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숨은책 2023.1.1.

헌책읽기 6 남의 문화유산 답사기 1



  척 보아도 어느 책을 따라하되 따라하지 않는 척하는 결을 보여주는 《남의 문화유산 답사기 1》를 1997년에는 알지 못 했습니다. 저는 1997년에 강원 양구 멧골짝에서 날마다 금강산을 맨눈으로 바라보면서 한 손에 총을 쥐었거든요. 1997년 12월 31일에 드디어 강원도 멧골짝 눈밭을 떠나고서 새뜸나름이(신문배달부)로 돌아오는데, 둘레에서 전유성 씨 책이 재미있다고 읽어 보라 말하는 이가 제법 있었습니다. 그러나 슥 보고는 어쩐지 재미없더군요. 스물다섯 해가 지난 2022년에 모처럼 다시 들추자니 첫머리가 남다르네 싶었다가도, 바로 17쪽 이야기부터 내내 재미없더군요. ‘유럽 배낭여행 이야기’를 쓸 생각을 했다면서 막상 ‘방송국에서 대주는 돈으로 널널하게 다닌’ 발걸음으로는 뼛골이든 마음으로든 스밀 만한 이야기하고 멀게 마련입니다. 스스로 다리품에 손품을 팔면서 만난 이웃나라가 아니라, 심부름꾼(통역·짐꾼·운전사)을 거느리는데다가 밥값도 찻값도 술값도 길삯도 스스로 치르지 않으면서 무슨 ‘배낭여행’이 될까요? 이러다 보니 발바닥으로 느끼거나 누린 ‘이웃나라 살림(문화유산)이 아니’라 ‘남들(아는 사람들)한테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잔뜩 끼워넣고, 주저리주저리 잔소리가 가득합니다. 일부러 힘들게 돌아다녀야 배우거나 느끼지 않습니다. 손쉬운 길로 가서 이름을 얻거나 판다면, 누구보다 전유성 씨 스스로 배울거리가 없을 테지요. 다른 곳(익살판)에서는 이름을 날리거나 팔았을는지 모르나, 글판에서는 영 시답잖구나 싶어요. 구태여 ‘익살스러워 보일 글’을 쓰려고 용을 쓸 까닭이 없어요. ‘남’을 이야기할 까닭도, 남들이 들려준 말을 잘 옮겨서 붙여야 할 까닭도 없습니다. 우리나라를 다리품을 팔아서 돌아다니든 이웃나라를 발품을 팔아서 누비든, ‘내 눈(우리 눈)’으로 보면 될 뿐입니다. 책이름조차 그렇습니다. 유흥준 씨 책이름을 흉내내려 했으면, 차라리 “너네 문화유산 답사기”로 붙였으면 그나마 나았으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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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문화유산 답사기 1》(전유성, 가서원, 1997.4.15.첫/1997.5.25.10벌)



배낭여행에 웬 촬영팀이냐 하면, 우리 부부가 유럽으로 여행을 간다니까 이왕 가는 거 비디오로 좀 찍어서 방송으로 내보내자는 데가 세 군데 있었다. (17쪽)


잘돼 있다고 소문난 파리 지하철이 알고 보면 굉장히 불편하다는 걸 오래 있어 본 사람이나 유학생들은 안다. 화장실 없지 문도 자동이 아니지 칸마다 왔다갔다고 안 되지. 정말 엄청 불편하다고 한 친구가 말했다. 그러자 다른 한 친구가 대답한다. “야, 임마! 대신 잘 빠진 애들이 많이 타잖아!” 그건 그래!!! (36쪽)


산책을 좋아하는 부모들은 아이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역사적인 건물들 사이를 지나고 공원을 지나고 다리를 건넌다. (100쪽)


그런데 다니다 보면 음식을 배달해 먹을 수 있는 한국이 역시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피자는 외국에서도 배달해 주지만. 집에서 시켜먹고 싶은 게, 누워서 편안하게 먹고 싶은 게 어디 피자뿐이랴!!! 그래서 우리는 배달민족이다!! (137쪽)


프랑스 성인 프로그램은 어떻게 보면 일본 것보다 더 야하다. 굉장하다. 충격을 받는다. 수요일, 금요일, 토요일 밤 열두 시 넘어서 케이블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 보아라. 공중파는 수요일날 틀어 보아라. 여기 처음 온 사람들은 처음에 열심히 보지만 나중엔 안 본단다. 남이 하는 것 보면 뭘 하냐! 본인이 직접 해야지!!! (229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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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숲노래 어제책 2022.12.28.

