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카메라와 그녀의 계절 1
츠키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545



마음으로 담은 사랑을 사진으로 찍다

― 그녀와 카메라와 그녀의 계절 1

 츠키코 글·그림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5.4.25. 4500원



  사진기가 있으니 사진기를 손에 쥐고 찰칵 하고 사진 한 장 찍습니다. 손전화 기계라면 사진을 찍는 소리가 안 들리도록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손전화 기계는 사진을 찍는 소리가 안 들리지만, 일부러 소리가 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은 사진을 찍는 일이 아주 흔하고 쉽습니다. 누구라도 사진을 찍을 수 있으며, 참말 누구나 사진을 봅니다. 증명사진이 아니어도 사진이 많고, 재미나게 놀면서 찍는 사진이 많아요.


  그러면, 사진에 찍힌 삶과 사진에 안 찍힌 삶은 어떻게 다를까요? 사진에 찍히기에 더 오랫동안 남을 만한 이야기가 될까요? 사진에 안 찍히기에 곧장 잊히는 이야기가 될까요?



‘3학년이 되니, 학교에 가는 것은 좀 우울해진다. 그래도, 시내에는 강이 여러 군데 흐르고, 아침마다 자전거로 다리를 건너 학교에 간다. 맑은 날이면 딱 다리 위에서 산이 보여서, 그 풍경은 언제나 내 등을 힘차게 밀어 준다.’ (3∼4쪽)


‘아아, 어쩌면 저렇게 햇빛이 어울릴까. 빛나는 땀방울 건강한 향기. 자기에게 자신이 넘쳐 반짝반짝해 보여. 그리고 남자고, 분명, 유키가 말하는 동물 같은 소리도, 내게 만들 수 있겠지.’ (56쪽)



  츠키코 님이 빚은 만화책 《그녀와 카메라와 그녀의 계절》(학산문화사,2015) 첫째 권을 읽으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이 만화책은 여고생 두 사람과 남고생 한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애틋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세 사람은 서로서로 마음이 있으나 마음을 드러내는 몸짓을 잘 모르고, 마음을 드러내는 몸짓을 보여주다가 자칫 앞으로는 동무 사이로 지내지 못할까 하고 걱정하기도 합니다.


  세 사람은 가까운 듯하면서 멉니다. 또 멀어진다 싶다가도 늘 곁에 있습니다. 사진을 찍든 안 찍든 세 사람 사이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진에 찍히는 모습이 꽤 많으나, 사진에 안 찍히는 모습은 훨씬 많습니다. 이를테면 굳이 찍지 않는다면, 밥 먹는 모습이나 잠을 자는 모습이나 교실에서 수업하는 모습은 사진으로 안 남습니다. 애써 남겨 놓기에 함께 공원이나 길을 거니는 모습이라든지 학교 골마루에서 달리는 모습이 사진으로 남습니다.


  그런데, 세 사람 사이에서 살갑고 사랑스레 흐르는 이야기는 ‘사진에 남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 사람이 애틋하고 살가우면서 사랑스레 주고받는 이야기는 모두 ‘마음에 남는 이야기’입니다.



“무지개를 찍었더니 같이 나와 버렸네! 게다가 입은 벌리고!” (22쪽)


“아, 그대로 있어. 먹는 모습 찍는 걸 좋아하거든.” (26쪽)


“알바는 오늘 쉴 수 있는 거지?” “응!” “그럼 오늘 하루는, 같이 사진 찍으면서 보내자. 걸어가는 모습도, 이야기하는 것도, 하늘도, 길을 가는 사람도, 고양이도.” (123쪽)



  끼니마다 사진을 찍어 놓아야 ‘오늘은 무엇을 먹었는가’를 알지 않습니다. 밥을 먹고 나서 꼬박꼬박 일기를 써 놓아야 ‘오늘 밥차림’을 되새길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으로 찍거나 글로 써야 ‘기록’이지 않습니다. 흔히들, 사진이나 글로 남아야 비로소 나중에 되새길 수 있다고 하지만, 사진이나 글로 남길 수 있는 발자국은 우리 삶 가운데 아주 조그마한 조각일 뿐입니다. 동영상으로 하루 스물네 시간을 찍는다고 하더라도 몸짓은 찍어도 마음이나 사랑을 오롯이 담지 못해요. 가만히 드러누워서 마음으로 짓는 꿈을 동영상이 담을 수 없습니다.


  기록만 움켜쥐면 기록만 생각합니다. 사진만 바라보면 사진만 생각합니다. 내가 너를 애틋하게 여기면서 기쁘게 사귀고 싶다면, 사진에 대고 말하지 말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면서 얘기해야 합니다. 내가 네 손을 잡고 싶으면, 사진을 보며 손을 잡으려 하지 말고, 만나자고 불러서 손을 살포시 잡아야 합니다.



‘이 즐거운 시간은, 끝이 있는 거구나. 더욱더, 소중하게, 오래오래 곱씹을 수 있도록, 보내야겠다.’ (79쪽)


‘아무도, 인구 30만인 이 지방도시에 남을 생각은 안 하는구나.’ (81쪽)


‘무서워. 아무 생각도 없었던 것들이. 난 어떻게 하지? 좌우간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나?’ (87쪽)



  만화책 《그녀와 카메라와 그녀의 계절》은 책이름에 적은 세 가지 이야기를 아기자기하게 엮어서 보여줍니다. 여고생 두 사람, 여고생 두 사람이 손에 쥐는 사진기, 여고생 두 사람이 풋풋하게 무르익으면서 철이 들 무렵 가슴속에 담는 꿈, 이렇게 세 가지 이야기를 차근차근 엮습니다.



