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에 기사를 다시 쓰겠습니다


 그제, 강릉에 사는 띠동갑 후배가 인천으로 찾아왔습니다. 서울에 있는 ㅁ대안학교에서 만난 후배입니다. 저를 보고 꼬박꼬박 ‘최종규 선생님’이라고 불러 주는 젊은 친구는 저를 자기 길동무로 생각해 줍니다. 스물한 살 젊은 나날을 보내며 부대끼는 온갖 걱정거리와 마음앓이를 털어놓고 자기 갈 길을 스스로 헤아리곤 합니다. 새벽 네 시가 넘도록 젊은 친구와 옆지기하고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젊은 친구가 저를 처음 보았을 때 이야기를 듣습니다. “처음 받은 느낌으로는, 저 사람 콧대가 높을 것 같다”였다고 합니다.

 옆지기도 웃고 저도 웃었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거울을 안 보고 사는 제 얼굴이 이웃사람들한테 어떻게 비치고 있는가를 잘 안 듣고 살았구나 싶은 마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살며 거울을 꼭 봐야 하지는 않고 이웃사람들이 허튼소리를 할 때에는 한귀로 흘리며 마음을 고요히 다스릴 수 있으면 좋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보지 못한 세상 모습을 들려준다든지, 제가 미처 느끼지 못하고 엇나가고 있는 걸음걸이를 알려준다든지, 제가 느끼지 못한 사람들 아픔과 눈물과 웃음과 즐거움을 보여준다든지, 제가 알지 못하는 슬기를 깨우쳐 줄 때에는, 어느 자리 어느 때 누구 말이라 해도 고개숙여 받아들여야 한다고 느낍니다.

 강릉 사는 젊은 친구한테 미처 묻지 못했는데, 저를 처음 본 2005년 여름 그날 콧대 높게 느껴지던 제 모습이, 2007년 여름 이날도 마찬가지일까요.

 어제 잠깐 서울 나들이를 했습니다. 서울로 사람 만나러 떠나는 젊은 친구가 혼자서 전철간에서 심심할까 싶어서 함께 갔습니다. 저녁나절 집으로 돌아오기 앞서 들른 헌책방에서 《텍스트》라는 ‘북매거진’ 35호를 보았습니다. 저는 이 잡지를 정기구독하고 있는데 거의 한 해 가까이 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나온 35호를 보니 지난 34호를 낸 뒤로 사람품이며 돈이며 다른 여러 가지며 참 안 좋아서 한 호도 못 내고 있었더군요. 다시 펴내는 말을 이렇게 적습니다.


.. 이렇게, 다시, 결국, 시작합니다. 늘, 끝의, 시작입니다. 《텍스트》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많다는 것 잘 압니다. 어떻게 사과와 용서를 빌어도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솔직히 고백컨대 그 불만과 불신을 온전하게 해소시키기에는 너무나 역부족입니다. 다만 텍스트에 대한, 버리지 못한 욕망이 다시금 《텍스트》를 시작케 합니다. 그 욕망에 기대는 것만이 지금 할 수 있는 전부일 따름입니다. 부디 그 텍스트의 욕망 안에 모두가 행복해지는 오솔길이 놓여 있기를 희망합니다 ..


 그동안 〈오마이뉴스〉에 글을 안 쓰면서, 제가 해 오던 수많은 글쓰기(우리 말 / 책 / 헌책방 / 자전거)를 많이 줄이거나 꺾거나 묻어 놓았습니다. 자원봉사로 몇 군데 자그마한 매체에 글을 보내기는 하지만, 정작 제가 세상에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는 털어놓고 있지 못했으며, 아니 안 했으며, 숨죽이며 또아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올해 4월 15일, 네 해 조금 못 되는 세월을 일하면서 보냈던 충주를 떠나 인천으로 왔습니다. 이오덕 선생님 원고 갈무리는 지난해에 다른 분한테 넘겨 드린 뒤 다른 일거리 없이 자전거만 타고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녔습니다. 덕분에 자전거로 못 가는 곳이 없음을 느꼈고, 오른무릎과 오른팔꿈치는 맛이 가서 요 몇 달 동안 자전거를 탈 수 없을 만큼 몸이 무너졌습니다.

