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다 - 우리 시대 전태일을 응원한다
하종강 외 지음, 레디앙, 후마니타스, 삶이보이는창, 철수와영희 기획 / 철수와영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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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태일은 사랑씨앗 뿌린 예쁜 벗님
 [책읽기 삶읽기 25] 손아람과 다섯 사람, 《너는 나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림을 꾸리는 한편, 즐거이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일은 꿈으로만 꿀 수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꿈이 바로 내 삶이고, 내 삶이 곧 꿈입니다. 꿈꾸듯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아니라, 꿈을 이루며 하루하루 거듭나는 내 삶이에요. 왜냐하면 꿈이란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똑 떨어지지 않을 뿐더러, 돈있고 이름있으며 힘있는 사람을 어버이로 두어 태어나야 꿈같은 나날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봄날에 볍씨를 뿌리거나 모내기를 하면서 곧바로 쌀을 얻지 않습니다. 볍씨를 뿌렸으면 볍씨가 잘 자라 싹이 트고 잎이 나며 열매를 맺기까지 잘 건사해야 합니다. 감자알을 묻었다고 이내 굵은 새 감자가 나지 않아요.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기다립니다. 마냥 손 놓고 기다리지 않습니다. 땀 뻘뻘 흘리는 몸뚱이로 기다립니다. 날마다 바지런히 일하면서 기다립니다. 마음속으로 빌고 온몸으로 흙과 부대끼면서 손꼽아 기다립니다.

 참으로 돈이 많고 이름이 높으며 힘이 대단한 분을 어버이로 두었다면 내 삶이 그야말로 아름답거나 훌륭하거나 멋질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 어버이가 돈이 아주 많아, 책을 살 때마다 주머니가 거덜날까 걱정할 일이 한 번도 없다면, 내 책읽기가 더없이 신나거나 즐거울 만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 어버이가 이름이 아주 높아, 내가 조그마한 글 하나 끄적였을지라도 널리 알려지거나 읽히며 이름값을 거머쥘 수 있으면, 내 글쓰기가 그지없이 기쁘거나 놀라울 만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 “몸을 쓰는 위험한 일이고 바깥에서 보면 어떻게 이렇게 일하냐, 싶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드네요. 저는 노동환경 개선이나 그런 것보다는 그냥 관리직 윗사람들의 따뜻한 한 마디면 충분할 것 같아요. 수고했다, 한 마디만 해도 되는데 오히려 화풀이 하고 욕질하는 윗사람들이 있어요. 힘들지 않냐, 물 한 잔 마시고 해라, 지나가는 말만 해 줘도 일을 더 열심히 할 텐데. 기분도 좋잖아요. 조금만 더 인간적으로 대해 준다면 …….” ..  (57쪽)


 제 몸에 불을 살라 숨을 거둔 전태일 님이 흙으로 돌아간 지 마흔 돌이 된 2010년 11월 13일입니다. 이날을 맞추어 《너는 나다》라는 이야기책 하나 조용히 나왔습니다. “우리 시대 전태일을 응원한다”라는 이름이 작달막하게 붙은 이야기책입니다. 덧이름 그대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또다른 전태일’이란 수없이 많을 뿐더러, 너는 나다란 이름 그대로 전태일이 나요, 내가 전태일입니다.


.. 누군가는 요즘 청년들이 도전정신이 없다고 말한다. 나는 그 말에 한 번도 동의해 본 적이 없다. 내 주변 청년들은 다들 필사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미 대학에서 학점 경쟁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누구나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그 와중에 자기가 좋아하는 취미 활동을 하는 것은 어떤가? 얼마나 필사적이면 그 엄청난 취업 준비, 학점 경쟁 속에서 취미 활동을 할 수 있지 … 이번 달에 택시 한 번 탄 적이 없는데 10만 원 가까운 돈이 교통비로 나갔다. 최근 나가고 있는 단체의 한 여자 후배는 교통비를 아끼려고 자전거를 샀다고 한다. 나도 매달 10만 원에 달하는 돈을 교통비로 쓸 바에 후배처럼 자전거를 살까 생각이 든다 ..  (120, 126쪽)


 책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이룬 젊거나 나이든 이들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면서 “공무원을 지망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다 비슷한 꿈을 꾼다고 말하는데, 사실은 그게 돈을 버는 거잖아요(155쪽/단편선).” 같은 아주 마땅하면서 참 마땅히 잊는 생각조각을 끄집어냅니다. 그렇잖아요. 모두들 ‘꿈’을 이루겠다고들 말은 하지만, 정작 이 꿈이 뭔가를 들여다보면 ‘돈’이기 일쑤예요. 얼음판에서 지치기를 잘하고 싶다는 꿈이든, 조그마한 공 하나를 잘 던지거나 잘 차고 싶다는 꿈이든, 손꼽히는 대학교에 들어가 학문 하나 거룩히 세우겠다는 꿈이든, 마지막 자리를 들여다보면 한결같이 ‘돈’과 맞닿습니다. 끝마음이 ‘돈’으로 마무리되는데, 이런 꿈을 꾸는 사람들 첫마음은 무엇이려나요.

 새삼스러울 이야기가 아닌, 누구나 훤히 안다는 이야기인 ‘한 사람한테 땅이 얼마나 있어야 하는가’를 돌아볼 수 있으면, ‘나 하나 살아가는 데에 돈을 얼마나 벌어 얼마나 쓸 수 있으면 되는가’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나 하나 아름다운 삶으로 일구는 동안 나 스스로 손에 쥘 책은 몇 권이면 넉넉한가’라든지, ‘내 아름다운 사랑을 만나기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사귀어 보아야 하는가’라든지, ‘내 좋은 보금자리를 마련하자면 어떻게 땀을 흘리거나 어디에서 얼마나 애를 써야 하는가’ 같은 이야기를 톺아볼 수 있겠지요.

 스스로 숨을 거두며 노동법과 노동권을 지켜 달라 외치던 전태일 님이라 합니다. 그러나 1970년이건 2010년이건 노동법이나 노동권을 지키는 공무원이나 기자나 지식인이나 관료나 정치꾼이나 교사는 몹시 드물다고 느낍니다. 하루 여덟 시간 일하도록 하는 일이 노동권이 아닙니다. 최저생계비를 제대로 챙기도록 하는 법이 노동법이 아닙니다. ‘일할 권리’란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갈 권리입니다. ‘일하는 사람을 지키는 법’이란 종이책에 적바림하는 글줄이 아닌, 사람이 사람다이 사랑할 이야기여야 합니다.


