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빙해사기 - 하
다니구치 지로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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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84



미처 마무리짓지 못한 ‘거신 문명 판타지’

― 지구빙해사기 하

 타니구치 지로 글·그림

 미우 펴냄, 2016.8.31. 14000원



  1988, 1989, 1990년 세 해에 걸쳐 드문드문 짧게 그려서 마무리를 지은 만화책 《지구빙해사기》 상·하권은 2016년에 한국말로 나옵니다. 타니구치 지로 님이 요즈막에 선보인 만화책을 돌아보면 《지구빙해사기》는 사뭇 다른 결로 이야기를 끌어내려 한다고 느낄 만합니다. 이 만화책은 지구가 대빙하를 맞이해서 무너지고 난 뒤에 꽤 오랜 나날이 흐른 어느 날을 바탕으로 삼아요.


  어쩌면 오백 해, 어쩌면 즈믄 해, 어쩌면 만 해쯤일는지 모릅니다. 지구에 대빙하가 찾아와서 모조리 꽁꽁 얼어붙은 먼 뒷날은 말이지요. 눈부시던 문명도 얼음 밑에 갇힌다지요. 온갖 전쟁무기도 얼음 밑에 갇힌다 하고요. 바다가 모조리 얼어붙는다면 잠수함이고 구축함이고 항공모함이고 모두 부질없어요. 꽁꽁 얼어붙는 땅뙈기에서는 석유를 뽑아내지도 못할 테니 석유로 움직이는 기계는 몽땅 멈출 테고요.



“이 데이터는 지구 전체 규모로 계속되고 있던 빙하기의 끝을 경고하고 있는 거야!” (27쪽)


“이제껏 본 적도 없는 생물들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성장하고 있지.” “푸하하하하. 재미있잖아. 이렇듯 이 대지가 새롭게 거듭나려 하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살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면 우린 굉장히 행복한 거야. 넌 이 지구라는 존재에 좀더 감사해야 해.” (86쪽)



  만화책 《지구빙해사기》를 보면 지구문명이 스러지고 어렵사리 다시 깨어난 새 문명에서도 사람들은 술과 놀음을 그치지 않습니다. 이때에도 전쟁무기는 아직 있습니다. 만화책에 흐르는 이야기입니다만 사람들은 기계에 더욱 기대어 살아가요. 아무래도 ‘기계로 지은 기지(집이 아닌 기지입니다)’ 바깥은 너무 춥기 때문에 아예 바깥으로 나갈 엄두를 못 낼 테지요. 게다가 바깥은 꽁꽁 얼어붙었으니 제대로 된 먹읅거리가 있다고 하기도 어려울 테고요.


  그런데 이런 곳에서도 사람들은 ‘술’을 똑같이 마십니다. 먹을거리는 없어도 술은 있어야 하나 봐요.

  어리석다고 해야 할는지, 바보스럽거나 멍청하다고 해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지구에 문명이 아예 사라지지는 않고, 사람도 다 사라지지 않은 모습을 그렸으니 한 줄기 빛이라도 있는 셈일까요. 그렇지만 온통 얼어붙은 지구에 살아남아서 ‘석유 아닌 다른 지하자원’을 찾아 헤매며 ‘집 아닌 기지’에 갇힌 몸으로 풀도 꽃도 나무도 바람도 볕도 흙도 모르는 채 산다면, 이러한 삶도 삶이라 할 만한지 아리송합니다.



“먼지에서 태어나, 먼지로 돌아간다. 우리는 돌아왔다. 또다시 대지의 먼지로부터 태어났다. 난, 이미 늙어버린 노목이다. 난 길고 긴, 영원처럼 여겨질 만큼 엄청나게 긴 기억을 갖고 있다. 과연, 네 눈에는 보일까?” (122∼123쪽)


“보인 것이냐, 타케루? 잊지 마라. 네게도 그 힘이 있다는 걸.” (130쪽)



  《지구빙해사기》 이야기는 상권을 지나 하권에 이르면 ‘기나긴 대빙하기’가 끝나서 ‘얼음이 녹는 때’를 맞이합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늘 얼음만 보고 살던 사람들이 처음으로 ‘녹는 땅’을 보고는 놀랍니다. 더구나 ‘녹는 땅’에서 아주 무시무시하도록 빠르게 퍼지는 풀과 나무를 보면서 더욱 놀라요.



“굉장히 훌륭한 도시인데?” “얼마나 오래된 걸까?”“빙하 밑에 쭉 파묻혀 있었겠지.” (159쪽)



  얼어붙은 땅이 녹으면서 오랫동안 얼음 밑에 갇혔던 옛날(그렇지만 오늘 우리가 사는 나날) 문명이 고개를 내밀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문명이 곳곳에서 살몃살몃 드러나는 빠르기보다 풀과 나무가 훨씬 빠르게 자라지요. 왜 그러한가 하면, 풀과 나무는 그동안 ‘사람 문명한테 짓밟히면서 괴롭던 나날’을 온몸에 아로새겼거든요. 그래서 기나긴 대빙하가 끝날 즈음 풀과 나무는 ‘사람한테 앙갚음’을 할 뜻입니다. 아니 앙갚음이라기보다는 ‘지구를 지키고 풀과 나무 스스로도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이에요.