 인천으로 오면서 여태껏 읽고 추슬러 온 책을 갈무리해서 ‘지역 전문 도서관’을 열었습니다. 제가 읽은 책은 제 마음에 담겼다가 제 몸으로 드러나서 사람들한테 펼쳐질 뿐이라고 생각하기에, 제가 읽은 책을 이웃사람한테 선물로 드리는 일도 좋지만, 차곡차곡 모아 놓은 뒤 한꺼번에 드러내어 누구나 찾아와서 읽을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 한결 좋겠구나 깨달으면서 일을 벌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제가 부대끼며 마음에 담은 이야기를 글 한 쪼가리로 써낸다면, 이런 글은 종이에 옮겨지는 그때부터는 ‘제 것’이 아닐 테지요. 어느 누구 것도 아닌 ‘글’일 뿐이며, 이 글을 좋게 받아들여 주는 사람한테는 좋은 이야기로, 얄궂게 받아들이는 분한테는 비판과 칼질을 해야 하는 못난 이야기로 다가가리라 생각합니다. 좋은 글을 읽으며 좋음을 배우고, 나쁜 글을 읽으며 모자람과 어리숙함이 무엇인지를 느껴서, 저마다 자기가 선 자리에서 더 나은 길로 거듭날 수 있다고 봅니다.

 요즈음 인천은, ㅇ시장이 벌이는 밑도 끝도 없는 재개발 공사계획 때문에 가난하지만 수수하게 살던 골목집 사람들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인천사람이지만 인천을 떠나 서울에서 살다가 충주로 옮겨 지내는 동안 살갗으로 못 느끼던 일이었습니다. 지역신문에서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중앙신문에서는 ‘거긴 너네들 지역 일이잖니’ 하고 한수 접고 들어가는 일임을 뼛속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운명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자전거로 전국 곳곳을 찾아다니면서 느끼기로, 골목집 문화가 남은 마지막 곳은 인천이었습니다. 고향이라서가 아니라, 도시 삶터에서 이웃집과 어깨동무를 하면서 조용하고 조촐하게 살 수 있는 한 곳이라면 인천밖에 없다고 느꼈습니다. 돌아가신 김기찬 선생이 온삶을 바쳐 찍은 《골목 안 풍경》은 이제 중림동에 없습니다. 사직동에 없습니다. 공덕동에 없습니다. 남산에 없습니다. 경교장이 있는 서울 종로구 평동도 ‘이명박 뉴타운’으로 지정된 지 오래이고, 〈오마이뉴스〉 김대홍 기자가 사는 홍제동도 개미마을과 전철역 둘레를 중심으로 높직높직 아파트를 새로 짓는 계획이 차근차근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파트값이 높고낮음만 다를 뿐, 강아랫마을과 강웃마을과 강옆마을 삶터가 무엇이 다를까요.

 인천은 2014년에 아시아경기를 치르게 되면서, 2013년까지 모든 구에 걸쳐서 모든 서민들 집을 허물고, 이 자리에 아파트와 쇼핑센터와 대형할인마트를 올려세우는 계획을 ㅇ시장 지시와 명령으로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전국 어디를 가나 아파트 없는 마을이 없고, 이제는 이 나라 사람들은 절반 넘게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멍가게나 옛 저잣거리에서 장보기를 하는 사람보다도 대형할인마트에서 장보기를 하는 사람이 훨씬 많지 않을까요. 두 다리로 걸어다니거나 자전거를 타고 장보기를 하기보다 덩치 큰 suv라는 자가용을 몰고 장보기를 하는 분이 더 많지 않을까요.

