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양자역학 7일 만에 끝내기 만화 7일 만에 끝내기
후쿠에 준 지음, 목선희 옮김 / 살림Friends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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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42



양자역학을 ‘이레’ 아닌 ‘7분’ 만에 끝내기

― 양자역학 7일 만에 끝내기

 후쿠에 준 글

 목선희 옮김

 살림프렌즈 펴냄, 2016.2.28. 9800원



  ‘만화 7일 만에 끝내기’ 가운데 하나로 나온 《양자역학 7일 만에 끝내기》(살림프렌즈,2016)를 읽기 앞서 생각합니다. 양자역학을 이레 만에 끝낼 수 있다고? 그런데 양자역학을 끝내는 데에 이레나 걸리나? 아니, 양자역학을 고작 이레면 끝낼 수 있나?


  양자역학을 다루는 책인 만큼, 나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보려 합니다. 양자역학은 이레 만에 끝낼 수 없다는 생각 하나에다가, 양자역학은 이레 만에 끝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리고, 이레 만에 끝낼 수 없는 양자역학이라면, 이레가 아닌 일흔 날이 걸려도 끝낼 수 없을 테고, 이레가 아닌 일곱 해가 걸려도 끝낼 수 없겠다고 느낍니다. 거꾸로, 이레 만에 끝낼 수 있는 양자역학이라면, 일곱 시간이면 끝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일곱 분, 그러니까 ‘7분’ 만에라도 끝낼 만하리라고 생각해 봅니다.



물질을 물리화학적으로 깊이 이해하게 되면서 점차 원자나 분자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 (26쪽)


지금까지 발견된 많은 증거로부터 내릴 수 있는 유일하게 정확한 관점은 ‘빛은 파동이기도 하고, 입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64쪽)



  사진은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사진찍기는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사진읽기는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사진을 잘 찍는 데에는 얼마나 걸릴까요? 사진을 잘 읽는 데에는 또 얼마나 걸릴까요?


  어떤 사람은 사진을 마흔 해나 쉰 해를 찍었는데에도 ‘사진을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진기를 손에 쥔 지 1분이 지났을 뿐인데에도 사진을 그냥 잘 찍습니다.


  살림은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살림을 배우기는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살림을 제대로 익히자면 스무 해나 서른 해는 걸려야 할까요? 두세 해쯤 걸려서 살림을 익히기는 어려울까요? 두어 달 만에 살림을 익힐 수는 없는 노릇일까요? 이틀이나 사흘 만에 살림을 다 익히는 사람은 없을까요?


  흔히 ‘과학’은 어렵다거나 ‘수학’은 괴롭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학이나 수학뿐 아니라, 종교도 학문도 다 어렵거나 괴롭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이든 수학이든, 또 살림이든 사진이든, 또 아이키우기이든 밥짓기이든, 또 집짓기이든 뜨개질이든, ‘하루아침에 이루는’ 것은 없을 만합니다. 그리고, 어느새 문득 깨달아서 즐겁게 하기도 합니다.



미시 세계에서 전자의 위치나 운동량은 처음부터 관측할 수 있는 물리량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이젠베르크는 원자핵의 주위를 전자가 ‘궤도운동을 한다’는 고전물리학의 개념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106쪽)


미시 세계에서는 모든 현상이 근본적으로 불황적적이고 확률적으로 일어나지만 우리가 ‘관측’을 하면 그때마다 무수히 많은 가능성 중에서 가장 가능성이 큰 상태가 결과로 표현된다. (138쪽)



  《양자역학 7일 만에 끝내기》는 일본에서 나온 ‘만화 7일 만에 끝내기’ 꾸러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일본 한자말이 많이 나옵니다. 양자역학에서 가장 크게 헤아리면서 다루는 낱말인 ‘보다(바라보다)’를 이 책에서는 ‘관측’이라는 한자말로 나타냅니다.


  그러면, 양자역학에서 가장 크게 헤아리면서 다루는 낱말인 ‘보다·바라보다’란 무엇일까요? 이는 바로 ‘내가 보지(바라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거나 하나도 안 이루어진다’를 나타냅니다. 내가 보기에(바라보기에) 비로소 무엇이든 이루어집니다.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내가 볼 적에 어떤 것이든 다 이루어집니다.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배울 수 있습니다.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배울 수 없습니다.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학교 문턱을 밟지 못했어도 스스로 배웁니다.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수만 권에 이르는 책을 갖다 주어도 하나도 못 배웁니다.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돌이나 나무도 모두 책으로 삼고 스승으로 삼아서 배워요.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책이 아무리 많아도 이녁한테는 그냥 ‘돌이나 나무’와 똑같을 뿐입니다.



빛에너지가 연속적이라면 어두운 곳에서 장시간 노출해야 사진이 찍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별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짧은 순간에도 별을 볼 수 있다. 이 현상이 바로, 별빛은 에너지 덩어리인 양자로써 아득히 먼 우주 저편에서 날아왔다는 증거이다. 빛이 양자가 아니었다면 우리 인간은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146쪽)


우주와 시공간이 탄생했을 때 모든 입자의 질량은 제로0였다. 물질입자도, 매개입자도 모두 광자와 같았다. 우주가 팽창하고 온도가 내려가면서 시공간과 물질입자 그리고 매개입자가 나뉘어졌다. (200쪽)



