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서명’을 ‘낙서’로 여겨 지우기


  헌책방이 문방구처럼 동네마다 여러 곳씩 있을 뿐 아니라, 초·중·고등학교 앞에서 한 군데씩 있던 지난날, 책은 참으로 쉽게 들어오고 쉽게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그무렵 책을 참 잘 읽고 잘 내놓았으며 잘 샀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책을 소유한다’는 생각보다는 ‘책을 나눈다’는 생각이 짙었습니다. 그래서, 헌책방으로 나들이를 하면서 책을 사는 분들은 책에 ‘글쓴이 서명’이 들어가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헌책방지기도 ‘글쓴이 서명’이 들어간 책을 웃돈을 얹어서 팔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고서 수집’을 하는 이들이 ‘글쓴이 서명’이 깃든 책을 모아서 전시회를 열고 ‘대단한 값어치가 있다’고 말하면서, 흐름이 살짝 바뀝니다. ‘고서 수집가’는 ‘글쓴이 서명이 깃든 책’을 ‘글쓴이 서명이 없는 책’보다 두 곱이나 세 곱, 때로는 열 곱까지 비싸게 사고팔았습니다.

  헌책방지기는 글쓴이 서명이 있건 없건 그냥 팔았지만, 이런 소문이 헌책방지기 귀에도 들어오면서, 어느 헌책방은 글쓴이 서명이 깃든 책을 곱배기로 값을 치러야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소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책은 모두 똑같은 책일 뿐’이라고 여겨, 서명이 없는 책하고 똑같이 파는 헌책방도 꽤 많습니다.

  학교 앞에 있는 작은 헌책방에서는 글쓴이 서명을 썩 달갑잖게 여겨 버릇했습니다. 학교 앞 헌책방은 참고서와 교과서를 많이 다룹니다. 참고서와 교과서를 찾는 학생이나 손님은 ‘낙서가 없는 책’을 바랍니다. 그러니, 학교 앞 헌책방지기는 책에 있는 낙서를 지우느라 팔이 빠져요. 헌책방마다 지우개를 잔뜩 쌓아 놓는데, 참고서와 교과서에 있는 낙서를 지우려고 둡니다.

  그런데, 학교 앞 헌책방 일꾼은 인문책이나 시집에 있는 ‘글쓴이 서명’도 지웁니다. 예전에는 지우개로 지웠고, 지우개로 안 되면 사인펜으로 새까맣게 발라요. 수정액이 나온 뒤로는 수정액으로 지우지요. 그리고, 사인이 너무 지저분하다(?) 싶으면 아예 북 찢습니다.

  헌책방 일꾼이 찢어서 버린 ‘글쓴이 서명’ 가운데 여러모로 눈에 띄는 작가로는 도올 김용옥 님 서명이 있습니다. 아는 사람은 ‘도올 서명’인 줄 알지만, 모르는 사람은 그야말로 끔찍한(?) 낙서로 여길 만합니다. 걸레 스님 중광이 남긴 서명도 헌책방지기 눈에는 ‘낙서’일 뿐입니다. 가볍게 북 찢어서 버리지요.

  예전에 저는 헌책방에서 책손이 스스로 ‘글쓴이 서명’을 찢어서 버리는 모습을 보았어요. 한 분은 ‘책이 지저분해서 찢는다’고 말씀합니다. 다른 분은 ‘글쓴이 서명 때문에 이 책을 사지 않기 때문에 찢는다’고 말씀합니다. 두 분 말씀을 들으면서 그때마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참말 우리는 책을 읽으려고 책을 삽니다. 글쓴이 서명을 건사해서, 나중에 이 책을 비싼값에 되팔려고 사지 않습니다. 우리는 ‘책 즐김이’이지 ‘책 장사꾼’이 아닙니다.

  책에 글쓴이 서명을 남기고 싶은 사람은, 아름다운 글을 나한테 선물한 이웃을 오래도록 마음에 품으면서, 그분 손글씨 자국에서 빛을 느끼고 싶기 때문입니다. 굳이 글쓴이 서명을 안 받으려는 사람은, 그분이 쓴 글로 엮은 책에 그분 넋과 숨결이 고이 깃들었으니, 굳이 서명을 더 받아야 할 까닭이 없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열다섯 해쯤 지난 예전 일인데, 언젠가 제가 고른 책 가운데 ‘글쓴이 서명’이 남은 책이 있었습니다. 헌책방 아주머니가 그 책을 살피면서 책값을 셈하다가 “아이고, 손님 미안해요. 여기 낙서를 안 지웠네.” 하면서 바로 그 자리에서 수정액으로 글쓴이 서명을 지우십니다. 나는 멍하니 지켜보았습니다. 또 한 번은 다른 헌책방에서 “책이 지저분하게 낙서가 뭐람.” 하면서 제 앞에서 글쓴이 서명을 북 찢어서 건네더니 “낙서가 있는 책이니 그냥 천 원에 가져가세요.” 하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헌책방지기가 북 찢은 ‘낙서라 하는 글쓴이 서명’을 주워서 책에 끼웁니다. 헌책방지기가 묻습니다. “그거 주워서 뭐 하려고요?” “이것도 이 책 가운데 하나인데, 그냥 끼워두려고요.”

