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fe of Yousuf Karsh (Paperback) - Portrait in Light and Shadow
Maria Tippett / House of Anansi Pr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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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고 싶은 책은 목록에는 뜨지 않으나, 먼저 유섭 카쉬 님 이야기를 적바림한 분이 있어, 뒤에 붙여서 적어 봅니다) 



 즐거운 삶이 사진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18] 유섭 카쉬(Yousuf Karsh), 《American legends》(Little Brown & com,1992)


 1908년에 아르메니아에서 태어나 1924년에 캐나다로 건너가고, 1932년부터 사진길을 걷다가 2002년에 숨을 거둔 유섭 카쉬(Yousuf Karsh)라는 사진쟁이를 가리켜 ‘사람사진을 훌륭히 찍은 분’으로 일컫습니다. 어떻게 보면 유섭 카쉬라는 분은 온누리에 손꼽히는 사람들을 ‘사진으로 담았다’기보다 ‘빛으로 담았다’고도 할 테며,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만, 더욱이 사진이라는 문화나 예술을 한껏 북돋우면서 ‘사진을 얕보’거나 ‘사진을 아무것 아닌 손재주’쯤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생각을 바꾸었다 할 텐데, 이런저런 이름을 붙이는 일은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이런 이름 저런 꾸밈말은 부질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 유섭 카쉬 님 사진을 바라보면서 가슴속으로 아무것을 느끼지 못하면서 이런 이야기만 늘어놓는다면 덧없습니다. 남들이 하는 우러르는 말을 따를 노릇이 아니라, 유섭 카쉬 님이 훌륭히 사진을 찍을 뿐 아니라, 사진이 참말로 빛으로 그리는 문화요 예술이라고 느낀다면 내 삶에서 내가 사진기를 쥘 때에 나부터 늘 스스로 ‘빛으로 나누는 삶’을 보여줄 노릇입니다.

 제대로 헤아리거나 받아들이는 사람은 제대로 살아갑니다. 제대로 헤아리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입으로는 북돋우거나 섬기는 말을 읊을 수 있으나, 막상 나 스스로는 달라지거나 거듭나거나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사람을 사진으로 담는 사람이 많고, 유섭 카쉬 님이 내놓은 사진책 가운데 하나인 《American legends》(Little Brown & com,1992)에 담긴 사람들처럼 ‘이름나거나 손꼽히거나 훌륭하다 하는 사람을 담은 사진’을 찍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유섭 카쉬 님이 찍은 사진이라든지 유섭 카쉬 님이 찍은 ‘이름나거나 훌륭하다는 사람들 모습을 담은 사진’은 여느 사진쟁이나 퍽 이름난 다른 사진쟁이 사진하고 무척 다릅니다.

 바라보는 눈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요? 사진으로 담으려고 손가락을 움직여 사진기 단추를 누르는 손길이 다르다고 해야 하나요? 사진으로 적바림해서 둘레 사람들한테 보여주거나 나누려는 마음이 다르다고 해야 할는지요?

 생각해 보면, 사진쟁이 가운데 남하고 똑같이 사진을 찍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사진기를 쥐어 같은 빛을 받으며 같은 모습을 찍어도 빈틈 하나 없이 똑같다 할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세발이를 세워 넣고 단추만 다른 사람이 누르면 똑같은 사진이 나오려나요? 움직이지 않는 무언가를 놓고 전기불을 밝힌 곳에서 사진기 단추만 누르도록 하면 유섭 카쉬 님이 찍든 고든 파크스 님이 찍든 한결같다 싶은 사진이 나올까요? 어쩌면, 이렇게 억지로 만들어 똑같은 사진을 뽑을 수 있으니까 사진을 얕보거나 깎아내릴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기계만 잘 다루면 똑같이 찍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포토샵을 잘 건드리면 사진기 없어도 사진을 얻는다고도 하니까, 사진은 문화도 예술도 아니라 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기계만 잘 다루는 사람은 사진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포토샵만 잘 건드리는 사람 또한 사진을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기계를 잘 다루는 사람은 기계쟁이입니다. 포토샵을 잘 건드리는 사람은 포토샵쟁이예요. 사진쟁이가 아닙니다. 사진쟁이란 사진을 하는 사람입니다.

 유섭 카쉬 님이 ‘사람을 사진으로 담던 여느 사진쟁이’하고 다른 대목이라면, 당신이 찍은 사진을 바라보면서 ‘그저 사진이기에 사진으로 말하는 사람으로서 사진쟁이 길을 걷는다’고 당신 목소리를 담았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당신 사진책 《American legends》를 한 번 볼 때, 두 번 세 번 볼 때에, 열 번째 볼 때에, 또 자꾸자꾸 볼 때에 곰곰이 웃으면서 생각합니다. 참말 당신 사진으로 찍힌 사람들은 보드랍습니다. 부드럽지 않고 보드랍습니다. 웃어도 보드랍고 웃지 않아도 보드랍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이나 당신 사진기를 바라보아도 보드라우며, 당신이나 당신 사진기를 바라보지 않아도 보드라와요.

 어떤 사진은 틀이 좀 기울어집니다. 어느 사진은 팔 한 귀퉁이가 잘린다든지 신발이 잘립니다. 어느 사진은 비례가 살짝 어긋나거나 꽤 어긋납니다. 그러나, 이런 사진이든 저런 사진이든 사진이라는 틀에 깃든 사람을 맨 먼저 느끼며, 이 사진에 담긴 사진을 바라보면 즐겁기 때문에 이 사진은 이런 틀이거나 저런 틀이거나 그리 대단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초점이 덜 맞는다거나 아주 가늘게 떨린 느낌이 잡히더라도 괜찮을 뿐 아니라, ‘괜찮다기보다 이러한 느낌이 깃든 모습’이기에 이이 사진으로 한결 어울리는구나 싶어요.

 마땅한 노릇이지만, 사진을 잘 찍는 틀이란 없습니다. 사람을 잘 찍는 사진 또한 없습니다.

 아주 마땅한데요, 사랑을 잘 하는 길이란 없습니다. 사랑을 잘 하는 사람 또한 없어요.

 잘한다고 하면 잘한다고 하는 대로 즐겁고, 잘 못한다고 하면 잘 못한다고 하는 대로 즐거우며, 영 못하는구나 싶으면 영 못하는구나 싶은 대로 즐거운 삶입니다. 그렇지만, 사람 삶에는 점수를 매기지 못하고, 사진에도 점수를 붙이지 못합니다.

 어떤 이는 빈틈 하나 없이 꽉 짜인 대로 살아가는 데에서 즐거움을 찾겠지요. 누군가는 조금 풀어지거나 느슨한 대로 살아가는 곳에서 즐거움을 누리겠지요. 어느 때에는 이렇고 다른 때에는 또 요렇게 즐기면서 웃고 울 테지요.

 한길이란 없습니다. 한길을 걷는 사람이지만 한길이란 딱히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름난 어느 한 사람을 사진으로 담을 때에 더 훌륭하거나 도드라지거나 멋스러이 담는 틀이란 없습니다. 그림을 그리든 글을 쓰든 똑같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보이도록 해야 이 사람을 담는 사진이 아닙니다. 유섭 카쉬 님이 찍을 때에는 유섭 카쉬 님이 알거나 사귀면서 사람들한테 들려주는 목소리가 깃드는 ‘사람사진’입니다. 유진 스미스 님이 찍을 때에는 유진 스미스 님이 알거나 사귀면서 사람들한테 들려주는 이야기가 담기는 ‘사람사진’입니다. 레니 리펜슈탈 님이 찍을 때에는 레니 리펜슈탈 님이 알거나 사귀면서 사람들한테 들려주는 넋이 스미는 ‘사람사진’이에요. 한편, 누가 찍든 찍는 사람 매무새와 삶과 넋이 드러나기만 하지 않습니다. 누가 찍든 찍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사람사진’이지만, 누가 찍더라도 ‘사진에 담기는 사람 삶’은 이이 삶결과 삶무늬 그대로입니다. 사진으로는 늘 달리 보이겠으나, 사진에 담기는 사람은 늘 스스로 제 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황순원 님이 〈소나기〉를 썼다 해서 ‘소나기’는 황순원 님 소설대로 소나기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황순원 님이 〈소나기〉를 쓴 뒤로 소나기는 ‘황순원이 바라보며 느낀 소나기’가 하나 새로 태어났으며, ‘내가 황순원 님 마음이 되면서 느끼고픈 소나기’에다가 ‘소나기는 늘 그대로 소나기였기에, 소나기가 늘 소나기 그대로이던 마음’은 어떨까를 가만히 짚을 수 있습니다.

 사람을 찍는 사진은 사람을 가두지 않습니다. 사람을 사진 한 장에 가두어, ‘이 한 장으로 한 사람 모습을 송두리째 말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 한 장으로 이 사람 사진은 다 보여주었어!’ 하고 외치려 한다면, 이런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쟁이가 아니라 겁쟁이라 하거나 푼수쟁이라 할 만합니다. 사진쟁이는 사진으로 사람을 사귀면서 사람으로 살아가는 즐거움을 사진으로 이야기 나누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찍으면서 ‘이 사진 한 장’으로 끝낼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두 번 찍으면 ‘한 사람한테 깃든 두 가지 이야기’가 샘솟습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백 번 찍으면 ‘한 사람한테 어린 백 가지 이야기’가 샘솟을 테지요. 사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사진이 보여주는 모습이란, 사진으로 나누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이제까지 사진을 하던 사람이나 사진밥을 먹던 사람이나 사진밭을 일군 사람은 사진이 무엇이라고 여겼는가요.

 이야기를 꽃피우는 사람들이 늘 새롭구나 하고 느끼도록 손길을 내미는 삶이 곧 사진입니다. 멋진 문화나 놀라운 예술이 아닌 즐거운 삶이 사진입니다.

