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사진으로 말하다
현경미 지음 / 도래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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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담긴 노래대로 사진을 보기

― 인도, 사진으로 말하다

 현경미

 도래, 2014.6.25.

 https://blog.naver.com/hope4us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의 발전되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낙후된 모습에만 초점을 맞추면 흥분하고 거부감을 드러내면서 왜 우리는 인도의 한 부분만, 그것도 문화나 경제적으로 생활수준이 가장 뒤떨어진 삶만 보려 하는지 말이다. (7쪽)


인도에 살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여줘야 할지 알고 있다면 찍는 것은 별 문제가 안 된다. 머릿속이 텅 빈 백지 상태라면 제아무리 성능 좋은 카메라라도 차가운 금속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17쪽)



  인도를 사진으로 마주하고픈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도, 사진으로 말하다》(도래, 2014)를 폅니다. 지은이는 첫머리에 사진을 찍는 눈길을 이야기합니다. 한국사람은 외국사람이 이 나라를 ‘문명으로 발돋움한 눈부신 도시’가 아닌 ‘뭔가 좀 오래되거나 후줄근한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면 안 좋아한다고들 해요. 이러면서 정작 다른 나라로 가면 ‘뭔가 좀 오래되거나 후줄근한 모습’을 사진으로 즐겨 찍는다지요.


  인도나 몽골이나 부탄 같은 곳을 찾아가는 한국사람이 사진으로 찍는 모습 가운데 ‘크게 발돋움한 도시 한복판’보다는 ‘시골스럽거나 오래되거나 가난해 보이는 사람이나 마을이나 골목’을 찍는 일이 흔하다고도 하고요. 그런데 이는 한국에서도 으레 불거집니다. 오래된 골목마을로 나들이를 가서 사진을 찍는 분들은 ‘더 낡거나 더 오래된 모습’을 찾기 마련입니다. 마실꾼뿐 아니라 사진작가도 이런 모습을 더 눈여겨보고요.



길을 가다가도 멀리 사원이 보이면 무작정 들어갔다. 사원이 웅장하고 역사가 깊고, 뭐 이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76쪽)



  무엇을 사진으로 찍느냐는,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한번 가만히 돌아볼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왜 인도를 더 오래되거나 낡거나 가난해 보이는 모습으로 찍어야 할까요? 더 오래되거나 낡거나 가난해 보이는 모습으로 찍힌 인도 사진을, 정작 인도사람은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어쩌면 우리 스스로 인도라는 나라를 이웃으로 마주하지 않기에 더 오래되거나 낡거나 가난해 보이는 모습을 찾아내어 찍으려 하지는 않을까요? 우리가 찍은 사진을 이웃한테 고스란히 선물로 준다고 생각한다면, 섣불리 ‘그런 모습’만 찍지는 않을 테고요.


  우리가 이웃이나 동무를 사진으로 찍은 다음에 선물로 준다면, 이를테면 ‘못난 모습’으로 나온 사진은 버리거나 지우기 마련입니다. 장난 삼아 ‘못난 모습’으로 나온 사진을 줄 수 있지만, 장난이나 놀이가 아니라면 ‘못난 모습’은 굳이 안 쓰기 마련이에요.


  우리가 이웃이나 동무를 사진으로 찍으려 한다면, 이웃이나 동무하고 나누고 싶은 뜻이나 마음이나 생각이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야기를 하려고 사진을 찍지요. 즐거이 이야기를 하고 싶기에 사진을 찍어요.



처음부터 사진기를 들이대지 말았어야 했다. 몸과 마음을 다 비우고 그 사원의 아름다움을 먼저 감상했어야 했는데 오직 사진 욕심만 채우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녔지 마음속으로는 하나도 감동받지 못했던 것이다. 결과는 참담했다. (111쪽)



  《인도, 사진으로 말하다》를 읽으면, 지은이 스스로도 ‘사진 욕심’에 빠져서 도무지 마음에 안 드는 사진을 찍고 말았다는 말이 곧잘 흐릅니다. 지은이 스스로 이제껏 지켜본 ‘다른 작가들 욕심투성이 사진’에서 훌훌 벗어나 새롭고 상냥하며 즐겁게 사진빛을 이루고 싶은데, 때로는 더 좋은 사진이나 더 나은 사진을 얼른 찍고 싶다는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고 털어놓습니다.


  아마 우리 스스로 바쁘다고 여기는 터라 ‘마음 아닌 욕심’으로 기울지 싶습니다. 오늘 아니면 다시 그곳에 가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니, 차분히 돌아보고 둘러보고 헤아리고 살핀 뒤에 살며시 사진기를 들기보다는, 서둘러 이 모습도 찍고 저 모습도 찍으려 할 수 있어요. 굳이 100장이나 200장을 찍어야 하지 않는데, 다문 한 장만 찍더라도 이 한 장에 마음을 담으면 되는데, 숫자에 얽매인다고 할까요. 사진으로 안 찍으면 마음에 안 남는다고 여긴달까요.



이 동네 어르신들을 뵙고는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힘든 농사일을 하다가 쉴 때는 언제나 기다란 곰방대에 말린 담뱃잎을 잘라서 꼭꼭 누른 다음 담배를 태우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하다. (157쪽)



  서두르지 않거나 바쁘지 않은 몸짓이 되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사진찍기에서뿐 아니라 마실하기에서도 비슷해요. 아이를 낳아 돌보는 살림에서도 비슷하고, 무엇을 배우는 길에서도 비슷합니다. 책 한 권을 서둘러 읽는대서 책 한 권을 더 잘 알아채거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남보다 책을 1시간 빨리 읽기에 책을 더 잘 꿰뚫지 않아요.


