シルクロ-ドの子どもたち (大型本)
나가쿠라 히로미 / 每日新聞社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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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으로 사람을 사귀는 삶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39] 나가쿠라 히로미(長倉洋海), 《シルクロ-ドの子どもたち》(每日新聞社,2009)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진기를 장만합니다. 온누리 어느 나라를 보더라도 한국처럼 사진기 많이 팔리고 사진 많이 찍으며 누리사랑방이나 누리모임 같은 데에 사진 끝없이 올라오는 곳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진나라라 할 만한 일본은 어떠할까 궁금합니다. 사진쟁이 많고 사진책 많은 일본에서도 한국처럼 사진기 어깨에 걸거나 가방에 넣고 다니는 사람이 이토록 많을까요. 사진잡지 많고 사진이야기 많은 일본에서도 한국처럼 누리사랑방이나 누리모임에 사진이 철철 흘러넘칠까요.

 사진기 갖춘 사람 많고 사진 찍는 사람 많은 한국이지만, 막상 사진책은 많이 나오지 않으며, 애써 나온 사진책이 두루 팔리는 일은 퍽 드뭅니다. 드문드문 나오는 사진책을 가만히 살피면, 사진책이라기보다 사진수필인 책이 퍽 많습니다. 사진으로 보여주는 사진책은 얼마 안 됩니다. 사진책 아닌 사진기록이 꽤 많습니다. 사진으로 보여주는 사진책마저 책값이 지나치게 비싸기 일쑤입니다. 여느 사진 즐김이가 사진책 즐김이로 이어질 만한 고리가 너무 자그맣습니다. 알맞춤한 크기에 알맞춤한 값을 붙여 알맞춤하게 엮는 아름다운 사진책이 좀처럼 태어나지 못해요.

 한 마디로 간추리자면, 한국땅 사진삶이란 ‘사진장비 갖추는 데에는 돈이 얼마가 되든 바칠 수 있’으나 ‘사진책 건사하는 데에는 돈을 조금이나마 들이지 못’하는 셈이로구나 싶어요.

 사진이 즐거울 때에는 사진책이 함께 즐겁습니다. 사진을 찍는 즐거움을 누린다면, 사진책을 읽는 즐거움을 나란히 누립니다. 그런데, 사진이 즐거울 수 있자면 삶이 즐거워야 합니다. 삶이 즐거울 때에는 사진이 즐거울 뿐 아니라 글이 즐겁고 그림이 즐겁습니다. 노래와 춤이 모두 즐겁습니다. 밥과 옷과 집이 다 같이 즐거워요.

 사진책이 즐거운 사람은 그림책이 즐겁고, 만화책과 글책 또한 즐겁습니다. 따로 사진책만 즐거울 사람이 있기도 할 테지만, 삶을 담는 책을 즐길 줄 알 때에 사진을 담는 책을 즐길 줄 압니다. 삶을 담는 사진을 누릴 줄 알 때에 삶을 담는 사진책을 누릴 줄 알아요.

 사랑하는 넋으로 삶을 일굽니다. 사랑하는 넋으로 삶을 일구는 몸짓이 사진 하나 찍는 매무새로 이어집니다. 사랑하는 넋으로 삶을 일구는 몸짓이 사진 하나 찍는 매무새로 이어지면서 사진책 하나 예쁘게 태어납니다.

 일본 사진쟁이 나가쿠라 히로미(長倉洋海) 님이 빚은 《シルクロ-ドの子どもたち》(每日新聞社,2009)를 읽으며 곰곰이 헤아립니다. 사진으로 사람을 사귀는 삶을 누리는 나가쿠라 히로미 님이로구나 하고 느끼면서, 이녁은 사진으로 사랑을 맺고 사진으로 꿈을 이루며 사진으로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느낍니다. 나가쿠라 히로미 님은 당신 삶을 사랑하기에 사진을 사랑할 줄 압니다. 당신 삶을 믿기에 사진을 믿습니다. 당신 온삶과 온넋을 바치는 사진이기에, 바로 이 사진으로 당신이 반가이 여기며 좋아하는 이웃을 사귀고 동무와 어깨동무해요.

 《シルクロ-ドの子どもたち》는 “비단길 어린이”입니다. 비단길 발자취를 ‘비단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길목’이 되는 나라를 하나하나 찾아다니면서, 이들 길목 나라에서 저마다 다 다른 삶을 저마다 다 다른 기쁨과 슬픔과 웃음과 눈물로 곱게 여미는 사람들 이야기를 어린이 눈높이에서 돌아봅니다.

 예쁜 웃음을 사진으로 담으려 하지 않습니다. 맑은 낯빛을 사진으로 실으려 하지 않습니다. 좋은 이웃을 사진으로 사귑니다. 반가운 동무를 사진으로 만납니다. 그럴싸한 모습을 그럴싸한 사진으로 담아 선보이지 않습니다. 그럴듯한 작품을 그럴듯한 사진으로 만들어 뽐내지 않습니다.