  나무는 뿌리부터 우듬지까지 ‘사람이 저지른 핵전쟁 때문에 생겨난 방사능과 잿더미로 그동안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는지’ 세포 하나하나가 되새깁니다. 아주 기운차게 자라고 뻗는 풀과 나무는 ‘사람을 볼 때’마다 모두 우걱우걱 잡아먹으려 해요.



“지금 네 의식은 움직이는 숲의 뇌 조직에 들어가 있다. 숲의 신경중추로 내려가고 있어. 넌 지금 숲의 내(內) 우주를 지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해하려 들지 말고 느껴라. 너라면 할 수 있다.” (209쪽)


“그렇다. (핵전쟁으로 일어난 핵폭발) 이것이 긴 빙하기의 시작이었다. 알겠느냐? 타케루. 숲들의 분노와 고뇌를. 지금 숲들에게 있어 인류는 들불처럼 무서운 존재란다. 재생한 지구 식물이 거친 과정은 혹독했다.” (214쪽)



  누구 잘못일까요? 누구 탓일까요? 대빙하기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지난날(그러니까 오늘날) 핵전쟁을 일으켜 지구를 송두리째 무너뜨린 그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구를 무너뜨린 전쟁 미치광이가 남긴 씨앗’이지요. 대빙하기가 끝나고 뻗어나는 풀과 나무는 바로 ‘사람이라는 씨앗’이 앞으로도 또 전쟁무기이며 핵무기이며 자꾸 만들어서 서로 다투고 싸우고 윽박지르리라 여깁니다. 그러니 ‘사람이라는 씨앗’을 모조리 죽여 없애야 한다고 여겨요.



제8기 무르톡 빙기의 지구 수도 어비스 메갈로폴리스는 불에 타버렸다. 지구는 지금 간빙기의 시작점에 서 있었다. 지각은 크게 변동되고 온갖 생물들이 진화하고 변모하는 새 시대에 인류의 진화도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타케루의 내면에서 깨어난 의식은 대자연과 대화하며 공생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이었다. ‘지구 빙해사기’, 그것은 신인류의 역사다. (310쪽)



  타니구치 지로 님이 만화가 길을 걸어가는 첫무렵에 ‘미완성처럼 완성한’ 작품인 《지구빙해사기》입니다. 타니구치 지로 님이 새내기 만화가이던 무렵 이 작품을 서둘러 어영부영 마무리짓지 않고 더 이야기를 끌어내 보았다면 어떠했으랴 싶어요. 대빙하기가 끝난 뒤부터 사람들이 똑같이 어리석은 짓으로 나아가려 했는지, 대빙하기가 끝난 뒤부터 사람들이 어떤 살림을 지으려 했는지, 그리고 대빙하기라고 하는 때에 사람들이 저마다 어떤 문명으로 살아남으려 했는지, 앞으로 사람들이 스스로 지을 삶은 ‘문명과 살림’ 사이에서 어느 길이 슬기롭거나 아름다울는지를 조금 더 차분히 천천히 그려 보았다면 어떠했으랴 싶어요.


  이밖에 이 만화책에서는 ‘거신’을 다뤄요. 겉그림에 나오는 사람은 ‘지구사람’이 아닌 ‘우주에서 지구로 찾아온 거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만화 연작을 너무 서둘러 마치는 바람에 ‘여러 거신’을 다루지 못하고 딱 한 거신만 살짝 보여주고 말아요. 거신 문명이나 문화나 역사와 얽힌 수수께끼를 조금 더 깊이 다루어 봄직한데, 이 대목에서도 아쉽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이제 더 꺼내기 어렵습니다. 타니구치 지로 님은 조용히 흙으로 돌아가서 풀뿌리하고 나무뿌리 사이에서 새로운 흙이 되어 지구별 한 조각이 되었거든요.


  부디 고이 쉬시기를 바랍니다. 타니구치 지로 님이 남긴 어여쁜 만화책은 고운 씨앗이 되어 우리 마음속에서 자라리라 생각해요. 비록 이 지구에서 수많은 나라가 전쟁무기를 손에서 못 놓고, 핵무기마저 손에서 못 놓으며, 핵발전소까지 손에서 못 놓지만, 앞으로 새로 태어나서 자랄 아이들은 모든 무기를 내려놓고서 서로 어깨동무하는 슬기로운 길로 나아가리라 생각해요. 아름다운 지구가 되고, 사랑스러운 나라가 되며, 즐거운 마을이 되기를 바라며 지은 작은 만화책은 두고두고 싱그러운 씨앗 노릇을 하리라 봅니다. 2017.3.9.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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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9 20: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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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0 06: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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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3 00: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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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4 20: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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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를 기르는 법 1
김정연 지음 / 창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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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83



안동 아가씨 ‘이시다’가 서울에서 홀로서기

― 혼자를 기르는 법 1

 김정연 글·그림

 창비 펴냄, 2017.2.7. 16000원



  경상북도 안동 아가씨는 고향집을 떠나기로 합니다. 서울로 갈 꿈을 품습니다. 그렇지만 돈이 딱히 있지 않고, 대단한 재주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서울에서 일자리를 찾았지만 고시원 한 칸을 겨우 얻습니다.


  그야말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한데 모인 서울에서 고시원은 창문조차 없는 성냥갑 같습니다. 이곳에서 돈을 더 치르고서라도 창문 있는 자리를 찾아봅니다. 그런데 막상 고시원에서 창문 있는 자리를 찾아보니, 창문을 열면 바로 옆 건물 벽만 보인대요.



