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으로 들어오는 책

 


  헌책방으로 온갖 책이 들어온다. 헌책방을 찾아오는 온갖 사람들이 이 온갖 책을 살펴보다가는 온갖 책을 저마다 즐겁게 장만한다. 누군가 즐겁게 읽은 책을 즐겁게 헌책방에 내놓아 주머니 가벼운 이가 즐겁게 장만하도록 할 때가 있고, 출판사나 작가가 신문·잡지·방송사 기자한테 보낸 책을 이들 매체에서 다 껴안을 수 없어 폐휴지로 내놓았다가 고물상을 거쳐 헌책방 일꾼이 거두어들일 때가 있다. 정치꾼이나 지자체 우두머리나 대학 교수한테 보낸 책을 비서가 틈틈이 폐휴지로 모아서 내놓을 적에 고물상을 거쳐 헌책방 일꾼이 거두어들이기도 한다.


  이름난 작가가 이름난 누군가한테 선물한 책이 헌책방으로 들어오는 일은 흔하다. 책을 버렸기 때문일까? 어떤 사람은 ‘책을 버렸’기에 헌책방에 이 책이 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돌고 도는 책’이 되도록 내놓아서 ‘책을 나눈다’고 해야 옳은 말이리라 느낀다. ‘책을 버린다’고 할 적에는 책을 북북 찢어서 아무도 못 보게 불쑤시개로 했다는 뜻쯤 되어야지 싶다. 헌책방에 책이 들어갈 때에는 ‘다시 읽히도록’ 하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선물받은 책’을 헌책방에 내놓을 적에 이녁 이름 적힌 자리를 찢거나 칼로 오리곤 한다. 그런데, 이렇게 찢거나 칼로 오린 종이는 어떻게 될까. 잘 건사할까. 이 또한 찢어서 버릴까. 돌고 도는 책이기에, 어느 책을 건사하는 사람이 숨을 거두면, 이 책은 으레 돌고 돌면서 헌책방으로도 들어오기 마련이다. 굳이 이름 적힌 자리를 찢거나 오리지 않아도 된다. 누가 누구한테 선물한 자국도 ‘책이 살아온 발자국’이다. 헌책방 나들이를 즐기는 이들은 이런 발자국을 보는 즐거움을 곧잘 누리곤 한다.


  나는 헌책방을 다니면서 그야말로 온갖 사람들 온갖 ‘이름 적기’를 보았다. 번거로운 듯이 흘려서 쓴 사람이 있고, 도장까지 찍으며 정갈하게 쓴 사람이 있다. 소설쓰는 박완서 님이 내놓은 책을 헌책방에서 만나기도 했는데, 박완서 님이 ‘나쁜 뜻으로 책을 버렸다’고 느끼지 않았다. 이녁이 집에 건사할 수 없는 책을 틈틈이 내놓아 헌책방에서 새로운 사람들한테 새롭게 읽히도록 했다고 느꼈다. 이오덕 님이 선물한 책도 헌책방에서 만났는데, 이오덕 님 제자라는 분이 ‘책을 안 읽고 버렸다’고 느끼지 않았다. 즐겁게 읽은 뒤 ‘누군지 모르지만 이 책을 아낄 젊은 넋’한테 즐겁게 물려주려는 뜻이리라 느꼈다. 요즈음은 손택수 님이 다른 시인한테서 받은 시집을 헌책방에서 퍽 자주 만나는데, 좋은 시집을 가난한 문학청년이 적은 돈으로 장만해서 읽을 수 있도록 고맙게 내놓았으리라 느낀다.


  얼마나 재미있을까. 누군가 누구한테 선물한 책이 헌책방에 들어와서, 이 책을 살살 어루만질 적에 얼마나 재미있을까. 돌고 도는 삶에 돌고 도는 책, 돌고 도는 이야기에 돌고 도는 사랑, 이 얼마나 재미있을까.