 얼굴에 흙먼지 가득하대서 슬플 아이들이 아닙니다. 한국 경제높이와 견주어 가난하기에 고단한 아이들이 아닙니다. 열 살 남짓 나이에 돈벌이를 해야 하니까 괴로운 아이들이 아니에요. 어린 동생을 업고 돌보느라 학교에 가지 못하더라도 그늘질 까닭이 없어요.

 아이들마다 꿈과 사랑과 믿음과 이야기는 사뭇 달라요. 아이들마다 따스함과 넉넉함과 포근함과 살가움은 서로 달라요.

 스스로 오래오래 뿌리내려 아름다운 이야기를 건사하려는 어버이하고 살아가는 아이들은 즐겁습니다. 스스로 기쁘게 뿌리내려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간직하려는 어버이하고 살아가는 아이들은 흐뭇합니다. 어버이가 백만장자여야 하지 않아요. 어버이가 손전화를 선물해 주어야 하지 않아요. 어버이가 높은학교를 다녔거나 아이들이 높은학교로 나아가야 하지 않아요. 손을 따숩게 맞잡는 삶이면 즐겁습니다. 살가이 어깨동무하는 나날이면 기쁩니다. 조촐히 밥을 나누고 넉넉하게 잠자리를 누리면 웃음꽃입니다.

 한국땅에서 곧잘 사진큰마당이 벌어집니다. 한국땅에서 수없이 많은 사진잔치가 열립니다. 지자체나 문화체육관광부 같은 데에서 뒷배를 하거나 돈을 대어 사진큰마당을 벌인다든지, 이름난 사진쟁이가 서울땅 예쁘장한 자리에서 사진잔치를 연다든지 하는데, 사진작품은 수두룩하게 넘치지만, 사진사랑은 그닥 찾아보지 못합니다. 사진비평은 곧잘 태어나지만 사진삶 드러내는 사진이야기는 좀처럼 만날 수 없습니다.

 나가쿠라 히로미 님 《シルクロ-ドの子どもたち》를 함께 읽어요. 무거운 마음 내려놓고, 무거운 사진기 내려놓고, 무거운 이름값 내려놓고, 무거운 가방과 옷가지 내려놓고, 무거운 지식과 정보 내려놓고, 무거운 자가용 내려놓고, 무거운 아파트 내려놓으면서 자그마한 사진책 하나 함께 읽어요. 홀가분하게 살아가며, 너그러이 살아내는 하루를 곱씹어요. 곱다시 꿈을 꾸고 포근히 어루만지는 꾸덕살 박힌 야무진 손바닥을 함께 느껴요. 사랑으로 사람을 사귀는 결을 살리면서 사진으로 사람을 사귀는 사진쟁이를 기다립니다. (4344.11.2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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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고건축 1 - 비원
임응식 지음 / 광장 / 197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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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연에서 쉴 수밖에 없는 사진
 [찾아 읽는 사진책 68] 임응식, 《韓國의 古建築 ① 秘苑》(광장,1976)



 1970년대 끝무렵에 커다란 판으로 나온 얇은 사진책 묶음 “韓國의 古建築” 1번은 《秘苑》(광장,1976)입니다. 1970년대 끝무렵이란 새마을운동에 따라 시골마을 옛집이 거의 사라질 즈음입니다. 서울이나 크고작은 도시 커다란 기와집이나 궁궐이나 성곽은 문화재로 삼아 이럭저럭 건사하지만, 여느 사람들 수수한 살림집은 깡그리 무너지거나 허물려야 했어요. 대통령이 노랫말까지 붙여 ‘새마을운동’을 널리 퍼뜨리기에, 시골마을 흙길은 시멘트길로 바뀝니다. 소가 일구고 소가 갈던 논밭은 기계가 일구고 기계가 갑니다. 소는 흙에서 난 밥을 먹고 흙으로 거름을 돌려줄 뿐 아니라 제 몸뚱이인 고기까지 내줍니다. 기계는 기름을 먹고 배기가스를 내보낼 뿐 아니라 어느 만큼 나이를 먹으면 고스란히 쓰레기가 됩니다. 풀약 없이 흙을 일구고 비료 없이 곡식을 거두던 시골마을은 사라집니다. 참말 송두리째 사라집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풀약이나 비료가 따로 없더라도, 비닐이나 비닐집이 굳이 없더라도, 모두 한 끼니 밥을 먹는 걱정이 없었습니다. 나라와 땅임자한테 바치는 세금이 만만하지 않았더라도 그럭저럭 밥술은 들 만했습니다. 이제 이 나라 흙일꾼은 나라와 땅임자한테 세금을 톡톡히 바치면서, 풀약과 비료와 기름과 기계를 대느라 더 많은 품과 겨를과 돈과 땀을 바쳐야 합니다. 이러면서 참다운 밥과 싱그러운 물과 달콤한 바람을 맞아들이지조차 못해요.

