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 히로시마
존 허시 지음, 김영희 옮김 / 책과함께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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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46



늘 ‘민간인’을 죽이는 전쟁 불구덩이

― 1945 히로시마

 존 허시 글

 김영희 옮김

 책과함께 펴냄, 2015.8.6. 11000원



  1914년에 중국에서 태어난 존 허시 님은 열 살 무렵 미국으로 건너가서 살다가, 전쟁이 지구별을 휩쓸 무렵 종군기자가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한 해가 지날 무렵, 원자폭탄이 떨어진 일본에서 살아남은 여섯 사람을 만난 이야기를 썼고, 이 이야기는 1946년에 처음 책으로 나옵니다.


  존 허시 님은 그 뒤 마흔 해가 지나서 “40년 후” 이야기를 보탭니다. 원자폭탄이 일본에 떨어지고 난 뒤에 살아남은 여섯 사람이 지난 마흔 해 동안 어떤 살림을 꾸렸는가를 돌아보는 이야기가 책 하나로 새로 묶였어요. 《1945년 히로시마》(책과함께,2015)는 바로 이 두 가지 이야기를 다루는 책입니다.



폭격기들이 지나가자마자 나카무라 부인은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2시 30분이 조금 지나 있었다. 집에 들어서자 곧장 라디오부터 켰다. 그런데 다시 대피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오는 게 아닌가. 순간 짜증이 몰려왔다. 아이들을 쳐다봤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난 몇 주 동안 동부 연병장까지 도대체 얼마나 왔다갔다했던가. (24쪽)


그는 양말만 신은 채로 여기저기 끌려다녔고, 밀려드는 환자에 아연실색했으며, 끔찍할 정도로 드러난 생살에 자지러졌다. 결국 그는 의사로서의 직업의식을 완전히 잃었다. 능숙한 외과의사로서, 환자에게 연민을 느끼는 인간으로서 진료할 수가 없었다. 대신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닦고 바르고 감고, 닦고 바르고 감기만을 반복했다. (54쪽)



  《1945년 히로시마》라는 책은 ‘일본 원폭 생존자’ 여섯 사람을 눈여겨봅니다. 이 생존자 여섯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서양 신부입니다. 일본에 서양 종교를 퍼뜨리려고 들어온 사람이지요. 이 한 사람을 뺀 다섯 사람은 일본사람이고, 군인이 아닌 민간인입니다. 《1945년 히로시마》는 전쟁 불구덩이에서 ‘민간인’은 어떻게 전쟁을 맞닥뜨려야 했는가를 보여줍니다. 일본은 전쟁을 일으킨 나라이지만, 군인이 아닌 민간인은 어떤 살림이고 삶이었는가 하는 대목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적에 틀림없이 일본사람이 가장 많이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사람도 무척 많이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으로 끌려가서 강제노동을 해야 한 사람들이 많았으니까요.


  원자폭탄이 터진 뒤에 가까스로 살아남은 ‘식민지 강제징용 노동자’는 고향나라로 돌아온 뒤에 모질게 앓습니다. ‘원폭병’에 걸려서 시름시름 앓지요.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죽고, 나중에 원폭병인 줄 알아도 한국 정부나 일본 정부 모두 등을 돌렸기에 그대로 죽습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뿐 아니라 ‘일본인 원폭 피해자’도 오랫동안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본에는 ‘전쟁 미치광이’가 된 사람들도 있었고 ‘전쟁터에 끌려간’ 사람들도 있었으며 ‘천황 폐하한테 충성’하겠노라 다짐한 사람들도 있었을 테고 ‘전쟁이란 까맣게 모르면서 조용히 살던’ 사람들도 있었어요. 원자폭탄은 이 모든 사람들을 한꺼번에 죽였고, 전쟁을 일으킨 정치권력은 ‘죽은 사람’하고 ‘살아남은 사람’ 앞에 고개 숙여 뉘우치는 몸짓이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 사사키 양도 마찬가지 처지였다. 그녀는 의지할 사람 한 명 없이 공장 앞마당에 대충 임시방편으로 만든 지붕 아닌 지붕 아래 버려졌다 … 부러진 다리 때문에 무시무시한 고통에 시달리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90쪽)


사사키 양은 두 동생을 그 고아원에 맡겼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자신도 그 고아원의 보모 자리를 지원했다. 그녀는 그곳에 채용되었고, 그 후 야스오와 야에코와 함께 지낼 수 있는 것을 삶의 위안으로 삼았다. (204쪽)



  불구덩이에서 죽어야 했던 이들은 ‘민간인’입니다. 히로시마나 나가사키는 전쟁터가 아니라 ‘민간인 마을’이었으니까요. 군수공장이 이런 도시에 있었다 하더라도,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민간인’이지요. 또 한국·중국·대만에서 끌려온 ‘강제징용 노동자’이고요.


  더 헤아리면, 전쟁터에 나가서 총을 들어야 하는 이들도 ‘민간인’입니다. 몇몇 간부나 장교쯤이라면 직업군인일 테지만, 전쟁터에서 총알받이가 되어서 죽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민간인입니다. 더군다나 직업군인 사내를 낳은 어버이도 거의 모두 민간인이요, 군대에서 간부나 장교인 사람들 식구까지도 모두 민간인이라고 할 만해요.


  ‘사내’로 태어났기 때문에 ‘나라(전쟁을 일으키는 정치권력)’가 이들 민간인을 군대로 끌고 갑니다. 그동안 평화롭게 살던 민간인은 정치권력이 등을 미는 대로 총을 손에 쥐고서 ‘다른 민간인(이웃나라 사람)’을 죽이는 몫을 맡습니다. 다른 민간인도 군인이 되어야 하는데, 이들이 총을 겨누는 적군(우리한테 쳐들어온 이웃나라 군인)이란 똑같이 ‘민간인’일 수밖에 없어요.


