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 할 곳이 있다 창비시선 367
민영 지음 / 창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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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113



쑥 캐서 버무리 빚어 고향동무 만나고픈 할배

― 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 할 곳이 있다

 민영 글

 창비 펴냄, 2013.9.20. 8000원



  비가 그친 봄은 한결 맑습니다. 바람도 볕도 더욱 싱그럽습니다. 아침 빨래를 마치고 마당을 내다보니 참새 세 마리가 서까래하고 빨랫줄 사이를 오갑니다. 마루문을 여니 이 참새들은 마당 가장자리 초피나무로 옮겨 앉습니다. 요 며칠 사이 늘 보는 참새입니다. 어쩌면 이 참새는 몇 해 앞서부터 겨울마다 우리 집 서까래에 깃들어 지내던 이웃일 수 있습니다. 우리 집 서까래에서 참새가 흔히 겨울나기를 하고 새끼를 까거든요.


  쑥이 돋고 매화꽃이 피며 동백꽃이 터지는 새로운 봄날입니다. 참새들은 서까래를 자꾸 드나드는데 어쩌면 또 알을 낳았을 수 있어요. 그리고 머잖아 제비가 이 땅에 돌아오면 처마 밑 둥지에 깃들 테지요. 올해에도 참새하고 제비가 우리 집 처마 밑이나 서까래 언저리에서 함께 지내는 모습을 볼 수 있으려나 하고 기다립니다.



바람은 어디서 불어와 어디로 날아가는가? / 바람은 저 남쪽 쪽빛 바다에서 불어왔다가 / 아스라이 눈 덮인 저 북쪽 높은 산으로 날아가고, / 다시 발길을 돌려 남쪽에 있는 섬나라로 돌아온다. (바람의 길)



  1934년에 철원에서 태어난 뒤 네 살 무렵에 만주 간도성 화룡현으로 가서 살다가 1946년에 두만강을 건넌 뒤 남녘에 깃들어 여든 나이를 훌쩍 넘었다고 하는 시인 민영 님이 선보인 《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 할 곳이 있다》(창비,2013)를 조용히 읽습니다. 쑥내음이 물씬 피어나는 곁으로 매화꽃내음도 어우러지는 봄날에 이 작은 시집을 고즈넉하게 읽습니다. 새벽부터 새소리를 반가이 들으면서 시집을 가만히 읽습니다. 오늘은 볕도 바람도 좋아서 빨래가 잘 마르겠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시집을 즐거이 읽습니다.



땅에서 뽑아든 흙 묻은 손을 / 하늘 높이 들어 보이는 / 농부들의 기쁨을 아시는가? (격양가)


찬바람이 불어도 아이들은 / 강에서 얼음을 지치며 놀고 있다. (겨울 강에서)



  여든 살이 넘은 할아버지 시인도 노래하지만, 아이들은 찬바람이 불어도 얼마든지 씩씩하게 놉니다. 아이들은 어머니랑 아버지 살림이 가난해도 씩씩하게 놉니다. 아이들은 어머니랑 아버지가 가멸찬 살림이어도 씩씩하게 놉니다. 어떤 자리 어떤 살림 어떤 나날이어도 아이들한테는 놀이가 있어서 하루를 새롭게 엽니다.


  그리고 시골지기는 새봄에 새롭게 흙을 만지면서 한 해를 열어요. 나라에서 농업정책을 제대로 마련하지 않더라도 그예 살가이 흙을 만집니다. 해마다 시골에서 어린이하고 젊은이가 빠르게 도시로 떠나서 너무 고요하다 싶은 마을이 되어도 꿋꿋하게 흙을 만집니다. 따스한 볕에 싱그러운 바람이 흐르는 이 땅에서 알뜰살뜰 흙을 만집니다.



하모니카가 지나간다. / 야심한 시간 11시 35분 / 손님이라곤 없는 전동차 안에서 / 잘 있거나 나는 간다 / 이별의 말도 없이…… / 하모니카 소리가 지나간다. (소야곡)


여기서 북쪽으로 눈을 돌리면 / 육십년 전에 떠나온 / 고향 마을이 보인다. // 불에 타 허물어진 돌담 곁에 / 접시꽃 한 송이가 / 빨갛게 피어 잇다. // 얘들아, 다 어디 있니, / 밥은 먹었니, / 아프지는 않니? // 보고 싶구나! (비무장지대에서)



  할아버지 시인은 쑥을 캡니다. 할아버지 시인이 쑥을 캐면 이녁 곁님이 쑥버무리를 합니다. 봄날에 쑥을 캐는 할아버지 시인은 남북으로 갈리면서 다시 찾아갈 수 없도록 길이 막힌 옛 마을을 그립니다. 오늘 이곳에서는 쑥을 캐는데, 오늘 저곳에서도 쑥을 캘까 하고 헤아립니다. 오늘 이곳에서는 쑥을 캐서 쑥버무리를 하는데, 오늘 저곳에서도 쑥을 캐서 쑥버무리를 할까 하고 생각에 잠깁니다.