저는 작은 규모의 인테리어 회사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야근만큼은 남다른 규모를 자랑합니다. 철야가 계속될수록 사무실은 극단적인 상상들로 가득 찹니다. 절대 실현되지는 않지만, 상상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음침한 생각들 말입니다. 물론 저도 저만의 불순한 상상을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일을 못하게 되는 상황을 생각해 보는 겁니다. (18쪽)


요즘은 출퇴근을 하는 것만으로도 여독이 쌓이는 기분입니다. 물리적으로 먼 길도 아닌데 말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힘들다고 그만둘 수는 없겠죠? 적어도 시한부쯤의 이유는 들어야 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24쪽)



  《혼자를 기르는 법》(창비,2017)이라는 만화책을 읽습니다. 이 만화책을 내놓은 김정연 님은 먼저 웹툰을 선보였습니다(webtoon.daum.net/webtoon/view/selfgrow). 시골 아가씨 한 사람이 서울에 터를 얻어 으레 밤샘일에 시달리면서 홀로서기란 얼마나 고단한가 하는 이야기를 만화로 보여줍니다. 툭하면 밤 늦게까지 일을 시키는 일터는 어느 날 빈 방에 침대를 들여놓더랍니다. 일터 한쪽 빈 방에 놓인 침대는 ‘대놓고 밤샘일을 시키겠다’는 뜻일 테지요.


  침대가 있는 일터는 복지를 몸소 보여주는 셈일까요. 아니면 복지하고 동떨어진 셈일까요.


  그러고 보면 창문 있는 고시원도 이와 비슷한 얼거리이지 싶어요. 창문이 있기는 있는데 창문을 열면 바로 맞닿은 옆 건물 벽만 보인다니, 이는 창문이라고 해야 할까요, 창문이 아니라고 해야 할까요.


  더 따지고 보면 거님길도 이야기할 만합니다. 서울이든 시골이든 모두 매한가지인데요, 사람이 다니라고 하는 거님길에 버젓이 자동차나 오토바이가 서곤 합니다. 사람길이 아닌 ‘자동차 서는 자리’가 되고 마는 거님길은 참말 거님길일까요. 아니면 그냥 ‘주차장에 사람도 다닐 수 있다’뿐일까요.



인류는 어쩌면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혼자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과, 그러지 못하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69쪽)


무리지어 살게 되면 좋은 점도 있지만, 흐릿해지는 가치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이를테면 함께 사용하기 때문에 아끼지 않거나 막 쓰게 되는, 욕실 안의 공공재 같은 것들 말이죠. 혼자 살게 되면 가장 해 보고 싶었던 것은, 만 원이 훌쩍 넘는 백화점 비누를 하나 사서, 개봉해서부터 쌀 한 톨 크기가 될 때까지 온전히 혼자서 다 써 보는 것이었습니다. (75∼76쪽)



  시골 아가씨는 서울 아가씨로 살려고 용을 써야 합니다. 입밖으로 쉬 내뱉지는 않지만 거친 말이 튀어나올 만한 일을 으레 겪어냅니다. 거친 말이 아주 쉽게 튀어나올 수 있을 만큼 거친 사회이고 메마른 도시입니다. 어느덧 웃음도 눈물도 무디어진다고 할 수 있어요.


  이럴 즈음 시골 아가씨는 마음을 기댈 수 있고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벗님을 만납니다. 집에서 수많은 물고기와 여러 짐승을 기르는 언니입니다. 작은 집에서 작은 목숨붙이를 바라보면서 마음을 나누어 봅니다. 사람도 작은 짐승도 물고기도 작은 곳에서 비로소 쉽니다.


  작은 단칸방에서, 작은 사육장에서, 작은 어항에서, 저마다 조그마한 살림을 꾸립니다. 작은 단칸방에 깃들면서 벽을 꾸민다든지 집을 가꾼다든지 할 수 없습니다. 달삯을 내면서 얼마쯤 그곳에 머물 수 있을 뿐이에요. 작은 사육장이나 어항에서 사는 작은 짐승이나 물고기도 그저 그곳에 머물 수 있을 뿐입니다.



고작 제 껍질의 텍스처나 신경 쓰고 있자니, 불현듯 좋지 못한 기억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어두운 술집에서 나 예쁘다고 뽀뽀해 놓고, 밝은 카페에서 헤어지자고 한 어떤 새끼가요. (137쪽)


고시원 시절, 창문 있는 방이 더 비쌌지만 굳이 욕심을 냈던 이유는, 제게는 그게 굉장히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창문이란 한 폭의 밖을 담은 그림과도 같습니다. (160쪽)



  너무 좁은 서울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몰리는 바람에, 아주 작은 곳에 아주 많은 사람이 복닥입니다. 어디를 가든 돈을 쓰는 곳이 되고, 마음을 놓으면서 턱 주저앉을 만한 걸상이나 빈터를 찾기 어렵습니다.


  이리하여 《혼자를 기르는 법》에 나오는 ‘이시다’라는 아가씨는 아버지한테서 “‘이시다’이시다”라는 멋진 이름을 물려받았으나 정작 ‘이시다(높임말)’라는 자리보다는 ‘이 시다(이 した, 이 잡일꾼)’라는 자리에 서곤 합니다. 만화에서도 ‘아랫자리’에서 맴도는 이야기가 으레 흘러요.



