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f Koudelka: Koudelka (Hardcover)
Robert Delpire / Aperture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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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뱅이 집에 들어가기 싫은 사람은 안 들어간다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0] 요제프 쿠델카(Josef Koudelka), 《Koudelka》(Delpire,2006)


 다큐사진을 하거나 다큐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요즈음 ‘요제프 쿠델카’를 자주 이야기합니다. 곁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용히 듣다가 ‘그 사람 사진이 그렇게 좋은가?’ 하고 혼자서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제프 쿠델카라는 사람이 찍은 사진이 좋다고 하든 이이를 좋아한다고 하든, 요제프 쿠델카를 말하는 사람들치고 막상 요제프 쿠델카가 찍은 사진을 담은 책을 사서 읽었으며, 이 사진책을 읽을 때에 어떠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또 혼자서 생각합니다. ‘뭐야, 쿠델카 사진책을 사서 읽지 않고 쿠델카를 말할 수 있는가? 어디에선가 쿠델카 사진책을 빌리거나 얻어서 몇 번 읽을 수는 있겠지. 그런데 쿠델카 사진책을 사서 내 곁에 놓으며 수없이 되읽지 않는다면 쿠델카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 쿠델카 사진이 어떻고 저떻고 하다며 이러쿵저러쿵 말밥으로 삼을 수 있는가?’

 두 해쯤 ‘쿠델카 사진책’을 생각하며 지냈습니다. 속으로 생각한달지라도 ‘나부터 쿠델카 사진책을 어디에서 사야 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진책을 즐겨 사던 책방은 장사가 힘들어 ‘그동안 애써 갖추던 사진책을 모조리 처분’했습니다. 한 달에 한 권씩 나라밖 비싼 사진책을 사자고 하던 그 책방이 나라밖 사진책을 다루지 않으니, 인터넷에서는 책을 안 사던 저로서는 쿠델카 사진책이 헌책방으로 흘러들기만을 손가락 쪽쪽 빨며 기다릴밖에 없습니다.

 이러던 지난겨울, 서울에서 서울사진축전을 한다며 저한테서 사진책 300권 남짓을 빌려갔고, 이 사진책으로 서울시립미술관 한켠에서 ‘사진책 도서관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이 자리에 찾아가서 내 사진책들이 어떻게 놓였는가 살피려고 서울마실을 합니다. 서울마실을 한 김에 서울 홍대 앞 만화가게에 들러 시골에서 지내며 못 산 만화책을 잔뜩 삽니다. 이런 다음 이제 시골집으로 돌아갈 차를 타야지 생각하며 전철역으로 가는데, 골목 한켠에 사진책과 디자인책과 일본만화책을 유리 진열장에 가득 놓은 책방이 한 군데 보입니다. 이 책방 유리 진열장에서 ‘Koudelka’라는 알파벳을 만납니다.

 걸음을 우뚝 멈춥니다. 아버지 손을 잡고 노래하며 걷던 아이도 발걸음을 멈춥니다. 아버지는 아이한테 “벼리야, 여기 한번 들렀다 가자!” 하고 말하며 문을 밀치고 들어섭니다.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는 동안 아이는 책방 골마루를 요리 뛰고 저리 뜁니다. 책방 아주머니는 아이가 귀엽다며 고맙게 놀아 주십니다. 아이를 귀여워 하는 아주머님한테 여쭙니다. “저기, 바깥에 있는 쿠델카를 볼 수 있을까요?”

 비닐에 싸인 사진책인데, 아주머니는 “네, 그럼요.” 하면서 선선히 비닐을 뜯어 줍니다. 아, 나는 비닐을 뜯어 달라는 뜻이 아니라, 겉만 보자는 뜻이었는데. 속을 들여다보지 않고 겉만 보아도 웬만큼은 내가 살 만한가 살 만하지 않은가를 알 수 있어서, 책 생김새를 보여 달라고 했던 소리인데.

 책방 아주머니는 당신 책방에 있는 ‘또다른 쿠델카’ 한 권도 보여줍니다. 그러고는 다시 아이하고 함께 놉니다. 갑작스레 마주한 쿠델카를 더없이 고맙게 펼쳐서 읽습니다. 두 가지 쿠델카 사진책은 똑같은 쿠델카 사진을 그러모았지만 엮음새와 ‘인화 느낌’은 똑같지 않습니다. 사진을 엮은 매무새가 달라, 쿠델카 사진이 사람들한테 무슨 이야기를 건네려 하는지 ‘조금은 다르게’ 느끼겠구나 싶습니다. 사진쟁이는 사진쟁이대로 사진을 찍으나, 이 사진을 읽는 사람들은 ‘사진을 읽는 사람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떤 생각으로 삶을 일구느냐’에 따라 사진읽기가 달라집니다. 사진책을 내는 편집자가 ‘사진을 어떠한 눈길과 마음과 손길로 엮어서 꾸미느냐’에 따라, 사진책이 들려주는 목소리와 이야기가 이렇게 달라지는구나 하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두 가지 사진책을 함께 보는 사람도 틀림없이 있을 테지만, 으레 어느 한쪽 사진책으로 쿠델카를 만나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한참 두 가지를 견주다가, 11만 원이라 하는 쿠델카하고 7만 원이라 하는 쿠델카를 놓고 망설인 끝에 11만 원짜리 쿠델카를 사기로 합니다. 책에 실린 사진이 어슷비슷하다면 7만 원짜리 쿠델카로도 넉넉하지만, 쿠델카를 잘 모르거나 쿠델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처음 마주할 쿠델카’라 한다면, 11만 원짜리를 먼저 보고 나서 7만 원짜리를 보아야 ‘사진책 편집자에 따라 사진 느낌이 이렇게 달라지는구나’ 하고 느낄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여느 사람들이 흔히 좋아한다고 말하는 쿠델카를 알자면 11만 원짜리를 고를 수밖에 없습니다.

 시골집으로 돌아옵니다. 《Koudelka》를 여러 달 책상맡에 놓습니다. 꽤 비싸다 싶은 값을 치르고 장만했으니 여러 번 수십 차례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사진을 제대로 읽고 싶기도 하지만, 사진에 깃든 마음과 손길을 찬찬히 읽고 싶으니 오래도록 곁에 놓습니다. 한참 마음껏 즐긴 다음 내 도서관 책꽂이에 얌전히 꽂아야지요. 쿠델카 사진책은 살가도 사진책 옆에 꽂을 수 있지만, 브레송 사진책 옆에 꽂을 수 있고, 김보섭이나 주명덕 사진책 곁에 꽂을 수 있습니다. 성남훈이나 한금선 사진책 둘레에 꽂을 수 있어요.

