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건축 4 - 칠궁
임응식 지음 / 광장 / 197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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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올렸던 글을 '리뷰'로 옮겨 새로 올린다 ㅠ.ㅜ 이 책은 절판된 지 오래되어 없는 줄 알고, 처음부터 '판 끊어져 검색 안 되는 책' 자리인 페이퍼쓰기를 했는데... 임응식 님 책을 검색해 보다가, 덜컥 뜨는 모습을 보거는 허거덕 @.@ 아웅... 힘들어라... 그러나 고마운 일이다. 다시 살 수는 없어도 이렇게 '책 검색'이 되는데다가 표지라도 뜨니까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예술이기 앞서 삶인 사진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9] 임응식, 《韓國의 古建築 ④ 七宮》(광장,1977)



 사진찍기를 처음 배우려 하는 분들한테나, 사진찍기를 제법 해 왔으나 ‘식구들 사진 아니고는 찍어 보지 못했다’고 하는 분들한테나 으레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진기는 다 똑같은 사진기이니, 더 값나가는 값진 사진기를 굳이 장만하려고 하지 마시라고. 덧붙여, 더 값나가는 사진기 한 대 장만할 돈만큼 사진책을 먼저 장만하여 죽 들여다본 다음에 사진기를 새로 사도 늦지 않다고. 이리하여, 하루아침에 사진책을 한꺼번에 장만하지 말고 틈틈이 책방마실을 다리품 팔며 하면서 가장 마음에 드는 책으로만 한두 권씩 장만하며 사진기 값만큼 썼다 싶을 때에 비로소 사진기를 장만한다면 굳이 사진강의나 사진교실을 다니지 않아도 스스로 마음에 들 뿐 아니라 스스로 바라는 사진길을 걸어갈 수 있다고.

 우리 나라는 사진책이 아주 안 팔립니다. 책마을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책이 안 팔린다’면서 우는 소리를 내지만, 사진책을 만들어 온 책마을 일꾼은 예나 이제나 ‘책 팔기 힘들어’ 골골거리면서도 사진책 하나를 힘써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안 팔리는 책을 꼽자면 사진책과 함께 환경책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을 올바르고 아름다이 일구자는 뜻을 담은 환경책은 아주 뜻밖에 아주 안 팔립니다. 이름난 출판사에서 광고돈 제법 들여 알리지 않고서야 거의 안 팔립니다. 이는 사진책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름난 출판사에서 광고돈 들여 널리 알리면 곧잘 팔립니다.

 문학책이 문학쟁이 한 사람이 일군 문학이라는 열매 하나를 담은 책이라면 사진책은 사진쟁이 한 사람이 일군 사진이라는 열매 하나를 담은 책입니다. 그런데, 문학책을 즐거이 사 읽으며 문학맛을 보려는 사람은 있되, 사진책을 기쁘게 사 넘기며 사진맛을 보려는 사람은 좀처럼 드뭅니다. 이러는 가운데 몇 가지 사진책은 아주 불티나게 팔립니다. 잘 안 팔릴 뿐 아니라 거의 안 팔린다는 사진책이라 하지만, ‘사진 더 잘 찍는 솜씨를 말하는 책’이라든지 ‘사랑받는 연예인 화보를 담은 책’이라든지 ‘곱상한 사진으로 멋을 부리는 포토에세이’라든지 ‘대학교 사진학과에서 교재로 쓰는 책’만큼은 제법 팔립니다.

 사진책을 즐겨 장만하는 저부터 늘 느끼지만, 사진책은 값이 좀 세긴 셉니다. 흔한 말로 휘리릭 넘기면 다 보는 사진책인데 책값이 꽤 비싸다 할 만합니다. 굳이 양장에 책 껍데기에 날개에 뭔가를 덕지덕지 달지 않아도 되는데 굳이 돈을 더 들여 더 빛나게 엮으려는 사진책이 퍽 많습니다. 글책은 그예 글책이고 사진책은 그예 사진책이기에, 글책이 글로 책을 받아들이고 글로 삶을 읽도록 돕는다면, 사진책은 사진으로 책을 맞아들이며 사진으로 삶을 헤아리도록 도울 수 있으면 넉넉합니다. 겉을 어느 만큼 꾸밀 수 있습니다만, 애써 더 겉꾸밈에 마음쓸 까닭이 없는 책들입니다. 이런 테두리에서 사진책 엮는 분들은 생각을 좀 고쳐야 합니다. ‘어차피 만드는 데에 비싼 돈이 치이니 몇 가지 더 꾸민다’고 하는 생각이 아니라, ‘사진 품질을 살리면서 좀더 많은 사람들이 손쉽게 장만할 수 있는 눅은 값’을 맞추는 데에 생각을 모두어야지 싶어요.

 1970년대 끝무렵에 ‘도서출판 광장’에서 펴낸 “韓國의 古建築”이라는 사진책들을 보면 이런 생각을 자꾸자꾸 할밖에 없습니다. 광장이라는 출판사는 건축책을 내는 곳인데, 이곳에서는 건축을 사진으로 말하는 사진책을 꽤 큰 판짜임으로 여럿 내놓았습니다. 광장 출판사에서는 모두 50권쯤은 내놓겠다는 꿈을 품고 있었다는데 모두 몇 권까지 내놓았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韓國의 古建築”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책 가운데 제가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찾아본 책들 가운데 다섯 권은 임응식 님 사진으로 나왔고(비원, 경복궁, 종묘, 칠궁, 소쇄원), 한 권은 강운구 님 사진으로 나왔습니다(내설악 너와집). 주명덕 님 사진으로 《수원성》이 나왔다고 하지만 이 책은 아직 못 보았습니다. 《제주 민가》를 담으려 했다는 사진책을 세 권 내려 했다는데 누구 사진으로 내려 했고, 나오기는 했는지조차 알 길은 까마득합니다.

 곰곰이 생각한다면, “韓國의 古建築”이라는 이름을 붙여 내놓는 사진책은 1970년대 끝무렵뿐 아니라 2010년대 첫무렵에 내놓는다 할지라도 널리 사랑받기에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 옛집”이든 “우리 나라 오늘날 집”이든, 여느 사람들은 당신 살림집을 알뜰히 눈여겨보면서 우리 삶터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한국사람은 한국땅에서 한국사람이 오순도순 모여 있는 한국 삶터 골목길을 스스럼없이 바라보거나 껴안거나 살피지 못합니다. 나라밖 일본이든 중국이든 티벳이든 인도이든 프랑스이든 미국이든 독일이든 스페인이든 하는 곳으로 비행기를 타고 나가서 그 나라들 골목길을 눈여겨보거나 헤아리거나 바라보거나 살필 뿐입니다. 제주섬 올레길을 찾는 사람이 무척 많다고 합니다만, 관광길인 올레길은 찾아다닐지라도 스스로 ‘관광길이 아닌 여느 사람 살림집하고 맞닿은 골목과 고샅’을 즐겁게 찾아다니며 마을사람 눈높이와 삶결대로 거닐면서 ‘내 이웃 삶을 받아들이려는 몸짓’을 보여주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더욱이, 관광여행으로 많이 찾는 제주섬이 아닌 여느 우리 동네라 할 때에, 우리 동네 골목길 구석구석 골골샅샅 누비며 내 이웃집은 어디요 내 동무가 사는 집은 어디이고 내 단골집은 어디메인가 하고 곱씹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 삶터조차 모르는 가운데 멀리멀리 비행기 타고 다닙니다. 우리는 우리 삶터 이웃집을 잘 알려 하지 않으면서 진보와 평화와 평등과 통일과 자유와 민주를 외치고 있습니다.

