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국어사전 - 남녘과 북녘의 초.중등 학생들이 함께 보는
토박이 사전 편찬실 엮음, 윤구병 감수 / 보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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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 국어사전


 나는 지난 2001년부터 두 해하고 여덟 달 동안 ‘어린이 국어사전’ 만드는 일을 했다. 내가 함께 만들던 어린이 국어사전은 내 손을 거쳐 태어나지 못했다. 나는 밑일만 하다가 그만두어야 했다. 내 손을 거쳐 태어나지 못한 어린이 국어사전이 책으로 나온 모습을 책방에서 보고는 더없이 슬퍼서 눈물이 났다. 내 손으로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슬프지 않았다. 사전이 너무 엉터리여서 눈물이 났다.

 아니, 제대로 말해야겠다. 말풀이가 엉터리여서 눈물이 났다. 짜임새와 엮음새는 훌륭했다. 책은 참 예쁘장했다. 꾸밈새도 뛰어났다. 곧, 짜임새와 엮음새와 꾸밈새는 좋다. 겉으로 보기에 참 괜찮다 싶은 사전이다.

 그러나, 사전은 속을 읽는 책이지, 겉을 살피는 책이 아니다. 아무리 잘 엮거나 짜서 낱말을 찾거나 살피기에 좋은들 무엇하랴. 사전은 말풀이를 옳고 바르게 하지 않으면 사전이라 이름붙일 수 없다. 사전은 말풀이 때문에 사전이 되지, 짜임새와 엮음새와 꾸밈새 때문에 사전이 되지 않는다.

 오늘 돌이키면, 지난날 그 어린이 국어사전 한 권이 내 손을 거쳐 태어났다면 나로서는 덜 슬퍼 했을는지 모르겠지만, 덜 슬퍼 하는 만큼 왜 슬퍼 하지 않아도 되는가를 몰랐으리라 생각한다. 지난날 그 어린이 국어사전 만드는 일에서 손을 떼고 다른 길을 걸어서 오늘에 이르렀기에, 비로소 지난날 그 국어사전을 안 만들어서 어쩌면 잘된 일이라고 느끼기도 한다.

 나는 아직 가장 옳고 바른 말을 쓰지 못한다. 나는 아직 가장 옳고 바른 말을 배우는 사람이다. 아마, 죽는 날까지 가장 옳고 바른 말만 배우다가 조용히 흙으로 돌아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 스스로 가장 옳고 바른 말을 쓰지 못하면서 국어사전을 만든다 한다면 얼마나 슬프며 안타까운 노릇일까.

 국어학자가 우리 말을 가장 옳고 바르게 쓰지 않는다. 국어학자란, 한 가지를 파고들어 논문을 쓴 다음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지, 우리 말을 가장 옳고 바르게 쓰는 사람은 아니다. 한자말이나 영어 같은 외국말을 안 써야 우리 말을 가장 옳고 바르게 쓰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 한자말이나 영어 같은 외국말을 안 쓰려 한다면, 왜 이러한 외국말을 안 써야 하는가를 살뜰히 깨달으면서, 알맞으면서 즐거이 쓸 우리 말이 무엇인가를 또렷하면서 살가이 느껴야 하고, 우리 말을 재미나며 알차게 쓸 줄 알아야 한다.

 여섯 살 어린이부터 열네 살 푸름이가 모인 자리에서 ‘어린이 국어사전’을 함께 펼친다. 국어사전 읽기와 찾기를 함께 한다. 아이들은 국어사전이 참 따분하다 이야기한다. 국어사전을 읽어도 ‘내가 찾으려는 낱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한다.

 ┌ 다다르다 : 목적한 곳에 가서 닿다. 어떤 곳에 이르다
 ├ 닿다 : 목적지에 다다르다
 └ 이르다 : 어떤 곳에 다다르다


 두 가지 어린이 국어사전을 펼친다. 아이들과 함께 읽는다. 두 가지 어린이 국어사전 모두 돌림풀이를 한다. 나는 국어사전을 만들 때에 이런 돌림풀이가 나오지 않도록 하려고 말풀이를 모두 새롭게 지었다. 열 가지가 넘는 국어사전을 나란히 펼치고 말풀이를 다 달리 붙이면서 돌림풀이가 아닌 참풀이가 되도록 땀을 흘렸다. 그렇지만, 내가 그만둔 다음 나온 어린이 국어사전조차 돌림풀이만 판친다. ‘다다르다’하고 ‘이르다’ 말풀이를 어떻게 붙여야 할까. 말풀이는 어떻게 새겨야 하는가.

 곰곰이 생각한다. ‘다다르다’라 한다면, “가려고 하는 곳에 다 가다”라 해야 하지 않을까. ‘이르다’라 한다면, “어떤 곳으로 가서 있다”라 해야 한다고 느낀다. ‘다다르다’라 할 때에는 처음부터 어떤 곳으로 “가려고 하는 마음”으로 가서 “다 갔다”고 하는 느낌이고, ‘닿다’라 할 때에는 ‘다다르다’하고 같은 마음으로 가되, “다 가서 그곳에 있다”나 “다 가서 그곳에 있게 되다”라는 느낌이며, ‘이르다’는 딱히 “가려고 하는 마음”이라기보다 어떤 곳으로 “가서 있”기만 하는 느낌이라고 본다.

 ┌ 가늠 : 형편이 어떤지 짐작하는 것
 ├ 짐작(斟酌) : 사정이나 형편 같은 것을 어림잡아 헤아리는 것
 ├ 어림 : 짐작으로 대충 헤아리는 것
 └ 헤아리다 : 어떤 일을 미루어 짐작하거나 살피다


 어린이 국어사전 일러두기에 나온 ‘가늠’이라는 낱말에 달린 풀이를 아이들한테 읽어 준다. 아이들은 ‘가늠하다’라는 낱말을 어느 자리에 써야 할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한다. 왜 ‘생각하다’라고만 쓰면 안 되느냐고 묻는다.

 ‘가늠하다’는 ‘재다’와 ‘따지다’와 ‘살피다’와 ‘헤아리다’와 ‘생각하다’를 모두 한 자리에 놓고 견주어야 말뜻을 알 수 있다. 이 낱말 하나만 똑 떨어뜨린 채 알도록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하려고 하면 할 수는 있겠지. 그런데, “형편이 어떤지 짐작하는 것” 같은 말풀이를 달면 이 낱말을 알 수 있도록 이끌지 못한다.

 “될까 안 될까, 또는 어떻게 될까 하고 품는 마음”쯤으로는 적어야 ‘가늠’이라는 낱말뜻을 어렴풋이나마 알도록 하리라 본다. 아이들이 “품는 마음”이라 할 때에 ‘품다’를 어떻게 느끼느냐가 걱정스러운데, 그러면 “될까 안 될까, 또는 어떻게 될까 하는 마음”이라고 하면 되리라. ‘어림’은 쉽다. “잘 모르지만 어느 만큼 될는지, 또는 어떻게 될는지 하는 마음”이라 하면 된다. ‘가늠’과 ‘어림’은 “잘 모르지만”이라는 꾸밈말이 붙고 안 붙고에서 갈린다고 여길 수 있다. ‘가늠’은 “잘 모르지만”을 따지지 않는다. 그냥 “될까 안 될까” 하는 마음이 ‘가늠’이다.

 말풀이를 꼭 어찌저찌 해야 잘 된 국어사전이라 할 수 있다. 돌림풀이가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하고, 사전을 읽어서 환하게 알 수 있도록 도와야 잘 된 국어사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낱말을 싣거나 저런 낱말을 실었대서 알찬 사전이 되지 않는다. 어느 사전이든 모든 낱말을 낱낱이 싣지 못한다. 모든 낱말을 싣지 못하는 사전이지만, 사전에 싣는 낱말만큼은 제대로 풀이해야 하고, 살뜰히 읽으며 말을 배우는 즐거움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말풀이가 엉터리라 해서 사전이 엉터리라 말할 수 없다. 짜임새는 훌륭한 사전이 있고, 엮음새는 빼어난 사전이 있다. 우리 나라에는 짜임새가 훌륭하거나 엮음새가 빼어난 사전조차 드물다. 어린이 국어사전 가운데에는 짜임새와 엮음새가 괜찮은 사전이 있다. 다만, 말풀이를 제대로 다룬 사전은 없다. 말풀이에 넣는 낱말을 옳으면서 바르게 가다듬은 사전 또한 없다.

 나는 이 때문에 슬프다. 말풀이가 제대로 된 사전이 없을 뿐 아니라, 말풀이에 넣는 낱말이 옳으면서 바른 사전이 없기 때문에 몹시 슬프다. (4344.3.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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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집 - 책들이 탄생한 매혹의 공간
프란체스카 프레몰리 드룰레 지음, 이세진 옮김, 에리카 레너드 사진 / 윌북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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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쓰는 사람은 왜 도시를 떠나는가
 [책읽기 삶읽기 40] 프란체스카 프레몰리 드룰레·에리카 레너드, 《작가의 집》



 20세기를 대표한다는 책을 쓴 스무 사람이 어떠한 집에서 살면서 글을 썼는가를 돌아본다는 책 《작가의 집》을 읽습니다. 저로서는 이 《작가의 집》에 실린 스무 사람이 ‘20세기를 대표하는 글쓰는 사람’이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이 가운데에는 노벨문학상을 탄 사람이 있고, 아주 널리 이름난 사람이 있으나, 이들을 놓고 20세기를 대표한다고 섣불리 말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어느 한 세기를 대표한다는 사람을 ‘인기투표’ 하듯이 뽑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온누리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책을 내놓아 다 다른 즐거움과 기쁨을 나누어 준 일을 돌아본다면, 이런 말은 참으로 부질없으며 덧없습니다. 헤르만 헤세나 어니스트 헤밍웨이나 버지니아 울프나 장 지오노 같은 사람들을 20세기를 대표하는 스무 사람에 넣을 수 있겠으나, 저로서는 어니스트 톰슨 시튼이라든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라든지 중 자오정 같은 사람을 넣고 싶습니다. 어쩌면, 《침묵의 숲》을 쓴 레이첼 카슨을 넣을 수도 있겠지요.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나 피에르 로티 같은 사람을 넣을 수도 있으나, 하이타니 겐지로나 미우라 아야코를 넣을 수도 있을 테며, 저는 한국사람이니까 리영희나 이오덕이나 이원수나 박경리나 권정생을 넣을 수 있을 테고요.

