旅ゆけば猫―ニッポンの猫寫眞集 (大型本)
이와고 미츠아키 / 日本出版社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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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고 아끼면서 사진을 찍기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2] 이와고 미츠아키(岩合光昭), 《旅ゆけば猫》(日本出版社,2005)



 사진이 사람들한테 차츰 퍼지면서 누구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제아무리 이름나거나 손꼽히는 사진쟁이라 하더라도 ‘사랑하는 내 짝꿍’을 사진으로 담을 때에는 사진찍기에 풋내기나 새내기라 하더라도 전문 사진쟁이보다 훨씬 잘 찍는다고.

 사진 풋내기나 사진 새내기일지라도 내 짝꿍을 사진으로 가장 잘 담는 사람은 남이 아니라 나입니다. 전문 사진쟁이가 제아무리 멋진 솜씨를 뽐내더라도 ‘짝꿍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만큼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찍히기 어렵습니다. 우리 집 아이를 사진으로 담을 때에도 다른 사람이 찍을 때하고 내가 찍을 때에는 사뭇 다릅니다. 같은 자리에서 바라보며 사진으로 담더라도 내 아이를 내가 담을 때랑 내 아이를 다른 사람이 담을 때랑 놀랍도록 다릅니다.

 사랑하는 내 짝꿍은 사진기 다루는 솜씨로 담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내 짝꿍이기 때문에 오로지 사랑하는 마음길과 눈길과 손길로 담을 뿐입니다.

 전문 사진쟁이가 ‘돈을 내어 주문한 사진’을 누구보다 잘 찍는 까닭은 달리 있지 않습니다. ‘돈을 내어 주문한 사람 입맛과 눈맛’에 맞추어서 찍으니까, 돈을 치르며 사진을 사는 사람한테 가장 어울리거나 걸맞거나 쓸모있는 사진을 낳습니다. 사진 풋내기나 사진 새내기는 ‘돈을 내어 주문한 사람 입맛과 눈맛’을 아직 모릅니다. 섣불리 내 목소리나 내 눈길을 집어넣습니다.

 상업사진을 하는 사람은 상업사진밭에서 가장 뛰어나거나 훌륭합니다. 그러나, 상업사진밭에서는 상업사진일 뿐이지, 다른 사진밭에서까지 뛰어나거나 훌륭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른 사진밭에서는 제법 잘 찍는다 할 수 있겠지요. 다큐사진을 하는 사람한테도 다큐사진밭에서 가장 뛰어나거나 훌륭하다 할 테지요. 그러나 다큐사진을 하는 사람이 상업사진밭에서든 다른 사진밭에서든 뛰어나거나 훌륭하기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 사진밭에서 내 솜씨를 빛낼 뿐입니다. 내 짝꿍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 짝꿍을 사랑하는 데에서 누구보다 돋보이거나 아름답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자리를 넘보거나 건드리지 못해요.

 사진찍기란 손놀림이나 손맛이나 손재주가 아닙니다. 사진찍기는 저마다 살아가는 자리에 걸맞게 제 삶을 맞추어 사랑하는 손길이자 마음길이자 눈길입니다. 상업사진을 한대서 더 나쁠 까닭이 없고 다큐사진을 한대서 더 좋을 일이 없습니다. 상업사진은 상업사진대로 아름답고, 다큐사진은 다큐사진대로 어여쁘며, 내 짝꿍 찍는 사진은 내 짝꿍 찍는 사진대로 아리땁습니다.

 이와고 미츠아키(岩合光昭) 님이 고양이 삶자락을 담은 사진책 《旅ゆけば猫》(日本出版社,2005)를 들여다봅니다. “길을 떠나면 고양이”나 “마실을 가면 고양이”나 “나들이길에는 고양이”라 할 만한 이 사진책을 찬찬히 돌아보면서 아이와 함께 즐겁습니다. 우리 집 아이는 고양이라든지 개라든지 온갖 짐승이 나오는 그림책이나 사진책을 퍽 좋아합니다. 네 살 난 아이한테 이 책을 내밀었더니 “벼리 책이야.” 하면서 제 어머니나 아버지조차 못 보게 가슴으로 꼭 껴안기까지 합니다. “너, 밥 먹던 손으로 책을 만지면 책이 더러워지지.” 하며 수건을 내밉니다. 아이는 옷에다 손을 슥 문지르다가 수건으로 손가락 사이사이 말끔히 닦습니다. 그러고는 제 곁에 이 사진책을 놓습니다. 이러다가다 다른 놀이를 하며 책은 어느새 잊지만.

 고양이 사진으로 가득한 《旅ゆけば猫》를 여러 번 가만히 넘기면서 생각합니다. 이토록 길고양이나 골목고양이나 바다고양이나 시골고양이를 푸근하면서 따사로이 담는 사람은 드물겠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고양이를 사랑하거나 아끼는 이라면, 누구나 이만큼이든 저만큼이든 그만큼이든 사진으로 담을 수 있겠지요. 고양이를 사랑하거나 아끼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사진이든 저런 사진이든 그런 사진이든 꿈조차 꾸지 않을 뿐더러 생각마저 안 할 테고요.

 이와고 미츠아키 님은 고양이를 사랑하거나 아끼는 넋으로 사진을 찍습니다. 달리 남다른 장비를 쓴다거나 남다른 솜씨를 부리지 않습니다. 꼭 고양이 눈높이와 삶높이에 걸맞게 마주하면서 사진놀이를 즐깁니다.

 이와고 미츠아키 님은 고양이를 사진으로 ‘잘 찍지’ 않습니다. 이와고 미츠아키 님은 모든 고양이를 고양이 그대로 사랑하며 아낍니다. 모든 고양이를 고양이 그대로 사랑하며 아끼는 마음밭으로 고양이를 당신 ‘사진감으로 고릅’니다.

 오래도록 깊고 넓게 사랑하는 길이기에, 이와고 미츠아키 님 눈에 고양이가 들어오면 고양이를 살가우며 푼더분하게 담습니다. 이와고 미츠아키 님 눈에 여느 일본 살림집이 들어오면 이 여느 일본 살림집을 어여쁘며 빛곱게 담습니다. 이와고 미츠아키 님 눈에 바닷마을 사람들 모습이 들어오면 이 바닷마을 사람들 모습을 애틋하며 곱게 담습니다.

 사진을 잘 찍는 길이란 없습니다. 사진기를 잘 다루는 법이란 없습니다. 그저 꾸준히 찾고 돌보는 사람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그예 내 사진기를 사랑하며 아끼고 돌볼 줄 알면 됩니다.