“아카리는 귀여워.” “응?” “감정표현이 풍부하고, 똑같은 표정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 언제나 즐거운 듯하고. 그런 감정이 안쪽에서 흘러넘쳐 빛나고 있어.” “설마, 그런.” (124∼125쪽)


‘이 작은 35mm 필름만이 아니라, 내 안에도, 이 그림을 새겨서 잊지 않도록 하자. 언제든지 오늘 아침을 떠올릴 수 있도록.’ (154쪽)


‘상대의 기억 속에 들어가고 싶은 기분. 유키의 앨범에 조금이라도 들어가고 싶다. 이 장면을 잊고 싶지 않다.’ (171쪽)



  아름다운 하루이기에 언제나 마음에 새깁니다. 아름다운 하루로 여겨서 마음에 새길 만한 이야기이기에 사진으로도 찍습니다. 먼저 사진으로 찍는 ‘아름다운 하루’가 아닙니다. 먼저 ‘아름다운 하루’를 기쁘게 누리고 나서야 이러한 삶을 사진으로도 찍거나 글로도 씁니다.


  웃고 우는 삶이 있으니 ‘기록’이 있습니다. 기록이 먼저가 아닙니다. 기록이 모두 다일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역사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러한 책은 조선 왕조 이야기조차 모두 보여주지 않습니다. 몇 가지 조각만 어렴풋이 보여줄 뿐입니다. 이러한 책에 안 실린 이야기는 훨씬 많고, 이러한 책이 굳이 담지 않으려고 한 수많은 여느 사람들 삶과 노래와 꿈과 사랑이 아주 깊고 넓습니다.


  마음으로 담은 사랑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마음으로 가꾼 삶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마음으로 누린 이야기를 사진으로 찍습니다. 마음으로 아끼는 동무랑 이웃이랑 곁님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즐겁게 노래하는 사람이 사진을 찍습니다. 4348.8.5.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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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3시의 무법지대 1
요코 네무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542



사내들이 알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 오전 3시의 무법지대

 네무 요코 글·그림

 김승현 옮김

 대원씨아이 펴냄, 2009.9.15. 5500원



  《펜과 초콜릿》, 《일단 지구가 멸망하기 전에》 같은 작품을 그린 네무 요코 님이 빚은 만화책 《오전 3시의 무법지대》(대원씨아이,2009)를 읽습니다. 모두 세 권으로 나온 《오전 3시의 무법지대》이고, 이 만화에 뒤이어 《오전 3시의 위험지대》가 세 권으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오전 3시의 무법지대》라는 만화책은 ‘전문대’를 막 마치고 회사원이 된 젊은이가 회사에서 겪는 일을 그립니다. 이 만화를 그린 네무 요코 님은 ‘만화에 나오는 회사’가 이녁이 처음 사회생활을 할 무렵에 다닌 회사와 거의 같다고 합니다. 밥먹듯이 밤일이나 밤새움을 해야 하고, 이제 일을 다 마치고 기지개를 켤라 치면 새로운 일감이 떨어집니다. 새벽까지 부시시하게 일하다가 회사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거나 몸을 씻기 일쑤입니다.



‘올봄 디자인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한 달이 지난 지금, 나는 익숙지 않은 용어와 꽉 찬 담배 연기와 반복되는 자문자답에 완전히 쩔어 있다. 난 왜 여기 있는 거지?’ (4∼5쪽)


‘가장 필요했던 건 침대 따위가 아니라, 그 손이었는데, 이젠 굉장히 멀어 … 하지만, 솔직히 지금 나에겐 눈앞의 일을 납기 마감에 맞출 수 있느냐 없느냐가 더 큰 문제라.’ (23, 25쪽)



  만화책 《오전 3시의 무법지대》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첫째, 사내들이 밤새움을 밥먹듯이 하는 회사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둘째, 회사 일을 밤을 새우며 하더라도 남녀 사이에 나누는 짝짓기를 저버리지 않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셋째, 많이 어리거나 젊은 나이에 홀로서기를 하면서 홀가분하게 살림을 꾸리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넷째, 꿈으로 나아가고 싶은 젊은 넋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다섯째, 아주 조그마한 일에도 마음을 달랠 수 있지만, 바로 이 조그마한 일 때문에 마음을 다치는 가녀린 넋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런데, 이 만화책에서 주인공은 사내 아닌 가시내입니다. 사내들이 우글거리고, 사내들이 변태스러운 짓을 하며, 사내들이 미친듯이 일감을 우악스레 맡아서 꾸역꾸역 해치우는 곳에 여린 가시내가 막내 일꾼으로 들어옵니다. 수많은 가시내가 막내로 들어왔다가 이곳에서 못 버티고 떠나는데, 이 일터는 재미있게(?)도 막내 일꾼을 자꾸 사내가 아닌 가시내로 뽑습니다. 일러스트와 디자인을 맡을 사람을 찾다 보니 사내는 드물고 가시내가 많을 수 있지만, 회사나 사회 얼거리를 살핀다면, 이만 한 일터라면 웬만한 사내도 버티기 힘든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괴로워 마땅한 그런 파괴적인 광경을 눈앞에 두고도 ‘어쩔 수 없지 뭐’라고 생각해 버릴 정도로 여자의 감성이 저하된 자신과, 이런 상황 속에서도 저 맞은편에서 나부끼는 형광 핑크 현수막에 눈을 빼앗기는 자신. 도모코가 만든 거네, 예쁘다. 파칭코 현수막을 보고 ‘예쁘다’라…….’ (30∼31쪽)


