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 테리 이글턴의 아주 특별한 문학 강의
테리 이글턴 지음, 이미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읽기 삶읽기 233



아름다운 삶을 문학에서 읽는 눈

―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테리 이글턴 글

 이미애 옮김

 책읽는수요일 펴냄, 2016.1.15. 16000원



  우리 생각이나 느낌을 글로 아름답게 빚으면 이를 ‘문학’이라고 합니다. 그냥 쓰는 글로는 아름다운 숨결이 되지 않아서 문학이라 하지 않아요. 이를테면, 병뚜껑에 적힌 ‘돌리세요’ 같은 글이라든지, 과자 봉지에 적힌 ‘뜯는 곳’ 같은 글은 따로 문학이라 하지 않습니다. 자전거나 선풍기를 새로 장만할 적에 받는 설명서를 놓고도 문학이라 하지 않아요. 지식이나 정보를 들려주기만 하는 글은 그냥 ‘지식 글’이나 ‘정보 글’이에요.


  그렇다고 문학에서 지식이나 정보를 안 다루지는 않습니다. 문학이라는 이름이 붙는 글은 지식이나 정보조차 아름답게 다루는 글이라 할 수 있어요. 정치나 경제 이야기도 아름다움이 흐르는 문학으로 빚을 수 있습니다. 수학이나 과학도 얼마든지 아름다움이 숨쉬는 문학으로 엮을 수 있어요.



텍스트의 해석에 옳은 방법과 그릇된 방법이 있습니까? 어떤 해석이 다른 해석보다 더 타당하다고 입증할 수 있을까요? (19쪽)


어쩌면 이 시는 여기서 가을을 묘사하면서 부지불식간에 그 자체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61쪽)



  2013년에 “How to Read Literature”라는 이름으로 나왔다고 하는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책읽는수요일,2016)을 읽습니다. 영어로 나온 책이름을 곰곰이 헤아린다면 “어떻게 문학을 읽는가”나 “문학을 어떻게 읽는가”라 할 만합니다. 한국말로 나온 책에서는 ‘어떻게’가 빠졌어요. 다시 말하자면,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이라는 책은 ‘독자’라는 눈을 넘어서 ‘비평가’라는 눈으로 문학을 바라보자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글을 읽을 적에 ‘독자 자리’에 얌전히 머물지 말고, ‘우리 스스로 저마다 다른 비평가 자리’에 서서 바라보자는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할 수 있어요.



이 연극은 우리에게 어떤 진실을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 존재의 환영적 속성에 관한 진실입니다. (97쪽)


많은 사실주의 소설은 독자가 그 인물들과 동일시하기를 요청합니다. 독자는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어떠할지 느끼리라고 예상합니다. (145쪽)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을 쓴 테리 이글턴 님은 ‘비평가 눈’은 한 갈래이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 책에서는 테리 이글턴이라고 하는 분 눈길로 ‘문학을 읽는 길’을 보여주는데, 우리는 ‘테리 이글턴처럼’ 문학을 읽을 수도 있고, ‘테리 이글턴이 안 하듯이’ 문학을 읽을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대학교수처럼 읽을 수 있어요. 누군가는 중학생처럼 읽을 수 있어요. 누군가는 시골지기처럼 읽을 수 있어요. 누군가는 청소부로서 읽을 수 있고, 누군가는 의사나 간호사로서 읽을 수 있어요. 시장으로서 읽을 수 있고, 전업주부로서 읽을 수 있어요.


  그러면 가장 나은 눈은 있을까요? 문학을 읽는 가장 훌륭한 길은 있을까요? 문학을 비평하고, 문학을 말하며, 문학을 다루는 가장 놀라운 눈이 따로 있을까요? 문학을 이야기하는 가장 재미나거나 즐거운 길이 참말 따로 꼭 한 가지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작가는 사적 경험을 맹목적으로 숭배해서는 안 됩니다. 작가가 되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이끌어 내라는 조언을 이따금 받습니다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 작가는 글을 쓰는 행위 너머의 그 어떤 경험도 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가 기록하는 고뇌의 감정은 순전히 허구적일 수도 있지요. (254, 255쪽)



  문학책이 아닌 만화책을 읽을 적에도 ‘한 갈래 눈’으로만 읽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마다 다 다르게 읽기 마련입니다. 나이에 따라서 다르게 읽기 마련이고, 살아온 발자국에 따라서 다르게 읽기 마련이에요. 같은 만화책을 놓고도 가시내하고 사내가 다르게 읽겠지요. 군인과 민간인이 다르게 읽을 테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하고 평화를 안 믿는 사람은 또 다르게 읽을 테지요.