 “韓國의 古建築”은 1번부터 7번까지 궁궐이나 성곽을 다룹니다. 이 가운데 꼭 하나, 강운구 님 《내설악 너와집》이 있으나, 이 나라 여느 사람들 수수한 살림집 이야기는 끼어들지 못합니다. “韓國의 古建築” 9번과 10번 은 제주섬 살림집 이야기라 하는데, 책으로 나왔는지 못 나왔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아직 저는 “韓國의 古建築” 9번과 10번은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주섬 살림집 또한 “韓國의 古建築”이라는 테두리에 깃듭니다. 어쩌면, 책이름부터 ‘옛 건축’이라는 낱말이니까, 여느 사람들 수수한 살림집은 이 테두리에 낄 수 없다 할 텐데요, ‘건축’이라는 한자말은 ‘짓집기’나 ‘지은 집’을 일컫습니다. 절집도 집이요 살림집도 집입니다. 기와집도 집이며 풀집도 집이에요. 임금님 살던 집도 집이면서 흙일꾼 살던 집도 집이에요.

 곰곰이 살피면, 이 나라에서 가장 오래되면서 가장 뿌리깊으면서 가장 사랑스러우면서 가장 살가운 한편 가장 고맙고 거룩한 집이란 여느 사람들 수수한 살림집입니다. 이를테면, 2010년대에는 크고작은 도시에 가득한 아파트나 빌라가 여느 사람들 수수한 살림집이 될는지 모릅니다. 1950∼80년대에는 이때에 걸맞게 여느 사람들 수수한 살림집이 있겠지요.

 골목동네 작은 사람들이 작게 일구는 텃밭과 꽃그릇 또한 ‘좋은 건축’입니다. 임금님이 쉬던 뒤뜰에 마련된 연못만 좋은 건축일 수 없습니다. 시골마을 흙일꾼이 알뜰히 일구는 논밭 또한 아름다운 건축입니다. 우람한 성곽이나 산성만 아름다운 건축일 수 없습니다. 바닷가 김밭과 미역밭과 조개밭, 이른바 뻘밭 또한 어여쁜 건축입니다. 멧자락 나물밭과 풀숲 또한 훌륭한 건축입니다. 나무마다 열매를 떨구어 오랜 나날에 걸쳐 이룬 나무숲 또한 거룩한 건축이에요.

 “후원은 창덕궁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대궐의 후원을 말하는데, 이곳은 정무에 시달리던 역대 임금들이 생활의 여가를 자연과 더불어 휴식하며 즐기던 곳으로 신비롭고 아름다운 정원이다 … 창덕궁 후원이었던 비원은 왕이 생활의 여가를 자연과 더불어 휴식하고 즐기는 곳이었으므로 궁궐의 외전이나 내전과는 기본의장이 다르게 마련이다. 그래서 비원의 건물들은 지형과 산록의 모양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건립되었고 이에 수반된 연못들도 자연풍경에 따라 만들어져 은근하고 아담한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42쪽/김원).” 하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나라일에 바쁘며 지친 임금님이 쉬던 뒤뜰이라는 ‘후원’이자 ‘비원’이라고 하는데, 나라님은 궁궐 한켠에 ‘숲을 따로 만들어서 쉬어야’ 했다고 합니다. 자연스레 살아숨쉬는 터가 아니라 사람들이 일부러 가꾸어 쉬도록 한 터라고 해요.

 자연 그대로 살리면서 풀숲과 나무밭과 연못 한켠에 조그맣게 논이랑 밭을 두었으면 참 좋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먼 옛날 임금님이랑 신하가 아침저녁으로 푸성귀 잎을 솎고 김을 매거나 논물을 살필 줄 알았다면 아주 좋았으리라 생각합니다. 한쪽에는 닭을 치고 소한테 풀을 뜯길 수 있겠지요. 염소를 두어 젖을 짤 수 있으며, 돼지나 개가 다른 한쪽에서 살아갈 수 있어요.

 나부터 내 삶터를 돌아보면, 아직 내 손으로 씨앗을 심어 밭을 돌보거나 나무를 가꾸지는 못합니다. 추위를 앞둔 늦가을에 새 보금자리로 옮겼으니 씨앗을 심기에 너무 늦었달 수 있습니다. 올해를 묵고 이듬해부터 씨앗을 심을 만한지 모르지만, 우리 집 뒷자락 빈터 쓰레기를 고르고 물골을 낸 다음 씨앗을 심으며 가만히 기다려도 좋으리라 꿈을 꿉니다. 바람이 고요히 잠들고 햇살이 따스히 내리쬐는 날, 첫째 아이랑 함께 호미로 땅을 쪼아 씨앗 몇 알 심고 싶습니다.

