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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 앤 뽀또그라피
진동선 지음 / 시공사 / 2005년 6월
평점 :
품절



 소설은 사진을 만나고 싶었을까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21] 진동선, 《노블 앤 뽀또그라피》


- 책이름 : 노블 앤 뽀또그라피
- 글 : 진동선
- 펴낸곳 : 시공아트 (2005.6.29.)
- 책값 : 1만 원


 (1) 배에서 갈매기 사진 찍는 사람


 옆지기와 아이하고 배를 타고 영종섬을 다녀왔습니다. 인천사람한테 영종섬은 고작 10분 거리로 배를 타고 들어가 볼 수 있는 몹시 가까운 섬입니다. 저는 이 배를 1994년에 마지막으로 타고 2010년에 탔으니 열여섯 해 만에 탔습니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뻔질나게 탔던 배인데, 고등학교를 마치고 나서는 꼭 한 번 타고는 다시 탈 일이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저는 이무렵부터 인천을 떠나 살았고 인천으로 돌아올 일이 퍽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배삯 250원으로 오간 영종섬인데, 아버지가 장봉섬에서 분교장으로 일하셨기에 중학생 때에는 어머니와 함께 다달이 아버지를 뵈러 배를 타러 장봉섬에 가고자 먼저 영종섬으로 들어가서 버스를 타고 영종섬 끝까지 간 다음 다시 배를 타고 한 시간 반 길을 들어가곤 했습니다.

 지난날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가고 나올 때에는 ‘새우깡 같은 과자를 갈매기한테 던지는 일’은 없었다고 떠오릅니다. 그러나 다시금 곰곰이 떠올리면 몇몇 분들은 갈매기한테 과자나 빵부스러기를 던졌습니다. 다만, 섬사람이라든지 우리 식구처럼 자주 들락거려야 하는 사람들은 과자이든 빵부스러기를 던지지 않습니다. 던질 만큼 과자나 빵을 넉넉히 사먹을 수 있지도 않았지만, 그럴 겨를이나 기운이 없었으니까요. 갈매기한테 과자나 빵부스러기를 던지는 사람은 ‘어쩌다가 배를 탄’ 사람이거나 ‘처음 배를 탄’ 사람이거나 ‘놀러다니고자 배를 탄’ 사람들뿐입니다.

 열여섯 해 만에 영종섬 들어가는 배를 타는데, 배에 탄 사람은 몇 없습니다. 젊은 아가씨 둘이 보입니다. 두 사람은 바지런히 새우깡을 던지고 갈매기 무리는 이들 가까이 붙어서 새우깡을 얻어먹으려고 합니다. 이윽고 중국 관광객이 스무 사람 남짓 탑니다. 이들도 젊은 아가씨를 좇아 과자를 갈매기한테 던집니다.

 갈매기한테 새우깡이나 과자를 던지는 분들은 다들 손에 사진기를 들고 있습니다. 새우깡 던지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달라붙는 갈매기를 사진으로 찍으며 달려드는 갈매기를 사진으로 찍습니다.

 이분들한테 사진이란 무엇일까 살짝 헤아려 보고는 지나칩니다. 이분들한테 갈매기는 어떤 목숨일까 한동안 생각해 보고는 고개를 돌립니다. 갈매기들이 저 새우깡이나 과자부스러기를 먹으며 목구멍이 막히거나 속이 더부룩해지는 줄을 하나도 살피지 않으니까 이렇게 바보스레 새우깡을 던지고 과자부스러기를 던지고 하겠지요. ‘새우깡 받아먹는 갈매기는 소화불량에 걸리거나 목구멍이 막혀서 죽습니다’ 하고 알려준들 알아먹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처음부터 알아먹을 관광객이었다면 조용히 갈매기를 바라보기만 할 뿐 무얼 던진다고 생각하지 않겠지요. 던져 주려면 싱싱한 날물고기를 던질 노릇입니다.

 아기를 데리고 3층으로 올라가 앉아 밥을 먹이며 곰곰이 돌아봅니다. 어쩌면 사진 찍는 사람들한테는 갈매기 사진을 찍자면 옆에서 새우깡을 던져 주어야 할 노릇입니다. 그래야 새우깡을 받아먹으려는 갈매기가 아주 가까이에서 날갯짓을 멈춘 채 날며 사진으로 그럴싸하게 찍혀 줄 테니까요. 바닷바람을 가르며 멈추어 있는 날갯짓을 사진으로 가까이에서 찍기에는 ‘뱃전에서 새우깡 던져 주기’를 할 때만큼 좋은 때가 없을 테니까요. 아주 적은 돈을 들이고도 멋지다는 사진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새우깡을 던지면서 갈매기가 무리지어 달려드는 모습을 뒤로 하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이 사진 한 장이 얼마나 즐겁거나 멋진 추억이 될까 궁금합니다. 다른 곳에 놀러가서도 이와 비슷한 얼거리로 사진을 찍고 사진을 남기며 사진으로 추억을 만들고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2) 소설과 만나지 못한 사진말 《노블 앤 뽀또그라피》


 사진평론을 하고 있는 진동선 님은 《현대사진가론》(태학원,1998), 《사진의 메카를 찾아서》(태학원,2000), 《한 장의 사진미학》(사진예술사,2001), 《현대사진의 쟁점》(푸른세상,2002), 《진실의 시뮬라크르》(푸른세상,2002), 《영화보다 재미있는 사진 이야기》(푸른세상,2003), 《사진과 역사적 기억》(눈빛,2003), 《시간의 풍경》(눈빛,2004), 《한국 현대사진의 흐름》(아카이브북스,2005), 《사진, 영화를 캐스팅하다》(효형출판,2007), 《사진가의 여행법》(북스코프,2008), 《쿠바에 가면 쿠바가 된다》(비온후,2009), 《좋은 사진》(북스코프,2009), 《그대와 걷고 싶은 길》(예담,2010)과 같은 책을 꾸준하게 써내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 사진 이야기를 널리 펼치면서 나누는 몫을 단단히 맡고 있습니다. 《노블 앤 뽀또그라피》는 2005년에 내놓은 책으로, ‘사진을 만난 소설’ 또는 ‘사진을 다루며 이야기를 풀어 가는 소설’을 하나하나 들면서 사진이 우리 문학에서 어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흔히 ‘영화가 만난 사진’이라든지 ‘영화와 어우러지는 사진’을 다루는 사람은 있지만, ‘소설이 만난 사진’을 다루는 사람은 진동선 님을 빼고는 거의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아무래도 사진쟁이 가운데 문학을 즐겨 읽는 사람이 많지 않을 뿐더러, 사진쟁이 가운데 ‘책을 가까이하면서 내 이웃 삶을 들여다보거나 헤아리거나 만나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 나만의 시선, 나만의 세상보기. 신현림은 사진으로 자신을 말한다. 세상과 나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세상을 보고 세상을 통해서 나를 보는 열린 시선을 갖는다 … 기억을 위한 이미지, 삶의 증거로서의 사진. 구효서는 소설 속에서 사진으로 그리움과 상처를 뽑아내고 보듬는다 … 윤대녕이 바라본 사진은 ‘거울’과 ‘창’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에게 사진은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이자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다 … 이청준은 사진이 어떻게 미래를 찍을 수 있는지를 문학적 행위로 완성한다. 사진을 찍을 당시에는 행위만 있을 뿐 해석은 나중에 행해지기 때문에 사진은 언제나 미래라는 관점을 보여준다 … 작가에게 사진은 눈의 기억과 동등한 무게로 자리한다. 눈이 본 역사를 사진도 보았기를 바란다. 눈이 기억하고 있는 것들을 사진이 더욱 오래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어떤 상징적 표현을 담아낸 문학 작품이 바로 김소진의 〈동물원〉이다 ..  (22, 24, 75, 93, 160, 173쪽)


 진동선 님은 《노블 앤 뽀또그라피》에서 신현림, 구효서, 안도현, 김원일, 김인숙, 윤대녕, 최일남, 이청준, 공지영, 조세희, 신경숙, 김주영, 남상순, 하성란, 박일문, 전경린, 김소진, 배수아, 한강, 함정임, 이렇게 스물한 사람 작품을 들춥니다. 소설쟁이 이름을 살피면 하나같이 나라안에 손꼽히는 분들이요, 이분들이 모두 당신들 소설에서 ‘사진을 만났다’고 하면 뜻밖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사진이라고 남다른 문화이거나 예술이지 않습니다. 사람들 누구나 노래를 듣고 춤을 즐기며 영화를 보듯,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씁니다. 쟁이만 사진을 찍으란 법이 없습니다. 쟁이만 그림을 그리고 쟁이만 글을 쓰란 법이 없습니다. 대학교수라야 글을 쓰겠습니까. 중학교만 마친 분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대학교 사진학과를 나와야만 사진을 찍겠습니까. 학교 문턱을 밟아 본 적 없다 하더라도 사진기를 쥘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라안에 이름난 소설쟁이 스물한 분 작품이 아니더라도 어디에서나 어렵잖이 만날 수 있는 ‘사진을 만난 소설’이요, ‘사진이 만나려는 소설’인 셈입니다. 우리한테는 사진과 소설이 만난 이야기를 따로 찾으려 애쓰기보다는 사진과 소설이 ‘만나서 이루어 내는 이야기’가 무엇인가를 짚으면서 우리 삶을 다시금 들여다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뜻이 있고 값이 있으며 사랑과 믿음이 있는 셈입니다.


.. 찰나의 예술인 사진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의 상처가 되고, 눈물이 되고, 그리움이 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사진의 특성이다 …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사진을 보고 슬퍼하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되찾을 수 없는 육신, 돌아올 수 없는 시간, 불행했던 과거에 대한 기억이 그것이다 … 사진은 실재할 수 없는 욕망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사진 앞에서 현실이 될 수 없는 욕심에 놀라 미끄러진다 ..  (32, 45, 137쪽)


 진동선 님은 소설을 하나하나 들추면서 이 작품 어느 대목에서 사진이 나타나고, 이 작품을 통틀어 사진이 어떻게 녹아들고 있는가를 밝힙니다. 소설쟁이마다 사진을 당신 삶이나 문학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거나 껴안는지를 읽어냅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를 놓칩니다. 《노블 앤 뽀또그라피》에 나오는 소설쟁이 스물한 사람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사진을 말하’고자 소설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들 스물한 사람뿐 아니라 소설을 쓰는 어떠한 사람들도 ‘사진을 말하’려는 뜻에서 소설을 쓰지 않습니다. 소재나 주제가 ‘사진’이 될 수 있다 하여도 사진을 말하는 소설이 되지 않습니다. 어떠한 소설이든 오로지 하나, ‘삶을 말하기’입니다.

 이리하여, 이 책 《노블 앤 뽀또그라피》에서는 크나크게 아쉽다고 느낄 대목이 자꾸 드러납니다. 진동선 님은 “찰나의 예술인 사진”이라고 틈틈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사진은 조금도 “찰나의 예술”이 될 수 없습니다. 찍히는 ‘기계 도구’로 바라보기에는 사진기란 아주 잠깐인 모습을 찍는 연장이라 볼는지 모르나, ‘아주 잠깐’을 찍고자 아주 기나긴 나날을 기나긴 생채기와 웃음을 부대껴야 합니다. 삭이고 되뇌고 생각하고 느끼며 어루만지지 않고서는 아무런 사진을 이루지 못합니다.

