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 꽃.바다.바위.소나무.숲.오름
황학주 글, 배병우 사진 / 생각의나무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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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찍는 사진
 [찾아 읽는 사진책 51] 배병우·황학주, 《故鄕》(생각의나무,2007)


 사람이 사진기를 만들었고, 사람이 사진을 찍습니다. 사람은 곁에 있는 사람을 사진으로 찍기도 하지만, 멀거니 떨어진 자리에서 부산스레 오가는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기도 합니다.

 사람이 붓과 종이를 만들었고, 사람이 그림을 그립니다. 사람은 곁에 있는 살붙이를 그림으로 그리기도 하지만, 들판과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그림으로 그리기도 합니다.

 사람이 글을 씁니다. 종이에 글을 쓰든 셈틀 자판을 또닥거리든, 사람이 글을 씁니다. 사람이 쓰는 글에는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담기고, 사람을 둘러싼 너른 자연이 어우러지는 이야기가 담깁니다. 사람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살아가는 만큼, 이 사람살이를 글로 옮깁니다.

 꽃·바다·바위·소나무·숲·오름, 이렇게 여섯 가지를 사진으로 담아 큼지막하게 빚은 사진책 《故鄕》(생각의나무,2007)을 읽습니다. 꽃과 바다와 바위와 소나무와 숲과 오름은 배병우 님이 사진으로 담고, 황학주 님이 글을 씁니다. 배병우 님은 배병우 님으로서 바라보거나 마주한 꽃·바다·바위·소나무·숲·오름을 보여줍니다. 황학주 님은 황학주 님으로서 느끼거나 맞아들인 꽃·바다·바위·소나무·숲·오름 이야기를 적바림합니다.

 사진을 보고 글을 봅니다. 사진은 사진대로 이야기를 담았을 테고, 글은 글대로 이야기를 실었을 테지요. 곰곰이 생각합니다. 이 꽃은 얼마나 꽃다울까요. 이 바다는 얼마나 바다다운가요. 이 바위는 얼마나 바위답다 할 만한지요. 이 소나무는 얼마나 소나무다운 목숨인지요. 이 숲은 어디에서 숲다운 모습일까요. 이 오름은 어떻게 오름다운 모습일는지요.

 더 톺아보면, 내가 내 살림자리 곁에서 늘 바라보는 꽃은 ‘내가 바라보는 꽃’입니다. 이 꽃들은 내가 바라보지 않더라도, 또 사람들이 ‘꽃’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더라도, 언제나 이곳에서 이 모습대로 살아냈습니다.

 사람들이 꽃을 사진으로 찍는다 할 때에는 얼마나 꽃다움을 고스란히 살리면서 사진으로 찍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어느 한 사람을 사진으로 찍는다 할 때에는 얼마나 ‘어느 한 사람다움’을 알뜰살뜰 빛내면서 사진으로 찍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사진이란 ‘사진으로 담기는 넋 밑삶이나 밑모습을 드러내는 일’하고는 멀찍이 떨어진 채 ‘사진을 찍는 사람 마음을 보여주는 일’에만 가까운지 모릅니다.

 새벽이슬을 머금는 봉숭아랑, 아침햇살 스미는 봉숭아랑, 한낮 눈부신 햇살을 받는 봉숭아랑, 어스름이 깔리는 봉숭아랑, 달빛을 맞아들이는 봉숭아랑, 새까만 깊은 밤 봉숭아랑, 어느 모습이 봉숭아 꽃다운 모습이 될까요. 시골자락 밭뙈기 가장자리에서 자라는 봉숭아랑, 골목집 담벼락 틈바구니에서 자라는 봉숭아랑, 꽃그릇에서 얌전히 자라는 봉숭아랑, 들판이나 멧자락에서 스스로 자라는 봉숭아랑, 그늘진 데에서 조용히 꽃망울 피우는 봉숭아랑, 어느 꽃자락이 꽃답다 할 만한 이야기를 길어올릴까요.

 사진책 《故鄕》을 펼치면서 거듭 돌이킵니다(거듭 돌이키니, 이 사진책 이름은 ‘故鄕’이지 ‘고향’마저 아닙니다). 이 사진책에 나오는 꽃은 꽃다운 꽃이 될 수 없습니다. ‘고향을 생각하거나 떠올리는 사람 마음에 새겨진’ 모습을 되새기는 징검돌 같은 꽃이 될 뿐입니다. 바다도 바위도 소나무도 숲도 오름도 이와 매한가지입니다. 바다를 보여주는 바다 사진이 아닙니다. 바위를 보여주는 바위 사진이 아닙니다. 소나무나 숲이나 오름을 보여주는 소나무 사진이 아니요 숲 사진이 아니며 오름 사진이 아니에요. 언제나 ‘사진기를 쥔 사람 마음에 새겨진 이야기 틀거리에 따라 잘라서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이름난 사진쟁이가 당신 아이들을 사진으로 담을 때를 헤아립니다. 이름없을 뿐더러 사진쟁이조차 아닌 여느 어버이가 당신 아이들을 사진으로 옮길 때를 돌아봅니다. 어느 쪽이 ‘사진’일까요. 어느 쪽이 ‘아이’ 사진일까요. 어느 쪽이 아이 ‘삶’일까요.