 꽤 예전에 사들여서 읽던 책 《요제프 쿠델카》(열화당,1987)를 들춥니다. 1984년에 ‘Photo Poche’에서 펴낸 책을 저작권 삯을 안 치르며 내놓은 사진책입니다. 이 사진문고를 내놓은 출판사는 저작권 삯을 안 치렀으니 이 멋진 책을 우리들이 구경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이무렵 저작권 삯을 치르며 이만 한 사진책을 내놓아야 했다면, 아마 우리들은 이 사진책을 구경하지 못했겠지요. 한글로 된 아주 드문 쿠델카 사진책인 터라, 쿠델카 사진을 비평한 ‘베르나르 뀌오’ 님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베르나르 뀌오 님은 쿠델카 사진을 낱낱이 파헤치면서 말합니다. “나는, 피해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이 사진가에 의해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에 수치심을 느낀다.” 뀌오 님은 덧붙입니다. “가난한 사람의 집에, 들어가기 싫은 사람은 들어가지 않는다.”

 다큐사진을 찍는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동네를 자주 찾아옵니다. 자연사진이든 풍경사진을 찍는 이들은 시골이나 멧골을 흔히 찾아옵니다. 다큐사진을 찍는 이들은 가난한 동네에서 똑같이 가난하게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자연사진이나 풍경사진을 찍는 이들은 시골이나 멧골에서 시골사람이나 멧골사람하고 함께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쿠델카 님은 체코슬로바키아 한복판에서 살았기에 체코슬로바키아 꿈틀거림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쿠델카 님은 숨을 거둔 집시 한 사람을 흙으로 떠나 보내는 자리라든지 손에 수갑을 차고 마을에서 떠나야 하는 사람하고 같은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이 모습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참말로, “가난한 사람이 살아가는 집에 들어가기 싫은 사람은 들어가지 않”을 뿐더러 쳐다보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며 알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다큐사진을 찍는 이들은 으레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동네로 찾아올 뿐, 정작 다큐사진을 찍는 이가 몸을 담거나 뿌리를 내리며 살아가는 동네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이야기로 갈무리하거나 그러모으지는 않습니다.

 《요제프 쿠델카》는 1984년 사진책입니다. 《Koudelka》는 2006년 사진책입니다. 요제프 쿠델카 님은 1950년대부터 사진을 찍어 2000년대까지도 사진을 찍습니다. 1984년에 나온 《요제프 쿠델카》는 스무 해 남짓 사진길을 걸어온 발자국을 담습니다. 2006년에 나온 《Koudelka》는 거의 쉰 해에 가까운 사진길 발자국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요제프 쿠델카》에서 《Koudelka》로 오는 동안, 쿠델카 님 사진에서 ‘사람 그림자’가 자꾸 사라집니다. 2006년에 나온 《Koudelka》로 가까워지는 만큼 쿠델카 님 사진에서 ‘사람들 살림살이’는 거의 자취를 감춥니다. 빛이랑 그늘이 어우러지는 흐름이라든지, 빛줄기 내려앉은 멧마루나 길바닥이나 동상이나 정물 사진이 하나둘 늘어납니다. 무지개빛 사진 아닌 흑백사진으로도 얼마든지 예술이요 문화임을 보여주는 사진이 늘어납니다. 아기자기한 멋이 있고 우락부락한 멋이 있는 또다른 사진삶이 드러납니다.

 빛깔 아닌 흑백으로 찍으면서 사진쟁이 나름대로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빛깔 아닌 흑백으로 찍는 바람에 놓치거나 잃거나 버려야 하는 숱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나와 이웃’을 사진으로 담을 때하고,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 가난한 마을을 찾아가서 ‘주변인’을 사진으로 담을 때란 똑같지 않습니다.

 어떻게 일하거나 놀며 살아가는가를 찍기 앞서, 함께 부대끼지 못한 채 가만히 벽이나 방에 세워 놓고 찍으면, 무슨 ‘사람(인물) 사진’이 될까 잘 모르겠습니다.

 쿠델카 님 《요제프 쿠델카》도 좋고 《Koudelka》도 좋습니다. 사진으로 담을 사람삶이란 무엇이요 사진기를 쥐고 걷는 사진길이란 무엇인가를 잘 밝힙니다.

 1984년 《요제프 쿠델카》에 비평을 넣은 베르나르 뀌오 님은 첫머리에서 “이 책을 볼 때에는 언제나 마지막 페이지부터 보아야 한다. 첫 번째 사진, 즉 풀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시계를 차고 있는 주먹 사진은 아직 당신에게 아무런 의미도 전해 줄 수 없다.”고 적었습니다. 2006년 《Koudelka》에서 ‘풀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시계를 차고 있는 주먹 사진’은 사진책 깊숙한 자리에 숨었습니다. 시계 찬 사진이 두 장 나오기는 하나, 어디메에 숨었는지 찾기란 참 힘듭니다. 스물두 해라는 나날을 건너뛰는 동안 우리들은 ‘어떠한 뜻을 건네받을 수 있’도록 사진이 달라지거나 쿠델카 님 사진밭이 거듭났다는 소리가 될까요. 아니면, 이제는 쿠델카 님이 사진을 찍을 때에 사진마다 ‘우리한테 무슨 이야기와 뜻을 건네려 하는지 또렷이 아로새기게 되었다’는 소리가 되려나요.

 요제프 쿠델카 님 다큐사진은 틀림없이 ‘한 발자국 안으로 들어선 사진’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집에 성큼성큼 발을 들여놓은 사진입니다. 죽은 사람을 기리는 자리에서 사진을 찍어도 괜찮다는 말을 듣고는 스스럼없이 찍은 사진입니다.

 그래요, 찍었습니다. 찍어서 보여줄 모습을 찍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 어떤 마음 어떤 삶을 찍은 사진이 될까요. 찍어야 할 모습을 찍었기에 다큐사진이라 할 만하거나 좋은 다큐사진이라 하면 될는지요.

 쿠델카 님 집시 사진에는 쿠델카 님 삶과 넋과 말이 깃듭니다. 한국땅 적잖은 다큐사진쟁이는 쿠델카 님 사진이 보여주는 ‘빛살과 느낌과 그늘과 감도와 흑백’과 같은 모양새로 또다른 ‘다큐 집시 사진’이라든지 ‘다큐 무슨무슨 사진’을 선보입니다. 그렇지만, 다큐라는 이름을 붙인 사진이기는 하되, ‘무슨 이야기’를 담아 누구하고 도란도란 말꽃을 피우려 하는지는 알아채기 어렵습니다. 다큐멘터리라는 이름을 붙이기 앞서, 먼저 사진부터 되어야 하지 않을는지요.

 다큐사진이란 고발사진이 아닙니다. 다큐사진은 현장사진이 아닙니다. 다큐사진은 이야기사진입니다. 이야기를 꽃피우며 이야기를 흐드러지게 나누지 않을 때에는 다큐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다큐사진쟁이로 살아가려는 분들이나, 다큐사진을 좋아한다는 분들이나, 다달이 만 원씩 모아서 한 해가 저물 즈음 쿠델카 님 11만 원짜리 사진책 《Koudelka》를 즐거이 장만해서 두고두고 보살피면서 읽어 주면 기쁘리라 생각합니다. (4344.2.28.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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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시 바람새 바람꽃
한금선 사진 / 눈빛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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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깔 고이 살아가는 사람들 삶자락
 [찾아 읽는 사진책 23] 한금선, 《집시 바람새 바람꽃》(눈빛,2007)



 사진을 찍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늘 마실을 다닙니다. 사진을 찍는 일을 하기 때문에 이곳저곳으로 사진마실을 다닙니다. 온누리 수많은 사람들 수많은 이야기를 사진으로 살포시 적바림하고자 꾸준하게 사진마실을 즐깁니다.