 사진기 단추를 누른다고 모두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종이조각에 끄적인다고 모두 글이 되지 않습니다. 겉보기로는 책이요 영화요 옷이요 집이요 사람이요 밥이요 할는지 모르지만, 속보기로는 책다운 책이 아니거나 영화다운 영화가 아니거나 옷다운 옷이 아니거나 집다운 집이 아니거나 사람다운 사람이 아니거나 밥다운 밥이 아닌 때가 아주 잦습니다. 안타깝게도, 진동선 님 스스로 너무 멋을 부리며 읊는 말마디 때문에 이 책에서는 사진이 사진으로 빛을 못 보곤 합니다. 소설 하나하나로 살폈을 때에 더없이 아름다운 작품이요, 이 더없이 아름다운 작품에서 더없이 아름다운 사진으로 드러나는 삶자락을 옹글게 잡아채지 않다 보니, “사진은 실재할 수 없는 욕망의 그림자”라느니 “고통과 가난 속에서도 사진의 주인공은 미소 짓고 행복한 모습을 보여준다”라느니 하는 이야기를 되풀이합니다.


.. 한 장의 사진 속에 들어 있는 이미지라는 것도 알고 보면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보이지 않는 약속과 같다 … 어느 민족의 영정사진도 슬프거나 우는 모습이 없다. 약속이나 한 듯 행복한 모습, 기쁨에 겨운 표정을 짓고 있다. 고통과 가난 속에서도 사진의 주인공은 미소 짓고 행복한 모습을 보여준다 … 사진을 알아봄으로써 잊혀진 시간을 되찾고 존재를 되찾는다 ..  (41, 81, 120쪽)


 사진은 우리 삶을 담습니다. 만듦사진이라면 ‘실제로는 없는 모습’을 담는다 할 만할 텐데, ‘실제로는 없는 모습’을 만들자면 ‘실제로 있는 모습’을 알아내거나 찾아내어서 뒤틀거나 비틀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찍는 사진이든 없는 모습을 만드는 사진이든 모두 우리 ‘실제로 꾸리는 삶’을 느끼거나 살피거나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진은 “실재할 수 없는 욕망의 그림자”가 될 수 없습니다. 사진은 바로 “참말 나 스스로 아프거나 기쁘게 부대끼는 삶을 담아내는 발자국”입니다. 이러한 발자국은 욕망이 될 수 있고 꿈이 될 수 있으며 부질없는 몸짓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이 될 수 있고 미움이 될 수 있습니다. 웃음이 될 수 있으며 눈물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떠하게 자리매김하거나 뜻매김을 하든 사진은 우리 삶입니다.

 영정사진은 “고통과 가난 속에서도 사진의 주인공은 미소 짓고 행복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말은 덧없는 중얼거림과 같습니다. 괴로운 삶이면 괴로운 삶이 영정사진에 고스란히 담깁니다. 가난한 삶이면 가난한 삶이 영정사진에 그예 스밉니다. 다만, 괴롭거나 가난하다고 해서 “나쁜 삶”이 아닙니다. 괴롭거나 가난해야지만 “좋은 삶”이지 않습니다. 스스로 괴롭거나 가난한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괴로우면서도 웃는 삶이 영정사진에 담기고, 부자이면서 잘 먹고 잘 지냈다는 삶이면서도 슬프게 우는 모습이 영정사진에 담깁니다.

 《노블 앤 뽀또그라피》 맨 마지막 쪽 맨 마지막 글월에 이르러, 진동선 님은 “결정적 순간이란 없다”고, 바로 “작고 작은, 흔하디흔한, 하찮은 삶의 순간의 부활”이 소설이요 사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마지막 대목 마지막 글월은 《노블 앤 뽀또그라피》라는 책에서 214쪽에 걸쳐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모두 뒤엎습니다. 215쪽짜리 책에서 214쪽에 걸쳐 들려주었던 이야기는 한낱 겉멋이었음을 스스로 밝힙니다. 진동선 님 스스로 소설쟁이 스물한 사람 작품을 들여다보며 ‘소설이 만난 사진’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시나브로 ‘따로 소설이 사진을 만나려 한 적이 없’음을 깨달았거든요. 아니, 진작에 깨닫고 있었으나 일부러 숨기고 있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소설이든 사진이든 그저 우리 사람들 삶을 담는 몸짓이나 손길’이라고 밝히고 있는지 모릅니다.


.. 사진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또 다른 누구에게 무엇인가를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사진은 찍은 사람의 감정, 혹은 찍힌 사람의 인생의 부분이다 … 인간의 눈은 카메라의 눈과 다를 게 없다. 사진의 눈도 육신의 눈처럼 현실 한가운데서 이 모든 것들을 지켜본다 … 문학과 사진, 어떤 창에도 결정적 순간이란 없다는 말은 진정한 삶이란 결정적 순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데 있다. 뿐만 아니라 영원성의 순간도 작고 작은, 흔하디흔한, 하찮은 삶의 순간의 부활이어야 한다 ..  (96, 136, 215쪽)


 책을 꾹 덮으며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진동선 님이 처음부터 이 마지막 글월에서 보여주려던 생각을 보여주었다면 《노블 앤 뽀또그라피》라는 책은 아주 다른 책이 되지 않았을까 하고. 진동선 님은 처음부터 바로 이 마지막 글월을 보여주면서 ‘소설이 만난 사진’이든 ‘사진이 만난 소설’이든 하는 허울에서 벗어나 사진은 무엇이요 소설은 무엇이며 우리 삶은 무엇인가 하는 참으로 깊으며 아름다운 이야기를 찾아나서야 하지 않았을까 하고.

 처음부터 진동선 님 스스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찾아나섰다면 《노블 앤 뽀또그라피》를 쥐어든 사람들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헤아리면서 더 깊고 살가우며 따뜻한 마음밭을 일굴 수 있었구나 싶습니다. 이 책을 읽는 사람뿐 아니라, 이 책을 쓴 진동선 님 스스로 당신 마음밭을 더욱 알차고 아름다우며 기쁘게 추스르거나 다스릴 길을 찾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우리는 아름답고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사진을 찍습니다. 우리는 나 스스로 아름답다고 느끼며 좋아하기에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연극과 영화를 합니다. 우리는 나 스스로 아름다움이 사랑스럽고 멋스러우니까 농사를 짓든 운전대를 쥐든 두 다리로 걷든 하면서 이 땅에서 땀흘리며 부대끼고 살아냅니다.

 사진이란 머나만 남쪽나라에 있지 않습니다. 머나먼 동쪽나라에도 있지 않습니다. 사진이란 바로 우리 집에 있고 우리 이웃한테 있고 우리 아이한테 있으며 우리 동무와 우리 살붙이 누구한테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이란 바로 삶이기 때문입니다. 소설로 빚어내는 이야기란 다름아닌 우리 삶에서 비롯하고, 시이든 연극이든 영화이든 모두 우리 삶에서 이야기를 길어올립니다. 사진이라고 다르겠습니까. 상업사진이든 다큐사진이든 무슨 사진이든 모두 우리 삶에서 이야기를 퍼올립니다. 우리 삶을 우리 스스로 얼마나 진득하게 붙잡거나 마주안을 수 있느냐에 따라서 사진이 달라집니다.

 사진이 아름답도록 하자면 나 스스로 내 삶을 아름답도록 일구면 됩니다. 사진이 훌륭하도록 하자면 나 스스로 내 삶을 훌륭히 가꾸면 됩니다. 사진이 멋스럽도록 하자면 나 스스로 내 삶을 멋스럽게 돌보면 됩니다. 사진이 사랑스럽도록 하자면 나 스스로 내 삶을 사랑스레 어루만지면 됩니다. 사진이 소설을 만나서 우리 삶으로 뿌리내리는 발자국을 좇으려던 진동선 님 손자취가 여러모로 아쉽고 안쓰럽다고 느끼며 《노블 앤 뽀또그라피》라는 책 하나를 책꽂이에 꽂아 놓습니다. 아무쪼록 2011년 2012년 …… 2020년으로 고이 이어지는 진동선 님 삶자락에서 사진 하나 알뜰히 뿌리내리면서 아름다이 자리잡을 수 있기를 빌어 마지 않습니다. 사진을 만나고 싶었던 소설들이 아닌, 삶을 만나고 싶고자 사진하고 함께 길을 걸었던 소설들일 뿐입니다. (4343.6.8.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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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 결정적 순간의 환희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31
클레망 셰루 지음, 정승원 옮김 / 시공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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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을 찍는 기쁨 하나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4] 클레망 셰루,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앎에는 아무 뜻이 없습니다. 안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알아서는 안 되고 잘 알아야 하기 때문이며, 알고 있다면 앎을 머리에 가두지 말고 온몸으로 녹아내어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진찍기에는 아무 뜻이 없습니다. 사진을 찍는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되고 제대로 찍어야 하기 때문이며, 사진을 찍으려 한다면 내 삶이 송두리째 드러나도록 찍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삶을 다루는 글쓰기이고 그림그리기입니다. 삶을 보여주는 노래부르기이고 춤추기입니다. 삶을 영글은 농사짓기이고 아이키우기입니다. 우리 둘레에서 맞아들이거나 부대끼는 일놀이 가운데 삶하고 이어지지 않는 일놀이란 한 가지도 없습니다. 모두 애틋한 삶이고 모두 가멸찬 삶이며 모두 땀흘리는 삶입니다. 밥 한 그릇을 마련할 때에도 애틋한 삶이고, 밥그릇 하나를 설거지할 때에도 가멸찬 삶이며, 아이한테 노래 하나 들려주며 재울 때에도 땀흘리는 삶입니다. 삶을 꾸밈없이 바라보며 껴안는 가운데 곰삭일 수 있으면 굳이 글이나 그림이나 노래나 춤이나 사진이나 만화나 영화나 연극 따위가 없어도 넉넉합니다. 삶을 있는 그대로 살피며 어루만지는 가운데 되뇌일 수 있으면 따로 글이나 그림이나 노래나 춤이나 사진이나 만화나 영화나 연극 따위로 나타낼 때에 눈물과 웃음이 절로 깃듭니다.

 어떤 잘난 사람을 따라하거나 흉내낼 글이 아니요 그림이 아니며 사진이 아닙니다. 대단한 노래꾼을 따라하며 노래를 불러야 맛이 아닙니다. 내 목소리에 감겨드는 느낌을 살리고 사랑하며 부르는 노래가 제맛입니다. 엄청난 춤꾼을 흉내내며 춤을 추어야 멋이 아닙니다. 내 몸에 찾아드는 기쁨과 슬픔에 따라 움직이며 즐기는 춤이 제멋입니다. 스스로 제 결을 찾아야 할 삶이지, 스스로 제 결을 놓거나 버리며 다른 데로 눈길을 돌리고 다른 곳에 손길을 뻗을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겉치레로 내동댕이칠 수 없습니다. 겉을 꾸미는 일놀이란 삶이 아닙니다. 겉을 꾸미는 일놀이란 거짓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속차림으로 보듬어야 합니다. 속을 차리는 일놀이일 때라야 비로소 삶입니다. 속을 차리는 내 삶이란 바로 참입니다.