  그런데 우리가 문학을 어떻게 읽든 문학은 늘 문학입니다. 내가 이 문학을 썩 못마땅하게 여긴다고 하더라도 이 문학은 언제나 이 문학 그대로예요. 내가 이 문학을 몹시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이 문학은 늘 이 문학 그대로입니다. 남들이 어느 문학을 손가락질하거나 깎아내린다고 하더라도 늘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 생각’일 뿐입니다.


  문학은 추켜세울 수도 없고 깎아내릴 수도 없습니다. 잘 쓴 글이나 못 쓴 글이 있다기보다 ‘잘 썼다고 여기는 눈’이 있고, ‘못 썼다고 여기는 눈’이 있을 뿐이에요. ‘즐겁게 바라보는 눈’이 있고, ‘안 즐겁게 바라보는 눈’이 있어요. 그리고, 이처럼 사람들마다 다르게 읽을 수 있기에 문학은 비로소 문학다우리라 느껴요. 문학을 가리켜 ‘생각과 느낌을 아름답게 빚은 글’이라고 할 적에는 참말 사람들마다 다 다른 즐거움이나 기쁨이나 슬픔이나 짜증이나 보람이나 사랑을 문학에서 맛볼 수 있기 때문이지 싶어요.



가창 독창적이지 못한 비평 양식은 작품의 줄거리를 그저 다른 말로 바꿔 얘기하는 것입니다. (280쪽)


각각의 예술 작품은 기적과 같은 새로운 창조입니다. 그것은 신의 세계 창조 행위의 모방이자 반복이지요. (329쪽)


이누이트족의 풍부한 시를 탐구하는 데 몰두한 영국인 독자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양쪽 모두 다른 문명의 예술을 즐기려면 자신의 문화 환경 너머로 나아가야 합니다. (345쪽)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을 쓴 테리 이글턴 님도 이야기하듯이, ‘작품 줄거리’를 읊는 글은 비평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글은 그저 ‘줄거리 소개글’일 뿐입니다. 줄거리를 늘어놓기만 한다면 ‘줄거리 늘어놓는 글’이에요.


  비평이라는 눈으로 바라보자면, ‘작가 스스로 작가 나름대로 품은 생각과 느낌을 담은 글’을 읽은 ‘비평가 스스로 비평가 나름대로 품은 생각과 느낌을 담아서 말할’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작가는 작가대로 작가 목소리를 내야 ‘창작’이요, 비평가는 비평가대로 비평가 목소리를 내야 ‘비평’이라고 하겠지요.


  그러니까 목소리가 있어야 합니다. ‘내 목소리’가 있어야 합니다. 내 삶을 내가 스스로 노래할 수 있는 목소리가 있어야 해요. 내 꿈을 내가 손수 밝혀서 드러낼 수 있는 목소리가 있어야지요. 내 사랑을 내가 기쁨으로 나누려고 하는 목소리가 있어야 하는구나 싶어요.


  문학을 빚는 사람은 이녁 나름대로 이녁 삶을 글로 아름답게 빚습니다. 문학을 누리는 사람은 이녁 나름대로 이녁 삶을 문학이라는 글에 비추어 새롭게 읽습니다. ‘문학쓰기’는 작가 나름대로 펼치는 ‘삶쓰기’라면, ‘문학읽기’는 비평가(또는 독자) 나름대로 즐기는 ‘삶읽기’라고 할까요.


  작가 한 사람은 삶을 아름답게 가꾸려는 길을 걸으면서 문학을 빚는다고 봅니다. 비평가(또는 독자) 한 사람은 삶을 아름답게 지으려는 길을 바라보려고 문학을 읽는다고 느낍니다. 작가와 비평가는 서로 아름다움으로 만나고, 우리는 이 아름다움을 기쁘게 마음밥으로 먹으면서 문학책 한 권을 손에 쥡니다. 2016.2.23.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주아주 많은 달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91
루이스 슬로보드킨 그림, 제임스 서버 글, 황경주 옮김 / 시공주니어 / 199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629



“꽃을 잘라도 그 자리에 또 새 꽃이 피잖아”

― 아주아주 많은 달

 제임스 서버 글

 루이스 슬로보드킨 그림

 황경주 옮김

 시공주니어 펴냄, 1998.1.30. 7500원



  보름달이 뜹니다. 이 달 참으로 곱네 하고 노래하면서 올려다봅니다. 여느 달에 뜨는 보름달도 밝지만, 설날이 지난 뒤에 찾아오는 보름달은 그야말로 밝습니다. 여느 달에 보름달이 뜨면 시골마을 밤하늘을 가득 채우는 뭇별도 제법 볼 수 있는데, 한 해에 두 차례 큰보름달이 뜨는 날에는 다른 별이 잘 안 보입니다. 참말로 ‘큰보름달’이네 하는 생각이 들어요. 올 큰보름에는 저녁에 빗방울이 듣고 밤에 구름이 잔뜩 끼었는데에도, 큰보름달빛은 구름까지 꿰뚫고 환하게 퍼집니다.



