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 없애야 말 된다

 (387) 심층적 1


우리는 각 주제들을 더욱 심층적으로 다룬 책들을 여러분에게 소개할 것이다

《제임스 브루지스/정지인 옮김-지구를 살리는 50가지 이야기 주머니》(미토,2004) 12쪽


 더욱 심층적으로 다룬 책

→ 더욱 깊이 다룬 책

→ 더욱 깊숙하게 다룬 책

→ 더욱 꼼꼼하게 다룬 책

→ 더욱 낱낱이 다룬 책

→ 더욱 차근차근 다룬 책

 …



  한국말사전에는 ‘심층적’이라는 낱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낱말을 쓰는 분이 꽤 많습니다. 한자말 ‘심층’은 ‘깊은 곳’이나 ‘깊숙한 곳’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깊은 곳’이나 ‘깊숙한 곳’처럼 쓰면 됩니다.


 바다의 심층 → 바다 밑바닥 / 바다에서 깊은 곳

 심층 취재 → 깊은 취재 / 밑바닥 취재

 내 마음의 심층 → 내 마음 깊은 곳


  “바다의 심층”이라면 “바다 밑바닥”이 되겠지요. ‘바닷바닥’ 같은 낱말을 새로 지을 수도 있어요. 땅에서는 ‘땅바닥’이니까요. 게다가 ‘심층’ 같은 한자말을 섣불리 쓰기 때문에 “심층은 수심의 깊이에 따라” 같은 엉성한 말까지 나타납니다. ‘수심(水深)’은 “물깊이”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수심의 깊이”는 “물깊이의 깊이”인 꼴이고, “심층은 수심의 깊이에 따라”는 “깊은 층은 물깊이의 깊이에 따라”인 꼴이에요. 도무지 말이 될 수 없습니다.


 심층은 수심의 깊이에 따라 수온이 차차 낮아진다

→ 바닷바닥은 물깊이에 따라 온도가 차츰 낮아진다

→ 밑자리는 물깊이에 따라 온도가 차츰 낮아진다


  한 마디씩 꼼꼼하게 살피지 않으면 말을 엉터리로 쓸 수 있습니다. 한자말을 쓰느냐 마느냐라든지 ‘-적’을 쓰느냐 마느냐 같은 이야기를 넘어서, 말을 말답게 쓰느냐 마느냐를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4338.12.20.불/4348.4.14.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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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든 이야기를 더욱 깊이 다룬 책을 여러분한테 알려주려 한다


“각(各) 주제(主題)들”은 “주제마다”나 “이야기마다”나 “모든 이야기”로 손봅니다. “여러분에게 소개(紹介)할 것이다”는 “여러분한테 알려주려 한다”나 “여러분한테 이야기하겠다”나 “여러분한테 밝히려 한다”로 손질합니다.



심층적 : x

심층(深層)

1. 사물의 속이나 밑에 있는 깊은 층

   - 바다의 심층 / 심층은 수심의 깊이에 따라 수온이 차차 낮아진다

2.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사물이나 사건의 내부 깊숙한 곳

   - 심층 취재 / 심층 보도 프로그램 / 내 마음의 심층에 있었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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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 없애야 말 된다

 (916) 심층적 2


게다가 박수근의 미망인마저 세상을 뜬 후여서 화가를 심층적으로 파 보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박용숙-박수근》(열화당,1979) 3쪽


 심층적으로 파 보려는 

→ 깊이 파 보려는

→ 깊은 곳까지 파 보려는

→ 속속들이 파 보려는

→ 남김없이 파 보려는

→ 차분히 파 보려는

 …



  언론에서는 ‘심층 취재’를 한다고 흔히 이야기합니다. ‘심층적 취재’라고는 쓰지 않지만, ‘심층’이라는 한자말을 생각해 보면, ‘깊은’을 뜻하는 만큼, ‘깊은 취재’나 ‘깊이 있는 취재’나 ‘깊이 파고든 취재’쯤으로 다듬어 쓸 수 있어요.


  “심층적으로 파 보려는”과 비슷한 말투로 “심도(深度) 있게 파 보려는”을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심도’도 ‘심층·심층적’과 마찬가지로 ‘깊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한국말 ‘깊음(깊다·깊은)’을 잘 살려서 쓰면 넉넉합니다.


