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만한 책은 언젠가 읽는다

 


  책을 잔뜩 사들이기만 하고 제대로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나는 달리 생각한다. 책은 언제나 사야 할 때가 있다. 예나 이제나 모든 책이 언제나 새책방 책시렁에 놓이지는 않는다. 또한, 모든 책은 헌책이 되어 헌책방으로 들어오지만, 헌책방에 들어오는 책이 오랫동안 책시렁에서 조용히 잠들기만 하지 않는다. 새책이든 헌책이든 바로 오늘 아니라면 장만할 수 없다. ‘책을 읽을 때’처럼 ‘책을 살 때’가 있다. 새책방에서 사라진 뒤 땅을 치면 무엇하겠는가. 새책방에서 사라진 책이 헌책방에 들어오기까지 얼마나 오래 기다리고 싶은가.


  ‘책을 읽어야 할 때’는 어느 책 하나에 마음이 꽂힐 때이다. 그리고, 어느 책 하나를 손에 쥐어 읽으면서 ‘줄거리 훑기’가 아닌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를 할 수 있는 때이다.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줄거리만 훑으려 하면, 책이 얼마나 서운해 할까.


  읽어치운다고 해서 책읽기가 되지 않는다. 책읽기는 ‘빨리 읽기’도 ‘천천히 읽기’도 아니다. 책읽기는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삶을 스스로 헤아리면서 ‘마음으로 읽기’이다. 그러니까, 책을 잔뜩 사들이기만 하고 정작 제대로 못 읽는다고 한다면, ‘책을 사야 할 때’는 잘 알아채거나 느껴서 이럭저럭 갖추지만, ‘책을 읽어야 할 때’는 아직 멀었다는 뜻이다. 책을 읽을 만한 눈높이와 마음가짐이 될 때까지 이 책들을 알뜰살뜰 모시면서 흐뭇하게 바라보면 된다.


  애써 목돈 들여 사들인 책을 제때 못 읽는다고 뉘우칠 까닭은 없다. ‘제때’가 아직 오지 않았을 뿐이다. ‘제때’, 그러니까 ‘책을 가장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받아들여서 읽을 마한 때’가 오기까지 찬찬히 내 마음을 갈고닦으면 된다. 날마다 내 삶을 새롭게 일구면서 언제나 즐겁게 웃으면 된다. 스스로 삶을 다스리는 동안 어느 날 어느 곳 어느 때에 어느 책을 손에 쥐면서 고운 빛이 가슴속으로 스며드는가를 시나브로 깨달을 수 있다. 4346.12.31.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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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 2013-12-31 10:03   좋아요 0 | URL
장만한 책은 언젠간 읽는다. 저의 신조예요. ^^
그러니 아깝지 않아요.

숲노래 2013-12-31 11:05   좋아요 0 | URL
새해에도 즐겁게
책을 장만하고 읽으면서
아름답게 누리셔요~~~

transient-guest 2013-12-31 10:32   좋아요 0 | URL
저 역시 자주 경험하곤 하는 일입니다. 어느 날, 그 책과 딱 맞아떨어지는 날이 있고, 그 날과 책이 만나면 사놓고 읽지 못한 책을 읽게 되는 것 같아요. 어느 한 때 잠깐 읽다가 흥미가 떨어져서 꽂아놓은 책이 다른 날 우연히 보았을때 너무 재미있게 보이는 때가 종종 있더라구요.ㅎ

숲노래 2013-12-31 11:05   좋아요 0 | URL
누구나 언제나 스스로 새롭게 거듭나요.
그러니 예전에는 잘 몰랐던 책을
나중에 깊이 깨닫곤 하는구나 싶어요.
참 재미나다고 할까요. 즐겁다고 할까요~~

appletreeje 2013-12-31 10:52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정작 제대로 못 읽는다고 한다면, '책을 사야 할 때'는 잘 알아채거나 느껴서 이럭저럭 갖추지만, '책을 읽어야 할 때'는 아직 멀었다는 뜻이다. 책을 읽을만한 눈높이와 마음가짐이 될 때까지 이 책들을 알뜰살뜰 모시면서 흐믓하게 바라보면 된다.'-
무척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정말 책은, 저마다의 책마다 다 읽어야 '제때'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곱게 기다리다..오늘 아침, 제게 찾아온 책을
기쁜 마음으로 읽습니다~*^^*


