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와 글쓰기


 나한테 1억이라는 돈은 꿈조차 꿀 수 없으나, 누군가한테는 1억이라는 돈으로 골프채 한 대를 사거나 자가용 한 대를 쉽게 산다. 나로서는 백만 원 아닌 천 원 한 장 벌기란 몹시 빠듯하지만, 누군가한테는 1억뿐 아니라 10억이나 100억이 어렵지 않게 돌고 돈다. 나 혼자 지내자면 보증금 50에 달삯 5만 원짜리 방 하나 얻어 살겠지. 보증금 50조차 이웃한테 꾸어서. 옆지기와 아이가 있으니 보증금 300에 달삯 20쯤 되는 살림집을 얻어야 도시 골목동네 깊숙한 데에서 몸을 누일 수 있다. 이런 살림에서 백만 원뿐 아니라 천만 원은 더없이 까마득한데, 보금자리가 아닌 운동이나 취미로 쓰는 물건이 꿈조차 꿀 수 없는 돈크기라면 나와 누군가는 어떤 삶이고 사람일까. 골프 또한 좋은 운동이거나 취미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런 운동이나 취미 이야기를 신문이나 방송에서 얼마든지 다룰 수 있겠지. 진보이든 개혁이든 바라면서 골프 이야기를 다루지 말라는 법이란 없다. 다만 내 살림살이로서는 큰돈 아닌 푼돈을 버는 데부터 마음을 쏟기 어려울 뿐더러 손길이 가 닿지 않는다. 나는 칭얼대고 투정대며 어리광부리는 딸아이에다가 몸과 마음 모두 힘들며 아파하는 옆지기하고 시골집에서 복닥이는 데에 온 품을 들여도 언제나 허덕이거나 허우적거린다. 아, 오늘은 아침부터 맑고 고운 햇살이 내리쬐었다. 이런 날 인천에서 세 식구가 느긋하게 골목마실을 하며 땀을 흘린 다음 저녁나절 보리술 한잔 걸치고 잠들 수 있다면 얼마나 흐뭇할까. 가까운 헌책방 한 곳 가뿐하게 들러 책 한 권 마련한 다음 이 책을 넘기며 저녁밥을 같이 먹으면 얼마나 기쁠까. 그래도 옆지기 어버이와 살붙이 살아가는 일산 바깥쪽 비닐집에서 어머님 밥 얻어먹으며 그저 펑퍼짐히 지내는 하루 또한 홀가분하면서 즐겁다. (4343.10.3.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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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 시간 골목 걷기 1


 시월 들어 첫날 인천으로 마실을 와서 골목길을 다섯 시간 남짓 혼자서 걷다. 그야말로 걷고 또 걷고 다시 걸으며 다섯 시간을 쉬지 않고 내리 걸었다. 시월 첫날 빗줄기가 가늘게 흩뿌렸기에 여느 때처럼 사진으로 찍을 만하다 싶은 모습을 더 많이 느끼지는 못한다. 그러나 흐린 날에는 흐린 날 느낌을 담으며 사진으로 옮기면 되고, 비가 흩뿌리거나 때때로 빗방울이 굵을 때에는 이러한 느낌을 고스란히 사진으로 이으면 된다. 종아리가 퉁퉁 붓고 무릎이 시큰거리며 등허리가 저리도록 걸으며 생각한다. ‘에휴, 겨우 틈을 내어 왔는데 오늘은 날씨가 궂구나. 날이 궂으면 사진에도 궂은 느낌이 깃들고 마는데.’ 인천에서 살아가며 언제나 즐거이 마실 다니는 사진을 더는 찍을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고 만다. 이제는 인천사람이 아닌 시골사람으로 살아가니까 나 또한 그동안 인천 골목동네에서 마주했던 ‘골목 아닌 아파트숲에서 살며 아주 가끔 출사 나오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골목마실을 하는 셈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저녁나절, 고단하고 지친 몸을 겨우 이끌어 일산에 있는 옆지기 식구들 살림집으로 온다. 전철을 타고 멀고 먼 길을 가까스로 오다. 다리가 제법 무거워 하룻밤 인천에서 자고 이튿날 새벽이나 아침에 갈까 싶었으나, 아이를 혼자 돌보느라 힘겨울 옆지기하고 식구들을 떠올리며 이를 앙다물고 전철을 타고 간다. 인천에서는 끝역이라 앉아서 가지만, 용산역부터는 내내 서서 간다. 주안역을 지날 무렵부터는 졸음이 쏟아져 모처럼 아이보기를 안 하며 책읽기만 할 수 있으나 그예 책을 덮고 눈을 감는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느긋하게 책을 읽겠느냐 생각하지만, 이런 생각과 달리 내 몸뚱이는 눈을 붙이잔다. 노량진역까지 꾸벅꾸벅 졸며 자며 온다. 용산역에서 내려 종로3가까지 오고, 여기에서 다시 3호선을 갈아타는 동안, 전철을 기다리며 큰 배낭에 책을 받치고 쭈그려앉는다. 쭈그려앉아 책을 읽는다. 어쩌면 자리를 얻지 못하고 서서 가야 하니까 억지로라도 책을 읽을 수 있는 셈.