 내 사랑하는 짝꿍은 내 사랑하는 짝꿍 그대로 사진으로 옮기면 됩니다. 더 예뻐 보이도록 찍을 까닭이 없습니다. 더 멋져 보이도록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더 아름답게 보이도록 찍는다든지 더 귀엽게 느끼도록 찍을 일이란 없어요. 기쁠 때에는 기쁜 빛을 담고, 슬플 때에는 슬픈 빛을 담으며, 괴로울 때에는 괴로운 빛을 담습니다. 고단할 때에는 고단한 빛을 담고, 좋아할 때에는 좋아한 빛을 담으며, 아플 때에는 아픈 빛을 담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옆지기로서 사진을 담습니다. 이와고 미츠아키 님 고양이 사진은 ‘고양이를 잘 찍자’라든지 ‘고양이를 좋아하자’라든지 ‘고양이가 예뻐’라든지 ‘고양이가 으뜸이야’라든지 외치는 사진이 아닙니다. 곁에서 더없이 사랑하면서 아낌없이 어깨동무하는 삶을 나란히 마주하는 이야기를 꽃피우는 사진입니다.

 사랑하면 넉넉합니다. 아끼면 즐겁습니다. 좋아하면 아름답습니다. 믿으면 따사롭습니다. 사진을 찍고픈 분이라면 사진기를 장만하기 앞서, 내 삶을 사랑하고 내 동무를 아끼는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4344.3.19.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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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說 古事記 (ふくろうの本) (單行本)
篠山 紀信 / 河出書房新社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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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고 보여주고픈 사진책은 목록에서 찾을 수 없다. 다만, 시노야마 기신 님 사진 가운데 이와 같은 사진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려주고 싶기에, 이이 문화재 사진책에 이 글을 걸친다.) 



 한국사람이 사진으로 담지 않은 예쁜 한국사람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19] 시노야마 기신(篠山紀信), 《シルクロ-ド (2) 韓國》(集英社,1982)



 일본 사진쟁이 시노야마 기신(篠山紀信) 님은 일본에서 내로라 하는 여자 배우 사진을 꽤 많이 찍었습니다.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여자 배우 사진’으로 널리 알려졌다 할 만한 사진쟁이일 텐데, 시노야마 기신 님이 내놓은 사진책은 ‘여자 배우 사진’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시노야마 기신 님은 문화유적 사진을 곧잘 찍었으며, ‘비단길’을 돌아본 발자국을 그러모아 두툼한 사진책 《シルクロ-ド》를 여덟 권짜리로 내놓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 비롯해서 한국과 중국을 거쳐 파키스탄과 이란과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과 터키와 그리스를 지나 이탈리아에서 마무리짓는 《シルクロ-ド》 여덟 권인데, 이 가운데 둘째 권이 한국이고, 여덟 권 가운데 둘째 권 한국 이야기에서 ‘여느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 가장 많이 나타납니다. 일본사람으로서 일본사람을 찍기란 한결 수월할 텐데 외려 일본 이야기 다룬 첫째 권에서조차 일본사람 모습은 얼마 없습니다. 거의 모두 ‘비단길이 일본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하느냐’ 하는 문화유적 사진투성이입니다.

 이란에서야 사람 사진 찍기가 힘들밖에 없다지만, 중동이든 중국이든 파키스탄이든 문화유적 사진이 꽤 많이 차지합니다. 뜻밖이라 할 만한 사진책인 《シルクロ-ド》이면서 뜻밖이라 할 만한 엮음새인 《シルクロ-ド》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다른 책보다 한국 이야기 담은 둘째 권에서 ‘여느 한국사람 살아가는 모습’을 낱낱이 보여주다 보니, 1982년에 나온 이 사진책을 돌아보면서 1970년대 끝무렵과 1981년 즈음 한국땅 한국사람 자취를 꽤 알뜰살뜰 느낍니다.

 《シルクロ-ド (2) 韓國》(集英社,1982)을 펼치면, 책 겉그림부터 무지개빛 사진입니다. 비단길 사진책 여덟 권 가운데 흑백사진은 한 장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문화유적을 담을 때에 흑백사진을 쓰는 사람이 드물다고도 할 터이나, 사람 사는 발자국을 담는 ‘한국 사진쟁이 사진’은 으레 흑백입니다. 다큐사진을 하는 사람들은 한국 사진쟁이이든 외국 사진쟁이이든 거의 늘 흑백입니다. 시노야마 기신 님 《シルクロ-ド》처럼 무지개빛으로 아리땁게 채우는 일은 찾아보기 몹시 어렵습니다.

 집식구와 《シルクロ-ド》 여덟 권을 함께 들여다보면서 서로 생각합니다. 시노야마 기신 님이 빚은 《シルクロ-ド》이든, 이이가 담은 일본 여자 배우 사진이든, 이이는 ‘예쁘게 느껴 예쁘게 바라본 사람을 예쁘게 읽을 예쁜 사진’으로 태어나도록 하는구나 싶습니다. 이런 느낌은 무지개빛이 아닌 흑백으로 담을 때에도 똑같이 피어나리라 생각합니다. 토몬 켄 님이나 기무라 이헤이 님이 담은 사람사진을 들여다보면, 흑백이지만 하나도 흑백 같지 않다고 느낄 수 있는데, 시노야마 기신 님 사람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면, 고운 무지개빛이면서 이 무지개빛을 흑백으로 바꾼다 한들 무지개빛 느낌이 사라질 수 없구나 싶어요. 게다가, 무지개빛이 아니고서는 이 느낌을 사진쟁이부터 예쁘다 느끼기 어려울 뿐 아니라, 이러한 무지개빛을 사람들이 바라보지 않는다면 ‘이러한 무지개빛으로 살아가는 사람 스스로 내 삶이 얼마나 무지개빛인가를 모르며’ 지나치기 쉽겠구나 싶습니다.

 《シルクロ-ド (2) 韓國》 겉껍데기에는 흰옷을 입고 춤추는 할아버지 사진이 담깁니다. 겉껍데기를 열면 사진책 겉장에는 아기를 나란히 업은 두 계집아이 사진이 담깁니다.

 겉껍데기 사진이 어느 동네 무슨 사진인지를 알아챌 한국사람이나 인천사람이 얼마나 될까 궁금합니다만, 겉껍데기 춤추는 흰옷 할배 사진은, ‘이제는 헐려 사라진 인천공설운동장(이 운동장은 자그마치 1930년대에 터를 닦은 역사가 매우 깊은 곳입니다만 인천시는 이런 역사를 아랑곳하지 않고 새 축구전용구장을 짓는다며, 이 공설운동장하고 옆에 있던 야구장을 함께 허물었습니다. 인천 숭의야구장 또는 도원야구장은 1920년대에 웃터골이라는 데에 처음으로 마련되었다가 이제는 헐린 자리에 1934년부터 옮겨져서 2008년까지 있다가 공설운동장과 함께 이슬처럼 사라졌습니다)에서 민속무용대회를 하는 모습’ 가운데 하나로, 사진에 나온 흰옷 할배는 학춤을 춥니다. 사진 오른쪽 아래를 찬찬히 살펴보면 숭의3동 꼭대기 전도관 건물과 밑으로 죽 이어진 골목집 모습이 보입니다. 아는 사람이 드물 테지만, 황해도 은율탈춤은 인천에서 하고, 무형문화재도 인천에서 지정되었습니다. 전국 민속무용대회를 인천에서 할 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 어린 날 공설운동장에서 했던 민속무용대회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나저나, 인천에서 민속무용대회를 하던 이무렵이든 다른 무렵이든, 한겨레 여느 사람들이 즐기거나 누리던 옛춤을 사진으로 담은 한국 사진쟁이는 얼마쯤 있었을까요.