  정치권력은 권좌에 앉아서 민간인을 이리저리 휘두릅니다. 민간인인 여느 사람들은 난데없이 총을 손에 쥐고 사람을 죽여야 합니다. 서로 죽이지 않으면 서로 죽으니, 너도 죽고 나도 죽는 끔찍한 불구덩이가 됩니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곳도 불구덩이요, 원자폭탄이 떨어지지 않은 수많은 전쟁터도 똑같이 불구덩이입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을 겪은 사람들을 지칭할 때, 일본인들은 ‘생존자’라는 단어를 가급적 사용하지 않으려 했다. 살아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 이 단어는 숭고한 죽음을 맞은 자들을 다소 경시하는 듯한 느낌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대신 나카무라 부인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지칭할 때 ‘피폭자’라는 다소 중립적인 단어가 사용되었다 … 일본 정부는, 승전국인 미국이 저지른 극악무도한 행위에 대한 도덕적 책임 등을 비롯하여 그 어떤 책임도 지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160쪽)



  존 허시 님이 쓴 《1945년 히로시마》에 나오는 여섯 사람 가운데 이 ‘끔찍하고 모진 전쟁 불구덩이’를 제대로 헤아리거나 살피거나 생각하는 사람은 딱 하나입니다. 원자폭탄이 처음 떨어지던 때에 한쪽 다리를 크게 다쳐서 걷지 못한 채 비를 쫄딱 맞으면서 며칠 동안 굶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사키’라는 여학생입니다. 원자폭탄이 떨어지던 그무렵에는 여학생이었으나, 이 불구덩이에서 다리를 다쳐서 절름발이가 된 뒤에는 어버이를 잃은 외톨이로 바뀝니다. 어린 두 동생을 절름발이인 몸으로 돌봐야 하는 외톨이예요.


  나는 《1945년 히로시마》를 읽으면서 다른 다섯 사람보다 이 한 사람을 눈여겨봅니다. 다른 다섯 사람 이야기도 안쓰럽다고 할 만하지만, 다른 다섯 사람은 ‘안쓰러운 아픔’을 겪고 난 뒤에 ‘전쟁하고 등을 지거나 전쟁을 깡그리 잊은 삶’으로 나아갔습니다. 오직 사사키라는 여학생은 ‘전쟁을 늘 껴안으면서 이 전쟁이 삶을 어떻게 무너뜨리는가’를 깊이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여학생 사사키는 외톨이가 되었다가, 두 동생을 고아원에 맡긴 뒤, 이녁 스스로도 고아원으로 들어가서 돌봄이(보모) 일을 합니다. 오랫동안 돌봄이 일을 하다가 동생들이 스스로 일어서서 잘 사는 모습을 지켜본 뒤에 수녀원에 조용히 들어갑니다. 수녀가 된 뒤에는 요양원 일을 하면서 한삶을 보내는데, 이녁은 늘 ‘아프고 외로운 이’ 곁에서 벗님 자리를 지켜요.



사사키 양은 아기 엄마들이 불쌍했다. 아기 엄마 중에는 매춘부도 있었다. 또 아기 아빠도 불쌍했다. 아기 아빠들은 열아홉 혹은 스무 살밖에 되지 않은 (미국) 청년들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자신들과 무관해 보이는 전쟁에 징집되어 온 처지였고, 아기 아빠로서의 책임감은 가장 기본적인 수준, 즉 죄책감 정도에 불과했다 … 경미하게 부상을 당한 피폭자와 권력에 굶주린 정치인들이 주로 원자폭탄을 들먹였다. 정작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전쟁이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희생시킨다는 사실인데 말이다. 전쟁은 원자폭탄과 소이탄 투하로 일본인들을 희생시켰고, 일본에게 침략당한 중국의 민간인들을 희생시켰으며, 죽을 수도 있고 불구가 될 수도 있는 전쟁에 마지못해 끌려나온 어린 일본인 병사와 미국인 병사들을 희생시켰다. 그리고 또 일본인 매춘부와 그들이 낳은 혼혈아들도 희생시켰다. (206∼207쪽)



  전쟁무기가 있으니 전쟁을 벌입니다. 전쟁무기는 평화가 아닌 전쟁을 벌이려고 마련하는 무기입니다. 그런데 정치권력을 손에 쥔 이들은 자꾸 전쟁무기를 만들려 합니다. 전쟁무기는 나날이 최첨단을 걷습니다. 최첨단 전쟁무기를 만드는 데 들어갈 돈은 어마어마합니다. 우리는 언뜻 ‘평화 지키기’ 때문에 전쟁무기를 갖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모든 전쟁무기는 전쟁을 하려는 뜻으로 만듭니다. 사람을 죽이는 전쟁무기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전쟁무기는 없습니다. ‘방어하는 전쟁무기’란 없다는 뜻이에요. 모든 전쟁무기는 ‘공격해서 죽이려’고 만들어요.


  더욱이 《1945년 히로시마》를 읽으면, ‘불쌍한 아기 엄마’와 ‘불쌍한 아기’와 ‘불쌍한 아기 아빠’를 바라보는 사사키라는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녁이 고아원에서 일하는 동안 마주하는 ‘세 가지 불쌍한 사람’은 모두 전쟁 때문에 나타납니다. 전쟁 때문에 한쪽에서는 가시내가 ‘성 노리개’가 됩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사내가 ‘전쟁에서 죽을까 두려워하면서 성욕 풀이’를 하는 바보가 됩니다. 그리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는 일본에서도 미국에서도 사랑받지 못하는 외톨이가 됩니다.


  전쟁은 얼마나 미친 짓일까요. 전쟁무기는 얼마나 끔찍한 것일까요. 전쟁무기 가운데 원자폭탄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일까요.