 임응식 님이 “韓國의 古建築”이라는 이름을 붙여 내놓은 사진책 《비원》과 《경복궁》과 《종묘》와 《칠궁》과 《소쇄원》을 하나하나 넘겨 보노라면, 임응식 님은 이무렵 쉰 해 남짓 이어온 당신 사진삶을 한결 가다듬고 추스르면서 당신으로서는 거의 마지막 불꽃이라 할 만한 사진길을 새롭게 걸었구나 하고 느낍니다. 우리 나라 사진누리를 맨 처음으로 다스리거나 갈고닦았다고 할 분 가운데 하나로서, 당신 뒷사람한테 보이거나 남기거나 물려주고픈 이야기와 넋을 사진마다 알알이 아로새겼구나 하고 느낍니다.

 “韓國의 古建築”이 나올 무렵은 한국 사진쟁이도 “우리 나라 옛집과 옛궁”을 어떤 흐름과 줄기를 좇으며 어떤 이야기를 담도록 사진을 해야 하는가를 곧잘 살피던 때인 한편, 일본 사진쟁이 또한 “일본 이웃에 있는 아름다운 옛집과 옛궁이 살아숨쉬는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밝히고자 바지런히 찾아와서 알뜰살뜰 사진을 찍던 때입니다. 한 자리에 놓고 견주기에는 마땅하지 않으나, 1981년에 ‘村井修’라는 일본사람 사진으로 《李朝の建築》(求龍堂)이라는 두툼한 사진책이 나왔습니다. 이 책에 실린 사진을 보면, 일본 사진쟁이는 ‘조선 무렵 옛 궁궐과 기와집’ 사진을 빛깔사진과 흑백사진 두 가지로 나누어 담았습니다. 빛깔사진으로 해야 할 자리와 때에는 빛깔사진으로 담고, 흑백사진으로 해야 할 곳과 때에는 흑백사진으로 담습니다. 놀랍도록 또렷하면서 밝고 아리땁게 ‘조선 무렵 옛 궁궐과 기와집’을 사진으로 보여주는 고운 사진책인 《李朝の建築》입니다. 이 일본 사진책하고 임응식 님 《비원》과 《경복궁》과 《종묘》와 《칠궁》과 《소쇄원》을 나란히 놓고 생각한다면, 임응식 님 사진은 어느 모로 답답하다 여길 수 있습니다. 빛을 좀더 맑고 밝게 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임응식 님은 굳이 흑백사진으로만 “조선 무렵 옛 궁궐과 기와집”을 담습니다. 어느 사진은 선명도가 깨지고 어느 사진은 살짝 흔들리고 어느 사진은 빛이 잘 맞지 않아 아쉽지만, 이 땅에서 이만 한 집을 이루어 살아가던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즐기며 무엇을 아끼려 했는가 하는 생각을 사진마다 골고루 담아 놓습니다. 사진길을 오랫동안 걸어온 ‘임응식이라는 손꼽히는 사진쟁이’ 이름이나 얼룩을 느낄 수 없는 사진을 선보이는 “韓國의 古建築”입니다. 임응식이라는 사진쟁이가 내놓은 작품을 보라는 “韓國의 古建築”이 아니라, 이 나라 옛 궁궐과 기와집을 처음 지은 일꾼들 땀냄새하고 이 궁궐과 기와집에서 하느작거리며 노닐던 사람들 삶결을 읽으라 하는 이야기가 서린 “韓國의 古建築”입니다. 그래서, 사진 작품으로 치자면, 또 이 나라 옛 궁궐과 기와집 매무새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사진으로 보자면, 일본 사진쟁이가 이룬 《李朝の建築》이라는 책이 더할 나위 없이 멋있습니다. 이와 달리, 사진하는 넋과 사진기를 쥔 손길에다가 사진으로 이루어 사진으로 나누려는 눈물과 땀내로 돌아보자면, 여러모로 어수룩한 구석이 남아 있으면서 “이 나라 옛 궁궐과 기와집”을 읽는 새로우며 남다른 생각과 밑눈을 베풀어 준 “韓國의 古建築” 다섯 권이 그지없이 고맙습니다. 저는 이 다섯 권 가운데 4번 《七宮》 사진책을 몹시 아낍니다. 사진을 들여다보며 그저 좋아 웃습니다. 기와집이란 풀집과 달리 권력과 이름과 학문과 돈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집인데, 이러한 기와집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고 ‘사람 기운이 똑같이 어려 있’음을 사진으로 아기자기하게 엮어 냅니다.

 1979년에 나온 《현대한국사진작가선 : 임응식》(시각)이라는 사진책을 펼치면 이경성 님이 임응식 님 사진을 읽어낸 글이 한 꼭지 실려 있는데, 마지막을 다음처럼 맺습니다. “사실 그(임응식)의 말대로 오늘의 평면 예술에는 사진술을 이용한 많은 회화와 판화가 있는 것이다. 그들은 비록 사진술을 썼다손 치더라도 그들의 궁극의 목적이 회화이므로 사진은 아니다. 그렇다면 사진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하여 사진작가 임응식은 ‘사진은 기록성과 진실성을 담은 평면예술이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4343.8.6.쇠.ㅎㄲㅅㄱ)


― 韓國의 古建築 ④ 七宮 (임응식,광장,1977/판 끊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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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토의 민들레
윤주영 / 호영출판사 / 199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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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촉촉한 가슴에서 저절로 샘솟는 고운 사진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13] 윤주영, 《동토의 민들레》(호영,1993)


 잘 찍는 사진, 또는 잘 찍은 사진하고는 동떨어졌을 뿐더러, 훌륭한 사진이나 놀라운 사진이나 대단한 사진이나 좋은 사진하고도 멀거니 떨어진 윤주영 님 사진을 읽습니다. 1928년에 태어나 여태껏 사진기를 힘차게 쥐는 당신은 1928년에 태어나 이제껏 사진기를 당차게 쥐는 최민식 님하고 동갑내기입니다. 윤주영 님은 당신이 예순다섯이던 1993년에 내놓은 사진책 《동토의 민들레》에서 “사실 내가 2∼3년만 일찍 태어나 국민학교만 마치고 집에서 농사일이나 거들고 있었다면 나도 영락없이 이곳에 끌려와 그들이 살아온 세월처럼 형용할 수 없는 고초를 겪을지도 모를 일(126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윤주영 님이 러시아에서 쭈그렁 할아버지로 지내는 가운데 최민식 님이 러시아로 사진 취재를 떠나 만나는 사이가 되었을 수 있어요. 그러나저러나, 얼어붙은 땅 러시아 사할린에서 겪는 한겨레붙이 아픔과 슬픔이란 ‘강제이주’ 하나뿐 아니라 ‘강제이주에 재이주에 재재이주’까지 덧달립니다. 이루 말로 담아내기 힘들고, 이루 사진으로 실어내기 벅찬 눈물입니다.

 그러나 이 얼어붙었다는 땅에서도 한겨레붙이는 서로 믿고 기대어 사랑을 나눕니다. 다 함께 손잡고 어깨동무하며 따순 품을 나눕니다. 끔찍한 나날을 겪은 할머니와 할아버지 가운데에는 ‘러시아 녀석하고 내 손주가 시집장가 가는 꼴을 못 본다’고 외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 한겨레붙이하고 똑같이 한겨레붙이라 할 만한 남녘땅 한겨레붙이는 러시아에서 살아가는 러시아사람하고 맞대 놓을 때에 얼마나 한겨레붙이답다 할 만한지 궁금합니다.

 재일조선인 소설쟁이 유미리 님은 한국에서 온 유학생 아무개가 다니는 대학교에 놀러갔을 때 이야기를 당신 수필책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2000)에 적바림합니다. 당신을 “유입니다.” 하고 말했더니 한국사람이냐고 묻기에 한국사람이라 하니까, 한국사람치고 일본말을 참 잘한다고 하기에 일본에서 태어났으니 그렇다 했는데, 한국 유학생은 “그럼 일본사람이잖아요?” 하고 물었고, 유미리 님은 “아니, 그러니까 재일한국인 2세인데요.” 하고 대꾸했는데, 막상 돌아온 말이란 “그게 무슨 소리죠?”였다고 적바림합니다.

