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내 부하 해 - 하이타니 겐지로 선생님과 함께 어린이 시 쓰기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햇살과 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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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햇살 누리는 사람은
 [사랑하는 배움책 12] 하이타니 겐지로, 《선생님, 내 부하 해》(양철북,2009)

 


- 책이름 : 선생님, 내 부하 해
- 글 : 하이타니 겐지로
- 옮긴이 : 햇살과나무꾼
- 펴낸곳 : 양철북 (2009.12.7.)
- 책값 : 9000원

 


  좋은 햇살 누리는 사람은 좋은 햇살과 같은 마음을 나눕니다. 고운 봄볕 누리는 사람은 고운 봄볕과 같은 사랑을 나눕니다. 어떤 마음이 되고 싶은가 하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랑을 나누고 싶은가 하고 헤아립니다.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 마음을 이룹니다. 살아가는 하루하루 모여 사랑이 태어납니다.


  가르치거나 배우는 마음이 아닙니다. 삶결 그대로 빚는 마음입니다. 책으로 읽거나 영화로 보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무늬 고스란히 빛나는 사랑입니다.


  마음을 즐거이 다스릴 때에 삶이 즐겁습니다. 마음을 햇살과 같이 둘 때에 마음밭에 뜨는 햇살처럼 내 말과 넋과 삶 모두 햇살처럼 따사롭습니다. 사랑을 웃음으로 나눌 때에 삶이 기쁩니다. 사랑을 웃음으로 나누며 비로소 내 말이랑 넋이랑 삶 모두 사랑이 넘실거리면서 기쁩니다.


.. 자기 생각을 눈곱만큼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사랑입니다.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딱딱하게 굳은 마음에서는 사랑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 상대가 누구든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아주 멋진 일입니다 … 시는 나약한 인간의 솔직한 모습을 담는 것이지, 결코 훌륭한 인간의 모습을 담는 것이 아닙니다 ..  (13, 34, 38, 141쪽)


  마늘을 까다가 문득 생각합니다. 마늘까기노래 부르고 싶다고. 그래서 생각을 기울입니다. 먼먼 옛날 이 겨레 어머니 가운데 마늘을 까면서 노래를 부른 적 있을까 하고. 넓디넓은 마늘밭을 일굴 적에 마늘심기노래라든지 마늘캐기노래를 부른 적 있을까 하고.


  아마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마늘심기·마늘캐기·마늘까기, 이렇게 세 갈래로 다 다른 노래가 다 다른 고을마다 있으리라 생각해요. 왜냐하면, 밭자락 가득 마늘을 심자면 고되지만, 내 밭에 내 밥을 심는 만큼 즐겁게 일하고 싶어요. 밭자락 푸른 마늘잎 쓰다듬으며 마늘알 캘 적에도 내 밥을 거두는 만큼 즐겁게 일하고 싶습니다. 굵거나 작은 알을 만지작거리며 껍질 벗길 적에도 내 밥을 빚는 만큼 즐겁게 일하고 싶답니다.


  노래는 즐겁습니다. 아이들 재우는 자장노래가 즐겁고, 옆지기와 들길 거닐며 부르는 들노래가 즐겁습니다. 놀면서 부르는 놀이노래가 즐겁습니다. 일하며 부르는 일노래가 즐겁습니다.


  누가 가르쳐야 부르는 노래는 없습니다. 노랫말 스스로 짓습니다. 노랫가락 손수 엮습니다. 흥얼흥얼 중얼중얼 제 가락에 맞추고 제 말에 맞추어 노래를 부릅니다.


.. 눈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없습니다 …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단 하나뿐인 자기 마음이 다치기 때문에 싸움은 나쁜 것입니다 … 선물을 한다는 건 한마디로 진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진심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물건을 빌어 표현하는 것뿐인데, 어른들은 한심하게도 선물 하면 와이셔츠나 위스키 같은 물건만 생각하죠 … 가난한 집과 부잣집이 있는 것은 온전히 어른들 탓입니다. 전 세계의 어른들은 하세 게이코 앞에서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  (15, 21, 31, 66쪽)


  밥물 안치고 설거지 하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아이들 재울 적에 부르는 자장노래를 빨래하면서 부르기도 합니다. 마당에 빨래를 널 적에 이 노래를 고스란히 부르기도 합니다. 잠자리에서는 자장노래이고, 일할 적에는 일노래이며, 놀 적에는 놀이노래예요.


  사진찍기를 생각하면, 똑같은 사진기를 쓰는데, 어느 자리는 다큐사진이라 하고 어느 자리는 패션사진이라 해요. 어느 자리에서는 예술사진이라고도 하고, 어느 자리에서는 생활사진이라고도 하다가는, 어느 자리에서는 보도사진이라고도 해요.


  똑같은 연필을 써도, 누군가는 글을 씁니다. 누군가는 그림을 그립니다. 누군가는 설계도를 그립니다. 누군가는 숫자를 적고, 누군가는 장부를 갈무리합니다.


  호미로 풀뽑기 하는 사람 있고, 호미로 밭갈이 하는 사람 있습니다. 호미로 나물캐기 하는 사람 있으며, 호미로 돌고르기 하는 사람 있어요. 아이들은 호미로 흙놀이를 합니다.


.. 아이들은 잔인한 짓을 해도 장난 정도로 끝나지만, 어른들이 잔인한 짓을 저지르면 진짜 무시무시합니다 … ‘당신의 아이를 믿으세요.’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믿지 않으니까 아이들이 비뚤어지는 거예요 … 잠깐만요. 어른들도 옛날에는 어린이였습니다 … 어린이들이 불평할 때는 그만 한 까닭이 있습니다. 정당한 논리가 어른들 때문에 왜곡되려고 할 때, 어린이들은 불평을 합니다 … 아름다운 마음이 담긴 시를 읽은 아이는 아름다운 마음이 훨씬 더 아름다워집니다. 상냥한 마음이 가득 담긴 시를 쓴 아이는 상냥한 마음이 훨씬 더 상냥해집니다 ..  (42, 47, 59, 60, 173쪽)


  삶은 누구나 스스로 짓습니다. 스스로 살고 싶은 대로 스스로 생각을 기울여, 스스로 내 삶을 짓습니다. 나한테 기쁜 일이 찾아오면, 이 기쁜 일을 발판으로 어떤 삶을 누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나한테 궂은 일이 찾아들면, 이 궂은 일을 바탕으로 어떤 삶을 겪고 싶은 마음입니다.


  뜬금없이 찾아오는 일은 없습니다. 모든 일은 스스로 부릅니다. 어이없이 찾아드는 일은 없습니다. 모든 일은 스스로 비롯합니다.


  날벼락 같은 일은 없어요. 모든 일은 시나브로 쌓습니다. 어느 시험을 치러 1등을 해도 스스로 쌓아 이룬 1등이요, 달리기를 해서 꼴등을 해도 스스로 쌓아 이룬 꼴등입니다. 좋고 나쁨이 아니에요. 스스로 쌓은 삶이 어떤 모습을 환하게 비추며 찾아올 뿐입니다.


  이를테면, 국회의원이나 시장·군수 뽑는 선거 있다고 해 봐요. 참말 훌륭하게 살아오고 아름답게 일한 이들이 선거에서 뽑혀요. 때로는 뒷꿍꿍이나 돈놀이로 뽑히는 이들이 있을 텐데, 뒷꿍꿍이나 돈놀이로 뽑힌 이들은 오래지 않아 들통나요. 모두한테 알려지지요. 훌륭하거나 아름답게 뽑힌 이는 훌륭하거나 아름다운 일을 해요. 뒷꿍꿍이나 돈놀이로 뽑힌 이는 뒷짓이나 돈짓을 일삼다가 오래지 않아 공직에서 물러납니다. 공직에서 물러나며 사람들한테 까맣게 잊힙니다. 훌륭하거나 아름답게 일한 사람은 두고두고 이름이 남고 이야기 이어져요. 훌륭하거나 아름답게 일한 사람은 천 해가 지나거나 이천 해가 지나도 이름과 이야기 남습니다. 어리석거나 우악스레 군 사람은 권력이나 돈으로 동상·빗돌 세워도 세월 따라 빛이 바래거나 스스로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갈 노릇입니다. 우리들 누구나 스스로 훌륭한 하루를 일굴 노릇입니다.


  아름다움이란 아주 커다란 업적이 아닙니다. 훌륭함은 훈장이나 명예가 아닙니다. 나무 한 그루 사랑하는 손길이 아름다움입니다. 아이들 이마를 쓸어넘기며 맛난 밥 차려 먹이는 손길이 훌륭함입니다. 풀포기 하나 아끼는 손길이 아름다움입니다. 하늘바람과 구름바람 마시며 맑은 목청으로 노래 한 가락 뽑는 삶이 훌륭함입니다. 텃밭에 콩씨 하나 묻어 콩열매 얻는 삶이 즐거움이요 아름다움이며 훌륭함입니다.


.. 다이코 슈는 자기의 남동생이 사내아이답지 않게 너무 얌전한 것이 못마땅합니다. 이것은 다이코 슈가 남동생을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뜻과 같습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면 이렇게 열을 올리지도 않을 테니까요 … 시에는 규칙이 없습니다. 하면 안 되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딱 하나, 지킬 것이 있습니다. 바로 솔직하게 쓰는 거죠 … 시는 이야기에서 시작됩니다. 눈곱만큼도 거짓을 말하지 않겠다는 마음,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겠다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면 수다는 훌륭한 시입니다 … 새싹에 물을 주며 무럭무럭 자라도록 보살피듯이, 자신의 아름다운 마음도 끊임없이 살피며 키워 나가야 합니다 ..  (65, 76, 174쪽)


  하이타니 겐지로 님이 쓴 《선생님, 내 부하 해》(양철북,2009)라는 책을 읽습니다. 퍽 어린 아이들한테 ‘동시 쓰기’를 이야기한 열매를 갈무리한 책입니다. ‘동시 쓰기 지도’라고 할 수는 없고, ‘동시 쓰기 놀이’라 할 만한 책입니다. 아이들 스스로 이녁 삶을 좋아하고 아끼고 즐기고 사랑하면 아이들 누구나 스스로 시인이 되어 예쁜 싯말 하나 빚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입니다.