 이보다 한국땅 여느 사람이 즐기는 문화라든지 한국땅 여느 사람이 살아가는 매무새를 애써 흑백으로 담는 사진이 아니라, 빛깔 고운 결 그대로 무지개빛을 살리는 사진쟁이는 얼마나 될까요.

 한국에서 골목길 사진을 찍는 꽤 많은 분들은 거의 모두 흑백으로만 바라보며 흑백으로만 찍기 일쑤입니다. 삶터와 사람을 바라보는 눈길이 흑백이기 때문에 흑백사진을 찍을밖에 없을 테고, 삶터와 사람을 마주하는 매무새가 흑백인 탓에 흑백사진을 찍기만 해요. 골목길 모습이 흑백사진하고 잘 어울리니까 흑백사진을 찍을 만하지 않습니다. 골목길 삶자락을 ‘흑과 백’이라는 두 갈래로만 쩍 갈라서 바라보니까, 한국땅 숱한 사진쟁이는 골목길 사진을 흑백사진으로만 담기 일쑤이며, 때때로 무지개빛으로 담는다 하더라도 ‘흑과 백’이라는 틀을 스스로 떨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골목동네 사람과 삶터가 얼마나 아리땁게 빛나면서 결이 고운지를 모르기 때문이에요.

 시노야마 기신 님은 한국땅 여느 골목길 모습도 제법 사진으로 옮깁니다. 시노야마 기신 님은 한국땅 여느 골목을 다른 사진하고 똑같이 무지개빛으로 바라보며 무지개빛으로 담습니다. 햇볕과 그림자가 알맞게 드리운 어여쁜 모습을 놓치지 않습니다. 아니, 놓칠 까닭이 없으며, 햇볕과 그림자를 기쁘게 받아들여요. 신나게 즐깁니다. 《シルクロ-ド (2) 韓國》은 ‘비단길’이 사진책 줄거리입니다만, 햇볕과 그림자를 예쁘게 맞아들여 기쁘게 즐기는 한국사람하고 나란히 어깨동무하면서 사진쟁이 스스로 기쁘게 즐기는 예쁜 넋을 곱다시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곰곰이 살피면, 이탈리아에서 비롯하여 중동과 아시아 여러 나라와 중국을 거쳐 한국땅을 마지막으로 해서 일본으로 들어온 비단길 문화는 ‘한국에서 예쁘게 꽃피웠구나’ 하고 시노야마 기신 님부터 느끼기 때문에, 시노야마 기신 님 사진책 《シルクロ-ド》 여덟 권 가운데 한국 이야기에서는 사람사진이 아주 많이 나올 뿐 아니라, 꽤 재미나기도 하며, 참 살갑기까지 합니다.

 한국땅에서는 애써 문화유적을 돌아보며 사진으로 담을 까닭이 없는 셈입니다. 중국 문화이건 유럽 문화이건, 또 일본이나 몽골이나 무슨무슨 서양 문화이건, 한국사람은 한국땅에서 저희 나름대로 예쁘게 곰삭이며 신나게 살아가니까, 이렇게 살아가는 예쁜 사람을 예쁜 눈길과 손길을 거쳐 예쁜 사진으로 빚으면 됩니다. 어찌 보면 ‘비단길 사진’ 가운데에 ‘옷감집 사진’을 넣는 모습이라든지 ‘자개장 문을 열고 이불과 베개 놓인’ 모습 찍은 사진이라든지 뜬금없다 할 만합니다. 여느 살림집 여느 책상머리 모습 사진이라든지 시골 논밭 돌보는 사람들이 새참 먹는 모습 사진이라든지 가을날 울긋불긋 물든 나무 밑에서 올망졸망 노는 어린이들 담은 사진 또한 비단길 문화랑 뭐가 이어졌느냐 할 만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여느 사람 수수한 삶이야말로 ‘문화’이자 ‘비단길 문화’입니다. 박물관에 모셔진 궁궐사람 금관이건 양반집 술병이건 똑같이 문화라 할 터이나,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 교과서나 역사책에서 다루지 않는 여느 사람 수수한 삶이 곧바로 문화이자 비단길 문화입니다. 한국땅 사진쟁이조차 제대로 사진으로 담지 않은 한국사람 모습이기에, 《シルクロ-ド》를 내놓은 시노야마 기신 님은 누구보다 이 같은 모습을 더 파고들며 가슴으로 껴안으려 했다고 느껴요.

 사진을 함께 바라보던 옆지기는 문득 “포대기 빛깔이 참으로 곱다”고 말합니다. 문득 이런 말을 뱉으면서 “우리 나라에서 포대기 사진을 칼라로 찍은 사람이 있나요?” 하고 묻습니다.

 옆지기가 문득 느끼면서 뱉은 말마디와 문득 물은 말마디에 말문이 막힙니다. 털어놓고 말하자면, 저는 이렇게 느끼지 못했고 이렇게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저로서는 골목길 삶자락을 사진으로 담을 때에 흑백사진으로 빚을 수 없다고 느껴 무지개빛으로 사진을 담기는 하나, 포대기 빛깔을 고이 돌아보거나 느끼려 하지 못했어요. 옆지기 말을 듣고 나서 사진을 가만히 다시 돌아보며 새삼 깨닫습니다. 《シルクロ-ド (2) 韓國》에서는 아기 업은 어린 계집아이 포대기 빛깔뿐 아니라, 여느 저잣거리에서 아기를 업은 아줌마들 포대기 빛깔이 모두 다릅니다. 모두 다를 뿐 아니라 모두 밝고 맑으며 곱습니다. 시노야마 기신 님은 이 빛깔을 하나도 놓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한국사람이 사진으로 담지 않은 예쁜 한국사람을 언제 어디에서나 듬뿍 느끼면서 신나게 사진기 단추를 눌렀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1970∼80년대 한국사람이 얼마나 예쁘며 재미나고 즐겁게 알뜰살뜰 살림을 꾸렸는가 하는 이야기는 한국사람 한국사진으로는 알아챌 길이 없습니다. 《シルクロ-ド (2) 韓國》을 들여다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을 사랑하거나 좋아한다는 서양사람조차 한국사람 어여쁜 무지개빛까지 알아채거나 알아보지는 못해요. 그래도 한국사람은 ‘서양사람이 바라본 한국 모습 사진’을 썩 좋아하는 듯합니다.