  눈앞에서 마주할 수는 없지만 마음속에는 늘 도사리는 고향 마을입니다. 두 발로 찾아갈 수는 없지만 마음자리에는 늘 맴도는 고향 마을입니다.


  쑥도 접시꽃도 울타리를 가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높직하게 울타리를 쌓더라도 꽃씨는 바람을 타고 가뿐히 울타리를 넘습니다. 아무리 두껍게 시멘트담을 세우더라도 풀씨는 바람에 얹히 사뿐히 시멘트담을 넘어요. 아무리 무시무시하게 쇠가시로 된 울타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총을 든 군인이 지켜서더라도 꽃씨랑 풀씨랑 나무씨는 모두 사뿐사뿐 이곳저곳 드나듭니다.



지난 4월의 어느 날 / 매지리로 간다니까 아내는 / 쑥을 캐 가져오라고 말했다. / 맷돌에 갈아서 체로 친 미분에 / 물에 씻은 봄쑥을 넣어 / 쑥버무리를 만들면 예전에 떠나온 / 고향 생각이 날 거라고 하면서. (매지리에서 쑥을 캐며)


이 양반아, / 나는 새벽에 나오면 밤늦게까지 / 이 쓸쓸한 간이역을 지키고 있다오. / 설마 당신이 나보다 더 / 힘들다고는 하지 않겠지요? (기차를 잘못 내리고)



  쑥부침개를 먹고 싶다는 큰아이하고 쑥을 뜯으러 뒤꼍에 서는데, 마을 할매 한 분이 우리 집 뒤꼍에서 벌써 동이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쑥을 캐셨습니다. 할머니, 우리 집 뒤꼍 쑥은 우리가 뜯어서 먹으려고 그동안 고이 모셨는걸요? 말 없이 들어오셔서 이 쑥을 그렇게 샅샅이 캐시면 어쩌시나요.


  겨우내 기다리던 쑥이 얼마 안 남습니다. 그러나 남은 쑥은 새로 돋을 테고, 아직 깨어나지 않은 씨앗도 곧 새로 깨어나겠지요.


  어떻게 할까 하다가 다른 봄풀을 뜯기로 합니다. 갈퀴덩굴하고 살갈퀴하고 봄까지꽃하고 코딱지나물을 훑어서 풀부침개를 하자고 생각합니다. 쑥만 부침개로 맛나지 않으니까요. 쑥도 숱한 봄풀도 모두 반가우면서 맛난 봄밥이요 봄맛입니다. 삼월로 접어들었어도 북쪽은 많이 추워서 쑥이 안 돋았을는지 모르는데, 곧 북쪽 이웃들도 쑥내음을 맡고 손가락마다 쑥물이 들면서 맑고 환하면서 고운 봄바람을 마실 수 있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저 나무의 이름이 무엇인지요?” / 하고 물었더니, / 싸리비로 마당을 쓸던 노스님이 / “목백일홍이지요.” 하고 대답했다. (목백일홍)


벌써 저 / 시끄럽게 떠드는 바깥세상에 / 나가지 않은 지도 석달이 지났다. (겨울 들판에서)



  시집 《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 할 곳이 있다》를 선보인 민영 님은 앞으로 새로운 시집을 더 선보이실 수 있을까요? 그리운 곳을 그리는 이야기도, 그리운 곳을 가지 못하는 채 일흔 해 가까이 살아온 이야기도, 이곳에서 새롭게 짓고 가꾼 살림하고 얽힌 이야기도, 여든 나이에 나무 이름을 새로 배우는 이야기도, 시끄러운 바깥세상에 나가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하루 이야기도, 모두 고즈넉하게 시 한 줄로  태어날 수 있기를 빕니다.


  얼어붙은 두 나라 사이에 모든 앙금이 풀리기를 빕니다. 차가운 마음이 부딪히면서 갈래갈래 찢긴 이곳과 저곳 사이에 고운 봄바람이 불면서 다 같이 봄잔치를 벌이고, 봄쑥노래를 부르며, 봄맞이 쑥버무리를 두레상에 올려서 막걸리 한 잔을 나눌 수 있기를 빕니다. 서로서로 어깨동무하는 기쁜 삶을 할아버지 시인이 더없이 환한 웃음으로 지켜보면서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는 시 한 줄이 예쁜 노래로 흐르는 시집을 더 만날 수 있기를 빕니다. 2016.3.14.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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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은 주권이다
윤석원 지음 / 콩나물시루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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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38



미국은 쌀 농가소득에서 70%가 보조금?

― 쌀은 주권이다

 윤석원 글

 콩나물시루 펴냄, 2016.2.22. 13000원



  오늘도 언제나처럼 아침저녁으로 밥을 지어서 차립니다. 미리 쌀을 씻어서 불려 놓고, 국이랑 밥을 함께 끓이면서 다른 반찬을 마련합니다. 국이 제법 끓었다 싶으면 불을 여리게 맞춘 다음에 뒤꼍으로 가서 쑥을 뜯습니다. 봄에 실컷 누리는 쑥으로 국을 마무리지을 생각입니다. 앞으로 쑥이 더 오르면 밥에도 쑥을 넣어 쑥밥을 짓고, 쑥버무리도 빚으려고 해요.


