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카메라는 39.5℃ - 패션 사진가 박경일의 라이프 포트폴리오
박경일 글.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패션 없는 한국에서 패션사진 찍자니까
 [찾아 읽는 사진책 19] 박경일, 《나의 카메라는 39.5℃》(랜덤하우스코리아,2007)



 패션사진을 하는 박경일 님은 《나의 카메라는 39.5℃》라는 책에서 “티베트나 몽골의 원주민들이 정말 순박한 얼굴로 민속 옷을 입고 찍은 다큐멘터리 사진을 보면서 나는 그 사람들의 인생이 보일 뿐이지 그걸 찍은 작가의 인생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간혹 그런 사진을 보며 작가의 인생관이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정작 나를 사로잡는 건 카메라를 응시하는 그들의 눈빛일 뿐이다(17쪽)” 하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한편으로는 옳습니다. 왜냐하면, 티베트 민속 옷을 입은 사람들을 찍는다 해서 이런 사진이 ‘다큐멘터리 사진’이 아니기 때문이고, 다큐멘터리 사진이 아닌 사진을 찍으면서 다큐멘터리 사진인 줄 내세우는 작품들은 그다지 우리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니까, 박경일 님 말처럼 ‘사진기를 바라보는 그 사람들 눈빛’이 보일 뿐입니다.

 참다이 다큐멘터리 사진이라 할 다큐사진은 스스로 다큐사진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진이면서 갈래를 나누자면 다큐사진이 될 뿐입니다. 먼저 사진답지 않고서야 다큐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제대로 사진답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사진은커녕 다큐사진이 못 되고, 이런 사진으로는 아무런 이야기를 건네지 못합니다.

 참다이 사진이면서 다큐사진으로 갈래를 나눌 만한 사진을 들여다보면, 이 사진을 읽으면서 이 사진을 찍은 사람 마음과 삶을 함께 읽습니다. 애써 이러한 사진을 찍는 사람 손길과 다리품을 읽고, 이러한 사진을 우리한테 보여주려는 사람 삶과 꿈을 읽습니다.

 박경일 님은 “내 사진이 단순히 예쁘다거나 멋지다는 개념으로 불리는 패션사진이 아니라 그 안에 분명한 스토리가 있고 나만의 아이디어가 녹아 있는 사진이 되기를 바란다(33쪽).”고 말합니다. 곧, 이야기가 녹아들지 않으면 ‘사진이 아니’요 ‘사진이 아니면서 패션사진 또한 아니’라는 셈입니다.

 옳게 찍은 다큐사진이 아니라면, 다큐멘터리라는 이야기를 느끼지도 못할 뿐 아니라, 사진으로서도 따분하거나 엉터리이거나 뒤틀립니다. 옳게 찍은 다큐사진이어야 다큐멘터리 이야기뿐 아니라 사진으로서도 즐거우며 아름답습니다. 그러니까, 박경일 님이든 다른 누구이든, 패션사진으로서 패션사진다웁기 앞서 사진으로서 사진다워야 합니다.

 사진으로서 사진다우려면 ‘내 이야기가 깃든 사진’이어야 합니다. 내 이야기가 깃든 사진이란 ‘내 삶이 깃든 사진’입니다. 내 이야기와 내 삶을 사진으로 깃들일 때에 ‘사진이 태어나’면서 ‘갈래를 나눌 때에 패션사진이기’도 합니다.

 이리하여, 박경일 님은 “처음 카메라를 메고 길거리를 헤매고 다니기 시작하면서 깨달은 것은 어떻게 하면 사진을 잘 찍는가가 문제가 아니란 것이었다(34쪽).” 하고 느낍니다. 사진을 잘 찍는다 해 보았자 ‘사진에 내 이야기가 담기’지 않습니다. 그저 예쁘장한 사진이 나올 뿐입니다. 길거리를 헤매면서 그럴듯한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대서 ‘사진에 내 삶이 스미’지 않습니다. 그저 그럴듯한 모습을 그럴싸하게 보여줄 뿐입니다.

 사진은 잘 찍은 작품이 아닙니다. 잘 찍은 작품이래서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사진 가운데 잘 찍은 작품이 있기도 하지만, 잘 찍는 틀이나 솜씨나 매무새가 사진으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이야기가 없고 삶이 깃들지 못한다면 사진도 문화도 예술도 삶도 아닙니다.

 박경일 님은 “내츄럴한 사진은 자연스러운 느낌만 잘 살면 약간의 허점도 문제되지 않고 도리어 인간적인 매력으로 다가와 친밀감을 줄 수 있지만, 테크니컬한 사진은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모델의 얼굴에 난 잡티 하나까지 사진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망쳐 버리기 때문이다(50쪽).” 하고 말하지만, ‘내츄럴’이건 ‘테크니컬’이건 조그마한 잡티 하나 때문에 사진이 망가지거나 흔들립니다. 왜냐하면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담으려고 뜻하지 않은 모습이 사진으로 스며들면서 뜻밖에 놀라운 사진이 될 수 있다지만, 내가 담으려고 뜻하지 않은 모습이 엉뚱하게 스며든 나머지 내 이야기를 보여주는 사진이 안 되고 맙니다. 그래서 ‘내츄럴’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잡티 하나’ 때문에 다시 그 자리로 가서 다시 그 빛과 이야기가 살아날 때까지 기다립니다. ‘테크니컬’ 사진이기 때문에 잡티 하나로 사진이 망가지지 않습니다. ‘사진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 빈틈이나 어수룩한 데가 드러날 수 없습니다. 사진을 하는 사람은 한복판에 담는 모습이든 구석퉁이에 넣는 모습이든 모두 살피며 보듬어 껴안는 매무새여야 합니다. 사진은 그저 사진이지, ‘내츄럴’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매력’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테크니컬’ 사진 또한 사람이 이루는 사진이기에, 이러한 사진에도 ‘사람다운 느낌’을 담지 않고서야 즐거이 마주할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마땅한 노릇입니다만, “어떤 순간을 기다려 포착해 내는 것만으로는 내가 그리고 싶고 말하고 싶은 것을 평생 담아낼 수 없(61쪽)”습니다. 나는 내가 말하고 싶은 대로 내 삶을 꾸려야 합니다. 나는 내가 그리고 싶은 대로 내 삶을 일구어야 합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대로 내 삶을 꾸리다 보면, 사진기를 쥔 내 앞에 ‘내가 담아서 그리고픈 이야기가 깃든 모습이 어느 한때에 환하게 나타납’니다. 나는 이렇게 내 눈앞에 나타난 환한 모습을 놓치지 않고 사진으로 옮길 수 있어야 합니다. 기다린다고 해서 나타나는 환한 모습이 아니라, 내가 이 땅에서 내 삶을 일굴 때에 시나브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다시금 마땅한 노릇인데, “정 노출대로 찍으면 매번 달력 사진 같은 것밖에 나올 수가 없다(85쪽).”는 말은 틀립니다. 노출을 제대로 해서 찍는다고 왜 ‘달력 사진’일까요. 게다가 ‘달력 사진’이 노출을 ‘정 노출’로 할까요? 게다가 ‘정 노출’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사진 노출’이란 사진기를 쥔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느 사람은 더 밝게 볼 수 있고, 어느 사람은 더 어둡게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찍은 사진을 종이에 뽑으려고 사진관에 맡기면 으레 ‘사진이 너무 어둡게 나올 듯한데?’ 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사진관에서는 제 사진을 ‘밝게 보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제 눈에는 제가 찍은 사진빛 그대로 제 ‘노출’이니까,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됩니다. 제 사진을 보는 분 가운데에는 ‘너무 어두운 빛’이라 하는 사람이 있지만 ‘딱 좋은 빛’이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제가 살아가는 대로 제 빛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제가 바라보는 빛이 가장 옳거나 좋거나 낫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제 빛은 제 빛을 뿐입니다. 바른 노출도 그른 노출도 넘치는 노출도 모자란 노출도 아니에요. 우리들이 사진기를 쥐며 ‘나한테 맞는 노출’을 찾자면, ‘내가 바라보는 삶과 사람과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알아채야 합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어릴 때부터 창의성과 동떨어진 교육을 받고 자랐다. 사진의 경우만 보더라도 전공학과에 들어가기 전부터 학원에서 스파르타 식 교육을 받는다. 학교에 가서 뭘 배울까 싶을 정도로 대학입시만을 위해 공부한다(84쪽).”고 하니까 ‘정 노출’이니 하고 생각하고야 맙니다.