숲노래 2013-12-31 11:06   좋아요 0 | URL
언제나 제때를 즐겁게 누리면서
오늘 하루를 신나게 보내면
책도 사람도 이야기도 햇볕도 바람도
모두 아름답게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희망찬샘 2014-01-01 06:37   좋아요 0 | URL
좋네요. 이 말.
앞으로는 언제 읽노, 언제 읽노... 라는 말 조금 줄여 보렵니다.
책과의 인연~ 그런 거 있더라고요.
지금은 어려웠지만, 또 언젠가는 쉽게 와 닿는 책도 있고요. ^^

숲노래 2014-01-01 08:31   좋아요 0 | URL
이 글에는 따로 안 썼지만,
내가 못 읽는 책은
나중에 아이들이 커서 읽어 주면 되기도 해요.

아이들이 큰 뒤에는
책방이나 도서관에 없을 책이
아주 많을 테니까요 ^^

saint236 2014-01-01 19:04   좋아요 0 | URL
예전에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느낀 것은 사고 싶은 책은 빚을 내서라도 사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책이 절판되기도 하고, 표지만 바뀌어서 가격을 올려받기도 하고요. 이런 일을 겪다보니 책을 사모으게 되고, 그렇게 사모은 책들은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꾸준히 읽어나가고 있지요. 다만 책 사는 속도를 읽는 속도가 못따라가는 것이 아쉬움이지만요...

숲노래 2014-01-01 20:19   좋아요 0 | URL
나중에는 '읽을 책'이 모자랄 날을 맞이하시리라 생각해요.
지구별 모든 책을 다 읽을 일은 없거든요.

아무튼, 아름다운 책들을 우리들이 즐겁게 알아보면
그 책들 숨결이 한결 오래도록 퍼지면서
우리 이웃들도 기쁘게 누리리라 생각해요~~
 

아름다운 책도, 못난 책도

 


  아름다운 책이나 못난 책이 따로 있을까. 아름다운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 따로 있을까. 그러나, 사람들은 곧잘 말한다. 저이는 참 아름다운 사람이야 하고. 저놈은 참 못난 녀석이야 하고. 우리 삶터에 아름다운 빛 드리우려고 힘쓰는 사람한테는 ‘아름다운 님’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마련이고, 우리 삶터를 짓밟거나 짓누르거나 어지럽히는 사람한테는 ‘못난 놈’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마련이다.


  그러면, 우리 삶터에 아름다운 빛 드리우려고 한몫 거드는 책일 때에 ‘아름다운 책’이 될까. 우리 삶터를 들쑤시거나 어지럽히거나 편가르기나 따돌림이나 괴롭힘 따위를 불러들이려는 책일 때에 ‘못난 책’이 될까.


  사랑이 없이 태어난 아이는 없다고 느낀다. 사랑을 못 받고 태어난 아이는 없다고 느낀다. 어머니 몸속에서 열 달 지내며 태어난 아이는 모두 사랑을 받았다. 엄마젖을 먹든 가루젖을 먹든, 씩씩하게 자라 어른이 된 사람들 모두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이 사랑을 전쟁으로 짓밟는지든지 독재와 군국주의로 짓누른다든지 하면서 바보짓을 저지른 사람이 있다. 이네들은 왜 바보짓을 일삼았을까. 돈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고, 얼굴 생김새나 학력을 따지면서 이웃을 들볶거나 해코지하는 사람이 있다. 이네들은 왜 이런 바보짓을 일삼을까.


  아름답다는 책이든 못나다는 책이든, 모두 나무를 베어 만든다. 숲에서 푸른 바람 베풀던 나무가 책으로 다시 태어난다. 책은 그저 책일 뿐이고, 나무는 그예 나무일 뿐이다. 책이 되어 준 나무는 ‘아름다운 책’이나 ‘못난 책’이 될 마음이 하나도 없다. 말없이 사람한테 몸을 맡기어 책이 되었을 뿐이다.