 사진작가라는 이름을 얻은 분들은 왜 ‘작가’가 될까 궁금합니다. 온누리에 널리 알려졌기에 ‘소나무를 가장 잘 찍는 사람’이라는 이름표가 붙을 만한가 궁금합니다. 소나무를 가장 잘 찍는다 하지만, 이 소나무 사진들은 얼마나 소나무다움을 드러낼는지요. 소나무가 이 사진을 바라본다면 소나무로서 ‘그래 그래, 이 사진들은 바로 나, 소나무 삶이로구나.’ 하고 느낄 만한지요.

 ‘사람들이 좋아해 주는 소나무 모습을 잘 찍는다’고 해야 알맞으리라 느낍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배병우 님 스스로 좋아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좋아해 주는 소나무 모습을 잘 찍는다고 말해야 올바르다고 느낍니다.

 소나무 꽃잎이나 뿌리나 줄기를 찍는 사람은 ‘소나무를 못 찍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위에 뿌리내려 자라는 소나무를 찍든, 민둥산에 한 그루 달랑 남은 소나무를 찍든, 몇 천만 원어치 값을 뽐내며 학교나 체육관이나 회사나 아파트 들머리에 심긴 소나무를 찍든, 어디에서나 ‘소나무를 찍는 사진’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소나무는, 어디에서 자랄 때에 ‘소나무다운 소나무’일까요. 사람 발길이 뜸한 데에서야 비로소 소나무일는지요. 아파트 앞에 심으면 소나무가 아닐는지요. 소나무는 경주에서만 소나무요, 서울 남산에서는 소나무가 아닐는지요.

 나는 생각합니다. 배병우 님이 스스로 우물을 파고 우물에 갇혔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배병우 님이 스스로 울타리를 치고 울타리 안쪽에 얽매인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배병우 님이 길어올리는 사진을 바라보거나 다루거나 비평하거나 이야기하는 사람들 스스로 우물을 파거나 울타리를 친다 할 만합니다. 배병우 님은 배병우 님이 바라보는 대로 꽃도 찍고 바다도 찍고 바위도 찍고 소나무도 찍고 숲도 찍고 오름도 찍고 할 뿐입니다. 구태여 ‘배병우 아닌 다른 사람 눈길’로 꽃이나 바다나 바위나 소나무나 숲이나 오름을 바라보며 사진으로 찍을 까닭이 없어요. 그런데, 퍽 슬프게도 배병우 님 사진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은 ‘당신 눈길’이 아닌 ‘당신들이 좋아한다는 배병우 님 눈길’을 좇거나 시늉하거나 따르면서 어설픈 껍데기 사진에 사로잡힙니다. 곧, 배병우 님은 배병우 님 사진을 즐긴다 하지만, 배병우 님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들한테 ‘자, 그러면 당신은 당신이 즐기는 사진을 마음껏 누려 보셔요.’ 하고 이끌지 못하는 노릇입니다. 온통 따라쟁이만 낳습니다. 온통 흉내쟁이만 키웁니다.

 《고향》이라는 사진책은 모두 여섯 갈래로 나누어 고향이라는 삶자리를 돌아봅니다. 고향을 이 여섯 갈래로 나눌 만한지부터 아리송한데, 이 여섯 갈래로 나눈다 할 때에, 어느 한 갈래도 ‘도시하고 가깝지 않’습니다. 여섯 갈래 모두 도시하고 동떨어진 삶자락이요 이야기입니다.

 도시에는 꽃이 없습니다. 도시에는 바다가 없습니다. 도시에는 바위도 소나무도 숲도 오름도 없습니다. 아니, 도시는 꽃조차 들이지 않습니다. 도시에서 키우는 꽃은 돈이 되는 꽃입니다. 돈이 되지 않는 꽃은 모조리 잡풀로 여겨 뽑아냅니다. 그렇다면, 이 사진책에서 밝히는 ‘고향’에서 자랄 꽃은 어떤 꽃인가요. 참말 고향이라는 데에는 꽃이 있을까요.

 이제 사진책 《고향》을 덮습니다. 여러 달에 걸쳐 가만히 들여다보던 사진책 《고향》을 이제 덮습니다. 내 고향 인천에는 서울에서 흘러든 똥물과 쓰레기가 가득한 나머지, 앞바다에서 똥냄새와 쓰레기내음을 피웁니다. 내 고향 인천에는 서울로 올려보낼 공산품을 만드는 공장이 가득해서, 언제나 매연을 마시고 언제나 짐 가득 실은 짐차 배기가스까지 신나게 마십니다. 나한테 내 고향은 시커먼 빛깔에 가까운 잿빛입니다. 돌도 흙도 햇빛도 물도 바람도 풀도 홀가분하기 어려운 터전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꽉 막힌 데에서도 내 어버이와 내 이웃들은 텃밭을 일구고 꽃밭을 마련하며 웃음눈물을 나누더군요.