.. 아름다운 자연은 시가 꽉 들어찬 통조림과도 같습니다 … 지금껏 아무도 쓴 적이 없는 말이나 표현을 여러분이 직접 발명하는 거예요. 여러분은 위대한 말 발명가가 되어야 합니다 … 여러분이 어른들을 저만치 앞질러 버리세요. 보석처럼 근사한 말을 가득 만들어서 어른들을 무릎 꿇리는 거예요 … 시에서 리듬은 중요하지만 머리로는 리듬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시의 내용(바꿔 말해서, 시의 마음)만 확실하면 시의 리듬은 저절로 생겨납니다 … 시가 아름다운 까닭은 이처럼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시를 써서 다른 뭔가를 해 보려는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기 때문에 시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  (94, 110, 111, 130, 185쪽)


  어린이는 모두 시인입니다. 어린이는 모두 하늘이거든요. 어른도 누구나 시인입니다. 어른은 누구나 어린이 삶을 누리며 자랐거든요.


  다만, 어린이 가운데 학원과 학교와 텔레비전과 조기교육(선행학습)에 얽매인 채 놀지 못하고 뛰지 못하며 노래하지 못하는 숨결이라면, 이 어린이는 하늘이 아니고, 시인이 아닙니다. 이 어린이는 슬픈 기계이자 슬픈 톱니바퀴입니다.


  어린이를 쳇바퀴에 가두지 말아요. 어린이한테 지식을 주워섬기지 말아요. 열두 살 어린이가 왜 열네 살 푸름이가 학교에서 배우는 영어나 수학을 먼저 지식으로 배워야 하나요. 열여섯 살 푸름이가 왜 스무 살 젊은이가 대학교에서 배우는 영어나 수학을 먼저 지식으로 갖춰야 하나요.


  어른 스스로 어른 이녁을 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어른 또한 누구나 하늘인 줄 깨달아야 합니다. 어른부터 스스로 섬기고 아낄 때에, 어른과 함께 살아가는 아이들을 나란히 섬기고 아낄 수 있어요. 어른 스스로 이녁을 안 섬기고 안 아끼니까, 이 어른들이 아이들을 괴롭히거나 얽매거나 짓누릅니다.


.. 이 세상에 나는 한 사람뿐이다, 이 넓은 우주에 나는 딱 한 사람밖에 없다는 것을 늘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시를 쓰세요 … 시는 머리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시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 ‘좋은 시를 쓰려면 좋은 삶을 살아라.’는 말이 있는데, 이무렵의 아이들은 이 말을 잘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 뒤 일본은 불행한 전쟁의 시대를 맞고, 시도 완전히 달라져 버립니다 … 시를 쓰는 것은 아름다운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시는 아름다운 마음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시를 쓴다는 것, 시를 읽는다는 것은 그 마음을 찾아내 따뜻하게 데워 주고 커다랗게 만들어 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  (149, 150, 160, 172쪽)


  좋은 햇살 누리는 사람은 좋은 햇살을 가슴에 품어요. 어른 스스로 좋은 햇살을 누리려고 해야 어른 가슴에 좋은 햇살이 깃들어요. 맑은 바람 마시는 사람은 맑은 바람을 가슴에 담아요. 어른부터 스스로 맑은 바람을 누리려고 해야 어른 가슴에 맑은 햇살이 스며들어요.


  햇살도 바람도 누리지 않는 어른은, 아이들이 햇살과 바람을 누려야 하는 줄 몰라요. 햇살도 바람도 즐기지 않는 어른은, 아이들이 햇살과 바람을 먹으면서 아이들 스스로 이녁 삶을 사랑하도록 이끌어야 하는 줄 몰라요.


  왜 오늘날 한국 아이들은 시인이 못 될까요? 마땅하지요. 오늘날 한국 아이들 가운데 ‘하늘’인 아이는 거의 없어요. 오늘날 한국 아이들 가운데 얼마쯤 ‘하늘다운 모심이나 섬김’을 받는가 돌아봐요. 오늘날 한국 아이들은 하늘바라기를 못해요. 오늘날 한국 아이들은 도시에서 하늘빛조차 못 봐요. 오늘날 한국 아이들은 낮에는 눈부신 햇살을 못 누리고, 밤에는 해맑은 달빛과 별빛을 못 누려요. 오늘날 한국 아이들은 무지개도 미리내도 볼 수 없어요. 오늘날 한국 아이들은 자가용과 아파트와 시멘트건물에 갇힌 채, 들새 노랫소리나 풀벌레 노랫소리나 개구리 노랫소리 하나 즐기지 못해요.


.. 서로 사이좋게 지내고 인간으로서 가치를 서로 인정하는 것도 중요한 공부다 ..  (214쪽)


  어린이는 하늘입니다. 그래서 어린이는 시인입니다. 어른은 하늘입니다. 그래서 어른은 시인입니다. 곧, 사람은 하늘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시인입니다. 어린이이든 어른이든, 또 젊은이이든 늙은이이든, 누구나 하늘이면서 시인입니다.


  스스로 즐겁게 느끼기를 빌어요. 나도 시인이요, 당신도 시인이에요. 나부터 시인이고, 당신 또한 시인이랍니다.


  우리 모두 시를 써요. 우리 다 같이 하늘숨을 마셔요. 우리 모두 시를 노래해요. 우리 다 함께 삶빛을 나누며 어깨동무해요. 4346.2.2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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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하는 남자 친구의 편지 한림 저학년문고 1
키르스텐 보예 지음, 스테파니 샤른베르그 그림, 유혜자 옮김 / 한림출판사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어린이책 읽는 삶 29

 


서로 재미있게 놀자
― 발레하는 남자 친구의 편지
 키르스텐 보이에 글,스테파니 샤른베르그 그림,유혜자 옮김
 한림출판사 펴냄,2006.4.30./9000원

 


  시골에서 살아가든 서울에서 살아가든, 우리들은 재미있게 살아갈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든 어느 집안에서 태어나든, 저마다 재미있게 삶을 일굴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시골에서 태어났으면 시골사람답게 시골을 누리면 됩니다. 서울에서 태어났으면 서울사람답게 서울을 누리면 돼요. 살림 가멸찬 집안에서 태어나면 이 집안살림 곱게 누리면 되고, 살림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면 이 집안살림 넉넉히 누리면 됩니다.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삶입니다. 어떤 마음이 되어 하루하루 맞아들이려 하는가에 따라 바뀌는 생각입니다. 마음자리에 따라 삶이 달라지고, 마음빛에 따라 생각이 거듭나요.


  시골에서 살아가기에 파랗게 눈부신 하늘과 푸르게 뒤덮인 들과 숲을 누리면 됩니다. 서울에서 살아가기에 마당을 돌보고 텃밭이나 꽃밭을 가꾸며, 빈 터가 보이면 나무씨앗 한 톨 심어 씩씩하게 자라기를 빌 수 있어요. 시골에서는 시골숲을 보살피고, 서울에서는 서울숲을 돌보면 즐겁습니다.


.. 그런데 생각해 보니 선생님이 쓰기 공부를 가르치는 것보다 수산네라는 동창생 이야기를 하는 게 차라리 잘 된 일인 것도 같았다 ..  (12∼13쪽)


  정치를 꾀하는 이들은 진보나 보수 같은 이름을 만듭니다. 아마 오늘날 정치에서는 진보하고 보수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금긋기를 하며 싸워야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진보는 무엇이고 보수는 무엇일까요. 시골에서는 정치를 안 하고 몽땅 서울에서만 정치를 하는데, 서울에서 정치꾼이 꾀하는 진보나 보수란 서로 어디로 나아가려 하는가요.


  정치꾼이든 기업꾼이든 으레 ‘일자리 만들기’를 얘기해요. 우리 시골집으로도 ‘국회의원 의정보고서’가 날아와요. 시골 국회의원이 정치꾼으로서 무슨 일을 했는가 죽 돌아보니, 하나같이 ‘토목건설 사업’을 이래저래 벌이며 몇 억이나 수십 억 돈을 타내었다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그러니까, ‘일자리 만들기’라 한다면, 우리 여느 사람들 주머니에서 돈을 거두어들여 ‘토목건설 일자리’를 만든다는 셈이고, 토목건설 일꾼들이 무언가 짓고 부술 적에 곁에서 밥을 팔거나 술을 팔거나 기계를 팔거나 부속품이나 장비를 팔아 돈이 돌고 돌게 한다는 뜻입니다.


  백 해쯤 앞서를 생각합니다. 오백 해나 천 해나 만 해쯤 앞서를 생각합니다. 한국말에 ‘진보’나 ‘보수’는 없습니다. 서양 학문을 일본 학자가 옮기며 ‘진보’나 ‘보수’ 같은 한자말을 지었습니다. 문명 사회가 되었다 하기에, 서양 학문이 한국으로도 흘러들어 이런 이름으로 정치나 사회나 문화를 읽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흙을 만지는 일꾼한테 진보가 있을까요. 갯벌에서 바지락 캐고 고깃배 몰아 고기를 낚는 일꾼한테 보수가 있을까요. 아이를 낳아 젖을 물리는 어머니한테 진보가 있을까요. 아이들 똥바지 오줌기저귀 손빨래하는 아버지한테 보수가 있을까요.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들은 진보나 보수를 알까요. 노래를 부르며 놀고, 마당에서 뒹구는 아이들한테 진보나 보수라는 금을 가를 까닭이 있을까요.


  봄꽃에 진보가 있을까요. 여름숲에 보수가 있을까요. 가을걷이에 진보가 있을까요. 낫질이나 써레질이나 갈퀴질에 보수가 있을까요. 아궁이에 불을 때고 밥물 맞추는 데에 진보가 있을까요. 겨우내 도란도란 이야기꽃 피우며 고구마 쪄서 먹는데 보수가 있을까요.

 

 


.. “알렉산드라라는 애야. 줄여서 알렉스라고 한대. 네가 직접 읽어 봐. 글씨를 읽을 수 있다면.” “정말 글씨 되게 못 쓴다.” 발레스카가 안됐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착한 아이일지도 몰라. 글씨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  (36쪽)


  우리 시골마을 고흥에서는 군청에서 앞장서서 ‘비전 5000 프로젝트’를 꾀한다고 밝힙니다. 시골 흙일꾼이나 고기잡이마다 한 해에 5000만 원 넘게 돈을 벌도록 무언가 한다는 뜻인데, 흙을 만지거나 고기를 낚거나 갯일을 하며 꼭 5000만 원 넘게 벌어야 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4500만 원을 번다든지 3900만 원을 벌면 안 될는지요. 2000만 원을 벌면 먹고살기 힘들는지요. 흙을 일구어 거두는 푸성귀나 곡식을 굳이 내다 팔아 돈을 만져야 할는지요. 스스로 살림 꾸릴 만큼 흙을 일구어 식구들 밥을 차리는 삶으로 나아가면 어떠할는지요.


