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삶읽기 2022.6.23.

아무튼, 내멋대로 14 그림책



  어린이로 살던 무렵(1975∼1987)에는 ‘그림책’이 있는 줄조차 몰랐고, ‘그림책’이란 낱말조차 못 들었다. 푸름이로 지내던 무렵(1988∼1993)에는 ‘동화책’은 “애들이나 읽는 책이니 기웃거리지 말라”는 핀잔을 들었다. 싸움터(군대)에 끌려가서 짓밟히던 무렵(1995.11.6.∼1997.12.31.)에는 종이책을 하나도 못 읽었고, 새뜸(신문)조차 읽을 수 없었다. 이태 남짓 그냥 바보로 뒹굴며 총을 쏘고 등짐(군장)을 짊어지며 멧골을 끝없이 걸어서 넘으며 보냈다. 삶터(사회)로 돌아오고서 1998년 1월 4일에 《몽실 언니》를 읽는데 눈물을 가없이 흘렸다. “나는 왜 어린이로 살던 무렵에는 이런 아름책을 알려주는 어른도 없고, 배움터(학교)에서는 이런 책을 읽으라는 길잡이(교사)도 없는 채 반공독후감에 반공웅변에 허덕여야 했나?” 하고 울고 또 울었다. 1998년 1월 5일부터 어린이책(그림책+동화책+동시집)을 샅샅이 읽어내기로 다짐했다. 어린이란 몸으로 못 읽었어도 스물세 살 젊은 사내가 앞으로 ‘사람답고 사내답고 아저씨답고 할배답게’ 살자면, 책벌레로서는 ‘어린이책 사랑돌이’로 나아가야겠다고 느꼈다. 그런데 막상 책집에 가서 어린이책을 살피고 쥐고 펴고 읽으면, ‘엄마 손을 잡고 그림책을 보려던 아이들’이 “엄마, 저기 아저씨 있어! 어떡해?” 하더라. 얘야, 아저씨가 스물세 살이긴 해도 아직 아저씨 소리는 좀 낯간지럽지 않니? 그러나 네가 보기엔 그냥 아저씨일 테지. ‘아이 손을 잡은 엄마(아줌마)들’은 “저기요, 남자가 여기서 책을 보니 아이들이 못 보잖아요? 저리 비켜 주세요!” 하신다. 어린이책 있는 칸에서 책을 볼 적에는 아이나 아줌마가 있는지부터 살폈다. 이분들이 없을 적에만 부랴부랴 들여다보고, 아이나 아줌마가 이쪽으로 올라치면 먼저 달아났다. 지난 2020년에 서울시장 박원순 씨는 응큼질(성추행)을 뉘우치고서 값(처벌)을 달게 받는 길이 아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을 갔다. 그해에 서울시장·부산시장은 응큼질 탓에 새로 뽑아야 했다. 2022년 6월에 ‘포항 포스코 본사 무더기 응큼질(집단 성폭행)’이 불거진다. 이쪽 놈이건 저쪽 놈이건, 응큼짓을 일삼는 이는 수두룩하다. 겉만 번드르르한 응큼사내가 많으니 “모든 남자를 잠재적 성폭행범으로 여기는 주의주장”이 불거질 만하다. 그런데 “모든 남자를 잠재적 성폭행범으로 여기는 주의주장”을 펴면서 순이돌이 사이를 쫙 갈라치기를 하기보다는, 철없는 사내랑 어린 사내랑 젊은 사내 손에 어린이책(그림책·동화책)을 쥐어 줄 노릇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이책을 읽혀서 ‘철없는 사내들이 마음부터 맑게 씻고 다스리도록 일깨우지’ 않고서야, 이 나라 ‘바보사내짓(남성 가부장권력 횡포)’이 사라질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기 똥기저귀를 맨손으로 갈 줄 모른다면, 아기를 부드러이 씻길 줄 모른다면,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그림책을 함께 읽지 않는다면, 먼저 나서서 동화책을 살펴 읽다가 눈물에 젖고 웃음꽃을 터뜨리지 않는다면, 사내들은 메마른 바보넋으로 뒹굴지 않을까? 사내들 손에 있는 인문책을 덮으라 하자. 젊은이도 할아버지도 인문책은 그만 읽어도 좋다. 그림책과 동화책을 함께 읽자. 착하면서 참한 마음빛부터 가꾸어야 사내답고 사람다워 사랑을 속삭이는 아름살림을 지으리라 생각한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젠더 전쟁’이 아닌 ‘어깨동무’로 나아가도록

