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읽기 삶읽기 사람읽기 7
― 필름과 메모리카드와



 4기가라는 메모리카드 하나가 맛이 갑니다. 이 메모리카드에 담긴 사진은 여러 날이 걸려 겨우 되살리지만, 이 메모리카드는 되살리지 못합니다. 어쩌다 잘못해서 불량품이 제 손으로 들어왔는지 모릅니다. 몇 차례 못 쓴 새 메모리카드가 말썽이 나고 말았습니다.

 필름으로 애써 잘 찍었다지만, 인화를 맡은 이가 깜빡 잘못하면 사진이 와르르 날아갑니다. 필름에 애써 잘 담았다지만, 미처 다 감지 않았는데 사진기 뚜껑을 일찍 열면 사진이 아지랑이처럼 날아갑니다. 때로는, 멋모르고 ‘다 쓴 필름’을 끼워넣고는 ‘한 번 찍힌 자리에 다시 찍히도록’ 하곤 합니다. 이때에는 두 가지 사진을 한꺼번에 날리는 셈입니다. 어떤 이는 일부러 이렇게 찍기도 한다지만, 필름 하나에 한 가지 이야기만 담으려 하던 사람으로서는 땅을 치고 가슴을 치더라도 돌이키지 못합니다.

 바보스러운 짓, 또는 어처구니없는 잘못, 때로는 슬픈 일 때문에 오랜 나날 오랜 품을 들인 사진이 먼지가 됩니다. 먼지가 된 사진을 알아볼 사람은 없습니다. 제아무리 빼어난 평론가라 하더라도 먼지가 된 사진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먼지가 된 사진은 내 눈과 가슴과 머리에만 아로새겨집니다. 어느 때에 어느 곳에서 어떠한 마음과 느낌으로 사진을 찍었지 하는 생각만 어루만집니다.

 디에스엘알이라는 사진기이든 똑닥이라는 사진기이든 손전화 사진기이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내가 살아가며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을 만한 사진기이면 나한테 어울리며 즐겁고 좋습니다. 나는 내 좋은 이야기를 갈무리하고 싶어 사진을 찍으니까요. 나는 내 좋은 이야기를 두고두고 건사하면서 사랑할 뿐 아니라, 둘레에 나누고 싶기에 사진을 찍습니다.

 필름을 써야 더 좋은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필름 가운데 중형이나 대형을 써야 더 훌륭한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메모리카드에 담는 디지털사진이라 해더 덜 좋은 사진일 까닭이 없습니다. 이제 온누리는 필름을 지나 메모리카드로 바뀐 만큼, 메모리카드로 해야 사진다운 사진이 된다 할 수 없습니다.

 몇 천만 원짜리 사진기를 쓰든 몇 백만 원짜리 사진기를 쓰든 몇 십만 원짜리 사진기를 쓰든 몇 만 원짜리 헌 사진기를 쓰든 사진이 달라질 수 없습니다. 달라지는 한 가지란 내 마음입니다. 바뀌는 한 가지란 오직 내 삶입니다.

 사진길을 걷고 싶은 사람들이라 할 때에는, ‘사진 새내기 길잡이 이야기책’을 들추지 말아야 합니다. ‘무슨무슨 길잡이’라든지 ‘무슨무슨 잘 찍는 법’ 같은 책이 아니라 ‘사진을 사진 그대로 느끼고 생각하며 받아들이는 삶을 비추는 이야기책’을 찾고 살피며 만나서 사진과 삶과 사랑과 사람을 배우며 껴안아야 합니다.

 곰곰이 헤아린다면, 슬기롭게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따로 책이 없어도 됩니다. 요리책이 있어야 밥을 잘 하지 않습니다. 살림을 꾸리는 일을 책읽기로 배우지는 않습니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삶자락을 책으로 익힐 수 없습니다. 꽃이 얼마나 예쁘고 어떻게 예쁜가 하는 느낌이나 생각은 책을 읽는대서 깨달을 수 없습니다. 나 스스로 흙을 밟고 선 숲이나 들이나 논둑에서 나 스스로 꽃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마음에서 샘솟는 아름다움이 있을 때에 바야흐로 ‘꽃이 예쁘구나’ 하고 느끼면서 삶과 자연과 목숨과 사람과 사랑을 배웁니다. 사진을 참다이 사랑하거나 배우려 한다면, 사진강의나 사진책이 아니라 사진삶이 어떠한가를 되짚으면서 내 하루하루를 아끼거나 사랑해야 합니다.

