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랑 놀자 172] 자장얘기



  어머니나 아버지는, 때로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아기를 재우려고 보드라우면서 따사로운 목소리를 뽑아서 노래를 부릅니다. “자장자장 잘도 자네” 하면서 부르는 이 노래는 ‘자장노래’라고 해요. 노래는 아니지만 같은 말을 나즈막하면서 살가이 되풀이하며 재우려 할 적에는 ‘자장타령’을 한다고 해요. 아기를 재우려는 어버이는 때때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지요. 아이가 이야기 하나만 듣고서 자겠다고 하면 어버이는 잠자리맡에서 이야기를 조곤조곤 나긋나긋 속삭입니다. 잠자리에서 들려주는 이런 이야기는 ‘자장이야기’나 ‘자장얘기’예요. 잠자리에 들면서 오늘 하루를 되새기고 새로운 하루를 꿈꾸려는 뜻으로 몇 마디 말을 읊을 수 있어요. 이를테면 “나는 늘 언제 어디에서나 눈부시게 튼튼하지” 같은 말을 읊으면서 참말 나한테는 아픈 데가 없이 씩씩하고 튼튼하기만 하다고 다짐하듯이 몇 마디 말을 읊으며 고요히 잠자리에 들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즐겁게 놀았고, 새 하루도 재미나게 놀겠어요” 같은 말을 읊을 수도 있을 테고요. 이런 말은 ‘자장말’이 됩니다. 4348.12.25.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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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93 빛, 빛깔, 빛결, 빛살



  지구별에서 빛은 해님과 함께 나타납니다. 해가 뜨면서 빛이 나타나는데, 빛은 볕과 함께 나타납니다. 이리하여 ‘햇빛·햇볕’을 말합니다. 햇빛이 퍼질 적에는 아주 빠르게 퍼집니다. 햇빛이 퍼지는 줄기, 이를테면 빛줄기(햇빛줄기)는 따로 ‘햇살’이라 합니다.


  우리는 ‘빛의 삼원색’이나 ‘색의 삼원색’을 말하면서 ‘빛’과 ‘색(色)’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빛’과 ‘색’을 제대로 갈라서 쓰는 사람이 드물고, 왜 ‘삼원색’을 ‘빛’과 ‘색’으로 나누는가를 알려 하는 사람이 드물며, 이렇게 가르는 잣대가 맞는지 살피는 사람이 드뭅니다.


  한국말사전에서 ‘색(色)’을 찾아보면 “빛을 흡수하고 반사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사물의 밝고 어두움이나 빨강, 파랑, 노랑 따위의 물리적 현상”으로 풀이합니다. ‘색(色)깔’을 찾아보면, “= 빛깔”로 풀이합니다. ‘빛깔’을 찾아보면 “물체가 빛을 받을 때 빛의 파장에 따라 그 거죽에 나타나는 특유한 빛”으로 풀이합니다. ‘빛’을 찾아보면 “1. 시각 신경을 자극하여 물체를 볼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전자기파 2. 물체가 광선을 흡수 또는 반사하여 나타내는 빛깔”로 풀이합니다.


  한국말사전에 나오는 말풀이만 살피더라도 ‘色’이나 ‘色깔’이라는 낱말은 뜬금없거나 뚱딴지 같은 줄 알 만합니다. 이런 한자말이나 엉터리 낱말은 쓸 까닭이 없습니다. ‘빛’에서 ‘빛깔’이 나옵니다. ‘빛’은 온누리 모든 것을 알아보도록 이끄는 ‘전자기파’이고, ‘빛깔’은 빛을 받으면서 드러나는 알록달록한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처음부터 이 대목을 제대로 가르고 살펴서 말해야 했습니다. 어설프게 ‘色깔’ 같은 낱말을 억지로 짓지 말아야 했고, ‘色’이라는 외국말(한자말)을 한국말로 똑똑히 옮겨서 써야 했습니다.


  ‘빛살’은 “빛 + 살”이면서, 빛이 흐르는 줄기(빛줄기)를 나타냅니다. 화살이나 물살처럼, 빛살입니다. ‘빛깔’은 “빛 + 깔”이면서, 빛이 이루는 모습(꼴)을 나타냅니다. 맛깔이나 때깔처럼, 빛깔입니다.