  깊이 판다고 할 적에는 속속들이 판다고 할 수 있고, 남김없이 파거나 모두 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숨김없이 파거나 낱낱이 판다고도 할 수 있어요. 4340.6.27.물/4348.4.14.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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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박수근한테는 곁님마저 이승을 뜬 뒤여서 이녁을 깊이 파 보려는 일을 그만두지 않을 수 없었다


‘미망인(未亡人)’은 ‘홀어미’로 다듬을 낱말입니다. 이 자리에서는 “박수근의 미망인마저”를 “박수근한테는 곁님마저”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세상(世上)을 뜬 후(後)여서”는 “이승을 뜬 뒤여서”로 손보고, “파 보려는 노력(努力)을”은 “파 보려는 일을”로 손보며, ‘포기(抛棄)하지’는 ‘그만두지’나 ‘그치지’나 ‘멈추지’로 손봅니다.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않을 수 없었다”로 손질합니다.


..


 '-적' 없애야 말 된다

 (1705) 심층적 3


직접 피해자인 농민들 이야기나 국민들이 쌀 개방과 관련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심층적으로 파고들지 않습니다

《김덕종·손석춘-식량 주권 빼앗겨도 좋은가?》(철수와영희,2014) 20쪽


 심층적으로 파고들지

→ 깊이 파고들지

→ 깊숙히 파고들지

→ 파고들지

→ 깊이 살피지

→ 깊숙히 살펴보지

 …



  ‘파고들다’라는 낱말은 “깊숙이 들어가다”를 뜻합니다. 그래서 ‘깊은 층’을 가리키는 한자말 ‘심층’을 넣어서 “심층적으로 파고들지”처럼 쓰면 “깊이 깊이 들어가다” 꼴이 됩니다.


  말뜻이 겹치더라도 일부러 “깊이 파고들지”처럼 쓸 수 있으나, “파고들지”라고만 적어도 넉넉합니다. 그리고, ‘깊이’나 ‘깊숙히’ 같은 낱말을 넣으려 하면 “깊이 살피지”나 “깊숙히 살펴보지”처럼 쓰면 돼요. 4348.4.14.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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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바로 피해를 보는 시골사람 이야기나, 사람들이 쌀 개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깊이 살펴보지 않습니다


‘직접(直接)’은 ‘곧바로’나 ‘바로’로 손봅니다. ‘농민(農民)’이나 ‘국민(國民)’은 그대로 둘 수 있을 테지만, ‘농사꾼’이나 ‘사람’으로 손볼 수 있고, ‘농민’은 ‘시골사람’이나 ‘흙지기’나 ‘시골지기’로 손보아도 됩니다. “쌀 개방과 관련(關聯)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쌀 개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로 손질합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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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49 콩씨와 팥씨



  한겨레가 먼 옛날부터 주고받는 말 가운데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가 있습니다. 이 말은 아주 옳습니다. 그야말로 옳습니다. 대단히 옳고 바르면서 멋진 말입니다. 콩을 심으니 콩이 납니다. 팥을 심기에 팥이 나요. 달리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을 마음에 심으면 사랑이 자랍니다. 꿈을 마음에 심으면 꿈이 자라요. 더할 나위 없이 올바른 말입니다.


  내 마음에 미움을 심으면 무엇이 자랄까요? 미움이 자라지요. 내 마음에 시샘을 심으면 무엇이 자라나요? 시샘이 자라지요. 내 마음에 기쁨이나 웃음을 심으면 기쁨이나 웃음이 자라고, 기쁨이랑 웃음을 함께 심으면 ‘기쁜 웃음’이나 ‘웃는 기쁨’이 자랍니다.


  나무를 심기에 나무가 자랄 수 있습니다. 나무를 보살피고 아끼기에, 나무는 우리한테 사랑스럽고 맛난 열매를 고맙게 베풉니다. 씨앗 한 톨을 흙땅에 정갈한 손길로 기쁜 꿈을 품으면서 심으니, 씨앗 한 톨은 흙 품에 안겨서 씩씩하게 자랍니다.


  한편, 한겨레 옛말은 다르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콩을 심은 데에 팥이 나거나, 팥을 심은 데에 콩이 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까요? 심기는 콩을 심었는데 왜 팥이 나지요? 콩을 심으면서 콩이 아닌 팥을 생각하니까 팥이 납니다. 팥을 심으면서 팥이 아닌 콩을 생각하니 콩이 납니다. 이 또한 아주 옳습니다. 그래서, 한겨레는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 갚는다.”와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 진다.”고도 이야기합니다. 똑같은 말이지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아주 다른 열매를 맺습니다.