 유섭 카쉬 님은 첫손가락 꼽을 사진쟁이가 아닙니다. 유섭 카쉬 님을 ‘사람사진 아주 훌륭히 찍는 첫손’으로 꼽는 사람이란 사진을 볼 줄 모를 뿐 아니라, 유섭 카쉬 님을 볼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유섭 카쉬 님은 ‘사진을 보는 사람들 굳은 마음’을 녹이거나 풀면서 ‘사진이란 이렇게 즐겁습니다’ 하는 길을 조용히 넌지시 살며시 살가이 나누어 준 사람입니다. 사진이란 즐거운 삶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부터 즐겁고,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 또한 즐거운 삶입니다. (4344.2.1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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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호의 카메라 - 세상에 풀어놓은 마음의 모습들
권영호 지음 / 앨리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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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찍기는 아주 쉽습니다
 [찾아 읽는 사진책 18] 권영호, 《권영호의 카메라》(앨리스,2010)



 사진찍기로 돈을 벌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든, 사진찍기를 할 뿐 돈벌이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사람이든, 언제나 사진을 좋아할 수 있으며 사진을 사랑할 수 있지만 사진하고 동떨어지거나 사진을 모를 수 있습니다. 사진을 배우려고 무던히 애쓴다 해서 사진을 알 수는 없습니다. 사랑을 배우려고 힘들여 애쓴다 해서 사랑을 알 수 없고, 밥이나 농사나 하늘이나 흙이나 사람을 배우려고 용쓴다 해서 밥이든 농사이든 하늘이든 흙이든 사람이든 속속들이 알 수 없는 흐름하고 매한가지입니다.

 사진찍기로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하는 권영호 님이 《권영호의 카메라》라는 조그마한 사진수필 하나 내놓습니다. 이 조그마한 사진수필에 담은 권영호 님 사진은 ‘돈 받고 팔 생각’으로 찍은 사진이라거나 ‘사진잔치 열어 사람들한테 내보이려는 마음’으로 찍은 사진이라 여기기 힘듭니다. 그저 권영호 님 스스로 좋아하는 대로 찍은 사진이로구나 싶습니다. 사진길을 걷거나 사진길을 걷고 싶은 사람들한테 ‘사진을 찍는 마음’이 어떠할 때에 참으로 즐거울까 하고 이야기를 건네려고 스스로 기쁘게 찍어 스스로 신나게 엮은 사진이리라 생각합니다.

 권영호 님은 《권영호의 카메라》에서 말합니다. “내 스타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찍은 사진에서 내가 보였으면 좋겠다. 그저 잘 찍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을 넘어서 내 생각, 내 기분이 드러나는 사진을 찍고 그것을 본 사람들이 사진에서 생동감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31쪽).”고. 그런데 권영호 님은 ‘권영호 님 삶에서 어떠한 모습’이 보이도록 하고 싶은지까지 말하지는 못합니다. 어떤 사진이든 찍은 사람 모습이 나타나기 마련이고, 잘 찍든 못 찍든 찍은 사람 느낌이 묻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사진을 찍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스스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며 어떤 느낌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가를 먼저 잘 알아채야 합니다. 스스로 먼저 잘 알아챌 때에 나 스스로 어떠한 사진을 찍으면서 나누는가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진쟁이 스스로 ‘생동감 있게’ 살아가면, 이이가 찍은 정물사진을 보면서도 ‘생동감을 느낍’니다. 사진쟁이 스스로 ‘슬픈 마음에 푹 젖은 채’ 살아가면, 이이가 찍은 노래꾼 이효리 님이 활짝 웃는 사진을 보면서도 ‘슬픈 마음에 푹 젖은 채’ 보내는 나날을 느끼거나 읽습니다.

 사진쟁이는 기계가 아닌 사람입니다. 단추를 누르는 일은 사람 아닌 기계를 시켜서도 한다지만, 어떠한 모습을 어떠한 크기와 질감과 빛그림으로 담으려 하는가는 ‘기계 아닌 사람’이 ‘쇠붙이 아닌 따뜻한 가슴’에 따라 담기 마련입니다. 사진을 주문한 사람이 바라는 모습을 찍어 준달지라도, 사진쟁이 스스로 아주 기쁜 나날이라면 ‘슬픈 모습’을 찍어 달라 했는데, 막상 하나도 안 슬픈 모습이 되어 버립니다. 기쁜 모습을 찍어 달라 했으나 사진쟁이가 더없이 슬픈 나날을 보낸다면 하나도 안 기쁜 모습만 찍고 말아요.

 연기를 하는 사람들은 연속극에서든 영화에서든 나 스스로 연기를 하는 배역에 맞추어 내 삶을 바꿉니다. 내 삶을 내 배역에 맞추어 바꾸지 않고서야 연기를 하지 못합니다. 연기를 잘 하는 사람은 내 배역에 따라 삶이 바뀌기 때문에, 자칫 마음이 크게 다칠 수 있습니다. 나쁜 짓 하는 배역을 맡으면 참말 내 삶에서도 나쁜 짓이 저절로 튀어나옵니다. 착한 일 하는 배역을 맡으면 참으로 내 삶에서도 착한 몸가짐이 스스럼없이 배어듭니다.

 상업사진을 하면서 주문자 입맛에 맞추는 일이란, 언제나 내 삶을 바꾸어야 하는 사진쟁이가 되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마치 영화배우처럼 영화 배역에 따라 늘 내 삶을 바꾸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살아숨쉬는 내가 아니라 ‘이웃 삶에 오롯이 내 모두를 맞추어 살아내는 내’가 되어야 해요. 권영호 님이 하는 사진찍기란 ‘나를 드러내는 사진찍기’가 아닌 ‘다른 사람이 바라는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사진찍기’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권영호 님 당신은 “나는 내가 찍은 사진에서 내가 보였으면 좋겠다”고 말하는구나 싶습니다. 숱하디숱한 사진을 찍는 동안 정작 권영호 님 당신을 즐거이 찍을 길은 없으니까요.

 이리하여, 《권영호의 카메라》를 들여다보면 그리 대단하지 않을 뿐더러, ‘잘 찍지 못한’ 사진이 수두룩합니다. 어설프다든지 ‘하얀 옷 입은 어린 아이’한테 지나치게 환상을 품는 모습마저 드러납니다.

 그러나, 권영호 님이 이제껏 권영호 님 삶과 모습과 꿈을 즐거이 나누는 삶사진을 찍을 수 없었던 흐름을 돌아본다면 더없이 자연스럽거나 마땅한 노릇입니다.

 누구든 빈틈없는 사람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꽉 짜인 채 어수룩한 데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면서 띄어쓰기를 틀리기도 하고, 말을 하면서 앞뒤가 안 맞기도 하며, 물을 쏟거나 밥을 태우거나 약속을 깜빡 잊기도 하는 사람입니다. 《권영호의 카메라》에 담긴 권영호 님 사진은 이렇듯 ‘깜빡깜빡 하기도 하고 어설프기도 한’ 여느 사람 내음이 살며시 묻어납니다. 그러나, 여느 사람 내음이 살며시 묻어나려 하다가 자꾸만 ‘주문자 입맛에 맞추어 사진을 찍던 버릇’이 톡톡 튀어나옵니다. 더 수수하게 더 투박하게 더 조촐하게 당신 사진길을 좋아하는 이야기를 펼칠 듯하다가도 자꾸 겉멋을 부립니다.

 겉멋 부리기가 잘못이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주문자 입맛에 맞추’는 일은 멋을 부리고 맛을 내야 하는데, “나는 내가 찍은 사진에서 내가 보였으면 좋겠다”고 한다면 내 사진맛이란 굳이 더 멋부리거나 맛내는 조미료를 쓴다 해서 좋아지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그 소녀를 카메라에 담으며 나는 상상을 자유롭게 펼친다. 사진 속 소녀는 지금 봐도 참 어여쁘다. 아마도 그건 내가 소녀를 어여쁘게 바라보고 있었다는 뜻이 아닐까(96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곧, 돈을 받고 사진을 찍어야 할 때에는 사진쟁이로서는 돈을 찍을밖에 없습니다. 사진을 찍고 돈을 받으면, 나는 사진을 찍겠지요. 그저 어여쁘게 바라보며 사진을 찍을 때에는 언제나 어여쁘구나 싶은 사진을 얻습니다. 어여쁘구나 하고 느낄 때에 어여쁘다고 느끼도록 사진을 찍어요.

 사진쟁이란, 사진찍기로 돈을 벌든 사진찍기를 그저 즐기든, ‘내 생각에 맞추어 찍는 사진’인지 ‘사진에 맞추어 생각을 하는 삶’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삶에 따라 찍는 사진’인지 ‘사진에 따라 보내는 삶’인지 곰곰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어느 결을 사랑하면서 아끼느냐에 따라 삶도 사람도 사랑도 사진도 달라집니다.

 권영호 님은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서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아주 솔직한 순간, 솔직한 눈빛. 마치 무성영화를 볼 때 스크린 속의 배우들이 웃고 있는지 다투고 있는지 슬퍼하는지 화가 나 있는지 굳이 소리가 없어도 저절로 알게 되는 것처럼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 얼굴은 그것 자체로 모든 것을 다 말해 준다. 그런 얼굴을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111쪽).” 하고 말합니다만, 권영호 님이 살아가는 틀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는지 모르나, 이 말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그런 얼굴을 만나기란 쉽습’니다. 그런 얼굴을 만나 사진으로 찍기도 쉽습니다.

 중국에서 만난 흰옷 입은 아이를 찍은 사진은 무슨 사진이었을까요. 이 사진은 사진으로 모두를 다 말해 주지 않던가요. 권영호 님 스스로 ‘모든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들려주는 사람을 만나 사진을 찍는 일’을 겪으면서도, 이러한 일이 쉬운지 어려운지를 가누지 못한다면 큰일입니다. 스스로 겪는다 해서 누구나 다 알아채지는 않는다지만, 스스로 바라는 대로 살고, 스스로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는 나날인 줄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든 바라는 대로 사진을 찍습니다. 더 멋스러이 찍고픈 사람은 참말 더 멋스러이 찍습니다. 더 아름다이 찍으려 하는 사람은 더 아름다이 찍어요. 더 가난해 보이도록 찍으려면 더 가난해 보이도록 찍습니다. 더 구질구질하게 보이도록 찍자니 참말 더 구질구질하게 보이도록 찍고 말아요.