“진짜 아무것도 안 느껴지더라. 충격이고 슬픔이고. 오히려 후련하기까지 하더라고. 이상하지?” “이상해. 널 그렇게 만든 게 회사라면, 그딴 데 가고 싶지도 않다.” ‘만약 회사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난 울었을까.’ (48쪽)



  일이 힘든 사람한테는 무엇이 있어야 할까요? 일이 힘들다고 하는 사람은 무엇을 바랄까요? 왜 우리는 즐겁고 신나게 일하기보다는, 힘들고 고단하게 일하려 할까요? 일감을 더 많이 따와야 먹고살 수 있을까요? 저마다 일감을 더 따오려고 하는 바람에 먹고살 길이 외려 더 팍팍하지 않을까요? 알맞게 나누고 알맞게 쓰며 알맞게 일할 적에 삶이 눈부시게 빛날 수 있지 않을까요?  



‘사실을 말하면, 매일 꽤 즐겁게 일하고 있다. 더 깊이 말하면, 요즘 들어서는 그만두고 싶은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70∼71쪽)


“이제 그만 결정해야지. 모모코 자신을 위해서도, 그리고 우릴 위해서도. ‘이딴 회사’라도, 우린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78쪽)



  만화책 《오전 3시의 무법지대》에서 말하는 ‘오전 3시’란 “밤 세 시”입니다. 밤 세 시에도 일해야 하는 곳이요, 밤 세 시는 아무것이 아닌 일터입니다. 아니, 밤 세 시까지 일을 마치고는 까무룩 잠이 드는 일터라고 할 만하다는 소리도 될 텐데, 문득 생각해 보면, 시골에서는 으레 네 시 즈음 일어나서 하루를 엽니다.  시골사람으로서는 새벽 네 시이건 세 시이건 대수롭지 않습니다. 그저 하루를 여는 때일 뿐입니다.


  고요한 서너 시에 눈을 뜨면, 맨 먼저 개구리 소리하고 풀벌레 소리가 잦아드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이무렵에는 밤새도 거의 숨을 죽입니다. 다섯 시쯤 되면 낮새가 바지런히 깃을 털고 일어납니다. 풀잎도 나뭇잎도 가만히 자면서 이슬을 머금는 새벽 서너 시입니다. 이리하여 이런 때에 맨 먼저 일어나서 하루를 여는 사람을 두고 ‘이슬떨이’라고 하는 이름을 붙였겠지요. ‘이슬떨이’나 ‘이슬받이’로 하루를 여는 사람은 언제나 씩씩하면서 야무지고 의젓합니다. 즐겁게 노래하면서 삶을 짓고, 기쁘게 꿈꾸면서 일손을 잡습니다.


  그러니까, 《오전 3시의 무법지대》에 나오는 여린 아가씨는 이슬떨이나 이슬받이와 같은 길을 간다고 할 만합니다. 이 여린 아가씨를 아끼던 선배 언니도 지난날에는 이슬떨이나 이슬받이와 같은 길을 갔을 테고요.



‘하고 싶은 일과, 반드시 해야 하는 일, 즐거운 일. 즐거운 일을 선택하면 안 되는 걸까?’ (93쪽)


“내일 데이트라며, 얼른 일 끝내야지.” “데이트. 그런 거나 가도 될까요?” “무슨 소리야? 파칭코 가게 바닥의 고작 80cm 공백이랑 자신의 데이트랑 뭐가 더 중요해? 응? 뭐냐고? 당연히 데이트지!” (151쪽)



  네무 요코 님 만화책 《오전 3시의 무법지대》에 나오는 사내들은 ‘사람 마음’을 잘 못 읽습니다. ‘사람 마음’을 헤아려 보려는 사내도 있으나, ‘사람 마음’을 도무지 못 헤아리는 사내가 꽤 많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내는 만화책에만 있지 않습니다. 만화책 바깥, 그러니까 우리 사회 곳곳에도 ‘사람 마음’을 읽지 못하거나 헤아리지 않는 사내는 참으로 많습니다. 사람으로서 사람을 읽지 못하거나, 사람으로서 사람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내라고 할까요.


  꽤 많은 사내는 밥을 차리는 기쁨을 알지 못하고 누리지 못합니다. 참 많은 사내는 빨래하고 아이들 돌보는 사랑을 알지 못하고 누리지 못합니다. 무척 많은 사내는 살림을 짓고 밭을 가꾸는 꿈을 알지 못하고 누리지 못합니다.


