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 사진 이야기] 12. 대구 대륙서점. 2010.3.17.


 헌책방에는 헌책이 있습니다. 새책방에는 새책이 있습니다. 도서관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헌책방이니 마땅히 헌책을 갖춥니다. 헌책이라는 이름은 사람들이 ‘새로 나온 책’을 ‘새로 장만하여 읽은’ 다음 내놓을 때에 붙습니다. 누군가 ‘새책’을 정갈하게 건사하며 읽고서 내놓았다면, 이 헌책은 ‘정갈한 헌책’이 됩니다. 누군가 새책을 아무렇게나 읽어 함부로 내놓았다면, 이 헌책은 ‘지저분한 헌책’이 됩니다. 헌책방은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를 값싸게 사는 데가 아닙니다. 때때로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를 갖추면서 이 책들을 값싸게 팔기도 하겠지요. 그렇지만, 헌책방은 ‘가슴으로 아로새길 만하다고 여기는 묻힌 책’을 갈무리하는 몫을 맡습니다. 가슴으로 아로새겨서 오래오래 되새길 만하다고 여기는 책을 갈무리하고, 이 책을 고맙게 만나는 데가 헌책방입니다. 세월이라는 더께가 앉은 책이니 먼지가 제법 먹고 종이가 퍽 바스라지기도 할 테지요. 늙은 사람 주름살은 나이값이요 나이그릇이듯, 헌책 누런 종이나 먼지는 삶값이요 마음그릇입니다. 늙은 사람을 마주할 때에 주름살을 읽지 않고, 이녁이 살아낸 기나긴 나날에 걸친 슬기를 읽습니다. 헌책을 마주할 때에 겉껍데기나 먼지를 읽지 않고, 누렇게 바랜 종이에 깃든 아름다운 넋과 꿈을 읽습니다. (4344.9.17.흙.ㅎㄲㅅㄱ)


- 2010.3.17. 대구 대륙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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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9-17 16:11   좋아요 0 | URL
계속 벼르다가 일산 끄트머리에 있는 헌책방을
추석 때 드디어 들렀답니다. 먼지내 풀풀 나는 곳에서 두시간을 버티며
이책저책 다 디비고 보고 향내 맡는 그 기분이 얼마나 좋던지요, 결국
두 손 가득 책을 들고 나왔다지요........ ㅎㅎ

홍대 살 때, 거기도 굉장히 오랜 헌책방이 있었는데 없어진 소식에 맘 아팠어요.

숲노래 2011-09-17 16:53   좋아요 0 | URL
매장으로 가는 발길이 줄고,
매장으로 가더라도 '다 다른(다양한) 책'보다는
그때그때 실용으로 삼을 책에 더 눈길이 가는 세상 흐름이니까,
새책방도 동네책방은 힘들고 대형서점만 살아남을 수 있듯,
헌책방은 아주 힘들어요.

내 동네 어디 한켠에 헌책방이 있을 때에
고마이 아끼면서 즐겨 찾아가야 해요.

그래도 홍대 신촌 둘레에는 좋은 헌책방이 많아요.
새로 생기는 곳도 있고요~ ^^

카스피 2011-09-18 22:50   좋아요 0 | URL
대륙서점이라 예전에 대구에 갔을때 헌책방 몇군데를 돌은 기억이 나는군요.이거 혹 대구 시청 뒷골목에 있던 헌책방인가요??

숲노래 2011-09-19 03:13   좋아요 0 | URL
대구시청 뒷골목이라 할는지 알 수 없으나,
대구역과 동대구역 사이
큰길가에 있습니다.

카스피 2011-09-19 08:37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럼 맞는것 같기도 하네요^^ 또 언제 가볼지 모르겠군요.
 



 달빛 달리기


 아침 일찍 안개를 뚫고 마실을 나간다. 안개는 멧골집에서 멀어질수록 옅어진다. 면내에 닿을 무렵 안개는 거의 없다. 시외버스를 타고 면내를 벗어날 때에는 안개란 아예 없다.