 일제강점기 역사와 임진왜란 역사 때문에 한국사람이 무던히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일본사람 가운데 빛을 빛 그대로 사랑하며 아끼는 사진쟁이가 틈틈이 한국사람 어여쁜 무지개빛을 조용히 예쁘게 사진으로 옮겨서 고즈넉하게 ‘사진 문화유산’을 새삼스레 선물처럼 내밀어 줍니다. (4344.3.15.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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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현의 얼굴 - 그의 카메라가 담는 사람, 표정 그리고 마음들
조세현 지음 / 앨리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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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글·그림·사진이 아름다이 태어나는 길
 [찾아 읽는 사진책 25] 조세현, 《조세현의 얼굴》(앨리스,2009)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어느 사진보다 얼굴을 담은 사진을 더 좋아하거나 눈길이 끌릴 수 있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애써 얼굴을 담은 사진이 아니더라도 얼굴을 읽을 수 있으며, 사람 모습을 담은 사진이 아닐지라도 사람 모습을 읽을 수 있다고 느낍니다.

 사진쟁이 조세현 님은 《조세현의 얼굴(앨리스,2009)에서 “사진은 그것을 만드는 사람을 닮습니다(4쪽).” 하는 말로 첫머리를 엽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사진찍기와 사진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읽는 사람 마음에 따라 사진을 받아들입니다. 읽는 사람 삶에 따라 사진을 맞아들입니다. 찍는 사람 마음에 따라 사진을 받아들일 테고, 찍는 사람 삶에 따라 사진을 맞아들이겠지요.

 조세현 님은 “사람의 표정만큼 더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5쪽).” 하고도 말합니다. 스스로 아름답다 느끼는 삶과 이야기를 스스로 아름답게 사진으로 담거나 글로 옮기거나 그림으로 펼치면 됩니다. 온누리에서 ‘더’ 아름답거나 ‘가장’ 아름답다 할 무언가는 따로 없습니다. 그저, ‘나한테 참으로’ 아름답다 느낄 무언가가 있을 뿐입니다.

 이리하여 나 스스로 참으로 아름답다 느끼는 무언가를 글로 쓰면 글이 아름다이 빛납니다. 나부터 참말 아름답다 느끼는 무언가를 그림으로 그리면 그림이 아름다이 반짝입니다. 내가 무엇보다 아름답다 느끼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면 사진이 아름다이 태어납니다.

 사진이란 다른 삶이 아닙니다. 사진이란 사진기를 손에 쥔 삶입니다.

 조세현 님 말은 죽 이어집니다. “보통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보이는 그대로 찍는다. 하지만 사람을 찍는다는 것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과 몸짓만을 촬영하는 것이 아니다. 한때는 나도 그랬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만 주의를 기울이며 ‘내’가 그를 어떻게 보는지, ‘내’가 그를 어떻게 찍고 싶어 하는지에만 관심을 쏟았다. 사진을 찍는 데 있어 가장 우선시했던 것은 바로 ‘나’였다(29쪽).”고. 그런데, 사진책 첫머리에서 했던 말하고는 어긋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대목이 앞에 적은 이야기하고 견주면 참으로 맞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사람 표정을 아름답다 여기며 사진으로 찍는 일’은 겉훑기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조세현 님이 ‘사람 얼굴빛’을 사진으로 찍고 싶다 할 때에는 겉훑기로 드러나는 모습을 겉훑기로 찍고픈 마음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이 드러내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 자리에서 느끼며 찍고 싶다’고 말해야 옳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누구나 겉훑기로 사람을 읽어 겉훑기로 사진을 찍거나 겉훑기로 글을 쓴다든지 그림을 그릴 수 있어요. 그렇지만 겉훑기로 하는 일이나 겉훑기로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슬플까요. 사람을 사귀든 만나든, 또 사람 모습과 이야기나 얼굴을 사진으로 담든 차근차근 속으로 사귀거나 만나면서 속으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진은 ‘찍히는 사람 자리에 선다’고 해서 한결 아름답거나 더 아름답거나 참 아름답지 않습니다.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이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아름답습니다. 내 쪽도 네 쪽도 아닌 다 같은 쪽이어야 합니다.

 이리하여 “사진 속 인물이 치아를 드러내고 활짝 웃을 필요는 없다.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따뜻함이 묻어나온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런 사진은 찍는 나도 행복하지만 보는 이도 행복하게 만든다(75쪽).”는 말을 다시 하고야 마는 조세현 님입니다. ‘사진을 찍는 나’와 ‘사진을 찍는 네’가 함께 즐거울 수 있는 사진을 생각하는 조세현 님 모습을 다시금 봅니다. 이렇게 같이 즐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찍히는 네’ 자리만이 아니라 ‘찍는 내’ 자리를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함께 생각하며 조용히 하나될 때에 바야흐로 서로서로 웃으면서 사진 한 장을 손에 쥡니다.

 사진찍기란 삶찍기이고, 사진읽기란 삶읽기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에 내 사랑하는 삶을 찍고 싶어 땀을 흘리고, 사진을 읽는 사람은 내 사랑하는 삶을 읽고 싶어 마음을 들입니다.

 사진을 읽고 글을 읽다가 문득 궁금합니다. 조세현 님 스스로 사진찍기와 사진읽기가 어떠한가를 모르지 않는 듯한데, 왜 자꾸 엇나가는 이야기를 글이나 사진으로 보여주고 말까 궁금합니다. 조세현 님 스스로 ‘더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진을 찍는다 한다면, ‘더 아름답게 살아가는 조세현 님 삶’을 글과 사진으로 보여주거나 나누면 될 텐데요. “사진은 결정적인 한 컷을 얻어내기 위한 긴 여정이다. 결정적인 한 컷을 위해 우리는 셔터를 누르고 또 누른다(96쪽).”는 말은 앞에서 조세현 님 스스로 깨달은 사진길하고는 몹시 동떨어집니다. 찍히는 너와 찍는 내가 하나되어 서로 흐뭇한 사진으로 이르는 길하고는 만나지 않습니다.

 사진은 ‘결정적인 한 장’이 아니라, ‘서른 장이 되든 삼천 장이 되든 서로 함께 좋아하며 웃음이 묻어나는 사진이 되도록 찍는 일’이어야 조세현 님이 《조세현의 얼굴》이라는 책에서 들려주는 글과 보여주는 사진이 제대로 빛나도록 이끄는 말마디가 되리라 느낍니다.

 사진은 ‘이 사진 한 장’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이든 삶이든 ‘어느 하루 한 가지 모습’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고이 이어지는 사람이면서 삶입니다. 고이 어이지는 사람과 삶을 사랑하는 사진입니다.

 조세현 님은 “내가 작업한 사진의 느낌이 좋다는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한 번 촬영한 스타들은 다른 사진 작업에서도 내가 촬영해 주기를 바랐다(130쪽).”는 까닭을 제대로 느껴야 합니다. ‘인기스타가 사진쟁이 조세현을 저절로 찾아오는 일’을 기쁘게 생각하면 안 되고, 왜 ‘사진쟁이 조세현이 사진으로 담은 사람들이 사진쟁이 조세현 사진을 좋아하려 하는가’를 스스로 읽어야 합니다.