 유리판을 거쳐 필름이 되었고, 필름을 지나 메모리카드가 되었습니다. 메모리카드는 하루가 다르게 나아지거나 새로워집니다. 머잖아 메모리카드조차 사라지면서 또다른 ‘사진을 담는 그릇’이 태어나겠지요. 메모리카드를 넘어서거나 메모리카드와는 사뭇 다른 ‘그릇’이 나오면, 그때에는 또 ‘메모리카드 사진이 참 사진’이냐 ‘새로운 그릇에 담는 사진이 참 사진’이냐를 놓고 말다툼을 하려나요.

 우리는 오로지 사진을 할 뿐입니다. 우리는 늘 사진을 즐길 뿐입니다.

 우리는 오직 사랑을 할 뿐입니다. 우리는 노상 사랑을 즐길 뿐입니다.

 집에서 낳는 아기이든 산부인과에서 낳는 아기이든 조산소에서 낳는 아기이든, 한결같이 사랑스러운 아기입니다. 첫째 아기이든 셋째 아기이든 막째 아기이든 하나같이 고마운 목숨입니다.

 풋내기 사진쟁이 사진이든 이름난 사진쟁이 사진이든, 그저 사진입니다. 내가 바라보면서 나한테 얼마나 아름답게 스며드는 사진인가를 살필 수 있으면 됩니다.

 사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진을 사랑해야 합니다. 기계가 아닌 사진을 바라보고, 기계가 아닌 사진을 사랑해야 합니다.

 필름이 좋으면 필름을 쓰면 됩니다. 필름을 노래하거나 추켜세울 까닭이 없습니다. 메모리카드가 좋으면 메모리카드를 쓰면 됩니다. 현대 물질문명 사회라 한대서 메모리카드만 있지 않은 줄 깨달아야 합니다.

 모든 필름과 메모리카드와 유리원판 따위에 앞서, 모든 사진은 맨눈으로 찍거나 ‘감은 눈’으로 찍으면서 내 가슴에 깊이 돋을새김했습니다. 마음으로 찍지 못하는 사진이라면 기계로도 찍지 못하는 사진입니다. (4344.5.5.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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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벚꽃잎

 봄철 봄비가 쏟아지면서 봄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거센 봄비가 그치며 거칠던 봄바람이 함께 잠든다. 이동안 봄철을 곱게 빛내던 멧자락 벚꽃잎은 거의 떨어진다. 거센 봄비와 거친 봄바람이 아니었다면 하늘하늘 부는 바람결에 따라 하늘하늘 흩날리는 꽃비가 내렸을 텐데. 그래도 벚꽃잎이 몇 남아서 우리 손바닥 텃밭에까지 조용히 떨어진다. 씨감자를 텃밭에 마저 심는 동안 하얀 꽃잎 몇몇 살포시 내려앉는다. (4344.5.1.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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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성문 2


 책으로는 훌륭한 소리로 진보와 평화와 평등을 외치지만, 막상 집에서는 가부장 권력을 휘두르는 이는 ‘진보’인가 ‘남녀평등주의’인가 ‘평화운동’인가.

 자격증과 졸업증을 바랄 뿐 아니라, 이런 종이쪽이 없으면 벼랑으로 내몰기 때문에, 반성문이든 사상전향서이든 무어든 자꾸자꾸 글로 권력과 폭력을 휘두른다. (4344.4.30.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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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성문 1


 ‘사상전향서’란 얼마나 끔찍한 폭력인가. 그러나, 이런 종이쪽을 썼대서 생각이 바뀌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저 이런 종이쪽은 사람을 얽어매려는 쇠사슬이다. 주민등록증에 붉은 줄을 긋고는 한 사람을 ‘죽을 때까지 죄인으로 손가락질’하는 셈하고 마찬가지이다.