  오늘 찍지 못한다면 이튿날 찍을 수 있습니다. 올해 찍지 못한다면 이듬해 찍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올해도 못 찍을 뿐 아니라 이튿날이나 이듬해에도 못 찍는다면, 서너 해 뒤라든지 열 해쯤 뒤에 찍을 수도 있어요.


  더 빨리 사진 한 장을 얻어야 하지 않습니다. 책을 더 빨리 읽어치워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를 더 빨리 다그쳐서 더 빨리 배우라 이끌어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더 빨리 더 나은 사람으로 거듭나야 하지 않습니다. 사진작가 자리로 본다면, 더 빨리 더 멋진 사진을 선보여서 더 이름난 사진작가 소리를 들어야 하지 않습니다.



힌두사원에 가서 사진을 찍을 때마다 복전함에 꼭 시주를 한다. 그것이 예의라 생각해서 그렇게 했을 뿐, 특별히 소원을 빈 적은 많지 않다. 사원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것만으로 고마웠다. (163쪽)



  마음에 담긴 노래대로 사진을 볼 수 있다고 느낍니다. 우리가 마음자리에 서두르려는 생각을 심으면, 한국에서든 인도에서든 늘 바빠맞은 몸짓으로 닦달하면서 겉훑기에 그치기 쉽다고 봅니다. 우리가 마음밭에 차분하면서 느긋한 생각을 심으면, 인도에서든 한국에서든 언제나 즐거우면서 상냥한 손길로 이야기꽃 이루는 사진 한 장을 얻는다고 봅니다.


  사진 한 장 찍을 수 있어 고맙습니다. 사진 두 장 찍을 수 있어 반갑습니다. 사진 석 장 찍을 수 있어 기쁩니다. 사진 넉 장 찍을 수 있어 사랑스럽습니다.


  사진을 한 장씩 찍을 적마다 어떤 마음인가를 헤아려 보면 좋겠어요. 고마움, 반가움, 기쁨, 사랑, 여기에 꿈, 노래, 꽃, 해, 별을 떠올리고 웃음, 눈물, 아픔, 날개돋이를 그리다가 어깨동무, 손잡기, 이웃되기, 서로돕기를 담아 볼 수 있습니다.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 부겐빌레아는 겨울이면 특히 꽃의 색깔이 짙어져서 말 그대로 눈부시게 아름답다. 별 감상 없이 지나쳐 버리고는 했는데 이 산속에서 다시 만난 부겐빌레아는 먼지 한 점 없이 선명하게 피어 꽃 터널을 이루고 있었다. (45쪽)



  어디에서나 사진꽃이 핍니다. 길에서도 숲에서도 꽃은 그저 꽃으로 곱습니다. 숲에서만 고운 꽃이 아닌 길에서도 고운 꽃입니다. 인도에서도 한국에서도,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이 마을에서도 저 마을에서도, 우리는 상냥하면서 고운 마음을 건네면서 상냥하면서 고운 사진을 얻습니다.


  노래하는 마음으로 꽃길을 거니는 몸짓이 되면, 참말 누구나 언제나 노래꽃 같은 사진을 찍으리라 봅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대로 사진 한 장을 이룹니다. 우리가 서로 바라보는 눈길에는 우리가 나누고 싶은 말 한 마디가 살며시 드러납니다. 찬찬히 마주하면서 먼저 마음에 깊이 담고서야 사진기를 손에 쥘 노릇입니다. 아직 마음에 깊이 담지 않았다면 사진기는 등짐 깊숙하게 묻어둘 노릇입니다. 2018.2.2.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사진비평/사진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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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광 - 흔적에 길을 묻다 오늘의 다큐 5
박노철 지음 / 눈빛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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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책 읽기 364


이 사진은 눈 덮인 냇물이 아닙니다
― 폐광, 흔적에 길을 묻다
 박노철 사진, 눈빛, 2017.6.29. 25000원


  해마다 며칠쯤 시골이 북적입니다. 새해 첫머리, 설날, 한가위에 자동차가 꽤 북적입니다. 이맘때에는 고샅마다 자동차가 줄짓고, 여느 때에는 고샅이든 한길이든 안 보이던 사람들이 보이며, 사람들 목소리가 들려요.

  이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도시에서 살기에 여느 날 시골은 매우 조용합니다. 도시하고 매우 먼 시골은 더욱 조용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도시하고 먼 시골은 여러 가지가 많이 나곤 해요. 먼저 먹을거리가 많이 나지요. 들이며 숲이며 냇물이며 깨끗하니 곡식이나 열매가 잘 자랍니다. 깨끗한 바다를 낀 시골이라면 갯것이나 바닷것이 잔뜩 나오고요.

  그리고 도시하고 먼 강원도 시골에는 화석연료라 하는 광석이 많습니다. 도시라는 자리에서 강원도를 보자면, 옛날에는 ‘탄광이 많은 고장’이었을 테고, 오늘날에는 ‘주말이나 휴가철에 놀러가는 고장’일 테지요. 머잖아 ‘겨울올림픽을 여는 고장’이라는 이름을 얻을 테고요.


광산은 사라져 가지만 그곳에 아직도 흐르고 있는 희고 붉은 폐광수는 분주했던 옛 탄광촌의 영화를 말해 주는 것 같다. 산맥 골골 깊은 곳, 옛 광산에서 흘러나오는 붉고 흰 폐광수는 그 옛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광부들의 애환이 깃든 피눈물일 수 있다. (167쪽)


  사진책 《폐광, 흔적에 길을 묻다》(눈빛, 2017)를 읽습니다. 이 사진책은 말 그대로 폐광을 다룹니다. 강원도 깊은 멧골에 있다가 문을 닫은 탄광을 다룹니다. 기나긴 날 광석을 캐다가 이제 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훤히 드러나는 등골 시린 모습을 다룹니다. 한때 탄광이던 곳이 폐광으로 바뀌면서 오늘 어떤 ‘자국’으로 있는가를 돌아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헤아려 보면, 폐광이 되고 나서야 환히 드러나는 등골 시린 모습은 아니지 싶습니다. 한창 탄을 캐던 무렵에도 이 같은 모습이었으리라 생각해요. 어쩌면 한창 탄을 캐던 무렵에는 더욱 등골 시린 모습이었을 수 있습니다.