  요 며칠 사이, 김용옥 님이 홍준표 경남도지사한테 선물한 책이 헌책방에 나왔다고, 이 책을 헌책방에서 샀다는 사람이 트위터에 사진을 올렸다고 하는데, 그럴 만하지 않을까? 더 넓게 읽힐 수 있는 뜻인데, 왜 이런 일을 놓고 비아냥거리거나 손가락질하는 말이 나와야 할까? 언론사에서 보도자료를 폐휴지로 내버릴 적에 고물상 거쳐서 헌책방으로 들어오는 책이 무척 많다. 정치꾼이나 지자체 우두머리가 선물받은 뒤 비서가 알뜰히 내버려 주어 헌책방이 즐겁게 받아안는 책이 꽤 많다. 다만, 이런 책 모두 새로운 손길을 받을 만한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누군가 즐겁게 마주하며 즐겁게 읽을 사람이 있다. 스스로 즐겁게 읽으려는 책이 아니라면 다시 내려놓고 조용히 지나가면 좋으리라. 서로 예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예쁜 생각 주고받을 수 있기를 빈다.


  헌책방이 없으면, 애꿎은 책들 모두 종이쓰레기 되지 않았겠는가. 헌책방이 없다면, 누가 누구한테 선물한 책이 오래도록 돌고 돌며 새로운 이야기 길어올릴 일조차 없이 몽땅 사라지지 않았겠는가. 4346.12.12.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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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나무와 나무와

 


  나무로 짠 책꽂이에 나무로 엮은 사다리 있고, 나무로 묶은 책이 나란히 있다. 헌책방 골마루를 찬찬히 돌아보다가 세 가지 나무를 문득 느낀다. 나무와 나무와 나무가 어우러지는 책방이로구나. 나무와 나무와 나무가 있어 푸른 숨결 흐르는 책방이네. 나무와 나무와 나무가 어깨동무하면서 따순 사랑과 빛을 나누어 주는 책방이야.


  나무 책시렁을 쓰다듬는다. 나무 사다리를 어루만진다. 나무 책을 살몃 쥔다. 나무를 만지는 손에는 나무내음 스미고, 나무를 쥐는 손에는 나무빛 감돌며, 나무를 품는 손에는 나무노래 퍼진다. 나 또한 나무가 되어 새로운 이야기를 쓴다. 4346.12.7.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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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12-07 21:02   좋아요 0 | URL
최영미님의 <꿈의 페달을 밟고>,가 있네요~?^^
오늘 어떤 책을 보다 이정록님의 詩 '나무기저귀'를 읽었는데

'목수는/ 대패에서 깎여 나오는/ 얇은 대팻밥을/ 나무기저귀라고 부른다
천 겹 만 겹/ 기저귀를 차고 있는,/ 나무는 갓난아이인 것이다
좋은 목수는/ 안쪽 젖은 기저귀까지 벗겨내고/ 나무아기의 맨살로/ 집을 짓는다
발가벗은 채/ 햇살만 입혀도 좋고/ 연화문살에/ 때때옷을 입어도 좋아라
목수가/ 숲에 드는 것은/ 어린이집에 가는 것이다'

이 시를 읽고 또, 함께살기님의 나무노래
'나 또한 나무가 되어 새로운 이야기를 쓴다' 를 들으니
참 좋습니다~*^^*

숲노래 2013-12-08 03:16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책방에서 이 책들 사려고 골라서 사다리에 얹었다가,
다른 책을 보는 사이
깜빡 잊고 이 책은 셈을 안 하고
사다리에 얹은 채 그대로 시골집으로 돌아온 듯하군요.
어어.... @.@ ㅜ.ㅠ

나무기저귀 이야기 재미있네요.... ㅠ.ㅜ
 

책사랑 나누는 벗

 