  히로시마는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기 앞서 조용하고 평화로운 도시였다고 합니다. 히로시마는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뒤 군수공장 도시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다가 원자폭탄이 떨어지면서 잿더미 도시가 되는데, 잿더미를 치워서 새롭게 일으켜세울 적에 유흥도시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전쟁 불구덩이에서 빠져나오니 이 문명 사회가 걷는 길은 ‘유흥도시’인가 싶어 아찔합니다.



원폭 투하 이후 도시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히로시마는 일본 전역에서 가장 현란한 유흥도시로 탈바꿈했다. (218쪽)



  《1945년 히로시마》 첫머리를 보면 하승수 님이 추천글을 씁니다. 이 추천글에서 김형률이라는 분 이야기를 밝혀요. ‘원폭 피해’를 받은 사람이 낳은 아이는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짤막하게 적습니다.


  1946년에 처음 선보인 책을 1986년에 보탤 적에 존 허시 님은 ‘한국인 원폭피해자’를 알 수 있었을까요, 알기 어려웠을까요? 아마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1980년대 첫무렵에 ‘한국인 원폭피해자’를 미국사람이 찾아내어 만나기란 몹시 어려웠을 테고, 이를 다룬 자료도 찾기가 매우 어려웠겠지요.


  그러나 한국에서도 ‘한국인 원폭피해자’를 돌아보고 살피며 도우려고 한 손길이 있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아니고, ‘한국 민간인’이 원폭피해자를 이웃으로 바라보았어요. 1975년에 《소리도 없다 이름도 없다》(창원사)라는 책이 처음으로 나왔고, 이 책을 쓴 박수복 님은 열 해 뒤에 《핵의 아이들》(한국기독교가정생활사)을 선보이면서, 그동안 한국인 원폭피해자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살핍니다. 이밖에 《한국인 원폭피해자(실태조사보고서)》(한국교회여성연합회)가 1984년에 나왔어요. 한국교회여성연합회와 사회사진연구소는 1989년에 《그날 이후》(한국교회여성연합회)라는 사진책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아픈 이들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전쟁 불구덩이도, 원자폭탄 불구덩이도 이 지구별에 다시 나타나지 않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2016.2.14.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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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자 식물 - 식물 영과 함께하는 치유 가이드
팸 몽고메리 지음, 박준식 옮김 / 샨티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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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45



새봄에 신나게 뜯을 쑥을 기다리면서

― 치유자 식물

 팸 몽고메리 글

 박준식 옮김

 샨티 펴냄, 2015.12.28. 18000원



  설날이 지나면서 겨울은 한껏 누그러집니다. 아직 이월이지만 우리 집 뒤꼍에서 자라는 뽕나무 둘레에는 쑥이 몽실몽실 돋습니다. 뽕나무 둘레뿐 아니라 이곳저곳에서 쑥싹을 만납니다. 곧 새봄 쑥을 신나게 뜯어서 먹을 수 있습니다.


  겨울이 저물면서 쑥이 돋는 요즈음은 코딱지나물이나 곰밤부리나 봄까지꽃도 함께 올라옵니다. 갈퀴덩굴도 살그마니 고개를 내밀어요. 냉이도 이 작은 새봄 들꽃 곁에서 살짝살짝 인사를 합니다.


  겨우내 찬바람에 옹크리면서 포근한 볕을 기다리던 들풀은 곧 온누리를 푸르게 덮으리라 생각해요. 추운 바람이 불던 겨울이 길었어도, 이 긴 겨울 끝에는 포근하면서 보드랍고 살가운 봄바람이 찾아온다는 꿈을 나누어 주어요.



우리는 원래 식물과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태어났으며, 따라서 식물과 우리를 하나로 연결시키는 공통의 언어를 발견해 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35쪽)


할머니는 식물을 사랑하는 분이셨다. 집안일을 모두 끝낸 오후만 되면 할머니는 풍성한 정원으로 나가서 무언가를 따거나 꺾곤 했는데, 일하는 내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듯 계속 중얼거리셨다. (38쪽)



  팸 몽고메리 님이 쓴 《치유자 식물》(샨티,2015)을 읽으면서 봄풀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미국에서 ‘약초 치료사’이자 ‘식물 영 힐러’로 일한다고 하는 팸 몽고메리 님이에요. 이 책을 읽으면서 미국 같은 서양에도 ‘약초 치료사’라는 사람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한국 같은 동양뿐 아니라 지구별 어디에서나 ‘풀로 몸을 다스리는 사람’은 늘 있었지 하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왜냐하면, 먼 옛날부터 이 지구별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땅을 일구어서 곡식이며 열매를 얻었으니까요. 땅을 일구기 앞서는 들풀이나 나무열매를 얻었어요. 언제나 풀과 나무한테서 밥을 얻었으니, 따로 치료사나 약초 치료사가 아니어도 풀을 잘 알거나 살피기 마련이에요.



매일 아침 새로운 날을 시작하면서 나는 밖으로 걸어 나가, 따스한 숨을 보내 주는 태양에 감사하고, 나에게 먹을 것을 주는 대지에 감사하며, 산소를 제공해 주는 나무에 감사하고, 이 땅에 생명수를 주고 내 몸에 필요한 수분을 제공해 주는 하트스프링의 순수한 물에 감사한다. (107쪽)


생명을 죽이는 방식의 현대화와 세계화가 전 세계를 잠식해 감에 따라 서구 외의 지역도 그 뒤를 바짝 뒤쫓고 있다. 자연의 상품화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참된 본성, 즉 우리가 지구를 통해서 영과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우리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분리된 상태가 직접적으로 반영된 것이며, (129쪽)



  한국에는 한의사가 있습니다. 한의사로 일하는 분들은 한약을 바로 ‘풀’에서 얻습니다. 풀 아닌 것으로도 한약을 재거나 달입니다만, 한약은 언제나 ‘풀’이 바탕이 된다고 할 만해요. 쑥뜸을 뜨더라도 쑥이 있어야 쑥뜸이 되어요. 쑥을 가리켜 그냥 ‘쑥’이라고도 하지만 ‘약쑥’이 따로 있고, 쑥을 잘 말려서 찻물로 끓여서 마셔요.