  5000만 원을 벌어 무엇을 하면 즐거운 삶이 될까요. 5000만 원 넘게 벌어 누구하고 이 돈을 나눌 때에 아름다운 삶이 될까요. 5000만 원 못 되게 벌어 살림은 어떠하게 꾸릴 때에 재미난 삶이 될까요.


  돈을 버는 일이 나쁘다고 여기지 않아요. 다만, 돈벌이에만 마음이 사로잡히면 슬프거나 안쓰럽다고 느껴요. 시골마을 군청에서 할 몫이라면, 시골마을 사람들이 ‘돈을 더 벌라’고 부추기거나 채찍질을 하기보다는, 돈을 적게 벌거나 아예 안 벌더라도, 하루하루 재미나게 삶을 누리는 길을 밝혀야지 싶습니다.


  우리 이웃 할머니 할아버지는 ‘서울로 가서 지내는 딸아들’이 손자를 낳아 돌보는데 아토피 때문에 유기농 곡식이며 약값이며 무어며 하면서 다달이 백만 원이나 이백만 원씩 쏟아붓는다고 걱정해요. 한 해에 5000만 원을 벌든, 또는 1억 원을 벌든, 아토피를 비롯해 온갖 몸앓이를 한다면, 이렇게 버는 돈은 어디에 뜻이 있을까요. 돈벌이를 하느라 막상 삶을 누리지 못하거나, 느긋한 겨를이 없다면 어떤 보람이 있을까요.


  돈을 벌고 싶으면 벌 노릇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누구도 ‘돈을 벌려고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어요. 우리는 누구나 ‘삶을 재미있게 누리려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 “이런 바보 같은 애를 뭐 하러 만나러 가요? 축구도 바보 같은 짓이라고 하는데!” “그런 말을 썼다고 그 애를 보러 가지 않겠다고? 너 생각이 제대로 돌아가는 애니? 설마 온 세상 사람들이 네가 좋아하는 것을 다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49∼50쪽)


  시골마을 고흥은 ‘비전 5000 프로젝트’를 외치면서 다른 한켠에서는 ‘하이 고흥 해피 고흥’을 외쳐요. 높고 즐거운 고흥이라는 소리인데, 돈을 많이 번대서 높고 즐거운 시골살이가 되지 않습니다. 집안에서 아이들 웃음꽃이 흐드러지고, 마을에서 사람들 노랫소리 흐드러지며, 숲과 들에 맑은 바람 산들산들 불 때에 높고 즐거운 시골살이가 이루어집니다.


  멧새와 들새가 농약에 시달리지 않을 때에, 도랑물과 냇물을 언제 어디에서라도 두 손으로 떠서 마실 수 있을 때에, 바닷가에 관광객 쓰레기가 넘치지 않을 때에, 자동차보다 자전거와 두 다리를 믿고 들길과 시골길 거닐 수 있을 때에, 멧골짝 시냇가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놀이가 아니라 멧골짝 시냇물에서 발 벗고 찰방찰방 노닐며 노래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즐거운 시골살이입니다.


.. 다시 거실로 돌아간 로빈은 알렉스의 회색 눈빛을 보면서 역시 북해 출신 아이답다고 생각했다 ..  (76쪽)


  키르스텐 보이에 님 글이랑 스테파니 샤른베르그 님 그림이 어우러진 어린이책 《발레하는 남자 친구의 편지》(한림출판사,2006)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사내가 발레를 해도 스스로 즐거우면 재미난 삶입니다. 가시내가 축구를 해도 스스로 즐거우면 재미난 삶입니다. 발레에도 축구에도 진보나 보수는 없습니다. 집안일이나 들일이나 바닷일에도 진보나 보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누리는 삶에서 스스로 무엇을 찾고 생각하며 나눌 때에 아름다운가를 깨닫기를 바랍니다. 어른부터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면서, 이 땅 어린이와 푸름이가 아름다운 빛을 실컷 누리고 느낄 수 있도록 이끌기를 바랍니다. 서로 재미있게 놀기를 빕니다. 4346.2.1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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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라 로켓파크 카르페디엠 32
이시다 이라 지음, 김윤수 옮김 / 양철북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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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책과 함께 살기 104

 


청소년은 즐겁게 살아가고 싶다
― 날아라 로켓파크
 이시다 이라 씀,김윤수 옮김
 양철북 펴냄,2013.1.2./11000원

 


  바람이 붑니다. 여러 가지 소리를 내며 바람이 붑니다.


  귀를 기울입니다. 내 귀로 스며드는 여러 가지 소리를 가만히 듣습니다.

  바람은 철마다 다 다른 소리와 내음과 무늬와 빛깔로 내 몸으로 스밉니다. 바람은 다달이 다 다른 소리로 찾아들고, 나날이 다 다른 내음으로 찾아들며, 아침저녁으로 다 다른 무늬를 선보이다가는, 때마다 늘 다른 빛깔이 눈부십니다.


  바람은 소리로만 찾아오지 않습니다. 바람에는 수많은 모습이 서립니다. 시골에서 부는 바람이랑, 숲과 들과 마당과 마을과 바다에서 부는 바람이 사뭇 다릅니다. 대청마루에 앉아 마주하는 바람이랑, 헛간 곁에서 마주하는 바람이랑, 대문 앞에서 마주하는 바람이랑, 마늘밭이나 무논에서 마주하는 바람이 서로 달라요.


  도시에서도 바람은 노상 다릅니다. 찻길에서 마주하는 바람, 거님길에서 마주하는 바람, 높다란 아파트나 건물 곁에서 마주하는 바람, 도시 한켠 공원에서 마주하는 바람, 도시 길가 가녀린 나무 옆에서 마주하는 바람, 골목 어귀에서 마주하는 바람, 골목동네 한복판에서 마주하는 바람, 골목밭 앞에서 마주하는 바람, ……, 참말 같은 바람이란 없습니다.


.. 고개를 드니 콘크리트 난간 너머로 도쿄의 하늘이 보였다. 크림처럼 하얀 봄 하늘이다. 요지는 요코하마나 여기나 하늘은 똑같구나 생각했다 … “사람한테 나이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어른이라도 그저 그런 사람이 있고, 아이라도 놀랄 ㅁ나큼 믿음직한 사람이 있어. 너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똑바른 사람이라서 부탁한 거란다.” ..  (7, 71쪽)


  햇살이 드리웁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안고 햇살이 드리웁니다.


  눈을 감습니다. 내 살결로 젖어드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곰곰이 헤아립니다.


  햇살은 철마다 다 다른 이야기로 나한테 다가옵니다. 도란도란 속삭이는 이야기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우당탕탕 헐레벌떡 거침없이 휘젓듯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햇살이 우당탕탕거릴 수 있느냐고요? 네, 그래요. 햇살을 스물네 시간 바라보셔요. 새벽부터 밤까지 햇살을 찬찬히 느껴 보셔요. 시멘트로 지은 집에서 말고, 흙과 나무와 짚과 돌로 지은 집에 깃들어 햇살을 하나하나 느껴 보셔요. 아니, 시멘트로 지은 집에서도 햇살을 느낄 수 있어요. 마음으로 눈을 뜨며 가만히 헤아려 봐요.

  해가 기운 저녁에도 햇살을 느낄 수 있어요. 지구별 다른 쪽 비추는 햇살을 느껴요. 달에 어리는 햇살을 느껴요. 멀디먼 뭇별에 닿는 햇살을 느껴요. 밤에도 햇살은 우리 마을 우리 집까지 찾아옵니다. 낮에도 아침에도 햇살은 즐겁게 찾아옵니다.


  풀과 나무와 꽃은 햇살을 먹으며 살아갑니다. 물고기와 들짐승과 풀벌레 모두 햇살을 마시며 살아갑니다. 사람 누구나 햇살을 들이켜면서 살아갑니다. 햇살 한 모금 마시지 않으면 숨결을 잇지 못해요. 햇살 한 조각 먹지 않으면 목숨을 건사하지 못해요. 내 즐거운 삶을 빛내는 반가운 햇살을 고맙게 마주하면서 두 팔을 활짝 벌립니다.


.. 다들 한눈으로도 간타를 특이한 아이로 여기는 듯했다. 어른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 간타를 특별한 아이 취급하는 사람들은 유치원 선생님만이 아니었다. 어른들은 모두 그랬고, 늘 간타와 함께 있는 요지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 “걱정 안 해도 돼. 아빠가 그랬어. 신은 장애를 가진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훨씬 강하게 만드셨대. 곤란하거나 괴로운 일을 견딜 수 있는, 그래서 우리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래.” … “사람을 심판한다는 건 그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부분까지도 전부 깎아내는 일이야.” ..  (14, 15, 23, 166쪽)


  푸름이는 누구나 즐겁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꿈을 키우는 푸름이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사랑을 노래하는 푸름이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실컷 놀고, 개구지게 달리고 싶습니다. 마음껏 뛰고, 온몸 휘저으며 뒹굴고 싶습니다.


  어느 일터에 몸이 매여 달삯바라기만 하는 푸름이로 살아가는 일은 즐겁지 않습니다. 대학생이 되어야 할 푸름이가 아닙니다. 공무원이나 회사원이 되어야 할 푸름이가 아닙니다. 자영업자가 될 푸름이가 아닙니다. 푸름이는, 푸름이라는 이름 그대로 푸른 삶 푸른 꿈 푸른 사랑을 꽃피울 수 있는 가슴을 북돋울 때에 푸름이입니다.


  즐겁게 삶을 누리는 어린이가 즐겁게 삶을 빛내는 푸름이가 됩니다. 즐겁게 삶을 빛내는 푸름이가 즐겁게 삶을 일구는 어른이 돼요. 어릴 적 즐겁게 놀지 못하면, 푸른 나날에도 즐겁게 배우지 못해요. 푸른 나날에 즐겁게 배우지 못하면, 어른이 되어 아이들을 낳거나 짝꿍과 사랑을 나누고 싶을 때에 즐거운 삶길을 걷지 못합니다. 어릴 적에 놀지 못한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으면, 이녁 아이하고 놀 줄 몰라요. 어릴 적에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짝꿍을 사귀려 할 적에 사랑을 어떻게 나누어야 아름다운가를 몰라요.