 누군가는 한국땅 곳곳을 누빕니다. 누군가는 여권 빈자리가 없을 만큼 나라밖 이곳저곳을 돌아다닙니다. 일본사람 타누마 타케요시 님은 “지구별 어린이”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사진책으로 낸다면서 자그마치 백 나라가 넘는 숱한 나라를 밟습니다. 한 나라에서 마주하는 한 아이 이야기만으로도 사진책 하나는 거뜬히 나올 텐데, 백 군데가 넘는 나라에서 마주한 숱하게 많은 아이들마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서리거나 깃들었을까요.

 겨우내 우리 멧골집 물이 꽁꽁 얼어붙어 날마다 웃마을 집으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물을 긷고 빨래를 했습니다. 집살림을 알뜰히 건사했다면 집안 물꼭지가 얼지 않았을 테고, 밥하기며 빨래하기며 집치우기를 한결 알뜰살뜰 했겠지요. 눈이 오건 눈바람이 모질건 날마다 물통과 빨랫감을 짊어지고 멧길을 오르내리기란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으레 아이는 아버지 손을 잡고 멧길을 오르내립니다. 빨래하며 물 긷는 길을 함께 다녔습니다. 아이는 멧길을 걸으며 노래를 부르고, 아버지는 이런 아이 모습을 틈틈이 사진으로 찍습니다.

 오늘은 겨울이 물러서는 봄비가 내리니 이제 우리 멧골집 물도 녹을까 싶어 한낮까지 기다려 보지만, 도랑에 남은 얼음이나 계단논에 펼쳐진 얼음은 아직 안 녹습니다. 아마 우리 살림집 얼음도 한참 먼 듯합니다. 하는 수 없다 생각하며 또 물통이랑 빨랫감을 짊어지고 멧길을 오릅니다. 빨래를 마치고 물통을 들고 내려오는데, 봄비를 맞는 멧자락 작은 나무에 대롱대롱 겨우내 매달리던 잎사귀에 달린 물방울이 아주 예쁘다고 느낍니다. 문득 발걸음을 멈춥니다. 빨래하고 물 긷느라 사진기를 안 챙겼는데, 집으로 얼른 돌아가 사진기를 들고 나올까 생각합니다. 나는 내 눈으로 이 예쁜 모습을 보았으니까 굳이 사진으로 안 담아도 되잖나 생각합니다. 터덜터덜 내려옵니다. 집에 닿아 물통과 빨래를 내려놓습니다. 무언가 떠오르듯 사진기를 집어들고 우산을 쓰고는 후다닥 달려나옵니다. 내려온 길을 거슬러 올라가며 도랑 둘레 겨울잎 천천히 썩으며 흙으로 돌아가는 빛깔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어느덧 조금 아까 보던 겨울나무 앞입니다. 가쁜 숨을 고르며 사진기를 듭니다. 감도 200에 셔터빠르기 1/15초 조리개값은 4.0으로 사진을 한 장 찍습니다. ‘흔들렸나?’ 생각하며 다시 한 장, ‘아닌데? 또 흔들린 듯하군.’ 하면서 거듭 한 장.

 감도를 높이고 셔터빠르기를 올릴 수 있습니다만, 감도 400이나 800은 내키지 않습니다. 감도가 높아질수록 사진은 뿌얘지니까요.

 인천에서 살면서 골목동네 마실을 하며 사진 찍던 피 퍼붓던 날을 되새깁니다. ‘이때에도 감도는 200까지만 놓고 찍었지. 감도 400으로 놓고 사진 찍은 적은 없잖아?’ 하도 1/15초이니 1/8초이니 하고 사진을 찍어댔기에, 넉 장째에 이르러 흔들림 없다 싶은 사진을 얻습니다. 그러나 모르는 노릇입니다. 집으로 돌아가 셈틀을 켜고 사진을 옮겨 크게 보면 가늘게 떨렸을 수 있습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니까 시골살이 사진을 찍습니다. 골목에서 살던 지난날에는 골목살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예나 이제나 시골에서든 골목에서든 헌책방마실을 즐겼기 때문에 헌책방을 찾아다닐 때면 으레 헌책방마실을 사진으로 담았습니다.

 저는 제 삶결에 따라 제 사진을 찍습니다. 제 삶이 남들하고 견주어 빛깔이 더 고운지 거무튀튀하거나 꾀죄죄한지는 모릅니다. 그저 저는 제 삶을 좋아하면서 하루하루 맞이하니까, 이렇게 제 삶을 좋아하며 맞이하는 하루하루를 고스란히 사진으로 옮깁니다. 딱히 감추거나 애써 꾸미면서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제 삶이 못나지 않으니까 딱히 감추지 않습니다. 제 삶이 도드라지게 훌륭하니까 애써 꾸미지 않습니다. 잘났거나 못났다고 느끼지 않는 제 삶인 만큼, 오늘 하루를 보내는 그대로 사진으로 찍고 그림으로 그리며 글로 씁니다. 제 사진은 제 삶이며 제 빛깔입니다.

 우리 멧골집 살림은 가난합니다. 인천 골목동네에 살던 때에는 더 가난했는데, 그래도 용케 잘 살아 밥을 굶지 않았습니다. 우리 살림살이는 정부에서 말하는 최저생계비만큼 닿지 않기에 기초생활보호 대상자였지만, 옆지기 아버님은 파산을 해서 빚이 많고, 우리 아버지는 교사로 정년퇴임을 해서 연금을 받기 때문에, 기초생활보호 급여를 줄 수 없다 했습니다. 한쪽 어버이가 빚쟁이이고, 한쪽 어버이는 살림이 그럭저럭 괜찮대서 두 어버이네 아이들이 똑같이 빚쟁이가 되거나 그럭저럭 괜찮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버이한테 얹혀 사는 살림이 아니라, 독립된 호적으로 제금나서 살아가는 부부요 애 아빠이고 애 엄마이니까요.

 우리 살림집 둘레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든 우리 살림을 돌아보든, 가난하다 해서 슬퍼야 하지 않습니다. 가난하게 살아가는 우리 동네 사람들이니까 우리들이 웃을 때에 더 해맑지 않습니다. 내 둘레 알 만한 부자들도 울고, 우리들도 웁니다. 부자인 사람도 웃으면서 살고, 가난뱅이인 사람도 웃으면서 살아요. 어디에서나 삶입니다. 누구한테서나 꿈입니다. 서로서로 좋은 이웃이요 동무입니다.

