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버스 파랑새 그림책 79
제인 고드윈 글, 안나 워커 그림, 강도은 옮김 / 파랑새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25



버스를 타는 아이들은

― 빨간 버스

 제인 고드윈 글

 안나 워커 그림

 강도은 옮김

 파랑새 펴냄, 2009.4.24.



  나는 어릴 적에 버스를 타면 맨 앞이나 맨 뒤에 즐겨 앉았습니다. 맨 앞에 앉으면 버스가 달리는 길이 시원하게 트여서 넓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맨 뒤에 앉으면 버스가 달리면서 휙휙 지나치는 길을 가만히 내다볼 수 있습니다. 맨 앞이나 맨 뒤가 아닌 가운데쯤에 서면 창밖을 보기 어렵습니다. 어디쯤 지나가는지 알 수 없기도 합니다. 버스에 손님이 가득한 날은 이리저리 밀리면서, 막상 내려야 할 곳에서 못 내리기도 합니다.


  아마 누구라도 맨 앞이나 맨 뒤에 앉아서 느긋하게 창밖을 내다보고 싶어 하리라 느낍니다. 어정쩡한 자리보다는 눈앞이 시원하게 트이는 자리를 좋아하겠지요. 그러니, 우리 집 아이들이 맨 앞에 앉아서 신나게 바깥을 내다보려고 하는 마음을 잘 알 만합니다. 아이들은 키가 작으니 가운데쯤 어정쩡하게 서거나 앉으면 바깥을 내다보지 못합니다. 애써 버스를 탔는데 창밖을 구경할 수 없으면 몹시 서운합니다.




.. 수업이 끝나면 키티는 버스에 타서 두리번거려요. 키티는 언니랑 앉고 싶은데, 언니는 친구들이랑 앉고 싶대요. 키티는 맨 앞자리에 앉고 싶은데, 다른 애가 늘 먼저 앉아 있어요 ..  (4쪽)



  아이들과 시골에서 살며 이레나 보름에 한 차례쯤 버스를 탑니다. 읍내를 다녀올 적에 버스를 탑니다. 그야말로 어쩌다가 한 번 타는 버스요 자동차인 터라, 아이들은 읍내마실을 몹시 기다립니다. 멀리서 버스가 오는 소리를 일찌감치 알아차리고, 늘 똑같이 바라보는 창밖 모습을 언제나 새롭게 마주합니다.


  시골버스가 구불구불힌 길에 흔들리며 달리면 까르르 웃으면서 재미있어 합니다.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는 버스를 마치 놀이기구로 여깁니다. 게다가 어쩌다 한 번 타는 버스인 터라, 내릴 적에 단추를 꼭 누르고 싶어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작은아이는 누나가 먼저 단추를 누르면 골을 부리기까지 하고, 단추가 손에 안 닿는 곳에 있으면 그야말로 섭섭합니다.




.. “가자.” 언니는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앞서 가요. 키티는 언니를 따라가느라 늘 총총대요 ..  (10∼11쪽)



  제인 고드윈 님이 글을 쓰고, 안나 워커 님이 그림을 그린 《빨간 버스》(파랑새,2009)를 읽습니다. 자동차나 버스를 좋아하는 작은아이는 《빨간 버스》 같은 그림책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자주 들추지는 않습니다. 틈틈이 들추기는 하되, 손수 버스를 만들어서 놀기를 훨씬 좋아합니다.


  가만히 헤아려 보면, 나도 어릴 적에 우리 집 작은아이처럼 버스놀이를 곧잘 했다고 떠오릅니다. 장난감이 없어도 맨손으로 버스 모습을 그려서 놀고, 연필이나 나무젓가락을 버스로 삼아서 놉니다. 돌멩이나 나뭇잎을 버스로 삼기도 합니다. 머릿속으로 그리는 길고도 거칠며 깊은 곳을 버스가 달린다고 생각합니다. 혼자서 생각에 폭 빠져서 놀이를 할라치면, 참말 나는 버스를 타고 아주 먼 곳을 신나게 달린다고 느낍니다. 꿈에서 깨어 이곳으로 돌아오면 아쉽습니다.


  버스를 타고 움직일 적에 때때로 이 버스가 하늘을 날거나 바닷속을 누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울퉁불퉁한 길에서 덜컹거린다든지, 구부정한 길을 아슬아슬하게 달릴 적에는 온몸이 짜릿짜릿합니다.




.. 키티가 부스스 눈을 떴을 때, 사방이 아주 깜깜했어요. 키티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두리번거렸어요. 정말 아무도 없었어요 ..  (22쪽)



  그림책 《빨간 버스》는 ‘버스놀이’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버스와 얽힌 애틋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몸이 작고 마음이 여린 아이가 언니 꽁무니를 좇으며 버스를 타지만, 막상 언니와 어울려서 놀지 못하고 외톨이처럼 지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언니 옆에 앉지도 못하고, 맨 앞에 앉지도 못하다가, 어느 날 언니 없이 혼자 버스를 탔는데 그만 버스에서 잠들었다고 해요. 집으로 어떻게 돌아가야 하나 걱정하면서 덜덜 떨 적에, 버스 일꾼이 아이를 알아봅니다.



.. 바로 버스 운전사 아저씨였어요. “아저씨, 저 못 내렸어요.” 키티가 콩알만 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아저씨는 조용히 웃음을 짓더니, 빨간 담요를 가져와서 키티를 포근하게 감싸 주었어요 ..  (26쪽)



  그림책 《빨간 버스》에 나오는 아이는 맨 앞에 앉고 싶은 마음도 있고, 언니와 나란히 앉아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즐거운 마음이 되어 버스를 타고 싶습니다. 날마다 타고 다니는 버스에서 즐겁게 웃고 맑게 노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혼자 동떨어진 채 말 한 마디 섞지 못하고 쓸쓸하게 달리는 버스가 아니라, 창밖도 신나게 구경하면서 동무나 언니하고 도란도란 말을 섞을 수 있는 버스가 되기를 바라요.


  더 빨리 달려야 하지는 않습니다. 더 멀리 달려야 하지도 않습니다. 날마다 똑같은 길을 달리더라도, 이 길에서 즐거움을 실컷 맛보고 싶습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어요. 모두 얌전히 자리에 앉아서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면 버스는 몹시 따분합니다. 모두 조용히 자리에 앉아서 아무 말을 할 수 없다면 버스는 몹시 괴롭습니다.


