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 - 1950년, 받지 못한 편지들
이흥환 엮음 / 삼인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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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으로 짓는 작은 사람 이야기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47] 이흥환 엮음,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

 


- 책이름 :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
- 엮은이 : 이흥환
- 펴낸곳 : 삼인 (2012.4.10.)
- 책값 : 15000원

 


  다섯 해를 함께 살아가는 첫째 아이는 새벽 세 시 무렵 밤오줌 한 차례 누고 아침 여덟 시 무렵 아침오줌 한 차례 누면 속이 개운하구나 싶습니다. 때로는 밤새 쉬를 안 누고 아침에 일어나서 한 차례 누기도 합니다. 어느 날은 바지에 오줌을 조금 지리고 나서 “나 바지 갈아입을래.” 하고 말하며 새 속옷과 새 바지로 갈아입고 자리에 눕습니다. “나 오줌 지렸어.”나 “나 오줌 쌌어.” 하고 말하지 않지만, 속옷과 바지를 갈아입을 때에는 오줌으로 옷가지를 버린 때입니다.


  밤 열두 시에 옆지기한테서 둘째 아이를 받습니다. 둘째를 가슴에 얹고 재웁니다. 스르르 곯아떨어집니다. 어느 결엔가 둘째 아이가 내 오른팔을 베개 삼아 잡니다. 베개 삼아 자던 아이가 낑낑거려 퍼뜩 잠에서 깨어 왼손으로 아이 가슴을 토닥입니다. 이불을 여미면서 오른팔을 슥 뺍니다. 몇 시간 이렇게 잤나 모르겠지만 오른팔이 없는 듯 뻑적지근합니다. 첫째 옷을 갈아입히고 뒷밭에 아이 오줌을 뿌리고는 나도 쉬를 하고 하늘을 보니 파랗게 물들며 동이 트려 합니다. 처마에 있는 제비집에서는 암수 제비 두 마리가 삣삣삣 하면서 새 하루를 열려고 부산을 떱니다.


  새벽 다섯 시 십 분. 밤개구리 소리는 천천히 잦아들고, 들새와 멧새 지저귀는 소리 차츰 커집니다. 이웃집은 슬슬 하루를 열 테고, 우리 집도 우리 집대로 새 날을 엽니다.


- 봉석이는 히죽히죽 웃는다고 하였으나 요사이에는 내가 손을 달라고 하면 손을 척 내주곤 합니다. 봉식이 크게 웃을 적에는 당신의 생각을 잊지 못하겠습니다. 봉석이 아버지, (중략) 할 말이 많으나 이것으로 끝맺습니다. 우스운 소리도 할 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믿을 데도 없으나 봉석이를 보면 웃습니다. 그리고 망나(막내) 아주버님이 일하시고 집에 들어와 말도 안 할 적에는 나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생각은 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당신 하나밖에 없습니다. 해답 빨리 해주시요. (1950년 6월 8일 은애 올림/22쪽)
- 아-아 고향 삼천리를 떠나 산 설고 물 설은 먼 곳에 있는 사랑하는 나의 동생에게 발 없는 편지야 빨리 빨리 달아나라. (1950년 10월 8일 백홍섭/49쪽)


  어제 저녁을 먹고 누런쌀을 불리려 했는데 깜빡했다고 떠오릅니다. 얼른 일어나서 누런쌀을 씻고 불려야겠습니다. 그나마 요사이는 날이 따뜻해서 새벽녘 누런쌀을 불리면 아침에 새로 밥을 지을 만합니다. 다른 밥거리는 어제 먹고 남은 삶은고구마 있고 말랑두부국이 있습니다. 뒤꼍에서 풀을 뜯어도 됩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도시나 시골이나 모두 길러서 먹어 버릇하는 삶입니다.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스스로 자라나는 풀이나 열매를 기쁘게 얻어 알맞게 먹어 버릇하는 삶은 아주 드뭅니다. 곰곰이 돌이키면, 사람들이 땅을 일구어 몇 가지 곡식을 거두기 앞서까지 어떻게 살아갔을까 하면, 하나같이 풀과 열매와 고기를 먹었겠지요. 스스로 살아가는 풀과 열매와 고기를 스스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먹었겠지요. 비료도 사료도 항생제도 풀약도 없이, 온통 가장 깨끗하고 가장 정갈하며 가장 아름다운 목숨을 내 몸으로 받아들였겠지요.


  바다에서 낚는 조기 이야기를 다루는 어느 책을 읽으니, 1960년대 끝무렵에 이르러 연평도에서든 남녘 바다에서든 조기낚기가 몹시 힘들어졌다 합니다. 갑작스레 씨가 마르듯 크게 줄었다 합니다. 고기잡이배가 더 커지고 고기그물이 더 발돋움한 탓에 새끼고기까지 잡아들이느라 조기가 확 줄었다 할 테지요. 그런데 ‘문명 발달’과 ‘마구 낚기(남획)’ 때문에 조기가 줄어들기만 했을까요. 1960년대 끝무렵이라 하면 새마을운동이 한창 온 나라를 휩쓸던 즈음입니다. ‘유기농’이나 ‘친환경’이라는 이름을 모르고도 언제나 유기농과 친환경으로 흙을 아끼고 살찌우던 사람들이 새마을운동 때문에 비료와 사료와 풀약과 항생제를 마구마구 쓰던 즈음입니다. 화력발전소가 부쩍 늘고, 폐수와 매연을 마구 내뿜는 공장이 엄청나게 늘던 즈음입니다. 고속도로와 함께 자동차가 끝없이 늘어나며, 사람들 스스로 환경을 아름다이 지키려던 마음을 한꺼번에 내팽개치던 즈음입니다.


- 당신하고 같이 사진 한 번 찍지 못한 것이 유감이 되어 어떡하면은 좋은런지 막 안타까운 것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사진은 나의 가슴에서 죽을 때까지 있다는 것을 알고, 당신에게 나의 사진을 보내드리니 살아 있는 동안에 잊지 말 것을 부탁합니다. 편지를 쓰면서도 폭탄 소리에 몇 번씩 놀라면서 점심시간에 감추고 쓰기 때문에 문구가 되지 못하더라도 잘 보시오. 인제 우리 학교는 어느 곳으로 이주될런지 모르겠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만 시간을 이용하여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1950년 10월 11일 오후 10시 10분/36∼37쪽)
- 동무에게 부탁하는 것은 어머님이 자식을 서이식(셋씩) 전선으로 내보내게 되여 서운하실 것인데, 동무들이 만히(많이) 위려하여(위로하여) 주십시요. (1950년 10월 8일 정원/66쪽)


  이 나라 온 들판과 멧자락과 냇물과 바다는 쉰 해 남짓 비료와 사료와 풀약과 항생제에 찌들었습니다. 국립공원 멧자락이라 하더라도 솔잎혹파리를 잡는다며 갖가지 풀약과 항생제를 끝없이 뿌립니다. 깊디깊은 두메라 하더라도 풀약과 항생제 그늘에서 홀가분하기 어렵습니다. 마음 놓고 풀을 뜯어서 먹을 만한 시골이나 멧골은 없다 해도 될 만큼 슬프며 메마른 터전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웬만한 시골이나 멧골도 흙길을 모조리 시멘트길이나 아스팔트길로 닦습니다. 깊은 멧자락 등성이나 봉우리까지 자동차가 붕붕 달립니다. 언젠가 관악산에 한 번 오르니, 꼭대기에서 냉장고를 들여 얼음과자에 막걸리에 라면 따위를 팔던데, 사람들은 스스로 먹고 마시고 버리고 더럽히는 짓을 끔찍하게 저지르며 하나도 안 느낍니다. 풀과 나무가 없으면 숨을 쉴 수 없는 줄 안 느낍니다. 풀과 나무가 깃들 흙이 싱그럽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는 줄 안 느낍니다. 물고기와 바닷고기가 튼튼하고 씩씩하게 살아갈 수 없으면 사람도 살아갈 수 없는 줄 안 느낍니다.