 사진기를 손에 쥐려 하는 우리들이라 할 때에는 바야흐로 내 삶을 꾸밈없이 들여다볼 뿐 아니라 너그러이 껴안는 매무새여야 합니다. 사진기 다루는 재주를 배워야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습니다. 값나가는 장비를 갖추어야 사진을 잘 찍을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 교본을 챙겨 읽는다든지 사진 강좌를 찾아 듣는다든지 해서 사진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을 잘 찍자면 내 삶을 잘 꾸려야 합니다. 사진을 신나게 즐기고 싶다면 내 삶을 신나게 즐기고 있으면 됩니다. 아름다운 사진을 바란다면 내 삶을 아름답게 여밀 노릇이고, 사랑스러운 사진을 꿈꾼다면 내 삶을 사랑스레 가꿀 노릇입니다.

 나라 안팎에서 참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거나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진쟁이로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님이 있습니다. “카르티에브레송은 사진을 통해 기하학에 대한 관심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냈다. 많은 비평가들은 황금 분할 법칙에 충실한 그의 이미지 위에 구성 도식을 적용해 가며 이 사실을 설명하곤 한다 … 카르티에브레송은 마네킹, 인형, 매춘부, 눈 감은 사람, 잠자는 사람, 꿈을 꾸거나 무언가에 도취된 사람 등 초현실주의 신화의 좋은 구성 요소를 사진으로 담아냈다(38, 41쪽).”고 합니다. 이때에는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님이 갓 사진기를 손에 쥔 때요, 그러니까 새내기 사진쟁이 때 모습이라고 합니다. “카르티에브레송이 한층 성장하는 데는 전쟁의 경험, 수용소 생활, 지인들의 실종 같은 사건들이 밑바탕이 되었다. 그는 ‘전쟁 이후, 염려하던 마음은 달라진 세상에 대한 기대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카르티에브레송은 ‘사진의 추상적 접근법’보다는 ‘인간의 가치’에 더 관심이 많았으며 … 이제 그는 선동적이거나 초현실주의적인 사진가가 아니라, 정보에 따라 적절하게 반응하는 사진기자였다(58, 64쪽).”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픗내기나 새내기였을 적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님은 ‘사진을 할지 그림을 할지’ 망설이는 가운데 ‘돈 걱정을 따로 하지 않는 넉넉한 살림’에서 ‘사진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을 뿐 아니라, ‘사진을 한다 하더라도 무엇을 담아서 보이고 나눌는지’는 살피지 못한 셈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고빗사위를 넘기는 동안 비로소 당신한테 ‘사진이야말로 내 삶이로구나’ 하고 깨달으면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으로 태어났다고 하겠습니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님은 “어떤 상황에서든 그는 늘 좋은 이미지를 노렸다(45쪽).”고 합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아주 마땅한 소리입니다. 언제나 좋은 사진이 되도록 애쓸 노릇이지, 어느 때에는 대충 찍는다든지 어느 때에는 어설피 찍는다든지 어느 때에는 아무렇게나 찍을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 찍어 달라고 해서 찍어 주든 이웃 아줌마가 찍어 달라고 해서 찍어 주든 사랑스러운 집식구가 찍어 주기를 바라며 찍든 늘 온힘과 온마음을 바쳐 나한테 가장 아름답고 즐거운 사진을 일구어야 합니다. 언제 어디에서 무슨 사진을 찍든 이제까지 찍은 사진 가운데 가장 나으며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카르티에브레송은 잡지사들의 요청에 응하면서 사진을 선택하고 의미 있게 배열하는 작업이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78쪽).”고 합니다. 당신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당신 사진을 잡지사에 팔고 신문사에 팔았을 텐데, 이렇게 돈을 받으며 사진을 내어줄 때에 편집자들은 이리 자르고 저리 붙이는 한편, 당신이 사진으로 담아 나누려는 이야기하고 엇나갈 때가 있다고 밝힙니다.

 뭇사람들이 사진밭 큰사람으로 섬기는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라는 이름을 놓고 돌아볼 때에 이런 말마디는 퍽 얄궂습니다. 그러나 큰사람이든 작은사람이든 이런저런 다툼과 부딪힘과 아픔과 생채기를 겪거나 치르는 가운데 차츰차츰 당신 자리를 찾아 가는 셈 아닌가 싶습니다. 주문에 맞추는 글ㆍ그림ㆍ사진이 아니라, 부탁에 따르는 글ㆍ그림ㆍ사진이 아니라, 바로 내 삶에 맞추는 글ㆍ그림ㆍ사진이 되어야 시나브로 나를 비롯한 내 둘레 사람들 모두한테 웃음과 눈물을 선사하는 땀방울로 영글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당신 스스로 붙인 이름이 아닌 미국에서 당신 사진을 전시하던 이들이 처음 붙였던 이름이라는 “결정적 순간”이라는 말마디는, 우리 말로 쉽게 옮기면 “바로 이 사진 하나 얻는 때”를 있는 그대로 사진으로 담아내는 삶이었다는 당신 매무새는, 사진찍기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한테든 사진찍기를 즐기고자 하는 사람한테든 고마운 이야기 하나라고 느낍니다.

 “카르티에브레송은 언제나 발생한 사건자 자체보다는 그 안의 진실을 다양하게 해석해 보여주는 상황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96쪽).”고 하니까요. ‘순간을 기다리며 찍는 당신’이 아닌 ‘어느 한때에 깃든 삶을 누구보다 스스로 느끼며 사진기 단추를 누르는 당신’이었을 테니까요.

 사진을 찍는 사람은 많지만, 사진을 찍는 삶을 글로 함께 적바림하는 사람은 몹시 드문 가운데, 당신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님은 우리한테 남긴 사진 못지않게 우리한테 남긴 글이 제법 많습니다. 이리하여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라는 자그마한 책에는 당신이 걸어온 사진삶이 차곡차곡 담기는 한편, 당신이 밝히며 늘 거듭나고 있던 사진말이 알알이 깃들어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당신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라는 이름을 들먹이는 사람은 꽤나 많으면서, 정작 당신 사진 작품을 찬찬히 챙겨 본다든지 당신 사진 이야기를 곰곰이 찾아 읽는다든지 하는 사람은 그리 안 많구나 싶습니다. 브레송이 어떻고 저떻고 하고 입방아를 찧기 앞서, 브레송이니 부라자이니 어렁저렁 말밥을 삼기 앞서, 사진 하나에 온삶을 들여 땀과 품과 사랑과 믿음을 펼쳐 온 삶자락을 들여다볼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브레송이라 하는 사람이 사진을 어떤 매무새로 껴안았는지 살필 노릇이고, 브레송이라 하는 사람이 사진을 어떻게 느끼고 있었는가 돌아볼 노릇이며, 브레송이라 하는 사람이 사진에 어떤 숨결을 불어넣었는지 생각할 노릇이라고 봅니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라는 작은 책에는 “결정적 순간의 환희”라는 이름이 하나 덧붙습니다. 책을 두 번 내처 읽고 나서 이 덧이름을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라는 사람한테는 더도 덜도 아닌 “사진을 찍는 기쁨”일 뿐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웃갸웃해 봅니다. 찍힌 사진을 나중에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바로 이때”를 찍었다 할는지 모르고, 찍은 사진을 두고두고 바라보는 사람들이 느끼기에 “기막힌 모습을 짜릿하게” 찍었다 할는지 모르나,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으로서는 ‘찍어야 할 모습을 찍었’을 뿐이요, ‘담아야 할 삶을 담았’을 뿐 아니랴 싶습니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라는 작은 책에 담긴 당신 삶과 넋을 돌아보니 그저 이런 느낌이 듭니다. 떠들썩하니 무슨무슨 이름을 갖다 붙이며 떠받들 브레송이 아니라, 그예 사진을 사랑하고 아끼며 사진과 한몸이 된 삶이었던 브레송이라고 느끼며 우리 스스로 우리 깜냥껏 사진을 사랑하고 아끼며 사진과 한몸이 될 길을 찾아나서면 즐거우리라 생각합니다. (4343.6.5.흙.ㅎㄲㅅㄱ)


[책에서 그러모은 생각조각]
ㄱ. 나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장면이나 일화를 찾아다니지 않았다. 그저 그것들이 거기 있었다.
ㄴ. 마그네슘 플래시는 빛이 전혀 없을 때라도 허용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사진은 참을 수 없을 만큼 위협적인 것이 되고 만다.
ㄷ. 인간적 진실이 훼손되지 않도록 인위적인 면을 반드시 피하고 사진기와 사진 찍는 사람을 의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ㄹ. 만일 좋은 사진을 조금이라도 잘라낸다면 결국 균형은 깨지게 된다.
ㅁ. 사진기는 작업의 도구이지 그저 예쁜 장난감 기계가 아니다. 이 기계로 우리가 하려는 일에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ㅂ. 나는 내 사진을 트리밍하거나 피사체를 재배치해서 좀더 나아 보이도록 시도한 적은 거의 없다. 만일 사진이 그리 좋지 않았다면 프레임 안의 기하학적 비율이 잘못된 것이고, 그렇다면 여기저기 변형하여 인화하더라도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ㅅ. 사진가는 자신을 잊고 순간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꿰뚫어보며, 상대가 지금 그 위치에서 자기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사람의 내면으로까지 정교하게 카메라를 들이밀어야 한다.
ㅇ. 탐미주의에 앞서 현재의 삶이 드러나 보이는 이미지에 애착을 가진다.
ㅈ. 나는 보도기자이지 화실의 초상화가가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고 행동하는 외부세계(혹은 내적 세계)는 내 작품의 주제이자 나에게는 큰 의미를 지닌 무대 배경이다.
ㅊ. 애호가들은 자신의 세계에 빠져 있고, 기술자들은 시험 중인 기계 속에 파묻혀 있다.
ㅋ. 사실 우리 모두는 모방자들로서, 무엇보다 ‘본질’을 모방해야 한다. 그리고 다음 단계에서 우리 자신을 부담 없이 표현해야 한다.
ㅌ. 나는 위대한 사진을 찍으려 일부러 애쓰지 않는다. 내가 얻은 모든 것이 위대한 사진이다.
ㅍ. 나는 사진보다 삶에 더 관심이 많다.
ㅎ. 나에게 보도사진은 눈과 손, 그리고 두 다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클레망 셰루 씀,정승원 옮김,시공사 펴냄,2010.5.24./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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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피우는 사연
전민조 지음 / 대가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사진을 찍는 삶 이야기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20] 전민조, 《담배 피우는 사연》


- 책이름 : 담배 피우는 사연
- 글ㆍ사진 : 전민조
- 펴낸곳 : 대가 (2010.5.15.)
- 책값 : 2만 원



 (1) 사진기 드는 마음


 사진을 잘 찍는 사람만 사진기를 들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을 못 찍는 사람 또한 사진기를 들 수 있으며, 사진을 어설피 찍는 사람 누구나 사진기를 들 수 있습니다. 사진을 훌륭히 찍는 사람만 사진기를 든다면 우리 누리는 얼마나 슬프거나 메마르거나 치우쳐 있을까요.

 밥을 잘 하는 사람만 밥상을 차릴 수 있지 않습니다. 밥솜씨가 모자라더라도 밥상을 차릴 수 있습니다. 어린이도 밥상을 차릴 수 있고, 푸름이와 젊은이와 늙은이 누구나 밥상을 차릴 수 있습니다. 함께 수저를 들며 배고픔을 달랠 사람들 마음을 따사로이 보듬을 줄 안다면 모두모두 밥상을 차릴 수 있습니다.