  저녁에 인천에 닿아 배다리 헌책방거리로 걸어간다. 가방에 짊어진 책짐 몹시 무거워 이대로 안 되겠다고 느낀다. 헌책방에 들어 책짐을 택배로 시골집으로 부쳐 달라 말씀을 여쭈어야겠다. 터덜터덜 천천히 골목길 걷는다. 동네 아이 몇 빈터에 앉아서 논다. 조용하고 한갓진 인천 골목길을 걷는다. 땀이 비질비질 흐른다. 헌책방거리에 닿는다. 어두움 내린 헌책방거리에 사람 발길 없다. 단골로 스물두 해째 드나든 책방에 들어간다. 짐을 내려놓는다. 어깨와 등허리와 무릎을 편다. 시큰시큰하다. 숨을 돌린다. 무릎과 다리를 풀며 골마루를 천천히 돌아본다. 책손은 나 혼자이다. 책방지기 한 사람과 책손 한 사람이 책방에서 발소리 내지 않고 서로서로 일을 한다. 책방지기는 책을 손질해서 꽂고, 책손은 마음에 담을 책을 살핀다. 이윽고 다른 책손 들어온다. 다른 책손 더 들어온다. 조용한 책방에 발소리 늘고, 숨소리와 책종이 넘기는 소리 퍼진다.


  인천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이백만을 웃돈다 하는데 이 작은 헌책방에 깃든 책손은 몇일까. 모두들 어디에서 무엇을 할까. 택배로 맡길 책을 내려놓고는, 이곳에서 책을 몇 권 더 골라서 함께 묶는다. 이제 이 책들은 이튿날 아침에 책방지기 손을 거쳐 우리 시골집으로 즐겁게 날아갈 테지.


  아이들 그림책은 택배꾸러미에 넣지 않는다. 아이들 그림책은 가방이 좀 무겁더라도 씩씩하게 짊어지고 들고 가서, 시골집 대문 열고 대청마루에 짠 하고 풀어놓아 아이들 선물로 보여주고 싶다.


  책방에서 오랜 동무들 만나 이야기꽃 피우면 더없이 즐거울 텐데, 마흔 고개 넘어서는 내 동무들 가운데 책방마실을 누리는 아이는 거의 없다. 그래도, 뭐, 나쁘지 않아. 종이책을 읽지 않더라도 내 동무들이 저희 아이를 낳아 그 아이들 무럭무럭 자라는 웃음빛 마주하면서 삶을 읽을 줄 안다면, 책방마실을 안 하더라도 내가 책빛을 살포시 나누어 주면 될 테니까. 4346.12.5.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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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3-12-05 12:06   좋아요 0 | URL
책빛- 소리내어 말하니까 더 아름답네요.

숲노래 2013-12-05 21:07   좋아요 0 | URL
더없이 아름답기에
자꾸자꾸 '책빛' 이야기를 써서
예쁜 이웃들하고 나누고 싶어요.

앤님 가슴에 아름다운 책빛 언제나 드리우기를 빌어요~

양철나무꾼 2013-12-05 17:50   좋아요 0 | URL
전에 방송에 출연하신 모습, 링크 거신거 트랙백해서 봤어요.
말씀은 조근조근 차분하게 하시는데,
자전거 페달을 밟는 근육이 발달한 것을 보고,
몸도 마음도 참 건강한 분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벼리와 보라는 아빠를 더 기다릴까요, 아빠 손에 들린 그림책을 더 기다릴까요?


숲노래 2013-12-05 21:06   좋아요 0 | URL
아이들은 아버지가 사올 '맛난 먹을거리'를 기다린답니다 ㅋㅋㅋㅋ

그리고, 아버지가 꼬옥 안아 주기를 기다리고요~ ^^

아이들은 "집에 책 많으니 책 더 사지 말아요." 하고 얘기해요 ^^;;;;;
 

책넋

 


  책을 쓴 사람들 넋을 읽는다. 책을 빚은 사람들 꿈을 읽는다. 책을 다루는 사람들 손길을 읽는다. 책이 되어 준 나무가 우거진 숲에서 흐르던 빛을 읽는다. 책마다 곱게 드리우는 무늬를 읽고, 책 하나에 살포시 감도는 이야기를 읽는다.


  책을 읽는 사람은 어떤 마음이 될까. 책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삶을 일굴까. 책을 말하는 사람은 어떤 눈빛이 될까.


  어린이와 함께 읽는 책을 쓰거나 엮거나 다루는 사람은 이 땅 아이들한테 어떤 꿈을 들려주려는 마음일까. 성인잡지를 내거나 성인만화를 그리는 사람은 이 땅 어른들한테 어떤 노래를 들려주려는 마음일까.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쓰는 사람은 이 땅 이웃들하고 어떤 사랑을 나누려는 마음일까. 자기계발과 처세를 말하려는 사람은 이 땅에서 나고 자라는 이웃들 앞에서 어떤 빛이 되고 싶은 마음일까.


