男子 (ペ-パ-バック)
梅 佳代 / リトル·モア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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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을 만든 남자한테 말을 걸다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5] 카요 우메(梅 佳代), 《男子》(Little More,2007)


 우리 집 첫째 아이가 하루가 다르게 크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내 어린 나날은 어떠했을까를 가만히 곱씹습니다. 이른아침부터 늦은밤까지 지치지 않으면서 엉겨붙거나 노는 품을 바라보면서 아이들은 이렇게 싱싱하거나 기운차게 살아간다고, 무럭무럭 자라는구나 하고 헤아려 봅니다.

 수백 가지 웃음과 눈물을 보여주는 아이입니다. 수천 가지 몸짓과 노래를 선보이는 아이입니다. 수만 가지 이야기와 꿈을 밝히는 아이입니다.

 모든 사람은 어머니가 있고 아버지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어른이 되기 앞서 어머니나 아버지가 흙으로 일찍 돌아가곤 합니다. 누군가는 새어머니나 새아버지를 맞아들일 테지만, 낳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없이는 내 목숨이 이 땅에 설 수 없습니다. 내가 낳아 돌보는 아이 또한 나와 옆지기가 있기에 예쁘게 태어나서 고맙게 살아갑니다.

 누구나 선물덩어리이면서 보배덩어리입니다. 누구나 선물을 듬뿍 물려주면서 보배를 가득 남깁니다. 일찍 혼인해서 일찍 아이를 낳든, 조용히 혼자 살아가며 아이 없이 지내든, 어떠한 사람이더라도 나부터 내 가슴에 펄떡펄떡 뛰는 목숨이 있습니다. 이 목숨을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사람과 삶과 사랑이 달라집니다. 일찍 혼인해서 아이를 열씩 낳았다지만 사람과 삶과 사랑하고는 동떨어질 수 있습니다. 짝꿍을 사귀지 않고 홀로 지내다가 앓아누워 조용히 숨을 거두더라도 사람과 삶과 사랑하고는 살가울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온몸을 사랑으로 돌본다면 나와 마주하는 모든 사람들은 고스란히 사랑입니다. 내가 내 온마음을 믿음으로 보듬는다면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믿음입니다.

 사진이란 ‘하루가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담습니다. 하루 동안에도 ‘때마다 다르게 살아내는’ 사람들 사랑을 담습니다.

 사진은 수백 가지 웃음과 눈물뿐 아니라 수만 가지 이야기와 꿈을 밝힙니다. 수천 가지 몸짓과 노래 또한 알알이 즐기면서 보여줍니다.

 값진 사진기로 값진 사진을 이루지 않습니다. 높은 이름값으로 거룩한 글을 이루지 못해요. 어마어마하다는 권력으로 아름다운 그림을 빚지 못합니다. 사람 목숨 하나이든 사랑스러운 손길 한 번이든 살가운 삶 한 자락이든, 돈이나 이름이나 힘으로 건드리지 못합니다. 살가운 사랑으로 사람을 사귀는 예쁜 삶이란, 살가운 사랑으로 이웃과 어깨동무하는 어여쁜 삶으로 마주하면서 느낄 수 있습니다. 값진 사진기가 아니라 ‘내 온 사랑을 담아 손에 쥔 사진기’로 담는 아름다운 사람들 아름다운 사랑 아름다운 삶입니다.

 카요 우메(梅 佳代) 님 사진책 《男子》(Little More,2007)를 들여다봅니다. 사진책 이름이 더도 덜도 아닌 ‘남자’입니다. 첫 쪽부터 마지막 쪽까지 ‘남자 어린이’ 사진이 펼쳐집니다. 장난꾸러기인지 개구쟁이인지 까불이인지 철부지인지 알 길이 없는 남자 아이들 사진이 가득합니다.

 이 아이들, 이 사내 녀석들은 장난꾸러기라 할 만할까요, 개구쟁이라 할 만할까요. 사진기 앞에서 스스로 바보스러운 몸짓과 얼굴짓을 하는 요 녀석들은 까불이라 할 만한가요, 철부지라 할 만한가요.

 여자 아이라 하면 사진기 앞에서 어떤 모습 어떤 몸짓 어떤 낯빛이 될까 궁금합니다. 여자 아이라 하든 남자 아이라 하든 다 마찬가지가 될는지, 남자 아이는 남자 아이답게 남달라 보이는 모습이 될는지 궁금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지 않더라도, 남자 아이나 어른은 참 바보스럽습니다. 스스로 얼마나 바보스러운 줄 모르며 바보스레 살아가는 남자 아이나 어른입니다. 무엇 하나 대단하지 않은데, 어리석게도 대단하다 생각하며 얽매이는 남자 아이나 어른입니다. 그러니까, 정치라든지 권력이라든지 스포츠라든지 이름값이라든지 얽매이는 남자 아이나 어른입니다. 남자가 얼마나 잘나서 ‘공차기는 남자만 하는 놀이’라고 여깁니까. 여자가 권투를 할 때에 우악스럽다거나 징그럽다고 여긴다면, 남자가 권투를 할 때에도 매한가지입니다. 서로서로 신나게 두들겨패서 넋을 잃고 쓰러지면 손뼉을 치며 웃고 떠드는 남자들이란 더없이 바보요 멍텅구리입니다. 참삶을 모르고 참사랑을 모르며 참사람을 모르는 철부지요 꺼벙이입니다.

 축구선수도 밥을 먹고 권투선수도 밥을 먹습니다. 밥을 안 먹어도 될 사람은 없습니다. 축구를 못 하든 안 하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밥을 못 먹거나 밥을 할 줄 모른다면 큰일입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되든 말든 대단하지 않습니다. 밥을 못 먹거나 밥을 할 줄 모른다면 살지 못합니다.

 카요 우메 님 사진책 《男子》는 어린아이 모습을 담아 ‘남자’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어린아이 모습으로만 읽을 남자 이야기만은 아니로구나 싶습니다. 남 앞에서 제 모습을 돋보이려는 이 바보스러운 남자들은 ‘사진에 찍힌 몇몇 아이만 바보스럽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이 아이들이 바보스러운 노릇이 아니라, ‘남자’라고 하는 목숨붙이들이 얼마나 바보스러운 짓을 하면서 바보스러운 줄 모르고 바보스러운 꼴을 되풀이하면서 제 삶을 슬프게 잊는가를 들려주는 셈입니다.

 한 마디로든 두 마디로든 세 마디로든 남자는 바보스럽습니다. 이 바보스러운 남자들이 정치 권력이나 사회 권력이나 사진 권력을 움켜쥡니다. 철없고 까부는 남자들이 평론이니 학문이니 무어니를 온통 거머쥡니다. 참말 남자들은 뭔 짓을 하는지 스스로 알기나 하겠습니까. 뭔 짓을 하는지조차 스스로 모르면서 바보짓을 하는 사람들이 곧 남자라는 목숨입니다. 슬프며 가녀린 목숨입니다. 쓸쓸하며 허전한 목숨입니다. 따순 손길과 포근한 눈길을 바라는 애처로운 목숨입니다. (4344.5.5.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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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村伊兵衛 昭和を寫す〈4〉秋田の民俗 (ちくま文庫) (文庫)
木村 伊兵衛 / 筑摩書房 / 199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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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 그리운 모습, 오늘은 오늘을 찍는다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4] 기무라 이헤이(木村伊兵衛), 《木村伊兵衛 昭和を寫す 4 秋田の民俗》(筑摩書房,1995)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누구나 사진을 찍습니다. 책으로 묶는다든지 사진잔치를 열어야 비로소 사진쟁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식구끼리 웃고 떠들며 넘기는 사진첩에 담을 사진을 찍더라도 사진쟁이가 됩니다.