 그런데 내 사진이 ‘달력 사진’이면 어떻습니까. 내 사진이 ‘예술사진’이어야 아름다운 사진일까요. 내 사진이 ‘일 등급 사진’이 될 때에 비로소 나는 내 사진길을 잘 걸었다 할 만하겠습니까. 내 사진을 남들이 어떻게 재거나 따지든, 내 사진에 내 이야기를 소롯이 담아 내 삶을 어여삐 보듬는 나날이라면, 내 사진길은 씩씩하며 당차고 기쁩니다.

 박경일 님은 “8×10 카메라로 만든 시리즈. 무거운 카메라만큼이나 모델도 나도 경직되어 있는 게 느껴진다(177쪽).”고도 말합니다. 무거운 사진기를 쓰니까 모델이나 사진쟁이가 무거워질까요. 가벼운 사진기를 쓰면 모델이나 사진쟁이가 가벼워지나요. 값나가는 사진기를 쓰면 모델이나 사진쟁이는 값나가는 사람으로 탈바꿈하는지요. 싸구려 사진기를 쓰면 모델이나 사진쟁이는 싸구려로 나동그라지는가요.

 은행원이었다가 사진작가가 되었다는 박경일 님 사진삶을 담은 책 《나의 카메라는 39.5℃》 책날개 첫머리에는 박경일 님을 소개하면서 “대한민국 최고의 패션 사진가가 된 은행원”이라는 말을 붙입니다.

 ‘최고’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사진 찍는 사람 가운데 ‘최고’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진쟁이는 어떻게 사진을 해야 ‘첫손가락’이 될까요. 어떤 패션사진을 찍어서 선보여야 ‘으뜸’이 되는지요.

 사진을 잘 찍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사랑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만 있습니다. 사진이 돋보인다거나 사진이 놀랍다 할는지 모르나, 돋보이는 사진이 좋은 사진이 아니며, 놀라운 사진이 대단한 사진이 아닙니다.

 사진은 사람입니다. 사진은 사랑입니다. 사진은 삶입니다. 이도 저도 아닙니다. 사진은 사람인 까닭에 ‘최고라 일컫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진은 사랑이니까 ‘첫손가락 꼽는’ 사랑이 없습니다. 사진은 삶인 만큼 ‘으뜸으로 여길’ 삶이 없습니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담아 좋아하는 사진이 태어납니다.

 박경일 님은 《나의 카메라는 39.5℃》를 거의 마무리할 즈음에 “우리가 찍는 옷은 한복이 아니다. 전부 외국 디자이너들의 서양 옷이다. 그러니 한국인들이 입은 느낌과 외국인들이 입은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다. 파란 눈에 금발 머리카락의 유럽 여자가 한복을 입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 모습으로 창경궁에 앉아 있는 사진이 화보로 나가면 우리가 보기에도 ‘별난 사진이다’ 하는 정도지 ‘우아하고 단아하다’고 하지는 않는다(182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이 즈음에서 박경일 님은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면서 책을 마무리합니다.

 한국에는 ‘패션’이 없습니다. 패션이 없는 한국에서 패션사진을 찍어 본댔자 패션사진이 태어날 수 없습니다.

 한국사람이 입는 옷은 ‘패션’이 아닌 ‘서양 옷’입니다. ‘한복을 걸친 서양사람’이 우스꽝스럽거나 웃기는 모습으로 보인다면, ‘서양 옷을 걸친 한국사람’도 우스광스럽거나 웃기는 모습으로 보일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사람 가운데 한국 옷을 입은 사람은 몇이나 있는가요. 온통 서양 옷만 입는 한국사람입니다. 그렇지만 ‘한국 패션사진’은 ‘서양사람을 모델로 세워 서양 옷만 입히는 사진’에 머뭅니다.