.. 그가 죽기 전까지 외쳤던 것은 삶이었다. 그가 주장했던 것은 평범한 삶을 누릴 권리였다 ..  (9쪽)


 길은 어디에나 손쉽게 나 있습니다. 삶은 어디에서나 알차게 일굴 수 있습니다. 사랑은 누구하고나 살가이 나눌 수 있습니다. 돈은 얼마든지 내 살림에 맞게 벌 수 있습니다.

 다만, 길을 못 느끼며 살아가기 일쑤이고, 삶을 못 붙잡으며 헤매기 일쑤이며, 사랑 아닌 수렁에 빠지기 일쑤요, 돈이 아닌 권력과 욕심에 허덕이기 일쑤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하고 내가 아름다이 살아가고 싶다면, 내가 돈을 조금 더 번달지라도 내가 돈을 조금 더 버는 일이 내 삶터와 자연을 망가뜨린다 할 때에도 그냥 돈을 조금 더 벌면 되나요. 가야 할 길이 바쁘니까, 찻길에서 고양이를 치건 사마귀를 밟건 잠자리를 들이받건 개구리를 밟건 아랑곳하지 않으며 씽씽 내달리면 되는가요.

 어여쁜 꽃 한 송이를 꽃집에서 돈 몇으로 장만해서 선물할 수 있어요. 그런데, 어여쁜 꽃 한 송이를 우리 집 한켠에 꽃그릇 마련해서 씨앗 하나 심어 작은 싹부터 어린 잎과 가느다란 줄기부터 하나하나 어루만지고 돌보며 꽃이 피어나도록 할 수 있습니다. 노동권이든 노동법이든 꽃집에서 꽃 한 송이 장만하듯 거머쥐거나 움켜쥘 수 없는 노릇이에요. 언제나 꽃씨 하나 심어 차근차근 알맞춤하게 날씨와 철을 돌아보면서 고마이 얻을 삶이어야지 싶어요.

 사랑씨 하나 심어 사랑싹과 사랑잎과 사랑줄기를 보듬을 줄 아는 좋은 일꾼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사랑씨앗 하나로 사랑꽃을 피운 다음, 이 사랑꽃에서 또다른 사랑씨앗을 얻어 이웃한테 나누어 주는 가운데, 사랑꽃에서 사랑열매를 맺어 나부터 즐기고 내 고운 벗님과 살붙이하고 도란도란 나눌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내고 싶습니다. (4343.11.12.쇠.ㅎㄲㅅㄱ)


― 너는 나다 (손아람과 다섯 사람,철수와영희 펴냄,2010.11.13./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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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 - 소노 아야코의 경우록(敬友錄)
소노 아야코 지음, 오경순 옮김 / 리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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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하며 참다이 살고 있기에 책을 안 읽습니까
 [책읽기 삶읽기 12] 소노 아야코,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



 소노 아야코 님 책을 틈틈이 챙겨 읽는다. 새롭게 옮겨지는 책도 있고, 예전에 한 번 나온 뒤 다시 나오지 못하는 책이 있다. 나는 스물여섯 나이에 《계로록》으로 이분 책을 처음 만났지만, 헌책방에서 《누구를 위하여 사랑하는가》라는 책을 두 번 만나 두 번 사서 두 번 읽은 뒤로 곰곰이 헤아려 보니, 훨씬 예전부터 ‘曾野綾子’라는 이름이 새겨진 책을 읽었구나 싶다. 아직 철이 잘 들었다고는 여기지 않는다만, 훨씬 철이 덜 들었을 무렵에는 ‘曾野綾子’하고 ‘소노 아야코’라는 이름을 맞대어 헤아리지 못했다. ‘三浦綾子’하고 ‘미우라 아야코’ 또한 마찬가지. 두 이름을 한꺼번에 살피지 못하며 책을 읽어 왔다.

 소노 아야코 님이 쓴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은 글자가 꽤 크며 글이 짧다. 하루가 아닌 한 시간이면 읽어치울 만한 책이다(더 빨리 읽어치울 수도 있겠지). 아무래도 나이든 분들을 헤아려 이렇게 큰 글자로 책을 엮었지 싶은데, 여느 젊은 사람이 읽을 만한 글자로 책을 엮었다면 쪽수나 부피가 훨씬 줄겠지. 더욱이, 글자를 꽤 크게 하며 내놓을 만하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 같은 소노 아야코 님 책은 ‘금세 읽어치우고 덮’으면 뭔 소리를 하는지 제대로 삭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회사에서든 집에서든 무리를 하면 피곤해져 인간성을 잃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미움을 사면 미워하라고 내버려두면 그만이다 … 잘못된 기억에 의존하여 칭찬을 받는다 한들 또 비난을 받는다 한들 다 부질없는 일이다(22, 26쪽).” 같은 이야기를 꾸밈없이 받아들일 만한 이 나라 사람이 얼마나 되려나. 잘못 알면서 잘못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뒤에서 호박씨를 까는 재미로 사는 사람마저 있다. 뭐, 한국뿐 아니라 일본부터 엉터리 삶인 사람이 많으니까 일본사람 소노 아야코 님은 일본사람 들으라고 이런 말을 하겠지. 미움을 사느니 마느니에 매이는 삶이 아니라, 나 스스로 아름다우며 착하고 참다이 살아가면 된다는 소리이다. 내가 아름다이 살아가는지, 또는 착하게 지내는지, 아니면 참다이 삶을 꾸리는지는, ‘나를 잘 모르거나 잘못 보는’ 사람이 아닌, 하늘에 계신 분이 굽어살피니까 애써 마음쓸 대목이 없다.

 “자신의 추한 부분, 불쾌한 부분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또 그것에 비애를 느낄 때라야 그 사람의 정신은 자유로워져 정신 자세도 자연히 건전해진다고 여겨진다(55쪽).”는 이야기를 열 살 어린이나 스무 살 젊은이가 받아들일 만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서른이나 마흔 나이라 할지라도 섣불리 맞아들이지 못한다고 느낀다. 어쩌면 쉰이나 예순 나이가 되어도 못마땅하게 들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하지 않을까. 나한테 한 번 주어진 이 삶을 고맙게 섬기기란 얼마나 어려울까. 하루하루 재미난 나날이라고 헤아리며 두 손 곱게 모아 비손을 하기란 얼마나 힘들까.