 이런 세상에서 글쓰기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아찔아찔 골이 아파서 머리가 지끈거립니다. 이런 세상에서 혼자 깨끗한 척, 잘난 척, 모든 것을 아는 척 콧대를 세우고 우쭐거리는 꼬락서니가 얼마나 우스운가 돌아보니 얼굴이 화끈해집니다. 참말로 글은 왜 썼고, 책은 왜 읽었고, 그동안 〈오마이뉴스〉에 그 어리숙하고 모자랐던 글과 사진은 왜 올렸을까요.

 어느 누구도 제대로 알아보아 주지 않는 헌책방 이야기를 사람들한테 알리고픈 마음이 있었지만, 헌책방 이야기를 알린다기보다는 ‘헌책방처럼 따돌림받고 푸대접받는 이웃사람들 삶과 삶터도 함께 느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올바르게 쓰지 않는 우리 말과 글을 살가이 돌아보고 느끼면서 말하고 글써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지만, 우리 말과 글을 올바르게 쓰는 일보다는 ‘말과 글을 깨끗하고 알뜰하고 아름답게 추스르는 동안 우리 마음과 생각도 깨끗하고 알뜰하고 아름답게 추스를 수 있을 테고, 이러는 동안 우리가 저마다 서 있는 곳에서 좀더 힘내고 기운차게 어깨를 겯고 일하고 놀고 싸우고 노래하고 술과 밥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신문과 방송과 잡지에서 알아보아 주지 않는 조그마한 출판사 알맹이 탄탄한 책도 좀 읽으면서 세상 공부를 해야 우리 사회 밑바탕이 차츰차츰 탄탄해지지 않겠느냐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묻혀 있는 책 이야기를 들려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 삶과 경험을 톺아보면서 내 삶과 경험을 되새기고, 내 사는 이야기를 이웃사람과 나누며 우리한테 정작 중요한 일을 깨닫고, 이웃사람들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으면서 참말 우리가 깨닫고 맞서고 함께해야 할 일거리 싸움거리 걱정거리 이야기거리가 무엇인가 스스로 찾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예전에 쓴 글을 하나하나 다시 읽어 보면 참 부끄럽습니다. 저 어설픈 생각찌끄레기를 어쩜 저렇게 낯빛 하나 안 바꾸고 대단한 척 우쭐댈 수 있었나 싶어 예전 글은 다 불살랐으면 좋겠구나 싶은 마음뿐입니다. 하지만 지금 쓰는 글도 앞으로 몇 해가 지난 뒤 다시 읽었을 때 똑같이 느끼겠지요. 하루하루 나이를 먹으며 모자람과 어설픔만 깨닫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 모자람과 어설픔을 느끼기 때문에 날마다 더 애쓸 수 있고, 날마다 더 주먹을 불끈 쥘 수 있으며, 날마다 더 눈에 불을 켤 수 있을까요.

 나한테 깃든 모자람을 느낀다면, 내 이웃한테서 느껴지는 모자람을 더 따뜻한 눈길로 굽어살피고, 나한테 깃든 어설픔을 느낀다면, 내 이웃한테서 느껴지는 어설픔을 더 포근한 손길로 어루만져야 하는구나 깨닫습니다. 남이 나한테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다가서야지요.

