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 형무소 - 옮기던 날의 기록 그리고 그 역사, 개정증보판
리영희·나영순 글, 김동현·민경원 사진 / 열화당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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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지개’사진을 ‘까망하양’사진으로 바꾸다
 [찾아 읽는 사진책 29] 김동현·민경원, 《서대문 형무소》(열화당,1988/2008)


 어느 한 사람을 사진으로 담든, 어느 집 하나를 사진으로 찍든, 어느 한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마다 다 다르게 사진을 내놓습니다. 어느 집 하나를 마주하는 사람마다 다 다른 느낌을 사진에 싣습니다.

 다만, 기계를 바꾼대서 사진 느낌이 확 바뀌지는 않습니다. 쓰는 기계가 달라지면 아주 조그마한 대목에서 느낌이 얼핏 바뀌기는 하지만, 같은 사람이 같은 사람을 바라보거나 같은 사람이 같은 집을 바라보며 사진으로 담는 느낌은 거의 똑같습니다.

 기계는 그대로이고 사람이 다르다면, 이때에는 언제나 다른 사진이 태어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마다 다 다른 어버이한테서 태어나 다 다른 삶을 꾸렸거든요. 다 다른 곳에서 다 다른 사랑을 받으며 다 다른 이야기를 길어올린 사람이기 때문에, 이 다 다른 사람들이 일굴 사진에는 다 다른 사진말이 깃듭니다.

 기계가 그대로요 바라보는 사람 또한 그대로라 할 때에는, 쓰는 필름에 따라 느낌이 달라집니다. 무지개필름을 쓸 때랑 까망하양필름을 쓸 때랑 사진이 달라집니다. 아니, 사진기를 쥔 사람이 사진기에 눈을 박아 들여다볼 때에는 똑같아요. 다만, 필름에 앉히는 모습이 달라지고, 나중에 종이에 사진을 얹을 때에 새삼스럽게 달라진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한 가지 더. 기계가 같고 바라보는 사람 또한 같으며 필름 또한 같다 할 때에는, 날씨와 날과 철에 따라 달라집니다. 봄철 찍는 사진하고 겨울철 찍는 사진이 같을 수 없습니다. 궂은 날과 갠 날 사진이 같을 수 없습니다. 아침과 새벽과 낮과 밤 사진이 같을 수 없어요.

 사진은 늘 사진이지만, 사진에 이야기를 싣는 사람입니다. 사진은 언제나 사진으로 이루면서, 사진에 삶을 담는 사람입니다.

 사진찍기를 할 때에 어떠한 기계를 썼느냐는 하나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사진읽기를 할 때에 사진쟁이가 어떠한 기계를 썼느냐를 하나도 몰라도 됩니다. 사진찍기를 할 때에 사진쟁이가 누구한테서 사진을 배웠느냐를 살필 까닭이 없습니다. 사진쟁이는 이제껏 살아낸 내 나날을 돌이키면서 내 사진을 찍을 뿐입니다. 사진읽기를 할 때에 사진쟁이가 무슨무슨 대학교를 나오거나 어디어디 배움길을 다녀왔다 하는 가방끈을 알아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진읽기를 할 사람들은 사진 한 장에 깃든 이야기가 내 마음밭에 어느 만큼 아로새겨지는가를 느낄 뿐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기계를 따질 일이 없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내 사진에 담기는 사람이나 집이 어떠한가를 돌아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무지개필름을 쓰겠느냐 까망하양필름을 쓰겠느냐를 가눕니다. 요사이는 디지털파일로도 무지개파일을 쓰겠느냐 까망하양파일을 쓰겠느냐를 가눕니다.

 내 사진으로 담으려는 사람이나 집을 ‘아침에 만나’려는지 ‘낮에 만나’려는지 ‘새벽에 만나’려는지 ‘한낮에 만나’려는지 ‘저녁에 만나’려는지 ‘밤에 만나’려는지를 따져야 합니다.

 내 사진으로 옮기려는 사람이나 집을 ‘맑은 날에 사귀’려는지 ‘궂은 날에 사귀’려는지 ‘비오는 날에 사귀’는지 ‘눈오는 날에 사귀’려는지 ‘구름 낀 날에 사귀’려는지 ‘안개 낀 날에 사귀’려는지 ‘비바람 몰아치는 날에 사귀’려는지 살펴야 합니다.

 내 사진으로 빚으려는 사람이나 집을 ‘따순 봄날에 어우러’지려는지 ‘꽃샘추위 닥친 봄철에 어우러’지려는지 ‘갓 접어든 여름날에 어우러’지려는지 ‘한창 무더운 여름날에 어우러’지려는지 ‘벼락과 우레가 떨어지는 여름날에 어우러’지려는지 ‘산들바람 가을철에 어우러’지려는지 ‘열매가 무르익는 가을날에 어우러’지려는지 ‘겨울비 내리는 겨울날에 어우러’지려는지 ‘큰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철에 어우러’지려는지 ‘꽁꽁 얼어붙은 겨울철에 어우러’지려는지 ‘따스한 바람이 부는 겨울날에 어우러’지려는지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사진책 《서대문 형무소》(열화당,1988/2008)를 읽습니다. 스무 해를 사이에 두고 첫판과 고침판으로 나누어진 두 가지 사진책을 읽습니다.

