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책 좀 골라 주라.” “무슨 책?” “아이들 책.” “마, 아이들 책은 니가 공부해서 사 줘야지.” “내가 아이들 책을 어떻게 알아. 너가 많이 봤으니 좀 추천해 줘.” “어른인 네가 보는 책이라면 추천도 해 줄 수 있지만, 아이들이 보는 책은 추천해 주지 못하지.” “그냥, 아무 책이라도 추천해 줘.” “자식, 생각해 봐라. 너는 애인하고 어디 놀러갈 때 그냥 아무 데나 가냐. 또 애인한테 선물 사 줄 때 아무거나 사 주니. 아이들한테 책을 읽히려고 하는데 아무 책이나 사 줄 수 없지. 또 대충 추천하는 책을 사 줄 수도 없고. 애인한테 선물 사 주듯이, 네가 손수 공부해서 찾아서 사 줘야지.” “아이들이 좋아하는 그런 책 사 주면 될까?” “네가 아이들이 뭘 좋아하는지 어떻게 아니? 그럴 바에야 그냥 돈으로 주는 게 나아. 그리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책이 참으로 아이들한테 좋은 책일까? 아이들 마음밭을 무너뜨리는 책이지는 않을까? 잘 생각해 봐. 그리고 네가 아이를 낳아서 기른다고 생각해 봐. 너는 네 아이한테 어떤 책을 사 읽힐 생각이니? 네가 먼저 살펴보고 좋은지 나쁜지를 가려낼 수 있은 다음, 네 아이한테 책을 읽혀야 하지 않겠어? 이 일이 쉽지 않겠지만, 아이를 생각한다면 쉽지 않은 일이라고 대충 해서는 안 되겠지.”

 고등학교 적 동무가 제 일터인 도서관으로 찾아왔습니다. 선물할 어린이책을 사러 배다리 헌책방골목에 온 김에 저한테 ‘무슨 책을 골라 주면 좋을까 물어 보려고’ 했답니다. 하지만 제가 동무녀석한테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 책이 좋다고 할 책이든 안 좋다고 할 책이든 네 스스로 골라라’입니다. 어쩌면 동무녀석은, 대충 전집 한 가지라든지, 낱권책 몇 가지를 골라 줄 수 있겠지요. ‘요새 아이들이 많이 본다는 책’을 추천받아서 사 줄 수 있고요. 그러면 동무녀석이 사다 준 그 책을 받아드는 아이는 얼마나 좋아할까요. 얼마나 반길까요.

 “아이들 책은 함부로 추천해 줄 수가 없어. 선물을 받을 아이는 몇 살이니?” “초등학교 5학년쯤.” “음, 초등학교 5학년이라. 그래, 아이들한테 책을 추천해 주기 어려운 건, 같은 초등학교 5학년이라고 해도 눈높이나 지식이 달라. 어느 아이는 책을 좀더 많이 읽었을 테고 어떤 아이는 아직 책을 잘 못 읽을 수 있지. 아이마다 취향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잖아. 이쪽에 있는 책들은 모두 그림책인데, 어떤 책은 지식 소양을 길러 주는 책이고, 어떤 책은 생태ㆍ환경을 이야기감으로 삼은 책이야. 그 아이한테는 동화책이 알맞을 수 있는데, 어느 동화책은 철학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치기도 하고 어느 동화책이 아이들이 학교에서 지내는 이야기를 담지. 책마다 성격이 다르고 갈래가 다르기 때문에, 그 아이한테 맞춰서 그 아이를 잘 생각하면서 골라야 한다고. 그러니 아이들 책은 아무나 추천해 줄 수 없고, 아이들 부모가 손수 공부해서 하나씩 사 줘야 해.” (4340.9.2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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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망》이라는 긴소설이 1970년대 끝무렵에 조그마한 ‘손바닥책(문고판)’으로 번역되어 나오기도 했으나, 그 뒤로, 또는 그 앞으로 ‘긴 줄거리를 담은 책’이 손바닥책으로 나온 일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일본에서는 책이 새로 나온 뒤 얼마만큼 팔리게 되면, 손바닥책으로 보급판을 만드는 문화가 널리 자리잡았다고 합니다. 《토지》 같은 책도 일본에서는 손바닥책으로 나옵니다. 보도사진가를 이야기하는 어느 일본 손바닥책은 쪽수가 자그마치 1000쪽을 훨씬 넘는데 책 만듦새는 튼튼하여 책장이 안 떨어지고, 읽기에도 괜찮고 무게도 가볍습니다. 우리 나라였다면 이런 책을 큼직하고 무겁게 만들어서 들고 다닐 수 없게, 그러니까 책꽂이에만 모셔 두도록 했겠지요. 책값은 5만 원도 아닌 10만 원쯤 붙었을 테고요.