  웃고 떠들기에 싱그러운 기운이 흐릅니다. 서로 따스하게 마주보면서 마음을 기울이기에 즐거운 바람이 붑니다. 이곳과 저곳 사이를 잇는 버스는 나와 너 사이에서 이야기를 싣고 가볍게 달립니다. 4348.4.30.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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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쓸한 초콜릿
미리암 프레슬러 지음, 정지현 옮김 / 낭기열라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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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96



함께 먹을 때에 맛나고 달다

― 씁쓸한 초콜릿

 미리암 프레슬러 글

 정지현 옮김

 낭기열라 펴냄, 2006.2.10.



  어제 낮에 아이들과 읍내마실을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살짝 가게에 들러서, 과자 한 봉지씩 골라도 된다고 말하니, 두 아이 모두 초콜릿을 집습니다. 배가 고프다면서 초콜릿을 고릅니다. 초콜릿 값을 셈하고 나오면서 이제 군내버스를 타려고 하는데, 우리가 탈 버스가 그만 코앞에서 부웅 하고 떠납니다. 시골에서는 손님이 적어 버스마다 자리가 널널하기 마련인데, 오늘 따라 군내버스가 읍내 버스역에서 일찍 떠납니다. 앞으로 한 시간 남짓 다른 버스를 기다려야 합니다. 허허 웃다가 읍내 버스역 걸상에 아이들을 앉힙니다. 걸상에 앉아서 초콜릿을 뜯어서 먹으라고 얘기합니다. 초콜릿을 저마다 하나씩 쥐고 서로 나누어 먹는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내 어릴 적을 되새깁니다. 나도 어머니하고 저자마실을 나와서 ‘과자 하나 골라 봐’ 하는 말을 들으면 으레 초콜릿을 집었다고 느낍니다. 과자 한 봉지보다 값이 센 초콜릿은 여느 때에는 엄두를 못 내지만, 이렇게 ‘마음껏 고르라’는 말을 들으면 거침없이 손을 뻗습니다. 야금야금 먹으면서 몇 조각을 어머니한테 건네면, 어머니는 으레 ‘안 먹어, 너 다 먹어.’ 하고 말씀합니다. 나는 어머니한테서 배운 대로 우리 아이들이 초콜릿을 몇 조각 떼어 작은 손으로 내밀면 ‘응, 고마워. 너희 먹어.’ 하고 말하는데, 그래도 끝까지 내밀면서 ‘아버지도 먹어야지요.’ 하고 말하면 그야말로 기쁘게 받아서 입에 넣습니다.



.. 저런 행위로 자기들끼리의 애정을 과시하는 사람들은 그게 남들에게 어떤 고통을 주는지 모르는 것일까 …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을까? 나를 두고 뭐라 하고 있을까? 어린 여자애가 어쩌면 저렇게 뚱뚱하냐며 비웃고 있을까?’ … 왜 이렇게 괴로운 거지? 사실은 즐거워야 하잖아. 미헬과 사귀게 되었고, 내 옆에 프란치스카가 있으니까.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 거지? 벌써 오래전에 다른 것이 찾아왔는데, 왜 잊지를 못하는 걸까 ..  (12, 14, 67쪽)



  조그마한 과자 한 조각이라 하더라도 네 사람이 다시 넷으로 나누어 아주 조그마한 부스러기를 먹을 때가 있습니다. 과자 한 조각이 뱃속에 들어간다는 느낌조차 없을 만합니다. 그런데, 혼자 과자 한 조각을 먹으면 ‘아쉽구나’ 하고 느끼지만, 여럿이 아주 작은 조각으로 나누어 먹으면 ‘즐겁구나’ 하고 느낍니다. 아주 조그마한 조각이 뱃속에서 새로운 기운을 길어올립니다. 뱃속은 허전할는지 몰라도 마음은 넉넉하기에 서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웃음노래를 부릅니다.


  물 한 모금도 과자 한 조각처럼 나누어 마실 수 있습니다. 돈 한 푼도 과자 한 조각처럼 나누어 가질 수 있습니다. 밥 한 술도 과자 한 조각처럼 나누어 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못 할 만한 일이란 없습니다. 나눌 수 없는 것이란 없습니다. 사랑도 나누고 꿈도 나누며 이야기도 나눕니다. 삶도 나누고 노래도 나누며 웃음도 나누어요. 그러니까, 함께 나눌 때에 더욱 기쁘고, 함께 나누려 하지 않을 때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함께 나누면서 어깨동무를 할 때에 그야말로 기쁘고, 함께 나누려 하지 않을 때에는 어깨동무나 두레는 없이 쓸쓸하거나 썰렁하거나 고단합니다.



.. “젠장.” 에바는 수영용품을 챙겨 들고서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에바는 문을 쾅 히거 닫는 걸 좋아했다. 그건 에바가 화났을 때 유일하게 하는 행동이었다. 그밖에 또 뭘 할 수 있을까? 소리라도 지를까 … 왜 아빠는 이따금 견딜 수 없을 만큼 불쾌하게 행동하는 것인지 에바는 이해할 수 없었다 … 비곗살에 파묻혀 에바는 가려졌다. 지방의 무게를 짊어지지 않고 가볍게 살아가는 에바, 사랑스런 모습이어야 할 에바, 진짜 에바, 참된 에바가 말이다 ..  (26, 34, 147쪽)



  미리암 프레슬러 님이 빚은 청소년문학 《씁쓸한 초콜릿》(낭기열라,2006)을 읽습니다. 《씁쓸한 초콜릿》은 초콜릿을 다루는 이야기책은 아닙니다. ‘에바’라는 아이가 나오는 이야기책이고, 에바라는 아이는 제법 통통한 몸집인 듯합니다. 어쩌면 살이 퍽 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아이가 ‘먹기’를 좋아하거나 즐기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는 알 수 있어요. 아 아이는 모든 짜증과 골과 힘겨움과 슬픔과 아픔과 괴로움을 ‘먹기’로 풉니다.