  게다가, 풀·나무·흙·새·물고기 들을 살리는 길이 ‘옛날로 돌아가는 고단한 삶’인 줄 잘못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아니에요. 아닙니다. 밥을 먹는 사람은 ‘풀 열매’를 먹는 사람이에요. 하얀 쌀밥을 먹더라도, 이 하얗게 깎은 벼알은 흙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풀이에요. 세겹살을 싸서 먹는 상추를 비닐집에서 키우더라도 흙이 있어야 자랍니다. 흙 없이 물로만 상추를 기르기도 한다지만, 전기로 밝힌 등불을 쬐며 물만 마시는 상추가 사람 몸에 좋은 기운으로 스며들 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햇볕을 쬐며 빗물을 마시며 기름진 흙에서 자라는 상추나 배추나 무나 당근이나 호박이나 쑥이나 냉이나 버섯이 되어야 비로소 사람 몸에 좋은 기운으로 스며들리라 느낍니다.


  나는 살아가고 싶습니다. 나는 사람답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나는 좋은 바람을 마시고 싶습니다. 나는 좋은 햇살을 쬐고 싶습니다. 나는 좋은 물을 먹고 싶습니다. 나는 좋은 흙에 보금자리를 짓고 싶습니다. 나는 좋은 사람으로 살고 싶어, 좋은 바람·햇볕·물·흙을 꿈꿉니다.


- 어머님께 3천 원 쥐어 보냈는데 이제는 돈 보낼 일도 막연합니다. 어린 아해(아이)들을 맡겨놓으니 겨울 날 일 앞으로 지낼 일 참으로 가슴이 막힙니다. 어떻든 목숨만 붙어놔주시요. 아해들 어떻든 잘 길러주시요. 정세가 좋아지면 곧 만나겠지요. 급한 길가에서 씁니다. (강계 국립건설은행 북지점 한운봉/115쪽)
- 오라버님, 고향으로 돌아올 때는 내가 보낸 이 편지를 품 안에 넣고 집으로 가지고 돌아오십시요. 부탁합니다. 꼭!! (1950년 9월 23일 복실은 올림/189쪽)


  도시에서도 먹이를 얻으며 목숨을 잇는 비둘기나 고양이나 참새나 까치나 개는 너무 딱하고 안쓰럽습니다. 들짐승다운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도시짐승하고 닮습니다. 도시짐승이 들짐승다운 모습이 하나도 없듯, 도시사람한테는 들사람다운 모습이 조금도 없습니다. 가공식품과 화학약품에 길들어진 도시사람입니다. 물질문명과 제도권 울타리에 얽매이는 도시사람입니다. 스스로 책을 지을 수 있고, 스스로 학교를 세울 수 있으며, 스스로 흙을 일구거나, 스스로 삶을 가꿀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내 삶이 내 책입니다. 내 넋이 내 아이와 나를 함께 북돋우는 학교입니다. 내 하루가 내 보금자리 밭자락과 논자락을 북돋우는 땀방울입니다. 내 사랑이 내 생각을 보듬으며 내 삶이 됩니다.


  사람이 스스로 사람다이 살아가던 때에는 ‘쓰레기’라는 낱말을 안 썼습니다. 쓰레기라든지 찌꺼기라는 낱말이 있기는 하지만, 사람들 살림살이에서 쓰레기가 될 것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사람다이 살아가지 않고 물질문명을 누리거나 퍼뜨리면서 쓰레기가 어마어마하게 생깁니다. 태워도 화학물질이 남는 쓰레기입니다. 묻어도 썩지 않는 쓰레기입니다. 전기를 만들며 수십만 수백만 해 동안 방사능이 남는 쓰레기입니다. 자동차를 만들고 옷을 만들고 아파트를 만들고 고속도로를 만들며 언제나 쏟아지는 쓰레기입니다. 쓰레기를 먹고 쓰레기를 누리며 쓰레기를 둘러놓고 살아가는 문명이고 물질입니다.


  그리 멀지 않은 우리 삶을 헤아립니다. 한국전쟁이 터질 즈음 사람들 삶은 어떠했을까요. 새마을운동 따위 없던 때 사람들 삶은 어떠했을까요. 일본제국주의 식민지가 아니던 때, 이씨 임금들이 봉건 위계질서로 사람들을 내리누르지 않던 때, 서로 제 잘났다며 땅빼앗기를 일삼던 여러 나라가 우글거리지 않던 때, 조그맣게 마을을 이루거나 조그맣게 외딴집을 이루던 작은 사람들은 어떤 삶 어떤 꿈 어떤 이야기 어떤 나날을 지으며 사랑을 누렸을까요.


- 과히 놀라지 말아라. 평양 소식을 알린다. 9월 16일에 놈들의 공습에 무사히 지내든 우리 사는 사택에다가 80개의 폭탄을 던지며 수백 명 사람 죽고 하는 중에 우리의 두 집 식구는 천명으로 살아났다. 작은어머님 집도 폭탄에 치여 형편이 없고 무너지는 집 속에서 살아나고, 우리 집 식구는 집 안에 있다가 폭탄 파편에 겨우 몸을 빠져서 살아났다. 나는 현장에 갔다가 연기가 매우 나서 집에 돌아온즉 식구들은 울고 있는 현상이다. (210쪽)
- 집에서 네가 사랑하는 토끼 2마리, 돼지 2마리 모두 가지고 큰집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한 가지 섭섭한 것은 을태 삼촌이 논에서 베를 베다가 적의 폭격에 희생되었다. (1950년 10월 10일/226쪽)


  이흥환 님이 엮은 인문책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삼인,2012)를 읽습니다. 한국전쟁이 불거지면서 ‘보낸 사람은 있되 받을 사람은 없’어지고 만 편지꾸러미를 예순 몇 해만에 풀어내어 선보입니다. ‘혁명’과 ‘새 조국 건설’을 외치는 목소리가 더러 있으나, ‘삶’과 ‘사랑’을 속삭이는 목소리가 거의 모두라 할 작디작은 편지에 담긴 이야기를 읽습니다.


  남녘이든 북녘이든, 총이나 폭탄이나 전투기나 군대는 무슨 값을 하겠습니까. 전쟁이나 무력통일이나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는 무슨 보람을 하겠습니까.


  사람은 그저 사람입니다. 사람답게 살아가고픈 사람입니다. 사람답게 사랑을 나누고 사람답게 꿈을 피우고 싶은 사람입니다.


  전쟁통에는 해방군도 적군도 아군도 인민군도 국군도 없습니다. 모두 바보입니다. 총을 든 사람은 몽땅 바보입니다. 총을 들어 평화를 지키겠다고 외친다지만, 총만 들어서는 아무도 살지 못해요. 한창 총을 쏘다가도 배가 고픈걸요. 한창 폭탄을 떨구다가도 똥이 마려운걸요. 한창 칼을 휘두르며 ‘내 이웃이거나 동무였을 적군’ 배를 가르고 팔다리를 자르다가도 졸음이 쏟아지는걸요.


  사람은 밥을 먹어야 살아갑니다. 사람은 똥오줌을 누어야 살아갑니다. 사람은 잠을 자야 살아갑니다. 사람은 두 다리 쪽 뻗고 가뿐하게 드러누울 좋은 보금자리가 있어야 살아갑니다.


  이쪽도 저쪽도, 속으로는 ‘북진통일’이나 ‘남진통일’이 아닌, 아무런 정권도 주의주장도 권력도 체제도 울타리도 틀도 제도권도 없는, 그저 사랑스러우며 좋은 보금자리가 되기를 바랐으리라 생각합니다.