 누구나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누구나 그림을 그립니다. 멋들어진 곳에서 멋들어진 틀에 끼워 그림을 내다 걸어야 그림쟁이가 되지 않습니다. 나와 벗과 살붙이가 웃고 떠들며 돌아보는 살가운 그림이 된다면 그림쟁이가 됩니다.

 이름난 문학평론가가 손뼉을 쳐 주는 문학을 써야 글쟁이가 아닙니다. 이름난 출판사에서 책으로 나와 수십 수백만 권이 팔려야 비로소 쓸 만한 글이 아닙니다. 나라 안팎에 널리 알려지거나 불리는 노래를 짓거나 불러야 좋은 노래가 아닙니다.

 나 스스로 좋아서 쓰는 글입니다. 내가 좋아하니까 그리는 그림입니다. 내 마음을 담아 부르는 노래입니다. 내 삶을 사랑하면서 찍는 사진입니다.

 모두 그리운 모습이기에 오늘은 오늘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모두 애틋한 이야기이기에 오늘은 오늘을 글로 씁니다. 모두 살가운 이웃이기에 오늘은 오늘을 그림으로 담습니다.

 글을 쓰다 보면 어제나 그제 이야기를 쓴다든지, 모레나 글피 이야기를 쓴다 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어제 이야기를 돌이키든 모레 이야기를 톺아보든, 언제나 오늘을 살아가는 나로서 쓰는 오늘 글에서 비롯합니다. 꽃이나 나무나 사람을 그림으로 그릴 때면, 처음 붓을 들 때와 마지막 붓질을 할 때는 다르다 할 만합니다. 여러 날을 두고 그림을 그리면, 처음 바라보던 모습을 처음 모습 그대로 그린다 하기 어려울 수 있어요. 1초 만에 휘리릭 그려내든 1분 만에 재빨리 담아내든, 그림을 그린다 할 때에는 1초와 1분 사이에 살아낸 모습을 고스란히 옮깁니다. 한 달에 걸쳐 그림 한 장을 그린다면 한 달이라는 나날과 삶과 모습과 이야기가 그림 한 장에 스미는 셈입니다.

 사진은 오늘을 찍습니다. 사진은 어제도 모레도 찍지 못하고, 오로지 오늘만을 찍습니다. 1초에 여러 장을 찍을 수 있는 사진기인 만큼, 사진은 오늘 가운데에서도 몇 시 몇 분 몇 초로 끊으면서 찍을 수 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모습을 어마어마하게 많은 이야기를 담아 보여줄 만합니다.

 같은 글이라 하더라도 쓰는 사람에 따라 맛과 멋이 다릅니다. 같은 그림이라 하더라도 그리는 사람에 따라 깊이와 너비가 다릅니다. 돌멩이를 찍든 문짝을 찍든,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이 돌멩이와 문짝을 어떻게 바라보며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느끼는가에 따라 사진맛과 사진멋이 달라져요. 사진깊이와 사진너비가 새롭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는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 몇 분 몇 초라는 틀에 사로잡힌 채 ‘오늘 사진’을 찍지만, 누군가는 ‘나와 네가 처음 태어나던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르게 일군 삶을 나란히 마주하면서 느끼는 오늘 사진’을 찍기 때문입니다.

 기무라 이헤이(木村伊兵衛) 님이 빚은 사진을 그러모은 자그마한 사진책 《木村伊兵衛 昭和を寫す 4 秋田の民俗》(筑摩書房,1995)을 들여다봅니다. 이웃나라 일본은 사진책을 이처럼 손바닥책으로 아기자기하게 묶어서 내놓곤 합니다. 책값은 고작 840엔. 쪽수는 208쪽. 한국에서는 한 사람 사진삶과 사진넋을 조그마하면서 예쁘장한 책 하나에 살뜰히 그러모으기 힘들다고 새삼 느낍니다. 이 사진을 더 큼지막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느낌이 한결 깊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자그마한 크기로 바라본대서 느낌이 옅거나 어수룩할 수 없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며 오늘을 아름다이 사진으로 옮긴 아름다운 손길을 얼마든지 느낍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지난날 김기찬 님이 내놓은 《골목 안 풍경》이라는 사진책을 이렇게 조그마하면서 예쁘장한 판꾸밈으로 아기자기하게 새로 엮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고. ‘기무라 이헤이 사진문고’처럼 ‘김기찬 손바닥 사진책’이라든지 ‘임응식 손바닥 사진책’을 어여삐 묶어서 오래오래 사진꿈과 사진얼을 맛볼 수 있게끔 하면 참으로 기쁘겠다고 느낍니다.

 일본 사진쟁이 기무라 이헤이 님은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사람들 얼굴을 사진으로 찍고, 사람들 차림새를 사진으로 찍으며, 사람들 살림살이라든지 살림집이라든지 마을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어느 한 가지를 더 돋보이도록 하지 않습니다. 몇몇 사람을 도드라지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저마다 작은 사람입니다. 저마다 고마운 목숨을 어버이한테서 선물받아 저마다 새로운 목숨을 제 아이한테 선물하며 살아가는 고운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아니고 힘겨운 사람이 아닙니다. 외로운 사람이거나 슬픈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내 이웃인 한 사람’입니다. ‘내 동무인 두 사람’입니다. ‘나와 살붙이라 할 만한 세 사람’이고, ‘나랑 한 마을에서 지내는 네 사람’이에요.

 돈이 없기에 슬픈 삶일 수 없습니다. 돈이 있기에 기쁜 삶일 수 없습니다. 어버이 두 분이 몸이 튼튼하든 어버이 두 분이 일찍 돌아가셨든, 어느 한쪽이 더 슬프거나 더 기쁘지 않습니다. 내 아이큐가 150이 되든 100이 되든 50이 되든 다를 일이란 없습니다. 내 걸음이 빠르든 느리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내 키가 크든 작든 어떠하든 대단하지 않습니다. 내 삶은 그예 내 삶입니다. 내 길은 고스란히 내 길입니다. 내 넋은 사랑스러운 내 넋입니다.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더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더 똥구멍 찢어지게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야 ‘다큐멘터리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아니, 굳이 다큐사진을 찍어야 사람들 살아가는 이야기를 보여주는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연예인이나 예쁜 아가씨를 알몸으로 벗기고 사진을 찍는다든지, 또는 예쁘다 하는 옷을 입히고 사진을 찍는다든지, 아름답다는 나라로 가서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라는 아가씨를 사진으로 찍는다고 하든지 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패션사진’이 나올 수 있습니다. 옷 만드는 회사 이름이나 상품을 널리 알리거나 파는 데에 도움이 되는 길을 걸어가기에 ‘여느 사람 눈길을 확 끄는’ 사진을 찍을 수 있을 테지만, 사람들 눈길을 확 끌기에 아름다운 사진이 되지는 않아요.

 얼굴에 주름이 졌으니까 주름진 얼굴을 고스란히 보여주되, 주름진 얼굴만큼 주름진 옷과 주름진 집과 주름진 땅과 하늘을 보여줍니다. 방아를 찧거나 물레를 잣거나 벼를 훑으며 고단하기에 고단한 모습을 사진으로 찍지만, 방아를 찧으며 밥을 얻는다는 즐거움이 있고 물레를 자으며 옷을 얻는다는 기쁨이 있습니다. 고단함과 즐거움과 기쁨을 한 자리에 그러모읍니다.

