そっとネコぼけ (單行本)
이와고 미츠아키 / 小學館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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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을 잘 찍으려고 힘쓰지 마셔요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32] 이와고 미츠아키(岩合光昭), 《そつとネコぼけ》(小學館,2008)



 사진을 잘 찍으려고 힘쓴다 해서 사진을 잘 찍을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을 예쁘게 찍으려고 애쓴다 해서 사진을 예쁘게 찍을 수 없습니다. 사진을 멋지게 찍으려고 마음쓴다 해서 사진을 멋지게 찍지는 않습니다.

 나 스스로 잘 일구는 좋은 내 삶이라면, 내가 어떤 사진기를 손에 쥐더라도 즐겁게 잘 찍는 사진입니다. 나 스스로 예쁘게 사랑하는 내 삶이라면, 내가 누구를 마주보며 사진으로 담는 예쁘게 찍는 사진입니다. 나 스스로 멋지게 보살피며 아끼는 나날이라면, 내가 언제 어디서라도 멋지게 찍는 사진입니다.

 어느 한 가지만 잘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 한 가지만 못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일과 놀이가 찬찬히 이어집니다. 모든 삶과 꿈은 하나입니다.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살아가면서 생각합니다. 말을 하면서 꿈을 꾸고, 꿈을 꾸면서 말을 합니다. 삶을 일구면서 사진을 찍고, 사진을 찍으면서 삶을 일굽니다.

 그러니까, 가르치면서 배운다 하고, 배우면서 가르친다 합니다. 교사는 학생 앞에서 교사이면서 학생이 되고, 학생은 교사 앞에서 학생이면서 교사가 돼요. 학생한테 무언가 가르친다 하지만, 가르친다고 하면서 정작 교사 스스로 배우는 삶이 됩니다. 교사한테서 무언가 배운다고 하지만, 배운다고 하면서 막상 학생 스스로 가르치는 삶이 돼요.

 그렇지만, 사진은 누가 누구한테 가르치지 못합니다. 사진은 누가 누구한테서 배우지 못합니다. 사진을 가르친다고 할 때에는 사진을 가르치는 사람 스스로 사진을 새롭게 배워야 하지만, 사진을 가르친다 하면서 사진을 가르치는 사람이 사진을 배우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진을 배운다 할 때에도 사진을 배우면서 사진을 가르치는 사람한테 무언가 가르치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워요.

 이론을 가르친다는 자리에서든 실기를 가르친다는 자리에서든 늘 매한가지입니다. 사진을 이야기하는 이론책을 내든 사진 발자국을 보여주는 역사책을 내든 노상 똑같습니다. 사진기나 사진장비를 두루 알려주는 책을 내놓든, 사진을 더 잘 찍는 솜씨나 매무새를 밝히는 책을 내놓든, 언제나 다르지 않아요. 모두들 외통수가 되고 맙니다. 하나같이 사진삶하고 동떨어진 사진지식에 머물고 말아요.

 길고양이나 골목고양이나 들고양이라 할 만한 고양이들을 두루 만나거나 사귀면서 사진으로 담는 이와고 미츠아키(岩合光昭) 님 사진책 《そつとネコぼけ》(小學館,2008)를 읽습니다. 이와고 미츠아키 님이 담는 고양이 모습은 어느 사진을 보더라도 ‘잘 찍은’ 사진이 아닙니다. 이와고 미츠아키 님이 빚은 어느 사진을 보더라도 ‘사랑스레 찍은’ 사진이라고 느낍니다. ‘즐거이 찍은’ 사진입니다. ‘웃으면서 찍은’ 사진이거나 ‘울면서 찍은’ 사진이에요.

 ‘잘 찍으려’ 하는 사진이라든지 ‘예쁘게 찍으려’ 하는 사진이라든지 ‘멋지게 찍으려’ 하는 사진하고는 한참 떨어진 《そつとネコぼけ》입니다. 이와고 미츠아키 님은 ‘고양이를 고양이 그대로’ 찍을 뿐입니다. 고양이가 고양이답지 않게 찍는다든지, 고양이를 고양이 아닌 사람처럼 보이도록 찍지 않습니다. 고양이가 고양이로서 고양이다이 살아가는 자취를 곁에서 고양이 벗님으로 다가가면서 사진으로 담습니다.

 곧, 집고양이라 하든 들고양이라 하든 ‘이 고양이들을 잘 찍어서 보여주려’ 애쓸 까닭이 없습니다. 그저 고양이는 고양이인 만큼 고양이다이 느끼면서 사랑할 수 있도록 사진으로 찍으면 돼요.