 내 잘난 이야기를 떠드는 일이 목적이었다면 글쓰기를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내 이웃들 복닥이는 온갖 삶을 바라보는 눈길이 있고, 느끼는 가슴이 있고, 곰삭이는 머리가 있으며, 함께하려는 손발이 있다면, 그때에라야 비로소 볼펜을 들든 자판을 두들기든 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2000년부터 2005년까지 제가 썼던 〈오마이뉴스〉 기사는 ‘높지도 않은 콧대를 높이 세우면서 거들먹거린’ 이야기였구나 싶습니다. 높여야 할 것은 콧대가 아닌 붓대일지 모르나, 붓대조차도 높일 까닭이 없으며, 높여야 할 것이 없는 만큼 낮춰야 할 것도 없고, 있는 그대로 손을 맞잡고 저마다 자기 길을 다부지게 걸어가야지 싶습니다. 핑계만 가득한 생각쪼가리 늘어놓습니다. (4340.8.30.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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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낮, 헌책방 나들이를 하려고 서울로 전철을 타고 가는 길에 《하종강-길에서 만난 사람들》(후마니타스,2007)을 읽습니다. 73쪽, 다큐멘타리 영화를 찍는 태준식 감독 이야기를 읽다가 한동안 책을 덮습니다.


.. 그렇다. 사람은 ‘사상’이 아니라 ‘삶’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


 볼펜으로 꾹꾹 눌러 가면서, 책에 몇 글자 적습니다.

 사람은 그이가 써낸 책이 아니라, 그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았느냐로 평가를 받는다. 《무소유》라는 책이 아니라, 이 책을 쓴 분이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서 누구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로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지금 이 나라에서는 삶이 아닌 책으로 사람을 따진다.

 사람은 그이가 번 돈이 아니라, 그이가 어디에서 어떻게 돈을 쓰며 살았느냐로 평가를 받는다. 재산이 얼마요 땅이 얼마가 아니라, 그만한 돈을 번 사람이 무슨 일을 어떻게 했고, 이렇게 번 돈을 어디에서 누구하고 어떠한 일을 하는 데에 썼는가로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지금 이 나라에서는 그이가 무슨 짓을 했고 말고는 헤아리지 않고 돈크기가 얼마이냐만으로 사람을 잰다.

 사람은 그이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동무나 이웃이나 피붙이)이 아니라, 그이가 어디에서 누구와 어울리며 함께 일하고 노느냐로 평가를 받는다. 이름난 사람, 힘있는 사람, 돈있는 사람과 가까이 지낸다고 해서 이름이 나거나 힘이 있거나 돈이 있지 않다. 훌륭한 사람을 많이 알고 지낸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들 책을 많이 읽어서 알고 있다고 해서 그이도 훌륭하겠는가. 하지만, 지금 이 나라에서는 그이가 옆에 어떤 사람을 가까이 두고 있느냐를 놓고만 사람을 살핀다.

 사람은 그이가 얻거나 갖춘 지식이나 학벌이 아니라, 그가 어디에서 누구와 자기 지식을 베풀거나 나누었는가로 평가를 받는다. 아는 것 많아 똑똑하다거나 높은 학교를 마쳤다거나 나라밖으로도 공부를 다녀왔다고 해서, 그이가 세상을 좀더 두루 살펴볼 줄 알거나 깊이 파헤칠 줄 알겠는가. 하지만, 지금 이 나라에서는 퀴즈대회에서 우승하고, 졸업장이나 자격증 숫자가 많으며, 온갖 어려운 학술 낱말로 자기를 감싸는 사람이 대단한 무엇을 보여주고 있기라도 한듯 떠벌리고 부풀린다. (4340.8.10.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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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창작에 있어서, 아니 삶의 창조에 있어서 저항이 어떠한 성질의 것이라는 점을 그는 여기서 암시하고 있다 ..  《조태일-고여 있는 시와 움직이는 시》(전예원,1980) 130쪽