왕이 공주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져다 주마. 갖고 싶은 게 있느냐?” 공주가 대답했습니다. “달을 갖고 싶어요. 달을 가질 수만 있다면 곧 나을 것 같아요.” (6쪽)



  제임스 서버 님이 글을 쓰고, 루이스 슬로보드킨 님이 그린을 그린 《아주아주 많은 달》(시공주니어,1998)을 읽습니다. 1943년에 처음 나온 그림책이라 하니, 1998년에 한국말로 나왔어도 무척 오래된 이야기책이에요. 지구별 여러 나라에서는 일흔 해 넘게 사랑받는 그림책이요, 한국에서도 스무 해 가까이 사랑받는 그림책입니다. 마침 달빛이 고운 큰보름날이기에 《아주아주 많은 달》을 더 재미나게 들여다봅니다.



“달은 48만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사옵니다. 달은 동전처럼 둥글고 납작하며, 석면으로 되어 있고, 크기가 이 나라의 절반만 하옵니다. 더군다나, 하늘에 꼭 붙어 있사옵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달을 구해 올 수는 없사옵니다.” 왕은 이번에도 불같이 화를 내며 공중 수학자를 멀리 보내 버렸어요. (18쪽)




  이 그림책 《아주아주 많은 달》에는 여러 사람이 나옵니다. 먼저 공주님이 나오고, 임금님이 나옵니다. 공주님은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앓아요. 왜 앓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임금님은 이녁 딸아이가 걱정스러워서 ‘부디 몸이 낫기를 바라’요. 딸아이가 몸이 나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해 주겠노라 말합니다.


  몸을 앓던 공주님은 아버지(임금님) 말을 듣고는 불쑥 한 마디를 해요. “달을 갖고 싶어요.”


  하하하. 얼마나 사랑스러운 딸아이인가 하고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달을 갖고 싶니? 그럼 달을 따 주지. 해를 갖고 싶니? 그럼 해를 따 주어야지. 아마 온누리 모든 아버지 어머니는 ‘눈에 넣어도 아플 수 없는’ 아이들 꿈을 모두 오롯이 이루어 주려고 온힘을 다하리라 생각합니다.


  이리하여, 임금님은 임금님답게(?) 신하를 부릅니다. 아무래도 시골지기 아닌 임금님이니까요, 손수 달을 따러 가지는 않고 신하를 불러서 심부름을 맡길 테지요.


  그런데, 임금님이 거느리는 신하들은 임금님이 맡기려는 온갖 심부름을 여태 다 해냈지만, ‘달 따기’만큼은 안 되겠다고 손사래를 칩니다. 이 신하도 저 학자도 저 사람도 모두 고개를 젓습니다.



“제가 곧 달을 가져다 드릴게요. 그런데 공주님, 공주님은 달이 얼마나 크다고 생각하세요?” “내 엄지손톱보다 조금 작아. 내가 달을 향해 엄지손톱을 대 보면 딱 가려지거든.” 공주가 대답했어요. “그러면 달은 얼마나 멀리 있나요?” “내 방 창문 밖에 있는 큰 나무만큼도 높이 있지 않아. 어떤 때는 나뭇가지 꼭대기에 달이 걸려 있기도 하니까.” (24쪽)




  슬픔에 잠기기도 하고, 부아가 나기도 하는 임금님입니다. 그렇다고 임금님 스스로 뾰족한 수를 내지도 못합니다. 이럴 때야말로 임금님이 슬기를 뽐내어 달을 따올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임금님은 커다란 걸상에 앉아서 푸념을 늘어놓을 뿐입니다.


  이때 궁전 어릿광대가 임금님 곁으로 찾아가서 근심걱정을 들어 주어요. 그러더니 문득 임금님한테 여쭈어요. 공주님이 달을 갖고 싶다 한다면 바로 공주님한테 여쭈어서 ‘달이 어디에 있’고 ‘달이 어느 만큼 큰가’ 하는 대목을 이야기로 들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지요.


  번뜩이는 좋은 생각을 내놓은 어릿광대는 어려운 수수께끼를 풀어냅니다. 공주님은 ‘달’이 창밖에 있다고 말해요. 어릿광대는 공주님한테 슬쩍 한 가지를 더 여쭈기도 했어요. ‘달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느냐’고 여쭈지요. 이때에 공주님은 어릿광대한테 ‘달’은 마땅이 ‘금’으로 이루어졌으리라 하고 말해요.