 《작가의 집》에 실린 스무 사람이란, 20세기를 대표한다기보다, 이 책을 쓴 프랑스사람이 좋아하는 글쟁이라고 여겨야 옳겠다고 봅니다. 더구나, 20세기를 대표한다는 사람은 온통 서양사람이며, 거의 다 서유럽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책을 쓴 사람 스스로 좋아하는 스무 사람인데다가 서유럽 둘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일컬어야 올바른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가만히 보면, 세계문학전집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문학을 살필 때에도 언제나 유럽문학이 한복판에 섭니다. 베트남문학이나 중국문학이나 필리핀문학이나 멕시코문학이나 칠레문학을 살피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우리도 어느새 이런 틀에 젖어듭니다. 세계문학이라 하면, 말 그대로 세계를 아우를 뿐 아니라 세계를 돌아보는 문학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황순원이나 조정래를 나라밖으로도 읽혀야 한다는 소리가 아니라, 수많은 나라와 겨레마다 아름다운 말꽃을 피우거나 일군 손길과 삶을 껴안을 때라야 비로소 세계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하다고 느낍니다.


.. 스웨덴의 모르바카 저택은 그녀(셀마 라게를뢰프)의 일가가 몇 대에 걸쳐 살면서 정을 붙인 곳이다. 그 땅에는 전통, 흥미로운 모험담, 겨우내 난롯가에서 도란도란 나누는 신기한 옛이야기가 풍부했다 … 장 지오노는 이 프로방스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마을에서 1895년에 똑똑한 무정부주의자이지만 고독했던 이탈리아계 구두장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  (134, 170쪽)


 다시금 생각하면, 《작가의 집》은 그저 “글을 쓰던 사람들이 살던 집”을 하나하나 찾아가서 살핀 다음 적바림한 책이라고만 말해야 옳습니다. 어느 한 세기를 대표한다든지 세계문학을 대표한다는 말은 알맞지 않아요. 글을 쓰고 책을 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작가의 집》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 ‘어떠한 마음과 뜻에 따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인가를 밝혀, 이러한 사람들을 좋아하는 까닭을 찬찬히 들려주면서, 이들 글쟁이 삶과 발자취를 톺아볼 때에 한결 알차며 훌륭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작가의 집》에 실린 스무 사람 삶을 돌아보면, 딱 한 사람을 빼놓고는 가난에 허덕이거나 배를 곯은 일이 없습니다. 딱 한 사람조차 술과 바람피우기에 빠져 돈을 흥청망청 써댔기 때문에 남의집살이를 하듯 떠돌며 살았지, 한 사람 한 사람 돌아보면 그리 어렵지 않은 살림이거나 꽤 넉넉한 살림을 누리면서 글을 쓴 사람들입니다.

 부자가 글을 쓰면 안 된다거나 밥 굶는 걱정 없이 글을 쓴다 해서 글이 어수룩하지 않습니다. 다만, 글로만이 아니라 사진으로도 “작가들이 살던 집”을 보여주는 책인 만큼, “작가라 하는 사람들이 살던 집이 너무 으리으리하거나 크”니까, 어쩐지 높직한 울타리가 서는 듯합니다. 글 좀 쓰고 살려면 이만 한 부잣집에서는 살아야 한다는 듯한 느낌이 짙습니다. 더욱이, 《작가의 집》에 나오는 사람들은 저마다 ‘널리 사랑받으며 많이 팔리는 책’이 생기면서 이렇게 많이 팔아 돈을 버는 책이 있을 때마다 집을 넓히거나 키웠다는 이야기가 자꾸 나옵니다.


.. 1980년대 말부터 유럽의 정세는 전반적으로 어두웠다.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지척에서 폭격을 당했다. 울프 부부는 수시로 폭격이 일어나고 공습경보가 빈번한 혼란스러운 도시 런던을 점점 더 멀리하게 되었다 … 1930년에 딸 알린을 데리고 정착한 부부에게 “서쪽으로 200미터 남짓 거리에 도시가 있는 언덕 비탈. 종려나무, 월계수, 살구나무, 포도나무가 어쩌면 오십 그루쯤. 모자만 한 크기의 연못과 샘”이 있는 그곳은 천국과 같았다 … 그는 파리를 싫어했고 문학계 암투들과는 거리를 두었다. 그는 언제나 마노스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  (161∼163, 174, 183쪽)


 저 또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생각합니다. 우리 식구들 깃든 시골집이 겨울에 덜 춥고 여름에 덜 더울 수 있도록 손질하자면 천만 원쯤 있어야 합니다. 저한테는 천만 원이란 꿈 같은 돈이며, 이만 한 목돈을 손에 쥐기란 몹시 어려우리라 느낍니다. 지난해부터 얻어 지내는 시골집도 집삯을 안 내고 거저로 고맙게 얻어 지내는 판에, 집 고칠 돈을 어디에서 얻겠습니까. 그런데, 저 또한 제가 쓴 책 가운데 어느 한 가지가 제법 팔려 한 해 사이에 다섯 쇄쯤 신나게 찍는다면 글삯으로 천만 원이 모일 수 있어요. 이렇게 글삯이 들어온다면 이 돈으로 우리 시골집을 요모조모 고치고 손질할 수 있을 테지요. 이런 꿈을 꿀 수밖에 없습니다. 나 혼자 지내는 집이 아니라, 아이와 옆지기가 함께 살아가는 집이니, 또 ‘글쓰는 사람 집’에 쌓인 숱한 책들이 비바람이나 햇볕이나 멧쥐한테 다치지 않도록 건사하자면, 아주 빼어난 집은 아니더라도(바랄 수도 없으나) 기름값이나 땔감 걱정을 덜 하면서 조용히 잘 지낼 집을 바랄밖에 없습니다.

 참말 작은 집 한 채라면, 스무 평 서른 평도 아닌 열 평 남짓 되는 멧골자락 작은 집에서 어른 둘이랑 아이 둘이랑 복닥이면서 지낼 수 있는 작은 집 한 채라면, 네 식구 먹을 푸성귀를 일굴 텃밭을 옆에 끼면서 그야말로 호젓하게 흙에 뿌리를 내리는 삶을 사랑하면서 글과 책을 함께 사랑할 만하리라 봅니다. 한 사람 몫으로 두 평씩, 마루 몫으로 네 평, 부엌 몫으로 두 평, 씻거나 빨래하는 몫으로 한 평이면 한솥밥 먹는 식구들 살림집으로 좋습니다. 뒷간은 집 바깥에 내어 똥오줌 거름을 모아 텃밭에 뿌릴 수 있도록 하면 됩니다.


.. 그(로렌스 더럴)는 이집트의 습한 무더위, 도시가 뿜어내는 심한 먼지를 싫어했다 … 두 사람(크누트 함순과 아내)은 북부의 스토게임에서 ‘노르웨이 흙을 일구며’ 살았다 ..  (266, 319쪽)


 19세기를 살던 톨스토이 님은 한 사람한테 땅이 얼마나 있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네, 한 사람 앞에 땅이 백 평만 되더라도 이 넓은 땅을 돌보자면 등허리가 휩니다. 천 평 이천 평이 된다면 뼈가 빠집니다. 오천 평 만 평이 된다면 일하는 식구가 커야 합니다. 재 너머 사래 긴 밭 언제 갈려 하느냐는 옛사람 말도 있습니다만, 넓은 땅을 한 사람이 어떻게 건사하겠습니까.

 넓은 땅도 한 사람이 건사하기 벅차지만, 많은 돈이나 높은 이름도 한 사람이 건사하기 힘듭니다. 은행계좌에 1억이나 10억이 쌓였다면, 아이고, 이 돈 무서워서 어찌 사는가요. 집이란 한솥밥 먹는 살붙이가 오순도순 복닥이며 살을 부빌 만한 넓이면 넉넉하고, 돈이란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쓰거나 나눌 만큼이면 즐겁습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면 되지만, 있으면 있는 대로 근심덩어리인 돈이라고 느낍니다.

 《작가의 집》에 나온 스무 사람이 “글을 쓰고 지내던 살림집”을 다시금 돌아봅니다. 스무 사람이 글을 쓰며 지내던 살림집은 하나같이 도시하고 멀리 떨어집니다. 도심지 한복판에서 지내며 글을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서양은 한국처럼 아파트가 널리 퍼지지 않기도 했지만, 수풀이 우거지고 멧짐승이나 들짐승이 마당을 오가는 시골자락 살림집에서 지내며 글을 썼다고 합니다. 자연을 노래하는 글을 썼든 안 썼든, 글을 쓰는 사람들 살림집은 한결같이 도시를 등집니다.

 문득 우리 나라를 떠올립니다. 우리 나라에서 글을 쓴다는 사람들은 으레 도시로 몰립니다. 더 큰 도시인 서울로 몰립니다. 작은 도시에 머물거나 시골자락에 뿌리내리며 글을 쓰는 사람도 제법 있습니다만, 훨씬 많은 글쟁이는 도시에 몰렸고, 이 가운데 서울 안쪽에 가장 많이 우글거립니다.

 신문기자이든 잡지기자이든 방송기자이든, 기자라는 이름을 내거는 이들 또한 으레 서울에 몰립니다. 책을 만드는 일꾼이라면 아주 마땅히 서울에만 있어야 하는 줄 생각합니다.