어렸을 땐 그냥 노는 대로 놀아졌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디에 갈지를 정하는 것이, 제 놀이의 전부가 되어버렸습니다. (238쪽)


제가 살던 곳의 미끄럼틀에는, 동네의 최강자만이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비비탄들을 주워서 갖다 주면, 총에 맞지 않고도 놀이터를 이용할 수 있었죠. 하지만 모든 약속들이 반드시 지켜지는 것은 아니었고, 아버지의 화난 지갑은 제게도 수단이란 것을 안겨 주었습니다. (337쪽)



  서울이 더 넓어지면 그 많은 사람들이 조금씩 넉넉하게 바뀔 만할까 궁금합니다. 서울이 좀 작아지면 오히려 그 많은 사람들이 서울 바깥으로 흩어지면서 조금이나마 넉넉하게 달라질 만할까 궁금해요.


  아니면 이 서울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씩씩하게 홀로서는 길을 찾을 만할까요. 또는 굳이 이 서울이 아니어도 씩씩하며 즐거이 홀로서는 길을 새롭게 열 만할까요.



카트에 청경채를 담고, 고등어를 담고, 콜라를 담고, 방향제를 담고, 휴지도 담고, 락스도 담으면서, 그 중간 어디쯤에선 물고기도 테이크아웃해 올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29쪽)


제 꿈은 폴리 포켓 디자이너가 되어, 제가 살고 싶은 집들을 마음껏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건축 모형용 미니어처 인간들을 보면 그때 생각이 나곤 하죠. 전 아직도 나름의 동심을 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449쪽)



  ‘먹는 물고기’가 아닌 ‘기르는 물고기’를 요새는 ‘마트’에서도 판다고 해요. 플라스틱 컵에 담은 ‘기르는 물고기’가 우리 가운데 누가 골라 주기를 기다린다고 해요.


  그리 오래지 않은 지난날까지 ‘기르는 물고기’라면 으레 도랑이나 냇물에서 낚거나 잡곤 했습니다. 1990년대 첫무렵까지 인천에서 살던 저는 바닷가나 갯가로 낚시를 가서 ‘기르는 물고기’를 낚았고, 작은 늪이나 못에서 미꾸라지를 잡기도 했어요. 곰곰이 생각하니 우리가 마을 언저리에서 ‘기르는 물고기’를 손수 잡던 삶하고 멀어질 즈음 민물고기나 바닷물고기 모두 제 삶자리에서 빠르게 밀려났지 싶습니다. 물고기뿐 아니라 개구리도 새도 숲짐승도 차츰 보금자리를 빼앗기고요.


  4대강 사업이 벌어지면서 민물고기는 더더욱 설 자리를 잃었는데, 어쩌면 ‘도시화·서울화’는 우리가 스스로 서는 씩씩한 길을 자꾸 갉아먹는지 모를 노릇이에요. 이런 틈바구니에서 《혼자를 기르는 법》에 나오는 ‘이시다’ 아가씨는 홀로서기를 이루어 낼 수 있을까요? 혼자서도 씩씩하고, 혼자서도 즐거우며, 혼자서도 아름다운 살림을 끝끝내 찾아내어 활짝 웃음꽃을 피울 수 있을까요?


  부디 쓰러지지 말기를, 부디 이시다 아가씨 같은 이웃을 보듬을 수 있기를, 부디 서울에서도 살림꽃을 피울 수 있기를, 무엇보다 따사로운 마음을 서울에 씨앗으로 심어서 많디많은 사람들이 바삐바쁜 삶에서 살그마니 시름을 덜면서 흐뭇하게 어깨동무하는 길로 나아가는 징검돌을 이룰 수 있기를 빕니다. 2017.3.3.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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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함께 : 신화편 - 상 신과 함께 시리즈
주호민 지음 / 애니북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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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82



빈손으로 활을 당겨 해를 떨군 한겨레 옛이야기

― 신과 함께, 신화편 상

 주호민 글·그림

 애니북스 펴냄, 2012.11.16. 11000원



  젊은 만화가 주호민 님은 우리 신화에 만화라는 옷을 입혀서 새롭게 선보였습니다. 《신과 함께》라는 이름으로 2010년에 ‘저승편’을, 2011년에 ‘이승편’을, 2012년에 ‘신화편’을 마무리지어요


  우리한테도 ‘하느님 이야기(신화)’가 있느냐고 아리송해 할 분이 있을 텐데, 우리한테뿐 아니라 모든 겨레에는 ‘하느님 이야기’가 있어요. 중국에도 일본에도, 태국에도 라오스에도, 브라질에도 멕시코에도 저마다 다른 ‘하느님 이야기’가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그리스나 로마 하느님 이야기만 있지 않습니다. 북유럽이나 아일랜드 하느님 이야기만 있지도 않고요.


  다만 한국에서는 ‘한겨레 하느님 이야기’가 어느 때부터 뚝 끊어졌을 뿐입니다. 정치권력을 거머쥔 쪽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싹 끊어버렸을 뿐이에요. 우리 스스로 이 땅에서 사람이 살아온 뿌리를 잊거나 놓거나 잃은 셈이라고도 할 만해요.