.. 베르톨트가 태어났을 때 에바는 벌써 다섯 살이었다. 동생이 태어나자 기뻐하던 아빠의 모습을, 흥분에 들뜬 아빠의 커다란 목소리를 에바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세상에! 사내아이예요. 정말 사내아이라고요!” 아빠의 웃음은 전과 달랐다 … 베르톨트는 무척 빠른 속도로 먹었다. 사실 집어삼킨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베르톨트는 접시에서 눈을 떼지 않고서 고집스럽게 꾸역꾸역 집어삼켰다. “에바야, 넌 왜 안 먹니?” 아빠가 물었다. 그제야 에바는 아직 자기가 케이크에 손도 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바는 아빠를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아빠가 잔소리를 그렇게 하는데 어떻게 입맛이 나겠어요.” ..  (86, 95쪽)



  배고파서 먹는 사람이 있고, 아프고 슬퍼서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배고프지만 못 먹는 사람이 있고, 아프고 슬퍼서 못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은 먹어야 합니다. 배부른 사람은 더 먹지 않아도 됩니다. 아픈 사람한테서는 아픔이 사라져야 합니다. 슬픈 사람한테서는 슬픔이 녹아서 없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배고픈 사람이 자꾸 배고픕니다. 배부른 사람도 자꾸 배부릅니다. 아픈 사람은 자꾸 아프고, 슬픈 사람도 자꾸 슬픕니다.


  삶과 사회는 왜 이렇게 외곬로 치달아야 할까요. 우리 삶자락에 왜 이렇게 사랑과 꿈이 찬찬히 스며들지 못할까요. 서로 아끼고 보살피는 따사로운 손길과 눈길이 왜 이렇게 퍼지지 못할까요.



.. 자유. 에바는 연어 한 점을 입 안에 넣었다. 자유. 모험이라든가 크고 넓은 세계처럼, 격정적이며 아름답게 들리는 단어였다 … 이번에는 음악에 젖어들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지난번보다 많은 시간과 미헬의 손길이. 하지만 이내 괜찮아졌다. 아주 좋아지기까지 했다. ‘난 할 수 있어. 늘 잘할 수 있어.’ … “넌 내 여자친구잖아. 난 네 남자친구고. 그런데 왜 날 두려워해?” 미헬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두려움? 그게 두려움이었을까 ..  (116, 135, 164쪽)



  청소년문학 《씁쓸한 초콜릿》에 나오는 ‘뚱뚱한(또는 통통한) 에바’는 저 스스로를 아끼거나 사랑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에바는 저 스스로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저 저 스스로 깎아내리거나 미워합니다. 아들만 높이 여기는 아버지를 못마땅해 하면서 이런 생각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아들만 높이 여기다가 이 아들이 학교성적이 시원찮으니 아들을 함부로 깎아내리는 아버지를 그야말로 못마땅해 하지만 이런 마음조차 나타내지 못합니다.


  뚱뚱하거나 통통한 몸을 가리려고 널널한 치마만 입는 에바는 제 마음에 드는 옷을 입은 적이 없습니다. 에바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도 에바가 어떤 마음이거나 생각인가를 듣거나 읽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에바가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퍼먹기’ 하나에다가 ‘방문을 쾅 소리 나게 닫는 일’ 하나입니다.


  가만히 보면, 이 땅에도 ‘수많은 에바’가 있습니다. ‘먹기’로 아픔과 슬픔을 달래는 아이가 있고, ‘굶기’로 아픔과 슬픔을 다독이는 아이가 있습니다.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는지 몰라서 헤매거나 떠도는 아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아이들이 왜 아프거나 어떻게 아픈가를 살피지 않아요. 그저 이 아이들한테 한마디만 합니다. ‘대학교에 가라’고. 아이들은 참으로 착해서 대학교에 갈 때까지 모두 꿋꿋하게 참습니다. 그런데, 막상 대학교에 가고 나서는 ‘회사에 들어가라’고 말하는 어른이요 사회입니다. 회사에 들어가고 나면 ‘짝짓기를 하라’고 말하는 어른이며 사회이고, 짝짓기를 하면 ‘아기를 낳으라’고 말하는 어른과 사회이며, 아기를 낳으면 ‘아파트를 장만하고 연금과 보험에 들며 자가용을 몰라’고 말하는 어른입니다. 아이들 목소리를 듣는 일이 없는 어른이요 사회입니다.



.. 에바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뚱뚱한 가슴과 뚱뚱한 배, 뚱뚱한 다리를 가진 뚱뚱한 소녀가 보였다. 하지만 정말로 그 소녀는 못생겨 보이지 않았다. 약간 눈에 띄긴 하지만, 그렇긴 하지만 못생기진 않았다. 에바는 뚱뚱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뚱뚱하면서도 아름다운 사람도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었다. 대체 아름답다는 건 무엇일까? 패션잡지 사진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생긴 여자들만이 아름다운 것일까 … 눈에 보이는 변화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에바는 갑자기, 자신이 원했던 에바가 되어 있었다. 에바는 웃었다.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  (203∼204쪽)



  밥 한 그릇은 함께 먹을 적에 맛있습니다. 초콜릿 한 조각은 아무리 작아도 함께 나누어 먹을 적에 대단히 달콤합니다. 이야기는 함께 나눌 적에 아무리 ‘하찮은 것’을 놓고 이야기하더라도 즐거워서 웃음이 터져나옵니다. 노래는 대중노래를 부르든 민중노래를 부르든 찬양노래를 부르든, 우리 스스로 기쁘면서 사랑스러운 마음이 되어서 부르면 늘 기쁘면서 사랑스럽습니다.


  《씁쓸한 초콜릿》에 나오는 ‘뚱보 에바’는 이제껏 제 삶을 제대로 바라보려 한 적이 없습니다. 남들이 바라보는 대로 ‘뚱뚱하면 밉지’라든지 ‘날씬해야 예쁘지’ 같은 말에 휘둘렸습니다. 바보스러운 아버지가 외치는 말에 아뭇소리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뚱보 에바’는 ‘그냥 에바’로 살기로 다짐합니다. 아니, 뚱보도 날씬이도 아닌, 에바 그대로를 바라보기로 하면서, 스스로 무엇인가 달라진 줄 깨닫습니다.