  혼자 살던 지난날에 가끔 ‘못난 책’이라 할 만한 책을 냄비 받침처럼 쓴 적 있으나, 도무지 이렇게 할 마음이 일지는 않았다. 남들은 으레 이렇게 한다니 나도 한 번 해 보았으나, 책이 되어 준 나무한테 미안해서 차마 책을 냄비 받침으로 못 쓰겠더라. ㅈㅈㄷ신문을 냄비 받침으로 쓴다는 분들도 있는데, 나로서는 ㅈㅈㄷ신문뿐 아니라 다른 신문이라고 그리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는데, 어느 신문으로도 냄비 받침을 쓰고 싶지 않았다.


  시골숲이나 시골들을 다니다 보면, ‘미국 자리공’을 곧잘 본다. 뿌리를 뽑고 뽑아도 다시 돋는다. 아무렴. 모든 풀은 자르고 잘라도, 태우고 태워도 다시 돋는다. 미국 자리공만 힘줄이 세지 않다. 개망초이든 망초이든 베고 또 베어도 얼마나 잘 자라는가. 민들레 또한 시골사람이 농약을 퍼부어 태워 죽이고 또 죽여도 그 자리에 씩씩하게 다시 올라온다. 쑥을 보아라. 뽑고 뽑아도 쑥쑥 다시 올라오지 않는가. 그나저나, ‘미국 자리공’을 볼 적에 저 풀을, 저 무시무시하게 번지는 서양풀을, 이 나라 숲과 들을 잡아먹을듯이 퍼지는 저 서양풀을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다가도 그냥 지나친다. 낫으로 벤들, 발로 밟는들 무엇이 달라질까. 이 나라에 퍼진 ‘그야말로 끔찍한 것’들을 떠올리면 자리공은 아무것도 아닐 뿐 아니라, 자리공이든 다른 귀화식물이건 이 땅에서 푸른 바람을 베풀어 준다. 저 서양풀도 미국이건 어느 서양에서건 자랄 적에는 그 나라에서 푸른 숲을 이루어 온 지구별에 푸른 숨결을 베풀어 주지 않았겠는가.


  한국사람이 고추장을 마치 한국 먹을거리인 양 여기지만, 고추가 한겨레 여느 사람이 널리 먹는 푸성귀가 된 지는 아직 백 해가 안 된다. 감자도 고구마도 토마토도 배추도 모두 다른 나라에서 들어왔다. 한겨레가 김치를 먹은 역사는 아직 천 해가 안 된다. 오백 해쯤 되었을까. 솜을 얻는 목화를 언제 들여왔는가. 목화 또한 귀화식물이다. 늦겨울부터 온 시골마다 노란물결 일렁이도록 하는 유채가 한국땅에 들어온 지 그리 오래지 않다. 배추보다는 오래되었다지만, 이렇게 군청마다 잔뜩 뿌린 지는 스무 해나 서른 해쯤 되었을까.


  나는 내 마음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책을 즐겁게 읽고 싶다. 내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는 책은 굳이 읽고 싶지 않으며, 사들일 뜻이 없는데다가, 누가 선물해도 애써 들추고 싶지 않다. 이 지구별에 태어나는 아름다운 책들만 읽어도 이 아름다운 책을 모두 읽을 수 있겠나.


  그러니까, 어떤 나무이든 지구별을 살찌우는 푸른 바람이다. 어떤 책이든 누군가를 밝히고 빛내며 보살펴 주는 살가운 마음벗이다. 나는 내 마음에 벗이 될 아름다운 빛인 책을 사귀고 싶다. 아름다운 책이나 못난 책을 따로 가르지 못한다. 그저 내 마음에 닿는 책을 나한테 아름다운 책이라 여기면서, 다른 책들은 다른 책들대로 누군가한테 아름답게 스며들 책이라 느낀다.