태초에 혼돈이 있었다. 땅과 하늘도 없고 처음과 끝도 없고 선과 악도 없는 혼돈. 어느 날 그 혼돈의 작은 틈을 찢고 거신들이 나타났다. 거신의 돌로 찢은 혼돈은 하늘과 땅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거신이 땅에서 솟아났다. 두 번째 거신은 네 개의 눈에서 불같이 뜨거운 빛과 얼음같이 차가운 빛을 뿜어냈다. 격렬한 싸움 끝에 첫 번째 거신이 두 번째 거신을 제압하고, 그의 눈을 뽑아 하늘에 던지니, 두 개의 해와 두 개의 달이 되었다. 두 번째 거신은 흩어지고 세상에는 오색구름이 피어나 산과 강과 들이 생겨났다. 훗날 사람들은 첫 번째 거신을 가리켜 하늘 문을 지키는 산 ‘도수문장’ 또는 ‘미륵’이라 불렀다. (9∼13쪽)



  《신과 함께》 신화편 상권은 ‘대별소별전’하고 ‘차사전’ 두 가지 이야기를 다룹니다. ‘대별소별전’은 ‘천지왕본풀이(제주도 신화)’에서 따와 새롭게 빚었다고 밝힙니다. 신화편 중권에서는 ‘할락궁이전’하고 ‘성주전’ 두 가지 이야기를 다룹니다. 중권 ‘할락궁이전’은 ‘이공본풀이(제주도 신화)’에서 따와 새롭게 빚었다고 밝혀요.


  만화 이야기 끝에 어느 옛이야기에서 따왔는가 하고 밝히는 대목을 살피노라면, 이 땅에서도 제주도나 함경도나 평안도나 전라도나 강원도나 충청도마다 다 다른 옛이야기가 오랫동안 흘렀지 하고 느낄 만합니다. 이제는 텔레비전과 영화에 밀려 거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만, 고장마다 오랜 이야기를 입에서 입으로 물려주면서 나누었어요. 아스라히 먼 옛날 옛적에 지구가 어떻게 태어나고 사람이 어떻게 생겼으며 들이며 숲이며 바다이며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는 대목을 한국에서도 한겨레 하느님 이야기로 엿볼 만합니다.



“아버님께선 제압하라고 하셨지 죽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장난해? 내 이마 안 보여? 날 죽이려 했다고!” “우린 이자에게 배울 것이 많아.” (43쪽)


“그렇게 많은 활은 없을 뿐더러 인간들은 아무런 힘이 없다고!” “활은 필요없어. 내가 수명장자를 쐈을 때처럼 쏘는 시늉만 하면 돼.” (99쪽)



  대별왕하고 소별왕 이야기를 보면, 이승 나라에서 임금이 되고픈 동생 소별왕은 형 대별왕을 여러모로 속입니다. 이를 다른 이들 누구나 뻔히 알지만 소별왕 속임수대로 소별왕은 이승 나라 임금이 되어요. 형 대별왕은 으레 동생한테 속아넘어가 줍니다 이럴 뿐 아니라 동생을 돕지요.


  더욱이 대별왕은 동생만 돕지 않습니다. 이승이라는 곳에 사는 여느 사람들을 함께 도와요. 마치 종처럼 큰 권력자한테 눌리거나 부려지는 사람들을 넌지시 일깨웁니다. 두 손에 엄청난 무기가 있어야 하지 않은 줄 깨닫게 해요.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해요. 대별왕 소별왕 둘이서 저승하고 이승을 나누어 맡는 임금 노릇을 할 무렵, 이승에는 해랑 달이 둘씩 있었대요. 사람들은 둘씩 있는 해랑 달 때문에 낮이고 밤이고 너무 살기 어려웠대요. 소별왕은 이를 어찌 풀어내지 못하지만 대별왕이 슬기로운 마음을 써서 이를 풀어내지요.


  대별왕은 혼자서 이 일을 풀어내지 않아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끌어내어 이 일을 풀어내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빈손으로 시늉만 할 뿐이지만, 사람들이 다 함께 해랑 달을 바라보면서 ‘빈손 활쏘기’를 하도록 시켜요. ‘마음으로 쏘는 활’로 ‘두 헤와 두 달’ 가운데 하나씩 떨어뜨리도록 하지요. 아주 커다란 활이나 아주 듬직한 활이 아닌 ‘마음으로 쏘는 활’입니다. 겉보기로는 그저 빈손일 뿐이지만, 이 빈손인 채로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이 되면 ‘빈손에 가없이 큰 힘을 내는 활’이 생겨난다고 알려주어요. 이리하여 대별왕은 하늘에 ‘한 해와 한 달’이 있도록 이끌어요.



“이로써 사람들은 자존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들의 힘으로 무엇이든 바꿀 수 있다는.” (105쪽)


“도와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느냐?” “이승도 속임수로 차지하고, 폐하와의 약속도 저버리고 수명장자를 죽이지 않았습니까.” “하하하, 그게 그렇게 궁금하더냐?” ‘가끔은 바보 같단 말입니다.’ “소별을 도운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도운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느냐.” (113쪽)



  대별왕이 사람들을 일깨운 대목을 보며 생각해 봅니다. 온갖 말썽거리를 일으킨 대통령하고 대통령을 둘러싼 권력자를 ‘맨손인 수수한 사람들’이 대통령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힘이 오늘날 우리한테 있습니다. 우리는 총칼을 손에 쥐면서 말썽쟁이 대통령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맨손으로 말썽쟁이 대통령을 끌어내립니다. 다만 맨손에 촛불을 하나씩 쥐었을 뿐이에요. 촛불을 굳이 손에 쥐지 않더라도 서로 한마음이 되어 외치기에, 다 같이 한마음이 되어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훌륭한 나라를 바라기에, 이 마음이 너울치면서 가없이 커다란 힘으로 거듭나요.


