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390


《오월 그날》

 시민군 상황실장 박남선 글

 샘물

 1988.12.20.



  어떤 말이나 어느 쪽을 믿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어떤 말이나 어느 쪽도 믿지 않으면 된다고 여깁니다. ‘믿지’ 말고 ‘볼’ 노릇이고, ‘본 대로 받아들여서 고스란히 말하’면 되지 싶습니다. “그 말은 못 믿겠던데?” 한다면 “그 말에 깃든 뜻하고 숨은 생각을 느끼고 읽어 보자. 믿지도 안 믿지도 말고.” 하고 여기고요. 1980년 5월에 전남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경기 인천에 살던 어린이가 볼 길도 들을 길도 없었습니다. ‘학살자 전두환’이란 말은 1988년에 중학교에 들어갈 즈음 비로소 들었지 싶어요. 죽인이·때린이·밟은이는 죽이거나 때리거나 밟은 줄 모르거나 딴청을 하기 일쑤입니다. 전남 광주에 없던, 또 1980년이 지나고서야 다른 고장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은 ‘피맛을 본 공수부대 군인’하고 전두환이 얽힌 이야기를 얼마나 헤아릴 만한지 모르지만, 주검도 총칼부림도 숨기지 못합니다. ㅅㄴㄹ


“이미 피맛을 진하게 본 공수들은 얼굴이 새파랗게 공포에 부들부들 떨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사람들을 개머리판으로 후벼 찔러댔다. 마당 안에는 순식간에 붉은 피로 낭자해졌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대문께로 달아나려 하자 M16을 치켜들고 어깨에 밀착시킨 공수들은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려 냉소를 흘리며 방아틀 뭉치에 꽂고 있던 검지 손가락에 힘을 주어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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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377


《방랑 소년 15》

 시무라 타카코 글·그림

 이상은 옮김

 2018.3.15.



  한글판 《방랑 소년》은 2007년 2월에 첫걸음이 나오고, 2011년 11월에 열한걸음이 나오며, 2016년 1월에 열두걸음이 나오더니, 2017년 8월에 열네걸음이 나온 다음, 2018년 3월에 마지막 열다섯걸음이 나옵니다. 한글판은 열다섯걸음이 나오고 얼마 안 되어 모두 판이 끊어집니다. 일본판 《放浪息子》는 2003년 8월에 첫걸음이 나오고 2013년 9월에 마지막인 열다섯걸음이 나옵니다. 첫걸음이 나올 적부터 눈여겨본 만화책인데 뒤로 갈수록 띄엄띄엄 나오다가 바로 판이 끊어진 터라 열다섯걸음 한글판은 아직 장만하지 못했습니다. 한숨을 길게 쉬고는 일본판으로 장만해서 읽었지요. 두 가지 생각이 들더군요. 아슬아슬하게 달리며 마지막까지 한글로 옮겨 주어 고마우면서, 제대로 안 알리고서 너무 잽싸게 판을 끊어버려 밉더군요. 그러나 《이누야샤》 같은 만화책은 2002년에 나온 한글판이 요새도 꾸준히 사랑받지만, 모든 ‘번역만화’가 사랑받기 어려울 만합니다. 펴낸곳에서도 여러모로 애썼으니 한글판을 내겠지요. 책으로 태어난 대목이 고맙습니다. 일본판은 살 수 있었으니, 이 책을 다룬 책집이 고맙습니다. 《방랑 소년》은 ‘한몸에 두 마음’이 깃든 아이들이 겪는 마음앓이를 따사롭게 다룬 푸릇푸릇한 이야기꾸러미입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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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376


