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맛

 


  내가 어릴 적에는 우유이든 사이다이든 술이든 물이든 모두 병에 담겼다. 학교에서 소풍을 간다 할 적에도 사이다 유리병을 가방에 넣고 가서는, 다 마시고 빈병을 집으로 가져왔다.


  플라스틱에 물이나 마실거리가 담긴 때가 언제였을까. 맨 처음 플라스틱에 담긴 무언가를 마셨을 적, 나는 몹시 나쁜 냄새를 느꼈다. 어떻게 이런 데에 마실거리를 담아서 사람들한테 마시라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 느낌은 한결같다. 어쩔 수 없이 페트병 물을 마셔야 할 때면, 물맛보다 플라스틱맛을 느낀다. 페트병 맥주가 처음 나올 적, 적잖은 사람들은 유리병 아닌 페트병을 가방에 넣으면 무게가 가볍다며 반갑게 여겼지만, 나는 술맛이 나쁘다고 느껴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이러한 느낌은 오늘날에도 똑같다. 페트병에 담긴 술을 마시면 술보다 페트병 냄새가 먼저 훅 끼친다.


  집에서 아이들한테 물을 마시게 할 때에도 이 느낌은 똑같다. 나부터 페트병 플라스틱 맛을 느끼는데, 아이들이 페트병을 입에 물고 마시도록 할 수 없다. 바깥으로 마실을 할 때에도 같은 마음이다. 처음에는 유리병을 들고 다니며 물을 마시게 했고, 요사이에는 스텐 물병을 가지고 다닌다.


  그런데 바깥에서 여러 날 돌아다녀야 할 때면, 어쩌는 수 없이 ‘집물’이 아닌 ‘바깥물’을 마셔야 하는데, 바깥물을 마실 적에는 수도관을 타고 흐르는 냄새를 느낀다. 먹는샘물을 사다 마시더라도 집물처럼 시원하거나 개운한 느낌을 받지는 못한다. 왜일까. 사다 마시는 먹는샘물도 우리 집물처럼 땅밑에서 맑게 흐르던 물일 텐데, 페트병에 담긴 먹는샘물에서는 우리 집물처럼 맑으며 시원스러운 느낌이 안 날까. 흐르는 물이 아닌 갇힌 물이 되었기 때문일까. 언제나 흙과 풀과 나무와 바람과 햇살이랑 얼크러지는 물이 아닌, 공장에서 플라스틱 통에 꽁꽁 가둔 물이기 때문일까. (4345.10.5.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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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씩씩한 아이들

 


  마실 가는 길에 큰아이더러 마을 어귀 샘가에서 낯을 씻으라고 이야기한다. 큰아이는 “네!” 하고 씩씩하게 외치며 달린다. 곧이어 작은아이가 큰아이 뒤를 따른다. 두 시간에 한 차례 지나가는 군내버스도 뜸하지만, 여느 때 여느 자동차도 거의 지날 일 없어, 마을 어귀 앞 찻길이 그리 걱정스럽지 않다. 큰아이 작은아이 모두 시골마을 시골집에서는 누구보다 씩씩하고 튼튼하다. 자동차를 근심하거나 살필 일이 없으니 씩씩할 수 있다. 아이들이 거리껴 하거나 두렵게 여길 걸림돌이 없으니 튼튼할 수 있다.


  아이들이 살아가기에 마땅한 터라면 어른들 또한 오순도순 즐겁게 살아가기에 마땅한 터가 된다고 느낀다.


  곰곰이 돌아본다. 나한테 아이들이 찾아오기 앞서도 이 같은 대목을 알았을까. 나 혼자 살아가던 때에도 이러한 대목을 슬기롭게 헤아렸을까. 아이들이 나한테 찾아오면서 조금 더 깊이 돌아보거나 한결 넓게 생각할 수 있을까. 모두 아는 이야기였으나 오래도록 잠들었을 뿐일까. 무엇을 알 때에 참으로 기쁜 앎이요, 무엇을 헤아릴 때에 더없이 사랑스러운 생각이라 할 만할까.