 서울에서 살아가니까 서울 이야기를 쓰고 서울 이야기를 듣거나 읽으며 서울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서울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서울 바깥 이야기는 잘 모르며 잘 모르니까 나누지 않는데다가, 나누지 않다 보니 살갗으로 못 느낄 뿐 아니라, 미국이나 일본이나 유럽 소식보다 멀디먼 소식처럼 여깁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스스로 뿌리내린 곳에서 살아가면서 생각합니다. 살아가는 보금자리 언저리에서 생각하며 말합니다. 살아가는 보금자리를 사랑하거나 아낄 수밖에 없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면서 4대강사업을 가로막자고 외칠 수 있을는지 모르나, 외침말은 그저 외침말이지, 내 몸부림이거나 내 움직임으로 이어지지 못합니다. 서울에서는 환경운동이나 환경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서울에서는 4대강사업 막는 일을 비롯해 참다운 진보나 올바른 개혁을 이루지 못합니다. 서울 같은 도시는, 스스로 흙을 일구어 먹을거리를 마련하는 평화로운 일거리와 삶자락이 아니라, 무기공장이나 자동차공장 같은 데에서라도 일해서 어찌 되든 돈을 얻어 돈으로 먹을거리를 장만하고 돈으로 살림집을 얻어 돈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얼거리이기 때문입니다. 삶이 아닌 돈이 한복판에 또아리를 트는 도시입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모르나, 20세기에 손꼽히는 글쟁이 스무 사람이 하나같이 도시하고는 멀찍이 떨어진 시골자락 살림집에 뿌리를 내리면서 글을 쓴 까닭을 알 만합니다. 돈이나 이름값이나 힘(권력)이 아니라, 사랑과 믿음과 나눔을 아끼는 넋을 글로 담고자 하는 사람들이 도시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4344.2.22.불.ㅎㄲㅅㄱ)


― 작가의 집 (프란체스카 프레몰리 드룰레 글,에리카 레너드 사진,이세진 옮김,윌북 펴냄,2009.11.10./14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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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왈 曰曰 - 하성란 산문집
하성란 지음 / 아우라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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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도심 학교를 새도심으로 옮기는 한국사람
 [책읽기 삶읽기 39] 하성란, 《왈왈》


 설을 맞이해서 아이를 데리고 여러 어르신을 만나뵈러 다닙니다. 집을 여러 날 비우고 돌아다닙니다. 집에서만 지낼 때에는 돈 쓸 일 없으면서 집일을 하느라 몹시 바쁩니다. 집일을 하느라 바쁘다지만, 정작 집안을 말끔히 치우거나 갈무리하지는 못합니다. 이 일 저 생각에 매여 이것 하고 저것 하면서 어수선합니다. 날마다 고단한 몸으로 잠들고, 새벽마다 다시금 기운을 내어 일어납니다.

 살림집을 떠나 여러 날 바깥에서 잠을 얻어 자고 밥을 얻어 먹습니다. 집안을 쓸고 닦는다든지, 밥을 차리고 치운다든지, 아이하고 놀아 주거나 아이 책을 읽힌다든지, 내 일을 하거나 내 책을 읽는다든지, 이런저런 일을 하나도 하지 않습니다. 모처럼 다른 사람이 해 주는 밥을 먹으며, 밥을 먹고 나서 치우지 않는데다가, 그야말로 방바닥에 얌전히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만 합니다.

 가만히 보면, 설이란 모든 일손을 쉬면서 어우러지는 때라 할 만합니다. 찬찬히 살피면, 설날은 내 일을 내려놓고 서로서로 얼크러지는 자리라 할 만합니다. 바쁜 일이건 느긋한 일이건 안달하지 않아도 좋은 때일 테지요.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복닥이지 않아도 기쁜 자리일 테지요.

 다만, 설이나 한가위에는 으레 일하는 사람만 일한다고 합니다. 일하는 사람만 더 일해야 하니 설이나 한가위를 못마땅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느 때에는 어떠한가요. 여느 때부터 일하는 사람만 일하지는 않는가요. 여느 때부터 함께 일하고 함께 놀며 함께 즐기고 함께 나누어 왔다면, 설이든 한가위이든 일하는 사람만 일할 까닭이 없습니다. 설이라 더 힘들고 한가위라 더 고단하지 않아요. 여느 때 여느 자리부터 서로서로 일손을 나눌 뿐 아니라, 다 함께 일손을 붙잡는 보람을 누려야 합니다. 여느 때 여느 자리에는 집일을 거들지 않다가 설에만 집일을 거들라 할 수 없습니다. 여느 때 여느 자리에서는 집일은 아랑곳하지 않다고 설이니까 집일을 돌보라 할 수 없어요.

 닥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언제나 하는 일을 으레 할 뿐입니다. 삼백예순나흘은 엉터리인데 꼭 하루만 제대로 구르도록 할 수 없습니다. 한글날에만 한글을 사랑한다거나, 예수님나신날에만 예수님을 거룩히 섬긴다거나, 광복절에만 제국주의 식민지살이를 돌아본다거나 할 수 없습니다. 늘 되새기는 우리 삶입니다. 노상 곱씹는 우리 나날이에요.


- 오늘 중3인 큰아이는 과학고를 탐방했다. 식물원처럼 멋진 학교 건물에 반해 ‘열공’해서 꼭 입학해야지 결심하려는 순간 전학년 성적이 전교 일이 등은 되어야 한다는 소리에 기가 팍 꺾인 참이다. (10쪽)
- 큰애는 보는 내내 ‘금잔디’가 된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걸 아는 이 ‘아줌마’에겐 남자보다 꽃이다. 눈이 즐거우면 그만이다. (16쪽)
- 아기를 키우면서 글을 쓰던 십여 년이 떠오른다. 아기는 꼭 마감을 코앞에 두었을 때 아팠다. (48쪽)


 소설쓰는 하성란 님 산문모음 《왈왈》을 읽습니다. 하성란 님은 당신이 살아온 결에 따라 글을 꾸준히 썼고, 이렇게 꾸준히 쓴 글이 모여 책 하나 태어납니다.

 하성란 님 산문모음 《왈왈》에 담긴 이야기는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따질 수 없습니다.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가를 수 없습니다. 괜찮다거나 어수룩하다거나 잴 수 없습니다. 읽을 만하다거나 읽을 만하지 않다거나 말할 수 없습니다. 그예 하성란 님 삶입니다.

 누군가는 아이들을 이름난 대학교에 보낼 마음으로 서울 강아랫마을로 살림집을 옮기려고 애씁니다. 누군가는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으로서도 더 돈을 굴리며 더 돈을 긁어모으려고 아파트 사고팔기를 합니다. 가까운 길이니 걸어서 오가는 사람이 있으나, 가까운 길이니까 자가용 타고 휙 다녀오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이 있으니 있을 때에 마음껏 쓰는 사람이 있고, 돈이 있기에 이때에 나보다 힘든 가난한 이웃이나 피붙이한테 주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날 이 땅에는 거의 모두라 할 만큼 어느 집에나 텔레비전을 모십니다. 집에서 가장 돋보이는 한복판에 텔레비전을 모시곤 합니다. 집에 텔레비전을 모시는 집에서는 으레 텔레비전을 켜고, 으레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이야기를 나누며, 으레 텔레비전 새소식에 귀를 기울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 텔레비전을 안 모시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아주 드물지만 없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금잔디’이니 무어니를 다루며 이야기꽃 피울 테지만, 누군가는 금잔디인지 은잔디인지 하나도 모르며 눈길조차 안 두곤 합니다. 정치가 어떻고 겨울아시아대회가 어떠하며 해적이 어떻다는 둥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많을 테지만, 정치이든 겨울아시아대회이든 해적이든 알아듣지 못할 사람은 어김없이 있습니다.

 옳다 그르다가 아닌 다 다른 사람들 다 다른 삶입니다.


- 어렴풋이 우리가 이사가던 풍경이 떠오른다. 젊은 아버지는 리어카를 끌고 젊은 엄마는 리어카를 밀며 쉬며 갔다 …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가정을 꾸리는 데 필요한 것은 그렇게 리어카 한 짐도 되지 않았다 ..  (34쪽)
- 무청이 무성한 데다가 꽃까지 피었다. 무꽃은 처음 보았다. 엄지 손톱만 한 꽃들이 동글동글 맺혀 있다. 대체 어떻게 해서 꽃까지 피울 수 있었을까. (47쪽)


 인천에서는 제물포고등학교를 송도로 옮기느니 마느니 하고 떠들썩합니다. 벌써 옮길 만한 학교는 일찌감치 옮겼는데, 이제 와서 제물포고등학교 한 곳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할 까닭은 없습니다. 옮기지 말아야 한다면, 제물포고등학교에 앞서 축현초·인천여고·대건고·박문초부터 따져야 하며, 이 학교들을 옛도심으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아니, 처음부터 이들 학교를 옮기지 말아야 했습니다. 새도심에 새 학교를 지었어야지, 옛도심에서 옛 학교를 파내는 일부터 글러먹었습니다. 새도심에만 사람이고 옛도심에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옛도심 사람들이 새도심 아파트로 옮긴다 하더라도 옛도심에서 죽 살아가는 사람이 있으며, 옛도심 오래된 내 보금자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 옛도심 작은집에서 가난하면서 아름다이 살림을 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이 아닌 사람을 헤아리고, 잇속이 아닌 사랑을 살폈다면, 처음부터 옛도심 학교는 옛도심 학교대로 알뜰살뜰 돌보면서 새도심에는 새도심에 걸맞게 새 학교를 지었어야 합니다.

 인천은 서울 강웃마을에서 서울 강아랫마을로 숱한 학교가 파 옮긴 일을 따라했습니다. 제물포고등학교도 옮기려면 얼마든지 옮길 노릇이요, 인일여고이든 인천여상이든 중앙여상이든 동산중·고이든 박문여고이든 신나게 옮길 일입니다. 학교 하나를 놓고 이러쿵저러쿵해 보았자 밑뿌리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학교 하나 옮기든 말든 그다지 대수롭지 않습니다. 대수로울 일이란, 우리가 우리 삶을 어떻게 일구느냐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알차며 아름답게 일군다면, 제물포고등학교 한 곳을 옮기더라도 옛도심과 새도심이 서로 슬기로우며 아름다울 수 있고,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형편없거나 엉망진창으로 내몬다면, 제물포고등학교 한 곳이 옛도심 자리에 튼튼히 뿌리를 내리더라도 우리 삶은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도시 물질문명을 누리며 살아가는 자리에서 돈이 얼마나 있어야 하는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하루하루 누구하고 이웃하며 누구하고 동무하는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도시에서 이루려는 꿈은 무엇이요, 도시에서 하려는 일과 놀이란 무엇인가를 먼저 헤아려야 합니다.