 한금선 님 다큐사진 《집시 바람새 바람꽃》(눈빛,2007)을 읽습니다. 집시로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을 담은 사진입니다. 한금선 님이 이 책에서 전미정 님을 만나 들려준 이야기, “편견이 생기려 하면 아예 그 반대 행동을 선택하는 게 습성처럼 되어 버렸죠. 솔직히 저도 겁이 안 나는 건 아니에요. 그러면 스스로 마취를 걸어요. 편견을 넘어서면 더 아름다운 세상이 있는데 용기를 내자. 사실 사진을 찍으며 겪는 경험들은 스스로를 검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해요. 편견과 바로 마주한 공간에서 가장 솔직한 자신을 발견하는 현실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더 투명하게 볼 수 있거든요(149쪽).”가 아니더라도, 집시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으레 ‘편견’에 젖습니다. 한금선 님도 편견이 있었다 밝힙니다. 다만, 한금선 님은 ‘편견을 딛고 서려 애씁’니다.

 아마, 한금선 님은 한금선 님 나름대로 ‘편견을 딛고 섰’기 때문에 집시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진으로 담아 사진책 하나 내놓을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편견’이란 집시가 집시 아닌 사람을 바라보는 눈이 아닙니다. 집시 아닌 사람이 집시를 바라보는 눈이 편견입니다.

 집시가 집시 삶을 사진으로 담는다면 어떤 이야기가 태어날까요. 가난한 사람 스스로 가난한 이웃을 사진으로 찍는다면 어떤 모습을 빚어낼까요. 아니, 빚어내지 않겠지요. 가난한 살림살이를 고스란히 사진으로 찍을 뿐입니다.

 다큐사진은 가난하게 살아가는 ‘안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밀어낸’ 모습을 담는 사진이 아닙니다. 다큐사진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는 사진입니다. 부자를 담든 가난뱅이를 담든, 사람들이 저마다 다 다른 곳에서 제 삶을 사랑하거나 아끼거나 좋아하거나 믿으면서 어우러지는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사진쟁이 스스로 이들하고 이웃이 되어’ 찍는 사진입니다.

 다큐사진은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사진입니다. 다큐사진은 ‘편견 없이 찍는 사진’이 아닙니다. 다큐사진을 찍는 사람은 ‘편견이 있어도 아름다운 사진’을 찍습니다. 외려 ‘편견 때문에 더 돋보이는 사진을 얻는 날’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편견이 있든 없든,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서 ‘내 사진에 담을 사람들 삶에 어떠한 이야기가 깃들었는가를 만나려 하거나 사귀려 하는 흐름’으로 사진을 찍기 때문입니다. 온누리에 빛나거나 온누리를 비추는 손꼽히는 아름다운 다큐사진쟁이들이란 ‘그림 그럴싸한 사진’을 낳는 사람이 아닙니다. 온누리에 빛나는 다큐사진쟁이는 사진으로 담기는 사람들하고 즐거이 손을 맞잡으면서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는 동무입니다. 놀이동무요 마음동이며 밥동무입니다. 밥 한 그릇 함께 나누어 먹고, 잠자리 함께 나누어 자며, 술 두어 잔 싱긋 웃으면서 나누는 동무예요.

 빛깔 고이 살아가는 사람들 삶자락을 ‘빛깔 고이’ 담으면 한결 좋습니다. 다큐사진쟁이가 할 몫이란 내 사진으로 담을 사람들이 얼마나 ‘빛깔 고이’ 살아가는가를 동무로 지내면서 깨닫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다큐사진을 하는 분들은 으레 흑백사진만 찍습니다. 아니, 흑백사진이어야 비로소 다큐사진이 되는 듯 여깁니다.

 흑백사진으로도 훌륭하다 싶은 다큐사진이 태어납니다. 흑백사진에도 짙기가 달라 0부터 10까지이든 하나부터 열까지이든, 까망과 하양이 아리따이 어우러지는 빛그림을 낳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무지개빛인 사람들 삶을 까망과 하양이라는 두 갈래로만 못박는다면 ‘빛깔 고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여느 사람들은 어떻게 마주하려나요. 여느 때부터도 ‘편견 품으며 바라보는 여느 사람들’은 흑백으로 이루어진 다큐사진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편견씻이’를 하며, ‘동무되기’를 하려고 ‘어깨동무’를 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책 《집시 바람새 바람꽃》은 사람들한테 얼마나 편견씻이에 이바지하는 사진책이 될까 궁금합니다. 왜냐하면, 한금선 님은 이 사진책을 당신 스스로 품던 편견을 씻고자 애쓰면서 찍었기 때문입니다. 한금선 님은 당신이 마주한 사람들(집시)이 얼마나 ‘빛깔 고이’ 살아가는가를 느끼면서 사진으로 담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집 안팎에 빨래를 널며 이쁘게 웃는 이 사람들은 무지개빛 모습으로 바라보면 얼마나 싱그럽거나 아리땁거나 사랑스러울까요. 편견씻이를 하는 데에도 사진찍기는 제몫을 하겠으나, 편견씻이보다 사랑하기를 하는 데에도 사진찍기는 제몫을 톡톡이 합니다.

 한국땅에서 사랑하기를 나누려는 다큐사진을 일구는 사진쟁이를 만날 수 있기를 꿈꾸고 싶습니다. 한국땅에서 살가운 내 동무와 이웃을 내 살림집 가까이에서 마주하면서 이쁘게 담는 결 고운 다큐사진쟁이를 만날 수 있는 날을 손꼽고 싶습니다. (4344.2.27.해.ㅎㄲㅅㄱ)


― 집시 바람새 바람꽃 (한금선 사진,눈빛 펴냄,2007.8.22./2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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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카메라는 39.5℃ - 패션 사진가 박경일의 라이프 포트폴리오
박경일 글.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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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션 없는 한국에서 패션사진 찍자니까
 [찾아 읽는 사진책 19] 박경일, 《나의 카메라는 39.5℃》(랜덤하우스코리아,2007)



 패션사진을 하는 박경일 님은 《나의 카메라는 39.5℃》라는 책에서 “티베트나 몽골의 원주민들이 정말 순박한 얼굴로 민속 옷을 입고 찍은 다큐멘터리 사진을 보면서 나는 그 사람들의 인생이 보일 뿐이지 그걸 찍은 작가의 인생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간혹 그런 사진을 보며 작가의 인생관이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정작 나를 사로잡는 건 카메라를 응시하는 그들의 눈빛일 뿐이다(17쪽)” 하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한편으로는 옳습니다. 왜냐하면, 티베트 민속 옷을 입은 사람들을 찍는다 해서 이런 사진이 ‘다큐멘터리 사진’이 아니기 때문이고, 다큐멘터리 사진이 아닌 사진을 찍으면서 다큐멘터리 사진인 줄 내세우는 작품들은 그다지 우리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니까, 박경일 님 말처럼 ‘사진기를 바라보는 그 사람들 눈빛’이 보일 뿐입니다.