 한국에서 패션사진을 하는 사람은 패션사진도 한국사진도, 끝끝내 사진도 못 하는 셈입니다. 한국에서 패션사진을 하자면, ‘늘 서양 옷만 입는 한국사람 삶’이 무엇인가를 찬찬히 꿰뚫을 뿐 아니라 마음속 깊이 사랑하면서 사진길을 걸어야 합니다. 까놓고 말해, 사진을 찍는 박경일 님 또한 한국 옷이 아닌 서양 옷을 입으며 서양(또는 일본) 사진장비를 들고 사진을 찍습니다. 우리가 서양(또는 일본) 사진장비를 들고 사진을 찍는대서 서양사진이나 일본사진을 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우리는 한국땅에서 한국사람으로 살면서 한국사진을 찍습니다. 한국에 패션이 없고 패션사진이 없는 까닭을, 누구보다 ‘패션사진을 한다’고 생각하거나 ‘한국에서 패션사진을 가장 잘 찍는다’고 자랑하듯 말하는 사람 스스로 옳게 깨닫고 바르게 알아채며 슬기롭게 사진길을 가다듬으며 살아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사진은 자랑이 아닙니다. 사진은 내가 사랑하는 삶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삶을 자랑하는 사람은 사진으로도 그림으로도 글로도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 갈무리하지 못합니다. (4344.2.24.나무.ㅎㄲㅅㄱ)


― 나의 카메라는 39.5℃ (박경일 글·사진,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2007.1.30./120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土門拳 腕白小僧がいた (小學館文庫) (文庫)
土門 拳 / 小學館 / 200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진은 어디에서 어떻게 태어나는가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19] 토몬 켄(土門 拳), 《腕白小僧がいた》(小學館,2002)



 1909년에 태어나 1990년에 숨을 거둔 토몬 켄 님 사진책 가운데 한국에 알려진 책은 하나도 없습니다. 토몬 켄이라는 이름조차 한국 사진쟁이한테는 퍽 낯설다 할 만합니다. 나이든 사진쟁이 가운데에는 토몬 켄 사진책 한 권쯤 들여다본 분이 있을는지 모르나, 젊은 사진쟁이 가운데에는 토몬 켄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았다든지 이이 사진책을 장만하여 즐긴다고 할 만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궁금합니다.

 일본 사진밭은 기무라 이헤이 님이 갈고닦았다면, 여기에 토몬 켄 님이 씨앗을 심어 우람한 나무로 자라도록 돌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토몬 켄 님은 ‘사진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바로 사진으로 했으며, ‘사진으로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을 곧 사진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멀디먼 나라로 사진마실을 다닌다든지 유럽이나 미국에서 새로운 흐름이라고 내세우는 사진흐름을 애써 받아들이지 않은 토몬 켄 님이라고 느낍니다. 새로운 흐름은 그예 새로운 흐름이지, 사진을 하는 사람들 누구나 똑같이 받아들일 흐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새로운 사람이 태어나는 만큼, 새롭게 사진기를 쥐어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새로운 바람으로 새로운 사진을 찍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화나 현상을 남달리 한다든지 오래된 필름을 쓴다든지 사진틀을 요모조모 바꾼다든지 해야 새로운 사진흐름이 되지 않습니다. 스튜디오에서 꿈 같은 모습을 만든다거나 셈틀 풀그림으로 머리속 꿈나래를 꽃피운다 해서 새로운 사진흐름이기만 하지 않습니다. 사진쟁이 스스로 새로운 넋으로 새로운 삶을 일굴 때에 바야흐로 새로운 사진흐름입니다.

 찍을 수 있을 때 찍을 수 있는 사진을 찍으면 즐겁습니다. 찍을 수 있는 곳에서 찍을 수 있는 사진을 찍기에 아름답습니다.

 놀이하는 어린이, 일하는 어린이, 가난한 어린이, 동생 업어 돌보는 어린이, 어머니 품에서 만화책 읽는 어린이 …… 들을 두루 가까이에서 마주하면서 사진으로 영글며 이룬 사진책 《腕白小僧がいた》(小學館,2002)에 담긴 사진은 더 돋보인다거나 더 남다른 사진이 하나도 아닙니다. 그저, 토몬 켄이라고 하는 사진쟁이가 살던 때에 둘레에서 흔히 마주하던 아이들하고 가까이에서 사귀면서 사진으로 한 장 두 장 담은 이야기를 그러모읍니다. 아이들이 골목이든 길가이든 들판이든 멧자락이든 탄광마을에서든 스스럼없이 뛰어놀거나 일을 하니까, 이런 모습을 가만히 살피며 사진으로 찰칵 담습니다. 고단한 아이들 나날을 사진으로 밝혀서 공무원과 정치꾼을 일깨우려는 사진이 아닙니다. 일본이 제국주의 길을 걸어가며 아이들을 짓누르거나 ‘충군애국’을 억지로 쑤셔박을 때조차 아이들은 해맑은 눈빛과 매무새로 신나게 물장구치고 놀이하는 모습을 꾸밈없이 찰칵찰칵 담습니다. 일본 어린이가 더 예쁘다고 외치지 않습니다. 애써 인도나 티벳에 가지 않더라도 일본사람은 일본에서 예쁜 아이들을 늘 만나며 사랑할 수 있다고 깨우치는 사진이 아닙니다. 어린이는 참말 어린이요, 어린이로 보내는 나날이 얼마나 아름다우며 사랑스러운가를 몸소 느끼기에 담는 사진이라는 이야기를 담을 뿐입니다.

 1979년에 병으로 쓰러져 더는 사진기를 쥐지 못하기까지, 어린이면 어린이, 일본 자연이면 일본 자연, 일본 불상이면 일본 불상을, 어린이와 자연과 불상하고 한마음이 되면서 토몬 켄이라는 사진쟁이 한 사람이 사랑어린 손길을 살포시 깃들이는 사진을 내놓습니다.

 아름답다고 느끼기에 아름답다고 느끼는 그대로 담는 사진입니다. 사랑스럽다고 느끼기에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눈길을 고스란히 싣는 사진입니다. 즐겁다고 느끼기에 즐겁다고 느끼는 사랑을 차분히 깃들이는 사진입니다.

 사진을 더 잘 찍는 길이란 없습니다. 사진을 더 돋보이도록 찍는 법이란 없습니다. 사진을 더 잘 쓴다든지, 사진이 더 훌륭하거나 나은 문화나 예술로 거듭나도록 하는 수는 없어요.

 내 삶이 그대로 사진입니다. 내가 살아가며 바라보는 눈길이 그예 사진입니다. 내가 땀흘리며 꾸리는 살림살이가 곧바로 사진이 되어요.

 내 하루하루를 기쁘게 웃으면서 맞아들일 때에, 내가 찍는 사진 한 장을 기쁘게 웃으며 맞아들일 뿐 아니라, 내 둘레 사람한테도 기쁘게 웃으며 보여줍니다. 내 오늘과 어제와 글피를 어여삐 돌보거나 건사할 때에, 내가 담으려는 사진 이야기를 즐거이 엮으면서, 내 살붙이와 동무하고 즐거이 나누거나 함께합니다.

