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지키는 손



  책방지기는 내내 장갑을 끼고 일한다. 헌책방이든 새책방이든 언제나 장갑을 끼고 일한다. 책방지기가 장갑을 끼지 않으면 손이 다칠 수 있다고도 할 텐데, 손보다 책이 다칠 수 있다. 책을 나르고 꽂고 하다 보면 손에서 땀이 나기 마련이니, 땀이 난 손으로 책을 만지면 ‘물이 묻는 책은 다친’다.


  헌책방에서 일하는 사람은 손에 책때가 덜 묻도록 하려고 장갑을 낀다고 할 테지만, 새책방에서 일하는 사람도 ‘갓 찍어서 나온 책에서 날리는 먼지’ 때문에 장갑을 낀다. 묵은 책에는 묵은 먼지가 낀다면, 갓 나오는 책에는 인쇄소와 제본소를 거치면서 ‘갓 나온 먼지’가 풀풀 날린다. 어느 책방에서 일하든 장갑을 끼지 않으면 책먼지가 손에 시커멓거나 뽀얗게 묻는다.


  책방지기가 책상맡에 조용히 앉아서 느긋하게 책을 읽기는 쉽지 않다. 책방지기는 하루 내내 책만 만지작거린다고 할 수 있다. 다리를 쉬면서, 손님이 뜸한 틈을 타서, 새롭거나 놀랍다 싶은 책을 문득 보았을 때에, 살며시 책을 펼친다. 책방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가야 비로소 책을 읽을 만하다.


  책방은 징검다리이다. 책을 쓴 사람과 책을 읽는 사람을 잇는 징검다리이다. 삶을 밝히는 아름다운 지식을 담은 책 하나가 태어나도록 글쓴이는 온힘을 쏟는다. 삶을 밝히는 아름다운 지식을 담은 책 하나를 맞아들이려고 책손은 눈빛을 밝힌다. 책방지기는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아니다. 책방지기는 ‘잇는 사람’이다. 잇는 사람으로서 징검다리 구실을 알뜰히 한다. 징검다리가 있기에 ‘쓰는 사람’은 더욱 기쁘게 힘을 낸다. 징검다리가 있으니 ‘읽는 사람’은 한결 즐겁게 책마실을 한다. 비바람에도 징검다리는 튼튼하게 선다. 책방지기는 늘 씩씩하게 책방을 지킨다. 4347.7.19.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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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단골 되기



  ‘책방 단골’은 아무나 될 수 없다고 한다. 책방을 자주 드나드는 사람은 ‘자주 오는 손님’은 될 수 있으나 ‘책방 단골’이라는 이름을 얻지는 못한다. ‘단골’은 어떤 책손한테 붙이는 이름일까? 글쎄, 나는 어느 책방을 두고도 나 스스로 ‘단골’이라고 느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살아가니, 시골에서는 달포에 한 차례 책방마실을 하기에도 만만하지 않다. 자주 드나들지 못하는 책방이기에 한 차례 찾아가더라도 책을 잔뜩 장만하기는 하지만, 단골은 ‘책을 많이 사들이는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얼추 열다섯 해쯤 앞서이지 싶은데, ‘책방 단골’을 놓고 ‘책방에 자주 오는 아저씨’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서울 용산에 있는 헌책방 〈뿌리서점〉이었다. 그곳을 날마다 드나드는 아저씨들이 꽤 많은데, 그분들이 서로 옥신각신 얘기를 주고받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서로 생각을 모두었다. 그분들이 말하는 ‘책방 단골’은 이렇다.


 ㄱ. 서른 해 넘게 드나들기

 ㄴ. 오천 권 넘게 장만하기


  어느 한 군데 책방에서 ‘단골’이라는 이름을 얻자면, 그 책방을 서른 해 넘게 드나들되, 그동안 책을 오천 권 넘게 장만해야 한단다.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한 군데 책방을 스무 해쯤 드나들었으면 아직 ‘단골’은 아니다. 스무 해 즈음 드나들었을 때에는 제법 자주 드나들었다고 할 만하지만, 아직 그 책방 속내까지 헤아리지는 못할 만한 햇수라 하겠지. 자주 드나든다고 하더라도 책을 어느 만큼 장만해서 읽지 않는다면, 그 책방이 어떤 책을 다루고 어떤 책으로 오래도록 책방살림을 꾸리는가를 알지 못한다고 할 만하다.


  나한테는 아직 ‘단골이라 할 만한 책방’이 없다. 왜냐하면, 아직 서른 해 넘게 드나든 책방이 없기 때문이다. 가장 오래 드나든 책방은 스물세 해 드나든 곳이다. 이 다음으로는 스물두 해 드나든 곳이 있고, 스물한 해 드나든 곳이 꽤 많다. 앞으로 일곱 해는 더 있어야 나한테도 ‘단골 책방’이 생긴다. 나는 마흔일곱 살이 되어야 비로소 ‘단골 책방’을 이야기할 수 있구나. 4347.7.1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



알라딘이 열다섯 돌이라 하는데,

나는 아직 알라딘에서도

열 돌이 안 되었다.


