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은 헌책방

 


  책방은 책꽂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책방은 간판을 보지 않는다. 책방은 책방지기 얼굴을 보지 않는다. 책방은 오직 책꽂이를 본다. 책꽂이가 통나무여도 좋고 합판이어도 좋으며 쇠붙이여도 좋다. 책꽂이에 꽂힌 책들을 살피며 책방 한 곳 살아가는 흐름을 읽는다.


  책방지기가 예쁘거나 잘생겼대서 책방에 가지 않는다. 책방이름이 예쁘거나 간판이 멋스러워서 책방에 가지 않는다. 책방이 신문이나 방송에 나왔기에 책방에 가지 않는다. 책방지기한테 박사학위가 있다거나 시인·소설가라는 이름표가 있대서 책방에 가지 않는다. 책방에는 오직 책을 만나러 간다.


  책방에 깃든 책을 살피며 책방지기 마음을 읽는다. 책방에 갖춘 책을 골라 장만하면서 책방지기와 이야기를 나눈다. 다만, 책을 살피고 장만하는 동안 책방지기하고 말 한 마디 섞지 않는다. 책방 책꽂이에 있는 책을 만지는 사이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한 번 슥 훑으면 그만일 듯하다고 여길 수 있는 조그마한 자리에 남은 조금 있는 헌책을 바라본다. 그렇지만, 나는 이 조그마한 자리, 조그마한 책꽂이, 조그마한 칸에 깃든 책들을 한 시간에 걸쳐서 찬찬히 살피기로 한다. 보고 또 보면서, 다시 보고 거듭 보면서, 이 작은 헌책방 조그맣게 남고 만 책꽂이 사이에서 아름다운 빛을 누리고 싶다.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아 헌책방살림 벅차고, 그예 다른 일을 한다 하더라도,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이곳에 서린 빛을 못 보았을 뿐, 내가 이곳에 있는 빛을 못 보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즐겨 찾아오지 못했다 하더라도, 내가 이곳을 즐겁게 찾아가서 아름답구나 싶은 책 하나 만나면 넉넉하다.


  이 작은 헌책방에는 책손 열 스물 드나들 수 없다. 이 작은 헌책방에는 책손 두엇만 있어도 꽉 찬다. 이 작은 헌책방에는 차분히 책을 돌아볼 책손 한둘이면 넉넉하다. 이 한둘이 흐뭇하게 책을 고른 뒤 자리를 비우면 다른 책손이 찾아들어 찬찬히 책을 누린다. 아름다운 책빛이 조용히 웃으면서 기다린다. 4346.11.27.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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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으로 빛 한 줄기

 


  책방마실을 하다가 가끔 책을 덮곤 한다. 책방으로 햇살 한 줄기 들어오는 모습을 느끼면 으레 빛줄기 바라보느라 한참 책에서 눈을 뗀다. 왜 그럴까. 처음 헌책방으로 마실을 가던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책방으로 스며드는 햇살에서 눈을 뗄 수 없다.


  책방이든 도서관이든 햇빛과 책 사이를 떨어뜨리려고 애쓴다. 책꽂이에 멀쩡히 두는 책이라 하더라도 햇빛에 곧 바랜다. 햇빛뿐 아니라 형광등 불빛에도 책이 이내 바랜다. 책은 빛을 그리 안 좋아한다. 책은 그늘진 자리를 좋아하고, 책을 읽기에도 그늘진 자리가 알맞다. 누런 만화종이라 하더라도 햇빛이 밝게 비추는 곳에서는 그만 눈이 부셔서 책종이 넘기기 수월하지 않다. 그런데 나는 햇살을 좋아하고 햇빛이 눈부신 데에서도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책을 읽는다. 시골집에서도 햇볕 따사롭게 비추는 평상에 앉거나 모로 누워서 책을 펼치곤 한다.