 마련해 놓기는 거의 반 해가 되었으나 아직 펼치지 않던 《별을 헤아리며》(양철북,2003)를 드디어 읽어 본다. 책을 처음 마련할 때에도 꽤 괜찮은 작품이리라 여겼는데, 막상 읽고 보니 참 괜찮다. 우리 나라에는 이만 하게 작품을 빚을 글쟁이가 몇이나 될까 하고 곱씹는다. 아직은 멀었다고, 아직은 힘들다고, 아직은 슬프다고, 아직은 기다려야 한다고 느낀다. 가볍게 읽거나 가르침을 베푸는 작품은 많다. 그러나 곰곰이 되새기면서 우리 터전과 사람과 목숨과 꿈과 발자국 모두를 아우르며 사랑하고 믿는 작품은 드물다. 이원수 권정생 임길택으로 살포시 이어지던 끈을 씩씩하며 즐겁고 당차게 이은 글쟁이로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꼽을 수 있으려나. 아름답다 느낄 글을 쓰려면 스스로 아름답다 느낄 삶을 일구어야 하는데, 오늘날 이 나라 글쟁이 가운데 아름답다 느낄 삶을 즐거우며 곱고 신나게 보듬는 분으로 누가 있다 할 만할까. 가난하고 아프지만 가난을 좋은 벗으로 삼고 아픔을 고마운 스승으로 여기는 분으로 어느 분을 꼽을 만한가. 자가용을 타지 않을 뿐더러 자가용을 가질 만한 살림살이가 아닌 분이 누구인가. 아파트에 살지 않는데다가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이웃을 슬프며 따사로이 어루만질 만한 가슴으로 지내는 분이 누구일까.

 이어 《좋은 사람이 더 많은 세상》(내일을여는책,1997)을 들춘다. 어린이문학을 쓰는 송언 님이 서울살이를 접고 시골살이를 하면서 쓴 글을 모은 산문책. 이 책은 올 2월에 헌책방에서 만났으나 여태까지 펼칠 엄두를 못 냈다. 책을 사 놓고 여덟 달 만에 읽는 셈이네. 마흔 가까이 되어 비로소 서울을 벗어나 시골집에 전세를 얻어 시골 터전을 살갗으로 느끼는 이야기를 담는다. 송언 님 스스로 이무렵에 느끼셨는지 모를 노릇인데, 이와 같이 쓰는 글이야말로 문학이고 어린이문학이 된다. 따로 어떻게 꾸미고 자시고 해야 문학이 되지 않는다. 아이들한테 동시하고 동화만 들려주어야 어린이문학이지 않다.