 “나는 잘못된 일 처리나 뇌물 수수, 배임 횡령의 기사 따윈 신문에서도 거의 읽지 않으므로, 별로 그 일을 떠들썩하게 생각한 적이 없다(70쪽).”는 소노 아야코 님인데, 나는 신문을 아예 안 읽는다. 집에 텔레비전을 안 들여놓고 살아온 지 열다섯 해가 넘는다. 도시에서 전철을 탈 때면 책을 읽으며 전철 곳곳에 덕지덕지 붙은 광고판을 안 보려 한다. 눈을 쉬게 하고프다. 손전화 걸고 받으며 시끄러운 사람들 소리에서 홀가분하고 싶어 책을 펼친다. 요사이는 아이랑 씨름하느라 둘레 사람이 떠들든 말든 아랑곳할 겨를이 없다. 아이하고 버스나 전철을 타면 이런 대목이 퍽 쏠쏠하다. 다른 데에 눈이나 마음을 쓸 수 없다.

 그렇지만, 이렇게 하더라도 숱하며 자잘한 이야기가 귓결에 스친다. 며칠만 지나고 보면 다 잊는 이야기를 놓고 신문이며 방송이며 인터넷이며 참말 시끄럽게 떠들어댄다. 언론이란 떠들어대는 이야기를 담는 그릇이 아닌데, 온통 더 큼지막하게 써대려 하고, 된통 더 따갑게 부풀리려 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이야기란 무엇이기에.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기에. 깊어 가는 가을날, 또는 한창 무르익으려는 겨울날, 이리하여 차츰 다가오는 봄날, 앞으로 새삼스레 다시 찾아올 여름날을 그때그때 다 달리 껴안으면서 내 삶을 나 스스로 알차며 사랑스레 북돋울 이야기를 신문이며 방송이며 인터넷이며 다루면 장사가 안 되는가. 언론이란 장사가 안 될 이야기를 다루면 안 되는가. 언론이란 삶을 다루는 이야기를 알뜰살뜰 채우면 안 될 노릇인가.

 책을 읽으면서 “좋은 일을 한 만큼 좋은 결과를 얻는다면 그것은 상행위와도 같다(91쪽).”는 대목에서 자꾸 걸린다. 자꾸자꾸 걸려 넘어진다. 아이를 낳아 함께 살아가면서 이 대목을 거듭 곱씹는다. 내가 제아무리 아이하고 신나게 놀아 주었다 생각하더라도, 아이한테 내 사랑이 이어갔다고 여길 수 없다. 난 그저 얼마쯤 아이하고 놀았을 뿐이니까. 내가 쌀을 씻어 불린 다음 밥을 안치고 반찬이며 국이며 마련하여 밥상을 차려 놓는다 해서 아이가 아침과 저녁을 맛나게 받아먹으며 제 아버지한테 고맙다고 느껴야 하지는 않다. 고마움을 느끼라고 차리는 밥상은 아니니까. 사랑은 장사가 아니다. 삶은 장사일 수 없다. 사람을 사귀든 글을 써서 책으로 엮든 아이를 수레에 태우고 자전거마실을 다니든 그예 삶이지, 장사이지 않다.

 “아마도 우리들이 정말로 어려울 때 도와주는 사람은 경제적으로 결코 여유 있는 사람도 아니며, 권력자도 아닐 것이다. 그들은 고통과 슬픔을 맛본 사람들일 게다(160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소노 아야코 님이 쓴 다른 책 《왜 지구촌 곳곳을 돕는가》를 떠올린다. 《왜 지구촌 곳곳을 돕는가》라는 책은 그리 사랑받지 못하고, 잘 읽히지 못한다. 적어도 이 책 하나쯤 찬찬히 헤아려 본다면,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이라는 책에서 다루는 이야기를 한결 깊이 돌아볼 수 있을 테지만, 이렇게까지 책을 읽으며 고개를 숙인다든지 삶을 곱씹는 사람은 드물다. 안타깝다 할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이 땅에서 책읽기란 ‘처세’와 ‘자기계발’이라는 늪에서 허우적거리기 때문이다.

 책읽기가 삶읽기로 자리잡는다면 책을 읽는 사람은 늘 고개를 숙이면서 고맙게 마음밥을 얻어먹는다고 느낀다. 마음밥을 얻어먹으며 하루하루 새롭게 태어나고, 언제나 새삼스레 거듭난다. 책을 읽으며 내 마음이 더 아프고, 책을 덮고 나서 삶을 부대끼는 동안 내 몸이 더 슬프면서, 내 두 다리와 두 팔로 어디에서 무엇을 해야 좋을까를 곱씹는다.

 “교육적이려면 좀 특별한 화제를 만들어 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가정 내 대화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시시하기 때문에 마음이 편해지는 거다(278쪽).” 같은 이야기란 누구나 뻔히 안다 할 만큼 시시한 이야기라고 느낀다. 그래, 참 시시한 이야기이다. 소노 아야코 님 이 책은 참말 시시한 이야기를 구지레하게 담았다 말해도 좋다. 삶이란 시시하지 대단하지 않다. 수다란 시시하지 대단할 구석이 없다. 책이란 시시하지 거룩하지 않다. 앎이란 시시하지 거룩할 까닭이 없다.

 시시하면서 수수한 삶이다. 시시하기에 홀가분하게 웃고 떠드는 수다이다. 시시하니까 스스럼없이 쥐어들어 마음껏 펼치는 책이다. 시시한 만큼 머리에 가두지 않고 몸으로 신나게 풀어 놓는 앎, 곧 슬기이다.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이라는 책에는 ‘머리를 쓰며 살아가’라는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다. ‘내 몸을 내가 스스로 더 힘껏’ 쓰면서 ‘좀 어리석거나 바보스레’ 살아가자는 이야기를 다룬다. 뭐 그리 잘난 삶이라고 용을 쓰면서 살아가야 하는가. 뭐 그리 똑똑한 삶이라며 어깨를 우쭐거리며 지내야 하는가. 너무 무거운 내 머리를 가볍게 하면서 살아가면 된다.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듯 좋은 소리와 궂은 소리 모두 귀담아들으며 살아가면 넉넉하다. 된장찌개나 미역국 한 그릇으로 얼마든지 배불리 밥을 먹을 수 있다.

 다 아는 이야기, 다 알 만한 이야기를 담은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으레 다 알거나 알 만한 이야기를 담았다는 이 책을 읽은 사람은, 또는 이 책을 굳이 읽지 않아도 다 알거나 알 만하다 말하는 사람은, 이 땅 이 나라 이 터전에서 얼마나 아름답거나 착하거나 참다이 살아가는가. 몹시 궁금하다. 이까짓 이야기 훤히 꿰는 사람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면서 내 삶과 네 삶을 고이 어루만지는가. 참으로 궁금하다. 