  ‘빛’과 ‘빛깔’이라는 두 가지 낱말만 써야 합니다. 괜히 ‘色’과 ‘色깔’이라는 낱말을 섞으니 뒤죽박죽이 되고 말아요. 그러면 ‘색종이’나 ‘색연필’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빛종이·빛깔종이’나 ‘빛연필·빛깔연필’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사람들 입과 손과 귀에 많이 굳었다 하더라도, 어른들 입과 손과 귀에 굳었을 뿐입니다. 아이들 입과 손과 귀에 굳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생각이 굳어서 딱딱하고 메마른 어른’ 틀에 맞추어 말을 뒤트는 짓을 그쳐야 합니다. 우리는 ‘생각이 열린 아이’ 삶에 맞추어 말을 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말을 바르고 아름답게 쓰자는 뜻보다 ‘삶을 제대로 세우고 슬기롭게 갈고닦아 넋을 제대로 다스리자’는 뜻으로 낱말을 하나하나 제대로 살펴서 제대로 쓰는 길을 열어야 합니다.


  이리하여, 우리가 쓸 말은 ‘빛의 삼원색’이나 ‘색의 삼원색’이 아닙니다. ‘빛’과 ‘빛깔’로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써야 맞지만, 자칫 헷갈릴 수 있으니, ‘빛’을 ‘빛살’로 바꾸어서 쓸 수 있어요.


  그러니까, ‘빛의 삼원색’이 아닙니다. ‘세 바탕빛살’이며 ‘세 빛살’이고 ‘빛살바탕’입니다. ‘세 빛살’은 ‘빨강·푸름·파랑’입니다. 빨강은 “온 목숨”을 나타냅니다. 온 목숨은 “따뜻하게 흐르는 물”인 피를 품습니다. 이러한 물(피, 불물)을 몸에 담은 목숨은 ‘사람’과 ‘열매(알)’입니다. 모든 열매가 빨간 빛은 아니지만, 빨강이라는 빛으로 목숨을 이야기합니다. 푸름은 “풀과 나무와 숲”을 나타냅니다. 나뭇줄기는 흙빛을 닮으나, 나무에 매다는 잎이 풀과 같은 빛이고, 풀과 나무가 어우러진 숲도 푸른 빛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파랑은 “바람·하늘과 물·바다”를 나타냅니다. 하늘빛은 파랑이고, 이 파랑이 바다빛이 됩니다. 물은 하늘을 닮아서 파란 빛이 되기에, 바다와 물은 파랑이라는 얼거리에서 하나입니다. 


  ‘적·녹·청’처럼 외마디를 따서 일컫기도 하는데, 외마디를 제대로 따려면 ‘빨·푸·파’라 해야지요.


  곧, ‘색의 삼원색’이 아닙니다. ‘세 바탕빛깔’이며 ‘세 빛깔’이고 ‘빛깔바탕’입니다. ‘세 빛깔’은 ‘빨강·파랑·노랑’입니다. 빨강은 목숨을 따뜻하게 안는 빛깔입니다. ‘핏빛’이나 ‘열매빛(알빛)’이라 할 수 있습니다. 파랑은 바람과 하늘을 상큼하게 품는 빛깔입니다. ‘바람빛’이나 ‘하늘빛’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랑은 온누리를 보드랍게 돌보는 빛깔입니다. ‘햇빛’이나 ‘불빛’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를 더 생각할 수 있습니다. 빛깔을 보면 짙거나 옅습니다. 짙거나 옅은 느낌은 ‘결’입니다. 그러니까, 짙은 빛깔이나 옅은 빛깔을 가를 적에는 ‘빛결’이라는 낱말을 쓰면 됩니다. 사회에서는 ‘농도(濃度)’나 ‘농담(濃淡)’ 같은 한자말을 쓰지만, 이런 한자말이 아닌, 한국말 ‘빛껼’을 써야 알맞습니다.


  이제 빛살과 빛깔을 살피면서 빛결을 말할 수 있다면, 한 걸음 내딛은 셈입니다. 한 걸음 다음은 두 걸음이면서 새 걸음입니다. 새롭게 내딛는 걸음입니다. 다음 걸음은 무엇인가 하면, ‘빨강’과 ‘푸름’과 ‘파랑’에서 무엇이 나오느냐입니다. 빨강은 핏빛이면서 알빛(열매빛)인데, 동백꽃빛이나 장미꽃빛이나 딸기알빛이나 앵두알빛이나 능금알빛으로 갈릴 수 있습니다. 빨강이라는 빛깔로 드러나는 꽃이나 열매를 떠올릴 수 있어요. 푸름은 풀빛이면서 잎빛입니다. 쑥잎빛이나 감잎빛이나 민들레잎빛이나 모과잎빛이나 풀개구리빛이나 개구리밥빛처럼 온갖 풀이나 작은 짐승이나 벌레를 그리면서 이 빛깔을 가리킬 수 있어요. 파랑은 하늘빛이면서 바다빛인데, 달개비꽃빛이나 봄까지꽃빛이나 쪽빛이라 할 만합니다. 노랑은 해님이 드리우는 포근한 기운이 서린 빛깔이니, 벼빛이나 보리빛이라 할 수 있고, 짚빛(마른 풀잎 빛깔)이라 할 수 있으며, 개나리꽃빛이나 원추리꽃빛이나 병아리빛이나 민들레꽃빛이나 씀바귀꽃빛 같은 모습을 하나하나 헤아릴 수 있습니다. 노란 꽃이나 열매를 가만히 되새깁니다.