  밥을 거의 다 지을 즈음 아이들을 부릅니다. 아이들은 방이나 마루나 마당이나 고샅이나 뒤꼍에서 놀다가 “밥 먹을 사람?” 하고 부르는 소리에 “야, 밥이래! 밥 먹으러 가자!” 하고 웃으며 소리칩니다. 나는 이 소리를 들을 적마다 괜히 더 즐겁습니다. 밥 한 그릇을 맞이할 적에도 기쁘게 웃으며 노래하는 아이들을 마주하면서 밥짓는 보람을 물씬 느껴요.



미국이나 유럽, 캐나다, 호주와 같은 소위 선진국들은 식량파동을 겪지 않고 있다. 이들은 탄탄한 재정을 바탕으로 막대한 투자와 보조정책으로 농업이라는 산업을 유지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쌀 농가소득의 약 70%가 보조금이고 EU농가 소득의 약 절반 이상이 각종 명목의 보조금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33쪽)


쌀 농가 소득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고안해야 하는 일이 더 시급하다. 이러한 논의를 먼저 진행하면서 쌀시장 개방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순서이다. (79쪽)



  중앙대학교에서 농업경제학과 교수로 일하다가 정년을 두 해 반 남기고 미리 그만둔 뒤에 강원도 양양에서 올해(2016년)부터 ‘농민’으로 바뀐 삶을 누리려 한다는 윤석원 님이 쓴 《쌀은 주권이다》(콩나물시루,2016)를 읽습니다. 중앙대학교에서는 일곱 해 앞서 ‘농업경제학과(산업경제학과)’를 구조조정해서 경제학부로 통합했다고 합니다. 이때에 윤석원 님은 매우 크게 충격을 받았고, 강단에서 물러나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이때부터 깊이 헤아렸다고 합니다.


  이제 강단에서 물러났으니 ‘교수’ 아닌 ‘농민’이라는 이름이지요. 앞으로는 ‘교수님’ 아닌 ‘시골 아재’나 ‘시골 할배’라는 이름이 익숙한 나날이 될 테고요. 글이나 책이 아닌 온몸으로 흙을 말하는 삶이 될 테며, 목소리나 학문이 아닌 땀방울하고 열매로 시골살이를 말하는 살림이 될 테지요.



현재 쌀 가격 기준으로 쌀 한 가마에 현재의 16만 원에서 3만 2천 원이 떨어져 12만 8천 원이 된다면 수입쌀과 가격경쟁력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가. 10년 후 쌀 가격이 12만 8천 원이 된다면 그동안 물가는 오를 것이 뻔한데, 그 가격으로 농사나 지을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120쪽)


정부와 국회가 하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왜 이리 현장농민들의 고민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155쪽)



  《쌀은 주권이다》를 읽으면서 그동안 잘 몰랐던 대목을 새삼스레 배웁니다. 무엇보다도 ‘미국, 유럽, 캐나다, 호주’ 같은 나라는 정부가 농업보조금을 무척 많이 댄다고 하는 대목을 처음으로 배웁니다. 미국만 하더라도 농가수입에서 70%가 농업보조금이라 하니, 한국 농업하고 대면 한국은 도무지 ‘경쟁력’이 생길 수 없구나 싶습니다. 한국 농업에 보조금이라 할 만한 돈을 시골 농사꾼한테 주거나 베풀기나 할까요? 이런 생각을 하는 정치인이나 행정관료는 있기나 할까요?


  그래도, 한국에서 녹색당은 ‘기본소득’을 사람들이 누려야 한다고 말하면서,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농업 기본소득’을 조금 더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시골에서 땅을 부치는 사람도, 앞으로 시골에서 살며 땅을 부치고 싶은 사람도, 농업 기본소득으로 50만 원이나 70만 원을 누릴 수 있다면 그야말로 한국 농업은 크게 탈바꿈할 만하리라 생각해요.


  농업 기본소득이 보장된다면 시골사람 누구나 농약을 덜 쓰는 한결 정갈한 농업으로 바뀔 수 있고, 도시에서 고단한 나날을 보내는 이들도 시골에서 새로운 꿈을 키우는 살림으로 거듭날 만하리라 봅니다. 시골에서 사는 사람한테도 농업 기본소득을 보장해 주면, 도시에서만 문화나 예술이나 교육을 펼치려 하는 젊은이도 시골로 하나둘 찾아가서 시골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새로운 꿈을 지피는 몫을 맡을 수 있을 테고요.