헌책읽기 5 아톰의 철학



  예전에는 그림책을 낮잡는 분이 많았으나, 이제는 많이 바뀌었습니다. 만화책을 낮잡는 분이 많습니다. 앞으로도 만화책을 낮잡는 물결은 바뀌기 어려울 듯싶습니다. 그림책을 안 읽어 본 사람이라면 그림책을 낮잡게 마련이요, 얼핏 그림책을 펼쳤더라도 찬찬히 읽고 누리려는 마음이 아니라면, ‘그림책을 조금 맛보았어도 낮보는 마음이 안 가십’니다. 만화책을 놓고도 매한가지요, 사진책을 놓고도 비슷합니다. 서울에서 살기에 ‘서울을 맛보며 알아갑’니다. 오늘날은 거의 모두 서울(도시)에서 살기에, 다들 서울을 맛보면서 꽤 알 뿐 아니라, 서울에 익숙합니다. 이와 달리 거의 모두 시골에 안 사는 터라, ‘막상 시골에서 태어난 사람’조차 시골을 모를 뿐 아니라, 시골을 알 마음조차 없게 마련입니다. 《아톰의 철학》은 ‘만화책이란 무엇인가’하고 ‘사람들이 만화를 누구나 즐기도록 확 바꾸어낸 테즈카 오사무는 어떤 사람인가’ 두 가지를 들려주려 합니다. 만화를 만화로 바라보면서 누구나 곁에서 새롭게 마음을 다스리는 길동무로 삼기를 바라는 마음이 물씬 흐르고, 이 만화를 어린이·푸름이하고 어른 곁에 살포시 놓는 살림빛을 가꾸고 편 테즈카 오사무는 ‘무슨 마음으로 그리고, 무슨 넋이 만화에 흐르는가’를 풀어내는 줄거리예요. 흔히 “만화님(만화의 신)” 같은 이름을 붙이지만, 이보다는 “만화사랑”이란 이름이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사랑이기에 환하게 피어나도록 가꾸거든요. 오로지 사랑이기에 “누구나 만화책”으로 돌봅니다. 그림책은 “애들이나 보는 책”일 수 없어요. 만화책도 “애들이나 볼 책”일 수 없습니다. ‘한두 쪽으로 펼친 그림에 이야기를 얹는 그림책 얼거리’라면 ‘칸으로 크고작게 쪼개어 글·그림을 여미는 이야기에 얹는 만화책 얼거리’입니다. 어깨동무(평화)를 이루는 길은 늘 사랑 하나라는 마음을 그림꽃(만화)에 담기에 두고두고 아름다이 누립니다. 네, ‘그림꽃’이란 이름이 어울리는 ‘만화’입니다.


ㅅㄴㄹ


《아톰의 철학》(사이토 지로/손상익 옮김, 개마고원, 1996.8.20.)



동물원의 우리 속에서 평생 인간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으며 산다는 것은 판쟈 왕가의 왕자에게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24쪽)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발표된다는 기약도 없는 만화를 매일매일 그려 나갔던 데즈카. 만화를 그리는 것도 보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던 전쟁이란 상황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만약 또 전쟁이 일어나 자유롭게 만화를 그릴 수 없는 사회가 된다면 큰일이다. 절대로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의가 이 젊은 만화가를 열정적으로 만화에 매달리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전쟁은 1945년 8월 15일에 끝나지 않았다. (45쪽)


창작하는 사람의 ‘이런 것을 말하고 싶다’는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만화는 오랫동안 독자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데즈카는 반복해서 말하곤 했다. 그러나 그 메시지가 강요된다거나 독선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장 경계한 사람 역시 데즈카였다. (64쪽)


데즈카는 … 또 시대상황과 관계없이 단지 하루하루 생계를 꾸려가는 민중을 묘사하면서 결코 ‘정의와 악’이란 상투적인 도식을 쓰지 않았다. 각 개인의 삶의 방식에 모두 애정을 담아 묘사하는 것으로, 그의 만화 창작관을 실증해 보였다. (163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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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숲노래 어제책 2022.12.28.