.. 한국전쟁의 전쟁터에 불려 나간 청년들의 태반이 이런 젊은이들이었다. 그런데도 남에서든 북에서든 국가의 이름으로 나중에 써낸 전쟁사에는 이런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빠져 있다. 대개의 전쟁사가 전투 기록, 전략전술사로만 기술된 군사이거나 전쟁의 배경, 원인에만 치중한 정치사이다. 이런 기록은 생명력이 없다. 생명력이 없다는 것은 사람의 목소리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며, 생명력이 없는 기록은 그래서 잊히기 쉽다 ..  (엮은이 말/164쪽)


  역사란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사회나 정치란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목숨(생명력)’이 없는 역사나 사회나 정치가 여느 사람들한테 무슨 꿈이 되거나 어떤 사랑이 될는지 생각합니다.


  목숨이 아닌 역사 기록은 잊히기 쉽지 않습니다. 아무 뜻도 값도 없습니다. 아무 뜻도 값도 없는 역사 기록을 굳이 생각할 까닭이 없습니다. 잊히는 역사 기록이 아니라, 처음부터 떠올릴 만하지 않고 얘기할 값어치 없는 역사 기록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이 대단한 역사 기록이라 한다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임금님 발자국을 좇는 이야기만 실리지, 여느 사람들이 어떤 삶을 누리면서 어떤 사랑을 빚는가 하는 이야기는 안 실립니다. 역사 기록이라는 테두리에서는 값을 할 테지만, ‘삶·꿈·사랑·믿음·이야기’라는 보금자리로 돌아보자면 아무 값을 못 합니다.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에 실린 작디작은 글월은, 어느 글월이나 애틋하고 구수하며 살가운 사랑을 한 자락씩 보여줍니다. 바로 이 애틋하고 구수하며 살가운 사랑이 감도는 이야기이기에 즐거이 읽을 만합니다. 이렇게 애틋하고 구수하며 살가운 사랑이 풍기기에 반가이 읽을 만합니다. 1950년 6월에도 9월에도 10월에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랑과 꿈과 눈물과 웃음과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4345.5.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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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기행 학고재 산문선 6
시바 료타로 / 학고재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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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라섬에서 평화를 지키는 평화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46] 시바 료타로, 《탐라 기행》

 


- 책이름 : 탐라 기행
- 글 : 시바 료타로
- 옮긴이 : 박이엽
- 펴낸곳 : 학고재 (1998.2.20.)
- 책값 : 9800원

 


  매화꽃잎이 집니다. 산들산들 부는 바람에 따라 말갛게 눈부시던 꽃잎이 하나둘 지면서 마늘밭 푸른 물결 사이로 톡톡 떨어집니다. 시골마을 매화나무는 이렇게 마늘밭 사이로 꽃잎을 날리는데, 도시에서 조그마한 흙자락 겨우 얻어 뿌리를 뻗는 매화나무는 고운 꽃잎을 어디로 날릴 수 있을까요. 꽃이 지고 열매를 맺어 씨를 떨굴 때에는 어디로 어떻게 새 아기들을 퍼뜨릴 수 있을까요.


  사람 발길이 거의 안 닿는 숲길을 거닐면 하늘을 가릴 만큼 뻗은 큰 나무들 밑으로 아이들 손가락 길이만큼 자란 뾰족뾰족한 풀줄기를 보곤 합니다. 숲길을 그냥 지나치며 보면 풀줄기가 솟았구나 하고 여길 테지만, 발걸음을 멈추고 쪼그려앉아 들여다보면 여느 풀줄기 아닌, 둘레에 우람하게 자라는 나무들이 씨앗을 떨구어 겨울을 나고 이듬해에 새로 돋은 아기나무인 줄 알아챌 수 있습니다.


  커다란 느티나무 둘레에는 한 해를 자란 아기 느티나무부터 두 해를 자란 아기 느티나무나 서너 해를 자란 자그마한 아기 느티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어린 느티나무는 서너 해를 자랐어도 키가 아주 작습니다.


  작은 나무는 사람 발길이나 손길을 타지 않으면 마음껏 자랍니다. 마음껏 자라며 서로 얼키고 설킵니다. 얼키고 설키다가 어느 나무는 죽고 어느 나무는 높이 뻗습니다. 한 사람 삶으로는 나무들 얼키고 설키는 삶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따로 가지치기나 사이베기를 하지 않아도 나무들은 스스로 숲을 일구고 돌보며 어루만집니다. 스스로 알맞게 자라고, 스스로 죽어 거름이 됩니다. 스스로 씨앗을 내리고, 스스로 새싹을 틔웁니다.


.. 생각하면, 사대부 또는 그것을 지향하는 지식인들이나 독서생들이 거의 불모라 할밖에 없는 신학 논쟁을 5백 년이나 계속하였다는 것은 세계사적으로 보더라도 기이한 일이라 할 만하다. 중국인이나 조선인만큼 정신적 활력이 풍부한 민족이, 세계가 근대로 들어서는 가장 중요한 다섯 세기를 말장난 같은 학문에 소모해 버렸다고 하는 것은 통탄할 노릇이다 … 한국의 옛 건축물을 보고 공통적으로 느끼는 인상은 우아함과 유연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근대 이전의 중국 건축과는 완연히 구별되는 듯하다. 중국의 대건축에는 정권의 위용을 형태로써 보여주고자 하는 의식이 있으나, 한국의 그것에는 설사 그것이 궁전이라 할지라도 그런 의식이 적다. 아마도 나라의 넓이가 작은 데다 단일민족이라는 요소도 가세하여, 건물로써 위압을 주어야 될 필요는 없었던 까닭인가 한다 ..  (14, 64쪽)


  봄을 맞이해 개구리가 깨어납니다. 개구리가 깨어나면 뱀도 깨어나겠지요. 이 나라에 사람들만 득시글거리며 온 골골샅샅 찻길이나 구멍이 뚫리지 않던 때에는 곰도 깨어났어요. 곰과 함께 다람쥐가 깨어납니다. 들토끼나 멧토끼는 새로 돋는 봄풀을 맛나게 뜯어먹으며 긴긴 겨울이 얼마나 춥고 힘들었는가를 떠올립니다.


  이 나라에서 마지막 멧곰이 마지막 겨울잠을 깨던 봄은 언제였을까 헤아립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멧곰 식구들한테 보금자리를 내주기 힘들 만큼 더 넓은 땅을 더 많이 차지하고, 더 많은 자동차를 더 빠르게 내달려야 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봄을 맞이한 뒤 자전거를 타고 읍내나 면내로 달리면, 길바닥에 차에 치여 죽은 짐승과 벌레를 숱하게 만납니다. 자동차는 사마귀나 방아깨비를 밟아 죽여도 느끼지 않습니다. 자동차를 모는 어른들은 길알림판이나 앞차를 바라보는 데에 바쁘지, 새까만 길바닥 한켠에 사마귀가 몸을 따뜻하게 덥히다가 그만 커다란 쇳덩이가 덮치며 납짝쿵이 되고 마는 줄 알아차리지 않습니다. 나비를 치든 잠자리를 밟든, 범나비 애벌레를 밟든 동박새를 치든, 자동차는 아랑곳하지 않고 달릴 뿐입니다.


  봄비 내려 논마다 물이 찹니다. 물이 찬 논마다 개구리가 웁니다. 개구리 우는 논자락에는 새들이 살포시 내려앉아 개구리 먹이를 찾습니다. 개구리 우는 논 둘레 찻길에는 멋모르고 올라온 개구리가 자동차한테 밟혀 또다시 납짝쿵이 됩니다. 개구리들 사이에는 새까만 찻길은 얼핏 따뜻하다고 여길 수 있다지만 아무 무시무시하다는 이야기를 유전정보로 대물림하지 못할까요.