우리 사회는 어찌하여 전 농지의 약 50%, 수도권의 농지는 약 70∼80%가 부재지주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니 정작 농지가 필요한 농민은 농지가 없고, 농지가격은 엄청나게 비싸 농민이 소유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190쪽)


2005년에 도입한 쌀 정책은 한마디로 실패다. 실패한 정책을 지속한다는 것은 정책당국의 직무유기 아닌가. 얼마나 더 쌀 농업이 무너져야 깨닫겠다는 것인가 … 쌀 실질소득이 지난 8년여 동안 25%가량 줄었는데도 기껏 2∼3% 인상한다는 것을 쌀농업 포기정책을 넘어 쌀농업 말살정책이라 할 만하다. (222쪽)



  밥을 맛나게 먹은 아이들은 새롭게 기운을 내면서 즐겁게 놉니다. “오늘 밥은 무엇이야?” 하고 묻는 아이들한테 “오늘 밥은 맛있는 밥.”이라 말하거나 “오늘 밥은 즐거운 밥.”이라 말하거나 “오늘 밥은 신나는 밥.”이라 말합니다. 밥상맡에서 마지막 밥풀까지 삭삭 훑어먹으면서 “오늘도 고맙게 잘 먹었구나. 이 고마운 기운을 몸에 기쁘게 받아들여서 활짝 웃고 뛰놀자.” 하고 이야기합니다.


  밥심으로 놀고, 밥심으로 일하지요. 고기를 더 먹든 풀을 넉넉히 누리든 모두 밥입니다. 빵을 먹든 떡을 먹든 우리는 언제나 ‘밥을 먹는다’고 말해요. 몸을 살리는 밥이요, 마음을 새롭게 일으키는 바탕이 되는 밥입니다.


  경제발전이라는 틀에서는 논이 아닌 공장이나 관광단지나 발전소나 고속도로나 골프장이나 아파트가 들어서야 돈이 된다고 하지만, 삶과 살림이라는 눈길로 바라본다면, 논을 둘러싸고 조촐한 마을하고 아름드리 짙푸른 숲이 있을 적에 아름답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어요. 돈이 있어도 쌀이 없으면 밥을 못 먹어요. 돈이 있어도 숲이 없고 냇물이 망가져서 바람이 깨끗하지 못하면, 사람들이 다 아프지요. 돈이 있고 자동차가 있고 고속도로가 있어도, 맑은 바람과 따스한 햇볕과 싱그러운 냇물과 빗물이 있는 터전이 없으면, 삶이 삶답기 어렵습니다.


  중앙정부와 지역정부에서 정치와 행정을 맡은 일꾼들이, 그러니까 우리 삶을 아름답게 북돋우는 일을 맡은 ‘심부름꾼’들이 《쌀은 주권이다》를 함께 읽으면서 한손에는 호미나 쟁기나 괭이를 쥘 수 있기를 빕니다. 손수 흙을 일구어 보지 않는다면 흙과 쌀과 풀과 숲과 나무와 냇물과 바람과 햇볕이 우리 삶을 어떻게 북돋우는가를 제대로 알기 어려울 테니까요. 2016.3.13.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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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밀화로 보는 나비 애벌레 권혁도 세밀화 그림책 시리즈 4
권혁도 글.그림 / 길벗어린이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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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602



나비를 보면서 봄인 줄 깨닫다

― 세밀화로 보는 나비 애벌레

 권혁도 글·그림

 길벗어린이 펴냄, 2010.5.25. 1만 원



  며칠 앞서 마당에서 평상을 손질하는데 널빤 뒤쪽에 달랑달랑 붙은 번데기를 보았습니다. 빈 번데기인가 꿈꾸는 번데기인가 하고 살피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번데기입니다. 어느 나비 번데기인지 알 길은 없지만 용케 평상 널빤에 붙었어요.


  나비 번데기는 나뭇잎이나 풀잎에도 매달리지만, 헛간 벽에도 매달리고 짐을 쌓은 뒤쪽 틈에도 매달립니다. 나비로 새롭게 깨어나려고 꿈을 꾸는 동안 꼼짝을 않고 잠을 자니까, 이동안 고요히 잠을 자려는 뜻에서 아늑하고 구석지며 조용한 자리를 찾는구나 싶어요.


  어제는 우리 집 뒤꼍 뽕나무 둘레에서 쑥을 뜯는데 애벌레를 잔뜩 보았습니다. 어느 애벌레인지 잘 모르겠지만 얼추 스무 마리 즈음 쑥잎에 붙어서 쑥잎을 갉습니다. 이 애벌레는 갓잎도 갉던데, 머잖아 번데기를 볼 수 있을 테고, 한 달 즈음 뒤면 어떤 나비로 깨어나는지 알 수 있을 테지요.



나풀나풀 날아다니는 예쁜 나비를 본 적 있니? 나비들은 모두 나비 애벌레가 자라서 된 거야.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풀잎이나 나뭇잎에 나비 애덜레들이 살고 있어. (2쪽)



  바야흐로 봄빛이 무르익는 첫봄에 《세밀화로 보는 나비 애벌레》(길벗어린이,2010)를 새삼스레 들춥니다. 참말 봄은 봄꽃으로도 느끼고 봄바람으로도 느끼지만, 봄에 눈부시게 깨어나서 팔랑거리는 나비로도 느껴요. 아니 봄에 나비를 보지 못한다면 봄다운 철이라고 하기 어렵지 싶습니다. 꽃이 피고 벌이랑 나비가 날며 바람이 따스하게 뺨을 어루만지는 고운 날을 맞이할 적에 비로소 봄이네 하는 소리가 절로 터져나옵니다.