 참다이 다큐멘터리 사진이라 할 다큐사진은 스스로 다큐사진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진이면서 갈래를 나누자면 다큐사진이 될 뿐입니다. 먼저 사진답지 않고서야 다큐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제대로 사진답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사진은커녕 다큐사진이 못 되고, 이런 사진으로는 아무런 이야기를 건네지 못합니다.

 참다이 사진이면서 다큐사진으로 갈래를 나눌 만한 사진을 들여다보면, 이 사진을 읽으면서 이 사진을 찍은 사람 마음과 삶을 함께 읽습니다. 애써 이러한 사진을 찍는 사람 손길과 다리품을 읽고, 이러한 사진을 우리한테 보여주려는 사람 삶과 꿈을 읽습니다.

 박경일 님은 “내 사진이 단순히 예쁘다거나 멋지다는 개념으로 불리는 패션사진이 아니라 그 안에 분명한 스토리가 있고 나만의 아이디어가 녹아 있는 사진이 되기를 바란다(33쪽).”고 말합니다. 곧, 이야기가 녹아들지 않으면 ‘사진이 아니’요 ‘사진이 아니면서 패션사진 또한 아니’라는 셈입니다.

 옳게 찍은 다큐사진이 아니라면, 다큐멘터리라는 이야기를 느끼지도 못할 뿐 아니라, 사진으로서도 따분하거나 엉터리이거나 뒤틀립니다. 옳게 찍은 다큐사진이어야 다큐멘터리 이야기뿐 아니라 사진으로서도 즐거우며 아름답습니다. 그러니까, 박경일 님이든 다른 누구이든, 패션사진으로서 패션사진다웁기 앞서 사진으로서 사진다워야 합니다.

 사진으로서 사진다우려면 ‘내 이야기가 깃든 사진’이어야 합니다. 내 이야기가 깃든 사진이란 ‘내 삶이 깃든 사진’입니다. 내 이야기와 내 삶을 사진으로 깃들일 때에 ‘사진이 태어나’면서 ‘갈래를 나눌 때에 패션사진이기’도 합니다.

 이리하여, 박경일 님은 “처음 카메라를 메고 길거리를 헤매고 다니기 시작하면서 깨달은 것은 어떻게 하면 사진을 잘 찍는가가 문제가 아니란 것이었다(34쪽).” 하고 느낍니다. 사진을 잘 찍는다 해 보았자 ‘사진에 내 이야기가 담기’지 않습니다. 그저 예쁘장한 사진이 나올 뿐입니다. 길거리를 헤매면서 그럴듯한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대서 ‘사진에 내 삶이 스미’지 않습니다. 그저 그럴듯한 모습을 그럴싸하게 보여줄 뿐입니다.

 사진은 잘 찍은 작품이 아닙니다. 잘 찍은 작품이래서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사진 가운데 잘 찍은 작품이 있기도 하지만, 잘 찍는 틀이나 솜씨나 매무새가 사진으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이야기가 없고 삶이 깃들지 못한다면 사진도 문화도 예술도 삶도 아닙니다.

 박경일 님은 “내츄럴한 사진은 자연스러운 느낌만 잘 살면 약간의 허점도 문제되지 않고 도리어 인간적인 매력으로 다가와 친밀감을 줄 수 있지만, 테크니컬한 사진은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모델의 얼굴에 난 잡티 하나까지 사진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망쳐 버리기 때문이다(50쪽).” 하고 말하지만, ‘내츄럴’이건 ‘테크니컬’이건 조그마한 잡티 하나 때문에 사진이 망가지거나 흔들립니다. 왜냐하면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담으려고 뜻하지 않은 모습이 사진으로 스며들면서 뜻밖에 놀라운 사진이 될 수 있다지만, 내가 담으려고 뜻하지 않은 모습이 엉뚱하게 스며든 나머지 내 이야기를 보여주는 사진이 안 되고 맙니다. 그래서 ‘내츄럴’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잡티 하나’ 때문에 다시 그 자리로 가서 다시 그 빛과 이야기가 살아날 때까지 기다립니다. ‘테크니컬’ 사진이기 때문에 잡티 하나로 사진이 망가지지 않습니다. ‘사진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 빈틈이나 어수룩한 데가 드러날 수 없습니다. 사진을 하는 사람은 한복판에 담는 모습이든 구석퉁이에 넣는 모습이든 모두 살피며 보듬어 껴안는 매무새여야 합니다. 사진은 그저 사진이지, ‘내츄럴’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매력’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테크니컬’ 사진 또한 사람이 이루는 사진이기에, 이러한 사진에도 ‘사람다운 느낌’을 담지 않고서야 즐거이 마주할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마땅한 노릇입니다만, “어떤 순간을 기다려 포착해 내는 것만으로는 내가 그리고 싶고 말하고 싶은 것을 평생 담아낼 수 없(61쪽)”습니다. 나는 내가 말하고 싶은 대로 내 삶을 꾸려야 합니다. 나는 내가 그리고 싶은 대로 내 삶을 일구어야 합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대로 내 삶을 꾸리다 보면, 사진기를 쥔 내 앞에 ‘내가 담아서 그리고픈 이야기가 깃든 모습이 어느 한때에 환하게 나타납’니다. 나는 이렇게 내 눈앞에 나타난 환한 모습을 놓치지 않고 사진으로 옮길 수 있어야 합니다. 기다린다고 해서 나타나는 환한 모습이 아니라, 내가 이 땅에서 내 삶을 일굴 때에 시나브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다시금 마땅한 노릇인데, “정 노출대로 찍으면 매번 달력 사진 같은 것밖에 나올 수가 없다(85쪽).”는 말은 틀립니다. 노출을 제대로 해서 찍는다고 왜 ‘달력 사진’일까요. 게다가 ‘달력 사진’이 노출을 ‘정 노출’로 할까요? 게다가 ‘정 노출’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사진 노출’이란 사진기를 쥔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느 사람은 더 밝게 볼 수 있고, 어느 사람은 더 어둡게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찍은 사진을 종이에 뽑으려고 사진관에 맡기면 으레 ‘사진이 너무 어둡게 나올 듯한데?’ 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사진관에서는 제 사진을 ‘밝게 보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제 눈에는 제가 찍은 사진빛 그대로 제 ‘노출’이니까,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됩니다. 제 사진을 보는 분 가운데에는 ‘너무 어두운 빛’이라 하는 사람이 있지만 ‘딱 좋은 빛’이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제가 살아가는 대로 제 빛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제가 바라보는 빛이 가장 옳거나 좋거나 낫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제 빛은 제 빛을 뿐입니다. 바른 노출도 그른 노출도 넘치는 노출도 모자란 노출도 아니에요. 우리들이 사진기를 쥐며 ‘나한테 맞는 노출’을 찾자면, ‘내가 바라보는 삶과 사람과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알아채야 합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어릴 때부터 창의성과 동떨어진 교육을 받고 자랐다. 사진의 경우만 보더라도 전공학과에 들어가기 전부터 학원에서 스파르타 식 교육을 받는다. 학교에 가서 뭘 배울까 싶을 정도로 대학입시만을 위해 공부한다(84쪽).”고 하니까 ‘정 노출’이니 하고 생각하고야 맙니다.