  대학입시에 얽매여 즐거운 나날을 누리지 못하던 아이들이 대학생이 짠 하고 된대서 즐거운 삶을 스스로 일구지 못합니다. 대학입시 공부에 목이 매여 참고서와 교과서와 문제집만 가방 가득 짊어지고 다녀야 하는 푸름이라면, 꿈도 사랑도 이야기도 모두 짓눌린 채 바보가 된 슬픈 넋일 뿐입니다. 가방에 시집 한 권 챙기지 못한다면, 집에서 만화책 한 권 느긋하게 펼치지 못한다면, 동무들과 바다마실 숲마실 들마실 즐기지 못한다면, 어버이와 오순도순 이야기꽃 피우지 못한다면, 푸름이로서 푸름이다운 한삶을 못 누리는 셈입니다. 푸름이일 때에 푸름이답게 한삶을 못 누린다면, 이웃을 아끼거나 뭇목숨을 소담스레 보살피는 손길을 키우지 못해요.


.. 아이들이 자살하는 첫 번째 원인은 학교생활 때문이다. 학교라는 작은 사회는 아이들에게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글과 같았다 … “한 살 많은 얼간이를 왜 선배라고 불러야 하는데? 난 그런 거 싫어. 운동은 좋아하지만.” … 누가 더 센지 싸우고, 교실에서는 누구 머리가 좋은지 시험 점수로 경쟁한다. 그것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이었다 ..  (32, 98, 101쪽)


  학교에 가야 하는 아이들이 아니고, 학교에 안 가야 하는 아이들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그저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 하는 어버이가 아니고, 아이들을 학교에 안 보내도 되는 어버이가 아닙니다. 어버이는 누구나 어버이입니다.


  아이들 마음을 읽어요. 어른들 마음을 보여주어요. 아이들 생각을 쓰다듬어요. 어른들 생각을 활짝 열어요. 아이들 사랑을 돌보아요. 어른들 사랑을 스스럼없이 드러내요.


  우리가 서로서로 할 일은 오직 하나, 사랑입니다. 사랑스럽게 말을 하고, 사랑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며, 사랑스럽게 밥을 지으면 됩니다. 사랑스럽게 빨래를 하고, 사랑스럽게 비질과 걸레질을 하며, 사랑스럽게 웃고 울어요. 사랑스럽게 자전거를 타고, 사랑스럽게 들길을 걸으며, 사랑스럽게 나물을 캐고 나무를 어루만져요. 사랑스럽게 책을 읽고, 사랑스럽게 글을 쓰며, 사랑스럽게 사진을 찍어요.


  무엇을 하든 사랑으로 하면 돼요. 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하든, 집에서 지내며 숲과 바다와 들을 온몸으로 껴안든, 시골에서 시골 아이로 자라든, 도시에서 도시 어른으로 크든, 마음속에 사랑씨앗 한 알 곱게 심으면 돼요.


  무엇이 되겠다거나, 어떤 뜻을 이루겠다는 생각도 좋아요. 다만, 어떤 이름값을 떨치거나 얼마쯤 되는 돈을 벌겠다는 뜻을 세우든, 언제나 사랑으로 할 수 있으면 됩니다. 사랑스럽게 이름을 떨치고, 사랑스럽게 돈을 벌며, 사랑스럽게 꿈을 이루면 되지요.


  사랑이 없을 때에는 메마릅니다. 사랑이 없으니 차갑습니다. 사랑하고 등을 돌리면 나 스스로 삶이 고단해요. 아이를 품에 안고 다독다독 자장노래 부를 적에는 목소리만 예쁘게 뽑는대서 아이가 새근새근 잠들지 않아요. 어버이나 어른으로서 온 사랑 듬뿍 실어 부드러이 부르는 자장노래일 적에 아이는 느긋하게 눈을 감고 즐겁게 웃으며 꿈나라로 날아갑니다.


.. 정말 그럴까? 간타는 생각했다. 요지와 함께 만든 로켓파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샀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주식이 오르고 이익이 늘어나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누군가는 아파트 단지 공원에 있는 로켓 미끄럼틀을 탄 적도 없을 뿐더러, 그 존재조차 알지 못한다 … “이상한 건, 모두 노동이 신성하다고 외치면서 실제로 회사에서는 사람을 기계 부품처럼 취급한다는 거야. 말과 행동이 전혀 달라. 노동은 신성하지만 노동자는 한 번 쓰고 필요없어지면 버리는 일회용이라니 모순이야.” ..  (247, 271쪽)


  푸른문학 《날아라 로켓파크》(양철북,2013)를 읽습니다. 일본사람 이시다 이라 님은 아이들이 어릴 적에 어떤 사랑을 받으며 자라는가에 따라 어른이 되며 살아가는 모습이 사뭇 달라진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쁜 사랑 예쁘게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예쁜 이야기 꽃피우는 예쁜 어른으로 살아갑니다. 슬픈 사랑 슬프게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슬픈 이야기 주섬주섬 줍는 슬픈 어른으로 살아갑니다.


  어린이인 오늘 즐겁게 살아야, 어른이 된 오늘 즐거운 이야기 나눕니다. 푸름이인 오늘 즐겁게 지내야, 어른이 된 오늘 즐거운 일을 기쁘게 합니다.


  스무 살에 대학생이 되고 스물대여섯 살에 도시에서 일자리 얻어, 예순두어 살쯤 정년퇴직을 하고는, 늙어서 죽을 때까지 연금 받으며 조용조용 손자 재롱에 깔깔깔 웃는 삶이 즐거운 삶일는지 생각할 수 있기를 빕니다. 우리 어른들은 이렇게 지내는 삶이 즐거울까요. 우리 아이들한테 이런 삶을 물려주어야 즐거울까요.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이란 무엇일까요. 사람으로 사랑을 나눈다는 뜻이란 무엇일까요. 사람으로 생각하고 마음을 여는 길이란 무엇일까요. 어깨동무란 무엇이고, 품앗이랑 두레는 무엇일까요. 마을이란 무엇이고, 보금자리란 무엇일까요. 일이란 참말 무엇이며, 놀이란 참말 무엇일까요.


  도시에서는 숱한 등불과 건물에 가려 밤하늘 별을 바라보기 힘들다고 하지만, 도시 어디에나 별은 뜹니다. 등불이나 건물에 가릴 뿐, 별은 늘 반짝반짝 빛나요. 아이들이 입시지옥과 취업지옥에 시달리거나 들볶인다지만, 이 아이들 가슴에는 사랑을 빛내고픈 작은 씨앗 하나 어김없이 있어요. 작은 씨앗은 사랑을 먹으며 자라고 싶어요. 작은 씨앗은 사랑 어린 손길 받으며 따사로운 마음밭에서 자라고 싶어요.


  아이들이 날게 해 주셔요. 아이들 날개를 보드랍게 쓰다듬어 주셔요. 아이들 마음자리에 사랑이라는 새 날개옷 베풀어 주셔요. 아이들 누구나 스스로 사랑날개 펼쳐 사랑노래 부를 수 있도록, 우리 어른들 모두 웃음꽃 피울 수 있기를 빌어요. 4346.2.12.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푸른책과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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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02-12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엇이 되겠다거나, 어떤 뜻을 이루겠다는 생각도 좋아요. 다만, 어떤 이름값을 떨치거나 얼마쯤 되는 돈을 벌겠다는 뜻을 세우든, 언제나 사랑으로 할 수 있으면 됩니다. 사랑스럽게 이름을 떨치고, 사랑스럽게 돈을 벌며, 사랑스럽게 꿈을 이루면 되지요."

-이 글을 읽으니 칼릴 지브란 저, <예언자>에서‘모든 노동은 사랑이 없는 한 공허한 것.’이란 말이 생각납니다. 사랑으로써 행하기,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깁니다.


숲노래 2013-02-13 07:45   좋아요 0 | URL
삶에는 사랑이 있기에 뜻이 있구나 싶어요.
참 그래요.
 
10대와 통하는 노동 인권 이야기 - 차남호 선생님이 들려주는 노동과 세계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9
차남호 지음, 홍윤표 그림, 이수정 감수 / 철수와영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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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책과 함께 살기 103


내가 할 일은 내가 사랑할 삶
― 10대와 통하는 노동인권 이야기
차남호 글,홍윤표 그림
철수와영희 펴냄,2013.1.14./13500원


도시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시골로 옮겨 아이들하고 오붓하게 지내면서 흙을 일구는 차남호 님이 이 땅 푸름이를 생각하며 쓴 책인 《10대와 통하는 노동인권 이야기》(철수와영희,2013)를 읽습니다. 푸름이들한테 ‘노동자 되어 일하는 삶’을 들려주는 책이로구나 싶어 반갑기도 하지만, 그저 도시에서만 살아가며 이 얘기를 들려주기보다, 스스로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서 흙내음 맡으며 살아가는 사랑을 살포시 담아 이 얘기를 들려주니 한결 반갑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태어나 어딘가 보금자리를 이루어 살아간다고 할 적에, 도시살이도 한 갈래 길이요 시골살이도 한 갈래 길이거든요. 도시에서만 살아가며 ‘노동자 되어 일하는 삶’을 얘기할 적에는 모든 푸름이한테 ‘도시에서 살아가는 길’만 들려주어요.


.. ‘노동자는 어렵게 산다’는 편견에 갇혀 지레 겁먹을 필요도 없어요. 요컨대 ‘노동자로 살아도 괜찮을까’를 놓고 씨름하는 대신 ‘내 꿈을 이루려면 어떤 노동자가 될지’ 깊이 생각하는 게 현명한 태도라 하겠습니다 … 10대 아르바이트생한테도 당연히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해야 합니다. 아니, 어른보다 힘이 약하고 미숙하니까 더 특별히 보호해야죠 .. (12, 14쪽)


사람은 도시에서만 살아갈 수 없습니다. 누군가 도시에서 살아간다 하더라도, 시골이 없으면 도시는 무너집니다. 시골을 지키는 사람이 없다면 어떠한 도시라도 쓰러지거나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너무 마땅한 노릇인데, 시골에서 곡식과 열매와 푸성귀를 일구어 거두는 사람이 없다면, 어떤 도시도 하루조차 버티지 못합니다. 시골 흙일꾼이 있어 도시사람이 먹고삽니다. 시골에 숲이 있어 도시사람이 숨을 쉽니다. 시골에 냇물이 흐르고 들판이 푸르기에 도시사람이 따순 햇볕을 쬘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시골살이’를 안 가르칩니다. 오늘날 교과서는 아이들한테 ‘시골에서 흙일꾼 되기’를 안 보여주고 안 가르칩니다. 오늘날 교사는 아이들 앞길을 이끌 적에 대학교로 보내거나 직업훈련소로 보내거나 공장으로 보내거나 하는 데에만 마음을 기울이지, 아이들이 ‘시골로 가서 살아가’도록 돕거나 이끌거나 북돋우지 않습니다.