 《태백산맥》과 《아리랑》은 ‘애장용’이라고 하며 양장에다가 책상자까지 만든 판이 나온 지 여러 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좀더 많은 사람이 가벼운 마음으로 값싸게 사서 널리 읽을 수 있도록 하는 ‘보급판’이나 ‘손바닥책’을 만들겠다는 소식은 아직 없습니다. 《토지》나 《혼불》 같은 긴소설도 손바닥책으로 만들겠다는 소식을 들을 수 없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를 보더라도 소설책을 한국처럼 두껍고 무겁고 비싼 고급종이를 써서 만드는 곳은 없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일본이든 다른 어느 나라이든, 소설책뿐 아니라 다른 책들도, 그러니까 공부하는 책, 학문 깊이를 파헤친 책, 인문사회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어떤 전문 분야를 다룬 책도, 그림과 사진이 많이 들어간 예술 쪽 책도 으레 가볍고 튼튼하면서 보기 좋고 값싸게 만드는 편입니다. 다만, 이렇게 만들면서도, 도서관에서 오랫동안 장서로 갖추어 자료로 쓸 수 있는 판도 함께 만듭니다(도서관에서 기꺼이 사 주니 이렇게 할 수 있을 테지요).

 지금 우리는 어떨까요? 요새는 웬만하게 만들어서는 책이 안 팔린다고 해서 책값을 올리며 빛깔 곱게 꾸밉니다. 책마다 껍데기를 씌우거나 띠지 두르기는 유행이 아니라 꼭 해야 할 일처럼 되었습니다. 그래, 책값을 올려붙인 책이니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독자들이 사 주지 않는다는 말도 들립니다. 그렇다면, 이런 책마을 흐름은 ‘어차피 이 책을 사서 볼 사람은 사서 보니까, 그렇게 사서 보아야 할 사람들 주머니를 털어내자’고 생각하는 도둑질은 아닐까요. 좀 지나친 말이라 하실지 모르겠으나, 우리네 책마을 모습이 이렇잖아요. ‘어차피 사서 읽을 사람’이라 한다면 ‘좀더 값싸고 즐겁게 사서 보도록’ 해 주어야 좋고, ‘이 책을 몰라보고 못 사는 사람한테도 널리 알리는 길’을 찾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이 모든 문제를 출판사 탓으로 돌릴 수 없습니다. 책을 읽는 우리들부터 ‘속에 담은 줄거리’를 살피며 책을 사 보는 버릇을 제대로 못 들이고, 또는 안 들이고 있으니까요.

 겉꾸밈(디자인이나 장정)이 좀 허술하더라도 속에 담은 줄거리가 알뜰해야 좋은 책이라고 느낍니다. 널리 이름이 알려졌거나 무슨 교수가 쓴 책이라 해서 훌륭한 줄거리를 담은 책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수없이 많은 책을 낸 역사 깊은 출판사라고 해서 ‘이곳에서 새로 내는 책마다 우리 삶을 밝히는 책’이 될까요. 우리들이 아직 이름을 잘 모르는 사람이 써낸 책을 낯선 출판사에서 냈을 때, 이 책들은 찬찬히 살피며 돌아볼 값어치가 없을까요.