 나도 옆지기랑 아이하고 우리 집 뒷자락을 뒤뜰이나 뒷밭이나 뒷터로 삼아 쉬고 싶습니다. 우리가 사랑할 나무를 씨앗으로 심어 천천히 돌보고 싶습니다. 우리 살붙이는 씨앗을 심어 뿌리를 내려 줄기를 올리는 모습을 누리고, 우리 살붙이가 낳아 돌볼 아이들과 이 아이들이 새로 돌볼 아이들은 우리 살붙이가 처음 씨앗을 심은 나무가 우람하게 자라 아름드리가 될 모습을 누리면 돼요.

 사진책 《秘苑》을 다시금 들여다보면서 생각합니다. 임금님이건 흙일꾼이건 쉬어야 일을 합니다. 일을 한 다음에는 쉬어야 합니다. 오늘날 회사원이건 공무원이건 대통령이건 교사이건 노동자이건 쉬어야 합니다. 기자이건 판사이건 쉬지 않고서는 다시 일하지 못합니다.

 쉬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해야 쉬는 나날인가요. 쉬는 터는 어떻게 마련하거나 찾아야 좋을까요. 어떠한 곳을 찾아가야 비로소 느긋하게 쉴 만한가요.

 극장에서 쉴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놀이공원이나 서울 명동이나 동대문 같은 데에서 쉴 만한지 궁금합니다. 술집이 늘어선 골목이나 여관이 줄지은 골목에서 쉴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찜질방에서 쉬나요. 횟집에서 쉬나요. 포장마차에서 쉬나요. 노인정에서 쉬나요.

 사람이 사진기를 만들어 자연을 사진으로 담는 까닭은, 사람 스스로 빚은 물건과 사람 스스로 빚은 물건을 다루는 사람 모두 쉬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김영갑 님은 제주섬 오름하고 어깨동무하면서 쉬었습니다. 안승일 님은 삼각산 한라산 백두산을 오르내리며 쉬었습니다. 전민조 님은 섬을 떠돌면서 쉬었습니다. 강재훈 님은 시골 분교를 찾아다니며 쉬었습니다.

 나는 헌책방 책밭이랑 골목길 텃밭을 찾아다니며 쉬었다든지, 시골집에서 아이들하고 복닥이면서 쉰다 할 만할까 헤아려 봅니다. 내 옆지기는 이 시골집에서 느긋하게 쉴 만한지 곱씹어 봅니다. 쉬는 사람일 때에 쉬는 자연이며, 쉬는 자연은 쉬엄쉬엄 따사로운 사랑을 쓰다듬습니다.

 자연에서 쉴 수밖에 없던 임금님입니다. 억지로 애써 뒤뜰을 만들지 않고서는 버틸 재주가 없습니다. 자연에서 쉴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억지로 애써 4대강을 손질한다며 법석을 떨밖에 없습니다. 자연에서 쉴 수밖에 없는 사진쟁이입니다. 패션사진을 하건 다큐사진을 하건 사진기와 사람이 너그러이 쉴 사진을 함께 누리지 못한다면 아무런 빛도 그림자도 꿈도 사랑도 사진이야기로 갈무리하지 못합니다. (4344.11.20.해.ㅎㄲㅅㄱ)


― 韓國의 古建築 ① 秘苑 (임응식 사진,김원 글,광장 펴냄,1976.9.1./판 끊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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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ifornia on the Breadlines (Hardcover) - Dorothea Lange, Paul Taylor, and the Making of a New Deal Narrative
Jan Goggans / Univ of California Pr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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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서 읽은 책은 이 <캘리포니아 어쩌고>가 아니지만, 이 사진책에 캘리포니아 모습이 적잖이 나온다. 아무튼, 도로디어 랭 사진책을 '간추린 판'이 아닌 '사진책'으로 사서 읽는다면, 사람들이 흔히 고정관념처럼 아는 사진하고는 다른 이야기를 느끼리라 믿는다. 



 사진 한 장에 담기는 사람들 삶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38] Dorothea Lange, 《Photographing the Seocnd Gold Rush》(Heyday books,1995)


 1895년에 태어나 1965년에 숨을 거둔 도로디어 랭(Dorothea Lange) 님 사진을 바탕으로 새롭게 꾸민 사진책 《Photographing the Seocnd Gold Rush》(Heyday books,1995)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이 조그마한 사진책에는 “Dorothea Lange and the Bay Area at War, 1941∼1945”라는 자그마한 이름 하나 덧붙습니다. 그러니까 1941년부터 1945년 사이에 찍은 사진이요, ‘두 번째 금광찾기’가 된다는 사진이라는 셈입니다.

