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읽는다는 것 - 엄마 독서평론가가 천천히 고른 아이의 마음을 읽는 책 40
한미화 지음 / 어크로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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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배움책 38



어린이책을 읽는 어른이 배우는 살림

― 아이를 읽는다는 것

 한미화 글

 어크로스 펴냄, 2014.8.18. 14000원



  나는 어린이책을 어린이일 적에는 얼마 못 읽었습니다. 내가 어린이였던 1980년대 첫무렵에는 거의 다 전집책이었는데, 전집책은 집에 제법 돈이 있지 않고서야 들이지 못했습니다. 그즈음 내가 다닌 학교에는 학교도서관이 없었고 학급문고도 없었습니다. 내가 살던 인천에서 우리더러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으라고 알려준 어른도 없었습니다. 중학교에 가고서야 도서관은 ‘시험공부 하러 가는 곳’인 줄 알았어요. 왜 그러한가 하면, 도서관은 새벽 여섯 시에 문을 여는데, 번호표를 주어요. 번호가 찍힌 표는 ‘책상 번호’이고, 이 종이가 있어야 도서관에 들어가서 ‘내 자리’를 얻어서 그 책상에 틀어박혀 시험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요즈음은 도서관이 많이 달라지지요. 예전처럼 ‘책 없는 도서관’은 자취를 감추지요. 아무튼 나는 어릴 적에 어린이책은 거의 읽지 못한 채 마냥 뛰어놀면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마땅한 어린이책이 드물었고, 더러 손에 쥔 어린이책은 ‘요즈음 그 책을 다시 들추니 하나같이 일본 어린이책을 몰래 베낀 판’이었습니다.



어린이책을 읽자 내 안에 웅크리고 있던 어린 소녀가 걸어 나와 내 아이의 손을 잡았다. 아이가 머리 모양이 마음에 안 들어 학교에 안 가겠다고 할 때 나는 심부름도 못 갈 만큼 외모를 신경 쓰던 사춘기를 떠올렸다. (9쪽)


똑똑한 척을 하려 들면 사람이 경직되기 마련이라 재미가 없다. 가장 큰 웃음은 자기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만들 때 나오는 법이 아닌가. (25쪽)



  책을 비평하는 일을 하는 한미화 님이 평론가 자리에서 살며시 내려와서 ‘어머니 자리’에서 어린이책을 읽은 느낌을 갈무리한 《아이를 읽는다는 것》(어크로스,2014)을 읽습니다. 한미화 님은 어머니(또는 어버이)가 되어 어린이책을 읽는 동안 평론가로서 어린이책을 읽을 때하고는 사뭇 다른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니,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어린이책을 손에 쥐면서 ‘삶을 읽는 눈’이 달라지거나 새롭게 트이는구나 하고 느꼈다고 해요.


  그러고 보면, 나도 어린이책을 어린이일 때가 아니라 어른일 때에 읽었습니다. 그런데 언제 어린이책을 읽었느냐 하면, 스무 살에 읽고 스물네 살에 읽었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교에 들어간 뒤에 대학교 둘레 책방을 다니다가 만난 어린이책을 읽고는 뒷통수를 맞은 느낌이었어요. 글씨만 빼곡한 ‘어른 인문책’은 온갖 딱딱한 말투로 갖은 어려운 이론이 가득한데, 글씨도 적고 그림이 많은 ‘어린이책’은 퍽 쉽고 부드러운 말씨로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가득하더군요. 삶과 사람과 사랑을 이토록 쉽고 부드럽게 들려주는 어린이책으로 ‘토론’을 한다면 훨씬 뜻있고 값있을 뿐 아니라 즐겁게 새 넋을 가꿀 만하겠다고 느꼈어요.



되돌아보니 잔소리는 부모인 내가 마음이 지치고 몸이 힘들 때, 아이를 지나치게 어리게만 취급할 때 더 심해졌던 것 같다. (44쪽)


아무리 자식이라 해도 애정을 쏟지 않는 한, 저절로 알게 되는 건 없다. (67쪽)



  나는 사내로 태어났기에 군대에 끌려갔습니다. 군대에서는 책을 한 권도 읽지 못했습니다. 내가 군대에서 볼 수 있던 ‘글’은 연대장이나 대대장이 내리는 ‘지시사항’이었고, ‘스포츠신문’에다가 ‘ㅈ일보’하고 ‘국방일보’였습니다. 1990년대 군대에 책은 거의 들어올 수 없었지만 ‘재미있게’도 스포츠신문하고 ㅈ일보는 잘 들어왔습니다. 아무튼 군대를 마치고 사회로 돌아온 첫 날 드디어 손에 쥔 책은 어린이책이었습니다. 스물네 살에 비로소 《몽실 언니》라는 동화책을 읽었습니다.


  이때부터 어른 인문책 곁에 어린이책을 나란히 놓으면서 읽었고, 둘레에서 이웃들이 ‘너는 아이도 아니고 어른이면서 왜 어린이책을 읽니?’라든지 ‘너는 장가도 안 간 주제에 왜 어린이책을 읽니?’라든지 ‘너는 혼자 살고 애도 없으면서 어린이책을 왜 읽니?’라든지 ‘너는 대학교도 자퇴해서 앞으로 교사 일도 할 수 없을 텐데 어린이책을 왜 읽니?’ 같은 말을 물을 적마다 몇 가지로 대꾸했습니다. 첫째, “이 어린이책이 참 재미있으니 한번 읽어 보시겠어요?” 둘째, “어른책보다 훨씬 훌륭하니까 이 어린이책을 읽어요.” 셋째, “나중에 혼인해서 아이를 낳은 다음에 어린이책을 읽는다고 하면 이미 늦어요. 이제부터 바지런히 읽어야 나중에 우리 아이한테 들려주거나 물려줄 어린이책을 제대로 가릴 수 있어요.”