 제가 헌책방을 자주 다니며 책을 보는 까닭 가운데 하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① 겉꾸밈이 좋다고 모두 읽을 만한 책이지 않습니다. ② 이름난 사람, 학식과 지위와 권력이 있는 사람이 쓴 책이라고 해서 훌륭한 줄거리를 담은 책이지 않습니다. ③ 권위와 역사 깊은 출판사라 해서 한결같이 우리 삶을 밝히는 책을 내지는 않습니다. ④ 책크기(판형)가 작고 가볍고 값싸고 좀 질이 낮은 종이를 쓴 책이라고 해서 뭔가 좀 덜 떨어지거나 모자란 책이지 않습니다.

 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우리들은 사람이든 책이든 사물이든, 일자리든 자연이든 삶이든, 사진이든 연속극이든 영화든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따라서 ‘좋고 싫고’를 가리기 일쑤입니다. 이름있는 대학교를 나왔다고 하면 일도 잘하고 똑똑할 것처럼 생각하지 않나요. 얼굴이 곱상하고 예쁘면 더 마음이 끌리지 않나요.

 참 많은 사람들이 어린아이일 때부터 초-중-고등학교를 거치는 동안 ‘일류대학교 들어가기 난장판’에 끌려들고 맙니다. 사물과 사람과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자기가 참으로 좋아하고 즐길 만한 일자리를 찾기보다, 돈과 이름과 힘을 더 많고 높고 크게 얻을 수 있는 학벌과 연줄을 찾는 일에 자기도 모르게 따라갑니다. 형편이 이러하니, 책 한 권을 볼 때에도 속보다 겉을 더 따지거나 찾게 되지 싶어요. 요즘 들어서 드물게 나오지만, 못생긴 탤런트나 영화배우 숫자는 참 적어요. 연속극에 나오는 배우들은 하나같이 잘나고 잘생기고 몸매 늘씬한 사람입니다. 장애인은 아예 나오지 못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나라만큼 ‘장애인 이동권’과 ‘장애인 활동권’이 막혀 있는 나라가 없습니다. 더욱이 장애인 이야기나 푸대접받는 소수자 이야기를 다루는 책은 구경하기 힘들고, 어쩌다 나오는 책은 실천이 따르지 않는 구호를 벗어나지 못해요. 영어니 논술이니 하는 책이 불티나게 팔리는 동안 아예 한참 뒤로 밀려나 버리고 만 ‘우리 말과 우리 문화 이야기’를 다룬 책은 큰 책방 진열장에서도 구석진 자리에나 조금 있을 뿐입니다. 뭐, 이런 책을 사 보는 사람이 드무니 책방에서는 어쩔 수 없겠지요.

 사람 손은 하나라서 한 손에 잡을 수 있는 것도 하나입니다. 욕심을 잡으면 나눔을 못 잡고, 명예나 돈이나 권력을 잡으면 사랑과 믿음과 즐거움을 놓칩니다. 겉멋을 잡으면 속멋을 놓치기 마련이고 학벌과 학력을 잡으면 참된 사람살이와 사람공부는 놓칠밖에 없습니다. 책 하나 만들어 사람들한테 읽히겠다는 책마을 일꾼도 마찬가지입니다. 읽는이 마음과 살림을 좀더 헤아리고 살피는 눈길을 잡지 않는다면 얄궂은 길로 갈밖에요. 책 하나 찾아내어 읽는 우리들도 겉꾸밈과 유명세 따위에 자꾸자꾸 빠진다면, 속을 잘 차리면서 알뜰하고 아름답게 가꾼 책하고 그지없이 멀어질 테고요.