알라딘이라는 곳 단골이 되기에도

아직 스무 해가 남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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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엄쉬엄 책방 걸상


  책방에 걸상이 있습니다. 책방지기가 앉아서 책손을 기다리는 걸상이 있습니다. 책손이 딛고 올라서서 높직한 책시렁에 꽂힌 책을 꺼내도록 돕는 걸상이 있습니다. 한참 책을 보던 책손이 다리를 쉬려고 앉는 걸상이 있습니다.

  아이와 함께 책방마실을 하는 어버이가 아이 다리를 쉬도록 해 줄 걸상이 있기도 합니다. 걸상이 없으면 책꾸러미에 살짝 걸터앉습니다. 책방 골마루에 주저앉습니다. 또는 씩씩하게 두 다리로 서서 책을 둘러봅니다.

  널찍한 책방이라면 군데군데 걸상이 있습니다. 널찍한 책방이지만 어디에도 걸상이 없을 수 있습니다. 조그마한 책방이기에 걸상 놓을 틈이 없기도 합니다. 조그마한 책방이지만 군데군데 조그마한 걸상을 놓습니다.

  그루터기가 걸상 구실을 합니다. 풀밭이 온통 걸상이요 앉을 자리 구실을 합니다. 나무를 잘라 몇 조각을 끼워맞추어 걸상이 됩니다. 나무를 베어 종이를 얻으면 책이 태어납니다. 나무 한 그루는 책이 되고, 걸상이 되며, 책꽂이가 됩니다. 나무 한 그루는 연필이 되고, 땔감이 되며, 기둥이 됩니다. 책방 걸상에 앉아 다리를 쉬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내 마음속에서 흐르는 빛은 어떤 숨결이 되어 어디로 퍼질 수 있을까요. 4347.7.1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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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서명’을 ‘낙서’로 여겨 지우기


  헌책방이 문방구처럼 동네마다 여러 곳씩 있을 뿐 아니라, 초·중·고등학교 앞에서 한 군데씩 있던 지난날, 책은 참으로 쉽게 들어오고 쉽게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그무렵 책을 참 잘 읽고 잘 내놓았으며 잘 샀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책을 소유한다’는 생각보다는 ‘책을 나눈다’는 생각이 짙었습니다. 그래서, 헌책방으로 나들이를 하면서 책을 사는 분들은 책에 ‘글쓴이 서명’이 들어가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헌책방지기도 ‘글쓴이 서명’이 들어간 책을 웃돈을 얹어서 팔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고서 수집’을 하는 이들이 ‘글쓴이 서명’이 깃든 책을 모아서 전시회를 열고 ‘대단한 값어치가 있다’고 말하면서, 흐름이 살짝 바뀝니다. ‘고서 수집가’는 ‘글쓴이 서명이 깃든 책’을 ‘글쓴이 서명이 없는 책’보다 두 곱이나 세 곱, 때로는 열 곱까지 비싸게 사고팔았습니다.

  헌책방지기는 글쓴이 서명이 있건 없건 그냥 팔았지만, 이런 소문이 헌책방지기 귀에도 들어오면서, 어느 헌책방은 글쓴이 서명이 깃든 책을 곱배기로 값을 치러야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소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책은 모두 똑같은 책일 뿐’이라고 여겨, 서명이 없는 책하고 똑같이 파는 헌책방도 꽤 많습니다.

  학교 앞에 있는 작은 헌책방에서는 글쓴이 서명을 썩 달갑잖게 여겨 버릇했습니다. 학교 앞 헌책방은 참고서와 교과서를 많이 다룹니다. 참고서와 교과서를 찾는 학생이나 손님은 ‘낙서가 없는 책’을 바랍니다. 그러니, 학교 앞 헌책방지기는 책에 있는 낙서를 지우느라 팔이 빠져요. 헌책방마다 지우개를 잔뜩 쌓아 놓는데, 참고서와 교과서에 있는 낙서를 지우려고 둡니다.

  그런데, 학교 앞 헌책방 일꾼은 인문책이나 시집에 있는 ‘글쓴이 서명’도 지웁니다. 예전에는 지우개로 지웠고, 지우개로 안 되면 사인펜으로 새까맣게 발라요. 수정액이 나온 뒤로는 수정액으로 지우지요. 그리고, 사인이 너무 지저분하다(?) 싶으면 아예 북 찢습니다.

  헌책방 일꾼이 찢어서 버린 ‘글쓴이 서명’ 가운데 여러모로 눈에 띄는 작가로는 도올 김용옥 님 서명이 있습니다. 아는 사람은 ‘도올 서명’인 줄 알지만, 모르는 사람은 그야말로 끔찍한(?) 낙서로 여길 만합니다. 걸레 스님 중광이 남긴 서명도 헌책방지기 눈에는 ‘낙서’일 뿐입니다. 가볍게 북 찢어서 버리지요.