 사진과 함께 걷는 따사로운 길 하나는 ‘모두 그리운 모습’이라고 느끼며, ‘오늘은 오늘을 찍는’ 사진길입니다. 내 오늘을 예쁘게 사랑하는 사람이라 한다면, 애써 《木村伊兵衛 昭和を寫す 4 秋田の民俗》 같은 사진책을 들추지 않더라도 ‘내 예쁜 오늘과 내 예쁜 오늘 사진’을 살갗으로 느끼리라 생각합니다. 내 오늘을 예쁘게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한다면, 기무라 이헤이를 들추든 토몬 켄을 넘기든 살가운 속살을 헤아리지 못하겠지요. (4344.5.5.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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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 - 사진과 삶에 관한 단상
필립 퍼키스 글.사진, 박태희 옮김 / 안목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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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나은 사진장비’를 놓고 망설이는 분한테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33] 필립 퍼키스,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



- 책이름 :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
- 글 : 필립 퍼키스
- 옮긴이 : 박태희
- 펴낸곳 : 안목 (2011.2.8.)
- 책값 :9500원



 (1) 사진이란 무엇인가


 더 나은 사진장비는 있습니다. 좀 떨어지는 사진장비 또한 있습니다. 필름사진기이든 디지털사진기이든 값진 장비가 있고 값싼 장비가 있습니다. 그런데, 더 나은 사진장비이든 좀 떨어지는 사진장비이든, 언제나 ‘사진을 찍도록 이끄는’ 기계입니다.

 더 나은 사진장비를 쓰면 시야율이 높을 뿐 아니라 화질이 한결 뛰어납니다. 화소수가 높은 사진장비를 쓸 때에는 사진 하나를 크게 만든다 하더라도 입자가 덜 깨지거나 안 깨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입자가 보드라운 사진이든 입자가 거친 사진이든, 늘 ‘사진다울 때에 사진’이라고 일컫습니다.


.. 전시장에 간다. 눈길을 끄는 사진 앞에 선다. 그것을 5분 동안 바라본다. 사진에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한다 ..  (15쪽)


 필름은 감도 50부터 감도 3200까지 있습니다. 필름은 감도 100만 있지 않습니다. 흑백필름을 쓰던 예전 사람들은 감도 400을 곧잘 썼다지만, 흑백필름 또한 감도 100이나 감도 200이 있으며, 감도 800이나 감도 1600이나 감도 3200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감도 100 필름을 400으로 올려서 찍습니다. 누군가는 감도 400 필름을 1600으로 올려서 찍습니다.

 입자가 보드라운 결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입자가 거친 느낌을 즐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풍경사진을 찍을 때에는 대형원판으로 찍어야 비로소 ‘먼 곳과 가까운 곳’이 작은 데까지 살아난다고들 말합니다. 틀림없이 맞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풍경사진이기 때문에 언제나 보드라운 결로 사진을 찍어야 하지 않아요. 풍경사진이든 얼굴사진이든 패션사진이든 다큐사진이든 한결같이 ‘사진’이에요. 사진이라는 테두리에서만 같은 울타리일 뿐, 저마다 홀가분하게 제 길을 걸을 노릇입니다. 다 같은 사람이라지만 다 같은 길을 걸어야 하지 않아요. 저마다 좋아하는 길을 저마다 제 힘과 슬기와 삶에 맞추어 걸을 뿐입니다. 농사꾼이 되고픈 사람하고 버스기사가 되고픈 사람이 똑같은 길을 걸을 까닭이 없어요.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고픈 사람이랑 학자나 교사가 되고픈 사람이 비슷한 길을 걸어야 하지 않아요. 돈이 많은 사람하고 돈이 적은 사람하고 꼭 같은 자리에 서야 하지 않습니다.

 무언가 더 누린대서 더 낫거나 좋은 삶이 아닙니다. 무언가 적게 누린대서 덜 떨어지거나 나쁜 삶이 아니에요. 일본사람 미우라 아야코 님은 몸이 아파 죽을는지 모르는 채 오래오래 병자리에 누워 지냈지만, 고마운 하늘 뜻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처음부터 고맙게 받아들이지는 못했다지만, 나중에 고맙게 받아들이면서 당신 삶이 달라졌다고 해요. 아픈 사람은 아프기 때문에 고맙고, 튼튼한 사람은 튼튼하기 때문에 고마운 노릇이에요. 혼자 살아가면 혼자 살아가는 대로 고맙습니다. 여럿이 복닥거리며 살아간다면 이대로 고맙겠지요.

 사진기는 1회용 사진기부터 여러 천만 원에 이르는 사진기까지 있습니다. 몹시 이름나고 아주 잘 팔린 사진기부터 그닥 많이 알려지지 못한 사진기까지 골고루 있습니다. 같은 회사 사진기라 하더라도 기종에 따라 빛느낌이나 질감이 조금씩 다르기 마련입니다. 같은 기계라 하더라도 다루는 사람 손길과 마음에 따라 빛느낌이나 질감이 조금씩 새로워지기 마련입니다.

 사진은 기계 단추만 누른대서 이루어지는 삶이 아닙니다. 기계 단추만 누른대서 이루어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계 단추를 누르는 사람 넋과 얼이 스미는 사진이에요. 기계 단추를 누르기까지 저마다 제 삶을 어떻게 보듬으며 살아왔는가 하는 꿈과 뜻이 서리는 사진입니다.

 곧, 내가 사랑하는 삶결 그대로 내가 빚는 사진결이 됩니다. 내가 좋아하는 삶무늬 그대로 내가 일구는 사진무늬가 돼요. 내가 보살피는 삶자락 그대로 내가 껴안는 사진자락이 될 테고, 내가 아끼는 삶길 그대로 내가 걸어갈 사진길이 되기 마련입니다.


.. ‘무엇’을 상상하려고 하면 우리는 그 말의 족쇄에 걸려 그 ‘무엇’밖에는 상상할 수 없게 된다 ..  (27쪽)


 인천에서 살던 때, 인천으로 ‘골목길 사진’을 찍으러 찾아오는 사람이 꽤 많았습니다. 이들을 데리고 인천 골목길 골골샅샅 몇 시간씩 누벼 보기도 했습니다. 누구든 혼자서 하루 예닐곱 시간을 천천히 걸어다닌다면 굳이 저 같은 사람하고 함께 골목길을 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굳이 저 같은 사람하고 함께 골목마실을 해야 하는 까닭이라면, 늘 오붓하거나 호젓하게 오래오래 골목동네를 즐기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골목길 사진을 찍으러 찾아오는 사람들은 늘 ‘골목 사진을 찍어야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더 깊은 골목을 봐야 한다!’라느니 ‘더 골목다운 골목을 봐야 해!’ 하는 생각에서 풀리지 못합니다.

 인천에서 살던 지난날, 저는 날마다 서너 시간씩 옆지기나 아이를 데리고 골목을 구비구비 거닐었습니다. 혼자서 거닐 때에는 날마다 대여섯 시간은 가벼이 걸었어요. 꼭 어느 골목 어느 모습 어느 이야기를 빚으려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따로 무슨 사진을 찍겠다거나 반드시 어디를 다녀 보거나 느껴 보려 하지 않았어요. 집식구하고 골목마실을 하는 동안 꼭 한 가지만 헤아렸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 터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하고 봄·여름·가을·겨울 맑거나 비오거나 눈오거나 바람부는 온갖 삶자락을 함께한다고 헤아렸습니다.

 골목이기 때문에 더 사람내음이 나지 않습니다. 골목이기 때문에 더 가난해 보이지 않습니다. 골목이기 때문에 더 따스한 삶터가 아닙니다. 골목이기 때문에 더 오래되거나 낡아 보이지 않습니다. 골목이기 때문에 더 사진거리가 될 만하지 않습니다. 골목이기 때문에 곧 사라질 추억어린 곳이 될 수는 없습니다.