 삶을 자기 스스로 가꾸면서 알알이 빚어낼 때, 비로소 글 하나 세상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제 스스로 제 삶을 알알이 빚어낼 수 있도록 가꾸거나 힘쓸 때, 비로소 제 마음에 드는 글 하나 살포시 건넬 수 있습니다. 제 삶을 스스로 가꾸지도 않고 추스르지도 않으면서 자꾸자꾸 무언가 뽑아내려고 하면, 책상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들기거나 볼펜을 붙잡고 종이를 마주할 때에는, 머리가 하얘지기만 할 뿐, 또는 헛말만 지루하게 늘어지기만 할 뿐입니다. 삶이 없이 글이 나올 수 없는 한편으로, 남들 삶을 그저 따라만 갈 때에도 글이 나올 수 없습니다. 내 삶을 꾸려야지, 내 길을 걸어야지, 내 일을 해야지, 내 놀이를 즐겨야지, 내 말을 하고, 내 사람을 만나고, 내 눈으로 바라보아야지, 내 귀로 들어야지, 내 마음으로 헤아려야지, 내 살갗으로 느껴야지, 내 몸으로 껴안아야지, 내 발로 디뎌야지, 내 손으로 만져야지, 내 몸뚱이를 움직여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녀야지, 내 머리로 알아챈 책을 책시렁에서 스스로 뽑아내어 내 주머니에 있는 돈, 그러니까 내 땀방울을 흘려서 번 돈을 써서 사들이고 내 품과 시간을 들여서 읽어내어 내 나름대로 곰삭이고 받아들여야지, 비로소 글 하나가 태어납니다. 글은 태어납니다. (4340.8.6.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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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좋은생각>에서 청탁이 들어와서 써 보낸 글입니다.
마감날에 겨우 맞추었네요 ^^;;;;;


― 내 삶에 책 하나 : 마르지 않는 삶을 담은 책


 제가 일하는 책상에는 늘 100∼200권에 이르는 책이 얹히거나 꽂혀 있습니다. 책상 둘레에도 비슷한 숫자로 쌓여 있습니다. 그날그날 제 살림집으로 받아들인 책이 하나둘 모이면서 탑을 이룹니다. 한 번 집어들고 끝까지 쉬지 않고 읽어내리는 책도 있지만, 제 얕은 마음을 휘젓거나 다독여 주는 줄거리를 읽었을 때면 한동안 책을 덮습니다. 지금 막 깨우친 이야기를 차근차근 곰삭이고 싶어서요. 누런 쌀밥을 백 번쯤 우물우물 씹어서 넘기듯, 마음에 밥이 되는 책을 만났을 때는 서두르지 않고 읽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한 끼니에 열 그릇이나 스무 그릇을 비울 수 없듯이, 제 모자란 깜냥을 일깨우는 책이라면 하루아침에 읽을 수 있으랴 싶습니다.

 우리들이 만나는 책은 ‘그 책을 짓거나 엮은 사람이 짧으면 한두 해, 길면 열이나 스무 해도 넘는 세월을 바쳐서 만든’ 책이에요. 그래, 열 해라는 세월을 한두 시간만에 후루룩 넘겨버릴 수는 없다고도 느껴요. 이러다 보니 책상맡에는 쌓이느니 책이요, 다 읽고 나서도 좀처럼 ‘따로 마련한 책꽂이’로 옮겨 꽂지 못합니다. 다 읽었어도 더 읽고 싶고, 여러 차례 읽었어도 틈틈이 다시 들추고 싶어서.