《요술 손가락》을 읽어 보면 어린이들이 얼마나 틀에 박히지 않은 멋진 이야기를 좋아하는지, 악당들이 끔찍한 최후를 맞는 걸 얼마나 즐기는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79쪽)


그렇다면 톰은 왜 큰어머니나 오빠들 눈에는 보이지 않느냐고? 왜냐하면 그들은 해티만큼 간절하게 톰을 원하지 않으니까. (129쪽)



  한미화 님은 《아이를 읽는다는 것》이라는 책을 빌어서 이녁 이야기를 찬찬히 풀어놓습니다. 다만, 이 책을 살피면 한미화 님이 살림을 지은 이야기보다는 ‘책 줄거리 소개’가 조금 길어서 이 대목이 아쉬워요. 책 줄거리는 우리가 스스로 읽으면 얼마든지 다 알 수 있으니 ‘줄거리 소개’는 더 짧게 줄이거나 끊은 뒤에, 그 책을 왜 읽었는가를 들려주고, 그 책을 읽으며 받은 기쁨이나 슬픔을 밝히며, 그 책을 읽고 나서 한미화 님 아이하고 어우러지는 나날이 어떻게 바뀌었는가 하는 대목을 풀어놓으면 한결 나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무튼, 나는 한미화 님 책을 읽으면서 여러모로 반갑습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림을 지으면서 즐겁게 어린이책을 마주하는 이웃을 알았거든요. 평론가로서 추천도서를 소개하려는 책읽기가 아니라, 어버이로서 아이를 사랑하려는 책읽기를 보여주기에 반갑습니다.



직장에서는 해고와 실직이 아버지를 위협하고, 회사에 매여 가정을 등한시한 탓에 불만과 권태에 찌든 아내는 남편을 주눅 들게 하고, 성공과 돈이 최고인 세상에서 돈 못 버는 아버지는 자식 앞에서 할 말이 없다. (208쪽)



  어린이책을 읽는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신나는 생각날개’를 가꾸는 기쁨을 누립니다. 어린이책을 읽는 어른은 어른답게 ‘재미난 살림날개’를 가꾸는 즐거움을 누립니다. 어린이는 어린이책에서 생각을 한껏 북돋우는 발판을 얻습니다. 어른은 어린이책에서 살림을 한껏 일으키는 바탕을 얻어요.


  자, 가만히 헤아려 봐요. 아이들은 우리 어른과 어버이한테서 무엇을 바랄까요? 더 많은 돈을 바랄까요? 어쩌면 더 많은 돈을 바랄는지 모르지요. 그래서 아이한테 더 많은 돈을 선물해 줄 수도 있지요. 그러면, 참말로 아이들한테 더 많은 돈을 선물해 보셔요. 그때에 아이들은 또 무엇을 바랄까요? 더 큰 집? 더 빠르고 새까만 자가용? 외국여행? 우주여행?


  아마 이 모두 다 아니리라 느껴요. 아이들은 우리 어른과 어버이한테 오직 하나를 바라요. “나랑 같이 놀자!”


  더 많은 돈을 버느라 바쁘기에 아이하고 못 놉니다. 아이하고 못 놀면 아이는 ‘사랑’을 느끼지 못합니다.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는 사랑스레 자라지 못합니다.


  사랑스레 자라지 못하는 아이는 앞으로 어떤 길을 걸을까요? 우리 어른들은 아이한테 더 많은 물질만 베풀려고 하다가 그만 물질에만 얽매이고 말아 ‘마음’을 잊고 ‘사랑’을 잃으며 ‘살림’을 놓치지는 않는지 궁금합니다. 마음과 사랑과 살림이 없이 아이를 키운다면, 정작 어른인 우리부터 스스로 안 재미있고 안 보람차고 안 즐거운 하루가 되지는 않을까 궁금합니다.



오로지 어린이책을 읽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가슴 벅찬 순간이 있다 … 꾸밈없이 순진한 세계를 어린이책에서 만날 수 있다. (249쪽)



  ‘엄마 독서평론가’라고 하는 한미화 님이 책 한 권으로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는 아주 조그맣습니다. 바로 사랑 하나입니다. 사랑으로 어린이책을 읽고, 사랑으로 이녁 아이를 돌보려 합니다. 우리도 저마다 사랑으로 어린이책을 읽을 적에 기쁩니다. 우리도 저마다 사랑으로 살림을 지을 적에 하루가 즐겁습니다. 아이하고 나눌 한 가지는 언제나 ‘즐겁게 어울려 놀듯이 짓는 사랑스러운 살림’이라고 느껴요. 이 대목을 늘 가슴속에 고이 새기면서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비질을 하고 이부자리를 여미고 집안을 건사하고 텃밭에 씨앗을 심고 나무하고 인사하면서 삶을 누릴 때에 아름다운 보금자리가 되리라 봅니다. 2016.3.11.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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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 한국사 상식 44가지의 오류, 그 원인을 파헤친다!
박은봉 지음 / 책과함께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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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47



군사정권은 왜 ‘역사’를 건드렸을까?

―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박은봉 글

 책과함께 펴냄, 2007.11.24. 16800원



  《한국사편지》를 쓴 박은봉 님이 선보인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책과함께,2007)는 책이름처럼 한국사를 놓고 사람들이 ‘상식’으로 여기는 대목을 바로잡으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정작 옳지 않거나 틀릴 수 있다는 대목을 알려준다고 할 만합니다. 이를테면 오늘날 우리는 아기가 태어나면 주민등록을 해야 하고, 이때에 성하고 이름을 쓰는데요, 이때에 아기한테 붙이는 성을 우리가 널리 쓴 지 얼마 안 되었다는 대목을 깨닫는 사람이 매우 적어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주민등록을 할 적에 ‘성’이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또 어머니나 아버지 성 가운데 하나를 안 써서는 안 됩니다. 그나마 요즈음은 어머니 성도 처음부터 쓸 수 있도록 법이 바뀌었습니다만, ‘어머니 성도 아버지 성도 아닌 새로운 성’을 쓸 수는 없어요. 우리는 왜 새로운 성을 쓰면 안 될까요? ‘중국에서 베풀어’ 준 성이 아니라, 한국사람 스스로 새로운 성을 지을 수 없을까요?



고려시대 이전에는 왕족과 극소수의 대귀족만 성을 가졌고 나머지 사람들은 성 없이 이름만 있었다. 유력한 호족 집안에서 태어난 왕건조차 성이 없었으니 … 왕실의 체모를 갖추려면 중국처럼 성을 써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는 중국과 신라의 호칭 문화가 다른 데 이유가 있었다. 사람을 호칭할 때 신라에서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 관습이었지만 중국에서는 성을 불렀으며 이름 부르는 것은 무례한 일로 여겼다. (21, 23쪽)



  ‘성’이란 무엇일까요. 어버이 성은 아이가 꼭 물려받아야 할까요. 우리는 저마다 집안에 족보가 있다고 여기지만, 우리가 아는 족보 가운데 제대로 된 족보는 얼마나 될는지 궁금합니다. 고구려나 백제나 신라에서도 성을 쓴 사람은 아주 드물었고, 고려 무렵에도 드물었으며, 조선 무렵이라고 해서 그리 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대목을 헤아릴 수 있다면 오늘날 ‘한국사람 누구나 성을 쓰는 일’을 좀 알쏭하게 여길 만하겠지요.