  다 다른 사람들한테 다 다르게 아름다운 책들이 태어날 테지. 그러나, 전쟁무기 같은 책만큼은, 아니 전쟁무기가 되는 책만큼은, 농약이나 화학비료가 되는 책만큼은, 핵발전소나 핵폐기물 같은 책만큼은, 폭력과 욕설 같은 책만큼은, 불평등과 차별 같은 책만큼은, 계급이나 학벌 같은 책만큼은, 부디 태어나지 않기를 빈다. 아름다운 나무로 빚은 종이에 아름다운 이야기를 실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면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하고 꿈꾼다. 4346.12.29.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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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12-29 10:06   좋아요 0 | URL
예~저도 제 마음에 벗이 될 아름다운 빛인 책을 사귀고 싶습니다~
다 다른 사람들에게 다 다르게 아름다운 책들이 태어나겠지요.^^
그런데 '미국 자리공'은 어떤 풀인가요?
이름도 처음 들어보고 어떻게 생긴 풀인지도 잘 몰라서요..^^;;

숲노래 2013-12-29 10:13   좋아요 0 | URL
사진 몇 차례 찍기는 했지만
어디에 숨었는지 찾기는 힘들고 ^^;;;
자리공 이야기를 하려고
사진을 여러 차례 찍으면서
늘 다른 이야기에 밀려
아직 못 풀었네요 ^^;;;

우리 '느낌(정서)'하고는 안 맞는
열매를 맺고, 좀 ... 거석한 느낌이랍니다.
 

읽고 싶은 책을 읽는다

 


  아이는 아이 스스로 읽고 싶은 책을 읽습니다. 아이는 읽고 싶지 않은 책을 읽지 않습니다. 아이는 제 마음을 사로잡는 책을 읽고 싶습니다. 아이는 제 마음에 빛이 되는 재미난 책을 읽고 싶습니다.


  어른도 어른 스스로 읽고 싶은 책을 읽습니다. 어른도 읽고 싶지 않은 책을 읽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른은 읽고 싶지 않더라도 졸업장이나 자격증 때문에 억지로 책을 펼치곤 합니다. 재미없다고 느끼면서도 꾸역꾸역 책을 읽곤 합니다. 비평이나 평론을 해야 하기에, 또는 ‘새책 평가단’이 되었기에, 마음에도 없는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를 살피느라 마음을 곱게 둘 책하고 자꾸 멀어지곤 합니다.


  아이도 어른도 마음을 밝히는 아름다운 책을 가슴에 담으면 얼마나 즐거우랴 싶습니다. 다 함께 마음빛 될 책을 가슴에 품으면 얼마나 아름다우랴 싶습니다. 시험공부를 해야 하기에 다니는 학교가 아니라, 푸른 넋 살찌우는 빛을 누리고 배우려고 다니는 학교일 때에 얼마나 사랑스러우랴 싶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없는 책을 참말 읽는가 하고 돌아보면, 아마 아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마음에 없는 책을 읽는다기보다 ‘자격증과 졸업장 거머쥐려는 마음’으로 재미없는 책을 읽고 맙니다. 노리는 무언가 있다면서 재미없는 일을 하고 맙니다. 돈을 벌거나 이름을 날리려는 마음으로 재미없거나 따분하거나 올바르지 않은 책하고 자꾸 사귀는 셈 아닌가 싶어요.


  재미있는 책을 읽으면서 재미있는 넋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아름다운 책을 읽으면서 아름다운 삶을 가꿀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사랑스러운 책을 읽으면서 사랑스러운 빛을 나눌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우리 모두 스스로 살고 싶은 보금자리를 돌보면서 살아요. 우리 모두 스스로 사랑하고 싶은 곁님을 사랑하면서 살아요. 우리 모두 스스로 놀고 싶은 놀이를 즐기고 일하고 싶은 일거리를 찾아 하루를 빛내요. 꿈을 먹으면서 내 마음이 환하고 푸르게 빛나도록 활짝 웃어요. 4346.12.26.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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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12-27 09:22   좋아요 0 | URL
정말 책은 읽고 싶은 책을 읽어야 할 때~스스로의 삶이 즐겁고 기쁘지요~
그래서 어제도 서점에서 와락 마음에 들어 오는 책 몇 권, 집어왔답니다...^^;;