 덧말 한 마디 붙인다면, 소노 아야코 님은 천주교를 믿는 사람이다. 어찌 되었든, ‘하나님’이 아닌 ‘하느님’으로 적어야 했을 텐데. (4343.11.7.해.ㅎㄲㅅㄱ)


―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 (소노 아야코 글,오경순 옮김,리수 펴냄,2005.6.25./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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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달나라 정복기 그랜드 펜윅 시리즈 3
레너드 위벌리 지음, 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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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은 나라가 마땅히 어여쁘다
 [책읽기 삶읽기 16] 레너드 위벌리,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달나라 정복기》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달나라 정복기》를 읽다. 이 책을 쓴 레너드 위벌리 님은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뉴욕 침공기》를 1953년에 내놓았고, 《달나라 정복기》는 1962년에 내놓았으며, 1969년에는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월스트리트 공략기》를 내놓는다. 1981년에는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석유시장 쟁탈기》를 내놓으며 ‘작은 나라’이지만 이름부터 ‘작지 않은(그랜드) 나라’ 사람들이 펼쳐 보이는 싱그러운 웃음을 베풀었다.

 네 작품 모두 첫머리에 모든 실마리와 줄거리가 나타나지 싶다. 《달나라 정복기》 또한 첫머리에 이 작품에서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를 낱낱이 드러낸다. 아니, 가만히 생각하면, 첫머리이기 앞서 책이름부터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또렷이 밝힌다고 해야지 싶다. 이 작품이 1962년 미국에서 나왔음을 헤아리며 찬찬히 읽어 본다.


.. 지난해에 마운트조이 백작은 예산을 대폭 확충하여, 공국의 산 주위를 따라 구불구불 나 있는 도로를 직선으로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물론 다른 공약들처럼 이 역시 매년 선거 때마다 반복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랜드 펜윅 사람들은 좁아터진데다가 구불구불해서 위험하기까지 한 지금의 도로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다. 물론 공국 내에는 자동차가 한 대도 없고 가장 빠른 교통수단이라고 해 봐야 자전거뿐이어서, 사고가 나더라도 비교적 가벼운 수준에 그친다는 이유도 이런 반응에 한몫하긴 했다 ..  (10∼11쪽)


 “농부들은 미국의 호의를 의심스러워하는 한편, 막대한 자금이 국가에 미칠 영향을 우려한 까닭에 하나같이 벤트너를 지지했다. 반면 빨래를 할 때마다 주전자에 물을 데워 나무 빨래통을 채워야 하는 주부들은 마운트조이 백작을 열렬히 지지했다(103쪽).”는 대목은 첫머리에 나온 실마리이자 줄거리를 한결 단단히 뒷받침한다. 작은 나라 ‘그랜드 펜윅’ 사람들은 조금도 바보가 아니요 얼간이 또한 아니며 멍텅구리조차 아니다. 그네들 삶에 걸맞을 빠르기를 알고, 그네들 삶을 언제나 알뜰히 즐길 줄 안다. 어마어마한 돈을 주겠다는 커다란 나라 꿍꿍이를 걱정할 줄 알며, 제 깜냥과 주제에 알맞게 조촐히 살아갈 줄 안다.

 작은 나라에 굳이 자동차가 있을 까닭이 없을 뿐더러, 자동차를 타고 돌아다녀야 할 곳이 없는 한편, 애써 자동차까지 타고 멀리멀리 나다닐 일이 없다. 작은 울타리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보내는 삶이 아니다. 아름다우며 사랑스러운 보금자리에서 알콩달콩 웃음꽃 피우는 삶을 잘 알며 즐기기 때문이다.

 엊그제 자전거를 타고 금왕읍 장날 마실을 다녀오는 길에 꽤나 굵직한 공사판 옆을 지나갔다. 멀쩡한 4차선 ‘고속화 국도’ 한쪽을 헐어 살짝 구불텅한 길로 바꾸는 공사인데, 이렇게 구불텅한 길로 바꾸면서 바로 옆에 새로 닦는 고속도로(평택과 제천을 오가는 새 고속도로)하고 이어지는 샛길을 잇느라 바쁘더군. 예전 ‘반듯한’ 길은 그대로 둔 채 고속도로하고 이어질 샛길만 이으면 되는데, 애써 산을 또 깎고 아스팔트길을 새로 깐다. 그야말로 세금이 넘치니까 이런 공사를 한다. 복지와 문화와 교육에 쓸 돈이든 이 나라 환경을 알뜰히 건사하는 데에 쓸 돈이든 펑펑 넘치니까 이런 길 공사에 목돈을 퍼붓는다.

 평택과 제천을 오가도록 한다는 고속도로는 아주 우람하다. 충청북도에는 대단히 높은 산은 없으나 갖가지 산이 끝없이 이어진다. 고만고만한 가파른 산이 한결같이 이어진다. 새 고속도로는 이 고만고만 가파른 산꼭대기나 산중턱을 1자로 뚫는다. 거의 산 높이하고 똑같은 높직하고 굵은 기둥을 세운 다음, 이 기둥에 반반하고 두툼한 시멘트덩이를 올려놓는다. 시골마을 모습을 얼마나 망가뜨리는가를 살피지 않고, 시골 논밭을 얼마나 허물어뜨리는가를 돌아보지 않으며, 시골 산자락을 얼마나 무너뜨리는가를 헤아리지 않는다. 공사를 마치고 자동차로 이 고속도로를 씽씽 달릴 사람들 또한 아무것도 안 느끼겠지. 오로지 ‘1분을 더 줄인다’느니 ‘10분을 더 줄인다’느니 하는 숫자에 얽매이겠지. 이 나라 앞날을 생각한다면 이와 같은 고속도로를 더 많이 뚫어 놓아야 한다고 얘기할 테지. 그런데, 이 나라 앞날을 생각할 때에 이 나라 자연 터전을 깡그리 짓밟는 일은 어떻게 도움이 될까. 무엇을 이바지하고 어떤 보람이 있을까.

 고속도로 둘레에 새로 올라서는 아파트가 몹시 많다. 이들 고속도로 둘레 아파트를 볼라치면 고속도로 옆으로 아파트가 하나도 보이지 않을 만큼 ‘소리막이(방음) 울타리’를 높직하게 쌓는다. 소리막이 울타리를 쌓는다고 모든 자동차 소리를 막을 수 없다. 고속도로 차소리는 웬만큼 막는다지만 아파트 안쪽으로 들어와 멈추는 차소리는 고스란히 울려퍼진다. 새벽녘에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자동차 소리는 고요한 아파트 건물 사이사이에 메아리처럼 울리곤 한다.