  빛깔은 내가 스스로 짓는 삶에서 찾습니다. 한국사람이 흔히 잘못 쓰는 빛깔 가운데 ‘갈색(褐色)’이 있습니다. 이 빛깔말을 으레 쓰기는 하지만 정작 어떤 빛깔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뭅니다. 한국말로는 ‘흙빛’이거나 ‘도토리빛’이거나 ‘밤알빛(밤빛)’입니다. 나뭇줄기 빛깔이 ‘흙빛’이기도 합니다. 자작나무나 벚나무라면 흙빛이 아니지만, 여느 나무는 흙빛하고 거의 같습니다. 아니, 나무는 흙빛을 닮는다고 할까요. 흙이 까무잡잡하면 나뭇줄기도 까무잡잡하다고 할까요.


  푸름을 가리키는 풀빛은 잎빛이기도 하기에 솔잎빛이나 잣잎빛이나 후박잎빛처럼 쓸 수 있습니다. 감잎빛도 봄감잎빛과 여름감잎빛과 가을감잎빛이 다릅니다. 하얀 빛깔을 가리킬 구름빛도, 어느 때에는 잿빛인 구름이니, 매지구름빛은 새로운 잿빛이라 할 만합니다. 까만 빛깔은 까만 씨앗으로 나타낼 만하니 능금씨빛이나 배씨빛을 쓸 수 있고, 깨알빛이나 나팔꽃씨빛을 쓸 수 있습니다. 그림자빛이나 그늘빛을 쓸 수도 있습니다. ‘밤빛’은 밤알과 밤하늘을 가리키는 두 가지 빛깔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늘빛은 ‘낮하늘빛’과 ‘밤하늘빛’이 있을 테지요. 더 가른다면 ‘아침하늘빛’과 ‘새벽하늘빛’도 있어요.


  제 삶을 찾을 때에 제 빛을 찾습니다. 제 삶을 찾아서 바라볼 때에 제 빛을 찾아서 바라봅니다. 제 삶을 찾지 않는다면 제 빛을 보거나 알 수 없습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 봅니다. 아직 내 몸이 어둠만 보다가, 밤이 지나서 아침이 찾아올 적에 내 둘레에 어떠한 빛이 퍼져서 어떤 모습을 만날 수 있는지 그려 봅니다. 4348.3.14.흙.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숲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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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 없애야 말 된다

 비판적


 비판적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다 → 비판해야 한다 / 비판해 주어야 한다

 매사에 너무 비판적이다 → 모든 일에 너무 꼬치꼬치 따진다

 비판적 사고 → 판가름하는 생각 / 따질 줄 아는 생각

 비판적 독해 → 판가름 독해 / 판가름하기

 비판적 담론 → 비판 담론 / 판가름 담론

 비판적 읽기 → 밝게 읽기 / 판가름 읽기 / 파헤쳐서 읽기


  ‘비판적(批判的)’은 “사물의 옳고 그름을 가리어 판단하거나 밝히는”을 뜻한다고 합니다. ‘판단(判斷)’은 “사물을 인식하여 논리나 기준 등에 따라 판정을 내림”을 뜻한다 하고, ‘판정(判定)’은 “판별하여 결정함”을 뜻한다 하며, ‘판별(判別)’은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을 판단하여 구별함”을 뜻한다 합니다. ‘구별(區別)’은 “성질이나 종류에 따라 차이가 남. 또는 성질이나 종류에 따라 갈라놓음”을 뜻한다 해요. ‘판단→판정→판별→판단’으로 빙글빙글 도는 말풀이입니다.