 골목동네 사진을 찍는 이들은 으레 골목동네를 ‘골목집 = 달동네 집 = 가난’이라고 공식을 짜맞추어 사진을 만듭니다. 골목동네를 살가이 사귀면서 사진을 못 찍기 일쑤입니다. 골목동네를 사귀는 일이 어렵기에 이렇게 사진을 찍을까요? 골목동네를 사귀는 일이 어렵지 않으나, 사진쟁이 스스로 내 삶을 바치고 품을 들이면서 짬을 내어 가까이 다가서며 만나지 않으니까, 늘 판에 박히거나 틀에 박힌 사진만 찍고 맙니다.

 상업사진이든 패션사진이든, 주문한 사람한테 보내 줄 사진을 찍자면, 주문한 사람이 어떠한 마음이거나 뜻이요 어디에 어떻게 쓰며 모델은 어떤 느낌이 나야 하는가를 골고루 살펴야 합니다. 사진은 스튜디오에서 찍을는지 밖에서 찍을는지, 한국에서 찍을는지 나라밖에서 찍을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하나 따지고 재야 합니다. 곧, ‘깊이 사귀는 삶’이라는 매무새로 주문을 받아 사진을 만들어야 합니다. 깊이 사귀는 삶이라는 매무새로 다가설 때에 상업사진이든 패션사진이든 훌륭하다 싶은 작품 하나 태어납니다.

 다큐사진이라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집에서 아이를 돌보며 아이를 사진으로 찍을 때에도 똑같습니다. 영정사진을 찍는다 해서 다를 까닭이 없어요. 언제나 똑같습니다. 그저 기계처럼 후다닥 영정사진을 찍는다면, 영정사진으로 찍히는 할머니 할아버지부터 마음이 무겁습니다. 한 분 한 분 당신 삶을 기리고 아끼면서 고맙게 찍는 매무새일 때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부터 사진으로 찍히는 때에 웃고 울면서 좋아합니다.

 사진찍기는 아주 쉽습니다. 사진찍기는 내 삶대로 찍으니까 아주 쉽습니다. 내 삶이 어떠한가를 헤아리면서 하는 사진찍기인 만큼 어려울 까닭이 없습니다. 내가 찍고픈 사진감에 따라 내 삶을 맞추거나 고치거나 가다듬으면 하나도 어려울 일이 없습니다.

 사진찍기가 어렵다면, 나 스스로 내가 사진으로 담으려는 사진감으로 깊이 스며들거나 파고들거나 어깨동무하거나 손잡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살가이 사귀거나 가까이 다가서지 않고서야 무슨 사진을 찍겠습니까. 내 삶에 따라 달라지는 사진인 줄 느끼고, 내 삶을 담아서 나누는 사진이라고 헤아리며, 내 삶과 이웃 삶을 서로 사랑하는 길을 찾는 사진이구나 하고 돌아본다면 내 마음밭도 우리네 사진밭도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4344.2.14.달.ㅎㄲㅅㄱ)


― 권영호의 카메라 (권영호 글·사진,앨리스 펴냄,2010.7.7./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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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作寫眞館―小學館ア-カイヴスベスト·ライブラリ- (11) (ムック)
木村 伊兵衛 / 小學館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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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쪽 580엔 사진책에 담는 예술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17] 기무라 이헤이(木村伊兵衛), 《名作寫眞館 11 : 昭和の日本》(小學館,2006)



 우리 나라에도 조그마한 판으로 나오는 ‘사진문고’가 있습니다. 아예 없지 않으며 새로운 책이 아예 안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꾸준히 나오는 사진문고는 한 가지조차 없습니다. 지난날 우리네 사진밭을 빛낸 분들 작품이든 오늘날 우리네 사진밭을 남달리 일구는 이들 작품이든, 적은 돈으로 여러모로 살필 만한 사진책으로 사진문고를 만나기는 몹시 힘듭니다. 아니, 아예 만날 수 없다고 해야 옳습니다. 그나마 꼭 한 가지 나오는 사진문고조차 1999년 12월 31일까지는 프랑스판 사진문고를 저작권을 안 치르고 내던 판이었기에 2000년 1월 1일부터 판이 끊어지며 2003년 즈음부터 새판으로 나오지만 2008년에 30권째 나오고는 더 소식이 없습니다.

 출판사로서는 사진문고 내는 일이 만만하지 않겠으나 사진을 즐기는 사람들한테 베푸는 선물인데, 사진을 즐기는 사람들로서는 이 고운 선물을 알뜰히 받아먹지 못하는 셈이라 할 만합니다. 달리 보면 사진을 즐기는 사람들이 애틋하게 바라는 사진책을 사진문고로 못 내놓는다 할 수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참으로 살갑거나 훌륭하다 싶은 사진이 책 하나로 묶일 때라 해서 더 사랑받거나 눈길을 받지 않습니다. 더욱이, 작은 판으로 나오든 큰 판으로 나오든 두루 사랑하거나 따사로이 어루만지지 못해요.

 기무라 이헤이 님 사진을 책 하나로 묶어 보여주는 ‘좋은 사진마당(名作寫眞館)’ 가운데 11권으로 나온 《昭和の日本》(小學館,2006)을 찬찬히 읽으면서 곰곰이 돌아봅니다. 기무라 이헤이 님 사진을 놓고 《昭和の日本》은 “一舜の情景を輕やかに切り取る”라고 덧붙입니다. 1901년에 태어나 1974년에 숨을 거두기까지 한삶을 ‘사진길 걷기’에 따라 살핀 해적이를 책 첫머리에 붙이는 한편, 사진기를 들고 사진을 찍는 사진을 한 장 넣으면서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꼭 36쪽짜리 얇으면서 조금 큼직한 판인 사진책에는 한 쪽을 통째로 차지하는 커다란 사진부터 한 쪽에 서너 장을 넣는 작은 사진을 골고루 넣고, 사진쟁이 한 사람 삶과 넋과 작품이 어떠한가를 밝히는 글에다가, 이 한 사람이 온삶을 걸쳐 이룬 사진책을 찬찬히 소개하는 대목까지 깃듭니다. 어떻게 보면 기무라 이헤이 같은 분이든 다른 사람들 사진밭이든 36쪽이 아니라 360쪽이나 3600쪽에 이르는 판으로 엮어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다 할 텐데, 더도 덜도 아닌 36쪽짜리 사진책으로도 사진쟁이 한 사람이 걸어간 길을 조곤조곤 들려줍니다.

 소학관 출판사에서 내놓는 ‘좋은 사진마당(名作寫眞館)’이 몇 권까지 나올는지 모르지만, 이 사진책들은 이 한 권으로 넉넉히 사진쟁이와 사진찍기와 사진읽기와 사진나눔과 사진하기를 맞아들이도록 이끕니다. 한편, 이 사진책을 읽고 나서 다른 사진책들을 하나하나 찾아서 읽도록 돕습니다. 모든 넋을 짚도록 이끌면서 깊은 얼을 살피라고 돕습니다. 사진은 사진대로 훌륭해서 아름답고, 책은 책대로 훌륭해서 즐겁습니다.

 아무래도, 사진과 글을 엮어 이야기로 이루려는 책마을 일꾼부터 기무라 이헤이라는 사진쟁이 한 사람을 한결 살뜰히 읽었기에 이만 한 책이 나올 수 있겠지요. 그저 기계처럼 책을 만들어 상품으로 팔아치우는 부속품 같은 책마을 일꾼이라면 이러한 사진책을 낼 수 없다고 느낍니다. 사진쟁이는 사진을 즐기고 제 삶으로 껴안으며 하루하루 아름답게 보내고, 책쟁이는 책 엮는 일을 즐기고 당신 삶으로 얼싸안으며 나날이 아리땁게 누리기에, 좋은 사진책이 태어나겠구나 싶습니다.

 사진책은 사진 한 장으로도 이룰 수 있고, 사진 만 장으로도 이룰 수 있습니다. 사진 만 장을 빼곡하게 채우면서 놀라운 이야기를 선보일 수 있으며, 사진 한 장만 넣으면서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내보일 수 있어요. 사진을 하는 마음에 따라 사진이 달라지고, 책을 일구는 매무새에 따라 사진책이 바뀝니다. 일본 사진쟁이와 책쟁이가 사진책 하나 길어올리는 모습을 돌아볼 때면, 좋은 사진을 즐길 수 있으니 좋은 넋을 배우기도 하고 좋은 사진뿐 아니라 좋은 책을 아낄 줄 아는 몸가짐을 함께 길러야 비로소 사진누리를 이 땅에서 이룰 수 있다고 느낍니다. 아름다운 사진누리를 이 땅에서 이룬다면, 사진을 담아 내놓는 사진책으로도 아름다운 책누리를 이 땅에서 이룰 테지요. 사진은 책이랑 떨어질 수 없고, 사진을 하는 사람은 책을 가까이할밖에 없으며,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사진이 담긴 책을 기쁘게 넘기면서 글과 그림과 사진이 빚는 이야기보따리를 듬뿍 맛봅니다.