 김밥 두 줄을 가끔 꺼내어 조금씩 먹으며 다섯 시간을 걷는다. 마실을 마치고 배다리 헌책방거리로 갈 무렵, 도화2동 142번지 둘레 ‘한창 집이 비며 철거를 할랑 말랑 하는 골목동네’에서 퍽 오래 머문다. 두어 달 앞서 이곳을 지날 때만 하더라도 사람이 살던 동네였는데, 그사이 텅텅 비다시피 한다. 텅텅 비다시피 하면서 더없이 쓸쓸하다. 그런데 쓸쓸하기만 하지는 않다. 일찌감치 비어 버린 골목집을 치워 텃밭으로 일군 자리에서는 노랗고 큰 호박꽃이 소담스레 피어 있다. 가꾸어 주는 사람이 없는 비어 버린 텃밭에는 갖가지 들꽃이 앙증맞게 피어난다. 설마 싶어 크고 굵직하게 달린 열매가 있나 살피는데 아직 열매는 보이지 않는다. 꽃만 시원하게 많이 피어 있다. 이 호박꽃들이 열매를 맺을 때까지 이 빈집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비어 있는 골목집은 모두 흙으로 지은 집이다. 요새 도시사람들은 시골로 살림집을 옮긴다고 할 때에 흙집을 짓는다며 집짓기를 배운다지. 그런데 그 흙집이 바로 도시 한복판 가난하고 조그마한 골목동네마다 있거든요. 아니, 쉰 해 예순 해를 이어온 도시 골목동네 살림집들은 으레 흙집이거든요. 흙집 겉에 시멘트만 살짝 발랐을 뿐이거든요. 기둥과 지붕은 나무예요. 골목동네 살림집을 요모조모 뜯어 보고 살피면 얼마든지 나무집과 흙집 짓는 솜씨를 익힐 수 있거든요.

 흙집에 나무지붕에다가 나무창문인 집 앞에 우뚝 선다. 창호지를 댄 나무문살 작은 창문 한쪽은 어디로 떨어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이 집이 비고 나서 틀림없이 동네 푸름이들이 담배 피고 술 마시러 와서는 망가뜨렸으리라. 집들이 비니까 동네 푸름이들은 이 빈집에 몰려들어 담배 피고 아무 데나 버릴 뿐 아니라 술 마시고 병을 깨뜨리기까지 한다. 한쪽만 남은 나무문살 창문은 그냥 후두둑 떨어진다. 이 창문을 어찌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내 가방에 넣기로 한다. 다시 붙일 수 없는 노릇이니까. 어제 새로 장만한 70리터들이 큰 가방에 넣어 본다. 꼭 맞게 들어간다. 얼마 뒤면 무시무시한 쇠삽날로 밀어버릴 이 골목집 자취 가운데 하나인 ‘창호지를 댄 나무문살 작은 창문’ 하나를 건사해 놓고 이곳에 어떠한 골목이웃이 어떠한 살림을 꾸리며 어떠한 꿈과 삶을 이었는가를 마음으로 품고 싶다.