  씨앗 한 톨을 심으면서 ‘씨앗 한 톨’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것을 생각한다면, 씨앗이 제대로 자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콩씨를 심어도 콩알이 안 맺을 수 있습니다. 씨앗 한 톨을 심으면서 ‘열매가 잔뜩 열리면 돈을 많이 벌어야지’ 같은 생각을 한다면, 이때에도 열매가 제대로 안 맺을 수 있습니다. 첫발(첫걸음)을 내디디는 우리는 새발(새걸음)을 내딛으려고 해야 합니다. 첫발을 내딛으면서 끝(열매)을 지레 생각하니까, 첫발부터 어긋나고 맙니다.


  다시 말하자면, 콩씨를 심으면서 팥을 생각한 사람은 처음부터 ‘콩을 심지’ 않고 ‘팥을 심는구나’ 하고 여길 만합니다. 씨앗을 심으면서 ‘씨앗’이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다른 것’을 심은 셈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늘 ‘우리가 손수 심은’ 대로 거둡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옛말처럼, 생각을 마음자리에 심거나 뿌린 대로 삶이 나타납니다.


  말이 씨가 됩니다. 씨가 삶이 됩니다. 말은 언제나 씨앗과 같습니다. 씨앗과 같은 말을 함부로 뇌까린다면, 나는 내 삶을 스스로 함부로 망가뜨리려는 셈입니다. 언제나 씨앗과 같은 말이니, 말을 정갈하고 아름답게 가꾸어서 슬기로운 생각으로 마음자리에 둘 수 있으면, 이 말은 마음자리에서 사랑스레 깨어납니다.


  어떤 씨앗을 심을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씨앗을 바라보면서 내 손에 쥐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선 땅에 어떤 씨앗을 쥐고 어떤 몸짓으로 어떤 삶을 지으려 하는가를 또렷이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 손에 쥔 씨앗을 제대로 바라볼 때에 내 길을 제대로 걷습니다. 내 손에 쥔 씨앗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내 길은 그예 어긋나기만 합니다. 4348.3.3.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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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량한 말 바로잡기
 (1674) 충성

보도 할머니는 입이 틀어막힌 채 의자에 꽁꽁 묶이고 말았어. 그때에 충성스러운 크릭터가 잠에서 깨어나 사납게 도둑에게 달려들었어
《토미 웅거러/장미란 옮김-크릭터》(시공주니어,1996) 28쪽

 충성스러운 크릭터가
→ 믿음직한 크릭터가
→ 씩씩한 크릭터가
→ 다부진 크릭터가
 …


  군대에서 으레 ‘충성’ 같은 한자말을 씁니다. 군대에서는 한손을 눈썹과 이마 사이에 척 붙이면서 인사할 적에도 ‘충성’이라는 말을 외치도록 시킵니다. 한자말 ‘충성(忠誠)’은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을 뜻한다고 합니다. ‘진정(眞情)’은 “참되고 애틋한 정이나 마음”을 가리키고, ‘정성(精誠)’은 “온갖 힘을 다하려는 참되고 성실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성실(誠實)’은 “정성스럽고 참됨”을 가리킨다고 해요. 그러니까, ‘정성 = 참됨 + 성실’이요, ‘성실 = 정성 + 참됨’인 셈입니다. 한국말사전 뜻풀이가 오락가락 겹말입니다. 아무튼, 한국말사전 뜻풀이를 살피면, ‘진정·정성·성실’은 모두 “참된 마음”이나 “참됨·참다움”을 가리키는구나 하고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충성을 다하다 → 온힘을 다하다
 충성을 맹세하다 → 마음을 바치겠노라 다짐하다
 충성된 하인 → 믿음직한 일꾼
 나라에 충성하다 → 나라에 몸바치다
 나라에 대한 충성 → 나라에 몸바치기

  한국말사전에서 ‘충성’이라는 한자말을 더 살펴보면, “임금이나 국가에 대한 것을 이른다”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충성’이라는 한자말은 군인이나 신하한테 쓰는 낱말인 셈이고, 몸이나 마음을 바쳐서 따르라고 하면서 쓰는 낱말입니다.