 사람은 사진을 찍습니다. 사람은 사진기를 만들어 사진을 찍습니다. 잘난 이야기를 길어올리려고 사진을 찍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돈을 벌자며 사진기 단추를 눌러대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사람이 찍는 사진은 사람이 살아가는 나날을 담습니다. 사람이 만든 사진기는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는 그릇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나날은 ‘사람 얼굴’을 찍는대서 담기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길거리나 골목길’을 찍는대서 실리지 않습니다. 들꽃이나 골목꽃 한 송이를 찍더라도 얼마든지 고향 빛깔을 담습니다. 길바닥에 구르는 돌이나 바가지에 담긴 물을 찍더라도 얼마든지 고향 내음을 싣습니다. 들판을 찍거나 멧자락을 찍거나 바닷물을 찍거나, 누군가 이곳에 얌전히 섰기 때문에 들판 사진이나 멧자락 사진이나 바닷물 사진이 태어납니다. 사람들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면서 이 지구별 기스락에서 보금자리를 틀었을까요. 사람이 찍는 사진에 사람내음은 얼마나 깃드는가요. 사람이 만들어 나누는 사진기란 사람들 사랑을 얼마나 옮길 만한 따스한 연장이 되는가요. (4344.9.6.불.ㅎㄲㅅㄱ)


― 故鄕, 꽃·바다·바위·소나무·숲·오름 (배병우 사진,황학주 글,생각의나무 펴냄,2007.3.2./5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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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비숍 Werner Bischof 열화당 사진문고 7
클로드 쿡맨 지음, 이영준 옮김, 베르너 비숍 사진 / 열화당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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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이 무엇을 사랑하는가를 사진으로 담기
 [찾아 읽는 사진책 50] 베르너 비숍·클로드 쿡맨, (열화당,2003)



 1916년에 태어나 1954년에 숨을 거둔 베르너 비숍(Werner Bischof)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한국땅에서 슬픈 피비린내가 나던 때에 이 나라에 찾아와서 ‘슬픈 피비린내’ 사진이 아닌 ‘사랑스러운 사람들 사랑스러운 삶’ 한 자락과 이 삶 한 자락을 뒤틀려는 가녀린 몸짓을 사진으로 담기도 했습니다.

 조그마한 사진책 《베르너 비숍》(열화당,2003)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이 작은 사진책은 영국 파이돈(phaidon) 출판사에서 내놓은 책을 옮긴 판입니다. 인터넷책방에서 살펴보니 영국에서 나온 판이 외려 한국에서 옮겨진 판보다 값이 쌉니다. 거꾸로 되었네 싶고, 이런 줄 미리 알았으면 영국 책으로 장만했을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진책으로 찍은 빛느낌이나 종이느낌은 한국 책이 영국 책을 아직 못 따르거든요. 더욱이, 굳이 ‘사진쟁이 삶을 풀어서 들려주는 이야기’를 읽지 않아도 될 뿐 아니라, 사진마다 옆에 붙인 ‘덧말’을 읽는다 해서 사진을 더 잘 읽어낼 수 있지 않아요. 그래도, “1943년, 비숍은 ‘가난과 싸우고 자유를 사랑하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것을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임무이며, 우리 일생의 임무라고 생각한다’라고 썼다(6쪽).” 같은 글월을 한글로 읽을 수 있으니 고맙습니다. “비숍은 일부러 어린이들을 택했다. 그 나라 지도자들의 죄가 어떤 것이건 간에, 어린이들은 전쟁의 무고한 희생자들이었다. 또한, 핵전쟁의 발발에 위협받고 있는 그들의 미래는 현재보다 황폐할 것 같았다(8쪽).” 같은 글월을 읽을 수 있는 일 또한 고맙습니다.

 다만, 애써 이러한 글월을 읽지 않더라도 ‘사진으로만 보았을 때’에도 베르너 비숍이라는 분이 어떠한 사진을 좋아하면서 어떠한 사진길을 걸으려 했는가를 환하게 느낄 만해요. 사진은 사진이기 때문에 사진으로 읽습니다. 사진은 사진이기 때문에 사진으로 찍습니다. 사진은 사진이기 때문에 사진으로 나눕니다.

 사진을 읽을 때에는 사진으로 읽습니다. 글을 읽을 때에는 글로 읽어요. 사랑을 읽을 때에는 사랑으로 읽습니다.

 사랑을 다른 테두리나 눈길로 읽을 수 없습니다. 그림을 다른 테두리나 눈길로 읽을 수 없어요. 사람은 사람 그대로 바라보면서 마주합니다. 내 앞에 선 사람을 이이 그대로 맞아들이며 사귈 뿐, 이이를 다른 누구로 삼거나 여기거나 견줄 수 없어요. 이이는 오직 이이 한 사람이요 이이 한 목숨입니다.

 베르너 비숍 님 사진을 읽으면서 차근차근 느낍니다. 베르너 비숍 님은 ‘사람들이 무엇을 사랑하는가를 사진으로 담는 사람’이구나 하고 느낍니다. 뉴욕을 찍은 사진이든 조개껍데기를 찍은 사진이든 쿠스코로 가는 길을 찍은 사진이든 모두 매한가지입니다. 베르너 비숍 님은 ‘당신이 찾아가서 만나는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에서 ‘이들이 무엇을 사랑하면서 껴안는가’를 가만히 지켜봅니다. 가만히 지켜보고 나서 살며시 사진기 단추를 누릅니다.

 더 좋다거나 더 나쁘다는 느낌은 없습니다. 베르너 비숍 님 당신이 느끼는 결을 고스란히 사진으로 담습니다. 사람들이 착하게 살면 착하게 사는 얼거리를 사진을 담습니다. 사람들이 바보스레 살면 바보스레 사는 줄거리를 사진으로 담아요.