  다시 말해서 ‘아무 성’을 쓴다고 하더라도 족보에 남을 일이 아닐 만하리라 봅니다. 족보가 대수롭지 않다기보다, 족보에 얽매이지 않아도 될 우리 살림이리라 생각해요. 사내(아버지)로 이어지는 핏줄을 지켜야 하는 살림이 아니라, 오늘 이곳에서 저마다 즐거운 일을 찾아서 저마다 기쁨으로 삶을 짓는 데에 마음을 기울일 수 있어야지 싶어요.


  그래서 아버지 핏줄을 잇는다는 ‘성’이란 뜻이나 값이 얼마 없다고 할 만하지 싶어요. 우리는 아무 성을 잇는 사람이 아니라, 아름답게 삶을 짓고 사랑스레 살림을 지어서 아이들한테 물려줄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곰곰이 돌아보면 오늘날에도 한국사람은 서로 부를 적에 ‘성을 잘 안 붙여’ 버릇합니다. 성으로 불러야 ‘버릇없지 않다’는 생각은 중국 문화였고, 중국 글이나 말을 쓰던 권력자 문화였다고 합니다. 이런 중국 문화를 받아들인 권력자가 여느 사람한테까지 이 문화를 퍼뜨렸기에 ‘최 영감’이나 ‘박 선생’ 같은 부름말을 썼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용구 삼촌’이나 ‘순이 이모’나 ‘은봉 선생’처럼 성을 빼고 이름으로만 부르곤 했어요.



사람들은 현모양처 하면 으레 신사임당을 떠올리며 조선시대의 이상적 여성상이라고 고개를 주억거리지만, 실은 현모양처는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개화기에 외국에서 들어온 새로운 여성상이다 … 문제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현모양처가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활용되었다는 데 있다 … 1970년대 들어 ‘한국적 민족주의’를 외치며 유신체제를 선포한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통합의 상징 모델로 충무공 이순신과 신사임당을 내세웠다. (79, 87, 90쪽)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에서 다루기도 하는데, 조선 무렵 이 나라 여성한테 바란 모습은 ‘현모양처’가 아닌 ‘열녀’와 ‘효부’입니다. 내 지난날을 돌아봅니다. 1980년대에 국민학교를 다니는 동안, 학교 안팎에서 또래 가시내한테 어른들이 이런 말을 들려주는 모습을 곧잘 보았습니다. 그무렵 또래 가시내들은 왜 저희한테만 ‘열녀·효부’를 바라느냐며 따지곤 했고, 사내더러 너희는 ‘열남’이 될 수 있겠느냐고 따지기도 했어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여성한테만 현모양처이든 열녀이든 효부이든 바라는 일은 올바르지 않다고 느낍니다. 여성은 남성을 사랑하면 될 노릇이고, 남성은 여성을 사랑하면 될 일입니다. 서로서로 아끼고 돌볼 줄 아는 마음을 키워야지 싶어요.


  그렇지만 정치권력은 여성을 열녀나 효부나 현모양처 자리에 두면서 억누르려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성은 아직 ‘평등’이나 ‘민주’나 ‘평화’라는 자리에 서지 못해요. 오늘날에도 남성은 아직 사회평등뿐 아니라 남녀평등을 제대로 이루려고 마음을 쏟지 못합니다. 정치평등이나 교육평등뿐 아니라 남녀평등을 사회 얼거리에서뿐 아니라 집안에서도 넉넉하고 즐겁게 이루려는 몸짓이 제대로 싹트지 못하기 일쑤예요.



《대동여지도》는 김정호 혼자 전국을 직접 돌아다니며 측량하여 만든 지도가 아니라, 이전에 만들어진 여러 지도를 두루 참조하여 종합, 집대성한 지도다. (171쪽)


남방식, 북방식이라는 분류법은 그 의미를 상실한 지 오래다. 왜냐하면 고인돌 연구가 진점됨에 따라 북방식이라 했던 탁자 모양의 고인돌이 한강 남쪽 전라도에서 발견되고, 반대로 남방식이라 했던 바둑판 모양의 고인돌이 한강 북쪽 북한에서 발견되는가 하면 (201쪽)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에 나오는 고인돌 이야기를 읽다가, 전남 고흥 곳곳에 수없이 많은 고인돌을 떠올립니다. 학계에 보고된 숫자만 쳐도 남녘에 3만 기를 웃도는 고인돌이 있다는데, 이 가운데 전라남도에 절반 가까이 몰렸다고 해요. 고흥에는 ‘학계에 보고된 고인돌’이 1500기가 넘는다고 하는데 아직 보고가 안 된 고인돌도 많으리라 느낍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흔히 말하는 ‘갑툭튀’ 같은 우람한 돌이 여느 마을 여느 살림집 마당이나 울타리에, 또는 고샅길 한쪽이나 밭 귀퉁이에 버젓이 꽤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갑툭튀’ 돌이 고인돌로 인정을 받거나 보고가 되었다고 하는 얘기는 거의 못 들어요. 웬만한 삽차로는 들어낼 수도 없이 엄청나게 큰 돌인데, 이런 엄청나게 큰 돌이 크기는 거의 다 비슷합니다. 생김새도 비슷하고요. 그래서 나는 우리 마을이든 이웃 마을이든 이런 우람한 돌을 볼 적마다 ‘틀림없이 보고 안 된 고인돌’이겠거니 하고 여깁니다.


  그나저나 이 고인돌이란 무엇일까요. 이 고인돌은 어떻게 세웠을까요. 엄청난 무게인 이 돌을 어떤 힘으로 날랐을까요.


  오늘날 우리는 ‘학설’로 이 고인돌을 이야기합니다. 여러 가지 학설로 이 고인돌이 어떤 뜻으로 세웠겠거니 하고 여기지만, 아무도 속내를 알 길이 없어요. 왜 그러한가 하면, 고인돌이 처음 선 무렵에 ‘남긴 글(기록)’이 없고, 고인돌이 처음 선 무렵에 왜 이 돌을 날라서 이 자리에 놓았는가를 지켜본 자취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여러 학설을 ‘상식’으로 여기면서 배우지만, 앞으로 ‘먼 옛날 연구’가 제대로 깊이 이루어지면, ‘오늘은 상식으로 여긴 학설’이 뒷날에는 아무것도 아닌 얘기가 되리라 느껴요.