 애보기를 잘 하는 사람만 아이를 보며 키울 수 있지 않습니다. 애보기에 어설픈 사람도 아이를 보며 키워야 합니다. 애보기를 해 보지 않았다 한들 애보기를 손사래쳐야 할 까닭이란 없습니다. 여자들은 아기를 배에 열 달 보듬고 있다고 낳기에 남자들과 견주어 아기한테 쏟는 사랑이 남다를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기를 내 배에서 보듬어 보지 못했다 하여 애보기를 안 한다든지 아이가 눈 똥오줌을 못 치운다든지 할 까닭이란 없습니다. 사랑과 믿음으로 애보기를 할 노릇입니다.

 사진기를 들 때마다 생각합니다.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이 사진기는 얼마나 싸구려 사진기인가 하고. 그렇지만 이 싸구려 사진기를 들고 있는 내가 ‘싸구려 기계를 쓰니까 싸구려 사진만 찍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계는 싸구려일지라도 내가 내 손으로 이루는 사진에는 내 온 사랑과 믿음을 따뜻하고 넉넉하게 어루만지며 일구려는 손길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손에 들고 있을 이 사진기가 비싸구려 사진기일지라도 더 나은 사진이나 더 마음에 드는 사진이나 더 괜찮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퍽 비싸구려 사진기를 어쩌다 한 번 손에 쥐어 보면 속으로 눈물이 납니다. 비싸구려 사진기로 이 사진기를 갖고 있는 분 모습을 찍어 드리다 보니, 이 비싸구려 사진기에 찍히는 모습들은 그야말로 대단하더군요. 대충 찍는 사진이란 없겠습니다만, 대충 찍어도 작품처럼 보이니까요.

 비싸구려 사진기를 내려놓고 제 싸구려 사진기를 집어듭니다. 낡고 닳은 제 싸구려 사진기를 손에 듭니다. 내 살림살이가 푸지지 못해서 서운하느냐고 속으로 묻습니다. 내 사진기는 싸구려이기 때문에 내가 바라거나 생각하거나 마주하는 사람들 삶자락을 꾸밈없이 담아내지 못하느냐고 혼잣말로 되뇝니다.

 틀림없이 그 비싸구려 사진기를 갖고 있다면 오늘 제가 담아내어 나눌 사진은 한결 빛나거나 아름다이 보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들고 있는 사진기는 싸구려인 탓에 더 마음을 쏟고 더 손을 쓰며 더 몸을 부려서 사진 하나를 일구어야 합니다. 아무리 비싸구려 사진기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대충 찍는 일이란 없지만, 대충 찍을 수 없는 사진임을 더 뼈저리게 깨달으며 사진을 찍습니다. 살짝 어긋나기만 하여도 엉터리가 되는 싸구려 사진기이니 훨씬 힘을 내고 땀을 흘리며 다리품을 팝니다. 무엇보다도 사진기 눈으로 들여다볼 때하고 사진으로 찍힐 때하고 넓이가 달라 애를 먹으나, 이렇게 애를 먹으면 애를 먹는 대로 ‘사진기를 들여다보는 만큼’이 아닌 요모조모 어긋나게 나오는 푼수를 헤아리며 찍으면 그만이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다른 분들보다 더 사진에 힘을 들여야 하고 마음을 바쳐야 하니까, 나는 나로서 한결 반갑고 고마운 사진을 얻는 셈 아니겠느냐고 생각합니다.

 날마다 두 끼니나 세 끼니 밥을 해서 아이와 함께 먹습니다. 아빠가 아이한테 가장 맛나거나 좋을 밥을 해 준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아이는 아빠가 차려 준 밥을 늘 고맙게 받아먹지는 않고 고개를 요리조리 홱홱 돌리며 밥은 안 먹겠다고 투정을 부리곤 합니다. 애 아빠는 아이가 밥을 안 먹으려 할 때마다 기운이 빠지고 섭섭하며 고개를 떨굽니다. 애 아빠가 더 밥을 잘 하지 못한 줄은 살피지 않고 그냥 기운이 빠집니다. 그래도 아이는 달리 아픈 데 거의 없이 용케 무럭무럭 큽니다. 참으로 씩씩하게 뛰어놉니다. 끝없이 수다를 떨고 끊임없이 노래를 부릅니다. 아이가 아빠보다 기운이 좋아 펄펄 날듯 놀고, 아빠는 집살림이며 돈벌이이며 다른 일이며 치르느라 헉헉댑니다. 아이는 배고플 때에 차려 주니까 먹는 밥일는지 모릅니다. 어쩔 수 없이 먹어 주는 밥일는지 모릅니다. 애 아빠 스스로 아이 눈높이가 되어 아빠 된 사람이 이런 밥을 차려 주면 먹을 만할까 하고 헤아린다면, 저로서는 부끄럽게 여기며 더 마음을 쏟아야 할 텐데, 언제나 바쁘고 힘들다는 핑계로 한숨만 쉬고 맙니다. 더 애쓰고 더 용쓰며 더 힘쓸 노릇인데 자꾸 풀이 죽습니다.

 그러고 보면 아이가 먹고 싶어 하는 밥거리를 좀더 살뜰히 마련해 주어야 할 노릇인데, 아이 입맛과 밥맛에 잘 못 맞추고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애 아빠 입맛과 밥맛이 아닌 아이 입맛과 밥맛을 살피며 밥을 차리고 밥술을 떠 줄 노릇인데, 그저 배고픔 때울 끼니거리만 해 오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하루 내내 힘들여 찍은 사진을 셈틀로 옮기며 갈무리하며 생각합니다. 군더더기와 티끌 하나 없이 제대로 찍은 사진은 제가 찍은 제 사진이면서 스스로 웃고 스스로 웁니다. 군더더기가 한 군데라도 있으면 더없이 잘 찍은 괜찮은 사진이라 여기면서도 이 사진을 쓰고픈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다시 가서 새로 찍어야겠네’ 하는 생각이 들며 주눅이 듭니다. 필름사진기라든지 더 값나가는 좋은 장비였다면 다시 찍을 일은 거의 안 생겼을 테지요. 그래도 저 스스로 더 마음을 쏟지 못한 탓에 사진을 다시 찍을 일이 생기고 만다고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아니, 마음을 고쳐먹어야지 어쩌겠습니까. 달삯 치를 돈조차 빠듯한데 무슨 사진 장비 타령을 합니까.

 그러니까 애 아빠가 차린 밥상을 아이가 그닥 달가와 하지 않는다면, 애 아빠는 ‘내가 오늘 밥을 제대로 못했나?’ 하고 뉘우치면서 밥을 아예 새로 차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따가 뭘 해야 하고, 낮이나 저녁에 누굴 만나야 하고 하면서 ‘이 녀석아, 얼른 좀 먹어!’ 하고 다그쳐서는 안 됩니다. 먹을 만하지 않게 밥을 차려 놓고 억지로 쑤셔넣는다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아이가 아직 많이 어려 어른이 알아들을 말을 못한다고 함부로 굴면 안 됩니다. 사진을 아직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 ‘이 사진 꽤 괜찮은데 왜 버리셔요?’ 하고 묻는다 할지라도 나 스스로 이 괜찮다는 사진에서 군더더기와 티끌을 한 군데에서라도 보거나 느낀다면 마땅히 버려야 합니다. 저한테 괜찮은 사진이라는 소리를 들으려면 빈틈도 군더더기도 티끌도 어설픔도 모자람도 없어야 하니까요. 그릇 빚는 이들이 옹근 그릇이 아니면 모두 깨부수듯, 사진찍는 이들 또한 옹근 사진이 아니라 한다면 필름은 불사르고 파일은 지울 노릇입니다. 다시, 새로, 거듭, 또다시, 새삼스레, 자꾸자꾸 찍고 또 찍어야 합니다.

 ‘바로 이 한 장’이라 할 만한 사진을 얻어야 합니다. ‘꽤 괜찮은’ 사진을 얻어서는 안 됩니다. 올 한 해 내 마음을 넉넉히 채우는 ‘바로 이 한 장’을 얻어야 합니다. 앞으로 열 해와 스무 해를 보내는 동안에도 즐거이 마주할 ‘바로 이 한 장’을 얻어야 합니다. 내가 숨을 거두어 딸아들한테 물려줄 때에도 기쁘게 웃으며 물려줄 ‘바로 이 한 장’을 얻어야 합니다.

 사진밭은 그림밭하고 견주어 훨씬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입니다. 사진을 찍어 남길 수 있는 작품 숫자하고 그림을 그려 남길 수 있는 작품 숫자는 엇비슷합니다. 제대로 사진을 찍고 올바로 사진을 찍으며 훌륭히 사진을 찍으려 한다면 ‘한삶을 걸쳐 이룰 아름다운 사진’ 숫자란 몇 안 됩니다. 그럭저럭 괜찮은 사진이 많다 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참 아름다운 사진 한 장’ 숫자는 아주 적습니다. 사진기를 손에 쥐면서 ‘사진은 참 쉽게 찍을 수 있어요’ 하고 말하거나 생각한다면 모두 엉터리입니다.


 (2) 바보스럽게 찍은 《담배 피우는 사연》 전민조 님


 사진쟁이 전민조 님이 2010년 새 사진 작품을 내놓았습니다. 해마다 새로운 사진 작품을 내놓고 있는 전민조 님은 앞으로 2011년에도 새 작품을 내놓을 터이며, 2012년에도 새 작품을 내놓으리라 봅니다. 그야말로 꾸준하고 이야말로 한결같으며 더할 나위 없이 새롭습니다. 사진찍기란 ‘꾸준함’과 ‘한결같음’과 ‘새로움’ 세 가지 매무새를 갖추어 찍어야 함을 당신 스스로 몸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가운데 한 가지조차 제대로 안 갖추거나 못 갖춘 채 어설프고 어줍잖으며 엉터리일밖에 없는 사진을 쏟아내는 ‘거짓 쟁이’가 넘치는 한국땅에서 전민조 님 사진밭은 참 고마운 선물입니다.


― 박정희 정권 시절 외무부장관을 지낸 이동원(1926∼2006) 장관은 당시 한ㆍ일회담을 성사시킬 때의 반대여론을 회고하면서 줄담배를 피웠다. 담배연기가 이내 방 안에 안개처럼 꽉 차서 그의 얼굴이 희미해 보였다. 사진은 미래를 찍지 못하는 것이다. 사진기가 찍은 인물은 순식간에 과거의 인물이 되었다. (20쪽/1991.1.14.연희동 자택)

― 박 대통령 사망 후 정치인 김대중(1924∼2009)은 상도동 김영삼 자택을 찾아 환담했다. 그는 지금까지 사진기자들한테 보여준 도전적인 얼굴이 아닌 아주 편안한 얼굴로 비장의 파이프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그의 표정은 앞으로 어떻게 어두운 정국을 헤쳐 나가야 대권을 잡을지 라이벌 김영삼 앞에서 무엇인가 골똘하게 구상하는 듯했다. (28쪽/1979.12.29.상도동 김영삼 자택)


 여원사와 한국일보사와 동아일보사에서 사진기자로 일한 다음 정년퇴직을 한 전민조 님은 지난 2005년부터 해마다 사진잔치를 열고 사진책을 펴내고 있습니다. 2005년은 ‘섬’, 2006년은 ‘서울’, 2007년은 ‘한국인의 초상’, 2008년은 ‘기자가 바라본 기자’, 2009년은 ‘농부’이고, 2010년은 ‘담배 피우는 사연’입니다.