.. 강재언 씨는 보기 드문 애국자다. 대한민국이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니 하고 두 쪽으로 갈라져 맞서고 있는 마당에, 애국자 노릇을 계속한다는 것은 바로 고독 그것이다 …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차이는 한국에는 지식인이 있을 뿐, 일본같이 지적인 기인이 없다는 점이다.” 하는 말을 10여 년 전 어느 한국인의 글에서 읽은 일이 있다 … 경상도 사람들이 자신의 자부심을 한껏 높이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러다 보니 자기가 소속된 지역 자랑을 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딴 지역을 폄하하게 되는 것이다 … 문제는 문장의 교졸로 인하여 한 사람은 천상의 생활이 보장되고, 다른 수백만 명은 땅바닥에 엎드려 기는 삶을 강요당해야 하는 제도에 있다 ..  (24, 95, 103, 160쪽)


  모처럼 네 식구 다 함께 이웃 순천시로 나들이를 다녀온 지난주 일을 떠올립니다. 순천시는 이웃한 광양시보다 작고, 광양시는 광주광역시보다 작으며, 광주광역시는 대전이나 인천보다 작으며, 대전이나 인천은 서울보다 작습니다. 그러나, 순천시는 보성군이나 장흥군이나 고흥군보다 큽니다. 찻길이 넓고 시내가 넓으며 사람이 많습니다. 높은 건물과 아파트가 줄줄이 늘어섭니다.


  무엇보다 시내 가까이에 논이나 밭이 없습니다. 논이나 밭이 없는 순천 시내에서는 개구리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어쩌다가 참새 소리를 듣는다지만, 동박새나 노랑할미새나 직박구리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까마귀나 노랑조롱이나 종달새 소리는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서울보다 작고, 인천보다 작으며, 광주보다 작고, 광양보다도 작은 순천시이지만, 이 순천시에서 뱀을 만날 길은 없습니다. 개구리뿐 아니라 다람쥐도 사마귀도 방아깨비도 만날 길이 없어요.


  골목에서 튀어나오는 자동차를 걱정합니다. 쉬지 않고 달리는 자동차 소리에 귀가 멍합니다. 바라볼 만한 푸른 숲이나 들이 없어 눈이 아픕니다.


  나도 도시에서 나고 자랐지만, 도시에서 살아가던 나는 자동차 소리가 하나도 반갑거나 좋지 않았습니다. 어린 우리들 놀이터를 자동차가 차지하는 일이 몹시 싫었습니다. 국민학교 운동장에 자동차가 들어오면 그렇게 싫었습니다. 한창 공차기를 하는데 뒤에서 빵빵 울리며 비키라 하는 어른들 자동차가 대단히 싫었습니다. 집과 학교 사이를 걸어서 오가는 사오십 분 길을 두 귀가 멍하도록 큰길을 달리는 자동차가 참으로 싫었습니다.


  네 식구 함께 시골로 옮겨 자동차 소리하고 동떨어진 삶자락에서 지내며, 내 몸이 얼마나 시골을 바랐고, 자연을 꿈꾸었으며, 풀과 나무와 꽃을 기다렸는가 하고 깨닫습니다. 아마, 사람이라면, 여느 사람이라면, 물로 이루어지고 흙에서 태어났으며 햇살을 먹고 자라는 사람이라면, 저마다 어디에서 제 숨결을 가장 사랑스럽고 어여삐 빛낼 수 있는가를 느끼리라 생각합니다.


.. 한 가지 언급해 두고 싶은 것은, 한국인이나 조선인은 뛰어난 사람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일본 문화를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사실이다. 일본 것을 연구하려고 들면, 어딘가 바보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일까 … 과거에 응시할 만한 사람은 우선 방대한 중국 고전을 암송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해석은 오직 주자의 주석을 따라야 한다. 그런 연후에 바늘끝만 한 정의를 향하여 스스로의 지성을 응축시켜야만 한다 … 그들 중에는 더러 에라스무스의 두뇌를 가진 자, 뉴턴이 될 만한 인물도 있었으련만, 몽땅 판에 박은 분재송이 되어 버렸다 … 만일 그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논쟁토록 하였다면, 이후의 조선 사상사는 엄청나게 풍부하게 되었을 것이다 … 진실이란 그러한 틀 속에는 들어 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일본을 얼마만큼 나쁘게 보든 상관없으나, 자유로운 시각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하는 것을 서울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  (38, 84∼85, 87, 207쪽)


  제주섬을 생각합니다. 제주섬은 ‘제주’라는 이름이기 앞서 ‘탐진’이었고, 탐진이라는 이름이기 앞서 ‘탐라’였다 합니다. 이곳을 다스린다고 하던 나라님은 ‘탐라’가 ‘홀로 한 나라를 나타내는 이름’이기에 못마땅해서 ‘라’를 ‘진’으로 고쳤고, 나중에는 아예 ‘탐’까지 없애고 ‘진’에서 한 자리 낮추어 ‘주’를 붙였다 해요.


  그런데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한국사람이 쓴 글이나 책에서 읽지 못합니다. 한국사람이 쓴 글이나 책에서는 어느 때에 어떻게 이름이 바뀌었다 하고만 나올 뿐, 왜 이렇게 이름을 바꾸어야 했는가 하고 찬찬히 밝히거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나는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한국역사를 배웠으나, 이러한 발자취를 배운 일이 없어요. 일본사람 시바 료타로 님이 쓴 《탐라 기행》(학고재,1998)을 읽으며 비로소 이 같은 발자취를 깨닫습니다.


.. 조선이라는 나라의 까다로운 성격은, 순수한 중국인에 대하여도 꺼리고 멀리하여, 될 수 있는 한 서울에서는 살지 못하게 하였다는 데 있다. 말하자면 조선 전체가 자신의 관념이 만들어낸 누에고치 속에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 지폐 위에 찍혀 있는 이퇴계는 분명 훌륭한 인물임에 틀림없으나, 중국 주자학을 몇 세기 뒤에 전달해 준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 조선 왕조는 도그마에 얽매인 관료들이 고의로 문명을 정체시켰다. 이러한 견지에서 보지 않으면, 무슨 동화 속의 이야기로 들리기 십상이다. 조선사람들은 짐을 짊어지고 걸어간다. 만약 수레가 있다면 얼마나 경제가 진보하고, 민생이 풍요로워질 것인가 하는 소리가 실학자들의 지론이었다 … 생각해 보면 조선은 중국의 이웃 나라일 뿐 아니라 중국을 종주국으로 받들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전통적인 산업기술을 스스로 격리시켜 온 것은 그 형이상적 이유 때문이다 ..  (169, 187, 193쪽)


  남녘땅 정부는 제주섬, 이라 해야 할는지, 탐라섬, 이라 해야 할는지, 이곳 한켠에 군부대를 새로 지으려 합니다. 남녘땅 정부가 새로 지으려 하는 군부대가 이곳 한 군데뿐인가 싶지만, 남녘땅 정부는 이곳을 세계문화유산 가운데 한 곳이 되도록 하려고 애쓸 뿐 아니라, 남녘땅에서 손꼽히는 관광도시로 키운다고 하지만, 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허울을 내세워 군부대 짓기를 밀어붙입니다.


  남녘땅 사람들은 제주섬 올레길을 걷는다고 말합니다. 제주 도지사는 올레길을 닦는 데에 돈을 꽤 많이 씁니다. 그렇지만 바로 이런 곳에 군부대가 들어섭니다.


  사람들은 옳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군부대는 평화를 어떻게 지켜 줄까요. 정부 일꾼은 제대로 살피지 못합니다. 군사시설은 평화를 어느 만큼 지켜 주나요.


  전투기가 평화를 지킬까요. 항공모함이 평화를 지키나요. 박격포와 전차가 평화를 지킬는지요.


  십억이나 백억에 이르는 돈을 베풀어야 사랑이 꽃피지 않습니다. 사랑이 꽃피려면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서울 강아랫마을 아파트를 사거나 값나가는 자동차를 산다 해서 사랑이 샘솟지 않습니다. 사랑이 샘솟자면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평화는 평화로 지킵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이룹니다. 꿈은 꿈으로 빛냅니다.