 토몬 켄 님 사진은 ‘사진은 어떻게 태어나는가’를 스스로 살피거나 찾거나 헤아리면서 이룬 삶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토몬 켄은 토몬 켄대로 사진이 태어나는 한살이를 살피면서 《腕白小僧がいた》를 빚고, 다른 사진쟁이는 다른 사진쟁이대로 다른 사진쟁이가 아끼거나 좋아하면서 살아가는 보금자리를 둘러싼 마을에서 ‘사진은 어떻게 태어나는가’를 스스로 살피거나 찾거나 헤아리면서 즐기면 될 사진이며 삶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사진은 우리 집에서 태어납니다. 사진은 내 마음에서 태어납니다. 사진은 우리 마을에서 태어납니다. 사진은 내 손과 발에서 태어납니다. 사진은 내 겨레 내 삶터에서 태어납니다. 사진은 내 눈길과 내 보조개에서 태어납니다.

 사진은 기계나 장비에서 태어나지 않습니다. 사진은 셈틀이나 포토샵에서 태어나지 않습니다. 사진은 필름이나 메모리카드에서 태어나지 않습니다. 사진은 두근두근 뛰면서 살아숨쉬는 내 가슴에서 태어납니다. (4344.2.22.불.ㅎㄲㅅㄱ)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jooferry 2011-10-19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서점에서 많은 사진집들을 보고 놀랐지요. 다양한 작가군과 소재, 그런 양질의 책들이 서점에서 유통되고 독자가 있고 기호가 다양하다는 것.아쉬움 마음에 일본사진집을 몇 개 사려고 알라딘을 돌아다니다가 문득 느낌오는 책을 주워담습니다. 된장님의 리뷰량 겹치는 작가가 많아서 반가운 맘이 들었어요.저는 그냥 한 컷의 느낌에 구매확신을 얻지만 된장님 리뷰에 간략한 일본사진작가들의 소개와 역사들을 실어주셔서 정보도 얻게 되구요.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숲노래 2011-10-20 20:07   좋아요 0 | URL
저도 아직 더 많은 분들 이야기를 담지 못해요.
새 보금자리에 좋은 책터 자리잡으면
신나게 수많은 사람들 이야기를 펼치고 싶어요.

일본 사진책은 참 훌륭하지만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답니다..
 
Immediate Family (Hardcover)
Sally Mann / Aperture / 1992년 10월
평점 :
품절


(이 책이 알라딘 목록에도 뜨는 줄 이제서야 알았기에, 지난해에 쓴 글을 이제서야 걸친다. <사진책과 함께 살기>에 실린 글.)


 그림그리기와 글쓰기와 사진찍기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3] 샐리 만(Sally Mann), 《Immediate Family》(Aperture,1992)


 사진책 《윤미네 집》이 1990년에 처음 나왔을 적에 사람들은 그리 눈여겨보지 않았습니다. 제법 눈길을 끌고 입소문을 타기는 했으나 이 사진책을 기꺼이 장만하면서 ‘내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 삶’을 사진으로 담는 뜻을 읽어내지 못했습니다. 2010년에 사진책 《윤미네 집》은 새 옷을 입으며 다시 태어났고, 이제는 퍽 많은 사람들이 널리 눈여겨보며 이 사진책을 장만해 줍니다. 스무 해 만에 다시 나오며 꽤 사랑받는다고 하여 이 사진책에 깃든 뜻이 갑자기 생겨나거나 샘솟지는 않습니다만, 이제라도 사진찍기에 담는 손길을 느낄 수 있다면 반가운 노릇입니다. 그런데, 《윤미네 집》을 장만한 분들은 이 사진책에서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아쉬운지를 찬찬히 느끼고 있을는지요. 누구나 찍을 수 있어 아름답고, 언제라도 찍을 수 있어 훌륭하며, 어떠한 장비로라도 찍을 수 있어 어여쁜데다가, 작가 아닌 사람이 찍어도 거룩한 줄을 느끼고 있을는지요. 식구들하고 좀더 오래 지낼 수 있으면 더 애틋한 사진을 엮을 수 있고, 집살림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하며 복닥였으면 더욱 살가운 사진을 이룰 수 있으며, 함께 즐길 놀잇거리나 일거리가 있었으면 한결 눈물겨울 사진을 선보일 수 있는데다가, 두고두고 오순도순 이야깃거리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한껏 웃음지을 사진을 펼칠 수 있는 줄을 깨닫고 있을는지요.

 스물다섯 즈음 된 젊은 넋이 당신 어버이 품을 떠나 홀로 나라 안팎을 떠돌던 발자국을 담아낸 이야기책 《먼지의 여행》(신혜 글,샨티 펴냄,2010)을 읽으면, “사진찍기를 원하는 아이들에게 카메라가 없어서, 대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색연필로 초상화를 그려 주기로 했다. 카메라로 찰칵 찍고 말 순간을 천천히 그림으로 그리며, 나는 아이들과 친해지는 과정에 집중하게 되었다. 초상화를 그리는 동안 아이들이 나를 오래 쳐다보고, 나도 아이들을 오래 바라봤다(133∼134쪽).”는 대목이 있습니다. 젊은 넋은 ‘좋은’ 사진, 또는 ‘즐거운’ 사진, 또는 ‘애틋한’ 사진, 또는 ‘훌륭한’ 사진, 또는 ‘눈물겹거나 웃음지을’ 사진이 어떻게 태어나는가를 몸으로 부대꼈습니다. 그러나 아직 한 가지를 더 부대끼거나 삭여내지는 못합니다. 아직 많이 팔팔하고 풋풋하니까 앞으로 얼마든지 새로이 부대끼며 받아들이리라 믿는데, 그림을 그릴 때에만 오래오래 서로를 쳐다보며 얘기를 하고 마음을 모을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찍기를 할 때에도 언제나 오래오래 서로를 쳐다보며 얘기를 한 다음에 할 수 있고, 이렇게 해야 참다운 사진을 낳습니다.

 저는 제 사진감인 ‘헌책방’과 ‘골목길’과 ‘자전거’와 ‘우리 집 딸아이’를 사진으로 담을 때에 늘 오래오래 지켜보며 가슴으로 삭여 놓습니다.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며 샘솟는달지, 스스로 우러나오며 터질 때까지는 사진기를 쥐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제 어디에서라도 사진기는 제 목걸이가 되어 줍니다. 싸구려 사진기이면서 꽤나 무거운 녀석을 쓰고 있습니다만, 자전거를 타고 골목마실을 하든 아이를 품에 안고 동네마실을 하든 제 목에는 어김없이 사진기가 대롱대롱 걸려 있습니다. 헌책방에서 책을 살필 때에도 사진기를 목걸이처럼 걸고 있습니다. 빨래하고 밥하고 청소하고 설거지하는 때를 빼놓고는 늘 사진기를 몸에 걸거나 곁에 놓고 있습니다. 날마다 열 시간쯤은 사진기를 손으로 만지작거리지 싶습니다. 다만 사진기 단추를 누르는 횟수는 많지 않습니다. 내 눈길로 바라본 내 삶을 내 마음으로 곰삭여서 무르익히지 않고서는 사진기 단추를 누를 수 없습니다. 미처 무르익히지 않았는데 사진기 단추를 누르면 ‘그럴싸한’ 사진은 되지만, 저 스스로 제 사진을 놓고 ‘웃거나 울’ 사진은 못 됩니다.