함께 어린이책을 읽고

함께 아이를 사랑으로 낳아

함께 그림책을 읽고 노래하면

우리 삶터는 조금씩

아름다이 거듭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싸우지 마요.

서로 사랑하는 어린이책으로

마음을 가꾸기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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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삶읽기 2022.6.21.

아무튼, 내멋대로 12 오리궁둥이



  어린이로 살던 무렵, 힘든 여럿 가운데 하나는 바지였다. 나는 돌이(남자)란 몸으로 태어났는데 ‘돌이바지’를 입기 힘들었다. 둘레 어른들은 “오리궁둥이네. 톡 튀어나온 궁둥이가 귀엽네.” 하고 말했고, 어린배움터(국민학교)에 들어가니 ‘오리궁둥이’를 놀리는 순이(여자)가 참 많았다. 오리궁둥이인 터라 여느 돌이바지를 꿰자면 ‘엉덩이가 안 끼는 치수인 바지’라면 허리가 너무 헐렁해서 흘러내리고, 허리가 맞는 바지라면 엉덩이가 꽉 끼어 쉽게 튿어졌다. 엉덩이가 꽉 끼어 튿어지면 얼마나 창피한지. 튿어진 바지 엉덩이를 툭하면 기우던 어머니는 늘 한숨을 쉬며 “또 튿어지니? 어떡하니? 그렇다고 엉덩이에 맞는 바지는 허리가 너무 헐렁하고.” 하셨는데, 어느 날 엉덩이가 잘 맞고 허리가 안 흘러내릴 만한 바지를 내미셨다. 진작 이런 바지가 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신나서 걱정없이 뛰놀았다. 그런데 이날 배움터(학교)에 가니 순이들이 깔깔대며 놀린다. “어머! 뭐야! 너 왜 여자바지를 입었어! 깔깔깔!” 어머니는 한참 골머리를 앓으시다가 마을 이웃집에서 ‘다 큰 순이가 못 입는 작은바지’를 얻어오셨더라. 비록 놀림을 받으며 얼굴이 벌개지기 일쑤였어도 ‘돌이바지’는 이제 더 안 입겠다고 다짐했다. 놀림질이란 그냥 한동안 손가락질을 하고 깔깔대다가 끝이지만, 엉덩이가 꽉 끼는 돌이바지로 뛰거나 달리자면 자칫 또 튿어질까 봐 걱정해야 하니, ‘놀림받으며 순이바지를 입기’로 했다. 돌이 몸으로 태어나도 오리궁둥이인 사람이 이따금 있다. 오리궁둥이인 돌이는 모두 바지 탓에 호된 어린날을 보냈겠지. 2022년 6월 20일 낮, 서울 어느 옷집에서 깡동바지(반바지)를 고르는데 옷집 일꾼 네 사람이 갈마들면서 “여긴 여자바지예요! 남자바지는 저쪽이에요!” 하고 큰소리를 낸다. “전 오리궁둥이입니다. 남자바지 못 입습니다.” 하고 말하며 고개를 돌렸는데, ‘곁짝한테 사줄 바지’를 고를 수도 있고, ‘딸아이한테 사줄 바지’를 살필 수도 있잖은가? 왜 멀쩡한 사람을 마치 ‘미친놈’이나 ‘치한’으로 여기면서 ‘순이바지’를 만지작거리지 말라며 뱀눈을 치켜뜰까? 순이(여자)도 돌이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순이가 치마를 훌훌 벗어던지고서 바지를 꿸 수 있는 삶(권리)을 누린 지 얼마나 되었는가? ‘바지순이(바지를 입은 여성)’를 그렇게 괴롭히고 손가락질하던 ‘미친 사내나라(가부장국가)’를 호되게 겪지 않았는가? 순이옷하고 돌이옷을 가를 까닭이 있을까? 저마다 몸에 맞는 옷을 살필 뿐이요, 저마다 즐길 옷을 누리면 아름다울 뿐이다. 순이가 바지를 마음껏 입는 삶을 누리듯, 돌이도 치마를 신나게 입는 삶을 누릴 때에, 비로소 이 나라는 아름빛으로 가득하면서 사랑으로 어깨동무하는 조그마한 길에 살짝 발을 내딛는 셈이리라 본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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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배움빛 2022.6.21.