 사진책 《昭和の日本》을 다시 한 번 들춥니다. 일본사람은 580엔밖에 안 하는 적은 돈으로도 이 멋진 사진책을 사서 읽으니 얼마나 좋을까 부럽습니다. 그러나 한국사람도 이 일본 사진책을 책방에 주문해서 1만 원이 안 되는 값으로 장만할 수 있습니다. 일본사람이 치르는 책값을 헤아리면 꽤 비싸게 사는 셈이지만, 반가운 책을 마련할 때에는 돈이 아깝지 않습니다. 책을 살 수 있어 반가우며 고마워요. 사진을 한 번 보고 열 번 보며 백 번쯤 보면서 생각합니다. 기무라 이헤이 님은 1901년에 태어나 1974년에 흙으로 돌아갔기에 1930년대나 1950년대 삶자락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더 빼어난 눈길이라서 1930년대와 1950년대 삶자락을 사진으로 적바림하지 않습니다. 그예 당신이 1930년대 한복판을 젊음으로 보냈고 1950년대 한가운데를 무르익는 나이로 누볐으니까 이러한 삶자락을 꾸밈없이 사진으로 담고 아낌없이 사진으로 찍습니다.

 더 잘난 눈썰미가 아닙니다. 더 어설픈 눈높이가 아닙니다. 1930년대에는 그저 1930년대 눈썰미이고, 1950년대에는 그예 1950년대 눈높이예요. 당신이 사진으로 담는 사람들하고 어깨높이를 맞추고, 당신이 사진과 함께 마주하는 이웃들하고 손을 맞잡습니다. 애써 부드러운 옷을 입지 않습니다. 온몸이 부드러워 부드러이 바라보며 부드러이 사진기 단추를 누릅니다. 일부러 살갑게 웃지 않습니다. 온마음이 살가우니까 살가이 눈웃음을 지어 살가운 웃음을 사진으로 옮겨 냅니다.

 2000년대 한복판을 살아온 우리들이라면 2000년대 한복판 삶자락을 꾸밈없이 사진으로 담으면 됩니다. 2020년대 한가운데를 살아갈 우리들이라면 2020년대 한가운데 삶무늬를 아낌없이 사진으로 찍으면 돼요. 사진은 내가 살아가는 결대로 찍을 뿐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웃음꽃대로 찍습니다. (4344.2.12.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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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강여호 2011-02-12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 한 장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주말 보내십시오

숲노래 2011-02-12 20:22   좋아요 0 | URL
이 사진책을 사려고 꽤 오래 기다렸어요. 못 살 줄 알았는데, 두 주 남짓 기다린 끝에 뜻밖에 살 수 있었답니다. 좋은 사진이나 좋은 글이라면, 세상보다 사람들 마음을 따스하게 덥힐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2011-02-13 0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1-02-13 05:24   좋아요 0 | URL
'작가'까지는 아니고 그냥 '최종규'입니다.
^^;;;;;
 
강운구 사진론
강운구 지음 / 열화당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사진을 말하는 사람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32] 강운구, 《강운구 사진론》



- 책이름 : 강운구 사진론
- 글 : 강운구
- 펴낸곳 : 열화당 (2010.10.7.)
- 책값 : 2만 원


 (1) 사진말


 사진을 찍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주 많습니다. 사진을 찍는 수많은 사람이 모두 사진쟁이라 할 만한가 하고 헤아린다면, 누구나 사진쟁이라 할 만하지만, 모조리 사진쟁이라 해도 좋으려나 알쏭달쏭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 많습니다. 매우 많습니다. 글을 쓰는 숱한 사람이 몽땅 글쟁이라 할 만할까 하고 곱씹는다면, 누구든 글쟁이라 할 만하지만, 죄다 글쟁이라 해도 좋을는지 아리송합니다.

 혼인을 해서 아이를 낳아 키우면 어찌 되든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며 어버이가 됩니다. 그러나 아이를 낳아 키우기는 하지만 아버지답지 않거나 어머니답자 않아 도무지 어버이라 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름은 틀림없이 어버이이면서 아버지이거나 어머니일 테지요. 아버지 노릇을 못한달지라도 어찌 되든 아버지입니다. 그러니까, 사진기를 쥐어 사진을 찍는다면 누구나 사진쟁이입니다만, 사진다운 사진을 살피지 못하면서 사진찍기다운 사진찍기를 하지 않을 때에는 사진쟁이라 할 만하기 어렵습니다. 연필이나 볼펜을 쥐어 글을 쓴다면 누구나 글을 쓰는 셈이지만, 이 글이 참말 글다운가 아닌가를 돌아보았을 때에, 하나도 글답지 않을 뿐더러, 이러한 글로 독재부역이라든지 식민지부역이라든지 돈바라기로만 흐른다든지 한다면, 이 또한 글을 썼다고 하기 참 힘듭니다.

 예나 이제나 사진쟁이는 많고 그림쟁이도 많으며 글쟁이도 많습니다. 춤쟁이나 노래쟁이도 많습니다. 먼 옛날이라고 하기는 그렇고, 백 해쯤 앞서 이 나라에 막 사진기가 들어왔을 무렵, 사진기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몹시 드물었습니다. 사진이 이럭저럭 퍼졌을 때에도 사진기를 쥘 수 있는 사람은 퍽 드물었습니다. 사진기 한 대 장만하려면 돈을 많이 들여야 했고, 사진을 찍어서 종이로 뽑자면 또 돈을 많이 들여야 했습니다.

 오늘날은 값싼 사진기 많고 한 번 쓰고 버리는 사진기까지 있습니다. 굳이 필름이 아니어도 디지털로 찍을 수 있는 사진이요, 집에 셈틀 한 대 있으면 돈 걱정 않고 사진을 찍을 만하다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돈 걱정 없이 사진을 찍을 수 있지는 않습니다. 첫째, 어찌 되든, 그러니까 값이 싸든 비싸든 사진기를 장만해야 합니다. 장만한 사진기를 다룰 줄 알아야 합니다. 셈틀이 있어야 합니다. 셈틀을 만질 수 있어야 합니다. 디지털사진이 필름사진보다 돈이 덜 들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신나게 찍어 디지털파일이 늘면 셈틀 저장장치를 차지하는 부피가 자꾸자꾸 늘어납니다. 자꾸자꾸 늘어나는 부피를 넓히려면 저장장치를 새로 장만해야 합니다. 필름은 한 번 만들어 놓으면 이대로 건사하면 그만이지만, 디지털파일은 꾸준히 새로 갈무리해야 합니다. 저장장치는 백 해 이백 해를 가지 않습니다. 아니, 쉰 해를 갈 수 있으려나요? 스무 해나 갈 만할는지요? 메모리카드는 이 하나를 죽을 때까지 쓰지 못합니다. 메모리카드도 소모품이요, 디지털사진기 건전지도 소모품이며, 건전지에 전기를 먹여야 하는데, 건전지 전기값은 누가 거저로 대지 않습니다. 디지털사진기는 열 해 스무 해 안 망가질까요? 디지털사진기가 목숨이 다할 무렵이면 고치는 데 드는 값보다 새로 사는 값이 훨씬 싸다 싶기까지 합니다.

 사진찍기를 하는 사진쟁이 길을 걷자면, 어쨌든 돈이 있어야 합니다. 사진을 찍어 사진을 팔아 돈을 벌든, 다른 일을 하면서 돈을 벌든, 사진찍는 사진쟁이 길을 걷는 사람은 무엇을 해서든 돈을 마련해야 합니다. 나 먹고살거나 식구들 먹여살리는 돈을 벌면서, 사진을 찍는 데에 들 돈을 벌어야 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연필과 종이만 있으면 되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붓과 물감과 종이만 있으면 된다지요. 아니, 그림을 그릴 때에 물감 장만할 돈이 없으면 연필 하나로 그리면 된다지요. 노래를 하는 사람은 목소리만 있으면 되고, 춤을 추는 사람은 몸뚱이만 있으면 돼요. 내 삶을 드러내거나 내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이웃 삶을 담아내거나 이웃 이야기를 함께 나누려는 온갖 문화나 예술 갈래 가운데 사진처럼 돈 많이 들고 돈 꾸준히 들며 돈 걱정을 해야 하는 일도 없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으나 누구나 하기 힘들며, 어디에서나 즐길 수 있으나 어디에서나 즐기기 어려운 사진 같은 일거리도 없어요.

 장비를 마련하고 사진을 이루며 사진이야기를 일구는 흐름을 돌아볼 때에, 사진찍기를 하는 사람 삶은 사진에 찍히는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바라보기에 ‘참 한갓지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꽤 먹고살 만하니까 사진을 찍는군.’ 하고 여길 수 있으며, 이러한 생각은 틀리지 않습니다.

 사진찍기를 하는 사람 가운데 느긋하게 먹고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는지 궁금하지만, 또 사진찍기를 하는 사람 가운데 찢어지게 가난해서 그예 아끼던 사진장비를 팔아 끼니를 때우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사진길을 걷는 사람은 사진을 한 장 두 장 찍을 때마다 ‘들어오는 돈은 없어도 나가는 돈은 있는 삶’을 꾸리니까, 사진을 잘 모른다는 사람들이 바라보기에 ‘퍽이나 한갓지거나 재주 좋은 사람이군.’ 하고 여길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나라 이 땅 사진밭을 돌아본다면, 사진길 걷는 삶부터 제법 만만하지 않습니다. 사진을 찍어 돈을 벌 구멍이란 그리 안 넓습니다. 사진길을 걸으면서 돈벌이 걱정을 줄이기란 참으로 버겁습니다. 다큐사진이니 상업사진이니를 떠나, 사진길을 걸으려는 사람은 ‘돈되는 사진’으로 갈밖에 없습니다. 가장 돈이 잘 된다 싶은 패션사진을 찍거나 광고사진을 찍거나 상업사진을 할밖에 없습니다.