여러 마리가 모여 있으니까 더 무섭고 징그러워. 그런데 진짜 놀라운 것은 이렇게 못생긴 애벌레가 자라서 멋진 나비가 된다는 거야. (7쪽)



  애벌레는 징그러울까요? 어쩌면 징그러울 수 있습니다. 애벌레는 예쁠까요? 어쩌면 예쁠 수 있습니다. 다 다른 나비는 다 다른 애벌레로 살다가 깨어납니다. 다 다른 나비이기에 다 다른 애벌레로 살기 마련입니다.


  애벌레 모습만 들여다보고서 나비를 그릴 수 없어요. 참말 나비하고 애벌레는 사뭇 다르거든요. 불을 좇는 불나비(나방)이든, 해를 좇는 낮나비(나비)이든, 모두 오래도록 꿈을 꾸면서 새롭게 태어난 숨결입니다. 꼼틀꼼틀 천천히 기면서 푸른 잎사귀만 갉던 아이들이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것도 보지 않으며 아무것도 듣지 않는 기나긴 꿈에 포옥 잠겨서 이제부터 새로운 몸으로 깨어나기를 바라는 그 엄청난 탈바꿈을 거쳐서 살풋 고개를 내밀어요. 더는 기어다니지 않아도 될 몸뚱이가 되지요. 하늘을 훨훨 날면서 어디로든 나들이를 할 수 있는 날개를 달지요. 꽃가루와 꿀을 먹으면서 아름다운 삶을 짓는 새로운 길을 열어요.



나비 애벌레는 자라면서 허물이 함께 늘어나거나 커지지 않아. 아이들이 자랄 때 더 큰 옷이 필요하듯 애벌레는 몸을 감싸고 있던 작은 허물을 벗어 버려. 이것을 허물벗기라고 해. 애벌레는 허물벗기를 할 때마다 나이를 한 살씩 먹어. (35쪽)




  애벌레는 허물벗기를 하면서 새로운 몸으로 거듭납니다. 아이들은 애벌레처럼 허물을 벗지 않지만 날마다 조금씩 눈에 뜨이게 자랍니다. 말솜씨가 자라고 마음밭이 자랍니다. 머리카락이 자라고 뼈마디가 자랍니다. 살집이 오르고 키가 큽니다. 생각이 자라고 꿈이 큽니다. 사랑이 한결 따스하게 자랄 뿐 아니라, 손놀림도 몸짓도 씩씩하고 아름답게 자라요.


  새로 맞이한 봄에 마당도 뒤꼍도 마을도 들판도 마음껏 날아다니는 나비를 바라보며 속삭입니다. ‘겨우내 잘 잤니, 반갑구나. 새봄을 맞이한 기쁨이 얼마나 크니, 너 참 곱구나. 나도 이제 묵은 허물을 벗고 즐겁게 기지개를 켜는 하루를 열려고 해. 싱그러운 봄바람을 마시고 밝은 봄볕을 먹으면서 아름다운 살림을 짓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려고 해. 우리 이 아름다운 곳에서 함께 춤추고 노래하면서 살자.’


  나비도 ‘나비꿈’을 꾸고, 아이들도 나도 ‘나비꿈’을 꿉니다. 애벌레에서 나비로 다시 태어나는 꿈을 꿉니다. 어제와 다를 뿐 아니라, ‘다르다’에서 그치지 않고 ‘새롭다’고 말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삶이 되기를 바라면서 꿈을 꿉니다. 봄바람이랑 봄볕이랑 봄비랑 봄구름이랑 모두 반가이 맞이하면서 우리 밭에 심을 씨앗을 헤아리고, 내 마음에 담을 ‘꿈씨앗’을 함께 생각합니다. 2016.3.13.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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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할머니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나라 요시토모 그림,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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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39



‘엄마는 이 몸을 타고 여행을 했구나.’

― 아르헨티나 할머니

 요시모토 바나나 글

 요시토모 나라 그림

 김난주 옮김

 민음사 펴냄, 2007.4.6. 8000원



  나는 아직 사람 몸에서 넋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누군가 내 곁에서 숨을 거두는 모습을 보지 못했기에, 넋이 몸에서 고요히 빠져나가는 모습을 못 보았다고 할 만합니다.


  나는 넋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모습을 못 보았지만, 이 모습을 본 사람은 꽤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몸에서 넋이 빠져나가면서 몸뚱이가 그야말로 텅 빈 껍데기가 된 모습을 보았다면, 이때 일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테지요. 죽음을 지켜본다는 일은 ‘죽지 않고 삶을 잇는 사람’한테는 무척 큰 아픔이나 슬픔이 될 테고, ‘앞으로 이을 삶’을 바꿀 만하리라 느껴요.