숲집놀이터 273. 멍울



어버이도 아이였다. 아이도 어른으로 자란다. 어버이로 서기 앞서 아이로 살던 숨결은 어린날 받은 생채기가 쌓여 멍울이 질 만하다. 그리고 이 생채기나 멍울을 스스로 기쁘게 씻어내어 우리 아이한테 ‘생채기·멍울’이나 ‘근심·걱정·끌탕’이 아닌 ‘오롯이 사랑으로 눈부시게 누리는 삶·살림이라는 오늘 하루’를 보여주고 들려주면서 물려줄 수 있다. 나는 “멍울 능금(또는 보조개 능금)”이 오히려 한결 달콤하다고 느낀다. 멍울(또는 보조개)이 하나도 없는 능금도 달콤하되, 부딪히거나 긁힌 능금은 ‘다친 자리’를 스스로 아물도록 돌보는 숨빛이 피어나기에 우리한테 새록새록 이바지하는구나 싶더라. 어버이가 짊어지는 멍울이란, 아이한테 넘겨주고 싶은 짐이란 뜻이다. 어버이가 기쁘게 달래어 씻어내는 멍울이란, 아이한테 옹글게 사랑씨앗을 건네면서 푸른숲을 보금자리부터 일구는 마음으로 살아가겠다는 뜻이다. 아기는 왜 걸을 수 있을까? 숱하게 넘어지고 다치고 무릎이 깨지더라도, 넘어지거나 다치거나 무릎이 깨진 줄 깨끗이 잊고서 ‘걷는 기쁨’을 누리려는 마음이 눈부시거든. 나는 아이로 살던 지난날, 날마다 어머니·언니·마을 또래·마을 언니·마을 어른한테 숱하게 얻어맞으면서 보냈다. 날마다 신나게 얻어터졌다. 이밖에 둘레 어른·또래·여러 언니가 괴롭히거나 짓밟은 생채기는 책 즈믄(1000) 자락으로 쓸 만큼 넘치지만, 오늘 우리 아이들한테 “너희 아버지는 어려서 신나게 맞고 컸어.” 하고 웃으며 말한다. 이제는 멍울이 아니니까. “에? 왜 때렸대? 할머니도? 큰아버지도?” “응. 그때에는 다들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을 테니까.” “그렇구나. 아버지 애쓰셨어요.” “어, 뭐가?” “그냥. 사랑해요.” “아, 고마워. 사랑합니다.” 나는 나를 괴롭히고 때린 모든 사람을 봐준(용서한) 적이 없다. 그들을 미워하거나 싫어하거나 짜증낸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남을 봐줄 수 없더라.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봐줄 수 있을 뿐이고, 나는 오직 나를 봐줄 수 있을 뿐이더라. 내가 나를 스스로 봐주면서 사랑할 적에, 내 멍울이며 생채기를 스스로 씻으며 어느새 꽃으로 피워 사랑씨앗을 맺고는 아이들 마음에 심을 수 있더라.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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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삶읽기 2022.6.20.