 우리가 걸어갈 앞날은 어떠한 길인지 곱씹어야 합니다. 개발을 해야 한다면 어떠한 개발을 어떠한 크기로 왜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몽땅 때려부수고 새로 짓는 개발인지, 살리거나 지키거나 가꿀 모습은 살리거나 지키거나 가꾸면서, 고치거나 보듬거나 다듬을 곳은 고치거나 보듬거나 다듬는 개발인지를 톺아보아야 합니다.

 아파트와 쇼핑센터만 우람하게 새로 지으려는 개발인지, 동네사람이 동네 발자취와 땀방울과 살림살이를 아끼면서 서로 돕고 어깨동무하는 터전을 일구려는 개발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아파트와 쇼핑센터를 짓는다면 이 아파트와 쇼핑센터에는 누가 들어오며 누가 즐기는 터전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개발을 하는 돈은 어디에서 나오며, 개발이익을 누가 거두고, 이 같은 개발 효과는 앞으로 언제까지 이어지며, 앞으로 서른 해 뒤에 똑같은 개발을 다시금 하려는지, 오래오래 동네를 아름다이 보살피려는 개발인지를 곰곰이 따져야 합니다. 제물포고등학교 한 곳이 옮긴다 해서 송도가 더 발돋움하지도 않으나, 제물포고등학교 한 곳이 옮긴다 해서 옛도심이 폭삭 주저앉지도 않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고, 나와 이웃이 어떻게 살아가며, 행정과 정치하는 동네 공무원이 동네를 어떻게 돌보도록 마음쓰느냐에 따라 사뭇 달라지는 삶이며 삶터입니다.


- 시골이 도시보다 변화가 적고 지루할 거란 예상은 보기 좋게 어긋났다. 하루하루가 변화무쌍했다. 밤이 되면 짙은 풀냄새가 차올랐다. 산 저쪽에서 울던 새가 다음날에는 산 이쪽에서 울었다. 아련히 먼 기억 속의 새소리였다. 빛을 좇아 모기장 틈으로 날아온 날벌레에 기겁한 아이가 비명을 질러댔다. (186쪽)
- 불쑥불쑥 앞을 가로막는 도로턱과 울퉁불퉁한 인도, 거기에다 상점에서 내놓은 물건들 때문에 지나치기도 쉽지 않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에서는 느리게 달리는 것도 빨리 달리는 것도 위험하다. 때때로 자전거를 메고 차도를 지나고 계단을 오르내려야 한다. 사대강 사업 중 하나에 둔치의 자전거도로 설치가 들어 있다. 왜 자전거도로를 강에서부터 시작하는 걸까. 자전거를 끌고 나가는 순간 문앞에서부터 문제에 부딪힌다. 자전거도로가 난 그 강까지 자전거로 갈 생각을 하면 막막해진다. (210쪽)


 하성란 님 산문모음 《왈왈》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도시에서만 살고, 또 도시 가운데 서울에서만 살며, 또 서울에서도 아파트에서만 사는데다가, 자가용 몰아 이곳저곳 빠르게 싱싱 오가는 하성란 님이 쓰는 글은 저하고는 걸맞지 않습니다. 도시에서 살던 때에도 골목동네에서 살았고, 시골마을로 식구들 모두 옮겨서 살아가며, 시골 가운데에서도 멧자락 깊은 데에 깃들고, 자가용은커녕 텔레비전도 없이, 자전거나 시골버스나 두 다리로만 다니는데다가, 꽤나 어수룩하지만 텃밭 하나 건사하는 삶으로 하성란 님 삶을 마주했을 때에는 퍽 따분합니다.

 나와 옆지기는 ‘으리으리한 건물’을 보면서 우리 아이를 학교에 넣을 생각이 없습니다. 학교가 학교다워야 아이를 학교에 넣습니다. 아이한테 ‘열공’을 시킬 마음이 없습니다. 오늘날 초·중·고등학교에서 말하는 열공이란 한낱 ‘시험점수 높게 나오도록 내몰기’일 뿐인데, 이런 열공을 시킨다면서 아이 머리와 마음과 가슴을 망가뜨릴 수 없어요. 신문 안 읽고(시골에서 신문을 본댔자 며칠 늦게 봅니다) 방송 안 보며 맛집·멋집 같은 데에는 찾아다니지도 않는 주제이기에, 하성란 님 글은 하성란 님 삶을 소롯이 적바림하면서 수수한 멋을 예쁘게 보듬는다고 느끼면서도, 우리 식구들 삶하고는 참 동떨어졌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하성란 님은 살림하고 아이 낳아 키운 어머니 마음으로도 글을 씁니다. 집살림과 아이돌보기에 조금 더 마음을 기울인 글은 저 또한 퍽 읽을 만하다고 느끼지만, 이런 글은 너무 적습니다. 더 수수하고 더 투박하며 더 못나고 훨씬 못생긴 여느 자리 여느 삶 이야기를 솔솔 풀어낸다면, 나로서는 《왈왈》이라는 책을 우리 옆지기나 우리 장모님한테도 선물해 주겠건만, 살짝 수수하려다가 수수한 멋하고는 멀어지고, 조금 투박한가 싶더니 깍쟁이 같은 서울내음이 짙게 배고 말아, 혼자 읽고 혼자 덮습니다.

 하성란 님은 하성란 님 삶을 꾸리기 때문에, 하성란 님한테는 하성란 님 오늘 하루가 아름답습니다. 저는 제 삶을 일구니까, 저한테는 제 오늘 하루가 기쁘며 고맙습니다. 컨테이너집과 비닐집 차가운 방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저녁에 잠들어야 하는 옆지기네 어르신하고 설날 막바지를 함께 보내면서 이렁저렁 생각합니다. 오늘날 한국땅에서 ‘가난하다’는 밑바닥 사람들 20% 살림돈이 자그마치 1억이 넘는답니다. 아래쪽 20%조차 1억이 넘는다니 꿈만 같은데, 이런 푼수라 한다면 우리 살림이나 옆지기네 어르신 살림이란 1%에 들거나 0.1%에 들지 않나 싶기도 하고, 이 나라에서 80∼90%는 1억 넘는 돈이나 집이나 자가용이나 재산을 가졌다는 소리입니다. 그러고 보면 자가용 한두 대 없는 집이 드뭅니다. 이 나라 60% 안팎은 아파트에서 살아간답니다. 어쩌면 벌써 70%를 웃돌는지 모르며, 앞으로는 아파트 사람들이 80%를 훌쩍 넘으리라 봅니다. 아니, 벌써 이와 같다 해야 옳을는지 모르지요.

 가난하다는 사람들도, 또 여느 자리 사람들도, 또 웬만한 사람들도 살림살이 눈높이가 ‘아파트 + 자가용’에다가 온갖 전기전자제품이랑 큰도시 살림살이인데, 하성란 님 같은 분들한테 어떠한 글을 쓰라고 섣불리 말할 수 없습니다. 하성란 님은 하성란 님 삶을 살포시 껴안으면서, 이 틀에서 사랑하고 믿는 고운 삶자락을 글꽃으로 여밀 수 있을 때에 아리땁다 할 수 있습니다. 이래저래 가난한 사람들은 읽을거리가 매우 적고, 가난한 사람들은 바쁘거나 고된 나머지 스스로 글을 쓰지 못하며, 가난한 사람들하고 손잡는 삶을 글로 담는 사람이나 일꾼 또한 참 없습니다. (4344.2.7.달.ㅎㄲㅅㄱ)


― 왈왈 (하성란 글,아우라 펴냄,2010.12.10/11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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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일기 - 절망의 수용소에서 쓴 웃음과 희망의 일기
조반니노 과레스키 지음, 윤소영 옮김 / 막내집게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사랑할 삶과 사랑받을 사람과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38] 조반니노 과레스키, 《비밀일기》



- 책이름 : 비밀일기
- 글 : 조반니노 과레스키
- 옮긴이 : 윤소영
- 펴낸곳 : 막내집게 (2010.12.11.)
- 책값 : 1만 원



 (1) 하루살이 이야기


 밤늦게까지 안 자던 아이가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납니다. 밤새 잠을 거의 못 자다가 새벽녘 일어나 주섬주섬 일하던 애 아버지는 그만 한숨부터 쉽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일찍 일어난 까닭이 있을 테지요. 아무리 늦게 잤달지라도, 오늘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가기로 했으니, 일찍 일어나야 하는 줄 아니까요. 그러면 어제는 좀 일찍 자든가 해야지,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면 아이는 고단하고 졸리니까 땡깡만 부립니다. 이런 날을 워낙 숱하게 겪다 보니, 일찍 일어난 아이를 바라보며 대견하다고 여기지 못합니다. 아이한테 옷을 입힌 다음 마주앉아서 조곤조곤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 주어 고맙지만, 네가 어제 그렇게 늦게 자고 오늘 아침에는 이토록 일찍 일어나면 제대로 놀 수 있느냐, 보나 마나 다른 때처럼 또 골 부리고 그럴 텐데, 어머니가 일어나고 아침 차려 먹고 이것저것 치운 다음 떠나야 하니, 이렇게 하자면 서너 시간은 더 있어야 하니, 너도 좀 그때까지는 더 잠을 잤다가 일어나서 얼른 밥 먹고 가자 …….

 조금 뒤 아이를 꼬옥 안고는 이부자리로 파고듭니다. 한동안 배 위에 올려놓다가는 옆으로 누여 팔베개를 해 줍니다. 이렇게 삼십 분쯤 있자니 아이는 스르르 잠듭니다.

 겨우 재웠구나 생각하며 일손을 붙잡으려 하지만, 애 아버지도 잠이 모자라 어질어질합니다. 이제 밥물 안치고 국이나 반찬을 해야 할 텐데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애 아버지도 벌렁 드러눕고 싶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벌렁 나자빠지고 싶습니다.


.. 우리는 버려진 것보다 더 나쁜 상황이 되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짐승이 되지는 않았다. 우리는 빈손으로 우리만의 문명을 만들어 나갔다 … 침묵이 흐른 뒤, 모두들 침대 속으로 들어간다. 한 사람 옆에 또 한 사람, 한 사람 위에 또 한 사람. 이민자의 집에 있는 칙칙한 선반에 쟁여진 물건들처럼, 모두들 그렇게 차곡차곡 침대로 들어간다 ..  (14, 106쪽)


 등허리가 아파 애 아버지도 살짝 누워 봅니다, 바닥이 따스해서 좋습니다. 눈을 감아 봅니다. 아, 느긋하고 좋습니다. 어느덧 살짝 잠이 들었다 싶더니 마음으로 빨래를 합니다. 살짝 잠이 든 채 꿈속에서 빨래를 합니다. 이제 막 빨래를 마치고 헹군다 할 즈음 눈을 도로 뜹니다. 그래, 빨래도 해야 하는데, 빨래감을 가져가서 할머니 댁에서 할까.