  ‘충성’이라는 한자말은 말뜻처럼 ‘참됨·참다움’과는 동떨어진 자리에 씁니다. “온힘을 다하다”라든지 “마음을 바치다”라든지 “몸을 바치다”라 할 만한 자리에 씁니다. 때로는 “믿음직한 아무개”를 가리키는 자리에서 써요. 이러한 얼거리를 슬기롭게 헤아려서 한국말을 알맞게 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48.4.14.불.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보도 할머니는 입이 틀어막힌 채 걸상에 꽁꽁 묶이고 말았어. 그때에 믿음직한 크릭터가 잠에서 깨어나 사납게 도둑한테 달려들었어

‘의자(椅子)’는 ‘걸상’으로 다듬습니다.


충성(忠誠) :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정성. 특히, 임금이나 국가에 대한 것을 이른다
   - 충성을 다하다 / 충성을 맹세하다 / 충성된 하인 / 나라에 충성하다 /
     신하들은 부모에 대한 효도보다 나라에 대한 충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


 알량한 말 바로잡기
 (1680) 대답

에밀리가 물었어요. “너 뭐하는 거니? 그거 주떼니?” 타냐가 대답했어요. “아니, 이건 타조야.”
《페트리샤 리 고흐/김경미 옮김-흉내쟁이 꼬마 발레리나》(현암사,2003) 14∼15쪽

 타냐가 대답했어요
→ 타냐가 대꾸했어요
→ 타냐가 얘기했어요
→ 타냐가 말했어요
 …


  한국말에 ‘대꾸’와 ‘말대꾸’가 있습니다. ‘대꾸·말대꾸’는 같은 뜻이며, 두 낱말은 “제 뜻을 나타내는 일이나 말”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누군가 무엇을 물을 적에 제 뜻을 나타낸다고 하면 ‘대꾸한다’고 하지요.

  이 보기글에서도 ‘대꾸했어요’로 손보면 되고, ‘얘기했어요’나 ‘말했어요’로 손볼 수 있습니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 불러도 대꾸가 없다
 대답을 잘하는 아이 → 대꾸를 잘하는 아이
 아무 대답이 없다 → 아무 말이 없다

  ‘대꾸·말대꾸’는 한국말이고, ‘대답(對答)’은 한자말입니다. 두 낱말은 뜻이나 쓰임새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서 쓰느냐 하는 갈래가 다를 뿐입니다. 다만, 요즈음은 ‘대꾸’나 ‘말대꾸’라는 낱말은 쓰임새를 잃고, ‘대답’이라는 한자말만 널리 퍼집니다. ‘대꾸·말대꾸’는 손아랫사람이 손윗사람이 하는 말을 버릇없이 받아친다고 여기는 자리에서만 쓰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말하다’와 ‘이야기하다(얘기하다)’라는 한국말을 쓰면 되는데, 막상 ‘말하다·이야기하다’를 알맞게 쓰는 사람도 늘어나지 못합니다.

 묻는 말에 대답도 잘 못하는
→ 묻는 말에 대꾸도 잘 못하는
 그의 침묵을 긍정의 대답으로 여겼다
→ 그가 말이 없어 받아들인다고 여겼다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었는지
→ 묻는 말에 궁금함을 풀었는지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없음을
→ 이 일을 푸는 실마리가 될 수 없음을

  한국말사전을 보면 “그의 침묵을 긍정의 대답으로 여겼다” 같은 보기글이 나옵니다. 한국말을 옳게 쓰지 못하다 보니 이런 말투까지 쓰고 맙니다. “그의 침묵”이나 “긍정의 대답”은 어떤 말일까요? 이러한 말은 무엇을 뜻할까요?

  “긍정의 대답”처럼 “부정의 대답”이라 쓸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말마디는 “받아들이다”와 “안 받아들이다”로 고쳐쓸 수 있고, “고개를 끄덕이다”와 “고개를 젓다”로 고쳐쓸 만해요.