.. 제주도에 와서 반가운 일 가운데 하나는 낡은 초가집을 아직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오늘날의 문명에는 바보스러운 데가 있다. 학교를 난립시켜, 아이들을 몽땅 우리 속에 가둬 놓고 어느 우리가 더 나은지 등급을 매기고 있다. 사회나 부모가 다 아이들을 닦달하여 등급이 매겨진 우리 속에 밀어넣고 자타를 구별함으로써 안도하는 사회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신분제가 없는 사회가 되면 흡사 광장공포증에 걸린 생쥐 같은 심리 상태가 되어, 그런 우리를 만듦으로써 일종의 신분적 차별성을 향유하는 것이다 … 생각하면, 이름의 한자 따위는 허식일 뿐인 것이, 훌륭한 뜻을 지닌 한자 이름을 가졌다고 전복 한 개를 더 딸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  (55, 253, 264쪽)


  일본에서 내로라하던 시바 료타로 님은 한국땅 제주섬을 돌면서 책을 하나 써냅니다.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글쟁이라면, 사진쟁이라면, 그림쟁이라면, 춤쟁이라면, 노래쟁이라면, …… 이녁은 어떠한 이야기를 빚을 수 있을까요. 제주섬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며 무엇을 꿈꿀 수 있을까요.


  일본에서 손꼽히던 글꾼 시바 료타로 님은 한국땅 제주섬을 생각하는 이야기를 글로 여미면서 책이름에 ‘탐라’라는 말을 적습니다. 한국에서 손꼽히는 글꾼이라면, 환경모임 일꾼이라면, 사회모임 일꾼이라면, 정치모임 일꾼이라면, …… 당신은 어떠한 이름으로 어느 한 터전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한국사람이 한국땅을 착하게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사람이 이웃나라를 참답게 아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사람이 지구별을 곱게 건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무기를 든 평화란 평화가 아닌 ‘무기를 든 전쟁’입니다. 학력을 쥔 평등이란 평등이 아닌 ‘학력을 내세운 차별’입니다. 돈을 앞세운 사랑은 사랑이 아닌 ‘돈을 앞세운 거짓’입니다. (4345.4.9.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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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가는 길 - 앤소니 드 멜로 신부의 마지막 명상들
앤소니 드 멜로 지음, 이현주 옮김 / 삼인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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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왜 태어나서 살아가는가
 [책읽기 삶읽기 102] 앤소니 드 멜로, 《사랑으로 가는 길》(삼인,2012)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할 때에 가장 즐겁습니다. 가장 하고 싶은 놀이를 할 때에 가장 신납니다. 셋째로 즐겁거나 둘째로 신날 만한 일놀이 아닌 첫째로 즐겁거나 신날 만한 일놀이를 할 때에 비로소 홀가분합니다.


  밥을 먹고 싶을 때에는 밥을 먹어야 합니다. 잠을 자고 싶을 때에는 잠을 자야 합니다. 나들이를 하고 싶을 때에는 나들이를 해야 합니다.


  언제나 마음이 곱게 흐르도록 살아야 아름답습니다. 늘 몸이 바라는 길을 살필 때에 어여쁩니다. 따순 봄을 맞이해서 온갖 들풀이 꽃송이를 피우듯, 가장 피어나고 싶은 한때에 꽃이 핍니다. 사람들 꿈이나 사랑 또한 가장 빛나게 펼쳐지며 드리우고 싶을 때에 빛나야 아름답다 할 만해요.


.. 당신이 자연을 감상하고 친절한 벗들과 사귀고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맛보는 행복 … 당신이 지금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당신한테 있는 것을 보지 않고 당신한테 없는 것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 당신을 행복하게 하거나 불행하게 하는 것은 세상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도 아니고 당신 머리에 담긴 생각입니다 … 행복을 얻기 위하여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행복하기 위하여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고요? 당신은 지금 여기서 충분히 행복하니까요 ..  (12, 17, 18, 35쪽)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놀던 아이가 저녁나절 드디어 잠듭니다. 한창 뛰어놀기에 빠진 아이는 시골집 마당 한켠에 쌓은 모래더미를 좋은 놀이터로 삼습니다.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이 모래더미에 파묻힙니다. 한낮 해가 기울 무렵 아버지가 뒤꼍 땅뙈기를 괭이로 일구니, 이 곁에서 저도 호미로 땅파기를 하다가는 호미는 옆으로 던져 놓고 흙바닥에 주저앉아 이제 흙놀이를 합니다. 밭을 마련하려고 일군 자리에 들어가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어 뒹굽니다.


  흙투성이 몸으로 집으로 들어가면 마루며 부엌이며 방이며 다시 쓸고 닦고 해야 하니 속으로 한숨이 나오지만, 이렇게 밭일을 할 때에 곁에서 흙을 만지작거리며 햇살을 나란히 쬐니 고맙고 기쁩니다. 마침 옆지기가 저녁 먹자며 부르는데, 뒤꼍 땅뙈기 가장자리 나무에서 꽃이 피었다며 무슨 꽃이냐고 묻습니다.


  아이와 함께 바라봅니다. 어, 우리 집 뒤꼍에 매화나무가 있었네?

  우리 마을 다른 집 매화나무는 흐드러지게 꽃이 피는데, 우리 집 매화나무는 이제 두어 송이 겨우 꽃이 핍니다. 마을 다른 집 매화나무는 눈처럼 새하얀데 우리 집 매화나무는 옅게 발그스름합니다. 속으로 생각합니다. 음, 우리 집 매화나무 꽃송이가 훨씬 예쁜걸. 게다가 이제부터 우리 집 뒤꼍에서 매화꽃을 보며 밭을 갈 수 있구나.


.. 어떤 사람에게 특별한 존재이기를 요구하는 것은 그를 즐겁게 할 임무에 당신을 묶어 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의 자유를 스스로 잃어버리는 거지요 … 사랑을 경험하려면 당신 주변의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독특함과 아름다움에 민감해야 합니다 … 우리가 자연을 거역하여 개발을 시도할 때마다 그렇게 해서 상처를 입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연은 곧 인간이니까요 …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을 소유할 수 있을까요? 당신은 그것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당신 안에 있으니까요 ..  (42, 51, 79, 112쪽)


  저녁을 먹습니다. 둘째를 씻깁니다. 둘째 몸을 말리고 옷을 새로 입힙니다. 마당에서 또 모래놀이를 하는 첫째를 부릅니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 …… 부르거나 말거나 쳐다보지 않습니다. 둘째를 씻기고 남은 물은 식습니다. 저 물로 얼른 아이들 옷가지를 빨래하고 치워야 나도 좀 쉴 텐데 하고 생각하다가, 이러다 첫째를 오늘 또 못 씻기나 하고 생각합니다. 둘째를 안고 마당으로 나옵니다. 첫째는 어느새 집으로 들어왔는데, 아버지가 밖으로 나오니 저도 따라 나옵니다.


  아버지는 둘째를 안고 마을을 한 바퀴 휘 돕니다. 첫째는 아버지 뒤를 졸졸 따라옵니다. 어디, 얼마나 잘 따라오는가 보자, 생각하면서 발걸음을 재게 놀립니다. 아이가 신이 벗겨집니다. 모르는 척 걷습니다. 울면서 아버지를 부르다가 이내 달음박질을 하며 따라붙습니다. 논둑으로 올라섭니다. 길로 내려옵니다. 다시 마을 한 바퀴를 도는데 또 신이 벗겨집니다. 벗겨진 신을 보다가 아버지를 보다가 또 우는 아이를 다시금 모르는 척합니다.


  이제 우리 집 뒤꼍 밭뙈기 자리에 접어듭니다. 아, 내가 무슨 아버지랍시고 이렇게 아이를 울리면서 졸졸 따라오게 하나 생각합니다. 그저 더 놀고 싶을 뿐이라, 씻자는 말을 귓결로 흘릴 뿐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 씻자 씻자 불러도 안 오면 둘째를 안고 이렇게 마을을 한 바퀴 돌자고 불러, 휘 돈 다음 씻자고 하면 아이가 잘 따르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더 놀게 하고, 더 뛰게 한 다음, 이제 꽤 지쳤겠다 싶을 무렵 신나게 씻으면, 어느 결에 스르르 잠들 테지요.