 저는 골목길을 천천히 거닐며 사진을 찍을 때에 늘 느낍니다. 내가 찍는 골목길 사진은 더 예쁘게 찍는 사진이 아닙니다. 내가 찍는 골목길 사진은 이 골목길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예쁜 살림 예쁜 빛깔 예쁜 꿈넋 예쁜 손길을 고루 건사하면서 나누기 때문에, 이 모든 예쁜 모습을 내 사진으로 담아 예쁜 이야기를 꽃피울 수 있을 뿐입니다. 서로서로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는 이웃이기에 나 또한 즐거이 사진을 찍습니다. 예쁜 사랑으로 예쁜 웃음을 짓기에 예쁘구나 하고 느낄 만한 사진입니다. 억지로 예쁜 척할 수 없는 사진입니다. 예쁜 그림을 따로 만들거나 꾸밀 수 없습니다. 예쁜 삶은 예쁜 결로 묻어납니다. 만드는 사진은 티가 납니다. 살아가는 사진은 사랑이 묻어납니다.

 자그마한 사진책 《베르너 비숍》에 베르너 비숍 님 모든 삶이나 사진이나 사랑이 깃들지는 않습니다. 꼭 이만큼만 깃듭니다. 그런데, 이만큼이든 저만큼이든 삶이나 사진이나 사랑은 달라지지 않아요. 사진을 더 많이 찾아볼 수 있으면 더 잘 읽을 수 있겠습니까. 사진을 꼭 한 장만 볼 수 있으면 제대로 못 읽겠습니까.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사진 한 장으로 모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진 한 장으로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진쟁이는 사진 백 장을 그러모아서 또다른 이야기를 싱그러이 들려줍니다. 꿈을 노래합니다. 빛을 나눕니다. 넋을 보살핍니다. 흙을 사랑합니다. 한국땅 사진쟁이들한테 베르너 비숍이 착하고 해맑게 읽힐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립니다. (4344.9.3.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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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시선 -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사진 에세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지음, 권오룡 옮김 / 열화당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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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찍는 사진, 읽는 마음, 따순 사랑
 [찾아 읽는 사진책 49]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영혼의 시선》(열화당,2006)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님이 사진을 어떻게 바라보면서 찍었는가 하는 짤막한 이야기를 담은 책 《영혼의 시선》(열화당,2006)을 읽습니다. 브레송 님은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달아나는 현실 앞에서 모든 능력을 집중해 그 숨결을 포착하는 것이다(15쪽).” 하고 말합니다. 언제나 내가 두 발을 디딘 땅에서 내 모든 넋과 기운과 사랑과 땀방울과 말미를 바쳐서 일구는 사진 한 장인 셈입니다.

 참으로 마땅합니다. 글 한 줄을 쓸 때이든 그림 한 장을 그릴 때이든 노래 한 가락을 부를 때이든 춤 한 사위를 출 때이든 똑같이 마땅합니다. 언제나 모든 넋을 바치고 모든 기운을 들이며 모든 사랑을 쏟는 한편 모든 땀방울을 흘리면서 모든 말미를 깃들이는 삶입니다.

 사진을 찍으려 하는 사람 누구나 사진을 쉽게 찍을 수 없습니다. 내 온마음을 바치지 않았으면 쉽게 찍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 온마음을 바치는 사람은 사진을 쉽게 찍습니다.

 사진길을 걸으려 하는 사람 모두 사진길을 걱정없이 걸을 수 없습니다. 내 온몸을 쏟아붓지 않았으면 사진길을 걱정없이 걸을 수 없습니다. 곧, 내 온몸을 쏟아붓는 사람은 사진길을 걱정없이 걷습니다. 다만, 사진길을 걱정없이 걷는대서 먹고사는 길이 다 풀리지 않아요. 때로는 먹고살기 힘겹고, 어느 때에는 밥을 굶으며, 어느 때에는 외롭거나 쓸쓸합니다. 그렇지만 내 온몸을 쏟아붓는 내 사랑하는 삶길을 일구는 사진일 때에는 가난이나 외로움이란 아무것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벗입니다. 살가은 길동무예요.

 브레송 님은 “나는 기쁨을 위해 일했고 나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일했다(21∼22쪽).” 하고 말합니다. 기쁘게 살아갈 사람들이고, 즐겁게 일할 사람들이에요. 꼭 사진을 찍기에 기쁘게 살지 않습니다. 반드시 사진기를 쥐었대서 즐거이 일하지 않아요. 호미를 쥐어 밭을 일구든, 펜이나 자판을 가까이하면서 회사일을 보든, 언제나 마찬가지입니다. 나 스스로 내가 선 일터에서 기쁘게 살아가면 됩니다. 나 스스로 내가 두 발 디딘 보금자리에서 예쁘게 어울리면서 즐거이 일하면 돼요.

 기쁘게 살지 않을 때에는 기쁘지 않은 사진만 만듭니다. 기쁘게 살 때에는 아주 홀가분하면서 손쉽게 기쁨을 나누는 사진을 일굽니다.

 사진은 억지로 만들지 못합니다. 사진은 홀가분하게 찍습니다. 사진은 남달리 만들지 못합니다. 사진은 내가 살아가는 결과 무늬 그대로 곱게 찍습니다.

 사진은 전문가들끼리 키득거리는 꼼수가 아닙니다. 사진은 대학교 사진학과를 다니거나 나라밖 사진학교를 다닌 사람들끼리 꼼지락거리는 손재주가 아닙니다. 사진은 이름난 스승한테서 배우며 내 이름을 높이는 가방끈이 아닙니다.

 사진은 오직 내 사랑을 바친 삶입니다. 내 사랑을 바친 내 삶이 그대로 사진으로 나타납니다.