 텅텅 비어 버린 동네를 걷는데, 집집마다 ‘새 주소 사업’을 한다며 새로 붙인 주소패가 반짝거린다. 쓰겁게 웃다. 이렇게 곧바로 허물 집이면서 저 새 주소패는 뭣하러 붙였을까. 새 주소패를 붙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허물 생각이면서 이런 짓을 왜 했을까. 새 주소패를 둘 떼어낸다. 붙인 지 얼마 안 되었기에 본드 냄새가 물씬 난다. 반들거리는 새 주소패 겉에 이 주소패를 붙였던 살림집 주소와 오늘 날짜를 네임펜으로 적는다. 문이 열린 빈집으로 들어가 본다. 빈집이니 자물쇠가 걸려 있지 않다. 살림살이 하나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치웠다. 집 옮길 돈은 받고 옮기셨을까. 바깥 골목에서 보면 알 수 없던 골목집 누리가 펼쳐진다. 바깥 골목에서는 골목집 안쪽 마당에 이렇게 예쁜 꽃밭과 텃밭이 앙증맞게 있는지 알 수 없다. 쇠붙이 문짝 잠금쇠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이 잠금쇠 또한 우리네 가난하고 수수한 여느 살림꾼들 발자국인데, 이 잠금쇠 하나를 ‘서민 역사’로 여기며 건사해 놓는 박물관이 한 군데라도 있는지 궁금하다. 이렇게 골목집을 허물어 아파트로 바꾼다고 할 때에 골목집 살림붙이를 찬찬히 보듬으며 모셔 놓을 박물학자라든지 전문가라든지 역사학자는 있는지 궁금하다. 지난해에 갑자기 돌아가신 재능대 사진학과 박재건 교수님은 송림4동과 5동 골목동네를 쓸어버릴 때에 동네를 다니면서 문패이니 주소패이니 몇 가지를 건사해 놓으며 “이 동네가 여기 있었음을 생각하고 싶었다.”고 말씀했다.

 새로 장만한 큰 배낭은 비를 맞아도 끄떡없다. 빗물이 스며들지 않는다. 목돈을 쏟아 장만한 배낭이라 그런지 좀 다르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쓰던 가방은 십만 원 넘는 돈을 들였는데 그 가방은 쟈크가 망가지고 빗물이 스몄고, 이 가방은 이십만 원 넘는 돈을 들여서 그런가, 쟈크는 한결 튼튼해 보이고 빗물이 스밀 틈이 없다. 빗물막이 천을 두르면 훨씬 야무지다. 돈이란 좋은가 무서운가 고마운가 대단한가 놀라운가.

 거의 다 비어 버린 골목동네를 거닐며 대문 안쪽으로 살짝살짝 들여다보이는 살림살이를 살핀다. 마루에 드러누워 낮잠을 자는 아저씨 한 분 보인다. 그래, 거의 다 비어 버렸으나 이렇게 살아가는 골목이웃이 있어. 사람이 살아가는 동네라고. 사람이 있는 터전이라고. 사람이 뿌리내리고 자리잡는 쉼터라고. 막걸리이든 보리술이든 한 잔이 그립다. (4343.10.3.해.ㅎㄲㅅㄱ)
 

= 사진은 보름 앞서 마실 할 때 찍은 녀석들. 엊그제 찍은 사진은 며칠 뒤에나 갈무리할 수 있어서 못 올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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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살이


 시골에서 살아가며 애써 도시로 마실을 해야 할 까닭을 찾기 어렵습니다. 아름다이 스미는 책을 곁에 두면서 따로 지루하거나 딱딱한 책을 쥐어들 까닭이란 없습니다. 사랑스레 자라는 아이를 따스히 어루만지고 있는데 굳이 텔레비전을 켜야 하지 않습니다. 텃밭에서 땀방울 똑똑 흘리는데 괜히 비행기 타고 나들이길을 나서야 하지 않아요. 흰구름 안고 밀잠자리 보며 범나비와 해바라기를 하고 있기에, 냄비밥 한 그릇에 국수 넣은 찌개 하나로 배부른 아침저녁으로 노래가 절로 나옵니다. (4343.10.2.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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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톱과 글쓰기


 엊저녁에 아이 손발톱을 깎다. 아이 오른엄지발톱이 또 부러졌다. 자주 깎아서 부러지지 않게끔 해야 하는데 늘 갖은 일에 치이니까 손발톱 깎기를 자꾸 잊거나 놓친다. 하기는, 내 손발톱조차 못 깎으니까. 아이 손발톱을 깎았으니 내 손발톱도 깎아야 할 텐데 언제쯤 틈을 내어 깎을 수 있을까. 문득 내 손톱을 들여다보니 오른쪽 넷째와 닷째 손톱이 한쪽으로 갈려 있다. 넷째 손톱은 갈린 끄트머리가 꽤 쓰라리다. 날마다 손에 물이 마를 새 없이 집일을 하고 손빨래를 하니까 내 손발톱은 남아날 수 없다. (4343.10.2.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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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차와 글쓰기