 그런데 내 사진이 ‘달력 사진’이면 어떻습니까. 내 사진이 ‘예술사진’이어야 아름다운 사진일까요. 내 사진이 ‘일 등급 사진’이 될 때에 비로소 나는 내 사진길을 잘 걸었다 할 만하겠습니까. 내 사진을 남들이 어떻게 재거나 따지든, 내 사진에 내 이야기를 소롯이 담아 내 삶을 어여삐 보듬는 나날이라면, 내 사진길은 씩씩하며 당차고 기쁩니다.

 박경일 님은 “8×10 카메라로 만든 시리즈. 무거운 카메라만큼이나 모델도 나도 경직되어 있는 게 느껴진다(177쪽).”고도 말합니다. 무거운 사진기를 쓰니까 모델이나 사진쟁이가 무거워질까요. 가벼운 사진기를 쓰면 모델이나 사진쟁이가 가벼워지나요. 값나가는 사진기를 쓰면 모델이나 사진쟁이는 값나가는 사람으로 탈바꿈하는지요. 싸구려 사진기를 쓰면 모델이나 사진쟁이는 싸구려로 나동그라지는가요.

 은행원이었다가 사진작가가 되었다는 박경일 님 사진삶을 담은 책 《나의 카메라는 39.5℃》 책날개 첫머리에는 박경일 님을 소개하면서 “대한민국 최고의 패션 사진가가 된 은행원”이라는 말을 붙입니다.

 ‘최고’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사진 찍는 사람 가운데 ‘최고’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진쟁이는 어떻게 사진을 해야 ‘첫손가락’이 될까요. 어떤 패션사진을 찍어서 선보여야 ‘으뜸’이 되는지요.

 사진을 잘 찍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사랑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만 있습니다. 사진이 돋보인다거나 사진이 놀랍다 할는지 모르나, 돋보이는 사진이 좋은 사진이 아니며, 놀라운 사진이 대단한 사진이 아닙니다.

 사진은 사람입니다. 사진은 사랑입니다. 사진은 삶입니다. 이도 저도 아닙니다. 사진은 사람인 까닭에 ‘최고라 일컫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진은 사랑이니까 ‘첫손가락 꼽는’ 사랑이 없습니다. 사진은 삶인 만큼 ‘으뜸으로 여길’ 삶이 없습니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담아 좋아하는 사진이 태어납니다.

 박경일 님은 《나의 카메라는 39.5℃》를 거의 마무리할 즈음에 “우리가 찍는 옷은 한복이 아니다. 전부 외국 디자이너들의 서양 옷이다. 그러니 한국인들이 입은 느낌과 외국인들이 입은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다. 파란 눈에 금발 머리카락의 유럽 여자가 한복을 입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 모습으로 창경궁에 앉아 있는 사진이 화보로 나가면 우리가 보기에도 ‘별난 사진이다’ 하는 정도지 ‘우아하고 단아하다’고 하지는 않는다(182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이 즈음에서 박경일 님은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면서 책을 마무리합니다.

 한국에는 ‘패션’이 없습니다. 패션이 없는 한국에서 패션사진을 찍어 본댔자 패션사진이 태어날 수 없습니다.

 한국사람이 입는 옷은 ‘패션’이 아닌 ‘서양 옷’입니다. ‘한복을 걸친 서양사람’이 우스꽝스럽거나 웃기는 모습으로 보인다면, ‘서양 옷을 걸친 한국사람’도 우스광스럽거나 웃기는 모습으로 보일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사람 가운데 한국 옷을 입은 사람은 몇이나 있는가요. 온통 서양 옷만 입는 한국사람입니다. 그렇지만 ‘한국 패션사진’은 ‘서양사람을 모델로 세워 서양 옷만 입히는 사진’에 머뭅니다.

 한국에서 패션사진을 하는 사람은 패션사진도 한국사진도, 끝끝내 사진도 못 하는 셈입니다. 한국에서 패션사진을 하자면, ‘늘 서양 옷만 입는 한국사람 삶’이 무엇인가를 찬찬히 꿰뚫을 뿐 아니라 마음속 깊이 사랑하면서 사진길을 걸어야 합니다. 까놓고 말해, 사진을 찍는 박경일 님 또한 한국 옷이 아닌 서양 옷을 입으며 서양(또는 일본) 사진장비를 들고 사진을 찍습니다. 우리가 서양(또는 일본) 사진장비를 들고 사진을 찍는대서 서양사진이나 일본사진을 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우리는 한국땅에서 한국사람으로 살면서 한국사진을 찍습니다. 한국에 패션이 없고 패션사진이 없는 까닭을, 누구보다 ‘패션사진을 한다’고 생각하거나 ‘한국에서 패션사진을 가장 잘 찍는다’고 자랑하듯 말하는 사람 스스로 옳게 깨닫고 바르게 알아채며 슬기롭게 사진길을 가다듬으며 살아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사진은 자랑이 아닙니다. 사진은 내가 사랑하는 삶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삶을 자랑하는 사람은 사진으로도 그림으로도 글로도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 갈무리하지 못합니다. (4344.2.24.나무.ㅎㄲㅅㄱ)


― 나의 카메라는 39.5℃ (박경일 글·사진,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2007.1.30./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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土門拳 腕白小僧がいた (小學館文庫) (文庫)
土門 拳 / 小學館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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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어디에서 어떻게 태어나는가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19] 토몬 켄(土門 拳), 《腕白小僧がいた》(小學館,2002)



 1909년에 태어나 1990년에 숨을 거둔 토몬 켄 님 사진책 가운데 한국에 알려진 책은 하나도 없습니다. 토몬 켄이라는 이름조차 한국 사진쟁이한테는 퍽 낯설다 할 만합니다. 나이든 사진쟁이 가운데에는 토몬 켄 사진책 한 권쯤 들여다본 분이 있을는지 모르나, 젊은 사진쟁이 가운데에는 토몬 켄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았다든지 이이 사진책을 장만하여 즐긴다고 할 만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궁금합니다.

 일본 사진밭은 기무라 이헤이 님이 갈고닦았다면, 여기에 토몬 켄 님이 씨앗을 심어 우람한 나무로 자라도록 돌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토몬 켄 님은 ‘사진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바로 사진으로 했으며, ‘사진으로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을 곧 사진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멀디먼 나라로 사진마실을 다닌다든지 유럽이나 미국에서 새로운 흐름이라고 내세우는 사진흐름을 애써 받아들이지 않은 토몬 켄 님이라고 느낍니다. 새로운 흐름은 그예 새로운 흐름이지, 사진을 하는 사람들 누구나 똑같이 받아들일 흐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새로운 사람이 태어나는 만큼, 새롭게 사진기를 쥐어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새로운 바람으로 새로운 사진을 찍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화나 현상을 남달리 한다든지 오래된 필름을 쓴다든지 사진틀을 요모조모 바꾼다든지 해야 새로운 사진흐름이 되지 않습니다. 스튜디오에서 꿈 같은 모습을 만든다거나 셈틀 풀그림으로 머리속 꿈나래를 꽃피운다 해서 새로운 사진흐름이기만 하지 않습니다. 사진쟁이 스스로 새로운 넋으로 새로운 삶을 일굴 때에 바야흐로 새로운 사진흐름입니다.