도시에 있는 학교도 아이들을 시골로 보내지 않습니다. 시골에 있는 학교도 아이들을 시골에서 살아가도록 붙잡지 않습니다. 아마, 제도권교육 울타리에서는 모든 아이를 도시로 보내어 ‘노동자나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게끔 이끌밖에 없겠지요. 그런데, 아이들이 도시에서 노동자가 되든 회사원이 되든 공무원이 되도록 이끌면서도, 막상 ‘일하는 사람’이 무엇이고 ‘일’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슬기롭게 짚지 못해요.


사회를 말하거나 경제를 말하거나 정치를 말하는 사람은 많아요. 그러나, 일을 말하거나 놀이를 말하거나 삶을 말하는 사람은 너무 적어요. 돈을 말하거나 연봉을 말하거나 투자를 말하는 사람은 많아요. 그러나, 사랑을 말하거나 나눔을 말하거나 꿈을 말하는 사람은 매우 적어요.


.. 전쟁 포로의 노동은 차츰 세상을 움직이는 중요한 원동력이 됩니다. 그래서 포로의 공급원인 전쟁이 끊이지 않아요. 자연스레 전쟁의 지도자는 지위가 높아지고 영향력이 커지면서 부족 지도자로, 끝내는 왕으로 변신하죠. 왕은 이제 지배자로서 공동체를 통치하게 돼요. 왕과 그 신하들은 많은 가축과 전쟁 포로를 거느린 대토지 소유자이기도 하죠. 토지는 갈수록 늘어나고 그걸 경작하려면 더 많은 가축과 전쟁 포로가 필요합니다. 이들은 마음만 먹으면 전쟁 포로를 죽일 수도, 죽을 때까지 일을 시킬 수도 있어요. 전쟁 포로는 이제 노예가 되죠 .. (35쪽)


시골에서 옆지기랑 아이들하고 살아가며 날마다 조용한 하루를 누립니다. 자동차 거의 안 다니니까 한갓질 뿐 아니라, 아이들이 마음껏 뛰며 노래할 수 있습니다. 물이 맑아 몸을 환하게 적시는 물맛을 시원하게 즐깁니다. 바람이 상큼해 눈을 감고 바람소리를 듣습니다. 바람이 간질이는 풀잎과 나뭇잎 춤추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마당에 놓은 평상에 앉아 해바라기를 합니다. 가깝거나 먼 멧자락 바라보며 눈을 쉽니다. 구름이 흐르는 길을 바라보고, 하늘빛을 품에 안습니다.


곰곰이 돌이켜보면, 내 어릴 적, 나한테 풀을 가르친 어른은 없습니다. 마을에서도 학교에서도 나더러 ‘이 풀은 맛이 참 좋아. 먹어 볼래?’ 하고 뜯어서 내민 어른이나 교사가 없습니다. ‘배가 아플 때에 이 풀을 먹으면 배앓이가 낫지.’ 하면서 풀 한 포기로 몸을 다스릴 수 있는 길을 일깨운 어른이나 교사가 없습니다. 도시에서도 골목마다 흐드러지는 풀꽃이 얼마나 싱그럽거나 어여쁜지 들여다보도록 이끈 어른이나 교사가 없습니다. 꽃이라면 꽃집에나 있는 줄 여기고, 들꽃과 메꽃과 바다꽃을 알아보도록 도와준 어른이나 교사가 없어요.


구름빛을 느끼면서 구름결을 살피도록 알려준 어른이나 교사가 없습니다. 구름빛과 구름결을 살피면 날씨를 읽을 수 있습니다. 늘 흐르는 바람내음을 맡으면 비가 언제쯤 찾아오는지, 또 날이 얼마나 가물는지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구름을 읽거나 바람을 읽는 길을 가르치거나 이야기한 어른이나 교사는 아직 못 보았어요.


우리 어른들은 우리한테 무엇을 가르치나요. 어른이 된 나는 이 땅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칠 수 있나요. 우리 어른들은 우리한테 무엇을 보여주나요. 어른이 된 나는 이 땅 아이들한테 무엇을 보여주면서, 사랑이나 꿈을 이야기할 수 있나요.


요즈음 들어 귀촌이나 귀농이라는 이름으로 시골살이를 찾아 도시를 떠나는 사람들이 제법 늘어납니다. 도시에서 사람답게 살아갈 수 없다고 느껴 도시를 떠날 텐데, 왜 처음부터 도시 아닌 시골에서 살아갈 수 없었을까 싶어 쓸쓸합니다. 왜 학교와 교과서와 언론과 책은, 온통 도시 이야기로만 가득해서, 이 땅 모든 아이들이 도시바라기가 되도록 할까요. 아이들 만화영화에는 왜 시골살이 이야기가 없을까요. 아이들 만화영화는 몽땅 도시살이 이야기만 다루어야 하나요. 도시에서 자동차를 타고, 도시에서 로봇이나 기계를 만지며, 도시에서 소꿉놀이 하는 이야기 아니면 만화영화를 만들 수 없을까요.


.. 노동자는 자신의 생산물에서도 소외됩니다. 노동의 결실은 모두 자본가가 챙겨 가고, 노동자에게는 애초 노동력을 팔면서 계약했던 ‘쥐꼬리’만 한 임금만 지급될 뿐이죠. 그래서 자본가는 나날이 부를 쌓아 부자가 되는 반면, 노동자는 열심히 노력해도 살림살이가 늘 빠듯하기만 합니다 … 자본가는 노동자가 만든 물건을 자신이 소비하는 게 아니라 모두 시장에 내다 팝니다. 아니, 처음부터 팔기 위해 만들죠 … 노동자들이 착취에 시달리는 건 자본가들의 본성이 사악해서가 결코 아니에요. 자본가는 자신의 의지, 양심과 무관하게 자본의 생리에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죠. 비록 자본을 소유한 사람이지만 현실에서는 거꾸로 자본에 매인 존재가 자본가예요. 양심 때문에, 또는 인정에 끌린 나머지 자본의 명령을 뿌리친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자본주의의 약육강식 원리에 따라 도태되는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어요 .. (62, 63, 68쪽)


학교에서 역사나 문화를 가르치는 자리에서, 먼먼 옛날 사람들은 ‘수렵·채취’를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몹시 힘들게 열매를 따서 먹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나는 교사들 말을 들으며 무척 알쏭달쏭합니다. 먼먼 옛날 사람들은 겨울을 어떻게 났을까, 먼먼 옛날 사람들은 어떤 열매를 먹었을까, 먼먼 옛날 사람들은 몇 살까지 살았을까, 먼먼 옛날 사람들뿐 아니라, 풀을 먹는 짐승들은 삶을 어떻게 누렸을까 ……. 그런데, 내 궁금함을 풀어 주는 어른이나 교사는 없습니다. 어떤 책도 내 궁금함을 풀지 못합니다. 먼먼 옛날 사람들은 ‘고기 먹는 사람’이 아니라 ‘풀 먹는 사람’이었을 텐데, 들과 숲에서 ‘풀 먹는 짐승’이 오늘날로서는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아주 많았을 먼먼 옛날인데, 그때 그 옛사람 삶이 참말 힘들었을까 궁금합니다.


나는 시골에서 살아가며 몸으로 깨닫고 배웁니다. 네 식구 먹을 풀은 다섯 평 밭으로 넉넉합니다. 네 식구 먹을 곡식은 쉰 평 논으로 넉넉합니다. 굳이 어디에 내다 팔 생각이 아니라면, 구태여 돈을 만들어야 하지 않는다면, 다섯 평 밭이랑 쉰 평 논만 있으면 얼마든지 한 해 먹을거리가 남아요. 그러니까, 먼먼 옛날 사람들은, 이른바 ‘수렵·채취’로 살아갔어도 굶는 사람이 없었으리라 느껴요. 오히려 오늘날 사람보다 훨씬 튼튼했을 테고, 훨씬 홀가분했을 테며, 훨씬 기쁜 하루였겠지요.


풀을 뜯어서 먹느라 몸을 움직일 때를 빼놓고는 무엇을 했을까요. 먼먼 옛날 사람들은 풀을 뜯거나 열매를 따는 한때를 보낸 다음, 하루 나머지를 무엇을 하며 보냈을까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깁니다. 나 스스로 먼먼 옛날 사람이 되어 봅니다. 고속도로와 아파트와 공장과 발전소와 골프장과 공항과 야구장과 청와대와 갖은 공공기관 따위 하나도 없는 먼먼 옛날을 떠올립니다. 자동차 없고 오직 풀밭과 풀숲과 풀길만 있는 먼먼 옛날을 떠올립니다. 아하, 맛난 풀 싱그러이 자라는 들판에 드러누워 한손으로 풀을 뜯어 입에 넣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빙그레 웃는군요. 추위가 찾아들면 따스한 터, 그러니까 남쪽으로 걸어가서 들판에서 어우러지고, 다시 새로운 봄이 찾아들면 북쪽으로 걸어와서 들판에서 어우러지는군요. 제비가 가을에 강남으로 갔다가 돌아오듯, 사람들도 북쪽과 남쪽을 마음껏 두 다리로 걸어서 오가며 삶을 누렸군요.


풀짐승은 풀을 뜯어먹느라 하루를 보낸다 하지만, 풀을 뜯어먹지 않을 적에는 풀밭이나 숲에서 뒹굴며 놉니다. 실컷 놀고 난 다음에는 숲에서 들려주는 노래, 이를테면 바람이 풀잎 간질이는 소리나 멧새와 들새가 지저귀는 노래, 풀벌레가 들려주는 노래를 얌전히 듣습니다. 총칼을 들며 지키는 군인이 없지만 평화입니다. 탱크도 잠수함도 없지만 평화입니다. 핵무기나 인공위성 하나 없지만 평화입니다.