 저녁 늦게 달빛을 느끼며 마실길에서 돌아온다. 서울에서 벗어날 무렵부터 저 먼 어딘가에 달이 떴을 테지만, 수없이 켜진 수많은 불빛에 가릴 뿐더러, 자동차 불빛이 눈부셔 달빛을 찾거나 느낄 수 없다. 시외버스가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로 접어들 때에도 아직 달빛을 찾거나 느끼지 못한다. 드디어 읍내에서 버스를 내려 자전거를 타니 달이 보인다. 그런데, 읍내에서는 달이 보이기는 하나, 달빛을 찾거나 느끼지 못한다. 읍내에 몇 없는 거리등불에 가리고, 가게마다 내뿜는 전기불빛에 눌린다.

 마을 어귀로 접어들 무렵부터 비로소 달빛을 느낀다. 논둑길은 오직 달빛에 기대어 자전거를 달린다. 저기 멀리, 또는 저기 앞에, 아버지를 기다리는 작은 집 불빛이 보인다. 달빛이 내려앉은 깜깜한 멧자락 한켠 작은 보금자리 작은 불빛을 바라보면서 논둑길을 마저 달린다.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는다. (4344.9.16.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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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과 빨래와 책과


 작은 들꽃을 꺾어서 내민다. “아버지, 꽃 예뻐요?” “네, 꽃 예뻐요.” 첫째 아이 작은 손에 쥔 작은 들꽃은 꺾였으니까 얼마 못 살고 시들겠지. 들판에 널린 들꽃이니 한 송이쯤 꺾는다고 달라질 일이 없다고 여길 수 있고, 작은 들꽃 한 송이라도 눈으로만 바라보자 할 수 있으며, 이 들꽃은 풀씨를 많이 퍼뜨려 이듬해에 또다시 흐드러지게 핀다 할 수 있다. 어느 쪽으로든 고마운 목숨이 우리 살림집 둘레에서 피고 지며 살아간다.

 아버지는 새벽부터 신나게 빨래를 한다. 한가위를 마무리지은 다음 집안을 치우고 빨래를 하자며 겨우겨우 자리를 잡는다. 그렇지만 아직 새 보금자리로 옮기지 못하기 때문에 한쪽에 묶어서 쌓은 짐이 눈에 치인다. 얼른 이 짐을 나르고 풀어서 깔끔하게 집살림을 일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침 빨래를 마치고 나서 아이를 부른다. “벼리야, 잘 있어.” 아이는 이 말에 부리나케 달려나온다. 저도 마당으로 나오겠단다. 아버지는 모르는 척 밖으로 나와서 기저귀를 넌다. 첫째 아이는 “나도, 나도.” 하고 말하면서 빨래집게를 한손에 하나씩 쥔다. 아버지한테 내민다. 이윽고 기저귀도 한 장을 집어서 내민다. 아버지는 말없이 받는다. 이러다가 그만 아이 치마 한 벌이랑 기저귀 한 장을 놓쳐 마당 흙바닥에 떨어진다. 저런. “벼리야, 떨어뜨리면 안 되지. 하나씩 집어야지 왜 욕심을 부리니.” 아이는 떨어진 빨래를 줍는다. 주워서 아버지가 하듯 탕탕 턴다. 아직 네 살이라 힘이 실리지 못하나 제법 모양이 난다. 마지막 빨래를 다 널고서 “고맙습니다.” 하고 아이한테 인사한다.

 한낮이 지나고 바깥바람이 시원한 때에 돗자리를 들고 마당으로 나온다. 바깥이 시원하기에 나왔지만, 시원한 바깥에는 모기가 달라붙는다. 하는 수 없이 얼마 못 있고 다시 집으로 들어온다. 마당에서 숲을 느끼고 풀벌레와 함께하면서 파란하늘을 등에 지고 책을 읽으면 더없이 싱그러이 이야기 한 자락 스며든다고 느낀다. 책이란, 이렇게 숲과 바람과 햇살을 먹으면서 쓴 글로 엮어, 숲과 바람과 햇살을 먹으면서 읽을 때에 참다이 마음밥이 될 수 있을까. 오늘 하루도 새롭게 흐르다가 새롭게 끝을 맺는다. (4344.9.14.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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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름 사이로 달