.. 깨어 있는 사람이 어떻게 나쁜 짓을 할 수 있겠어요?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하거나 악한 사람이 되는 것은 그가 뭐든지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병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 동물은 너무 살이 쪄서 체중이 오버하는 일이 없고, 싸우거나 도망칠 일이 생기기 전에는 긴장하는 법이 없습니다. 제 몸에 안 좋은 음식에는 절대 입을 대지 않지요. 필요할 때만 움직이고 나머지 시간은 휴식으로 꽉 채웁니다. 바람, 햇빛, 비, 더위, 추위 같은 자연환경에 언제나 적당히 자신을 노출시키지요. 그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제 몸이 하는 말을 알아듣고 몸의 지혜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 사랑을 할 때 당신은 모든 사람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됩니다. 전에는 엄격하고 심드렁하게 보던 사람들을 너그럽고 친절하게 대하지요 ..  (47, 81, 117쪽)


  씻고 옷을 새로 입은 첫째는 어머니 곁에서 조금 칭얼거리고 놀더니 아버지 품에 안겨 무릎에 눕습니다. 아버지 무릎에 누운 지 몇 분 지나니 사르르 잠듭니다. 옆에서 둘째가 어머니랑 놀며 좋다고 악악 소리를 내도 깨지 않습니다.


  키 1미터를 넘긴 첫째를 무릎에 누워 재우자면 이제 무릎이 모자랍니다. 다리며 머리가 삐죽 나옵니다. 첫째를 무릎에 누워 재운 지 참 오래되었다고 떠오릅니다. 요즈음 첫째를 재울 때면 으레 잠자리에 나란히 누워 팔베개를 하며 노래를 부르거든요.


  날마다 키가 자라는 만큼 날마다 몸피도 커지고 몸무게가 늡니다. 둘째를 무릎에서 재우며 토닥일 때에 무릎이 저리고, 다 큰 첫째를 무릎에 재우자니 무릎이 퍽 저립니다.


  내 어버이는 내가 몇 살일 때까지 무릎에 누여 재우셨을까 궁금합니다. 열두어 살 때에도 시외버스를 타고 시골집에 찾아갈 때에 무릎에 재운 적 있기도 하다고 문득 떠오르는데, 온몸을 맡겨 내 어버이 무릎에서 잠든 마지막 나이는 언제였을까 궁금합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저희 어버이인 나와 옆지기가 저희를 이렇게 무릎에 눕히고 무릎이 뻑적지근하도록 재우던 일을 어느 만큼 떠올릴까 궁금합니다. 어쩌면 하나도 떠올리지 못할 수 있고, 하나도 못 떠올린다지만, 이 두 아이가 무럭무럭 커서 저희 짝꿍을 만나 저희 아이를 낳고 나서, 나와 옆지기가 했듯, 또 내 어버이와 옆지기 어버이가 했듯, 저희 아이들을 무릎에 누여 곱게 재우는 삶을 이으리라 느껴요. 얼마나 어버이 무릎에서 잠들었는지 제대로 떠올리지 못한다지만 몸이 알겠지요. 얼마나 오래 어버이 무릎에서 꿈나라로 접어들었는가 낱낱이 되새기지 못하더라도 마음이 느끼겠지요.


.. 틀을 움켜잡으면 당신은 그것에 갇힌 몸이 되지요. 그리하여 당신은 시들게 되고, 마침내 죽는 순간까지 자기를 본다는 게 무엇인지, 배운다는 게 무엇인지를 깨치지 못할 것입니다 … 한 아이를 누군가의 판박이로 만들 때 당신은 그 아이가 세상에 가지고 온 천연의 불꽃을 발로 밟아 끄고 있는 겁니다 … 당신은 신선하게 보이지 않는 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상대한테서 끊임없이 새로움을 발견하지 않고서는 그를 사랑할 수가 없는 거예요 … 우리는 시력 잃은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깁니다만, 그러나 그들의 다른 감각들이 제공하는 풍부한 정보에 대하여는 거의 아는 게 없습니다 ..  (94∼95, 102, 142, 145쪽)


  사랑으로 가는 길은 오직 하나라고 느낍니다. 사랑하는 삶이 곧 사랑으로 가는 길이라고 느낍니다. 사랑을 말하거나 속삭인대서 사랑으로 가는 길은 아니라고 느껴요. 사랑을 이야기하는 책을 읽거나 노래를 듣더라도 사랑으로 가는 길은 아니라고 느껴요.


  오직 사랑하는 삶이 사랑으로 가는 길이로구나 싶어요. 아이들을 사랑하고, 옆지기를 사랑하며, 보금자리를 사랑합니다. 풀과 나무를 사랑하고, 밭과 논을 사랑하며, 햇살과 바람을 사랑합니다. 냇물을 사랑하고, 멧자락을 사랑하며, 바닷가 모래밭을 사랑합니다. 살붙이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동무를 사랑합니다.


  딱히 다른 사랑이 있을까 모르겠어요. 딱히 다른 사랑은 없으리라 느껴요. 책사랑이란 말 그대로 책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노래사랑이란 이름 그대로 노래를 사랑하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삶이기에 사랑으로 가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삶인 만큼, 몸과 마음을 예쁘게 가다듬어 사랑스레 걷습니다.


.. 당신은 아름답지도 밉지도 않으니까요. 당신은 그냥 당신입니다 …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일 일은 내일이 알아서 할 것입니다. 날마다 그날 하루의 수고로 충분합니다 ..  (124, 172쪽)


  앤소니 드 멜로 님이 빚은 《사랑으로 가는 길》(삼인,2012)이라는 이야기책을 읽습니다. 앤소니 드 멜로 님은 사람들한테 오직 한 가지 길을 즐거이 걸어가면 좋겠다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삶을 사랑하며, 내가 꿈을 사랑할 때에 참 좋으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랑 말고는 온통 덧없다고 하는 《사랑으로 가는 길》을 읽습니다. 사랑하는 삶을 즐겁게 걷는 나날만큼 아름다운 이야기란 없다는 《사랑으로 가는 길》을 읽습니다.


  그래요. 나는 왜 태어났을까요. 우리 아이들은 왜 태어났을까요. 나는 이 땅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면 즐거울까요. 우리 아이들은 이 땅에서 어떤 꿈을 펼치며 살아갈 때에 즐거울까요. 사람이 하루하루 기쁘게 누리는 밑샘이란 무엇일까요. 사람이 날마다 기쁘게 맞아들이는 웃음은 어디에서 비롯할까요.


  몸을 살찌우는 밥은 어떤 매무새로 지어야 맛날까요. 마음을 살찌우는 이야기는 어떤 넋으로 빚어야 슬기로울까요.


  사랑 없이 지은 밥을 맛나게 먹을 수 있나요. 사랑 없이 지은 옷을 예쁘게 입을 수 있나요. 사랑 없이 지은 집에서 오붓하게 살아갈 수 있나요. 돈을 벌든, 이름을 얻든, 힘을 거머쥐든, 내 마음과 몸이 온통 사랑으로 빛나지 않는다면, 내 삶은 나 스스로 아름답다고 느낄 수 없어요. (4345.3.28.물.ㅎㄲㅅㄱ)


― 사랑으로 가는 길 (앤소니 드 멜로 씀,이현주 옮김,삼인 펴냄,2012.2.17./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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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나무 사이로 걸어가니 내 키가 커졌다
호원숙 지음 / 샘터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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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은 삶에서 태어납니다
 [책읽기 삶읽기 99] 호원숙, 《큰 나무 사이로 걸어가니 내 키가 커졌다》(샘터,2006)

 


 나는 두 아이한테 어버이입니다. 나는 두 어버이한테 아이입니다. 나는 두 아이가 튼튼하고 씩씩하게 자라나서 착하고 어여삐 살아가기를 꿈꿉니다. 내 어버이 또한 나한테 튼튼하고 씩씩하게 자라나서 착하고 어여삐 살아가기를 빌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이 손을 잡고 길을 걷습니다. 눈이 오면 눈길을 걷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걷습니다. 맑은 날은 햇살을 받으며 걷습니다. 바람 부는 날은 바람을 맞으며 걷습니다.