 서울 용산 헌책방 〈뿌리서점〉을 열여덟 해 다니며 사진은 열두 해에 걸쳐 사천 장 즈음 찍었습니다만, 드나드는 횟수가 늘고 머물며 책을 살피는 나날이 늘수록 이곳에서 다시금 찍는 사진이 한결 사랑스럽고 푸근합니다. 어쩌다 한두 번이 아닌 제 고향터전이자 살림집 깃든 골목길을 수천 수만 번 밟으며 사진기 단추를 누를 때에 비로소 제 웃음보와 울음보를 터뜨리는 사진이 태어납니다.

 셜리 만(Sally Mann)이라는 분이 이룬 사진책 《Immediate Family》를 보았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아이를 낳고 기르며 부대낀 온갖 따스함과 눈물과 애틋함을 서려 놓은 사진책을 보았습니다. 《윤미네 집》은 바깥일로 바쁜 아버지가 바쁜 틈을 얼마나 바지런히 쪼개며 식구들과 복닥이는 데에 바쳤는가를 잘 엿볼 수 있어 사랑스러운 사진책이라면, 《Immediate Family》는 홀가분하고 거리낌없는 넋으로 삶을 꾸리는 어머니가 밤낮으로 아이들하고 뒤섞이면서 아이들 자라나는 하루하루를 얼마나 재미나게 껴안았는가를 즐거이 읽을 수 있어 따사로운 사진책입니다.

 두 사진책을 보면서 새삼스레 느끼지만, 생활사진이든 작품사진이든 모두 삶에서 비롯합니다. 꾸밈없이 바라보는 수수한 사진이든 이래저래 만들고 꾸미며 이루는 작품사진이든, 삶을 그대로 드러내거나 삶을 뒤틀거나 만지작거리며 사진 하나 이루어 냅니다. 삶결 따라 내놓는 사진이지, 삶무늬 없이 내놓을 수 없는 사진입니다. 삶자국 묻어나는 사진이요, 삶자락 없이 일굴 수 없는 사진입니다.

 글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노래이든 춤이든 굿판이든, 모조리 나 스스로 살아가는 모양새요 넋입니다. 사랑하는 삶이 고스란히 사진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4343.3.9.불.ㅎㄲㅅㄱ)
 


댓글(1)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2011-02-19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애써 올렸더니 이 책은 품절이네... ㅠ.ㅜ
그러나 1994년 재판본은 있으려나?
아직 이 책이 남았다면,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두 사람이라도
한국에서 사서 보아 주기를 꿈꾸며.... 엉엉..
 
The Life of Yousuf Karsh (Paperback) - Portrait in Light and Shadow
Maria Tippett / House of Anansi Pr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내가 말하고 싶은 책은 목록에는 뜨지 않으나, 먼저 유섭 카쉬 님 이야기를 적바림한 분이 있어, 뒤에 붙여서 적어 봅니다) 



 즐거운 삶이 사진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18] 유섭 카쉬(Yousuf Karsh), 《American legends》(Little Brown & com,1992)


 1908년에 아르메니아에서 태어나 1924년에 캐나다로 건너가고, 1932년부터 사진길을 걷다가 2002년에 숨을 거둔 유섭 카쉬(Yousuf Karsh)라는 사진쟁이를 가리켜 ‘사람사진을 훌륭히 찍은 분’으로 일컫습니다. 어떻게 보면 유섭 카쉬라는 분은 온누리에 손꼽히는 사람들을 ‘사진으로 담았다’기보다 ‘빛으로 담았다’고도 할 테며,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만, 더욱이 사진이라는 문화나 예술을 한껏 북돋우면서 ‘사진을 얕보’거나 ‘사진을 아무것 아닌 손재주’쯤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생각을 바꾸었다 할 텐데, 이런저런 이름을 붙이는 일은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이런 이름 저런 꾸밈말은 부질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 유섭 카쉬 님 사진을 바라보면서 가슴속으로 아무것을 느끼지 못하면서 이런 이야기만 늘어놓는다면 덧없습니다. 남들이 하는 우러르는 말을 따를 노릇이 아니라, 유섭 카쉬 님이 훌륭히 사진을 찍을 뿐 아니라, 사진이 참말로 빛으로 그리는 문화요 예술이라고 느낀다면 내 삶에서 내가 사진기를 쥘 때에 나부터 늘 스스로 ‘빛으로 나누는 삶’을 보여줄 노릇입니다.

 제대로 헤아리거나 받아들이는 사람은 제대로 살아갑니다. 제대로 헤아리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입으로는 북돋우거나 섬기는 말을 읊을 수 있으나, 막상 나 스스로는 달라지거나 거듭나거나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사람을 사진으로 담는 사람이 많고, 유섭 카쉬 님이 내놓은 사진책 가운데 하나인 《American legends》(Little Brown & com,1992)에 담긴 사람들처럼 ‘이름나거나 손꼽히거나 훌륭하다 하는 사람을 담은 사진’을 찍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유섭 카쉬 님이 찍은 사진이라든지 유섭 카쉬 님이 찍은 ‘이름나거나 훌륭하다는 사람들 모습을 담은 사진’은 여느 사진쟁이나 퍽 이름난 다른 사진쟁이 사진하고 무척 다릅니다.

 바라보는 눈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요? 사진으로 담으려고 손가락을 움직여 사진기 단추를 누르는 손길이 다르다고 해야 하나요? 사진으로 적바림해서 둘레 사람들한테 보여주거나 나누려는 마음이 다르다고 해야 할는지요?

 생각해 보면, 사진쟁이 가운데 남하고 똑같이 사진을 찍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사진기를 쥐어 같은 빛을 받으며 같은 모습을 찍어도 빈틈 하나 없이 똑같다 할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세발이를 세워 넣고 단추만 다른 사람이 누르면 똑같은 사진이 나오려나요? 움직이지 않는 무언가를 놓고 전기불을 밝힌 곳에서 사진기 단추만 누르도록 하면 유섭 카쉬 님이 찍든 고든 파크스 님이 찍든 한결같다 싶은 사진이 나올까요? 어쩌면, 이렇게 억지로 만들어 똑같은 사진을 뽑을 수 있으니까 사진을 얕보거나 깎아내릴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기계만 잘 다루면 똑같이 찍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포토샵을 잘 건드리면 사진기 없어도 사진을 얻는다고도 하니까, 사진은 문화도 예술도 아니라 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기계만 잘 다루는 사람은 사진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포토샵만 잘 건드리는 사람 또한 사진을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기계를 잘 다루는 사람은 기계쟁이입니다. 포토샵을 잘 건드리는 사람은 포토샵쟁이예요. 사진쟁이가 아닙니다. 사진쟁이란 사진을 하는 사람입니다.