  어느 책이든 나무가 있기에 태어난다. 이제 나무도 종이도 없이 전자책이 나올 수 있다 하는데, 나무도 종이도 쓰지 않는 책은 참으로 지구별과 숲을 아끼는 넋으로 엮는 책이 될까. 나무도 종이도 쓰지 않는 책이 되면서, 오히려 지구별과 숲하고 더 멀어지는 책으로 나아가지는 않을까. 나무로 된 책이요, 종이로 빚는 책을 엮으면서, 섣불리 아무 글을 쓸 수 없으며, 함부로 아무 책이나 내놓을 수 없는 넋을 잊거나 잃지는 않는가.


  글 한 줄에 아름다운 넋 담으려 한 책은 오래도록 읽힌다. 글 두 줄에 사랑스러운 얼 실으려 한 책은 두고두고 읽힌다. 글 석 줄에 푸른 숨결 얹으려 한 책은 한결같이 읽힌다. 누구나 바람을 마셔야 목숨을 잇듯, 아름다운 넋이 있기에 책을 읽는다. 누구나 물을 들이켜야 목숨을 건사하듯, 사랑스러운 얼 있어 책을 읽는다. 누구나 밥을 먹어야 목숨을 살찌우듯, 푸른 숨결 있는 책을 읽는다. 바람과 같고, 물과 같으며, 밥과 같은 넋으로 책이 태어난다. 4346.12.3.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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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서 노는 아이들

 


  아이들은 어디에서나 논다. 집에서도 마루에서도 마당에서도 골목에서도 찻길에서도 아이들은 거리끼지 않는다. 아이들로서는 어디이든 삶터이고 놀이터 된다. 어른들이 따로 돈을 들여 시설을 마련한 데가 놀이터 아니다. 아이들이 놀면 어디나 놀이터 된다.


  아이들은 헌책방에서 개구지게 뛰어논다. 헌책방이라 해서 시끌벅적 뛰어놀아도 되지 않지만, 아이들은 새책방에서든 헌책방에서든 거리끼지 않는다. 어떤 어른은 헌책방에 있는 책을 만질 적에 장갑을 끼기도 하지만, 아이들은 아무것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어떤 어른은 헌책방에 있는 책은 먼지와 세균이 많다 여기는데, 아이들은 어느 하나 따지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먼지와 세균은 어디에나 있고, 헌책방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들락거리는 도서관에서 오래도록 묵는 책이야말로 먼지와 세균을 많이 품지 않을까.


  순천에 있는 헌책방집 막내와 우리 집 큰아이는 같은 또래이다. 우리 집 작은아이는 누나랑 형이 노는 틈에 함께 끼어 놀고 싶다. 아이들은 책방마실을 하더라도 책보다 놀이가 훨씬 맛있다. 아이들은 온갖 책이 그득한 숲에서 이리 뛰고 저리 노래하면서 논다. 책방에서 놀며 천천히 책내음 맡고, 책방에서 뒹굴며 가만히 책빛 마신다. 아이들 스스로 모르는 사이에 책노래가 아이들 마음속으로 젖어든다.


  골목에서 놀듯 책방에서 논다. 골목에서 놀며 골목숨 마시고 골목빛 먹듯이, 책방에서 놀며 책방숨 마시고 책방빛 먹는다. 시골에서 놀며 시골숨과 시골빛 먹듯이, 책방에서 놀며 책숨과 책빛을 한껏 들이켠다.


  땀 실컷 흘린 뒤 살짝 땀을 식히며 그림책이나 만화책 집어들 수 있겠지. 땀 옴팡지게 쏟은 뒤 살짝 땀을 달래며 나무그늘 찾아 쉬거나 풀밭에 드러누울 수 있겠지. 놀고 쉬고, 놀고 먹고, 놀고 자고, 놀고 노래하는 아이들이다. 천천히 튼튼하게 자란다. 4346.11.28.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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