  민주도 평화도 평등도 이렇게 마음으로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뛰어난 사람이 하나 나타나서 대통령이 되어 주어야 하지 않습니다. 수수한 우리가 집과 마을에서 먼저 따사로운 마음으로 민주와 평화와 평등을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집과 마을에서 다 같이 따사롭게 민주와 평화와 평등을 이루어 내면, 이 힘이 하나하나 모여서 너울치는 아주 가없이 커다란 힘으로 거듭나리라 생각해요.



“근데요, 여기서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살았는데, 우리 땅이 아니에요?” “아니야.” “왜 아니에요?” “나라에서 정했으니까.” “그런 건 누가 정해요?” (170쪽)


“국경을 지키라고 보내 놨더니 오랑캐하고 붙어먹어? 그러고도 네놈이 녹봉을 받아먹는 무관이냐!” “말씀대로 국경을 지키러 왔지, 아이들을 죽이러 오지 않았소.” (210쪽)



  ‘차사전’ 이야기에서는 ‘국경수비’를 맡은 ‘하얀 삵’이 살다가 죽는 모습을 그립니다. 처음에는 차갑게 사람들을 죽이는 군인이던 하얀 삵은 어느 날 북방 국경수비대 일을 하다가 아이들을 만난다고 해요. 이 아이들이 하얀 삵한테 문득 물어요. 왜 이 아이들은 꽤 오랜 옛날부터 그곳에서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 아버지 모두 칼에 맞아 죽어야 하고, 저희들은 쉴 자리 없이 떠돌면서 목숨만 겨우 지키느냐고. 어른인 하얀 삯은 ‘나랏님이 국경을 그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고 대꾸할 뿐, 더 할 말이 없어요.


  이러면서 비로소 스스로 생각을 해 보아요. 왜 나랏님이 시키는 대로 ‘군인이 되어 오랑캐라고 하는 이웃나라 사람들을 마구 죽이는 짓을 해야 했을까’ 하고요. 국경이란 무엇인지, 나라를 넓힌다고 하는(국토 확장) 일이란 무엇인지, 군인으로서 나랏님이 시키는 대로 이웃나라 사람들을 그저 오랑캐로만 여기며 죽여도 되는가를 참말로 뒤늦게 생각해 보았다고 해요.


  아스라하기에 도무지 언제 지은 옛이야기인지 종잡을 수는 없습니다. 삼천 해도 오천 해도 아닌, 삼만 해도 오만 해도 아닌 옛이야기이지 싶어요. 삼십만 해나 삼배만 해가 되었을 수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오래된 옛이야기가 지구별 모든 겨레마다 있어요.


  지구가 태어나고, 사람이 태어나고, 들과 숲이 태어나고, 마을이 태어나고, 바람과 해와 별이 태어나고, 사람들이 서로 아끼며 보살피다가 그만 권력과 전쟁이 태어나는 숱한 살림살이가 옛이야기 한 자락으로 흘러요.


  이 옛이야기는, 또 만화라는 옷을 새로 입은 《신과 함께》에 깃든 ‘오늘이야기’에는 틀림없이 우리가 서로 배울 만한 슬기가 흐른다고 봅니다. 어제를 되새기며 오늘을 돌아볼 적에 모레를 새롭게 맞이할 슬기를 옛이야기에서 얻을 만하지 싶어요. 빈손으로 활을 당겨 해랑 달을 하나씩 떨어뜨리며 온 하늘을 별나라로 바꾸었다는 먼먼 옛사람 자취를 더듬으며 오늘 이곳에서 지을 새로운 이야기를 그립니다. 2017.3.1.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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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야샤 1
다카하시 루미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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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80



오백 해를 가로지르는 따순 마음

― 이누야샤 1 

 타카하시 루미코 글·그림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02.3.25. 4500원



  만화책 《이누야샤》는 500년이라는 나날을 우물을 사이에 두고 가로지르면서 만나는 두 사람 이야기를 다룹니다. 일본에서는 1996년부터 2008년까지 열두 해에 걸쳐 나온 작품이며, 만화영화로도 나왔어요. 한국에서는 한때 ‘견야차’라는 이름으로 해적판이 나왔으나, 2002년부터 정식계약을 맺은 번역판이 나왔습니다.



(1400년대 일본 전국시대) “이것을 내 몸과 함께 태워 다오. 두 번 다시 사악한 자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사혼의 구슬은 내가 저 세상으로 가지고 가겠다.” (9∼10쪽)



  첫 회가 나온 지 어느덧 스무 해 남짓입니다. 1996년 첫 연재에 나오는 배경은 1999년이라고 합니다. 1999년에 살던 열다섯 살 푸름이가 어느 날 ‘집으로 들어온 지네 요괴’한테 붙잡혔다가 풀려나면서 ‘집에 있는 오래된 우물’에 빠져요. 이러다가 1400년대 옛날로 넘어간대요. 이때에 열다섯 살 푸름이는 무엇을 느낄 만할까요? 두려움일까요? 무서움일까요? 새로움일까요? 또는 모험이나 용기나 어떤 다른 이름을 붙일 만한 마음일까요?