 햇볕을 쬘 권리를 바야흐로 말할 수 있고, 자동차나 기차나 버스 소리를 안 들을 권리를 비로소 말할 수 있다. 연탄공장 옆에서 탄가루를 들이마시지 않을 권리라든지 제철소나 유리공장 옆에서 쇳가루와 유리가루를 들이마시지 않을 권리 또한 겨우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권리를 말할 수 있기 앞서까지는 고스란히 들이마시고 새된 소리를 들어야 했다. 기차길이나 전철길 옆에서 살아 보면 안다. 아마, 돈이 많아 기차길이나 전철길 옆에서 살 일이 없는 이들은 하나도 모를 테지. 그래서 자꾸자꾸 새 자동차길만 닦으려 하고, 더 널따란 길을 놓으려 하며, 고즈넉하며 사랑스러운 삶터보다는 더 많은 돈을 뽑아낼 만한 공사와 행정과 사업만 벌이려 하는지 모른다.

 다시 《달나라 정복기》를 들여다본다. “작년에 그랜드 펜윅을 지나간 자동차는 모두 네 대였습니다. 그로 인해 거위 여섯 마리와 오리 다섯 마리가 죽었고, 양 네 마리가 놀라서 새끼를 조산했는데 그것도 하필이면 모조리 암놈들이었습니다. 또한 테드 페인터의 모친께서 그때의 자동차 소음 때문에 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그치지 않아 고생하고 계시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12쪽).” 하는 대목이 첫머리에 함께 나온다. ‘작은 나라’인 그랜드 펜윅인 만큼, 이 작은 나라에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자동차 넉 대가 지나가는 바람에 거위와 오리와 양 몇 마리가 다치거나 죽었는가’를 알 뿐 아니라, ‘마을 할머니 이름이며 마을 할머니 몸이 어떠한가’까지 안다. 이제 우리 나라는 몹시 커다란 나라가 되어 버린 만큼 대통령 자리에 있든 시장이나 군수 자리에 있든 구청장이나 읍장 자리에 있든 동사무소 일꾼이나 읍사무소 일꾼으로 있든 동네사람이나 마을사람 삶을 모른다. 우리 식구 살아가는 이 산골집 주소랑 이어진 신니면사무소 일꾼들이 산골마을 삶자락을 헤아려 줄 일이란 없다. 인천에서 지낼 때 창영동사무소 일꾼이나 동인천동사무소 일꾼이 골목동네 사람들 삶을 읽어 줄 일이란 없었다. 똑같다.

 이 시골마을에 버스는 하루에 몇 대 지나가고, 버스를 타기까지 어느 만큼 큰길로 걸어가야 하며, 버스는 어디부터 어디로 오가는지를 면사무소 일꾼들은 모른다. 버스는 하루에 몇 대가 오가며, 몇 시 몇 분에 오는지를 면사무소 일꾼뿐 아니라 버스회사 일꾼마저 모른다.

 지난주 음성읍 장날에 갔을 때에, 무하고 배추하고 ‘값이 좀 내렸다’는 푯말을 붙인 푸성귀 장사꾼들을 보았다. 500원인가 1000원인가 내렸다 하는 무하고 배추 값이란 아직도 3000∼5000원 안팎이다. 그런데 이 무하고 배추란 비료와 농약을 먹고 자란 무하고 배추이다. 비료와 농약을 먹지 않고 자라는 ‘유기농’ 무하고 배추는 값이 얼마일까? 이 나라 사람들은 ‘유기농’ 푸성귀 값하고 ‘화학농’ 푸성귀 값이 어떻게 다른 줄을 얼마나 알려나. 유기농 콩으로 빚으며 소포제와 유화제 따위를 안 넣은 두부 한 모하고, 화학농 콩으로 빚으며 소포제와 유화제 따위를 넣은 두무 한 모 값이 어떻게 다른 줄을 얼마나 알려나. 참말로 이 나라 사람들은 무엇을 알면서 살아가는지 모를 노릇이다. 무엇이 ‘살아가는 즐거움’이요, 무엇이 ‘어깨동무하는 마을살이’이며, 무엇이 ‘내 몸과 마음을 살찌우는 아름다움’인지를 생각하기나 할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작은 나라’ 그랜드 펜윅 이야기를 두 권째 읽었다. 먼저 《뉴욕 침공기》를 읽었고 《달나라 정복기》가 두 권째이다. 《석유시장 쟁탈기》랑 《윌스트리트 공략기》도 재미있으리라 여기지만 석유 싸움이나 주식 다툼은 그리 돌아보고 싶지 않다. 돈을 사이에 놓고 툭탁질하는 이야기는 아무리 재미있거나 신나더라도 들여다보기 싫다. 하기는, 《뉴욕 침공기》나 《달라나 정복기》 모두 미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힘센 나라들이 서로 더 많은 돈을 거머쥐려고 아웅다웅하는 사이에 ‘작은 나라’ 사람들은 아무 욕심이 없이 ‘조용하면서 즐겁게’ 살고픈 마음에 ‘큰 나라’ 사람들한테 ‘제발 싸우지 말고 조용히 좀 지내자구’ 하는 말을 건네려고 하는 이야기를 담는다. 어느 책을 읽든 오늘날 한국 같은 바보 나라 뒷통수를 치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작은 나라에는 군대가 없다. 무기 또한 석궁 말고는 없는데, 석궁은 무기라기보다는 가끔 들새를 잡을 때에 쓰는 사냥 연장이다. 작은 나라에 있는 칼은 밥할 때에 쓰는 부엌 연장이다. 칼로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돈을 빼앗는 깡패란 없다. 작은 나라에 있는 쇠붙이란 논밭을 일구는 데에 쓰는 낫과 호미와 쇠스랑과 쟁기이다. 작은 나라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지만, 자전거조차 안 타고 두 다리로 걷기 일쑤이다. 왜냐하면, 자전거 마실도 즐거웁지만 두 다리로 한결 한갓지고 느긋하게 거닐며 ‘아름다운 자연 터전’을 마음껏 받아들이는 가운데 너른 넋을 가꾸는 삶이 훨씬 즐거우니까.

 대한민국 제주섬에는 올레길이 있다는데, 대한민국이란 나라에는 ‘따로 도보관광을 하는 길’을 만들어 놓지 않고서는 ‘두 다리로 걸을 만한 데’가 거의 사라졌다. ‘따로 자전거를 타고 오가는 길’을 수백 수천 억원을 들여 만들어 놓지 않고서는 ‘자전거로 홀가분하게 다닐 만한 데’가 거의 없어졌다.