 윤주영 님은 다큐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인물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이야기사진이나 상업사진을 찍지도 않습니다. 이른바 프로사진이 아닌 윤주영 님 사진이라 할 텐데, 윤주영 님은 당신이 좋아하는 결대로 다리품을 팔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이런 이름도 어울리지 않고 저런 갈래도 걸맞지 않습니다. 그예 사람들 살아가는 품새를 다루고, 그저 사람들 복닥이는 매무새를 들여다봅니다.

 누구나 사진을 찍는다 할 때에는 ‘저마다 아는 만큼’ 찍는다 여길 수 있습니다만, 저마다 아는 만큼 사진을 찍는 일이란 없습니다. 언제나 ‘저마다 살아가는 만큼’ 사진을 찍습니다. 저마다 살아가는 만큼 사람과 삶터를 바라보고, 저마다 살아가는 만큼 사진기를 장만해서 단추를 눌러 사진 하나 일굽니다.

 이리하여, 윤주영 님 사진하고 견주면 솜씨 빼어나거나 틀이 괜찮거나 생각이 좀 깊거나 한달지라도 윤주영 님 사진만큼 이야기가 넉넉하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왜냐하면, 윤주영 님처럼 살아내지 못하면서 다큐멘터리라는 이름을 섣불리 붙인다든지, 윤주영 님처럼 다리품과 손품을 팔지 않으면서 사진쟁이라는 허울을 우쭐거리면서 쓴다든지 한다면, 보잘것없는 사진 작품만 잔뜩 쏟아냅니다. 가만히 보면, 스스로 ‘다큐’라 이름 붙일 때에는 다큐사진이 아니고, 제 입으로 ‘인물’이라 이름 달면 인물사진이 아닙니다. 이때에는 문화이고 예술이고조차 아닌 겉멋이나 겉치레에 머물고 맙니다.

 윤주영 님만큼이라도 다리품을 팔거나 손품을 들이면서 사진길을 걷는다면 이 나라 사진쟁이들은 얼마나 크게 발돋움할까요. 돈이 있고 겨를이 많아 윤주영 님이 이렇게 다리품과 손품을 팔았겠습니까. 나한테 돈이 아주 많거나 겨를이 참말 넉넉하다면 윤주영 님은 저리 가라 하도록 멋진 사진을 내놓을 수 있는가요.

 사진책 《동토의 민들레》를 들여다보면, 윤주영 님이 사할린 한겨레붙이를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한결 살가이 보듬지 못했구나 하고 느낄 만합니다. 윤주영 님 스스로 밝히기도 하는데, “그러나 이 사진집을 통해 사할린 교포들의 삶을 담아낸다는 것 자체가 애초부터 무리한 욕심이었던 듯싶다. 그들이 50년 동안 겪고 살아온 그 엄청난 수난의 세월을 짧은 시간에 담아내는 데는 어차피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127쪽/윤주영).”는 말이 아니더라도 몇 차례 사진여행을 떠나 수십 또는 수백 통 필름을 썼달지라도 ‘러시아 사할린땅 한겨레붙이’ 삶을 오롯이 담아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작 한 차례 나들이를 했으면서도 얼마든지 러시아 사할린땅 한겨레붙이 삶을 알뜰살뜰 여밀 수 있어요. 윤주영 님은 아직 이 대목을 깨닫지 못하시는데, ‘미리 촬영 대상을 공부하고 살피거나 알아본다’고 하든 ‘사람들하고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사진을 담는다’고 하든 이야기사진이나 다큐사진 하나 태어나지 않습니다. 어떠한 사진이든, 우리들은 바로 이 자리에서 내 삶을 곰삭이며 내 깜냥과 주제와 그릇에 걸맞게 내 삶을 사진 하나에 실어내려고 할 때에 이야기 한 자락을 사진 하나에 살포시 얹으며 삶꽃 어여삐 일굽니다.

 잘 찍을 까닭이란 없습니다. 깊거나 놀랍거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줄 까닭이란 없습니다. 곧거나 옳은 목소리를 외칠 까닭이란 없습니다. 멋지거나 그윽한 그림을 보여줄 까닭이란 없습니다. 사진은 사진이지 ‘글’도 ‘그림’도 아닙니다. 사진을 글인 듯 여기면서 줄줄줄 꼬리말을 달아 놓는다면 부질없습니다. 사진을 그림처럼 받아들이면서 그럴싸한 모습을 달달달 늘어 놓는다면 덧없습니다.

 더 많은 필름이나 더 좋은 장비나 더 기나긴 겨를로는 사진을 이루지 못합니다. 더 너른 사랑과 더 따순 믿음과 더 깊은 마음으로 사진을 이룹니다. 내 삶부터 따뜻하게 여미어 주셔요. 내 가슴을 촉촉히 적셔 주셔요. 내 눈망울을 맑게 빛내어 주셔요. 사진은 저절로 우러납니다. (4343.12.1.달.ㅎㄲㅅㄱ)


―  (윤주영 사진,호영 펴냄,1993.3.20./2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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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사이로 imagepress 2
이미지프레스 엮음 / 청어람미디어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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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과 살아가는 하루
 [찾아 읽는 사진책 10] imagepress, 《사람들 사이로》(청어람미디어,2006)



 다큐멘터리 사진쟁이 모임인 ‘이미지프레스’는 《여행하는 나무》(청어람미디어,2005)를 첫 책으로 삼으며 꾸준하게 사진이야기를 내놓겠다고 했으나, 2006년 12월에 《사람들 사이로》를 내놓고 나서 2010년 11월까지 셋째 사진이야기를 내놓지 못합니다. “많은 독자들이 첫 번째 책을 찾아 주셔서 17개월 만에 2000부가 넘게 판매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더욱 분발해서 매진의 속도를 높여 보겠습니다(9쪽/이상엽).”는 말은 덧없는 꿈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진을 말하거나 사진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 열일곱 달에 걸쳐 2000부가 팔렸다면, 적게 팔렸다 할 만하면서 많이 팔렸다 할 만합니다. 예쁘장하게 엮은 모양새를 헤아린다면 적게 팔렸고, 사진책 장만하는 사람이 그리 안 많음을 헤아리면 무척 많이 팔린 셈입니다.

 생각해 보면, 사진기 장만하는 사람은 참으로 많습니다. 새로 나오는 제법 비싸다 싶은 사진기조차 꽤 많이 팔립니다. 너무 뻔한 이야기라 할는지 모르겠는데, ‘사진을 알고 즐기’려는 매무새에 앞서 ‘더 값나가는 사진 장비 갖추’려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사진을 제대로 가르치는 곳이 없는 탓이라 하는 목소리가 있으나, 이보다는 우리 삶터 얼거리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이는 사진밭에서만 느낄 아쉬움이 아니라, 글밭이든 그림밭이든 노래밭이든 학문밭이든 사회운동밭이든 매한가지예요. 이 나라 삶터가 온통 돈을 많이 벌든 이름을 크게 떨치든 힘을 대단히 거머쥐든 하는 쪽으로 흐르며 굳어졌거든요, 서로를 사랑하며 살거나 다 함께 착하게 어깨동무를 하거나 콩 한 알 나누는 너그럽고 따스한 넋을 아끼는 흐름이란 거의 찾아보지 못합니다. 언제나 겨루기요 노상 다툼이며 늘 숫자놀음입니다. 사진밭 한 갈래만 착하거나 참되거나 곱게 나아가기를 바랄 수 없어요.