 사진길 갈래는 숱하게 많지만, 숱하게 많은 사진길을 다 다른 삶과 넋으로 꿋꿋하고 씩씩하게 걸어가며 사진을 하기 힘든 이 나라입니다. 온갖 갈래 사진이 아름다이 춤추거나 노래하면서 재잘재잘 이야기꽃을 피우기 어려운 이 땅입니다. 더욱이, 다큐사진 한 가지만 보아도 다큐사진은 ‘다큐사진 하나’라 말하지 못합니다. 다큐사진을 하는 갈래부터 수없이 자잘히 갈립니다. 아프거나 가난하다는 사람들을 좇아 찍는 사진이 있겠고, 환경 문제를 좇는 사진이 있을 테며, 사회운동과 노동운동 발자취를 따르는 사진이 있겠지요. 골목동네 삶자락을 담는 사진이라든지, 수수한 여느 살림꾼(어머니나 할머니)하고 함께 살아가며 담는 사진이나, 내 아이 삶을 갓난쟁이 때부터 훌쩍 클 때까지 고이 살아내며 담는 사진이 있습니다. 시골 농사꾼하고 함께 보내는 나날을 담는 사진이라든지, 여느 회사원이나 공무원하고 함께 어울리는 나날을 담는 사진이라든지, 철도·지하철·택시·버스 일꾼이나 연예인·정치꾼·운동선수 뒤꽁무니를 졸졸 따르는 사진이 있습니다. 나라밖 아프리카나 인도나 티벳을 밟는다든지 남아메리카나 미국이나 일본을 쏘다니는 다큐사진도 있어요. 한국땅에서 다큐사진을 한다는 이들 가운데 수많은 다큐사진 길을 옳게 살피며 꿋꿋하거나 씩씩하게 걸어가는 사람은 퍽 드뭅니다. 왜냐하면 다큐사진 길이 얼마나 넓으며 깊은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는 상업사진에서도 엇비슷하다고 느낍니다. 패션사진이든 광고사진이든 다르지 않다고 느낍니다. 《강운구 사진론》에서 강운구 님도 처음부터 끝까지 꾸준히 되풀이하면서 다루기도 하는 ‘만듦사진’도 매한가지입니다. 만듦사진은 사진이라 할 수 없는 ‘종합예술’이라 해야 옳겠으나, 만듦사진이든 패션사진이든, 이러한 사진으로 걸어가는 길이란 대단히 넓습니다. 좁을 수 없을 뿐더러 좁지 않아요. 패션사진이라 해서 한 갈래일 수 없습니다. 광고사진 길이 한 가지일 턱이 없습니다.

 아리따운 몸매를 뽐내는 여자 모델이 입는 이름값 있는 회사 옷만 패션사진이 되겠습니까. 어린이옷도 옷이며 생활한복도 옷입니다. ‘모던 패션’만 패션사진이겠습니까. 이름부터 영어로 써서 ‘패션’이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입는 옷·차리는 입성·꾸미는 매무새를 두루 돌아본다면, 오늘날 한국땅처럼 이렇게 사진이 옹송그려서는 안 될 노릇입니다. 돈을 벌어야 한다지만 돈으로만 나아가서는 사진이 될 수 없고, 돈도 벌어야 하지만 돈만 벌어서는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주문하는 사람 입맛에 맞출 때에는 사진이 아닙니다. 이때에는 물건입니다. 오늘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거의 모든 상업사진은 사진이 아니라 ‘상품’입니다. 사고파는 물건인 상품일 뿐인 상업사진이라 해야 옳다고 느낍니다. 사진관 영업사진을 놓고 사진이 아니라고 오래도록 말해 왔는데, 사진관 영업사진이 사진이 아닐 까닭이 없으나, 사진관 영업사진이 사진이 아니라 한다면 ‘주문받아 찍는 상업사진’ 가운데 사진이 될 사진이란 한 장조차 없습니다. 패션잡지이든 요리잡지이든 연예인을 담는 사진이든, 이런 사진들은 하나같이 주문을 받아 찍는 사진입니다. 신문사와 잡지사가 찍는다는 보도사진 또한 편집국 주문에 따라서 찍기만 한다면 사진이 아니라 상품입니다. 우리 나라 보도사진이 나날이 눈높이가 낮아지거나 떨어지는 까닭은 ‘편집국 주문 받아쓰기’ 틀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편집국 주문은 주문대로 받아들이면서 ‘사진다운 사진’으로 찍어야 사진입니다.

 편집국에서 바라는 대로 쓴다고 해서 모두 글이 되지 않습니다. 돈을 바라면서 쓰는 글을 놓고 ‘이 글은 글입니다.’ 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돈이라고 합니다. 때로는 ‘편파 왜곡 보도’라고 하지요. 사진이라 해서 다르지 않고, 그림이라 해서 다를 수 없어요.

 사진이 사진이 되자면, 말 그대로 사진답게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패션사진이든 다큐사진이든, 상업사진이든 생활사진이든, 프로사진이든 아마사진이든, 그저 사진은 사진대로 나아가면 됩니다. 돈을 벌어야 한다면 돈을 벌되 사진다움을 잘 추슬러야 합니다. 돈구멍을 찾든 말든 사진길은 사진길대로 아끼며 보듬어야 합니다.

 사진길을 걸을 때에 비로소 사진이며, 사진길을 걷는 참사진이라면, 이때에 시나브로 사진을 말하는 사진말이 태어납니다.

 사진다운 사진인 참사진이 없는 나라에서는 말다운 말인 참말이 없습니다. 곧, 사진을 말하는 사진말이 있자면 참사진과 참말이 있어야 하며, 이 나라는 참나라여야 합니다.

 사진이 옳게 사진길을 걷지 않으니, 사진을 옳게 말하는 사람이 나타나기 힘듭니다. 사진쟁이 스스로 사진찍기를 참다이 하지 않기에, 사진쟁이 스스로 사진을 말하지 못할 뿐더러 ‘사진을 안 찍으면서 사진비평만 하는 사람’들이 슬기롭거나 아름답게 ‘사진 말하기’를 할 수 없습니다.


.. 할 말을 한다고, 옳은 말을 한다고(설사 옳은 말이 아닐 수가 있다 하더라도 한 작가로서의 생각을 말한다고) 괴팍하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선 괴팍하지 않은 사람들이 수상쩍은 사람들일 것이다 ..  (160쪽)


 사진을 사진 그대로 말하는 사람이 드물고, 사진을 사진다이 읽는 말이 드문 까닭은 오로지 하나입니다. 한국사진 발자취가 어느덧 백 해를 아우른다 하지만, 정작 백 해를 아우르는 기나긴 나날을 통틀어 사진다운 사진길, 참사진을 걷는 길이 너무 흐리멍덩하기 때문입니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사진을 사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진찍기를 사진찍기 그대로 맞아들이지 않으니까, 사진을 말할 사람이 없고, 사진을 말하더라도 엉뚱한 지식읊기로 그치거나 주례사비평에 머뭅니다.


 (2) 강운구 사진말


 한국사진 백 해를 거슬러오르면서 사진책을 톺아볼 때에, ‘사진비평’을 다루었다는 책은 얼마나 되랴 궁금합니다. 한국사람으로서 한국사진을 말하든 한국사람 눈높이로 세계사진을 말하든, 사진비평으로 이루어진 사진책이 몇 권쯤 될까 궁금합니다.

 이제 한국땅에도 대학교 사진학과가 제법 많은데, 사진학과 교수나 강사 가운데 당신 나름대로 당신 넋과 삶과 꿈을 고이 담은 사진비평이 몇 권쯤 새롭게 태어나서 읽히는지 궁금합니다. 사진학과에서 가르치는 책으로든, 사진학과를 넘나들며 배우는 책으로든, 한국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도 나눌 만한 책으로든, ‘한국 사진비평책’은 얼마나 될는지 궁금합니다.


.. 그이들은 다만 사진이라는 새로운 표현 도구를 그이들의 미술에 이용했을 뿐이지, 사진을 한 것은 아니다 … 렌즈는 어둡고 필름의 감도는 느렸던 거의 칠십 년 전쯤엔 부단한 노력과 열망으로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했었으나, 이 테크놀로지 시대의 청개구리들은 그 뛰어난 전자동 카메라를 가지고 고작 차려 자세로 정지되어 있는 사람들이나, 아니면 그 비슷한 움직이지 않는 것들을 주로 찍는다 … 그런데 그런 사진가들은 ‘장르의 벽이 해체된 시대’라고 하면서도 결코 사진가란 딱지를 떼고 ‘아티스트’란 카테고리로 들어갈 마음도 용기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 그리하여 사진이 범미술로서 확산되는 점이야 좋지만, 진정한 사진은 거의 실종될 지경에 이르렀다 … 그리하여 어떤 사진을 보고 “그림 같군요.” 하는 게 최상의 칭찬이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제대로 된 사진을 두고 그렇게 말한다면 그건 모욕을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진은 사진다워야 하는 것이다 … 내용 없는 화면에서 기술만이 빛나는 사진을 볼 때 나는 허탈감을 느낀다. 표현 기술은 결국 한 작가의 정신을 구체적으로 화면에 나타나게 하는 데 소용되는 것일 뿐이다 ..  (18∼21, 186쪽)


 글을 말하는 책은 대단히 많습니다. 글쟁이 어느 한 사람을 놓고 말하는 책이 꽤나 많습니다. 숱한 사람이 숱한 눈길과 목소리로 글쟁이 한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누군가는 글쟁이 한 사람을 속속들이 꿰뚫으면서 제대로 말할 테며, 누군가는 어설피 건드리며 어수룩하거나 엉뚱하게 말할 테고, 누군가는 그럭저럭 아주 틀리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아주 알맞지도 않게 말할 테지요.