  우리는 보리를 말린 뒤에 ‘보리찻물’을 끓여서 마셔요. 보리는 보리밥도 되지만 찻물로 거듭나는 ‘약물’이 되기도 하는 셈입니다. 옥수수차이든 결명자차이든 모두 매한가지예요. 요즈음 널리 퍼진 ‘허브’라는 풀도 바로 ‘풀’입니다. 약풀이기 앞서 언제나 풀이에요.


  가만히 보면, 아침저녁으로 먹는 밥도 풀입니다. 나락이라고 하는 풀을 논에 씨앗으로 심어서 거둔 뒤에 겨를 벗겨 쌀알을 얻어요. 이 쌀알로 지은 밥이니, 밥도 ‘풀숨’이라고 할 만합니다. 풀 기운을 먹는 밥이라고 하겠지요.



내가 학생들과 하는 활동 가운데 하나가 밤 산책이다. 많은 사람이 어둠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이는 자기 안의 두려움들을 대면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211쪽)


우리가 육체의 눈만 사용해서 보는 까닭에 주변에 있는 것들의 전체 모습을 보지 못하고 한평생 살아간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274쪽)



  《치유자 식물》은 우리 몸을 달래거나 다스리도록 돕는 풀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잊고 지낸 풀을 이야기하고, 우리가 조금만 돌아보면 쉽게 만날 수 있는 풀 한 포기가 바로 우리 몸을 곱게 보살펴 준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멀리 있는 어떤 대단한 풀(약초)을 찾을 노릇이 아니라, 가만히 마음을 열어서 우리 보금자리를 둘러싼 풀을 알아보자는 이야기를 들려주지요.


  내 몸을 살리는 풀은 벼(쌀밥)가 될 수 있고, 보리가 될 수 있습니다. 쑥이 되거나 냉이가 될 수 있습니다. 씀바귀나 고들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서나물이나 민들레가 될 수 있고, 젓가락나물이나 피나물이 될 수 있어요. 토끼풀이나 꽃다지가 될 수 있고, 머위나 뱀밥이 될 수 있지요.


  상자나 그릇에 담아서 키우는 상추 한 포기가 우리 몸을 살릴 수 있고, 고춧잎이나 깻잎이나 콩잎이 우리 몸을 살찌울 수 있어요. 배춧잎이나 무잎이나 유채잎이 우리 몸을 보듬을 수 있을 테고요. 어느 풀이든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활짝 열어’서 마주할 때에 비로소 풀숨이 우리 몸으로 스며든다고 합니다.



보호와 관련해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은, 여러분이 허용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여러분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는 것이다. (304쪽)


우리는 바구니를 들고 민들레가 엄청나게 피어 있는 큰 들판으로 향한다. 그 꽃의 숫자만으로도 이 평범한 꽃의 성공이 입증된다 … 민들레 같은 식물이 우리의 현관 바로 앞에서 엄청나게 자라고 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의미심장하다. (336, 337쪽)



  새봄에 신나게 뜯을 쑥을 기다립니다. 새봄을 부르는 늦겨울비를 맞으면서 쑥잎을 쓰다듬습니다. 쑥잎 곁에서 하얗게 꽃을 피운 곰밤부리도 가만히 어루만집니다. 곰밤부리 둘레에서 보랏빛 꽃송이를 앙증맞게 터뜨린 봄까지꽃도 살며시 건드립니다. 빗방울이 톡 터지듯이 퍼집니다. 풀거미가 사는 거미줄에도 빗방울이 조롱조롱 달리고, 겨울을 이기고 맺힌 꽃눈하고 잎눈에도 빗방울이 알롱달롱 달립니다.


  우리 집에서 돋는 봄풀이 우리 식구한테 새로운 숨결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들여다봅니다. 우리 이웃집에서 돋는 봄풀은 우리 이웃집 사람들한테 싱그러운 숨결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이웃 마을과 들에서 돋는 봄풀은 모든 이웃한테 사랑스러운 숨결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켜봅니다. 2016.2.13.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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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예요? 생각하는 분홍고래 2
콘스탄케 외르벡 닐센 지음, 정철우 옮김, 아킨 두자킨 그림 / 분홍고래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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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624



‘나는 누구인가?’를 스스로 푸는 수수께끼

― 나는 누구예요?

 콘스탄체 외르벡 닐센 글

 아킨 두자킨 그림

 정철우 옮김

 분홍고래 펴냄, 2013.9.13. 12000원



  살랑거리는 포근한 바람을 타고서 노르웨이에서 한국으로 날아온 그림책 《나는 누구예요?》(분홍고래,2013)를 읽습니다. 콘스탄체 외르벡 닐센 님이 글을 쓰고, 아킨 두자킨 님이 그림을 그린 이 그림책은 ‘내가 누구인가?’ 하는 수수께끼를 어린이가 스스로 푸는 길을 찬찬히 들려줍니다. 성교육 지식으로서 어머니랑 아버지 몸에 있는 두 가지 씨앗이 만나서 태어나는 ‘나’라고 하는 ‘몸’을 넘어서, 이 몸을 다스리면서 움직이는 ‘또 다른 나’라고 하는 ‘넋’이 무엇인가를 찾고 싶은 어린이한테 길찾기를 들려주어요.