 어제부터 드디어 날이 조금 풀립니다. 한낮이 가까우면 앞마당과 집 둘레 멧자락이 두툼히 깔린 눈이 살살 녹는다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지난해 겨울에 얼어붙은 우리 집 물은 안 녹습니다. 더 따뜻해야 하고 더 포근해야 하며 더 오래 따사로운 햇볕을 받아야 합니다.

 멧자락 집에서 물을 못 쓰며 두 달을 살고 보니 일거리는 더 많고 설거지나 빨래를 할 때면 한결 고단합니다. 집안에 물꼭지가 있어 언제라도 물을 틀어 쓰는 삶이란 얼마나 수월한가 새삼 깨닫습니다. 물지게를 지며 물을 쓰던 옛사람 삶이란, 물 한 바가지 얼마나 알뜰히 건사할밖에 없는가 싶습니다.

 집에 물꼭지 없이 우물물을 길어야 물을 한결 알뜰히 여기거나 돌보지만은 않겠지요. 집에 물꼭지 있어도 얼마든지 물을 아끼며 살겠지요.

 가난하게 살아간대서 가난한 삶이 무엇인가를 잘 헤아리며 이웃사랑 삶사랑을 하지는 않겠지요. 돈이 많거나 넉넉하면서도 얼마든지 이웃사랑 삶사랑을 할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물꼭지를 언제나 마음껏 틀어 쓸 수 있는 사람들이 물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자가용 있는 분들이 자가용을 꼭 써야 할 때만 쓰고, 여느 때에는 두 다리나 자전거를 알뜰히 사랑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있으면서도 알뜰살뜰 꾸리는 살림인 분이 오늘날 얼마나 되나 알쏭달쏭합니다.


.. 독일 제국, 당신 내 주머니를 뒤지고 내 침대의 대팻밥을 들쑤시는데, 다 쓸데없는 짓이라오. 아무것도 못 찾을걸. 하지만 난 아주 중요한 비밀문서들을 숨겨 놨다오. 우리 집의 청사진, 내 과거의 수많은 영상들, 내 미래의 계획과 같은 것들 … 사람의 본질이란 그런 거라오. 바깥에서 명령을 내리는 거야 아주 쉽겠지만, 그 속에서는 영원하신 하느님께만 순종하는 법 … 오늘은 내 아들이 네 살이 되는 날이다. 나는 그 녀석에게서 내 어린 시절을 다시 보았지만, 아들과 떨어져 있는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56∼57, 88∼89쪽)


 첫째 아이가 좀 크면 집일을 나누어 맡을까 궁금합니다. 첫째 아이가 좀 크더라도 집일을 그닥 나누어 맡지 못하면서 둘째 아이 또한 이래저래 마음쓰며 돌볼 일만 잔뜩 늘어날는지 궁금합니다.

 아마, 아이 없이 살아가더라도, 아이 여럿 키우는 어머니 삶을 올바로 읽는 사람은 어김없이 있으리라 봅니다. 혼인을 않고 살아가더라도,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나날을 제대로 살피는 사람은 틀림없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책을 많이 읽었대서 책을 잘 안다 할 수 없습니다. 교사 노릇 오래 했대서 학생 삶을 잘 헤아린다 할 수 없습니다. 여행을 두루 다녔대서 온누리 골골샅샅 깊디깊이 훑는달 수 없습니다.

 스스로 살아가야 아는 삶입니다. 스스로 읽어야 아는 책입니다. 스스로 다녀야 아는 마실입니다.

 허리가 쑤시고 결리며 저리니까 바야흐로 집일이란 무엇인가를 뼈와 살로 받아들입니다. 집물을 못 쓰고 다른 집에서 물을 길어다 쓰니까 손가락이 노상 꽁꽁 얼어붙어 콕콕 쏘면서 물이란 어떠한가를 몸과 마음과 발바닥으로 맞아들입니다.

 고단하면서 졸리며 힘든 나날을 날마다 치르면서, 이런 나날이면서 손에 쥐어들 책이란 어떠한 책인가 하고 헤아립니다. 나부터 글을 쓰는 사람이기에, 나 같은 집살림 도맡는 사람이 졸리며 고단한데다가 힘든 몸으로 자꾸 감기는 눈을 비비며 읽을 만한 글을 쓰지 못한다면, 이런 글이 실린 책을 책으로 여길 만하겠느냐고 생각합니다. 나부터 사진을 찍는 사람인 만큼, 나처럼 집살림 아이키우기 도맡을 사람이 바빠맞은 하루하루 겨우 말미를 내어들여다보며 가슴속에 아름다움이 꽃피우도록 할 만한 사진일 찍지 못한다면, 이런 사진도 사진이랍시고 찍은 셈이겠느냐고 돌아봅니다.

 하루살이로 살며 하루살이로 읽는 책이고 사진입니다. 어쩔 수 없이 하루살이처럼 살아가니 하루살이로 쓰는 글이며 찍는 사진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랑 붙어 지내며 아이가 웃고 울며 떠들고 조용한 온갖 모습을 지식 아닌 삶으로 곰삭입니다. 아이 말씨 말투 말결을 살며시 되뇌고, 아이 몸짓 눈짓 손짓을 가만히 되짚습니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아이 삶입니다. 어제 새롭고 오늘 새로운 아이 모습입니다. 늘 같을 수 없는 나날이며, 늘 다른 나날이기에 이렇게나 고단하고 지치면서도 용케 아침이면 다시 눈을 뜨며 새날을 맞이하는구나 싶습니다.


.. 자식들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금과옥조로 여겼다. 그리하여 그들은―안전한 철조망 안에서― 아버지 시대 젊은이들의 지혜를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담배도 피우지 않고, 춤도 추지 않고, 저녁에 외출하지도 않고, 극장에서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고, 불량식품을 사먹지도 않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을 하지 않는다. 아버지, 하지만 내가 집으로 돌아간다면요 …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전쟁의 끝이 초를 다투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초시계를 들고 기다린다. 하지만 1분이 지나고, 2분·3분·4분·5분이 지나도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  (113, 148쪽)


 내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물려받은 사람이, 나중에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아 키울 때에 사랑을 물려줍니다. 내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물려받지 못한 사람은, 나중에 어른이 되면 사랑을 물려주기 어렵지만, 마음으로 사랑을 그리거나 바라거나 기린다면, 스스로 사랑씨를 틔워 차츰차츰 사랑꽃을 맺습니다. 스스럼없이 묻어나는 사랑을 물려줄 수 있고, 어렵디어렵게 피워낸 사랑을 물려줄 수 있어요.

 어떤 사랑이 우리 아이한테 더 낫거나 좋거나 기쁠 사랑인지는 모릅니다. 그저 저는 제 나름대로 사랑을 물려줍니다. 고운 옆지기는 고운 옆지기대로 아이한테 사랑을 물려줄 테고, 어수룩하게 집살림 도맡으며 해롱해롱거리는 하루살이 아버지는 해롱해롱 하루살이 아버지대로 사랑을 물려줍니다.

 아이가 말을 안 듣고 제멋대로 군다며 삐지거나 입을 샐쭉거리는 아버지는, 이런 아버지대로 어영부영 어설피 어버이 노릇 한답시고 바둥거리면서, 이렁저렁 사랑을 물려줍니다.

 깊어 가는 저녁나절 아이는 잠들지 않다가 갑자기 “엄마 똥 눌게.” 하면서 변기에 앉아 끙끙 하면서 똥을 뿌직뿌직 누고는 “똥 눴어. 오줌 눴어.” 하기에 밑을 종이로 한 번 닦고 영차 아이를 안아 물로 다시금 닦았더니, 몇 분 지나지 않아 또 똥 눈다면서 변기에 앉아 다시금 똥을 뿌직부직 누기에 종이로 거듭 닦고 어영차 아이를 또 안아 물로 다시 닦습니다. 아이 밑을 닦으면서 아이가 속이 답답해 똥을 누고 싶어 잠을 안 잤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갓난쟁이 아이였다면 아이는 그예 곯아떨어진 채 기저귀나 바지에 똥을 부직부직 누었겠지요. 아버지는 똥바지와 똥기저귀를 빨면서 아이가 이토록 힘들었구나 생각하다가는, 아이가 크려면 아직 한참 멀었는데 더 귀여워 하며 예쁘게 받아들여 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뉘우칩니다.

 애 아버지는 조용히 비손합니다. 우리한테 돈이 넉넉하다면 넉넉한 돈으로 무언가 다른 일을 할는지 모르며, 우리 옆지기가 몸·마음이 안 아픈 사람이라면 집일을 많이 나누어 맡아 주면서 애 아버지도 한 시름 덜는지 모르지만, 우리 살림은 쪼들리고 우리 옆지기는 아파 하기에, 애 아버지는 더욱 힘들며 슬프게 살아갈밖에 없지만, 더욱 힘들며 슬프게 살아갈밖에 없으니, 더 몸을 쓰고 더 마음을 쏟으면서 하루하루 집과 식구와 일과 놀이를 건사하는구나, 하고 비손합니다. 이제는 밥을 안쳐야겠습니다.


 (2) 전쟁 겪기·전쟁 읽기


 아이한테 밥을 먹이는 틈틈이, 아이를 재우고서 옆에 나란히 누워 조금씩, 밥물을 안치고 국을 끓이는 사이사이, 아이가 혼자 예쁘디예쁘게 책을 펼쳐 읽으면 이 옆에 마주앉아 얼마쯤 펼치며 읽은 《비밀일기》를 덮습니다. 나중에 아이가 많이 커서 열 몇 살 스물 몇 살이 되면 달라질 테지만, 온 눈길과 손길과 마음길을 받으며 자라야 하는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동안에는, 책 하나 차근차근 차분히 읽지 못합니다. 읽다가 끊어야 하고, 읽다 끊겼기에 다른 책을 뒤적거리고, 다른 책도 읽다 끊어지니 또 다른 책을 읽다 끊고 하면서, 여러 가지 책을 이래저래 뒤죽박죽 섞어 읽습니다.