엄마가 죽었을 때, 내게서 평범한 세계는 사라졌다. 그 대신 지금까지 커튼 너머에 있던 어떤 굉장한 것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7쪽)


엄마의 몸에서 엄마의 혼이 떠났을 때, 나는 그 싸늘한 몸을 보면서 몇 번이나 생각했다. ‘아아, 엄마는 이걸 타고 여행을 했던 거야.’ (12쪽)



  요시모토 바나나 님이 쓴 소설 《아르헨티나 할머니》(민음사,2007)를 읽습니다. 이 소설책 첫머리를 보면, 주인공으로 나오는 아이 어머니가 몸져눕다가 그만 죽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주인공 아이는 어머니가 숨을 내려놓을 적에 옆에서 지켜봅니다. 그런데, 이때에 어머니 몸에서 넋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해요. 이때부터 주인공 아이는 ‘삶을 마주하는 몸짓’이 크게 달라졌고, 사람을 마주하는 몸짓도 사뭇 달라졌구나 하고 느낍니다.



엄마가 죽고 어느 정도 지나, 다른 사람도 아닌 우리 아빠가 아르헨티나 할머니의 건물에 드나든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그만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17쪽)


이상해진 아빠를 우선은 잠자코 지켜볼 생각은 못 하고, 왜 뜬금없이 알지도 못하는 시설부터 상상한 것일까? (20쪽)





  어머니 죽음을 지켜본 아이는 어떤 마음이 되었을까요? 곁님 죽음을 지켜보지 못한 채 곁님을 떠나 보내야 한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 되었을까요?


  넋이 빠져나간 빈 몸은 ‘옷’이라고 할 만합니다. 넋이 입은 옷이 몸이라고 할까요. 소설책 《아르헨티나 할머니》에서 주인공 아이는 “엄마는 이 몸을 타고 여행을 했”다고 느낍니다. 어디를 여행했느냐 하면 바로 이 지구별을 여행한 셈이지요. 지구별 여행을 마친 어머니 넋은 빈 몸뚱이를 내려놓고 새로운 곳으로 가지요. 다만 주인공 아이는 어머니 넋이 앞으로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주인공 아이는 죽음이 아닌 삶이라는 자리에서 하루하루 새롭게 살아가니까요.


  그리고, 주인공 아이네 아버지도 곧 새로운 삶으로 나아갑니다. 곁님이 없는 자리에서 ‘아르헨티나 할머니’ 품에 안겨요.



아아, 고요하다. 발을 들여놓고 보니, 모든 것이 아주 평화롭다. 아빠가 왜 여기 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다. (36쪽)


주문처럼 그렇게 말하면서 아르헨티나 할머니는 내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 옷에서 곰팡이와 태양과 먼지와 인간의 기름 냄새가 났다. 나는 숨이 막힐 것 같고 역겨웠는데, 어째서인지 눈물이 나왔다. (39쪽)



  마음을 차분하게 다스리지 못하기에 마음을 차분하게 다스릴 수 있는 곳을 찾습니다. 마음을 고요하게 가누지 못하기에 마음을 고요히 가눌 수 있는 자리를 찾습니다. 소설책에 나오는 주인공 아이는 주인공 아이대로 차분한 마음과 고요한 숨결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주인공 아이네 아버지도 새로운 일을 찾고 새로운 사람을 찾으면서 새로운 삶을 찾고 싶습니다.


  참말로 삶이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몸뚱이를 내려놓고 넋이 떠나면 죽음이라 하는데, 죽음을 맞이한 사람한테는 이 땅에서 했던 여러 가지 일이 어떤 뜻이 될까요. 우리는 이 땅에서 살면서 무슨 일을 할 때에 보람이 있을까요? 우리는 이 땅에서 살면서 어떤 놀이를 누리면서 살림을 지어야 기쁨이 될 만할까요?


  어차피 맞이할 죽음으로 한 걸음씩 나이를 먹는 삶일까요? 죽을 때는 죽더라도 삶을 누리는 오늘 이곳에서 언제나 새로운 웃음을 지으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하루가 될 수 있을까요?




“사위를 들여도 되고. 덤으로 귀여운 돌고래 무덤에 묻힐 수 있다고 하면서 말이다.” 비석을 씻고 있는데 엄숙한 기분이 들지 않고, 마치 돌고래를 씻는 기분일 수 있다니, 멋진 일이다. 더구나 돌고래는 웃으며 기뻐하고 있다. (73쪽)



  소설책 《아르헨티나 할머니》에 나오는 ‘아르헨티나 할머니’는 막상 쉰 언저리 나이라고 합니다. 할머니까지는 아닌 셈이지만, 마을에서는 그분을 가리켜 다들 ‘할머니’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소설책에서 아르한테나 할머니는 주인공 아이네 아버지하고 한집살이를 하면서 아기를 낳습니다. 쉰 언저리 나이에 아기를 낳지요.


  아르헨티나 할머니는 그 뒤 몇 해 못 살고 죽음길로 간다고 해요. 주인공 아이는 저를 낳은 어머니 죽음을 곁에서 지켜보아야 했는데, 이제 ‘마음으로 어머니 같은 분’까지 죽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아야 합니다. 호적으로는 새어머니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 아이로서는 ‘두 어머니’가 죽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한 셈입니다.


