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힝야 소년, 수피가 사는 집 라임 청소년 문학 32
자나 프라일론 지음, 홍은혜 옮김 / 라임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푸른책과 함께 살기 136


수용소에서 태어난 로힝야 아이는 ‘DAR-1’
― 로힝야 소년, 수피가 사는 집
 자나 프라일론 글/홍은혜 옮김
 라임, 2018.4.5.


“수피, 그래도 오늘은 운이 좋네! 오늘 점심은 유통 기한이 12일밖에 안 지났어.” (12쪽)

엄마는 NAP-24이고, 퀴니 누나는 NAP-23이다. 나는 여기서 태어났기 때문에 번호가 달랐다. DAR-1이 내 번호인데, 이곳에서 태어난 첫 번째 아기라서 1번이 붙었다. (19쪽)


  푸른문학 《로힝야 소년, 수피가 사는 집》(자나 프라일론/홍은혜 옮김, 라임, 2018)을 읽으며 ‘로힝야’가 어떤 이름인지,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어떤 삶인지 아리송합니다. 몇 쪽을 읽다가 ‘로힝야’라는 이름을 누리그물에서 찾아볼까 싶었으나, 책에서 실마리를 풀자는 생각으로 그대로 읽어 봅니다.

  유통 기한이 한참 지난 먹을거리를 받아서 먹는다는 대목, 어머니 누나를 비롯해 아이한테 이름 아닌 ‘번호’가 붙는다는 대목, 학교를 다니지 않고 아무것도 배울 길이 없다는 대목, 한식구가 함께 지낼 수 없도록 뿔뿔이 흩어 놓기도 한다는 대목을 읽으며, 아무래도 만만하지 않은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누아는 퀴니 누나의 진짜 이름인데,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엄마밖에 없었다. 엄마는 즐겁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다. 미얀마에서 키우던 강아지나 당나귀 이야기, 바다에서 헤엄치던 이야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 이야기 같은 거였다. 그리고 옛날 옛적부터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던 로힝야족 이야기도 들었다. (43쪽)

아무도 수용소 바로 앞에 있는 바깥세상의 이야기는 해 주지 않았다. 그곳이 어떤지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107쪽)


  《로힝야 소년, 수피가 사는 집》을 어느 만큼 읽으며 ‘수용소살이’를 하는 사람들 이야기라고 깨닫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수용소살이라니? 지구별 어느 곳에서 수용소살이를 하는 아이들이 있나 하고 헤아려 봅니다. 오늘날 한국은 아직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총부리를 겨누는 군인이 잔뜩 있고, 다른 나라에도 다툼이 끊이지 않습니다. 휴전으로 흐르는 나라가 있고, 내전이나 전쟁이나 분쟁으로 흐르는 나라가 있으며, 난민이나 피난으로 힘겨운 나라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로힝야하고 수용소는 어떤 사이일까요? 책을 끝까지 읽고서 이 수수께끼를 풀어 볼 즈음 《식민지의 사계》라는 책을 함께 읽었습니다. 《식민지의 사계》는 조지 오웰 님이 ‘버마’에서 겪은 일을 바탕으로 ‘영국하고 제국주의 총부리에 눌린 식민지’는 어떤 사이인가를 덤덤하면서 씁쓸하게 풀어냅니다.

  영국은 퍽 오랫동안 인도이며 버마이며 뭇나라를 제국주의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이러면서 영국사람 스스로 이 식민지를 다스리지 않았지요. 어느 한 나라를 식민지로 삼을 적마다 ‘이웃한 작은 부족·나라’를 끌어들여 이들이 다스리도록 이끌었습니다. 이른바 ‘식민지 사람이 다른 식민지 사람을 다스리는 꼴’인 얼거리입니다.


총 여섯 명이 바닥에 드러누웠는데, 모두 입술을 꿰매고 있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다리가 후들거리면서 온몸이 마구 떨렸다. (158쪽)

우리가 씨앗을 심어도 경비원들이 아무 말을 안 할까? 채소를 두세 가지만 심어도 좋을 텐데. (166쪽)


  버마에서 미얀마로 이름을 바꾼 나라에서 ‘로힝야 겨레’를 마구 죽이거나 괴롭히거나 내모는 뿌리를 살피면 ‘제국주의 영국이 로힝야 겨레를 내세워 버마를 식민지로 다스린 탓’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버마·미얀마는 영국한테 억눌린 아픔하고 슬픔을 영국한테 풀지 않고 로힝야 겨레한테 푸는 셈이지요. 영국은 버마에서 단물을 잔뜩 빼 가면서도 뒷일은 로힝야 겨레한테 떠넘기고 뒷짐을 지는 셈입니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는 버마·미얀마한테 ‘인종청소·인종학살’을 멈추라고, ‘로힝야 수용소’에까지 폭력 살인 강간을 저지르는 짓을 그만두라고 밝힌다지만, 버마·미얀마는 이를 멈추지 않고 그칠 생각이 없다고 해요.