  힘을 써서 더 많은 짐을 짊어지는 사내는 힘을 덜 쓰거나 못 쓰면서 짐을 짊어지지 못하는 사람들 마음을 잘 모릅니다. 어쩌면, 알려고 하는 생각조차 없을는지 모르지요. 여리거나 아프거나 슬프거나 괴로운 사람이 어떤 마음인가를 알려고 하는 사내가 드물 수밖에 없을는지 모릅니다. 사내는 예부터 전쟁터에 끌려가서 다른 사람을 죽이는 짓을 저질러야 했고, 사내는 힘자랑을 해야 뭔가 대단하다는 듯한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하니까요. 4348.8.4.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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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아 고양이 골룸 1
야마자키 마리 지음, sana 옮김 / 애니북스 / 2013년 5월
평점 :
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528



‘우리 집 광’에서 나고 자라는 고양이

― 아라비아 고양이 골룸 1

 야마자키 마리 글·그림

 sana 옮김

 애니북스 펴냄, 2013.5.10.



  올여름에도 우리 집 광에서 고양이가 태어났습니다. 해마다 두 차례씩 우리 집 광에서 고양이가 새끼를 낳습니다. 한 번은 겨울을 앞둔 늦가을에 낳고, 한 번은 이른여름이나 늦봄에 낳습니다. 마을고양이나 들고양이라고 해야 할 텐데, 이 아이들은 왜 우리 집 광에서 해마다 두 차례씩 새끼를 낳을까요? 아무래도 먹이가 넉넉하고, 아늑하기도 하며, 땡볕을 긋거나 물을 얻기에 수월한 곳이라고 여기기 때문일까요. 따뜻하거나 포근하다고 여기기 때문일까요.


  올여름에 우리 집 광에서 새끼를 낳은 어미 고양이는 지난해나 지지난해에 우리 집 광에서 태어났던 아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니까, 집고양이는 아닌 마을고양이나 들고양이는 꽤 예전부터 우리 집 광이나 마당이나 뒤꼍이 저희 보금자리나 고향일 수 있습니다. 우리 식구가 이 시골집에서 지낸 지는 다섯 해이나, 그에 앞서까지 꽤 오랫동안 빈집이었다 했고, 빈집이기 앞서는 늙은 할매 혼자 살았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마을고양이는 그무렵부터 이곳에서 새끼를 낳았을 수도 있겠지요.



어느 날, 왜 하늘에서 밥이 내리는 걸까요. 궁금한 마음에 올려다보니, 어떤 인간이 높은 건물에서 우리들한테 먹을 걸 던지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8∼9쪽)



  야마자키 마리 님이 빚은 만화책 《아라비아 고양이 골룸》(애니북스,2013)을 읽습니다. 둘째 권은 아직 한국말로 안 나오는데, 이 만화책에 나오는 고양이라고 해서 남다른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아라비아 고양이’다운 모습을 꼭 바라서 이 만화책을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아라비아에서 만나는 고양이한테서 ‘아라비아 모습’을 엿볼 만하지는 않아요.


  어쩌면, 일본사람이 일본에서 고양이를 바라보듯이 아라비아에서도 ‘일본에서 하던 대로’ 바라보았으니, 아라비아다운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울 수 있겠지요.


  그러면, 나는 어떤 눈길로 우리 집 고양이를 바라보는가 하고 되새겨 봅니다. 도시에서 살던 때하고 시골에서 살던 때에, 고양이를 바라보는 눈길은 얼마나 다른가 하고 되짚어 봅니다.


  도시에서는 빈 그릇에 고양이 사료를 꾸준히 채워 주면서 지냈습니다. 살림돈이 모자라면 고양이 사료를 따로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때에는 다른 이웃집에서 잘 얻어먹겠지 하고 여겼습니다. 시골에서는 밥찌꺼기를 한쪽에 놓습니다. 가시나 뼈다귀가 나올 적에도 한쪽에 놓습니다. 알뜰히 챙기지는 못하지만 못 본 척하며 지내지는 못합니다.



그렇게 애교 부리지 않아도, 밤만 되면 우리한테 먹을 걸 던져 주는 인간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거든요. 우리는 하얀 고양이도 아닌데, 그 인간은 그런 걸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아요. (14쪽)



  다섯 해 앞서 처음 이 시골집에 깃들던 무렵을 떠올리면, 그무렵에는 천장을 기어다니는 쥐가 꽤 있었습니다. 빈집으로 오래 있던 티를 낸다고 할까요. 그런데, 마을고양이가 하나둘 우리 집 둘레를 어슬렁거리고, 또 우리 집 광에서 새끼 고양이가 태어나서 놀던 때부터 ‘천장을 달리거나 기는 쥐’는 모조리 사라집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사람이 따로 먹이를 챙기지 않아도 고양이는 고양이 스스로 먹잇감을 찾습니다. 시골고양이한테는 쥐랑 지네랑 개구리가 맛난 먹이가 되리라 느껴요. 때로는 작은 뱀도 잡아서 먹겠지요.