“말씀해 주세요, 레노어 공주님. 공주님의 목에 달리 걸려 있는데, 어떻게 하늘에서 또 달이 빛날 수 있죠?” 공주는 어릿광대를 바라보고 웃었습니다. “그건 간단하지, 이 바보야. 이를 빼면 그 자리에 새 이가 나잖아, 안 그래?” 궁중 어릿광대가 말했습니다. “물론이죠. 유니콘이 숲에서 뿔을 잃어 버려도 이마 한가운데에서 새 뿔이 자라죠.” “맞아, 궁중 정원사가 정원에 있는 꽃을 잘라도 그 자리에 또 새 꽃이 피잖아.” (42∼44쪽)




  그림책 《아주아주 많은 달》을 읽으면서 가만히 생각에 잠깁니다. 달은 하늘에도 있고, 우리 마음에도 있습니다. 내가 오늘 이곳에서 보는 달이 있고, 이웃님이 저 먼 다른 고장에서 보는 달이 있습니다. 밤에 아이들하고 나들이를 다니면, 아이들은 달이 우리를 따라온다면서 웃습니다. 아이들이 저마다 바라보는 달이 있고, 내가 따로 바라보는 달이 있어요.


  어릿광대가 달을 하나 따서 공주님한테 선물로 드렸으면, 다른 곳에서 새롭게 뜨는 달이 또 있어요. 공주님은 “꽃을 잘라도 그 자리에 또 새 꽃이 피잖아(44쪽).” 하고 이야기하면서 새근새근 잠이 듭니다. 공주님이 바란 것은 ‘달’이면서 ‘이야기를 나눌 동무’였구나 하고 느낍니다. 임금님이든 신하이든 학자이든 누구이든, 공주님을 알뜰히 섬기거나 돌보려는 마음에서 그치지 말고, 살가운 말벗이요 삶벗으로 여길 수 있다면, 공주님은 한결 튼튼하고 씩씩하면서 슬기롭게 자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들도 모두 이와 같으리라 느껴요. 아이들은 어버이 사랑을 바라요. 어떤 대단한 선물이나 금은보화가 아니라, 따사로이 어루만지는 사랑스러운 손길을 바라요. 진수성찬이 아니라 즐겁게 함께 먹는 밥 한 그릇을 바라요. 수많은 책이나 학원이나 교육이 아니라 기쁨으로 살림을 짓는 너그러운 마음결을 바라요.


  꽃송이가 잘려도 다시 새로운 꽃이 돋아나듯이, 우리 마음에도 언제나 새롭게 꿈이 자라리라 봅니다. 힘들거나 고단한 하루가 지나가면, 앞으로 기쁘면서 넉넉한 새 하루가 찾아오리라 봅니다. 큰보름달을 바라보면서 가만히 춤을 춥니다. 밤새 아이들 이불깃을 여미면서 오늘 하루도 즐거운 살림살이를 이루자고 다짐합니다. 2016.2.23.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짓말을 먹고 사는 아이 난 책읽기가 좋아
크리스 도네르 지음, 필립 뒤마 그림, 최윤정 옮김 / 비룡소 / 200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린이책 읽는 삶 136



아이는 ‘시인’인가 ‘거짓말쟁이’인가

― 거짓말을 먹고 사는 아이

 크리스 도네르 글

 필립 뒤마 그림

 최윤정 옮김

 비룡소 펴냄, 2003.10.2. 6500원



  “착한 거짓말”이 있다고 해요. 듣기 좋도록 하는 거짓말이라고 해요. 이를테면 “너 참 예쁘네” 하는 말을 “착한 거짓말”로 한다지요. 그런데, “너 참 예쁘네” 같은 말을 “착한 거짓말”로 한다면 썩 들을 만하지 않으리라 느껴요. 안 예쁘다고 여겨서 예쁘다고 거짓말을 하는 셈이니까요.


  거짓말하고 참말을 가르는 잣대라면 한 가지가 있으리라 느껴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인가 아닌가에 따라 다르리라 느껴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라면 참말이 될 테고, 마음에 없는 말이라면 거짓말이 되겠지요.



토마는 엄마한테 이야기하는 걸 아주아주 좋아한다. 엄마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동생 기저귀를 갈아 주는 동안, 그러면 어떤 때는 엄마가 토마 이야기를 잘 들어 보려고 하던 일을 멈출 때도 있다. 그러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렇게 말하는 거다. “너, 그 얘기 굉장하다!” (7쪽)



  크리스 도네르 님이 글을 쓰고, 필립 뒤마 님이 그림을 그린 《거짓말을 먹고 사는 아이》(비룡소,2003)를 읽습니다. 이 이야기책에 나오는 아이는 ‘거짓말을 먹고 사는’ 아이라고 합니다. 이 아이는 처음부터 거짓말을 즐기지 않습니다. 그저 ‘이야기’를 즐길 뿐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학교를 다니는 동안 차츰 이야깃거리가 줄어요. 왜 그러한가 하면, 처음 학교를 다닐 적에는 모든 것이 새로워서 이 새로운 이야기를 집에서 어머니한테 들려주며 기뻤는데, 하루하루 지나는 동안 새로움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늘 똑같은 일만 벌어지고, 늘 똑같은 것만 가르친다고 여겨서, 어머니한테 ‘이야기를 들려주는 즐거움’이 사라져요.