 내 아이를 찍을 때에도 이와 똑같습니다. 내 아이는 내 아이답게 사랑할 수 있도록 사진으로 담을 노릇입니다. 내 아이를 ‘이웃 엄마 아들’ 모습처럼 보이도록 찍으려 하면 부질없을 뿐 아니라 슬픕니다. 내 옆지기를 사진으로 찍을 때이든, 내 어버이를 사진으로 찍을 때이든, 내 동무나 이웃을 사진으로 찍을 때이든 언제나 똑같습니다. 가난한 골목동네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든, 외진 시골마을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든, 나라밖 인도나 네팔을 찾아가서 사진을 찍든, 늘 똑같아요. 남달리 보이도록 찍을 사진이 아닙니다. 돋보이게 찍을 일이 없는 사진입니다. 더 거룩해 보이도록 한다든지, 더 아름다이 보이도록 할 까닭이 없습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부르는 자리에서도 한결같습니다. 꾸밈없이 글을 쓰면 됩니다. 수수하게 그림을 그리면 돼요. 있는 그대로 노래를 부르면 될 뿐입니다.

 다만, 꾸밈없이 글을 쓰되 내 온 사랑을 담습니다. 수수하게 그림을 그리되 내 모든 꿈을 싣습니다. 있는 그대로 노래를 부르되 내 온갖 믿음을 얹어 부릅니다.

 가만히 돌이키면, 아직 이 나라에서는 고양이를 사진으로 담든 기와집을 사진으로 담든 연예인을 사진으로 담든 설악산을 사진으로 담든 바닷가를 사진으로 담든 명품이라는 가방을 사진으로 담든, 사랑과 믿음을 고이 실어 착하거나 해맑게 사진꿈을 길어올리는 사진쟁이를 좀처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와고 미츠아키 님은 고양이를 사진으로 옮기면서 우리들 착하고 해맑은 삶을 사랑하는 길을 찾아나섭니다. (4344.8.28.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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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8-29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이런 사진을 볼때마다 저도 사진을 찍고 싶다는 욕망이 불끈 불끈 솟아오르네요^^

숲노래 2011-08-30 05:53   좋아요 0 | URL
사진은 사진기로도 찍지만,
마음으로도 찍어요.

마음으로 예쁘게 담으면 돼요~
 
윤광준의 아름다운 디카 세상
윤광준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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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야기가 없으면 사진이 아닙니다
 [찾아 읽는 사진책 43] 윤광준, 《아름다운 디카 세상》(웅진,2004)



 2002년에 《잘 찍은 사진 한 장》(웅진지식하우스)을 내놓은 윤광준 님이 이태 뒤 새롭게 내놓은 《아름다운 디카 세상》(웅진,2004)을 읽습니다. 윤광준 님은 “사진을 찍기 위해 특별한 곳을 가야 한다는 생각은 거추장스럽다(39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참 옳다 싶은 이야기입니다. 사진을 찍으려고 남다르다 싶은 곳에 가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진을 배우려고 남다르다 싶은 사진책이나 인문책을 읽어야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남다르다 싶은 사진’ 한 장을 얻는 일이 부질없듯이, ‘잘 찍었다 싶은 사진’ 한 장을 얻는 일이 덧없습니다.

 《잘 찍은 사진 한 장》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한 사진삶을 이태 뒤에는 어느 만큼 곰삭였을까 궁금해서 《아름다운 디카 세상》을 펼칩니다. 사진밭에 처음 발을 들이는 이들이 윤광준 님 책을 퍽 즐겨읽을 뿐 아니라, 사진길을 그럭저럭 걷는 이 또한 윤광준 님 책을 꽤 들여다보기 때문입니다. 여러모로 사진말을 낳으며 사진꿈을 키우는 윤광준 님이기 때문에 “브레송과 같은 열정을 바치지 않는다면 평생에 걸쳐 ‘결정적 순간’을 포착해 낼 확률은 거의 없다(80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고개를 갸웃합니다. 앙리까르띠에 브레송 님은 ‘어떤 열정’을 바쳤을까요. ‘평생에 걸쳐 결정스럽다 싶은 순간을 붙잡아야 할 까닭’이 꼭 있는가요.

 윤광준 님은 “사진이란 게 꼭 좋은 화질에 얽매일 필요가 있을까? 나의 의식과 대상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좋은 사진 아닌가(139쪽)?” 하고 묻습니다. 우리한테 묻지 않습니다. 윤광준 님 스스로한테 묻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물으면서도 디지털사진기 화소수를 이야기하는 틀에서 홀가분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묻지만, 막상 값싸고 가벼운 똑딱이를 즐겨쓴다고 느끼기 어렵습니다. 디지털사진기를 쓸 때에도 ‘잘 찍은 사진’에 얽매이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진 한 장에는 사진에 담기는 사람들 이야기가 스며들 뿐 아니라, 사진 한 장을 빚는 사람 이야기가 나란히 깃듭니다. 이야기가 있기에 사진입니다. 이야기가 없으면 사진이 아닙니다. 이야기가 있기에 글입니다. 이야기가 없으면 글이 아닙니다.