 “먼 훗날 자신의 어린 시절이 담긴 사진으로 스스로의 세월을 돌아보며 행복해 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189쪽).”고 스스로 적바림한 글을 스스로 되읽으면서 조세현 님 사진길이란 무엇인가를 스스로 곱씹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골목은 중국에도 있고 한국에도 있습니다. 예쁘거나 아름다운 골목은 중국에도 있으며 한국에도 있습니다. 사람내음 물씬 나는 골목은 중국에도 한국에도 골고루 있을 뿐 아니라, 일본이나 프랑스나 버마나 인도나 파키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이나 페루나 볼리비아에도 있습니다. 어디에나 있는 예쁜 사람 예쁜 삶 예쁜 골목입니다. 다만, ‘작가’와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한국에 있는 예쁜 사람 예쁜 삶 예쁜 골목이 무엇인지를 느끼지 않습니다. 아니, 느끼지 않는다기보다 예쁜 사람 예쁜 삶 예쁜 골목이 어디에 있는지 함께 살아가지 않으니 모를밖에 없습니다.

 예쁜 사람하고 함께 살아가며 저절로 예쁜 사진을 찍는 ‘이름없이 수수한’ 여느 사람들을 작가와 전문가만큼은 모릅니다. 중국이건 티벳이건 네팔이건 쿠바이건 신나게 나들이를 하는 숱한 작가와 전문가들은 막상 인천 숭의3동 191번지이건 숭의4동 7번지이건 걸어 보지 않습니다. 부산 골목이건 음성 골목이건 목포 골목이건 춘천 골목이건 얼마나 걸어 본 작가요 전문가일까요. 강운구 님은 이 나라 시골자락을 골골샅샅 누벼서 안 가 본 곳이 거의 없다 하는데, 한국땅 사진쟁이나 글쟁이나 그림쟁이는 한국땅 가운데 어디를 얼마나 두 다리로 천천히 거닐며 밟아 보았을까요.

 자가용을 몰며 지나간 마을이 아니라 두 다리로 거닐다가 한참을 못박힌 듯이 서서 바라본 마을이 얼마나 될까요.

 자가용을 몰며 지나가는 때에는 사진을 찍지 못합니다. 자가용에서 내려 두 다리로 걸어야 비로소 마을을 보며, 비로소 마을을 볼 때에 못박힌 듯이 제자리에 우뚝 서서 한참 들여다보아야 바야흐로 사진을 찍어 사진 한 장에 마을사람 사랑을 고이 받아들이는 내 사진이 태어납니다.

 조세현 님은 “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 수업의 모든 과정이 끝날 무렵 학생들에게 그동안 배운 걸 토대로 사진을 찍어 오라는 과제를 준다. 어떤 친구는 풍경을 찍어 오기도 하고 어떤 친구는 오브제를 찍어 오기도 하고 어떤 친구는 인물을 찍어 오기도 한다. 뭘 찍어 오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사진을 보는 사람이 공감을 하느냐, 못 하느냐이다(166쪽).” 하고 말합니다.

 ‘공감(共感)’이라는 한자말은 “함께 느끼다”를 뜻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과 사진을 읽는 사람이 함께 느낄 수 있느냐를 살핀다는 소리입니다. 이는 곧, 사진을 찍는 사람과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이 한마음이 되느냐를 살핀다는 소리요, 찍고 찍히는 사이와 찍고 읽는 사이는 한동아리가 되어야 한다는 소리일 테지요.

 참말로 무슨 사진을 찍느냐는 아랑곳할 일이 아닙니다. 만듦사진이든 다큐사진이든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참말로 사진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사진인지, 겉껍데기 시늉하는 사진인지를 대수로이 살펴야 합니다. 껍데기 사진인지 알맹이 사진인지를 가누어야 합니다. 사랑이 어린 사진인지 사랑을 꾸민 사진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뭘 느낄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어떻게 느끼는가요. 눈으로 본다 해서 사진으로 찍을 수 없고, 눈으로 본다 해서 사진을 읽을 수 없습니다. 눈이 아닌 마음을 길어올려 내 삶을 통틀어야 비로소 사진을 찍는 손길을 일으키고, 눈이나 말이나 입이 아니라 가슴과 몸뚱이와 삶으로 마주해야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 삶을 가만히 얼싸안습니다.

 다른 사람 사진을 읽을 때에는 ‘공감할 만하느냐’라든지 ‘함께 느낄 만하느냐’로 따질 수 없습니다. 대학교 사진학과 아이들한테도 이런 잣대를 들이댈 수 없습니다. ‘대학 교수인 내’가 함께 느낄 수 있든 없든 ‘삶이 묻어난 사진을 대학교수인 내가 내 삶을 쏟아서 읽을 수 있느냐’가 훨씬 큰 일입니다. 사진길을 걸어가려는 어린 학생들한테 ‘사진을 보는 내가 함께 느낄 수 있는 사진을 찍으라’고 말할 수 없어요. ‘사진교수인 내가 알아보든 못 알아보든 사진을 찍는 네 삶을 이 사진 한 장이 고이 담아, 네가 사진으로 찍은 이 사람(또는 사물)하고 함께 즐거울 수 있도록 하면 된다’고 말해 줄 수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조세현의 얼굴》이라는 책에 바로 이러한 이야기를 담았으니까요. 조세현 님 스스로 알면서도 모르기도 하는 이러한 사진길이야말로 이 나라에서 사진길을 꿋꿋하거나 씩씩하게 걸어가고파 하는 사람들한테 즐거운 도움말이 될 테니까요.

 글은 사랑이 있을 때에 태어납니다. 사랑이 없이 쓰는 글이란 죽은 글입니다. 그림은 믿음이 서릴 때에 태어납니다. 믿음이 없이 그리는 그림이란 죽은 그림입니다. 사진은 어느 때에 태어날까요. 사진에 무엇이 없으면 사진은 죽은 사진이 되고 말까요. 산 사진과 죽은 사진은 어느 자리에서 갈릴까요.

 한국땅에서 사진길을 걷는 사람은 살아숨쉬는 사진길을 걸어가는지 궁금합니다. 한겨레붙이로 한국땅에서 사진길을 걷는 사람은 숨막히는 사진길을 걸어가지는 않나 궁금합니다. (4344.3.13.해.ㅎㄲㅅㄱ)


― 조세현의 얼굴 (조세현 사진·글,앨리스 펴냄,2009.11.15./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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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학교에서 배운 것들 - 임영균의 사진과 삶의 대한 단상
임영균 지음 / 브리즈(토네이도)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사진학과에 사진교재는 부질없습니다
 [찾아 읽는 사진책 24] 임영균, 《사진학교에서 배운 것들》(토네이도미디어그룹,2010)


 중앙대학교 사진학과에서 사진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임영균 님이 사진학과 학생한테 들려주는 이야기를 그러모은 책 《사진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읽는다. 이 책은 사진책이라기보다 사진교재라 할 만하다. 글쓴이 스스로 머리말이나 꼬리말에서 밝히기도 하지만, 대학교 사진학과에 들어온 젊은이한테 ‘사진을 익히는 첫걸음’쯤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를 찬찬히 그러모은다.