 이 나라에 사진기자는 수두룩하게 많으나 ‘한 해에 한 번씩’은 어렵다 하여도 ‘여러 해나 열 해에 한 번’쯤이라도 사진잔치를 열며 사진책을 펴내는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누구보다 사진을 많이 찍고 누구보다 더 많은 곳을 다니며 누구보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날 사진기자라 한다면, 누구보다 사진으로 나눌 이야기가 많으리라 생각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정작 사진기자로 일하며 사진잔치와 사진책을 신나게 선보이는 사람은 너무 적은 우리 나라입니다.

 일에 치여 바쁘기 때문일까요. 찍어 달라는 사진만 찍어도 속이 얹히거나 메스꺼워 도무지 ‘내 사진’을 일굴 수 없기 때문일까요. 나중에, 한참 나중에 선보이며 온누리를 크게 놀래키고 싶기 때문일까요.


― 삼성 이병철 회장의 장남으로 태어난 이맹희 씨는 기자들을 불러서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이야기를 갑자기 쏟아냈다. 허공에 담배 연기를 날리며 고뇌하는 얼굴을 보면서 가진 것이 너무나 많아서 겪는 재벌가의 암투와 갈등의 주인공보다 오히려 아무것도 없이 카메라와 몸뚱이만 가지고 세상을 향해 사진만 찍고 있는 사진기자 직업이 정말 속편하다는 생각을 했다. (48쪽/1988.12.13.장충동 자택에서)

― 영업택시 운전기사가 달리면서 담뱃재를 도시를 향해 털고 있다. 꽁초와 담뱃재는 도시에 버리고 자신의 좁은 공간만 깨끗하게 하려는 이런 얄궂은 심리는 거리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런 풍경은 윗목에 쓰레기를 모아 놓고 아랫목에서 코를 막고 누워 있는 심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164쪽/2010.3.20.강남구 논현동)


 해마다 내놓는 전민조 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두 가지 생각이 듭니다. 먼저, 당신이 올해 새로 선보이는 사진 가운데 2/3나 3/4은 당신이 사진기자로 뛰었기 때문에 찍을 수 있었구나 싶습니다. 다음으로 1/3이나 1/4은 당신이 사진기자를 그만둔 뒤에 여느 사진쟁이와 다를 바 없이 스스로를 낮추면서 새롭게 사진길을 걷는 ‘새내기 사진꾼’으로 여기고 있기에 이런 사진을 얻는구나 싶습니다.

 신문사 사진기자일 때에는 ‘위에서 주어진 대로’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때때로 ‘내가 내 사진감을 만들어서’ 신문에 싣기도 하지만, 신문에 싣는 사진은 사진쟁이 한 사람 목소리로 선보일 사진일 수 없습니다.

 홀가분한 사진쟁이 한 사람으로 찍는 사진일 때에는 ‘나 스스로 좋아서’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내 사진을 바라보거나 들여다보거나 찾아보는 사람은 ‘이 사진쟁이는 뭘 그리 좋아해서 이런 사진을 다 찍나?’ 하는 궁금함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누구나 다 찍는 사진이 아닌 사진쟁이 한 사람 눈길로만 들여다보며 담을 수 있는 사진을 일구어야 합니다. 최종규면 최종규 사진을 찍고 전민조면 전민조 사진을 찍으며 강운구면 강운구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사진만 척 보아도 ‘어허라, 아무개 사진이네!’ 하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와야 합니다.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면서 ‘이게 누구 사진이더라?’ 하고 있다면 이런 사진은 엉터리입니다. 이런 사진은 흉내내기 사진이거나 짜깁기 사진입니다. 이런 사진은 너절한 사진이요, 무엇보다도 ‘사진’이라는 이름을 내걸 수 없는 종이조각입니다.

 전민조 님 사진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지난 1960년대 것부터 2010년대 것까지 두루 있습니다. 한 사람 작품을 이리 오랜 나날에 걸쳐 한꺼번에 돌아볼 수 있는 일이란 더없이 반갑고 고마운 노릇입니다. 사진삶을 쉰 해 아우르는 사진쟁이란 이 나라에 몇 없습니다. 더욱이 사진삶 쉰 해를 늘 새내기 마음으로 새내기 사진으로 일구려는 사람은 열 손가락으로 다 꼽기조차 힘듭니다. 그러나 오래도록 사진을 찍은 사람이라 해서 더 훌륭하지 않습니다. 오랜 나날 사진기를 붙잡고 필름 수십만 통을 썼다 할지라도 더 아름답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삶을 아름다운 넋으로 일구며 아름다운 손길이 서린 아름다운 사진을 바라지, 무슨무슨 이름값이나 권력이나 얼굴값으로 사진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어느 대가 한 분 작품이 나왔소이다!’ 해서는 사진이 팔리지 않습니다. ‘이야, 이번에 이런 좋은 작품이 나왔습니다!’라든지 ‘우와, 이번에 이런 아름다운 작품이 나왔습니다!’라 해야 사진이 팔립니다.


.. 실제 신문, 잡지의 사진 찍는 일은 인터뷰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담배 피우는 사진은 재미있게 찍어 와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잘 게재하지 않았다. 유명인사로 알려진 인물들의 그럴듯한 외양 뒤에 숨겨진 참모습은 담배 피우는 표정이었다. 완벽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담배를 피우면서 사색하는 모습은 모두 고독해 보였다. 어제의 승리자에서 패배자로 전락한 기업가가 연신 뻐끔 담배로 울분을 토하는 표정, 담배가 꼭 남성들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표정으로 거침없이 연기를 날리는 드라마작가 … 모든 흡연자는 자신들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고 담배가 몸에 나쁜 줄 알면서 습관적으로 피우는 사람이 많았다 ..  (6쪽)


 사진책이 사진책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사진을 사진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이 나라입니다. 글을 쓰거나 글을 좋아한다는 분들은 어김없이 글책은 많이 사서 읽는데, 그림책이나 사진책이나 만화책은 참으로 멀리하고 있는 알쏭달쏭한 이 나라입니다. 아름다운 글 하나 엮는 일과 아름다운 그림 하나 그리는 일과 아름다운 사진 하나 일구는 일과 아름다운 만화 하나 낳는 일은 얼마나 다를까요. 어느 일이 더 힘들거나 어느 일이 더 값있을까요.

 아름다운 책이면 한결같이 아름다운 책입니다. 글책만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림책이나 사진책만 아름답지 않습니다. 만화책만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이나 만화라고 하는 틀을 넘어 ‘사람으로 살아가는 아름다움’을 담아서 나누려는 책을 만나야 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 피땀을 흘린 손자국을 글책에서 만나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피땀을 쏟은 손자취를 그림책에서 만나며, 사진을 찍는 사람이 피땀을 바친 사진책을 만나는 가운데, 만화를 빚는 사람이 피땀을 들인 만화책을 만날 노릇입니다.

 참말로 피땀이 깃든 책은 글책이든 그림책이든 사진책이든 만화책이든 우리 마음과 생각을 곱게 어루만집니다. 피땀이란 바로 사랑과 믿음이거든요. 사랑과 믿음이란 다름아닌 글쟁이ㆍ그림쟁이ㆍ사진쟁이ㆍ만화쟁이가 눈물과 웃음으로 부대낀 좋은 삶이거든요. 좋은 삶이란 어디 먼 나라에 있는 삶이 아니라, 바로 우리 둘레에서 늘 마주하고 살을 섞는 여느 수수한 사람들 삶이거든요.


.. 나는 그때 지옥에서 기어나와 천당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지구상에서 가장 깨끗한 신선한 공기를 맡는 것 같았다. 국내 산에 올라 그렇게 숲속을 걸어다녀도 전혀 느끼지 못했던 향기를 그때 처음 느껴 본 것이다. 나는 그때 인간이 아무리 돈이 많고 물질이 풍요로워도 숲이 없는 황폐한 환경에서는 어떤 행복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땅바닥에 발을 딛자 본능적으로 담배를 한 대 입에 가져가게 되었는데 담배연기를 마시자마자 기침을 하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깨끗한 공기를 마시고 왔던 가슴에서 담배 거부 반응이 일어난 것이다 … 강대국들의 담배회사는 지금까지 약소국의 젊은이들 건강은 염려하지 않고 온갖 방법으로 망쳐 놓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 담배를 끊고 소란스런 세상을 살아가면서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담배 피우는 사람의 입에서는 향긋하지 못한 냄새가 풍겨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은 담배 피우는 사람과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기가 힘들다는 사실이다 ..  (8∼9쪽)


 《담배 피우는 사연》이라는 사진책을 내놓은 전민조 님은 똑같은 이름을 붙인 사진잔치를 2010년 5월 19일부터 6월 1일까지 서울 관훈동 토포하우스(02-734-7555)에서 엽니다. 사진책과 전시회 알림쪽지에 적힌 글월을 읽다 보면, “그래서 ‘담배는 일종의 마약이며 국민들을 병자로 만드는 독약’이라는 생각에서 요즘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항상 불안하게 쳐다보면서 《담배 피우는 사연》이라는 사진집을 출간하게 되었다. 이 사진집은 금연운동에 바치는 사진집이다” 하는 이야기로 끝마무리를 짓습니다. 이 나라에 담배를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함부로(?) 끄적이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렇지만, 담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콧방귀를 뀌든 손가락질을 하든, 전민조 님 스스로 ‘담배 사랑이’였다가 ‘담배 끊은이’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말은 얼마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게가다 전민조 님은 사진쟁이입니다. 사진으로 말을 걸고 사진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입니다. 당신 스스로 담배 태우는 사람들 삶을 사진으로 보여준다고 할 때에는 무슨 뜻이 한 가지 있기 마련입니다.

 담배란 무엇인가 살피고, 담배가 태어난 밑뿌리는 어떠하며, 사람들이 담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담배가 우리 삶에 어떻게 자리잡고 있으며, 담배를 우리 삶에서 어떻게 마주해야 좋을까 하는 숱한 생각을 사진으로 풀어낼 전민조 님입니다. 이리하여 사진을 들여다보고 사진책을 넘기면서 싱긋 웃음이 납니다. 사진쟁이 전민조 님은 ‘담배 끊자’고 말하고 싶은 마음에 《담배 피우는 사연》을 내놓으셨지만, “인간이 아무리 돈이 많고 물질이 풍요로워도 숲이 없는 황폐한 환경에서는 어떤 행복도 느낄 수 없”음을 깨달은 당신 말씀마따나, 숲이 없고 물질만 넘치는 오늘날 우리 도시 삶터에서는 이 사진책을 들여다보며 ‘어, 담배나 한 개비 물어야겠네’ 하는 분들이 훨씬 많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아무래도 ‘그래, 담배가 몸에 얼마나 나쁘고 우리 터전을 얼마나 무너뜨리는데’ 하고 생각하면서 절로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무는 사람이 많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4343.6.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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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mily Zone - 선우 家의 자연 이야기, 선우중호 가족 사진집
선우중호 사진 / 눈빛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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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기 살 돈으로 사진책 사소서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19] 선우중호 가족 사진집, 《FAMILY ZONE》



- 책이름 : FAMILY ZONE, 선우家의 자연 이야기
- 글, 사진 : 선우중호와 네 식구
- 펴낸곳 : 눈빛 (2009.12.2.)
- 책값 : 3만 원 

 




 (1) 사진기는 어떻게 사야 하는가


 지난 2007년 4월 15일부터 인천 배다리 헌책방거리 한켠에 문을 열어 놓고 있던 사진책 도서관은 2010년 6월 15일에 문을 닫기로 했습니다. 세 해하고 두 달을 비싼 달삯 치르며 버티었으나, 인천이라는 도시에서 사진벗을 마주하기 힘들고 벅차 시골마을로 살림터와 책터를 옮기기로 했습니다.