  지난해 겨울에는 뒤꼍에서 뻣뻣하게 죽은 고양이를 보기도 했습니다. 늙어서 죽은 고양이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남 고흥은 날이 폭하니 겨울이라고 해서 얼어붙지 않습니다. 틀림없이 뭔가를 잘못 먹고 죽은 듯했습니다. 마을 이웃집에서는 으레 쥐약을 놓고 농약을 많이 씁니다. 아무래도 쥐약 먹고 헤롱거리는 쥐를 잡아먹다가 목숨을 잃었지 싶은데, 우리 집 뒤꼍 풀숲에 곱게 누웠더군요. 이때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입니다. 볕이 잘 드는 뒤꼍 한쪽을 골라서 땅을 판 뒤 가만히 누였습니다.



그 인간은 갑자기 나를 높이 안아올리더니,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어요. 내려놔 달라고 버둥거려 보았지만, 쓰다듬어 주는 손길이 무척 기분 좋아서 나도 모르게 얌전해지고 말았어요. (46쪽)



  만화책 《아라비아 고양이 골룸》을 떠올립니다. 한국사람도 외국사람도 고양이를 바라보는 눈길은 서로 매한가지입니다. 예뻐하는 사람은 어느 곳에서나 예뻐합니다.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에서나 미워하거나 싫어합니다. 고양이밥을 챙겨 주고 싶은 사람은 도시에 살건 시골에 살건 마음을 찬찬히 기울입니다. 고양이 따위는 보기 싫은 사람은 멀쩡한 고양이한테 함부로 돌을 던집니다.


  ‘우리 집 고양이’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고 ‘우리 집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고양이’는 평상 밑으로 기어들어 한여름 땡볕을 긋기도 하고, 새끼 고양이는 평상에 올라앉아서 뒹굴며 놀기도 합니다. 어미 고양이가 마당 한복판에 벌렁 드러누워서 새끼 고양이한테 젖을 물리기도 합니다. 앵두나무 밑에 앉아서 풀내음을 맡으며 낮잠을 자기도 하고, 매화나무 옆이라든지 모과나무 옆에서 꾸벅꾸벅 졸기도 합니다.


  곰곰이 헤아려 보니, 우리 집은 농약을 안 치기에 풀개구리나 참개구리가 곳곳에서 노래합니다. 우리 집에서 함께 사는 고양이는 틀림없이 쥐하고 개구리를 노리며 나무 둘레에서 낮잠을 자는구나 싶습니다. 때로는 돌울타리에 올라앉아서 ‘나무에서 노래하는 새’를 오래도록 올려다봅니다.


  올겨울을 앞두고도 이 아이들이 새로 새끼를 낳을는지 궁금합니다. 아무쪼록 씩씩하게 우리 집 둘레에서 먹이를 넉넉히 찾으면서 오래오래 튼튼히 살아갈 수 있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마을고양이도 들고양이도 모두 우리한테는 이웃이요 동무이니까요. 4348.8.2.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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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겟 미 낫 Forget Me Not 1 세미콜론 코믹스
츠루타 겐지 지음, 오주원 옮김 / 세미콜론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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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539



나는 너를 잊지 않아

― 포겟 미 낫 1

 츠루타 겐지 글·그림

 오주원 옮김

 세미콜론 펴냄, 2012.2.24. 11000원



  지난 보름 동안 마을에서 개구리 노랫소리가 끊어졌습니다. 지난 보름 동안 마을에서 농약을 어마어마하게 뿌려댔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시골치고 농약을 안 뿌리는 마을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완전 유기농’을 하는 곳이 아니라면 어느 시골이든 농약나라가 됩니다. 논에는 농약을 치지 않더라도 고추밭에까지 농약을 안 치는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능금밭이나 배밭이나 포도밭을 일구는데 농약을 한 방울도 안 쓰는 사람은 그야말로 찾아보기 아주 어렵습니다. ‘농약 없는 능금밭’인 ‘기적의 사과’를 이룬 일본 할배는 있습니다만,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여느 시골에서 농약 없이 아무것도 못 한다고 할 만합니다.


  오늘도 농약바람은 아주 사그라들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며칠 앞서를 헤아리면 아주 얌전합니다. 농약바람이 부는 동안 무논마다 개구리가 모조리 죽은 줄 알았는데, 우리 집 마당하고 뒤꼍, 그리고 우리 집 앞자락 빈들에서 개구리 몇 마리가 노래를 합니다. 농약을 안 뿌리는 세 군데에서만 개구리 노랫소리하고 풀벌레 노랫소리가 울립니다.



“피에트로 베누치와 이마리 마리엘은 스타일이 다르다고. 그리고 1류 탐정이 어찌 간통 조사나 하고 있냔 말이야.” “알겠습니다. 일류 탐정이 수발을 받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지요. 그럼 오늘부터 식사는 스스로 준비하시길.” (13∼14쪽)



  츠루타 겐지 님 만화책 《포겟 미 낫》(세미콜론,2012) 첫째 권을 읽습니다. 둘째 권은 언제 나올는 지 알 길이 없는 만화책입니다. 츠루타 겐지 님 다른 만화책도 첫째 권은 이렁저렁 나오지만, 둘째 권은 좀처럼 나올 낌새가 없습니다. 츠루타 겐지 님 만화를 아끼는 분들은 ‘한 권이라도 만날 수 있어 반갑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여러 연재에 손을 대고는 도무지 다음 이야기를 안 잇는 몸짓’보다는 ‘한 가지 연재라도 꾸준히 손을 대어 다음 이야기를 잇는 몸짓’이 될 수 있으면 얼마나 고마우랴 싶기도 합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츠루타 겐지라는 분이 빚는 만화는 ‘연작’이면서 ‘연작이 아닌 작품’입니다. 여러 권이 나올듯이 ‘1’라는 숫자를 붙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이대로 더 연작을 선보이지 않고 끝맺을 수 있습니다. 다섯 해나 열 해에 한 권씩 선보일 수도 있겠지요.