 그런데 궁금하다. 이만 한 ‘사진 밑지식’조차 사진학과 학생들은 갖추지 못했는가 하고. 대학교 사진학과쯤 들어가려 하는 새내기 대학생들은 고등학생 때까지 이만 한 이야기조차 스스로 깨닫거나 헤아리지 못하는가 하고. 이리하여, 대학교 사진학과에서는 고작 이런 밑지식을 한 해에 걸쳐 가르쳐 주어야 하는가 하고.

 사진학과 교수 임영균 님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은 스스로 가장 고민하고 느꼈던 삶이 그대로 배어난 것이다(17쪽).” 하고 말한다. 이 말은 더없이 마땅하다. 다만, 더없이 마땅한 이 말을 끌어내기까지 너무 많은 길을 거쳐야 하는구나 싶다. 게다가 더없이 마땅한 이 말은 굳이 사진학교에서 가르칠 이야기가 아닐 텐데 하고 느낀다. “좋은 카메라를 선택하는 기준은 나를 가장 잘 아는, 내가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카메라를 만나는 것이다(29쪽).” 같은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몹시 마땅한 대목이기는 하지만, 어쩐지 깊이가 얕다고 느낀다. 대학교 사진학과라면 누구나 사진기를 다룰 텐데, 사진기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나 스스로 잘 다루지 못하는 장비를 다루려는 학생이 있을 수 있는가. 사진학과 교수이든 전문 사진쟁이이든 나 스스로 잘 다루지 못하는 사진기를 쓸 수 있는가.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내 몸에 안 맞는 자전거를 아무렇게나 타고 다닐 수 있는가. 밥을 먹는 사람이 내 손에 안 맞는 수저로 밥을 먹을 수 있는가.

 그러나, 내 몸에 안 맞는 수저일지라도 쓰다 보면 익숙해진다. 내 몸에 안 맞는 자전거라 하더라도 타다 보면 익숙해진다. 내 몸에 어울리지 않던 사진기라 하지만 오래오래 쓰다 보면 익숙해진다.

 임영균 님은 “사진학교에서 배운 것들”이라는 이름을 붙여 책 하나 내놓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임영균 님 스스로 사진학교에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배웠기 때문에, 다시금 사진학교 젊은이한테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리라. 임영균 님이 다른 사진을 배웠다면 다른 사진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테지. 틀림없이 임영균 님도 ‘사진 = 삶’인 줄을 어느 만큼 헤아리기는 하지만, 아직 온몸으로 깊숙하게 느낀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은 스스로 가장 고민하고 느꼈던 삶이 그대로 배어난 것이다”라는 말은 ‘내가 가장 좋아하거나 사랑할 사진이란 스스로 일구는 삶이 그대로 드러나는 사진’이라는 소리이고, 한 마디로 간추리면 ‘내가 좋아할 사진은 내가 좋아할 삶’이며, ‘내가 사랑하는 사진은 내가 사랑하는 삶’이라는 소리이다. 곧, 내가 사람을 사랑하는 삶이 그대로 내 사진이 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내 사진으로 담고, 내 사랑이 내 삶이 되며, 내 사랑하는 사람하고 내 삶을 함께 일구는데, 내 사진은 이러한 삶흐름을 고스란히 담는 이야기보따리인 셈이다.

 오늘날 고등학교 아이들을 생각해 본다. 오늘날 고등학교 아이들은 꿈이나 삶이나 넋을 품을 수 없다. 아이들은 오로지 대학바라기만 해야 한다. 대학교 사진학과에 들어가려 한다 해서 고등학생 때이든 중학생 때이든 초등학생 때이든 푸른 꿈이나 푸른 사랑이나 푸른 삶을 일구지 못한다. 아이들은 입시 성적에 따라 대학교에 들어간다. 아이들이 어떤 꿈과 삶과 사랑을 품느냐에 따라 ‘하고픈 공부’를 하든 ‘하고픈 일’을 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대학교 사진학과에서는 아이들한테 ‘사진은 바로 네 삶이란다’ 하고 들려줄밖에 없다. 아이들 스스로 ‘사진은 바로 내 삶이야’ 하고 느끼면서 ‘내가 사진으로 담을 내 삶을 어떠한 이야기가 드러나도록 내 손길을 가다듬으면 좋을까’ 하고 돌이키도록 이끌지 못한다. 이럴 겨를이 없는 대학교 사진학과가 되고 만다. 아이들은 초·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너무도 슬픈 시험기계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생각이 갇히고 마음이 닫히며 삶이 쪼그라들었으니까, 이 갇히고 닫히며 쪼그라든 넋을 천천히 풀어내야 할 테니, 《사진학교에서 배운 것들》에 담긴 아주 가벼운 밑지식을 대학교 사진학과에서 가르칠밖에 없다 하리라.

 그래도 이 책은 여러모로 아쉽다. 백 사람이면 백 사람 다 다른 삶을 일구면서 백 가지 다른 사진이 태어나야 할 텐데, 저마다 다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 다 다른 사진길을 걷도록 얼마나 잘 타이르면서 북돋우는지는 모르겠다.

 임영균 님은 말한다. “미술의 역사가 서양미술사와 동양미술사로 확연하게 구분되는 지금, 서양사진사와 동양사진사의 구분은커녕 동양사진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는 사진사 도서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161쪽).”고. 그러면, 임영균 님 스스로 말하면 된다. 《사진학교에서 배운 것들》조차 서양 사진쟁이 이야기로 그득하다. 고작 일본 사진쟁이 한두 사람 이름이 얼핏 나올 뿐이다. 일본 사진밭조차 더 넓거나 깊게 다루지 못한다. 베트남 사진이라든지 버마 사진이라든지 인도네시아 사진은 아예 건드리지 못할 뿐 아니라, 중국 사진이나 대만 사진이나 재일조선인 사진은 조금도 다루지 못한다.

 조금 더 바지런히 아시아 여러 나라 사진책을 사서 모으고 읽히면서 임영균 님 사진넋과 사진학과 대학생 사진얼을 끌어올려야 하지 않느냐 생각한다. 말로만 ‘동양사진사’ 걱정을 하지 말고, 아름다우며 재미나고 즐거운 동양사진사 이야기를 들려주면 된다. 말로만 앞세우는 걱정을 넘어야 하고, 말부터 ‘임영균 님 스스로 사랑하며 아끼는 숱한 한국·일본·아시아 사진 이야기’를 《사진학교에서 배운 것들》에 담으면 된다. 이러한 이야기를 담지 못한다면 이 사진교재는 교재로서도 그리 아름다울 수 없다. 아니, 그저 교재로 그치고 만다.

 대학생한테 교재란 부질없다. 대학교 미술학과에 교재가 쓸모있을까. 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교재가 쓸데있을까.

 문화를 말하건 예술을 다루건 교재가 있을 수 없다. 문화나 예술을 이야기하는 학과에서 ‘교재 = 삶’일 뿐이다. 문화쟁이나 예술쟁이가 되려는 학생은 학생 스스로 학생 삶을 교재로 삼아야 한다. 학생 스스로 학생 몸뚱아리와 마음밭을 교재로 삼아야 한다. 학생 스스로 부대끼거나 부딪히는 하루하루가 송두리째 교재가 되며 책이 되고 삶이 된다. 학생들이 만나거나 사귀는 모든 사람이나 짝꿍이나 이웃이 교재가 되고 책이 되며 삶이 된다.