 어제부터 《내 나이가 어때서?》(황안나 지음,샨티,2005)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예순다섯 나이에 두 다리로 남녘땅 한쪽 끝에서 다른 끝까지 걸어서 밟아나가는 여행을 떠난 할머니 삶과 생각을 담은 책입니다. “나 역시 내일을 담보로 오늘을 희생하고 싶지 않다. 무엇을 하기에 ‘오늘’은 항상 가장 적합한 때이다. ‘지금’이 아니면 도대체 언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해 본단 말인가!” 하는 대목에서 한동안 책장을 덮습니다. 이 외침 그대로 우리들은 오늘을 살아갑니다. 오늘을 밝히는 책, 겉멋이나 유명세나 유행이 아니라 자기한테 지금 가장 쓸모있으면서 올곧음과 즐거움을 베풀어 주는 책, 달디단 설탕이나 짜디짠 소금이 아니라 구수하면서 하루 세 끼니 한 해 삼백예순닷새를 먹어도 질리지 않는 된장찌개 같은 책을 즐기는 일이 출판사한테는 ‘조그마한 책’ 조촐히 내는 마음을 일으켜세우고, 우리 자신한테는 ‘조그마한 책’ 가붓이 즐기는 마음을 잠깨울 수 있을까요. 조용히 믿어 봅니다. (4338.8.18.나무.처음 씀/4340.9.16.해.고쳐 씀.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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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을 찾는 방법 1
 


 좋은 책을 찾는 방법이 있을까요? 글쎄, 제가 느끼기로는 자기한테 좋을 책을 저마다 하나하나 살피는 길밖에 다른 길은 없지 싶습니다. 제가 읽어 본 어느 책이 참 좋다고 해서, 다른 분들한테까지도 그 책이 좋을 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다른 어느 분이 참 즐겁게 읽은 책이라 해서, 이 책이 저한테까지 즐겁지는 않겠지요. 이를테면, 저는 삼미 슈퍼스타즈-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로 이어지는 야구단을 응원했지만, 어떤 분은 MBC 청룡-LG 트윈스로 이어지는 야구단을 응원하겠지요.

 한때는 야구를 좋아할 수 있고, 한때는 춤추고 노래하며 놀기를 좋아할 수 있고, 한때는 술과 담배를 가까이할 수 있으며, 한때는 사랑하고 사귀는 일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다른 일을 좋아할 수 있고 다른 놀이를 즐길 수 있습니다. 차츰차츰 바뀌기도 하고 달라지기도 하며 거듭나기도 합니다. 우리가 ‘참 좋다’고 느끼는 책도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아무것도 아니네’ 하고 느낄 수 있으며,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하면서 새삼스레 값어치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 저한테 “책을 많이 보셨으니까, 좋은 책 고르는 방법을 잘 아실 것 같은데, 한 말씀 해 주시지요?” 하고 곧잘 묻는 분들 앞에서, 딱히 어떤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늘 이렇게 대꾸합니다. “글쎄요. 자기가 읽어서 좋으면 좋은 책이지 싶은데요. 따로 좋은 책을 찾거나 나쁜 책을 안 읽는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 책 저 책 하나하나 살피면서, 가만히 책 하나를 맛본다는 생각으로 살펴본다면, 자연스럽게 자기한테 좋거나 반가운 책을 알 수 있지 않겠어요? 남들이 읽었다고 하는 좋다고 하는 책을 자기도 사서 읽기보다는, 자기 스스로 책방에 가득 꽂혀 있는 온갖 책을 두루 살피고 읽어 보는 일이 더 낫다고 생각해요.”

 박지성 선수한테 ‘축구 잘하는 법’을 묻는다고 해 봤자, 이승엽 선수한테 ‘야구 잘하는 법’을 묻는다고 해 봤자, 이창호 씨한테 ‘바둑 잘 두는 법’을 묻는다고 해 봤자, 박수근 님한테 ‘그림 잘 그리는 법’을 묻는다고 해 봤자, 어떤 뾰족한 대답을 들을 수 있을는지요? 길은 스스로 찾아야 하는 법이고, 자신한테 좋다고 느껴지는 책은 자기 스스로 찾아야 하는 법이라고 느낍니다. (4339.6.21.물.ㅎㄲㅅㄱ)


 좋은 책을 찾는 방법 2


 “알려고 하니까, 진짜 알아지는 기회가 오는데. 알아진 것 같지만, 고기 안에서 안주하려고 하면 알 수 없어.” (헌책방 〈아벨서점〉 아주머니 말, 2007.9.5.)


