르는 일을 할 때이든, 졸업장이 있기에 ‘가산점’ 받을 일이 없어요. 어느 모로 보면, 대학생더러 굳이 ‘졸업장 내려놓기’를 안 바라도 될 만합니다.


  그러나, 나는 대학생들 누구나 졸업장을 내려놓으면 얼마나 좋으랴 싶어요. 이를테면, 《내가 나일 때 가장 빛난다》에 나오는 어른 일곱 사람을 만날 적에도 그런데요, 한홍구 님이나 홍세화 님이 어느 대학교를 나오건 안 나오건 대수롭지 않아요. 이들 어른 가운데 누군가가 어느 대학교에서 대학생을 가르치건 말건 대수롭지 않아요. 더 이름나다는 대학교를 나왔기에 더 어른스러울까요. 더 이름나다는 대학교에서 대학생을 가르치기에 더 이야기를 들을 만할까요.


.. 조선 시대에는 태어나자마자 신분이 규정되었다면, 지금은 스무 살, 대학에 입학할 시점에 신분이 규정되는 사회인 거죠 … 교육은 결국 경제·문화·교육 자본을 가진 이들이 그것을 자식에게 대물림하는 것을 합리화시킨다는 것입니다 ..  (홍세화/40, 51쪽)


  오늘날 이 나라 대학생들은 스스로 말할 자리가 거의 없다고 느낍니다. 이 나라 대학생들은 둘레 어른한테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을 자리 또한 거의 없다고 느낍니다. 대학생이 되기까지, 집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찬찬히 당신들 삶을 들려주는 일이 몹시 드뭅니다. 이웃 아주머니나 아저씨한테서 당신 삶을 듣는 일이 매우 드뭅니다. 학교에 간들, 어린이집부터 초등학교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치는 사이, 어느 교사가 당신 삶을 학생들 앞에서 조곤조곤 아름다이 들려줄까요. 시험성적과 교과서 이야기를 빼고, 삶과 꿈과 사랑을 어여삐 들려주는 ‘어른’은 ‘대학생이 된 아이들’ 둘레에 얼마나 있을까요.


  대학생들이 스스로 졸업장을 내려놓고 둘레 어른들하고 이야기꽃을 피우면 참 좋으리라 생각해요. 길에서 붕어빵 하나 사먹으면서 붕어빵 아줌마나 아저씨하고도 이야기꽃을 피우면 좋으리라 생각해요. 기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면서, 기차 일꾼이나 버스 일꾼하고 방긋 웃으며 이야기꽃을 피우면 좋으리라 생각해요. 날마다 먹는 밥을 누가 일구는가를 생각하면서, 봄에든 여름에든 가을에든, 시골일을 거들러 며칠이나마 ‘두레(농촌봉사활동이 아닌 두레)’를 가면 좋으리라 생각해요.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하고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삶과 흙과 해와 물과 풀과 바람을 느낀다면 몹시 좋으리라 생각해요.


  그러고는, 대학생 스스로 이녁 마음하고 이야기를 나누어야지요. 마음속에 깃든 ‘내 빛줄기’하고 이야기를 나누어야지요.


.. 자, 국가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군대와 정권이 국가의 실체인가요? 아니면 큰 욕심 없이 정직하게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국가의 실체인가요 … 지금 이 사회는 자기 본분에 충실했다고 해서 인간적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 (독도가) 한국 땅이냐 일본 땅이냐를 구분하기 이전에 한국이, 일본이 누구의 땅이냐를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  (김규항/65, 74, 78쪽)


  더 많이 아는 일은 대수롭지 않습니다. 더 적게 아는 일은 대단하지 않습니다. 참답게 알면서 참답게 살아가면 즐겁습니다. 착하게 알면서 착하게 살아가면 즐겁습니다. 아름답게 알면서 아름답게 살아가면 즐겁습니다.


  이 땅 대학생뿐 아니라 ‘대학생 아닌 젊은이’ 누구나, 참답고 착하며 아름답게 생각하고 살아갈 때에 가장 빛나면서 스스로 즐거우리라 느껴요.