  《양자역학 7일 만에 끝내기》는 양자역학이 태어나기 앞서 서양 과학이 어떻게 흘렀고, 고전물리학이 어떻게 퍼졌는가 하는 대목을 넓게 다룹니다. 그리고 이 책이 일본에서 나온 만큼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일본 과학자’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서양에서 나오는 양자역학 책에서는 구태여 ‘일본 과학자’ 이야기를 이 책처럼 자주 길게 다루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일본 과학자를 몰라도 된다는 뜻이 아니고, 일본 과학자 가운데 훌륭한 이들 발자취를 몰라도 된다는 뜻 또한 아니에요. 이 책이 ‘일본에서 일본 어린이’ 눈높이에 맞추어서 나온 터라, 일본 물리학자 이야기가 자주 많이 나올 수밖에 없을 뿐입니다. 양자역학을 배우는 길잡이책으로서 알차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이 대목에서는 ‘그냥 번역만 하기’에는 좀 아쉽다고도 할 수 있어요. 왜 그러한가 하면, 일본 어린이는 이 책에서 다루는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일본 과학자’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도 저 훌륭한 사람처럼 물리학자(과학자) 꿈을 키워야지’ 하는 생각을 북돋울 만합니다만, 부록이나 붙임말로 따로 ‘한국 물리학자’ 이야기라든지, ‘양자역학과 얽혀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온누리 모든 과학자’ 이야기를 알려주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관측하기 전에는 모든 가능성이 더해진 상태지만, 관측을 하면 무한한 가능성 중 각 상태의 확률 크기에 따라 단 하나의 상태만이 선택되는 것이다. (214쪽)



  그러고 보면, 이 책이 아무리 일본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일본 글쓴이 스스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일본 과학자’ 이야기는 부록으로 밀고, 몸글에서는 ‘양자역학 알맹이를 더 깊이 다루는 데’에 마음을 쏟지 못했다고도 할 만합니다. 그래서 이 책은 아인슈타인이 끝까지 외친 말, “사랑하는 하느님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라는 말만 다룰 뿐, ‘고전물리학’을 버리고 새로운 물리학인 양자물리학으로 나아가려는 이들이 외친 말은 다루지 못합니다. 아인슈타인과 논쟁을 오랫동안 하면서 고전물리학을 버리고 양자물리학으로 나아간 이들은 1920년대부터 “하느님이 이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실 것인가를 지시하는 것은 우리들의 과제가 될 수 없습니다(하이젠베르크 쓴 《부분과 전체》 110쪽)” 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머잖아 “하느님은 주사위를 던진다”는 대목을 깨닫지요. 오늘날 양자역학 이론에서는 “하느님은 주사위놀이를 매우 자주, 아니 늘 즐긴다” 하고도 말합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주사위놀이’에서 ‘주사위’란 ‘생각(이론)’입니다. ‘놀이’란 ‘삶(실험·경험)’이고요. 생각을 하나 내놓으면(주사위를 던지면, 또는 이론을 세우면), 이 생각(주사위·이론)에 따라서 어떤 일이 생기고(삶이 이루어지고, 또는 경험을 하고), 이 생각에 따라서 생기는 어떤 일을 보면(관측·관찰)서, 새로운 이야기(결과·실험결과)가 태어나요.


  이러한 양자역학 원리를 쉬운 말로 다시 간추리자면, ‘내가 어느 한 가지를 생각하기에 나는 스스로 내 삶을 새롭게 짓는다’입니다. 내가 어느 한 가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겪지 못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배울 수 있지만,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배울 수 없다고 해요.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한 가지 생각’을 씨앗으로 심기에 삶에서 새로운 일을 겪고, 이 겪음이 바로 배움으로 나아가요. 그렇지만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처음부터 아무 생각이 없기에 수많은 일을 겪더라도 그 수많은 일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자꾸 똑같은 일(경험)만 되풀이하는 얼거리가 된다고 합니다.



‘관측’이라는 행위를 할 때, 혹은 양자역학적인 ‘선택’이 이루어질 때마다 가능한 모든 우주가 관측 시점으로부터 나뉘어, 이 모두가 실제로 존재하는 우주가 된다는 것이다. (220쪽)



  이제 《양자역학 7일 만에 끝내기》를 덮으며 생각에 잠깁니다. 양자역학을 이레 만에 떼든 안 떼든 대수로운 일은 아니라고 느껴요. 양자역학을 이레 만에 떼어도 좋고 안 떼어도 좋습니다. 다만, 양자역학에서 밝히면서 들려주려는 이야기는 깊고 넓게 곰삭이고 싶습니다. 우리 집에서 우리 아이들을 기쁘게 사랑하려는 숨결로 하루를 새롭게 짓자고 하는 생각을 씨앗으로 심고 싶어요. 그래서 나는 이 씨앗을 즐겁게 바라보면서 내 삶을 새롭게 겪고, 아이들이 씩씩하고 곱게 자라도록 곁에서 지켜보고 보살피면서, 이 결에 맞추어 새로운 이야기가 무럭무럭 태어나도록 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마치 ‘주사위놀이를 하는 하느님’처럼 ‘삶을 짓는 바탕이 되는 생각을 늘 즐겁게 씨앗으로 심는 어버이’가 되겠다는 뜻입니다. ‘관측하기에 결과가 생긴다’는 이론처럼, ‘생각하기에 삶이 태어난다’고 하는 얼거리를 슬기롭게 헤아리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마음이에요. 즐겁게 내 길을 고르고(선택), 즐겁게 내 삶을 바라보며(관측), 즐겁게 내 살림을 짓는(결과) 하루가 되기를 꿈꾸면서 아이들하고 웃음꽃을 피우려 합니다. 2016.3.30.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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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19
신동호 지음 / 실천문학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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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16



“아빠, ○○○당이 왜 나빠?”