 사진책 《서대문 형무소》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1988년 사진책이고 다른 하나는 2008년 사진책입니다. 두 사진책은 서로 다른 책입니다.

 왜냐하면, 판짜임과 엮음새가 다를 뿐 아니라, ‘사진마저 다릅’니다.

 처음에는 “한정된 시간 내에 굴절 많은 우리 역사의 현장을 제대로 기록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라도 전할 수 있게 된 것을 우리의 행운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1988/사진 찍은 이).”고 밝혔습니다. 그러면, 스무 해 뒤에는 ‘한정된 시간’이 아니었겠지요. 스무 해에 걸쳐 꾸준히 더 찍고 더 만나며 더 어우러졌으면, 2008년에 새로 내는 1988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못 다 이룬 숱한 이야기를 알알이 아로새길 아름다운 사진책이 될 수 있겠지요.

 나중에는 “판형을 확대하고 기록적 가치가 뛰어난 사진과 도면 자료 등을 추가했으며, 독립지사 세 분의 글을 덧붙여 서대문형무소에 관해 다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2008/편집자).”고 하지만, 2008년 사진책은 그리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2008년 사진책은 판이 조금 커지고 사진 짜임이 조금 달라지며 쪽수가 조금 늘었습니다. 그렇지만, 1988년 사진책하고 무엇이 다른가를 느낄 수 없습니다. 이럴 바라면 1988년 사진책을 똑같이 다시 낼 때하고 무엇이 나아질까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1988년 사진책과 2008년 사진책은 큰 대목에서 서로 엇갈립니다. 1988년 사진책에는 ‘무지개사진’이 제법 실립니다. 2008년 사진책에는 오직 ‘까망하양사진’이 실립니다. 1988년 사진책에는 ‘무지개사진’이었는데 2008년 사진책에서는 몽땅 ‘까망하양사진’으로 바뀝니다.

 나는 묻고 싶습니다. 온누리 사진쟁이 가운데 ‘무지개사진’으로 찍는 이야기하고 ‘까망하양사진’으로 찍는 이야기가 똑같다고 느낄 사람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까망하양사진이 나쁘고 무지개사진이 좋을 수 없습니다. 까망하양사진이 ‘기록 값어치가 빼어나며 다큐멘터리 빝깔이 더 짙을’ 수 없습니다. 두 갈래 사진은 두 갈래대로 이야기가 다르고 삶이 다르며 생각이 다릅니다. 그저 빛느낌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1988년 사진책부터 ‘사진쟁이는 무지개사진으로 담았’으나 ‘출판사 편집자가 까망하양사진으로 바꾸’었는지 모릅니다. 1988년 사진책과 2008년 사진책에서는 이 대목을 한 마디로도 다루거나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대목은 반드시 밝혀야 하고 꼭 다루어야 해요.

 앙리까르띠에 브레송 님이 당신 사진을 ‘까망하양사진’이 아닌 ‘무지개사진’으로 찍었다고 할 때에, 이이 사진을 똑같이 바라볼 수 있을까요. 김기찬 님이 담은 《골목 안 풍경》은 까망하양사진일 때하고 무지개사진일 때에 아주 크게 달라집니다. 사진으로 담긴 모습뿐 아니라 사진으로 찍는 느낌까지 아주 크게 달라집니다.

 무지개사진과 까망하양사진이 어떻게 다른 줄 모른다면, 새벽에 안개가 드리울 때에 소나무를 찍는 사진하고 한낮에 안개가 모두 걷혀 파란 빛깔 하늘이 눈부실 때에 소나무를 찍는 사진이 어떻게 다른 줄 모르는 삶하고 매한가지입니다. 사진책 《서대문 형무소》는 이 나라 사진밭이 어떠한 깊이요 너비인가를 낱낱이 보여줍니다. (4344.8.22.달.ㅎㄲㅅㄱ)

 

― 서대문 형무소 (김동현·민경원 사진,리영희·나명순 글,열화당 펴냄,1988.1.15·2008.1.1./16000원)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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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당과 예술사진 시대 - 한국 근대 예술사진 아카이브 (1910~1945)
이경민.사진아카이브연구소 엮음 / 아카이브북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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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네 사진은 예술이었을까
 [찾아 읽는 사진책 27] 이경민, 《카메라당과 예술사진 시대》(아카이브북스,2010)


 나한테 사진기가 없던 때이든 나한테 사진기가 있는 때이든, 사진찍기를 예술이라 여긴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쓰던 자동사진기를 빌려 수학여행 때에 사진을 찍었든, 후배한테서 빌린 수동사진기로 처음 작품사진을 찍었다 하든, 어떠한 사진이라 하더라도 예술이라 느낀 적이 없습니다.