  지난 2005년 서울 용산에서 김기찬이라는 분 이름과 도장이 찍힌 책을 잔뜩 보았습니다. 김기찬이라는 분이 죽으면서 그분이 건사했던 책이 아주 많이 헌책방에 나왔습니다. 왜 이 책들이 헌책방에 나왔을까 궁금하게 여기다가 슬픈 이야기를 듣고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한참 망설이다가 김기찬 님 서명과 도장이 깃든 책을 두 권 골랐습니다. 글쓴이 서명을 건사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기증한 책이 버려지는 한국 도서관 역사와 문화를 자료로 두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4347.7.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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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4-07-09 01:10   좋아요 0 | URL
아 '글쓴이 서명'을 이러한 이유로 '낙서'로 여겼군요.
저는 몰랐는데 함께살기님의 고마우신 글로 또 헤아려봤습니다.^^
좋은 글,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숲노래 2014-07-09 01:12   좋아요 0 | URL
깊은 밤에 즐겁게 마음과 몸을 쉬시고
새 아침에도 새로운 웃음과 노래로
하루를 여셔요~ ^^
 

헌책방으로 둘이 함께 나들이



  헌책방으로 둘이 함께 나들이를 하면 어떤 느낌일까. 책을 퍽 좋아하는 이라면 늘 가는 곳이니 새삼스러울 일이 없을는지 모른다. 책을 썩 안 좋아하는 이라면 왜 새책방이 아닌 헌책방이라는 곳에 굳이 가느냐고 여길는지 모른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면, 책을 좋아하는 이들은 ‘내가 읽을 책’ 말고 ‘짝꿍이나 동무한테 선물하고 싶은 책’을 살필 수 있다. 책을 안 좋아하는 이하고 나들이를 왔다면, 헌책방에서만 남달리 느낄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만하다.


  그저 구경만 하려고 헌책방에 들를 수 있다. 헌책방이라는 곳을 ‘나들잇길’ 가운데 하나로 삼을 수 있다. 공원에 가듯이 헌책방에 갈 수 있고, 두 사람 사이를 밝힐 만한 이야기책을 헌책방에서 찾아보려고 할 수 있다. 꼭 새로 나온 책에서만 ‘사랑을 밝히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먼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어떤 넋과 숨결을 담아서 ‘사랑을 밝히는 이야기’로 엮었는지 돌아볼 수 있다.


  나는 어버이로서 아이를 데리고 헌책방으로 나들이를 한다. 젊은이라면 이녁 짝꿍을 데리고 헌책방으로 나들이를 할 수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서로 손을 맞잡고 천천히 거닐면서 헌책방으로 나들이를 할 수 있다. 아저씨와 아주머니도 꼭 술집이나 노래방만 가야 하겠는가. 아저씨와 아주머니도 헌책방으로 놀러와서 책과 놀 수 있다. 어린이와 푸름이도 헌책방으로 마음을 쉬러 나들이를 할 수 있다. 4347.7.7.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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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서 시집을 한 권 사서 읽는데



  헌책방에서 시집을 한 권 사서 읽는데,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시집을 처음으로 사서 읽은 사람 자국이 맨 뒤에 있다. 고등학교 1학년에 처음으로 책방마실을 했던 아이가 그날 겪은 일을 애틋하게 적었다. 아마 학교에서 모든 학생들한테 ‘학교 앞 책방’에 가서 책을 사는 ‘체험 교육’을 시킨 듯하다. ‘체험 교육’ 뒷이야기를 적었다고 할 수 있고, 이 글은 어쩌면 ‘숙제’일는지 모르는데, 숙제이건 아니건 퍽 상큼하다. 빨간 색연필로 빈 종이에 네모난 테두리를 그린 뒤 정갈하게 한 글자씩 또박또박 적은 글이다.


  처음 시집을 살 적에는 이런 글이 적힌 줄 몰랐다. 예전에 읽은 시집이지만 다시 읽어 보자는 생각으로 아예 책을 새로 장만했을 뿐이다. 삼현여고라는 학교는 어디에 있을까. 2003년에 4쇄를 찍은 시집이니 이 아이는 2003년에 여고 1학년 학생으로서 이 시집을 사서 읽었을까.