  한국말에 ‘판가름’이 있고, 이 낱말은 “사실의 옳고 그름이나 어떤 대상의 나음과 못함, 가능성 따위를 판단하여 가름”을 뜻한다고 합니다. ‘판단·판정·판별’은 바로 한국말 ‘판가름’을 가리키는 셈입니다. ‘비판’이나 ‘비판적’ 같은 한자말을 꼭 쓰고 싶다면 쓸 수밖에 없을 테지만, 한국말에 ‘판가름’이 있고, 때와 곳을 살펴서 ‘따지기’나 ‘밝히기’나 ‘파헤치기’ 같은 낱말을 쓸 만하며, ‘비판적이다’는 ‘날카롭다’나 ‘나무라다’나 ‘못마땅하게 여기다’나 ‘싫어하다’나 ‘차분하다’나 ‘차갑다’를 가리키는 자리에 끼어들기도 합니다. 4348.12.24.나무.ㅅㄴㄹ



비판적인 눈으로 응시하지는

→ 따가운 눈으로 바라보지는

→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지는

→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지는

→ 내키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지는

→ 못마땅해 하는 눈으로 보지는

《페스탈로찌/홍순명 옮김-린하르트와 겔트루트》(광개토,1987) 161쪽


비판적인 자세로 수용해야 합니다

→ 비판 자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 꼼꼼히 살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 찬찬히 따져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 곰곰이 판가름하며 받아들여야 합니다

→ 옳고 그름을 가려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 잘잘못을 가리며 받아들여야 합니다

→ 잘 살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김남주-시와 혁명》(나루,1991) 34쪽


비판적으로 읽도록

→ 따져서 읽도록

→ 파헤쳐서 읽도록

→ 판가름하며 읽도록

→ 옳고 그름을 가리면서 읽도록

→ 속 깊이 살피며 읽도록

《헨리 지루/이경숙 옮김-교사는 지성인이다》(아침이슬,2001) 52쪽


크리슈나무르티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 크리슈나무르티를 비판한다

→ 크리슈나무르티를 나무라는 쪽에 선다

→ 크리슈나무르티한테 무엇이 잘못인가를 말한다

→ 크리슈나무르티가 무엇을 잘못하는가를 밝힌다

《전사섭-장충동 김씨를 위한 책 이야기》(시공사,2003) 68쪽


거울 속의 얼굴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 거울에 비친 얼굴을 비웃듯이 바라본다

→ 거울에 비친 얼굴을 손가락질하듯이 바라본다

→ 거울에 비친 얼굴을 나무라듯이 바라본다

→ 거울에 비친 얼굴을 꾸짖듯이 바라본다

→ 거울에 비친 얼굴을 씁쓸히 바라본다

→ 거울에 비친 얼굴을 쓰겁게 바라본다

→ 거울에 비친 얼굴을 쓰디쓰게 바라본다

→ 거울에 비친 얼굴을 쓸쓸히 바라본다

→ 거울에 비친 얼굴을 차갑게 바라본다

《존 버거,장 모르/김현우 옮김-행운아》(눈빛,2004) 227쪽


비판적으로 바라봄으로써

→ 비판 어린 눈으로 바라보면서

→ 차분히 돌아보면서

→ 잘하고 못한 대목을 짚으면서

《이숙의-이 여자, 이숙의》(삼인,2007) 23쪽


그런 관행들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이다

→ 그런 관행들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 그런 관행들을 따졌기 때문이다

→ 그런 관행들을 나무랐기 때문이다

→ 그런 관행들을 꾸짖었기 때문이다

《마저리 쇼스탁/유나영 옮김-니사》(삼인,2008) 47쪽


비판적 사고는 부정적 사고가 아닙니다

→ 비판하는 생각은 나쁘게 보는 생각이 아닙니다

→ 비판 어린 생각은 나쁜 생각이 아닙니다

→ 판가름하기는 나쁘게 보는 눈길이 아닙니다

《손석춘-10대와 통하는 사회 이야기》(철수와영희,2015) 39쪽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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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 없애야 말 된다

 일상적


 일상적 모습 → 흔히 보는 모습 / 여느 모습

 일상적 생활 → 여느 삶 / 하루하루 삶

 일상적 습관 → 늘 보이는 버릇

 일상적으로 많이 사용된다 → 늘 많이 쓰인다

 일상적으로 하는 일 → 으레 하는 일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 → 흔히 이르는 말 / 쉽게 이르는 말