.. 여성은 ‘유급 직장 노동-무급 가사 노동’ 구조에 시달리게 됐습니다. 맞벌이를 하더라도 여성은 남성보다 가사 노동을 더 많이 합니다 … 여기에는 남성은 밖에서 일하고, 여성은 집안일을 하는 게 자연스럽다는 성차별 의식이 깔려 있습니다. 이는 전통이나 종교의 이름으로, 때로는 폭력으로 오랫동안 세계를 지배해 왔습니다 … 우리나라 이주 노동자 문제의 핵심은 정부와 자본이 이들을 오직 노동력으로만 보는 데 있어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애써 외면하는 거예요 … 눈여겨볼 것은 헌법에는 분명 ‘국민의 권리’가 있는데, 유독 노동자에게만 노동 기본법을 따로 부여했다는 사실이에요 .. (88, 91, 149쪽)


먼먼 옛날 사람들은 사내와 가시내가 똑같이 일했겠지요. 아이 낳는 몫은 가시내만 맡을 수 있지만, 아이가 태어나면 젖을 물릴 때 빼고는 사내와 가시내가 나란히 아이를 아끼고 사랑하며 보살폈겠지요.


먼먼 옛날 사람들은 어버이가 바로 교사입니다. 어버이 스스로 삶을 익히면서 아이들한테 어버이 꿈과 사랑을 물려줍니다. 어버이 스스로 온누리를 부대끼면서 날마다 새롭게 배우고, 아이들한테도 날마다 새로운 꿈과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이제, 오늘날 모습으로 돌아와 생각합니다. 오늘날 어른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일찌감치 보육원에 넣고 어린이집에 보냅니다. 오늘날 어른들은 집에서 아이들을 스스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늘날 어른들은 어버이 자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오늘날 어른들은 어버이 스스로 교사인 줄 모르는 나머지, 집에서 아이들한테 삶을 물려주어야 하는 줄 못 느낍니다. 집에서 아이들이 이어받을 꿈이나 사랑을 보여주는 어른이 거의 안 보입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이녁 어버이 모습을 고스란히 따르겠지요. 오늘날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면, 이 아이들이 낳은 아이들은 이녁 어버이가 했듯이 똑같이 보육원에 넣고 어린이집에 보내겠지요. 쳇바퀴처럼 돌고 돌면서, 어버이 스스로 아이를 아끼며 보살피는 손길을 못 느낄 테지요. 모든 교육과 보육은 학교가 맡도록 하고, 사회복지가 있어야 하는 줄로만 여길 테지요.


평등교육과 사회복지는 있어야 합니다. 다만, 사람들마다 여느 살림집에서 아이들과 나눌 참사랑 참꿈 참배움 참삶이 있어야 합니다. 여느 살림집에서 아이들이 참사랑 참꿈 참배움 참삶을 누리지 못한다면, 학교에 다니더라도 슬기롭게 배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노동자’란 바로 내 어버이입니다. 나를 낳고 돌보는 어버이가 바로 노동자입니다. 아이들이 배우는 노동자 모습이란, 바로 내 어버이 모습입니다. 어버이인 오늘날 어른들 스스로 어떤 몸가짐이나 매무새인가에 따라, 아이들 앞날 모습이 달라져요.


.. 농경 사회에서는 비록 생산력은 낮았지만 생산의 목적이 소외된 돈벌이가 아니라, 여유롭게 누리는 것이었어요. 이때, 여유라는 것은 지금처럼 일하고 남은 ‘자투리 시간’이 아니라 노동 속에서 구현되는 것이었죠 … 이들 자본은 돈이 된다면 생태계 파괴와 기후 변화 따위는 눈 하나 깜짝 안 해요. 여기서 일하는 노동자들 또한 자신의 일자리와 임금 때문에 비슷한 태도를 보입니다. 물론, 근본적인 책임은 생태 파괴 사업체를 세우고 운영해 온 자본에게 있어요. 노동자 또한 단지 실행만 하는 부차적 위치였다 하더라도 책임을 면키 어려워요.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그 책임을 덮을 수는 없습니다. 나아가 노동자의 생계가 달려 있다고 해서 언제까지고 생태 파괴를 지속할 순 없는 노릇이죠 .. (123, 140쪽)


일이란 즐겁습니다. 일이기에 즐겁습니다. 놀이는 신납니다. 놀이이기에 신납니다. 일은 삶입니다. 일하지 않고서는 먹을 수 없습니다. 풀을 뜯고 열매를 따야 먹고삽니다. 놀이는 삶입니다. 놀지 않고서는 웃을 수 없습니다. 까르르 노래하고 펄쩍펄쩍 뛰고 달리고 해야 비로소 아름다운 하루입니다.


일은 삶이고 놀이는 삶입니다. 곧, 일과 놀이는 똑같은 삶입니다. 일이란 놀이와 같고, 놀이란 일과 같습니다. 일을 하지 않고는 먹고살 수 없다면, 놀이를 하지 않고는 먹고살 수 없습니다. 놀이를 하지 않고서는 웃을 수 없다면, 일을 하지 않고는 웃을 수 없습니다.


일과 같은 놀이요, 놀이와 같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모두 삶이거든요. 즐겁게 누리는 삶이거든요.


노동자란 일하는 사람이면서 놀이하는 사람입니다. 즐겁게 웃으면서 할 만한 일일 때에, 즐겁게 노래하면서 누릴 만한 놀이입니다. 일터에서 즐겁게 웃으며 땀흘리기 어렵다면, 나한테 반갑거나 알맞다 싶은 일이 아닙니다. 일터에서 아이들하고 얼크러지면서 함께 놀 수 없다면, 이 일은 나한테 안 맞거나 안 어울린다고 하겠습니다.


.. 우리는 기아자동차가 노동에 종사해 온 실습생을 6년 동안 한 명도 채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교육 과정을 돕거나 ‘우수 인력 발굴’을 위해 현장 실습을 유치한 게 아니란 얘기죠. 고분고분하면서도 임금은 싸게 먹히고, 게다가 법적 책임까지 거의 없는 노동력이 필요했던 거예요 .. (309쪽)


하루 여덟 시간을 일한다든지, 주 닷새를 일한다든지, 이런저런 틀이나 숫자는 덧없습니다. 즐겁게 일하는 사람은 하루 열여섯 시간도 일합니다. 즐겁게 놀이하는 사람은 한 주 내내 놉니다.


일을 어떤 틀로 따질 수 없습니다. 놀이를 어떤 규범이나 제도로 묶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돈을 벌려고 일하거나 놀지 않아요. 사람은 살아가려고 일하거나 놀아요. 삶을 누리는 일이면서 놀이입니다.


그러면, 왜 노동권이나 노동법 같은 말이 태어날까요? 바로 사회가 제도권으로 구르기 때문이에요. 사회가 사람들을 톱니바퀴처럼 다루고 쳇바퀴 구르도록 내몰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하루 몇 시간 일하고 달삯 얼마 받을 부속품’이 아닙니다. 우리는 온 하루를 누리면서 어른과 아이가 어깨동무할 수 있는 삶을 북돋울 사람입니다. 그리 멀지 않은 지난날, 이 나라 시골마을마다 ‘공동체’라는 이름이 따로 없었어도 두레를 하고 품앗이를 하며 울력을 했어요. 아이나 어른 모두 서로서로 어깨동무를 했어요. 시골에 학교 하나 없어도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삶을 물려받고, 어른들은 스스로 아름답게 일하면서 삶을 물려주었어요.


양반이나 상놈이라고 하는 신분이 없을 때, 지주와 소작농이라 하는 계급이 없을 때, 사람들 누구나 즐겁게 웃고 떠들면서 잔치마당을 이루었어요.


자, 생각해 봐요. 오늘날 이 나라 어디에 잔치마당이 있나요. 이 나라 어느 일터에 노래꽃이 피어나는가요. 이 나라 어느 일터에서 어른과 아이가 뒤섞여 까르르 웃으면서 일할 수 있나요. 어느 공장이나 사무실이나 시계와 시간표에 따라 착착 움직여야 하는 기계와 같지 않나요. 공장 노동자이든 사무직 노동자이든 똑같은 옷차림에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몸짓에 똑같은 말투로 ‘주어진 일감’을 떠맡아야 하지 않나요. 이런 삶이 아름다울까요. 이런 삶이 즐거울까요. 이런 삶이 사랑스러울까요.


.. 우선, 여러분 스스로가 자신의 노동을 존중해야 합니다 .. (262쪽)


나 스스로 내 삶을 사랑할 수 있어야, 나 스스로 내 일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 스스로 내 삶을 좋아할 수 있어야, 나 스스로 내가 한껏 즐길 놀이를 찾을 수 있습니다.


노동자란 무엇이고 인권이란 무엇이며 노동권은 또 무엇일까요. 왜 오늘날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억눌려야 하고, 최저임금조차 제대로 못 누리는 한편, 비정규직이라든지 대졸실업자가 넘쳐야 할까요. 시골에는 젊은이 하나 찾아보기 어려운데, 왜 도시에는 일손 놓고 멍하니 있는 젊은이가 넘치고 넘쳐야 할까요. 시골에서 조금만 손을 놀려도 모든 사람이 밥 굶을 일이 없는데, 왜 도시에서는 어느 한쪽은 돈이 넘치고 어느 한쪽은 돈이 없어서 틈이 자꾸 벌어질까요.


삶을 바라볼 수 있기를 빌어요. 삶을 느낄 수 있기를 빌어요. 삶을 사랑하면서 내 살붙이와 이웃과 동무를 모두 사랑할 수 있기를 빌어요.


풀내음을 맡아요. 바람소리를 들어요. 하늘빛을 헤아려요. 그리고, 눈을 살며시 감고 꿈을 꾸어요. 서로서로 아름답게 살아가는 길은 무엇일까 하고 마음속으로 그림을 그려요. 사람과 풀과 나무와 벌레와 짐승과 새와 물고기 모두 예쁘게 얼크러질 삶자락을 그려요.


내가 할 일이란, 내가 즐길 놀이이면서 내가 누릴 삶입니다. 4346.1.31.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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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학교, 헬레네 랑에 - 상상을 현실로 만든 혁신학교 이야기
에냐 리겔 지음, 송순재 옮김 / 착한책가게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아름답게 배우며 살아가는 꿈
 [사랑하는 배움책 11] 에냐 리겔, 《꿈의 학교, 헬레네 랑에》(착한책가게,2012)

 


- 책이름 : 꿈의 학교, 헬레네 랑에
- 글 : 에냐 리겔
- 옮긴이 : 송순재
- 펴낸곳 : 착한책가게 (2012.2.20.)
- 책값 : 15000원

 


  ㄱ. 교사는 배우는 사람


  2012년 가을, 전라남도 고흥군 주민들은 고흥군에 화력발전소가 못 들어오게 막았습니다. 전라남도 해남군 주민들도 해남군에 화력발전소가 못 들어오게 막았어요. 몇 해 앞서는, 고흥군과 해남군에 핵발전소를 끌어들이려고 여러 권력자와 기업자가 똘똘 뭉쳤지만, 이때에도 주민들이 막아내어 고흥과 해남이 정갈한 시골로 이어가도록 지켰습니다.