  이제 이 아이는 ‘이야기하는 즐거움’을 놓치지 않으려고 ‘부풀리기’를 떠올립니다. 아주 조그마한 일을 크게 부풀립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일어났다고 하기로 합니다.



“아, 그렇겠구나.” 엄마는 알아들은 척한다. 하지만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엄마는 토마가 황당한 이야기를 꾸며대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다. (19쪽)


아빠는 엄마하고는 다르다. 토마는 아빠한테는 엄마한테처럼 이야기를 해 드려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아빠는 점수에만, 그것도 좋은 점수에만 관심이 있다. 아빠는 여자 애들이 화장실에 갇혔었다는 이야기 같은 건 전혀 재미있어 하지 않을 것이다. 아빠는 “굉장하네!” 같은 말은 하는 적이 없다. (22쪽)



  아이 어머니는 마음이 어지럽습니다. 아이가 그동안 ‘이야기 즐기기’만 했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부풀리기’를 곁들이더니, 이제는 온통 ‘부풀리기’만 있거든요. 게다가 이 부풀리기는 차츰 ‘거짓말’로 가지를 칩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아이가 부풀리는 이야기는 참말이 아니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하지 않은 일을 말하고, 스스로 보지 않은 일을 말하며, 스스로 겪지 않은 일을 말하니까요.


  아이 아버지는 이녁 아이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재미있다고 여깁니다. 부풀리든 거짓이든 이렇게 ‘꾸미는’ 이야기가 훌륭하다고 여깁니다. 아이 아버지는 아이가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때에만 좋아했다고 하는데, 알고 보니 이 아이 아버지는 ‘아이가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는 일’도 좋아한다고 해요. 아이 어머니는 아이가 거짓말을 자꾸 키우면서 걱정스럽다 하고, 아이 아버지는 ‘시인이 될 낌새’라면서 좋다고 합니다.



“저거 봐, 토마! 네가 거짓말을 하니까 엄마 아빠가 어떻게 되는지 봤지? 결국 거짓말 때문에 싸우게 되잖아.” “나 때문이 아니에요.” 토마가 말한다. “거짓말을 하면 안 돼.”“거짓말 안 했어요.” “거짓말쟁이!” “저 봐, 또 거짓말하잖아!” “시인이라니까!” “거짓말쟁이야!” “시인!” (51쪽)



  시인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시인은 삶을 사랑으로 그릴 줄 아는 사람이에요. 시인은 삶을 꿈으로 짓는 사람이고, 시인은 삶을 기쁨으로 그리면서 웃음꽃하고 노래잔치를 열 수 있는 사람이에요.


  《거짓말을 먹고 사는 아이》에 나오는 아이는 이야기를 사랑합니다. 이 아이한테는 이야기가 없으면 ‘사는 보람’이 없다고 할 만합니다. 두 어버이는 아이를 놓고 한참 다투고야 마는데,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간 끝에 훌륭한 실마리를 하나 찾아냅니다. 무엇인가 하면, 아이더러 ‘글을 쓰도록’ 해요. 어머니는 아이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너무 거짓스러워서 못마땅하니, 이를 글로 쓰되 아버지한테 이야기를 들려주는 쪽으로 가자고 마음을 맞춥니다.


  아이는 먼저 글로 제 이야기를 마음껏 지을 수 있겠지요. 학교 운동장에 우주선이 내려앉았다고 하든, 학교 선생님 머리에 새똥이 비오듯이 떨어졌다고 하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땅이 쩍 갈라져서 땅밑 깊은 곳까지 빠졌다가 ‘지구 내부 세계’를 구경하고 돌아왔다고 하든, 아이는 마음껏 이야기를 지어서 쓸 수 있어요.


  가만히 보면, 이야기에서는 무엇이 참이거나 거짓인지 헤아리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냥 이야기라고 하면 헷갈릴 만하니, “사는 이야기”하고 “생각 이야기” 이렇게 나누어야지 싶어요. “꿈꾸는 이야기”하고 “재미난 이야기”로 나누어 볼 수도 있어요. 마음에 밥이 되는 이야기요, 생각에 날개를 다는 이야기입니다. 삶에 고운 꽃을 피우는 이야기요, 즐거운 사랑으로 자라나는 이야기입니다. 온누리에 아름다운 이야기가 새록새록 흐를 수 있기를 빕니다. 2016.2.22.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어린이문학 비평)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빠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아베 고지 사진.글, 박미정 옮김 / 안단테마더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110



아버지는 ‘사진가’와 ‘시인’이 된다

― 아빠!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아베 고지 사진·글

 박미정 옮김

 안단테마더 펴냄, 2016.1.11. 18000원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과분한 일상. 이것이 바로 나의 보물이다(109쪽).” 같은 멋있는 말을 들려주는 사진책 《아빠! 안녕히 다녀오셨어요!》(안단테마더,2016)를 무척 고맙게 읽습니다. 왜 고맙게 읽느냐 하면, 이 사진책을 빚은 아베 고지 님은 이녁 아이들이 신나게 뛰놀면서 숲을 누비는 기쁨을 기꺼이 나누어 주거든요.