윌리엄은 가끔 혼자 있고 싶어요. 친구들과 뛰어 놀라는 잔소리를 안 들어도 되고, 얼마든지 생각에 빠질 수 있으니까요. 생각하고 싶은데 왜 놀아야 하죠? 그리고 생각을 어떻게 멈추죠? 친할머니는 윌리엄이 안 보여도 어디 있는지 다 알아요. (2쪽)




  그림책에 나오는 아이는 때때로 혼자 생각에 잠깁니다. 혼자 생각에 잠기는 날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니,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쏟아지는 생각을 들여다보느라 바쁘니까요. 흐르는 생각을 살펴야 하니까요.


  생각을 하면서 공을 찰 수 없고, 생각을 멈추면서 술래잡기를 할 수 없어요. 나무에 마련한 오두막으로 올라가서 조용히 웅크리고 앉아서 생각에 잠겨요. 나무가 베푸는 기운을 받고, 숲내음이 흐르는 오두막 기운을 함께 느끼면서 생각에 잠겨요.


  그림책을 보다가 ‘우리 집 나무도 무럭무럭 자라서 이런 오두막을 지을 수 있으면 좋겠네’ 하고 생각해 봅니다. 아니면 우리 집을 두 층으로 올려서 다락방을 하나 마련할 수 있으면 좋겠네 하고도 생각합니다. 그러면 나중에 우리 집 아이들이 저마다 혼자 조용히 생각에 잠기고 싶어 할 적에 그곳에 깃들어서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 테니까요.



여기 나무 집에 혼자 있는 윌리엄은 누구일까요? 윌리엄은 엄마의 꿈이 이루어진 거래요. 그렇지만 어떻게 꿈이 아이가 될 수 있죠? 그럼 우리는 태어나기 전에 누군가의 꿈이었다는 거예요? (4쪽)


외할머니는 윌리엄의 질문을 듣지 못했나 봐요. “그럼 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데?” 대답은 않고 오히려 되물어요. (10쪽)




  ‘나는 누구지?’ 하고 궁금해 하는 아이는 둘레에서 마주하는 사람들한테 이 수수께끼를 묻습니다. 두 할머니와 할아버지한테 말씀을 여쭈고, 어머니하고 아버지한테 말씀을 여쭙니다. 마을 형이나 누나한테 묻습니다. 아이를 둘러싼 사람들은 저마다 맞닥뜨리는 삶에 맞추어 아이한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마을 형들은 “넌 그냥 멍청이야(20쪽).” 하면서 짓궂게 놀립니다. 마을 누나는 아이 이름에 깃든 뜻이 남달리 있으리라고 넌지시 귀띔말을 들려줍니다.


  아이는 여러 사람한테 수수께끼를 묻는 사이에 어렴풋하게 알 듯도 하다고 느끼지만, 도무지 모르겠다고, 오히려 실타래가 더 엉킨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바야흐로 종잡을 수 없는 노릇이라고 느껴요. 더군다나 증조할머니 말씀처럼 “크면 안다”고 하는 이야기를 기다릴 수 없습니다. 아이는 바로 오늘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을 뿐, 나이가 마흔 살이나 예순 살이나 여든 살이 되어서야 알기를 바라지 않아요.



증조할머니는 윌리엄이 소중한 선물이래요. 누구에게도 줄 수 없는 선물이요. 자기가 어떻게 선물일 수 있느냐고 물으면 한동안 말이 없어요. 그러고는 이렇게 얘기하죠. “네가 크면 알게 될 거야.” (18쪽)


“너 이름마다 뜻이 있는 거 아니? 내 이름은 올리케야. 늑대처럼 강하다는 뜻이지. 나한테 딱 맞는 이름이야. 난 포기하지 않거든.” 어쩌면 윌리엄이라는 이름이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 줄지 몰라요. 그런데 세상에는 윌리엄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너무 많아요. (23쪽)




  우리는 저마다 ‘내가 누구인지’ 얼마나 알까요? 우리는 스스로 ‘내가 누구인지’ 알려고 얼마나 마음을 기울일까요? 돈을 버느라 너무 바빠서 ‘내가 누구인지’ 생각할 틈이 없을까요? 그림책 《나는 누구예요?》에 나오는 아이 아버지는 일하느라 바빠서 ‘내가 누구인지’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아이 할아버지 한 분은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일(취미)에 푹 빠지느라 아이가 묻는 말에 찬찬히 대꾸할 겨를이 없습니다. 아이 어머니는 ‘꿈’이라고 이야기를 해 주는데, 아이로서는 ‘꿈’이 무엇인지도 아직 잘 몰라요. 어머니가 아이를 꿈꾸었기에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는 대목이라든지, 어머니한테 어떤 아이가 이 보금자리로 찾아오기를 꿈꾸었는가 하는 대목까지는 잘 모릅니다.


  나무 오두막에서 한참 생각에 잠긴 아이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할머니 한 분은 영차영차 힘을 내어 오두막까지 올라옵니다. 주전부리를 챙겨서 올라오시지요. 그러고는 아이한테 아주 쉬운 실마리를 하나 밝혀 줍니다. 아마 할머니도 할머니 스스로 누구인가 하는 대목을 새롭게 생각해 보셨겠지요. 나이가 들면 다 알 수 있다는 실마리가 아니라, 나이가 어릴 적에는 어린 숨결대로 어떤 넋이고, 나이를 먹는 동안에는 이때에 새롭게 어떤 넋이며, 나이가 많이 들어 늙은 때에는 이때대로 새롭게 어떤 넋인가를 생각해 보셨구나 싶어요.