헌책읽기 4 할아버지의 부엌



  나라에 이바지하고 일터(회사)에 몸바치는 사내가 수두룩합니다. 요새는 사내 못잖게, 때로는 사내보다 더 나라하고 일터에 이바지하거나 몸바치는 가시내가 참 많습니다. 곰곰이 보면 어린배움터부터 ‘바깥살이(사회생활)’를 해야 마치 ‘나찾기(자기계발)’를 이룬다고 가르칩니다만, 참말로 집밖을 오래 떠돌면서 돈을 벌고 이름을 얻고 힘을 부려야 ‘나찾기’일까요? 요새는 손수 밥차림을 하는 사내가 부쩍 늘었으나 아직 밥차림을 등지거나 못 하는 사내가 수북해요. 더구나 밥차림을 익히거나 다루면 ‘가시내답지 않다(성평등하고 멀다)’고 여기면서 손에 물을 안 대는 분이 차츰 늘어납니다. 1990년에 우리말로 나온 《할아버지의 부엌》은 나라나 일터에만 온마음을 다하고 살다가 자리에서 물러난 사내들이 ‘마을에 동무도 이웃도 없을 뿐 아니라, 마을을 하나도 모르고, 집살림이며 집안일은 더더욱 모르는 바보스러운 하루’를 나이든 딸아이가 하나하나 짚고 가르쳐 주는 줄거리를 들려줍니다. ‘할아버지가 되고서야 비로소 홀로서기다운 홀로서기를 처음 배우는 아장걸음’은 사내를 보여줘요. 그런데 앞으로는 “할아버지 부엌”뿐 아니라 “할머니 부엌”을 말할 때로 다가간다고 느껴요. 2030년을 지나고 2040년 무렵이면 부엌칼도 도마도 다룰 줄 모르는 가시내가 수북하지 않을까요? 손전화로 시킬 줄은 알되 집에서 살림할 줄 모르는 순이돌이가 넘실거리겠지요? 그동안 나라지기(대통령)를 마친 이들은 하나같이 우람집(대궐)을 짓고서 숨었습니다. 시골 오두막이나 서울 골목집에 깃들어 ‘수수한 들꽃살림’을 짓는 이가 없습니다. 높다란 벼슬이나 감투를 거머쥔 이도 매한가지입니다. 글이름을 판 사람도 엇비슷합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는 삶일까 처음부터 짚을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배움터에서 무엇을 보고 자라는지 다시 돌아봐야지 싶습니다. 부엌일이며 집안일을 안 하고서 배움터만 오래 다니는 사람은 누구나 바보라는 굴레에 스스로 갇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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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부엌》(사하시 게이죠/엄은옥 옮김, 여성신문사, 1990.5.10.)



아버지가 ‘혼자살기’를 선언한 때부터 나는 경제적으로 가계를 꾸리는 방법, 혼자 사는 방법을 아버지에게 가르쳐 드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34쪽)


언니들은 아버지가 욕심쟁이고 자기 멋대로라고 한다. 그러나 혼자 사는 나는 아버지의 기분을 손에 쥐듯 알 수 있다. 나는 너무 바쁘다 보니 외로움을 뼛속 깊이 느낄 사이가 없지만 아버지는 하루 종일 자유시간. (190쪽)


회사를 위해 일생을 바치고, 가족을 위해 이를 악물고,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일도 해왔다. 그리고 나서 문득 돌이켜보니, 거기에는 따뜻하게 마음을 쉴 수 있는 가정이 없었다. (207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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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숲노래 어제책 2022.12.28.