 자전거길이든 거님길이든 돈으로 닦을 수 없다. 사람들 삶터이든 보금자리이든 돈으로 지을 수 없다. 마음으로 닦고 사랑으로 지으며 땀방울로 돌본다. (4343.10.22.쇠.ㅎㄲㅅㄱ)


―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달나라 정복기 (레너드 위벌리 글,박중서 옮김,뜨인돌 펴냄,2006.10.28./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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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사람 - 이문열 조정래 백낙청 김민수 김상봉 김종철을 만나다
이명원 지음 / 이매진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지식인들 수다는 왜 재미없을까
 [책읽기 삶읽기 13] 이명원, 《말과 사람》



 문학평론을 하는 이명원 님이 지식인이라 할 만한 여섯 사람을 만난 이야기를 책 하나로 묶었다. 이문열, 조정래, 백낙청, 김민수, 김상봉, 김종철, 이렇게 여섯 사람이다. 여섯 사람 발자취를 곰곰이 더듬는다면 틀림없이 이 여섯 사람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따로 한 권씩 책으로 낼 만하다. 모두들 할 말이 많은 사람이며, 늘 숱한 말을 내어놓는 사람이다. 이들이 왼쪽에 있든 오른쪽에 있든, 또는 어중간하게 있든 대수롭지 않다. 어느 쪽에 있거나 스스로 줏대 단단히 세우며 살아가면 된다. 어느 쪽에서 무얼 하든 옳고 바르며 참된 넋으로 착하고 사랑스러우며 곱게 살아간다면 된다.

 이명원 님은 문학평론을 하기 때문에 《말과 사람》이라는 책에 실린 여섯 사람을 만나는 일이 아주 마땅하다. 이명원 님으로서는 헌책방 일꾼이라든지, 분식집 아줌마라든지, 시골버스 기사라든지, 농사짓는 할배라든지, 이주노동자 아무개 씨라든지, 제도권 학교를 일찌감치 떠난 아이라든지 만나기 어렵다. 아니, 만날 수야 있으나 이들한테서 깊고 너른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거나 고맙게 얻어 듣기는 힘들다.

 사람들을 만나서 나누는 이야기를 책으로 바지런히 엮는 지승호 님이 있다. 이이는 ‘사람들한테서 들은 이야기’만으로도 꽤 여러 권을 엮었다. 참 마땅한 일이다만, 이 나라에는 이와 같은 책이 퍽 드물다. 모든 책이란 따지고 보면 ‘사람 사는 이야기’인 만큼, 저마다 다 달리 살아왔으나 따로 스스로 내 삶을 글로 쓸 겨를을 못 내는 사람한테서 몇 시간이나 며칠쯤 이야기를 듣는다면 책 한 권이 저절로 나온다. 사람들은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어 당신 이야기를 책으로 알뜰히 묶지 못해서 그렇지, 어떤 사람이든 당신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 놓고 보면 몹시 재미나다. 이름난 사람 이야기이건, 이름 안 난 사람 이야기이건 매한가지이다. 온누리에 이름값을 떨친 적이 없을 뿐더러 이름값 떨칠 일조차 없던 우리 할머니 삶이든 옆집 아줌마 삶이든, 이분들은 하루하루를 견디거나 즐기거나 받아들이면서 눈물과 웃음으로 살아냈다. 이분들이 살아낸 삶이 바로 책이며 ‘감동’이다. 다만, 지승호 님이라든지 이명원 님이 내놓은 책은 제법 이름있거나 꽤 널리 알려진 사람들 삶자락에서 맴돈다.

 《말과 사람》이라는 책은 꽤 재미있다. 먼저, 소설쓰는 이문열 님 이야기를 맨 앞에 실어 더욱 재미있다. 《말과 사람》에 실린 이문열 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분이 오롯이 소설쓰기에 온마음 바칠 수 있었다면 노벨상을 노릴 수 있었겠구나 싶기도 하다. 다만, 노릴 수는 있으나 탈 수는 없겠지. 왜냐하면 소설쓰기에만 온마음을 바친다면 소설에 깃드는 글월을 한껏 빛내거나 훨씬 잘 매만질 수야 있다만, 소설이라는 문학에 담는 줄거리에서 밑바탕이 될 ‘글쓴이 삶’은 한껏 북돋우거나 훨씬 아름다이 여밀 수 없으니까. 글만 잘 쓴다 해서 소설이 아니다. 글솜씨 빼어나고 짜임새 대단하며 줄거리 돋보인다 해서 문학이 아니다.

 그런데, 《말과 사람》이라는 책이 더 재미있으려면 어슷비슷한(?) 사람들을 여섯 만나기보다, 아주 다른 자리에서 사뭇 달리 살아가는 사람들을 여섯 만났어야 하지 않느냐 싶다. 아니면, 아예 한 갈래 지식인들만 만나든지.

 《말과 사람》에 실린 여섯 사람 삶을 헤아려 본다. 이분들 삶은 그리 안 다르다 할 수 있다. 한통속으로(?) 묶을 만하니 이렇게 여섯 사람 이야기를 그러모을 수 있다. 또한, 엮은이 이명원 님 삶이 이 여섯 사람하고 비슷하게 흐르니까 이들 여섯 사람을 만날밖에 없기도 하다. 잡지 〈녹색평론〉을 내는 김종철 님은 ‘한국땅에서 변두리라는(?) 대구’를 떠나 아예 서울로 옮겼는데, 이 책을 낼 무렵에는 아직 대구를 송두리째 버리지는 않고 서울에서 오래 머물며 책을 만들었다. 이명원 님은 김종철 님 같은 사람이라면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갔음직한데 외려 서울 한복판으로 들어오니 아리송하다고 말한다. 맞는 얘기이다. 김종철 님은 “몸이 편안해지자 자기도 모르게 생각들도 작아지고, 왜소해지는 것이다 … 우리 문학을 보면 결국 땅에서 멀어지니까 야생의 정신이랄까 하는 게 점점 희박해지는 것 같다(218, 219쪽).” 하고 말한다. 김종철 님은 다른 지식인을 놓고 이렇게 이야기했으나, 나로서는 김종철 님 당신 삶이 이와 같다는 소리가 아닌가 하고 느낀다. 왜 김종철 님 같은 분이 스스로 땅하고 더 가까와지고자 하지 않는가. 왜 이 땅에 두 다리 튼튼하게 박으려 하지 못할까.