 그러나, 사진밭에서 사진을 말하는 사람은 눈에 뜨이도록 적거나 없습니다. 사진쟁이 한 사람을 놓고 수많은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삶과 결과 무늬에 따라 다 다른 이야기를 쏟아내지 못합니다. 으레 한목소리입니다. 거의 한통속입니다. 그냥 한 가지입니다. 그나마, 웬만한 사진쟁이들은 한목소리 한통속 한 가지인 이야기조차 못 듣기 일쑤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라 해서 이웃 글쟁이를 애써 말한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글을 쓰는 사람들은 서로서로 이웃 글쟁이 글을 읽습니다. 이웃 글쟁이 글을 읽고 난 다음에는 으레 이웃 글쟁이 글이 어떻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퍽 많이 나돌며, 신문이든 잡지이든 으레 몇 꼭지 차지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이웃 사진쟁이를 얼마나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사진쟁이치고 이웃 사진쟁이 사진을 제대로 들여다보거나 살피거나 마주하면서 말을 해 주는 사진쟁이는 얼마나 될까 모르겠습니다. 이웃 사진쟁이가 사진책을 내놓았으면 이 사진책을 기꺼이 장만해 주는가요. 내가 내놓은 사진책을 이웃 사진쟁이는 스스럼없이 장만해 주는가요. 내 이웃 사진쟁이 사진책을 읽은 다음 사진이야기를 즐거이 펼치거나 나누는가요.


.. ‘미술사진’은 주로 화가들이 다만 사진술을 그이들의 새로운 표현수단으로 차용해다가 쓸 뿐이므로 사진의 본질이나 문법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런 이들의 작품은 그런 점 때문에 더 예술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그런 사진을 사진가들이 새로운 사진의 경향으로 알고 받아들인 수가 많다. 그런 난해한(그러나 사실은 애매한) 것들이 ‘예술’의 이름으로 대중들의 주목을 받는 수가 많다 … 나는 그림이나 사진 같은 이미지를 감상할 때, 이 작가는 어떤 나라 말을 쓰는지를 식별해 본다. 그래야 이해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 세계화에 편승할 것도 있고, 오롯이 남아 있어야 할 것도 있다. 다른 언어로는 해 보기 어려운, 한국어로 말하는 한국사진은 우리가 아니면 아무도 고민하지 않는다 … 자연과 어울리는 곡선과 빛깔에서 붉고 푸른 빛깔의 얄팍한 직선으로 온 나라의 집과 마을이 갑자기 바뀌었을 때, 그리고 느닷없이 전통과 익숙한 풍경으로부터 단절되었을 때 사람들이 정서적으로 아무렇지도 않았을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 떼로 몰려다니길 좋아하며, 증명서를 내세우는 작가가 있다면 틀림없이 가짜일 것이다 … 요즈음의 전시회 카탈로그들 중에는 작가 이름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영어로만 되어 있는 것들도 있다. 세계화를 노린 전략일 터이다. 그러나 대다수인 자국 사람은 어쩌고, 어쩌다 오는 외국인을 겨냥하는 그런 전략을 세우는 것일까 ..  (28, 30, 31, 90∼91, 226, 228쪽)


 한국땅 글밭이 그리 아름답다 하기는 뭣하지만, 한국땅 사진밭은 한국땅 글밭을 둘러보았을 때 그지없이 메마르거나 딱딱하거나 슬픕니다. 비평이든 비판이든, 악평이든 촌평이든, 손가락질이든 뚱딴지이든, 갖가지 목소리가 잘 안 들립니다. 너무 딱딱해서 여느 사람은 좀처럼 읽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애써 읽어도 알아듣지 못할 논문 아니면 주례사비평만 넘치는 한국땅 사진밭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으면 사진을 읽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사진을 찍거나 사진을 읽거나 사진을 말하는 사람들 말은 한국에서만큼은 ‘너무 어렵’거나 ‘그예 추켜세우’기만 합니다.

 이런 한국땅 사진밭에서 《강운구 사진론》 하나 제법 두툼하게 태어납니다. 여느 사람들이, 곧 사진을 좋아하거나 사진을 찍거나 사진을 배우고 싶은 사람들이 조곤조곤 읽으며 도란도란 사진이야기를 나눌 만한 책으로 《강운구 사진론》이 하나 태어납니다.


.. 예술가적인 기질만 가진 사진가보다는 건전한 시민정신과 자기가 사는 시대를 파악할 수 있는 역사의식을 가진 사진가가 우리에게는 더욱 필요하다. 인간의 문제와 정면대결을 기피한 것은 역사의식의 결여를 반증한다 … 작가의 관점이 나타나 보이지 않는, 여러 장으로 구성된 단순한 기록을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을까 … 주관이 전혀 배제된다면 이 넓디넓은 세상의 많고많은 것에서 무엇을 왜 찍어야 된다는 말일까 … ‘원로’ 대접을 받으며 작가 노릇하는 것도, 또는 칩거하는 것도 사는 것이다. 그보다 더 잘 사는 것은 현장에 적극적으로 나타나서 개입하는 것이다. 그 경험, 지식, 성찰들 다 나눠 주는 게 잘 사는 것이 아닐까 ..  (70, 112, 130쪽)


 사진찍는 강운구 님이 내놓은 《강운구 사진론》에는 새로 쓴 글은 몇 가지 안 됩니다. 그동안 여러 곳에 길고 짧게 내놓았던 글을 그러모읍니다. 생각해 보면, 오늘날이든 지난날이든 한국땅에서 사진이야기를 담을 만한 신문 자리나 잡지 자리는 꽤 드뭅니다. 기껏 사진 한 장 담아 주는 자리는 있을는지 모르나, 사진이란 무엇이며 사진찍기란 어떠하고 사진읽기를 하는 매무새를 밝힐 만한 자리를 신문이건 잡지이건 웬만해서는 마련해 주지 않습니다. 사진을 말하는 사람이 드물기도 하지만, 사진을 말할 만한 자리부터 마련되지 않습니다. 강운구 님으로서도 사진을 말하는 글을 바지런히 쓰셨달지라도 애써 쓴 글을 내놓을 만한 자리는 거의 없다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 아닌 강운구 님쯤 된다면 스스로 ‘사진말 실을 자리’를 마련하도록 힘쓸 수 있습니다. 먼저 당신 스스로 사진말을 싣는 자리를 신문이든 잡지이든 마련하도록 힘써서 한두 해쯤 신나게 사진말을 털어낸 다음, 당신 사진벗이나 사진동생한테 물려주면 됩니다. 이렇게 하고 다른 신문이나 잡지에서 또 새롭게 사진말을 싣는 자리를 마련해서 한두 해 바지런히 사진말을 쏟아낸 다음, 또 당신 사진벗이나 사진동생한테 이어주면 돼요.

 없다 해서 끌끌 혀를 찰 노릇이 아니라, 없으니 만들어야 합니다. 없으니까 사진잡지도 새로 만들어야 하고, 없기에 ‘있는 사진잡지’에 좋은 자리를 만들도록 힘과 땀과 품을 바쳐야 합니다.

 《강운구 사진론》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강운구 님 스스로 당신 사진삶과 사진말을 어느 한 자리에서 꾸준하게 적바림하면서 나누어 왔다면, 이 책 짜임새는 사뭇 달라졌거나 훨씬 새로웠으리라 느낍니다. 워낙 한국땅 사진밭에 사진말이 드물기도 했으니, 《강운구 사진론》 하나로도 반가우면서 고맙지만, 웃사람이 아랫사람한테 나무라듯 내려보내는 말마디보다는 사진길 걷는 옆지기이자 길동무로서 살가이 손길을 내미는 사진말로 알뜰살뜰 꾸밀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강운구 님 사진찍기란 ‘웃어른이 선보이는 작품’이 아니라 ‘사진길 걷는 여느 사진쟁이로서 사진쟁이와 이웃한 사람들 삶을 어깨동무하는 눈썰미로 살가이 마주하며 다가서는 사진’ 이루기일 테니까요.


..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땐 찍으면 다 ‘사진’이었을 터인데, 아무리 재 보아도 ‘사진’이 될 것 같지가 않아서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겨우 한두 번만 누른 적이 많았다. 마음이 허락하지 않으면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 (내 사진은) 나의 친구들과 이웃과, 같은 시대를 사는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지, 외국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 내 딴에는 그늘진 구석이나 그런 곳에서 힘들어 하거나 외로워 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고 돌아다녔는데, 마땅히 그런 이들은 사진 찍히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  (82, 93, 262쪽)


 《강운구 사진론》을 읽다 보면 “그러나 프로페셔널 사진가의 가장 이상적힌 형태인 프리랜서 사진가는 아직까지 한 사람도 없다(61쪽).”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이러한 말은 옳을 수 있으나, 꼭 옳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프로페셔널 사진가’는 반드시 ‘프리랜서 사진가’일 때에 가장 아름다울 수 있지 않을 뿐더러, ‘프리랜서 사진가가 한 사람도 없을’ 수 없으니까요.

 프로페셔널이란 무엇이고 프리랜서란 무엇인가요. 사진을 찍는 사람들한테 이러한 이름은 무슨 보람이나 뜻이나 값이 있으려나요. 오늘 이 나라에는 어떤 사진쟁이가 있어야 하나요. 세계사진역사에 주름잡거나 한두 줄 적힐 만한 사진쟁이가 있어야 할까요. 현대세계사진을 이끄는 사진쟁이라든지 온누리에 빛날 사진쟁이가 있어야 하는가요.

 강운구 님은 “내 딴에는 그늘진 구석이나 그런 곳에서 힘들어 하거나 외로워 하는 사람들”을 찾아나섰다고 이야기합니다만, 이 땅에는 “그늘진 구석” 사람이란 없습니다. 아니, 그늘진 구석 사람이란 서울 강아랫마을 비싸디비싸다는 아파트에서 살아가며 아이들을 대학입시에 목매달도록 하는 사람들일는지 모릅니다.

 다시금 왜냐하면이라고 말할밖에 없는데, 아무래도 강운구 님 스스로도 느끼실 테지만, 강운구 님이 찍었다는 “그늘진 구석” 사람들 모습이 담긴 사진을 들여다볼 때에, 이들 삶이 그늘진 구석이라고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내 딴에는 그늘진 구석”으로 볼는지 모르나, 가난하면서 아름다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요, 가난하면서 아름다이 살아가는 사람들인 까닭에, 이들을 사진으로 담은 작품을 들여다보면 더없이 따스하면서 넉넉합니다. 포근하면서 보드랍습니다. 강운구 님이 여태것 찾아다니면서 만난 사람들은 “그늘진 사람”이 아니라 “볕좋은 사람”이요 “따스한 사람”이며 “사랑스러운 사람”이에요.