 사진을 바라볼 때에 그저 사진이라 느끼지 예술이나 문화나 다른 무엇으로 느끼지 않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에 그저 사진이라 여기지 예술이든 문화이든 다른 무엇이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진예술을 말하거나 사진문화를 다루는 일은 이 나름대로 뜻과 값과 보람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방송에서 떠들썩하게 나오는 대중노래를 놓고 노래예술을 말하거나 노래문화를 다루는 일 또한 이 나름대로 뜻과 값과 보람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영화를 놓고 영화예술이라든지 영화문화를 밝힌다 할 때에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무슨무슨 예술이나 문화를 들려주거나 살피는 일은 언제나 이 나름대로 뜻이나 값이나 보람이 있어요.

 다만, 하루하루 아름다이 살아가면서 따로 예술이나 문화를 잘라서 밝히거나 따지거나 살펴야 할까 궁금합니다. 송두리째 껴안을 수 있고 남김없이 살아낼 수 있습니다. 사진은 사진이기에 사진 그대로 껴안으면 즐겁습니다. 사진은 사진인 만큼 사진다이 살아내면 아름답습니다.

 이경민 님이 엮은 사진책 《카메라당과 예술사진 시대》(아카이브북스,2010)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이 사진책은 사진 발자취를 학문으로 파고듭니다. 학문으로 이렇게 파고드는 사진책은 이 나름대로 뜻과 값과 보람이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 사진이 맨 처음 어떻게 받아들여졌고 퍼졌으며 뿌리내렸는가를 들여다보면서 오늘 내 모습을 돌아볼 수 있어요. 지난날과 오늘날과 앞날을 견주면서 우리 사진삶이 어떻게 영글면 좋을까를 곱씹는 밑거름이 됩니다.

 “결국 살롱사진은 사진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예술사진의 제도화 과정에서 오인된, 그리고 공모전 명칭에서 비롯된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살롱사진이라는 명칭으로부터 비롯된 예술사진에 대한 단선적인 이해를 넘어 다양한 예술사진의 생산 맥락을 밝히는 작업이 요구된다(11쪽).” 같은 말마디를 읽으면서 한국 사진밭에서 흔히 쓰는 낱말이 얼마나 알맞을까 곱씹고, 얼마나 사진다울까 헤아립니다. 이윽고, “살롱사진은 앞서 언급했듯이 해방 공간의 좌우 대립 속에서,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에 사진계의 패권을 잡기 위해 호명된 용어라는 점에서 일제강점기 예술사진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에는 부적절한 표현이며(12쪽).” 같은 말마디를 되뇌면서 한국땅에서 한국사람으로 한국사진을 하는 길이란 어떻게 나아가는 길인가 톺아봅니다.

 참말로 어떻게 걷는 내 사진길이 가장 나답다 할 사진이면서 가장 한국사진답다 할 한국사진이 될까요. 나는 내 삶을 어떻게 일구거나 가꿀 때에 내 사진밭을 알뜰히 여미면서 알차게 북돋울까요.

 2011년에 되돌아볼 때에 일흔두 해를 먹은 글월, “사진은 있는 그대로 백여 내인다고 하지만 촬영하는 그 자신의 눈을 통하여 마음에 비치우는 것을 백는 것인 만큼 사진 작품에는 작자의 마음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새로운 의도가 없어서는 더 발전할 수 없는 줄 압니다(200쪽/박필호 1938.6.30.).”를 되읽습니다. 사진에는 사진을 찍은 사람 마음이 담깁니다. 글에는 글을 쓴 사람 마음이 담깁니다. 노래에는 노래를 부른 사람 마음이 담깁니다.

 가장 좋은 사진이나 글이나 노래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가장 흐뭇하게 받아들일 사진이나 글이나 노래란 없습니다.

 누구한테는 이 사진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누구한테는 이 글이 가장 마음에 찹니다. 누구한테는 이 노래가 가장 마음에 와닿습니다.

 더 하지 않되 덜 하지 않습니다. 더 낫지 않되 덜 떨어지지 않습니다. 더 좋지 않되 더 나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삶을 찾아 일굴 노릇입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어깨동무하며 살아갈 노릇입니다. 나는 내가 믿는 고운 보금자리를 돌보며 두 다리 느긋하게 뻗을 노릇입니다. 나는 내가 아끼는 사진기를 마련해서 내 가슴으로 스며드는 모습을 내 이야기를 담아 사진으로 찍을 노릇입니다.

 굳이 갈라야 하지 않으며, 애써 갈라야 하지 않습니다. 사진은 늘 사진이었고, 사진을 예술로 바라보고 싶으면 언제나 예술이 됩니다. 사진은 한결같이 사진이었으며, 사진을 문화로 바라보고 싶다면 노상 문화가 됩니다.

