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찬히 살피는 손길

 


  어느 책 하나 판이 끊겨 새책방 책시렁에서 사라져도 서운하지 않아요. 애틋하게 여겨 찬찬히 살피며 읽을 손길은 헌책방으로 찾아가서 따사롭게 품에 안을 테니까요. 마음으로 쓰다듬어 마음에 담는 책이에요. 마음을 열기에 눈을 뜨고 바라볼 수 있어요. 마음이 있기에 가슴에 사랑 심으며 이야기를 아로새길 수 있어요. (4345.8.3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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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

 


  새 태풍이 찾아든다는 깊은 밤에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깬다. 아이들이 새벽 일찍 부산스레 조잘거리는 소리에 나도 함께 일어난다. 나는 훨씬 이른 새벽에 홀로 조용히 일어나 글을 쓰다가 잠들었기에, 동이 트는 이른 새벽에 아이들이 부산스레 떠드는 소리를 귓결로 듣다가, 두 아이를 차근차근 달래며 노래를 부른다. 이원수 님이 빚은 시에 백창우 님이 가락을 붙인 노래를 잇달아 부른다. 이윽고 아이들과 어버이 모두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왜 고졸 학력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나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잘 안 보일까. 왜 사람들은 책에 이녁 ‘대학 졸업 사항’을 밝혀 적을까.


  책을 써서 내놓는 사람이 적을 발자국이라면 이녁이 사랑하거나 생각하거나 꿈꾸는 이야기일 때에 아름다우리라 느낀다. 책을 써서 사람들 앞에 선보이는 사람이 밝힐 발자취라면 이녁이 살아가며 품은 뜻이나 보람이나 넋일 때에 즐거우리라 느낀다.


  따지고 보면, 어느 대학교를 마쳤다 하는 이야기만큼 어느 고등학교나 어느 중학교를 마쳤다 하는 이야기는 부질없다. 학교를 다닌 사람만 책을 쓸 수 있는가. 학교 다녀서 받은 졸업장이 글을 쓰는 밑거름이나 도움이가 되었을까. 어떤 마음이 되어 글을 쓰고, 어떤 꿈을 찾아 그림을 그리며, 어떤 사랑을 나누려 사진을 찍는가 하는 이야기를 책날개에 곱게 적바림한다면 참 기쁘겠다고 느낀다. 생각을 빛내며 글을 빛내고, 꿈을 밝히며 그림을 밝힌다. 이야기를 사랑하며 사진을 사랑한다. 책을 읽는 사람은 삶을 읽고, 책을 쓰는 사람은 삶을 쓴다. 책과 사람과 삶이 서로 고운 빛살로 얼크러지는 무지개가 된다면 참으로 좋겠다. (4345.8.30.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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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바람

 


  들바람 부는 들판에 섭니다. 나는 들바람을 마시고 싶어 들 앞에 섭니다. 거세거나 드세거나 모질다 하는 커다란 비바람이 들을 휘젓습니다. 어디에서는 지붕을 날리고 비닐집을 뜯는다 하는데, 어디에서는 자동차도 날리고 멧자락을 무너뜨리기도 한다는데, 나는 이 들바람이 볏포기를 눕히거나 꺾지는 못하고, 그저 벼춤을 추도록 하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바다에서는 파란 물결이 일렁입니다. 들판에서는 푸른 물결이 일렁입니다. 큰 비바람이 한 차례 훑으며 볏포기를 이리저리 흔들어 춤추도록 하니까, 볏포기한테 달라붙어 볏포기를 갉아먹는 벌레를 떨굴 수 있을까요. 그러고 보니, 어릴 적 외할머니나 외삼촌 이야기가 얼핏 떠오릅니다. 충청남도 시골마을 어르신들은 ‘태풍이 한두 차례 지나가야 벼가 잘 익는다’고 했어요. 태풍이 안 훑는 논은 벌레가 많이 들어 힘들다고 했어요.


  요즈음에는 태풍이 한두 차례 찾아와서 스윽 훑고 지나가기를 바라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들판에 풀약을 치면서 태풍을 반기지 않습니다. 태풍이 아니더라도 조금 거세거나 드센 바람이 불어도 모두들 못마땅해 합니다.