.. 처음 서점으로 들어갈 때, 정신이 없었다. 학교를 마치고 간 터라, 삼현여고 학생들로 북적댔다. 원래 나는 도서관의 분위기처럼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원했었지만, 학교 앞 서점인지라 무지 시끄러웠다. 좀 크고 조용한 서점으로 가서 여러 가지 책들을 보며 여유롭게 책을 사려고 했는데, 책을 사야 하는 날이 다가오니 여유로울 시간이 없었다. 처음 책을 사려고 교실에서 제목이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라 놓았었다. 《아내에게 미안하다》. 제목이 진짜 맘에 들었다. 서점에 들어가면서 찾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학교 앞 서점이라서 그런지 추천도서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둘러볼 틈도 없이 《아내에게 미안하다》라는 책을 잡았다. 아주 얇았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속을 보니 시집이었다. 난 시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책을 살려고 고민을 시작했다. 긴 고민 끝에, 난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를 잡았다. 왠지 감동스러울 것 같은 제목!! 그런데 지갑을 보니, 돈이 없었다. 좀 당황스러웠지만 난 내일 다시 오기로 하고 집으로 갔다. 그 다음날, 학교를 마치고 다시 서점으로 향했다. 역시 학생들로 북적거렸다. 난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를 사려고 했는데, 책이 다 나가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긴 고민 끝에 《아내에게 미안하다》를 잡았다. 왠지 시집이 읽고 싶어졌기 때문에. 난 계산을 하고 나니 기분이 가뿐해졌다. 이 책을 꼭 다 읽고 싶다. 꼭! 다 읽을 것이다! ..  (1학년 ㅎㅎㅈ)



  고등학생이 스스로 책방에 가도록 이끌고, 책방에서 《아내에게 미안하다》 같은 시집을 골라서 읽도록 하는 학교는 몇 군데쯤 있을까. 중학생이, 또 초등학생이 ‘학교 앞 책방’을 드나들도록 이끌면서, 아름다운 책을 만날 수 있게끔 책을 이야기해 주는 교사는 몇 사람쯤 있을까.


  생각해 보니,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때에 학교에서는 ‘우체국 가기’라든지 ‘은행 가기’라든지, 여러 가지를 시켰다. 그런데, 그때에 ‘책방 가기’를 시켰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안 시켰지 싶다. 내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에도 ‘책방 가기’를 시킨 일은 없다. 더욱이,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를 보내면서 학교에서 우리한테 ‘어떤 책을 책방에서 찾고, 책을 어떻게 읽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가르친 교사를 만나지 못했다.


  마음이 푸르게 빛나는 아이들이 책방으로 사뿐사뿐 발걸음을 옮겨, 푸른 숨결 깃든 책을 사랑스레 고르면서 삶을 밝히는 길을 스스로 찾는다면 참 아름답겠다고 생각한다. 4347.6.29.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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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지기 안경



  안경을 쓴다. 잔글씨가 잘 보이지 않아 안경을 쓴다. 책방지기 할배와 할매 모두 잔글씨를 보려 할 적에는 돋보기 안경을 쓴다. 잔글씨를 보기 어려운 만큼 책을 펼쳐 읽기에도 어렵다고 할 만하다. 그렇지만, 책방을 찾는 손님이 바랄 만한 책을 하나둘 건사해서 책시렁에 둔다. 예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나오고 새로 나오는 책들 가운데 책손한테 기쁨과 웃음과 보람을 베풀면서 책방살림 꾸릴 돈을 벌도록 해 줄 책을 고른다.


  책방지기가 돋보기 안경을 쓸 무렵, 책방을 오래도록 찾던 책손도 안경을 쓴다. 안경 없이 척척 책을 알아보아 갖추던 책방지기도, 안경 없이 척척 책을 골라내어 읽던 책손도, 다 같이 안경을 쓰고 새롭게 만난다. 4347.6.7.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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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을 까는 헌책방



  헌책방지기 할아버지가 콩을 깐다. 책손을 기다리면서 콩을 깐다. 처음 헌책방이 문을 열 적에 어떤 책손이 찾아왔고, 오늘은 어떤 책손이 깃드는가를 헤아리면서 콩을 깐다. 콩깍지는 책방 바닥에 놓는다. 콩알은 자루에 담는다. 푸른 빛깔로 잘 익은 통통한 콩알은 헌책방지기 할아버지 손을 거쳐 자루로 들어가는데, 헌책방을 그득 채운 책을 가만히 둘러본다. ‘우리는 어느 곳에 와서 무엇을 구경할 수 있을까?’ 하고 콩알이 서로 속닥속닥 이야기꽃을 피운다.


  콩내음이 책방에 퍼진다. 콩빛이 책시렁에 번진다. 콩을 까던 손길로 내가 고른 책을 받으시고, 콩내음이 묻은 손길로 책값을 셈하신다. 내가 고른 책마다 콩내음과 콩빛이 서린다. 4347.6.7.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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