  폐광 아닌 탄광이던 무렵에는 광산에서 흘러내리는 ‘광물 섞인 물’이 들이나 숲이나 내를 흠뻑 물들이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 우리들입니다. 지난날에는 숲을 망가뜨리고 마을을 더럽히는 ‘폐광수’를 거의 헤아리지 않았어요. 오히려 지난날에는 공장 굴뚝 매연하고 쓰레기물을 ‘개발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사진책 《폐광》은 한여름에도 마치 눈이 내린 듯한 냇물을 보여줍니다. 둘레에 풀이나 나무는 짙푸른데, 냇물만 새하얀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러면서 영 뜬금없다 싶은 모습을 나란히 보여줍니다. 둘레 숲은 한겨울에 눈이 소복하게 덮여 새하얀데, 폐광수가 흐르는 물줄기는 싯누렇거나 시퍼렇습니다.

  때로는 싯누런 물줄기하고 시퍼런 물줄기가, 또는 싯누런 물줄기하고 새하얀 물줄기가 만납니다.

  한참 《폐광》을 넘기다가 어릴 적에 본 냇물 모습이 문득 떠오릅니다. 제가 어릴 적 살던 마을에 식품공장하고 연탄공장이 있었어요. 두 곳에서 흘러나오는 쓰레기물은 뭐랄까 매우 아리송한 빛깔이면서 때로는 무지개 같은 빛깔이었습니다. 이러면서 냄새가 코를 찔렀지요. 어른들은 “거기 그만 쳐다봐라. 코 뚫릴라.” 하면서 도리질을 쳤으나, 두 공장에서 나오는 쓰레기물이 어우러지는 아리송한 빛깔에 사로잡혀서 한참 쳐다보곤 했습니다.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황변현상과 백화현상의 산과 계곡을 우리가 보듬어야 한다. 그나마 환경 복원사업으로 일부 회복되어 가고는 있지만 아직도 외면받는 폐광의 잔재들은 차고 넘친다. 나는 좀더 가까이에서 그 불편한 진실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168쪽)


  이 땅에서 석유는 나지 않는다고 하기에 석유밭 언저리가 얼마나 새까만지를 두 눈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석탄이 많이 났기 때문에 석탄밭 언저리가 얼마나 새까만지를 두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문을 닫은 석탄밭 둘레가 그동안 어떤 자국이었는가를 똑똑히 지켜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모습을, 우리가 걸어온 발자국을, 우리가 살아가는 길을, 차근차근 짚을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땅밑에서 광물을 캐내느라 탄광 둘레 숲이나 마을은 그동안 얼마나 망가졌는지 짚어야지 싶어요. 광물을 더 캐내지 않아도 폐광이 된 뒤로 한참 지난 오늘날까지 얼마나 모진 쓰레기물이 흐르는가를 또렷이 짚어야지 싶어요.

  여기에 몇 가지를 더 짚어야지 싶습니다. 숱한 공장이나 골프장이나 큰 발전소 곁은 어떤 자국이나 모습일까요? 아늑한 물질문명을 누리느라 시골은, 숲은, 마을은, 폐광 둘레는 앞으로 얼마나 더 아파야 할까요? 앞으로는 전기나 문명이나 자원을 누리는 길을 처음부터 새로 짚으면서 가다듬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진책 《폐광》이 ‘폐광’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고 강원도 멧골을 말없이 보여주었다면, 아마 적잖은 분들은 이 사진이 어떤 모습이나 자국을 나타내는지 알 수 없으리라 봅니다. 왜 새하얀 물줄기인지, 왜 시퍼렇거나 싯누런 물줄기인지 도무지 모르겠지요. 다만 시커먼 물줄기를 보고서야 뭔가 있구나 하고 느낄 테고요.

  사진으로 똑똑히 바라보면서도 우리가 스스로 삶길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면, 폐광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한강이며 낙동강이며 금강이며 두루 스며들어 우리 목을 죄리라 봅니다. 모두 우리 스스로 끌어들인 모습입니다. 모두 우리 스스로 지은 자국입니다. 2018.1.3.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사진읽기/사진비평)

* 글에 붙인 사진은 눈빛 출판사에 말씀을 여쭈어 고맙게 얻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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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꽃 - 김지연 사진 산문
김지연 지음 / 열화당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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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책 읽기 361


일흔 할머니가 들려주는 사진꽃 이야기
― 감자꽃
 김지연 글·사진
 열화당, 2017.12.5. 16000원


사과나무 과수원을 서성거리는데 주인이 왔다. 주인은 표정 없이 떨어진 사과를 광주리에 담았다. 새벽부터 낯선 곳에서 서성이는 나를 보더니 떨어진 사과 몇 알을 건네주었다.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나는 깜짝 놀랐다. 세상에 이렇게 상큼한 사과 맛이 있을까? (13쪽)

요즈음 나 자신에게 되묻고 있다. ‘나는 밥값을 하고 있는 것인지.’ 사진을 하는 동안, 세상사에 발을 담그고 살면서 세삼 ‘밥값’도 제대로 못 하는 사진가는 아닌지 반문해 본다. (21쪽)


  사진기라는 기계는 평등하면서 평등하지 않습니다. 사진기라는 기계가 평등하다면, 대학교 사진학과를 나왔든 나오지 않았든 이 기계를 손에 쥐는 사람은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어린이도 할머니도 젊은이도 얼마든지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사진기라는 기계가 평등하지 않다면 값에 따라 값어치가 달라서, 더 돈을 치르면 해상도가 더 빼어난 기계를 손에 쥘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대학교 사진학과라든지 사진밭 여러 어른 뒷줄에 서서 이름을 펴기도 합니다.