 그러나 책상맡에 놓지 않으면서도 꾸준히 들춰보는 책이 있습니다. 잡지 《샘이 깊은 물》. 1984년에 첫호를 낸 《샘이 깊은 물》은 ‘아줌마 독자’와 ‘아가씨 독자’한테 눈길을 맞추어 우리 사는 세상 이야기를 조곤조곤 돌아볼 수 있게 이끌어 줍니다. 폐간되어 새책방에서 사라지고, 도서관에서도 갖추어 놓지 않는 잡지인 터라,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한 권 두 권 틈틈이 사서 읽습니다. 책꽂이에서 1987년 10월에 나온 《샘이 깊은 물》을 꺼내어 봅니다. 벌써 스무 해나 지나간 옛글이라 할 테지만, 세월을 건너뛰는 슬기로움을 보여줍니다. 철지나거나 묵었으면 ‘이제는 돌아볼 값어치’가 없다고 여기는 요즘 세상이건만, 이 잡지는 철이 지나고 묵을수록 깊은 된장맛을 냅니다. 잡지가 나오던 지난날에는 지난날대로 세상을 앞서 읽던 줄거리를 담았고, 잡지가 자취를 감춘 오늘날에는 지금 우리 모습과 삶을 가만히 되새기고 돌아볼 수 있는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잡지 이름처럼, 샘이 깊어서 언제까지나 마르지 않고 시원하게 감겨들까요. 섣부른 세상 물결에 휩쓸리지 말되 세상일에 팔짱 끼고 나 몰라라 하지 않도록, 무엇이든 빨리빨리 외치는 세상 흐름에 끄달리지 말되 자기 줏대와 눈길을 추스를 수 있도록, 조용히 외치고 말이 아닌 온몸으로 파고드는, 내 삶에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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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우연히 〈오마이뉴스〉에 실린 기사 하나를 보았는데, 이 기사는 〈문화연대〉에서 낸 성명서 하나를 거의 고스란히 옮겨놓은 ‘퍼오기 기사’였다. 이 퍼오기 기사 원글을 인터넷에서 찾아서(http://www.culturalaction.org) 읽어 보았다. 〈시민의신문〉이 문을 닫게 되고 〈시민사회신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일을 ‘도저히 환영할 수 없다’고 밝히는 성명서.

 이 성명서를 읽으면, ‘그래, 그렇다면 잘못이 누구한테 있고, 이 잘못은 어떻게 고쳐야 하는가?’ 하는 알맹이를 잡을 수 없다. 〈시민의 신문〉이 문을 닫게 한 주범인 이형모 이사를 나무라는 건지, 이형모 이사를 감싸안은 ‘한국 사회 대표 시민사회단체’를 나무라는 건지 알 수 없다. 또한, 애써 이런 답답이들과 싸우며 곧은 목소리를 내온 〈시민의 신문〉 기자들 외침에 귀를 닫고 눈을 감아 온, 주류 매체와 비주류 매체와 주류 시민사회단체와 비주류 시민사회단체를 탓하는 건지도 알 수 없다. 누구 들으라고 쓴 글이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제대로 짚기나 하고 쓴 글인지 종잡을 수 없다. 문득, 이 단체 〈문화연대〉라는 곳은 그동안 무엇을 해 왔는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보다 더 딱한 것은, 이런 〈문화연대〉 성명서를 거의 그대로 ‘퍼오기 기사’로 실은 〈오마이뉴스〉 기사.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올린 그 기자는, 앞뒤 흐름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조금이라도 살핀 뒤 그런 ‘퍼오기 기사’를 썼는가? ‘퍼오기 기사’이니 취재도 안 하고, 책상 앞에서 인터넷만 끄적거리다가 썼을는지 모른다. 둘레에서 몇 마디 나온 이야기를 어느 만큼 그러모아서 쓰기도 했을 테고.

 하지만 〈문화연대〉에서 성명서를 쓴 사람, 또 〈오마이뉴스〉에서 퍼오기 기사를 쓴 사람은 모르리라. 자기들이 얕은 생각으로 함부로 쓴 그런 글 하나 때문에 참과 거짓이 엉뚱하게 알려지게 되는 줄은. 그리고 그 엉뚱하게 알려지는 글 때문에 피해를 입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자기가 쓰는 글에 ‘비판’이라는 꼬리말을 단다고 해서 그 글이 비판인가? 비판이란 아무나 하는 말이 아니다. 비판을 하려면, 누구보다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하며, 누구보다 더 깊이 사랑해야 하며, 누구보다 더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비판이 나올 수 없다. 깊이 파고들지 않은 채, 깊이 사랑하지 않은 채, 많은 시간을 쏟지 않은 채 내뱉는 말은 ‘헐뜯기’일 뿐이다.