 꾸려야 할 책짐이 5톤 짐차로 석 대를 가득 채우고 남을 만큼 되기에 몇 달 앞서부터 틈틈이 책을 묶어 두고 있습니다. 집살림 꾸리고 아이 함께 돌보는 가운데 겨우 틈을 조금 내어 책을 묶기에 퍽 오래 걸립니다. 내 책들이 어느덧 열한 번째 묶이며 터덜터덜 먼 나들이를 떠나는가 하고 생각하면 미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번에 옮기면 적어도 열 해 동안은 느긋하게 쉬도록 해 주고 싶다고 생각해 봅니다. 두 번 다시 안 옮겨도 되도록 살림돈이 넉넉하여 마땅한 집 하나를 마련한다면 가장 좋을 테지만, 우리 딸아이가 오늘 제 나이만큼 크더라도 이런 일은 생기지 않으리라 봅니다. 그저 앞으로 또다시 책짐을 꾸려야 할 수 있으니, 나중에는 더 많은 책을 더 오랜 품을 들여 묶고 나를 만한 힘이 튼튼히 살아 있도록 몸을 추슬러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한창 책짐을 꾸리고 있을 때에 도서관에 손님 두 분 찾아옵니다. 살짝살짝 책 구경을 마친 두 분이 도서관을 나설 무렵 저한테 사진 한 장 찍어 달라 말씀합니다. 사진기를 어깨에 걸치고 있던 분이 당신 짝꿍을 찍어 달라 말씀하는군요. 그냥 당신이 찍으면 될 텐데 왜 나한테?

 한 분만 찍을 까닭이 없기에 두 분이 함께 앉으면 찍겠다고 해서 두 분을 앉히고 사진기를 건네받습니다. 사진기에 붙인 렌즈는 제가 쓰는 렌즈하고 같은 값싸구려이지만, 사진기 몸통은 저로서는 꿈꾸기 어려운 ‘마크 머시기’라는 녀석입니다. 사진기를 왼손으로 감싸고 오른손으로 단추께를 만지작거리는데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퍼뜩 생각합니다. ‘이러니까, 돈있는 사람이라면 마크 머시기를 쓰는구나’

 웃는 얼굴로 걸상에 앉은 두 분을 사진기로 들여다봅니다. 오, 이런. 같은 값싸구려 렌즈이지만 마크 머시기에 붙은 이 렌즈로 들여다보이는 모습이란 넓고 시원합니다. 한 마디로 아주 좋습니다. 속으로 눈물 찔끔 납니다. 그런데 사진 한 장 두 장 시험판으로 찍어 보니 제가 생각하던 사진이 나오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 하고 살짝 생각하다가 사진 설정과 화이트밸런스 설정 두 가지를 눌러 봅니다. 아하, 이분은 이 두 가지 설정을 처음 그대로 놓고 있군요. 사진기를 장만한 사람들은 사진 설정이나 화이트밸런스 설정이나 다른 여러 가지를 당신 사진감에 맞추어 손질해 놓아야 하는데 아직 아무것도 손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저 감도만 800으로 돌려놓아 실내에서 어둡지 않게 나오는 데에만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제가 늘 찍는 대로 사진 설정은 ‘풍경’으로 고치고, 화이트밸런스 설정은 ‘그늘’로 고칩니다. 저는 디지털사진기를 장만하고 두 해쯤 뒤에 비로소 이 설정을 처음 깨달았는데, 어느 디지털사진기이든 필름사진기와 견주어 ‘좀더 밝게’ 찍히고 ‘좀더 날카롭게’ 찍힙니다. 디지털사진기에 맞추어져 있는 처음 설정을 그대로 두면 새내기나 풋내기들도 웬만큼 어긋나거나 틀리지 않는 사진이 나오도록 되어 있는 설정이라서, 사진을 제법 찍어 온 사람들 눈이나 느낌에는 꽤 동떨어진 사진이 되기 일쑤입니다. 괜히 디지털사진은 ‘날선’ 느낌이라 싫다고 잘못 생각하고 맙니다.

 저로서는 이태 만에 겨우 이러한 대목을 깨달았습니다만, 필름사진만 찍는 숱한 분들은 아직 이러한 대목을 못 깨닫습니다. 사진 설정을 고치면 ‘필름으로 찍을 때하고 똑같을’ 뿐 아니라 ‘사람 두 눈으로 바라보는 빛과 느낌’ 그대로 찍을 수 있음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같은 필름사진이라도 니콘과 캐논과 미놀타에 같은 필름을 앉히고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을 찍어 보아도 사진은 똑같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는 라이카를 쓰든 콘탁스를 쓰든 마찬가지입니다. 기계에 따라 빛과 느낌과 날카로움이 아주 가늘고 자잘하게 다릅니다. 이 또한 디지털사진기에서도 매한가지라, 사진 전문가들은 ‘이제 막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떠한 사진감을 즐겨서 찍으려’ 하는가를 귀기울여 들은 다음에 이이한테 가장 어울릴 기계와 필름(또는 디지털파일 형식)을 일러 주어야 합니다. 움직이는 사람을 찍을 때에 한결 잘 어울리는 기계와 필름이 있고, 멈춘 사람을 찍을 때에 한결 돋보이도록 돕는 기계와 필름이 있습니다. 건물을 찍거나 옷가지나 보석을 찍을 때에 더욱 걸맞는 기계와 필름이 있습니다.

 더 좋거나 더 나쁜 장비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기계마다 쓰임새가 다르고 구실이 다르다는 소리입니다. 어느 기계를 쓰든 다루는 사람이 잘 다루면 그만이지만, 기계를 처음 만든 공장과 일꾼이 어느 쪽에 더 마음을 기울였느냐에 따라서 기계가 살릴 수 있는 사진감이 다릅니다. 이를테면, 장도리로도 못을 박고 망치로도 못을 박습니다. 어느 연장을 쓰든 못을 박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연장이 똑같은 쓰임새이거나 구실이지는 않습니다. 오직 못 박는 한 가지에만 쓰도록 망치를 만드는 까닭이 따로 있습니다. 사진기에서도 기계마다 어느 자리에 더 알맞거나 걸맞거나 어울리는 구실이 있습니다. 사진관 일꾼이나 사진쟁이는 이렇게 다른 구실을 옳게 깨닫거나 알아채면서 사진기를 팔거나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더 비싼 장비가 더 좋은 장비가 아닙니다. 알맞춤한 자리에 알맞춤한 장비입니다. 내 사진감 쓰임새에 따라 나 스스로 여러 해에 걸쳐 목돈을 모아 반드시 장만해야 할 장비가 있으며, 내 사진감 쓰임새에 따라 적은 돈을 들여 값싸게 장만하여 아주 신나게 쓸 장비가 있습니다.

 광고에 휘둘려 무슨무슨 사진기가 가장 뛰어나다는 듯한 엉터리에 속으면서 애먼 데에 돈을 쓸 일이 아닙니다. 사진을 찍고 싶다면 사진기를 장만하기 앞서 내가 무엇을 사진으로 담으려 하는가를 오래도록 생각하고 찾아야 합니다. 굳이 내가 사진기를 장만해서 애써 내가 뭔가를 사진으로 담으려는 까닭을 두고두고 살피고 느껴야 합니다. 이런 시간을 아무리 짧아도 한두 해쯤 ‘사진기 없이 보내’면서, 나한테 사진기가 없기 때문에 내가 사진감으로 삼으려 하던 이 모습을 코앞에서 뻔히 보고 있으나 찍지 못하니 속에서 불이 나고 갑갑하고 미칠 노릇이라 안 되겠다고 느낄 때에 사진기를 장만해야 합니다.


.. 지난 1990년대 말, 갑작스럽게 집에서 한가한 시간을 가져야만 했을 때에 사진은 내게 일거리라는 귀한 선물을 주었다 ..  (머리말)


 베스트셀러이니 뭐니 하고 떠들썩한 책이 나한테 가장 좋은 읽을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다들 좋다고 야단법석인 책이 내가 읽을 만한 책이지 않습니다. 어쩌다 운 좋게 이러한 책 가운데 나한테 어울리는 책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한테 좋은 책은 나 스스로 오랫동안 살피고 더듬고 찾아나서야 비로소 만납니다. 찾고 찾고 또 찾으면서 다리품을 팔며 장만할 책 한 권입니다.

 사진기를 장만할 때뿐 아니라, 사진기를 장만한 다음 사진을 찍는 자리에서도 ‘내가 사진으로 무엇을 담아 말을 걸려고 하지?’ 하는 물음을 채우려면 오래오래 다리품을 팔아야 하고 생각을 거듭해야 하며 삶을 알차게 꾸려야 합니다. 










 (2) 사진기 살 돈과 사진책 살 돈


 “나무가 그렇게 아름답고 사람에게 주는 교훈이 큰지는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하였다 … 이제야 겨우 이런 자연의 신비함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으니 ‘자신 참으로 둔하게 살기도 하였구나’ 하고 탄식을 하게 된다(35쪽)”는 이야기를 적바림한 사진책 《FAMILY ZONE》을 봅니다. 사진책 《FAMILY ZONE》은 광주과학기술원장인 선우중호 님이 당신 사진과 당신 식구들 사진을 한데 그러모아 펴낸 책입니다.

 전문 사진쟁이가 아닌 선우중호 님이지만 풋내기 사진쟁이 또한 아닌 선우중호 님입니다. 취미가 사진이라지만 그예 취미로만 마주하지 않는 사진입니다.


.. (50여 년 전 대학에 다닐 때에) 내 전 재산을 털어서 산 비싼 카메라이고 재산목록 1호라서 다루기도 조심스럽게 다루어서인지 5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카메라는 손색이 없이 잘 작동되고 있다. 요즈음은 이런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것이 오히려 요란스러운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것보다 더 전문가답게 보여진다. 그래서 나는 가끔 사람들이 좀 많이 모이는 곳이면 오히려 이런 골동품을 가지고 나가 전문가인 양 과시하기도 한다. 우리같이 취미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게는 솔직히 말한다면 카메라가 좋고 나쁘고 하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싼 카메라를 가진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이지 좋은 사진을 찍는 것과는 크게 관계가 없다 … 현재 쓰고 있는 카메라가 전혀 문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혹시카메라를 새로운 모델이나 다른 종류로 바꾸면 더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짧은 생각에서 새로운 모델로 바꾸다 보니, 내 카메라 장 안에는 카메라가 하나 가득 있다. 대부분이 아직도 멀쩡하기만 한 카메라들이라 볼 때마다 좀 미안한 느낌이 든다 ..  (21∼22쪽)


 짧지 않은 햇수에 걸쳐 즐겨 온 사진 가운데 사람들한테 좀더 널리 나누고 싶은 사진을 몇 가지 간추려서 묶은 《FAMILY ZONE》에는 선우중호 님이 사진과 사진기와 사진작품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밝힌 글이 사이사이 실려 있습니다. 흔히들 이런 사진책을 내면서 사진만 덜렁 싣는데, 선우중호 님은 ‘사진에 할 말 있다’는 듯 여러 가지 말씀을 들려줍니다.