  아마 살면서 이렇게 ‘두 어머니 죽음’을 지켜보는 일은 흔하지 않으리라 느낍니다. 아직 열 몇 살 여린 나이에 이렇게 두 죽음을 곁에서 마주해야 하는 일은 만만할 수 없으리라 봅니다. 그렇지만, 소설책 《아르헨티나 할머니》에서 주인공 아이는 이 죽음을 맞딱뜨리면서 ‘엄청난 일’로 받아들입니다. 이제껏 누린 ‘수수한 삶’은 끝이 나고 ‘커튼 뒤쪽에 있던 놀라운 일’을 맞이해야 하는 삶으로 바뀌었다고 여겨요.




이 인생에서, 나는 나를 위한 유적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아무튼 내가 살던 곳을 떠날 마음은 없다. 설사 떠난다 해도 돌아오리라. (83쪽)



  소설책에 나오는 아이네 아버지는 빗돌을 깎는 일을 한다고 합니다. 이 아이네 아버지는 아르헨티나 할머니네 집에 깃들면서 ‘곁님 무덤에 세울 빗돌’을 ‘그냥 여느 빗돌’로 깎지 않고 ‘돌고래 모습 빗돌’로 깎았다고 해요. 소설책 주인공 아이는 돌고래 빗돌을 몹시 마음에 들어 합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하지요. 앞으로 이 아이가 스스로 헤치거나 걸어갈 길을 스스로 새롭게 짓겠노라고.


  얼추 100쪽이 안 되는 짤막한 소설인 《아르헨티나 할머니》인데, 청소년이 곁에 있는 살가운 사람을 죽음으로 떠나 보내야 하는 삶을 차분하면서도 속깊이 다루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이러면서 우리가 스스로 지을 살림살이를 어떻게 가다듬을 적에 이 삶에 기쁨을 손수 일으킬 만한가 하는 대목도 짚는구나 하고 느껴요.


  너도 나도 우리도 모두 죽음으로 흔들릴 수 없습니다. 너도 나도 우리도 모두 흔들릴 수 없는 삶을 짓습니다. 흔들려야 하는 일이 있다면 흔들리되,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흔들리다가 그만 고꾸라지거나 자빠지거나 쓰러져야 한다면, 씩씩하게 새로 일어서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삶을 누리고 싶거든요.


  마음으로 다가서는 이웃이 반갑고, 마음으로 손을 맞잡는 동무가 사랑스럽습니다. 그냥저냥 한집에서 밥상을 마주하는 사이로 지낼 때에는 서로 아무 기쁨이 없으리라 느낍니다. 아이와 어버이 사이에서, 나와 이웃 사이에서, 동무와 동무 사이에서, 마음으로 아끼고 보듬을 수 있는 숨결이 된다면 얼마나 고울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손수 짓는 고운 살림살이를 생각하면서 자그마한 소설책을 덮습니다. 새근새근 잠든 아이들 곁에 다가서서 이마를 쓸어넘기고 이불깃을 새로 여밉니다. 아이들은 자다가도 어버이 손길을 느꼈는지 길게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한 뒤 입맛을 짭짭 다시고는 다시 꿈나라로 깊이 빠져듭니다. 2016.3.12.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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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동 곰 춤추는 카멜레온 154
박종진 글, 박소연 그림 / 키즈엠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638



무지개옷을 입으며 무지개 같은 마음이 되어요

― 색동 곰

 박종진 글

 박소연 그림

 키즈엠 펴냄, 2015.9.4. 8000원



  박종진 님이 글을 쓰고 박소연 님이 그림을 그린 《색동 곰》(키즈엠,2015)을 읽으면서 고운 옷을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이 그림책에는 색동옷을 입고 싶은 아기 곰이 나와요. 마을에 사는 아이는 한가위를 앞두고 색동옷 한 벌을 얻었어요. 고운 색동옷을 입고 나들이를 다니는 아이를 본 아기 곰은 저도 그런 고운 옷을 입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리하여 달 밝은 어느 날 아이네 집을 찾아가지요. 숲에서 사는 아기 곰은 따로 옷을 입지 않아도 되는 몸이지만, 색동옷에 이끌립니다. 낮에 본 색동옷을 다시 보고 싶고, 다시 볼 뿐 아니라 한 번 몸에 걸쳐 보고 싶기도 합니다. 씩씩하게 마을로 내려갔고, 새롭게 기운을 내어 아이네 집에 이르며, 아이가 자는 방으로 살그마니 들어갑니다.



어느 날 아기 곰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알록달록한 색깔을 보았어요. (5쪽)



  알록달록 고운 옷을 누가 맨 처음에 지었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아마 처음에는 온갖 빛깔을 두루 섞은 옷을 지어서 입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해요. 흙으로 빚은 그릇을 살피면 그렇거든요. 처음에는 민무늬인 흙그릇을 썼고, 나중에 비로소 무늬를 넣은 흙그릇을 썼다고 해요. 옷도 처음에는 한 가지 빛깔인 실을 엮어서 지었을 테고, 차츰 새로운 빛깔인 실을 얻어서 알록달록한 옷을 지을 수 있었으리라 느껴요.