 이야기 없이 쓰는 글은 느낌글이 되지 않습니다. 이른바 ‘서평’이 되는데, 서평 가운데에서도 ‘주례사 서평’이 되고 맙니다. 이야기 없이 만든 문학은 시나 소설이나 수필이 되지 못합니다. 어찌어찌 문학 테두리에 든달지라도 이야기가 없는 시나 소설이나 수필을 왜 읽겠습니까. 이야기 있는 삶에서 샘솟는 이야기 있는 문학입니다. 이야기 있는 삶에서 길어올리는 이야기 있는 사진입니다.

 ‘사진을 잘 찍었다’ 할 때에는 구도·초점·빛·빛깔·그늘을 잘 맞추었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구도·초점·빛·빛깔·그늘을 잘 맞추며 찍은 사진은 ‘빈틈없이 찍었다’ 할 만한 사진이지 ‘잘 찍은’ 사진이 아닙니다. 잘 찍은 사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만, 굳이 이런 꾸밈말을 넣어 말을 하자면, ‘잘 찍은’ 사진이란, 구도가 어긋나거나 초점이 흔들리거나 빛이 모자라거나 빛깔이 어수룩하거나 그늘이 맞지 않다 하더라도 ‘이야기가 살아숨쉬는’ 사진입니다. 앙리까르띠에 브레송 님이 빚은 사진은, 이른바 ‘잘 찍은 사진’이면서 ‘빈틈없이 찍은’ 사진입니다. 반드시 ‘열정을 바쳐야’ 브레송다운 사진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내 삶을 아끼고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 삶을 사랑하면서 사진 한 장으로 그러모을 꿈을 건사할 때에, 필름사진기이든 디지털사진기이든 값비싼 사진기이든 값싼 사진기이든, 어느 사진기를 손에 쥐더라도 ‘참으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따사로운 사진’ 한 장을 얻습니다.

 윤광준 님은 “사진 찍을 대상이 걷거나 뛰면 나 역시 그와 같이 움직이며 사진의 리얼리티를 표현해 내야 하는 것이다(190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옳다 싶은 말입니다. 다만, ‘사실성 짙은 느낌을 나타내야’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사실’이란 무엇일까요. 한자말로 적는 ‘事實’ 말뜻을 제대로 헤아리는 분이 너무 적은데요, ‘사실’이란 “있는 그대로”입니다. 한 마디로 가리키면 “꾸밈없이”입니다. “본 그대로”가 아닌 “있는 그대로”이고, “덧붙이거나 깎거나 손질하는” 모습이 아니라 “꾸밈없는” 모습입니다.

 사진으로 찍힐 사람하고 ‘같이 움직이는’ 일은 틀림없이 잘 살필 매무새 가운데 하나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꼭 같이 움직이지 않아도 돼요. 가만히 멈추어 가만히 지켜보아도 돼요. 굳이 같이 뛰어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따라하기’란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함께 어울려 놀거나 사는 모습이 아니거든요. 말 그대로, 내가 사진으로 담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같이 살아야’ 합니다. ‘같이 살면’ 넉넉해요.

 같이 살아가는 고운 벗이기 때문에, 고운 벗하고 오래도록 떨어져 지내더라도 마음으로는 날마다 만납니다. 같은 자리에서 두 눈을 마주보지 못하더라도 깊은 마음으로는 언제나 함께 지냅니다. 사진으로 담을 넋이란 서로 애틋하게 여기는 사랑 한 가지입니다. 눈으로 느끼는 모습을 넘어, 마음으로 아끼는 사랑입니다. 온몸으로 껴안고 온마음으로 부둥켜안는 기쁨입니다.

 윤광준 님은 ‘아름다운 디카 세상’이라 이야기하지만, 디지털사진기가 아름다운 누리를 이루자면, 이에 앞서 ‘우리들이 서로 어우러지면서 살아가는 이 터전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아름다이 일구는 삶’에서 ‘아름다운 사람’으로 어깨동무하는 ‘아름다운 사랑’이 샘솟아 ‘아름다운 사진’이 꽃피웁니다.

 어떤 장비를 쓰든 아름다울 수 있는 사진이 아닙니다. 아무 장비라도 아름다울 수 있는 사진이 아닙니다. 아름다이 살아가기에 글을 쓰면 글에 아름다움이 깃들고 그림을 그리면 그림에 아름다움이 깃들며 사진을 찍으면 사진에 아름다움이 깃듭니다. 사진이 아름답거나 필름사진기가 아름답거나 디지털사진기가 아름답지 않습니다.