헌책읽기 3 협궤열차



  전라도하고 경상도라는 고장을 가르는 말씨가 있습니다. 여수·순천·광양을 가르고, 진주·하동·거창을 가르는 말씨가 있어요. 순천·고흥이 말씨가 다르고, 하동·함안도 말씨가 달라요. 더 들어가면, 고흥이나 함안에서도 읍내하고 면소재지 말씨가 다르고, 더 깊이 들어서는 시골마을마다 말씨가 다릅니다. 그렇다면 인천하고 서울하고 수원하고 부천하고 시흥도 말씨가 다를 테고, 인천에서도 주안하고 석바위가 말씨가 다를 테며, 인천 창영동하고 송림동하고 도화동하고 숭의동도 말씨가 다르게 마련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를 헤아리면서 글을 쓰는 분은 몇이나 될까요? 《협궤열차》는 틀림없이 인천을 바탕으로 줄거리를 풀어내겠구나 싶어서 집었습니다. 다른 분들은 ‘소설이라는 줄거리’를 볼 텐데, 저는 ‘인천이라는 삶자리’를 읽어 보았습니다. ‘수인선’을 탄 일은 아주 어릴 적 같아 잘 안 떠오르지만, 수인선을 디디면서 한나절 멍하니 걷던 일은 또렷이 떠오릅니다. 어린이·푸름이로 살던 여덟∼열아홉 살 사이에 젓가락 같은 쇳길(철길)을 으레 걸어서 오갔어요. 요새야 버스도 많고 자주 다닌다지만, 예전에는 서울·부산 아닌 데에서는 잦지 않았습니다. 걷는 사람이 수두룩했고, 칙칙폭폭 거의 안 다니는 쇳길을 디디며 오가는 사람도 제법 있어요. ‘인천사람이라면 이러지는 않을 텐데’ 싶은 대목을 내내 느끼며 《협궤열차》를 읽었습니다. 주안사람도 석바위사람도 이러지는 않다고 느끼며 읽었어요. 그냥 ‘글감’으로 좁은길(협궤열차)을 그렸을 테지요. 얼핏 구경한 모습이 아닌, 골목 한켠에 깃들어 보면서, 또 잿빛더미(아파트 단지)가 아닌 논밭에 소금밭이 너른 ‘귀퉁이 도시’를 살아내면서 좁은길 이야기를 써 보았다면 이 책에 ‘인천말씨’가 조금은 묻어났으리라 생각합니다. ‘문학으로 떨어지는 소설’이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수인선’을 다루면서 막상 수원을 얘기하는 글꾼은 없다시피 하고, 인천을 다뤄도 겉훑기로 딴 얘기만 편다는 소리입니다.


ㅅㄴㄹ


《협궤열차》(윤후명, 창, 1994.5.15.)


언제나 뒤뚱거리는 꼬마열차의 크기는 보통기차의 반쯤 된다. 통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며 앉게 되어 있는데, 상대편 사람과 서로의 숨결이 느껴진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수원과 인천 송도 사이를 오가는 수인선 협궤열차이다. 전세계에서 유일하다고도 한다. “그거 트럭하고 부딪쳐도 넘어지겠군.” 누군가가 말한다. 실제로 그런 일도 있는 조그만 열차. (68쪽)


나는 달려가서 딸아이를 끌어안았다. “별일 있졌저.” “무슨 일?” 나는 겨울 추위에 빨갛게 상기된 딸아이의 볼을 쓰다듬었다. “차비를 안 가져왔거든.” “그래서?” 나는 물었다. “담에 갈 때 드린다고 했지.” 이렇게 수인선 협궤열차는 오늘도 하루에 세 번씩 다니고 있다. (69쪽)


그는 석바위가 고향이라고 하였다. 석바위는 주안에서 소래로 오는 중간에 위치하고 있었다. 나는 석바위에서 소래 사이에 펼쳐진 논들의 고즈넉한 정적을 생각하며 사내에게 갑자기 오래 사귀어 온 것처럼 친근감을 느꼈다. 사내는 하룻밤 아무 데서나 지내고 내일 아침 영화를 촬영하는 곳으로 찾아가 볼까 하는 길이라고 말하며 담배를 땀바닥에 버리고 발로 문질렀다. 바람이 벌판을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112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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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숨은책 / 숲노래 어제책 2022.12.26.