  곰곰이 따진다면 사진밭뿐 아니라 어느 밭을 보든 매한가지입니다. 호미 한 자루는 누구한테나 평등합니다. 누구나 호미 한 자루로 밭을 일굴 수 있어요. 연필 한 자루는 모두한테 평등해요. 누구나 연필 한 자루로 글을 여밀 수 있지요. 그렇지만 어버이한테서 땅을 물려받지 못하면 다른 이 땅을 빌려서 부쳐야 합니다. 글밭도 글밭 여러 어른 뒷줄이 있어서, 이 뒷줄에 살그머니 서는 사람이 있어요.


나락을 거침없이 삼키고 흰 폭포처럼 위용있게 쌀을 뿜어내는 정미소는 어린 나에게 정말 대단한 존재로 다가왔다. 그러나 절대로 무너지는 날이 없을 줄 알았던 그 정미소가 이제는 시골 면사무소 뒤에서 납작이 엎드린 채 길가로 난 큰 문을 걸어 잠그고 안채 마당에서 소소한 창고로 쓰이는 물건이 되어 있었다. (23쪽)

“언제 또 봬요.” 나는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글씨요…….” 주인은 말꼬리를 흐린다. 우리가 언제 또 만날 수나 있겠어요. 정미소도 그렇다. (39쪽)


  사진책 《감자꽃》(열화당, 2017)을 읽습니다. 이 사진책을 여민 분은 쉰 줄이라는 나이부터 사진기를 손에 쥐었고, 이 사진책을 일흔 줄 나이에 선보인다고 합니다. 아주머니라 이를 만한 나이에 사진길을 걷자는 생각을 했고, 할머니라 이를 만한 나이에 새로운 사진책을 여밉니다.

  사진책 《감자꽃》에 실은 글이나 사진은 스무 살이나 마흔 살 즈음에도 쓰거나 찍을 수 있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어쩌면 어떤 분은 스무 살이나 마흔 살에도 이 사진책에 깃든 글만큼 사진만큼 이야기를 엮을 수 있겠지요. 사진기는 평등하거든요. 그런데 사진기만큼 평등한 한 가지가 있으니, 바로 나이와 발걸음입니다.

  삶길을 걸어온 나이에 맞추어 글 한 줄에 얹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삶길을 지핀 발자국에 맞추어 사진 한 장에 담는 이야기가 살며시 달라요.

  스무 살 젊은이가 정미소를 바라보는 마음이나 눈길은 쉰 살 아주머니가 정미소를 바라보는 마음이나 눈길하고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릴 적에 정미소를 늘 쳐다보면서 살다가 아주머니 나이를 지나 할머니가 된 분이 사진기를 손에 쥐어 담아낼 이야기를 서른 살 젊은이가 담아낼 수 없겠지요.


나는 감자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말에 충격을 받고는 감자꽃을 따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찌나 이쁘고 곱던지, 그냥 버리기가 아까워 감자꽃을 묶어서 부케처럼 만들어 할머니 손에 쥐여 주며 사진을 찍자고 했다. (43∼44쪽)

면내에는 물론 읍내에도 미용실이 한두 군데밖에 없던 시절인지라 여자애들도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자르면서 컸다. 예전에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49쪽)


  사진 찍는 김지연 님은 전북 진안에서 ‘공동체박물관 계남정미소’을 꾸리기도 했습니다. 요즈음은 전북 전주에서 ‘서학동사진관’을 꾸립니다. 늦깎이로 사진길을 걸었다 할 만하고, 어느새 할머니 나이에 이르는데, 이즈막 할머니 나이에 감자꽃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해요. 감자밭에서 감자꽃을 따서 버리는 시골 할매 곁에서 감자꽃을 주섬주섬 그러모아서 ‘감자꽃다발’을 엮습니다. 감자알처럼 투박하면서 살가운 시골 할매 손이란, 짐짓 쓸모없다고 여겨 버리는 감자꽃 고운 꽃송이처럼 따사롭고 푸진 손이겠지요.

  어쩌면 우리는 흙짓는 시골 할매나 할배 손에 꽃다발을 안긴 일은 없지 않을까요. 흙빛을 닮은 시골 할매나 할배 손에 작은 들꽃 한 송이를 가만히 건넨 일도 없지는 않을까요.


정읍의 눈 내리는 벌판을 걷노라면 마치 꿈속을 걸어가는 것 같다. 바람도 없는데 하염없이 눈이 쌓이고 또 쌓인다. 행여 길을 잘못 들어도 별로 당황스러울 것이 없다. 인가가 멀리서 보이는 국도에서 버스를 내리면 작은 시내가 흐르고 그 옆으로 방천길이 마을로 이어진다. 미루나무 한 그루 서 있는 곳에 간판도 창문도 없는 오래된 이발소가 있다. (55쪽)

우연한 기회에 동네 할머니 방의 문지방 위에 걸린 오래된 가족사진을 찍게 되면서 ‘낡은 방’ 연작을 시작했다. 이 사진을 찍게 되면서 나는 깨달았다. ‘아, 오래된 방에는 이렇게 가족의 역사가 가훈처럼 붙어 있었구나. 자식을 낳고, 그들이 자라고, 결혼을 하고, 아이의 돌이나 부모님의 환갑을 기념하는 사진들을 찍고, 그것을 모아서 문지방 위나 벽에 온통 걸어 두고 늙은 부모는 살아가고 있었구나.’ (83쪽)