 1941년부터 1945년 사이 한국이라는 나라는 어떠했는가 돌이킵니다. 일제강점기 막바지였던 이무렵 숱한 지식인과 지성인은 친일부역을 합니다. 나로서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살지 못했으니 이때가 얼마나 어떻게 괴로우며 벅찼는가를 알 수 없습니다만, 옳으며 바른 길을 착하고 맑게 걷기란 몹시 힘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니, 옳으며 바른 길을 착하고 맑게 걷는 모든 길이 꽉 막히지 않았겠느냐 싶습니다. 멧골 깊이 들어가 조용히 흙을 일구며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외딴섬 조그마한 집에서 아주 고요히 바다와 벗삼으며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흙을 일구어야 먹고살 수 있던 지난날 한겨레인데, 뻔히 일본총독부한테 쌀과 곡식과 푸성귀를 빼앗길 줄 알면서도 흙을 일구어야 하는 삶에서 어떻게 견디거나 버틸 수 있었을까요. 시골사람은 창씨개명을 할밖에 없으며, 도시사람은 친일부역을 할밖에 없던 슬프며 아픈 나날이 아닌가 싶습니다. 핑계감으로 삼는 말이 아니라, 참 배고프고 외로우며 아픈 나날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1950년부터 남녘과 북녘은 총부리를 맞대며 서로 죽이고 죽는 끔찍한 짓을 저지릅니다. 왜 한겨레끼리 이토록 죽임질에 목을 매야 했는가 돌아보면 그예 슬프며 아플 뿐입니다. 그런데, 이무렵 1950년부터 몇몇 나라는 군수공장을 펑펑 돌리면서 어마어마하게 돈벌이를 합니다. 이른바 ‘무기 만들고 팔아 금광찾기’를 하는 꼴입니다.

 그러니까, 모르는 노릇이지만, 미국땅에서 1941년부터 1945년은 ‘무기 만들고 팔아 금광찾기’를 하던 나날이었다고 여길 만합니다. 유럽에서는 독일이 일으켜 준 전쟁 때문에 쉴새없이 ‘무기팔이’를 할 수 있었고, 미국에서는 일본이 일으켜 준 전쟁이 있기에 더욱더 힘을 내어 ‘무기장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은 누군가한테는 그야말로 죽이고 죽는 끔찍한 짓입니다. 전쟁은 누군가한테는 집도 식구도 돈도 꿈도 몽땅 날아가는 터무니없는 아픔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또다른 누군가한테는 어마어마한 돈벌이입니다. 전쟁은 누군가한테는 더할 나위 없이 크나큰 훈장이나 이름값입니다.

 1941년부터 1945년 사이, 한국땅에서 마주할 수 있던 사람들 모습에서는 어떤 빛을 읽을 수 있었을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이야기를 길어올릴 만하고, 어떤 웃음꽃이 피어날 만하며, 어떤 꿈이 이루어질 만한지 궁금합니다.

 1942년에도 혼인한 사람이 있겠지요. 1944년에도 태어난 아이가 있겠지요. 1943년에도 글을 배운 아이가 있겠지요. 1945년에도 예순잔치가 있겠지요.

 도로디어 랭 님 사진책 《Photographing the Seocnd Gold Rush》를 넘기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사진 밑에 붙인 ‘사진 찍은 해’가 없다면, 이 사진을 1941년 사진으로 여길는지, 1951년 사진으로 여길는지, 1961년이나 1971년이나 1981년 사진으로 여길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참말 언제 찍은 사진이라 할 만할까 모르겠습니다.

 가난한 미국사람한테 1945년은 어떤 해였을까요. 가난하다가 갑작스레 살림이 편 미국사람한테 1944년은 어떤 해였을까요. 이무렵 일자리라면 아무래도 군수공장이 가장 많았으리라 보는데, 군수공장에서 일거리를 얻어 돈벌이를 하며 집식구를 먹여살리던 어버이들한테 1943년은 어떤 해였을까요.

 사진에 담기는 사람들 삶은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같은 해 다른 자리 사람들 사진은 저마다 어떤 이야기를 품을 수 있을까요. 같은 자리 다른 삶 사람들 사진은 저마다 어떤 빛과 그림자를 껴안을 수 있을까요.

 가난해도 밥을 먹습니다. 가멸차도 잠을 잡니다. 못생겨도 사랑을 합니다. 잘생겨도 헤어집니다. 집이 없어도 살림을 꾸립니다. 집이 있어도 텃밭을 못 일구곤 합니다. 돈이 없어도 웃음꽃을 활짝 피웁니다. 돈이 있어도 눈물나무만 자랍니다.

 누군가는 가난하거나 힘겹다 싶은 살림을 꾸리는 사람을 찍은 사진은 어둡거나 퀴퀴하거나 슬프거나 아파야 한다고 잘못 생각합니다. 그러면, 가멸차거나 수월하다 싶은 살림을 누리는 사람을 찍은 사진은 어떠해야 할까요. 사진은 돈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질까요. 글은 돈에 따라 빛깔이 달라지나요. 노래는 돈에 따라 내음이 바뀌는가요.

 더 큰 선물보따리를 받아야 웃는 아이들이 아닙니다. 밥그릇을 두서넛쯤 받아야 함박웃음으로 밥을 먹는 아이들이 아닙니다. 한 사람은 밥 한 그릇이면 넉넉합니다. 하루 두어 끼니면 배부릅니다. 누구나 조그마한 밥그릇으로 조그마한 사랑을 조그마한 꿈에 담아 누립니다.