 마땅한 노릇일 텐데, 참말 한국땅에서 그늘진 구석이라 할 만한 서울 강아랫마을 아파트사람을 찾아가서 사진기를 들이대어 보셔요. 얼마나 짜증스럽게 여기거나 싫어하거나 못마땅하다며 바라볼까요. 서울 강아랫마을뿐 아니라, 이 나라 어느 골골샅샅 누비더라도 사진기를 쥔 사람 스스로 ‘당신은 그늘진 구석 사람이요’ 하고 바라본다면 반가이 마주하거나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당신은 따스한 볕자리 사람이에요’ 하면서 바라볼 때에 비로소 사진은 사진빛을 내면서 사진힘을 나누어 줍니다.


.. 외국의 최신 작품들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뭘 말하느냐 하면, 여기가 후진국이라는 거죠 … 기본적으로는 내 언어권, 문화권 사람들에게 보이면서 생각과 느낌을 나누어야겠지요. 그래서 이 땅의 풍토에서 생기는 일, 현실과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 되는 거지요 … 제가 작품집이나 전시회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보편성입니다 … 사진가가 넥타이 매고 다니거나 잠바를 입고 다니거나 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진가의 위상이란 뭔지 이해할 수가 없고, 결국 사진가가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면 좀 전에 얘기했던 내용(사진가는 사진 해서 잘 먹고 잘 살길 바랄 뿐입니다)과 아마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됩니다 … 그런데 여러분(사진학과 교수)들이 사진 학교에 계시면서 ‘그건 사진이 아니야’라는 소리를 왜 아무도 못 하느냐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술을 하려면 예술이라고 분명히 밝히면서 가야지, 사진을 한다고 그러면서, 카메라 들고 다니면서, 나는 사진작가야 하면서 사진 아닌 걸 하지는 말라는 얘깁니다 ..  (314, 315, 340, 351, 352쪽)


 《강운구 사진론》은 이제까지 숱한 한국 사진쟁이하고 한국 사진평론가가 말하려 하지 않은 대목 하나를 퍽 속시원하다 할 만큼 이야기합니다. 다만, 이 이야기 하나는 속시원히 풀어내지만 다른 자리는 풀어내지 못해서 아쉬운데, 강운구 님 한 사람이 모든 이야기를 다 풀어낼 수 없으며, 다른 자리는 우리들이 차근차근 풀어내면 됩니다. 곰곰이 되씹으면, 강운구 님으로서는 다른 자리는 우리들보고 풀어내라는 뜻으로 당신이 풀어낼 꼭 한 가지를 다부지고 당차게 풀어내려고 하셨다 할 수 있어요.

 바로 ‘그건 사진이 아니야’ 하고 외치는 한 마디입니다. ‘사진 학교에서 교수나 강사로 있는’ 사람들이 사진 아닌 사진을 자꾸 사진이라는 옷을 입히며 비평과 평론을 해대는 모습을 나무랍니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한테 ‘당신들은 예술쟁이일 뿐 사진쟁이가 아니요’ 하고 외칩니다. 예술쟁이가 볼펜을 든다 해서 글쟁이일 수 없고, 예술쟁이가 붓을 든다 해서 그림쟁이일 수 없으니, 예술쟁이가 사진을 들었대서 사진쟁이일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예술쟁이가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춘대서 예술쟁이를 가리켜 노래쟁이라 하거나 춤쟁이라 하지 않습니다. 백남준 님이 텔레비전 화면서 당신 넋을 글로 죽 보여준다 할지라도 백남준 님은 글쟁이로서 쓰는 글이 아니라 예술쟁이로서 쓰는 글이면서, 글이 아닌 예술입니다. 예술쟁이가 사진기를 손에 쥐어 예술을 한다면, 이는 ‘사진기라는 물건’을 빌어서 선보이는 예술입니다. 이른바 거의 모든 만듦사진은 사진이라기보다 예술이고, 사진 테두리 아닌 예술 테두리에서 다루어야 올바릅니다.

 “그 뛰어난 전자동 카메라를 가지고 고작 차려 자세로 정지되어 있는 사람들이나, 아니면 그 비슷한 움직이지 않는 것들을 주로 찍는다”는 말씀은 아주 옳습니다. 그 뛰어난 전자동 사진기는 멈춘 모습을 찍으라는 사진기가 아닙니다. 아주 어둡거나 아주 재게 움직이는 사람이나 사물이나 목숨을 찍으라고 나온 사진기입니다. 똑딱이 디지털사진기로 찍어도 될 만한 예술품을 굳이 값나가는 비싼 사진기로 만들(‘찍을’이 아닌)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다른 한편으로는 안 옳기도 합니다. 오늘날 만듦사진을 하는 젊은이들은 ‘그 뛰어난 전자동 사진기’를 어릴 때부터 곁에서 흔히 보면서 다루었으니까요. 수동사진기만 있던 때라든지 대형사진기만 있던 때에 태어난 젊은이라면 수동사진기나 대형사진기로 만듦사진, 곧 예술을 했겠지요. 나라밖에서 빼어난 솜씨를 선보이는 만듦사진쟁이(또는 예술쟁이)들치고 그 뛰어난 전자동 사진기를 쓰는 사람은 그리 안 많다고 합니다. 값싼 사진기나 똑딱이를 쓰는 사람이 제법 많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사진찍기’가 아닌 ‘예술하기’를 하기 때문에, ‘내 예술을 하기에 가장 알맞춤하다 싶은 장비’를 찾을 뿐이니까요. 아직 우리 나라에서 예술쟁이로 일하는 사람들은 ‘내 예술에 걸맞을 장비’를 잘 모르거나 못 찾았다 할 만하니까요. 가르치는 사람부터 틀에 박혔기 때문에 배우는 사람도 틀에 박힙니다. 한국에서는 대학교뿐 아니라 초·중·고등학교 교육이 온통 틀에 박혔습니다. 이리하여, 대학교 사진학과 사람들만 나무랄 수 없어요. 나무라려 한다면 대학교에 앞서, 대학교에 들어온 아이들이 지난 열두 해에 걸쳐 얼마나 틀에 박히게 살며 생각하고 바라보아야 했는가를 나무라야 합니다. 이 슬픈 아이들이 저마다 스스로 틀에 박힌 줄조차 모르면서 틀에 박힌 사진을 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따스히 어루만질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강운구 님은 한국땅 사진밭 어르신이기 때문입니다. 따끔한 말도 좋고 매서운 말도 좋으나, 밑바탕을 더 깊이 훑으면서 한결 넉넉히 감싸 주는 살가우며 구성진 말이 참으로 좋습니다.

 《강운구 사진론》은 사진찍는 강운구 님이 그동안 쓴 온갖 글을 그러모은 책으로는 훌륭합니다. 그렇지만, 사진찍는 강운구 님이 밝힐 사진이야기로는 첫걸음입니다. 아무쪼록 앞으로 한 해 두 해 찬찬히 사진말을 여러 신문과 잡지에서 두루 이어실어 주시면서 새로운 “강운구 사진말”과 “강운구 사진이야기”를 베풀어 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4344.2.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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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일본사진가 - 사진시대총서 12
와따나베 쯔도무 / 해뜸 / 199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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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진이란 얼마나 즐거운 놀이인가
 [찾아 읽는 사진책 17] 와따나베 쯔도무, 《현대일본사진가》(해뜸,1988)



 일본 사진쟁이가 일본 사진밭을 돌아보면서 쓴 《현대일본사진가》라는 책을 읽을 수 있는 일은 몹시 고마우며 반갑습니다. 저는 한국말만 할 줄 알기에, 일본책이나 미국책이나 독일책이나 네덜란드책이나 베트남책이 있달지라도 그림이나 사진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한국말로 옮겨서 내놓은 책이 있으면,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고 꾸벅 절을 합니다. 비록, 이 번역책들 번역 말투가 엉터리라 할는지라도 처음으로 글을 쓴 일본사람이나 미국사람이나 독일사람이나 네덜란드사람이나 베트남사람이 그네 나라 말투로 어떻게 이야기를 펼쳤는가를 마음속으로 그려 봅니다. 비록, 이 번역책들을 처음 쓴 그네 나라 사람하고 마주하면서 한 마디도 나누지 못하더라도 눈빛과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듯이 책을 읽습니다.


- “과연 사진기를 메고 나서면 걷게 마련입니다. 나이가 먹으면 건강에 좋다는 그분의 표현이 내 가슴을 흐뭇하게 해 주었답니다. 여하튼 사진기란 별 게 아닙니다. 내가 생각한 것, 내가 본 것을 찍는 기계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때문에 사진은 즐거운 것입니다.” (아끼야마 료오지/68∼69쪽)


 그러나 이 나라 한국사람 가운데 《현대일본사진가》 같은 책을 즐거이 곁에 두면서 가슴으로 새길 사람이 얼마나 될까 궁금합니다. “현대일본사진가”가 아니라 “현대세계사진가”라든지 “현대유럽사진가”라든지 “현대미국사진가”라 하면 꽤나 사랑받으면서 읽힐 책이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참말, 한국 사진쟁이는 일본 사진쟁이와 사진밭을 너무 모를 뿐 아니라, 처음부터 살피지도 않고, 아예 들여다보지도 못합니다.

 수많은 ‘현대 한국 사진’은 ‘꽤 예전 일본 사진’에서 보던 모습들이곤 합니다. 만드는 사진이든 상업사진이든 예술사진이든 순수사진이든 다큐사진이든, 일본에서는 일찌감치 ‘다 해 본 사진’을 이제 와서 새로운 사진이라도 되는 듯이 하는 분이 꽤나 많습니다.