  만화책은 으레 여러 권으로 이야기에 살을 붙이기 마련이니, 연작만화에서 낱권 하나만 놓고 깊이 살피거나 생각하는 일은 드물다고 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마흔 권이나 쉰 권짜리로 나오는 만화책이라 하더라도 권마다 이야기가 다릅니다. 한 권씩 따로따로 줄거리를 살필 만합니다. 저마다 다른 권에 저마다 다른 목소리가 흐릅니다. 만화책 《포겟 미 낫》 둘째 권이 나올 수 있다면, 둘째 권 얼거리나 줄거리는 첫째 권하고 여러모로 다를 만해요. 셋째 권이 나올 수 있다면, 앞선 두 권하고 셋째 권은 짜임새나 매무새가 사뭇 다를 수 있습니다.



“두 액자 장인 빈센초와 페루지아. 놀랍네요. 동일 인물이에요.” “확실해졌네. 찾았어. 그 아가씨의 한심한 아버지.” “마스터도 참 능청스럽네요.” “어쨌든 매듭지었네. 이제 겨우 잘 수 있겠다. 행복해.” (64쪽)



  나는 너를 잊지 않습니다. 너도 나를 잊지 않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에 잊지 않을 수 있고, 네가 나를 미워하기에 잊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좋아하기에 잊지 않을 수 있으며, 네가 나를 싫어하기에 잊지 않을 수 있어요.


  나는 우리 아이들을 잊지 않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나를 잊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 어버이를 잊지 않습니다. 우리 어버이도 나를 잊지 않습니다. 자주 만나거나 연락하든 아니든, 마음속으로 언제나 함께 있다고 느낍니다. 늘 보는 사이인 터라 더 가깝지 않습니다. 마음속으로 따스하고 넉넉하게 헤아리는 사이일 때에 더없이 가까우면서 살갑게 지낼 수 있습니다.


  수다를 많이 떨어야 가까운 동무가 아닙니다. 짧게 몇 마디를 섞더라도 웃음하고 노래가 흐를 때에 가까운 동무입니다. 편지를 자주 주고받아야 가까운 벗님이 아닙니다. 가볍게 몇 마디를 나누더라도 포근하면서 너른 마음이 되면 가까운 벗님입니다.



“거짓말쟁이가 커서 도둑이 된다는 말이 있지요. 전 직업상 산더미같이 거짓말을 해대고 있는데, 그런 저도 도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항상 빼앗기만 하는 저지만, 무언가를 빼앗긴 적이 딱 한 번 있습니다.” (194쪽)



  만화책 《포겟 미 낫》을 살피면, 여자 주인공은 ‘탐정 집안’에서 탐정 일을 물려받습니다. 남자 주인공은 ‘탐정하고 맞서는 도둑’ 일을 배워서 솜씨 좋게 도둑질을 선보입니다. 한 사람은 지키는 쪽이라 하고, 한 사람은 훔치는 쪽이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키는 쪽이 착하고 훔치는 쪽이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만화책에 나오는 두 사람은 그저 ‘수수한 삶’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그런데, 훔치는 쪽은 가난한 이웃 것을 훔치는 일이 없습니다. 값비싸거나 값지다는 보배를 훔치기 일쑤입니다. 부자가 거머쥔 것을 훔친다고 해서 ‘착한 도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만, ‘나쁜 짓을 일삼는 사람이 여린 사람한테서 빼앗은 것을 훔치는 일’은 어떤 일이 될까요? 그리고, 1970년대부터 일어난 새마을운동은 풀집을 허물고 시멘트집에 슬레트지붕을 올리도록 했는데, 이제 시멘트집이나 슬레트지붕은 환경공해라고 일컫습니다. 새마을운동이 무시무시하던 지난날 슬레트지붕을 안 올리겠다고 하면서 군화발에 맞아야 한 시골사람은 어떤 삶이고, 오늘날로 접어들어 ‘슬레트지붕 무상철거’를 해 준다는 중앙정부나 지방정부 공무원은 어떤 삶일까요?



“저택도 재산도 이대로 누구에게도 상속되지 않고, 할아버지가 남긴 숙제만 대물림될 거야, 분명.” (210쪽)



  나는 기쁨을 잊지 않고 슬픔을 잊지 않습니다. 다만, 잊지 않되 굳이 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나간 기쁨은 지나간 기쁨일 뿐이고, 지나간 슬픔도 지나간 슬픔일 뿐입니다. 새로 맞이할 아침을 생각하면서 곱게 꿈을 꾸려 합니다. 새삼스레 찾아올 멋진 하루를 떠올리면서 푸른 꿈을 다시금 지으려 합니다.