 반성문이란 참으로 쓸데없는 종이쪽이자 모진 폭력이다. 그러나, 이 종이쪽을 써야 비로소 뉘우쳤다고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다. 글은 그럴싸하게 쓰면서 삶은 엉터리라면 반성문이란 무슨 뜻인가? 기록? 자료? 졸업장이나 자격증이 한 사람 ‘성적’이나 ‘재주’를 보여주지 않듯이 반성문이란 어느 한 사람 삶을 뉘우친 자국이 될 수 없다. 오로지 이 한 사람이 살아온 나날과 부대낀 나날이 온삶과 온사랑으로 ‘뉘우침글’이 된다.

 반성문 없이 옳고 바르게 살아갔으나 반성문을 안 썼으니까 나쁜 사람이라며 손가락질하거나 깎아내리거나 떠들어도 되는지 궁금하다. 시인 신동엽 님은 일제강점기에 쓴 ‘平山八吉’이라는 창씨개명을 놓고, 시인 이원수 님은 일제강점기에 쓴 친일시를 놓고, 따로 반성문을 쓰지 않았다. 반성문이란 삶으로 보여줄 노릇이지, 글로 적바림한대서 뉘우침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종이쪽이 아닌 온몸에 아로새긴 뉘우침글을 읽어야 사람과 삶과 사랑을 읽을 수 있다. (4344.4.30.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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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쓴 글과 읽는 글


 모든 사람이 모든 글을 옳게 쓰지는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글을 옳게 읽지는 않습니다. 나이가 어리기에 글을 옳게 못 쓰거나 글을 옳게 못 읽지 않습니다. 나이가 있기에 글을 옳게 쓰거나 글을 옳게 읽지 않습니다.

 학교를 오래 다녔거나 책을 많이 읽었기에 글을 옳게 쓰거나 글을 옳게 읽지 않습니다. 학교를 적게 다니거나 못 다녔거나 책을 조금 읽었거나 못 읽었기에 글을 옳게 못 쓰거나 글을 옳게 못 읽지 않습니다.

 차라리 어린이라면 나중에 글을 옳게 쓰거나 글을 옳게 읽을 수 있겠거니 생각할 만합니다. 그러나 어린이일 때에도 글을 옳게 쓰거나 글을 옳게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글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남김없이 알아듣거나 헤아려야 하지 않습니다. 이 글에 깃든 마음을 함께 느끼거나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됩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들꽃과 들풀을 바라보면서 받아들이거나 느낍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밥을 먹고 국을 마십니다. 아이는 어른하고 똑같이 밥그릇을 비우지 못합니다. 아이는 어른처럼 젓가락질이나 숟가락질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이는 아이대로 젓가락질을 하고, 아이는 아이 밥통만큼 밥그릇을 비울 수 있어요.

 아이한테 어른처럼 밥그릇을 비우라거나 젓가락질을 하라고 바라거나 시킬 수 없습니다. 아이한테 어른처럼 원고지에 글을 쓰거나 사진기를 손에 쥐라 할 수 없습니다. 아이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 어른한테 나무라듯 아이를 나무랄 수 없습니다. 아이한테는 아이 눈높이로 다가서야 하고, 아이한테는 아이 마음밭에 걸맞게 말을 걸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글을 쓰는 사람들이 ‘글을 읽을 사람’ 눈높이에 맞추지 않았으니까, 이 글을 못 알아듣거나 못 받아들이거나 못 느낀다 할 만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누가 이 글을 읽을까’ 하고 헤아린다면, 글이 사뭇 달리 읽히겠지요. 아니, 글을 쓰는 사람들은 ‘글을 읽을 사람’ 눈높이가 아니라 삶높이를 곱씹으면서 ‘글을 읽는 사람 삶높이가 어떠한 자리에서 어떻게 있는가’를 ‘글을 읽는 사람’ 스스로 돌이키면서 깨닫도록 도와야 합니다. 혼자 잘났다고 떠벌이는 글을 쓸 생각이 아니라면, 혼자 똑바로 잘 하면서 살아간다고 내세우는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러나 언제나 걸림돌이 있습니다. 이 걸림돌이란 너무 무섭습니다. 아니, 슬프다고 해야 할까요. “꽃이 참 예뻐요.”라든지 “밥이 참 맛나요.”라든지 “물이 참 맑아요.”라든지 “하늘이 참 파래요.”라든지 “바람이 참 따스해요.”라든지 “소리가 참 고와요.”라든지 “흙이 참 보드라와요.”라 할 때에 알아듣지 못하는 슬픈 마음밭이라는 걸림돌이 있습니다.