.. 우리 사회는 가부장적인 데다가 이상하기까지 한 사회죠 ..  (강신주/99쪽)


  일삯을 더 주는 데에서 일하기에 즐거우리라 느끼지 않아요. 공무원 뽑는 시험이나 사법고시 같은 시험에 붙는대서 즐거우리라 느끼지 않아요. 스스로 ‘젊은 대학생 삶’을 밝히는 길을 걸어갈 때에 즐거우리라 느껴요. 돈을 삼백오십만 원 받기에 더 즐겁지 않아요. 돈을 삼백사십만 원 받아도 되고, 삼백이십만 원 받아도 되며, 삼백만 원 받아도 돼요. 이백구십만 원도 되며, 이백팔십만 원도, 이백만 원도 되지요. 그러니까, 일삯으로 다달이 구십만 원을 받든 팔십팔만 원을 받든 아랑곳할 까닭이 없어요. 스스로 얼마나 즐거운 꿈을 꾸면서 아름답게 사랑하는 삶인가를 생각할 수 있으면 돼요. 꿈과 사랑이 없이 돈을 벌거나, 이름값을 얻거나, 권력을 누리는 일이 나한테 참으로 즐거울 만할까요.


  저 금강산이나 백두산이나 한라산이나 지리산을 단숨에 올라야 즐거울까요. 헬리콥터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고 가로질러야 즐거울까요. 한겨울에 천천히 오르다가 그예 오백 미터쯤 오르고 더는 못 올라도 즐겁습니다. 스스로 바라보는 삶이 있고, 스스로 누리는 삶이 있을 때에 즐겁습니다.


  밥을 먹으면서 꼭 열 숟가락을 채워야 즐겁지 않아요. 한 숟가락을 덜어도 즐거워요. 두세 숟가락을 던 다음, 내 숟가질을 ‘조금 적게 푸면’서 숫자로 열 차례를 맞추어도 즐거워요. 때로는 한 끼니쯤 슬그머니 거를 수 있어요.


  두 아이와 살아가며 이런 일은 흔히 겪거든요. 아이들 데리고 바깥으로 나들이를 나왔는데 물이나 먹을거리가 얼마 없으면, 이 몫을 아이들한테 줍니다. 어버이가 이 몫을 누리지 않아요. 어버이는 아이들이 얼마 없는 이 몫을 누리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배가 불러요.


.. 이것을 ‘인내천(人乃天)’이라 하죠.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말입니다. 내 속에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한울님, 즉 신이고 그것이 나의 본질이니, 나와 신이 같다는 거죠. 이렇게 떳떳한 생각이 어디 있겠어요?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당당해지고, 꿀리는 것 하나 없이 의연하게 살 수 있습니다. 나만 그런 것이냐? 아닙니다. 내 이웃도 그러합니다. 남의 마음속에도 신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 남을 하느님 모시듯 모십니다 ..  (오강남/213쪽)


  《내가 나일 때 가장 빛난다》를 빚은 중앙대학교 학생들이 앞으로 다음 책 하나 새롭게 빚을 수 있으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집에서 아기를 낳고 예쁘게 사랑하는 여느 어머니, 집에서 아이들 천기저귀를 빨래하며 집일을 돌보는 여느 아버지, 시골에서 나락 심고 마늘 심으며 고구마 심는 여느 할머니, 바닷가에서 조개를 캐고 낙지를 잡으며 김을 훑는 여느 할아버지, 작은 가게이든 커다란 마트이든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여느 아주머니, 시외버스를 모는 여느 아저씨, 대학교에서 청소를 하는 여느 사람들, 인문사회과학책방이나 헌책방에서 일하는 사람들, …… 대학생 둘레에서 ‘졸업장’하고는 아무런 끈도 줄도 닿지 않으면서 삶을 누리는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조곤조곤 주고받는 이야기로 예쁜 책 하나 빚을 수 있으면 어떨까 싶어요. 부디, 맑게 흐르며 맑게 빛나는 냇물이 되어 들판과 숲과 바다를 맑게 적시는 젊은이로 살아갈 수 있기를 빌어요. (4345.9.1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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