  처음에는 제국주의 영국이 보금자리를 빼앗아 버마로 삶터를 옮겨야 한 로힝야 사람들은 제국주의 시대가 저문 뒤에 버마 사람들한테서 손가락질을 받으며 맞아죽거나 떠밀리면서 다시 삶터를 옮겨야 했는데, 어디로도 갈 곳이 없다고 합니다. 이제 수용소에 갇힌 삶인데, 수용소에서 사람된 권리가 하나도 없이 시달린다고 해요.

  제국주의 시대가 저문 뒤에 태어난 아이들은,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낳은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제국주의 유럽이 저지른 식민지 부스러기는 앞으로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얼마나 더 고름이 터지면서 아픈 일로 이어가야 할까요?


모든 소리가 사라진 것처럼 조용해지자 누나가 아빠의 시를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로힝야 말로, 그다음에는 영어로. 덕분에 나도 무슨 뜻인지 또렷이 알 수 있었다. “떨어지는 별들이 드리운 그림자가 진실을 속삭일 때 / 텅 빈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닿을 때 / 너는 그곳에 있을 거란다. / 바다가 불러 준 노래와 세상의 마음을 바람이 어루만져. / 그늘 속에 흐트러뜨린 채 숨겨 놓아도 / 나는 너를 볼 수 있단다. / 우리는 날개를 펼치고 영원한 집으로 날아갈 거야. / 다 함께 날아갈 거야.” (228쪽)


  《로힝야 소년, 수피가 사는 집》은 어느 누구 탓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오늘 하루를 어떻게 맞이하면서 살아가는가를 찬찬히 들려줍니다. 수용소 바깥살이는 한 번도 보거나 겪은 적이 없는 아이가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야 할는지를, 또 수용소 곁에 있는 가난하고 작은 마을 사람들은 수용소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수용소 감시원으로 있으면서 수용소 사람들을 늘 괴롭히는 이들은 스스로 어떤 삶인가를 아울러 짚습니다.

  그나저나 영국은 왜 로힝야 이야기에 온몸을 다 뺀 채 아무 말이 없을까요? 영국을 비롯해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를 제국주의 식민지로 억눌렀던 이들은 오늘 어떤 삶을 누리는가요? 그리고 일제강점기라는 아픈 날을 보냈던 한겨레는, 앞으로 남북 평화로 나아가야 할 이 나라는, 전쟁·식민지·제국주의를 어떻게 씻거나 털면서 이웃을 어떤 눈으로 바라볼 때에 아름다운 살림이 될까요? 2018.5.16.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청소년문학/푸른문학)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 읽기 2018.5.15.


《요츠바랑! 14》

 아즈마 키요히코 글·그림/김동욱 엮음, 대원씨아이, 2018.4.30.



언젠가 우리 아이들이 알아내어 보리라 여기지만, 만화책 《요츠바랑! 14》은 아무래도 어린이가 볼 만하지는 않다고 느낀다. 다섯 살 어린이를 너무 어른 틀에 맞추어 길들이는구나 싶다. 아이들은 사랑스러운 어버이나 상냥한 어른 곁에서 무엇이든 빨아먹고 받아들이면서 자란다. 그러면 이 만화책 《요츠바랑!》에 나오는 어버이하고 둘레 어른은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가? 요츠바는 어떤 몸짓을 선보이는가? 아이는 누구나 맑다. 어른도 누구나 아기로 태어나 아이로 살았으니, 이 마음결을 고이 건사한다면 모든 어른도 맑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회살이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맑은 길을 스스로 하나둘 내려놓으면 으레 틀에 박히고 만다. 요츠바는 아직 틀에 박히지 않았되, 하나하나 틀에 박히는 길을 간다. 어쩌면, 틀에 박히는 길이라기보다 공주님도 되어 보고 집에서 라면을 매우 자주 먹는 하루가 좋을 수도 있다. 더 헤아리면 아이는 저마다 스스로 온갖 삶을 치르고 복닥이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고 달리면서 싱그러이 자란다. 좋고 나쁜 것을 굳이 가리지 않으면서 모두 배우면서 새롭게 삭인다. 그러니까 아이들한테 《요츠바랑!》을 읽히자면, 아이들하고 나란히 앉아 찬찬히 새기며 꼭지마다 낱낱이 이야기를 할 노릇이지 싶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 읽기 2018.5.14.


《괜찮아, 나도 그래》

 순천 신흥중학교 북적북적동아리 글·황왕용 엮음, 학교도서관저널, 2017.11.30.