 좋은 책이란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좋은 책을 나누는 잣대 또한 무엇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자기한테 좋은 책이란 어떤 책일지, 또 자기 이웃한테도 좋은 책이란 어떤 책일지, 자기 식구와 동무들한테 어떤 책이 좋을지를 깊이깊이 헤아리고 꾸준하게 살피고 두고두고 살피노라면, 저절로 눈이 트여서 책이 보입니다. 아니, 책이 우리 눈앞에 와서 엥깁니다. (4340.9.6.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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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다시 쓰겠습니다


 그제, 강릉에 사는 띠동갑 후배가 인천으로 찾아왔습니다. 서울에 있는 ㅁ대안학교에서 만난 후배입니다. 저를 보고 꼬박꼬박 ‘최종규 선생님’이라고 불러 주는 젊은 친구는 저를 자기 길동무로 생각해 줍니다. 스물한 살 젊은 나날을 보내며 부대끼는 온갖 걱정거리와 마음앓이를 털어놓고 자기 갈 길을 스스로 헤아리곤 합니다. 새벽 네 시가 넘도록 젊은 친구와 옆지기하고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젊은 친구가 저를 처음 보았을 때 이야기를 듣습니다. “처음 받은 느낌으로는, 저 사람 콧대가 높을 것 같다”였다고 합니다.

 옆지기도 웃고 저도 웃었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거울을 안 보고 사는 제 얼굴이 이웃사람들한테 어떻게 비치고 있는가를 잘 안 듣고 살았구나 싶은 마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살며 거울을 꼭 봐야 하지는 않고 이웃사람들이 허튼소리를 할 때에는 한귀로 흘리며 마음을 고요히 다스릴 수 있으면 좋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보지 못한 세상 모습을 들려준다든지, 제가 미처 느끼지 못하고 엇나가고 있는 걸음걸이를 알려준다든지, 제가 느끼지 못한 사람들 아픔과 눈물과 웃음과 즐거움을 보여준다든지, 제가 알지 못하는 슬기를 깨우쳐 줄 때에는, 어느 자리 어느 때 누구 말이라 해도 고개숙여 받아들여야 한다고 느낍니다.

 강릉 사는 젊은 친구한테 미처 묻지 못했는데, 저를 처음 본 2005년 여름 그날 콧대 높게 느껴지던 제 모습이, 2007년 여름 이날도 마찬가지일까요.

 어제 잠깐 서울 나들이를 했습니다. 서울로 사람 만나러 떠나는 젊은 친구가 혼자서 전철간에서 심심할까 싶어서 함께 갔습니다. 저녁나절 집으로 돌아오기 앞서 들른 헌책방에서 《텍스트》라는 ‘북매거진’ 35호를 보았습니다. 저는 이 잡지를 정기구독하고 있는데 거의 한 해 가까이 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나온 35호를 보니 지난 34호를 낸 뒤로 사람품이며 돈이며 다른 여러 가지며 참 안 좋아서 한 호도 못 내고 있었더군요. 다시 펴내는 말을 이렇게 적습니다.


.. 이렇게, 다시, 결국, 시작합니다. 늘, 끝의, 시작입니다. 《텍스트》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많다는 것 잘 압니다. 어떻게 사과와 용서를 빌어도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솔직히 고백컨대 그 불만과 불신을 온전하게 해소시키기에는 너무나 역부족입니다. 다만 텍스트에 대한, 버리지 못한 욕망이 다시금 《텍스트》를 시작케 합니다. 그 욕망에 기대는 것만이 지금 할 수 있는 전부일 따름입니다. 부디 그 텍스트의 욕망 안에 모두가 행복해지는 오솔길이 놓여 있기를 희망합니다 ..