 사진은 사진이기에 예술이나 문화가 됩니다. 사진은 사진이면서 삶이나 꿈이 됩니다. 사진은 사진이라는 알몸뚱이로 사랑과 믿음을 나누는 손길이 됩니다.

 어쩌면 이 나라에는 사진이 없이 예술과 문화만 판치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이 나라에는 예술과 문화는 없이 사진만 예쁘게 감도는지 모릅니다. (4344.8.16.불.ㅎㄲㅅㄱ)


― 카메라당과 예술사진 시대 (이경민 글,아카이브북스 펴냄,2010.9.15./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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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Frank: Peru (Hardcover)
Frank, Robert / Steidl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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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는 이야기를 살아숨쉬도록 하기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34]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 《PERU》(STEIDL,2008)


 페루에는 페루사람이 살아갑니다. 페루사람은 페루사람답게 살아갑니다.

 한국에는 한국사람이 살아갑니다. 한국사람은 한국사람답게 살아갑니다.

 페루사람보다 한국사람이 낫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한국사람보다 페루사람이 나은지 잘 모르겠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 널따란 아파트에서 자주 씻을 수 있으면 더 낫다 싶은 삶이 될까 궁금합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지면서 두 다리로 오래도록 힘겹게 걸어야 하지 않다면, 까맣고 커다란 자가용 짐칸에 짐을 싣고 다닐 수 있으면, 아니 까맣고 커다란 자가용조차 심부름을 해 주는 누군가 몰아 준다면, 이때에 한결 낫다 싶은 삶이 될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책 《PERU》(STEIDL,2008)를 읽습니다.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 님이 1948년에 빚은 사진책입니다. 사진책은 참 얇습니다. 페루땅에서 살아가는 페루사람 사진을 고작 서른아홉 장 담습니다.

 서른아홉 장이라 한다면 필름 한 통보다 석 장 많습니다. 설마 필름 두 통만 찍었겠느냐만, 또 1948년이면 요즈음 같은 필름이 아닌 다른 필름이라 할는지 모를 노릇이지만, 웬만한 여느 사진책을 돌아본다면, 서른아홉 장 사진으로 빚은 《페루》는 참 얄팍한 녀석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진책을 가만히 되넘깁니다. 사진 서른아홉 장이면 참말 적은 숫자인가 되뇝니다. 서른아홉 장이 아닌 삼백여든 장을 담아야 비로소 잘 엮은 사진책이라 할 만할는지 곱씹습니다. 서른아홉 장조차 아닌 서너 장으로 페루사람들 삶을 보여주려 했다면 바보짓이라 할 만한가 되뇝니다.

 사진을 보고, 다시 생각하며, 사진을 보다가, 또 생각합니다. 사진잔치를 하는 이들은 으레 ‘사진 한 장만 알림쪽지에 넣’곤 합니다. 사진책을 내놓을 때에 ‘사진책 앞쪽에 사진 한 장만 넣’기 일쑤입니다. 알림쪽지로든 사진책으로든, ‘사진 한 장’으로 사람들한테 느낌과 이야기를 건네지 못한다면, 사진잔치에 내건 다른 사진들이든 사진책에 담긴 다른 사진들이든 부질없다 할 만합니다. 사진 한 장으로 보여주지 못한다면 사진 백 장이나 천 장으로 보여줄 수 없습니다. 사진 백 장이나 사진 천 장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사진 한 장으로 보여줄 수 있습니다.

 다시금 사진책을 들춥니다. 사진책 《페루》에 실린 어느 사진이건 책겉에 넣을 만합니다. 애써 어느 사진 하나를 가려서 겉에 넣을 만하지 않습니다. 페루땅 페루사람 이야기라면 이 사진이든 저 사진이든 잘 어울리는구나, 잘 드러나는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잘 모르겠습니다. 누군가 한국땅에서 한국사람을 사진으로 찍는다 할 때에는 어느 사진 하나로 ‘한국땅 한국사람’을 보여준다고 내놓을 만할까요.

 한국이라는 나라는 어떠한 땅인가부터 갈피를 못 잡겠습니다. 한국에서 살아간다는 한국사람 또한 어떠한 몸과 마음으로 어떠한 꿈을 키우면서 어떠한 살림을 일구는 겨레인지 가늠하지 못하겠습니다. 4대강사업을 한다며 연장이나 기계를 다루느라 땀흘리는 사람들 모습이랑 자동차나 배를 만드는 공장에서 연장이나 기계를 다루느라 땀흘리는 사람들 모습이랑 얼마나 다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와 나라밖 노동자가 얼크러진 모습에서 무엇을 한국땅 한국사람 모습이라고 그려야 할까 잘 모르겠습니다. 한겨레 어머니와 조선족 어머니와 필리핀 어머니 사이에서 어떤 한국사람 얼굴을 찾아야 할까 잘 모르겠습니다. 까만 양복을 입고 까만 자가용을 모는 사람이랑 까맣게 탄 얼굴과 까맣게 얼룩진 손으로 흙을 일구는 사람 사이에서 어떤 한겨레 빛깔을 느껴야 할까 잘 모르겠습니다.