 교수 자리에서 쫓겨난 김민수 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이명원 님은 “해직이 되고 보니 그동안 피상적으로 사회를 읽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의 변화가 있었다(121쪽).”고 말한다. 이는 김민수 님도 매한가지이다. 교수 자리에서 쫓겨나 강단이라는 울타리가 아닌 ‘수수한 여느 사람들 자리’를 밟으며 돌아다닐 겨를이 나면서(강의를 할 수 없어 생긴 말미) 이 나라를 더 깊이 보거나 더 널리 살필 수 있었단다. 다만, 김민수 님이나 이명원 님이나 ‘겉훑기로 이 나라를 보았다’고 생각은 하지만 뉘우치기까지는 하지 못한다. 부끄러워 하거나 남우세스럽다 여기지 못한다.

 조금 더 시금털털할 수는 없는가. 조정래 님은 “보수 세력들은 별다른 노력 없이 민주화 세력의 정치적 무능 때문에 기득권을 회복하고 있다(48쪽).”고 말한다. 맞는 말이며 옳은 소리이다. 진보 세력이든 개혁 세력이든, 또는 열린 마음이나 깨친 넋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든, 나 스스로 참다웁고 착하며 고운 삶을 일구어야 한다. 참다웁고 착하며 곱게 살아가며 이러한 삶을 글로 담고 책으로 엮을 노릇이다. 처세와 돈굴리기를 다룬 책이 참말 잘 팔리는 흐름을 슬퍼하기 앞서, 사람들이 즐거이 읽을 글을 담은 책을 내놓을 일이다. 이명원 님은 여섯 지식인과 만나서 들은 이야기로 당신 깜냥을 가다듬거나 북돋았구나 싶은데, 이렇게 주워듣기로만 책을 엮어서는 널리 읽자고 건넬 만큼 깊거나 너른 책이 되기는 힘들다.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나를 더 낮추거나 더 드러내야 한다. 내 목소리를 아예 지우거나 내 목소리를 훨씬 키워야 한다. 스승한테서 배운다는 매무새로 이야기를 듣거나, 동네 깡패한테 뜨거운 맛 좀 보여주겠다는 몸가짐으로 타일러야 한다. 여러모로 재미있다 싶을 짜임새이며 이야기책이 될 만한 《말과 사람》이지만 적잖이 어중간한 자리에서 머물고 만다. 아직 이명원 님한테는 ‘글읽기’가 익숙하고 ‘삶읽기’는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모른다. 지식인이 끄적여 내놓는 글은 읽더라도 지식인이 살아가며 몸으로 보여주는 삶은 읽지 못하는 탓인지 모른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어차피 이렇게 우리 사회 지식인 생각을 귀담아듣는 이야기책을 엮으려 했다면 ‘남자 지식인’ 여섯을 따로 하나, ‘여자 지식인’ 여섯을 따로 하나 묶으면 어떠했으랴 싶다. 그런데, 지식인이라 하면 남자이든 여자이든 엇비슷할는지 모르겠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지식인이라는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않으니까. 나는 지식인보다는 ‘살림꾼(생활인)’이 좋은데, 살림꾼을 만나 이야기를 즐거이 들으며 찬찬히 갈무리하는 모습을 보기는 몹시 어렵다. 이를테면 만화쟁이 장차현실 님 같은 분하고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면 얼마나 남다르며 재미날까. 애를 둘 키운 공선옥 님 같은 분하고 만나 삶을 나누었다면 얼마나 새삼스러우며 맛깔스러웠을까. (4343.10.19.불.ㅎㄲㅅㄱ)


― 말과 사람 (이명원 엮음,이매진 펴냄,2008.11.24./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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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견문록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세계음식기행 지식여행자 6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나그네가 즐긴 아침
 [책읽기 삶읽기 8] 요네하라 마리, 《미식견문록》


 2010년 10월, 《팬티 인문학》이라는 책이 나왔다. 2006년에 숨을 거둔 일본사람 요네하라 마리 님이 쓴 책이고, 이분 책으로는 열 권째 한국말로 옮겨진다. 참 바지런히 옮겨내 주는구나. 그런데 《팬티 인문학》으로 옮긴 요네하라 마리 님 일본책 이름은 “パンツの面目ふんどしの沽券”이다. 우리 말로 고스란히 적바림하자면 “속옷(팬티) 참모습과 훈도시 값어치”가 될 텐데, 한국에서는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달고, 이 앞에 ‘팬티’라는 이름을 붙여야 제법 눈에 뜨이며 잘 읽히는가 보다. 그렇다면 내가 읽은 《미식견문록》은 일본에서 어떤 이름으로 나왔을까? 간기를 보면 알파벳으로 일본책 이름을 적어 놓는데, “RYOKOSHA NO CHOSHOKU”이다. 뭔 소리일까. 다시 더 알아보니, 이 일본말은 “旅行者の朝食”을 뜻한단다. 아하, 그러니까 “길손이 먹는 아침”이다. “나그네 아침밥”이든지.

 문득 궁금하다. 이렇게 ‘딱딱’하고 ‘똑똑’해 보이도록 책이름을 붙여야 요네하라 마리라고 하는 일본사람 글을 빛낼 수 있는가. 이처럼 ‘뭔가 그럴듯하게’ 붙여놓는 책이름이어야 “유쾌한 지식여행자” 이야기가 되는가.

 《미식견문록》이란 이름이 붙은 책을 읽으면, ‘일본사람이지만 일본 바깥으로 오래도록 떠돌아다녀야 하던 요네하라 마리 님이 반갑게 먹거나 즐겁게 먹은 밥’ 이야기가 수수하게 나온다. ‘견문(見聞)’, 그러니까 “보거나 들어서 얻은 지식”으로 쓴 이야기가 아니라, 요네하라 마리 님이 몸소 겪고 살아낸 이야기가 조곤조곤 나온다. 책 첫머리인 15쪽을 보면, “고전어 소양은 교육받을 수 있는 카스트에 속한다는 증거요, 신분의 상징이었으니 그 전통은 아직도 면면이 이어져, 발언 중에 틈만 나면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섞어서 교양을 과시하는 것이 웅변술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별것 아닌 것을 그럴듯하게 보여주는 효과도 있으니 그만둘 수 없는 것이리라. 일본인이 고사성어를 즐기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같은 대목이 있다. 일본사람이 ‘고사성어(또는 사자성어)’를 즐기는 일이란 거드름을 피우는 볼썽사나운 모습이란 소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글월을 우리 말로 옮기며 ‘일맥상통’이라는 한자말을 집어넣는다. 딱한 번역이라고 할까. 17쪽에 곧바로 ‘뉘앙스’라는 낱말이 튀어나오는데, ‘느낌-말맛-말느낌-맛-마음’ 같은 우리 말로 옮겨적어야 알맞다. 175쪽 “이거야말로 내가 지으려는 집의 콘셉트가 아닌가”는 뭔 번역이랄 수 있으려나. “집 모양”이나 “집 얼개”나 “집 생김새”나 “집 모습”쯤으로 적어 놓아야 알맞다. 번역이 얄궂은 대목을 하나만 더 든다면, 158쪽 “의학자 디오스코리데스도 양배추의 약재로서의 효능을 칭찬하며”가 있다. “양배추가 약재로 좋다고 칭찬하며”쯤으로 적어 주어야지. 토씨 ‘-의’를 잇달아 쓰는 일본 말투를 그대로 옮기면 어떡하나. 이런 번역은 번역이 아니다.