  에바는 무엇을 했을까요? 에바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했습니다. 에바는 억지로 살을 빼려고 하는 짓을 그만두면서, 스스로 스스럼없이 생각하고 꿈꾸는 ‘나다움’을 찾자고 생각합니다. 나를 나대로 헤아리면서 사랑하는 길을 바라보자고 생각합니다. 이제껏 제대로 웃은 적이 없던 에바는 제 모습을 제대로 바라본 첫날, 비로소 웃음을 마음껏 짓습니다. 스스로 웃음을 지은 에바는 처음으로 어머니한테 제 마음을 털어놓습니다. 다만, 에바가 짜증과 골과 아픔과 슬픔 때문에 ‘퍼먹기’를 했다는 말까지 하지는 않고, ‘이대로 많이 퍼먹는 삶’을 그대로 갈 수 없다고, 어머니한테 ‘밥’을 예전처럼 주지 말라고 말하면서, 에바도 스스로 제 밥을 짓는 삶으로 거듭나겠다고 말합니다. 에바네 어머니는 에바가 들려주는 말을 듣고는, 에바네 아버지한테 ‘앞으로 새로 지을 밥’이 입맛에 안 맞는다면 혼자 밖에 나가서 외롭게 밥을 사다 먹으라고 해야겠다고 말하면서 웃습니다.


  함께 먹는 밥이 맛있습니다. 함께 꿈꾸는 삶이 아름답습니다. 함께 짓는 사랑이 달콤합니다. 4348.4.30.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청소년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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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히 즐거운 산지니시인선 11
표성배 지음 / 산지니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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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97



고요히 누리는 기쁜

― 은근히 즐거운

 표성배 글

 산지니 펴냄, 2015.4.20.



  비가 오는 날에 자전거를 달립니다. 비가 와도 자전거를 타고 가야 할 곳이 있으니 자전거를 달립니다.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로 갈 수 있지만, 두 시간에 한 번 지나가는 버스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기에, 빗줄기를 가로지르면서 자전거를 달립니다. 아이들은 버스를 타든 자전거를 달리든 나들이를 가면 기뻐하니, 비를 맞으면서 자전거를 달립니다.


  왜 굳이 비가 오는 날에 자전거를 달려야 했을까요. 우체국에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왜 비가 멎은 이튿날 가지 않고 비가 오는 날에 가야 할까요. 날짜에 맞추어서 보내야 하는 편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방에 편지를 담고, 작은아이는 수레에 태우고, 큰아이는 비옷을 입고 장갑을 낀 손으로 샛자전거에 앉습니다. 우리는 셋이서 빗길을 자전거로 천천히 하느작하느작 달립니다.



.. 우체국 가자 / 좀 멀다 싶으면 자전거라도 타고 가자 / 우체국 가는 길 새로 생긴 우체통 있어도 / 그냥 우체국 가자 ..  (흑백사진)



  두 아이와 비를 맞으면서 자전거를 타는 일은 드뭅니다. 아마 한 해에 한두 차례쯤 되리라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어리니 빗길 자전거를 잘 안 타기도 하지만, 굳이 비오는 날까지 자전거를 달리려 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비가 오는 날에 자전거를 달리면 비를 맞으면서 빗소리를 듣고 빗물내음을 먹습니다.


  아이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고 나도 혼자 살던 지난날에는 비가 오는 날에 퍽 자주 자전거를 달렸습니다. 아니, 나는 혼자 살림을 꾸리며 살던 예전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몰아치나 벼락이 떨어지나 씩씩하게 자전거를 달렸습니다. 비를 잔뜩 맞은 나머지 멈추개가 망가진 날에도, 비를 여러 시간 맞고 자전거를 달리느라 손가락이 얼어붙은 날에도, 나 스스로 나한테 ‘너 참 씩씩하구나’ 하고 말하면서 자전거를 달렸습니다.


  가만히 돌아보니, 나는 신문배달을 하면서 자전거를 익혔기에, 자전거를 탈 적에 날씨를 안 가리는구나 싶습니다. 신문배달은 한 해 내내 합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신문을 돌려야 합니다. 날이 푹푹 찌든 모질게 춥든 신문을 돌려야 합니다. 언젠가 비가 억수처럼 쏟아져서 가슴께까지 빗물이 찬 적이 있는데, 신문이 젖지 않도록 비닐로 꽁꽁 싸매고 머리에 짊어지면서 물길을 자전거를 헤치면서 신문을 돌렸습니다. 교통사고가 나서, 그러니까, 신문배달을 하는데 뒤에서 갑자기 자동차가 나를 들이받고는 뺑소니를 치느라 손목과 팔꿈치가 부러진 뒤에도, 아픈 손과 팔에 붕대를 감고 자전거를 달려서 신문을 돌렸습니다.



.. 학생과 선생 사이처럼 빚쟁이와 빚꾸러기 사이처럼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처럼 의사와 환자 사이처럼 사이에 사랑 하나 머물지 못해 진지하다 그런데 시마저 진지하기만 하면 이 사이를 어떻게 좁히느냐며 시 좀 재미있게 쓰잔다 ..  (헐렁했으면 좋겠다)



  표성배 님 시집 《은근히 즐거운》(산지니,2015)을 읽으면서, 표성배 님이 오늘 이곳(표성배 님 삶자리)에서 누리는 즐거운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이러면서 내가 오늘 이곳에서 누리는 즐거운 노래를 헤아립니다.


  삶을 노래하는 이야기 가운데 ‘자전거’가 나오는 싯말이 있기에, 아련하게 떠오르는 내 신문배달 삶을 되새기면서, 어쩜 그때 그렇게 일하면서 살았을까 하고 빙그레 웃습니다. 내 자전거 바구니에서 신문을 몰래 한 부씩 훔쳐가던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웃습니다. 한겨울에 길바닥이 꽁꽁 얼어붙은 날 가파른 내리막길에서 안 미끄러지려고 용을 쓰던 일을 떠올리면서 웃습니다. 눈이 너무 쌓인 겨울에 골목동네 오르막길을 자전거로 끌고 올라갈 수 없어서, 자전거는 아래쪽에 두고 신문을 옆구리에 낀 채 오르막길을 깊은 새벽에 엉금엉금 기어서 올라간 일을 떠올리면서 웃습니다. 장마가 이어지는 어느 날, 지국장님 반지하집에 물이 차오른다면서, 신문배달을 마치기 무섭게 옷장이며 살림이며 빼내어 신문지국으로 나르던 일을 떠올리면서 웃습니다.