  ‘일상적(日常的)’은 “날마다 볼 수 있는”을 뜻한다고 합니다. ‘일상(日常)’은 “매일 반복되는 생활”을 뜻한다고 합니다. 두 낱말은 모두 한자말인데 뜻풀이가 다릅니다. 가만히 살피면, ‘일상’은 “날마다 되풀이되는 삶”이란 뜻이고 “날마다 같은 삶”이란 뜻이기도 합니다. 짤막하게 “늘 같은 삶”이나 “한결같은 삶”이라 할 만합니다. 아무튼 ‘일상적’은 말뜻대로 “날마다 보는”이나 “늘 보는”으로 손질하면 되고, 흐름을 살펴서 ‘흔히·으레·자주·쉽게·손쉽게·늘·언제나·가볍게·가까이’ 같은 낱말로 손볼 수 있습니다. 4348.12.24.나무.ㅅㄴㄹ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 으레 벌어진다

→ 자주 일어난다

→ 손쉽게 볼 수 있었다

→ 늘 있었다

→ 흔했다

→ 잦았다

《요시미 요시아키/이규태 옮김-일본군 군대위안부》(소화,1998) 66쪽


인권 침해사례를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 인권 침해를 늘 경험한다

→ 인권 침해를 언제나 겪는다

→ 인권 침해를 예나 이제나 겪는다

→ 인권 침해를 끊임없이 겪는다

→ 인권 침해를 한결같이 겪는다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외국인 이주노동자 인권백서》(다산글방,2001) 19쪽


일상적 의미보다는 훨씬 더 심오하고 정확한

→ 흔한 뜻보다는 훨씬 더 깊고 올바른

→ 여느 뜻보다는 훨씬 더 깊고 또렷한

→ 수수한 뜻보다는 훨씬 더 깊고 바른

《존 버거·장 모르/김현우 옮김-행운아》(눈빛,2004) 75쪽


더 일상적인 감정이며

→ 더 수수한 감정이며

→ 더 흔히 품는 느낌이며

→ 더 쉽게 품는 느낌이며

《존 버거·장 모르/김현우 옮김-행운아》(눈빛,2004) 81쪽


일상적인 말로 자리잡기도 한다

→ 일상말로 자리잡기도 한다

→ 흔히 쓰는 말로 자리잡기도 한다

→ 흔한 말로 자리잡기도 한다

→ 가벼운 말로 자리잡기도 한다

《중앙일보 어문연구소-한국어가 있다 1》(커뮤니케이션북스,2005)


일상적 문화공간

→ 일상 문화공간

→ 마을 문화 터전

→ 언제나 즐길 문화 쉼터

→ 가까이 찾아갈 수 있는 문화 쉼터

→ 언제라도 찾아가는 문화 쉼터

《최엄윤-이천동, 도시의 옛 고향》(이매진,2007) 124쪽


일상적으로 쓰는 말에도

→ 흔히 쓰는 말에도

→ 쉽게 쓰는 말에도

→ 늘 쓰는 말에도

→ 가볍게 쓰는 말에도

《손석춘-10대와 통하는 사회 이야기》(철수와영희,2015) 21쪽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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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랑 놀자 171] 거울



  거울을 바라보면 내 모습이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거울을 쓰면 무엇이든 비추어 주니까 내 눈으로 볼 수 없는 곳을 잘 살필 만합니다. 볼록거울을 써서 가까이 있는 것을 더 잘 들여다보려 하고, 오목거울을 써서 멀리 있는 것을 더 잘 살펴보려고 합니다. 자동차나 자전거에는 ‘뒷거울’을 달아서 뒤에서 달리는 자동차나 자전거를 살핍니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는 냇물이나 못물이나 샘물이 마치 거울과 같습니다. 물결이 일지 않는 물을 바라보면 내 얼굴뿐 아니라 하늘도 구름도 달도 모두 또렷하게 나타나요. 그래서 이 같은 모습을 헤아리면서 ‘거울로 삼는다’는 말을 쓰지요. 또렷하게 비추어서 보이는 모습을 헤아리면서 나 스스로 내 몸짓을 새롭게 가다듬을 수 있거든요. 동무나 이웃 누군가를 거울로 삼아서 아름다움이나 사랑스러움을 배우기도 하고, 바보스러움이나 어리석음을 다스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내 모습이 동무나 이웃한테 ‘거울이 되어’서 즐거움이나 기쁨이나 모자람을 비추어 보이는 노릇을 하고요. 어버이하고 어른은 어린이한테 거울이 되어 아름다운 삶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어린이도 어버이하고 어른한테 거울이 되어 맑은 사랑을 가르쳐요. 4348.12.23.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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