거북선 철갑선설이 오늘날까지 위력을 발휘하게 된 데는 아무래도 1960년대 초부터 20년간 계속된 군사정권이 끼친 영향이 크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무인이요 난세의 영웅이었던 이순신을 군사정권의 정통성 확보라는 차원에서 우상화하면서 기북선 철갑선설은 요지부동의 자리를 굳힌 것이다. (241쪽)


임진왜란 이후 17세기부터 결혼 풍습은 처가살이에서 시집살이로 차츰 바뀌어 갔다. 바뀐 건 결혼 풍습만이 아니었다. 아들딸 차별 없이 나눠 주던 균분상속이 딸에게는 적게, 아들에게는 많이 주는 남녀차별 상속으로, 또 여러 아들 중에서도 맏아들에게 많이 주는 장남우대 상속으로 바뀌어 갔다. (400쪽)



  ‘상식’이란 무엇일까요? 학설이란 무엇일까요? 역사 지식이란 또 무어일까요? 우리는 왜 역사를 배우거나 가르칠까요?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를 쓴 박은봉 님은 거북선 상식을 다루는 자리에서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이 벌인 일을 찬찬히 들려줍니다. 스스로 올바르지 않은 군사독재를 가리려는 뜻으로 현모양처 그림을 내세웠고 군사영웅 그림을 앞세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상속 제도’도 정치나 사회가 바뀌면서 어느새 ‘차별’이라는 모습으로 달라졌다고 해요. 그리고 이런 그림이나 모습은 오늘날 ‘그냥 상식’이라도 되는 듯이 퍼져서 굳어지기도 합니다.


  프랑스 군대에 짓눌리는 식민지로 살아야 했던 인도차이나 여러 나라라고 해요. 인도차이나에 있는 여러 나라는 프랑스라는 굴레를 떨치려 했는데, 1950년대 그무렵에 한국군이 그곳에 가서 ‘프랑스를 돕는’ 전쟁을 해야 했다면 한국 사회는 어떤 길을 걷는 모습이었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무척 아찔한 일이지 싶습니다. 거꾸로 생각하면 아주 쉬워요. 한국이 일본 제국주의에 짓눌리며 끙끙 앓던 무렵, 한국을 더 짓누르면서 일본 제국주의 손을 거드는 군대가 한국에 들어온다고 생각해 보면 됩니다.



1954년 1월 28일, 이승만은 인도차이나에 한국군 1개 사단을 파병하겠다고 주한 유엔군 사령관 존 헐에게 제안했다. 당시 베트남, 라오스를 비롯한 인도차이나는 프랑스와 전쟁 중이었다. 프랑스의 오랜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가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프랑스와 디엔비엔푸에서 혈전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428∼429쪽)



  이제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를 덮으며 생각을 갈무리합니다. 정치권력이 역사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역사 상식’을 뒤집거나 엉뚱하게 가르친다면, 아이들은 뭣도 잘 모르는 채 이대로 배워야 합니다. 시험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시험성적을 좋게 받으려면 학교에서 교과서로 가르치는 대로 달달 외워야 하거든요.


  한국에서 국가보안법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테러방지법이 불거질 뿐 아니라, 역사 교과서를 정치권력이 함부로 손을 대려고 합니다. ‘상식 아닌 상식’을 아이들 머릿속에 집어넣으려는 뜻입니다.


  아이들이 상식 아닌 상식을 상식으로 여기면서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한다면, 앞으로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될 무렵, 한국은 일본 못지않게 군국주의에 휩쓸리기 쉽습니다. 지난날 군사독재 정권이 했듯이 ‘독재 미화’와 ‘군사 영웅’을 드높일 뿐 아니라 ‘여성은 현모양처’라는 그림을 퍼뜨리겠지요. 요즈음은 아기를 여럿 낳으면 ‘애국’이라고까지 말하는 일이 마치 ‘상식’이 되는 마당입니다.


  아이는 사랑을 받아 태어나야 하고, 아이는 어른이 슬기롭게 삶을 짓는 이야기를 기쁨으로 배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른은 스스로 어른답게 살림을 아름답게 지으면서, 아이들한테 사랑을 물려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치권력이나 사회권력 입맛에 따라 뒤바꾼 ‘상식 아닌 상식’이 아니라, 사랑을 담은 이야기를 가꾸어서 나눌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정치권력이 역사를 건드리더라도 속내를 꿰뚫어보는 눈길을 가꿀 노릇이요, 정치권력이 역사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도록 우리 삶과 살림을 지킬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2016.3.11.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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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발자국이다 - 우리 산짐승 발자국과 똥 어린이 산살림 1
도토리 기획, 문병두 그림 / 보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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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637



겨울 발자국, 봄 발자국, 이웃 발자국

― 야, 발자국이다

 보리 글

 문병두 그림

 보리 펴냄, 2003.1.20. 11000원



  겨울이 저뭅니다. 바야흐로 봄을 맞이합니다. 봄이기에 겨울처럼 춥지는 않습니다만, 구름이 해를 가리고 바람이 싱싱 불면 제법 쌀쌀합니다. 다만, 춥지는 않고 쌀쌀합니다.


  오늘 낮에는 구름이 자주 끼고 바람이 꽤 부는 날씨였는데, 큰아이가 묻더군요. “아버지 다시 겨울이야?” 나는 빙긋 웃으면서 대꾸합니다. “아니. 바람이 부니까 좀 춥다고 느낄 뿐이야. 바람이 쌀쌀하지만, 해가 나면 따뜻하지.”


  한겨울에 새로 장만한 긴신을 꿴 두 아이는 어느 길이든 척척 걷습니다. 긴신을 꿰고 걷는 아이들은 “아버지는 왜 긴신 안 신어?” 하고 묻는데,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 긴신을 마련해 줘.” 하고 대꾸합니다. 나는 이 시골에서 한겨울에도 고무신 한 켤레로 났습니다.