 저녁부터 새벽까지 보름달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다. 구름이 잔뜩 끼었기 때문에 보름달 환한 빛살이 멧골자락 구석구석으로 포근히 내려앉지는 못하지만, 잔뜩 낀 구름인데도 마당이 퍽 밝다 싶도록 환하게 비춘다. 며칠 내내 비가 뿌리거나 찌푸렸지만, 이렇게 동그랗고 마알간 모습을 살며시 보여주고는 한가위를 마무리짓는다. 돌이켜보면, 꼭 한가위가 아니더라도 보름달은 다달이 한 차례 찾아든다. 설이나 한가위 무렵 보름달이 아니더라도 다달이 보름달을 마주할 수 있다. 가장 빛나는 보름달이라서 가장 아름다운 보름달은 아니요, 가장 덜 밝다는 보름달이라서 심심하게 지나칠 만한 보름달이 아니다. 나는 한 해 내내 보름달과 초승달과 반달을 모두 즐기면서 한가위 보름달도 한가위 보름달대로 고맙게 올려다보면서 좋았다. (4344.9.14.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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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읽기랑 사진찍기


 아버지는 책을 읽고 나서 책을 사진으로 찍는다. 그림책이나 만화책은 속알맹이를 몇 군데쯤 사진으로 찍는다. 사진으로 찍고 나면 이 사진들을 책느낌글에 붙여 누리집에 함께 띄운다. 어머니가 책을 읽고 아버지가 책을 읽으니, 아이도 곁에서 책을 읽는다. 아버지가 책을 앞에 놓고 한두 쪽씩 넘기면서 사진을 찍는 모습을 으레 바라본 아이는, 어느새 아버지가 하듯 아이 그림책을 앞에 놓고서 사진을 찍는다. 어느 모로 본다면 대견스러운 모습일 테지만, 다른 모로 본다면 어버이가 아이하고 함께 살아가면서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들려주며 무엇을 함께하느냐에 따라 서로서로 삶이 달라질밖에 없구나 싶을 모습이다. 어버이가 좋아하거나 즐기지만, 아직 아이한테는 이르거나 좋지 못하다 한다면, 이러한 ‘어버이가 좋아하거나 즐기는 일’은 어버이한테 얼마나 좋거나 즐거울 일이 될까. 전자파가 어마어마하게 나오기에 아이들한테 손전화뿐 아니라 요즘 새로 나오는 무슨 전자제품을 만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하지만, 막상 어른들은 손전화뿐 아니라 새로 나오는 무슨 전자제품을 신나게 사들여 오랫동안 만지작거린다. 제아무리 석유 걱정 지구자원 걱정 환경오염 걱정을 한다고 입으로 떠들어 보았자, 어른들은 자가용 굴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타야 할 만큼 타는 자가용이 아니라, 그냥 타는 자가용이 되고 만다.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버스를 타려고 마음을 기울이는 어른이 아주 드물다. 이런 어른 곁에서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은 무엇을 보고 느끼며 받아들일까.

 옆지기와 나는 생각한다. 우리 아이들한테 무엇을 물려주고 무엇을 보여주며 무엇을 함께해야 즐거우면서 아름다울까 하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앞으로 어디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때에 참다우면서 빛날까 하고 헤아린다. 아이들 몸과 마음뿐 아니라, 아이들하고 함께 지내는 어른들 또한 몸과 마음이 어느 때 어느 곳 어느 보금자리에서 싱그러우면서 사랑스러울까 하고 가늠한다.

 어버이는 땅을 마련해야 한다. 어버이는 손수 일굴 기름진 흙으로 이루어진 땅을 마련해야 한다. 어버이는 바다나 냇물·멧자락·들판·숲이 고루 어우러진 살가운 땅을 마련해야 한다. 어버이부터 이곳에서 살림을 예쁘게 돌보아야 한다. 어버이가 돌보는 살가운 터전을 아이들이 기쁘게 물려받아 아이들이 무럭무럭 커서 저희 아이들을 낳고 살아가고 싶을 만큼 예쁜 보금자리를 보살펴야 한다.

 아이가 읽을 책은 숲이요, 아이가 찍을 사진은 다람쥐이다. 아이가 읽을 책은 배추씨요, 아이가 찍을 사진은 배추잎이다. 아이가 읽을 책은 호미요, 아이가 찍을 사진은 고랑이다. 아이가 읽을 책은 바람이요, 아이가 찍을 사진은 햇살이다. (4344.9.13.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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