 자전거는 ‘잔차’라고도 일컫는다. 두 글자로 줄여 일컫는 이름인데, ‘잔차’라는 이름을 듣거나 말해야 할 때에는 살짝 소름이 돋는다. 이때에는 자전거 또한 여느 자동차와 매한가지로 ‘차’라는 느낌이 짙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내 두 다리와 마찬가지인 자전거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싶다. 이제 두 돌이 지난 딸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워 둘이서 신나게 읍내마실을 다니는 꿈을 꾼다. 자전거수레를 산 지 일곱 해 만에 드디어 우리 아이를 여기에 태우고 다닐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하며 혼자 들뜨고 기쁘다.

 사람들은 자전거를 놓고 오늘날처럼 자연 터전을 무너뜨리는 흐름을 뒤바꾸거나 거스를 수 있는 환경사랑 탈거리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중앙정부나 지자체에서는 자전거길을 마련한다며 수백 수천 억이라는 돈을 퍼붓는단다. 그러나 자전거 삶이란 돈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전거를 북돋우는 정책은 돈으로 펼칠 수 없다. 자전거 정책은 사람이 할 정책이고, 자전거 즐기는 삶이란 사람들 스스로 몸을 움직이는 삶이다.

 아이가 없을 때부터 나랑 한몸이 되어 주던 ‘허머(hummer)’라는 자전거가 한 대 있다. 아마 나하고 십만 킬로미터 넘게 달렸을 텐데, 처음 이 자전거를 헌 것으로 살 때 부속이 아직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자전거를 처음 산 뒤로 여러모로 삐걱거렸기에 여러 자전거집에 들러 꽤 자주 퍽 많이 손질했는데, 들르는 자전거집마다 ‘어, 이 자전거에 왜 이리 싸구려 부속이 붙어 있지요?’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예나 이제나 자전거 부속 급수에는 눈길을 두지 않는다. 튼튼하고 신나며 즐겁게 탈 수 있으면 좋다고 생각한다. 자전거집 일꾼들은 내가 2004년 즈음에 헌것으로 산 이 자전거에 치른 돈이 너무 많다고 입을 모은다. 아마 자전거집 일꾼들 말이 모두 옳으리라. 난 틀림없이 바가지를 썼으리라. 그러나 나로서는 지난 예닐곱 해에 걸쳐 ‘자전거값을 뽑고 남을 만큼 즐겁게 이 자전거와 함께 살았’다. 나로서는 이뿐이다. 내 삶을 즐기고 내 몸을 놀릴 수 있으면 고맙다.

 나로서는 내 삶을 즐기며 내 넋을 담을 수 있는 글쓰기이면 고맙다. 글 한 줄을 써서 돈을 번다든지 이름을 높인다든지 할 수 있겠지. 나는 자원봉사로 여러 매체에 글을 써 주는데, 어제 이들 가운데 한 곳에서 글삯을 보내 주겠다며 전화를 두 차례 걸었다. 손사래치다가 안 되어 글삯을 받기로 했다. 아직 은행계좌를 살피지 못해 얼마나 넣으셨는지 모를 노릇인데, 나한테 넣은 글삯만큼 이 매체에 도움돈으로 돌려주려고 생각한다.

 시골길을 달리며 길가에서 쉬는 나비와 메뚜기와 잠자리를 다치지 않게 하며 서로 오붓한 벗이 될 수 있는 자전거 타기를 오래오래 즐기고 싶다. 시골마을에서 살아가며 내 터전을 아끼고 사랑하는 그대로 아이와 어깨동무할 수 있는 글쓰기를 두고두고 즐기고 싶다. (4343.10.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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