흰 눈에 짝짝이 발자국 좀 봐. 짧은 발이 한 쌍, 긴 발도 한 쌍. 긴 발은 발가락이 다섯 개고 짧은 발은 발가락이 네 개야. 누구 발자국일까? (2쪽)



  ‘어린이 산살림’ 이야기 가운데 첫째로 나온 《야, 발자국이다》(보리,2003)를 읽습니다. 겨울에 숲에서 느끼거나 헤아릴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림책입니다. 겨울이면 눈이 소복히 쌓인 숲에서 발자국 찾기 놀이를 할 수 있거든요.


  다만, 우리 집이 있는 전남 고흥은 한겨울에도 눈 구경을 하기 몹시 어렵습니다. 눈이 쌓이는 일이 한 해에 하루나 이틀이 될랑 말랑 한데다가 밤새 눈이 한 번 쌓이는 날에도 낮이 되면 햇볕에 몽땅 녹아요. 눈 발자국을 찾기가 참 까다롭습니다.


  그래도 이른아침에는 마당이나 뒤꼍을 누군가 지나간 발자국을 보아요. 첫째, 마을고양이가 지나갑니다. 둘째, 온갖 새가 마당에 내려앉았다가 날아오릅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와, 눈이다!” 하면서 발자국을 엄청나게 남깁니다.




여기저기 똥이 흩어져 있어. 동글납작하고 누렇게 말랐어. 늘 이리로 다니나 봐. 길이 다 났네. 누굴까? “나야 나, 멧토끼야.” (13쪽)



  겨울에는 ‘눈 발자국’입니다. 그러면 봄에는? 봄에는 ‘진흙 발자국’이지요. 겨우내 꽁꽁 언 땅이 녹으면서 흙길은 질척거립니다. 봄비가 지나가면 흙길은 더욱 질척거리지요. 우리 집 작은아이는 흙길이 보이면 일부러 흙길로 찰박찰박 걷습니다. 신에 옷에 얼굴에 흙이 튀어도 아랑곳하지 않아요. 흙이 튀면 “오잉?” 하면서 싱긋 웃습니다.


  일부러 흙길을 걷고, 일부러 웅덩이에 빠집니다. 일부러 흙자국을 내다가, 어느새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기도 합니다.



오솔길에 난 이상한 발자국 좀 봐. 발가락도 없고 무늬도 있네. 무엇을 찾아다녔나? 이리 기웃 저리 기웃 발자국이 삐뚤빼뚤해. 누구 발자국일까? (34쪽)




  그림책 《야, 발자국이다》는 아이들이 어머니 아버지랑 숲마실을 하면서 마주하는 재미난 놀이를 보여준다고 할 만합니다. 눈이 소복히 덮인 조용한 숲길을 눈 밟는 소리만 가볍게 내면서 숲이웃을 찾아보는 기쁨을 들려준다고 할 만해요.


  우리 이웃은 옆집에만 있지 않아요. 우리 이웃은 숲에도 있어요. 우리 이웃은 도시에만 있지 않아요. 우리 이웃은 시골에도 있고, 바다에도 들에도 골짜기에도 있어요.


  발자국을 살피면서 우리 이웃이 어떤 살림을 짓는가 하는 대목을 돌아봅니다. 발자국을 헤아리면서 우리 이웃이 저마다 어떤 삶터에서 아기자기하게 삶을 짓는가 하는 대목을 생각합니다. 겨울이 저물고 찾아온 새봄에 아이들하고 흙 발자국을 내면서 새로운 봄이웃을 기다립니다. 개구리를 기다리고, 풀벌레를 기다리며, 나비를 기다리고, 제비를 기다립니다. 2016.3.9.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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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열어 주는 사회가치사전 - 토론하는 미래 시민을 위한 사회 개념어 이야기
구민정 외 지음, 김영랑 그림 / 고래이야기 / 2016년 3월
평점 :
품절


어린이책 읽는 삶 139



‘소비’ 아닌 ‘놀이’일 때에 ‘평등·민주 사회’

― 생각을 열어 주는 사회가치사전

 구민정·국찬석·권재원·김병호·신동하 글

 김영랑 그림

 고래이야기 펴냄, 2016.3.5. 16000원



  구민정·국찬석·권재원·김병호·신동하 다섯 분이 글을 쓰고, 김영랑 님이 그림을 그린 《생각을 열어 주는 사회가치사전》(고래이야기,2016)을 읽습니다. 열 살 어린이 눈높이에 맞추어 ‘한국 사회’와 ‘지구 사회’를 슬기롭게 읽는 눈길을 북돋우려고 하는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어린이가 사회를 알도록 이끄는 이야기를 다룬다고도 할 수 있지만, 이보다는 어린이가 차근차근 어른으로 자라는 동안 앞으로 ‘사회를 새롭게 가꿀 슬기’를 스스로 가꾸도록 돕는다고 할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로구나 하고 느끼면서 읽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생각하는 행복이 뭔지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나를 알아야 내가 원하는 행복도 알 수 있을 텐데.” (15쪽)


“저런, 그건 노는 게 아니에요. 그냥 소비를 하는 거지. 말뚝박기, 자치기, 땅따먹기 등 재미있는 놀이가 얼마나 많은데요. 안타깝네요. 여러분은 원 없이 뛰놀며 넘치는 에너지를 발산해야 하는 나이인데.” (17쪽)



  ‘행복’이나 ‘자유’나 ‘인권’이나 ‘평등’이라고 하는 사회가치를 어린이한테 어떻게 들려줄 만할까요? 사회이론을 어린이한테 들려주면 될까요? 어린이한테는 사회이론이 아니라 살림살이를 보여주어야 하겠지요. 머릿속에 지식으로 담을 이론이 아니라, 온몸으로 부딪히거나 부대끼면서 스스로 생각을 짓도록 이끌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하겠지요.


  《생각을 열어 주는 사회가치사전》에서도 말하는데, 오늘날 거의 모든 어린이는 ‘마음껏 놀지 못합’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어린이는 중·고등학교 푸름이 못지않게 시험과 공부라는 짐에 억눌립니다. 그나마 오늘날 어린이는 책읽기는 할 수 있어요. 아름답고 알차며 사랑스러운 문학책이나 인문책이나 그림책은 두루 읽을 수 있어요. 중학교에만 들어서도 책읽기를 쉽게 하기 어렵고, 중학교부터는 대학바라기 입시공부에 얽매여야 하는 얼거리가 되기 일쑤예요. 대학바라기 입시공부가 아니라면 취업준비에 힘을 쏟는 얼거리가 되지요.