 골목은 그저 골목입니다. 시골은 그예 시골입니다. 큰도시는 그냥 큰도시입니다.

 골목집도 집이고 아파트도 집입니다. 굴피집도 집이고 풀집도 집입니다. 흙으로 집을 짓고 짚으로 지붕을 이어야 가장 아름다운 집이 되지 않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집이란, 나 스스로 내 삶을 사랑하면서 아름답게 살붙이랑 어울리겠다는 꿈을 꽃피우는 집을 가리킵니다. 아파트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집일 수 있고, 아파트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사진거리가 됩니다.

 기찻길이든 뱃길이든 하늘길이든 땅밑길이든 골목길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오솔길이든 멧길이든 물길이든 바닷길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더 나은 모습이란 없습니다. 덜 떨어질 모습이란 없습니다. 예쁘장하다는 모델을 세워 놓고 찍어야 예쁜 얼굴 사진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값진 옷을 입히고 찍어야 패션사진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가난하거나 따돌림받는 사람들을 애써 찾아다니며 찍어야 다큐사진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사진은 언제나 사진이 될 때에만 사진입니다. 야구 경기를 하는 이들이 1등을 해야만 야구를 하고 막등이나 가운데쯤 자리할 때에는 야구를 안 한다 할 수 없습니다. 2등이나 3등쯤은 차지해야 비로소 농구를 하거나 배구를 한다고 하겠습니까. 1등을 했다지만 참말 1등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하겠습니까.

 사진은 늘 사진이어야 합니다. 사진으로 장난을 쳤으면 ‘사진 장난’이지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사진으로 돈벌이를 한다면 ‘사진으로 하는 돈벌이’이지 사진이 될 수 없습니다. 사진으로 이름값을 높인다든지 특종을 노린다든지 무슨 왜곡을 한다면 모두 ‘이름값 높이기’나 ‘특종 노리기’나 ‘왜곡 보도’에 머물 뿐, 사진이라는 데에 이르지 못해요.

 이리하여, 사진기자일 때에 사진을 찍는 기자라고 할 수 있기도 하지만, 사진기자이면서 사진 노릇도 기자 노릇도 못한다 할 수 있습니다. 사진작가라는 이름을 내건다지만 막상 사진을 빚는 사람 노릇을 못하는 사람이 대단히 많습니다.

 책을 읽었다 해서 다 책읽기가 되지 않습니다. 짝꿍하고 사귀며 혼인을 했대서 다 혼인살이가 아닙니다. 사랑이 없이 읽은 책이라면 앎조각만 갖다 맞추는 ‘지식쌓기’입니다. 사랑이 없이 맺은 짝꿍이라면 혼인이 아닌 ‘계약 동거’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사랑이 있을 때에 사진입니다. 사랑이 없는데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사랑을 담은 손길로 기계를 매만지며 일구는 사진입니다.


 (2) 두 번째 나오는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


 2007년 6월에 인천에서 ‘사진책 도서관’을 연 뒤부터 곧잘 ‘사진작가’나 ‘사진즐김이’를 만났습니다. 사진책 도서관이라는 곳을 열기 앞서까지는 ‘사진작가’를 만날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언제나 만나는 사람이라면 ‘사진즐김이’뿐이었습니다.

 2010년 6월에 인천살림을 모두 추슬러서 충주 멧골마을로 옮겼습니다. 도시에서는 더 달삯을 버틸 수 없을 뿐더러, 집식구들 몸을 생각해서 시골로 옮기기로 했습니다. 시골마을로 깊이 들어가니까 이제는 사진작가라 하든 사진즐김이라 하든 거의 만나지 않습니다. 이제는 언제나 집식구하고 어울리면서, 집식구하고 복닥이는 사진을 시골자락에서 혼자 즐깁니다.

 인천에서 지낼 때이든 충주 멧골마을로 들어온 뒤이든, 사진과 얽힌 사람을 드문드문 만나는 자리에서 ‘책 하나 소개’해 달라는 이야기를 듣거나 ‘책 하나 선물로 사 주는’ 때에는 으레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를 꼽곤 했습니다. 사진길을 처음 밟는 사람한테이든, 사진길을 퍽 오래 밟았다는 사람한테든,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만큼 사랑스러운 사진동무는 드물다고 느꼈습니다.

 이러던 어느 날, 2005년에 눈빛출판사에서 처음 나온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가 판이 끊어졌다는 이야기를 문득 듣습니다. 깜짝 놀랍니다. ‘참말인가? 이런 책이 참말 판이 끊어질 수 있나? 출판사 누리집에서 이 책이 꽤 잘 팔린다고 늘 밝혔다고 떠오르는데?’ 하고 생각하면서, 헌책방마실을 할 때에 이 책이 나오는가를 눈여겨보았습니다. 그러고는 두 번 이 책을 다시 장만합니다. 왜냐하면 새책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요. 2005년에 처음 나왔을 때에 장만한 책은 내 도서관 책시렁 ‘사진책 자리’에서 왼쪽 끝 즈음에 꽂고, 새로 장만한 책은 사진책 자리에서 오른쪽 끝 즈음에 떨어뜨려서 꽂습니다. 다른 한 권은 나한테 반가운 사진즐김이 한 분한테 선물로 드립니다.


.. ‘문화적 의미’를 담으려 하지 마라 … 사진이 찍혀지는 순간까지 그것과 함께 머물러야 한다 … 이름을 주지도, 상표를 붙이지도, 재 보지도, 좋아하지도, 증오하지도, 기억하지도, 탐하지도 마라. 그저 바라만 보아라 … 그러나 그저 보이는 게 찍힐 뿐이다 … 사진가가 열린 마음과 지성으로 사물을 충분히 관찰한 다음 그 주제를 온전한 매체로 기록할 때,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무언가가 튀어나올 가능성이 있다 … 사진의 이미지란 결코 창조물이 아니며, 무지개나 우박처럼 오히려 어떤 식으로 환경이 조성되었을 때 일어나는 자연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  (19, 57, 64쪽)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를 쓴 필립 퍼키스라는 분은 미국에서 사진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미국사람으로서 미국에서 사진길을 걸으려 하는 이들한테 도움말을 들려주려고 엮은 책이라 할 만합니다.

 일본사람이 사진강의노트를 썼다면 일본사람 눈길과 넋으로 일본 ‘사진 새내기’한테 도움말을 들려주려고 책을 엮을 테지요. 필립 퍼키스 님은 미국에 있는 대학교에서 사진을 가르친 기나긴 나날을 되짚으면서 책 하나를 갈무리했습니다.

 사진을 가르치던 첫무렵부터 이와 같은 사진강의노트를 내놓지는 못합니다. 사진을 오래오래 가르친 끝에 이와 같은 사진강의노트를 내놓습니다.

 여러 차례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를 읽었고, 2011년 2월에 새옷을 입고 다시 살아난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를 새삼스레 읽으며 곰곰이 생각합니다. 사진길을 처음 밟는 이한테나 사진길을 오래 밟았던 이한테나 더없이 도움이 될 만한 사진동무인 작은 책 하나이지만, 이 작은 책 하나를 알뜰히 여기며 사랑할 만한 사진쟁이가 한국에 얼마나 있을까 살짝 알쏭달쏭합니다.