  우리 삶은 언제나 노래입니다. 슬픈 노래도 있고 기쁜 노래도 있습니다. 아픈 노래도 있고 웃음이 터지는 노래도 있습니다. 이 노래이기에 나쁘지 않고 저 노래이기에 좋지 않습니다. 이 노래만 부를 수 없고, 저 노래는 귀를 막을 수 없습니다.



.. 바람이 있으면 하면 바람이 있었고 // 햇볕이 있으면 하면 햇볕이 있었는데 // 어디 따로 눈 둘 곳 찾지 못해 오늘은 자꾸 멀뚱하다 ..  (장마 탓이다)



  바람이 붑니다. 내가 바람을 불렀으니 나한테 바람이 붑니다. 바람이 멎습니다. 내가 바람을 바라지 않으니 나한테 바람이 불지 않습니다.


  꽃이 핍니다. 내가 꽃을 바라기에 꽃이 핍니다. 꽃이 안 핍니다. 내가 꽃을 안 바라니까 꽃이 안 핍니다.


  그러면, 군사독재정권 같은 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이런 것을 바랐기에 군사독재정권이 생겼을까요? 전쟁과 핵무기 따위는 무엇일까요? 이런 것도 내가 바란 탓에 생겼을까요?


  나는 사랑과 평화만 바라보려고 하지만, 자꾸 전쟁과 핵무기 따위가 눈에 어른거립니다. 나는 꿈과 노래를 어루만지려고 하지만, 자꾸 따돌림과 괴롭힘 따위가 눈에 밟힙니다.



.. 평생을 기계와 같이 사는 사람 // 평생을 기계를 이고지고 사는 사람 // 평생을 기계를 위해 밥을 하고 물을 끓이는 사람 // 평생을 기계를 위해 아이를 낳고 기르는 사람 ..  (기술자)



  기뻐하는 이웃이 있고, 슬퍼하는 이웃이 있습니다. 노래하는 이웃이 있고, 노래를 잊거나 빼앗긴 이웃이 있습니다. 눈물짓는 이웃이 있고, 웃음을 그치지 않는 이웃이 있습니다. 잔치를 누리는 이웃이 있고, 배고파서 허덕이는 이웃이 있습니다.


  책을 많이 읽은 이웃이 있고, 책 한 권조차 모르는 이웃이 있습니다. 술독에 빠진 이웃이 있고, 술 한 방울 입에 안 대는 이웃이 있습니다. 늘 웃는 이웃이 있으나, 늘 아무 낯빛이 없는 이웃이 있습니다.


  부드럽고 맑은 말씨로 이야기꽃을 피우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말끝마다 온갖 거친 막말을 섞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사랑으로 밥을 차리는 어버이가 있고, 얼렁뚱땅 끼니를 때우는 어버이가 있습니다. 입시지옥에 휘둘리며 아픈 푸름이가 있고, 학교를 안 다니면서 제 꿈을 스스로 찾으려는 푸름이가 있습니다.


  다 다른 사람들한테 다 다른 노래가 있습니다. 다 다른 곳에서 다 다른 이야기가 자랍니다. 다 다른 삶에서 다 다른 시가 한 줄씩 흐릅니다.



.. 솔숲에 가면 솔바람 불고요 / 강가에 가면 강바람 부는데 / 공단에는 무슨 바람 불까 / 가슴만 두근거리네요 ..  (바람)



  시집 《은근히 즐거운》을 차근차근 읽습니다. 빗길을 아이들과 자전거로 달리고 나서 몸을 씻고 빨래를 한 뒤에 읽습니다. 아이들한테 저녁을 차려 주고 나서 기지개를 켜다가 등허리를 펴려고 자리에 살짝 누운 뒤에 읽습니다. 몸이 뻑적지근해서 몇 줄 읽다가 어느새 곯아떨어집니다. 삼십 분쯤 눈을 붙였을까요. 아이들이 저희끼리 잘 노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깹니다. 살짝 누웠더니 허리를 펼 만합니다. 두 아이를 하나씩 옆구리에 끼고 방에서 빙글빙글 돕니다. 마당으로 나가서 두 손을 잡고 휘휘 돌립니다. 우리 집 마당에 선 후박나무 가지까지 번쩍번쩍 들어올리거나 하늘 높이 던지고서 받습니다.


  개구리가 노래하고, 사이사이 풀벌레가 노래합니다. 낮새는 고이 잠들었고, 밤새가 일어나서 노래합니다. 아이들이 짓는 웃음은 밤노래가 되어 저 먼 별까지 퍼집니다. 저 먼 별은 우리 집으로 고운 빛줄기를 베풉니다.



.. 고철 더미 속에서 붉은 녹물을 토하는 늙은 기계가 말하고 고철 장이 듣고 있는 가령, //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보이지 않는 곳을 볼 수 있는 것은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것 // 안녕, 망치야 안녕, 비둘기야 안녕, 그라인더야 안녕, 나의 일터야 ..  (안녕, 망치에게)



  모든 시는 삶을 담습니다. 모든 시는 삶글입니다. 시를 쓰는 모든 사람은 일을 합니다. 애써 ‘노동’이라는 한자말을 빌지 않아도 됩니다. ‘일하는 사람’이 시를 씁니다. 우리는 회사에서도 일하고, 공장에서도 일하며, 시골에서도 일합니다. 부엌에서도 일하고, 책상맡에서도 일하며, 텃밭에서도 일합니다. 자전거를 달리며 일하는 사람이 있고, 두 다리로 걸으며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토바이로 편지를 나르며 일하는 사람이 있고, 짐차를 몰며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루 내내 한곳에 꼼짝 않고 서서 일하는 사람이 있으며, 빗자루를 들고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글은 삶글이면서 살림글입니다. 살아가며 쓰는 글이기에 삶글이요, 저마다 다르게 하는 일을 가꾸면서 쓰는 글이니까 살림글입니다. 삶을 쓰는 글은 삶노래입니다. 글은 언제나 노래처럼 흐르기에 삶노래입니다. 살림을 쓰는 글이라면 살림노래가 될 텐데, 일을 읊는 노래라면 일노래이기도 하지요.