 바야흐로 첫 줄부터 끝 줄까지 읽고 나면 어딘가 허전합니다. 다 읽었으면서 어쩐지 찜찜합니다. 잠든 아이 옆에 앉아서 책을 다시 펼칩니다. 밑줄을 그으며 읽은 대목을 또 읽어 봅니다. 이 책을 처음 손에 쥐어 읽던 느낌과 어느덧 다 읽어내고 찬찬히 되짚는 느낌은 어떠한가 헤아립니다.

 바로 내가 읽은 내 책인데, 언제부터 이 책을 손에 쥐었는지 떠올리기 힘듭니다. 줄거리는 되새길 수 없고, 그때그때 되새기며 끄적끄적 했던 글월을 되새깁니다.

 아이를 낳아 함께 살아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러나 하고 한 해 두 해 거슬러 짚습니다. 고작 서너 해 앞선 때 일이라든지, 너덧 해 앞선 때 일이 너무 아련합니다. 아득하며 까마득합니다. 사람들이란 이렇게 되나, 여느 어머님들 삶이란 이러했으려나, 내 앞날은 또 어떻게 펼쳐지고 몇 해쯤 뒤 오늘 하루를 돌아보면 어떠하려나 두렵습니다.


.. 사랑하는 아들아, 너 역시 어느 날 갑자기 우편함에서 어느 막사로 출두하라는 소집영장을 발견할지도 모르겠구나. 그곳에 가면 네 이웃을 해치고, 너도 그런 일을 당하게 만드는 장비들을 받게 될 거야 … 그들은 전쟁도 그렇게 한다. 냄비에 인간을 쏟아붓고, 화약 가루와 군사 과학에서 추출한 양념을 섞은 다음, 규율이라는 뚜껑을 덮고, 비타협이라는 밸브를 잠근다. 그러고는 불을 켜고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휘파람 소리를 기다린다 … 배고픔 때문에 고통스러운 나날이 어느덧 18개월째다. 하지만 그 감각은 날마다 새롭다 ..  (18, 57, 172쪽)


 《비밀일기》는 ‘수용소 일기’입니다. 수용소에서 독일군 포로로 지내던 삶을 적바림한 ‘포로 일기’입니다. 전쟁 포로란, 독일이 일으켰던 싸움 때문이든 독일에 맞서 나라를 지키든 겨레를 지키든 마을을 지키든 집식구를 지키든 하려며 총을 들고 일어서다가 붙잡힌 ‘전쟁 일기’입니다.

 총과 포탄과 비행기가 날거나 춤추는 싸움터에서 언제 죽었는지 모르도록 총이나 폭탄에 맞아 죽은 사람은 아무런 ‘전쟁 일기’를 남기지 못합니다. 훈장을 받은 사람은 ‘훈장 일기’를 남길 테고, 싸움에서 살아난 사람은 ‘생존 일기’를 남길 테며, 조반니노 과레스키처럼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전쟁포로 수용소 일기’를 남길 테지요.

 그런데, 조반니노 과레스키 님이 새삼 지난일을 떠올리며 적바림했던 이 《비밀일기》란 참으로 조반니노 과레스키 님이 겪은 일이었을까요. 한낱 꿈은 아니었을까요. 떠올리려 애쓰지만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 까마득한 일은 아니었을까요.


.. 전쟁이 끝나면, 어떤 이들은 군복 가슴에 자랑스럽게 딸랑거리는 십자가 훈장을 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들이 죽어 있던 날들에 대한 보답으로, 해진 군복에 연필로 표시한 초라한 십자가만을 달게 되겠지 … 30분 전만 해도 우물가에서 세수하고 있던 사람이 지금은 죽어 있다니 … 비는 모래 위의 핏자국을 깨끗이 씻어내렸다 … 아르투르가 나에게 말했다. “복수는 야만적이고 비열한 짓이야. 내가 죽는다 해도 누가 복수해 줄 필요 없어. 난 단지 죽지 않기를 바라는 거야.” ..  (65, 115, 117, 200쪽)


 전쟁을 치러 살아남은 사람들만 전쟁을 떠올립니다. 전쟁을 치러 죽은 사람은 전쟁은커녕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합니다. 그냥 잿더미가 되거나 흙으로 돌아갑니다.

 전쟁통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글을 쓰고 일기를 남깁니다. 전쟁을 겪었거나 전쟁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 ‘전쟁 일기’나 ‘포로 일기’나 ‘수용소 일기’나 ‘훈장 일기’를 읽습니다.

 새삼스레 궁금합니다. 우리 겨레 우리 나라 우리 터 사람들은 이 땅에서 벌어졌던 숱한 전쟁을 어떻게 글로 남기고 어떠한 느낌으로 읽으려나요. 나라를 지키자면 전쟁이고 뭐고 힘차게 일어서야 하며, 적군은 깡그리 죽여 넘어뜨려야 한다는 넋으로 읽으려나요.


.. 오늘 아침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동쪽 철조망 앞에 있는 밭이 초록빛으로 뒤덮였다. 보리가 팬 것이다. 차갑고 황량하기만 한, 햇살도 없는 이런 하늘 아래서 씨앗이 열매를 맺는 기적이 일어나다니? … 막사 문 앞에서 돌멩이 하나를 주웠다. 그걸로 돌멩이 차기 놀이를 하면서 수용소를 한 바퀴 돌았다 ..  (89, 137쪽)


 누가 일으키는 전쟁이요, 누가 죽는 전쟁이며, 누구를 죽이는 전쟁일까요. 전쟁을 일으킨 이들은 무엇을 얻고, 전쟁을 막으려는 이들은 무엇을 지키려 하며, 전쟁통에는 누가 다치고 누가 살며 누가 아프고 누가 히히호호 웃는가요.

 숨길 까닭 하나 없는 비밀일기인 《비밀일기》입니다. 감추어야 할 대목 하나 없는 비밀일기인 《비밀일기》입니다.

 무엇을 숨겨야 하고, 어떤 이야기를 감추어야 하나요. 무슨 이야기는 꽁꽁 묻어야 하고, 어떤 이야기를 꽉 틀어쥐어야 하는가요.

 우리 삶이란 얼마나 아름다우며, 우리 이웃이란 어느 만큼 사랑스러운가요. 전쟁을 일으키는 권력자도 학교를 다녔을 테고, 사랑스러운 어버이가 사랑스러운 손길로 키웠겠지요. 전쟁통에 끌려나가 총칼을 들고 영문도 모를 누군가를 나쁜 놈으로 삼아 죽이고 짓밟아야 하는 맨 밑바닥 땅개 같은 군인들도 사랑스러운 어버이한테서 목숨을 선물받아 사랑스러운 어린 나날을 거쳐 사랑스러운 젊은이가 되었겠지요.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읽어야 하고, 무슨 책을 가까이해야 하며, 무슨 지식을 쌓아야 할까요. 우리는 누구를 사랑해야 하며, 누구를 미워해야 하고, 누구하고 등돌려야 하나요. 우리는 어디에서 살아야 하며, 우리 삶은 어떻게 꾸려야 하고, 우리 보금자리는 어떠한 모습이면 아름다울까요.

 조반니노 과레스키 님은 흙으로 돌아간 지 마흔 해가 훌쩍 넘었고, 《비밀일기》는 처음 태어난 지 예순 해를 훌쩍 넘긴 어느 날 한국땅에서 조용히 태어났습니다. 밥물이 끓습니다. 슬슬 아이를 깨워 오줌을 누이고 밥을 먹여야겠습니다. 아이고, 아이를 깨우려고 보니 아이는 그새 이불에 오줌을 흥건히 누었습니다. (4344.2.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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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공화국 - 프랑스 지리학자가 본 한국의 아파트
발레리 줄레조 지음, 길혜연 옮김 / 후마니타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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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람은 한국을 읽지 않는다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38] 발레리 줄레조, 《아파트 공화국》



- 책이름 : 아파트 공화국
- 글 : 발레리 줄레조
- 옮긴이 : 길혜연
- 펴낸곳 : 후마니타스 (2007.2.1.)
- 책값 : 15000원


 (1) 아파트·골목집·살림집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그리 잘 쓴 책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프랑스 학자가 한국 서울땅 아파트 얼거리를 살피며 쓴 ‘논문’이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살던 사람이 한국에서도 서울땅 아파트 얼거리를 돌아보며 ‘한국 사회 읽기’를 하고자 쓴 논문이지, ‘한국사람하고 한국 사회 읽기 함께하기’를 하고자 쓴 책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책 《아파트 공화국》을 ‘프랑스에서 한국 읽기’를 헤아리며 읽어 본다면 퍽 잘 썼다고 여길 만합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아파트가 좋으냐 나쁘냐’라는 금긋기가 아니라 ‘한국사람한테 아파트란 무엇이요, 한국 정부와 권력자와 재벌 기업한테 아파트란 무엇인가’를 밝히기 때문입니다.