 젓가락이 아름답기에 밥이 맛나지 않습니다. 밥그릇이 아름답기에 배불리 밥을 먹지 않습니다. 밥을 차린 손길이 아름답기에 밥이 맛납니다. 밥상에 오르기까지 땀흘린 흙일꾼 손마디가 아름답기에 배불리 밥을 먹습니다.

 사진을 찍고 나누며 즐기는 사람들 삶 밑자락을 건드리거나 들여다보지 않고서야 《아름다운 디카 세상》이 밝히거나 보여주려 하는 이야기를 옳게 건사하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이리하여, 윤광준 님은 “카메라 하나로 세상을 보는 관점이 이렇게 다른 만큼 아들녀석과 나와의 이해의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22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아닙니다. 사진기를 바라보는 눈이 아닙니다. 사진기와 놀이기계입니다. 윤광준 님 아들아이는 놀이기계로 디지털사진기를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사진기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삶이 다르기에 사랑이 다르고, 사랑이 다른 만큼 사진이 다릅니다. 아니, 사진이 아닌 놀이라 할 테지요.

 사진기 하나로 온누리를 바라보는 눈길이 아닌 줄 느껴야 합니다. 살아가며 온누리를 바라보는 눈길이 다른 줄 헤아려야 합니다. 온누리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매무새가 다른 줄 살펴야 합니다.

 사진이란, 다 다른 터전에서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사랑을 꽃피우면서 다 다른 이야기를 길어올릴 때에 이 다 다른 꿈결을 살뜰히 보듬는 어여쁜 손길 가운데 하나입니다. (4344.8.25.나무.ㅎㄲㅅㄱ)


― 아름다운 디카 세상 (윤광준 글·사진,웅진닷컴 펴냄,2004.4.30./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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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형무소 - 옮기던 날의 기록 그리고 그 역사, 개정증보판
리영희·나영순 글, 김동현·민경원 사진 / 열화당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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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지개’사진을 ‘까망하양’사진으로 바꾸다
 [찾아 읽는 사진책 29] 김동현·민경원, 《서대문 형무소》(열화당,1988/2008)


 어느 한 사람을 사진으로 담든, 어느 집 하나를 사진으로 찍든, 어느 한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마다 다 다르게 사진을 내놓습니다. 어느 집 하나를 마주하는 사람마다 다 다른 느낌을 사진에 싣습니다.

 다만, 기계를 바꾼대서 사진 느낌이 확 바뀌지는 않습니다. 쓰는 기계가 달라지면 아주 조그마한 대목에서 느낌이 얼핏 바뀌기는 하지만, 같은 사람이 같은 사람을 바라보거나 같은 사람이 같은 집을 바라보며 사진으로 담는 느낌은 거의 똑같습니다.

 기계는 그대로이고 사람이 다르다면, 이때에는 언제나 다른 사진이 태어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마다 다 다른 어버이한테서 태어나 다 다른 삶을 꾸렸거든요. 다 다른 곳에서 다 다른 사랑을 받으며 다 다른 이야기를 길어올린 사람이기 때문에, 이 다 다른 사람들이 일굴 사진에는 다 다른 사진말이 깃듭니다.

 기계가 그대로요 바라보는 사람 또한 그대로라 할 때에는, 쓰는 필름에 따라 느낌이 달라집니다. 무지개필름을 쓸 때랑 까망하양필름을 쓸 때랑 사진이 달라집니다. 아니, 사진기를 쥔 사람이 사진기에 눈을 박아 들여다볼 때에는 똑같아요. 다만, 필름에 앉히는 모습이 달라지고, 나중에 종이에 사진을 얹을 때에 새삼스럽게 달라진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한 가지 더. 기계가 같고 바라보는 사람 또한 같으며 필름 또한 같다 할 때에는, 날씨와 날과 철에 따라 달라집니다. 봄철 찍는 사진하고 겨울철 찍는 사진이 같을 수 없습니다. 궂은 날과 갠 날 사진이 같을 수 없습니다. 아침과 새벽과 낮과 밤 사진이 같을 수 없어요.

 사진은 늘 사진이지만, 사진에 이야기를 싣는 사람입니다. 사진은 언제나 사진으로 이루면서, 사진에 삶을 담는 사람입니다.