  “문제에 대한 대답”에서 ‘-에 對한’은 번역 말투입니다. 이러한 말투는 한국말이 어떻게 얽히는가를 제대로 헤아리지 않기 때문에 퍼집니다. 자, 문제는 어떻게 할까요? 풀겠지요. 문제는 풉니다. 그러니, “문제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문제를 푸는 대답”으로 바로잡아야 하고, 문제를 푼다고 할 적에는 수수께끼를 풀듯이 ‘실마리’를 찾아서 풉니다. 곧, “문제에 대한 대답”을 한국말로 옳게 고쳐쓰자면 “문제를 푸는 실마리”이고, “문제를 푸는 실타래”라 해도 됩니다. 4348.4.14.불.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에밀리가 물었어요. “너 뭐하니? 그거 주떼니?” 타냐가 말했어요. “아니, 이건 타조야.”

“뭐하는 거니”는 “뭐하니”로 다듬습니다.


대답(對答)
1. 부르는 말에 응하여 어떤 말을 함
  - 불러도 대답이 없다 / 부르면 대답을 잘하는 아이가 귀엽다 /
    집에 누가 있느냐고 불러도 아무 대답이 없다
2. 상대가 묻거나 요구하는 것에 대하여 해답이나 제 뜻을 말함
  - 묻는 말에 대답도 잘 못하는 어수룩한 사람 /
    나는 그의 침묵을 긍정의 대답으로 여겼다 /
    이 정도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3. 어떤 문제나 현상을 해명하거나 해결하는 방안
  - 어떠한 제안도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없음을 모두가 알고 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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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쓰면 우리 말이 깨끗하다

 (443) 초록의 1


이 나무에서 아름다운 초록의 애벌레를 발견했다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윤효진 옮김-곤충·책》(양문,2004) 21쪽


 초록의 애벌레를 발견했다

→ 초록 애벌레를 보았다

→ 풀빛 애벌레를 보았다

→ 푸른 애벌레를 보았다

 …



  한자말 ‘초록’을 한국말사전에서는 “풀의 빛깔과 같이 푸른빛을 약간 띤 녹색”으로 풀이합니다. ‘녹색(綠色)’을 한국말사전에서 찾아보면 “= 초록색”으로 풀이합니다. 그러니까, 한국말사전 뜻풀이는 아주 엉터리입니다. ‘초록’을 “푸른빛을 띤 녹색”이라 풀이하면서 ‘녹색 = 초록색’으로 풀이한다면, ‘초록 = 푸른빛을 띤 초록색’인 꼴이니까요.


 초록 물감 → 푸른 물감

 초록 저고리 → 푸른 저고리

 초록의 물결을 이루었다 → 푸른 물결을 이루었다


  한국말은 ‘풀빛’이나 ‘푸름’입니다. 한국말로는 ‘푸르다’라고 하면 됩니다. 더도 덜도 아닌 “푸른 빛깔”입니다. 4339.1.4.물/4348.4.12.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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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무에서 아름답고 푸른 애벌레를 보았다


‘발견(發見)했다’는 ‘보았다’나 ‘찾았다’나 ‘찾아냈다’로 손질합니다.



초록(草綠) : 풀의 빛깔과 같이 푸른빛을 약간 띤 녹색

   - 초록 물감 / 초록 저고리 / 짙고 연한 서리 빛 초록의 물결을 이루며


..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801) 초록의 2


포도나무 잎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초록의 옷을 입고, 포도넝쿨은 세상으로 성큼성큼 걸어나오고 있던 1990년 5월이었다

《류기봉-포도밭 편지》(예담,2006) 59쪽


 나뭇잎이 초록의 옷을 입고

→ 나뭇잎이 푸른 옷을 입고

→ 나뭇잎이 푸른 빛을 띠고

→ 나뭇잎이 푸르러지고

 …



  이 글을 쓰신 분은 “초록의 옷”이라 하는데, 이 말투와 비슷하게 “노랑의 옷을 입다”나 “빨강의 옷을 입다”나 “파랑의 옷을 입다”나 “검정의 옷을 입다”나 “잿빛의 옷을 입다”처럼 말할 사람도 있겠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투는 한국 말투가 될 수 없습니다. 한국말로 제대로 하자면 “노란 옷을 입다”, “빨간 옷을 입다”, “파란 옷을 입다”, “검은 옷을 입다”, “잿빛 옷을 입다”처럼 적어야 합니다.