 일본에서 지난날 우리보다 먼저 했다 해서 오늘날 우리가 하는 사진이 어설프거나 어수룩하거나 어리석을 수 없습니다. 더 따지면, 일본에 앞서 유럽사람과 미국사람이 일찍부터 사진을 해 왔고, 일본은 이러한 나라밖 사진을 보면서 바지런히 배웠을 테니까요.

 그러나, 일본과 한국은 다르며, 한국은 일본하고 대면 퍽 슬픕니다. 따르거나 배우거나 흉내내거나 고개숙이거나 어떻게 하거나 하든, 우리는 우리 길을 걸어야 합니다. 일본사람은 일본사람 길을 걷고 한국사람은 한국사람 길을 걸으면 돼요. 니콘 사진기를 쓰든 캐논 사진기를 쓰든 한국사람은 한국 사진길을 걸으면 됩니다. 콘탁스를 쓰든 라이카를 쓰든, 미국사람은 미국 사진길을 걸으면 됩니다.

 생각해 보면,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쟁이로서 사진길을 걷고, 사진기를 만드는 사람은 만듦쟁이로서 사진길을 걸으면 돼요. 고작 얇고 작은 유리 한 장이라지만, 한국에서는 유브이 필터 하나 만들지 못합니다. 기껏 얇고 작은 플라스틱 쪼가리 하나라지만, 한국에서는 후드 하나 만들지 못해요. 그렇다면, 일본 사진밭 만듦쟁이들은 처음부터 ‘잘 할 줄 알아’서 이렇게 사진기도 만들고 필터도 만들며 후드도 만들었을까요. 《현대일본사진가》에서 다루는 숱한 ‘1975년 무렵 현대 일본 사진쟁이’는 처음부터 ‘사진을 잘 찍을 줄 알아’서 이렇게 손꼽히는 사진쟁이로 떠받들리면서 사진말을 쏟아낼 수 있을까요.


- “부친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슬퍼서 운다든가 연인에게 배신당하여 운다든가 바로 그런 때에 나타나는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수단이야말로 사진이 가장 유효하지 않을까요.” (아라끼 노브요시/105쪽)


 ‘아키야마 료지’ 같은 사진쟁이를 알 한국사람은 거의 없겠지요. ‘아라키 노부요시’ 같은 사진쟁이는 꽤나 잘 알 터이나, ‘기무라 이헤이’나 ‘토몬 켄’ 같은 사진쟁이를 아는 한국사람은 얼마나 되려나요. “과연 사진기를 메고 나서면 걷게 마련입니다”라 말하다가는 “사진은 즐거운 것입니다”라 말할 수 있는 한국 사진쟁이는 있기나 있으려나요.

 무거운 사진장비를 짊어지고 걷기만 하여도 ‘돋보이는 사진 작품 하나 건지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사진은 즐겁게 즐기는 셈이다’ 하고 말할 줄 아는 한국땅 사진쟁이나 사진비평가는 몇 사람쯤 있다 할 만한가요. 사진을 사진으로서 바라보고, 사진을 사진답게 다루며, 사진을 사진으로서 껴안다가는, 사진을 사진다이 사랑하는 사진쟁이나 사진비평가라고 스스로 밝힐 만한 사람은 누가 있다 할 만한지요.

 강운구도 있고 배병우도 있고 주명덕도 있겠지요. 임응식도 있고 이해선도 있고 이명동도 있겠지요. 김중만도 있고 조세현도 있고 조선희도 있겠지요. 그런데 사진이란 무엇인가요. 그러면 사진이란 어떤 삶인가요. 그래 사진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 “만일 내가 이데올로기상으로 그분의 영향을 받았다면 사진기를 무기로 좌익운동에 참가했었는지 모르지, 하지만 나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고 그저 서민과 더불어 생활한다는 것뿐이었어 … 피사체가 잘 들어와 주었다는 것은 아주 좋은 조건이었어. 대상이 잘 들어와 주지 않으면, 잘못되면, 찍는 사람의 악만 남게 하니까. 내게는 그것이 잘 들어와 주었다는 말이지. 지금은 사진기의 성능이 너무 좋아져서 오히려 상대적으로 잘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지금 사람들은 피사체를 사진기에 넣는 노력이 좀 부족한 것 같아.” (기무라 이헤이/205, 210쪽)


 아이를 돌보며 집살림을 도맡는 애 아빠 삶은 아주 고단합니다. 아이한테 밥을 먹이고 집안 치우며 아이랑 놀아 주며 설거지랑 빨래로 하루가 저물다 보면, 내가 도무지 뭘 하는 사람인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나라 수많은 애 엄마는 제 이름을 잊거나 잃으면서 스스로 살림꾼인지 애보개인지 밥어미인지조차 모르면서 살아갑니다. 밥이 콧구멍으로 들어가는지 똥구멍으로 들어가는지조차 모르면서 지냅니다. 나이가 먹는지 주는지 잊으면서 복닥입니다. 손바닥에 꾸덕살이 박였는지 하얀손이 까만손이 되었는지 살피지 못하면서 뒹굽니다.

 사진이란 누가 하는 일입니까. 사진이란 뭘 하는 예술입니까. 사진은 어디에서 부리는 멋입니까. 사진은 어떤 눈썰미로 펼치는 사랑입니까.

 일흔을 앞둔 아버지는 설날 제사상에서 잔씻이를 하다가 불쑥 일어나서 절을 하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절을 안 하고 멀뚱멀뚱 하니까 왜 절을 않느냐고 외려 묻습니다. 살짝 말이 없다가 작은아버지가 젓가락을 고르지 않았다고 말하니, 아버지는 살며시 생각하다가, 어 하면서 깜빡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스무 해쯤 앞서 차례상을 떠올리고 서른 해쯤 앞서 제사상을 되새깁니다. 그무렵 이런 잘잘못이 생기면 어떤 불벼락이 여기저기서 떨어졌는지 곱씹습니다. 하나둘 나이를 먹는 어른들과 아이들을 헤아립니다. 어른들은 자꾸자꾸 잘못을 저지르고, 아이들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어른이기 앞서 젊은이였던 사람들은 차츰 늙은이로 바뀌고, 아이이기 앞서 갓난쟁이였던 사람들은 차츰 젊은이로 달라집니다.

 사진이란 왜 즐기는 놀이인가요. 사진이란 어떻게 나누는 삶인가요. 사진은 누구랑 어깨동무하는 손잡기인가요. 사진은 어떤 손길로 뻗어서 마주하는 믿음인가요.


- 최근의 젊은 세대의 우수한 사진가들은 사진가라기보다는 표현자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 필자를 본 그는 나를 붙잡고 이처럼 중대한 역사적 사건을 사진기로 기록하지 못하고 있는 자기가 과연 사진가냐고 한탄하는 것이었다. 그때 그는 하도 분해서 눈물까지 흘리던 것을 필자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당시 겨우 주목을 끌게 되던 시절이라곤 하지만, 나또리 요오노스께의 ‘일본공방’을 그만두었던 가난한 도몬 껜은 한 대의 사진기조차 갖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 그는 일본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일본인의 마음의 원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그의 언동으로부터 스며나온다 ..  (도몬 껜/252, 253, 155쪽)


 한때, 한국땅 글쟁이들은 너나없이 ‘쉼표 마침표’를 글월 아무 데에나 불쑥불쑥 집어넣곤 했습니다. 갑자기 이런 바람이 불어 너도 나도 이렇게 해야만 글이 되거나 문학이 되는 줄 여기곤 했습니다. 이제, 이 바람은 간곳없이 사라졌고, 이제는 온갖 치레하는 군말을 붙여야 글이 되거나 문학이 되는 줄 여깁니다. 갖은 영어와 온갖 고사성어를 끼워야 글이 되는듯 문학이 되는듯 잘못 압니다. 글쓰기를 다루는 책이 수없이 쏟아지는데, 막상 글재주 부리는 이야기만 넘칠 뿐, 사람들마다 다 다른 삶을 글로 여미는 즐거움을 나누려 하는 글쓰기 책은 좀처럼 안 보입니다.

 사진하는 사람들한테 도움이 되겠다며 적바림하는 ‘사진 길잡이책’이 하나둘 태어납니다. 그렇지만, 막상 쉰 예순 일흔 여든 늙은이가 함께 즐길 만한 ‘사진 길잡이책’은 눈에 안 뜨입니다. 어린이와 푸름이가 즐기며 맞아들일 ‘사진 길잡이책’ 또한 보이지 않습니다. 쉰 예순 일흔 여든 늙은이한테 ‘어르신들 이제부터 즐기면 되걸랑요?’ 하면서 사진을 즐기는 매무새와 넋을 보여주는 ‘사진 이야기책’은 여태껏 한 권조차 안 나옵니다.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이봐 이봐 너희야말로 이 멋진 삶을 즐기면서 사진도 함께 즐기자고?’ 하면서 사진을 나누는 몸가짐과 얼을 선보이는 ‘사진 이야기책’ 또한 이제껏 한 권이 안 나옵니다.

 그래도, 사진은 사진입니다. 사진쟁이가 사진을 사진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사진 ‘작품’으로 껴안든, 사진비평가가 사진을 사진으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사진 ‘논문’만 쓰든,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사진을 찍고 보여주며 즐기는 나날을 누립니다.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진이고, 이야기열매를 먹는 사진이며, 이야기뿌리를 내리는 사진입니다. 이야기나무와 같이 우람하며 푸른 사진입니다. 이야기씨앗과 같이 꿈을 꾸며 반가운 사진입니다. 추운 겨울날에도 나무마다 새눈이 소담스레 자라나듯, 아직까지도 썰렁하며 메마른 한국땅 사진밭이라 할 터이나, 이 땅 한국에서도 틀림없이 골골샅샅 구석구석 온갖 자리에서 조용히 사진밭을 일구며 사진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4344.2.3.물.ㅎㄲㅅㄱ)


― 현대일본사진가 (와따나베 쯔도무渡邊 勉 씀,홍순태 옮김,해뜸 펴냄,198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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