 사진을 이야기하는 책이자 사진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책 《사람들 사이로》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열네 가지 이야기를 노순택·이기명·이상엽·이재갑·정은정·Area Park·김홍희·한대수·이규철·박평종·이치열, 이렇게 열한 사람이 들려줍니다. 그런데 열한 사람 이야기를 열한 가지 빛깔로 느낀다거나, 열네 가지 이야기를 열네 빛깔 무지개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람 사이에 있고, 사람 사이에는 늘 사람이 있는데, 굳이 《사람들 사이로》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사진삶을 이야기하려고 했다면 ‘왜 사람이고, 왜 사람 사이이며, 왜 사람 사이 사진인가’ 하는 대목을 건드려야 합니다. 이 대목을 건드리지 않고 이름만 그럴듯하게 “사람들 사이로”라 외친들 사람들 사이에서 사진을 나누는 일이 되지 못합니다. “브 나르도”라 외친다거나 “민중 사이로”라 외친다 해서 참말 여느 사람들 사이로 스며들지는 않습니다. 여느 사람들 사이로 스며드는 일이란 외침이 아니라 삶이기 때문입니다. 따로 외칠 까닭이 없고 애써 외칠 겨를조차 없습니다. 그저 그대로 조용히 살아가며 그예 고스란히 예쁘게 살아가면 넉넉합니다.

 《사람들 사이로》에서 노순택 님은 말합니다. “나는 사진관을 운영하기 전에도 많은 대추리, 도두리의 농민들을 필름에 담아 왔다. 노동의 현장에서 그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투쟁의 현장에서 만난 사람은 더 많았다. 그들은 그들이 원치 않았던 투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투사들을 필름에 담아 왔다. 그렇지만 황새울 사진관에서 내가 만난 그들은 달랐다. 고운 한복을 차려입고 수줍게 웃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것은 정녕,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자신의 모습이었으리라(22쪽/노순택).” 노순택 님은 《사람들 사이로》에서 비로소 당신이 걸어갈 다큐사진 길 한 자락을 얼핏 보았구나 싶은데, 이렇게 얼핏 본 다큐사진 길 한 자락을 조금 더 살가우며 기쁘게 붙잡으며 오늘 하루 사진삶을 즐기는지 어떠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어느 사진이든 사진기를 쥔 사람이 바라보는 그대로 찍습니다. 이 결을 읽어 준다면 고맙습니다. 어느 사진이든 사진쟁이가 생각하는 그대로 담습니다. 이 무늬를 예쁘게 살펴 준다면 반갑습니다. 어느 사진이든 ‘사진을 아는’ 사람이 꿈꾸는 대로 이야기를 엮습니다. 이 느낌을 고이 얼싸안아 준다면 넉넉합니다.

 다만, ‘《사람들 사이로》라는 사진책 하나로 엮은’ 이만큼 해도 사진은 퍽 볼 만합니다. 이렇게 해도 사진은 꽤 값어치있습니다. 그러나, 이만큼 하기에 사진은 사람들 사이로 스미지 못합니다. 이렇게 하니까 사진쟁이 삶이 여느 사람 삶하고 동떨어집니다.

 사진쟁이가 ‘사진에 찍히는 사람’이 찍혀서 적바림되고픈 모습을 찍고 싶어 하기란 참 힘들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힘들어야 할까 궁금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든 사진애 찍히는 사람이든 똑같이 사람입니다. 모두 같은 목숨이요, 다 함께 사랑스러운 벗님이에요.

 아주 흔한 말이지만, 사진쟁이들은 사진기를 쥐기 앞서, 또 다큐사진이란 이름을 걸기 앞서 생각해야 합니다. ‘내 사진에 찍히는 사람이 나를 사진으로 찍는다면 난 어떤 모습으로 이 사람 앞에 마주하거나 바라보며 서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느 마을사람이 사진쟁이를 사진으로 찍겠다고 할 때에, 다큐사진을 하는 분들은 어떤 느낌 어떤 넋 어떤 매무새가 될는지 곱씹어야 합니다.

 사진쟁이 이재갑 님 또한 말합니다. “약 6개월의 시간이 흘렀을 때, 비로소 혼혈인 형님들이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참으로 힘든 시기였다. 일정한 수입이 없던 당시로서는 많은 어려움은 당연했고, 이는 오히려 좋은 작업을 하기 위한 절대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참으로 행복한 시간들이었다(83쪽/이재갑).” 그래요, 사진을 찍으며 사람들을 만나는 사람들은 참 즐거운 나날을 보냅니다. 그런데, 사진기를 들었기에 서로 즐거운 나날을 보내지는 않습니다. 붓과 종이를 들든, 연필과 수첩을 들든 서로 즐거이 어울릴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안 들어도 기쁘게 어깨동무할 수 있어요. 여러 겨레 피가 섞인 사람이든 이주노동자이든 여느 사람이든 다 똑같습니다. 우리들은 눈으로 사람을 보니까 여러 겨레 피가 섞인 사람을 달리 바라보곤 하는데, 앞을 못 보는 사람들한테는 여러 겨레 피가 섞인 사람이란 ‘무엇이 다른 사람’이 될까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들한테 영어를 쓰는 사람이나 한국말을 쓰는 사람이나 ‘어떻게 다른 사람’이 되려나요.

 다큐사진을 하는 분이 아니더라도 사람을 사람 그대로 받아안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도시에서 시내버스를 모는 분들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분들이, 학문을 파고들어 깊은 뜻을 깨우친다는 분들이 어떤 사람을 ‘어떤 사람’으로 헤아리면서 서로를 마주보는지 알쏭달쏭합니다. 다큐사진을 왜 자꾸 멀리서만 찾고, 내 삶터에서 내 살붙이하고 못 보듬는지 아리송합니다. 《사람들 사이로》에서는 사진책 《윤미네 집》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오늘 다큐사진을 한다’는 분들 가운데, 또 이미지프레스 모임 분들 가운데 ‘내 삶터가 뿌리내린 동네 사람들 이야기’를 오순도순 아기자기 알콩달콩 살랑살랑 들려주는 분은 아직 없습니다.


.. 나는 여행할 때마다 경치보다는 현지 사람들의 모습을 더욱 중요시한다. 그곳의 환경 속에 사는 그 사람들은 어떠한 것들 때문에 고민하고 기뻐하는지가 궁금하다 ..  (162쪽/한대수)


 사진책 《사람들 사이로》를 읽으며 한대수 님 이야기를 빼고는 그리 가슴에 와닿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다른 분들 사진이나 글은 자꾸 겉돌고 헛돌며 맴돈다고 느낍니다. 여행하는 사람이 있으면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머무는 사람이 있으면 아픈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듯이 걱정하는 사람이 있고, 기뻐하듯이 슬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나 사람은 있습니다. 어디에서나 사진이고, 어디에서나 다큐멘터리입니다.

 “대중들의 교육·문화·예술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 높아진다고 해도 사진의 촬영과 공표에 있어서 초상권의 문제는 늘면 늘었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두 번째로, 찍는 자와 찍히는 자 사이에 열린 마음으로 나누는 적극적인 의사소통이 부재했다는 것이다(205쪽/이치열).” 같은 이야기는 참 좋습니다. 여러모로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밑앎입니다. 애써 《사람들 사이로》 같은 책에서 한 꼭지로 들어갈 만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진기를 쥔 사람은 사진기를 쥐기 앞서 밑앎으로 익힐 이야기입니다. 낱말을 바꾸어 글쟁이나 그림쟁이나 연극쟁이나 영화쟁이나 방송쟁이나 신문쟁이 누구나 깊이 곱씹을 이야기입니다. 더욱이, 《사람들 사이로》는 이런 밑앎이 아닌, 참말 사진쟁이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얼크러지거나 설크러지며 빚어낸 사진삶을 차곡차곡 실어내야 해요. 사진쟁이 둘레 가장 너르며 흔한 이야기를 가장 고우며 밝은 사진삶으로 엮어내야 해요. 누구나 가진 사진기로 누구도 못 담는 사진삶을, 다른 누가 아닌 ‘다큐사진 모임 사진쟁이’부터 참다우며 제대로 깨닫거나 받아들이면서 신나게 나누는 모습을 알뜰살뜰 풀어놓아야 합니다.