.. 비교적 근래에 산 카메라들은 주머니에 여유가 있어서 그런지 최상의 기종들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작품의 질은 카메라 가격에 비례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나 자신부터 솔직히 인정한다 ..  (23쪽)


 아마, 이런 글을 읽는 분들은 쉽게 고개를 끄덕이리라 봅니다. 틀림없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글입니다. 그런데 저로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글입니다. 왜냐하면 제 살림살이와 제 삶과 제 사진길로 돌아볼 때에는 이런 말마디는 한낱 배부른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선우중호 님 스스로 “우리같이 취미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게는 솔직히 말한다면 카메라가 좋고 나쁘고 하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주머니에 여유가 있어”서 “최상의 기종”들을 사 모으고 있습니다.

 참으로 딱합니다. 왜 주머니에 돈이 좀 있을 때에 ‘그때그때 새로 나온 사진기’를 사서 모아 놓고 먼지만 먹히십니까. 주머니에 돈이 좀 있을 때에 ‘그때그때 새로 나온 좋은 사진책’을 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그때 새로 나온 좋은 사진책을 장만하셨다면 이 사진책은 먼지를 먹을 일이 없습니다. 당신 스스로 수없이 다시 꺼내고 들추고 펼치고 하면서 손때가 잔뜩 먹습니다. 당신과 함께 사진을 좋아하는 식구들 또한 이 사진책을 넘기거나 펼치면서 사진책이 낡고 닳아 똑같은 사진책을 두 번 세 번 다시 장만하는 일이 생기기도 할 테고요. 당신한테 찾아온 손님한테 당신이 사랑하고 아끼는 사진책을 선물할 수 있습니다. 참 좋다고 느낀 사진책이라면 열 권쯤 장만한 다음 한 권씩 선물해 주는 기쁨을 누릴 수 있어요.


.. 아무리 아름다운 것일지라도 매일 접하게 되면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게 된다. 그래서인지 흔히들 유럽과 같은 외국에 다녀오고서는 그들의 예술 작품에 대해 너무나 감명을 받은 나머지 우리 전통예술을 폄하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을 크게 비난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접하지 못하던 것을 처음 접하면 그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  (52쪽)


 사진을 찍든 그림을 그리든 글을 쓰든 제대로 살피며 삶으로 삭일 노릇입니다. 제대로 살피지 못하거나 올바로 삭이지 못하면 엉터리 사진만 찍고 어설픈 그림만 그리며 어줍잖은 글만 씁니다.

 최고경영자 자리에 선 이들 누구나 똑같을 텐데, 최고경영자란 회사나 학교 살림을 가장 훌륭히 꾸리는 사람입니다. 당신들이 맡고 있는 자리를 제대로 살필 노릇이요 당신 삶을 바쳐 올바로 삭일 노릇입니다. 어설피 하거나 어줍잖게 맡아도 될 최고경영자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 스스로 제대로 살필 줄을 모르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제대로 못 느낍니다. 우리 스스로 제대로 볼 줄을 안다면 날마다 마주하는 아름다움이 얼마나 즐겁고 반가우고 고마운가를 새삼 헤아리며 날마다 기쁩니다. 우리 스스로 아름다움을 올바로 삭이는 삶을 꾸리고 있다면, 참된 아름다움 앞에서 저절로 눈물이 흐릅니다. 우리 스스로 아름다움을 알뜰히 돌보고 있으면, 거짓 꾸민 아름다움 앞에서 혀를 끌끌 차며 슬픔에 북받쳐 눈물이 흐릅니다.


.. 왜 흑백을 고집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흑백사진과 컬러 사진의 차이를 책을 읽는 것과 TV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다고 설명한다. 컬러 사진이 눈에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면 흑백사진은 뇌에 즐거움을 준다고 말을 한다. 흑백사진 애호가로서 좀 과장된 비유라고 들리기는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흑백사진은 컬러 사진보다 사람들에게 더 많은 감동을 준다. 우리 눈은 자연의 각종 색들에 익숙하기 때문에 컬러 사진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그저 아름다움으로 그칠 뿐이다. 그 작품성을 제외하고는 오랫동안 마음에 찡하고 남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이 보통의 컬러 사진이다 ..  (79∼80쪽)


 곱고 밝게 찍어야 감동이 샘솟습니다. 흑백사진으로 찍었기에 감동이 샘솟지 않습니다. 선우중호 님은 “흑백사진은 좀 다르다. 자연의 모든 색을 흑과 백 그리고 그 사이의 색으로 축소시켰기 때문에 작품에 있는 피사체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그런 피사체가 아니다(80쪽)”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맞습니다. 그래서 이 말마따나 적잖은 흑백사진들은 ‘몇 가지로 줄인 빛깔로 엮은 사진’인 터라 수수하거나 한결 깊은 느낌을 자아내곤 합니다. 누구나 아무렇게나 찍어도 이런 느낌이 납니다. 그런데 빛깔사진을 찍자면 누구나 아무렇게나 찍어서는 수수하거나 한결 깊은 느낌을 자아내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늘 바라보는 모습이 빛깔이 어우러진 삶이기 때문에, 빛깔사진은 빛깔을 얼마나 잘 다루느냐에 따라 크게 갈립니다.

 흑백사진은 다루어야 하는 빛깔이 아주 적기 때문에 살짝만 건드려 주어도 느낌이 달라지거나 살아납니다만, 빛깔사진은 다루어야 하는 빛깔이 아주 많은데다가 흑백사진과 마찬가지로 ‘그늘 자리’하고 ‘같은 빛깔이라 할지라도 짙기와 옅기에 따라 느낌이 다른’ 만큼 이러한 짙기와 옅기를 함께 건드려야 합니다. 몹시 어려운 사진이 빛깔사진입니다. 사진을 잘 모르는 사람은 마치 흑백사진을 해야만 작품이 되는 줄 잘못 알고 있습니다만, 작품이 되려면 사진을 잘 찍도록 애써야지 흑백사진을 찍을 노릇이 아닙니다. 저마다 붙잡고자 하는 사진감이 무엇인가를 헤아리면서 흑백사진으로 할는지 빛깔사진으로 할는지를 골라야 합니다. 이러면서 두 가지로 사진을 함께하는 가운데 흑백사진으로 살릴 수 있는 이야기는 흑백사진으로 살리고, 빛깔사진으로 살릴 만한 이야기는 빛깔사진으로 살려야 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 스스로 어느 한 가지 생각에 지나치게 매여 있으면, 사진을 찍는 동안 ‘내가 얼마나 훌륭한 작품을 하고 있는데?’ 하는 자랑만 사진에 담깁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 스스로 ‘오늘 내가 아주 훌륭하다 싶은 사진을 하나 얻었다’고 느낄지라도 이 사진은 고작 오늘 하루로 그치는 사진입니다. 오늘을 마감하고 글피를 맞이할 때에는 글피에 걸맞게 ‘오늘 훌륭히 찍은 사진은 스스로 내려놓은’ 다음, 이보다 거듭나면서 이보다 한 걸음 더 내디딘 더 훌륭한 사진을 품에 안도록 땀을 흘릴 노릇입니다. ‘어제까지 내가 찍은 사진은 모조리 바보스러울 뿐입니다’ 하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오늘까지 내가 얻은 사진은 아직 어수룩할 뿐입니다’ 하는 생각이어야 합니다.

 게다가, 흑백사진이라 할지라도 흑백필름을 무엇으로 쓰느냐에 따라 다르고, 흑백필름을 안칠 사진기를 무엇으로 하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나아가, 35미리 사진기를 쓸는지 중형사진기를 쓸는지 대형사진기를 쓸는지에 따라 다릅니다. 또한, 여느 필름사진기를 쓰느냐하고 파노라마사진기를 쓰느냐하고 갈립니다. 같은 중형사진기라 하더라도 핫셀과 마미야와 브로니카가 다르며, 파노라마일 때에도 린호프인지 호스만인지 후지인지에 따라 다릅니다.

 선우중호 님은 《FAMILY ZONE》에서 “솔직히 말해서 작품의 질은 카메라 가격에 비례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작품 질이란 흑백이나 빛깔이냐에 따라 갈리지 않는다”고 말해야 앞뒤가 맞으면서 올바릅니다. 바로 이 사진책 《FAMILY ZONE》부터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데, 선우중호 님은 흑백사진으로 담아내고 있으나, 당신 옆지기와 아이들을 모두 빛깔사진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선우중호 님으로서는 당신 식구들이 빛깔사진 아닌 흑백사진으로 담았을 때에 한결 멋스러우며 작품값을 한다고 여기실는지 모릅니다만, 제 눈으로 들여다볼 때에는 흑백으로 하든 빛깔로 하든 스스로 붙잡은 사진감으로 얼마나 깊이 스며들며 하나로 어우러져 있는가에 따라 작품이라 할 만한지 아닌지가 갈리는구나 싶습니다. 흑백사진을 한다 할지라도 내가 담으려는 사진감하고 제대로 어깨동무하지 못하고 있다면 아장걸음을 하는 사진입니다. 한자말로는 습작이요 우리 말로는 풋내기 작품입니다. 내가 담으려고 하는 사진감하고 살가이 하나가 되어 있으면 바야흐로 눈물과 웃음이 절로 샘솟는 작품입니다. 우리가 흔히 우러러 마지 않는 나라밖 몇몇 사진쟁이들은 당신들 스스로 언제나 예전 사진하고 견주어 한 걸음씩 나아가며 거듭나려는 몸짓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아름답거나 훌륭하다고 느낄 만합니다. 이들이 다큐를 하든 예술을 하든 상업을 하든 ‘흑백사진을 찍어’서 아름답다거나 훌륭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사진에 바치는 땀방울이 아름답기에 사진이 아름답습니다. 사진에 깃들이는 사랑이 훌륭하기에 사진이 훌륭합니다.