 찍을 수 있을 때 찍을 수 있는 사진을 찍으면 즐겁습니다. 찍을 수 있는 곳에서 찍을 수 있는 사진을 찍기에 아름답습니다.

 놀이하는 어린이, 일하는 어린이, 가난한 어린이, 동생 업어 돌보는 어린이, 어머니 품에서 만화책 읽는 어린이 …… 들을 두루 가까이에서 마주하면서 사진으로 영글며 이룬 사진책 《腕白小僧がいた》(小學館,2002)에 담긴 사진은 더 돋보인다거나 더 남다른 사진이 하나도 아닙니다. 그저, 토몬 켄이라고 하는 사진쟁이가 살던 때에 둘레에서 흔히 마주하던 아이들하고 가까이에서 사귀면서 사진으로 한 장 두 장 담은 이야기를 그러모읍니다. 아이들이 골목이든 길가이든 들판이든 멧자락이든 탄광마을에서든 스스럼없이 뛰어놀거나 일을 하니까, 이런 모습을 가만히 살피며 사진으로 찰칵 담습니다. 고단한 아이들 나날을 사진으로 밝혀서 공무원과 정치꾼을 일깨우려는 사진이 아닙니다. 일본이 제국주의 길을 걸어가며 아이들을 짓누르거나 ‘충군애국’을 억지로 쑤셔박을 때조차 아이들은 해맑은 눈빛과 매무새로 신나게 물장구치고 놀이하는 모습을 꾸밈없이 찰칵찰칵 담습니다. 일본 어린이가 더 예쁘다고 외치지 않습니다. 애써 인도나 티벳에 가지 않더라도 일본사람은 일본에서 예쁜 아이들을 늘 만나며 사랑할 수 있다고 깨우치는 사진이 아닙니다. 어린이는 참말 어린이요, 어린이로 보내는 나날이 얼마나 아름다우며 사랑스러운가를 몸소 느끼기에 담는 사진이라는 이야기를 담을 뿐입니다.

 1979년에 병으로 쓰러져 더는 사진기를 쥐지 못하기까지, 어린이면 어린이, 일본 자연이면 일본 자연, 일본 불상이면 일본 불상을, 어린이와 자연과 불상하고 한마음이 되면서 토몬 켄이라는 사진쟁이 한 사람이 사랑어린 손길을 살포시 깃들이는 사진을 내놓습니다.

 아름답다고 느끼기에 아름답다고 느끼는 그대로 담는 사진입니다. 사랑스럽다고 느끼기에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눈길을 고스란히 싣는 사진입니다. 즐겁다고 느끼기에 즐겁다고 느끼는 사랑을 차분히 깃들이는 사진입니다.

 사진을 더 잘 찍는 길이란 없습니다. 사진을 더 돋보이도록 찍는 법이란 없습니다. 사진을 더 잘 쓴다든지, 사진이 더 훌륭하거나 나은 문화나 예술로 거듭나도록 하는 수는 없어요.

 내 삶이 그대로 사진입니다. 내가 살아가며 바라보는 눈길이 그예 사진입니다. 내가 땀흘리며 꾸리는 살림살이가 곧바로 사진이 되어요.

 내 하루하루를 기쁘게 웃으면서 맞아들일 때에, 내가 찍는 사진 한 장을 기쁘게 웃으며 맞아들일 뿐 아니라, 내 둘레 사람한테도 기쁘게 웃으며 보여줍니다. 내 오늘과 어제와 글피를 어여삐 돌보거나 건사할 때에, 내가 담으려는 사진 이야기를 즐거이 엮으면서, 내 살붙이와 동무하고 즐거이 나누거나 함께합니다.

 토몬 켄 님 사진은 ‘사진은 어떻게 태어나는가’를 스스로 살피거나 찾거나 헤아리면서 이룬 삶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토몬 켄은 토몬 켄대로 사진이 태어나는 한살이를 살피면서 《腕白小僧がいた》를 빚고, 다른 사진쟁이는 다른 사진쟁이대로 다른 사진쟁이가 아끼거나 좋아하면서 살아가는 보금자리를 둘러싼 마을에서 ‘사진은 어떻게 태어나는가’를 스스로 살피거나 찾거나 헤아리면서 즐기면 될 사진이며 삶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사진은 우리 집에서 태어납니다. 사진은 내 마음에서 태어납니다. 사진은 우리 마을에서 태어납니다. 사진은 내 손과 발에서 태어납니다. 사진은 내 겨레 내 삶터에서 태어납니다. 사진은 내 눈길과 내 보조개에서 태어납니다.

 사진은 기계나 장비에서 태어나지 않습니다. 사진은 셈틀이나 포토샵에서 태어나지 않습니다. 사진은 필름이나 메모리카드에서 태어나지 않습니다. 사진은 두근두근 뛰면서 살아숨쉬는 내 가슴에서 태어납니다. (4344.2.22.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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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oferry 2011-10-19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서점에서 많은 사진집들을 보고 놀랐지요. 다양한 작가군과 소재, 그런 양질의 책들이 서점에서 유통되고 독자가 있고 기호가 다양하다는 것.아쉬움 마음에 일본사진집을 몇 개 사려고 알라딘을 돌아다니다가 문득 느낌오는 책을 주워담습니다. 된장님의 리뷰량 겹치는 작가가 많아서 반가운 맘이 들었어요.저는 그냥 한 컷의 느낌에 구매확신을 얻지만 된장님 리뷰에 간략한 일본사진작가들의 소개와 역사들을 실어주셔서 정보도 얻게 되구요.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숲노래 2011-10-20 20:07   좋아요 0 | URL
저도 아직 더 많은 분들 이야기를 담지 못해요.
새 보금자리에 좋은 책터 자리잡으면
신나게 수많은 사람들 이야기를 펼치고 싶어요.

일본 사진책은 참 훌륭하지만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답니다..
 
Immediate Family (Hardcover)
Sally Mann / Aperture / 1992년 10월
평점 :
품절


(이 책이 알라딘 목록에도 뜨는 줄 이제서야 알았기에, 지난해에 쓴 글을 이제서야 걸친다. <사진책과 함께 살기>에 실린 글.)