  햇살이 나를 부르는 셈일까. 내가 햇살을 부르는 셈일까. 한참 읽던 책을 덮고는 한참 햇살을 바라보다가 생각한다. 나는 참 햇볕을 좋아하고, 햇살을 즐기는구나 하고 생각한다. 햇볕이 들어오고 햇살이 비추는 자리를 즐기며, 이렇게 햇빛을 느끼는 곳에서 내 마음빛이 부푼다고 느끼는구나 싶다.


  빛이 있어 글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일까. 빛이 있어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일까. 마음속에서 수많은 이야기가 샘솟더라도 아이들 재우는 잠자리에서는 글을 못 쓴다. 불을 다 끄고 누웠는데 어찌 글을 쓰는가. 이튿날 일어나서 써야지 하고 생각하면, 이튿날 아침에는 ‘아침에 일어나서 무언가 쓰자’고 품은 생각마저 잊기 일쑤이다. 깜깜한 밤이라 하더라도 불을 밝히고 빈 종이에 끄적여 두어야 한다. 재미있다면, 불을 켜고 빈 종이에 끄적인 이야기는, 이튿날 아침에 굳이 종이를 들추지 않더라도 어떤 이야기가 마음속에서 샘솟았는지 환하게 떠오른다. 종이에 적바림하지 않은 이야기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다시 떠오르지 않는데.


  빛이 있어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면, 빛이 있어 빨래도 하고 밥도 짓는다. 빛이 있어 온누리에 푸른 숨결 감돌고, 빛이 있기에 풀을 뜯고 나무를 안으며 꽃을 노래한다. 빛이 있으니 사랑이 있다. 빛이 있기에 꿈이 있다. 빛이 있어 춤노래 흐드러지고, 빛이 있는 터라 품앗이와 두레로 마을잔치 이룬다.


  책방으로 빛 한 줄기 흐른다. 아침빛일까 저녁빛일까. 이 빛은 어떤 바람을 이끌고 책방으로 깃들까. 이 빛은 책방으로 찾아온 사람들한테 어떤 책내음 알려줄까. 이 빛은 책방지기 가슴에 어떤 무늬로 스며들까. 4346.11.2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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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모모 2013-11-25 19:24   좋아요 0 | URL
언젠가 일요일 아침에 햇빛 쏟아지는 도서관 창가에서 책을 읽다가 새 소리를 들었는데
저는 그 때가 자꾸 떠오릅니다. 이 글을 읽으니 또 생각나네요^^

숲노래 2013-11-26 04:31   좋아요 0 | URL
햇빛 쏟아지는 새들 노랫소리란
아주 아름다운 선물이라고 느껴요~
 

손글씨 간판

 


  새책방도 처음에는 간판을 손글씨로 넣었으리라 본다. 지난날에는 간판글씨를 뚝딱뚝딱 만드는 일 없이 나무판에 붓으로 척척 그렸으리라 본다. 간판집에서 글판을 처음 만들고 난 뒤, 새책방은 으레 글판을 붙여 책방이름 알리는 간판을 올렸으리라 느낀다. 이와 달리 헌책방은 간판조차 없이 가게를 꾸리는 일이 잦았고, 이럭저럭 살림돈 모여 간판을 올릴 수 있은 뒤에는, 덧붙일 이야기 있으면 손글씨로 이래저래 적어 넣었을 테지.


  ‘간판 없는 새책방’이 있을까. ‘간판 없는 헌책방’은 참 많았다. 책방이름을 따로 안 짓는 헌책방들인데, 이곳 헌책방지기는 “그냥 헌책방이라면 되지, 굳이 이름을 붙이느냐?” 하고 얘기했다. “간판 없어도 책 볼 사람은 다 찾아온다.”고 했고, “간판에 돈 쓰기 아깝다.”고 했다. 간판 올릴 돈이 있으면 헌책을 더 장만해서 책손이 바라는 책을 더 갖추어야 할 노릇이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새책방이라면 간판이 잘 보여야 할까. 곰곰이 돌아본다. 아니, 장사를 하는 가게라면 어디나 간판이 잘 보이도록 큼지막하게 걸거나 불을 번쩍번쩍 비추기까지 한다. 가게 꾸리는 돈 못지않게 간판 알리는 돈을 많이 쓴다. 기름집을 보면, 기름집에서 다달이 쓰는 전기삯이 무척 세다고 한다. 그래도 벌이가 되니 기름집 간판불 밝히는 데에 돈을 엄청나게 쏟아부을 테지.