 도로디어 랭 님이 농업안정국이라는 데에 몸담으며 사진을 찍었든, 홀가분하게 당신 사진감을 찾아 사진을 찍었든, 두 갈래 사진은 그닥 다르지 않습니다. 사진에 담기는 사람들 삶이 무엇을 이야기하는가를 사진쟁이 스스로 읽을 줄 알면 됩니다. 사진에 담기는 사람들 삶이 사진기를 손에 쥔 사진쟁이한테 무엇을 보여주며 깨우치는가를 알아채면 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길을 닦는 사람입니다. 누군가는 사랑길을 닦을 테고, 누군가는 돈길을 닦을 테며, 누군가는 꿈길을 닦을 테지만, 누군가는 이름길을 닦겠지요. (4344.11.1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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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Eggleston (Hardcover) - Democratic Camera; Photographs and Video, 1958-2008
Elisabeth Sussman / Whitney Museum of Art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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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이글스턴 사진책이 퍽 여러 가지 뜬다. 그러나 내가 가진 책만큼은 좀처럼 안 뜬다 ㅠ.ㅜ 마이리뷰로 올리고 싶어 절판된 사진책에 글을 걸친다. 빛느낌이 새삼스러운 윌리엄 이글스턴 사진책이 잘 읽힐 수 있기를 꿈꾼다. 

 



 사진이 만든 빛, 사람이 살아가는 빛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37] 윌리엄 이글스턴(William Eggleston), 《Los Alamos》(Scalo,2003)


 사진은 빛을 만듭니다. 빛을 담는 그릇이 사진이라 할 텐데, 사진은 빛을 담으면서 스스로 빛을 만듭니다.

 사진이 만드는 빛은 억지스러울 수 있습니다. 사진이 만드는 빛은 사람들 눈으로는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사진이 만드는 빛은 더없이 눈부시거나 더할 나위 없이 고울 수 있습니다.

 사진은 빛을 붙들어매기 때문에 빛을 만들는지 모릅니다. 사진은 어느 한때에 멈추는 모습을 보여주기에 빛을 만드는구나 하고 느낄는지 모릅니다.

 사진은 틀림없이 빛을 만듭니다. 다만,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어야 사진이 빛을 만듭니다. 사진을 찍어 나누는 사람이 있을 때에 사진 또한 빛을 만듭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제 고운 삶터에서 고운 넋으로 살아갈 때에, 사진은 시나브로 고운 빛을 만듭니다.

 밉거나 슬프거나 아픈 삶을 누리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저 스스로 모르던 빛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진은 속일 수 있으나 속일 수 없습니다. 사진은 속일 수 없으나 속일 수 있습니다. 짐짓 대단하거나 씩씩하거나 무시무시한 듯 얼굴을 내미는 사람 뒤에 깃든 보드랍거나 따사롭거나 너그러운 빛을 담을 수 있는 사진입니다. 얼핏 사랑스럽거나 예쁘거나 티없다 싶은 듯 얼굴을 보여주는 사람 언저리에 감도는 어둡거나 쓸쓸하거나 힘겨운 빛을 담을 수 있는 사진이에요.

 윌리엄 이글스턴(William Eggleston) 님 사진책 《Los Alamos》(Scalo,2003)를 읽습니다. 여느 사진쟁이들이 까망하양 필름으로 그림자 놀이에 흠뻑 빠져 허우적거릴 무렵, 윌리엄 이글스턴 님은 무지개 필름으로 무지개꿈을 누립니다. 여느 사진쟁이들이 까망하양 필름으로 까망과 하양 사이에 얼마나 많은 빛깔이 있느냐고 금긋기를 하는 동안, 윌리엄 이글스턴 님은 사람들 여느 눈으로 바라보는 여느 빛깔이 무엇인가를 들여다봅니다.

 까망하양으로 담는 사진은 무지개빛 사진하고 견주어 차분하다고들 합니다. 어수선하지 않다고들 합니다. 다큐멘터리로 알맞은 듯 여깁니다.

 사람은 무지개빛으로 이웃과 동무를 바라봅니다. 사람은 무지개빛으로 살아갑니다. 흙을 만지며 흙내음과 흙빛을 느낍니다. 밥을 먹으며 나락내와 나락빛을 느낍니다. 바람을 마시며 바람내음과 바람빛을 느낍니다. 햇살을 먹으며 햇살내와 햇살빛을 느껴요.

 윌리엄 이글스턴(William Eggleston) 님 사진책 《Los Alamos》는 하나도 대단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빛을 살피면서 사진이 만드는 빛이 무엇인가를 느끼도록 이끌 뿐입니다.

 그러니까, 지난날 사진쟁이들은 굳이 까망하양에 얽매인 채 사진빛을 헤아리지 못했다면, 오늘날 사진쟁이들은 으레 무지개빛을 다루지만 막상 사진빛을 돌아보지 못하는 이야기를 살며시 건드립니다.