  사진책 《감자꽃》은 감자꽃 같은 사진하고 글이 어우러집니다. 어쩌면 감자꽃은 덧없을는지 모릅니다. 사진책 《감자꽃》에 흐르는 사진하고 글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스쳐서 지나갈 만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감자알에서 뿌리가 돋고 줄기가 오르며 잎이 나기에, 이러면서 꽃이 피기에, 또 꽃이 지거나 꽃을 따기에, 시나브로 감자알이 굵습니다. 꽃내음은 저마다 다를 테지만 꽃이 피지 않는 풀이나 나무란 없습니다. 꽃이 피지 않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꽃이 피지 않는 삶이나 살림이란 없습니다.

  비록 그늘진 자리에서 겨우 자그마한 꽃송이를 바들바들 떨면서 터뜨리더라도, 이 자그마한 꽃송이를 고작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접어야 하더라도, 모든 풀이며 나무이며 사람이며 꽃을 피웁니다. 우리는 꽃피우는 곡식이랑 열매를 먹습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꽃피우는 사랑으로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입니다.


‘자영업자’ 작업을 하면서 삼산이용원을 여러 차례 방문했는데 주로 할아버지들이 모여서 술 한 잔씩을 하며 놀고 있었다. 그리고 늘 같은 말로 ‘사진도 못 찍는 사진사’라는 인사는 빼놓지 않았다. (121쪽)

“꽃시절은 언제였어요?” “나는 존(좋은) 시절도 없었어”라는 대답이 들려오는 순간, 아차 하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147쪽)


  누구나 꽃길을 걸을 수 있을까요. 누구나 꽃길을 걸으려면 우리 삶이나 마을이나 나라는 어떤 길로 거듭나야 할까요.

  우리는 꽃날을 누리지 못한 채 저무는 삶일까요. 우리한테 꽃날이 찾아오려면, 아니 우리가 꽃날을 지어서 꽃잔치를 즐기려면, 우리는 어떤 길을 걸으면 될까요.

  사진책 《감자꽃》은 일흔 할머니 나이를 걸어갈 키 작고 몸집도 작은 사진님 한 사람이 조곤조곤 일구어 온 사진밭을 차곡차곡 보따리 풀 듯이 보여줍니다. 숱한 정미소를 보여줍니다. 숱한 이발소를 보여줍니다. 숱한 마을지기를 보여줍니다. 숱한 시골가게를 보여줍니다. 숱한 마을이웃을 보여주고, 숱한 꽃송이를 보여줍니다.

  어쩌면 작고 여린 사진님 한 사람 눈에 뜨였기에 사진으로 깃들 수 있는 모습이라 할 만합니다. 크고 단단한 이들은 쳐다보지 않거나 아랑곳하지 않던 모습이라 할 만합니다. 낡은 방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요? 빈 방을 어떤 눈길로 바라볼 수 있을까요? 낡은 방에 빼곡한 낡은 사진에 깃든 마음을 얼마나 읽을 수 있을까요? 이제 빈 방이 되어 버린 자그마한 터가 한때 숱한 아이들이 바글바글 복닥이면서 씩씩하게 자라던 보금자리인 줄 읽을 수 있을까요?


오늘 또 할아버지가 찾아왔다.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외로울까 봐 이쁜 새악시들 사진을 걸어논 거요?” 할아버지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벽에는 ‘꽃시절’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나는 괜히 가슴이 뿌듯했다. ‘아, 꽃시절.’ (158쪽)


  꽃가루가 꽃가루 아닌 모랫바람으로 온나라를 휩쓰는 오늘날입니다. 꽃비가 내려도 자동차 유리창에 떨어지면 귀찮거나 성가시거나 싫다고 여기는 오늘날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꽃을 멀리하지 않았을까요? 감자꽃뿐 아니라 사람꽃도 멀리하고, 삶꽃이나 사랑꽃도 멀리하지는 않았을까요?

  꽃을 멀리하다 보니 어느새 꽃길하고도 멀어지고 꽃날도 잊고 말지는 않을까요? 스스로 꽃사람인 줄 잊으면서 그만 꽃벗이나 꽃이웃까지 잊지는 않을까요?

  사진님 한 사람이 쉰 줄부터 일흔 줄에 이르기까지 걸어온 길이 꽃길이었는지 흙길이었는지 가시밭길이었는지 구름길이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저 사진길을 걸었겠지요. 사진님 한 사람이 쉰 나이부터 일흔 나이에 이르도록 일군 사진이 꽃사진이었는지 흙사진이었는지 가시밭사진이었는지 구름사진이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그저 수수히 살아온 나날을 적바림한 사진이었겠지요.


꽃가루 황사로 범벅이 되고
오월은 장미대선으로 분주하고
꽃비는 더러운 차창 위에 모로 눕고
와이퍼는 호들갑을 떠는 금요일 밤
집에 돌아와 미역국에 찬밥을 말아 먹는데
내가 오늘 생일인 것을 아는 사람이 없다. (175쪽)


  사진을 놓고 예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진을 놓고 아트라 해도 됩니다. 사진을 디자인해 볼 수 있을 테고, 사진에 이런 이론이나 저런 사상이나 그런 주의를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다만 사진을 어떻게 바라보든 사진으로 이야기를 지피다 보면 어느새 꽃 한 송이가 피어나서 향긋한 바람을 일으킬 만하다고 봅니다. 바로 ‘사진꽃’입니다.