.. 카메라를 들고 있으면서도 내가 기억해야 할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보낸 소중한 시간을 놓치고 있었구나, 했다 ..  (113쪽/정은정)


 가만히 보면, 《사람들 사이로》는 다큐사진을 하는 이 나라 사진쟁이들 어설픈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거울이라 할 만합니다. 다큐사진을 한답시고 설치는 남우세스러운 모습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뉘우침책(고백록)’인지 모릅니다.

 다큐사진이든 상업사진이든 사진이든 하나같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하고 복닥이는 즐겁고 애틋한 나날’을 담는 손짓 눈짓 몸짓입니다. 그리고 사랑짓 믿음짓 나눔짓이에요.

 단추질에서 그치는 사진이 아니기를 빕니다. 단추질에서 헛도는 다큐사진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단추질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는 사진모임이 아니기를 꿈꿉니다. 단추질과 볼펜질에 앞서, 사람들하고 사랑스러운 품앗이요, ‘사람들’이란 바로 나부터 함께하는 ‘그 사람들’임을 살갗으로, 뼈마디로 받아들일 나날을 기다립니다. (4343.11.28.해.ㅎㄲㅅㄱ)


― 사람들 사이로 (이미지프레스 엮음,청어람미디어 펴냄,2006.12.22./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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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현의 얼굴 - 그의 카메라가 담는 사람, 표정 그리고 마음들
조세현 지음 / 앨리스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비매품으로 만든 사진책을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에 조세현 님 다른 책에 이 글을 붙입니다. 아무쪼록, '최정상'이라느니 하는 부질없는 이름에 얽매이지 않기를 바라고, 다른 사람들도 이런 말을 함부로 덧달지 않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사진은 그냥 사진입니다. 

 


 더 아름다운 얼굴사진은 어디에도 없다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27] 조세현, 《Self-portrait of Postenchians》



- 책이름 : Self-portrait of Postenchians
- 사진 : 조세현
- 글 : 유대식, 황원미
- 영어 번역 : 유대식
- 펴낸곳 : POSTECH (2006.11.11.)
- 시중에 팔지 않는 책



 (1) 얼굴사진 찍기


 모든 사진은 얼굴을 찍습니다. 사람을 찍든 돌을 찍든 나무를 찍든 새를 찍든 구름을 찍든 바다를 찍든 얼굴을 찍는 사진입니다. 낯짝을 대놓고 찍을 때에만 얼굴을 찍는 사진이 아닙니다. 한 사람한테 고이 드러나는 빛깔을 찍는 사진이기에 얼굴사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돌에 깃든 얼굴, 나무에 스민 얼굴, 새한테 감도는 얼굴, 구름에 비치는 얼굴, 바다에 어린 얼굴을 차근차근 담는 사진입니다.

 언젠가 어디에선가, 사진쟁이 조세현 님을 일컬어 ‘얼굴 또는 사람 사진을 가장 잘 찍는 사진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피식 하고 웃었습니다. 도무지 터무니없기만 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가지를 가장 잘 찍는다 할 사진쟁이란 있을 수 없을 뿐더러, 사람이든 얼굴이든 가장 잘 찍을 사진쟁이 또한 나타날 수 없습니다.

 누구나 제 삶에 걸맞게 사진을 찍습니다. 누구나 저 스스로 좋아하는 모습을 제 깜냥껏 찍습니다. 잘 찍고 못 찍고란 따로 없습니다. 내 마음을 담아냈느냐 못 담아냈느냐만 있습니다.

 사람 모습을 사진으로 잘 찍었다고 할 때에는, 이 사진쟁이 한 사람이 바라보는 사람을 이 사진쟁이 넋으로 잘 담아냈다는 뜻입니다. 더도 덜도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 모습을 사진으로 잘 찍었다”는 말은 함부로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진쟁이 한 사람은 사람을 찍은 사진이 아니라 “사진쟁이로서 어떤 사람들을 바라보며 느끼어 절로 샘솟는 이야기를 찍은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딸아이 아빠보다 딸아이 사진을 잘 찍을 사람이란 없습니다. 다만, 딸아이 아빠가 바라보지 못하거나 느끼지 못하는 모습을 남달리 잡아채어 찍을 수 있는 사진쟁이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딸아이 아빠가 아닌 딸아이 아빠 이웃집 아저씨도 매한가지입니다. 딸아이 아빠가 못 보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얼마든지 봅니다. 할머니도 보고 동무도 보며 동생도 봅니다. 언니도 보고 엄마도 보고 낯선 길손도 봅니다. 누구나 제 깜냥껏 제 눈길에 따라 제 삶결을 아로새기는 사진찍기일 뿐입니다.

 사랑스러운 짝꿍을 사진으로 담을 때에는, 사랑스러운 짝꿍이 나한테 얼마나 사랑스러운가를 생각하면서 사진으로 담을 노릇입니다. 사랑스러운 짝꿍을 애써 찍었으나 무언가 어수룩하거나 예쁘장하지 않다고 느꼈다면, 사진기를 쥔 나 스스로 내 사랑스러운 짝꿍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를 깨닫지 못하거나 생각하지 못하거나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진기가 싸구려였다라든지 필름이 나빴다라든지 날씨가 궂었다라든지 솜씨가 없었다라든지 하는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 마음밭이 아직 모자란 탓입니다.

 사진관 일꾼은 누구나 사람사진을 잘 찍습니다. 왜냐하면 사진관 일꾼이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을 때에 ‘이 사진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아주 잘 알기 때문입니다. 큰회사에 낼 서류에 붙이는 사진이라든지, 대학입시 서류에 붙이는 사진이라든지, 여권에 붙이는 사진이라든지, 살림집 마루에 큼직하게 붙이는 사진이라든지, 지갑에 넣고 간직할 사진이라든지, 누군가한테 선물할 사진이라든지 …… 사진관 일꾼은 쓸모와 쓰임새에 맞추어 사진을 알차게 찍습니다. 사람사진을 가장 잘 찍는다는 말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만, 이런 말을 하자면 다른 사람이 아닌 사진관 일꾼한테 해야 올바릅니다.

 깊어 가는 밤나절, 아빠가 자꾸 부스럭거리면서 글깨나 끄적인다고 셈틀을 켜 놓고 있자니 아이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깹니다. 아빠는 글 좀 깨작거리고픈 나머지 아이한테 골을 부립니다. 그렇지만 셈틀을 끕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보아도 아빠가 잘못했으니까요.

 셈틀을 끈 아빠는 아이를 무릎에 누입니다. 한동안 누이다가 자리에 눕힙니다. 자리에 눕힌 다음 머리칼을 쓰다듬습니다. 한참 이대로 있자니 아이가 “물!” 하고 외칩니다. 아빠는 물을 갖다 바쳐야 합니다. 물을 마신 아이는 다시 눕습니다. 무언가 흐뭇한 얼굴입니다. 아빠도 아이 곁에 모로 눕습니다. 아이는 “이불!” 하고 외칩니다. 네, 이불을 끌어올려 드립지요. 아이는 한참을 더 뒤치락 엎치락 꼼지락 꾸무적 꼼틀꿈틀 하더니 한 시간쯤 걸려 바야흐로 고이 꿈나라로 빠져듭니다.

 아이가 한창 꼼지락거리며 두 손으로 머리칼을 만지작거릴 때에 디지털사진기를 들어 감도를 1600으로 놓고 셔터빠르기는 3초나 4초쯤으로 한 다음 사진 하나 찍어 볼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아빠가 누워 있다가 일어난 줄을 깨닫고 저도 일어나겠다며 ‘두 손으로 머리칼 만지작거리기’를 그칩니다.