 사진은 빛을 만듭니다. 사람은 살아가며 빛을 냅니다. 사진은 사람이 살아가며 내는 빛을 담습니다. 사람은 사진에 담긴 빛을 들여다보면서 저희 삶을 새삼스러이 다시 바라봅니다.

 사진은 모두 다 보여주지 않습니다. 사진은 아주 작은 점 하나를 보여줍니다. 사진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아주 작은 점 하나를 바라보면서 저마다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른 빛을 누리는 저희 삶을 넓거나 깊게 되새깁니다. 점 하나가 발판이 되어 흐름을 곱씹습니다. 점에서 점으로 이어지는 길이를 돌이킵니다. 점에서 비롯해서 점으로 돌아오는 너비를 헤아립니다.

 빛나는 삶입니다. 누구나 빛나는 삶입니다. 무엇을 찍든 빛나는 사진입니다. 이름나며 예쁘장한 모델을 찍어야 빛나는 사진이지 않습니다. 대단하거나 거룩하다는 뜻을 애써 심어야 놀라운 사진이지 않습니다.

 만듦사진은 부질없습니다. 다큐사진은 덧없습니다. 사진은 오직 사진일 때에 아름다우면서 즐겁습니다. 사진은 사람이 살아가는 빛을 사람내와 사람빛을 깨달으며 시나브로 담을 때에 비로소 사진빛을 이룹니다. 사진빛을 이루지 못한다면 사람빛을 모른다는 소리입니다. 사진꿈을 꾸지 않는다면 사람꿈하고 등졌다는 소리입니다. 사진넋이 없다면 사람넋하고 동떨어진다는 소리입니다. 사진사랑이란 사람사랑입니다. 사진이야기란 사람이야기입니다. 사진삶이란 사람삶입니다. 사진길이란 사람길입니다. 사진은 사람입니다. (4344.11.14.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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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밭 사진관
신현림 지음 / 눈빛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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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쟁이 된 능금나무밭에서 사진으로 찍는다
 [찾아 읽는 사진책 67] 신현림, 《사과밭 사진관》(눈빛,2011)



 신현림 님은 사진책 《사과밭 사진관》(눈빛,2011)을 내놓으면서 100쪽에 걸쳐 사진을 보여주고 40쪽에 걸쳐 글을 들려줍니다. 신현림 님은 사진과 글로 함께 이야기합니다. 맨 먼저 “사과꽃이 피고, 빨간 사과가 열리는 곳. 사과밭 쪽을 바라보자, 내게 푸른 바람이 불어왔다. 몹시 따사롭고 정에 넘치는 바람이었다. 그 바람 속에서 사과꽃 하나가 내 손에 사뿐 내려앉았다(105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능금꽃을 신현림 님 사진감으로 삼으면서 하얀 능금꽃과 빨간 능금알이 가슴속으로 어떻게 스며들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푸른 바람을 맞으며 푸른 몸이 되었다면 푸른 사진을 찍습니다. 맑은 바람을 쐬면서 맑은 넋이 된다면 맑은 사진을 담아요. 보드라운 바람을 누리며 보드라운 꿈을 키운다면 보드라운 사진을 이루어요. 사랑스러운 바람을 즐기며 사랑스러운 뜻을 나눌 때에는 사랑스러운 사진을 낳아요.

 신현림 님은 “나는 사과꽃 풍경 속에서 참으로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120쪽).”고도 이야기합니다. 능금밭에서 사진을 찍고 놀고 쉬고 일하면서 더없이 사랑받았구나 싶어요. 신현림 님을 낳은 어머님은 어린 신현림 님이 어른 신현림 님이 되기까지 돌보고 아끼면서 사랑씨를 가슴에 살며시 심었겠지요. 어린 신현림 님은 어른 신현림 님이 되어 딸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동안 딸아이 가슴에 사랑씨를 새롭고 새삼스레 심겠지요.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 사랑을 못 나누란 법은 없어요. 다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란 없어요.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다 다른 빛깔과 결과 내음과 무늬로 사랑을 받아요. 사람들 스스로 얼마나 사랑받는 줄 모르거나 어떻게 사랑받는 줄 못 깨달을 뿐이에요.

 온누리에 넘치는 글은 하나같이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온누리에 흐르는 그림은 한결같이 사랑이 감돕니다. 온누리에 빛나는 사진은 온통 사랑이라 할 만해요.

 신현림 님은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나는 사람들에게 자연 그리고 예술과 가까워지라고 말하고 싶다(128쪽).”는 말마디로 이야기를 마무리짓습니다. 사람은 고운 목숨을 아끼며 살아가자면 누구나 어디에서나 사랑을 하기 마련이요, 사랑을 하는 삶을 누리면, 누구나 어디에서나 예술을 꽃피울 수 있어요. 사랑을 하지 않는다면 삶이 망가지거나 흔들리는 셈이고, 사랑을 하지 않는 삶으로는 어떠한 예술도 꽃피우지 못해요.