한참 뒤 할머니가 말했어요. “어쩌면 네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너일지도 몰라.”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요?” “그래, 모든 것.” (26쪽)




  기쁨을 마음에 담으면 기쁨이 바로 나예요. 슬픔을 마음에 얹으면 슬픔이 바로 나예요. 웃음을 마음 가득 터뜨리면 웃음이 바로 나예요. 눈물을 펑펑 쏟아내면 눈물이 바로 나예요. 그러니까, 나는 늘 바뀝니다. 나는 늘 거듭나기도 합니다. 나는 늘 제자리걸음을 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뒷걸음질을 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껑충 뛰어오를 수 있습니다. 신나게 달릴 수 있고, 고단하게 주저앉을 수 있습니다. 참말 나는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림책 《나는 누구예요?》를 읽을 어린이가 이 대목을 어느 만큼 스스로 헤아리거나 깨달을 만한지는 알기 어려운 노릇입니다. 그러나 이 그림책을 어머니랑 아버지가 아이하고 함께 읽으면서 생각을 기울이면 아름다우리라 느껴요. 어머니도 오늘 이곳에서 ‘나는 누구일까’ 하고 돌아보고, 아버지도 오늘 이곳에서 ‘나는 누구인가’ 하고 되새기면서, 아이가 아이 스스로 ‘나는 어떤 사랑을 받아서 어떤 꿈을 가슴에 품고 이곳에 태어난 넋인지 궁금하네’ 하는 수수께끼를 풀도록 도와줄 수 있으면 참으로 아름답겠지요.


  함께 생각하면서 함께 길을 찾습니다. 아직 어렴풋하더라도, 아직 잘 모르겠더라도, 서로 손을 맞잡으면서 씩씩하게 새로운 길을 걸어갑니다. 2016.2.13.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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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의 화학자 - 화학과 요리가 만나는 기발하고 맛있는 과학책
라파엘 오몽.티에리 막스 지음, 김성희 옮김 / 더숲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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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31



‘쓴맛’도 맛있다고 배우는 부엌살림

― 부엌의 화학자

 라파엘 오몽 글

 김성희 옮김

 더숲 펴냄, 2016.1.27. 13000원



  만화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보면, 활활 타오르는 불에 부침판을 올려서 베이컨하고 달걀을 굽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때에 하울은 기름을 두르지 않고 달걀을 부쳐요.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고 이 대목을 지나쳤습니다. 나중에 집에서 베이컨을 처음으로 부침판에 올려서 구워 보고 나서야 이 대목이 다시 보였어요.


  아이들하고 만화영화를 다시 보다가 베이컨 굽기를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예전에는 이 대목을 그러려니 하고 지나친 까닭은 ‘몰랐’기 때문입니다. 베이컨은 부침판에 바로 얹어서 불을 올리면 기름을 따로 두르지 않아도 ‘베이컨에서 나오는 기름’이 워낙 많기 때문에 베이컨을 자글자글 구우면서 달걀을 손쉽게 익힐 수 있어요. 더욱이 베이컨은 처음부터 부침판에 얹어도 들러붙지 않습니다. 달걀에 베이컨 냄새가 두루 배면서 남다르다 싶은 맛이 되기도 해요.


  그러니까 세겹살을 구우면서 나오는 기름으로도 달걀을 부칠 수 있겠지요. 고깃집에서는 세겹살을 구우면서 나오는 기름으로 김치를 폭 절여서 먹기도 합니다.




분자요리의 관점에서 밀가루는 더 이상 비스킷에 꼭 필요한 재료가 아니며, 달걀이 없어도 수플레를 만들 수 없고, 베이킹파우더 없이 케이크를 부풀릴 수 있으며, (13쪽)


요리사는 어떻게 라즈베리로 구름 같은 요리를 만들게 되었을까? 이것이 진짜 중요한 질문이다! 어떻게 요리로 사람들을 그토록 감동시킬 생각을 했을까? (24쪽)



  라파엘 오몽 님이 쓴 《부엌의 화학자》(더숲,2016)를 가만히 읽습니다. 부엌에서 요리를 하면서 과학을 돌아본다는 화학자 이야기가 흐릅니다. 부엌에서 밥을 짓는 손길마다 곳곳에 화학 이야기가 깃든다고 하는 대목을 밝혀 줍니다. 분자식이나 분자원리를 잘 모르던 먼 옛날 사람도 동양이든 서양이든 ‘분자요리’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처음에는 ‘그럴 수 있겠네’ 싶다가, 책을 읽는 내내 ‘참으로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러면서 ‘오늘 우리가 누리는 온갖 밥짓기’를 처음으로 깨닫거나 알아차린 사람들 살림살이를 그려 봅니다.


  아마 처음에는 ‘실패’나 ‘잘못’이라고 여겼을 수 있는데, 때때로 실패하거나 잘못을 해 보면서 새로운 밥짓기를 알아내요. 처음부터 삭혀서 먹거나 말려서 먹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해요. 처음에는 그때그때 땅에서 훑어서 먹었겠지요. 열매나 곡식이나 풀을 말리는 손길도 나중에야 알았겠지요. 말린 것을 물이 불리거나 불에 익혀서 먹는 손길을 처음부터 알지는 못했으리라 느껴요.



우리 연구에 따르면 달걀흰자는 62℃에서 응고하고, 노른자는 68℃에서 응고한다 … 제일 중요한 결론은 달걀을 100℃에서 익히지 말라는 것이다! 이 경우 응고가 지나치게 많이 진행되고, 그 결과 단백질의 그물 구조가 너무 촘촘해진다. (67∼68쪽)


물리화확자는 스테이크를 굽는 기술에서 ‘온도 기울기’에 주목한다. 스테이크의 겉과 속 사이에 존재하는 연속적인 온도 변화를 두고 하는 얘기다. (77쪽)




  한국에서 김치를 담근다거나, 서양에서 치즈를 빚는다거나, 한국에서 소금에 절인 물고리를 먹는다거나, 서양에서 잼을 졸인다고 하는 밥짓기도, 맨 처음부터 이렇게 먹을 줄 알았기 때문에 먹지는 않았으리라 느껴요. 그렇다고 그 옛날에 화학방정식이나 분자식을 알았기에 이렇게 손질을 하거나 다뤄서 먹지는 않았을 테고요.