 이 꽃이 무슨 꽃인지 꼭 이름을 알아야 하지 않습니다. 이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꼭 이름을 알아야 하지 않습니다. 이름이란 사람이 붙입니다. 꽃이나 나무 스스로 내가 어떤 이름이라고 밝히지 않습니다.

 이름이란 사람이 붙이기 마련이기에, ‘다른 사람이 붙인 이름’을 모르면 ‘내가 느끼는 대로 이름을 붙이’면 됩니다. 누군가 ‘개불알꽃’이라 하든 말든, 이 이름을 알든 모르든, 나는 ‘괭이불알꽃’이라든지 ‘소불알꽃’이라 이름을 붙일 수 있어요. 누군가 ‘제비꽃’이라 하든 말든, 이름을 알든 모르든, 나는 ‘땅보라꽃’이라 이름을 붙일 수 있어요. 땅바닥에 찰싹 달라붙듯 자그맣게 피어나는 보라빛 꽃송이인 만큼, 나는 내가 느끼는 대로 이름을 붙이면 됩니다.

 어떠한 이름이든 내가 느끼며 받아들이는 삶을 내 깜냥껏 슬기로이 곰삭이면서 사랑할 수 있으면 됩니다. 어떠한 글이든 내가 읽으며 깨달은 삶을 내 손으로 사랑하고 내 마음으로 아끼면서 좋아할 수 있으면 됩니다.

 어려운 이웃을 보았을 때, 누군가는 1억 원이라는 돈을 선뜻 내놓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1만 원을 내놓을 수 있고, 누군가는 마음속으로 비손하면서 부디 아픔과 걱정을 잊으면서 웃고 살아가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빨래를 거들 테고, 누군가는 김치 한 접시를 갖다 줄 수 있겠지요.

 만화책 《어시장 삼대째》(대명종,2010) 29권을 읽으면, 205쪽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삼대째 어시장 가게에서 일하는 ‘마사’라는 사람이 어린 날 당신 아버지한테 “아버지, 왜 같은 전갱인데 저렇게 분류를 하는 거야?” 하고 여쭙니다. 마사네 아버님은 “그건 말이다. 같은 전갱이라도 맛이 다르기 때문이지.” 하고 웃으면서 이야기합니다.

 누군가한테는 다 똑같은 전갱이일 테지요. 그런데 누군가한테는 다 똑같은 ‘물고기’입니다. 누군가한테는 다 다른 ‘전쟁이’이고요.

 이오덕 님이 쓴 책을 마흔 가지쯤 읽은 사람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송건호 님이 쓴 책을 스무 가지쯤 읽은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리영희 님이 쓴 책을 열 가지쯤 읽은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김남주 님이 쓴 시집을 열 가지쯤 읽은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권정생 님이 쓴 동화책을 열다섯 가지쯤 읽은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원수 님이 쓴 동화책이나 동시책을 서른 가지쯤 읽은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누군가는 한 권만 읽어도 ‘아무개를 다 알았다’고 하겠지요. 누군가는 이오덕이든 송건호이든 리영희이든 김남주이든 권정생이든 이원수이든 다 똑같은 ‘책’이라 하겠지요. 그리고, 누군가한테는 한 사람이 내놓은 책마다 다 다른 삶과 이야기가 깃들고, 같은 책 한 권일지라도 이 한 권에 깃든 꼭지마다 다 다른 삶과 이야기가 배었다고 느끼겠지요.

 누군가 글을 씁니다. 누군가 글을 읽습니다. 누군가 책을 만듭니다. 누군가 책을 삽니다. 오늘도 해는 뜨고 오늘도 달이 뜨며 오늘도 바람이 불고 오늘도 햇살이 비칩니다. 오늘도 개구리는 알을 깨며 왁왁 울 테며, 오늘도 왜가리는 개구리 먹이를 찾아 이 논 저 논 누빌 테지요.

 아름다운 책은 따로 없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이 아름다운 책입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는 따로 없습니다. 아름다운 삶이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4344.4.30.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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