 사진찍기를 할 때에 어떠한 기계를 썼느냐는 하나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사진읽기를 할 때에 사진쟁이가 어떠한 기계를 썼느냐를 하나도 몰라도 됩니다. 사진찍기를 할 때에 사진쟁이가 누구한테서 사진을 배웠느냐를 살필 까닭이 없습니다. 사진쟁이는 이제껏 살아낸 내 나날을 돌이키면서 내 사진을 찍을 뿐입니다. 사진읽기를 할 때에 사진쟁이가 무슨무슨 대학교를 나오거나 어디어디 배움길을 다녀왔다 하는 가방끈을 알아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진읽기를 할 사람들은 사진 한 장에 깃든 이야기가 내 마음밭에 어느 만큼 아로새겨지는가를 느낄 뿐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기계를 따질 일이 없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내 사진에 담기는 사람이나 집이 어떠한가를 돌아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무지개필름을 쓰겠느냐 까망하양필름을 쓰겠느냐를 가눕니다. 요사이는 디지털파일로도 무지개파일을 쓰겠느냐 까망하양파일을 쓰겠느냐를 가눕니다.

 내 사진으로 담으려는 사람이나 집을 ‘아침에 만나’려는지 ‘낮에 만나’려는지 ‘새벽에 만나’려는지 ‘한낮에 만나’려는지 ‘저녁에 만나’려는지 ‘밤에 만나’려는지를 따져야 합니다.

 내 사진으로 옮기려는 사람이나 집을 ‘맑은 날에 사귀’려는지 ‘궂은 날에 사귀’려는지 ‘비오는 날에 사귀’는지 ‘눈오는 날에 사귀’려는지 ‘구름 낀 날에 사귀’려는지 ‘안개 낀 날에 사귀’려는지 ‘비바람 몰아치는 날에 사귀’려는지 살펴야 합니다.

 내 사진으로 빚으려는 사람이나 집을 ‘따순 봄날에 어우러’지려는지 ‘꽃샘추위 닥친 봄철에 어우러’지려는지 ‘갓 접어든 여름날에 어우러’지려는지 ‘한창 무더운 여름날에 어우러’지려는지 ‘벼락과 우레가 떨어지는 여름날에 어우러’지려는지 ‘산들바람 가을철에 어우러’지려는지 ‘열매가 무르익는 가을날에 어우러’지려는지 ‘겨울비 내리는 겨울날에 어우러’지려는지 ‘큰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철에 어우러’지려는지 ‘꽁꽁 얼어붙은 겨울철에 어우러’지려는지 ‘따스한 바람이 부는 겨울날에 어우러’지려는지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사진책 《서대문 형무소》(열화당,1988/2008)를 읽습니다. 스무 해를 사이에 두고 첫판과 고침판으로 나누어진 두 가지 사진책을 읽습니다.

 사진책 《서대문 형무소》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1988년 사진책이고 다른 하나는 2008년 사진책입니다. 두 사진책은 서로 다른 책입니다.

 왜냐하면, 판짜임과 엮음새가 다를 뿐 아니라, ‘사진마저 다릅’니다.

 처음에는 “한정된 시간 내에 굴절 많은 우리 역사의 현장을 제대로 기록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라도 전할 수 있게 된 것을 우리의 행운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1988/사진 찍은 이).”고 밝혔습니다. 그러면, 스무 해 뒤에는 ‘한정된 시간’이 아니었겠지요. 스무 해에 걸쳐 꾸준히 더 찍고 더 만나며 더 어우러졌으면, 2008년에 새로 내는 1988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못 다 이룬 숱한 이야기를 알알이 아로새길 아름다운 사진책이 될 수 있겠지요.

 나중에는 “판형을 확대하고 기록적 가치가 뛰어난 사진과 도면 자료 등을 추가했으며, 독립지사 세 분의 글을 덧붙여 서대문형무소에 관해 다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2008/편집자).”고 하지만, 2008년 사진책은 그리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2008년 사진책은 판이 조금 커지고 사진 짜임이 조금 달라지며 쪽수가 조금 늘었습니다. 그렇지만, 1988년 사진책하고 무엇이 다른가를 느낄 수 없습니다. 이럴 바라면 1988년 사진책을 똑같이 다시 낼 때하고 무엇이 나아질까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1988년 사진책과 2008년 사진책은 큰 대목에서 서로 엇갈립니다. 1988년 사진책에는 ‘무지개사진’이 제법 실립니다. 2008년 사진책에는 오직 ‘까망하양사진’이 실립니다. 1988년 사진책에는 ‘무지개사진’이었는데 2008년 사진책에서는 몽땅 ‘까망하양사진’으로 바뀝니다.

 나는 묻고 싶습니다. 온누리 사진쟁이 가운데 ‘무지개사진’으로 찍는 이야기하고 ‘까망하양사진’으로 찍는 이야기가 똑같다고 느낄 사람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까망하양사진이 나쁘고 무지개사진이 좋을 수 없습니다. 까망하양사진이 ‘기록 값어치가 빼어나며 다큐멘터리 빝깔이 더 짙을’ 수 없습니다. 두 갈래 사진은 두 갈래대로 이야기가 다르고 삶이 다르며 생각이 다릅니다. 그저 빛느낌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1988년 사진책부터 ‘사진쟁이는 무지개사진으로 담았’으나 ‘출판사 편집자가 까망하양사진으로 바꾸’었는지 모릅니다. 1988년 사진책과 2008년 사진책에서는 이 대목을 한 마디로도 다루거나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대목은 반드시 밝혀야 하고 꼭 다루어야 해요.