― 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

 신동호 글

 실천문학사 펴냄, 2014.6.23. 8000원



  신동호 님 시집 《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실천문학사,2014)를 읽습니다. 대뜸 묻는 냉면집 아저씨 이야기가 긍금합니다. 냉면집 아저씨가 어디로 갔기에 시인은 이렇게 물음표를 콕 찍을까요? 아무래도 냉면집 아저씨가 더는 냉면집을 지키거나 버티지 못하기에 어디론가 가셨겠지요. 냉면집 살림이 나빠졌을 수 있고, 냉면집 말고 다른 꿈을 찾아서 길을 나섰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흔한 재개발에 밀려서 떠나야 했을 수 있고, 고향이 그리워서 냉면집을 고이 접었을 수 있습니다.



종착역. 끝이 없는 여행은 없다. 없기에 슬프고, 없기에 다행이기도 했다. 혁명은 억지로 봄을 부르지만 겨울아, 왜 사랑은 눈꽃처럼 네 안에서만 피어나는 것이냐.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은 눈동자는 아직도 길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겨울 경춘선 2)


광합성은 1차 산업이다. 지식인들은 이미 자신들이 비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당산나무 증후군)



  사월을 앞둔 시골은 부산하려는 움직임이 살랑거립니다. 아직 부산하지는 않습니다. 바야흐로 새벽이나 밤까지 따스한 바람이 불면 그야말로 부산할 테지요. 마늘밭에서 마늘을 뽑고, 마늘밭을 갈아엎은 뒤에, 이 자리에 새로운 남새를 심거나 모내기를 해야 하는 사오월이 그야말로 부산하지요.


  그래도 삼월 끝자락 새벽에 마을이 온통 연기투성이입니다. 집집마다 뭔가를 태우는 연기가 몽글몽글 솟습니다. 동틀 무렵부터 일어나서 하루를 연다는 뜻입니다. 나도 동틀 즈음 자리에서 일어나 하루를 엽니다. 아이들이 아침까지 깊이 자도록 불은 안 켭니다. 초만 한 자루 조용히 켭니다. 마당하고 뒤꼍을 돌면서 나무한테 인사하고, 곧 옥수수를 자리를 가만히 살핍니다. 날이 더 따스하면 아이들하고 신나게 옥수수를 심을 생각입니다. 어제는 텃밭에 붉은콩을 쪼르륵 심고, 뒤꼍에 나무도 한 그루 새로 심었습니다.



오전 여덟 시쯤 나는 오락가락한다. / 20퍼센트 정도는 진보적이고 32퍼센트 정도는 보수적이다. /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막둥이를 보며 늘 고민이다. (어떤 진보주의자의 하루)


장벽이 없었음을 확인하던 금강산이 두려웠던 게다. 우리 모두. 장벽이 있어야 편안한 우리 모두. (미인송)



  꽃삽하고 호미를 쥐고 흙놀이를 신나게 하는 아이들입니다. 꽃삽하고 호미만 있으면 하루가 빠르게 지나간다고까지 할 만합니다. 해가 뜨고 해가 지는 동안 꽃삽하고 호미로도 배고픈 줄 잊고 놀아요. 밥을 먹으라고 부르면 더 놀아야 한다면서 안 오기 일쑤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도시 사회이기에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그렇지만 딱 서른 해만 돌아보고 쉰 해를 거스르면 아주 많은 사람들이 시골에서 흙을 만졌어요. 백 해를 되새기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시골에서 흙을 만졌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니 우리 아이들뿐 아니라 온누리 거의 모든 아이들한테 꽃삽하고 호미를 맡기면 무척 신나게 흙놀이를 하리라 생각해요. 도시 아이들도 바닷가에 놀러가면 모래밭에서 모래를 파며 신나게 모래투성이가 되지요.


  시집 《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를 읽으면 신동호 님네 막둥이가 학교에 가기 싫어한다는 이야기가 얼핏설핏 흐릅니다. 그러면 이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말고 며칠쯤 아버지 일하는 곳에 함께 데리고 다녀도 재미있으리라 느껴요. 아이들은 굳이 학교에 ‘개근’해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부러 하루나 며칠쯤 학교를 쉬도록 하고서는, 어머니랑 아버지하고 바깥나들이를 넉넉히 다녀 보아도 즐거워요.



과태료 고지서를 깜빡하고 평양까지 가지고 갔다 / 납기 후 금액에 안달하던 자본주의 버릇까지 가지고 갔다 (평양, 가방)


늦은 밤, / 온종일 수학 문제를 푼 열다섯 아들이 / 집으로 가는 길에서 물었다. / “아빠 새누리당이 왜 나빠?” (사막촌 주막)



  시인 신동호 님이 과태료 고지서 말고 이녁 아들을 데리고 평양을 다녀오면 어떠한 살림을 지을 만할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학교를 며칠 쉬도록 하고는, 이 아이들이 평양을 아버지하고 함께 밟으면서 ‘아버지가 하는 일’을 살짝이나마 겪어 보도록 하면 어떠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다시 시집을 덮고 부엌일을 합니다. 아침으로 지을 밥거리를 손질합니다. 부엌에서 도마질을 하는 아버지를 보는 우리 아이들은 저희도 칼질이나 도마질을 하고 싶습니다. 칼등으로 마늘을 빻으면 왜 칼등으로 마늘을 빻느냐고 물으면서 저희도 그처럼 하고 싶습니다. 절구로 마늘을 찧으면 저희가 절구질을 하겠다면서 손을 번쩍번쩍 듭니다.