곧 새로 낼 책을 놓고서 한창 글마감에 글손질을 한다. 5월 끝자락이나 6월부터 10월이나 11월까지 줄줄이 나올 테니 일거리가 참 많다. 그렇지만 아무리 바빠도 밥을 짓고 살림을 하며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한다. 바깥살림으로 책쓰기를 한다면, 집살림으로 배움길을 걷는다. 자라는 아이들에 맞추어 집을 넓게 고쳐야 할 텐데, 방에 쌓은 내 책부터 치우기로 한다. 보름이나 달포쯤 들이면 제법 치울 만할까. 지난해에 장만하고서 여태 한 쪽도 못 읽은 《괜찮아, 나도 그래》를 편다. 일손을 쉬며 등허리를 토닥거리면서 읽는다. 중학교 푸름이가 사서교사하고 글쓰기 놀이를 하는 이야기가 흐른다. 학교에서는 수업일 테지만, 푸름이가 즐겁게 맞이하는 배움자리라면 놀이라 해도 되겠지. 글쓰기 놀이, 이른바 글놀이를 하는 푸름이는 저희 하루를 사서교사 곁에서 수수하게 적는다. 어른 눈으로는 ‘고작 중1∼중3’이라지만 벌써 입시에 치이는 나이로 보면 바쁘고 고단할 푸름이를 이끌고 글놀이를 한다니, 대견하면서 반갑다. 교과서를 덮고서 책을 읽는다든지, 교과진도를 잊고서 삶을 돌아볼 적에 푸름이가 참말로 푸른 숨결로 자라는 틈을 누리겠지. 중학교에서 글틈을 누린 어린 벗님이 앞으로 무럭무럭 크기를 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천무 2
김혜린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1998년 10월
평점 :
절판


만화책시렁 4


《비천무 2》

 김혜린

 대원문화출판사

 1997.1.15.



  시인은 어떻게 사랑을 하는가, 또는 사랑을 하던 시인은 어떻게 사람을 마구 죽이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가, 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던 사람은 어떻게 시인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비천무》는 두 걸음째에서 노래님(시인)하고 죽일놈(살인마)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를 그려냅니다. 때로는 하늘을 날며 춤추는 노래인데, 때로는 하늘을 날며 춤추는 칼입니다. 때로는 하늘을 함께 날며 기쁜 노래인데, 때로는 하늘에 홀로 펄럭이며 슬픈 칼부림입니다. 사내들은 왜 칼을 자꾸 손에 쥐고 싶을까요? 사내들은 사람을 베는 긴칼 말고 도마질을 하는 부엌칼을 손에 쥐면 안 될까요? 사람을 죽이는 칼질이 아닌 사람을 살리는 칼질을 한다면, 그리고 호미하고 삽을 쥐어 땅을 일군다면, 이러면서 나무를 만져 뚝딱뚝딱 장난감이며 살림을 짓는 길을 간다면, 못 배우건 많이 배우건 누구나 노래님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살리는 길을 가기에 노래님이요, 죽이는 길을 가기에 죽일놈입니다. 살림길에서 함께 노래합니다. 죽음길에서 홀로 눈물에 젖습니다. 사내들이여, 겉멋을 걷어치우고 사랑맛을 가꾸소서. ㅅㄴㄹ



“나처럼 못 배운 놈이 어떻게 시인이 돼?” “아냐! 시인이야.” ‘빗소리는 선율, 가늘게 떠는 풀잎은 하늘을 오르는 춤! 알 수 있겠니, 설리?’ (40쪽)


(숲노래/최종규 . 만화읽기/만화비평)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월의 라이온 10
우미노 치카 지음 / 시리얼(학산문화사)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화책시렁 3


《3월의 라이온 10》

 우미노 치카

 서현아 옮김

 시리얼

 2015.5.25.



  지키려는 마음이란 무엇일까. 지킨다고 할 적에는 누가 누구를, 또는 누가 무엇을 지킬 수 있을까. 보금자리를 지키나? 삶을 지키나? 사랑이나 사람을 지키나? 내가 나를 지킬 줄 안다면,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생기리라 본다. 내가 나를 지키지 못하면서 이웃을 지키는 일이란 없다고 느낀다. 《3월의 라이온》은 열 걸음째에 이르면서 아이가 얼마나 자랐는가를 보여준다. 어릴 적에 ‘남집’에 살며 아뭇소리를 안 하고 숨으려고만 하던 아이는, 저를 살뜰히 지켜보면서 한지붕으로 이끄는 사람들한테서 받은 따스한 기운을 고스란히 키워서 ‘누구를 지키고 싶은 마음’을 한껏 북돋운다. 제법 어른스러워졌다고 할 수 있고, 아직 어른은 아니되 어른으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라 할 수 있다. 둘레에서 여러 어른, 아니 둘레에서 ‘나이 먹은 여러 사람’을 지켜보면서 ‘나는 앞으로 어떤 어른이 되어야 아름다울까?’ 하고 생각한다고 할 만하다. 그래, 그렇지. 둘레에 아름다운 어른이 있어야만 아이가 아름답게 자라지 않는다. 둘레에 바보스러운 어른, 아니 나이 먹고 안 아름다운 이가 가득해도, 이들을 거울 삼아 아름답게 자랄 수 있다. ㅅㄴㄹ



“뭘 기준으로 ‘어른’이라고 할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제 정의로는 ‘스스로 자기를 책임질 수 있을 것’이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161쪽)


(숲노래/최종규 . 만화읽기/만화비평)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