  어릴 적부터 여러 책방과 도서관 다니는 동안, 새책방과 도서관에서 ‘책을 많이 잘 갖추면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새책방은 ‘새책방인 탓’에 바닥에 책을 쌓지 않는다. 새책방 가운데 책꽂이를 늘리고 늘려 천장까지 빼곡하게, 골마루가 비좁도록, 이렇게 책을 갖추려는 데는 못 보았다. 새책방에서는 오래도록 안 팔리는 책 있으면, 좀 철이 지났다 싶은 책 있으면, 출판사에 가볍게 반품한다. 도서관에서도 책이 많이 쌓이면, 책이 좀 낡거나 대출실적 없으면, 이런 책을 가볍게 버린다.


  헌책방에서도 책이 지나치게 쌓이면 짐차를 불러 버리기는 하지만, 헌책방에서는 책을 더 꽂으려고 책꽂이를 자꾸 늘린다. 책꽂이를 늘리고도 모자라 책탑을 쌓는다. 책탑으로도 모자라 책방 앞 길가에도 새로운 책탑을 쌓는다. 언젠가 어느 헌책방지기가 문득 한 마디 했다. “이렇게 책방 앞에 쌓은 책탑이 헌책방 간판이지요. 헌책방에 간판이 달리 뭐 있나요.” 그러고 보면, 동네헌책방 자주 드나드는 단골 가운데 어떤 분은 이녁이 단골로 거의 날마다 드나드는 그 헌책방 이름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분은 “내가 여기 책 보러 오지, 간판 보러 오나? 책방이름 몰라도 거기에 책방 있는 줄 아니까 오지.” 하고 얘기했다. 4346.11.23.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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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지시 찾아가던 책방들

 


  책방마실만 즐기던 때에는 어느 책방이고 즐겁게 다녔다. 책이 있는 곳이라면 책방뿐 아니라 길거리에 깐 좌판도 지나치지 못한다.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 그리고 고등학교를 마치고 여러 해 동안, 간판이 있거나 없는 작은 헌책방과 길거리 좌판을 즐겨 찾아다녔다. 이 사이, 대학교 교육이 이 나라에서는 잔뜩 일그러졌다고 느껴 등록금 댈 돈을 스스로 아름다운 책 장만해서 읽는 데에 쓰자 생각했고, 군대에서 스물여섯 달을 보내고 사회로 돌아온 뒤 사진을 배워, 책방마실을 하는 틈틈이 사진을 찍어 보았다. 내가 즐겁게 다닌 책방을 사진으로 담고, 내 마음을 살찌운 책을 고맙게 갖추어 준 책쉼터를 사진으로 옮긴다.


  사진을 찍지 않더라도 내가 다닌 모든 책방 모습을 내 가슴속에 또렷이 아로새긴다. 사진을 찍은 뒤로는 내 가슴속에 또렷이 새긴 모습을 새삼스레 짚으며, 이날 이곳에서 어떤 책을 만났고 이 책들을 품에 안으며 얼마나 벅차고 설렜는가 돌아본다. 이제는 사라진 책방을 그리고, 이제는 사라진 책방 옆에 있던 더 일찍 사라진 책방을 그린다. 사진으로 미처 담지 못한 다른 사라진 책방을 그리고, 내가 모르는 지난날 일찌감치 사라진 책방을 그린다.


  책방에는 무엇이 있을까. 책이 있지. 헌책방에는 어떤 책이 있을까. 헌책이 있지. 책방에 있는 책은 무엇인가. 삶을 살찌우는 길동무가 되는 책이지. 헌책방에 있는 헌책은 무엇인가. 누군가 따사롭게 사랑하며 마음으로 새겨읽은 밥 한 그릇과 같은 책이지.