 유섭 카쉬 님이 ‘사람을 사진으로 담던 여느 사진쟁이’하고 다른 대목이라면, 당신이 찍은 사진을 바라보면서 ‘그저 사진이기에 사진으로 말하는 사람으로서 사진쟁이 길을 걷는다’고 당신 목소리를 담았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당신 사진책 《American legends》를 한 번 볼 때, 두 번 세 번 볼 때에, 열 번째 볼 때에, 또 자꾸자꾸 볼 때에 곰곰이 웃으면서 생각합니다. 참말 당신 사진으로 찍힌 사람들은 보드랍습니다. 부드럽지 않고 보드랍습니다. 웃어도 보드랍고 웃지 않아도 보드랍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이나 당신 사진기를 바라보아도 보드라우며, 당신이나 당신 사진기를 바라보지 않아도 보드라와요.

 어떤 사진은 틀이 좀 기울어집니다. 어느 사진은 팔 한 귀퉁이가 잘린다든지 신발이 잘립니다. 어느 사진은 비례가 살짝 어긋나거나 꽤 어긋납니다. 그러나, 이런 사진이든 저런 사진이든 사진이라는 틀에 깃든 사람을 맨 먼저 느끼며, 이 사진에 담긴 사진을 바라보면 즐겁기 때문에 이 사진은 이런 틀이거나 저런 틀이거나 그리 대단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초점이 덜 맞는다거나 아주 가늘게 떨린 느낌이 잡히더라도 괜찮을 뿐 아니라, ‘괜찮다기보다 이러한 느낌이 깃든 모습’이기에 이이 사진으로 한결 어울리는구나 싶어요.

 마땅한 노릇이지만, 사진을 잘 찍는 틀이란 없습니다. 사람을 잘 찍는 사진 또한 없습니다.

 아주 마땅한데요, 사랑을 잘 하는 길이란 없습니다. 사랑을 잘 하는 사람 또한 없어요.

 잘한다고 하면 잘한다고 하는 대로 즐겁고, 잘 못한다고 하면 잘 못한다고 하는 대로 즐거우며, 영 못하는구나 싶으면 영 못하는구나 싶은 대로 즐거운 삶입니다. 그렇지만, 사람 삶에는 점수를 매기지 못하고, 사진에도 점수를 붙이지 못합니다.

 어떤 이는 빈틈 하나 없이 꽉 짜인 대로 살아가는 데에서 즐거움을 찾겠지요. 누군가는 조금 풀어지거나 느슨한 대로 살아가는 곳에서 즐거움을 누리겠지요. 어느 때에는 이렇고 다른 때에는 또 요렇게 즐기면서 웃고 울 테지요.

 한길이란 없습니다. 한길을 걷는 사람이지만 한길이란 딱히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름난 어느 한 사람을 사진으로 담을 때에 더 훌륭하거나 도드라지거나 멋스러이 담는 틀이란 없습니다. 그림을 그리든 글을 쓰든 똑같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보이도록 해야 이 사람을 담는 사진이 아닙니다. 유섭 카쉬 님이 찍을 때에는 유섭 카쉬 님이 알거나 사귀면서 사람들한테 들려주는 목소리가 깃드는 ‘사람사진’입니다. 유진 스미스 님이 찍을 때에는 유진 스미스 님이 알거나 사귀면서 사람들한테 들려주는 이야기가 담기는 ‘사람사진’입니다. 레니 리펜슈탈 님이 찍을 때에는 레니 리펜슈탈 님이 알거나 사귀면서 사람들한테 들려주는 넋이 스미는 ‘사람사진’이에요. 한편, 누가 찍든 찍는 사람 매무새와 삶과 넋이 드러나기만 하지 않습니다. 누가 찍든 찍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사람사진’이지만, 누가 찍더라도 ‘사진에 담기는 사람 삶’은 이이 삶결과 삶무늬 그대로입니다. 사진으로는 늘 달리 보이겠으나, 사진에 담기는 사람은 늘 스스로 제 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황순원 님이 〈소나기〉를 썼다 해서 ‘소나기’는 황순원 님 소설대로 소나기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황순원 님이 〈소나기〉를 쓴 뒤로 소나기는 ‘황순원이 바라보며 느낀 소나기’가 하나 새로 태어났으며, ‘내가 황순원 님 마음이 되면서 느끼고픈 소나기’에다가 ‘소나기는 늘 그대로 소나기였기에, 소나기가 늘 소나기 그대로이던 마음’은 어떨까를 가만히 짚을 수 있습니다.

 사람을 찍는 사진은 사람을 가두지 않습니다. 사람을 사진 한 장에 가두어, ‘이 한 장으로 한 사람 모습을 송두리째 말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 한 장으로 이 사람 사진은 다 보여주었어!’ 하고 외치려 한다면, 이런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쟁이가 아니라 겁쟁이라 하거나 푼수쟁이라 할 만합니다. 사진쟁이는 사진으로 사람을 사귀면서 사람으로 살아가는 즐거움을 사진으로 이야기 나누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찍으면서 ‘이 사진 한 장’으로 끝낼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두 번 찍으면 ‘한 사람한테 깃든 두 가지 이야기’가 샘솟습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백 번 찍으면 ‘한 사람한테 어린 백 가지 이야기’가 샘솟을 테지요. 사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사진이 보여주는 모습이란, 사진으로 나누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이제까지 사진을 하던 사람이나 사진밥을 먹던 사람이나 사진밭을 일군 사람은 사진이 무엇이라고 여겼는가요.

 이야기를 꽃피우는 사람들이 늘 새롭구나 하고 느끼도록 손길을 내미는 삶이 곧 사진입니다. 멋진 문화나 놀라운 예술이 아닌 즐거운 삶이 사진입니다.