 피리를 불고, 양을 몰며, 먼지바람이 이는 흙길 뒤로 높디높은 멧자락이 드넓게 펼쳐진 페루땅 한켠 페루사람들 눈빛과 낯빛을 들여다봅니다. 햇살을 듬뿍 받고, 바람을 가득 마시며, 흙하고 한동아리로 뒹구는 페루사람들 몸뚱아리를 바라봅니다.

 사진에 앞서 사람이란 무엇일까 알아야겠습니다. 사진에 앞서 삶이란 무엇일까 찾아야겠습니다. 사진에 앞서 사랑이란 무엇일까 느껴야겠습니다.

 한국 사진쟁이 가운데 ‘한국사람’을 사진으로 담는다든지, ‘고향사람’을 사진으로 담는 이가 얼마나 될까 알쏭달쏭합니다. 한국사람과 고향사람을 지나 ‘지구별 이웃’이랑 ‘지구별 목숨’을 곰곰이 살피면서 사진으로 싣는 이가 몇이나 될까 아리송합니다.

 왜 사진을 찍는가요. 왜 사진에 담는가요. 사진기를 쥐고 무엇을 바라보는가요. 사진기를 든 채 어디에 서나요.

 사진을 찍어 무엇을 이루려 하는가요. 사진에 담아 무엇을 보여주려 하나요.

 사진기를 든 나하고 사진기를 바라보는 너 사이에는 어떠한 징검돌이나 걸림돌이 있는가요.

 살아가는 사람들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살아숨쉬도록 하는 몫을 맡은 사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니, 글이든 그림이든 노래이든 춤이든 만화이든 영화이든 연극이든 한결같이, 살아가는 사람들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살아숨쉬도록 할 때에 빛이 나면서 맛이 납니다. 살아숨쉬도록 하는 기운을 불어넣는 손길로 빚는 사진이요, 살아숨쉬도록 하는 기운을 샘솟게 돕는 눈길로 일구는 사진입니다. (4344.8.1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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未來ちゃん (單行本)
川島小鳥 지음 / ナナロク社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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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한테 물려주는 선물일까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33] 카와시마 코토리(川島小鳥), 《未來ちゃん》(ナナロク社,2011)



 어버이가 아이를 찍은 사진을 아이도 함께 즐깁니다. 아이도 사진을 얼마든지 잘 들여다볼 줄 알며, 아이는 아이대로 잘 찍힌 사진을 헤아리며, 더 좋아하는 사진이 따로 있습니다.

 사진찍기를 늘 하면서 살아가는 아버지와 살아가는 우리 집 네 살배기 아이는 첫 돌이 아직 안 될 무렵부터 사진을 보았습니다. 첫 돌이 아직 안 되었을 때부터 사진기를 만지작거렸고, 디지털사진기 단추를 요모조모 누르며 사진 보기를 즐겼습니다. 이제 네 살이 되면서 사진과 그림과 만화를 찬찬히 가릴 뿐 아니라, 사진에 어떤 이야기가 깃들었는가를 환하게 읽습니다.

 아이는 사진을 이론으로나 실천으로나 배우지 않습니다. 딱히 배운 적이 없으며, 굳이 가르칠 까닭이 없습니다. 아이한테 한글을 가르치지 않았고, 아이한테 책읽기나 영어나 한자를 가르친 적 또한 없습니다. 아이는 아이 나름대로 하루하루 반가이 맞이하며 즐거이 뛰놀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사진찍기를 늘 하는 아버지는 아이가 태어난 날부터 아이 모습을 수없이 찍습니다. 아버지는 아이를 날마다 사진으로 담습니다. 어느 날은 백 장 가까이 담고, 어느 날은 아이가 하도 미운 짓을 일삼는다고 여겨 고작 서너 장만 담습니다. 둘째가 태어난 다음부터는 집일이 멧더미처럼 쌓이는데다가 몸이 지치는 바람에 사진을 제대로 못 찍습니다. 그래도 어찌저찌 날마다 사진 몇 장씩 꼬박꼬박 찍습니다.

 하루를 보내고 이틀을 보내다가는 한 주가 흐르며 한 달이 갑니다. 이렇게 흐르거나 가는 날과 달이 모여 해를 이루겠지요. 때때로 몇 달 앞서 사진이나 한두 해 앞서 사진을 들춥니다. 날마다 아이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면서도 몇 달 앞서 모습을 들여다보며 깜짝 놀랍니다. 날마다 아이가 달라지는 모습을 새삼스레 느끼지만, 한꺼번에 여러 달이나 여러 해를 훑으니 이 아이가 이렇게 날마다 클 뿐 아니라 다른 얼굴 다른 모습 다른 이야기로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아이를 사진으로 찍는 어버이는, 나중에 아이가 자라서 제 어린 나날 모습을 기쁘게 돌아보거나 돌이키도록 돕는다기보다, 아이가 자라면서 아이가 어린 나날 어떤 모습이었고 어떤 이야기를 함께 나누며 살았는가를 ‘잊거나 놓칠 어버이’를 꾸준히 일깨우면서 ‘아이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즐거움과 고단함’을 찬찬히 느끼도록 돕는지 모릅니다. 그렇겠지요. 아무렴.