  나뭇잎이 푸른 빛깔이기에 “나뭇잎이 푸른 옷을 입고”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뭇잎은 푸른 빛깔이니까 수수하게 “나뭇잎이 푸르고”처럼 말하면 됩니다. 4339.11.11.흙/4348.4.12.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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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 잎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푸른 옷을 입고, 포도넝쿨은 이 땅으로 성큼성큼 걸어나오던 1990년 5월이었다


‘세상(世上)으로’는 그대로 둘 만하지만 ‘이 땅으로’로 손볼 수 있고, “걸어나오고 있던”은 “걸어나오던”으로 손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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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1314) 초록의 3


숲 저쪽의 노란 보리밭은 안개 때문에 뿌옇게 보였습니다. 초록의 나무들도 회색 베일로 가린 듯 희미하게 보였고요

《이마이즈미 미네코,안네테 마이자/은미경 옮김-숲에서 크는 아이들》(파란자전거,2007) 31쪽


 초록의 나무들

→ 푸른 나무들

→ 푸른 옷을 입은 나무들

→ 푸른 빛이 싱그러운 나무들

 …



  나뭇잎이 우거질 때에는 ‘푸른 빛’이 도는 나무라 하겠지요. 한 마디로 ‘푸른 나무’입니다. 나무는 잎사귀가 푸른 빛이니 “잎사귀가 푸른 나무”라고 적어도 되고, “푸른 옷을 입은 나무”라고 적어도 됩니다. 사이에 꾸밈말을 넣어서 “푸른 빛이 싱그러운 나무”라 하거나 “푸른 잎이 고운 나무”라 해도 돼요. 4341.4.16.물/4348.4.12.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숲 저쪽 노란 보리밭은 안개 때문에 뿌옇게 보였습니다. 푸른 나무들도 잿빛 천으로 가린 듯 흐리게 보였고요


“숲 저쪽의 노란 보리밭”은 “숲 저쪽에 있는 노란 보리밭”이나 “숲 저쪽 노란 보리밭”으로 손봅니다. “회색(灰色) 베일(veil)”은 “속이 비치는 잿빛 천”으로 다듬습니다. 보기글 앞쪽에는 ‘뿌옇게’라 잘 적었으니, 뒤쪽에 나오는 ‘희미(稀微)하게’도 ‘뿌옇게’로 손질하든지 ‘흐리게’나 ‘흐릿하게’로 손질합니다.


..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236) 초록의 5


하지만 그 초록의 물결 앞에서 / 우리는 왜 진즉 승천해버리지 못했을까

《고재종-날랜 사랑》(창작과비평사,1995) 63쪽


 초록의 물결

→ 푸른 물결

→ 풀빛 물결

→ 짙푸른 물결

 …



  한국말 ‘푸르다’를 찬찬히 쓰지 못하기에, 그만 일본 한자말 ‘녹색’이나 중국 한자말 ‘초록’을 쓰면서 ‘-의’까지 붙이고 맙니다. 그저 한국말 ‘푸르다’를 쓰면 됩니다. “푸른 물결”이라 하면 됩니다. 푸른 빛깔은 한 가지가 아니니 “짙푸른 물결”이나 “옅푸른 물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푸르디푸른 물결”이나 “매우 푸른 물결”이나 “맑고 푸른 물결”이라 해도 잘 어울립니다. 4348.4.12.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그러나 그 푸른 물결 앞에서 / 우리는 왜 진즉 날아오르지 못했을까


‘하지만’은 ‘그러나’나 ‘그렇지만’으로 손보고, ‘승천(昇天)해’는 ‘날아오르지’나 ‘하늘로 오르지’로 손봅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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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글게 쓰는 우리 말

 (1604) 하나, 하나로, 한나라


죄없는 나를 왜 찌르는가 / 나를 꼭 찔러야 / 통일이 되는 줄 아느냐고 외치고

《서홍관-어여쁜 꽃씨 하나》(창작과비평사,1989) 117쪽



  한자말 ‘통일(統一)’을 이 나라에서 쓴 지 얼마나 되었을까 헤아려 봅니다. 한자로 지은 낱말이니 여느 시골사람은 이런 말을 쓸 일이 없었을 테지요. 나라나 겨레가 여럿으로 쪼개진 자리에서 이러한 낱말을 쓸 테니, 한국에서 이 낱말을 널리 쓴 때라면 아무래도 해방 언저리부터이지 싶습니다.