 사진책 《FAMILY ZONE》을 덮으면서 생각합니다. ‘사진 찍는 최고경영자’들께서 사진잔치도 열고 사진책도 내면서 ‘사진밭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킨다 할 만한데, 사진을 취미로 여기든 사진을 삶으로 여기든 사진을 직업으로 여기든 좋습니다만, 사진을 어떻게 맞아들여 즐기고 있든지 ‘사진은 사진으로 곰삭여’ 주십사 하고 바랍니다. 사진은 사진답게 해야지, 사진을 사진답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땅한 노릇입니다만, 회사를 꾸리는 자리에서 회사를 회사답게 꾸려야지 회사답지 않게 꾸릴 수 없고, 학교살림 맡은 분으로서는 학교를 학교답게 일구어야지 학교를 직업훈련소나 영어학원처럼 일굴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진을 할 때에는 온통 사진으로 생각하고 사진으로 살며 사진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니콘이니 핫셀이니 마미야니 라이카니 올림푸스니 하는 이름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는 몇 가지 길입니다. 표준렌즈를 쓰느니 광각렌즈를 쓰느니 망원렌즈를 쓰느니 또한 여러 갈래 길입니다. 필름을 쓰느냐 디지털파일을 쓰느냐 또한 여러 갈래 길이며, 디지털파일에서도 raw가 있고 jpg가 있습니다. 필름에서도 흑백뿐 아니라 빛깔필름에서는 여느 필름과 슬라이드가 있습니다. 이 모두 사진쟁이들이 사진을 하는 숱한 길 가운데 하나이지, 이러한 길 가운데 어느 길로 가야 작품이 된다거나 멋이 담긴다든가 좋다든가 하는 틀이 되지 않습니다. 어느 한 가지 길만이 사진이 아니며, 이 모두가 사진으로 가는 길인 한편, 이 가운데 사진을 사진으로서 제대로 삭이며 살아내는 자리에서 오래도록 고이 이어가는 아름다움을 꽃피웁니다. 이렇게 아름다움을 꽃피우는 사진이 되면 비로소 ‘사진은 예술’이라 말할 수 있고, 사진이 사진다우며 사진으로 나누는 삶이 무엇인가 하고 두루 선보일 수 있습니다.


.. 결국 사진은 자기를 찍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다른 전문가의 사진을 따라 찍는 것이 사진수업을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 작가의 사진이지 자기 자신의 사진은 아니다. 같은 피사체를 같은 장소에서 찍는다 하더라도 찍는 사람에 따라 다른 사진이 되는 것은 각기 피사체를 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진은 피사체를 찍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피사체에 옮기고 이를 사진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  (132쪽)


 1940년에 태어난 선우중호 님은 어느덧 일흔 나이입니다. 일흔 나이에 사진을 새로 배우거나 다시 배우라 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진을 취미로 여기든 돈벌이로 삼든 어떻게 바라보든지, 사진이 참 좋아 사진길을 걷고자 하신다면 일흔 나이에라도 새롭게 사진을 배울 노릇이요 여든이나 아흔에도 새롭게 다시 배우며 사진을 찍을 노릇입니다. 나이를 많이 먹었기에 더는 새로 배울 겨를이 없을 뿐 아니라 힘들어서 못 배우겠다고 하신다면 사진기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다른 모든 문화와 예술과 교육과 정치와 사회와 경제가 매한가지인데, 어제와 똑같은 오늘이 없고 오늘과 똑같은 글피가 없습니다. 늘 새로 태어나는 하루요 노상 새로 일구는 삶입니다. 최고경영자라는 이름이란 언제나 새롭게 일하며 한결같이 새로움을 나누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선우중호 님은 《FAMILY ZONE》을 내놓는 자리에서 “결국 사진은 자기를 찍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깨닫습니다. 그런데 사진은 “자기를 찍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진이란 “사진기를 든 내 삶을 보여주는” 노릇입니다. “자기 생각을 피사체에 옮기”는 일에 그치지 않고, “내 삶이 내 사진에 고스란히 담깁”니다.

 흑백사진으로든 빛깔사진으로든 이 사진 하나를 바라보며 나 스스로 가슴이 뭉클하다면, 이이는 사진을 잘 찍어서가 아니라 삶을 알차게 꾸렸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쉰 해나 예순 해를 해 왔다고 해서 이이 사진이 아름다울까요? 사진을 고작 한두 달만 했다고 이이 사진은 형편없을까요?

 사진에 담는 깊이란 사진을 찍어 온 밥그릇(찍은 필름) 숫자가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온누리를 뜨겁게 부둥켜안으며 따스히 손잡고 살아왔는가 하는 데에 달린 사진 찍는 깊이입니다.

 사진에 담는 멋이란 어떤 사진 장비를 쓰거나 어떤 필름을 쓰거나 어떤 장치를 하느냐 하고 동떨어져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나 스스로를 아름다이 가꾸고자 땀을 흘렸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사진에 담는 멋입니다. (4343.5.23.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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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기의 현장
이경모 / 눈빛 / 199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사진기자는 어디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2] 이경모, 《격동기의 현장》(눈빛,1989)



 1926년에 태어나 1946년부터 호남신문사 사진부장으로 일했던 이경모 님은 《격동기의 현장》이라는 사진책에서 1945∼1951년 무렵 이 나라 삶자락을 하나하나 보여줍니다. 이경모 님이 일하던 신문사는 사라졌고, 한국전쟁 때 국방부 정훈국 보도과에서 뛰며 찍은 사진은 현상처리가 나빠 이 책에 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따로 갖고 있던 사진기에 담았던 필름이 남아 있어 이 사진책 하나를 꾸릴 수 있었답니다.

 우리한테 사진 문화가 조금이나마 있었다면 해방 이야기를 호남신문사에서 1945년에 내놓을 수 있었을 테며, 한국전쟁 이야기를 국방부에서 1953년에 펴낼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무렵에 사진책으로 엮지 않았기에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 삶자락을 담은 사진은 하나둘 자취를 감춥니다. 아니, 처음부터 빛을 보지 못합니다. 박도 님이 엮은 《그들이 본 한국전쟁》이라는 사진책이 있습니다만, 미국에 있는 도서관에 있든 누군가 개인으로 갖고 있든 오래도록 빛을 보지 못한 채 묻혀 있는 사진들은 이보다 훨씬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지난 1996년에 《끝나지 않은 전쟁》(조지 풀러 사진,눈빛 펴냄)이라는 사진책이 나온 적 있습니다. 한국전쟁 모습을 미국 군인이 빛깔 사진으로 담아 엮은 책입니다. 우리 지난 삶자락을 돌아보는 더없이 애틋한 사진책이지만, 이 사진책은 거의 눈길을 못 받고 사랑 또한 못 받은 채 묻혀 있습니다. 사진책으로 나오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가 있는 우리 나라인데, 애써 사진책으로 나왔다 할지라도 제대로 읽히거나 보이지 못하는 우리 나라입니다. 제아무리 잘 팔린 사진책이라 할지라도 1만 권 넘게 팔리는 일이란 몹시 드물고, 10만 권이나 100만 권 팔렸다는 사진책은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이름있는 사진기들이 몇 만 대씩 팔리는 모습을 보노라면, 사진을 찍는 아름답거나 해맑은 길을 보여주는 사진책들이 조용히 묻혀 있는 모습이란 그다지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슬프기 짝이 없습니다.

 이경모 님은 지난 2001년 5월 17일에 눈을 감았습니다. 사진과 얽혀 여러 가지 큰일을 했다지만 우리 문화와 역사에는 거의 아무런 자국을 남기지 못했고, 눈을 감은 소식을 찾아보기란 몹시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진을 찍었건 저런 사진을 남겼건 이 땅에서는 제대로 알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 이런 눈물이 있건 저런 사람들 저런 웃음이 있건 이 나라에서는 찬찬히 헤아려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격동기의 현장》이 나온 1989년을 돌아보면 이경모 님이 1945∼1951년치 사진을 찍은 지 거의 쉰 해 만입니다. 어쩌면 군부독재 정권이 무너졌기에 이런 사진책 하나 비로소 나올 만하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해방 무렵 사진이란 해방을 맞이하고 쉰 해가 지나서야 빛을 볼 만한 사진은 아닐 텐데, 이 나라 책마을이나 사진마을은 이와 같은 사진을 두루 살펴서 널리 나누고자 힘쓰지 못했습니다. 이런 흐름은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요즈음 우리 삶터를 요즈음 차근차근 돌아보며 요즈음에 알뜰살뜰 묶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느 사람들이 복닥이고 있는 눈물과 웃음이 어린 삶을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으로 그때그때 옮기며 웃고 울며 나눌 수 있으면 얼마나 반가울까요. 수수한 사람들 투박한 땀방울과 착한 손길을 그날그날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으로 함께할 수 있으면 얼마나 기쁠까요.

 글을 쓰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 자리에서 어느 이웃하고 어깨동무하면서 글을 쓰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 어느 동무하고 손을 맞잡으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 터전에서 어느 겨레붙이하고 부대끼면서 사진을 찍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해방도 격동기이지만 입시지옥도 격동기입니다. 한국전쟁도 격동기이지만 국가보안법도 격동기입니다. 여수ㆍ순천 사건도 격동기이지만 비정규직도 격동기입니다. 우리는 지난날과 오늘날과 앞날 격동기를 어느 만큼 헤아리면서 어느 만큼 올바른 눈썰미로 어느 만큼 알차게 보듬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글쟁이와 그림쟁이와 사진쟁이들만 탓할 수 없습니다. 정치꾼만을 탓한다고 정치가 달라지거나 나아지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며 우리 스스로 꾸리는 삶을 나무라며 가다듬는 가운데 정치를 바로세우도록 힘을 모아야 합니다. 바로 우리 스스로를 굽어살피며 우리 스스로 일구는 삶을 꾸짖고 뜯어고치는 가운데 문화와 예술이 살가이 꽃피우도록 뜻을 그러모아야 합니다.

 사진기자가 비틀어 보이는 거짓 사진에 홀리고 있는 우리들이라 한다면 몇몇 엉터리 사진기자들은 참을 비트는 사진을 자꾸자꾸 찍어서 내보냅니다. 사진기자가 엉터리 사진을 내놓을 때에 ‘이런 쓸개빠진 엉터리!’ 하면서 손가락질할 줄 안다면, 사진기자들이 우리들 앞에서 부끄러워 할 뿐 아니라 우리들을 두려워 하며 옳고 바른 사진으로 나아가고자 힘을 쓸밖에 없습니다. 엉터리 정치꾼이 나오는 까닭은 엉터리 유권자 때문이며, 엉터리 사진이 쏟아지는 까닭은 엉터리 독자 때문입니다. 참다운 정치꾼이 나오려면 참다운 유권자로 거듭나야 하며, 참다운 사진책이 나오려면 참다운 사진 독자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마땅한 노릇인데, 이제 어느 누구도 1945∼1951년 이야기를 사진으로 찍을 수 없습니다. 2009년 이야기 또한 어느 누구도 사진으로 찍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2010년 올해 이야기만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으며, 5월 17일 어제나 5월 16일 그제 이야기를 사진으로 찍을 수조차 없습니다. 오로지 5월 18일 오늘 이야기만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으며, 하루하루 새로 맞이하는 그날그날 삶과 사람을 사진으로 엮을 수 있습니다. 사진쟁이란 언제나 바로 그때 그곳에 있지 않고서는 아무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글쟁이와 그림쟁이는 바로 그때 그곳에 없었어도 글과 그림을 낳지만, 사진쟁이만큼은 총알이 빗발치든 군화발이 으르릉거리든 바로 그때 그곳에 머물며 삶과 죽음이 가로지르는 터에서 참거짓을 마주해야 합니다. 사진책 《격동기의 현장》은 이경모 님이 사진기자였기 때문에 낳을 수 있던 책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 가로놓인 자리에 두 다리 튼튼하게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낳은 보배덩어리입니다. (4343.5.18.불.ㅎㄲㅅㄱ)

― 격동기의 현장 (이경모 사진,눈빛 펴냄,1989.11.10./판 끊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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