헌책읽기 2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어릴 적부터 둘레 어른들은 뻔질나게 ‘나라사랑·겨레사랑(애국·애족)’을 해야 한다고 외쳤고, 아이들이 ‘나라를 사랑하고 겨레를 사랑해야’ 한다면서 이것저것 시켰어요. ‘반공 웅변·글짓기’를 시키고, 툭하면 길거리에 어깨띠나 머리띠를 한 채 한나절을 땡볕이나 눈바람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도록 시켰습니다. 제가 태어난 1975년에 ‘박정희 유신헌법 개헌 국민투표’가 불거졌고, ‘긴급조치 9호’로 온나라를 더 차갑게 짓밟았습니다. 1952년에 태어난 박근혜 씨로서는 1975년이면 스물네 살인데 ‘아버지가 하는 짓’을 막거나 말릴 만한 나이입니다. 그렇지만 이녁은 이런 사납짓을 막은 적이 없고 잘못이라 느끼지 않으면서 살아왔다고 느껴요.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은 박근혜 씨가 마흔두 살에 내놓은 책입니다. 책이름처럼 “수수한 집”에서 태어났기를 바란다고 내내 밝히지만, 정작 ‘보임틀(텔레비전) 구경’으로만 시골살이를 그릴 뿐, 막상 스스로 서울을 떠나 오두막이나 텃밭일로 삶을 지을 생각은 안 했습니다. 박근혜 씨는 내내 ‘아버지 박정희를 꼭두(영웅)로 세우기’를 했고 ‘아버지 박정희만큼 나라사랑·겨레사랑을 누가 했느냐’고 사람들한테 따지거나 가르치려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배부른 돼지”로 살면 즐겁거나 아름다운 나라일까요? 총칼에 주먹질로 윽박지르지 않아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스스로 땀흘려 얼마든지 넉넉히 나누고 어깨동무하는 ‘두레·품앗이·울력’으로 살아왔습니다. 꼭두에 서서 꼭두각시를 휘두르는 짓이 나라사랑일 수 없어요. 맨발로 논밭에 서고, 맨손으로 풀꽃을 쓰다듬고, 맨몸으로 나무를 품을 줄 아는, 그야말로 수수한 하루야말로 푸른별사랑이요 나라사랑이며 겨레사랑일 테지요. 아직 안 늦었습니다. 이제라도 임금집(궁궐)을 버리고서 ‘열댓 평 작은 시골집’으로 옮기시기를 바라요. 작은 시골집에서 나무를 심고 멧새랑 노래하는 ‘작은살림(평범한 가정)’을 살아내시면 조금이라도 허물씻이를 할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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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박근혜, 남송, 1993.10.30.첫/1994.8.6.7벌)



충성을 얘기하고 뭐가 어떻고 말이 많았던 그는 결국 마음에 있는 것은 자리 하나였다. 도저히 능률을 내지 못해 다른 자리로 옮기라고 하니까 반발하고 속좁은 얘기들을 쏟아놓는다. (12쪽)


평범하게 산다 해도 행과 불행은 있기 마련이겠으나 평범한 인생이 부럽기만 하다. TV를 통해서도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보면 마음까지 편안해진다. (38쪽)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중상이 또 시작된 것을 보면 역시 기념 사업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실컷 왜곡을 애써 벗겨 놓으면 또다시 새로 만들어 왜곡을 시작한다. 그리고 국가에 대해 품으셨던 그 원대한 꿈,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피땀 흘리셨던 노고, 이 모든 것은 제대로 계승되지도 못하고 내팽개채져 있는 것이다. (53쪽)


어제 ‘세계의 어린이’ 프로에 등장한 터키 소녀 말이 인상에 남는다. 그곳은 여성들이 주로 밭일을 하며 목화도 따고 하는데,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하니까 17세에 결혼해서 평생 밭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나같이 복잡한 환경에서 사는 사람에겐 너무나 거리가 먼 얘기로 들리지만 그 소녀가 누리는 소박한 꿈과 행복이 부러웠다. (60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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