 사진을 억지로 만든다면, 내 삶부터 억지로 만들듯 꾸미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내 삶부터 꾸밈없을 뿐 아니라 수수할 때에 다큐멘타리라 하는 사진이 제대로 꽃을 피웁니다. 내 삶부터 살가운 손길로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할 때에 상업사진이나 패션사진이 아리땁게 꽃을 피웁니다.

 누가 돈을 많이 준다 하면서 부탁하는 사진이기에 만듦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돈을 안 받고 찍어 주는 사진이기에 살갑거나 부드럽거나 착하거나 좋은 사진이 되지 않아요. 내 삶결 그대로 사진입니다. 내 삶결이 좋아야 내 사진이 좋습니다. 내 삶결이 보드라운 꽃송이여야 내 사진이 보드라운 꽃송이가 돼요.

 브레송 님은 “사진을 찍는 동안이나 암실에서 잔재주를 피워 사진을 조작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속임수들은 안목 있는 사람들에게는 여실히 드러난다(26쪽).” 하고 말합니다. 잔솜씨는 누구나 알아챕니다. 잔재주는 누구나 느낍니다. 밥을 할 때에 어떻게 밥을 하는가는 밥술을 한 번 뜨면 누구나 알아챕니다. 요리사가 차리는 밥이든 어머니가 차리는 밥이든 할아버지가 차리는 밥이든 아이들이 차리는 밥이든, 밥을 차리면서 사랑과 꿈과 믿음과 땀을 어느 만큼 쏟았느냐에 따라 밥맛이 달라져요.

 사진맛이란, 또 사진결이란, 또 사진삶이란, 나 스스로 내 사랑과 꿈과 믿음과 땀을 들이는 만큼 거듭납니다. 잔재주로는 잔재주 사진만 태어납니다. 잔솜씨로는 잔솜씨 사진만 만들고 말아요.

 브레송 님이 들려주는 “나는 인위적인 초상사진보다 여권사진을 찍는 사진사의 진열장에 겹겹이 쌓여 있는 조그만 증명사진들이 훨씬 더 좋다. 이런 사진들은 언제나 찍힌 사람들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사람들이 얻길 바라는, 시적 동일시 대신 기록사진으로 남은 인물의 신분을 증명하고 있다(30쪽).” 같은 말마디라든지 “암실에서 확대기를 통해 네거티브 필름을 재단하는 식으로 재구성한다고 해서 처음 찍었을 때 구성이 빈약한 사진이 살아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33쪽).” 같은 말마디를 가만히 되씹습니다. 번역을 한결 보드라이 했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싶지만, 이 또한 사진찍기 삶읽기하고 매한가지입니다. 브레송 님 책 《영혼의 시선》을 한국말로 옮긴 분 스스로 이 땅에서 누구와 이웃으로 사귀면서 어떠한 삶을 일구느냐에 따라 ‘어떤 한국말로 옮’겨서 ‘누가 읽도록 하려는 책’인가가 달라지거든요.

 이리하여 “누구나 사진을 찍는 동안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50쪽).” 같은 말마디를 읽으면서 밑줄을 긋습니다. 사진을 찍는 동안 그림을 그립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내 삶을 사랑합니다. 내 삶을 사랑하는 동안 내 꿈을 이룹니다. 내 꿈을 이루는 동안 내 착한 아이를 쓰다듬는 내 손길을 따뜻하게 돌봅니다.

 “비행기는 너무 빨라서 한 나라에서 다음 나라로 이동할 때 일어나는 점진적인 변화를 볼 수 없다(59∼60쪽).” 같은 말마디를 읽을 때에도 밑줄을 긋습니다. 좋으니까 밑줄을 긋습니다.

 나도 비행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는 고속철도 또한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는 자동차마저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는 자전거를 좋아합니다. 나는 내 두 다리를 사랑합니다. 언젠가 나이가 많이 들어 자전거를 탈 수 없거나 두 다리로 걸을 수조차 없이 된다면, 이때에는 한 자리에 가만히 누워 지내겠지요. 누워서 지내야 한다면 누운 자리에서만 둘레를 살필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누워서 지내야 한다면, 누운 채 바라보는 내 둘레 삶자락을 사랑하면 됩니다. 아직 두 다리가 튼튼해서 자전거를 달릴 수 있다면, 자전거로 달리며 만나는 내 삶터 둘레 이웃 보금자리를 가만히 살피면서 사랑하면 돼요.

 “앙드레 케르테스가 셔터를 누를 때마다, 나는 그의 심장이 뛰는 것을 느낀다(87쪽).” 하고 적바림하는 브레송 님입니다. 그래요, 브레송 님은 앙드레 케르테스 님이 사진기 단추를 누를 때마다 벌떡벌떡 일어서듯 쿵쾅거리는 심장소리를 느낍니다. 나는 브레송 님이 한 줄 두 줄 살며시 적은 글월을 읽으면서 손에 펜을 쥔 브레송 님 뜨거운 핏줄기를 느낍니다.

 피로 쓰는 글이고, 피로 그리는 그림이며, 피로 찍는 사진입니다. 피를 바쳐 부르는 노래요, 피를 바쳐 추는 춤이며, 피를 바쳐 이루는 삶입니다.