  우리는 사진예술을 하지 않아도 될 만하지 싶어요. 우리는 사진꽃 한 송이를 자그맣게 피울 수 있어도 넉넉하지 싶어요. 대단한 사진축제라든지 엄청난 사진페스티벌이라든지 놀라운 사진박물관을 세우지 않아도 되리라 봅니다. 들꽃 같은 사진이야기를 피우고, 마을꽃 같은 사진 노래를 부르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가볍게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사진꽃이 맺는 씨앗 한 톨을 오래오래 바라보아도 즐거우리라 생각합니다.

  일흔 할머니가 앞으로 아흔 할머니로 걸어가는 길목에서 피워낸 작은 사진책 《감자꽃》을 곱다시 덮습니다. 2017.12.21.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사진비평/사진읽기/사진넋)

* 이 글에 붙인 사진은 사진가 김지연 님한테 여쭈어 얻었습니다
* 서학동사진관 모습은 제가 찾아가서 찍었습니다
* 찻잔을 쥔 손은 사진가 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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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하늘가에서
마틴 프로스트 요가.글, 다나 레이몽 카펠리앙 사진 / 눈빛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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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책 읽기 360



가볍게 요가를 하고, 피터 팬처럼 사진놀이
― 요가, 하늘가에서
 다나 레이몽 카펠리앙 사진/마틴 프로스트 요가·글
 눈빛 펴냄, 2015.10.26. 45000원


요가는 몸동작 그 이상의 것이다. 몸동작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또 우리가 볼 수 없는 어떤 현상에 요가의 진정한 의미가 있다 … 우리가 호흡을 자연스럽게 하면서 생각과 의지를 멈출 때, 또 별다른 노력이나 꾸밈 없이, 소음 속에서 고요함을, 소요에서 평정함을, 무질서에서 조화를, 한 점 공간에서 우주를 느낄 때, 비로소 요가의 진정한 기능과 풍부한 가치를 깨닫는다. (6쪽)


  몸짓이란 흐름입니다. 흐르지 않으면 몸짓이라 하지 않습니다. 손가락을 까딱이든 눈썹을 치켜뜨든, 어떠한 몸짓이든 흐르기 마련입니다. 몸을 움직일 적에는 늘 흐름입니다. 어떤 이는 좀 뻣뻣해 보일 수 있고, 누구는 대단히 부드러울 수 있어요. 똑같이 물구나무서기를 할 적에 한 사람은 쭈뼛거리면서 넘어질까 싶지만, 다른 한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하늘로 발을 뻗고는 팔을 통통 튀길 수 있어요.

  그러나 뻣뻣하기에 어설프지는 않습니다. 매끄럽기에 훌륭하지는 않아요. 저마다 다른 몸을 드러낼 뿐이고, 저마다 다른 삶을 걸어왔구나 하고 나타낼 뿐입니다.

  이런 흐름을 엿볼 수 있다면, 사진을 놓고서 좋은 사진이나 나쁜 사진을 가릴 수 없는 줄 알아챌 만해요. 이 사진은 그저 이러한 사진이요, 저 사진은 마냥 저러한 사진입니다. 더 뛰어난 사진이란 없이, 그때그때 우리 삶을 보여줍니다. 더 아름답거나 놀라운 사진이란 없이,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가면서 생각을 키우느냐를 담아냅니다.


영원은 네 안에 있다
목으로, 옆구리로 조여 오는 것을 느끼면서
왜 머리로 만들어 내려고 하고
왜 멀리에서 끌어오려 하는가
바로 가까이에 있는데 (15쪽)


  사진책 《요가, 하늘가에서》(눈빛, 2015)는 요가하고 사진이 만나는 자리를 보여줍니다. 요가란 몸짓 너머에 있다고 한다면, 사진이란 종이에 얹은 그림 너머에 있다는 대목을 살짝 이야기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생각을 몸짓 하나로 드러내는 요가이고, 우리 생각을 그림처럼 하나로 담아애는 사진입니다. 모든 길이 우리 마음에 있다고 하듯, 모든 길을 사진 하나에 머물러 흐르도록 이끌 수 있어요. 먼 곳에 있는 멋진 모습을 찾으려 할 까닭이 없이, 우리 곁 어디에서나 즐겁거나 아름답거나 멋지거나 새로운 이야기를 느껴서 사진으로 담을 수 있어요.

  다시 말해서 ‘좋은 곳’으로 사진을 찍으러 갈 일이란 없습니다. 우리 보금자리나 일터가 바로 ‘나 스스로 사진을 가장 즐겁게 찍을 만한 자리’입니다. ‘좋은 모델’을 찾거나 불러야 할 일이란 없습니다. 우리가 늘 마주하는 사람이나 논밭이나 건물이나 집이나 이웃이나 풀벌레나 새나 물고기나 바람이나 구름이나 별이 ‘나 스스로 가장 즐거이 담을 만한 모습(모델)’이에요.


바람이 기분 좋게 바순 연주를 들려주는
지붕 낮은 동네를 보호한다 (76쪽)

그림자밟기 하는 소녀처럼 논다
한 줄기 햇빛 사이로 피터 팬을 출현시킨다 (126쪽)


  요가를 하는 마틴 프로스트 님은 어디에서나 요가를 합니다. 마실길에서든 마을에서든, 저잣거리에서든 복닥거리는 도시 한복판이든 가릴 일이란 없습니다. 어디에나 바람이 흐르고, 어디에나 햇볕이 드리웁니다. 어디에나 사람이 있고, 어디에나 흙이랑 풀이랑 나무가 있어요.

  남들한테서 ‘피터 팬’을 찾지 않습니다. 스스로 피터 팬이 됩니다. 남들이 하늘을 눈부시게 날아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지 않고, 스스로 훌쩍 하늘로 날아오르는 꿈을 꾸고 즐거운 몸짓을 펼칩니다.