 내가 책소개 기사를 거의 안 읽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책소개 기사를 쓰는 기자나 학자들은 ‘자기가 소개하는 책’을 제대로 읽지 않는다.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며 읽지 않는다. 종이에 박힌 활자는 읽을 줄 알아도, 종이 활자에 담은 지은이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다. 책 하나 펴내는 사람은 ‘돈 되는 상품’으로 책을 펴내지 않는다. 뭐, 이런 상품으로 펴내는 사람도 적잖이 있겠지. 그리고 상품을 소개하는 글을 쓰는 기자도 있을 테고. 다만, 나는 상품으로 책 만드는 사람과 상품으로 만들어진 책을 소개하는 기자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책을 펴내려고 했던 사람이 내놓아 우리 앞에 보여지는 것은 ‘한 권 책(이백 쪽이든 사백 쪽이든)’이지만, 이 한 권을 이루고자 기나긴 세월 땀-사랑-믿음-다리품 모두를 담았다. 서른 해 한삶이 책 하나로 바쳐지기도 하고, 예순 해 한삶이 책 하나로 바쳐지기도 한다. 책 하나를 펴내고자, ‘다른 책’ 10만 권을 읽은 사람이 있고, 책 하나 펴내고자, 세상사람 1만 사람을 만나거나 부대낀 사람이 있다.

 책은 줄거리가 아니다. 그래서 책소개 기사는 줄거리 소개가 아니다. 줄거리 소개로 그치는 기사라면, 또는 지은이와 출판사 요새 형편을 알리는 기사라면, 그리하여 책 하나 펴내는 속뜻과 깊은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기사라면, 모두 쓰레기라고 느낀다. 쓰레기일 수밖에 없지. 그 기사를 읽는 우리들 시간을 아깝게 내버리게 하는 쓰레기, 그 기사가 실린 신문을 더럽히며 종이를 헤프게 버리게 하는 쓰레기.

 책을 읽을 때, 첫 쪽부터 맨 마지막 쪽까지 꼼꼼히 살펴야 ‘읽었다’고 말할 수 없다. 줄거리를 다 외었다고 책을 ‘읽었다’고 말할 수 있으랴? 몇 쪽에 무슨 이야기가 적혀 있는 줄 달달 읊는다고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없다. 지은이 해적이를 외우고 출판사 도서목록을 죽 적어내려간다고 해서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있나? 참말로 책을 ‘읽었다’고 말하려면, 그래서 책을 ‘소개한다’고 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책 하나에 담긴 온 우주를 말하지 못하면서 책을 소개한다는 글을 쓰는 일이란 얼마나 아슬아슬하고 몹쓸 짓인가? 책 하나에 담은 한 사람 온삶을 자기 살갗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책을 소개한다고 끄적거리는 일이란 얼마나 얼치기 노릇이란 말인가? 책 하나로 나누려는 사랑과 믿음이 얼마만한 크기이며 부피인지 껴안아 보지 않고서 섣불리 읊는 칭찬과 비판이란 얼마나 부질없는 말장난인가? 책을 펴내는 사람은 ‘사람들한테 제대로 읽히기’를 바란다. ‘많이 팔리기’가 아니라 ‘두루 읽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책을 소개한다는 글을 쓰는 사람은 어떤 매무새로 글을 쓰는가? 지난 5월 17일에 세상을 떠난 권정생 할아버지는 ‘사람들한테 더 많이 팔리고 읽힐 수 있던 길’을 깨끗이 접어두고, ‘사람들이 어느 때라도 알아보며 찾아 줄 수 있는 길’을 어렵게 걸어갔다. 권정생 할아버지는 자기한테 돌아올 인세를 왜 자기 형제나 피붙이한테 건네지 않고, 북녘 어린이한테 주고 싶어했을까? 이 숙제를 스스로 풀어내지 않으려는 기자라면, 지금 곧바로 글쟁이 노릇을 집어치우고 다른 밥벌이를 알아볼 일이다. (4340.5.2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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