 살림하는 사람한테는 요리책이나 육아책이란 부질없다. 살림하는 사람은 하루하루 맞아들이는 온갖 일거리가 곧바로 교재 노릇을 하고 책 구실을 한다. 그저 몸으로 부둥켜안는 삶이다. 아이랑 노는 법을 책을 읽어 배울 수 있겠는가. 그냥 아이 손을 잡고 돼지 멱따는 소리로 노래를 부르면 된다. 구슬치기를 할 때이든 고무줄놀이를 할 때이든 놀이책을 옆에 놓고 구슬을 치거나 고무줄을 넘겠는가.

 사진하는 사람 가운데 사진교재를 곁에 끼면서 사진을 찍는 바보란 없다. 사진하는 사람은 ‘늘 들고 다니기에 알맞을 사진기’를 하나 옆구리이든 어깨이든 손에 끼거나 쥐거나 걸치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삶과 사랑’을 사진꽃으로 맺으면 된다. 굳이 교재가 있어야 한다면 이 나라가 교재이고 내 동네가 교재이며 내 어버이가 교재이다.

 교과서나 교재는 한 시간쯤 들여 가볍게 읽어서 치우는 심심풀이 땅콩일 뿐이다. 교과서나 교재 하나를 한 해나 들여 가르치려 한다면,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슬프다. 굳이 어느 책 하나를 교재처럼 삼으려면 강의를 하는 한 시간에 사진책 두어 가지를 보여주면서 가르치고, 한 해를 통틀어 사진책 이삼백 권은 보여주면서 가르칠 때에 비로소 ‘교재를 써서 가르친다’고 말할 수 있다.

 사진을 배우거나 사진을 찍으려 한다면 대학교 사진학과 같은 데에는 들어갈 까닭이 없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시험기계가 되고 만 아이들로서는 대학교밖에 갈 데가 없다고 잘못 안다. 이 어리숙한 철부지들한테 철이 들도록 할 몫이 대학교 교수한테 있다. 사진학과 교수라면 어리숙한 철부지한테 교재를 버리고 대학교 졸업장을 버리면서 ‘아이들아, 너희는 너희 삶을 찾아야지.’ 하고 가르칠 줄 알아야지 싶다. ‘교재 읽히기’가 아니라 ‘아이들이 저마다 스스로한테 가장 알맞을 수많은 교재가 어디에 있는지를 제힘으로 알아내도록 이끄는 길동무이자 이슬떨이 몫’을 할 수 있는 임영균 님으로 거듭나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4344.3.11.쇠.ㅎㄲㅅㄱ)


― 사진학교에서 배운 것들 (임영균 글·사진,토네이도미디어그룹,2010.1.5./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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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s (Hardcover)
Steve McCurry / Phaidon Inc Ltd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좋은 사진은 따로 없다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1] 스티브 맥커리(Steve McCurry), 《Portrait》(Phaidon,1999)



 사진을 잘 찍는다 할 만한 사진쟁이는 따로 없습니다. 사진을 못 찍는다 할 만한 사진쟁이 또한 따로 없습니다. 사진쟁이는 저마다 다 다르게 사진을 찍기 때문에, 누가 더 잘 찍거나 누가 더 못 찍는다 이야기하거나 가르지 못합니다. 저마다 살아가는 대로 찍는 사진이기 때문에 ‘이 사진이 참 좋다’고 한다면, 나로서는 ‘이 사진쟁이가 살아가는 결이 참 좋다’고 느낀 셈입니다. ‘이 사진은 그닥 좋지 않다’고 느끼면, 나로서는 ‘이 사진쟁이가 나아가는 삶이 그닥 좋지 않다’고 느낀 셈이에요.

 사진쟁이는 누구나 사진쟁이 나름대로 선 자리에 알맞게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즐김이는 누구나 사진즐김이 나름대로 선 자리에 걸맞게 사진을 읽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든 사진을 읽는 사람이든, 서로서로 선 자리에 따라 사진을 마주합니다. 저마다 살아가는 제 삶자리를 고이 맞아들이면서 사진을 껴안습니다.

 책을 읽든 일을 하든 말을 하든 글을 쓰든 똑같습니다. 누구나 살아가는 만큼 책을 읽거나 일을 하거나 말을 하거나 글을 씁니다. 아는 만큼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사는 만큼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아는 만큼 일을 하지 않고, 내가 살아가는 만큼 일을 해요. 아는 만큼 말을 하거나 글을 쓰지 않아요. 이제껏 살아온 만큼 말을 하거나 글을 씁니다.

 살아가는 눈이 사진하는 눈입니다. 살아가는 손길이 사진하는 손길입니다. 온누리를 따숩게 껴안고픈 꿈으로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온누리를 따숩게 껴안고픈 꿈이 사진으로 녹아듭니다. 다만, 사진길을 걸은 지 아직 얼마 안 된 이라면, 온누리를 따숩게 껴안고픈 꿈이 사진으로 깊이 녹아들지는 못합니다. 조금 어리숙하겠지요. 어느 모로 보면 좀 지나치거나 넘칠 수 있고, 때로는 모자라거나 엇나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 삶길에 따라 내 사진길인 만큼, 사진으로 담는 솜씨가 모자라더라도 사진을 이루는 넋은 처음이나 끝이나 매한가지입니다.

 살아가는 매무새 그대로 사진을 합니다. 살아가며 사람을 사귀는 매무새 그대로 사진을 하면서 사람을 만납니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뭇목숨이든 사진으로 예쁘게 담으려는 꿈을 품으면, 언제나 예쁘게 담습니다. 다만, 이때에도 처음에는 손재주는 좀 어설프겠지요. 차근차근 손재주를 가다듬으면서 내 사진을 빛냅니다.

 먼저 어떻게 살아가려 하는가 하고 내 삶을 단단히 뿌리내리지 않고서는 사진을 하지 못합니다. 먼저 내 삶을 어떻게 일구려 하는가 하고 내 다짐을 굳세게 다스리지 않고서는 사진뿐 아니라 자전거라든지 달리기라든지 살림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배움이라든지, 어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좋은 사진이 따로 없듯이 좋은 삶은 따로 없습니다. 좋은 사진이 따로 없는 만큼 좋은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좋은 사진을 생각할 수 없듯이 좋은 사랑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더 돋보이는 사람을 찍었기 때문에 사진이 더 돋보일 까닭이 없습니다. 더 이름난 사람을 찍었으니까 사진이 더 이름날 까닭이 없습니다. 더 예쁘장한 사람을 찍었다 해서 더 예쁘장한 사진이 되지 않아요.

 사진은 그예 사진이고, 사람은 그예 사람이며, 사랑은 그예 사랑입니다.

 있는 그대로 사진을 맞아들이지 않는다면, 나한테든 남한테든 사진이란 사진이 아니라 껍데기이거나 겉치레에 그칩니다. 있는 그대로 사진을 가슴으로 삭여 내 삶 한 자락으로 살포시 녹일 때에 바야흐로 나한테든 남한테든 살가이 사진으로 젖어듭니다.