  석 달 동안 배를 타고 한 달 동안 뭍에서 쉬는 일을 하는 아베 고지 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석 달 동안 아이들을 볼 수 없이 일하다가는, 비로소 한 달 동안 말미를 얻어서 아이들하고 만난다고 해요. 한 해 가운데 아홉 달은 아이들도 곁님도 볼 수 없는 일이지요. 그렇지만 배를 타는 사람은 누구나 이와 같겠지요?



삼 개월 만에 만나면 아이들은 놀랄 만큼 자라 있다. (4쪽)


사슴벌레를 모자에 넣고 그대로 머리에 쓴다. 이것이 바로 아이들 세계의 ‘멋’. (8쪽)





  석 달 만에 만나는 아이들은 늘 놀랄 만큼 자란다고 합니다. 아무렴 그렇지요. 석 달 만인걸요. 아이들은 날마다 새롭게 자라니, 석 달이라는 나날은 얼마나 길까요. 한 달씩 말미를 얻어서 쉰다고 하더라도 다시 석 달을 헤어져야 하니까, 한 달이라는 나날은 무척 짧다고 느끼리라 생각해요.


  이리하여 아베 고지 님은 한 달을 쉬는 동안 늘 아이들하고 어울려 놀겠노라는 다짐을 합니다. 아이들하고 만나서 놀려고 석 달을 일한다고 할까요. 석 달을 배를 타며 일하는 동안 ‘앞으로 다시 한 달 동안 신나게 놀아야지’ 하고 꿈을 키운다고 할까요.


  아이들은 이런 아버지 마음을 잘 알리라 느낍니다. 아버지가 드디어 배를 내리고 뭍으로 돌아올 적에 기쁘게 웃으면서 안길 테지요. 눈물 같은 기쁜 웃음을 짓지요. 이러다가 한 달이 지나갈 무렵 서로서로 아쉽고 서운한 손짓으로 헤어질 테고요.


  사진이 없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사진기가 없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사진이 있고, 사진기라는 기계가 있기에, 우리는 그립고 애틋하며 사랑스러운 짝님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습니다. 아마 사진이 없었으면 그림을 그리고 글월을 띄웠을 테지요. 마음속에 오롯이 이야기를 담으면서 떠올리려 할 테지요.



신나는 게 최고. (20쪽)


단순함이 좋다. 빛이 나니까! (26쪽)





  사진책 《아빠! 안녕히 다녀오셨어요!》는 오직 사랑으로 태어납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아버지가 된 아베 고지 님은 처음에는 ‘사진’이라고는 조금도 몰랐다고 합니다. 아니, ‘아이’조차도 잘 몰랐다고 해요. 사랑하는 짝을 만나서 한집살림을 가꾸다가 큰아이가 태어난 뒤에 차츰 ‘아이’를 느꼈고, 이 놀랍도록 사랑스러운 아이를 지켜보면서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딸이 돌이 되었을 무렵, 함께 산책하러 가면 아이는 무의식적으로 내 손을 잡거나 균형을 잃고 넘어질 것 같으면 내 다리를 붙들기도 했는데, 이것이 아이나 엄마에게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 안에서는 지금껏 경험해 본 적 없는, 신선하면서도 낯선 감정이 싹텄습니다(120쪽).” 같은 말을 가만히 헤아립니다. 이제껏 겪은 적이 없는 새로운 마음이 싹텄다고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돌아봅니다.


  사랑 어린 손길로 사진기를 들고, 기쁨 어린 눈길로 사진을 찍습니다. 꿈이 가득한 마음결로 사진기를 쥐며, 웃음 가득한 숨결로 사진을 찍어요.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사진에 찍혀 줍니다. 이 사진은 모두 ‘아버지가 다시 배를 타고 석 달 동안 일하러 가’면, 배에서 이 사진을 돌아보면서 저희를 그릴 줄 알아요.