숲노래 2013-12-27 09:26   좋아요 0 | URL
가까이에 책방이 있으니
책방마실 즐겁게 누리시겠네요~

시골에서는 그저... 마음속에만 품습니다 ^^;;;;;
 

정치로는 책을 읽힐 수 없다

 


  스스로 마음속에서 우러날 때에 비로소 책을 읽습니다. 누가 시켜서 책을 읽을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 교육과정이나 시험점수를 들이밀며 시킨들 책을 읽을 수 없습니다. 입사시험이나 승진시험을 들먹이며 시킨들 책을 읽을 수 없습니다. 간행물윤리위원회나 문화체육관광부나 문화재단에서 시키기에 책을 읽을 수 없습니다. 시청이나 군청에서 시킨다 하더라도 책을 읽을 수 없습니다. 시장이나 군수가 ‘책도시’나 ‘책마을’ 이름을 들먹이니까 책을 읽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언제라도 스스로 마음속에서 우러날 때에 비로소 책을 읽습니다.


  올바른 사회가 되도록 하자면 사회운동을 해야 할까요? 올바른 정치가 되도록 하자면 정치투쟁을 해야 할까요?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막는 길은 무엇일까요? 국회투쟁을 하거나, 누군가 국회의원이 되거나, 누군가 대통령이 되면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막을 수 있을까요? 밀양 송전탑을 어떻게 막을까요?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는 어떻게 막을까요? 미군기지 문제와 전쟁무기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두 ‘정치’로 풀고 맺는 일인가요? 대통령 한 사람 떡하니 나타나야 풀 수 있을까요? 국회의원 몇 사람이 소매를 걷어붙여야 풀거나 맺을 일인가요?


  정치로는 책을 읽힐 수 없습니다. 정치로는 사회를 바꿀 수 없습니다. 정치로는 정치조차 바꾸지 못합니다.


  책은 저마다 다른 삶으로 읽습니다. 아이를 낳고 돌보며 살림을 꾸리는 바쁜 틈틈이 살짝살짝 말미를 내어 책을 읽습니다. 흙을 만지거나 기계를 다루면서 살짝 숨을 돌려 땀을 씻는 겨를에 조용조용 책을 읽습니다. 버스나 전철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잊고 덜덜 흔들리는 몸을 가누면서 아늑하게 책을 읽습니다.


  나한테 돈이 억수로 많아 아무 일을 안 할 수 있어야 책을 읽지 않습니다. 나한테 돈이 엄청나게 많아 어느 책이든 마음껏 장만할 수 있어야 책을 읽지 않습니다. 밥을 안 지어도 되거나 빨래를 안 해도 되기에 책을 읽지 않습니다. 아이들하고 놀아 주지 않아도 되거나 아이들 가르치는 몫을 남한테 떠맡겼기에 책을 읽지 않습니다. 자가용하고 헤어진들 책을 읽지 않습니다. 시골에서 살더라도 책을 읽지 않습니다. 집에 따로 서재를 마련하니까 책을 읽나요? 돈이 많거나 대학교를 다녀야 책을 읽나요?