  그야말로 처음에는 수없이 실패하고, 수없이 버리다가, 문득 이러한 맛도 재미있거나 새롭거나 좋기도 하다고 알아차렸으리라 봅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여러 가지 밥짓기를 ‘분자요리’라는 이름으로 낱낱이 파헤치면서 새로운 밥짓기를 헤아릴 수 있을 테고요.


  그러고 보면, 우리는 수없이 깨지고 까지면서 배워요. 아이들은 유리잔이나 접시를 들고 나르다가 그만 미끄러뜨려서 깨뜨리지요. 아이들은 한손으로도 얼마든지 잘 들거나 나를 수 있다고 뽐내다가 그만 잘못을 저지르는 셈인데, 이렇게 깨뜨리면서 하나씩 배워요. 신나게 달리기를 하다가 넘어지면서 ‘왜 넘어졌지?’ 하고 돌아보면서 배워요. 이모저모 여느 틀대로 밥짓기를 하다가 뭔가 어긋나서 잘 안 되면, ‘왜 맛이 이렇지?’ 하고 돌아보다가 새로운 밥짓기를 익히기도 해요.



예전에 할머니들은 삼투 현상이나 수소이온농도 지수가 무엇인지 몰라도 훌륭한 요리를 만들어냈다. 경험을 통해 직관적인 방식으로 그 요소들을 다룰 줄 알았던 것이다. (128쪽)


초콜릿 무스의 질감은 다른 지방성 재료와 액체 재료를 가지고도 만들 수 있다. 그 질감의 비밀은 지방질과 액체, 공기를 혼합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화학자의 시각에서는 물과 유사한 물질에 해당하는 화이트와인과 푸아그라나 치즈만 있으면 화이트와인 푸아그라 무스나 화이트와인 치즈 무스를 만들 수 있다. (198쪽)



  그나저나 《부엌의 화학자》에서 다루는 ‘분자요리’는 모두 서양요리입니다. 다만, 요새는 서양요리나 한국요리 사이에 울타리가 아주 얕아요. 아니, 울타리가 없다고 할 만합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여러 가지 분자요리를 오늘날에는 누구나 재미있게 해 볼 만하리라 생각해요. 그래도 책끝에 ‘한국요리를 분자요리 얼거리로 돌아보기’를 놓고 몇 쪽쯤으로 붙이면 어떠했을까 싶어요. 이를테면 김치는 왜 분자요리일는지 살필 만하고, 젓갈이나 된장도 재미난 분자요리라는 대목으로 살필 수 있어요.


  콩 하나로 콩밥을 짓기도 하지만, 두부도 빚고, 된장이나 간장도 나와요. 국이나 찌개를 끓일 적에는 분자 얼거리가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엿볼 수 있을 테지요. 《부엌의 화학자》에서는 국이나 찌개 같은 밥짓기는 다루지 않으니, 한국사람이 흔히 먹는 밥을 놓고는 좀처럼 분자요리로 마주보기는 수월하지 않아요.


  오늘 아침도 밥상을 기쁘게 차리면서 생각을 기울입니다. 엊저녁에 먹고 남긴 밥을 알맞게 데울 온도를 헤아리고, 어느 만큼 데워야 맛나게 먹을 만한가를 살핍니다. 몇 초를 덜 데우면 찬 기운이 그대로 남고, 몇 초를 더 데우면 외려 굳거나 눌러붙습니다. 불을 어떻게 올려서 어느 만큼 손을 쓰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밥맛이에요. 하나부터 열까지 분자요리라는 틀로 바라보노라면, 나도 우리 집에서 ‘밥아비’이면서 ‘부엌 화학자’가 될 수 있습니다. 때때로 쓴맛을 보면서 이 쓴맛으로 밥살림을 새롭게 배우는 아침저녁입니다. 2016.2.12.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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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수학 그림책 - 미야니시 다쓰야의 ‘수’ 이야기
미야니시 다쓰야 글.그림, 김숙 옮김 / 북뱅크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616



밤하늘 별을 세는 숫자놀이

― 처음 만나는 수학 그림책

 미야니시 다쓰야 글·그림

 김숙 옮김

 북뱅크 펴냄, 2015.7.30. 11000원



  아이들하고 집에서 셈놀이를 하다가 내 어릴 적을 곰곰이 돌아봅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을 세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눈앞에 있는 것을 찬찬히 세면 되니까요. 그런데 학교에 들어가니 ‘눈앞에 없는 것’을 세라고 가르치지요. 처음에 산수를 배우면서 무척 어리둥절했어요. 아니 왜 눈앞에 없는 것을 세라고 하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이르러서야 곱셈이나 나눗셈을 한다든지, 방정식이나 여러 수식을 익히려면 ‘눈앞에 없는 것’을 기호로 셀 줄 알아야 하는구나 하고 깨달았지만, 처음에는 왜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닌 것을 세라고 시키거나 묻는가 하고 아리송하기만 했습니다.


  내 어릴 적에 학교에서 교과서로 배운 것하고 오늘 이곳에서 아이들한테 가르칠 것을 함께 돌아봅니다. 무엇을 가르치거나 배우든 왜 가르치거나 배우는가부터 이야기할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어느 나이에 이르렀으니 꼭 배워야 한다는 얘기보다는, 이것을 배우면서 어떻게 살려서 쓸 만한가를 알려주고, 이것을 배우면서 생각이나 살림이나 생각을 얼마나 한껏 키울 만한가를 들려줄 수 있어야지 싶어요.