 내 마음으로 바라보는 사진입니다. 내 사랑이 깃든 손발로 씩씩하게 일하며 일구는 삶을 좋아하는 내 마음으로 바라보는 사진입니다. (4344.9.1.나무.ㅎㄲㅅㄱ)


― 영혼의 시선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글,권오룡 옮김,열화당 펴냄,2006.9.20./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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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っとネコぼけ (單行本)
이와고 미츠아키 / 小學館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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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을 잘 찍으려고 힘쓰지 마셔요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32] 이와고 미츠아키(岩合光昭), 《そつとネコぼけ》(小學館,2008)



 사진을 잘 찍으려고 힘쓴다 해서 사진을 잘 찍을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을 예쁘게 찍으려고 애쓴다 해서 사진을 예쁘게 찍을 수 없습니다. 사진을 멋지게 찍으려고 마음쓴다 해서 사진을 멋지게 찍지는 않습니다.

 나 스스로 잘 일구는 좋은 내 삶이라면, 내가 어떤 사진기를 손에 쥐더라도 즐겁게 잘 찍는 사진입니다. 나 스스로 예쁘게 사랑하는 내 삶이라면, 내가 누구를 마주보며 사진으로 담는 예쁘게 찍는 사진입니다. 나 스스로 멋지게 보살피며 아끼는 나날이라면, 내가 언제 어디서라도 멋지게 찍는 사진입니다.

 어느 한 가지만 잘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 한 가지만 못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일과 놀이가 찬찬히 이어집니다. 모든 삶과 꿈은 하나입니다.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살아가면서 생각합니다. 말을 하면서 꿈을 꾸고, 꿈을 꾸면서 말을 합니다. 삶을 일구면서 사진을 찍고, 사진을 찍으면서 삶을 일굽니다.

 그러니까, 가르치면서 배운다 하고, 배우면서 가르친다 합니다. 교사는 학생 앞에서 교사이면서 학생이 되고, 학생은 교사 앞에서 학생이면서 교사가 돼요. 학생한테 무언가 가르친다 하지만, 가르친다고 하면서 정작 교사 스스로 배우는 삶이 됩니다. 교사한테서 무언가 배운다고 하지만, 배운다고 하면서 막상 학생 스스로 가르치는 삶이 돼요.

 그렇지만, 사진은 누가 누구한테 가르치지 못합니다. 사진은 누가 누구한테서 배우지 못합니다. 사진을 가르친다고 할 때에는 사진을 가르치는 사람 스스로 사진을 새롭게 배워야 하지만, 사진을 가르친다 하면서 사진을 가르치는 사람이 사진을 배우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진을 배운다 할 때에도 사진을 배우면서 사진을 가르치는 사람한테 무언가 가르치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워요.

 이론을 가르친다는 자리에서든 실기를 가르친다는 자리에서든 늘 매한가지입니다. 사진을 이야기하는 이론책을 내든 사진 발자국을 보여주는 역사책을 내든 노상 똑같습니다. 사진기나 사진장비를 두루 알려주는 책을 내놓든, 사진을 더 잘 찍는 솜씨나 매무새를 밝히는 책을 내놓든, 언제나 다르지 않아요. 모두들 외통수가 되고 맙니다. 하나같이 사진삶하고 동떨어진 사진지식에 머물고 말아요.

 길고양이나 골목고양이나 들고양이라 할 만한 고양이들을 두루 만나거나 사귀면서 사진으로 담는 이와고 미츠아키(岩合光昭) 님 사진책 《そつとネコぼけ》(小學館,2008)를 읽습니다. 이와고 미츠아키 님이 담는 고양이 모습은 어느 사진을 보더라도 ‘잘 찍은’ 사진이 아닙니다. 이와고 미츠아키 님이 빚은 어느 사진을 보더라도 ‘사랑스레 찍은’ 사진이라고 느낍니다. ‘즐거이 찍은’ 사진입니다. ‘웃으면서 찍은’ 사진이거나 ‘울면서 찍은’ 사진이에요.

 ‘잘 찍으려’ 하는 사진이라든지 ‘예쁘게 찍으려’ 하는 사진이라든지 ‘멋지게 찍으려’ 하는 사진하고는 한참 떨어진 《そつとネコぼけ》입니다. 이와고 미츠아키 님은 ‘고양이를 고양이 그대로’ 찍을 뿐입니다. 고양이가 고양이답지 않게 찍는다든지, 고양이를 고양이 아닌 사람처럼 보이도록 찍지 않습니다. 고양이가 고양이로서 고양이다이 살아가는 자취를 곁에서 고양이 벗님으로 다가가면서 사진으로 담습니다.

 곧, 집고양이라 하든 들고양이라 하든 ‘이 고양이들을 잘 찍어서 보여주려’ 애쓸 까닭이 없습니다. 그저 고양이는 고양이인 만큼 고양이다이 느끼면서 사랑할 수 있도록 사진으로 찍으면 돼요.

 내 아이를 찍을 때에도 이와 똑같습니다. 내 아이는 내 아이답게 사랑할 수 있도록 사진으로 담을 노릇입니다. 내 아이를 ‘이웃 엄마 아들’ 모습처럼 보이도록 찍으려 하면 부질없을 뿐 아니라 슬픕니다. 내 옆지기를 사진으로 찍을 때이든, 내 어버이를 사진으로 찍을 때이든, 내 동무나 이웃을 사진으로 찍을 때이든 언제나 똑같습니다. 가난한 골목동네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든, 외진 시골마을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든, 나라밖 인도나 네팔을 찾아가서 사진을 찍든, 늘 똑같아요. 남달리 보이도록 찍을 사진이 아닙니다. 돋보이게 찍을 일이 없는 사진입니다. 더 거룩해 보이도록 한다든지, 더 아름다이 보이도록 할 까닭이 없습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부르는 자리에서도 한결같습니다. 꾸밈없이 글을 쓰면 됩니다. 수수하게 그림을 그리면 돼요. 있는 그대로 노래를 부르면 될 뿐입니다.