  나는 바람을 더 좋아하지 않으나 바람을 덜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는 바람을 못마땅해 하지 않으며, 바람더러 어서 오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기에, 부는 바람을 쐬면서 들판에 섭니다. 바람이 멎기에, 고요한 저녁을 가로지르는 풀벌레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들바람 불어 푸르게 푸르게 푸르게 노래하는 들판을 오래도록 바라봅니다. (4345.8.30.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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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풍이 지난 끝

 


  태풍이 지난 끝, 맨 먼저 우리 집 뒤꼍 뽕나무 한 그루 뿌리가 뽑혔다. 3/4쯤 뽑힌 뿌리로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모르지만, 둘레 땅을 파서 뿌리를 흙으로 덮어 보았다. 뽕나무가 기운차게 누운 채 살아남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태풍은 이웃집이랑 맞닿은 시멘트블록담을 허물었다. 우리 이웃집은 텅 빈 집. 퍽 오래 비었기에, 블록담이 허물어지든 말든 대수롭지는 않다. 다만, 이제 바깥에서 우리 집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며칠 뒤 다시 거센 비바람이 온다면 한동안 그대로 두었다가 다시 쌓아야지 싶다. 그런데, 돌로 쌓은 울타리는 무너진 데가 없으나, 시멘트블록담은 이렇게 무너지는구나.


  부엌 쪽 천장에서 흙이 조금 떨어졌다. 어느 마을에서는 지붕이 날아가기도 했단다. 지붕을 얹은 지 퍽 오래되었으면 다시 단단히 여미어야 한다고 느낀다. 우리 집은 지붕을 새로 얹었으니 흙만 조금 떨어지고 그쳤다.


  우리 보금자리 있는 동백마을, 이웃한 신기마을·원산마을·지정마을·호덕마을, 이렇게 다섯 마을이 나란히 전기가 나갔다. 전기가 나가니, 마을 샘가에 할머니 할아버지 들이 물을 긷고 설거지를 하러 나오신다. 모처럼 샘가가 복닥복닥하다. 물이 안 나오기 때문에 모든 빨래를 하지는 않고, 작은아이 바지랑 집식구 속옷만 틈틈이 몇 점 빨래한다.


  전기가 나간 채 하룻밤을 지내고 보니 밤이 참 좋다. 마을에 불빛 하나 없으니 달과 하늘이 훨씬 까맣고 한결 밝다. 여느 때에도 불빛이랑 고샅 사이사이 몇 점 있는 등불이었지만, 이 등불조차 없으니 그야말로 시골 밤이로구나 싶다. 2012년 8월 29일 낮 한 시, 전기가 다시 들어온다. 내 왼손 가운데손가락 생채기가 아직 아물지 않아 빨래는 빨래기계한테 맡긴다. (4345.8.2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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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2-08-29 22:48   좋아요 0 | URL
더 큰 피해 없으셔서 다행이에요
손빨래 하시는 아빠는 정말 대단하셔요

숲노래 2012-08-30 00:04   좋아요 0 | URL
저희 식구는 '피해'를 생각하지 않으니 피해는 찾아오지 않아요.
^^;

아무튼, 손빨래나 온갖 집안일을 다 하는 아버지 노릇은...
하나도 힘들지 않고
조금도 대단하지 않답니다.

집안을 사랑으로 이끌 때에만
가장 아름답고 좋은 삶이라고 느껴요~ ^^
 


 바라는 삶

 


  아이들은 웃음을 바라고 생각하니까, 스스로 웃고 둘레에 웃음을 퍼뜨린다. 스스로 싫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스스로 삶을 싫어할 뿐 아니라 둘레에 싫다 하는 기운을 퍼뜨린다. 스스로 안 된다고 여기는 사람은, 스스로 어떠한 일도 안 된다고 흐름을 가로막는데다가 둘레에도 아무 일이 안 되도록 하는 기운을 퍼뜨린다.


  사랑을 바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사랑하면서 이웃과 동무한테 사랑스러운 기운을 퍼뜨린다. 꿈을 바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스스로 이루고 싶은 꿈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면서 이웃과 동무한테 저마다 이루고픈 꿈으로 나아가도록 기운을 북돋운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어디에 선 사람일까. (4345.8.27.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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