 사진책 《사과밭 사진관》에 나오는 능금나무를 가만히 바라봅니다. 어느 능금나무이든 키가 참 작습니다. 죄다 난쟁이 능금나무입니다. 그런데, 이들 난쟁이 능금나무는 가지마다 끈을 묶어 땅바닥에 박아요. 하늘로 뻗지 못하도록 붙잡힙니다. 하늘로 가지를 높일 수 없고, 열매를 ‘하늘을 나는 새’하고 나누지 못해요.

 사람들은 능금알을 맛나게 먹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없이 언제 어디에서라도 퍽 값싸게 장만하면서 능금알을 즐깁니다. 능금알을 즐기면서 이 능금이 어떤 나무에서 어떻게 매달린 채 자라는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능금나무가 무엇을 먹고 능금알을 맺는지 헤아리지 않습니다. 능금알은 능금꽃이 피어야 맺힐 수 있는 줄 깨닫지 않습니다.

 만화영화 〈빨간머리 앤〉을 본 사람이라면, 앤이 처음 푸른지붕집 있는 마을로 들어서려고 마차를 타고 달릴 때에 한 마디조차 벙긋하지 못하면서 눈부시게 하얀 능금꽃 흐드러지는 길을 달린 모습을 떠올리리라 봅니다. 앤이 앞으로 살아갈 마을에서는 능금나무가 우뚝우뚝 솟아요. 하늘을 바라보며 자라요. 마음껏 가지를 뻗고 굵다란 열매를 맺습니다. 먼 옛날, 만화영화 〈빨간머리 앤〉 무대가 되는 마을에서는 농약이든 비료이든 뿌리지 않습니다. 아니, 농약이나 비료나 없어요. 어느 사람도 가지를 끈으로 잡아당겨 땅에 못을 박지 않아요. 스스럼없이 자라나는 능금나무요, 사람들은 사다리를 타고 능금알을 따며, 이렇게 능금알을 딴다지만 멧새와 들새는 마음껏 날아들어 먹고픈 대로 알맞게 능금알 콕콕 쪼며 나누어 먹어요.

 오늘날 한국땅에서는 어른 키보다 높은 능금나무조차 보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한국땅에서는 굵직한 능금알만 얼른 잔뜩 매달아야 하는 슬픈 능금나무만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손쉽게 능금을 깨물어 먹지만, 막상 능금이 사람한테 베푸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느끼지 못합니다. 사랑을 모르는 채 능금을 먹고 배를 먹으며 복숭아를 먹습니다. 사랑을 헤아리지 않으면서 수박을 먹고 참외를 먹으며 토마토를 먹습니다. 더 값싸다는 열매를 먹거나 유기농으로 키웠다는 열매를 먹을 뿐입니다. 사랑으로 씨앗을 심어 사랑으로 보살핀 다음 사랑으로 거둔 열매를 먹지 않아요.

 사진책 《사과밭 사진관》을 곰곰이 돌아봅니다. 이제껏 능금나무나 능금밭을 사진감으로 삼아 예쁜 사랑을 나누려고 마음을 기울여 살가이 만난 사람이 얼마나 있었나 궁금합니다. 꼭 능금나무가 아니더라도 배나무이든 대추나무이든 석류나무이든 감나무이든, 곁에서 애틋하게 사랑하면서 열매를 얻기도 하고 잎과 꽃과 줄기를 고루 즐기면서 사랑한 사진쟁이는 몇이나 될까 궁금합니다.

 스스로 나무를 심는 사진쟁이는 있는가요. 스스로 나무 심을 흙땅을 마련하는 사진쟁이는 있을까요. 스스로 나무와 같이 살아가자며 흙을 누리는 시골자락으로 살림터를 뿌리내리는 사진쟁이는 있나요.

 사진을 찍고 글을 쓴 신현림 님부터 능금밭 능금나무 그대로 결을 살리는 마을에서 딸아이와 예쁘게 뿌리내릴 수 있을 앞날을 꿈꿉니다. 《사과밭 사진관》을 즐긴 사람들 가운데 다문 한 사람이라도 능금밭 돌보는 흙집이라든지 능금나무 곱게 심어 아이들한테 물려줄 넋으로 살아가는 분이 한 사람이라도 나올 수 있기를 꿈꿉니다. (4344.11.11.쇠.ㅎㄲㅅㄱ)


― 사과밭 사진관 (신현림 글·사진,눈빛 펴냄,2011.10.4./1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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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4-25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스로 나무를 심고, 나무를 심을 흙땅을 마련하고
흙을 누리는 시골자락 살림터를 뿌리내리는 사진쟁이, 함께살기님 계시잖아요. ~^^
참, 사과나무와 능금나무는 같은 나무인가요~^^;;
저도 프로필 이름을 '능금나무'로 바꾸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