  들에서 일하면 들노래입니다. 집에서 일하면 집노래입니다. 숲에서 일하면 숲노래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지구별에 두 다리를 딛고 일한다고 여기면 별노래입니다.


  망치한테 인사하는 표성배 님 시집은 어떤 노래일까 하고 헤아립니다. 고요히 누리는 기쁜 삶을 노래하는 싯말은 어떤 노래가 되어 이 땅에서 고이 흐를까 하고 헤아립니다. 저녁이 깊어 새근새근 잠든 아이들 곁에서 자장노래를 나긋나긋 부르면서 내 삶노래와 살림노래와 꿈노래와 별노래를 하나씩 함께 헤아립니다. 4348.4.29.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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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5-04-30 00:03   좋아요 0 | URL
저도 18쪽의 `흑백사진`을 읽으며 절로 함께살기님이 생각나 빙그레 웃었습니다~

모든 시는 삶을 담습니다. 모든 시는 삶글입니다.-
정말 그렇지요.^^

아주 편안하고 즐겁게 읽은 이 시집을, 함께살기님의 느낌글로 다시 읽으니 참으로
기쁘고 고맙습니다~*^^*

좋은 시집에 좋은 느낌글입니다!

숲노래 2015-04-30 00:23   좋아요 0 | URL
우리 스스로 즐거운 이야기를 짓고
다 함께 아름다운 삶이 된다고 느껴요.
appletreeje 님도 오늘 하루를
기쁘게 누리셔요~
 
마을을 상상하는 20가지 방법 - 우리가 꿈꾸던 마을이 펼쳐지고 있다, 2015년 세종도서 교양 부문 선정
박재동 글.그림 김이준수 글, 서울시 마을공동체 담당관 기획 / 샨티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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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09



한마을에서 이웃이 되는 길

― 마을을 상상하는 20가지 방법

 박재동·김이준수 지음

 샨티 펴냄, 2015.4.6.



  ‘마을 살리기’ 바람이 찬찬히 온 나라에 붑니다. ‘마을’이라는 낱말은 시골에서 쓰는 말이고, 도시에서는 ‘동네’라는 낱말을 쓰지만, 요새는 도시에서도 ‘마을’이라는 낱말을 곧잘 씁니다.


  한국말사전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는데, ‘마을’이라는 낱말은 “살림집이 여럿 모여 이루어진 삶터”를 가리킵니다. ‘동네’는 ‘洞 + 네’입니다. ‘동네’는 ‘洞內’에서 말꼴이 바뀌었다고도 하지만, ‘형네’나 ‘할머니네’처럼 ‘-네’를 붙였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아무튼, 한겨레는 먼 옛날부터 ‘마을’이라는 낱말만 썼으나, 시골살이가 사라지는 곳, 이른바 ‘도시’가 생기면서 한자를 빌어 ‘동네’라는 낱말을 새로 지어서 썼다고 여깁니다. 오늘날에는 ‘뉴타운’ 같은 영어를 쉽게 쓰지만, 일제강점기 언저리와 해방 뒤에는 으레 한자로 새 낱말을 지어서 썼습니다.


  그러니까, 오래된 삶터에서는 수수하게 ‘마을’이라는 낱말을 쓰는 셈이요, 새로운 문명과 사회를 보여주려고 하는 도시에서는 ‘동네’라는 낱말을 써서 둘을 가르려고 하는 셈입니다.



.. 임유화 씨는 아파트가 한 칸 한 칸의 사적 재산물들이 모여 있는 단순한 집합체라기보다는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마을을 이루는 공동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 ‘함께하는 것’의 즐거움을 맛본 사람들이 속속 판을 넓히기 시작하면서 성미산마을은 점점 더 흥미로운 곳이 되어 갔다 … ‘어울려서 요리하고 먹는’ 즐거움이 주방에서 시작해 마을로 이어진다 ..  (15, 29, 47쪽)



  ‘두레’를 엮으려는 움직임이 나라에서까지 일어납니다. 한자말로는 ‘협동조합’이라고 하는데, ‘협동조합’은 일본에서 지은 낱말입니다. 협동조합 운동도 일본에서 불거졌습니다. 나라에서 정책으로 협동조합 바람을 일으키기 앞서, 도시에서는 사람들 스스로 ‘생협(생활협동조합)’ 운동을 벌였습니다. ‘두레 생협’ 같은 이름을 쓰는 곳도 있었는데, 생협이든 협동조합이든 한국말로 가리키면 ‘두레’입니다.


  뜻을 모으고 힘을 모아서 여럿이 함께 큰일을 할 적에 ‘두레’를 합니다. 두레를 모임으로 엮지요. 그런데, ‘마을’이라는 이름도 시골살이에서 태어났고, ‘두레’라는 이름도 시골살이에서 나타났습니다. 도시에서는 흙일을 하지 않는데, 외려 도시에서 ‘마을 살리기’나 ‘마을 만들기’를 벌이고, ‘두레’라는 모임을 엮으려는 움직임이 크게 일어납니다.



.. 누군가는 이웃랄랄라가 어떻게 마을공동체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웃랄랄라는 분명 마을공동체다. 스스로 하나의 마을이 되었다 … 이런 과정에서 은실이네만의 철학도 생겼다. 조금 벌더라도 일을 많이 하지는 말자 … 마을에서는 곧잘 ‘우연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대도시들은 이런 기회를 차단하고 있다 … 곽수경 씨는 자신이 오랜 시간을 통해 깨달은 것을 마을의 청소년들도 언젠가 알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  (59, 68, 78, 204쪽)



  박재동·김이준수 님이 빚은 이야기책 《마을을 상상하는 20가지 방법》(샨티,2015)을 읽습니다. 서울에서 ‘마을 살리기’를 알차면서 예쁘게 잘 하는 스무 군데 마을을 찾아다닌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서울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예쁜 마을이 스무 군데뿐이겠습니까만, 이 스무 군데 이야기를 바탕으로 새로운 마을이 자라기를 비는 마음일 테고, 다른 모든 예쁜 마을이 튼튼하게 뿌리내리기를 꿈꾸는 마음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책을 찬찬히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도 듭니다. 왜 마을 살리기를 할까요? 마을 살리기를 굳이 해야 할까요?