 스티브 맥커리(Steve McCurry) 님이 일군 사진책 《Portrait》(Phaidon,1999)를 들여다봅니다. 사진책 《Portrait》에 담긴 사람들 가운데 돋보인다거나 이름났다거나 한 사람도 틀림없이 있겠지요. 그러나 이렇게 사진책으로 담긴 사람들 바로 옆에 있었을 다른 사람을 사진으로 담았어도 《Portrait》는 똑같이 이루어집니다.

 누구를 찍었기에 《Portrait》가 되거나 누구를 못 찍거나 안 찍었대서 《Portrait》가 안 되지 않습니다.

 영어사전에서 ‘Portrait’를 찾아보면 ‘초상화’나 ‘인물 사진’이라고 풀이합니다. 아마 그림만 있던 지난날에는 ‘얼굴그림’을 ‘Portrait’라 했겠지요. 우리는 말뜻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 말이나 함부로 쓰며 살아가는데, ‘肖像畵’란 “초상 그림”이고, “초상 그림”에서 ‘肖像’이란 “얼굴을 그리는 일”입니다. 아득히 먼 옛날 이 나라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은 쉽거나 바른 한국말을 하기보다는 중국사람을 섬기며 중국말을 하거나 중국글을 쓰기를 즐겼습니다. 이러다 보니, 여느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는 ‘肖像’ 같은 한자말을 중국에서 받아들였으며, 이 중국말은 아직까지 이 땅에서 버젓이 살아숨쉽니다. 이제 우리 한국사람은 중국사람 중국말이 아닌 한국사람 한국말을 해야 할 테니, ‘초상화’가 아닌 ‘얼굴그림’이라 말해야 하며, ‘인물 사진’ 또한 아닌 ‘얼굴사진’이라 일컬어야 제대로 쓰는 말이 됩니다.

 곧, 《Portrait》는 ‘얼굴사진’이란 소리입니다. 그러나, 사진책을 내놓을 때에 《얼굴사진》처럼 쓰는 사람은 없으니, 그냥 《얼굴》이라 하겠지요. 또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티브 맥커리 님은 영어로 ‘human’이라 하지 않고 ‘portrait’라 했습니다. ‘사람’이라 할 때에는 사람 모습이나 얼굴 모습뿐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나 ‘사람이 살아가는 터’까지 두루 담는 사진이요, ‘얼굴’이라 할 때에는 얼굴 모습이나 얼굴이 드러나는 사람 모습을 담는 사진이지,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이나 보금자리까지 넓게 살피는’ 사진이 아닙니다. 애써 ‘사람’으로 하지 않고 ‘얼굴’로 하더라도 ‘사람삶’을 담을 수 있다는 뜻으로 《Portrait》이고, 이에 걸맞게 온누리 여러 나라 사람들을 만나면서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사진을 책 하나로 도톰하게 엮습니다.

 《Portrait》에 담긴 얼굴사진을 살피면, 어린이 얼굴사진이 어른 얼굴사진보다 조금 많고, 계집아이 얼굴사진이 사내아이 얼굴사진보다 살짝 많으며, 아프가니스탄과 인도와 버마 사진이 거의 모두를 차지합니다. 사이사이 티벳과 미국 사진이 깃듭니다. 니제르나 말리나 인도네시아나 유고슬라비아나 네팔 사진도 드문드문 섞입니다.

 사진을 찍는 스티브 맥커리 님을 가만히 바라보는 눈빛이든, 사진쟁이가 사진을 찍는 줄 모르는 사이 찍힌 사람들 눈빛이든, 이 나라 사람들 눈빛이든 저 나라 사람들 눈빛이든, 《Portrait》에 얼굴이 실린 사람들 눈빛은 무척 말갛습니다. 미국사람이라서 게슴츠레하지 않습니다. 배고픈 어린이라서 뿌옇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라서 슬프지 않습니다. 돈있는 사람이라서 기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람삶 그대로 보여주는 눈빛입니다.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두 손을 곱게 모아 무슨 이야기를 소곤소곤 들려줍니다. 사진으로 찍히면서 이렇게 두 손을 곱게 모을 수 있구나 하고 새삼 깨닫습니다. 사진쟁이가 사진을 잘 찍었으니 이와 같은 모습을 얻기도 할 테지만,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이 마음을 한껏 열어 ‘아무쪼록 사랑과 기쁨이 찾아드소서’ 하는 비손이 담기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여러 나라 여러 겨레 사람들을 이처럼 한 자리에 모아서 두루 돌아보면서 생각합니다. 몸피와 얼굴과 살결이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같은 겨레 사람일지라도 옷차림이 똑같지는 않습니다. 한 사람이 물레를 잣고 베틀을 밟아 바느질을 하여 얻은 옷일지라도 두 사람이 입으면 두 가지 옷이 다릅니다. 얼핏 보면 똑같다 생각하겠으나, 다른 두 사람이 입은 옷인 만큼 다른 두 가지 옷입니다. 그러나, 다른 두 사람이지만, 두 사람 몸에 흐르는 기운과 넋이란 한동아리로 아름답습니다. 두 사람 모두 따순 피가 흐르며 따순 사랑이 감돕니다.

 흙땅을 맨발로 뒹굴든, 아스팔트바닥을 구두를 신으며 자가용을 모느라 밟을 일조차 없든, 두 사람 모두 몸에는 따순 피가 흐릅니다. 차가운 피가 흐르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더 거룩해 보이는 얼굴을 찾으려고 티벳이나 인도나 아프가니스탄을 찾아갈 까닭이 없습니다. 더 슬퍼 보이거나 가녀리다 싶은 얼굴을 찾으려고 미국이나 프랑스를 떠돌 까닭이 없습니다. 저마다 선 자리에서 돌보는 삶을 느끼면서 손을 잡을 수 있으면 됩니다. 누구나 제 나라 제 겨레 터전에 걸맞게 살아가는 결을 사랑할 수 있으면 됩니다.

 사진쟁이는 사진이기 때문에 글이나 그림이 이루지 못하는 이야기를 빚습니다. 글이나 그림으로는 온누리 여러 나라와 겨레 삶자락을 두루 찾아다니며 마주하는 동안 이렇게 숱한 빛깔 숱한 얼굴 이야기를 낳지 못합니다. 사진은 사진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 다 다른 얼굴빛과 ‘얼굴에 서린 이야기’를 두루 느끼도록 돕습니다.

 좋은 사진은 따로 없습니다. 좋은 삶이라고 느끼며 즐거이 꾸리는 사람이 있다면, 좋은 사람으로서 좋은 삶이요, 이 좋은 사람 좋은 삶을 어깨동무하는 사진쟁이는 전문작가이든 다큐작가이든 풋내기이든 새내기이든 아무것 아닌 사람이라 하든, 사진기를 들 때에 누구나 다 다르게 좋은 사진을 얻습니다. (4344.3.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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