“똑같은 것이 아니라 차별이 없는 것이 평등입니다. 만일 시각장애인을 일반인과 평등하게 대한다고 보조장치 없이 시험을 보게 한다면 실제로는 평등한 것이 아니겠죠?” (23쪽)


“특히 우리나라는 경제성장만을 최우선으로 삼아 왔기 때문에, 노동시간이 세계에서 가장 긴 나라가 되었어. 그러니 아빠들이 집안일을 함께하기가 어렵기도 하지.” (37쪽)



  놀지 못한 채 자라야 하는 어린이라면 ‘행복’을 알기 어렵습니다. 즐거움이나 기쁨을 느끼지 못한 채 공부와 시험에 얽매여야 했다면 ‘공부와 시험’을 알 뿐, 어떻게 놀아야 하는가를 알기 어렵지요. 놀이하고 ‘소비’는 다르기에 돈을 들여서 놀이시설이나 문화시설을 누려야 ‘놀이’가 되지 않아요. 놀이는 ‘소비’나 ‘문화생활’이 아니라 말 그대로 즐겁거나 기쁘게 몸과 마음을 활짝 펼치는 살림이라고 할 수 있어요. 노는 어린이로 삶을 지으면서 어른으로 자라야, ‘어른이 되어 짝을 만나 아이를 새롭게 낳은 뒤’에 ‘내가 낳은 아이’하고 즐겁게 놀 수 있을 뿐 아니라 아이가 즐겁게 놀 만한 터전을 마련할 수 있어요.


  자, 생각해 보아야지요. 어릴 적에 못 놀고 어른이 되면, 이 어른은 아이를 낳은 뒤에 무엇을 할까요? 놀이를 모르는 채 자랐으니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았’어도 어떻게 놀려야 하는가를 모를 테고, 아이가 놀아야 하는 줄도 모를 테며, ‘어른이 되기까지 이녁 스스로 겪은 그대로’ 새로 태어난 아이가 고스란히 입시 굴레에 갇히는 쪽으로 내몰기만 하겠지요.




“‘소비자는 왕’이라는 건 좀 지나친 것 같은데? 우리는 소비자인 동시에 노동자거든.” (55쪽)


“우리나라는 선진국에 비해 국가가 교육에 돈을 덜 투자해 왔단다. 국가가 할 일을 민간으로 떠넘기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교육환경이 열악하고 사립학교도 많고 학원비 등에 돈도 많이 들어.” (61쪽)


“노동조합이 적은 나라일수록 저임금 노동자들이 많아요. 우리나라 노동자 가운데 약 15%가 최저임금 노동자이죠.” (179쪽)



  《생각을 열어 주는 사회가치사전》은 ‘풀뿌리 민주주의’를 다루기도 하고 ‘마을공동체’와 ‘생활협동조합’과 ‘도시 재개발’과 ‘문화 공공성’을 다루기도 합니다. 우리 정부가 그동안 교육과 문화에 제대로 나랏돈을 안 쓴 대목을 찬찬히 따지면서 어린이한테 알려주기도 합니다. ‘전쟁’과 ‘냉전’과 ‘난민’과 ‘올림픽과 월드컵’도 다루면서 한국을 비롯한 지구별 여러 나라 정부가 썩 슬기롭지 못하고 아름답지 못한 모습으로 사회를 다스리는 대목을 나무라기도 합니다. ‘언론 자유’와 ‘수도권 집중화’와 ‘외국인 노동자’ 이야기도 다루지요.


  ‘노동’을 다룰 적에는 우리가 저마다 소비자이면서 노동자라는 대목을 일깨우고, 노동조합이 어떤 구실을 하는가를 제대로 밝혀서 이야기해 줍니다. ‘전교조’라고 하는 교사 모임은 어떤 일을 하는가도 꾸밈없이 밝혀서 이야기합니다.




“학생들이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의식 있는 사람으로 크는 것이 두려운 걸 거야. 아직도 일부 권력자들은 학생들이 로봇처럼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으로 자라길 바라고 있어.” (77쪽)



  아이들은 ‘생각하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길드는 사람이 아니라, 어른들이 어설피 엮은 사회를 새롭게 가꾸는 슬기를 꽃피우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자랄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꿈을 꾸는 어른으로 자라는 어린이일 때에, 이 어린이가 참다운 민주와 자유와 평등과 평화를 살찌우는 일을 하리라 봅니다. 꿈을 사랑스레 꾸는 어른으로 자라는 어린이일 때에, 이 어린이가 서로 돕는 어깨동무를 기쁨으로 할 만하리라 봅니다.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들은 ‘전쟁무기를 키우는 정책에 힘을 쏟는 어른’이 아니라 ‘마을살림을 가꾸며 두레와 품앗이를 나눌 수 있는 어른’이 되어야지 싶습니다. 차갑고 메마른 정치나 행정이나 문화나 경제에 얽매이는 어른이 아니라, 따스하고 넉넉한 살림짓기와 사회짓기와 집짓기에 온힘을 쏟는 어른이 되어야지 싶어요.




“그러나 그 다음에 군사 쿠테타를 일으켜 박정희 대통령이 권력을 잡았지. 나중에는 아예 시민들이 대통령을 뽑지 못하게 하고 체육관에서 몇몇이 대통령을 뽑게 했는데 늘 지지율이 99%를 넘었단다. 그것을 유신체제라고 해.” “그때는 대통령 비판만 해도 막 잡혀갔다면서요?” “뭐야, 북한하고 뭐가 달라?” … “아, 그 다음에 또다시 군인이 무력으로 권력을 잡았죠? 광주에서 그에 반대하는 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하면서.” (129쪽)



  역사는 우리가 짓는 길대로 나아간다고 느낍니다. 오늘 어른인 우리들이 슬기롭게 살림을 가꾸면서 아이들을 사랑스레 가르친다면, 우리 역사는 슬기로우면서 사랑스러운 쪽으로 나아가리라 봅니다. 오늘 어른인 우리들이 슬기롭지 못한데다가 사랑스럽지도 못하다면, 우리 역사는 슬기와 사랑하고는 동떨어진 벼랑으로 내몰리리라 봅니다.