 카와시마 코토리(川島小鳥) 님이 일군 사진책 《未來ちゃん》(ナナロク社,2011)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일본 사진쟁이 카와시마 코토리 님은 당신 딸아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사진으로 담았고, 이 사진을 그러모아 사진책 하나로 내놓습니다. 카와시마 코토리 님이 사내인지 가시내인지, 또 도시내기인지 시골내기인지 모릅니다. 그저 이 사진책을 들여다보는 동안, 퍽 외지다 싶은 시골마을에서 살아가는 딸아이가 참 재미나게 놀면서 꽤 예쁘고 씩씩하게 크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일본땅에서 태어나 일본사람으로 살아가는 넋을 고이 느낍니다.

 생각해 보면, 카와시마 코토리 님 사진책 《未來ちゃん》은 당신 딸아이를 기리면서 내놓았을 뿐 아니라, 당신 딸아이한테 바치는 선물이랄 수 있겠지요. 그리고, 이 사진책 《未來ちゃん》은 누구보다 딸아이를 낳아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로서 느낀 보람과 기쁨과 고됨과 눈물을 알알이 담아 당신한테 스스로 바치는 선물이랄 수 있어요.

 아이한테 물려주는 선물인 사진이기 앞서, 어버이 스스로한테 바치는 선물인 사진입니다. 아이가 먼 뒷날 즐겁게 돌아볼 선물인 사진이기 앞서, 어버이 스스로 먼 뒷날 기쁘게 곱씹을 선물인 사진입니다.

 아이 사진에는 아이가 나날이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만 담기지 않습니다. 아이가 나날이 무럭무럭 자랄 수 있도록 곁에서 아끼고 사랑하며 믿는 고운 어버이 모습이 살포시 담기고 나란히 스밉니다.

 다만, 어버이 되는 사람은 사진기를 들었으니 사진에는 안 나와요. 사진에는 오직 아이만 나옵니다. 내가 찍는 내 아이 사진도 똑같습니다. 내가 찍는 내 아이 사진에도 내 모습은 한 번도 비치지 않습니다. 오로지 내 아이만 나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 사진에는 어김없이 ‘아이하고 살아가는 어버이 눈물과 웃음’이 곳곳에 깃듭니다. 살며시 스밉니다. 아리따이 뱁니다.

 아이가 웃을 때에 어버이도 웃습니다. 아이가 울 때에 어버이도 웁니다. 아이가 넘어질 때에 어버이도 넘어집니다. 아이가 콩콩 뛰며 달리기를 할 때에 어버이도 콩콩 뛰며 달리기를 합니다.

 내 어버이는 나한테 고운 목숨을 선물했고, 나는 내 아이한테 고운 목숨을 선물합니다. 내가 먹는 밥은 숱한 알곡이 몸을 바친 목숨이요, 숱한 알곡은 흙과 물과 바람과 햇살을 머금으며 자랍니다. 돌고 도는 삶이면서, 돌고 도는 사랑이요, 돌고 도는 아름다운 꿈과 이야기입니다. (4344.8.11.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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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1-08-11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분이 알려주기를,
사진쟁이 딸이 아니라
친구 딸이라고 하네요 @.@

친구 딸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사진으로 담았다고 한다면
글이 아주 달라야 하는데...

에구구.... ㅠ.ㅜ
이분 다른 사진책도 곧 한 권 사서 읽고 나서
느낌글을 쓸 생각이라,
글에서 고치기가 엄두가 안 나네요....
 
레아의 감성사진, 두 번째 이야기 - 따뜻한 나날의 조각들
레아 글.사진 / 한빛미디어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사진은 언제나 마음찍기
 [찾아 읽는 사진책 42] 레아, 《레아의 감성사진 두 번째 이야기》(한빛미디어,2010)



 사진책 《레아의 감성사진 두 번째 이야기》(한빛미디어,2010)는 첫 번째 이야기 다음에 나온 책입니다. ‘감성(感性)사진’이라는 말마디를 쓰는데, ‘감성’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자극이나 자극의 변화를 느끼는 성질”을 뜻한다고 적힙니다. ‘자극(刺戟)’이란 “외부에서 작용을 주어 감각이나 마음에 반응이 일어나게 함”을 일컫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감성사진’이란 “마음이 움직이도록 건드리는 사진”이거나 “사람들 스스로 느끼도록 이끄는 사진”이라는 뜻입니다.