  찻길이 생긴 지 얼마 안 된다. 자동차가 드넓은 찻길을 씽씽 달린 지 얼마 안 된다. 사람은 사람으로 살아갈 뿐이었지, 자동차에 기대거나 길들여진 목숨이 아니었다. 사람들 누구나 씩씩한 다리로 씩씩한 삶을 꾸렸다. 사람들 모두 튼튼한 몸으로 튼튼한 마음을 아꼈다.


  씩씩한 아이들이듯 씩씩한 어버이로 살아가는 길을 생각한다. 나 또한 튼튼한 몸과 마음이 되어 하루를 누리자고 생각한다. 아이들아, 마음껏 뛰렴. 나도 너희하고 나란히 마음껏 뛰며 살아갈게. (4345.10.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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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는 옷

 


  늘 입는 대로 입는 옷이다. 스스로 살아가는 대로 입는 옷이다. 나는 다른 사람 눈치를 살피며 옷을 입지 않는다. 나는 내가 살아가는 결에 맞추어 옷을 입는다. 다른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니까 이렇게 옷을 입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저렇게 바라보기를 바라며 저렇게 옷을 입지 않는다.


  나는 처음부터 고무신을 신지는 않았다. 다만, 양말과 운동신을 신으며 살아가던 때에는 발바닥에 땀이 많이 차고 힘들다고 느꼈는데, 서른 살짝 넘은 나이에 시골에서 처음 살림을 꾸리면서 고무신을 한 번 신고 보니, 내 몸에 참 맞는구나 싶어, 이때부터 고무신을 신는다. 게다가 고무신 한 켤레 값이 되게 싸다. 신기에도 벗기에도 가장 낫고, 고무신 차림은 발을 퍽 자주 씻고 해바라기를 시킬 수 있으니 매우 마음에 든다.


  혼자 살아가던 때에는 언제나 책방마실을 다녔기에 가방이 큼지막하고 무거워 단출한 옷차림이었다. 깡똥바지에 민소매 웃옷을 입었다. 아이들을 낳고 나서는 아이들 옷가지를 늘 챙기며 다니니, 가방에 책을 넣지 않아도 으레 큼지막하고 무겁다 싶은 가방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자가용을 안 굴리고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몰거나 군내버스를 타며 돌아다니니까, 내 차림새는 예나 이제나 똑같다.


  고마운 이웃한테서 아이들 옷가지를 얻어 물려입힌다. 이런저런 행사 자리에서 옷을 얻어 나와 옆지기 옷가지를 삼는다. 옷을 장만하는 데에 돈을 거의 쓰지 않는다. 가만히 보면, 내 살림살이에서 어떤 옷을 어떻게 입는가 하는 대목은 하나도 대수롭지 않으니까, 따로 옷값을 마련하지 않고, 옷값을 쓸 일이 없으며, 옷차림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아름답게 살아갈 날을 헤아리고, 즐겁게 누릴 하루를 돌아본다. 웃고 떠들 삶을 곱씹고, 사랑을 꽃피우는 꿈을 가눈다.


  내 마음에 따라 입는 옷이다. 내 삶에 따라 걸치는 옷가지이다. 내 마음은 맑은 햇살을 바라본다. (4345.10.1.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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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을 밀어내는 아파트

 


  사람들이 도시를 지으려고 숲을 밀어 아파트를 세운다. 사람들이 도시를 넓히려고 숲을 더 밀어 아파트를 더 세운다. 처음에는 숲이던 곳이 어느새 아파트 꾸러미가 된다. 온갖 모양 아파트로 무리를 이룬다. 널따란 숲이 이제 손바닥만큼만 남는다. 그나마 남던 손바닥 숲 또한 머잖아 새로운 아파트로 바뀌고, 널찍한 찻길이 된다.


  사람들이 도시를 짓고 아파트를 올리면서 나무가 몽땅 사라진다. 나무 없이 휑뎅그렁한 길가에 어린 나무를 몇 그루 줄줄이 심는다. 나무가 스스로 자라며 숲이 우거지던 곳인데, 따로 돈을 들여 나무를 심어야 한다. 스무 해쯤 지나야 겨우 나무그늘이 생긴다. 그러나 스무 해쯤 지나고 서른 해쯤 되고 나면, 아파트라고 하는 시멘트집은 목숨을 다해 헐어야 한단다. 이에 따라 겨우 나무그늘 조금 생기던 나무는 목숨 다한 시멘트 아파트하고 나란히 헐리고 만다. 조금 키 자란 나무를 캐서 옮기는 돈은 비싸고, 어린 나무를 사다 심는 돈은 싸다고 하니까.