 아빠는 속으로 ‘젠떡!’ 하고 외칩니다. 이내 뉘우칩니다. 아빠는 사진쟁이라서 사진으로 아이 삶을 담아내 주고 싶지만, 이런 모습을 꼭 사진으로 담아야 하지는 않습니다. 눈으로 보았으면, 눈을 거쳐 머리를 지나 가슴으로 포근히 안으면 됩니다. 그림을 그리듯이 가슴에 새기면 될 아이 삶이고 모습이며 몸짓입니다. 내 아이를 내 무릎에 몇 분 동안 누여야 아이를 사랑하는 삶이 되지 않습니다. 내 아이를 눕히고 몇 분 동안 몇 가락 잠노래를 불러 주어야 아이를 아끼는 모습이 되지 않습니다. 아이 곁에서 아이가 씩씩하거나 튼튼히 크도록 지켜봐 주는 시간이 하루에 얼마쯤 되는가에 따라 아이를 보살피는 몸짓이 되지 않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고, 함께 얼싸안는 삶입니다. 사진은 천천히 얻습니다. 삶무늬를 아로새기는 얼굴사진이란 함께 살아가는 사람끼리 언제 어디에서나 넉넉하게 얻고 나눕니다. 삶이야기를 풀어놓는 얼굴사진이란 함께 얼싸안는 삶에서 그때그때 숱하게 깨알처럼 쏟아지면서 맛난 이야기 열매로 새삼스레 주렁주렁 달립니다.

 사진은 이론이 아니고, 사진은 손재주가 아니며, 사진은 장비놀음이 아닙니다. 사진은 사랑어린 손길이고, 사진은 따사로운 눈길이며, 사진은 너그러운 마음길입니다.

 누구나 흔히 찍는 얼굴사진입니다. 누구나 참 잘 찍는 얼굴사진입니다. 아무개 사진쟁이를 놓고 얼굴사진이든 사람사진이든 가장 잘 찍는다고 일컫는다면, 이런 소리는 이런 소리를 듣는 사진쟁이한테부터 못마땅하거나 안 어울리거나 몹쓸 소리입니다. 이런 소리를 늘어놓는 분들 또한 참으로 슬픈 넋입니다. 우리는 사진을 보고 사람을 보며 삶을 보아야지, 허울이나 겉치레나 껍데기를 볼 까닭이 없습니다.


 (2) 포항공대 찍기


 포항공대 스무 돌을 맞이하여 나온 사진책 《Self-portrait of Postenchians》를 봅니다. 비매품으로 나온 사진책이기에 헌책방에서 뜻밖에 만납니다. 다른 자리에서는 이 사진책을 마주할 길이 없습니다. 포항공대 스무 돌을 기린다는 뜻은 거룩합니다. 다만, 이렇게 기리는 거룩한 사진책에 붙이는 이름이 왜 이 모양으로 알파벳투성이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포항공대 스무 돌을 기리는 사진책인 탓에 이런 이름이 붙겠구나 싶습니다. 지난날 포항제철 몇 돌인가를 기리는 사진책이 하나 나왔을 때에도(이때에도 비매품으로 나왔고, 저는 이 사진책을 아주 마땅히 헌책방에서 만났습니다) ‘에드워드 김’ 님이 사진으로 담은 이 사진책은 온통 알파벳투성이였습니다. 아마 《영일만의 기적》이라는 말마디를 영어로 “미라클 오브 영일만”이라 했던가 싶습니다. 알파벳으로 적는 책이름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 포스텍이 걸어온 20년은 한국 대학교육에 변화의 물길을 만들고 우리의 이공분야에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면서 21세기의 과학기술을 이끌어 나갈 뛰어난 인재를 길러내는 길이었다. 짧은 역사에 비해 먼 길을 왔다고 자부한다. 이 포토에세이는 그 기록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앞을 바라보면 아직 가야 할 길은 멀다. 그래서 ‘스무 살 포스텍’의 과거와 현재를 정리하고 성찰하면서 제2의 도약을 준비하는 것이다. 기다리고 있는 길을 포스테키안은 선배들이 물려준 사명의식, 창의정신, 도전의식으로 목을 축이며 마라토너처럼 가기로 한다. 마침내 터져나올 환호성을 꿈꾸면서 ..  (책날개 소개글)


 사진쟁이 조세현 님은 《Self-portrait of Postenchians》를 아로새기는 사진을 찍는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지난날 포항체절 기림책은 에드워드 김 님이 사진을 찍었으니, 이 자리 이 기림책에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 우뚝 서는 일이란 사진쟁이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큰 이름값이요 보람이며 금메달이라 할 만합니다. 이 나라 한국에서 첫손을 꼽을 만한 사진쟁이가 아니고서야 포항제철이든 포항공대이든 하는 곳 삶자락을 담아낼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 뽑힐 수 없으니까요.

 사진책 《Self-portrait of Postenchians》를 넘기면, 이 사진책을 내놓고자 한 포항공대 뜻마따나 씩씩하고 똑똑하며 아름다운 젊은 학생들이 웃음꽃을 피우는 모습이 가득합니다. 슬기로운 머리와 튼튼한 몸, 땀흘리는 배움과 온누리를 밝히는 넋이 사진마다 고이 묻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참말로 포항공대는 나라안에서 손꼽는 훌륭한 대학교입니다. 나라밖으로 널리 알리며 북돋울 만한 멋진 배움터입니다.

 포항공대 사람들이 조세현 님을 ‘포항공대 역사 기록꾼’으로 받아들여 이 책을 엮을 만하다고 느낍니다. 다른 사진쟁이였다면 이 책에 담긴 사진 같은 모습을 선뜻 담아내지 못했겠지요.


.. 지난 늦겨울에 포스텍으로부터 개교 20주년 기념 화보집에 대한 제안을 받았을 때, 솔직히 저는 부담감을 느꼈습니다. 20년이라는 길지 않은 역사 속에서 어떤 모습을 담아낼 수 있을까, 이런 걱정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일 년 가까이 포스텍에서 보낸 저의 사진 여정은 큰 행운이었습니다. 세련된 대학환경, 창조적인 분위기, 예지적이면서도 정열적인 젊은 얼굴들이 색다른 영감을 일깨웠으며, 그 영감은 멋진 화보집을 탄생시킬 훌륭한 에너지로 바뀌었습니다 ..  (197쪽/조세현)


 사진쟁이는 사진으로 말합니다. 사진쟁이가 사진으로 말할 때에는, 그동안 갈고닦은 사진 솜씨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사진쟁이는 사진기를 쥔 채 보내온 나날을 사진 한 장에 갈무리하며 말합니다.

 사진책 《Self-portrait of Postenchians》를 찍은 조세현 님은 당신이 걸어온 나날 이야기를 이 사진책에 담긴 모습들에 살포시 담아서 내려놓습니다. 사진책 이름은 포항공대 사람들이지만, 사진책 이야기는 ‘포항공대 사람들을 바라본 사진쟁이 조세현 님이 걸어온 길’입니다. 주문(부탁)을 받아 찍은 사진이기에 주문(부탁)한 대로 사진을 찍기 마련이지만, 사진관 일꾼이 아니고서야 사진쟁이 마음결을 사진에 담을밖에 없습니다.

 뭇사람과 뭇평론가는 사진관 일꾼이 일구는 사진을 으레 깎아내리는데, 사진관 일꾼이 사진을 찍을 때에는 당신 이름을 사진에 살며시 내려놓거나 스며 놓지 않습니다. 어느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는 ‘사진관 사진’인데, 이런 사진관 사진이면서 ‘사진관마다 다 달리 찍는 사진’입니다. 모르기는 모르지만, 제가 포항공대 관계자였으면 포항공대 앞에 자리한 사진관 일꾼한테 《Self-portrait of Postenchians》를 만들어 달라고 주문(부탁)했습니다. ‘포항공대 사람들을 사진쟁이 깜냥껏 읽어내어 담아내는 사진’이 아닌 ‘포항공대 사람들 스무 해 삶을 꾸밈없이 담아내는 사진’을 바란다면 말이지요.