 《레아의 감성사진 두 번째 이야기》를 내놓은 레아 님은 “책 한 권 읽지 않고 사진을 시작했어요. 누군가의 책을 읽으면 누군가의 사진을 따라하게 될까 봐. 내 사진 속에 내 마음이 담기지 않게 될까 봐(23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글을 쓰든 사진을 찍든 그림을 그리든, 다른 이가 걸어간 길을 따르는 일은 그리 마땅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다 다른 사람인데 굳이 다른 사람 길을 따라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레아 님이 이렇게 이야기하려 한다면, 레아 님이 내놓은 《레아의 감성사진 두 번째 이야기》 또한 사진을 찍거나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이 읽을 까닭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레아 님이 빚어서 나누려 하는 ‘감성사진’은 ‘레아 님 스스로 당신 길을 고이 걸어가려 하는 사진’인 만큼, ‘레아 님 사진책을 읽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레아 님이 걸어간 길을 따르거나 젖어들거나 길들 수밖에 없’으니까요.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기를 씁니다. 사진기는 ‘다른 누군가’가 만듭니다. ‘내가 만든 내 사진기’로 ‘나만이 선보이는 사진’을 찍는 사람은 거의 없거나 아예 없습니다. 나 스스로 나만이 보는 빛느낌을 담는 내 사진을 찍는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잘못입니다. 나 스스로 나만이 보는 빛느낌이란 없습니다. ‘나만 본다고 생각하는 빛느낌’이 있을 뿐입니다.

 다른 사람이 만든 사진기를 쓰지 않고, 내가 손수 만든 사진기를 쓰더라도 ‘사진기라는 틀을 만든 사람’이 일군 빛느낌 담는 그릇이라는 테두리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이고, 우리는 누구나 목숨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이고, 우리는 누구나 믿음입니다.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만화를 그리든 노래를 부르든 춤을 추든 모두 똑같습니다. 어느 갈래에서든 ‘나만 남달리 하는 길’이란 없습니다. ‘내가 내 삶을 즐겁게 살찌우면서 하는 길’만 있습니다.

 레아 님이 맨 처음에는 다른 사진책을 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제는 다른 사진책을 찬찬히 살펴야 할 뿐 아니라, 다른 사진책을 잔뜩 들여다보더라도 ‘레아 님 나름대로 걷는 길이 흔들리지 않을 뿐더러, 더 단단해지거나 더 야물어지거나 더 빛나야 옳’고 아름다우며 사랑스럽습니다. 느낄 대목은 느끼고, 배울 대목은 배우며, 나눌 대목은 나누면 됩니다.

 나한테 더 있으니 기쁘게 나눕니다. 나한테 모자라니 즐거이 받아들입니다. 나한테 힘이 있으니 예쁘게 씁니다. 나한테 힘이 없으니 반가이 맞아들입니다.

 다른 사람 사진책을 읽지 않는다는 소리란,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는 소리하고 똑같습니다.

 책이 대수로울 수 없습니다. 책은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는 말마디를 담은 종이그릇입니다. 언제라도 다시 되새길 만한 말마디를 엮은 슬기그릇입니다. 따라하거나 배우거나 좇으라고 하는 책이란 없습니다. 저마다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달리 아름다이 살아내면서 깨우치거나 느낀 좋은 슬기와 넋과 빛느낌을 스스럼없이 나누면서 서로서로 다 다른 사진길을 사랑스레 북돋우자고 해서 태어나는 사진책입니다.

 “내가 사진을 찍는 이유는 사진에 마음을 담아내기 위해서입니다 … 설명서 같은 글이 싫어진 나는 갇혀 있던 감정을 사진과 함게 풀어내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30, 229쪽).”라는 이야기를 가만히 되새깁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까닭은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밥을 먹으려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잠을 자려고 살아가는 사람도 없습니다. 살아가면서 밥을 먹고, 살아가기에 잠을 잡니다. 살아가는 동안 사랑을 나눕니다. 살아가는 내내 웃고 울며 떠듭니다. 누구나 살아숨쉬는 나날 언제나 ‘마음을 보여주고 마음을 읽으며 마음을 어깨동무합’니다. 어쩌면, 레아 님으로서는 “갇혔던 마음을 사진과 함께 풀어낸”다기보다, 이제껏 스스로 제대로 몰랐던 마음을 시나브로 찾아나서는 사진찍기와 사진에 글 붙이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사진이든 마음이 담기고, 어떠한 글이든 마음이 실리거든요.

 딱딱하다는 신문글이든 논문글이든 평론글이든, 이러한 글 어디에라도 마음이 안 담길 수 없습니다. 적어도 ‘딱딱하게 굳은 마음’이라도 담깁니다. 학문에만 파묻혀 둘레 사람들 따순 손길이나 눈길을 읽지 못하는 딱닥하게 굳은 마음이라도 담겨요.