  커다란 무도 썰어 보고 싶고, 길다란 당근도 썰어 보고 싶습니다. 매운 내가 퍼지는 양파도 썰어 보고 싶고, 말랑말랑 잘 삶은 달걀도 가만히 썰어 보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어깨너머로 지켜보면서 배우고, 어버이는 어깨너머로 지켜보도록 틈을 내어 주면서 가르칩니다. 아이들은 어버이 곁에서 살림을 바라보면서 배우고, 어버이는 아이들 둘레에서 살림을 새로 지으면서 가르칩니다.



메밀꽃처럼 눈이 내리는데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 / 바다가 물러난 사리 갯벌 어디에서 개불을 잡고 있을까 (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


이제야 철조망이 보인다 / 나는, 내가 자유인인 줄 알았다 / 망명의 꿈도 꾸지 못하는 포로였음을 (포로수용소)



  메밀꽃처럼 눈이 내리고, 눈처럼 매화꽃이 날립니다. 매화꽃이 진 옆에서 모과꽃이 피고 앵두꽃이 핍니다. 모과꽃하고 앵두꽃이 지면 붓꽃하고 장미꽃이 펴요. 붓꽃하고 장미꽃이 질 즈음에는 초피꽃하고 후박꽃이 핍니다. 이 사이에서 찔레꽃이 가만히 피어나서 어느새 온통 하얀 꽃밭이 됩니다.


  시집 《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를 가만히 덮으며 생각을 기울입니다. 시인 신동호 님 아들은 아버지더러 “아빠 새누리당이 왜 나빠?” 하고 묻습니다. 아버지는 아들한테 ‘왜 나쁜’지 낱낱이 이야기를 해 주었을까요? 아니면, 싯말에만 이렇게 적었을까요?


  우리 집 아이들이 아버지더러 “○○는 왜 나빠?” 하고 묻는다면 나는 우리 아이들한테 “온누리에 나쁜 것(사람)은 없어.” 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온누리에 좋은 것(사람)도 없어.” 하고 덧붙여요. 나쁘다고 여긴 것(사람)이 어느새 좋다고 여길 만한 것(사람)으로 바뀌기도 하고, 좋다고 여긴 것(사람)이 어느새 나쁘다고 여길 만한 것(사람)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좋고 나쁨에 앞서 그것(그 사람) 바탕에 어떤 숨결이 흐르는가를 읽고 싶어요. 좋은 나무도 나쁜 나무도 없이 모두 ‘나무’이고, 좋은 풀도 나쁜 풀도 없이 모두 ‘풀’이며,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없이 모두 ‘사람’이라고 생각하려 합니다. “얘야, 네가 그릇을 떨어뜨려 깨뜨리면 네가 나쁜 아이일까?” “아니.” “아니지? 그냥 그릇을 떨어뜨려서 깨뜨렸을 뿐이야. 나쁜 사람은 따로 없어. 그저 그런 일을 했을 뿐이야. 나중에 그 사람이 그런 일을 왜 했는가를 스스로 돌아보면서 참말로 스스로 깨달을 수 있으면 돼.”


  새 아침에 새 하루를 엽니다. 새로운 이야기를 아이들하고 나눕니다. 새로운 살림을 짓자고 새롭게 생각합니다. 냉면집 아저씨는 틀림없이 새로운 길을 찾아서 씩씩하게 새로운 마음을 품으리라 봅니다. 시인 아저씨도, 나도, 온누리 아이들도, 모두 마음자리에 새로운 꿈을 담아서 삶을 노래할 수 있기를 빕니다. 2016.3.29.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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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터데이를 노래하며 11 - 완결
토우메 케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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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15



좋아하는 사람 곁에서 즐겁게 노래하기

― 예스터데이를 노래하며 11

 토우메 케이 글·그림

 이상은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6.2.25. 6000원



  아이들은 저희하고 함께 노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어머니랑 아버지가 저희하고 함께 놀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른들은 저마다 할 일이 있기에 좀처럼 아이들하고 놀 겨를을 못 내기 일쑤입니다. 아이들을 보살피거나 먹여살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에, 놀이보다는 으레 일이 앞서기 마련입니다.


  아이들은 저희랑 함께 놀 어버이를 기다립니다. 가만히 지켜보면서 기다립니다. 아이들은 어머니랑 아버지가 저희를 마주보면서 기쁨으로 좋아해 주며 함께 놀 날을 가만히 기다립니다.



‘먼 길을 돌아서 수많은 굴레를 짊어지고 왔구나. 우리들.’ (10쪽)


“도쿄로 돌아가고 싶지?” “이제 됐어. 너와 상관없는 일이야.” “우리는 여기서 자랐기 때문에 이곳에 애착이 있어. 하지만 오빠는 저쪽에 소중한 사람이 있잖아? 남편이 하고 싶은 일은 여기서도 할 수 있어. 오빠가 희생하면 그이도 마음이 불편할 거야. 그런 건 아버지도 바라지 않으실 테니까.” (57쪽)



  토우메 케이 님이 빚은 만화책 《예스터데이를 노래하며》(학산문화사,2016) 열한째 권을 읽습니다. 열다섯 해 남짓 잇던 이야기는 이제 마무리를 짓습니다. 권수로 치면 열다섯 해 남짓에 걸쳐 열한 권이니, 무척 더디게 이야기가 흘렀다고 할 만합니다. 이 사람하고 저 사람이 맺는 이야기가 흐르는 만화이고, 이 사람하고 저 사람 사이에서 따스한 바람이 불다가 서운한 바람이 부는 이야기가 흐르는 만화입니다. 이제 마지막 열한째 권에 이르러 ‘저마다 좋아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놓고 뚜렷하게 한 걸음씩 떼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하면서 흔들리는 삶이 아니라, 망설이지 않고 씩씩하게 한 걸음을 내딛으려는 모습이 나와요.