《Deutsches Lehrbuch Buch Ⅱ》

 장하구 엮음

 향린사

 1948.8.16.첫벌/1954.4.25.열한벌



  1945년 8월 15일 뒤로 이 나라에는 두 물결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부끄럽고 더러운 일제강점기를 말끔히 씻자는 물결이요, 다른 하나는 일본이 이 나라에 해놓은 살림이 많으니 갑작스레 바꾸면 안 된다는 물결입니다. 역사책에 적혔듯이 이 나라를 말끔하게 씻고서 새롭게 가꾸려던 이들은 거의 다 죽었습니다. 나라를 갑작스레 바꾸지 말고 천천히 바꾸자고 하던 이들은 끝끝내 ‘아무것도 안 바꾸고 그들 쇠밥그릇 지키기’를 해냈습니다. 이제 일본말은 안 써도 되고 조선말(우리말)만 쓰면 되는 나라였으나 일제강점기 친일부역자는 ‘일본말로 익힌 전문말’을 단단히 붙들면서 하나도 안 버리려 했어요. 사람들이 우리 말글을 새롭게 익혀서 즐겁게 삶을 가꾸는 길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랬다가는 그들 일자리가 모조리 사라지거든요. 《도이취 말 교본》은 일본 제국주의가 심은 모든 말씨를 털어내고서 ‘건너따옴법(간접화법), 같은자리(동격), 갈림꼴(분사), 그림씨(형용사), 끝남(종료), 닿소리(자음), 말밑(어원), 바로따옴법(직접화법), 붙임말(한정사), 센바꿈(강변화), 앞토씨(전치사), 줄기(어간), 이음씨(접속사), 홑셈(단수)’ 같은 말을 씁니다. 이제는 우리말로 바깥말을 배우자는 얼개예요. 참으로 짠합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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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375


《우리 대통령 리승만 박사》

 전성천 엮음

 공보실

 1959.3.26.



  군대에 있을 적에 중대장·행정보급관·소대장을 모두 둘씩 맞이했습니다. 이들을 문득 떠올리면 두 갈래예요. 둘레에서 하는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쪽이 하나라면, 둘레에서 어떤 말을 하는가를 곰곰이 듣고서 스스로 달라지려 하는 쪽이 하나입니다. 한쪽은 그야말로 막나가면서 제풀에 지치더군요. 한쪽은 좀 고약한 마음보라 하더라도 가끔은 장난을 걸거나 함께 어울릴 만했어요. 《우리 대통령 리승만 박사》는 ‘대통령’이면서 ‘박사’라는 이름으로 우쭐거리던 이가 걸어온 길을 오직 자랑으로 꾸민 책입니다. 이런 책을 나라에서 나라돈으로 찍어서 허벌나게 뿌렸지요. ‘공보실’이란 공보처요 국정홍보처일 텐데, 바른소리를 사람들한테 알리는 구실이 아닌, 허튼소리로 사람들 눈귀를 닫거나 퍼뜨리는 구실이었어요. 대통령이건 벼슬아치이건 ‘여느 사람을 돕는 심부름꾼’ 노릇을 하면서 나라돈으로 일삯을 받는 자리입니다. 이 대목을 잊고, 곁에서 바른말을 하는 사람을 멀리하면, 예나 이제나 어느 대통령이건 우쭐멋에 사로잡힌 독재자로 남겠지요. ㅅㄴㄹ


“이번에 리대통령각하 제84회의 탄신을 맞이해서 각하의 건강하신 모습과 일상생활 그리고 그간에 이룩하신 업적그대로를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드리고저 《우리대통령 리승만박사》라는 책자를 엮어 보았읍니다.”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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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354


《에미는 先覺者였느니라, 羅蕙錫一代記》

 이구열 글

 동화출판공사

 1974.6.5.



  이구열 님은 2020년 4월 30일에 눈을 감습니다. 우리나라 첫 미술기자라는 이름을 알린 이분은 ‘길잡이’ 노릇을 했다지요. 그림을 읽는 눈길, 그림을 나누는 손길, 그림을 펴는 마음길을 차근차근 밝혔다고 합니다. 1971년부터 나혜석 님 이야기를 쓰기도 했고, 이 글은 《에미는 先覺者였느니라, 羅蕙錫一代記》라는 책으로 태어납니다. 이제는 나혜석이란 이름을 떠올리거나 다루거나 돌아보는 분이 무척 늘었습니다만, 이녁을 그리고 기리면서 갈무리한 사람이 없었다면 아마 어림도 없는 일이 아니었을까요. 그림판에서뿐 아니라 삶자락에서도 길잡이였던 사람이 있고, 이 길잡이를 헤아리면서 새롭게 길잡이가 된 사람이 있어요. 한 사람 두 사람 이어가는 길잡이는 앞으로 새 길잡이를 낳겠지요. 새 길잡이는 다시 새 길잡이를 이끌 테고, 또또 새롭게 태어난 길잡이는 거듭거듭 숱한 길잡이를 돌보는 눈빛이 될 테지요. 아직 아무 길이 없는 곳에서 처음으로 길머리를 잡습니다. 누구도 가지 않은 곳이지만 새벽이슬을 온몸으로 맞으면서 뚜벅뚜벅 나아갑니다.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데 빙그레 웃으면서 춤추는 걸음입니다. 그래요, 꿈을 바라보기에 스스로 길을 내면서 이슬떨이가 되네요. 삶을 사랑하기에 길라잡이예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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