.. 이 사진은 재미있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소름이 끼치기도 한다. 한 마디로 걸작이다. 오직 사진만이 표현할 수 있는 세계다. 이런 식의 은유와 애절함은 사진이라는 독특한 매체의 직접성에서 비롯된다 … 시를 쓰는 단 하나의 이유는 산문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있기 때문이다 … 누군가 바닐라 맛에 대해 최상의 표현으로, 지적이고 우아하게 설명하는 것을 듣는다고 치자. 나는 여전히 바닐라 맛을 모른다. 그러나 난생 처음으로 바닐라 맛을 본 후에 설명을 듣는다면, 그제서야 ‘맞아, 바로 이 맛이야’라며 무릎을 칠 것이다. 처음으로 그랜드 캐니언에 가 보거나 예술 작품을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다 … 그러나 이름이 없는 것은 상도 안 준다. 오로지 이름을 붙이는 것만이 관건이다. 읽기와 산수로만 지능이 평가된다. 감수성과 관찰력이 뛰어난 학생이 장학금을 받았던 적은 언제였던가? ..  (25, 35∼36, 66∼67쪽)


 사진길을 걷겠다고 하는 이들치고 ‘어떤 사진장비’를 갖출까로 망설이거나 근심하거나 마음쓰는 사람만 많을 뿐입니다. 말 그대로 ‘어떤 사진길을 걸을까’ 하는 대목에 생각을 기울이거나 마음을 쏟는 이가 퍽 드뭅니다.

 야구선수한테 ‘어떤 방망이’나 ‘어떤 공’이나 ‘어떤 장갑’을 쓰느냐고 여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방망이 가운데에도 더 낫다 하는 방망이가 있겠지요. 더 질기며 튼튼하고 손에 잘 맞는 장갑이 있을 테지요. 그런데, 어느 야구선수도 방망이 탓이나 장갑 탓을 하지 않습니다. 할 수 없겠지요.

 축구선수가 더 낫다 하는 축구신을 신고 더 낫다 하는 공을 발로 차야 더 이름을 드높이거나 더 멋지거나 더 신나게 축구를 할 수 있지 않습니다. 배구선수가 더 낫다 하는 공을 써야 배구를 더 잘 하겠습니까.

 100원짜리 연필이든 100만 원짜리 연필이든, 글을 쓸 때에 달라질 대목이란 없습니다. 좀 싸구려 연필이나 좀 싸구려 볼펜을 쓰면 손목이 더 아프거나 어깨가 더 결릴까 궁금합니다. 좀 싸구려 자판을 두들기면 글쓰기를 더 못할는지 궁금합니다.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똑같습니다. 사진을 찍든 노래를 부르든 똑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더 낫다 하는 장비가 있대서 글을 더 잘 쓰거나 그림을 더 잘 그리지 않습니다. 마음이 없고서야 글이고 그림이고 태어날 수 없습니다.

 장비는 좋다지만 마음이 없으면 사진이 태어날 수 없습니다. 무대가 좋다지만 마음이 없으면 노래가 태어날 수 없습니다.

 사진길을 걸으려는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한 가지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어떤 사진길을 걸으려 하는가’ 한 가지만 생각해야 합니다. 사진장비란 내 살림돈에 맞추어 장만할 뿐입니다. 사진기 만드는 회사는 참 고맙게도, 값싼 사진기부터 값진 사진기까지 골고루 만들어 베풉니다. 어느 사진기를 쓰든 어찌 되건 돈이 있어야 하지요. 돈이 없고서야 사진을 찍지 못해요. 그러나, 돈이 아주 넉넉하기 때문에 사진을 걱정없이 할 수 있지는 않아요. 돈이 참 없어 밥굶기를 자주 한다 하더라도 사진을 못 할 수 없어요. 내 마음가짐에 따라서 할 수 있는 사진일 뿐입니다.


.. 늘 같은 렌즈를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렌즈가 제공하는 시야에 익숙해지면 ‘전체’를 훨씬 빨리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프레임은 사진가가 조작한 시각이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 기술이 중요한 게 아니다. 문제는, 보고 느끼는 사진 속에서 사진의 내용이 되는 질감과 명도를 제대로 살릴 수 있도록 사진가의 섬세함을 기르는 일이다 … (내가 찍은 사진을 내 손으로 갈무리하는) 편집을 하는 까닭은 내 사진을 발전시키기 위한 훈련이 필요해서다 … 작품의 정신은 예술가의 내면으로부터 나오고, 창조적 행위는 우리가 숨을 쉬며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슬프고 기쁘고 지치고 죽는 그 모든 과정과 서로 맞물려 이루어진다 ..  (41, 81, 95, 114쪽)


 필립 퍼키스 님은 사진을 오래오래 가르쳤습니다. 사진을 오래오래 가르친 열매가 담긴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입니다. 저는 이 책을 2005년에 처음 만나고 2011년에 새책으로 다시 만나면서,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생각합니다. ‘사진은 가르칠 수 없고, 사진은 누구한테서 따로 배울 수 없다’고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생각합니다.

 모르는 노릇입니다만, 필립 퍼키스 님이 사진을 가르칠 수 있다고 여겼다면 ‘사진강의노트’가 아닌 ‘사진강의’라고만 이름을 붙이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무슨무슨 ‘예술개론’이라든지 무슨무슨 ‘이론과 실제’라는 이름을 붙이는 책이 있는데, ‘사진미학’이든 ‘영화미학’이든 있을 수 없다고 느낍니다. 주의주장이 아니라 느낌으로 받아들입니다. 사진은 ‘사진예술’이나 ‘사진문화’라는 덧옷을 입힐 수 없구나 싶어요. 글을 놓고 ‘글예술’이나 ‘글문화’라 할 수 없어요. ‘수필예술’이나 ‘소설문화’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저 글이고 수필이며 소설입니다. 사진은 그저 사진이지 사진 앞에 무슨무슨 꾸밈말을 붙이거나 사진 뒤에 어떤저떤 덧말을 달 수 없습니다.

 패션사진을 한다는 사람들은 패션도 사진도 하지 않습니다. 오직 돈벌이만 합니다. 다큐사진을 한다는 사람들은 다큐도 사진도 하지 않습니다. 오직 구경꾼 노릇만 합니다. 누군가 예술사진을 한다고 말한다면 이이는 예술도 사진도 못 하거나 안 하는 셈입니다. 예술은 예술이고 사진은 사진입니다. 패션은 패션이고 사진은 사진입니다. 패션을 하면서 사진을 즐길 수 있고, 사진을 하면서 패션을 즐길 수 있어요. 다큐를 이루면서 사진을 받아들일 수 있고, 사진을 하면서 다큐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가르칠 수 없는 예술이고, 배울 수 없는 예술입니다. 문화를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습니까. 그저 살아낼 뿐인 문화이자 예술입니다. 사랑을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습니까. 그저 사랑할 뿐인 내 삶입니다.

 사진은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한테 가르치지 못합니다. 사진을 배우겠다며 대학교에 갈 수 없고 사진학교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필립 퍼키스 님은 대학 강단에서 오래도록 몸담으면서 바로 이 대목, ‘사진은 가르칠 수 없구나’ 하고 깨달으면서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를 썼다고 느낍니다.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없는 사진인 줄을 사람들이 알아채기를 바라면서 이 책을 썼다고 느껴요. 그래서, 이 책은 필립 퍼키스 님이 ‘대학교 사진 강단’에서 물러날 즈음이 되어서야 비로소 내놓을 수 있습니다.

 사진은 내가 살아내는 하루만큼 그날그날 찍는 이야기입니다.