“이 주변에는 볼 게 없는데.” “괜찮습니다. 산이나 들, 논밭을 구경하고 싶어요.” (73쪽)


‘이것저것 고민해도 결국 다다르는 곳은 내 영혼이 원하는 장소.’ (190쪽)



  어느 모로 본다면, 이 사람도 좋고 저 사람도 좋을 수 있어요. 그래서 이 사람 곁에도 있고 저 사람 곁에도 있을 만합니다. 여러 사람을 가까이에 두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서로 동무가 되어 함께 지낼 만해요. 사람살이가 꼭 짝짓기를 해야 하는 얼거리가 아니니, 굳이 ‘너랑 나만’이라고 하는 틀에 사로잡혀야 하지 않습니다. 사람살이에는 ‘짝’만 있지 않고 ‘동무’가 함께 있어요. ‘이웃’이 있지요. 동무도 ‘너나들이’ 같은 이가 있으며, 말동무나 길동무나 일동무나 꿈동무가 있어요.


  그러니 내 마음에 드는 어느 한 사람이 있을 적에, 또는 내 마음을 사로잡는 여러 사람이 있을 적에 잘 살피거나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짝’으로 두려는가? 모든 사람을 ‘동무’로 사귀려는가? 오직 한 사람만 ‘짝’으로 두려는가? 다른 동무가 없이 짝꿍만 있으면 되는가?



“나는, 나를 받아들여 준다면 당장이라도 갈 거야. 내가 도망친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만, 미나토는 자기 자신에게 달렸잖아.” (82쪽)


“곁에 있어 주면 그걸로 충분해. 멀리서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아. 곁에 있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돼. 그렇잖아. 곁에 있을 수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일이야.” (84쪽)



  만화책 《예스터데이를 노래하며》는 가장 훌륭하거나 멋진 길을 밝히거나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만화책에서 몇 가지를 넌지시 짚습니다. 첫째, 누가 누구를 좋아하든 ‘내 넋이 가장 포근하게 쉬면서 즐거운 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둘째, ‘내가 살아가는 기쁨은 바로 내가 스스로 찾으면 된다’고 말합니다. 셋째, 마음에 드는 모든 사람을 짝꿍으로 혼자 차지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아름다운 이웃하고 동무를 즐겁게 아끼면서 살뜰히 마주할 수 있는 마음이 되자고 말해요.



“어중간한 어른인 우리들은, 머리로만 지나치게 생각하고 있어. 이렇다 할 인생 경험이 없으니까. 그렇지?” (142쪽)


“‘행복’이란 뭘까요?” “그건 하루(주인공 이름, 그러니까 주인공 스스로)가 아니면 알 수 없어.” (164쪽)



  사랑은 머리로 알 수 없습니다. 아무렴, 그렇겠지요. 사랑은 가슴으로 알 테지요. 사랑은 마음으로 알 테고, 사랑은 깊은 넋으로 깨닫겠지요. 머리로 이모저모 아무리 따진들 사랑을 알 길이 없으리라 느껴요.


  기쁨도 이와 같아요. 기쁨을 머리로 알 수 없으리라 느껴요. 돈이 많아야 기쁨일까요? 이름을 드날려야 기쁨일까요? 엄청난 힘을 부려야 기쁨일까요? 아니겠지요?


  아이들은 두 손을 꼬옥 잡고 마당에서 빙글빙글 돌아도 까르르 웃음꽃입니다. 아니, 아이들은 내가 손가락 하나만 들어서 옆구리를 살짝 찔러도 깔깔깔 웃음바다입니다. 나도 마찬가지예요. 아이들이 춤잔치나 노래잔치를 베풀어 주어야 웃지 않습니다. 그저 곁에 있기만 해도 웃음이 퍼집니다.


  즐겁게 밥을 짓고, 즐겁게 빨래를 합니다. 즐겁게 씨앗을 심어 밭을 돌봅니다. 즐겁게 자전거를 몰며 나들이를 누립니다. 즐겁게 뒷산에 올라 봄꽃을 만납니다. 좋아하는 사람을 곁에 둘 수 있는 기쁨을 새롭게 되새기면서, 오늘 하루도 빙그레 짓는 ‘웃음살림’을 가만히 그립니다. 2016.3.28.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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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먹은 아기 고양이 비룡소의 그림동화 145
케빈 헹크스 글 그림, 맹주열 옮김 / 비룡소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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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643



달덩이를 먹으며 달웃음 짓는 눈썹달

― 달을 먹은 아기 고양이

 케빈 헹크스 글·그림

 맹주열 옮김

 비룡소 펴냄, 2005.6.3. 8500원



  저녁에 두 아이를 재우며 이마를 쓸아넘기고 볼을 토닥일 적마다 으레 생각합니다. 통통한 이 아이들 볼은, 얼굴은, 머리는, 마치 달덩이 같구나 하고요. 잠자리맡에서 살살 볼을 쓰다듬다가 때때로 입을 왕 하고 벌리며 아구아구 먹는 시늉을 합니다. 눈을 감으며 스스르 잠들려던 아이들은 입을 쩍 벌린 아버지가 냠냠 아구아구 하는 시늉을 보면서 달눈썹이 되어 웃습니다. 달덩이 같은 얼굴을 먹히니 달눈썹이나 달웃음이 되는 셈일까요.