여름에는 매미잡이로 하루를 시작한다. (32쪽)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웃음소리가 아닐까? (43쪽)





  나도 아이들을 늘 사진으로 찍는 사람으로서 이 사진책 《아빠! 안녕히 다녀오셨어요!》를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사진으로 찍힐 때에는 기쁘게 웃으며 노는 때입니다. 기쁘게 웃으며 놀 수 있기에 어버이가 사진기를 손에 쥘 적에 스스럼없이 찍혀 줍니다. 모델이 되는 아이들이 아니라, 그저 즐겁게 노는 아이들입니다. 모델을 찍는 어버이가 아니라, 그저 기쁘게 웃는 아이들이 사랑스러운 어버이입니다.


  아버지는 하루하루 사진을 찍는 동안 어느새 ‘사진가’가 됩니다. 사진을 잘 배우고 훌륭히 찍기에 ‘사진가’이지 않습니다. 사진 한 장에 담는 숨결이란 언제나 사랑이라는 대목을 깨닫기에 사진가입니다. 사진 솜씨가 훌륭하기에 ‘사진가’이지 않아요. 너(아이)와 내(아버지)가 이곳에서 함께 짓는 하루가 아름다운 꿈으로 피어나는구나 하는 대목을 알아차리기에 사진가예요.



보물이란 무엇일까? (55쪽)


(큰아이) 아카리가 엄마의 치마를 입게 되었다. (72쪽)





  사진가로 다시 태어나는 아버지는 시인으로도 다시 태어납니다. 아이들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하고 생각하다 보니, 모든 말이 마치 노래처럼 시처럼 흘러나옵니다. 아이들하고 도란도란 짓는 이야기를 떠올리다 보니, 그림책을 읽어 주든 동화책을 함께 읽든, 모든 말소리는 노랫소리로 거듭나면서 피어납니다.


  “둘째, 셋째가 태어나고 셋째 아이가 걸어다닐 즈음, 나는 아이들에게 완전히 푹 빠져 있었습니다. 카메라도 DSLR로 바꾸고, 시간만 나면 아이들과 산속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답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한없는 사랑을 주고, 아이는 그 사랑을 받아먹으며 무럭무럭 자랍니다. 하지만 도리어 내가 아이에게 무한한 사랑과 신뢰를 받고 변해 갔습니다(120쪽).” 같은 이야기를 천천히 읽습니다. 이 말마따나 아이는 사랑을 받아먹으며 무럭무럭 자라요. 그런데 언제나 어버이도 아이한테서 사랑을 받아요. 아이도 자라고 어버이도 자라요. 아이도 사랑으로 자라고, 어버이도 사랑으로 자라요.


  나이를 먹으며 늙는 어버이가 아니라, 아이하고 나누는 사랑을 아이한테서도 고스란히 나누어 받으면서 날마다 새롭게 웃음잔치랑 노래잔치랑 사진잔치를 즐기는 어버이입니다.



이랬으면, 저랬으면 하는 바람은 없다. (82쪽)


‘아, 고향이 참 좋아.’ 그렇게 생각해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91쪽)





  온누리 모든 사내가 아버지가 될 수 있다면, 참말 온누리 모든 사내는 아버지로서 사진가와 시인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두 손에 호미랑 연필을 쥐거나 괭이랑 사진기를 들면서 아이하고 어깨동무를 할 수 있다면, 참말 온누리에는 사랑하고 평화가 흐르리라 생각합니다.


  어버이는 사진을 찍으면서 아이한테 ‘사진 찍는 기쁨’을 가르칩니다. 어버이는 모든 말을 시처럼 노래하면서 아이한테 ‘시를 짓는 즐거움’을 물려줍니다. 아이는 천천히 뛰놀고 자라면서 아버지처럼, 또 어머니처럼 사진가도 되고 시인도 됩니다. 삶을 그리는 사진가로 자랍니다. 삶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자랍니다.


  사진은 예술이기 앞서 사랑이어야지 싶습니다. 사진은 문화이기 앞서 꿈이어야지 싶습니다. 사랑을 담을 수 있기에 아름다운 사진이지 싶습니다. 꿈을 그릴 수 있기에 멋진 사진이지 싶어요.


  사진책 《아빠! 안녕히 다녀오셨어요!》를 읽을 온누리 아버지랑 어머니 모두 즐겁게 사진을 찍고 노래를 부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모두 놀랍고 멋진 사진기이자 시인이거든요. 활짝 웃으면서 사진기를 쥐면 누구나 사진가예요. 하하 웃으면서 연필을 쥐면 누구나 시인이에요.


  아버지 사진가랑 어머니 시인을 만나고 싶습니다. 아버지 시인이랑 어머니 사진가하고 강강수월래를 하고 싶습니다. 2016.2.21.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사진책 읽는 즐거움/사진비평)


* 이 글에 넣은 사진은 안단테마더 출판사에서 보내 주었습니다. 사진을 실을 수 있도록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리에 핀 꽃 국민서관 그림동화 174
존아노 로슨 지음, 시드니 스미스 그림 / 국민서관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628



걸음을 멈추고 들꽃을 바라보는 기쁨

― 거리에 핀 꽃

 존아노 로슨 기획

 시드니 스미스 그림

 국민서관 펴냄, 2015.8.31. 1만 원



  길을 가다가 꽃을 봅니다. 꽃씨는 가볍게 바람을 타고 날다가 이곳에 저곳에 살며시 깃듭니다. 시멘트나 아스팔트를 아주 빈틈없이 깔아서 길바닥을 메웠다 하더라도, 아주 자그마한 틈이 있으면 꽃씨는 이곳에 기쁜 마음으로 내려앉습니다.