 그동안 〈오마이뉴스〉에 글을 안 쓰면서, 제가 해 오던 수많은 글쓰기(우리 말 / 책 / 헌책방 / 자전거)를 많이 줄이거나 꺾거나 묻어 놓았습니다. 자원봉사로 몇 군데 자그마한 매체에 글을 보내기는 하지만, 정작 제가 세상에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는 털어놓고 있지 못했으며, 아니 안 했으며, 숨죽이며 또아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올해 4월 15일, 네 해 조금 못 되는 세월을 일하면서 보냈던 충주를 떠나 인천으로 왔습니다. 이오덕 선생님 원고 갈무리는 지난해에 다른 분한테 넘겨 드린 뒤 다른 일거리 없이 자전거만 타고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녔습니다. 덕분에 자전거로 못 가는 곳이 없음을 느꼈고, 오른무릎과 오른팔꿈치는 맛이 가서 요 몇 달 동안 자전거를 탈 수 없을 만큼 몸이 무너졌습니다.

 인천으로 오면서 여태껏 읽고 추슬러 온 책을 갈무리해서 ‘지역 전문 도서관’을 열었습니다. 제가 읽은 책은 제 마음에 담겼다가 제 몸으로 드러나서 사람들한테 펼쳐질 뿐이라고 생각하기에, 제가 읽은 책을 이웃사람한테 선물로 드리는 일도 좋지만, 차곡차곡 모아 놓은 뒤 한꺼번에 드러내어 누구나 찾아와서 읽을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 한결 좋겠구나 깨달으면서 일을 벌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제가 부대끼며 마음에 담은 이야기를 글 한 쪼가리로 써낸다면, 이런 글은 종이에 옮겨지는 그때부터는 ‘제 것’이 아닐 테지요. 어느 누구 것도 아닌 ‘글’일 뿐이며, 이 글을 좋게 받아들여 주는 사람한테는 좋은 이야기로, 얄궂게 받아들이는 분한테는 비판과 칼질을 해야 하는 못난 이야기로 다가가리라 생각합니다. 좋은 글을 읽으며 좋음을 배우고, 나쁜 글을 읽으며 모자람과 어리숙함이 무엇인지를 느껴서, 저마다 자기가 선 자리에서 더 나은 길로 거듭날 수 있다고 봅니다.

 요즈음 인천은, ㅇ시장이 벌이는 밑도 끝도 없는 재개발 공사계획 때문에 가난하지만 수수하게 살던 골목집 사람들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인천사람이지만 인천을 떠나 서울에서 살다가 충주로 옮겨 지내는 동안 살갗으로 못 느끼던 일이었습니다. 지역신문에서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중앙신문에서는 ‘거긴 너네들 지역 일이잖니’ 하고 한수 접고 들어가는 일임을 뼛속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운명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자전거로 전국 곳곳을 찾아다니면서 느끼기로, 골목집 문화가 남은 마지막 곳은 인천이었습니다. 고향이라서가 아니라, 도시 삶터에서 이웃집과 어깨동무를 하면서 조용하고 조촐하게 살 수 있는 한 곳이라면 인천밖에 없다고 느꼈습니다. 돌아가신 김기찬 선생이 온삶을 바쳐 찍은 《골목 안 풍경》은 이제 중림동에 없습니다. 사직동에 없습니다. 공덕동에 없습니다. 남산에 없습니다. 경교장이 있는 서울 종로구 평동도 ‘이명박 뉴타운’으로 지정된 지 오래이고, 〈오마이뉴스〉 김대홍 기자가 사는 홍제동도 개미마을과 전철역 둘레를 중심으로 높직높직 아파트를 새로 짓는 계획이 차근차근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파트값이 높고낮음만 다를 뿐, 강아랫마을과 강웃마을과 강옆마을 삶터가 무엇이 다를까요.