  그리고 이 여러 빛깔 실로 한결 고운 옷을 지을 수 있었고, 귀여운 아이들한테 그야말로 고운 옷을 입혀서 활짝 웃으면서 뛰놀도록 북돋았지 싶습니다. 옷이 날개라고 하는 말처럼, 고운 옷은 고운 날개가 되어 고운 마음을 새삼스레 길어올리는 구실을 했을 테지요.


  옷 한 벌을 짓기까지 들인 품을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오늘날에는 옷집에 가서 돈을 치르면 예쁜 옷도 멋진 옷도 훌륭한 옷도 어렵지 않게 장만할 수 있어요. 지난날에는 집집마다 풀줄기에서 섬유질을 얻은 뒤, 이 섬유질을 다스려서 실을 얻고, 이 실을 물레를 잣고 베틀을 밟아 천을 얻은 다음, 비로소 알맞게 마름을 하고 한 땀씩 바느질을 해서 옷을 얻었어요.


  오랜 나날을 들이고 깊은 손품을 들인 알뜰한 옷이지요. 긴 나날에 걸쳐 너른 사랑을 들인 살뜰한 옷이에요.



아기 곰도 색동옷이 입고 싶었어요. 그래서 달 뜬 밤에 작은 아이의 집을 찾아갔지요. (9쪽)



  아기 곰은 아이 방에 들어갑니다. 아기 곰은 아이 몰래 색동옷을 꺼냅니다. 아기 곰은 이제껏 옷을 입은 적도 본 적도 없기에 어떻게 몸에 걸쳐야 하는지 모릅니다.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나니 아이는 어느새 잠에서 깼어요. 아기 곰이 색동옷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둘러 보려고 용을 쓰는 모습을 본 아이가 아기 곰한테 한 마디 해요. 뭐라고 할까요?



“내가 도와줄까?” 까무룩 잠들었던 작은 아이가 일어나 말했어요. (14쪽)



  사람들이 색동옷을 어떻게 생각해 냈을까 하고 그려 봅니다. 알록달록한 빛깔은 무지개에도 있고, 가을숲에도 있습니다. 그리고 봄숲에도 있지요. 겨우내 시든 잎 사이사이 새롭게 돋는 푸른 새싹에다가 온갖 봄꽃은 저마다 알록달록 어우러져요.


  아기 곰은 아기 곰 나름대로 숲에서 새로운 옷을 지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사람은 한가위를 앞두고 색동옷을 짓는다면, 곰 같은 숲짐승은 알록달록 물드는 숲에서 나뭇잎이나 풀잎으로 ‘색동잎옷’을 손수 지어서 입을 수 있을 테지요.


  아무튼, 아기 곰은 마을에 있는 아이네 집에서 함께 색동옷을 입으면서 놉니다. 아이는 스스럼없이 아기 곰한테 색동옷 한 벌을 내어줍니다. 곰하고 아이는 서로 동무가 되어요. 아이는 ‘색동아이’가 되고, 곰은 ‘색동곰’이 됩니다. 둘은 ‘색동동무’가 되는 셈입니다. 색동옷을 입은 ‘색동놀이’를 즐겨요.


  그림책 《색동 곰》을 덮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입는 알록달록 고운 옷을 돌아봅니다.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언제나 고운 옷을 입습니다. 큰아이가 입던 고운 옷은 어느새 작은아이가 물려입는데, 마을에서나 둘레에서나 우리 집 작은아이를 보며 가시내로 여기곤 합니다. 사내한테는 알록달록 고운 색동옷 같은 온갖 빛깔하고 무늬가 깃든 옷은 잘 안 히는 요즈음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색동옷을 입어야 무지개 같은 마음이 된다고 할 수 없을는지 모르지만, 아이도 어른도 ‘색동옷’하고 ‘무지개옷’을 입는다면 우리 사회는 어떤 빛깔로 달라질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아이도 어른도, 사내도 가시내도, 가을숲을 닮은 옷을 입고 봄숲을 닮은 옷을 입으면 얼마나 고울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하늘빛을 닮은 옷을 입고, 바닷물을 닮은 옷을 입습니다. 바람을 닮은 옷을 입고, 봄꽃을 닮은 옷을 입습니다. 고운 옷처럼 곱게 웃고, 밝은 옷처럼 밝게 노래합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르게 환하거나 눈부시거나 아름다운 옷을 입으면서 환하거나 눈부시거나 아름다운 마음으로 거듭난다면 더없이 즐거운 나라가 될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도 볕이 좋은 하루이니, 아이들이 어제 입고 벗어 놓은 옷을 신나게 빨아서 마당에 널어야겠습니다. 언제나 정갈하면서 고운 옷을 입고 신나게 뛰놀 수 있도록 하루를 씩씩하게 열어야겠습니다. 2016.3.12.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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