“모르겠지? 그러면 이 꽃삽은 내가 가져가겠다! 흐흐흐.” 숫자별 외계인이 그렇게 말한 바로 그때, (19쪽)



  미야니시 다쓰야(미야니시 타츠야) 님이 빚은 그림책 《처음 만나는 수학 그림책》(북뱅크,2015)을 아이들하고 찬찬히 읽습니다. 큰아이는 이 그림책에 나오는 셈을 잘 읽고, 작은아이는 아직 숫자를 다 읽지 못합니다. 그래도 작은아이는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으면서 셀 줄 압니다. 그래, 너처럼 손가락으로 짚으면서 세도 되지. 누구나 처음에는 그렇게 하나씩 짚으면서(만지면서) 센단다. 이렇게 눈으로 보고 손으로 짚으면서 차근차근 느낄 적에 비로소 이러한 숫자를 마음으로도 그릴 수 있어.


  그림책 《처음 만나는 수학 그림책》에는 외계인이 나옵니다. 처음에는 ‘숫자별 외계인’이 지구별에 나타나서 놀이터 아이들한테 다가오더니 낼름 꽃삽을 빼앗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꽃삽을 빼앗더니 숫자 문제를 못 풀면 꽃삽을 그대로 가져가겠노라 하고 말해요.


  어른인 이 외계인은 참으로 엉뚱하지요. 난데없이 나타나서 뜬금없이 아이들 것을 빼앗겠다고 하니까요. 더군다나 문제를 못 풀면 제 것이라고 외치니 더더욱 짓궂지요.




비행접시가 땅에 내려왔어. 그 안에서 숫자별 외계인 아이들이 내렸어. “얘들아, 숫자별 외계인 아이들 수는?” “음, 5보다 5 많으니까…….” “답은 바로 10이지!” 누군가가 대답하면서 비행접시에서 나왔어. (28∼29쪽)



  꽃삽을 빼앗긴 아이들은 씩씩하게 숫자 문제를 풉니다. 숫자별 외계인은 지구별 어린이가 너무 똑똑하다면서 붉으락푸르락합니다. 나중에는 그냥 꽃삽을 가로채려 합니다. 이즈음 아이들을 돕는 ‘더하기 아저씨(더하기 맨)’가 나타나서 도와주어요. ‘더하기 아저씨’는 숫자별 외계인을 꼼짝 못하도록 ‘더하기 문제’를 척척 맞추어 줍니다.


  나중에는 숫자별에서 ‘어린이 외계인’하고 ‘어머니 외계인’까지 지구별로 찾아와서 함께 숫자놀이를 해요. 어머니 외계인은 지구별 꽃삽이 더없이 멋있고 쓸모있구나 싶어서 얻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아버지 외계인’이 짓궂은 짓을 해서 미안하다고 밝히면서 ‘숫자로 선물’을 남기고 떠납니다.


  뭐, 숫자놀이하고는 동떨어진 얘기이지만, 꽃삽은 참으로 멋있고 재미난 연장이에요. 꽃삽으로 흙을 잘 뜰 수 있고, 꽃삽으로 땅을 파서 씨앗을 심기에 좋고, 작은 나무라면 꽃삽으로도 얼마든지 옮겨심기를 할 만해요. 꽃삽 하나만 있으면 흙놀이를 신나게 하면서 해가 떨어지는 줄조차 잊을 만하고요.



숫자별 외계인들은 모두 자기네 별로 돌아갔어. 이제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에 비행접시는 없어. 하나도 없으니까 비행접시 수는 0(영)이야. 개구리도 집으로 가서 보이지 않았어. 한 마리도 없으니까 개구리 수도 0. 달팽이도 닭도 가 버려서 한 마리도 없기 때문에 달팽이도 닭도 0. (38쪽)




  그림책 《처음 만나는 수학 그림책》을 보면, 숫자별 외계인이 내는 숫자 문제가 나옵니다만, 이 문제 말고도 숫자로 셀 것이 곳곳에 나옵니다. 이를테면, 구름이 있고, 나무가 있어요. 숫자별 외계인이 타고 오는 우주선도 있으며, 어느새 밤이 깊으면서 하늘 가득 돋은 별도 있지요. 숫자별 외계인이 지구를 떠난 뒤에는 밤하늘 별만 가득 남는데, 아이들하고 별 숫자를 세면서 놀 수 있습니다.


  그림책을 함께 보던 큰아이는 “별이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세?” 하고 묻습니다. 나는 “하나씩 세다 보면 다 셀 수 있어.” 하고 얘기해 줍니다. 못 셀 듯하다고 여기면 못 세기 마련이고, 하나씩 세다 보면 다 셀 수 있기 마련이에요.


  그림책에 나오는 별을 셀 만하다면, 우리 집 마당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만나는 수많은 별도 셀 만해요. 마당에 놓은 평상에 함께 드러누워서 서로 하늘을 갈라 한쪽 하늘에 별이 얼마나 되는가를 세 볼 수 있습니다. 하나부터 백까지 세고, 백에서 이백까지 셉니다. 숫자는 자꾸 늘어서 삼백이 되고 사백이 됩니다.


  문득 어릴 적 일이 다시 떠오릅니다. 어릴 적에 우리 어머니는 나한테 숫자 세기를 시키면서 숫자하고 가까워지도록 이끌었습니다. 별을 세도록 이끌었고, 꽃을 세도록 이끌었어요. 때로는 나뭇잎을 세도록 이끌었어요. 잠자리에서는 잠이 올 때까지 숫자를 몇까지 셀 수 있는지 물어보셨어요. 때로는 서로 숫자를 하나씩 말하기를 하면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고요. 이제 와서 돌아보니 천이나 이천이라는 숫자를 서로 하나씩 말하면서 숫자놀이를 하는 일이란, 이런 놀이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란, 참 대단하네 싶습니다. 천까지 함께 세고, 이천까지도 같이 세는 몸짓으로 어른들은 아이들을 사랑으로 가르치는 셈입니다. 2016.2.12.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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