  곧, 아파트를 지으려는 데에는 쉼터가 없다. 숲을 밀어 아파트를 지었으니 쉼터가 있을 수 없다. 도시에서는 숲이 사라지고 쉼터가 없기에, 새삼스레 돈을 들이고 땅을 비싸게 되사들여 공원을 지어야 한다. 새삼스레 돈을 들이고 땅을 비싸게 되사들여 짓는 공원에는 나무그늘이 거의 없다. 그렇다고 숲바람이나 나무바람이나 풀바람이나 꽃바람을 넉넉히 쐴 만한 자리가 되지는 않는다. 운동기가 몇 가지를 놓고, 걷거나 달릴 좁다란 길 몇 갈래 낸 터무니없이 작달만한 풀섶이 이루어진다. 애써 짓는 공원에서조차 흙을 밟지 못하고 흙을 만지지 못하며 흙을 바라보지 못하기 일쑤이다.


  곰곰이 돌아보면, 맨 처음 숲을 밀 적부터 도시와 아파트에서는 푸른 숨결을 죽인 셈이다. 도시사람과 아파트사람 스스로 숲을 등진 셈이다. 도시에서는 푸른 숨결이 없어도 살아갈 만하다고 여긴 셈이다. 그런데, 숲이 없이 밥을 먹을 수 있을까. 숲과 들과 메와 냇물과 바다를 밀어 없애고도 밥을 먹을 수 있을까. (4345.10.1.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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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이 넘어간 새벽하늘 별빛

 


  해가 뉘엿뉘엿 기우는 저녁부터 달빛이 밝다. 한가위를 앞둔 달이로구나 싶도록, 보름달이 아니어도 참 환하다. 그런데 이 달빛이란 달이 내는 빛이 아니라, 해가 빚어 내보내는 빛을 받아 지구별로 되비치면서 이루는 빛이겠지. 환하게 비추는 달빛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달에 아로새겨진 무늬를 찬찬히 읽어 본다. 망원경이 없어도 이럭저럭 볼 수 있는 만큼 달무늬를 읽는다.


  아이들 잠들고 나도 잠든다. 새벽녘에 깬다. 작은아이 바지와 기저귀를 간다. 나도 오줌이 마렵다. 마당으로 나온다. 풀숲이 된 빈터에 쉬를 눈다. 그동안 달은 넘어갔고, 아직 깜깜한 새벽하늘은 온통 별빛이다.


  별이 참 많구나. 아니, 별이 참 많이 보이는구나. 달이 넘어가고 나니 별이 훨씬 많이 보이는구나. 누군가는 이 별 저 별 엮어 별자리를 그리기도 하는데, 별자리로 그리는 별 말고도 훨씬 더 많은 별이 하늘에 있지 않을까. 왜 어느 별은 별자리에 들어가고, 왜 어느 별은 별자리에 안 들어갈까.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별이 아주 많을 텐데, 이들 별은 어떤 별일까.


  지구 바깥에서 지구를 바라보면, 지구라는 별은 어떤 별자리처럼 보일까. 다른 별에서 살아가는 목숨은 지구를 어떤 별자리로 그릴까. 어쩌면 다른 별 목숨은 지구라는 별을 굳이 별자리에 안 넣을는지 모른다. 지구별 사람이 어느 별은 별자리에 넣고 어느 별은 별자리에 안 넣듯, 지구라는 별도 똑같이 대접을 받을 수 있겠지.


  저 먼 별에는 어떤 삶이 이루어질까. 내가 발을 디딘 이 지구별에는 저마다 어떤 삶을 이룰까. 저 먼 별빛은 지구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내가 발을 디딘 이 지구별에서 일구는 내 삶은 저 먼 별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4345.9.29.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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