  만화책 《포겟 미 낫》은 ‘할아버지가 수수께끼와 함께 남긴 재산 상속’이 이야깃감이 된다고 할 만한데, 여자 주인공은 할아버지 재산에 그리 마음이 없으면서도 아예 마음이 없지도 않습니다. 잊지는 않되 더 생각하지 않는다고 할까요.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는다고 해서 갑작스레 기쁜 삶이 되지 않는 줄 알고, 빈털털이로 오늘을 살아도 오늘 하루를 기쁘게 누리면 웃음이 저절로 피어나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4348.7.31.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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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백의 소리 9
라가와 마리모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527



‘농약바람 헬리콥터’와 ‘노래하는 마음’

― 순백의 소리 9

 라가와 마리모 글·그림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5.2.25.



  요 며칠 사이에 마을에서 개구리 노랫소리가 끊어졌다고 느꼈습니다. 얼추 열흘 남짓 됩니다. 왜 개구리 노랫소리가 끊어졌는지 아리송했는데, 어제 낮에 수수께끼를 풉니다. 해마다 이맘때, 그러니까 칠월 한복판이면 온 마을에 농약뿌리기가 한창입니다. 벼포기가 무럭무럭 자라는 이즈음에 다른 풀이 돋지 못하게 하려는 생각에다가, 메로(멸구)가 들지 말라면서 농약을 뿌립니다.


  요즈음은 시골에서 할매와 할배가 손수 농약을 뿌리는 일이 드뭅니다. 날이 갈수록 할매와 할배는 나이가 드는 터라, 손수 농약을 뿌리고 싶어도 못 뿌리기 일쑤예요.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시골 할매와 할배는 농협에 돈을 내고 헬리콥터를 빌립니다. 농협 공무원은 무인 헬리콥터에 농약을 그득 실어 논배미에 띄워요. 무인 헬리콥터는 온 마을 논을 두루 날아다니면서 농약을 뿌립니다.



‘민요주점에 있는 민요 가사책에, 전국의 노래 대략 700곡이 실려 있다. 그것도 널리 알려진 노래만 싣기 때문에 실제로는 더 많다. 할당량은 하루 두 곡. 외울 것.’ (6쪽)

“너, 호흡을 주고받을 생각이 있는 거니? 노래꾼의 개성을, 죽이지 말아야지.” (40쪽)



  농약바람이 부는 요즈막 시골마을에는 소리가 없습니다. 농약바람이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울려퍼지는 요즈막 시골마을에는 노래가 없습니다. 개구리도 풀벌레도 농약바람이 부는 동안에 쥐죽은듯이 고요합니다. 아니, 아뭇소리를 못 냅니다.


  농약 헬리콥터 여러 대가 이 마을 저 마을 떠다니면서 농약을 날릴 적에는, 들판에 농협 공무원을 빼고는 아무도 안 돌아다닙니다. 그야말로 쥐죽은듯한 시골 여름이요, 우리 집 아이들은 바깥에서 뛰놀지 못하고, 우리 식구는 자전거 나들이도 다니지 못합니다.


  참말 쥐죽은듯이 고요한 시골마을에서 《순백의 소리》(학산문화사,2015) 아홉째 권을 읽으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소리와 노래와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소리와 노래가 잠들어 버리는 삶터란 무엇인가 하고 돌아봅니다.



“8년 동안 쌓아 온 지식을, 1주일밖에 안 된 녀석한테 쉽게 줄 수야 있나.” (24쪽)

“손님과 내가 주는 거야. 네 연주에 대한 대가라고. 기쁘지 않냐?” “…….” “저기 말야.” “예?” “호흡을 맞춘다는 건, 원치 않는 방향으로 교정된다는 건지도 몰라. 그건.” “그건?” “그때가 돼 보지 않으면 모르지.” (87∼88쪽)

“난 있지, 네 행동 하나하나가 놀랍지만, 진심이다 싶어 감탄했고, 뒤처진 것 같아 조바심이 났어. 그러니까 내 진심의 결실도 봐 주렴.” (109쪽)




  농약바람이 휘몰아치는 낮에 자전거에 두 아이를 태우고 마실을 갑니다. 오늘 꼭 우체국에 가서 부쳐야 할 소포가 있습니다. 안 갈 수 없는 노릇입니다. 아이들한테 비옷을 입힐까 하다가 그냥 갑니다. 날이 워낙 더워서, 비옷을 걸치고 자전거를 달리면 아이들은 온몸이 땀범벅이 되겠구나 싶어요.


  농약 헬리콥터가 없겠거니 싶은 길로 돌아서 가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코앞에 농약 헬리콥터가 농약을 촤아악 뿌립니다. 농협 공무원은 농약 헬리콥터를 낮게 띄워서 뿌리는데, 우리 자전거를 보더니 길 오른쪽으로 가라고 합니다. 속으로 웃음이 납니다. 자전거야 아주 마땅히 길 오른쪽으로 가지요. 그런데 바람이 길 오른쪽으로 부는데 어찌해야 할까요.