 다만, 꾸밈없이 글을 쓰되 내 온 사랑을 담습니다. 수수하게 그림을 그리되 내 모든 꿈을 싣습니다. 있는 그대로 노래를 부르되 내 온갖 믿음을 얹어 부릅니다.

 가만히 돌이키면, 아직 이 나라에서는 고양이를 사진으로 담든 기와집을 사진으로 담든 연예인을 사진으로 담든 설악산을 사진으로 담든 바닷가를 사진으로 담든 명품이라는 가방을 사진으로 담든, 사랑과 믿음을 고이 실어 착하거나 해맑게 사진꿈을 길어올리는 사진쟁이를 좀처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와고 미츠아키 님은 고양이를 사진으로 옮기면서 우리들 착하고 해맑은 삶을 사랑하는 길을 찾아나섭니다. (4344.8.28.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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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8-29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이런 사진을 볼때마다 저도 사진을 찍고 싶다는 욕망이 불끈 불끈 솟아오르네요^^

숲노래 2011-08-30 05:53   좋아요 0 | URL
사진은 사진기로도 찍지만,
마음으로도 찍어요.

마음으로 예쁘게 담으면 돼요~
 
윤광준의 아름다운 디카 세상
윤광준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4월
평점 :
절판




 이야기가 없으면 사진이 아닙니다
 [찾아 읽는 사진책 43] 윤광준, 《아름다운 디카 세상》(웅진,2004)



 2002년에 《잘 찍은 사진 한 장》(웅진지식하우스)을 내놓은 윤광준 님이 이태 뒤 새롭게 내놓은 《아름다운 디카 세상》(웅진,2004)을 읽습니다. 윤광준 님은 “사진을 찍기 위해 특별한 곳을 가야 한다는 생각은 거추장스럽다(39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참 옳다 싶은 이야기입니다. 사진을 찍으려고 남다르다 싶은 곳에 가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진을 배우려고 남다르다 싶은 사진책이나 인문책을 읽어야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남다르다 싶은 사진’ 한 장을 얻는 일이 부질없듯이, ‘잘 찍었다 싶은 사진’ 한 장을 얻는 일이 덧없습니다.

 《잘 찍은 사진 한 장》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한 사진삶을 이태 뒤에는 어느 만큼 곰삭였을까 궁금해서 《아름다운 디카 세상》을 펼칩니다. 사진밭에 처음 발을 들이는 이들이 윤광준 님 책을 퍽 즐겨읽을 뿐 아니라, 사진길을 그럭저럭 걷는 이 또한 윤광준 님 책을 꽤 들여다보기 때문입니다. 여러모로 사진말을 낳으며 사진꿈을 키우는 윤광준 님이기 때문에 “브레송과 같은 열정을 바치지 않는다면 평생에 걸쳐 ‘결정적 순간’을 포착해 낼 확률은 거의 없다(80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고개를 갸웃합니다. 앙리까르띠에 브레송 님은 ‘어떤 열정’을 바쳤을까요. ‘평생에 걸쳐 결정스럽다 싶은 순간을 붙잡아야 할 까닭’이 꼭 있는가요.

 윤광준 님은 “사진이란 게 꼭 좋은 화질에 얽매일 필요가 있을까? 나의 의식과 대상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좋은 사진 아닌가(139쪽)?” 하고 묻습니다. 우리한테 묻지 않습니다. 윤광준 님 스스로한테 묻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물으면서도 디지털사진기 화소수를 이야기하는 틀에서 홀가분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묻지만, 막상 값싸고 가벼운 똑딱이를 즐겨쓴다고 느끼기 어렵습니다. 디지털사진기를 쓸 때에도 ‘잘 찍은 사진’에 얽매이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진 한 장에는 사진에 담기는 사람들 이야기가 스며들 뿐 아니라, 사진 한 장을 빚는 사람 이야기가 나란히 깃듭니다. 이야기가 있기에 사진입니다. 이야기가 없으면 사진이 아닙니다. 이야기가 있기에 글입니다. 이야기가 없으면 글이 아닙니다.

 이야기 없이 쓰는 글은 느낌글이 되지 않습니다. 이른바 ‘서평’이 되는데, 서평 가운데에서도 ‘주례사 서평’이 되고 맙니다. 이야기 없이 만든 문학은 시나 소설이나 수필이 되지 못합니다. 어찌어찌 문학 테두리에 든달지라도 이야기가 없는 시나 소설이나 수필을 왜 읽겠습니까. 이야기 있는 삶에서 샘솟는 이야기 있는 문학입니다. 이야기 있는 삶에서 길어올리는 이야기 있는 사진입니다.