 인천은 2014년에 아시아경기를 치르게 되면서, 2013년까지 모든 구에 걸쳐서 모든 서민들 집을 허물고, 이 자리에 아파트와 쇼핑센터와 대형할인마트를 올려세우는 계획을 ㅇ시장 지시와 명령으로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전국 어디를 가나 아파트 없는 마을이 없고, 이제는 이 나라 사람들은 절반 넘게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멍가게나 옛 저잣거리에서 장보기를 하는 사람보다도 대형할인마트에서 장보기를 하는 사람이 훨씬 많지 않을까요. 두 다리로 걸어다니거나 자전거를 타고 장보기를 하기보다 덩치 큰 suv라는 자가용을 몰고 장보기를 하는 분이 더 많지 않을까요.

 이런 세상에서 글쓰기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아찔아찔 골이 아파서 머리가 지끈거립니다. 이런 세상에서 혼자 깨끗한 척, 잘난 척, 모든 것을 아는 척 콧대를 세우고 우쭐거리는 꼬락서니가 얼마나 우스운가 돌아보니 얼굴이 화끈해집니다. 참말로 글은 왜 썼고, 책은 왜 읽었고, 그동안 〈오마이뉴스〉에 그 어리숙하고 모자랐던 글과 사진은 왜 올렸을까요.

 어느 누구도 제대로 알아보아 주지 않는 헌책방 이야기를 사람들한테 알리고픈 마음이 있었지만, 헌책방 이야기를 알린다기보다는 ‘헌책방처럼 따돌림받고 푸대접받는 이웃사람들 삶과 삶터도 함께 느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올바르게 쓰지 않는 우리 말과 글을 살가이 돌아보고 느끼면서 말하고 글써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지만, 우리 말과 글을 올바르게 쓰는 일보다는 ‘말과 글을 깨끗하고 알뜰하고 아름답게 추스르는 동안 우리 마음과 생각도 깨끗하고 알뜰하고 아름답게 추스를 수 있을 테고, 이러는 동안 우리가 저마다 서 있는 곳에서 좀더 힘내고 기운차게 어깨를 겯고 일하고 놀고 싸우고 노래하고 술과 밥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신문과 방송과 잡지에서 알아보아 주지 않는 조그마한 출판사 알맹이 탄탄한 책도 좀 읽으면서 세상 공부를 해야 우리 사회 밑바탕이 차츰차츰 탄탄해지지 않겠느냐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묻혀 있는 책 이야기를 들려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 삶과 경험을 톺아보면서 내 삶과 경험을 되새기고, 내 사는 이야기를 이웃사람과 나누며 우리한테 정작 중요한 일을 깨닫고, 이웃사람들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으면서 참말 우리가 깨닫고 맞서고 함께해야 할 일거리 싸움거리 걱정거리 이야기거리가 무엇인가 스스로 찾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예전에 쓴 글을 하나하나 다시 읽어 보면 참 부끄럽습니다. 저 어설픈 생각찌끄레기를 어쩜 저렇게 낯빛 하나 안 바꾸고 대단한 척 우쭐댈 수 있었나 싶어 예전 글은 다 불살랐으면 좋겠구나 싶은 마음뿐입니다. 하지만 지금 쓰는 글도 앞으로 몇 해가 지난 뒤 다시 읽었을 때 똑같이 느끼겠지요. 하루하루 나이를 먹으며 모자람과 어설픔만 깨닫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 모자람과 어설픔을 느끼기 때문에 날마다 더 애쓸 수 있고, 날마다 더 주먹을 불끈 쥘 수 있으며, 날마다 더 눈에 불을 켤 수 있을까요.