 앙리까르띠에 브레송 님이 당신 사진을 ‘까망하양사진’이 아닌 ‘무지개사진’으로 찍었다고 할 때에, 이이 사진을 똑같이 바라볼 수 있을까요. 김기찬 님이 담은 《골목 안 풍경》은 까망하양사진일 때하고 무지개사진일 때에 아주 크게 달라집니다. 사진으로 담긴 모습뿐 아니라 사진으로 찍는 느낌까지 아주 크게 달라집니다.

 무지개사진과 까망하양사진이 어떻게 다른 줄 모른다면, 새벽에 안개가 드리울 때에 소나무를 찍는 사진하고 한낮에 안개가 모두 걷혀 파란 빛깔 하늘이 눈부실 때에 소나무를 찍는 사진이 어떻게 다른 줄 모르는 삶하고 매한가지입니다. 사진책 《서대문 형무소》는 이 나라 사진밭이 어떠한 깊이요 너비인가를 낱낱이 보여줍니다. (4344.8.22.달.ㅎㄲㅅㄱ)

 

― 서대문 형무소 (김동현·민경원 사진,리영희·나명순 글,열화당 펴냄,1988.1.15·2008.1.1./16000원)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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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당과 예술사진 시대 - 한국 근대 예술사진 아카이브 (1910~1945)
이경민.사진아카이브연구소 엮음 / 아카이브북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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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네 사진은 예술이었을까
 [찾아 읽는 사진책 27] 이경민, 《카메라당과 예술사진 시대》(아카이브북스,2010)


 나한테 사진기가 없던 때이든 나한테 사진기가 있는 때이든, 사진찍기를 예술이라 여긴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쓰던 자동사진기를 빌려 수학여행 때에 사진을 찍었든, 후배한테서 빌린 수동사진기로 처음 작품사진을 찍었다 하든, 어떠한 사진이라 하더라도 예술이라 느낀 적이 없습니다.

 사진을 바라볼 때에 그저 사진이라 느끼지 예술이나 문화나 다른 무엇으로 느끼지 않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에 그저 사진이라 여기지 예술이든 문화이든 다른 무엇이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진예술을 말하거나 사진문화를 다루는 일은 이 나름대로 뜻과 값과 보람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방송에서 떠들썩하게 나오는 대중노래를 놓고 노래예술을 말하거나 노래문화를 다루는 일 또한 이 나름대로 뜻과 값과 보람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영화를 놓고 영화예술이라든지 영화문화를 밝힌다 할 때에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무슨무슨 예술이나 문화를 들려주거나 살피는 일은 언제나 이 나름대로 뜻이나 값이나 보람이 있어요.

 다만, 하루하루 아름다이 살아가면서 따로 예술이나 문화를 잘라서 밝히거나 따지거나 살펴야 할까 궁금합니다. 송두리째 껴안을 수 있고 남김없이 살아낼 수 있습니다. 사진은 사진이기에 사진 그대로 껴안으면 즐겁습니다. 사진은 사진인 만큼 사진다이 살아내면 아름답습니다.

 이경민 님이 엮은 사진책 《카메라당과 예술사진 시대》(아카이브북스,2010)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이 사진책은 사진 발자취를 학문으로 파고듭니다. 학문으로 이렇게 파고드는 사진책은 이 나름대로 뜻과 값과 보람이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 사진이 맨 처음 어떻게 받아들여졌고 퍼졌으며 뿌리내렸는가를 들여다보면서 오늘 내 모습을 돌아볼 수 있어요. 지난날과 오늘날과 앞날을 견주면서 우리 사진삶이 어떻게 영글면 좋을까를 곱씹는 밑거름이 됩니다.

 “결국 살롱사진은 사진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예술사진의 제도화 과정에서 오인된, 그리고 공모전 명칭에서 비롯된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살롱사진이라는 명칭으로부터 비롯된 예술사진에 대한 단선적인 이해를 넘어 다양한 예술사진의 생산 맥락을 밝히는 작업이 요구된다(11쪽).” 같은 말마디를 읽으면서 한국 사진밭에서 흔히 쓰는 낱말이 얼마나 알맞을까 곱씹고, 얼마나 사진다울까 헤아립니다. 이윽고, “살롱사진은 앞서 언급했듯이 해방 공간의 좌우 대립 속에서,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에 사진계의 패권을 잡기 위해 호명된 용어라는 점에서 일제강점기 예술사진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에는 부적절한 표현이며(12쪽).” 같은 말마디를 되뇌면서 한국땅에서 한국사람으로 한국사진을 하는 길이란 어떻게 나아가는 길인가 톺아봅니다.