  왜 지난날 임금님과 사대부나 지식인은 신분과 계급으로 사람들을 가르면서 정치를 했을까요? 왜 남북녘 정부는 전쟁무기를 키워서 끔찍한 전쟁을 벌였을까요? 왜 1961년에 군사 쿠테타가 일어났을까요? 왜 서슬 퍼런 군사 독재가 오래도록 이어졌을까요? 왜 군사 독재자는 사람들을 끔찍하게 죽였을까요? 왜 오늘날에는 막개발하고 사회불평등이 사라지지 않을까요? 평등하지 못한 사회에 민주나 평화가 깃들 수 있을까요?


  오늘 어른인 우리들이 사회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오늘 우리 곁에서 자라는 아이들도 사회를 제대로 바라보기 어렵다고 느낍니다. 오늘 어른인 우리부터 사회를 올바로 바라볼 때에, 오늘 우리 곁에서 자라는 아이들도 사회를 올바로 바라보리라 느낍니다.




“하지만 만일 월드컵이나 올림픽을 위한 경기장을 짓기 위해 병원이나 학교를 짓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래? 혹은 관광객을 위한 시설을 짓기 위해 사람들이 사는 집을 부수겠다고 한다면? … 최근에도 단 2주간 열릴 평창 동계올림픽을 위해 가리왕산의 5백년 원시림이 파괴되었어.” (206∼207쪽)



  돈을 벌어야 잘 놀 수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도 마음이 너그럽거나 넉넉하지 않으면 잘 놀지 못하고 즐겁게 놀지 못한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서, 경제성장을 해야 우리가 잘 살 수 있지 않다고 느껴요. 경제성장에 정부가 온힘을 쏟는다고 하지만, 막상 경제성장에만 온힘을 쏟을 뿐 ‘사람들 살림살이’하고 ‘마을 보금자리’에는 거의 힘을 안 쏟는 사회 얼거리가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돈으로 ‘소비’를 할 수 있는 시설이 있어야 ‘여가·여행·문화·예술·복지’가 되지 않습니다. 즐겁게 일하고 놀면서 어깨동무를 하는 살림일 때에 그야말로 즐거울 수 있습니다.


  아이한테 ‘놀이’와 ‘소비’를 슬기롭게 가르칠 때에 아이는 사회를 슬기롭게 바라보면서 깨달으리라 봅니다. 오늘 우리 곁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기쁘게 놀면서 맑은 마음으로 자랄 수 있어야, 앞으로 우리 사회가 아름답게 거듭나리라 봅니다.


  어려서 놀지 못하고 시험공부와 입시경쟁에 목이 매인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어떤 사회를 이루려 할까요? 놀지 못한 채 ‘경쟁’만 하고 ‘소비’만 하던 아이가 어른이 된 탓에 국정교과서 말썽이나 테러방지법 말썽을 빚는 몸짓을 보여주지 않을까요?


  소비가 아닌 놀이일 때에는 동무끼리 서로 아낍니다. 소비가 아닌 놀이에는 신분도 계급도 없이 어깨동무입니다. 소비가 아닌 놀이로 자라는 아이들은 ‘어린이 사회’를 나눔과 사랑과 돌봄과 평화와 민주와 자유와 평동으로 가꾸는 슬기로운 마음을 다스립니다. 《생각을 열어 주는 사회가치사전》이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어린이도 어른도 함께 ‘생각을 열면’서 아름다운 살림과 삶을 열 수 있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2016.3.9.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어린이책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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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이 쑤신다 책 읽는 어린이 연두잎 6
이상교 지음, 홍성지 그림 / 해와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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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79



아이처럼 신나게 뛰노는 어른이 되기를 빈다

― 좀이 쑤신다

 이상교 글

 홍성지 그림

 해와나무 펴냄, 2011.3.30. 8500원



  집 안팎을 드나들며 노는 우리 집 아이들은 비가 오는 날에는 “비가 오네. 밖에서 못 놀겠네.” 하고 한 마디를 합니다. 이러면서 집 안쪽에서 소꿉놀이를 하고 그림놀이를 하며 뛰기놀이와 잡기놀이와 숨바꼭질을 다 합니다. 옷장에도 숨고, 이불에도 숨어요. 이러다가 슬금슬금 집 바깥으로 나갑니다. 어느새 비옷을 챙겨 입고는 “비 맞으며 놀아야지.” 합니다. 얼마쯤 지난 뒤, 비옷을 벗어서 옷걸이에 꿰어 말리고는 헛간에서 우산을 꺼내어 우산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놉니다. 바야흐로 빗물놀이입니다.


  아직 이른봄이라 날이 많이 따뜻하지는 않기에 ‘비 맞으며 놀기’까지는 하지 않는데, 반소매에 반바지를 입고 노는 날씨가 되면 ‘비 오는 날에는 비 맞으며 놀기’로 바뀌어요. 세찬 비가 쏟아지면 세찬 비대로 맞으면서 놀고, 가랑비가 노래처럼 내리면 가랑비대로 맞으면서 입을 헤 벌리면서 빗물을 받아서 먹습니다.



툭, 투둑! // 빗방울은 씨앗이다. // 뭐든 / 돋아 낸다. (빗방울)


어린 뿌리 / 어린 줄기 / 어린 잎 / 어린 꽃망울 / 어린 열매…… / 어린 것은 다 예쁘다. (어린 것)



  이상교 님이 글을 쓰고, 홍성지 님이 그림을 그린 동시집 《좀이 쑤신다》(해와나무,2011)를 읽습니다. 이 동시집 이름이기도 한 〈좀이 쑤신다〉를 보면 ‘밖에서 놀고 싶은 아이’ 마음이 환하게 드러납니다. 아무래도 이 동시를 쓴 어른부터 도시에서 살고, 이 동시를 읽을 아이도 도시에서 살기 때문에 ‘밖에서 놀지 못해 좀이 쑤신 삶’을 그리는구나 싶어요. 오늘날 도시에서는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지 못하거든요.


  첫째, 도시에 자동차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골목에서도 자동차 때문에 제대로 뛰놀지 못하고, 아파트에서도 손바닥만 한 놀이터를 빼고는 온통 자동차가 드나드는 길이에요. 둘째, 학원에 얽매이느라 힘겹습니다. 학원을 다녀야 하는 아이들은 놀 겨를이 없고, 놀 동무를 만나기 어렵지요. 셋째, 놀이터도 마땅하지 않고 놀이동무하고 밖에서 뛰놀지 못하다 보니, 인터넷게임에 푹 빠집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흔히 인터넷게임에 사로잡혀서 못 헤어나온다고들 말하지만, 집 바깥에서 마음껏 뛰놀지 못하는 고단한 마음을 인터넷게임으로 풀 수밖에 없으리라 느껴요.