.. 2000년 현재 1960년 이전에 지어진 도시 주택은 5퍼센트 이하에 불과하다. 한국전쟁 이전에 지어진 가옥은 극히 드물다. 간신히 3퍼센트 정도 된다 … 1960년에 존재하던 서울의 문화재 중 2/3 이상이 1990년 현재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새로운 주택들이 들어섰다 … 아파트와 그 동네가 ‘깨끗하다’는 말은 ‘더럽다’는 말과 상반되기보다는 오래되어서 낡고 값어치가 떨어졌다는 의미와 상반되는 것이다 ..  (17, 182쪽)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책이 나오기 앞서까지, 한국땅 지식인이나 건축가 가운데 아파트 문제를 찬찬히 다룬 적이란 거의 없다고 합니다. 낱권책으로는 거의 나온 적이 없는데, 대학교에서 논문으로 누군가 쓴 적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알 길이 없으니까요.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책이 나온 지 어느덧 네 해째 지납니다. 그러나, 네 해째 지나더라도 그닥 달라지는 구석이 없습니다. 2009년에 《아파트에 미치다》라는 책이 한 번 나왔으나, 이 책은 ‘아파트 겉모습 훑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아파트 속모습 엿보기’라든지 ‘아파트 삶 들여다보기’라든지 ‘아파트 사람들 만나기’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이루지 않습니다. 2006년에 《아파트의 문화사》라는 책이 하나 나왔는데, 이 책은 ‘아파트 = 이제는 한국사람한테 빼도 박도 못할 문화’라는 틀을 먼저 세운 다음 썼습니다. 한국사람이 아파트에서 거의 모두 산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아파트에서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 아직 퍽 많은데, 너무 섣불리 ‘끝마무리를 틀에 박은 나머지’ 기울어짐 없는 차분한 눈썰미를 엿보기 힘듭니다. 2009년에 나온 《대한민국 아파트 발굴사》 같은 책은 책이름 그대로 ‘첫 아파트 발굴, 이 가운데 서울 아파트’에 눈길을 맞추면서, ‘오래된 아파트에 살던 사람 추억 이야기’ 같은 틀에서 헤매고 맙니다. 《대한민국 아파트 발굴사》는 ‘골목길 = 옛 추억’이라 여기는 흔하디흔한 얼거리하고 똑같습니다. 아파트가 ‘값싸고 목 좋아진’ 땅을 차지하려고 골목동네를 마구 때려부수며 밀고 들어오면서 골목길이 많이 사라졌으나, 아직도 ‘아파트 재개발을 노리는 골목동네’는 무척 많이 남았습니다. 이 책 또한 처음부터 ‘아파트는 꿈조차 꾸지 못한 사람들(그러니까 ‘서민’이라는 사람들이든 ‘하층계급’이라는 사람들이든)’은 싹 도려낸 채 아파트를 바라보고 맙니다.

 생각해 보면, 한국 지식인들이 한국땅 아파트를 차분하게 돌아보기는 어렵습니다. 한국에서 지식인 자리에 올라서거나 대학교수가 되거나 건축가가 된 사람들치고, 아파트에서 나고 자라지 않은 사람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좀 있는 사람이라면 아파트 아닌 골목집이나 시골집에서 나고 자랐을 수 있으나, 이분들이 뜻을 이루며 돈을 번 뒤로는 한결같이 아파트로 삶터를 옮깁니다. 아파트에 안 살면서 아파트를 살피며 연구하거나 다루는 지식인이나 건축가가 있기나 할는지요.

 ‘아파트맨(아파트사람이 아닌 아파트맨입니다. 아파트를 재거나 따지는 사람은 ‘남자 여자’ 골고루가 아니라 거의 ‘남자’들뿐이니까요. 게다가 아파트를 설계하고 건축하며 사고파는 사람 또한 죄다 남자라 할 만합니다)’은 아파트사람한테 눈길을 맞추어 아파트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제, 한국땅에서 아파트는 50%가 넘는 살림집, 이른바 ‘과반수 살림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파트가 과반수 살림집이 되기 앞서까지는 아파트 이야기를 할 때에 눈치를 볼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과반수 넘는 사람’은 아파트에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파트 가운데에는 퍽 값싸며 작은 아파트도 제법 남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잣대로 보자면 퍽 값싸며 작은’ 아파트이지, 이 작으며 값싸다는 아파트가 처음 설 때를 돌아본다면 조금도 값싸지 않고 하나도 작지 않은 살림집이었습니다. 오늘날 무슨무슨 팰리스나 어떤저떤 샵 같은 아파트하고 따지니 더없이 값싸거나 작아 보일 뿐입니다.

 제아무리 작고 값싸다는 아파트라 할지라도, 여느 골목동네 사람들한테는 너무 크며 너무 비싼 집입니다. 달삯 5만 원이나 10만 원을 놓고도 손을 바르르 떠는 여느 골목동네 사람들한테 한 달 관리비가 아무리 싸서 5만∼10만 원쯤 된다는 작은 아파트일지라도 엄두를 낼 수 없을 뿐더러, 작다는 아파트 한 채를 사거나 얻자 하더라도 이런 집에 바칠 목돈을 모을 수조차 없습니다.


.. 개인주택이 아파트로 바뀌면서 한옥 마당과 고불고불한 골목길은 콘크리트와 포장된 주차장·도로나 놀이터·테니스장 같은 공동 시설로 변모했다 … 시소와 미끄럼틀 옆에 대형 미키마우스가 빈둥거리는 유치원 안마당은 디즈니랜드를 옮겨 놓은 듯하다. 놀이터에서 좀 떨어진 곳에는 노란 닭과 분홍색 토끼들이 용수철 끝에 매달려 유치원이 끝나고 몰려드는 아이들을 맞이한다. 이렇듯 화려한 외장과 장식 속에서 아파트단지 내 규격화된 생활양식은 은폐되고 있었다 ..  (25, 74쪽)


 골목동네 살림집 가운데에도 돈있고 이름있으며 힘있는 사람 살림집이 있습니다. 돈과 이름과 힘이 있는 사람들은 아파트에 살든 여느 주택에 살든 홀가분합니다. 그저 어디이든 살고 싶은 데에 마음대로 살 수 있어요. 어느 하나 모자라지 않으나, 그저 ‘취향’ 때문에 골목집에서 살 뿐입니다. 이러한 ‘있는 사람’ 골목집에는 으레 마당이 널따랗게 있고, 마당가에는 꽃밭과 나무가 자라며, 2층이나 3층이 올라서고, 차를 대는 자리를 한둘쯤 마련합니다. 밥어미나 운전기사가 깃들 작은 곁방으로 드나드는 작은 문이 높다란 담벼락 한쪽에 조그맣게 붙기도 합니다.

 ‘없는 사람’ 골목집은 반듯하지 않은 골목을 따라 왼편과 오른편으로 죽 이어집니다. 지붕이 모두 낮고, 높이도 한결같이 낮습니다. 멀리서 보면 햇볕 한 줌 제대로 들기 어렵다 싶지만, 골목집치고 햇볕이 안 드는 집은 없습니다. 서울처럼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 어쩔 수 없이 땅밑을 파고 사람들을 억지로 쑤셔넣는 곳에서나 햇볕 한 줌 못 들지, 서울을 뺀 다른 도시 골목집들은 왼편 집이나 오른편 집이나 햇볕이 골고루 스며듭니다. 골목집 사람들끼리 서로 자그맣게 살림을 꾸리면서 아침이면 아침, 낮이면 낮, 저녁이면 저녁, 이렇게 햇볕을 돌아가면서 받도록 자리를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골목동네로 사진찍기 하러 나오는 이들은 ‘골목집에 햇볕이 골고루 돌아가며 내리쬐는 때’를 잘 모르거나 처음부터 생각을 않고 찾아나서기 마련이라, 골목길 사진을 찍을 때에 노상 어둡거나 퀴퀴하거나 빛바랜 느낌이 드는데요, 골목을 사진으로 찍으려 하면서 골목을 모를 뿐 아니라 알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골목동네 사람들 삶자락을 글로 담아 학문을 하든 사진으로 찍어 예술을 하든, 막상 골목동네 사람(주민)으로 살지 않으면서 학문을 하거나 예술을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아파트는? 아파트를 글로 담아 학문을 하는 사람은 어떠할까요?

 이제는 아파트를 다루는 사람들은 거의 다, 아니 모두 다라 할 만큼 아파트사람, ‘아파트맨’입니다. 한편, 예술을 할 생각으로 아파트를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 한국의 경제 발전은 엄밀히 말해 ‘기적’이 아니라 1960년대 성인 계층의 고된 노동의 결과이자 그들의 희생에 바탕한 것이었다 … 이름이야 어찌 되었든 새로 지어진 아파트단지들은 시멘트에서 거실의 가구·문틀·비디오 경비 시스템·냉장고와 비디오 등,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두 재벌 기업의 제품이다. 그리하여 현대나 삼성의 마크가 찍힌 아파트단지들은 점점 재벌기업의 대형 광고판처럼 보이게 되었다 ..  (100∼101, 103쪽)


 누구나 살아가는 대로 삶터를 바라보고 사람을 사귀며 사랑을 나눕니다. 살아가는 틀을 벗어나 삶터를 바라보지 못합니다. 내 살아가는 하루하루에 걸맞게 사람을 사귈 뿐입니다. 내 삶에 따라 사랑을 합니다.

 골목동네 젊은이가 사랑을 속삭일 때에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자유로를 싱싱 달리겠습니까. 골목동네 젊은이가 ‘잠자는 데에 10만 원이 웃도는’ 호텔방에서 사랑놀이를 나누겠습니까.

 프랑스사람 발레리 줄레조 님은 ‘한국땅 아파트사람(또는 아파트맨)’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한국땅 골목집사람’도 아닙니다. 그저 ‘프랑스사람’입니다. 이분이 프랑스에서 여느 삶자락에서 살아가는지, 좀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지 퍽 ‘없는 사람’으로 살아왔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한국땅 아파트를 말할 때에 아파트 권력에 얽매이지 않으며, 그렇다고 아파트 추억에 사로잡히지 않는데다가, 골목동네 추억에도 말려들지 않습니다.

 이러면서 무디거나 무뚝뚝하게 한국땅 삶자락을 훑지 않습니다. 아주 따사롭게 손길을 내밀지도 않아요. 학문을 밝히고자 논문으로 쓴 《아파트 공화국》입니다. 살갑거나 포근한 읽을거리(삶이야기)로 쓴 책은 아닌 《아파트 공화국》입니다.

 이리하여, 한국에서 아파트가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두루 퍼지는 흐름이라든지, 이 아파트와 얽힌 한국사람들 삶자락을 차분하게 들려줍니다. 한국땅에서 아파트는 어떠한 빛깔이자 모습인지를 고즈넉히 보여줍니다. ‘손가락질’이나 ‘비웃음’이나 ‘씁쓸함’이나 ‘슬픔’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또 이 가운데 서울에서, ‘아파트 = 한국 사회 노동자 희생으로 이루어진 경제 발전을 발판으로 재벌기업 상품시장으로 이루어진 살림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2) 책읽기·삶읽기


 내 이웃들이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책을 읽겠다 할 때에는 이 책을 옳게 잘 읽어 주면 좋겠습니다. 줄거리를 섣불리 왼다든지, 글쓴이 생각이 무엇인가를 서둘러 파헤치려 한다든지 안 하면 좋겠습니다.