  그 어느 곳도 아닌 시골이기에, 시골에 발전소 하나 들어서는 일이란 아주 끔찍합니다. 사람들 먹을 곡식과 열매와 푸성귀를 거두는 들이요, 사람들 먹을 물고기와 김과 파래와 미역과 매생이를 얻는 바다입니다. 들판 한쪽에 공장이 있으면, 곡식이 어떻게 될까요. 양식장이나 갯벌 곁에 발전소가 있으면, 양식장이나 갯벌은 어떻게 될까요.


  돼지우리나 소우리 곁에 공항이 있으면, 돼지와 소는 시끄러워서 죽습니다. 사람도 비행기 끔찍한 소리에 귀가 찢어지거나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그러나, 자꾸자꾸 커지는 도시인 탓에 공항을 새로 짓고, 고속도로와 고속철도를 자꾸 놓으며, 공장은 끝없이 늘어납니다.


  무엇이 삶일까요. 어떻게 살아갈 때에 즐거울까요. 사람으로 살아가는 보람은 무엇일까요. 학교는 사람들한테 무엇을 가르치는가요. 학교는 아이와 어른한테 무엇을 보여주는가요. 학교는 이 나라 이 땅 이 마을에 어떤 구실을 하는가요.


.. 아이들이 집에서 읽기와 쓰기가 정말 중요하고 쓸모있으며 심지어 달콤한 것이라는 사실을 경험하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스스로 배우려 한다 … ‘읽기’와 ‘쓰기’는 죽은 사회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끊임없이 정확하게 비판적으로 ‘읽는 것’을 배운 사람은 혼잡스러운 텔레비전 영상이나 심지어 이른바 ‘진실’을 말한다고 하는 인쇄 매체를 안심하고 대할 수 있다 … 학생들의 사회적 책임감을 키우는 교육을 행하고 있는 학교가 너무도 적다 ..  (19, 30, 77쪽)


  2013년에 접어들면서, 중앙정부는 이 나라에 새 화력발전소를 열여덟 곳 짓겠다고 외칩니다. 전기가 모자라 화력발전소가 더 있어야 한다고 밝힙니다. 핵발전소는 너무 아슬아슬하니까 더 안 지을 듯하고, 핵발전소만큼 아슬아슬하지 않다고 하면서 화력발전소를 짓는다고 합니다.


  화력발전소가 들어선다는 곳을 들여다보면, 일찌감치 다른 화력발전소가 깃든 곳이요, 또는 ‘발전소 지으며 시나 군에 준다는 돈’을 노리는 곳입니다. 삶에 따라 어떤 일을 하지 않고, 돈에 따라 어떤 일을 꾀한달까요. 더군다나, 발전소에서 나오는 매연과 공해와 전자파를 끊거나 줄일 길이 없는데, 화력발전소를 자꾸 더 지으려는 움직임을 제대로 깨닫는 사람이 얼마 안 보입니다.


  이 나라에 왜 전기가 모자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을 찾기 어렵습니다. 도시는 자꾸 커지며 전기를 더 쓰려고 합니다. 시골은 더 작아지며 전기 쓸 일이 자꾸 줄어듭니다. 전기가 모자라다면 도시에서 전기가 모자라지만, 도시 한복판에 발전소를 지어 송전탑 갯수라도 줄이려는 움직임조차 없습니다. 전기가 모자란 까닭을 캐내어, 전기를 안 쓰거나 덜 쓰려는 움직임마저 없습니다. 무한동력 에너지를 빚어서 공해도 매연도 없이, 아름답고 알차게 전기를 쓰려는 움직임 또한 없습니다.


  화력발전소 사업은 어마어마한 돈덩이 사업입니다. 건설회사는 건설회사대로 발전소를 짓고 전기를 (중앙정부한테) 팔면서 돈덩이를 거머쥐고, 중앙정부는 중앙정부대로 세금을 거두고 전기를 (사람들한테) 팔면서 돈덩이를 거머쥐는 사업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얼거리를 교과서에서는 안 다룹니다. 제도권교육 울타리 안쪽에서는 발전소 사업 밑뿌리를 캐거나 밝히지 않습니다. 교과서로서는 ‘발전소 반대’를 ‘지역 이기주의’로 몰아세울 뿐이요, 전기와 도시와 산업 문제를 슬기롭게 바라보도록 이끌지 않습니다.


.. 단지 말로 듣기만 할 때보다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이 훨씬 더 기억에 오래 남는다는 사실은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그런데 왜 유독 학교 수업에서는 무언가를 실제로 경험하게 하기를 마다하는가 … 수업시간에 말을 해도 되는 것, 나아가 말을 해야만 하는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다. 침묵해야 하는 상황이야말로 오히려 낯설고 이상한 것이다 … 어떤 학교에서는 음악을 모두 함께 즐기고 우리의 영혼을 쓰다듬어 주는 좋은 것으로 여긴다. 그런가 하면 어떤 학교에서는 그저 배운 것을 누가 몇 주 후에 더 잘 기억하고 있으며, 이를 기반으로 어떻게 점수를 매길 것인가에 온 정신을 쏟기도 한다 ..  (43, 48, 62∼63쪽)


  오늘날 학교교육에서 교사는 교과서 지식을 한 해에 걸쳐 아이들한테 물려주는 구실을 맡습니다. 오늘날 학교교육에서 학생은 교과서 지식을 한 해에 걸쳐 교사한테서 물려받는 몫을 맡습니다. 교과서에서 다루는 지식을 제대로 외워야 시험문제를 잘 풉니다. 시험문제를 잘 풀어야 대학입시에서 더 높은 점수를 얻습니다. 대학입시에서 더 높은 점수를 얻어야, 더 등급 높은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더 등급 높은 대학교에 들어가야 더 연봉 높은 공공기관이나 큰회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국어국문학과를 나오거나 문예창작학과를 나와야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쓰거나 문학을 할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학과를 나와야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습니다. 미술대학을 나와야 그림을 그리거나 도자기를 구울 수 있지 않습니다.


  삶을 배우고 싶은 사람은 삶을 배우면 됩니다. 시를 쓰고 싶은 사람은 시를 쓰면 됩니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사람은 그림을 그리면 될 테지요. 시를 쓰는 자격증은 없어요. 그림을 그리는 졸업장은 없어요.


  그러면, 학교란 무엇일까요. 학교는 왜 있어야 할까요. 아이들은 학교를 왜 다녀야 하나요. 어른들은 왜 교사가 되어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쳐야 하나요.


  아이를 낳아 돌보는 길을 가르치는 학교는 없습니다. 아이를 어떻게 사랑하고 보살펴야 즐거운가 하는 삶을 가르치는 교사는 없습니다. 나무를 아끼는 사랑을 가르치는 교과서는 없습니다. 풀을 어루만지고 멧새와 노래를 즐기는 삶을 이야기하는 교사는 없어요.


  교과서에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안 실립니다. 교과서에는 바람이 나뭇잎 간질이는 소리가 안 실립니다. 교과서에는 훤한 달밤에 빛나는 구름 이야기가 안 실립니다. 교과서에는 함박눈 펑펑 내리며 고요한 시골마을 한켠에서 붉은 꽃망울 어여쁜 동백꽃 이야기가 안 실립니다.


  교과서에는 젖을 어떻게 물리는가 하는 몸가짐, 젖을 아기한테 물리는 기쁨, 젖을 먹는 아기가 얼마나 좋아하면서 무럭무럭 자라는가 하는 이야기도 안 실립니다. 교과서에는 제비가 찾아드는 시골집 처마 밑 이야기 또한 안 실립니다. 교과서에는 씨앗을 갈무리해서 이듬해에 밝은 웃음빛 지으며 뿌리는 이야기 또한 안 실려요.


.. 우리의 경험에 따르면 예술은 폭력에 대응할 수 있는 좋은 예방책이다 … 사람들은 아름답고 정돈된, 정성껏 만들어진 공간에 있을 때는 황량하고 볼품없고 애정 없이 대충 만들어진 공간에서와는 다르게 행동하는 것 같다 … 많은 학교 공간은 여전히 사람이 사는 공간 같지 않고 그저 어떤 기관 같은 느낌을 줄 따름이며 … 아이들이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 아이들이 교실에 앉아 그저 인간애에 대해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자신의 손으로 어르신들을 씻겨 드리고 아기의 기저귀를 갈아 주고 아픈 친구를 병원에 데려가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러한 경험들이야말로 수업을 몇 시간 빼먹어도 좋을 만큼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도 남는 일이다 ..  (88, 89, 95쪽)


  교사가 되려면 대학교를 나와야 한답니다. 교육대학교이든지 사범대학이든지 마치면서 교사자격증을 거머쥐어야 교사가 될 수 있다고 해요. 그러면, 대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쳐 교사가 되도록 키우는가요. 교사자격증 따도록 하는 시험제도는 어떤 이야기를 물어 보면서 교사가 되도록 북돋우는가요. 아이들 앞에 서는 교사는 교사로서 어떤 넋·마음·얼·사랑을 품으며 활짝 웃는 어른인가요. 교사가 되고 난 다음에는 교사 스스로 무엇을 꾸준하게 익히거나 배우면서 이녁 삶을 아름답게 갈고닦을는지요.