  새책방에서 만나는 책들한테는 내가 첫사랑을 베푼다. 헌책방에서 만나는 책들한테는 내가 두사랑 또는 세사랑 또는 네사랑을 나누어 준다. 첫사랑도 나한테 애틋하고, 두사랑과 세사랑과 네사랑 또한 나한테 살갑다. 사랑은 차례나 번호를 매기지 않으니까. 사랑은 그예 사랑일 뿐이니까. 책은 모두 책이요, 아름다운 마음밥은 늘 아름다운 마음밥 되어 내 삶을 북돋는 웃음꽃 되니까. 4346.11.23.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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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한 간판

 


  지난날 참 많은 헌책방들은 간판이 없이 가게를 열었다. 간판도 책방이름도 없이 책만 가게에 두었는데,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와서 책을 살펴서 사 갔다. 마음속으로 고운 책빛을 품는 사람들은 간판도 책방이름도 없는 조그마한 헌책방 옆을 스쳐서 지나갈 일이 어김없이 생긴다. 헌책방지기도 책손도 바로 이곳에 어느 날부터 헌책방이 문을 열 줄 생각조차 못했겠지. 그러나 두 사람 책빛이 마음과 마음으로 만나 이 길을 걸어갈 일이 생기고, 이 길을 걸어가다가 살며시 만난다.


  서른 해 마흔 해 쉰 해 헌책 만지며 살림 일구는 할배 헌책방지기와 할매 헌책방지기는 말한다. “좋은 책 두면 되지. 간판이 뭐가 대수로워.” 헌책방은 ‘이 좋은 책이 나온 곳’이라는 이름을 사람들한테 알리지 않는다. 헌책방은 그저 ‘이곳에 오면 책이 있다’는 이야기만 사람들한테 알린다.


  과일장수가 길가에 능금 몇 알 놓으면 이곳이 과일 파는 집인 줄 알려준다. 헌책장수는 길가에 헌책 몇 권 놓으면 이곳이 헌책 파는 집인 줄 알려준다.


  ‘이 책을 꼭 읽으시오’ 하고 말하는 헌책방은 없다. ‘이 책을 반드시 사시오’ 하고 끌어당기는 헌책방지기는 없다. 모두 책손 몫이다. 조그마한 동네새책방이건 동네헌책방이건, 책빛이 숨쉬는 책터를 알아보는 몫은 오로지 책손한테 있다. 책방지기는 이녁 책방에 ‘아름다운 빛 물씬 흐르는 책’을 꾸준히 알뜰살뜰 건사한다.


  책방을 광고하거나 홍보하지 않는다. 책은 광고하거나 홍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책을 엮은 출판사 일꾼도 책을 알리지 못한다. 보도자료는 쓸 수 있어도 책을 알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책을 알아채거나 느끼는 몫은 ‘마음속에 책빛 담은 사람’ 스스로한테 있기 때문이다. 두 손으로 쥐어 두 눈으로 살피며 온마음으로 읽는 책이다.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라 해서 이냥저냥 읽을 수 없다. 백만 사람이 읽는 책이 아니라, 다 다른 사람이 다 다른 가슴으로 읽는 책이다. 백만 사람이 읽었더라도 백만 가지 새 이야기가 흐를 수 있어야 옳다. 천만 사람이 읽었으면 천만 가지 이야기가 새로 태어나야 마땅하다.


  책방마실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 책시렁을 살핀다. 책방을 꾸리는 사람은 스스로 책을 캐낸다. 책방마실을 하는 동안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책을 헤아린다. 책방살림 일구는 동안 마음속으로 퍼지는 책씨앗을 돌아본다.


  커다랗게 붙여야 알아볼 만한 책방 간판이 아니다. 신문이나 잡지에 소개글이나 광고글 실렸기에 읽어 볼 만한 책이 아니다. 4346.11.16.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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