 《아파트 공화국》이란, 말 그대로 한국이라는 나라는 ‘민주주의 공화국’이 아니라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소리입니다.


.. 잠실처럼 평수가 작은 서민 아파트라 할지라도 대부분 한국의 아파트는 중간계급 이상의 주거지라는 특성을 갖는다 … 매매를 기본 원칙으로 한 주택정책이 공식화된 것은 1957년이었다. 이 원칙은 주택의 소유는 개인적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 기본 골자로 했다. 따라서 최하위 계층을 포함해 누구든 자신 소유의 주택을 손에 넣으려면 그만한 재산을 동원할 수 있기까지 상당한 물질적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식이 전제되어 있다 … ‘아파트는 현대적이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아파트의 본질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 상황에 대한 결정론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아파트 이외에 다른 선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따라서 저층 단독주택의 대안을 논쟁에서 배제시킨다 ..  (69, 99, 178쪽)


 사람들이 아파트에서 많이 살아가니까 ‘아파트 공화국’이 아닙니다. 한국땅 화폐경제가 ‘아파트’를 한복판에 세워 놓고 이루어지기 때문에 ‘아파트 공화국’입니다.

 진보 빛깔은 아니지만 진보라고 일컫는 신문 〈한겨레〉조차 ‘아파트 투기’와 ‘아파트 재개발’과 ‘아파트 광고’를 기사로 날마다 다룹니다.

 스스로 진보라 말하려면, 또 스스로 진보로 살아가자면 아파트를 떠나야 합니다. 한국에서 아파트가 50%뿐 아니라 60∼70%는 되고, 머잖아 80∼90%까지 될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아파트에서 살지 말라 하느냐 하면서 따지고 싶더라도, 진보라는 믿음을 지키고 싶다면 아파트를 버리든 아파트에서 떠나든 해야 합니다.

 진보이기 때문에 아파트를 떠날밖에 없습니다. 아파트에서 죽치고 살아가면서 외치는 진보는 거짓입니다. 프랑스사람 발레리 줄레조 님이 《아파트 공화국》에서 밝히듯, ‘아파트 = 돈굴리기를 하는 살림집’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막상 ‘진보를 이루려 할 때에 내 이웃으로 삼아야 할 사람’하고 너무 동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진보는 부자하고도 어깨동무를 하면서 이루어야 합니다. 진보는 가난뱅이하고도 손을 맞잡으면서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진보를 밝히거나 외치는 사람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하고 손을 맞잡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요. 가난한 사람들 골목동네에서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일터를 오가는 사람은 몇이나 있는지요.

 골목동네 여느 일꾼들은 이 추운 겨울에도 장갑을 두툼하게 끼고는 짐자전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시골 읍내나 면내 할아버지들도 두툼하게 낀 장갑으로 엉금엉금 달리면서 볼일을 보고 논밭을 둘러봅니다.

 누군가는 까만 빛깔 큰 자가용을 몰면서도 ‘아름다운 진보’나 ‘훌륭한 진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와 같은 진보도 알차게 이루어 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이웃하고 벗삼는 진보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가난하게 두 다리로 걷는 진보, 가난하게 자전거를 타는 진보도 있어야 하겠지요.

 집에서 살림하는 진보도 있어야 합니다. 어린이집 시설과 무상급식에 목매다는 진보도 있어야 하지만, 집에서 아이를 도맡아 돌보는 진보도 있어야 합니다. 어린이집 시설은 틀림없이 빈틈없게 갖추어야 하나, 나 스스로 사람됨과 어버이됨을 알뜰살뜰 건사해야 합니다.

 잘 생각해야 합니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어버이’ 사랑은 어린이집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어버이는 아이하고 더 오래 더 자주 더 깊이 살을 부비며 마음을 따사롭게 나누어야 비로소 내리사랑입니다. 가난한 어린이와 청소년이 학교에서 무상급식을 받아도 좋겠지요. 여기에서 더 헤아려야 합니다. 부자이든 가난뱅이든, 제 어버이(엄마만 아니라 아빠 또한)가 마련한 도시락을 먹을 때 더욱 즐거우며 한결 기운을 차립니다. 밖에서 맛난 바깥밥을 사 먹여야 아이가 즐겁지 않아요. 조그마한 집에서 조촐히 차리는 저녁밥을 식구들 모두 둘러앉아서 즐길 때에도 저녁잔치를 이룹니다.


.. 대학교수나 유명 건축사 등 엘리트에 속하는 건축가나 도시계획가들의 입장에서 주택 문제, 특히 아파트 문제는 관심 밖이었다. 아파트는 이미 너무 많이 지어졌고, 이제 와서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들 대부분의 생각이다 … 대단지 아파트로 대표되는 한국의 주택 문제에 대해, 대다수 건축가들과 지식인들의 입장은 모호함을 그 특징으로 한다 … 한국의 중간계급이 주택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주로 비공식 금융시장에 기초한 저축과 대출 때문이었다 … 권위주의 국가는 인구 성장을 관리하고 봉급생활자들이 경제 발전에 헌신하도록 가격이 통제된 아파트를 대량 공급하려 했다. 그리하여 중간계급을 대단지 아파트로 결집시키고, 이들에게 주택 소유와 자산 소득 증가라는 혜택을 주었으며, 그들의 정치적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결국 이러한 상호 혜택의 구조 때문에 한국의 도시 중산층과 중간계급 일반이 아파트단지를 중심으로 하층의 사회계층으로부터 공간적으로 분리될 수 있었다 ..  (110, 111, 144, 147쪽)


 진보란 삶입니다. 보수도 삶입니다. 진보가 더 낫거나 보수가 더 나쁘거나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삶을 찾을 사람들이고, 착한 삶을 사랑할 사람들이며, 참다운 삶을 아낄 사람들입니다.

 이리하여, 진보를 바라는 사람도 아파트를 버리거나 떠나야 하는 한편, 보수를 꿈꾸거나 외치는 사람도 아파트를 버리거나 떠나야 합니다. 올바른 보수란, 우리 삶터를 아름다우며 참답게 돌보고픈 생각을 지키는 사람들이니, ‘아파트 = 돈굳히기 살림집’이라 할 때에, 돈이 아닌 ‘사랑굳히기’를 하고 ‘믿음굳히기’를 하도록, 지붕 낮고 이웃하고 가까운 골목동네 여느 살림집으로 옮겨야 합니다. 겨울을 맞이해 한두 번 ‘연탄 나르기’를 하면서 사진찍히기를 하지 좀 말고, 겨우내 여느 골목동네 연탄불 살림집에서 오순도순 함께 살아가면서 ‘참된 보수’를 외쳐야 올바릅니다.


.. 결국 기업에서 월급쟁이 군단의 징집병들이 되는 것은 3년 간의 군 생활로 ‘교육된’ 남자들이다. 고지서의 납부 기한을 알리는 아파트단지의 스피커와 ‘수상한 사람’을 신고하도록 경비원들에게 전달되는 지침은 군사독재의 유신과 관련이 있다. 차단기가 군부대를 연상시키듯, 경제 발전을 추동한 권위주의 국가의 기초라 할 수 있는 군사주의로부터 오늘의 한국 사회는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  (233쪽)


 이제 《아파트 공화국》을 덮습니다. 2007년에 이 책을 처음 읽으면서, 섣불리 이 책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 느꼈습니다. 한국사람 스스로 ‘아파트 이야기’를 얼마나 더 깊이 헤아리거나 톺아보는가를 기다린 뒤에야 이 책을 말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어느덧 네 해가 흐르는 동안, 한국사람 스스로 아파트를 살가이 살핀다든지 속속들이 꿰뚫는다든지 하는 모습을 찾아보지 못합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사람은 아파트만 제대로 못 읽지 않습니다. 한국사람은 한국땅을 제대로 읽지 못해요.

 아니, 한국사람은 이름은 ‘한국’이지만, 정작 저 스스로 발을 디딘 이 나라를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한국사람은 미국을 읽고 일본을 읽으며 프랑스를 읽습니다. 한국사람은 중국을 읽고 러시아를 읽으며 인도를 읽습니다.

 왜 한국사람은 한국을 이리도 안 읽을까요. 어찌하여 한국사람은 스스로 한국을 이처럼 못 읽는가요.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땅을 사랑한다면 한국을 못 읽을 까닭이 없습니다. 한겨레로서 한겨레붙이를 아낀다면 한국말을 사랑할 테고, 한겨레 넋이며 얼이며 두루 돌볼 테지요.

 새삼스레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책이 고맙습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앞으로 2107년쯤 된다면, 그무렵을 살아갈 뒷사람 누군가가 ‘지식인들 말씨’가 아닌 ‘수수한 여느 사람들 말씨’로 이 책을 되옮겨 되펴낼 수 있겠다 싶습니다. 2000년대에 한국땅 모습을 차분하면서 그윽히 읽어낸 책을 한국사람 스스로 쓰지는 못했기 때문에, 2107년이나 2207년에 2000년대 한국 터전을 돌아보고자 할 우리 땅 뒷사람들은 어김없이 프랑스 판으로 이 책을 어떻게든 찾아내어 새로운 우리 말글로 아로새겨 주리라 믿습니다. (4344.1.2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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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눈물 2011-01-30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3년 정도 전에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저자인 발레리 줄레조와 같은 전공이어서 호기심과 반가운 마음에 집어 들었죠. 우리나라 '아파트'에 관한 논의는 '교육' 문제 만큼이나 어려운것 같습니다. 참고로 줄레조 교수의 <한국의 아파트 연구>라는 책도 있습니다. 절판이긴 하지만. 이 책은 <아파트 공화국>보다 더 딱딱합니다만, 타자의 시선으로 본 우리의 모습이기에 참고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숲노래 2011-01-30 23:34   좋아요 0 | URL
아, 그런 책도 나온 적이 있나 보군요. 말씀 고맙습니다~~~~~ 찾아서 살펴야겠어요.

'딱딱한' 책이라기보다는 '번역이 딱딱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이 책 느낌글에는 굳이 안 적었지만, 이분 책을 옮긴 분 '번역은 그야말로 형편없기 짝이 없었'어요.... ㅠ.ㅜ 왜 이렇게 번역에 마음을 못 쏟는지 슬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