.. 세월이 흐르면서 사진도 돈벌이로 부상했다. 사진가가 죽거나, 대형 사진이거나, 비평가들에게 쓸거리가 풍부한 내용일 때 값은 더욱 올라갔다 … 권세 있는 자들이 사진을 예술이라고 선고한 후부터 많은 사진가들이 예술 안에서 사진의 개념을 확장하려는 노력이나 예술로서의 사진에 대한 진지한 고민보다는 그저 예술처럼 보이는 그럴싸한 사진을 만드는 데에만 죽을힘을 다해 애쓰고 있다. 머릿속에 든 생각이 점점 빈약해질수록 사진의 크기는 점점 커져만 간다 … 희한하게도 새로운 기술이 발전하고 접근이 용이해질수록 플라티늄, 팔라디움, 카브로, 사이아노타이프 같은 ‘과거의’ 기법들이 기승을 부린다 … 인물 사진의 최신 경향은 영리하고 재능 있고 의욕에 찬 사진가들이 영민한 머리로 온갖 재주를 부려 사람들을 찍는 것이다. 특히 최근의 경향은 얼굴의 땀구멍이 불쾌하게 보일 정도로 가깝게 촬영한다(어떤 감정이든 불러만 오면 된다는 식이다). 지금 잘나가는 인물 사진가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유혹하는 방식에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는 패션 사진가들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  (59, 91, 102, 109쪽)


 사진이 처음 태어나던 지난날에도 사람들은 사진을 했고, 사진이 널리 퍼진 요즈음에도 사람들은 사진을 합니다. 옛사람이 더 빼어난 사진을 하지 않았습니다. 새사람이 더 훌륭한 사진을 하지 않습니다. 예전 사람이건 요새 사람이건, 그저 사진을 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사진을 하건 사진을 즐기건 사진을 누리건, ‘내가 좋아하는 사진을 내 삶에 걸맞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나눈다’고 하는 마음을 잊거나 처음부터 안 품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 시인에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오늘 시를 몇 편이나 쓰셨오?” … 결코 ‘순수’사진이라고 불릴 만한 사진은 한 장도 없다 … 모든 사진은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있으며, 모든 사진은 사진가가 결정을 내린 순간 찍혀지기 때문에 얼마간 사진가의 의도가 ‘표현된’ 것이다. 선을 그어 놓고 한쪽만을 취하도록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해악이다 ..  (93, 121, 125쪽)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는 사진길을 걷는다는 사람들한테 나누어 주는 선물입니다. 사진을 찍는 내 삶이 어떠한 삶인가를 저마다 스스로 즐거이 돌아보자는 뜻으로 나누어 주는 선물입니다.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사진을 하는 마음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글을 쓰는 마음을 되새길 수 있습니다. 초·중·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일을 맡은 사람이라면 ‘교육이란 무엇이고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마음을 짚을 수 있습니다. 집에서 살림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는 동안 살림하는 마음을 깨달을 수 있어요.

 우리가 저마다 살아가는 터전에서 망설여야 할 대목이라면 다문 한 가지입니다. ‘날마다 새롭게 맞이하는 내 하루를 오늘은 얼마나 더 사랑스럽거나 즐겁거나 신나게 맞아들이려 하는가’입니다.

 삶은 덜도 더도 아닙니다. 사랑은 덜도 더도 아닙니다. 사람은 덜도 더도 아닙니다. 사진은 덜도 더도 아닙니다. 삶은 삶이고, 사랑은 사랑이며, 사람은 사람이겠지요. 사진은 사진입니다.

 좋은 삶·사랑·사람을 이야기하는 책 하나를 알뜰히 여미어 되살린 박태희 님이 참 고맙습니다. (4344.4.26.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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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海天空下(シャンハイのそらのした) (大型本)
英 伸三 / 日本カメラ社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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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부사 신조' 사진책은 모두 두 가지가 뜬다. 내가 바라는 이 책은 없을 뿐더러, 하나부사 신조 님한테 대표가 될 만한 다른 사진책 또한 안 뜬다. 그래도, 이 사진책에 살짝 걸어 놓으면서, 이이가 보여주는 사진길이 무엇인가를 밝혀 보고 싶다. 하나부사 신조 님 다른 사진책들을 구경할 수 있는 날이 있을까...

 

어린이 사진책으로 물삶을 보여주는 마음
어린이가 읽는 사진책 3 : 하나부사 신조(英 伸三), 《みず》(福音館書店,1982)



 사람은 밥을 먹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한국사람이나 일본사람이나 중국사람, 웬만한 아시아사람은 밥을 먹으며 목숨을 잇습니다. 서양사람은 빵을 먹으며 목숨을 잇는다 할 만하겠지요. 그런데 막상 한국에서는 ‘목숨을 잇는 고마운 밥’ 이야기를 다루는 글책이나 그림책이나 사진책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더 맛나거나 멋지게 차리는 밥’을 ‘요리(料理)’라는 이름으로 붙인 책만 있을 뿐입니다. 한자말 ‘요리’ 말뜻을 살피면 그저 ‘밥하기’일 뿐이지만, ‘요리책’은 만들어도 ‘밥하기책’이나 ‘밥책’은 만들지 못하는 이 나라 어른들입니다.

 날마다 한 끼이든 두 끼이든 세 끼이든 네 끼이든 밥을 먹는 한국사람입니다. 흰쌀로 짓든 누런쌀로 짓든 보리쌀이나 온갖 곡식으로 짓든, 밥을 먹는 한국사람입니다. 밥짓기야 누가 누구한테 따로 어찌저찌 가르치지 않아도 다 할 만하다 여길는지 모릅니다. 요즈음은 전기밥솥에 물 얼추 맞춰 붓기만 하면 알아서 밥이 다 된다 할 만합니다. 찰밥이든 오곡밥이든 감자밥이든 쑥밥이든, 그냥 전기밥솥이 해 준다 할 수 있어요.

 더 많은 기계를 쓰고 새로운 전자제품을 쓰면서 집집마다 다 다르게 꾸리던 살림살이가 사라졌다 할 수 있습니다. 내 손으로 논을 일구고 가을걷이를 해서, 낟알을 털고 방아를 찧은 다음, 키질과 조리질을 거쳐, 불린 쌀을 불세기를 살피면서 짓던 밥이 아니기에, ‘밥을 하는 흐름’을 애써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거나 사진으로 찍을 까닭이 없을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하나 품을 들여 밥을 하든, 전기밥솥을 쓰든, 우리가 오늘 살아가는 밥삶 모습을 고스란히 이야기 한 자락으로 담을 수 있을 때에, 우리 집부터 내 아이한테 ‘밥이란 이렇게 해서 고맙게 한 그릇을 비울 수 있단다’ 하고 사랑을 물려주리라 생각합니다. 밥때가 되었으니 꼭꼭 씹어 얼른 흘리지 말고 먹으라 하는 데에서는 사랑을 물려주지 못하겠지요. 냄비밥으로 밥을 하든 전기밥솥으로 밥을 하든 무쇠솥을 쓰든, 밥솥에 안치기까지 쌀이 어떤 길을 거쳤고, 쌀이 되기 앞서 벼였으며, 벼이기 앞서는 모요, 모로 내기 앞서는 ‘벼 씨앗’인 볍씨인 줄을 헤아리는 흐름을 어른부터 스스로 느끼고 아이와 함께 살피면서, 이야기 한 자락 잃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밥하기와 맞물려 설거지하기로도 얼마든지 깊고 너른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밥하기에서는 온갖 반찬을 하는 매무새라든지, 부엌살림 쓰는 이야기가 더 태어납니다. 집안을 구석구석 쓸고닦는 이야기도 따로 있고, 옷가지를 빨래하는 이야기도 따로 있으며, 옷가지를 손질하거나 마련하는 이야기도 따로 있어요. 살림은 예쁘장한 그림으로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날마다 오랜 겨를을 많은 품을 들여 따사롭게 사랑하면서 어깨동무하는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한국에서는 가장 밑바탕이 될 살림살이부터 글로든 그림으로든 사진으로든 다루지 못하거나 안 다루기 때문에 다른 문화이든 예술이든 교육이든 정치이든 환경이든 제자리를 잃거나 잊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사진책 《みず(물)》(福音館書店,1982)를 넘기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합니다. 일본 복음관서점에서 “かがくのとも傑作集(과학동무 빛나는 책)”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열아홉째 책인 《みず》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사진쟁이 가운데 하나인 ‘하나부사 신조(英 伸三)’ 님이 빚은 작품입니다. 한국에서는 손꼽히는 사진쟁이가 ‘어린이 사진책’을 내는 일이 거의 없거나 아주 드물거나 좀처럼 찾아볼 수 없습니다만, 일본에서는 손꼽히는 사진쟁이들이 곧잘 ‘어린이 사진책’을 내놓습니다. 사진감으로 ‘어린이’를 삼는 이들이 곧잘 ‘어린이부터 함께 즐기는 사진책’을 마련해요.