아무튼, 내멋대로 10 긴머리



  1975년에 태어나 1982년에 아직 ‘국민학교’란 이름인 어린배움터에 들어간 또래는 늘 얻어맞고 막말을 듣고 짐더미(숙제)에 억눌린 채 집에서는 숱한 심부름에 허덕이면서 살았다. 우리 언니도 그러했고, 언니네 언니도 매한가지였다. 1975년 또래는 1993년에 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이해에는 ‘수능(수학능력시험)’을 9월하고 11월에 두 판 치렀다. 새로 바꾼 셈겨룸(시험)이 해볼 만한가를 따지려고 두 판을 치렀으니, 이 또래는 쥐(실험쥐)인 셈이다. 숲노래 씨가 다닌 푸른배움터(고등학교)는 3학년이 500 남짓이었는데, 이 가운데 둘만 ‘수능 2 + 본고사 + 면접’을 치렀다. 둘을 빼고는 11월에 치른 두 판째 셈겨룸으로 배움수렁(입시지옥)이 끝이었다. 그런데 배움터 길잡이는 두 판째 셈겨룸을 마친 이튿날 갑작스레 ‘머리치기(두발검사)’를 하더라. 배움칸(교실) 앞뒤를 잠그고서 자를 들이밀어 1mm만 넘으면 머리통에 구멍을 내시더군. 사랑도 살림도 삶도 가르칠 생각이 터럭만큼도 없던 지난날 우리 민낯이다. 위에서 힘으로 누르거나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라는 굴레를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나는 2mm가 더 길다면서 머리에 구멍이 났다. 다른 동무는 이날 곧장 머리집(이발소)에 가서 구멍난 티가 안 나도록 하려고 머리를 거의 박박 밀더라. 난 구멍난 머리인 채 배움옷(교복)차림으로 끝까지 버티었다. 보다 못한 배움터 길잡이가 “야, 넌 머리 깎을 돈이 없냐? 보기 흉하다. 내가 돈을 줄 테니 머리 좀 깎아라.” 하기에 “보기 흉하게 머리에 구멍낸 분이 누구시죠? 보기 흉한 줄 알면, 이런 보기 흉한 짓을 처음부터 말아야지요.” 하고 나즈막하게 읊으며 노려보았다. 머리에 구멍까지 낸 분들이 “요놈 말하는 싸가지 봐라!” 하고 손찌검을 하려고 들면 곧장 걸상을 집어들어 먼저 후려칠 생각까지 했는데, 숲노래 씨가 대든 말에 몽둥이를 들거나 손찌검을 한 분은 고맙게도 없었다. 1994년 2월 즈음에 이르자 구멍난 데가 조금은 찼고, 이제 어깨에 살짝 닿는 머리카락을 손질할까 하고 생각했는데, 문득 “아, 사내로서 머리카락을 언제 길러 보나? 어쩌면 딱 이때만 머리카락을 기른 채 보낼 수 있는지 몰라.” 싶어서 머리손질을 안 했다. 찰랑이는 머리카락을 그냥 두었다. 이러던 어느 날 인천 시내버스를 타다가 “뭐여? 남자가 불량스럽게 왜 머리가 길어? 우리 버스엔 불량학생 안 태워!” 하면서 앞문을 쾅 닫아 그만 쫓겨났다. 이른바 ‘승차거부’이다. 떠밀려 쫓겨나서 길바닥에 주춤주춤 섰다. 한동안 멍했다. “아니, 내가 무슨 마틴 루터 킹 목사야? 아니아니, 1994년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웬 버스 승차거부? 무슨 일이지?” 더 생각해 보았다. “여학생은 다 긴머리인데, 그럼 여자는 몽땅 불량학생이란 뜻이야? 구멍난 자리를 덮을 만큼 기르느라 어깨에 살짝 닿을 만한 머리카락인데, 이 머리카락이 길다고? 무엇보다 겉모습만으로 누가 불량하고 우량하고를 어떻게 갈라? 말이 돼?” 이날부터 버스를 안 타기로 했다. 그냥 걸었다. 여느때에도 한 시간 길은 으레 걸었으니, 두 시간 길도 기꺼이 걷기로 했다. 가만 보니 “긴머리 사내”를 보는 둘레 눈길이 따가웠다. “넌 왜 불량하게 머리를 길러?”라든지 “네가 락가수라도 돼?”라든지 “70년대 장발족도 아니고, 뭐 하니?” 같은 말을 날마다 뻔질나게 들었다. 나는 중·고등학교를 다닐 적에 마을 어린이를 가르쳐서(과외) 곁돈(용돈)을 벌어 책값으로 쓰곤 했는데, ‘긴머리’가 되고 보니 모든 가르침(과외) 자리를 잘렸다. 찻집도 술집도 긴머리인 사내는 곁일꾼으로 안 받겠더란다. 골프공을 줍는 곳에서조차 안 받더라. 1994년 한 해는 곁일자리가 하나도 없는 채 빠듯하게 열린배움터(대학교)를 다녔다. 이듬해 1995년은 열린배움터가 너무 엉터리라고 느껴 그만두기(자퇴)로 마음을 먹었고, 마지막이라 여기며 신문사지국에 갔더니 “엥? 넌 왜 머리가 길어? 이런 불량한 젊은이가 새벽마다 신문을 돌릴 수 있겠어? 뭐, 새벽에 신문을 돌리면 볼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괜찮다만, 하루라도 빠지면 안 돼!” 하면서 받아주었다. 새뜸나름이(신문배달부) 자리를 얻은 뒤에 대학도서관 곁일자리를 얻었고, 대학구내서점 곁일자리까지 얻었다. ‘신문배달부로 일하는 젊은이라면 긴머리여도 믿을 수 있다’고 하더라. 숲노래 씨는 긴머리로 살 생각이 터럭만큼도 없었지만, 마침종이(졸업장) 없이 일하려 생각했고, 겉모습으로 사람을 따지거나 재는 눈길을 고분고분 따를 마음이 없었기에, 1993년 11월 그날, 머리치기롤 겪으며 구멍난 날부터 머리카락이 마음껏 자라도록 둔다. 우리는 긴머리 대머리 짧은머리가 아닌 속마음 속사랑 속꿈을 바라보고 나눌 노릇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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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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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2022.6.18.