 참말로 어떻게 걷는 내 사진길이 가장 나답다 할 사진이면서 가장 한국사진답다 할 한국사진이 될까요. 나는 내 삶을 어떻게 일구거나 가꿀 때에 내 사진밭을 알뜰히 여미면서 알차게 북돋울까요.

 2011년에 되돌아볼 때에 일흔두 해를 먹은 글월, “사진은 있는 그대로 백여 내인다고 하지만 촬영하는 그 자신의 눈을 통하여 마음에 비치우는 것을 백는 것인 만큼 사진 작품에는 작자의 마음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새로운 의도가 없어서는 더 발전할 수 없는 줄 압니다(200쪽/박필호 1938.6.30.).”를 되읽습니다. 사진에는 사진을 찍은 사람 마음이 담깁니다. 글에는 글을 쓴 사람 마음이 담깁니다. 노래에는 노래를 부른 사람 마음이 담깁니다.

 가장 좋은 사진이나 글이나 노래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가장 흐뭇하게 받아들일 사진이나 글이나 노래란 없습니다.

 누구한테는 이 사진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누구한테는 이 글이 가장 마음에 찹니다. 누구한테는 이 노래가 가장 마음에 와닿습니다.

 더 하지 않되 덜 하지 않습니다. 더 낫지 않되 덜 떨어지지 않습니다. 더 좋지 않되 더 나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삶을 찾아 일굴 노릇입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어깨동무하며 살아갈 노릇입니다. 나는 내가 믿는 고운 보금자리를 돌보며 두 다리 느긋하게 뻗을 노릇입니다. 나는 내가 아끼는 사진기를 마련해서 내 가슴으로 스며드는 모습을 내 이야기를 담아 사진으로 찍을 노릇입니다.

 굳이 갈라야 하지 않으며, 애써 갈라야 하지 않습니다. 사진은 늘 사진이었고, 사진을 예술로 바라보고 싶으면 언제나 예술이 됩니다. 사진은 한결같이 사진이었으며, 사진을 문화로 바라보고 싶다면 노상 문화가 됩니다.

 사진은 사진이기에 예술이나 문화가 됩니다. 사진은 사진이면서 삶이나 꿈이 됩니다. 사진은 사진이라는 알몸뚱이로 사랑과 믿음을 나누는 손길이 됩니다.

 어쩌면 이 나라에는 사진이 없이 예술과 문화만 판치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이 나라에는 예술과 문화는 없이 사진만 예쁘게 감도는지 모릅니다. (4344.8.16.불.ㅎㄲㅅㄱ)


― 카메라당과 예술사진 시대 (이경민 글,아카이브북스 펴냄,2010.9.15./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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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Frank: Peru (Hardcover)
Frank, Robert / Steidl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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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는 이야기를 살아숨쉬도록 하기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34]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 《PERU》(STEIDL,2008)


 페루에는 페루사람이 살아갑니다. 페루사람은 페루사람답게 살아갑니다.

 한국에는 한국사람이 살아갑니다. 한국사람은 한국사람답게 살아갑니다.

 페루사람보다 한국사람이 낫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한국사람보다 페루사람이 나은지 잘 모르겠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 널따란 아파트에서 자주 씻을 수 있으면 더 낫다 싶은 삶이 될까 궁금합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지면서 두 다리로 오래도록 힘겹게 걸어야 하지 않다면, 까맣고 커다란 자가용 짐칸에 짐을 싣고 다닐 수 있으면, 아니 까맣고 커다란 자가용조차 심부름을 해 주는 누군가 몰아 준다면, 이때에 한결 낫다 싶은 삶이 될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책 《PERU》(STEIDL,2008)를 읽습니다.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 님이 1948년에 빚은 사진책입니다. 사진책은 참 얇습니다. 페루땅에서 살아가는 페루사람 사진을 고작 서른아홉 장 담습니다.

 서른아홉 장이라 한다면 필름 한 통보다 석 장 많습니다. 설마 필름 두 통만 찍었겠느냐만, 또 1948년이면 요즈음 같은 필름이 아닌 다른 필름이라 할는지 모를 노릇이지만, 웬만한 여느 사진책을 돌아본다면, 서른아홉 장 사진으로 빚은 《페루》는 참 얄팍한 녀석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진책을 가만히 되넘깁니다. 사진 서른아홉 장이면 참말 적은 숫자인가 되뇝니다. 서른아홉 장이 아닌 삼백여든 장을 담아야 비로소 잘 엮은 사진책이라 할 만할는지 곱씹습니다. 서른아홉 장조차 아닌 서너 장으로 페루사람들 삶을 보여주려 했다면 바보짓이라 할 만한가 되뇝니다.