 나한테 깃든 모자람을 느낀다면, 내 이웃한테서 느껴지는 모자람을 더 따뜻한 눈길로 굽어살피고, 나한테 깃든 어설픔을 느낀다면, 내 이웃한테서 느껴지는 어설픔을 더 포근한 손길로 어루만져야 하는구나 깨닫습니다. 남이 나한테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다가서야지요.

 내 잘난 이야기를 떠드는 일이 목적이었다면 글쓰기를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내 이웃들 복닥이는 온갖 삶을 바라보는 눈길이 있고, 느끼는 가슴이 있고, 곰삭이는 머리가 있으며, 함께하려는 손발이 있다면, 그때에라야 비로소 볼펜을 들든 자판을 두들기든 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2000년부터 2005년까지 제가 썼던 〈오마이뉴스〉 기사는 ‘높지도 않은 콧대를 높이 세우면서 거들먹거린’ 이야기였구나 싶습니다. 높여야 할 것은 콧대가 아닌 붓대일지 모르나, 붓대조차도 높일 까닭이 없으며, 높여야 할 것이 없는 만큼 낮춰야 할 것도 없고, 있는 그대로 손을 맞잡고 저마다 자기 길을 다부지게 걸어가야지 싶습니다. 핑계만 가득한 생각쪼가리 늘어놓습니다. (4340.8.30.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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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낮, 헌책방 나들이를 하려고 서울로 전철을 타고 가는 길에 《하종강-길에서 만난 사람들》(후마니타스,2007)을 읽습니다. 73쪽, 다큐멘타리 영화를 찍는 태준식 감독 이야기를 읽다가 한동안 책을 덮습니다.


.. 그렇다. 사람은 ‘사상’이 아니라 ‘삶’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


 볼펜으로 꾹꾹 눌러 가면서, 책에 몇 글자 적습니다.

 사람은 그이가 써낸 책이 아니라, 그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았느냐로 평가를 받는다. 《무소유》라는 책이 아니라, 이 책을 쓴 분이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서 누구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로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지금 이 나라에서는 삶이 아닌 책으로 사람을 따진다.

 사람은 그이가 번 돈이 아니라, 그이가 어디에서 어떻게 돈을 쓰며 살았느냐로 평가를 받는다. 재산이 얼마요 땅이 얼마가 아니라, 그만한 돈을 번 사람이 무슨 일을 어떻게 했고, 이렇게 번 돈을 어디에서 누구하고 어떠한 일을 하는 데에 썼는가로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지금 이 나라에서는 그이가 무슨 짓을 했고 말고는 헤아리지 않고 돈크기가 얼마이냐만으로 사람을 잰다.

 사람은 그이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동무나 이웃이나 피붙이)이 아니라, 그이가 어디에서 누구와 어울리며 함께 일하고 노느냐로 평가를 받는다. 이름난 사람, 힘있는 사람, 돈있는 사람과 가까이 지낸다고 해서 이름이 나거나 힘이 있거나 돈이 있지 않다. 훌륭한 사람을 많이 알고 지낸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들 책을 많이 읽어서 알고 있다고 해서 그이도 훌륭하겠는가. 하지만, 지금 이 나라에서는 그이가 옆에 어떤 사람을 가까이 두고 있느냐를 놓고만 사람을 살핀다.

 사람은 그이가 얻거나 갖춘 지식이나 학벌이 아니라, 그가 어디에서 누구와 자기 지식을 베풀거나 나누었는가로 평가를 받는다. 아는 것 많아 똑똑하다거나 높은 학교를 마쳤다거나 나라밖으로도 공부를 다녀왔다고 해서, 그이가 세상을 좀더 두루 살펴볼 줄 알거나 깊이 파헤칠 줄 알겠는가. 하지만, 지금 이 나라에서는 퀴즈대회에서 우승하고, 졸업장이나 자격증 숫자가 많으며, 온갖 어려운 학술 낱말로 자기를 감싸는 사람이 대단한 무엇을 보여주고 있기라도 한듯 떠벌리고 부풀린다. (4340.8.10.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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