 착한 마음만 마음일 수 없습니다. 맑은 마음만 마음이지 않습니다. 생채기를 입은 마음도 마음입니다. 다친 마음도 마음일 뿐 아니라, 아픈 마음과 슬픈 마음과 메마른 마음과 기운 꺾인 마음도 모조리 마음이에요. 굳은 마음이든 모진 마음이든 미운 마음이든 한결같이 마음입니다. 그저, 이 숱한 마음을 바라보면서, 어느 마음이 더 좋거나 더 나쁘다고 함부로 자르거나 잴 수 없어요.

 “우리가 걷는 길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은 훌륭한 피사체가 될 수 있습니다 … 책과 인터넷에서 소개하고 있는 유명한 관광지를 따라 타인이 걸었던 발자국을 쫓으며 허덕이는 대신 골목과 사람과 빛에 마음을 열어 보세요(167, 201쪽).”와 같은 이야기처럼, 레아 님은 레아 님만이 바라보는 눈길대로 삶을 일구고 사진을 사랑하려 합니다. 앞서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만, 사진책을 읽건 안 읽건 대단하지 않으면서, 사진책을 읽는대서 이 사진책을 내놓은 사람 틀에 갇힐 까닭이 없듯이, 이름난 관광지를 간대서 내 마음이 따분해지거나 칙칙해지지 않습니다. 사람 발길이 뜸한 데를 찾아간다 해서 내 마음이 촉촉해지거나 해맑아지지 않아요. 언제 어디에 어떻게 누구와 있더라도 내 마음은 늘 내 마음 그대로입니다. 시골자락에서 포근한 마음이 될 때에는 몸 또한 포근한 몸일 텐데, 복닥거리는 도시 한복판에서 포근하지 못한 몸이 되더라도, 마음은 포근하게 살릴 수 있어요. 몸이 힘들면 마음 또한 힘들지만, 몸이 힘들기에 마음은 한결 씩씩하게 가다듬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살아숨쉬는 고운 목숨이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살뜰히 살아숨쉬는 고운 목숨이면서 사진기를 손에 쥔 멋진 사진동무입니다.

 이리하여, 레아 님은 어쩔 수 없이 “이럴 때 나는 자신 있게 이야기합니다. ‘새로운 카메라가 필요해진 거야.’(277쪽)”처럼 이야기하고야 맙니다. 《레아의 감성사진 두 번째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사진마다 아래쪽에 어떤 사진기로 찍었는지 하나하나 밝히는데, 굳이 이렇게 밝힐 까닭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밝히는 뜻은 레아 님 나름대로 좋은 느낌과 넋과 매무새였다고 생각합니다만, 레아 님 사진책을 읽을 여느 사람한테는 ‘아하, 이런 사진을 찍으려면 이런 사진기를 써야 하는가 보구나.’ 하고 여기도록 이끕니다. 사진을 ‘마음’이 아닌 ‘사진기’로 찍도록 내몹니다.

 레아 님 스스로 ‘마음을 찍는 사진’이요 ‘마음을 나누는 사진’이라고 여긴다면, 사진마다 밝히는 ‘어떤 장비를 썼느냐’ 하는 대목을 잘라야 합니다. 아무 사진기를 쓰면 어떻고, 어떤 사진기를 썼다고 밝히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사진은 사진 그대로 바라보면서 즐겨야지요.

 레아 님이 어느 대학교를 다녔는지 알아야 레아 님 사진을 더 잘 헤아리거나 더욱 살가이 느낄 수 있지 않습니다. 레아 님이 어느 마을에서 태어나 어느 동네에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를 알아야 레아 님 사진을 살갗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장비병’이 잘못이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사진은 사진장비로 일구지만, 내가 텃밭을 일구며 호미를 쓴다 해서 호미한테 휘둘리는 일이란 없습니다. 내 손에 쥔 호미일 뿐입니다. 할배가 쓰던 호미를 쓴들 내가 저잣거리에서 사온 호미를 쓴들, 풀을 뽑을 때에는 똑같습니다. 내가 쓰든 호미를 내 딸아이가 물려받아서 쓴들, 딸아이가 나중에 커서 스스로 호미를 장만해서 쓴들, 딸아이가 밭에서 무를 캘 때에는 똑같습니다.

 마음으로 주고받는 사진을 이야기하려 한다면, 말 그대로 마음만 보여주셔요. 마음이 아닌 자잘한 부스러기는 사진을 나누거나 사진을 사랑하거나 사진을 꽃피우는 길에 그저 걸림돌입니다. 사진은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마음찍기였습니다. 다큐사진도 마음찍기요 상업사진도 마음찍기입니다.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른 꿈을 꾸며 다 다른 삶을 일구는 마음찍기입니다. (4344.7.30.흙.ㅎㄲㅅㄱ)


― 레아의 감성사진 두 번째 이야기 (레아 글·사진,한빛미디어,2010.8.31./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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