  곧 내 사진을 내가 바라봅니다. 내 사진을 내가 찍지요. 훌륭하거나 멋스럽거나 이름이 높은 남(다른 사진가)은 그만 쳐다보고, 스스로 걸어가는 길을 가만히 되짚으면서, 내 삶자리에서 내 삶을 담아내어 기쁨을 찾는 사진을 찍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한테 보여주려고 찍는 사진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을 가꾸고 삶을 지으며 사랑을 꽃피우는 사진을 찍는다고 할 수 있어요.


의자에 
서서 
앉는다
바람에 마르는
하얀 천이
된다 (141쪽)

멍청한 호박 덩어리가 되어도 좋고
스타일이 제멋대로라도 좋다 (222쪽)


  사진책 《요가, 하늘가에서》는 대단한 몸짓이나 놀라운 그림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대단하거나 놀라운 몸짓·그림이란 바로 우리 스스로 언제나 짓거든요. 아기를 어르는 어머니 얼굴에서 대단한 그림이 피어납니다. 마늘쫑 꾸러미나 파 한 묶음을 파는 저잣거리 아지매 얼굴에서 놀라운 이야기가 자라납니다. 밥을 짓는 어버이 손길에서,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는 아이들 손길에서, 전철길에 책을 읽는 눈길에서, 일을 마치고 살짝 눈을 부치며 쉬는 삶길에서, 다 다르면서 저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즐겁게 걸으면 즐거운 나들이입니다. 짜증을 내거나 한숨을 폭폭 쉬면 짜증스럽거나 귀찮은 나들이예요. 웃고 노래하는 몸짓으로 사진기를 손에 쥔다면 어떤 사진을 찍을까요? 웃지 않고 노래하지 않는 몸짓으로 사진기를 손에 쥔다면 어떤 사진이 나올까요?

  더 좋거나 나쁜 사진이 없듯, 더 좋거나 나쁜 장비도 없습니다. 더 좋거나 나쁜 삶마저 없어요.

  가만히 하늘가를 바라봅니다. 저 먼 하늘가는 이곳에서 보기에 멀 뿐, 저 먼 곳에 있는 누구는 이쪽을 바라보며 먼 하늘가라고 느낄 만합니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걸음걸이와 몸짓과 손짓으로 하루를 짓습니다. 하루를 짓는 길에 이야기가 흐르고, 이 이야기를 고이 건사하여 글도 그림도 사진도 마음껏 가꿉니다. 2017.11.9.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사진비평/사진읽기)

* 이 글에 붙이는 사진은 눈빛 출판사에 말씀을 여쭈어 고맙게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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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집배원 최씨 눈빛사진가선 49
조성기 지음 / 눈빛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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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책 읽기 359



우리 곁 고운 이웃을 바라보는 손길

― 우편집배원 최씨

 조성기 사진

 눈빛 펴냄, 2017.7.26. 12000원



  어릴 적을 떠올립니다. 우편집배원을 볼 적마다 어떻게 집집을 다 돌 수 있을까 하고 몹시 궁금했어요. 온 집을 돌면서 어떻게 편지를 안 틀리고 돌리는지 궁금했고요. 그냥 모든 집을 다 돌아서는 될 일이 아닐 테지요. 골목골목 샅샅이 알 뿐 아니라, 가장 빠르면서 한 집도 안 빠뜨릴 수 있을 만하게 다녀야 할 테고요.


  어떻게 모든 집을 찾아다닐 수 있느냐 하는 궁금함은 오래지 않아 풀었습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신문을 돌리는 일을 했어요. 신문을 돌리려면 집배원처럼 마을집을 꼼꼼히 알아야 합니다. 우유를 돌리는 일을 할 적에도, 다른 가게에서 배달을 할 적에도, 모두 마을집을 낱낱이 알아야 하지요.


  마을사람이기에 마을집을 꿰뚫기도 합니다. 한마을에서 사는 이웃이니 서로서로 마을집을 환하게 들여다봅니다. 일도 일이라고 할 만하지만, 마을에서 하는 일이란 늘 이웃을 마주해요. 이웃집 사람이 우리 가게 손님입니다. 우리 스스로 이웃가게에 손님으로 찾아갑니다.


  이런 흐름에서 더 짚어 본다면, 지난날에는 세금고지서는 드물고 참말로 편지가 많았어요. 엽서도 많았고요. 전화조차 드문드문 있던 무렵에는 흔히 편지나 엽서를 띄웠습니다. 하루나 이틀쯤 가벼이 기다리면서 글월을 띄워요. 사나흘이나 이레쯤 넉넉히 기다리면서 글월을 써요. 오래고 깊은 손길을 담아 글월을 적어 띄우고, 오래고 깊은 손길을 담은 글월을 기쁘게 받지요.


  그러니 이런 글월을 가방 가득 담아서 나르는 집배원은 배달이라는 일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마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 주는 일꾼입니다. 집집마다 기쁘거나 슬픈 이야기를 살포시 건네는 이웃님이에요. 때로는 봄철 제비처럼 새롭고 반가운 이야기를 알려주기도 하고요.