좀, 좀, 좀 / 좀이 쑤신다. // 밖으로 뛰어나가 / 놀고 싶어 / 좀이 쑤신다. (좀이 쑤신다)



  봄비가 내리는 봄날 저녁에 부엌에서 김치를 담급니다. 아이들하고 함께 마당하고 뒤꼍에서 갓을 솎았고, 갓을 함께 헹구었습니다. 소금물에 갓을 담가 놓은 뒤 양념을 마련했고, 이때에 큰아이는 마늘하고 생강을 찧는 일을 거들었어요. 아홉 살 큰아이가 마늘찧기랑 생강찧기를 거뜬히 도와주었기에 한결 수월하게 갓김치를 담글 수 있어요.


  소금물로 절인 갓잎에 양념을 고루 묻히면서 포개는 일은 제가 혼자서 합니다. 저녁밥을 다 차려서 먹인 뒤에 씩씩하게 갓김치를 담그는데, 이동안 두 아이는 아버지 곁에서 글놀이도 하고 그림놀이도 합니다. 이러다가 노래도 부르지요. 아이들이 재잘재잘 떠들며 부르는 노랫소리를 듣는 사이 등허리 결린 줄 잊습니다. 나도 아이들 곁에서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면서 양념 버무리기를 마무리짓습니다.



가을 해님이 / 샛노란 볕을 / 몇 가마니나 / 한꺼번에 떨어뜨렸다. // 놀란 나머지 / 은행나무 / 통째로 / 샛노랗게 물들었다. (샛노랗다)


베어진 나무가 / 흙바닥에 엎드려 / 잔다. // 흙의 가슴에 / 아기처럼 엎드려 / 잔다. (베어진 나무)



  동시집 《좀이 쑤신다》를 읽으면서 자꾸 마음이 아픕니다. 오늘날 아이들이 좀처럼 놀지 못하는 고단한 이야기가 이 동시집에 흐르기 때문입니다. 다른 동시집을 보아도 요즈음 아이들 모습은 엇비슷해요. ‘신나게 뛰노는 아이’ 삶을 그리는 동시를 요즈음 찾아 읽기는 퍽 어렵습니다. ‘거의 못 뛰노는 아이’가 얼마나 고단한가 하는 대목을 그리는 동시가 많아요. 놀이동무뿐 아니라 말동무조차 만나지 못하는 힘겨운 나날을 그리는 동시가 많아요. 학원과 입시와 학교와 시험과 숙제에 얽매인 아이들이 슬프고 아픈 모습을 그리는 동시가 많아요.


  아무래도 우리 사회가 이러한 모습이라 할 테니, 동시를 쓰는 어른도 우리 사회 모습을 고스란히 그릴 수밖에 없으리라 느껴요. ‘신나게 뛰노는 아이’를 만나기가 어려우니, 어쩌면 거의 다 사라졌다고 할 수 있을 만하니, ‘노는 웃음’을 그리는 동시는 좀처럼 태어나기 어렵다고 할 만하구나 싶어요.



학원을 새로 옮겨 / 아는 애 없어 속상했다. / 산더미 숙제에 쫓겨 / 이래저래 속상했다. / 짝과 말다툼으로 / 며칠 내리 속상했다. (손톱이 자랐다)



  나는 우리 시골집에서 우리 아이들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놉니다. 우리 아이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들 때까지 아주 조금도 안 쉬고 그야말로 개구지게 뛰어놉니다. 지치지도 않더군요. 이부자리에서까지 발을 구르면서 깔깔대며 놀아요. 놀이순이랑 놀이돌이를 재우자면 어버이인 나까지 아이들하고 지칠 대로 지쳐서 다 같이 곯아떨어지는 몸이 되도록 뛰놀고 일해야 하지요.


  봄비 소리를 들으며 까무룩 잠들었다고 문득 눈을 뜹니다. 두 아이가 이불깃을 잘 여미었는가 살핍니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저녁에 미처 마무리짓지 못한 부엌일을 마저 합니다. 설거지를 하고, 밥상을 훔칩니다. 양념으로 버무린 갓김치를 살피고, 새로운 아침에 어떤 밥을 지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물 한 모금 마신 뒤 마당을 내다봅니다. 마을고양이가 야옹거리면서 우리 자전거 밑에 옹크린 모습을 바라봅니다. 비가 오니 처마 밑에 놓은 자전거 밑에 깃들어 비를 긋는 고양이들입니다. 자전거 밑에 두 마리, 헛간에 네 마리, 집 옆으로 두 마리, 연장 상자에 한 마리, 이밖에 나무 밑에도 보일러실 앞에도 수많은 고양이가 우리 집을 둘러쌉니다. 고양이가 잔뜩 모인 시골집이 되다 보니, 우리 집만큼은 쥐가 한 마리도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 둘레에서 개구리 소리가 잘 안 나던데 마을고양이가 개구리까지 잡아먹어서 씨가 마를 수 있겠군요. 며칠 앞서부터 마을논에서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었는데, 머잖아 밤마다 개구리 노랫소리가 우렁차게 퍼지는 하루를 누리겠다고 느낍니다. 논마다 물이 가득 고여야 비로소 밤노래잔치가 펼쳐지겠지요.



우리 아파트 동네에 내린 / 눈은 / 얼마 가지 않아 / 질척질척 다 녹는데, // 시골 외가 마당에 내린 / 눈은 / 한참까지도 푸근푸근 / 녹지 않는다. (외갓집 눈)



  좀처럼 놀지 못해서 좀이 쑤시고 마는 도시 아이들 마음을 달래려는 동시집 《좀이 쑤시다》를 아이하고 함께 읽는 어른들이 ‘놀이하는 어른’ 마음으로 달라질 수 있기를 빌어 봅니다. ‘놀이하는 아이’를 사랑해 주면서, ‘놀이하는 어버이’가 되어 보기를, 이리하여 서로 즐겁게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살림을 지어 보기를 빌어 봅니다. 놀지 못해서 좀이 쑤시는 아이들은 사라지고, 신나게 놀아서 까무룩 곯아떨어지면서 드르렁드르렁 코를 고는 아이들이 새롭게 나타날 수 있기를 빌어 봅니다. 아이들이 마음껏 놀아야 마을이 살고, 마을이 살 때에 온누리가 아름답게 살아나리라 생각해요. 2016.3.8.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시읽기/동시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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