어느 날 밤, 아기 고양이는 보름달을 처음 보았어요. ‘하늘에 조그만 우유 접시가 있네.’ 고양이는 우유가 마시고 싶어졌지요. (2쪽)



  케빈 헹크스 님이 빚은 그림책 《달을 먹은 아기 고양이》(비룡소,2005)를 가만히 읽습니다. 이 그림책에 나오는 어린 고양이는 아직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어린 고양이는 아직 겪은 일이 매우 적습니다. 어린 고양이는 궁금한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어린 고양이는 보름달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보름달을 처음으로 보았다고 하니, 초승달도 반달도 아직 잘 모를 수 있습니다. 보름달을 처음 보았다면 봄이나 여름은 알더라도 가을이나 겨울은 아직 모를 만해요. 한 해가 흐르는 철도 아직 모를 테고요.



아기 고양이는 다시 힘을 냈어요. 엉덩이를 씰룩씰룩하다가 현관 맨 위 계단을 딛고 힘껏 뛰어올랐지요. (8쪽)



  달은 때때로 노랗게 빛납니다. 달은 어느 때에는 바알갛게 빛납니다. 그리고 달은 퍽 자주 하얗게 빛납니다. 동그랗고 하얗게 빛나는 달을 본 아기 고양이는 저 노랗고 동그란 것이 ‘접시에 담긴 우유’이리라 하고 여겨요.


  아하, 이 어린 고양이는 집고양이인가 보군요. 집고양이인 터라 ‘접시에 담긴 우유’를 알 테지요. 어린 고양이가 혼자 바깥 나들이를 나와서 달을 보았군요. 그런데 어린 고양이는 바깥 나들이를 나와서 달만 보지 않았어요. 달이 밝게 뜬 밤에 하늘하늘 날아다니는 개똥벌레도 봅니다. 커다랗고 동그란 달은 커다랗고 맛난 우유 접시로 여긴 아기 고양이는 개똥벌레는 작으면서 맛있는 남다른 것이 아닐까 하고 여깁니다. 그렇지만 엑, 개똥벌레는 그리 맛있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달을 잡으려고 계단 짬에서 뛰어올랐지만 땅바닥에 나자빠져서 뒹굴고 말아요.



아기 고양이는 가장 높은 나무로 달려가서 맨 꼭대기까지 오르고 오르고, 또 올랐어요. 하지만 우유 접시에는 아직도 닿을 수가 없었지요. 아기 고양이는 덜컥 겁이 났답니다. (18∼19쪽)



  아기 고양이는 털을 고르면서 기운을 차립니다. 다시 해 보려고 합니다.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 봅니다. 못물에 비친 달을 보고는 못으로 뛰어들어 보기도 합니다. 나무 꼭대기에서 무서움에 떨기도 하고, 못물에 빠져서 홀딱 젖기도 합니다. 어린 고양이로서는 그야말로 고단한 나날인 셈입니다. 이것을 해도 안 되고 저것을 해도 안 되어요.


  지친 몸으로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무래도 ‘달 우유’는 못 먹겠네 하고 여기면서 터덜터덜 집으로 가지요. 자, 이 하루는 어린 고양이한테 어떤 날로 마음에 남을까요? 해도 해도 안 되던 날로 남을까요? 수많은 새로운 일을 겪은 날로 남을까요? 나중에 동무가 생기면 이 이야기를 들려줄 만할까요? 아니면 어미 고양이한테 오늘 겪은 일을 찬찬히 들려줄 만할까요? 어린 고양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을 다른 고양이는 무슨 생각이 들까요?



아기 고양이는 타박타박 집으로 돌아갔지요. 그런데……. (26쪽)



  그림책 《달을 먹은 아기 고양이》에 나오는 아기 고양이는 ‘달을 먹지’는 못 합니다. 달을 먹으려 했을 뿐입니다. 달을 먹으려 하면서 숱한 일을 겪었고, 나무도 꼭대기까지 씩씩하게 올라갔어요. 다만, 꼭대기에서 덜덜 떨기는 했어도 말이지요. 더욱이 ‘고양이는 물을 싫어한다’고 하는데 이 어린 고양이는 못물에 당차게 뛰어들었어요. 아직 못물인지 몰랐기 때문일 수 있는데, 고양이로서 못물에서 허우적거리다가 헤엄도 쳐서 빠져나왔습니다. 그야말로 새로운 일을 잔뜩 겪었고, 이러는 동안 생각이 늘고, 이야기가 자라며, 몸이랑 마음도 부쩍 큽니다.


  달덩이를 먹으며 달웃음 짓는 눈썹달로 잠드는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이 아이들은 밤새 곱게 꿈나라를 누비다가 아침에 번쩍 눈을 뜹니다. 아이들은 참말로 번쩍 하고 눈을 떠요. 어제 했던 놀이는 모조리 잊고, 아침부터 새로운 놀이로 접어듭니다. 어제 하다가 잘 안 되던 놀이를 다시 하면서, 오늘은 조금 더 잘 해 보자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새로운 놀이를 하면서 새로운 마음이 됩니다. 어제까지 잘 못 하던 놀이를 새롭게 붙잡으면서 어느새 모든 놀이를 익숙하게 해냅니다. 더 빨리 달리고, 더 높이 뛰며, 더 힘차게 걷습니다. 더 활짝 웃고, 더 신나게 노래하며, 더 싱그러이 춤춥니다.