  두 해 앞서까지는 농협에서 농약 헬리콥터를 띄울 적에 며칠 앞서부터 면내방송을 했습니다. 지난해부터는 면사무소에서 ‘농약 헬리콥터가 뜬다’는 방송을 안 합니다. 농약 헬리콥터가 뜰 적에는 장독 뚜껑을 모두 닫고, 창문도 닫으며, 외출을 삼가라고 방송을 해요. 하늘에서 헬리콥터가 이리저리 날면서 온갖 곳에 농약을 뿌리니 한여름에 집안에 박혀서 문을 죄다 닫고 숨을 죽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화책 《순백의 소리》를 가만히 헤아립니다. 노랫가락을 온몸으로 익혀서 온마음을 터뜨리듯이 들려주려고 하는 아이들은 언제나 구슬땀을 흘립니다. 악기 하나를 켜는데 그야말로 땀범벅이 됩니다. 영화 〈나인틴 헌드레드〉를 보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배에서만 지내던 ‘나인틴 헌드레드’가 ‘재즈의 아버지’라는 사람하고 피아노 겨루기를 할 적에 어마어마하게 땀을 쏟으면서 놀라운 연주를 선보입니다. 악기를 켜거나 다루는 사람이 흘리는 땀이란, 노랫가락에 싣는 온사랑이라고 할 만합니다.



‘소리가 모두를 이끌고, 흥을 돋우고, 즐겁게 하며, 축제다.’ (70쪽)

‘이야기가 소리를 필요로 하고, 소리가 이야기를 필요로 하며, 조개처럼 합이 맞는다. 말의 호흡, 소리의 타이밍, 그것이 맞아떨어져 하나가 된다.’ (133쪽)



  커다란 소포를 수레에 싣고 우체국으로 달리는데, 농약 헬리콥터가 바로 옆에서 나란히 납니다. 농협 공무원은 ‘아이 태운 자전거’가 지나가더라도 ‘농약 뿌리기’를 10초나 1분조차 멈추지 않습니다. 안내방송조차 없이 헬리콥터로 농약을 뿌려대니, 이 시골마을에서 볼일 보러 다니는 사람한테 마음을 쓸 겨를이 없으리라 느낍니다.


  나는 농약을 온몸으로 쏴악 얻어맞습니다. 눈이 매우 따갑습니다. 두 아이를 태우고 자전거를 모는데, 눈이 따갑더라도 눈을 감거나 손으로 가리면 그만 고꾸라질 수 있습니다. 뒤에 앉은 아이들더러 “눈 감아!” 하고 외친 뒤에 눈을 부릅뜨고 자전거 발판을 세게 구릅니다. 마음속으로 ‘괜찮아, 괜찮아, 지나가는 바람이야.’ 하고 생각합니다. 이 외침말 빼고는 아뭇소리도 나한테 안 들립니다.


  한참 달려서 농약 헬리콥터한테서 벗어나고 나서야 겨우 숨을 돌립니다. 참새도 제비도 가뭇없이 사라진 들판입니다. 개구리도 왜가리도 숨을 죽이는 들녘입니다. 아무래도 지난 열흘 사이에 엄청난 농약을 들마다 듬뿍 뿌렸으니, 개구리가 거의 다 죽었을는지 모르겠구나 싶습니다. 이즈음에 새끼한테 먹이를 물어다 나르는 제비는 어떠할는지 걱정스럽습니다만, 제비도 사람들이 농약을 뿌리는 줄 알 테니, 농약이 없는 깊은 숲으로 깃들어서 먹이를 찾을까요.




“‘우메조노’에서 다른 사람의 힘과, 소리에 승패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더. 지금 ‘타케노하나’에서, 돈을 벌려면 손님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는 ‘잘하고 못하는’ 것 이전에, ‘좋고 싫은’ 것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더.” (157쪽)

“솔직히 재능만 보면, 너는 여기의 누구보다도 위야. 그러니까, 기술을 배울 생각은 하지 마라. 배워야 할 건, 폭넓게 바라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이야.” (168쪽)



  만화책 《순백의 소리》에서 악기를 켜는 아이들은 빼어난 손놀림만 보여주지 않습니다. 갓난쟁이였을 적부터 노랫소리를 듣고 자랐으니, 또 갓난쟁이였을 무렵부터 악기를 만지며 놀았으니, 이 아이들 손놀림은 참으로 훌륭하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노래는 손재주로 들려줄 수 없습니다. 노래는 오롯이 ‘마음 울림’입니다. 마음을 건드리려고 켜는 노래요, 마음을 북돋우려고 들려주는 노래이며, 마음을 어루만지려고 나누는 노래입니다. 그러니, 악기를 켜는 사람은 ‘손놀림’보다 ‘마음’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없이 켜는 노래에는 ‘들을 만한 기쁨’이 없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쓰는 글도 이와 같다고 느낍니다. 마음이 없이 쓰는 글에 어떤 노래가 흐를 수 있을까요? 또, 마음이 없이 그리는 그림에, 마음이 없이 찍는 사진에, 마음이 없이 읊는 말에, 마음이 없이 짓는 밥에, 마음이 없이 세우는 아파트나 송전탑에 어떤 기쁨이나 노래가 흐를 만할까요?


  저녁이 흐르고 밤이 되니 빗줄기가 굵어집니다. 어제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뿌린 농약이 이 빗물을 타고 스러지려나요. 이 비가 그치면 부디 개구리도 풀벌레도 깊은 잠에서 깨어나 씩씩하고 힘차게 노래를 다시 부를 수 있기를 빕니다. 아름다운 시골마을 한여름에 맑고 사랑스러운 노랫가락이 새롭게 울려퍼질 수 있기를 꿈꿉니다. 4348.7.23.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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