  한국말사전에서 ‘통일’을 찾아보면 “1. 나누어진 것들을 합쳐서 하나의 조직·체계 아래로 모이게 함 2. 여러 요소를 서로 같거나 일치되게 맞춤 3. 여러 가지 잡념을 버리고 마음을 한곳으로 모음”으로 풀이합니다. 찬찬히 간추리자면 “하나로 모이게 함”이나 “하나가 되게 맞춤”이나 “한곳으로 모음”을 ‘통일’이라는 한자말을 빌어서 나타내는 셈입니다.


 하나되기

 하나로

 한나라


  1980년대에 ‘통일운동’이나 ‘사회운동’을 하던 이들은 곧잘 ‘하나되기’를 말했습니다. 한자말 ‘통일’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한국말로 쉽게 적으려던 낱말인 ‘하나되기’입니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정치나 사회나 문화가 조금 숨통을 트었다고 할 만합니다. 군사독재 정치나 사회나 문화가 조금 걷혔기 때문입니다. 이즈음 온갖 영어가 밀물처럼 밀려들기도 했지만, 한국말을 새롭게 엮어서 즐겁게 쓰려고 하는 물결도 살몃살몃 치기도 했습니다. 이러면서 ‘하나로’라는 낱말이 곳곳에서 불거졌어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여러 곳에서 ‘하나로’를 말했고, 회사이름이나 가게이름이나 물건이름으로 이 이름이 널리 쓰였습니다.


  1970년대에 《뿌리깊은 나무》라는 잡지를 펴낸 한창기 님은 ‘韓國’이라는 이름은 뿌리가 없다면서, 이 나라와 이 겨레에 참답고 슬기로운 뿌리를 밝히는 이름을 새롭게 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러면서 빚은 새 이름이 ‘한나라’입니다. 우리 겨레를 일컬어 ‘한겨레’라고 하듯이, 우리 나라를 일컬어 ‘한나라’라고 할 때에 올바르다고 했어요. 이 이름은 2000년대로 넘어선 뒤 어느 정당에서 제 이름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통일이 되는 줄 아느냐

→ 하나가 되는 줄 아느냐

→ 하나로 되는 줄 아느냐

→ 한나라가 되는 줄 아느냐


  한자말 ‘통일’을 쓰는 일이 잘못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이 낱말을 안 써야 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한테 가장 알맞거나 사랑스러운 낱말을 제대로 지어서 쓰는지 안 쓰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한몸 . 한마음 . 한넋 . 한생각

 한나라 . 한누리 . 한별

 한삶 . 한노래 . 한사랑


  ‘하나되기(하나가 되다)’를 생각할 수 있다면, 차츰 가지를 뻗어 “한몸이 되다”와 “한마음이 되다”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 낱말로 추려서 ‘한몸되기’와 ‘한마음되기’도 생각할 수 있어요. ‘한넋’과 ‘한생각’이라는 낱말에다가 ‘한넋되기’와 ‘한생각되기’를 함께 생각해 볼 만합니다.


  정치 얼거리로 따지면 ‘한나라’이고, 지구 얼거리로 따지면 ‘한별’이며, 온누리(우주)로 따지면 ‘한누리’입니다.


  하나로 어우러진 삶이기에 ‘한삶’이 되면서, 한삶에서는 ‘한노래’를 부르고, ‘한사랑’을 나눕니다. 하나로 어우러진 삶으로 나아가면서 쓰는 말과 글이라면 ‘한말’과 ‘한글’이에요.


  때와 곳을 가만히 살피면 “통일이 되는 줄”은 “하나가 되는 줄”로 고쳐쓸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통일’과 ‘하나’가 서로 똑같이 쓰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 저 말 붙이지 않아도 ‘하나’라는 낱말 하나로 모든 이야기를 나눌 만해요.


 하나 . 하나님 . 한 . 한님 . 한동무

 온하나 . 온님 . 온벗 . 온사람


  해를 해님이라 하고 별을 별님이라 하듯이, ‘하나’를 ‘하나님’으로 적을 수 있고, ‘한 + 님’이라는 얼개로 ‘한님’ 같은 낱말을 지을 수 있습니다. 서로 하나가 되었으면, 서로서로 ‘한님’이라 부를 수 있고, ‘한동무’로 삼을 수 있습니다. 크게 하나가 되거나 모두 하나가 되었으면 ‘온하나’인 셈이며, 온하나가 된 사람은 서로 ‘온님’이나 ‘온벗’이나 ‘온사람’이라 할 만합니다. 4348.4.12.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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