  예전에 저는 헌책방에서 책손이 스스로 ‘글쓴이 서명’을 찢어서 버리는 모습을 보았어요. 한 분은 ‘책이 지저분해서 찢는다’고 말씀합니다. 다른 분은 ‘글쓴이 서명 때문에 이 책을 사지 않기 때문에 찢는다’고 말씀합니다. 두 분 말씀을 들으면서 그때마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참말 우리는 책을 읽으려고 책을 삽니다. 글쓴이 서명을 건사해서, 나중에 이 책을 비싼값에 되팔려고 사지 않습니다. 우리는 ‘책 즐김이’이지 ‘책 장사꾼’이 아닙니다.

  책에 글쓴이 서명을 남기고 싶은 사람은, 아름다운 글을 나한테 선물한 이웃을 오래도록 마음에 품으면서, 그분 손글씨 자국에서 빛을 느끼고 싶기 때문입니다. 굳이 글쓴이 서명을 안 받으려는 사람은, 그분이 쓴 글로 엮은 책에 그분 넋과 숨결이 고이 깃들었으니, 굳이 서명을 더 받아야 할 까닭이 없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열다섯 해쯤 지난 예전 일인데, 언젠가 제가 고른 책 가운데 ‘글쓴이 서명’이 남은 책이 있었습니다. 헌책방 아주머니가 그 책을 살피면서 책값을 셈하다가 “아이고, 손님 미안해요. 여기 낙서를 안 지웠네.” 하면서 바로 그 자리에서 수정액으로 글쓴이 서명을 지우십니다. 나는 멍하니 지켜보았습니다. 또 한 번은 다른 헌책방에서 “책이 지저분하게 낙서가 뭐람.” 하면서 제 앞에서 글쓴이 서명을 북 찢어서 건네더니 “낙서가 있는 책이니 그냥 천 원에 가져가세요.” 하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헌책방지기가 북 찢은 ‘낙서라 하는 글쓴이 서명’을 주워서 책에 끼웁니다. 헌책방지기가 묻습니다. “그거 주워서 뭐 하려고요?” “이것도 이 책 가운데 하나인데, 그냥 끼워두려고요.”

  지난 2005년 서울 용산에서 김기찬이라는 분 이름과 도장이 찍힌 책을 잔뜩 보았습니다. 김기찬이라는 분이 죽으면서 그분이 건사했던 책이 아주 많이 헌책방에 나왔습니다. 왜 이 책들이 헌책방에 나왔을까 궁금하게 여기다가 슬픈 이야기를 듣고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한참 망설이다가 김기찬 님 서명과 도장이 깃든 책을 두 권 골랐습니다. 글쓴이 서명을 건사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기증한 책이 버려지는 한국 도서관 역사와 문화를 자료로 두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4347.7.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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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4-07-09 01:10   좋아요 0 | URL
아 '글쓴이 서명'을 이러한 이유로 '낙서'로 여겼군요.
저는 몰랐는데 함께살기님의 고마우신 글로 또 헤아려봤습니다.^^
좋은 글,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숲노래 2014-07-09 01:12   좋아요 0 | URL
깊은 밤에 즐겁게 마음과 몸을 쉬시고
새 아침에도 새로운 웃음과 노래로
하루를 여셔요~ ^^
 

헌책방으로 둘이 함께 나들이



  헌책방으로 둘이 함께 나들이를 하면 어떤 느낌일까. 책을 퍽 좋아하는 이라면 늘 가는 곳이니 새삼스러울 일이 없을는지 모른다. 책을 썩 안 좋아하는 이라면 왜 새책방이 아닌 헌책방이라는 곳에 굳이 가느냐고 여길는지 모른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면, 책을 좋아하는 이들은 ‘내가 읽을 책’ 말고 ‘짝꿍이나 동무한테 선물하고 싶은 책’을 살필 수 있다. 책을 안 좋아하는 이하고 나들이를 왔다면, 헌책방에서만 남달리 느낄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만하다.


  그저 구경만 하려고 헌책방에 들를 수 있다. 헌책방이라는 곳을 ‘나들잇길’ 가운데 하나로 삼을 수 있다. 공원에 가듯이 헌책방에 갈 수 있고, 두 사람 사이를 밝힐 만한 이야기책을 헌책방에서 찾아보려고 할 수 있다. 꼭 새로 나온 책에서만 ‘사랑을 밝히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먼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어떤 넋과 숨결을 담아서 ‘사랑을 밝히는 이야기’로 엮었는지 돌아볼 수 있다.


  나는 어버이로서 아이를 데리고 헌책방으로 나들이를 한다. 젊은이라면 이녁 짝꿍을 데리고 헌책방으로 나들이를 할 수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서로 손을 맞잡고 천천히 거닐면서 헌책방으로 나들이를 할 수 있다. 아저씨와 아주머니도 꼭 술집이나 노래방만 가야 하겠는가. 아저씨와 아주머니도 헌책방으로 놀러와서 책과 놀 수 있다. 어린이와 푸름이도 헌책방으로 마음을 쉬러 나들이를 할 수 있다. 4347.7.7.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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