  ‘(만화 배경으로 본다면) 아니 2000년대를 눈앞에 둔 때’에 웬 지네 요괴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을 테지요. 더구나 ‘뜬금없다 싶은 지네 요괴’에 뒤이어 자그마치 오백 해를 거슬러 올라가서 짚으로 지붕을 잇고 자동차는커녕 자전거조차 없을 뿐 아니라, 온통 숲이요 들뿐인 시골마을에 떨어진다면? 이리하여 자칫 ‘내가 살던 1999년’으로 못 돌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 어떤 느낌이 될까요?



(1999년 일본 도쿄) “사혼의 구슬?” “음, 이것만 있으면 가정은 화목하고 사업은 번창하지.” “이걸 팔겠다교, 할아버지? 그냥 유리구슬인데?” (11쪽)



  만화책 《이누야샤》를 이루는 큰 줄거리는 ‘사혼 구슬’을 둘러싸고 흐릅니다. ‘사혼 구슬’을 거머쥐면 엄청난 힘을 끌어내어 쓸 수 있다고 여긴다고 해요. 요괴도 사람도 이 구슬을 손에 쥐려고 용을 쓴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는 1400년대 이야기예요. 1999년 언저리에 보기에 사혼 구슬은 그저 흔한 유리구슬 같다고 할 뿐입니다. 더군다나 이 사혼 구슬을 손녀딸 생일선물로 주려고 하는 할아버지는 “가정 화목 사업 번창”을 이야기하고요.



‘방금 그건 뭐였지? 꿈? ……이 아니야.’ (21쪽)


“지네 요괴 같은 조무래기를 상대로 뭘 쩔쩔매는 거야?” (38쪽)


“어쩔 거야, 여자! 여기서 나하고 같이 죽을래?” ‘이, 이런 알 수 없는 곳에서, 죽는 건 싫어! 되살아나라, 이누야샤!’ (53쪽)



  꿈이라 여길 수 없는 일을 삶에서 맞닥뜨리는 열다섯 살 푸름이는 생각을 곧장 추스릅니다. 뜬금없거나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면서 멍하니 있지 않습니다. 새로운 곳에 똑 떨어진 셈이지만, 이 새로운 곳에서 뾰족한 수를 찾아보려고 마음을 기울입니다. 다시 말해서 ‘생각을 하’고 ‘마음을 써’요. 주저앉지 않습니다. 머무르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달리고 자꾸자꾸 길을 걷습니다.



“저 말야. 나는 카고메야. 키쿄우가 아니라. 그러니까 사이좋게 지내지 않을래? 응?” “헹. 너, 바보냐? 네가 누구든 간에, 사혼의 구슬을 뺏기 위해선 인정사정 안 봐줘.” “그치만 네가 아무리 날뛰어도, ‘앉아’ 하고 말만 하면.” (77∼78쪽)


“먹이와 함께 찢어버릴 테다!”“뭐? 바보야! 어린애는 살려야지!” (106쪽)



  만화이기에 마치 꿈 같은 이야기를 지어서 그릴 수 있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만화가 아닌 우리 삶이나 사회를 보아도 마치 꿈 같은 이야기가 흐르기도 해요. 터무니없다 싶은 말썽거리로 온 나라가 들끓을 수 있어요. 엉터리라 할 만한 핑계를 대는 사람들을 둘레에서 볼 수 있어요. 그리고 더없이 아름답거나 착한 사람들을 마치 꿈처럼, 이른바 천사나 요정이라고 느낄 만한 사람들을 만나기도 해요.


  진작에 연재가 끝난 묵은 만화책을 새삼스레 들추면서 ‘꿈’하고 ‘삶’ 사이에 잇닿는 끈을 헤아려 봅니다. 무엇을 꿈이라 할 만하고, 무엇을 삶이라 할 만한지 곱씹어 봅니다. 오랜 만화책을 되읽는 까닭이라면, 오래도록 꾸준히 사랑받는 만화책에 흐르는 숨결을 되짚고 싶기 때문이에요. 오늘을 비추어 어제를 되새기고 모레를 새로 지어 보려는 마음이 되고 싶기도 합니다. 오늘은 아이로 살지만 모레에는 어른으로 살림을 지을 아이들한테 물려줄 슬기를 가다듬고 싶기도 합니다.


  사이좋게 지내려고 서로 이름을 밝히면서 마음을 여는 몸짓을 바라봅니다. 아무리 고빗사위나 벼랑에 몰려도 ‘해야 할 일’이나 ‘지킬 것’을 생각하는 마음을 살펴봅니다. 만화책 《이누야샤》에는 ‘반요(반만 요괴. 주인공 이누야샤)’하고 ‘사람(그저 오롯이 사람. 주인공 카고메)’이 나오고, 이 둘을 둘러싼 숱한 요괴랑 사람이 나옵니다. 마음이 시커먼 요괴나 반요나 사람이 있고, 마음이 맑은 요괴나 반요나 사람이 있습니다. 겉모습은 사람이지만 도무지 사람답지 않은 짓을 일삼는 누가 있어요. 겉모습은 요괴여도 참으로 사람다운 넋을 보이는 누가 있어요. 우리는 겉모습만으로 ‘요괴·사람’을 가릴 수 있을까요? 겉모습만으로도 틀을 가르거나 나눠도 될까요?