  아이들은 차츰 밥을 더 먹습니다. 아이들은 차츰 더 오래 놉니다. 아이들은 차츰 더 말을 많이 합니다. 밥을 먹고 사랑을 먹으며 온갖 일(경험)을 먹습니다. 어버이가 들려주는 말을 먹고, 수많은 이야기를 먹습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아기 고양이도, 나를 둘러싼 아이들도, 온누리에 저마다 다른 보금자리에서 자라는 어여쁜 아이들도, 아침저녁으로 새로우면서 기쁜 꿈을 지으면서 하루를 누립니다. 2016.3.27.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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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하는 어른 - 김지은 평론집
김지은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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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142



‘우주를 꿈꾸는 작은 집’에서 어린이책을 읽는다

― 거짓말하는 어른

 김지은 글

 문학동네 펴냄, 2016.1.8. 15000원



  꿈을 꿀 수 있는 삶이란 어떠할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날마다 꿈을 꿀 수 있고, 이 꿈으로 한 걸음씩 걸어갈 수 있으며, 이 꿈을 가슴에 품는 삶이란 어떠할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그리고, 꿈을 꿀 수 없는 삶이란 어떠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어느 하루도 꿈을 꿀 수 없고, 꿈이 없어 한 걸음씩 걷는 일이 없으며, 아무런 꿈도 가슴에 품지 못하는 삶이란 어떠할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꿈을 꿀 수 있기에 살림을 새로 지을 만하지 싶습니다. 꿈을 꾸면서 하루를 새롭게 맞이하면서 기운을 내지 싶어요. 꿈을 꾸는 마음으로 손수 살림을 짓는 동안 사랑이 피어날 만하지 싶고요.


  그리고, 꿈을 꿀 수 없기에 살림을 새로 짓는 데에 마음을 못 쓰겠구나 싶어요. 꿈을 꾸지 못하기에 날마다 똑같은 쳇바퀴처럼 느낄 만하지 싶으며, 꿈을 가슴에 못 품으니 재미도 보람도 즐거움도 누리기 어려우리라 봅니다.



어린이들은 반항도 비판도 정해진 한계 안에서나 허용된다는 걸 안다. 그럴 때 그들의 마지막 방어는 ‘거기 없음’을 택하는 것이다. ‘제가 한 일이 아니에요’ 혹은 ‘저는 없었어요’라고 말해버리는 것이다. (15쪽)


어린이의 상처를 직접 어루만지고 함께 굶주리는 일은 어떤 사실이나 보고서도 해낼 수 없는, 문학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33쪽)



  어린이책 이야기를 쓰는 김지은 님이 선보인 어린이문학 비평인 《거짓말하는 어른》(문학동네,2016)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나온 어린이문학을 바탕으로 비평을 들려주는 《거짓말하는 어른》입니다. 책이름에서 엿볼 수 있듯이, 한국 사회에서 숱한 어른들이 ‘거짓말하는 삶’이라는 대목을 넌지시 짚으려고 하는 문학비평이라고 느낍니다. 참말이 아닌 거짓말로 기울고, 말뿐 아니라 생각도 마음도 거짓으로 기울며, 삶과 살림까지 거짓으로 기울다가, 그만 사랑까지도 거짓스러운 쪽으로 기우는 한국 사회 어른들 모습을 어린이문학으로 비추어서 보여주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다른 사람의 행복과 불행에 대하여 제멋대로 짐작해 버리는 것일까. 행복과 불행에 대한 우리의 기준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35쪽)


우리 동화에서 인물의 목소리가 저점 잦아들고 우물거림이 많아진다거나 인물의 동선이 좁은 영역에서 움을 파는 소극적 구성이 많아지는 것은 아이들의 처지는 물론 글을 쓰는 어른들의 우울함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65쪽)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은 행동에 날개를 달아 준다. 자유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67쪽)



  어린이문학을 비평하는 글은 어린이가 읽도록 쓴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어린이문학 비평은 아무래도 ‘어린이책을 읽는 어른’한테 읽히려는 글입니다. 어린이책을 읽는 어른이 조금 더 마음을 열어서 꿈씨앗 한 톨을 심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쓰는 글이지 싶습니다. 이러면서 ‘어린이책을 안 읽는 어른’한테도 어린이책 한 권이 곁에 놓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쓰는 글이리라 봅니다. 그리고, ‘어린이가 읽을 이야기를 글로 짓는 어른’이 읽도록 쓰는 어린이문학 비평일 테지요. 어린이는 어린이문학 비평을 읽지 않더라도 ‘어린이책을 쓰는 어른’이 이러한 비평을 읽으면서 ‘어린이한테 어떤 이야기밥’을 나누어 주거나 베풀 수 있을 때에 어른으로서도 즐거우면서 보람이 있고 아름다운가 하고 돌아보도록 북돋울 만하리라 느껴요.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은 행동에 날개를 달아 준다(67쪽)”고 하는 대목을 새롭게 되새겨 봅니다. 어른이 스스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될 때에 어른부터 스스로 즐거우면서 홀가분해요. 아이를 돌보는 어른이 스스로 즐거우면서 홀가분하다면 아이한테 늘 웃음짓는 얼굴로 노래하는 이야기를 들려줄 만합니다. 아이를 돌보는 어른이 스스로 안 즐거우면서 안 홀가분하다면, 그러니까 어른 스스로 늘 안 웃고 안 노래하면서 산다면, 이때에 이 어른은 어떤 몸짓이 될까요?