.. 기숙사를 나서는 등교시간, 기숙사로 돌아가는 하교시간, 그리고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나면 포스텍 캠퍼스는 거의 하루 종일 적막감에 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강의실과 연구실에는 뜨거운 열정이 넘치고 있으며, 이것을 포스텍의 내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름방학 동안에도 연구실과 실험실에는 포스테키안의 아름다운 눈동자들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 최첨단 디지털 도서관인 청암학술정보관은 대학 건축물에 대한 저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한 순간에 무너뜨릴 만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고요한 공간에서 과학 한국의 밝은 미래를 미리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문득 고요를 깨야 했던 저의 카메라 셔터 소리는 지금 생각해도 민망하고 미안했습니다 ..  (197쪽/조세현)


 사진쟁이 조세현 님이 사진을 못 찍는다거나 엉성히 찍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진쟁이 조세현 님은 ‘사진쟁이 조세현 이야기’만을 사진으로 담을 줄 압니다. 사진쟁이 조세현 님은 ‘사진관 일꾼’이 아닙니다. 사진관 일꾼이 아닌 조세현 님은 이처럼 주문(부탁)을 받은 사진을 찍을 때에 어김없이 ‘조세현 이름표’를 달아 놓습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사진을 찍지는 못하겠지요. 그러니까, 이 사진책 《Self-portrait of Postenchians》는 우리 둘레에서 마주하는 포항공대 사람들 삶이나 모습이나 몸짓이 아닌, ‘사진쟁이 조세현 님 눈에 비치며 사진쟁이 조세현 님 마음에서 우러나는 이야기로 다시 그려지는’ 대학생일 뿐입니다. 조세현 님으로서는 포항공대 아닌 서울대 사람들을 찍을 때이든, 연세대 사람들을 찍을 때이든, 이화여대 사람들을 찍을 때이든, 조선대 사람들이나 광운대 사람들을 찍을 때이든 언제나 똑같을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이 대학 사람을 찍든 저 대학 사람을 찍든 ‘조세현 이름표’가 붙기 마련이며, ‘어느 대학 사람’인지는 따로 꼬리말을 달지 않고서는 알아챌 수 없습니다. 《Self-portrait of Postenchians》라는 사진책은 포항공대 사람들이라는 꼬리말이 붙었으니 비로소 포항공대 사람들인 줄 알지, 이런 꼬리말이 없으면 포항공대 사람들 사진책인지 아닌지 알 노릇이 없을 뿐더러, 포항공대 스무 돌을 기리는 사진책인지 아닌지조차 알아낼 수 없습니다.

 거듭 밝히는데, 사진쟁이 조세현 님 사진이 알맞지 않거나 어울리지 않거나 올바르지 않거나 좋지 않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조세현 님은 조세현 님 사진만 찍는 사진쟁이라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조세현 님은 부디 조세현 님 사진밭을 이루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주문(부탁)을 받아서 사진일을 한다면, 이러한 사진일을 하면서 어느 만큼 벌이가 될 테지요. 돈도 벌고 이름값도 얻겠지요. 그러나 당신 사진밭을 이루지 못할 뿐더러, 당신한테 일을 맡긴 사람들 또한 처음 바라던 대로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맙니다. 사진관 일꾼이 맡아서 사진을 찍어야 할 자리는 사진관 일꾼이 맡아서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조세현 님은 ‘조세현 이야기’가 가장 잘 묻어나는 ‘조세현 사진’ 한길을 즐겁고 신나며 아리땁게 일구어야 합니다.


.. 이 책에서 저는 무엇보다도 스무 살의 젊음과 포부를 마음껏 표현해 보고 싶었습니다. 또한 이공계 연구중심 대학에서 발견한 휴머니즘과 포스테키안의 드높은 기상을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 아직 앵글을 맞추지 못한 캠퍼스의 여러 모습과 소중한 얼굴들이 많은데, 벌써 출간할 때가 되었다니 아쉬움이 큽니다. 아무리 서둘러도 시간의 속도를 따라잡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 ‘스무 살 포스텍’의 놀라운 저력이 미래의 한국 과학을 이끌어 나가리라고 믿으며, 모든 포스테키안들에게 미흡하나마 저의 시각의 혼을 담은 이 화보집을 바칩니다 ..  (197∼199쪽/조세현)


 ‘포항공대 사람들 스무 살 푸른 꿈’이 아닌 ‘사진쟁이 조세현 스무 살 푸른 꿈’을 잘 구경한 사진책 《Self-portrait of Postenchians》입니다. 조세현 님 다른 사진책을 볼 때에도 이와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조세현 님은 ‘얼굴사진이나 사람사진 가장 잘 찍는다는 사진쟁이’가 아니라, ‘다른 사람 얼굴 모습을 빗대어 조세현 님 당신 이야기를 알뜰히 담아낼 줄 아는 사진쟁이’라고 일컬어야 옳겠구나 싶습니다.

 문득 일본 사진쟁이 다카하시 아유무 님 사진이 떠오릅니다. 조세현 님도 다카하시 아유무 님처럼 한결 홀가분하면서 한껏 호젓할 수 있다면, 굳이 포항공대 같은 데에서 일감을 얻지 않고도 얼마든지 밥벌이 잘 될 멋진 사진책을 꾸준히 선보일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처음부터 밥벌이 잘 될 멋진 사진책이 아니라, 밥벌이가 안 되더라도 눈물나고 웃음나는 사랑스러운 사진책을 꾸준하게 우리한테 선보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4343.11.2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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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고양이 - 도시를 누비는 작은 사냥꾼
녹스 사진, 사라 닐리 글, 한희선 옮김 / 예담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드디어 리뷰쓰기가 되네... 이틀 만이다 ㅠ.ㅜ 

 


 찬찬히 다가서면 누구나 찍는 사진
 [찾아 읽는 사진책 9] 녹스·사라 닐리, 《도시를 누비는 작은 사냥꾼, 방랑 고양이》(예담,2007)



 글을 쓰는 사람은 스스로 좋아하는 글을 씁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스스로 좋아하는 그림을 그립니다. 춤을 추는 사람은 스스로 좋아하는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 사람은 스스로 좋아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잘 써야만 쓸 글이 아니고, 잘 그려야만 그리는 그림이 아닙니다. 잘 추어야만 출 춤이 아니며, 잘 불러야만 부를 노래가 아닙니다. 누구나 글이든 그림이든 춤이든 노래이든 즐깁니다. 제 깜냥껏 즐기고 제 마음껏 누립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스스로 좋아하는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찍기로 돈벌이를 하려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좋아하는 사진을 찍기도 할 테지만, 스스로 좋아하지 않더라도 돈을 치를 테니 찍어 달라 하는 사진을 자주 찍어야 합니다.

 스스로 좋아하지 않는 모습에다가 스스로 좋아하지 않는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아내며 돈을 버는 삶이라지만, 뜻이 있으면 ‘나 스스로 바라지 않는 사진찍기’를 하면서 얼마든지 ‘한결 나은 사진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늘 새롭게 거듭나는 사진찍기를 선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벌이 사진을 하면서 언제나 새롭게 태어나거나 빛나는 사진을 내놓는 사람은 무척 드뭅니다.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돈도 벌어야 먹고산다 할 만하지만, 사진은 돈이 아니요, 돈이 있다 해서 사진을 즐길 수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라 할 텐데, 돈벌이에 굳이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될 살림살이라 하더라도 사진을 한껏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벌이에서는 홀가분하지만, 사진찍기에서는 홀가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스스로 좋아하는 길을 꿋꿋하거나 씩씩하게 걷는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신나게 사진을 찍기는 하더라도 열매를 싱그러이 맺는 사진찍기로 이어가지 못해요.