.. 청소년들은 어려운 과제를 해결할 만한 충분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아이들을 끝없이 보호하고 지키려고 하면서 사실은 아이들의 인생에 우리가 책임지지 못할 짐을 지워 주며 방관하고 있다 … 하루에 단어 스무 개 외우고 공식 몇 개 외우고 묻는 말에 대답하는 일은 청소년들의 입장에서조차 아무것도 아니다. 만일 이러한 것들이 학교가 아이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전부라면 아이들이 학교에서 미쳐 가는 것을 보고 놀랄 까닭이 전혀 없다 … 학교 스스로가 수없는 규범과 규칙에 얽매여서 스스로의 자유를 차단하고 이해할 수 없는 교육의 길을 택하는 현실에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상상력과 도전정신 그리고 학교운영자들의 연대 없이 이 같은 학교구조가 변화하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  (100∼101, 107쪽)


  흔히,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일컫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사가 가르치는 사람이기만 할 때에는 참교사하고는 동떨어지리라 느껴요.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이기 앞서 배우는 사람이기에 교사라고 느껴요. 아이들을 가르친대서 교사가 아니라, 삶을 먼저 즐겁게 배운 다음, 이녁 스스로 즐겁게 배운 삶을 아이들한테 너그러이 나눌 수 있기에 교사로구나 싶어요. 아이들한테 온갖 지식 베푼대서 교사가 아니라, 사랑을 늘 흐드러지게 빛내면서, 이녁 스스로 빛내는 사랑을 아이들과 어깨동무하면서 새롭게 꽃피울 때에 바야흐로 교사로구나 싶습니다.


  배우는 사람이기에 가르칩니다. 배울 줄 아는 사람이기에 가르칠 줄 압니다. 배우는 마음이기에 가르치는 마음이 돼요. 배우는 즐거움을 누리기에 가르치는 즐거움을 나눠요.

  배우는 사람은, 지식을 머리에 집어넣지 않습니다. 배우는 사람은, 배운 모두를 삶으로 녹입니다. 배우는 사람은, 늘 새 삶으로 거듭나면서 날마다 새 이야기를 길어올립니다.


  똑같은 지식을 똑같은 틀에 맞추어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모습을 한 아이들한테 똑같은 시간에 맞추어 줄줄 외는 사람은 교사가 아니겠지요. 새로운 이야기를 새로운 웃음으로 들려주면서, 새로운 얼굴빛을 짓는 아이들하고 언제나 새로운 노래를 부르듯 어깨동무하면서 새로운 삶을 북돋우는 새로운 사랑을 속삭일 때에 비로소 교사라 하겠지요.

 


  ㄴ. 학생은 가르치는 사람


  배우는 사람이기에 학생이라고 느끼지 않아요. 배운 대서 학생이 아니라, 무엇을 배우고 싶은가를 말할 줄 알기에 학생이라고 느껴요. 곧, 학생은 가르치는 사람이에요. 학생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어른한테 ‘당신이 나한테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사람이 학생이로구나 싶어요. 그러니까, 교사는 늘 배우는 사람이지요. 학생이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은가 하는 대목은 늘 배워야 하니까 교사는 늘 배울밖에 없어요. 학생은 늘 가르칠밖에 없고요.


.. 교사에게 모자란 지식을 습득하고 새로운 과목을 연구하고자 하는 호기심과 동기부여만 있다면, 이는 학생들에게 굉장한 이득이 되어 돌아온다 … 아이가 가진 능력에 대해 학교는 그저 잘해야 ‘기특한 재능’ 정도로 여길 뿐 졸업성적을 평가할 때 이런 것은 하나도 반영되지 않는다 … 학교는 학과목과 직접 관련되지 않은 학생들의 재능을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  (144, 167쪽)


  아이들은 어른들을 끊임없이 가르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한테 사랑을 끊임없이 가르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한테 꿈을 끊임없이 가르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어떤 밥을 지어 아이들한테 차려 주어야 할는지 가르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어떤 옷을 지어 아이들한테 입혀야 할는지 가르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어떤 집을 지어 아이들과 함게 살아야 할는지 가르칩니다.


  어버이는 아이를 낳으며 비로소 어른이 된다고 하는 말을 까닭이 있어요. 아이를 낳으면, 아이가 늘 곁에 있기에, 이 아이가 어버이를 늘 새롭게 가르쳐요. 어버이가 된 사람은 아기가 옹알거리는 목소리와 몸짓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어버이는 자꾸자꾸 배워야 합니다. 아기 똥오줌 흥건한 옷가지를 빨래하면서 빨래를 새로 배웁니다. 아기 똥오줌을 가리게 하면서, 아기한테 젖과 죽과 미음과 밥을 먹이면서, 아기한테 말을 가르치면서, 아기한테 마을과 이웃과 숲과 새와 짐승을 가르치면서, 아기한테 풀과 나무와 들과 바다를 가르치면서, 어버이 된 사람은 이녁 스스로 온누리를 모두 새롭게 바라보고 새롭게 깨달으며 새롭게 배웁니다. 아이를 낳는 어버이는 아이와 언제나 함께 지내면서 언제나 새로운 삶을 배웁니다.


  교사는 어버이와 같아요. 어버이는 갓 태어난 아기들을 한결같이 보살피면서 삶과 사랑과 꿈을 배운다면, 교사는 제법 자란 아이들을 하루 내내 보살피면서 삶과 사랑과 꿈을 배웁니다. 지식을 가르칠 때는 교사가 아니라 독재자나 폭압자나 권력자 굴레에 갇힙니다. 아이들한테서 삶과 사랑과 꿈을 배울 때에, 비로소 교사가 됩니다. 교과서 진도를 나가며 대학입시에 걸맞을 학생으로 길들일 때에는 교사가 아니라 바보나 멍청이나 얼간이가 됩니다. 아니, 노예가 되겠지요. 기계처럼 되고 말겠지요. 아이들하고 삶과 사랑과 꿈을 나누는 길동무가 될 때에, 비로소 교사가 돼요.


.. 학생들은 이 시간(수다 떨기)을 통하여 자신이 단지 영어나 수학을 배우는 학생으로서만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며, 하나의 인간으로서 하는 모든 경험이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 학교가 그곳에 속한 이들이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공부만 하기 위해 임의로 모여 있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 … 학생들이 학교라는 곳에 대해 “나는 여기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있고 싶어서’ 있는다.” 하고 느끼기를 바란다 ..  (195, 208, 230쪽)


  독일사람 에냐 리겔 님이 쓰고, 한국사람 송순재 님이 옮긴 《꿈의 학교, 헬레네 랑에》(착한책가게,2012)라고 하는 책은 ‘교사’와 ‘학생’과 ‘학교’와 ‘마을’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차근차근 짚습니다. ‘가르침’과 ‘배움’과 ‘삶’과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조곤조곤 다룹니다.


  교사가 할 몫은 배움이요 학생이 할 몫은 가르침이라면, 학교가 할 몫은 교사와 학생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이웃으로 만날 수 있는 쉼터요 숲이 될 일입니다.


  학교는 쉼터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을 쉬고 생각을 쉬며 몸을 쉬는 터전이 되어야 합니다. 학교는 숲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을 살찌우고 생각을 북돋우며 몸을 일으키는 숲이 되어야 합니다.


  쉼터에서 쉬면서 일을 합니다. 쉼터에서 쉬면서 즐겁게 뛰놉니다. 쉼터에서 쉬면서 서로 까르르 웃고 떠듭니다. 쉼터에서 쉬면서 노래와 춤과 문학과 예술을 누립니다. 쉼터에서 쉬면서 사랑을 속삭이고 꿈을 키웁니다.


  숲에서 하늘바라기를 합니다. 숲에서 나무바라기를 합니다. 숲에서 새바라기를 합니다. 숲에서 벌레바라기를 합니다. 숲에서 구름과 바람과 흙과 풀과 짐승과 냇물과 어우러집니다.


.. 아이 방에 텔레비전을 들여놓는 것에 아무런 문제의식도 가지지 않은 부모라면 아이를 우리 학교에 등록시키지 말아 달라는 것을 하나의 기본원칙으로 세웠다. 자기 아이에게 어떤 능력을 키워 주고 이를 계발하도록 이끌어 줄지는 부모가 직접 결정할 문제라 생각했다 … 그나마 건강한 식생활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는 학부모도 드물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부모들 사이에서는 아이에게 군것질을 못 하게 했을 때 생길 난리법석을 감당하느니 하루 종일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젤리와 크림과자가 우리 아이들을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들어 준다는 광고를 믿어 버리고 말자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  (263, 265쪽)


  도시에 짓는 학교를 보면 어디에서나 감옥이 떠오릅니다. 똑같은 칸, 똑같은 골마루, 똑같은 차림새, 똑같은 말투, 똑같은 시간표, 똑같은 목소리, 똑같은 몸가짐, 똑같은 신분과 계급과 서열, …… 오늘날 학교에서는 폭력과 따돌림이 춤출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학교인걸요. 꿈이 없는 학교인데요. 삶이 없는 학교에 폭력과 따돌림이 감돌밖에요.


  학교에는 칸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학교는 건물이 될 까닭이 없습니다. 학교는 운동장이 따로 없어도 됩니다. 학교는 풀과 나무가 마음껏 자라는 숲이면 되고, 냇물이 흐르고 골짜기가 이루어지는 멧자락이면 됩니다. 밥을 얻고 옷을 기우며 집을 짓는 삶터가 학교입니다. 이야기보따리를 꾸리고, 이야기꽃을 피우며, 이야기샘이 흐르는 데가 학교입니다.


  학교라고 하는 시설이 없던 지난날, 사람들은 누구나 모든 풀이름과 나무이름을 아이들한테 물려주었습니다. 학교라고 하는 제도가 없던 지난날, 사람들은 누구나 집짓기·옷짓기·밥짓기를 아이들한테 물려주었습니다. 학교라고 하는 교육이나 복지가 없던 지난날, 사람들은 누구나 사랑이랑 꿈이랑 믿음을 아이들한테 물려주었습니다. 학교라고 하는 울타리가 없던 지난날, 사람들은 누구나 춤과 노래와 이야기를 아이들한테 물려주었습니다.


  이제 학교가 서면서 아이도 어른도 풀이름과 나무이름을 하나도 모릅니다. 이제 학교가 생기면서 사람들은 집도 옷도 밥도 지을 줄 모릅니다. 이제 학교가 나타나면서 사람들은 사랑도 꿈도 믿음도 속삭이지 않습니다. 이제 학교가 퍼지면서 사람들은 춤도 노래도 이야기도 스스로 빚지 않습니다.


  아름답게 배우며 살아갈 때에 교육입니다. 아름답게 가르치며 어깨동무할 때에 교육입니다. 교육은 아주 쉬워요. 삶이면 교육이에요. 삶을 나누기에 교육이고, 삶을 즐기기에 교육입니다. 삶이 아니라면 모두 거짓입니다. 삶하고 동떨어지면 모두 껍데기입니다. 삶을 말할 때에 교육을 말할 수 있고, 삶을 나눌 때에 참배움이 이루어집니다. 4346.1.25.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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