‘어쩐지 지금까지의 일이 꿈 같아. 그래도, 저쪽 세계, 괜찮을까?’ (161쪽)


‘이상하다. 유라의 목적이 사혼의 구슬이라면, 목적은 벌써 달성했을 텐데. 나와 이누야샤를 노리고 있나?’ “이누야샤, 돌아가자!” “웬일로 말귀를 알아먹게 됐어?” “사실은 가기 싫지만.” ‘이대로 현대에 있으면, 가족들까지 피해를 입게 돼.’ (178∼179쪽)



  모두 56권으로 마무리를 지은 《이누야샤》입니다. 56권에 이르는 긴 만화책을 찬찬히 읽어 보면 두 주인공 사이에 흐르는 마음은 겉모습을 넘어서며 이어지는구나 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면서 두 주인공을 둘러싼 이웃들한테 ‘겉모습이 아닌 마음’으로 다가설 적에 누구나 마음을 새롭게 열 뿐 아니라, 삶과 사랑도 새로우면서 아름답게 열 수 있다는 대목을 밝혀 주어요.


  한국말로는 ‘씻김’이고 한자말로는 ‘정화’인데, 사람인 카고메는 바로 이 ‘씻김(정화)’을 합니다. 아프거나 슬프거나 괴롭거나 힘들거나 다치거나 눈물조차 메마른 뭇목숨을 씻길 수 있는 기운이 바로 ‘사람인 카고메’한테 있다고 해요. 이 기운, 바로 모두를 따사로이 어루만지거나 달래거나 품거나 돌볼 줄 아는 기운인 사랑이란, 참말로 만화책 주인공한테만 흐르는 기운이 아닌 ‘사람인 우리 모두’한테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흐르는 기운이리라 생각합니다. 2017.2.26.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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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귀야행 25
이마 이치코 지음 / 시공사(만화)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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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80



두려움이나 살림을 짓는 사람은 바로 나

― 백귀야행 25

 이마 이치코 글·그림

 한나리 옮김

 시공사 펴냄, 2017.1.25. 5000원



  일본에서는 1995년부터 나왔고, 한국말로는 1999년부터 나온 만화책 《백귀야행》입니다. 25권은 일본에서 2016년에 나오고, 한국에서는 2017년에 나옵니다. 스무 해 넘게 이야기가 흐르지만 아직 이 만화책은 끝날 줄 모릅니다. 아마 끝날 수 없을 테지요. 우리를 둘러싼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는 잔뜩 있을 테니까요.



“밭의 신이라곤 하지만 마을사람들이 그렇게 믿었을 뿐, 실제로 무엇을 불러들였는지는 몰라.” (10쪽)


“신이나 요마란 건 사람의 마음이 만들어 내는 거야.” (11쪽)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귀신’이란 무엇일까요? 수많은 귀신은 우리를 괴롭히거나 놀리거나 들볶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우리 스스로 괴롭힘을 받거나 놀림을 받거나 들볶이려고 하는 마음일까요?


  이 대목에서 놀라거나 손사래칠 분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니, 내 끔찍한 하루를 바로 내가 스스로 끌어들였다고?’ 하고 말예요. ‘아니, 내 기쁨을 참말 내가 스스로 이루었다고’ 하고도 물을 만하고요.


  법정 구속이 된 재벌 우두머리는 이녁 스스로 돈이랑 힘을 거머쥐고 싶은 마음에 불타올랐으니 그 자리에 섭니다. 그러나 그이 스스로 깨끗한 짓이 아닌 케케묵은 짓을 한다는 마음이 있으니 갖가지 말썽거리가 바깥으로 드러날 뿐 아니라 법정 구속에 이릅니다. 그이가 스스로 다른 마음이 되었다면, 이를테면 굳이 돈이랑 힘을 거머쥐려는 길이 아닌 ‘어마어마한 돈이나 힘을 이웃하고 널리 나누면서 아름다운 보금자리를 가꾸자는 마음’이었다면 사뭇 다른 삶이 될 만하리라 느껴요.



“꼭 결혼해야 해요?” “당연하지! 엄마는 네가 행복해지기를 바라서 이러는 거야.” ‘내 행복이란 게…….’ (171쪽)


‘이 20년 동안의 불행에 모두 이유가 있었다고? 아버지가 쓰러진 것도 할머니가 살해당한 것도, 내가 행복해질 자격이 없는 게 아니라…….’ (187쪽)



  우리는 누구나 매한가지라고 느껴요. 스스로 즐겁고 싶으니 즐겁습니다. 스스로 골을 부리고 싶으니 골을 부립니다. 스스로 웃고 싶으니 웃으며, 스스로 노래하고 싶기에 노래해요. 목소리가 곱기에 노래하지 않아요. 잘난 사람만 노래하지 않아요. 돈이 있기에 살림이 넉넉하지 않아요. 돈이 없대서 살림이 안 넉넉하지 않아요. 만화책 《백귀야행》을 꾸준히 읽으면서 이러한 생각은 한결 짙게 듭니다. 두려움도 무서움도 언제나 내가 스스로 끌어들이고, 웃음도 노래도 내가 스스로 짓습니다. 삶을 짓는 사람은 바로 나요, 살림을 이루는 사람도 늘 나입니다. 2017.2.25.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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