  다시 말하자면, 어른 스스로 즐거움이 없고 사랑이 없으며 웃음이 없을 적에는 아이가 아이답게 자라는 길을 가로막거나 괴롭히는 짓을 어른 스스로도 모르는 새에 저지르지 싶어요. 사회에서 흔히 벌어지는 안타까운 일들은 어른이 어른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한 삶이기 때문에 벌어지는구나 싶습니다.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자기 자신의 문제이지만, 우리는 누군가가 변신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행운이 되어 줄 수 있다. (105쪽)


내 마음을 넘어서서 상대방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사회적 마음을 상상하는 일은 소중하다. (116쪽)



  아이를 낳기에 어른이 아니라, 아이를 사랑으로 돌보기에 어른이라고 느낍니다. 아이를 가르치기에 교사가 아니라, 아이와 사랑으로 함께 배우는 숨결이기에 교사이지 싶습니다. 아이 곁에 있기에 어른이 아니라, 아이를 따사로이 품고 사랑할 수 있기에 어른이요 어버이라고 느껴요. 아이한테 책을 읽히고 교과서를 건네기에 교사가 아니라, 아이하고 함께 책을 읽고 아이하고 함께 선 이 자리에서 슬기롭게 함께 배우려는 몸짓이기에 교사이지 싶어요.


  어린이문학다운 어린이문학이라면, 언제나 사랑을 담으리라 봅니다. 교훈이나 훈계가 아닌 ‘사랑을 보여주고 사랑을 이야기하며 사랑을 느끼도록 북돋우는’ 이야기가 바로 어린이문학이 되지 싶습니다. 삶을 사랑하고, 살림을 사랑하며, 사람을 사랑해요. 새로운 하루를 사랑하고, 싱그러운 숲을 사랑하며, 슬기로운 이웃을 사랑하지요.



어린이들이 좀처럼 슬퍼하지 않는다. 어린이들은 눈물을 흘리는 대신 욕설을 한다. (160쪽)


환상은 선과 악의 정의를 내리거나 명확한 참과 거짓을 구분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시공간에서 잘못과 잘못 아닌 것에 대해 돌이켜보는 과정을 통해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 (199쪽)



  어린이문학 비평인 《거짓말하는 어른》은 여러 어린이문학을 찬찬히 돌아보면서 ‘어린이문학을 어린이한테 읽히려는 뜻’을 새삼스레 되새기자고 살며시 말을 겁니다. 책을 많이 읽히자는 목소리가 아니고, 좋은 책을 읽히자는 목소리가 아닙니다. 어떤 책을 어린이한테 읽히더라도 아이들이 즐거운 삶을 느낄 수 있도록 돕는 책을 어른도 함께 즐기자는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아이들이 판타지를 좋아한다고 해서 판타지를 골라서 읽힐 까닭은 없어요. 더 재미있거나 더 나은 판타지를 찾아서 읽힐 까닭도 없겠지요. 그리고 판타지이든 아니든 대수롭지 않아요. 어떤 책이건, 어떤 문학이건, 어느 작가가 썼건, ‘내가 누구인가를 스스로 찾고 느끼며 생각하도록’ 북돋우는 이야기를 만날 수 있도록 하면 되리라 느낍니다.


  이 작은 집에서, 이 작은 마을에서, 이 작은 고장에서, 이 작은 나라에서, 이 작은 별에서, 이 작은 우주에서, 그리고 드넓은 온누리에서, 우리 숨결은 어떠한 뜻이고 넋이며 마음이고 빛이며 사랑이요 노래인가 하는 대목을 어린이가 스스로 되돌아보도록 이끄는 이야기를 우리 어른들이 슬기롭게 헤아려서 가만히 들려줄 수 있을 때에 아름다운 삶이나 살림이 될 만하리라 봅니다.



아이들이 집을 되찾는 일은 학교가 달라지는 것, 나아가서 사회가 달라지는 것과 연관이 깊다. (222쪽)


집은 이런 곳이다. 우주를 꿈꾸는 곳이다. 회사가 학교가 주지 못하는 평온함을 듬뿍 안겨 주면서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는 곳이다. 내 꿈을 어떤 잣대로도 잘라내지 않는 곳이다. (226쪽)



  우주를 꿈꾸는 작은 집에서 어린이책을 읽습니다. 쳇바퀴를 도는 사회가 아닌, 크고작은 말썽이나 사건·사고가 끝없이 터지는 사회가 아닌, 체벌과 따돌림과 폭력이 춤추는 학교나 사회가 아닌, 불평등과 전쟁과 반민주가 넘실거리는 사회가 아닌, 그러니까 아름다운 삶이 흐르는 곳에서 어린이책을 읽습니다. 아름다운 사랑이 흐를 수 있는 곳을 꿈꾸며 어린이책을 읽습니다. 아름다운 살림을 가꿀 수 있는 조그마한 보금자리를 마음 깊이 생각하면서 어린이책을 읽습니다.


  아이도 꿈을 꾸고 어른도 꿈을 꿀 수 있는 삶터를 헤아리며 어린이책을 읽어요. 아이뿐 아니라 어른도 함께 꿈을 꾸면서 이 꿈을 키워 삶으로 이룰 수 있는 길을 걸으며 어린이책을 읽습니다.


  참말로 ‘우주를 꿈꾸는 집’에서 어린이책을 읽습니다. 사건이나 사고나 전쟁이 아니라 삶과 사랑과 살림을 일으킬 수 있는 집·마을·고장·나라를 꿈꾸면서 어린이책을 읽어요. 조그마한 문학비평인 《거짓말하는 어른》이 이러한 삶길이나 책길이나 꿈길로 우리 어른들을 찬찬히 이끌 수 있기를 빕니다. 글을 쓰는 어른도, 그림을 그리는 어른도, 집살림을 도맡는 어른도, 교과서로 가르치는 어른도, 마을살림을 다스리는 어른도, 정치나 행정을 맡는 어른도, 기계를 다루는 어른도, 모두 홀가분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사랑스러운 어린이책’ 한 권을 손에 쥐고서 활짝 웃는 몸짓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2016.3.26.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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