 사람은 밥과 함께 물이 없으면 목숨을 잇지 못합니다. 어린이 사진책 《みず》는 바로 물을 다룹니다. 사람한테 없어서는 안 되는 더없이 고마운 님은 물을 다룹니다. 사람한테 반드시 있어야 할 첫째를 꼽자면 바람이 되겠지요. 물을 안 마시고 몇 날을 버틴다고 하더라도 숨을 들이마시지 않고는 몇 분조차 버틸 수 없을 테니까요. 여느 사람은 몇 분이 아닌 일 분조차 못 버틸 테고요.

 그러면, 한국에서는 ‘바람’을 다루는 사진책이나 그림책이나 글책이, 또 ‘물’을 보여주는 사진책이나 그림책이나 글책이, 여기에 ‘밥’이라든지 ‘옷’이라든지 ‘집’을 다루는 사진책이나 그림책이나 글책이 얼마나 될까요. 곁에서 늘 마주하거나 보듬거나 살피거나 돌봐야 할 살림살이를 책으로 얼마나 담아낼까요.

 연필이나 종이나 신발이나 젓가락이나 가방은 얼마나 잘 살피는 한국사람이라 할 만할는지요. 나무나 풀이나 꽃이나 짐승이나 들판이나 논밭이나 멧자락이나 바다나 소금밭은 어느 만큼 알뜰히 돌아보는 한국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요. 저잣거리나 골목길이나 바닷마을이나 동굴이나 숲은 어떻게 바라보는 한국사람이라 할는지요.

 사진책 《みず》는 아이들이 제 둘레에서 마주하거나 느낄 물을 차근차근 보여줍니다. 사진책 《みず》는 ‘과학동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책 가운데 하나이지만, 애써 ‘과학’이라는 틀에 맞추지 않아도 될 사진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과학으로 바라보자면 과학이지만, 삶으로 바라보면 삶입니다. 고마운 님으로 바라보면 고마운 님이요, 아름답거나 즐거운 놀이로 바라보면 아름답거나 즐거운 놀이예요.

 후두두둑 떨어지는 빗물을 느낍니다. 꽁꽁 언 얼음을 느낍니다. 냇물에 고개를 처박고 물속을 들여다봅니다. 도시에서는 따로 헤엄터를 찾아갑니다. 물고기가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바닷가에서 바닷물이랑 신나게 어우러집니다. 돌멩이 하나를 못물에 살짝 던져 물결이 이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목마른 사람과 고양이가 목을 축입니다. 사람뿐 아니라 골목고양이도, 비둘기도, 까치도, 참새도, 골목개도, 들짐승도, 새앙쥐도, 물을 마시지 않고는 목숨을 잇지 못합니다. 과학으로 들여다보기 앞서 아주 살가운 내 삶인 물입니다.

 고드름에 볼을 댑니다. 물이 얼어 얼음이 됩니다. 얼음이 녹아 봄이 되면 따사로운 날씨에 따라 숱한 푸나무가 봄비를 맞으며 새싹과 새잎을 틔웁니다. 물을 머금으면서 햇볕을 쬐고, 물을 맞아들이면서 바람을 쐬며, 물과 함께 밥을 먹습니다.

 아무래도 오늘날에는 물을 맑고 시원하게 얻는 삶보다는 돈을 더 많이 오래 벌 수 있는 삶을 찾아 보금자리를 마련하거나 일자리를 얻을밖에 없겠지요. 수도물이 못미더우면 먹는샘물 사다 마시거나 정수기를 달면 된다고 여기겠지요. 돈이 있으면 프랑스에서 날아온 물을 사다 마실 수 있고, 평창에서든 제주에서든 마음껏 사다가 쓸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내 몸을 이루는 2/3가 물이건 말건, 내 몸 어느 한구석도 돈으로 이루어지지 않건 말건, 물을 물 그대로 바라보거나 맞아들이지 못하는 요즈음 삶터입니다.

 생각해 보면, 한국땅에서는 물을 물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어른투성이입니다. 삽질을 막자는 목소리가 드높습니다. 그러나 커다란 삽질을 막는다 한들, 커다란 도시에 깃든 아파트나 살림집마다 내놓는 생활폐수는 어떻게 할까요. 한국에 가득 있는 원자력발전소와 화력발전소에서 내놓는 열폐수는 어떻게 하나요. 공장마다 수없이 쏟아내는 공장폐수는 어쩌지요. 2013년쯤이면 한국땅 자동차 보유대수는 2000만 대가 넘어선답니다. 이 어마어마한 자동차마다 내뿜는 배기가스는 이 나라 물을 얼마나 맑거나 시원하게 지켜 줄까요. 삽질을 막는다고 물길을 살리지 못합니다. 원자력발전소를 줄이거나 없앤들 내 살림집 전기 씀씀이를 줄이지 않거나 내 물건 씀씀이를 가누지 않고는 열폐수와 공장폐수로 더럽혀지는 물길은 똑같이 더러워지고 맙니다. 돈을 들여서 한강·금강·낙동강·영산강을 살리지 못하듯, 돈을 들여서 더 맑거나 시원한 물을 마실 수는 없어요. 돈을 더 들인다 해서 아이가 더 똑똑하게 자라며 똑똑한 어른으로 홀로서기를 하지 않습니다.

 아이한테는 사랑보다 고마운 손길이 없습니다. 들과 멧자락과 바다와 하늘과 흙에는 돈이 아닌 사랑어린 손길로 살포시 보듬는 마음결이 없다면 맑은 넋이 깃들 수 없습니다. 사진책 《みず》는 아이들한테 과학 지식을 들려줄 생각이 없습니다. 사진책 《みず》는 아이들한테(또 이 사진책을 아이들한테 읽힐 어른들한테) 물이란 참말 무엇이고 물이란 우리 곁에 어떻게 있으며 물이란 내 삶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사랑과 믿음으로 살펴보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4344.4.2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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埿まみれの死―澤田敎一ベトナム寫眞集 (講談社文庫) (新裝版, 文庫)
澤田 サタ / 講談社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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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흙투성이 사진을 찍으며 진흙투성이 죽음을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4] 사와다 교이치(澤田敎一), 《泥まみれの死》(講談社,1985)