 

 자가용이 없는 우리 살림이기에 으레 걷습니다. 때로는 자전거를 함께 타고, 때로는 버스를 얻어 탑니다. 같은 빠르기로 걷습니다. 같은 곳을 바라보며 걷습니다. 같은 느낌과 생각까지는 아닐 테지만, 같은 하늘과 들판과 새들을 바라보며 걷습니다.


.. 해가 떠오르기 전 아침노을이 아름다울 때가 있다 … 나는 단풍나무 숲을 걷는다. 이파리 하나하나 말을 거는 듯 음악이 들리는 듯하다 ..  (10, 11쪽)


 해가 기울어 어두운 때, 아이를 데리고 마당이나 뒤꼍으로 나와 밤하늘을 올려다보곤 합니다. 밤에 별을 볼 수 있는 시골이 좋습니다. 밤에 별을 볼 수 없다면 얼마나 밋밋하고 따분한 터전이 될까요. 전기가 없으면 반짝거리지 못하는 데라면 얼마나 메마르고 허전한 터전이 될까요.

 

 아침과 낮과 저녁으로 바깥바람을 쐽니다. 때마다 바람이 다릅니다. 날에 따라 바람이 다르고, 철에 따라 바람이 다릅니다. 나는 나대로 바람을 맞아들입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바람을 맞아들일 테지요.

 

 어버이가 살아가는 터전이란 어버이부터 즐거이 누리는 사랑이면서, 아이들한테 곱게 물려주는 사랑입니다. 어버이부터 더 좋은 꿈을 북돋우는 사랑을 누릴 수 있고, 아이들한테 더 기쁜 사랑을 물려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버이부터 하루하루 가까스로 견디거나 힘겨이 버티기도 합니다. 사랑하고 동떨어진 채 지낼 수 있습니다. 이동안 아이들은 고되거나 슬픈 아픔을 나날이 물려받을 수 있습니다. 어버이 스스로 좋은 삶을 누리지 않으면, 아이들 또한 좋은 삶을 누리기 어렵습니다.


.. 시골 출신인 남편이 건네주는 자연의 선물이다. 서울 아이는 이런 건 모른다. 자연에서 놀지 않았기에 무얼 먹어야 할지 잘 모른다. 연두색의 꼼밥(소나부 꽃은 약간은 새큼하고 약간은 달큼하고 약간은 떫다 … 나는 좋은 부모 밑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고 젊어서 원 없이 사랑도 했고 좋은 직장에서 월급도 받아 보았고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아 내 젖으로 키웠고 좋은 학교에 보냈다 ..  (23, 66쪽)


 소설쓰는 박완서 님 딸로 태어나 살아온 호원숙 님이 내놓은 수필책 《큰 나무 사이로 걸어가니 내 키가 커졌다》(샘터,2006)를 읽습니다. 박완서는 박완서이고 호원숙은 호원숙일 텐데, 수필책 《큰 나무 사이로 걸어가니 내 키가 커졌다》는 어머니 박완서를 ‘큰 나무’로 삼고 맙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 할 수 있을까요. 어찌할 길 없는 셈이라 할 만할까요.

 

 큰 나무 사이로 걸어간대서 내 키가 커질 일이 없습니다. 나무가 크다면 얼마나 크고, 나무가 작다면 얼마나 작을까요. 나무는 그저 나무입니다. 나무 사이를 걸어가는 나는 그저 나 하나입니다. 내가 나무 사이를 걸어갔기에 나무들마다 키가 한껏 자라날는지 모르고, 내가 나무 사이를 걸어간 탓에 나무들마다 키가 한 뼘씩 줄어들는지 모릅니다만, 나 스스로 키가 커지겠다고 꿈꾸지 않는다면, 큰 나무들 사이를 걷는대서 내 키가 커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작은 나무들 사이를 걸어가더라도 나는 얼마든지 키를 키울 수 있어요. 아무 나무 사이를 안 지나더라도 나는 나대로 내 키를 키울 만합니다.


.. 쓸 수 있다는 것, 써진다는 것 모두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재미있다고 이런 책을 단숨에 읽을 필요는 없으리라. 하루에 한 편이라도 읽으면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착해질 것 같다 … 그래도 아이들 어릴 때 쓴 일기 공책은 버리지 못한다. 그걸 버리는 건 그들의 몫이니까 … 어머니의 데뷔작 《나목》을 읽던 날을 잊지 못한다. 단숨에 읽어 버렸지만 읽고 난 후 여태껏의 우리 집의 분위기와 빛깔이 바뀌어 이제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  (48, 57, 167, 213쪽)


 소설쓰는 박완서 님은 소설쓰는 박완서 님대로 당신 삶을 사랑하면서 일구었습니다. 호원숙 님은 호원숙 님대로 당신 삶을 사랑하면서 일구면 됩니다. 굳이 큰 나무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작은 나무라고 낮출 까닭이 없습니다.

 

 박완서 님은 호원숙 님을 비롯한 여러 아이를 낳아 돌보는 삶을 일구었기에 소설을 쓰는 기운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이 없었다면 소설쟁이 한길을 못 걸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호원숙 님한테 어머니 박완서 님이 큰 나무가 아니라, 박완서 님한테 호원숙 님이 큰 나무였을 수 있어요.


.. 아이는 그동안 무얼 공부했는지 이상의 수필 〈권태〉는 알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시험 전날 갑자기 무얼 어떻게 하겠는가. 미리 알려준 게 무슨 독과도 같았다. 나는 서재에서 낡은 이상 문학 전집을 꺼내 들고 아이 방으로 갔다. 그 애한테 세로로 조판된, 그것도 오래되어 잉크가 다 날아가 버린 책을 읽으라는 것은 무리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이상의 수필집을 읽어 준다. 어린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듯이 ..  (170쪽)


 수필이란 내 삶을 드러내며 내 꿈을 나누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삶이란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습니다. 내 삶이란 작지도 크지도 않습니다. 내 삶은 오로지 내 사랑대로 흐릅니다. 내 삶은 오직 내 사랑을 나 스스로 어떻게 보살피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수필책 《큰 나무 사이로 걸어가니 내 키가 커졌다》는 처음부터 ‘호원숙 수필’로 썼어야 아름답습니다. 어머니 그늘자리에서 쓰는 수필이 아니라, ‘내 삶자리’에서 쓰는 글이었어야 예쁘게 빛납니다.

 

 차라리, ‘어머니 박완서를 떠올리거나 그리는 이야기’로만 가득 채웠으면 나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니면, ‘어머니 박완서하고는 사뭇 동떨어진 이야기’로 알알이 누볐으면 나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라면, 그저 큰 나무에 기대어 열매 얻어먹는 셈일 뿐입니다.

 

 살아가노라면, 큰 나무에 기댄대서 잘못일 수 없고, 열매 몇 알 얻어먹는 일이 나쁠 까닭이 없어요. 다만, 호원숙 님으로서는 호원숙 님 한 사람한테만 서린 고운 빛줄기가 있습니다. 이 빛줄기를 곱게 사랑하며 북돋우면 좋겠습니다. 집에서 살림하는 아줌마이면 어떻고, 숲길 걷기를 좋아하는 도시내기이면 어떤가요. 오늘 내 삶을 꾸밈없이 맞아들여 스스럼없이 아낄 때에 가장 빛나는 하루이고, 이 가장 빛나는 하루를 수수하게 글로 여밀 때에 수필이 태어나요.