 그림그리기와 글쓰기와 사진찍기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3] 샐리 만(Sally Mann), 《Immediate Family》(Aperture,1992)


 사진책 《윤미네 집》이 1990년에 처음 나왔을 적에 사람들은 그리 눈여겨보지 않았습니다. 제법 눈길을 끌고 입소문을 타기는 했으나 이 사진책을 기꺼이 장만하면서 ‘내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 삶’을 사진으로 담는 뜻을 읽어내지 못했습니다. 2010년에 사진책 《윤미네 집》은 새 옷을 입으며 다시 태어났고, 이제는 퍽 많은 사람들이 널리 눈여겨보며 이 사진책을 장만해 줍니다. 스무 해 만에 다시 나오며 꽤 사랑받는다고 하여 이 사진책에 깃든 뜻이 갑자기 생겨나거나 샘솟지는 않습니다만, 이제라도 사진찍기에 담는 손길을 느낄 수 있다면 반가운 노릇입니다. 그런데, 《윤미네 집》을 장만한 분들은 이 사진책에서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아쉬운지를 찬찬히 느끼고 있을는지요. 누구나 찍을 수 있어 아름답고, 언제라도 찍을 수 있어 훌륭하며, 어떠한 장비로라도 찍을 수 있어 어여쁜데다가, 작가 아닌 사람이 찍어도 거룩한 줄을 느끼고 있을는지요. 식구들하고 좀더 오래 지낼 수 있으면 더 애틋한 사진을 엮을 수 있고, 집살림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하며 복닥였으면 더욱 살가운 사진을 이룰 수 있으며, 함께 즐길 놀잇거리나 일거리가 있었으면 한결 눈물겨울 사진을 선보일 수 있는데다가, 두고두고 오순도순 이야깃거리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한껏 웃음지을 사진을 펼칠 수 있는 줄을 깨닫고 있을는지요.

 스물다섯 즈음 된 젊은 넋이 당신 어버이 품을 떠나 홀로 나라 안팎을 떠돌던 발자국을 담아낸 이야기책 《먼지의 여행》(신혜 글,샨티 펴냄,2010)을 읽으면, “사진찍기를 원하는 아이들에게 카메라가 없어서, 대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색연필로 초상화를 그려 주기로 했다. 카메라로 찰칵 찍고 말 순간을 천천히 그림으로 그리며, 나는 아이들과 친해지는 과정에 집중하게 되었다. 초상화를 그리는 동안 아이들이 나를 오래 쳐다보고, 나도 아이들을 오래 바라봤다(133∼134쪽).”는 대목이 있습니다. 젊은 넋은 ‘좋은’ 사진, 또는 ‘즐거운’ 사진, 또는 ‘애틋한’ 사진, 또는 ‘훌륭한’ 사진, 또는 ‘눈물겹거나 웃음지을’ 사진이 어떻게 태어나는가를 몸으로 부대꼈습니다. 그러나 아직 한 가지를 더 부대끼거나 삭여내지는 못합니다. 아직 많이 팔팔하고 풋풋하니까 앞으로 얼마든지 새로이 부대끼며 받아들이리라 믿는데, 그림을 그릴 때에만 오래오래 서로를 쳐다보며 얘기를 하고 마음을 모을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찍기를 할 때에도 언제나 오래오래 서로를 쳐다보며 얘기를 한 다음에 할 수 있고, 이렇게 해야 참다운 사진을 낳습니다.

 저는 제 사진감인 ‘헌책방’과 ‘골목길’과 ‘자전거’와 ‘우리 집 딸아이’를 사진으로 담을 때에 늘 오래오래 지켜보며 가슴으로 삭여 놓습니다.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며 샘솟는달지, 스스로 우러나오며 터질 때까지는 사진기를 쥐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제 어디에서라도 사진기는 제 목걸이가 되어 줍니다. 싸구려 사진기이면서 꽤나 무거운 녀석을 쓰고 있습니다만, 자전거를 타고 골목마실을 하든 아이를 품에 안고 동네마실을 하든 제 목에는 어김없이 사진기가 대롱대롱 걸려 있습니다. 헌책방에서 책을 살필 때에도 사진기를 목걸이처럼 걸고 있습니다. 빨래하고 밥하고 청소하고 설거지하는 때를 빼놓고는 늘 사진기를 몸에 걸거나 곁에 놓고 있습니다. 날마다 열 시간쯤은 사진기를 손으로 만지작거리지 싶습니다. 다만 사진기 단추를 누르는 횟수는 많지 않습니다. 내 눈길로 바라본 내 삶을 내 마음으로 곰삭여서 무르익히지 않고서는 사진기 단추를 누를 수 없습니다. 미처 무르익히지 않았는데 사진기 단추를 누르면 ‘그럴싸한’ 사진은 되지만, 저 스스로 제 사진을 놓고 ‘웃거나 울’ 사진은 못 됩니다.

 서울 용산 헌책방 〈뿌리서점〉을 열여덟 해 다니며 사진은 열두 해에 걸쳐 사천 장 즈음 찍었습니다만, 드나드는 횟수가 늘고 머물며 책을 살피는 나날이 늘수록 이곳에서 다시금 찍는 사진이 한결 사랑스럽고 푸근합니다. 어쩌다 한두 번이 아닌 제 고향터전이자 살림집 깃든 골목길을 수천 수만 번 밟으며 사진기 단추를 누를 때에 비로소 제 웃음보와 울음보를 터뜨리는 사진이 태어납니다.

 셜리 만(Sally Mann)이라는 분이 이룬 사진책 《Immediate Family》를 보았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아이를 낳고 기르며 부대낀 온갖 따스함과 눈물과 애틋함을 서려 놓은 사진책을 보았습니다. 《윤미네 집》은 바깥일로 바쁜 아버지가 바쁜 틈을 얼마나 바지런히 쪼개며 식구들과 복닥이는 데에 바쳤는가를 잘 엿볼 수 있어 사랑스러운 사진책이라면, 《Immediate Family》는 홀가분하고 거리낌없는 넋으로 삶을 꾸리는 어머니가 밤낮으로 아이들하고 뒤섞이면서 아이들 자라나는 하루하루를 얼마나 재미나게 껴안았는가를 즐거이 읽을 수 있어 따사로운 사진책입니다.

 두 사진책을 보면서 새삼스레 느끼지만, 생활사진이든 작품사진이든 모두 삶에서 비롯합니다. 꾸밈없이 바라보는 수수한 사진이든 이래저래 만들고 꾸미며 이루는 작품사진이든, 삶을 그대로 드러내거나 삶을 뒤틀거나 만지작거리며 사진 하나 이루어 냅니다. 삶결 따라 내놓는 사진이지, 삶무늬 없이 내놓을 수 없는 사진입니다. 삶자국 묻어나는 사진이요, 삶자락 없이 일굴 수 없는 사진입니다.

 글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노래이든 춤이든 굿판이든, 모조리 나 스스로 살아가는 모양새요 넋입니다. 사랑하는 삶이 고스란히 사진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4343.3.9.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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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1-02-19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애써 올렸더니 이 책은 품절이네... ㅠ.ㅜ
그러나 1994년 재판본은 있으려나?
아직 이 책이 남았다면,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두 사람이라도
한국에서 사서 보아 주기를 꿈꾸며.... 엉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