 나 스스로 참다이 글쓰기를 즐기고 사진찍기를 즐기자면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내 글감은 나 스스로 내 좋은 삶에서 찾고, 내 사진감은 내가 손수 땀흘리는 내 삶에서 얻어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이야기를 글로 쓴다 할 때에, 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한테 사랑편지를 쓴다 할 때에, 나 스스로 내 마음을 들이면서 써야 가장 아름답습니다. 누군가한테 써 달라 할 수 있겠지요. 누군가 더 멋들어지게 이야기를 붙이고 멋진 글씨로 적바림해 줄 수 있어요. 그러나, 삐뚤빼뚤한 글씨로 앞뒤가 잘 안 맞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나 스스로 내 사랑이한테 편지를 적바림해서 보낼 때만큼 애틋하거나 아름답지는 못하다고 느낍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모습을 사진으로 찍을 때에도 그래요. ‘사람 사진 대단히 잘 찍는다’는 이한테 내 사랑이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달라 맡길 수 있겠지요. 참 예뻐 보이도록 사진 한 장 얻을 수 있어요. 그러면, 이렇게 해서 얻는 사진 한 장이 나한테 가장 기쁘거나 고맙거나 반갑거나 살가운 사진으로 자리매길 수 있을는지요. 무언가 이래저래 잘 안 맞는 사진을 어설프거나 어수룩하게 찍으면 내가 아낄 만한 사진이 안 될는지요.


..  우리 주변에는 존재감조차 알아차릴 수 없는 방랑 고양이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일부러 그들을 무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좀처럼 그들과 마주칠 일이 없기 때문이에요 ..  (머리말)


 사진책 《도시를 누비는 작은 사냥꾼, 방랑 고양이》를 읽습니다. 도시에서도 가장 번들거린다 할 만한 미국땅, 여기에서도 뉴욕에서 살아가는 골목고양이 삶을 좇아 사진으로 하나둘 담아내어 엮은 사진책입니다.

 저는 미국은 밟아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밟을 일이 없다고 느끼는데, 이 가운데 뉴욕 같은 데는 더더욱 밟을 일이 없다고 느낍니다만, 이곳에도 골목고양이가 살아가는구나 하고 《도시를 누비는 작은 사냥꾼, 방랑 고양이》를 읽으며 깨닫습니다. 하기는, 미국에도 거지가 있고 뉴욕에도 거지가 있지 않겠습니까. 미국에도 나무가 자라고, 뉴욕에도 나무가 자랄 테지요. 버려지는 밥쓰레기가 넘칠 테고, 이 밥쓰레기를 뒤지며 배를 채울 골목고양이는 어김없이 있겠지요.

 골목고양이는 뉴욕뿐 아니라 서울에도 있습니다. 큰도시에도 있고 작은도시에도 있으며 시골에도 있습니다. 고양이는 어디에서든 살아갑니다. 개도 어디에서든 살아갑니다. 까치도 까마귀도 비둘기도 매한가지예요. 사람들이 아무 데나 멋모르고 풀어 놓는 바람에 씨가 자꾸 퍼지기도 한다지만, 살 터전인 자연이 차츰 사라지거나 밀리기 때문에, 이제는 뭇 짐승들조차 도시로 몰려들어 보금자리와 먹이를 찾을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으레 도시에서 이런 짐승들이 어찌 살아가나 생각하지만, 짐승들은 먹을거리와 잠자리를 찾아 사람과 마찬가지로 도시로 몰려듭니다. 사람들은 일자리와 잠자리와 짝꿍을 찾으러 도시로 몰려들면서 이웃이나 동무를 거의 아랑곳하지 않는데, 사람들 스스로 사람을 살피지 않듯이 사람들은 으레 이웃 짐승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골목고양이가 있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골목비둘기가 있든 말든 마음쓰지 않습니다. 골목개가 떠돌든 말든 쳐다보지 않아요. 아니, 쳐다보거나 알아볼 수 없습니다. 거의 언제나 자가용으로 움직이니까요. 자가용이 아니더라도 길거리를 거닐 일이 드뭅니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서 골목고양이를 마주할 틈이 없습니다. 불빛 밝은 길을 거닐면서 달을 올려다보지 못할 뿐더러 별조차 헤아리지 못하는 판에, 길바닥 골목고양이 한 마리를 바라보지 못할 수밖에 없는데, 어쩌다 마주치더라도 몇 분 동안 느긋이 마주보지 않아요.


.. 아무리 뒷골목에 숨어 지낸다 해도 동물들(말 나온 김에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누구도)은 사람이 모는 자동차로부터 결코 안전하지 않다 ..  (맺음말)


 사진책 《도시를 누비는 작은 사냥꾼, 방랑 고양이》는 사진쟁이 녹스 님이 골목고양이를 무척 가까이에서 마주하며 사진을 한 장 두 장 담아내었기에 일구었습니다. 멀거니 떨어진 채로는 일굴 수 없는 사진책입니다. 골목고양이하고 이웃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저절로 찍고 저절로 엮는 사진책입니다.

 사진쟁이 녹스 님이 골목고양이가 아닌 연예인을 이웃이나 동무로 삼는다면, 가까운 연예인 삶을 살뜰히 사진책 하나로 내놓겠지요. 당신 어머님이나 아버님하고 가까이 지낸다면 당신 어머님이나 아버님 삶을 사진책 하나로 곱게 영글어 놓을 테고요. 꽃을 사랑한다면 꽃 이야기를 사진책으로 엮습니다. 빌딩을 사랑한다면 뉴욕땅 우람한 빌딩숲을 멋들어지게 담을 테지요.

 그러니까, 사진이란, 누구나 찬찬히 다가서면 얼마든지 찍어서 이루는 문화이자 예술입니다. 찬찬히 다가서지 못할 때에는 아무도 이루지 못하는 문화이거나 예술입니다. 찬찬히 다가서는 넋이기에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사진을 찍든 이야기 하나 알알이 예쁘게 엮어서 선보입니다. 찬찬히 다가서면서 어깨동무를 하거나 손을 맞잡는데,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사진을 찍든 사랑스러울밖에요.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꾸만 잊어버리는데, 무슨 일을 하든 무엇보다 살며시 손을 내밀어 함께 어우러지려고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부동산 일을 하든 편의점 알바를 하든 함께 어우러지려고 마음을 기울이지 못할 때에는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교사 노릇을 할 생각이든 공무원 구실을 할 생각이든, 내 마음을 바르게 써야 하고 곧게 가다듬어야 합니다. 문화재를 사진으로 찍을 때에만 다소곳한 매무새여야 하겠습니까. 인간문화재를 사진으로 담을 때에만 얌전한 몸가짐이어야 할까요. 골목개 앞에서든 골목고양이 앞에서든 똑같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내 사진감 앞에서 언제나 다소곳하거나 얌전해야 합니다. 내 사진감을 사랑해야 합니다. 내 사진감을 좋아해야 합니다. 내 사진감을 믿어야 합니다.

 노래쟁이는 노래를 믿고 춤쟁이는 춤을 믿습니다. 글쟁이는 글을 믿고 그림쟁이는 그림을 믿습니다. 사진쟁이는 사진을 믿습니다. 서로서로 믿으면서 한동아리가 됩니다. 문화를 하든 예술을 하든 바뀔 수 없는 밑바탕이고, 살림을 꾸리는 자리에서도 흔들릴 수 없는 밑틀입니다. 내 사랑을 바쳐 내 고운 님하고 한몸 한마음으로 어우러지는 자리에서 빛나는 열매 하나 달콤하게 맛보며 나눕니다. 한국땅에도 골목고양이나 집고양이를 사진으로 담는 사람이 무척 많은데, 아직 《도시를 누비는 작은 사냥꾼, 방랑 고양이》처럼 살갑거나 사랑스레 사진이야기 꽃피우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4343.11.21.해.ㅎㄲㅅㄱ)


― 도시를 누비는 작은 사냥꾼, 방랑 고양이 (녹스 사진,사라 닐리 글,한희선 옮김,예담 펴냄,2007.7.27./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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