 

 문학은 삶에서 태어납니다. 문학은 생각에서 태어나지 않습니다. 문학은 삶을 아끼는 생각으로 일굽니다. 문학은 삶을 사랑하는 생각으로 빚습니다. (4345.2.22.물.ㅎㄲㅅㄱ)


― 큰 나무 사이로 걸어가니 내 키가 커졌다 (호원숙 글,샘터 펴냄,2006.4.25./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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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나를 물들이다 - 법정 스님과 행복한 동행을 한 사람들
변택주 지음 / 불광출판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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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물들이는 어여쁜 삶
 [책읽기 삶읽기 96] 변택주, 《법정, 나를 물들이다》(불광출판사,2012)

 


 흙으로 돌아간 법정 스님을 되새기는 이야기책 《법정, 나를 물들이다》(불광출판사,2012)를 읽습니다. 이 책은 법정 스님이 ‘비우기(무소유)’를 말하지 않았다는 줄거리를 들려줍니다. 법정 스님은 ‘함께 살아가기’를 말했다는 줄거리를 찬찬히 보여줍니다.


.. “법정 스님이 신념을 가지고 말씀하셨어요. 문화, 사회, 역사를 봤을 때 종교 목적이 종단 구성일 수는 없다고.” ..  (21쪽/장익)
.. 1982년 전시회 때문에 귀국한 방혜자 선생. 고국에 돌아와서 흙도 밟아 보지 못하고 시멘트 바닥 위만 걷다가 돌아가게 되었다며 후배에게 하소연했다 ..  (53쪽/방혜자)


 곰곰이 헤아리면, ‘비우기’란 ‘함께 살아가’는 밑거름입니다. 내 가진 것을 비우거나 내려놓을 때에 내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를 바라볼 수 있을 테니까요. 내 가진 것을 비우거나 내려놓아야 비로소 내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하고 어깨동무할 수 있을 테니까요.

 

 내 이름값을 움켜쥐면서 동무를 사귀지 못합니다. 내 돈을 거머쥐면서 이웃을 만나지 못합니다. 내 콧방귀를 높이면서 살붙이를 사랑하지 못합니다.

 

 칭얼대는 아이한테 젖을 물리는 어머니는 모든 아이들한테 어머니입니다. 이녁이 아이를 낳기 앞서 변호사였다든지 회계사였다든지 의사였다든지 대통령이었다든지 시장이었다든지 하는 이름값은 부질없습니다. 아이는 그저 어머니를 바라봅니다.

 

 어린이하고 손을 잡고 노는 아버지는 모든 아이들한테 아버지입니다. 이녁이 아이들과 복닥이기 앞서 공무원이었다든지 군인이었다든지 회사원이었다든지 흙일꾼이었다든지 하는 이름은 덧없습니다. 아이는 그예 아버지하고 놀 뿐입니다.

 

 어버이가 돈이 많대서 아이들이 기뻐할 까닭이 없습니다. 흙을 일구려고 호미를 쥔 사람이 국회의원이건 택시기사이건 흙이 달리 여길 까닭이 없습니다. 햇살은 청소 일꾼한테도 비추고, 큰회사 사장실에도 비춥니다. 바람은 바닷가 고기잡이한테도 불고, 초등학교 교무실 창문으로도 붑니다.

 

 스스로 돈과 이름과 힘을 비우거나 내려놓아야 비로소 눈을 밝힙니다. 눈을 밝힐 때에 마음을 밝히고, 마음을 밝힐 때에 사랑을 밝힙니다.


.. “서울 살았으면 얼마를 더 벌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건 가상이잖아요. 이루어지지 않은, 생각 속 손해는 손해가 아니에요. 서울 사는 시간을 줄여서 큰 병에 걸리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보면 시골 가길 얼마나 잘했어요.” ..  (127쪽/이계진)
.. 노일경 목사는 시골교회 목회를 할 때, 가는 곳마다 있는 서낭당을 보면서, ‘개신교에서는 서낭당을 왜 죄악이라며 깎아내리고 무시할까?’ 갸웃거렸다. 민간 무속문화인 서낭당은 누군가에게 기대고자 하는 마음일 뿐인데, 그 대상이 나무든 돌이든 짐승이든 사람이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공경하며 조심스런 마음을 갖는 건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자기들만이 유일하다고 얘기하며 종교를 빌미로 권력을 휘두르고 ..  (200쪽/노일경)


 누구한테서 무얼 배워야 훌륭하지 않습니다. 누구한테서 배우지 않을 때에는 못 배운다 말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이기에 잘 가르치지 않습니다. 누구라서 못 배우지 않습니다.

 

 훌륭하다는 스승이나 제자란 따로 없습니다. 모자라다는 스승이나 제자 또한 따로 없습니다. 언제나 같은 사람이면서, 늘 서로서로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프랑스로 배우러 떠나야 그림을 배우지 않습니다. 미국으로 배우러 떠나야 의학을 배우지 않습니다. 쿠바로 배우러 떠나야 생태나 공동체를 배우지 않아요. 티벳으로 배우러 떠나야 불교나 깨우침을 배우지 않아요.

 

 학교에서는 재주를 가르치겠지요. 무슨무슨 기술이라 하는 이런 재주와 저런 재주를 가르치겠지요. 교과서를 읽으며 지식이나 정보를 얻겠지요. 교과서를 잘 익혀 시험점수 잘 낼 수 있겠지요.

 그러나, 무슨 재주가 있기에 훌륭하다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기술이 빼어나대서 훌륭하다 말하지 않아요. 시험점수 높으니 똑똑하거나 훌륭하다 말하지 않습니다.

 

 싱싱 내달릴 수 있기에 자동차를 잘 다루는 사람이 아닙니다. 기계를 잘 만지작거리기에 기술자가 아닙니다. 예술작품을 빚기에 예술쟁이가 아니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마음이 있을 때에 쟁이가 되고 장이가 되며 꾼이 돼요.


.. 법정 스님에게 조선대 법대에 들어갔다고 말씀드리니, 스님은 “법학을 하는 데 왜 사회학이 중요하고, 정치학이 중요하고, 심리학이 중요한지 아느냐? 그 기반 위에 법이 있기 때문이다. 바탕을 닦지 않고, 법학만 한다면 그저 시험공부일 뿐인 죽은 공부다. 특히 철학책은 꼭 읽어야 한다. 사유와 성찰이란 커다란 물줄기에서 법학은 새 발에 난 피일 뿐이다. 무식한 놈이 되지 않으려면 폭넓게 사유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말씀했다 ..  (224쪽/문현철)
.. “제가 출가하는 봄에 불일암을 짓기 시작해서 계를 받는 날 낙성식을 했으니, 불일암과 제 출가 나이가 똑같아요. 그때 촛대처럼 가는 후박나무 묘목을 심었어요. 불일암에 갈 때마다 후박나무를 만지며 숨결도 느껴 보는데, 그 가냘팠던 나무가 아름드리로 자라서 큰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요.” ..  (287쪽/현장)


 《법정, 나를 물들이다》에 나오는 사람들은 법정 스님을 떠올리면서 한결같이 이야기합니다. 당신들이 그닥 거룩하거나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는다고, 당신들이 만나면서 알고 지낸 스님 한 분은 ‘우상’이나 ‘거룩한 님’으로 섬기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모두 같은 사람입니다. 모두 같은 사랑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만난다면 나와 누군가가 서로 좋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나를 만난다면 누군가와 내가 좋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지만, 웃물이든 아랫물이든 같은 물이에요. 골짝물도 냇물도 바닷물도 똑같이 물이에요. 빗물도 우물물도 샘물도 나란히 물입니다.

 

 흐르는 자리가 조금 다르겠지요. 선 자리가 살짝 다르겠지요. 모양과 빛깔과 내음이 저마다 다르겠지요.

 

 흐르는 자리가 달라 모두 예쁜 물이 됩니다. 선 자리가 달라 서로 고운 물이 됩니다. 모양과 빛깔과 내음이 이래저래 달라 한결같이 맑은 물이 됩니다.

 

 법정 스님은 여러 사람들을 물들였습니다. 여러 사람들은 법정 스님을 물들였습니다. 서로 즐겁고 기쁘게 물들이면서 함께 살았습니다. 함께 살아가며 서로를 따스하고 너그러이 물들였습니다. (4345.1.19.나무.ㅎㄲㅅㄱ)


― 법정, 나를 물들이다 (변택주 씀,불광출판사 펴냄,2012.1.5./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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