  자동차가 싱싱 달리는 찻길이어도, 구석지거나 응달진 자리여도, 전봇대 옆이나 가게 앞이라도, 꽃씨는 해바라기를 꿈꾸면서 고요히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립니다. 작은 들꽃이 피어나면 이 들꽃을 바라보면서 “어머, 이곳에 이렇게 고운 꽃이 피었네!” 하면서 웃는 사람이 있습니다. 작은 들꽃이 피어나면 이 들꽃을 냉큼 뽑으면서 “뭐야, 언제 여기에 이런 잡초가 다 돋았어!” 하면서 골을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축구장 같은 너른 잔디밭에 들꽃이 필 수 있을까요? 축구장 한쪽에 민들레나 질경이가 돋아서 꽃을 피우면 잔디관리사는 어떤 마음이 될까요? 축구 선수는 공을 차다가 들꽃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경기장에 모인 사람들은 축구장 한쪽에 핀 꽃을 바라볼 틈이 있을까요? 이름난 선수 등번호를 좇는 사진기는 축구장 구석진 곳에 조용히 돋은 들꽃한테 눈길을 맞출 수 있을까요?


  존아노 로슨 님이 기획하고, 시드니 스미스 님이 그림을 빚은 《거리에 핀 꽃》(국민서관,2015)을 읽습니다. 이 그림책에는 아무 말이 흐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수많은 말이 고요히 흐릅니다. 빨간 옷을 입은 아이는 아버지 손을 잡고 나들이를 가요. 빨간 옷 아이는 아버지랑 길을 걷다가 자꾸 걸음을 멈추어요. 왜 멈추느냐 하면 들꽃을 보기 때문이에요.


  ‘빨강아이’는 어느새 ‘들꽃아이’가 됩니다. 한손 가득 들꽃을 쥐어요. 들꽃을 눈으로만 보고 지나갈 수도 있지만 ‘들꽃아이’는 굳이 꽃을 꺾어서 그러모읍니다. 이 아이는 왜 들꽃을 꺾어서 모을까요?


  아버지하고 이 골목 저 거리를 걷던 어느 때부터 들꽃아이는 손에 잔뜩 그러모은 들꽃을 하나씩 내려놓습니다. 어디에 내려놓는가 하면, 공원 긴 걸상에 드러누워서 자는 아저씨, 어쩌면 한뎃잠이일 수 있는데, 이 아저씨 발치에 들꽃을 놓아요. 공원 한쪽에서 숨을 거둔 참새 곁에도 들꽃을 놓지요.





  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 품에 안길 적에 ‘어머니 몰래’ 어머니 귓등에도 들꽃을 살짝 꽂습니다. 어머니는 무슨 꽃내음이 나네 하고 두리번거리다가 문득 알아채고는 빙긋 웃어요. 들꽃아이는 동생한테도 들꽃을 나누어 줍니다. 그러니까, 이 아이가 ‘골목마실’을 누리는 길이란 ‘꽃마실’인 셈이요, 이 꽃마실을 누리면서 만나는 어여쁜 들꽃이 수많은 이웃과 살붙이한테 새롭게 다가가서 기쁨을 퍼뜨려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로구나 싶어요.


  그림책 《거리에 핀 꽃》은 ‘거리에 핀 꽃’이 ‘마음에 피는 꽃’으로 거듭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골목에 핀 꽃’이 ‘사랑으로 피는 꽃’으로 다시 태어나는 숨결을 보여줍니다. ‘온누리에 피는 꽃’이 언제 어디에서나 ‘기쁨으로 피는 꽃’이네 하는 모습을 알려주어요.


  자, 우리도 문득 걸음을 멈추어 볼까요? 우리도 자동차에서 내려 볼까요? 우리도 작은 들꽃 곁에 쪼그려앉아서 가만히 들꽃을 바라보면 어떨까요? 삽차도 밀차도 모두 멈추고 이 골목에 저 숲에 그 바닷가에 나긋나긋 춤추는 상냥한 들꽃을 함께 바라보면 어떨까요? 우리 마음속에 꽃이 필 적에 이 땅에 사랑이 함께 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피어나는 꽃을 곱게 마주할 수 있을 적에 서로서로 아끼고 돕는 어깨동무를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2016.2.21.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