 구와바라 시세이 님이 쓴 《보도사진가》(타임스페이스,1991)를 읽으면 사와다 교이치(澤田敎一) 님 이야기가 짤막짤막 나옵니다. 두 사람이 동갑내기라 했으니 사와다 교이치 님 또한 1936년에 태어난 셈인데, 사와다 교이치 님은 1970년 10월 28일에 베트남에서 숨을 거둡니다. 미국이 베트남으로 쳐들어가서 싸움이 터진 뒤로 일본 사진기자는 모두 열다섯 사람이 숨을 거두었다 했는데(미국 사진기자는 스물한 사람이 숨을 거두었답니다), 사와다 교이치 님도 열다섯 가운데 하나입니다. 생각해 보면, 베트남전쟁 때에 죽은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구와바라 시세이 님도 베트남전쟁 때에 베트남에 가서 사진을 찍었답니다. 사진을 왕창 찍고는 도쿄로 돌아와 사진잔치를 벌이며 “약간 자랑스러운 말투로 설명을 덧붙였다(《보도사진가》 178쪽)”고 했는데, 구와바라 시세이 님은 사진잔치 강연을 마치고 내려오며 사와다 교이치 님 얼굴을 보고는 “자신의 우쭐대던 태도가 부끄러워졌다”고 밝힙니다. 이때 사와다 교이치 님은 구와바라 시세이 님과 눈이 마주쳤을 때에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그저 싱긋 웃기만 했다는데, 당신은 구와바라 시세이 님이 뒷날 펴낸 《보도사진가》라는 책을 볼 수 없었을 테니, 이이가 남우세스러워했는지 어떠했는지는 몰랐겠지요.

 이러거나 저러거나 사와다 교이치 님은 베트남전쟁 때에 온몸을 던져 사진을 찍었고, 온몸을 던져 찍은 사진에는 숱한 상장이 돌아왔습니다. 사와다 교이치 님은 숱한 상장을 받았으나 한결같이 베트남전쟁터로 뛰어들어 사진을 찍습니다. 이 전쟁이 끝나지 않고서야 사와다 교이치 님 사진 또한 그칠 수 없었겠지요. 아니, 이 전쟁이 끝난다면, 전쟁 뒤끝 베트남 삶터와 사람과 삶자락을 살며시 사진으로 담았겠지요.

 서른다섯이 될 무렵 더는 사진기 단추를 누를 수 없게 된 사와다 교이치 님은 당신 젊은 나날을 미국군하고 함께 움직이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일본사람으로서 미국군이 아닌 ‘해방군’하고 함께 움직이면서 사진을 찍을 수 없겠지요. 오늘날 미국이 이라크로 쳐들어갈 때에도 미국군하고 함께 움직이면서 사진을 찍어야지, 이라크군하고 함께 움직이면서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이라크군하고 함께 움직이며 사진을 찍는 기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아니 뼛가루 하나 남기지 못하는 채 언제 죽었는 지조차 모르며 죽고 말 테지요. 애써 찍은 사진은 하나도 빛을 못 볼 테지요.

 베트남에서 싸움판이 끝난 지 꽤 긴 해가 흘렀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미국군하고 함께 움직인 사진기자’ 사진만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베트남 해방군’하고 함께 움직인 사진기자 사진은 좀처럼 들여다보기 힘듭니다. 어쩌면 베트남 해방군은 숱한 사진기자를 거느리기 힘들었다 할 만한지 모르며, 이동안 베트남 해방군은 굳이 사진을 안 찍었는지 모르지요. 한국땅에서는 알기 힘들지만, 베트남에 가 보면 해방군 자리에서 사진을 찍어 이룬 열매를 어느 만큼 맛볼 수 있을는지 모르고요.

 사진책 《泥まみれの死》(講談社,1985)를 펼칩니다. 《진흙투성이 죽음》 또는 《고달픈 죽음》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사진책은 사와다 교이치 님 옆지기인 ‘사와다 사타(澤田サタ)’ 님이 엮어서 내놓습니다. 당신 옆지기가 떠난 지 열다섯 해가 지난 어느 날 내놓은 《泥まみれの死》에는 미국군과 함께 움직이면서 미국군 테두리에서 느낀 베트남전쟁을 찬찬히 보여주기도 하지만, 미국군 테두리에서 바라본 베트남전쟁이라기보다는 ‘전쟁이란 무엇인가?’와 ‘전쟁터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는가?’와 ‘전쟁터 군인은 어떠한 삶인가?’를 넌지시 보여줍니다.

 미국군이든 해방군이든 잠을 자고 밥을 먹습니다. 미국군이든 해방군이든 총소리가 멎을 때에는 두 다리 뻗으며 쉬거나 노래를 부릅니다. 총에 맞아 다치면 아파서 소리를 지르거나 눈물을 흘립니다. 총알이 머리나 염통을 꿰뚫었으면 그만 고개를 픽 떨굽니다. 총알이 빗발치면 미국군이든 해방군이든 탱크 뒤이든 건물 뒤이든 바싹 달라붙으며 두려움이 덜덜 떱니다.

 미국군과 함께 움직이면서 전쟁사진을 찍은 사와다 교이치 님이기 때문에 ‘미국군이 포로를 어떻게 다루는가’를 살며시 엿봅니다. ‘해방군을 도와주었다’는 빌미 때문에 애꿎게 죽은 사람들 모습을 일본 사진기자 눈길로 바라봅니다. 총에 맞아 죽어야 하는 가녀린 베트남사람, 미국군 주먹에 얻어맞는 슬픈 베트남사람을 일본 사진기자 눈매로 함께 들여다봅니다. 손바닥만 한 사진책 겉에는 장갑차 꽁무니에 밧줄을 이어 ‘해방군 한 사람 주검’을 질질 끄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박습니다.

 베트남에 간 미국이라는 나라 군인은 누구를 왜 어떻게 죽여야 했을까요. 평화를 지키는 일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될까요. 자유를 찾는 일이 사람을 괴롭히거나 주검을 갖고 노는 일이 될까요.

 일찌감치 숨을 거둔 사와다 교이치 님은 더 말할 수 없지만 더 사진을 찍을 수도 없습니다. 죽은 이는 말이 없습니다. 죽은 이 곁에 있었거나 죽은 이를 살짝 스쳤던 사람들이나 죽은 이 사진을 본 사람들이 ‘새로운 말’을 남길 뿐입니다.

 사와다 교이치 님은 죽고 나서 ‘로버트 카파 상’을 받았다는데, 이 상이란, 이 이름이란, 이 훈장이란, 참 덧없구나 싶습니다. 사와다 교이치 님이 로버트 카파 님보다 일찍 태어나 일찍 죽었으면 ‘사와다 교이치 상’이 생겨서, 로버트 카파 님이 ‘사와다 교이치 상’을 받는 사람이 되지 말란 법이 없으니까요.

 사진기자 사와다 교이치 님은 진흙투성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괴로우며 고달픈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사와다 교이치 님을 비롯해 수많은 베트남사람과 숱한 미국사람이 베트남 들판과 숲과 도심지에서 진흙투성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너나없이 괴로우며 고달픈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전쟁은 누가 왜 일으켰을까요. 전쟁이 일어난 동안 누가 돈을 벌었을까요. 전쟁터에 찾아간 군인은 왜 월급을 받아야 할까요. 사람을 죽이는 짓을 하는데에도 돈을 벌 수 있다니 이 무슨 평화요 자유요 민주라 할 만한가요. 미국은 군수산업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들였으며 오늘날에는 또 얼마나 돈벌이를 하는가요. 미국이 벌인 싸움터에 종군기자로 뛰어든 사람들이 찍은 사진은 우리들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는가요. 전쟁사진이란, 전쟁터를 보여주는 사진이란, 보도사진이란, 보도사진가란, 목숨을 바치며 총알받이가 되어 숨을 거둔 사진기자가 남긴 사진이란, 오늘날 한국땅 여느 도시내기들한테 무슨 이야기로 아로새겨질 수 있을까요. (4344.4.16.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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