  아무래도 마을 살리기를 한다고 한다면, 마을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마을 살리기를 굳이 해야 하는 까닭이라면, 마을이 죄다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앞뒤가 어긋난다고 해야 할까요, 씁쓸하다고 해야 할까요, 1970년대로 접어든 뒤부터 나라에서 ‘새마을 운동’을 일으켰고, 이 운동은 아직도 깃발이 나부낍니다. 아직도 시골에서는 마을마다 새마을 운동 깃발을 내걸어야 합니다. 시골 군청에서도 이 깃발을 내걸고, 도시에서도 이 깃발을 내걸어요. 그런데 말이지요, 새마을 운동 바람이 일고 난 뒤부터 ‘마을이 죽었’습니다. 새마을 운동은 시골에 있던 수많은 마을을 깡그리 짓밟았습니다. 게다가 도시에 있던 달동네도 하나둘 짓이겼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살갑고 고요하게 숨쉬던 마을살이를 몽땅 내쫓으려고 하던 새마을 운동입니다. 새마을 운동을 벌이면서, 풀집과 흙집을 허물었습니다. 제비집도 까치집도 허물었습니다. 마을 고샅길을 시멘트로 덮었고, 논둑도 시멘트로 덮으며, 논도랑도 시멘트로 덮었지요. 비료와 농약과 비닐을 쓰도록 부추긴 새마을 운동입니다. 새마을 주택을 짓게 시키고, 새마을 모자를 쓰게 시키며, 새마을 수련원을 세워서 ‘나라에 충성하는 애국 시민’을 키우려고 닦달했습니다.



.. 마을에서 꼭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시간이 걸릴망정 되지 않은 일은 없다 … 〈도봉 N〉은 마을에서 벌어진 사소한 일도 놓치지 않고 신문에 담아냈다. 아이들이 쓴 시가 실리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아이들은 신문이 언제 나오느냐고 보채곤 했다. 내 이야기, 우리 이야기가 실리는 신문, 마을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이유가 있었다 … 미디어는 즐겁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아낼 때 빛이 난다. 내 주변에 귀를 기울이면 얼마든지 즐겁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을 와보숑은 보여준다 ..  (114, 129, 151쪽)



  마을은 나라에서 세우지 못합니다. 마을은 사람들 스스로 세웁니다. 사람들이 손수 흙을 가꾸고 나무를 심으며 들을 돌볼 적에 비로소 살림집 한 곳이 태어나고, 이웃집이 생기고 늘면서 바야흐로 마을을 이룹니다. 커다란 장비를 써서 아파트를 수백 채씩 때려박아서 수천이나 수만에 이르는 사람이 좁은 곳에 다닥다닥 붙어서 살도록 해야 ‘마을’이 되지 않습니다. 예부터 ‘마을’이라고 하는 곳은 ‘아이들한테 물려줄 수 있는 삶터’입니다. ‘아이들이 물려받아서 즐겁게 살다가, 새롭게 아이를 낳아서 오래오래 물려줄 만한 삶터’가 바로 마을입니다.


  《마을을 상상하는 20가지 방법》에 나오는 ‘마을 살리기’를 찬찬히 보면, ‘골목집’으로 이루어진 마을은 드뭅니다. 으레 아파트로 이루어진 마을입니다. 아파트라고 해서 마을이 안 될 까닭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파트는 언제나 재개발을 합니다. 아파트 재개발을 하면, 이곳에 ‘예전 아파트 주민’이 다시 돌아와서 살기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아파트 재개발을 하면 예전 아파트를 허물면서 나오는 온갖 시멘트 쓰레기와 플라스틱 쓰레기가 갈 곳이 없어요. 이런 쓰레기를 어디에 버릴까요? 갯벌에 파묻고 매립을 할까요? 바다에 던질까요? 가난한 이웃나라에 아파트 쓰레기를 내다팔까요?


  마을 한 곳은 한두 해나 열스물 해 사이에 태어나지 않습니다. 마을 한 곳은 아무리 짧아도 이백 해는 흘러야 태어납니다.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서 어른이 된 뒤 새로운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기를 꾸준히 되풀이한 뒤에라야 비로소 마을이 뿌리를 내립니다.



.. 아이들을 대하는 아빠들의 태도에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났다. 아내의 몫으로만 여기던 육아를 자신의 삶 속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와 함께 바깥으로만 돌던 아빠들이 자연스레 마을의 일원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 마을무지개의 미덕은 이주 여성을 한 마을에 사는 이웃으로 바라본다는 것, 경제 활동을 함께하면서 마을공동체도 일구어 간다는 점일 것이다 ..  (184, 234쪽)



  서울은 사람이 대단히 많습니다. 땅은 무척 좁은데 사람이 무척 많습니다. 그래서, 서울에서는 텃밭을 누리기 몹시 어렵습니다. 마당 있는 집에서 지내는 서울사람은 손으로 꼽을 만큼 드뭅니다. 고급아파트나 호화빌라에 살더라도 마당을 누리는 사람은 드물지요. 마음껏 악기를 켜거나 노래를 부를 만한 살림집에 깃든 서울사람은 그야말로 드뭅니다.


  서울에서 꾀하는 ‘마을 만들기’는 이렇게 나무 한 그루 못 심고 텃밭 한 조각조차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제 더는 이 갑갑한 곳에서 숨이 막혀 못살겠다!’고 하면서 외치는 목소리라고 느낍니다. 층간소음 때문에 골머리를 앓지 말고, 신나게 춤추고 노래하고 웃고 떠들고 수다를 떨면서 밥잔치도 열고 술잔치도 벌이면서, 온갖 잔치를 함께 누리자고 하는 신나는 놀이마당을 꿈꾸면서 ‘마을 만들기’를 꾀하지 싶습니다.


  마을은 언제나 놀이마당입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언제나 노니까요. 마을은 언제나 일터입니다. 왜냐하면, 어른들은 언제나 일하니까요. 다만, 놀이와 일은 서로 동떨어지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어른들 일거리를 거들면서 기쁘게 놉니다. 어른들은 언제나 아이들이 홀가분하게 놀도록 온갖 놀잇감을 손수 만들어서 건네며 함께 놉니다. 놀이노래를 가르치고, 놀이를 물려줍니다. 너른 마당과 들과 숲에서 아이들이 걱정없이 뛰놀도록 삶터를 가꿉니다.