  올바른 정치가 서자면, 사람들 스스로 올바른 삶을 세워야 합니다. 스스로 올바르게 살아가면 올바른 정치가 됩니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끝장내자면, 사람들 스스로 올바르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 나라 사람들 모두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가는데, 도시에서 태어났어도 시골로 갈 생각을 않는데, 온갖 자유무역협정이 끝없이 불거질밖에 없습니다. 멀리서 찾아와 도와주는 이들 있으니 밀양 송전탑 말썽을 풀는지 모릅니다만, 밑바탕이 달라지지 않아요. 송전탑은 밀양에만 있지 않아요. 온 나라에 엄청나게 많아요. 송전탑이 왜 설까요? 바로 사람들이 몽땅 도시에 몰려 살아가면서 엄청난 물질문명을 누리기 때문이에요. 도시에서 살더라도 전기를 집집마다 스스로 만들어 쓸 생각을 안 하기 때문이에요. 밀양 송전탑을 안 하면 청도 송전탑을 하면 될까요? 사람 없는 아름다운 숲을 망가뜨리며 송전탑을 놓으면 될까요? 평화 아닌 전쟁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니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말썽이 불거집니다. 평화는 평화로 지킬 뿐인데, 전쟁무기가 있어야 평화를 지킬 수 있는 줄 잘못 알기 때문에, 군부대를 끝없이 새로 짓고 늘리려는 정치 움직임이 나타나요. 스스로 삶이 아름다운 평화가 되도록 할 때에 실마리를 찾을 수 있어요. 삶이 아름다운 평화가 되지 않으면, 언제나 싸움이요 정치요 투쟁이요 혁명만 외칠 뿐입니다.


  대통령이 바뀐대서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습니다. ‘책읽기 운동’을 한대서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습니다. 입시지옥이 버젓이 있는 까닭은 학력차별이 버젓이 있기 때문이고, 학력차별이 버젓이 있는 까닭은 계급차별이 버젓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 온갖 차별은 정치로는 씻지도 풀지도 못합니다.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면서, 저마다 제 밥과 옷과 집을 스스로 건사하는 삶을 일굴 때에 비로소 아름다운 길로 나아갑니다. 교육감도 전교조도 교육부도 교사도 학교도 아무것도 못 합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삶을 세우고 스스로 삶을 아름답게 다스리면서 아름다운 사랑을 누릴 때에 비로소 모든 실타래가 풀리니까요. 삶을 읽을 때에 책을 읽고, 삶을 다스릴 때에 사회를 다스리며, 삶이 아름다울 때에 나라가 아름답습니다. 4346.12.24.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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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13-12-24 11:24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공감 백배!

숲노래 2013-12-24 12:34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사람들이 조용히 이녁 보금자리를 아름답게 일굴 적에
천천히, 시나브로, 차근차근
아름다운 마을과 사회와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느껴요.

책으로 태어나는 이야기란
바로 이런 작은 아름다움을 나누는 사랑에서
태어나겠지요.
 

마음으로 읽는 책

 


  어떤 마음인가에 따라 달라요. 아무리 훌륭하다는 책을 읽는다 하더라도, 짓궂거나 얄궂은 마음이라면 읽지 않는만 못할 수조차 있어요. 성경을 읽어야 착해지지 않아요. 착하게 살면서 성경을 읽어야지요. 동화책을 읽어야 맑은 마음 되지 않아요. 맑은 마음으로 살면서 동화책을 읽어야지요. 시집을 읽어야 문학을 알거나 소설책을 읽어야 문학을 누리지 않아요. 삶이 언제나 시처럼 흐르면서 시집을 읽고, 삶을 늘 소설처럼 이야기샘 솟도록 가꾸면서 소설책을 읽어야 아름답습니다.


  눈으로도 읽지만, 눈과 함께 마음으로 읽는 책이에요. 눈으로도 꽃을 바라보고 나무를 헤아리지만, 눈과 함께 마음으로 바라보는 꽃이요 마음으로 헤아리는 나무예요. 밥 한 그릇을 혀와 입으로 먹지만, 혀와 입과 함께 마음으로 먹어요. 밥을 지은 사람 마음을 느끼고, 밥으로 차리기까지 흙을 보살핀 흙지기 손길을 나란히 누려요. 4346.12.2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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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남매맘 2013-12-21 20:25   좋아요 0 | URL
님 말씀에 격하게 공감합니다.
<착하게 살면서 성경을 읽어야지요>부분에서 우리 반 최고 꾸러기가 떠오르네요.
그 애가 교회는 정말 열심히 다니는데 삶이 그렇지 않거든요.
그래서 늘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어요.

숲노래 2013-12-21 20:43   좋아요 0 | URL
그 꾸러기를 수퍼남매님이 예쁘게 이끌어 주시면
앞으로 아름다운 길 걸어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