 유섭 카쉬 님은 첫손가락 꼽을 사진쟁이가 아닙니다. 유섭 카쉬 님을 ‘사람사진 아주 훌륭히 찍는 첫손’으로 꼽는 사람이란 사진을 볼 줄 모를 뿐 아니라, 유섭 카쉬 님을 볼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유섭 카쉬 님은 ‘사진을 보는 사람들 굳은 마음’을 녹이거나 풀면서 ‘사진이란 이렇게 즐겁습니다’ 하는 길을 조용히 넌지시 살며시 살가이 나누어 준 사람입니다. 사진이란 즐거운 삶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부터 즐겁고,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 또한 즐거운 삶입니다. (4344.2.19.흙.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권영호의 카메라 - 세상에 풀어놓은 마음의 모습들
권영호 지음 / 앨리스 / 201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진찍기는 아주 쉽습니다
 [찾아 읽는 사진책 18] 권영호, 《권영호의 카메라》(앨리스,2010)



 사진찍기로 돈을 벌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든, 사진찍기를 할 뿐 돈벌이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사람이든, 언제나 사진을 좋아할 수 있으며 사진을 사랑할 수 있지만 사진하고 동떨어지거나 사진을 모를 수 있습니다. 사진을 배우려고 무던히 애쓴다 해서 사진을 알 수는 없습니다. 사랑을 배우려고 힘들여 애쓴다 해서 사랑을 알 수 없고, 밥이나 농사나 하늘이나 흙이나 사람을 배우려고 용쓴다 해서 밥이든 농사이든 하늘이든 흙이든 사람이든 속속들이 알 수 없는 흐름하고 매한가지입니다.

 사진찍기로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하는 권영호 님이 《권영호의 카메라》라는 조그마한 사진수필 하나 내놓습니다. 이 조그마한 사진수필에 담은 권영호 님 사진은 ‘돈 받고 팔 생각’으로 찍은 사진이라거나 ‘사진잔치 열어 사람들한테 내보이려는 마음’으로 찍은 사진이라 여기기 힘듭니다. 그저 권영호 님 스스로 좋아하는 대로 찍은 사진이로구나 싶습니다. 사진길을 걷거나 사진길을 걷고 싶은 사람들한테 ‘사진을 찍는 마음’이 어떠할 때에 참으로 즐거울까 하고 이야기를 건네려고 스스로 기쁘게 찍어 스스로 신나게 엮은 사진이리라 생각합니다.

 권영호 님은 《권영호의 카메라》에서 말합니다. “내 스타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찍은 사진에서 내가 보였으면 좋겠다. 그저 잘 찍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을 넘어서 내 생각, 내 기분이 드러나는 사진을 찍고 그것을 본 사람들이 사진에서 생동감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31쪽).”고. 그런데 권영호 님은 ‘권영호 님 삶에서 어떠한 모습’이 보이도록 하고 싶은지까지 말하지는 못합니다. 어떤 사진이든 찍은 사람 모습이 나타나기 마련이고, 잘 찍든 못 찍든 찍은 사람 느낌이 묻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사진을 찍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스스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며 어떤 느낌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가를 먼저 잘 알아채야 합니다. 스스로 먼저 잘 알아챌 때에 나 스스로 어떠한 사진을 찍으면서 나누는가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진쟁이 스스로 ‘생동감 있게’ 살아가면, 이이가 찍은 정물사진을 보면서도 ‘생동감을 느낍’니다. 사진쟁이 스스로 ‘슬픈 마음에 푹 젖은 채’ 살아가면, 이이가 찍은 노래꾼 이효리 님이 활짝 웃는 사진을 보면서도 ‘슬픈 마음에 푹 젖은 채’ 보내는 나날을 느끼거나 읽습니다.

 사진쟁이는 기계가 아닌 사람입니다. 단추를 누르는 일은 사람 아닌 기계를 시켜서도 한다지만, 어떠한 모습을 어떠한 크기와 질감과 빛그림으로 담으려 하는가는 ‘기계 아닌 사람’이 ‘쇠붙이 아닌 따뜻한 가슴’에 따라 담기 마련입니다. 사진을 주문한 사람이 바라는 모습을 찍어 준달지라도, 사진쟁이 스스로 아주 기쁜 나날이라면 ‘슬픈 모습’을 찍어 달라 했는데, 막상 하나도 안 슬픈 모습이 되어 버립니다. 기쁜 모습을 찍어 달라 했으나 사진쟁이가 더없이 슬픈 나날을 보낸다면 하나도 안 기쁜 모습만 찍고 말아요.

 연기를 하는 사람들은 연속극에서든 영화에서든 나 스스로 연기를 하는 배역에 맞추어 내 삶을 바꿉니다. 내 삶을 내 배역에 맞추어 바꾸지 않고서야 연기를 하지 못합니다. 연기를 잘 하는 사람은 내 배역에 따라 삶이 바뀌기 때문에, 자칫 마음이 크게 다칠 수 있습니다. 나쁜 짓 하는 배역을 맡으면 참말 내 삶에서도 나쁜 짓이 저절로 튀어나옵니다. 착한 일 하는 배역을 맡으면 참으로 내 삶에서도 착한 몸가짐이 스스럼없이 배어듭니다.

 상업사진을 하면서 주문자 입맛에 맞추는 일이란, 언제나 내 삶을 바꾸어야 하는 사진쟁이가 되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마치 영화배우처럼 영화 배역에 따라 늘 내 삶을 바꾸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살아숨쉬는 내가 아니라 ‘이웃 삶에 오롯이 내 모두를 맞추어 살아내는 내’가 되어야 해요. 권영호 님이 하는 사진찍기란 ‘나를 드러내는 사진찍기’가 아닌 ‘다른 사람이 바라는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사진찍기’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권영호 님 당신은 “나는 내가 찍은 사진에서 내가 보였으면 좋겠다”고 말하는구나 싶습니다. 숱하디숱한 사진을 찍는 동안 정작 권영호 님 당신을 즐거이 찍을 길은 없으니까요.

 이리하여, 《권영호의 카메라》를 들여다보면 그리 대단하지 않을 뿐더러, ‘잘 찍지 못한’ 사진이 수두룩합니다. 어설프다든지 ‘하얀 옷 입은 어린 아이’한테 지나치게 환상을 품는 모습마저 드러납니다.

 그러나, 권영호 님이 이제껏 권영호 님 삶과 모습과 꿈을 즐거이 나누는 삶사진을 찍을 수 없었던 흐름을 돌아본다면 더없이 자연스럽거나 마땅한 노릇입니다.