 ‘사진을 잘 찍었다’ 할 때에는 구도·초점·빛·빛깔·그늘을 잘 맞추었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구도·초점·빛·빛깔·그늘을 잘 맞추며 찍은 사진은 ‘빈틈없이 찍었다’ 할 만한 사진이지 ‘잘 찍은’ 사진이 아닙니다. 잘 찍은 사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만, 굳이 이런 꾸밈말을 넣어 말을 하자면, ‘잘 찍은’ 사진이란, 구도가 어긋나거나 초점이 흔들리거나 빛이 모자라거나 빛깔이 어수룩하거나 그늘이 맞지 않다 하더라도 ‘이야기가 살아숨쉬는’ 사진입니다. 앙리까르띠에 브레송 님이 빚은 사진은, 이른바 ‘잘 찍은 사진’이면서 ‘빈틈없이 찍은’ 사진입니다. 반드시 ‘열정을 바쳐야’ 브레송다운 사진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내 삶을 아끼고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 삶을 사랑하면서 사진 한 장으로 그러모을 꿈을 건사할 때에, 필름사진기이든 디지털사진기이든 값비싼 사진기이든 값싼 사진기이든, 어느 사진기를 손에 쥐더라도 ‘참으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따사로운 사진’ 한 장을 얻습니다.

 윤광준 님은 “사진 찍을 대상이 걷거나 뛰면 나 역시 그와 같이 움직이며 사진의 리얼리티를 표현해 내야 하는 것이다(190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옳다 싶은 말입니다. 다만, ‘사실성 짙은 느낌을 나타내야’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사실’이란 무엇일까요. 한자말로 적는 ‘事實’ 말뜻을 제대로 헤아리는 분이 너무 적은데요, ‘사실’이란 “있는 그대로”입니다. 한 마디로 가리키면 “꾸밈없이”입니다. “본 그대로”가 아닌 “있는 그대로”이고, “덧붙이거나 깎거나 손질하는” 모습이 아니라 “꾸밈없는” 모습입니다.

 사진으로 찍힐 사람하고 ‘같이 움직이는’ 일은 틀림없이 잘 살필 매무새 가운데 하나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꼭 같이 움직이지 않아도 돼요. 가만히 멈추어 가만히 지켜보아도 돼요. 굳이 같이 뛰어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따라하기’란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함께 어울려 놀거나 사는 모습이 아니거든요. 말 그대로, 내가 사진으로 담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같이 살아야’ 합니다. ‘같이 살면’ 넉넉해요.

 같이 살아가는 고운 벗이기 때문에, 고운 벗하고 오래도록 떨어져 지내더라도 마음으로는 날마다 만납니다. 같은 자리에서 두 눈을 마주보지 못하더라도 깊은 마음으로는 언제나 함께 지냅니다. 사진으로 담을 넋이란 서로 애틋하게 여기는 사랑 한 가지입니다. 눈으로 느끼는 모습을 넘어, 마음으로 아끼는 사랑입니다. 온몸으로 껴안고 온마음으로 부둥켜안는 기쁨입니다.

 윤광준 님은 ‘아름다운 디카 세상’이라 이야기하지만, 디지털사진기가 아름다운 누리를 이루자면, 이에 앞서 ‘우리들이 서로 어우러지면서 살아가는 이 터전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아름다이 일구는 삶’에서 ‘아름다운 사람’으로 어깨동무하는 ‘아름다운 사랑’이 샘솟아 ‘아름다운 사진’이 꽃피웁니다.

 어떤 장비를 쓰든 아름다울 수 있는 사진이 아닙니다. 아무 장비라도 아름다울 수 있는 사진이 아닙니다. 아름다이 살아가기에 글을 쓰면 글에 아름다움이 깃들고 그림을 그리면 그림에 아름다움이 깃들며 사진을 찍으면 사진에 아름다움이 깃듭니다. 사진이 아름답거나 필름사진기가 아름답거나 디지털사진기가 아름답지 않습니다.

 젓가락이 아름답기에 밥이 맛나지 않습니다. 밥그릇이 아름답기에 배불리 밥을 먹지 않습니다. 밥을 차린 손길이 아름답기에 밥이 맛납니다. 밥상에 오르기까지 땀흘린 흙일꾼 손마디가 아름답기에 배불리 밥을 먹습니다.

 사진을 찍고 나누며 즐기는 사람들 삶 밑자락을 건드리거나 들여다보지 않고서야 《아름다운 디카 세상》이 밝히거나 보여주려 하는 이야기를 옳게 건사하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이리하여, 윤광준 님은 “카메라 하나로 세상을 보는 관점이 이렇게 다른 만큼 아들녀석과 나와의 이해의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22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아닙니다. 사진기를 바라보는 눈이 아닙니다. 사진기와 놀이기계입니다. 윤광준 님 아들아이는 놀이기계로 디지털사진기를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사진기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삶이 다르기에 사랑이 다르고, 사랑이 다른 만큼 사진이 다릅니다. 아니, 사진이 아닌 놀이라 할 테지요.

 사진기 하나로 온누리를 바라보는 눈길이 아닌 줄 느껴야 합니다. 살아가며 온누리를 바라보는 눈길이 다른 줄 헤아려야 합니다. 온누리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매무새가 다른 줄 살펴야 합니다.

 사진이란, 다 다른 터전에서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사랑을 꽃피우면서 다 다른 이야기를 길어올릴 때에 이 다 다른 꿈결을 살뜰히 보듬는 어여쁜 손길 가운데 하나입니다. (4344.8.25.나무.ㅎㄲㅅㄱ)


― 아름다운 디카 세상 (윤광준 글·사진,웅진닷컴 펴냄,2004.4.30./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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