 《미식견문록》이란 이름이 달린 책을 읽으며 생각한다. 출판사에서 처음부터 요네하라 마리 님 삶과 마찬가지로 애써 치레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좋아하는 흐름에 몸을 맡기어 즐겁게 살아가는 느낌을 북돋는 마음결을 어루만질 수 있었다면. 번역자는 책이름부터 살포시 붙이는 가운데 한결 따뜻하게 옮겼다면.

 이 책을 읽을 한국사람은 무엇을 느껴야 좋을까. 이 책을 읽는 한국사람은 무엇을 생각해야 좋은가. 지식을 다루는 《미식견문록》인가? 삶을 말하는 《미식견문록》인가?

 꽤 거추장스러운 이름이요 속이 빈 이름이며 지나치게 부풀려 놓은 이름 때문에 자꾸 곁길로 샌다. 요네하라 마리 님한테는 ‘미식(美食)’, 곧 “좋은 밥”을 즐겼다는 이야기를 신나게 펼치며 자랑하려고 이런 책을 썼겠는가. “나는 ‘버려진 아이들이 모험 끝에 성장하여 돌아온다’는 구조에 더 눈길이 간다. 아마도 아이들을 버리는 일이 그만큼 빈번했고, 그만큼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는 부모들이 많았다는 뜻이 아닐까. 옛날이야기는 그런 마음의 갈등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142∼143쪽).” 같은 글월을 읽으며 따사로운 손길을 느낀다. 책이름은 어줍잖게 《미식견문록》이지만, 정작 이 책에 깃든 이야기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따숩게 마주하는 ‘밥 한 그릇에 얽힌 웃음과 눈물’이지 싶다.

 요네하라 마리 님으로서는 이 책에서 내내 “글로벌 스탠더드를 외치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경계가 사라질 듯한 요즘이지만, 자신을 조국에 묶어 두는 가장 튼튼한 동아줄은 어려서부터 즐겨먹는 음식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좀 걱정스럽다. 요즘 와서 편의점 음식으로 크는 아이들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217쪽).”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지 않았나 생각한다. 당신이 어린 날부터 가까이 놓고 즐기던 먹을거리란 바로 ‘배고픔만 채우는 밥’이 아니라 ‘내 어버이가 지내온 나날을 헤아리고 내 어버이와 살아온 나날을 돌아보는 이야기’를 여는 실마리가 되어 주는 밥, 한 마디로 ‘이야기 밥’임을 밝히고 싶었구나 하고 느낀다. 미국사람들이 자꾸 전쟁을 일으킬 뿐 아니라 전쟁에 빠져드는 까닭이란 바로 ‘미국사람 스스로 먹는 밥’ 때문이요, 일본사람 또한 미국사람과 비슷하게 밥을 먹으며 살고 있기에 일본사람들조차 미국사람처럼 전쟁에 무디어지거나 전쟁에 미쳐 버리는 바보가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고 느낀다.

 스스로 즐겁게 살고플 뿐 아니라 따뜻하게 살고프며, 스스로 재미나게 살고플 뿐 아니라 아름다이 살고픈 넋을 글줄에 예쁘장하게 엮어 놓은 글쟁이 요네하라 마리 님이겠다고 느낀다. 창작이 아름답다면 번역 또한 아름다울 노릇이다. 다시 번역 얘기를 하고프지 않으나 두 가지를 더 들어 본다. “마음의 갈등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하는지도”는 “마음앓이를 하는 사람들을 풀어 주는 노릇을 하는지도”로 다듬어 주고, “어려서부터 즐겨먹는 음식임이 틀림없다”는 “틀림없이 어려서부터 즐겨먹는 밥이다”로 다듬어 주고 싶다. 낱말은 그대로 둔다 하더라도 말투는 고쳐야 한다. 낱말을 그대로 두고 싶다만 ‘역할’ 같은 낱말은 그대로 둘 수 없다.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하고, 생각을 하면서 글을 써야 하니까. 요네하라 마리 님은 늘 생각을 하면서 살아낸 한 사람일 테니까.

 책을 덮으려다가 끝자락에 붙은 글쓴이 말을 거듭 읽는다. “맛있는 것이라면 정신 못 차리지만 미식가를 자처할 정도로 전문가도 아니요, 미각에도 자신이 없다(245쪽).” 그런데 책이름은 《미식견문록》이다. 그지없이 슬프다.

 나는 집 바깥보다 집 안에서 더 오래 지내며 아이를 함께 돌본다. 웬만한 집일은 거의 다 한다. 이렇게 할밖에 없는 집 형편이지만, 집일을 하는 애 아빠라 말할 수 있어도 ‘집살림 잘하는 애 아빠’라 말할 수 없다. 누군가는 나를 보고 대단하다 말할는지 모르나 나로서는 하나도 대단할 구석이 없을 뿐더러 제대로 못하는 대목이 많다. 이런 나한테 ‘육아의 달인’이라거나 ‘살림 전문가’란 이름을 붙이면 얼마나 가시방석일까. 그나저나 《미식견문록》이란 이름이 새겨진 책에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세계음식기행”이란 말까지 덧달린다.

 끔찍하다. 이렇게까지 해서 책을 팔아야 하나. 이렇게까지 하면서 요네하라 마리 님 글을 읽혀야 하나. 사람들 누구나 다 다른 자리에서 저마다 좋은 밥을 즐기는 삶을 꾸리는 이야기를 수수하게 나누는 길을 여는 좋은 책으로 만들어서 내놓을 수 있으면 얼마나 반가울까. 아무래도 무엇이든 한국으로 들어오면 좋았던 책도 좋게 여기기 힘들고, 고왔던 이야기도 고운 이야기로 아로새기기 어렵구나. (4343.10.12.불.ㅎㄲㅅㄱ)


― 미식견문록 (요네하라 마리 글,이현진 옮김,마음산책 펴냄,2009.7.1./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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