 누구든 빈틈없는 사람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꽉 짜인 채 어수룩한 데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면서 띄어쓰기를 틀리기도 하고, 말을 하면서 앞뒤가 안 맞기도 하며, 물을 쏟거나 밥을 태우거나 약속을 깜빡 잊기도 하는 사람입니다. 《권영호의 카메라》에 담긴 권영호 님 사진은 이렇듯 ‘깜빡깜빡 하기도 하고 어설프기도 한’ 여느 사람 내음이 살며시 묻어납니다. 그러나, 여느 사람 내음이 살며시 묻어나려 하다가 자꾸만 ‘주문자 입맛에 맞추어 사진을 찍던 버릇’이 톡톡 튀어나옵니다. 더 수수하게 더 투박하게 더 조촐하게 당신 사진길을 좋아하는 이야기를 펼칠 듯하다가도 자꾸 겉멋을 부립니다.

 겉멋 부리기가 잘못이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주문자 입맛에 맞추’는 일은 멋을 부리고 맛을 내야 하는데, “나는 내가 찍은 사진에서 내가 보였으면 좋겠다”고 한다면 내 사진맛이란 굳이 더 멋부리거나 맛내는 조미료를 쓴다 해서 좋아지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그 소녀를 카메라에 담으며 나는 상상을 자유롭게 펼친다. 사진 속 소녀는 지금 봐도 참 어여쁘다. 아마도 그건 내가 소녀를 어여쁘게 바라보고 있었다는 뜻이 아닐까(96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곧, 돈을 받고 사진을 찍어야 할 때에는 사진쟁이로서는 돈을 찍을밖에 없습니다. 사진을 찍고 돈을 받으면, 나는 사진을 찍겠지요. 그저 어여쁘게 바라보며 사진을 찍을 때에는 언제나 어여쁘구나 싶은 사진을 얻습니다. 어여쁘구나 하고 느낄 때에 어여쁘다고 느끼도록 사진을 찍어요.

 사진쟁이란, 사진찍기로 돈을 벌든 사진찍기를 그저 즐기든, ‘내 생각에 맞추어 찍는 사진’인지 ‘사진에 맞추어 생각을 하는 삶’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삶에 따라 찍는 사진’인지 ‘사진에 따라 보내는 삶’인지 곰곰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어느 결을 사랑하면서 아끼느냐에 따라 삶도 사람도 사랑도 사진도 달라집니다.

 권영호 님은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서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아주 솔직한 순간, 솔직한 눈빛. 마치 무성영화를 볼 때 스크린 속의 배우들이 웃고 있는지 다투고 있는지 슬퍼하는지 화가 나 있는지 굳이 소리가 없어도 저절로 알게 되는 것처럼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 얼굴은 그것 자체로 모든 것을 다 말해 준다. 그런 얼굴을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111쪽).” 하고 말합니다만, 권영호 님이 살아가는 틀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는지 모르나, 이 말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그런 얼굴을 만나기란 쉽습’니다. 그런 얼굴을 만나 사진으로 찍기도 쉽습니다.

 중국에서 만난 흰옷 입은 아이를 찍은 사진은 무슨 사진이었을까요. 이 사진은 사진으로 모두를 다 말해 주지 않던가요. 권영호 님 스스로 ‘모든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들려주는 사람을 만나 사진을 찍는 일’을 겪으면서도, 이러한 일이 쉬운지 어려운지를 가누지 못한다면 큰일입니다. 스스로 겪는다 해서 누구나 다 알아채지는 않는다지만, 스스로 바라는 대로 살고, 스스로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는 나날인 줄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든 바라는 대로 사진을 찍습니다. 더 멋스러이 찍고픈 사람은 참말 더 멋스러이 찍습니다. 더 아름다이 찍으려 하는 사람은 더 아름다이 찍어요. 더 가난해 보이도록 찍으려면 더 가난해 보이도록 찍습니다. 더 구질구질하게 보이도록 찍자니 참말 더 구질구질하게 보이도록 찍고 말아요.

 골목동네 사진을 찍는 이들은 으레 골목동네를 ‘골목집 = 달동네 집 = 가난’이라고 공식을 짜맞추어 사진을 만듭니다. 골목동네를 살가이 사귀면서 사진을 못 찍기 일쑤입니다. 골목동네를 사귀는 일이 어렵기에 이렇게 사진을 찍을까요? 골목동네를 사귀는 일이 어렵지 않으나, 사진쟁이 스스로 내 삶을 바치고 품을 들이면서 짬을 내어 가까이 다가서며 만나지 않으니까, 늘 판에 박히거나 틀에 박힌 사진만 찍고 맙니다.

 상업사진이든 패션사진이든, 주문한 사람한테 보내 줄 사진을 찍자면, 주문한 사람이 어떠한 마음이거나 뜻이요 어디에 어떻게 쓰며 모델은 어떤 느낌이 나야 하는가를 골고루 살펴야 합니다. 사진은 스튜디오에서 찍을는지 밖에서 찍을는지, 한국에서 찍을는지 나라밖에서 찍을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하나 따지고 재야 합니다. 곧, ‘깊이 사귀는 삶’이라는 매무새로 주문을 받아 사진을 만들어야 합니다. 깊이 사귀는 삶이라는 매무새로 다가설 때에 상업사진이든 패션사진이든 훌륭하다 싶은 작품 하나 태어납니다.

 다큐사진이라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집에서 아이를 돌보며 아이를 사진으로 찍을 때에도 똑같습니다. 영정사진을 찍는다 해서 다를 까닭이 없어요. 언제나 똑같습니다. 그저 기계처럼 후다닥 영정사진을 찍는다면, 영정사진으로 찍히는 할머니 할아버지부터 마음이 무겁습니다. 한 분 한 분 당신 삶을 기리고 아끼면서 고맙게 찍는 매무새일 때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부터 사진으로 찍히는 때에 웃고 울면서 좋아합니다.

 사진찍기는 아주 쉽습니다. 사진찍기는 내 삶대로 찍으니까 아주 쉽습니다. 내 삶이 어떠한가를 헤아리면서 하는 사진찍기인 만큼 어려울 까닭이 없습니다. 내가 찍고픈 사진감에 따라 내 삶을 맞추거나 고치거나 가다듬으면 하나도 어려울 일이 없습니다.

 사진찍기가 어렵다면, 나 스스로 내가 사진으로 담으려는 사진감으로 깊이 스며들거나 파고들거나 어깨동무하거나 손잡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살가이 사귀거나 가까이 다가서지 않고서야 무슨 사진을 찍겠습니까. 내 삶에 따라 달라지는 사진인 줄 느끼고, 내 삶을 담아서 나누는 사진이라고 헤아리며, 내 삶과 이웃 삶을 서로 사랑하는 길을 찾는 사진이구나 하고 돌아본다면 내 마음밭도 우리네 사진밭도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4344.2.14.달.ㅎㄲㅅㄱ)


― 권영호의 카메라 (권영호 글·사진,앨리스 펴냄,2010.7.7./140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