숨은책 670


《廣辭林 新訂版》

 金澤壓三郞 엮음

 三省堂

 1921.9.25.첫/1938.9.18.490벌



  2002년 무렵 서울 어느 헌책집에서 책사랑 어르신이 문득 말을 겁니다. “자네 하는 일이 뭔가?” “낱말책을 씁니다.” “어떤 낱말책인가?” “국어사전입니다.” “그러면 일본 사전을 봐야 해. 우리 사전 모든 뿌리가 일본한테서 왔어. 이 《광사림》부터 읽어 보시게.” “우리 낱말책을 엮는 일을 하는데 왜 일본 낱말책을 봐야 해요?” “허허, 보면 알아.” 그때에는 귓등으로 흘렸어요. 왜 일본 낱말책을 구태여 살펴야 하나 싶더군요. 그즈음은 《廣辭林》이 헌책집마다 흔했고, 오랜판이건 새판이건 값싸게 살 수 있어요. 어느덧 스무 해쯤 흐르고서 예전에 안 산 《廣辭林》을 장만하려 하니 헌책집지기마다 “광사림? 안 팔려서 다 버렸지.” 하는 말을 듣습니다. 우리말꽃 지음이(국어사전 편찬자)라는 길을 한참 걷고서야 예전 어르신이 들려준 말이 무슨 뜻인가를 알았으나 책 하나 찾기가 팍팍합니다. 드디어 1938년에 자그마치 490벌째를 찍은 판을 목돈 들여 장만했고, 뒤쪽에 “一九五九.一二.三○. 於鍾路古書肆. 八○○圓”이란 글씨가 있습니다. 이 낱말책을 1959년에 사신 분이 들렀을 ‘서울 종로 헌책집’은 어디일까요. 따로 이름이 없던 곳일까요. 우리말꽃이 날개돋히듯 읽히도록 알차게 차곡차곡 여미자고 돌아봅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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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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