 사진을 보고, 다시 생각하며, 사진을 보다가, 또 생각합니다. 사진잔치를 하는 이들은 으레 ‘사진 한 장만 알림쪽지에 넣’곤 합니다. 사진책을 내놓을 때에 ‘사진책 앞쪽에 사진 한 장만 넣’기 일쑤입니다. 알림쪽지로든 사진책으로든, ‘사진 한 장’으로 사람들한테 느낌과 이야기를 건네지 못한다면, 사진잔치에 내건 다른 사진들이든 사진책에 담긴 다른 사진들이든 부질없다 할 만합니다. 사진 한 장으로 보여주지 못한다면 사진 백 장이나 천 장으로 보여줄 수 없습니다. 사진 백 장이나 사진 천 장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사진 한 장으로 보여줄 수 있습니다.

 다시금 사진책을 들춥니다. 사진책 《페루》에 실린 어느 사진이건 책겉에 넣을 만합니다. 애써 어느 사진 하나를 가려서 겉에 넣을 만하지 않습니다. 페루땅 페루사람 이야기라면 이 사진이든 저 사진이든 잘 어울리는구나, 잘 드러나는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잘 모르겠습니다. 누군가 한국땅에서 한국사람을 사진으로 찍는다 할 때에는 어느 사진 하나로 ‘한국땅 한국사람’을 보여준다고 내놓을 만할까요.

 한국이라는 나라는 어떠한 땅인가부터 갈피를 못 잡겠습니다. 한국에서 살아간다는 한국사람 또한 어떠한 몸과 마음으로 어떠한 꿈을 키우면서 어떠한 살림을 일구는 겨레인지 가늠하지 못하겠습니다. 4대강사업을 한다며 연장이나 기계를 다루느라 땀흘리는 사람들 모습이랑 자동차나 배를 만드는 공장에서 연장이나 기계를 다루느라 땀흘리는 사람들 모습이랑 얼마나 다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와 나라밖 노동자가 얼크러진 모습에서 무엇을 한국땅 한국사람 모습이라고 그려야 할까 잘 모르겠습니다. 한겨레 어머니와 조선족 어머니와 필리핀 어머니 사이에서 어떤 한국사람 얼굴을 찾아야 할까 잘 모르겠습니다. 까만 양복을 입고 까만 자가용을 모는 사람이랑 까맣게 탄 얼굴과 까맣게 얼룩진 손으로 흙을 일구는 사람 사이에서 어떤 한겨레 빛깔을 느껴야 할까 잘 모르겠습니다.

 피리를 불고, 양을 몰며, 먼지바람이 이는 흙길 뒤로 높디높은 멧자락이 드넓게 펼쳐진 페루땅 한켠 페루사람들 눈빛과 낯빛을 들여다봅니다. 햇살을 듬뿍 받고, 바람을 가득 마시며, 흙하고 한동아리로 뒹구는 페루사람들 몸뚱아리를 바라봅니다.

 사진에 앞서 사람이란 무엇일까 알아야겠습니다. 사진에 앞서 삶이란 무엇일까 찾아야겠습니다. 사진에 앞서 사랑이란 무엇일까 느껴야겠습니다.

 한국 사진쟁이 가운데 ‘한국사람’을 사진으로 담는다든지, ‘고향사람’을 사진으로 담는 이가 얼마나 될까 알쏭달쏭합니다. 한국사람과 고향사람을 지나 ‘지구별 이웃’이랑 ‘지구별 목숨’을 곰곰이 살피면서 사진으로 싣는 이가 몇이나 될까 아리송합니다.

 왜 사진을 찍는가요. 왜 사진에 담는가요. 사진기를 쥐고 무엇을 바라보는가요. 사진기를 든 채 어디에 서나요.

 사진을 찍어 무엇을 이루려 하는가요. 사진에 담아 무엇을 보여주려 하나요.

 사진기를 든 나하고 사진기를 바라보는 너 사이에는 어떠한 징검돌이나 걸림돌이 있는가요.

 살아가는 사람들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살아숨쉬도록 하는 몫을 맡은 사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니, 글이든 그림이든 노래이든 춤이든 만화이든 영화이든 연극이든 한결같이, 살아가는 사람들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살아숨쉬도록 할 때에 빛이 나면서 맛이 납니다. 살아숨쉬도록 하는 기운을 불어넣는 손길로 빚는 사진이요, 살아숨쉬도록 하는 기운을 샘솟게 돕는 눈길로 일구는 사진입니다. (4344.8.1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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