  서울에서 꾀한다는 ‘마을 만들기’는 아이들이 신나게 뛰놀기를 바라는 꿈이어야지 싶습니다. 서울사람이 짓는다는 ‘마을’은 바로 어른과 아이가 함께 웃고 노래하는 잔치마당을 바라는 꿈으로 나아가야지 싶습니다.


  청와대와 국회의사당에서도 앙증맞은 마을이 태어나기를 빕니다. 강아랫마을과 강웃마을 모두 사랑스러운 마을이 새로 자랄 수 있기를 빕니다. 이리하여, 나중에는 서울과 시골이라는 울타리가 없이, 모두 한동아리로 어깨동무할 수 있는 멋진 ‘한마을 이웃’이 될 수 있기를 빌어요. 4348.4.28.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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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무와 게로 오늘은 시장 보러 가는 날 벨 이마주 12
시마다 유카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중앙출판사(중앙미디어) / 2002년 2월
평점 :
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24



서로 아끼고 보살피기에 어깨동무

― 바무와 게로, 오늘은 시장 보러 가는 날

 시마다 유카 글·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중앙출판사 펴냄, 2001.4.30.



  들풀은 아주 조그마한 땅뙈기에서 함께 돋습니다. 풀을 캐 보면, 여러 가지 풀이 한뿌리로 섞여서 자라기 일쑤입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올라오는 풀은 한곳에서 서로 얼크러집니다. 모든 풀은 저마다 다른 때에 꽃을 피우고 씨를 터뜨립니다.


  때때로 한 가지 풀만 잔뜩 우거지기도 하는데, 아무리 한 가지 풀만 잔뜩 우거지더라도 이 풀은 이내 수그러듭니다. 그러고는 다른 풀이 새롭게 우거진 뒤 수그러들고, 또 다른 풀이 새삼스레 우거지면서 수그러듭니다.




.. 언제나 늦잠을 자는 게로가 오늘은 좀 달라 ..  (3쪽)



  온누리에 한 가지 풀만 자란다면 매우 따분하리라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셀 수 없도록 많은 풀이 골고루 자라기에 따분하지 않으면서 재미난 삶이 되리라 느낍니다. 쌀도 먹고 보리도 먹고 귀리도 먹고 서숙도 먹듯이, 돌나물도 먹고 부추도 먹고 냉이도 먹고 고들빼기도 먹고 까마중도 먹습니다. 갯기름나물도 뜯고 유채도 뜯고 살갈퀴도 뜯으며 이 풀 저 풀 골고루 뜯습니다.


  쑥을 뜯으면 쑥내음이 번집니다. 민들레를 뜯으면 민들레내음이 퍼집니다. 새로 돋은 감잎과 모과잎과 매화잎을 톡 따면, 감잎내음과 모과잎내음과 매화잎내음이 부드럽게 흐릅니다. 여름으로 접어들면 나뭇잎이 억세어 먹기 힘들지만, 봄이 무르익은 철에는 찔레잎도 맛나고 느티잎도 먹을 만합니다. 모두 사랑스러운 풀이요 잎이며, 우리 이웃입니다.




.. 오늘은 시장 보기에 딱 좋은, 맑은 날씨 ..  (7쪽)



  시마다 유카 님이 빚은 그림책 《바무와 게로, 오늘은 시장 보러 가는 날》(중앙출판사,2001)을 읽습니다. 이 그림책은 우리 집 작은아이가 몹시 좋아합니다. 멍멍이가 자동차를 달리는 그림이 나오기에 몹시 좋아할 만하구나 싶으면서도, 멍멍이와 개구리와 여러 동무들이 신나게 어우러져서 노는 이야기가 흐르니까 참으로 좋아할 만하겠다고 느낍니다.



.. 마지막으로 모두들 아주아주 좋아하는 골동품 가게에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하나씩 사고 돌아가자 ..  (25쪽)




  《바무와 게로, 오늘은 시장 보러 가는 날》은 책이름 그대로 바무와 게로라는 두 아이가 맑은 날에 저자마실을 다녀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두 아이는 숲이 우거지고 들이 푸른 곳에서 조용히 지냅니다. 두 아이는 자동차를 달려 읍내를 다녀오는 듯합니다. 들바람을 마시고 숲내음을 맡으면서 저자마실을 가요.


  집에서는 집에서대로 놀고, 읍내에서는 읍내에서대로 놉니다. 집에서는 들과 하늘과 나무와 풀과 꽃과 온갖 벌레와 새를 마주하면서 놀 테고, 읍내에서는 재미난 것을 살피고 여러 가게를 두리번거리면서 놉니다. 모든 것이 새롭고, 어느 곳에서나 즐겁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은 어떤 것이든 모두 소꿉으로 삼습니다. 돌멩이도 소꿉이 되고, 조개껍데기고 소꿉이 됩니다. 비닐조각조차 소꿉이 되며, 플라스틱조각이나 나무토막도 소꿉이 됩니다. 맨손으로도 놀며, 마당에서뿐 아니라 길거리에서도 놀아요. 골목에서도 놀고, 바다에서든 들에서든 마음껏 뛰어다니면서 놉니다.



.. 이튿날 아침, 게로는 일찍 일어났어. 그리고 새로 산 프라이팬으로 ..  (31쪽)





  서로 아낄 줄 알기에 동무입니다. 서로 보살필 줄 알기에 한집에서 삽니다. 서로 사랑하니 어깨동무를 합니다. 서로 기대고 빙그레 웃으니 너나들이로 지냅니다.


  놀이동무는 일동무입니다. 일동무는 노래동무입니다. 노래동무는 웃음동무이고, 웃음동무는 삶동무입니다. 한집에서 함께 사는 동무이면서, 한마을에서 함께 사는 동무이고, 한나라에서 함께 사는 동무인 한편, 한별, 곧 지구별에서 함께 어깨동무하는 동무입니다.


  서로 아끼면서 반기니 함께 놀 수 있습니다. 서로 보살피면서 빙그레 웃으니 놀이가 기쁩니다. 서로 사랑하면서 살림을 함께 가꾸니 날마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피어납니다.


  새로운 아침에 새로운 놀이를 가만히 그립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 집 아이들이 서로 아끼고 보살피면서 놀겠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아이들을 아끼고 보살피면서 함께 놀 생각입니다. 4348.4.28.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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