1994년 대학 4학년 여름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하던 날 우연히 우체국 잡지 기사에서 정년퇴직을 앞둔 지리산 산골마을의 집배원을 알게 되었다. 문득, 나는 집배원의 일상을 촬영하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 차 그에게 연락도 하지 않고 무작정 대구에서 버스를 타고서 그의 근무지인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함양군 마천우체국까지 찾아갔다. 당시 나는 학생 신분으로, 그는 자신을 며칠이고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게 해 달라는 나의 요청을 첫 만남에 거절하였다. 나는 며칠 뒤 우체국의 허락을 얻으면 그를 설득할 수 있을 거라 생각되어 발걸음을 우체국으로 돌렸다. 사정을 말하니 우체국장님은 선뜻 집배원용 오토바이까지 협조해 주셨다. 그 후 그에게 촬영을 허락해 달라 재차 간곡하게 말했고, 그는 나의 부탁을 끝내 들어주었다. 그는 집 대문 옆에 작은 방을 내주었고, 함께 집밥까지 먹으며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는 당시 나의 열정을 가상히 여겼던 것 같다. (3쪽/머리말)



  사진책 《우편집배원 최씨》(눈빛, 2017)를 읽습니다. 사진책에 흐르는 지리산 우편집배원 삶자국을 가만히 읽습니다. 1994년에 열흘에 걸쳐서 우편집배원하고 함께 마을이랑 멧자락을 돌아다니면서 찍은 사진마다 깃든 수수한 이야기를 읽습니다.


  1994년만 하더라도 집배원 오토바이가 널리 퍼졌습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오토바이 아닌 자전거로 편지를 날랐고, 두 다리로 걸어서 골목을 누빈 집배원도 많아요. 마을하고 마을 사이가 띄엄띄엄인 시골에서라면 으레 자전거를 달려야 할 테지요. 골목마다 빼곡히 살림집이 맞닿은 도시에서는 자전거가 오히려 번거로울 수 있으니 걸어서 편지를 날랐을 테고요.


  저는 자전거랑 우표랑 골목을 퍽 좋아하기에 어릴 적에 ‘집배원으로 일하는 삶’이 여러모로 재미있고 뜻있으리라 여기곤 했습니다. 숱한 사람들 이야기를 다 다른 글씨로 적은 봉투에 온갖 우표가 붙어서 여러 고장을 넘나들어요. 집배원은 이 숱한 편지를 손수 갈무리하여 알맞게 집집마다 돌립니다. 글월을 띄우는 사람이 실어 보내는 마음을 헤아리면서 고이 간수합니다. 글월을 기다리면서 받을 사람이 설렐 마음을 생각하면서 알뜰히 건사하고요.


  사진책 《우편집배원 최씨》는 꼭 열흘 동안 우편집배원하고 함께 움직이며 찍은 사진을 모았으니, 더 깊거나 너른 이야기를 담기는 어려운 사진책으로 얼핏 여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편집배원 살림하고 발자국을 찬찬히 지켜보면서 함께 움직이는 마음이라면 열흘 아닌 하루만 함께 움직이더라도 지리산에서 여러 마을을 휘돌면서 이야기를 실어 나르는 일이란 무엇인가를 사진으로 애틋하게 보여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1994년부터 2017년까지 어느덧 스물 몇 해라는 나날이 켜켜이 쌓입니다. 그리 멀지 않은 1994년 같으나 한 해 두 해 흐를수록 더 먼 지난날이 됩니다. 앞으로 2020년이나 2024년쯤 되면 그무렵에는 지리산 멧골마을 집배원은 어떤 차림으로 어떤 마을하고 어떤 집을 돌면서 일을 하려나요. 요즈음에는 지난 1994년하고 다른 어떤 발걸음이나 몸짓으로 어떤 이웃을 마주하는 집배원이 있을까요.


  스물 몇 해 사이에 그리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 있을 테고, 이동안 눈부시게 달라진 모습이 있을 테지요. 1994년에 허리 굽은 할머니인 분은 오늘날 어떻게 지내실까요. 그즈음 어머니 등에 업힌 아기는 오늘날 어떤 어른으로 자랐을까요. 그무렵 기저귀를 빨던 아주머니는 오늘날 어떤 보금자리를 가꿀까요.


  우편집배원은 편지로 사람하고 사람 사이를 잇습니다. 우편집배원을 사진으로 담은 한 사람은 사진으로 사람하고 사람 사이를 잇습니다. 아스라한 지난날하고 오늘날을 잇고, 그리 멀지 않은 듯하지만 어느새 꽤 멀리 떨어진 지난날하고도 오늘날을 가만히 잇습니다. 먼 길을 글월 하나가 잇고, 먼 나날을 사진 하나가 이어요.


  이 가을에 사진 한 장 찍어서 뒤쪽에 우표를 붙이고 몇 줄 이야기를 적어서 먼 곳에 사는 이웃이나 동무한테 부쳐 보면 어떠할까 싶습니다. 우체국에서 엽서 한 장 장만해서 뒤쪽에 사진을 붙여서 부쳐 보아도 재미있을 테고요.


  때로는 우리 스스로 집배원이 되어 글월을 건넬 수 있습니다. 손수 쓴 글월을 가방에 넣어 시외버스를 달리지요. 전남 고흥에서 서울로 글월 하나를 손수 실어 날라 볼 수 있습니다. 부산에서 광주로 글월 하나를 몸소 실어 날라 볼 수 있어요. 더 빨리 나르지 않아도 글월 하나는 우리한테 즐거운 이야기가 됩니다. 더 많은 사진을 찍지 않아도 사진 하나는 오래도록 우리 곁에 반가운 이야기로 머뭅니다.


  우리 곁 고운 이웃을 바라보는 손길로 사람이랑 사람 사이를 이은 우편집배원이 있습니다. 이 우편집배원을 고운 눈길로 바라보며 사진을 찍어 어제랑 오늘을 이은 사진가 한 사람이 있습니다. 2017.10.15.해.ㅅㄴㄹㄴ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사진읽기/사진넋)


* 이 글에 붙인 사진은 눈빛출판사에 말씀을 여쭈어 고맙게 받아서 붙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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